진정 귀한 것을 발견한 사람 /고전9:1-27/ 유기성 목사
2020-06-17 10:34:59
고전 9: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3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변합니다.
4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습니까? 5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6 나와 바나바에게만은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7 자기 비용으로 군에 복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 떼를 치고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8 내가 사람의 관례에만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십니까? 율법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9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기를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를 걱정하신 것입니까? 10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서 밭을 갈고, 타작을 하는 사람은 한 몫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12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습니다. 13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맡아보는 사람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14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5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18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란스럽고 어려운 때에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진짜와 가짜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거짓 교사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개척하였고 2년 동안이나 마음을 다하여 목회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도 의심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자신이 진정한 사도임을 고전 9장에서 두 가지 사실로 변호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너무나 귀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부양할 가족을 둘 권리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복음만 전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6 나와 바나바에게만은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사도 바울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12 ... 그러나 우리는 이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개척된 연약한 교회였기에 교인들에게 사역자를 부양할 부담을 주면 복음 전하는데 걸림돌이 될까 걱정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오직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6 ...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사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마저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살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처럼 살았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맞추어 살았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진정한 사도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삶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지금도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삶에서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식사하는 자리에서 교인들이 제게 음식을 덜어주면서, “이건 목사님 모가지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당혹스러웠습니다. ‘내 모가지?’ 몫의 사투리이지요.
지금은 이처럼 자기 몫을 챙기는데 혈안이 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이 누릴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교회 안의 분쟁이 있을 때나 결혼 문제나 약한 양심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문제나, 앞으로 나올 성찬의 문제, 영적 은사의 사용에 대한 가르침 등 모든 문제에서 일관되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일터에서나 해결 안 될 문제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무거운 짐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였고 자신이 받을 상급이라고 여겼습니다.
:15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18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저는 복음을 값없이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의 권리를 포기했습니다’라고 보고할 수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래 수고했다. 내가 다 안다.’ 하신다면 이 얼마나 기쁘고 복된 일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지극히 작은 것을 버리고 말할 수 없이 큰 것을 얻는 수지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복음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상과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려가라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사도 바울만 아닙니다. 이 일에 증인이 될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WEC 선교회를 설립한 C. T. 스터드(Studd)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에서 공부했고, 대학시절 영국의 가장 뛰어난 크리켓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5살에 D. L. 무디(Moody)의 설교를 통하여 거듭난 후 자신이 받을 유산을 다 선교를 위해 기부하고 중국 선교사로 떠났던 유명한 ‘케임브리지의 7인(Cambridge Seven)’의 한사람입니다. 10년 뒤 건강이 악화되어서 귀국했다가 다시 인도로 가서 6년을 섬겼고,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콩고로 가서 18년을 섬겼습니다.
WEC 선교회 총재를 지낸 노르만 그럽(Norman Grubb)이 쓴 1957년도 판 그의 전기에는 스터드가 소년시절 살았던, 크고 호화스러운 집의 사진이 있는데, 그 옆에 대충 얹어진 지붕에 나무로 지어진 방 하나짜리 오두막이 있는 작은 사진이 있습니다. 스터드가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집입니다.
여러분 스터드는 불쌍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믿어 쫄딱 망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안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도 사도 바울이나 스터드 선교사처럼 자기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종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사도 바울이나 스터드 선교사가 믿는 예수님과 내가 믿는 예수님은 다른 예수님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했을까요?
평소에 장자권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배고플 때 그에게는 팥죽 한 그릇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하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진정한 복음임을 믿지 못한다면 에서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살았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두려웠던 것은 제 유익만 구하며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꿈에서 깬 다음 즉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결코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유럽에 '램버린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메리안 프레민저(Marian Preminger) 여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913년 헝가리 귀족의 딸로 태어났는데, 성과 같은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하녀와 하인, 개인운전사와 가정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18세에 비엔나로 유학 가서 잘생긴 의사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일 년 후 이혼하였습니다.
그 후 배우가 되어 영화감독과 결혼하여 미국 영화계의 화려함과 환락 속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이혼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유럽 사교계의 여왕처럼 지냈는데, 1948년 유럽을 잠시 방문한 슈바이처 박사가 시골 마을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때, 슈바이처와 대화하는 중에 마음속에 하나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보게 해준 빛이었습니다. 그 뒤 슈바이처 박사의 초청으로 아프리카 램버린(Lambarene)의 병원에 갔다가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성에서 태어나 공주처럼 자라났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살았던 그녀가 흑인들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매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아기들의 목욕을 시켜주었고, 나환자들에게 음식을 먹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 "모든 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All I Ever Wanted Was Everything)"에서 슈바이처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돕는 사람과 또 하나는 돕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는 돕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노력과 결심으로 ‘자신의 권리, 자신이 받을 대우, 자신의 유익을 다 포기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구나 이렇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도대체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야 말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우리를 위하여 종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가 사함 받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3: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빌 3:9에서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있는 자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사도 바울처럼 될까봐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바보 같은 생각임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세상의 유익이 다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 너무나 궁금해졌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제 소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들 힘들다 어렵다 하는 지금이야말로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자신의 권리, 자유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살면 어떤 가정도 회복되고 어떤 교회도 바로 서게 되고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찬양: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admin
절제: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열매 /고전9:24-27/ 김병삼목사
2020-06-10 13:13:01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성령의 열매 9가지를 함께 나누어 보면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함께 묵상을 나누던 김병동 권사님이 이런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의 견해보다 훌륭한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세 개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내면의 문제요,
그 다음 ‘인내’, ‘자비’, ‘양선’은 성령의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들과의 문제요,
나머지 셋인 ‘충성’, ‘온유’, ‘절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모습이다.”
또한 9가지 성령의 열매 중에 사랑을 맨 처음에 그리고 절제를 맨 나중에 배치한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 나머지 열매들의 근원이요, 전제조건이라면 ‘절제’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죠. 절제 없이 어떤 열매도 완성이 불가능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제: 이기기를 다투는 자의 몫!
지난 몇 주 동안 말씀을 나누며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구원받은 자요, 택함 받은 존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결과적인 의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그가 맺는 ‘열매’를 보아 알게 됩니다.
오늘은 그 열매 중 ‘절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눕니다.
‘절제’는 신약의 헬라어 ‘네푸’라는 말로 ‘술 취하지 않은 건전함 혹은 중독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절제(節制)의 사전적 의미는 '알맞게 조절함', '방종하지 않도록 자기의 욕망을 이성으로서 제어함'입니다. 절제를 잘하는 사람은 여러 면에서 득(得)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제함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수와 도리를 지킴으로 상대에게도 실례를 범치 않을 수 있으며,
또한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므로 바른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절제란 해로운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은 적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을 다 살고 난 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것이죠.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이죠. 이 승리의 삶을 위해 사도바울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를 비유로 우리들에게 절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25절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도바울은 우리의 믿음 생활이 달음질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달음질 하는 사람의 목표가 상을 얻는 것이라면, 우리 신앙인들의 목표는 이 세상에 살지만 ‘썩지 아니할 것’ 곧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사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을 결코 낭비가 아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가치가 이렇게 귀중한 것이라면, 목표를 위해 절제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뉴스를 통해 참 좋은 운동선수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넘어져서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봅니다.
왜 운동선수들이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 걸려서 곤혹을 치러야 할까요?
왜 잘 알려진 연예인들이 술집을 찾아다니며 불의한 관계들을 맺을까요?
왜 정치인들이 이권에 휘말려 금전적 이득을 취하며 범죄에 연루될까요?
왜 목회자들은 돈과 명예와 이성에 넘어질까요?
왜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불의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하려 할까요?
이 모든 일들의 근원은 우리의 ‘망각’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종종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죠.
“달리기를 하는 이들도 상을 얻기 위해 절제하는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제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TV 예능 중에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집사부일체]라는 방송인데,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죠. 한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상화 선수시절 식단 조절 염격 – 55kg 제한에 태를 선수촌 밥 맛있어도 그림의 떡!)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29) 선수가 국가대표 시절 엄격한 식단 관리에 서러웠던 일을 털어놨다. 지난 10일 방영된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는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 선수가 사부로 출연했다.
이상화 선수는 이날 방송에서 ‘집사부일체’ 멤버들과 간식 내기 스케이팅을 탔다. 승리한 이상화 선수는 사발면과 떡볶이, 어묵 등 분식 3종 세트를 먹었다. 이 선수는 “저는 스케이팅 끝내고 이렇게 겨울 음식들을 먹는 게 참 부러웠다. 저희는 바로 또 시합 준비를 해야 해서 이런 걸 못 먹었었다”라고 말했다.
MC 이승기 씨는 “식단 조절을 하셨느냐”고 물었다. 이상화 선수는 “맞다”라며 “올림픽 기간에는 떡볶이를 1년 동안 아예 안 먹었다. 이게 완전 탄수화물이니까 ‘아, 이걸 먹으면 얼마나 더 운동해야 하지’ 이런 걱정이 드니까 이걸 끊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수는 또 태릉선수촌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선수촌 식당을 이용한 적이 있던 ‘집사부일체’ 멤버들은 “맞다. 진짜 맛있더라. 너무 놀랐다. 산해진미가 다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느낌이었다”며 크게 공감했다.
이상화 선수는 “근데 저희가 식판을 받으면 선생님이 검사를 하신다”라며 “심지어 (하루는) 레몬에이드를 한 잔 가져왔더니 선생님이 ‘상화야. 이거 뭘로 만든 거야?’라고 물었다”고 말했다.
이 선수는 “그래서 ‘레몬이겠죠. 레몬에이드니까’라고 했더니, ‘이거 설탕이잖아. 먹지 마’라고 했다”라며 “그래서 저는 레몬에이드를 좋아했지만 선생님이 못 먹게 해서 한동안 못 먹었다”라고 털어놨다.
“왜냐면 저희는 1kg만 쪄도 그걸 다 안다. 저는 또 시합에 적합한 몸무게가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이승기 씨는 “실례지만 그게 몇 kg인지 여쭤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상화 선수는 “55kg”이라 답하며, “그게 가장 잘 나가는 무게”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무게일 때 세계신기록도 세웠다”라며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강조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 ‘절제’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의 몫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겨야 할 것이 없다면 절제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 신앙생활에 목표가 없다면 우리는 쉽게 망가져 버릴 것입니다.
[좋은 성품학교]의 김영숙 박사는 ‘절제’를 이렇게 정의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잠언 25장 28절에 참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우리의 삶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절제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죠. 그러니 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절제의 열매가 ‘성령’과 관계있는 이유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생각, 육신의 연약함을 가진 우리의 능력으로는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죠. 로마서 8장 26-27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6-27절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절제: 달음질에는 원칙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 ‘달음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라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2.195km를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까요? 중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변화무쌍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중요한 것은 마라톤 경기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조건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리의 관건은 이 경기를 위해 누가 절제하느냐는 것이죠.
현재까지 조절해온 컨디션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라톤 선수들은 그 하루의 경기를 위해 음식과, 몸무게 등을 조절합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어디에서 스퍼트를 할 것인지도 생각을 합니다. 때로 동료들이 누구를 막아주고, 상대방의 힘을 빼는 전략을 세우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출애굽 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을 때, 그 시간이 마라톤의 시작이 아니었을까요? 모두가 그 길을 향해 달음질 했지만, 모두가 상을 얻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비전을 가진 자, 어려움 가운데 인내할 수 있었던 자,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방향을 잃지 않았던 자들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9장 26-27절을 보세요.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누군가요? 함께 홍해를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전쟁을 치루며 달려왔는데 마지막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자신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크리스천들이 보니, 중간에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달려왔는데, 참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져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도바울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절제 = 지구력입니다.
절제 = 올바른 방향입니다.
절제 =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 절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원칙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27절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달음질에 ‘향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일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열심히 달려가서 다 달은 곳을 가리켜 ‘여기가 내가 오려고 했던 곳이야’라는 억지만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방향을 다른 말로 하면 ‘원칙’이 아닐까요“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경기장의 트랙에서 뛰어야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 경기에 합당한 복장과 장비, 그리고 룰을 지켜야 하는 것이겠죠. 빨리 뛰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불법적인 약물을 먹으면 실격이 되고, 경기 중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형평성이 깨어져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경기의 룰에는 ‘지름길’, ‘편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의 정도’를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룰을 벗어나 무언가를 쉽게 얻으려는 유혹들이 늘 우리 주변에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힘겹지만 정해진 룰을 따라 정직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편법의 유혹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Steven Covey가 ‘원칙’에 대하여 아주 멋진 말을 했습니다.
원칙은 등대와 같다. 따라서 이것은 파괴될 수 없는 자연법칙이다. 불후의 명작 ‘십계’를 만든 세실 비 데밀 감독은 “우리가 율법을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단지 율법을 어김으로써 자신을 파괴할 뿐이다”라고 영화 속에 담겨진 율법, 즉 원칙의 진리에 관해서 말했다.
원칙이 갖는 위력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그렇습니다. 하나의 원칙이 교인들에게 다르게 적용될 때, 목회자는 권위를 상실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우리들이 물러서지 말아야할 원칙들이 있습니다. “한 번”이 우리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파괴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므로 내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으려면 하나님께 버림받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3절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절제하지 못하고 정욕에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절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영과 육이란 시소와 같은 원리입니다.
영이 높이 올라갈 때는, 육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육적인 욕심이 올라가게 되면, 영적인 수준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악”이란 “선의 결핍”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셨을까요?
초대 교회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아주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우리들은 늘 악을 경험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아주 명확하게 이 부분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선함의 크기만큼 악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들이 선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 가능한 것인데, ‘절제’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가능합니다. 저는 요즘 영적인 부분에 대하여 훈련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훈련이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반사’처럼 말입니다.
원칙이 습관화 되도록 하라!
먼저 우리는 악과 육체의 소욕의 무서움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얻고자 하는 “썩지 아니할 것”의 가치를 알아야합니다.
어떤 분과 상담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유함에 대한 체험을 하십시오.” 이 분은 늘 마음속에 악의 근원이 있어서 자꾸,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들을 때, 그 근원들이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을지도 모를 그 분을 위하여 다시 한 번, 그리고, 여기에 많은 죄악과 육체의 소욕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분들을 위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어떤 이는 죄 사함의 체험을 하고 살아가지만, 어떤 이는, 그것이 없어서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경험은 또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의지가 생겨야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6장 5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사야로 하여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장 8절)라는 결단을 얻어내고 말았습니다.
저의 경험인데 스스로 건강을 위해 음식을 조절하거나 생활 습관을 조절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 절제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건강 검진을 하고, 의사를 만나 상담을 하고 조언을 들으니 조심하게 됩니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분들이 건강을 위해 음식조절 다이어트를 한 경험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것은 ‘유지’하는 것입니다.
절제란 한 순간의 결심이나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지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의지입니다.
그러니 이 ‘절제’를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욕심과 정욕의 소리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늘 육체의 소욕과 영적인 소욕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방법 중에 하는 ‘방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주파수를 맞춘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 32장 8절에 보니까,
8.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8. But the noble man makes noble plans, and by noble deeds he stands. (NIV)
혹시 이런 광고를 보셨습니까? 산소 같은 여자가 나와서, 빨간 백을 사고 싶은데 “꼭 필요한지”,
멋있는 남자 배용준이 나와서 옷을 입어보고는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신용카드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목표가 분명하지 않고 절제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파산하게 하는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과 죄에서부터 사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제의 열매는 단순히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모두가 완주할 수 있지만 영광스런 완주를 위해 필요한 열매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선택이, 육적인 소욕과 영적인 소욕 사이에서의 갈등과 투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절제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일본에 단기 선교여행을 가서 세미나를 인도하고 나왔는데 한 목사님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잘 시켜야겠군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리고 핵심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어떻게 선정하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성경공부를 시키려고 하시지요? 그리고 왜 핵심자를 만들려고 하지요?”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목회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50세가 넘은 분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어느 정도 좋은 목회를 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의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목표를 물었을 때, 이 분의 마음에 감동이 온 것입니다. 한참 후배인 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목적이 생기니까 결단력이 생기게 됩니다. 제가 세미나를 인도하는 중에 트레스 디아스(Tres Dias)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사모님 표를 예약한 것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곁가지를 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잘라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지는 것입니다. 절제란,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분명한 목적에서 작은 희생들을 능히 감당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한 절제의 방향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절제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달음질하여 목적을 이룬 히딩크의 리더십 7가지입니다.
⑴ 욕먹어도 소신대로 꾸준히 추진하는 강력한 추진력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⑵ 멀리 내다본다 / 비전제시 - 절제는 미래를 내다볼 때 가능합니다.
⑶ 세트 플레이(set play)로 승부를 낼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습니다.
⑷ 강한 유럽 팀 상대로 평가 전을 하여 자신감을 고취시킨다. - 절제하는 사람은 시험을 이길 뿐 아니라, 시험을 디딤돌로 사용합니다.
⑸ 선수 안목부터 키운다 / 자율과 책임 - 절제가 처음에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⑹ 넘어오기 전부터 막는다 / 공격적인 경영 - 절제가 익숙해지면, 이제는 예방이 가능합니다. 단순히 무엇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절제된 우리들의 삶의 습관이, 악한 것들을 미리 막게 되어 있습니다.
⑺ 기술보다 체력이다 / 기초 경쟁력 중시 - 절제의 기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시편 119편 9절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에 한 눈을 팔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시편 119편 9절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절제의 목적이 ‘버림받지 않기 위함’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버림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토론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이 '버림'이라는 말을 구원의 측면이 아니라 사역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이 버림이라는 말에 ‘disqualify’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실격했다’, ‘자격을 상실했다’, ‘자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참 많이 들어가나 봅니다. 옛날 일들이 생각나니 말입니다. 아니,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하던 때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였던 일이죠.
1988년 9월 27일 월요일 아침 캐나다의 CBC 아침 뉴스에서 아나운서는
"오늘은 우리 캐나다의 국가적 수치의 날입니다."라는 멘트로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캐나다의 국가적 영웅이요, 세계적인 육상선수, 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선수로 칭송 받던 벤 존슨이 약물복용으로 선수의 자격을 박탈당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지된 약물을 복용했습니다. 그 결과 어렵게 딴 금메달도 박탈되었고, 그의 모든 기록은 깨끗이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왜 약물을 복용했느냐고 물으니까 벤 존슨은 힘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동안 훈련을 게을리 해 왔습니다. 의욕이 없었습니다.
챔피언의 명예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없이 약물을 복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처럼 불명예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할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격을 상실한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절제의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께 사용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예수를 믿고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까?
어제 설교 테이프를 듣다 보니 청주의 좋은 교회 한영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호박을 심어 놓은 사람은 매일 가서 물을 줄 뿐 아니라 열매를 찾습니다. 때로 열매가 보이면 애호박을 따다 된장찌개도 끓여먹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치가 나가는 것은 늙은 호박이라는 것이지요. 아직 아무 눈에도 띄지 않고 숨어 있던 호박이 자라고 늙어서 가치 있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여러분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들은 버림받는 존재가 아닌 쓰임 받는 존재가 되도록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쓰임 받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쓸 때 절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때, 절제의 삶이 시작됩니다. 절제의 내용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절제가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영광을 보장해주는 보증 수표입니다.
절제가 우리들의 삶에서 습관화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귀하게 사용하실 것 입니다. 면류관을 얻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는 비참한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절제된 깨끗한 그릇을 하나님은 사용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29/ 자유를 버린 사람 /고전9:19-23
2020-01-22 13:40:56
1.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19상)“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신이 누구에게도 자유자이지만 복음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해야할 때는 포기한다고 간증하고 있다. 즉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갈5: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복음이 주는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나? 진정한 자유는 어떤 환경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예) 사도바울...감옥에 갇혔다...그러나 감사 찬송하고 편하게 잠을 잣다...마음은 자유하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왕...세례요한을 마누라 등쌀에 못이겨 감옥에 가두고 자기 마음대로 풀어주지 못하여 넓은 방에서 잠을 못이루었다면? 그의 마음은 자유하지 못하고 감옥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 넓은 아파트 고대광실 같은 방에 살아도 마음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해서 그것도 싫어서 밖으로 뛰쳐나온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단칸방에 살아도 내 마음이 넉넉하여 감사하며 산다....누가 더 자유하며 사는가? 환경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좁은 방이지만 내가 감사하고 살 때는 넓은 방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넓은 방이지만 불평과 불만으로 살면 좁은 방이 되는 것이다.
남 보기에는 참 비참할 정도가 될지 몰라도 그의 마음이 스스로 자유하고 있으면 자유하고 있으면 그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넉넉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시기 질투의 노예가 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환경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리를 자유하게한다.
이런 마음의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믿음에서 온다. 복음에서 오는 자유이다.
2. 그러나 자유를 포기한 바울의 고백이다. 왜? 자유보다 사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분명히 자유 할 수 있다. 또 자유 했다. 그러나 자유를 스스로 버렸다. 왜?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그것은 사명이었다. 개인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명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유를 포기했다는 말이다. 나 하나 구원받아서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자신의 자유보다 사명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내 자유와 내 안일, 내 평안이 최고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다. 그보다는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훨씬 값지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훨씬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예) 여러분이 가정을 위해서나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나...더구나 수험생들이 있는 부모들은 얼마나 수고하는가?...그렇게 수고할 때에....
“하나님 내게 이런 귀한 자녀를 주셔서 인생의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데 내가 이것을 위해서 일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자녀를 위해서 수고할 수 있다는 이것 얼마나 큰 특권이냐?...그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내가 왜 자식은 낳아 가지고 또 이 고생을 하노?”
그렇게 생각하면 스스로 가족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다.
내 평안이 최고 목적이라면 자녀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겠지만 자녀를 위한 수고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권이고 복이다라고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하고 스스로 포기하면서도 행복한 법이다.
그런고로 스스로 자유를 반납한 사람, 스스로 종이 되는 사람....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첫째, 자유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다. 둘째, 그 마음이 사명으로 가득 차 있어야 된다.
내가 해야 할 사명감이 꽉 차 있으면... 자유가 있느니 없느니 그런 불평은 없어지고 행복함을 누리게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사명이라는 것이다.
3. 복음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게되어 그 복음이 열매를 맺는다.(20-23)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19절하)...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유대인들에게 전도할때에는 (율법에 자유한 자이지만) 율법에 얶매여서 살았고(20절)...이방인을 전도할 때에는 율법없는 자처럼 행동했다.(21절)...약한 자들에게 복음 전할 때에는 약한자들처럼 행동했다.(22절)...
쉽게 말하면 야만인이 아니지만 야만인처럼, 이방 사람이 아니지만 이방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복음 안에서 때로는 야만인처럼, 때로는 이방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다는 말이다.
(예)어느 미국인으로 중국에 선교사로 일하는 청년 38세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중국 선교를 하더라고....
그런데 거기서 얼마나 좌우간 열심히 중국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중국말을 배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든지 중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저 사람은 중국 사람보다 중국말을 더 잘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3년 동안 공부해 가지고 중국 사람보다 중국말을 더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선교사는 중국 사람과 똑같이 산다고...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사는 서민들 집을 보면... 열 집에 화장실 하나라고....그러니 선진국에 살던 미국인에게는 화장실 사용하는게 여간 고통이 아닐것이다...그런데 아무 불평없이 그렇게 산다고...그렇게 만 2년 동안을 사니 중국 공안부(경찰)에서까지 ‘저 사람이 뭐 하려고 저기서 사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그런데 그렇게 중국인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때로는 중국인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그랬다고....그런데 때리면 아무 반항없이 맞고 그러면서...그렇게 같이 사니.... 중국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큰 환영을 받는지...많은 선교 열매가 있더라고....
즉 마음을 얻으려면 같이 행동해야 된다는 말이다.
(예) 성 다미엔...문둥병 환자들만 모여 사는 섬에 가서 전도함...그들이 받아들이지를 아니함...그들은 당신이 건강한 사람이므로 우리를 돕는 것은 한낱 취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정의 도덕적 유희라는 것이다.....그래서 진정으로 우리의 고통은 당신은 모른다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다미엔은 드디어 기도한다. “하나님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나도 문둥병자가 되어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겠습니다.” 마침내 다미엔이 문둥병자가 되자 그들이 마음문을 열고 다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예) 어느 기업 사장... 직원들과 가까이 하고자 직원식당에서 직원들과 같이 식사를 함....처음에는 직원들이 “우리 사장님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다니 사장님은 참 좋은 분이다”는 여론...그러다가 여론이 확 바뀌기를 “기름진 것만 먹다가 한끼쯤 이런 것 먹는 것이야 별미겠지”하는 것이다... 가난해서 죽 먹는 것과 부한 사람이 죽 한끼 먹는 것은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4.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매이는 삶이 사실은 행복한 삶이다.(23)
결혼을 왜 하나? 결혼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매이고 여자는 남자에게 매이는 것 아닌가? 결혼과 함께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부자유하게 느낀다면 그건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매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그러한 매임이 너에게 더 큰 행복을 줄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매여보라....답답한 삶이 아니다. 불행한 삶도 결코 아니다. 더 큰 행복을 누리며 살수 있다.
(예) 옥경이, 칠갑산 작사 작곡가인 조운파 집사님(가수왕 남진씨를 전도한 사랑의 교회 집사)은 예수 믿고 그가 캐딜락 타고 다는 권리를 포기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캐딜락을 처음 사서 시속 150,180km을 달려도 차속의 물컵의 물이 그대로 있는 것이 처음엔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찔림이 오면서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렇게 고급 차만 타고 다니면 전도할 사람은 언제 만나니?” 이때부터 캐딜락을 하나님께 반납하고 버스 카드와 전철표를 사서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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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날 복음 전파 설교가 거의 없는가? /고전9:16/계3:20/ R. L. Hymers
2015-07-15 14:44:31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이 말은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강박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매튜 헨리는, “사역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는 책임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전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최근 몇 명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가 없다고, 나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전체 설교를 들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왜 목사님들이 십자가로 인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지’ 물어봤습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자들이 거의 없습니까?
나 자신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를 못 들은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설교에서 2가지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이유,
성경은, 마지막 날에 많은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종될 것을 예언합니다.
▲계시록 3:14-22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의 서구 세계의 교회들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J. A. Seiss는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을 누가 자세히 보고,
우리는 아직 라오디게아의 시대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1)
John Walvoord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슬프게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2)
Lehman Strauss는, “말세에 나타날 라오디게아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국가 Christendom 라 말하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가
거의 실종되어 있습니다. 대신에 점점 사람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주3)
J. Vernon McGee는, “우리는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인 교회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특정한 일부 교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가 대체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면, 우리의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 입술로는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건 입술의 고백일 뿐이다.’
여러분, 우리는 라오디게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것은 Stanley High가 말한 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내가 ‘죽을 죄인’이라고 말해 주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나의 영혼이 구원 받도록 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교회는 나의 죄의 대가, 분명한 지옥,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실패 했습니다. 주4)
▲우리 시대가,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가 맞다면,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 3:20에 나와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에는, 교회에서 쫓겨나 바깥에 계십니다.
그가 바깥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 이유는, 교회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Charles C. Ryrie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 밖에서 계셔야 하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주5)
계시록 3:2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시고자 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Dr. Ryrie가 지적한 것처럼, 그 분은, 그의 교회에서 쫓겨나시고,
사람의 마음에서도 나오셨습니다. 두 측면으로 다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계시록 3:22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따라서,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놀라워하면서도) 크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그러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미리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Michael Horton은, Christless Christianity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그는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대신
“자기 자신을 돕기 위한 메시지”를 전파한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self-help message”입니다.
그는 여러 교회의 설교제목들을 수집해서, 이런 주장을 증명했습니다.
아래 설교 제목만 보더라도, 복음이 아니라, “self-help message”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자신에 대해 더 만족할 수 있나”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나”
“어떻게 더 성공적이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나”
“어떻게 하면 돈을 더 관리 잘할 수 있나”
“성공적인 가정생활의 비밀들”
“어떻게 스트레스를 극복할수있나,” 등등. 주6)
이렇게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즉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그의 보혈의 죄 사함,
그의 부활, 그의 재림.. 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의 예언에서 보여지듯, 지금 우리가
마지막 날, 라오디게아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Dr. McGe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의 교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6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그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즉, 토하여 내쳐짐을 당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주7)
▲사도 바울은 딤후4장에서 그의 위대한 예언구절을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4:3-5.
바울은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기에,
“너는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지금은 마치 19세기의 Spurgeon 이 설교했던 것처럼,
복음적이며, 성경적인 설교가 진정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아, 얼마나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얼마나 간절히 필요로 합니까!
성경을 구절 구절 쪼개어, 그 의미와 교훈을 신자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나 Hymers 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 선포할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주 예수 넓은 사랑, 그 크신 은혜를,
나 힘써 전파함은, 참 기쁜 일일세
주 예수 복된 말씀, 생명과 진리요;
내 맘의 갈급함을 다 채워주시네,
옛부터 전한 말씀, 주 예수 넓은 사랑,
나 항상 전파 하기 참 좋아 하도다.
by A. Catherine Hankey, 1834-1911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2. 오늘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이유 두 번째로,
“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설교가, 필요 없게 만들었습니다.
※‘죄인의 기도 a sinner’s prayer 란, 짧고 간단한 회개기도. 보통 목회자를 따라서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접, 결단이 포함된 “짧고 간단한” 회개기도. 오늘날의 '영접 기도'
▲만약 당신이 사람들이 “죄인의 기도”만 하게 한다면,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현대적인’ 방법의 “죄인의 기도”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와 대치되었습니다.
즉, 강력한 양심의 죄책이나, 진정한 회개가 없이,
입술로 피상적으로, 짧고 간단하게, 죄책, 회개, 사죄의 은총까지
다 끝내 버리는 것입니다.
▲1993년에 Jack Hyles 는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면서
영혼은 구원하지 못하고, 그저 복음적인 교회로 차츰 바뀌고 말았습니다.
지금,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와, 그저 ‘복음적 교회’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복음적 교회’는, 즉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는,
신자들이 나가서, 불신자들을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인도’를 하면)
설교자는, 그저 교회의 강대상 위에서, 그들에게 설교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별로 열매가 적습니다. 있기는 하지만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에서는,
목회자/교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일대일 전도, 결신시키며)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 와서,
그들의 구원에 대한 간증을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 하게 합니다.
전자는, 아무도 전도할 줄을 모르지만,
후자는, 목회자나 교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전도를 할 수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세대는, 과거의 그저 ‘복음적 교회’에서
점점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이게 사도행전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일에 기독교인들에게 설교해서,
신자들이, 주중에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주8)
Jack Hyles가 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소위 ‘좋은 교회’들은 더 이상 전도/복음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사도행전적 교회를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나가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회개 기도”를 고백하게 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강단 초청해 응해, 복도로 걸어 나가서 결단하게’ 합니다.
그 성도들은, 실제로 영혼을 얻는 전도를 할 줄 아는 신자들입니다.
▲제 Hymers 가 성경을 읽어보니,
사도행전에서는 한 가지만 빼고, 모든 설교가 전도적인 설교였습니다.
한 가지란, 사도행전 20:18-35절이, 그 예외입니다.
이 설교는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마저도,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전도설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1
사도행전에 나온 다른 모든 설교들은,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포함하여, 복음전도주의적인 설교입니다. 행2:14-40
-산헤드린 앞에서의 베드로의 설교 행4:5~12
-스데반의 설교 7:1-53
-사마리아에서 빌립의 설교 8:5
-사도바울의 구원 받은 후의 설교 9:20~22
-이방인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 10:34~4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설교 행13:14-41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설교 17:22 등등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도바울이 집집마다 방문해 가면서
복음전도적인 설교를 한 것을 봅니다. 행20:20-21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복음 전도를 위하여
성전에서 또 여러 집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설교한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는 것을 읽습니다. 행5:42
▲Jack Hyles의 말들 중 아주 흥미로운 것은
“죄인의 기도”가 복음전도주의의 설교를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죄인의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이
복음 설교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거의 것이 된 것입니다.
※나 Hymers 는, Jack Hyles 의 책에서,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이 몇 가지 있지만,
지금 이 설교에서는, 그가 말한 것 중에 옳은 점들만 인용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죄인의 기도”룰 하게 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기도”라고 불리는, 그 짧고 간단한 기도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 복음에 대한 설교를 파괴시킨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짧은 기도를 통해서,
잠시 동안 자기가 기도한 것으로,
자기가 진정한 신자라고 생각(사실은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도/들으려 하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도바울의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나는 Thomas Williamson이라는 사람의 글을 읽었는데,
아주 계속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인들이 “나를 따라서 기도문을 말하고,
만약 당신이 소리내어 기도하기 창피하면, 그냥 작게 하고,
그래도 영접 기도만 하면, 당신은 구원 받을 것입니다”
그건 신약 성경적 방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과연 그걸 가르치는지..
아니면 내가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건지.. 헷갈리네요. 주9)
맞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죄인의 기도”(오늘날의 영접기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적은 없습니다!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확률은 대단히 낮습니다.
그 짧은 영접 기도를 따라하고, 소수는,
나중에 구원의 성숙과 완성 단계로 나아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방법입니다 –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위험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설교하지/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우리는 많은 교회에서 이것을 봅니다!
▲나는 Joel Osteen의 설교를 컴퓨터로 한 번 보았습니다.
그는 간단한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2번 정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한단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단어도, 주님의 보혈과 대속적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 끝에, Joel Oste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예수님을 당신의 삶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기회 없이
이 방송을 마감할 수 없습니다. 나와 함께 기도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따라서 말하십시오,
“주님 예수님, 나의 죄를 회개합니다. 나의 마음으로 와주세요.
나는 당신을 나의 주인으로 구주로 모십니다.”
“여러분, 당신이 이렇게 간단한 기도를 하면,
우리는 당신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그는 아마도 “다시 태어났다고” 믿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기도로 통해서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 기도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Joel Osteen은 그리스도 없는 설교와, “죄인의 기도”를 말하고,
복음의 언급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그 대가를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죄를 씻겨주시는 보혈의 언급이 없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신 언급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복음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짧은 기도의 거짓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Osteen은 사도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갈1:6, 7.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린도 전서 9:16).
주 예수 넓은 사랑, 그 크신 은혜를,
나 힘써 전파함은, 참 기쁜 일일세
주 예수 복된 말씀, 생명과 진리요;
내 맘의 갈급함을 다 채워주시네,
옛부터 전한 말씀, 주 예수 넓은 사랑,
나 항상 전파 하기 참 좋아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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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초청.
모든 인류는 죄의 쇠사슬에 묶여있고, 사탄의 통제 하에,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에 있습니다. 엡2:2
모든 사람들은 죄 아래 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2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딤전1:15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죄 없이 사셨습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러나 아주 끔찍한 밤 겟세마네 동산의 어둠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죄를 “그 몸”으로 짊어지셨습니다. 벧전2: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무게로 힘들어 하셔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4
성전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거짓혐의로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대제사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의 눈을 가리고 얼굴을 때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의 수염의 뿌리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그의 병사들에게, 예수님이 반쯤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하고,
땀과 피범벅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의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때리고 머리를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십자가를 끌고 거리로 나오게 하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을 장소에 왔을 때,
그들은 그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고, 십자가에서 벌거벗기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6시간의 고통이 끝난 후, 그는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4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지고 가서 세마포로 싸고
자기 무덤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큰 돌을 무덤 앞에 놓았고,
문을 막고 로마 병사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나의 친구,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로 벌을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다하고 당신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은 당신이 예수님이 당신의 죄로 돌아가셨고,
그것을 믿는 길이, 오로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피를 당신을 위해서 흘리셨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당신에게 영원한 삶을 주십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셔서, 벌써 당신의 고통과 아픔을 대신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로 오십시요! 그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구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당신이 죄를 회개하고, 그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당신의 죄로부터, 무덤에서,
그리고 지옥에서 다 구원받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는 당신의 그의 보혈로 깨끗이 죄에서 씻겨주실 것입니다!
...................................
주1)
J. A. Seiss, The Apocalypse, Zondervan Publishing House, n.d., p.85.
주2)
John F. Walvoord,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Moody Press, 1966, p. 95.
주3)
Lehman Strauss, D.D., The Book of Revelation, Loizeaux Brothers, 1982 edition, pp. 104, 105.
주4)
J. Vernon McGee, Throu호 the Bible, 1983, Thomas Nelson Publishers, volume V, pp. 922, 923, 925, 924; notes on Revelation 3:14-19; Stanley H. High was a senior editor of The Reader’s Digest and a Christian author. The above statement by Mr. High appeared in August, 1947 in Time Magazine.
주5)
Charles C. Ryrie, The Ryrie Study Bible, Moody Press, 1978 edition, p. 1900; note on Revelation 3:20.
주6)
Michael Horton, Christless Christianity: The Alternative
Gospel of the American Church, Baker Books, 2008, p.49.
주7)
McGee, Ibid., p.926.
주8)
Jack Hyles, Enemies of Soul Winning, Hyles-Anderson Publishers, 1993, pp. 140, 141.
주9)
Thomas Williamson, “Northern Landmark Missionary Baptist,” December, 2013, page2.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고전9:19-23/ 이동원목사
2014-12-04 23:01:57
공산통치 시대 러시아의 한 수용소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의사가 배치되어 왔습니다. 그의 임무는 아무리 심한 병에 걸린 환자라도 "건강함. 일할수 있음"이라는 도장을 찍어 노동장으로 보내야한다는 지령을 받고 있었고
만일 이 지령을 어기면 그는 사형 당할 것이라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지옥같은 수용소에서 한 죄수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 생명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총명해 보이는 젊은 죄수를 진단하다가 그가 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초기 장암이라 치료의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이 의사는 수용소의 비밀수칙을 어기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회복되기 시작하던 날 그는 의사에게 자신의 목숨의 위험을 알면서 왜 나를 살리는가고 묻습니다.
이 의사는 조용히 왜냐하면 예수님이 당신은 너무 소중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저녁 그가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는 한 간수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접합니다. 방금전에 자기를 살린 의사가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처형당한 의사가 살린 청년이 바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시작하여 나흘간 이웃 사랑 축제가 열립니다.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들려주고 결신하게 하는 잔치입니다.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중 특별한 기간을 정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함은 온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들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는 것을 보고자 함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 전서 9장에서 바울 사도는 주후 50년대소위 제2차 선교여행중 1년 반의 시간을 머물며 영혼들을 친히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자신을 통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라도 하겠고 무엇이라도 되겠다고 고백합니다
. 왜냐하면 영혼이 구원받는 일보다 더 좋은 일 더 고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이 소중한 영혼들을 전도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1.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그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 제일 먼저 한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종으로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어떤 사람이 종이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자기 권리를 주장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자유인이 된다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는 갈라디아5:1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의 본문에서는 스스로 이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인가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아니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은 전도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혹은 전도의 더 좋은 기회를 위해 어떤 권리들을 포기해야 했습니까? 고전9:4에서는 (더 잘)먹고 마시는 권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9:5에서는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편히 다닐수 있는 권리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9:9-11에 보면 복음 전도자로서 당연히 봉급받을수 있는 권리조차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12절에 보면 오직 한가지 이유-"--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이웃들을 전도하기 위해 그는 다만 종처럼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번 달 추천도서인 일곱집사 전도행전에 보면 옥경이, 칠갑산 작사 작곡가인 조운파 집사님은 예수 믿고 그가 캐딜락 타고 다는 권리를 포기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캐딜락을 처음 사서 시속 150,180km을 달려도 차속의 물컵의 물이 그대로 있는 것이 처음엔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찔림이 오면서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렇게 고급 차만 타고 다니면 전도할 사람은 언제 만나니?" 이때부터 캐딜락을 하나님께 반납하고 버스 카드와 전철표를 사서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희생 없이 섬김 없이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려면 먼저 종으로 살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2. 상황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면 전도 대상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황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한다음 그들이 이해할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을 선교학에서는 "토착화한다" 혹은 "상황화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 분당 비전센터 지하1층 복도에 가면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님의 일대기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 나오는 예수님이 한복을 입고 계십니다.
집이나 산천이 모두 한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토착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이해할수 있는 방식으로 한국식 문화의 옷을 입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 접목이상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려는 대상자의 사고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최근의 선교학자들은 토착화보다도 상황화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한국 초기 선교시대에 이땅에 들어와 최초로 기독교 개신교내의 침례교 신앙을 전한 선교사로 카나다 출신의 말콤 펜위익(Malcolm Fenwick,1865-1935)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회사를 저술한 민경배 박사는 펜위익 선교사를 가르쳐
"토착화의 한 거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보다 몇해 먼저 도착한 감리교나 장로교 선교사들과 선교지를 둘러싼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원산 시골에 들어가 갓쓰고 한복 입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며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얼마나 농사를 잘 지었는지 동리 사람들에게 농학 박사님으로 불리웠고 동리 사람들에게 개량된 영농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문화는 서양문화보다 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1917년 "만민좋은 기별"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한글판 신약 성경번역을 완성 출간합니다. 이 성경에서 그는 세례를 원어의 의미 그대로 침례로, 그리고 성령을 "성숨님" 곧 "거룩한 숨님"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성령의 뜻이 숨(호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도 한국식으로 예수씨로 불렀다고 합니다. 1935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원산땅에서 70세를 일기로 동역자들과 동리 사람들의 애도와 존경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제가 말콤 펜위크를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선교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선교 대상자의 삶가운데로 깊이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토착화요 상황화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신 그 자체가 바로 상황화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상황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그들에게 전도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상황화가 지나쳐 잘못된 불신의 문화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경계수위를 낮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신자라도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인격으로 존중하고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년 우리가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을 VIP로 부르기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렇게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의 20-22절의 바울의 고백이 아닙니까? 내가 율법아래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율법없이 사는 이방인들을 대해서는 율법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약한자를 대해서는 약한자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을 성서교재사에서 발행한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 성경은 직역이 아니라 본문을 의역한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유대인과 같이 있을 때에는 유대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의 관습과 의식을 따르는 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그들의 의식에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논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같이 있을 때도 될 수 있는 한 그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당한 일은 반드시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그들의 신뢰를 얻게 되어 결국 그들을 돕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려고 애쓰는 것은 그들이 자진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를 청해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의 결론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모든 상황화의 노력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였습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상황화 되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3.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이웃들의 상황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이웃들의 상황이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런 노력 자체로 전도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상황화의 노력은 전도받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 영혼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바울사도의 상황화의 모든 치열한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다시 2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현대어 역은 단순히 이렇게 옮겼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적인 때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나눌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미 고전9:16에서 복음전도를 피할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엄숙한 의무로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그가 그렇게 전하기를 열망했던 복음의 정의를 고린도 전서 15:1-4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성도들이 확실하게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이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3-4절에서 복음이란 한마디로 성경의 예언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 4:25에서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자리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용서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새 인생을 의롭게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자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신 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복음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순간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응답하는 그 순간이 영혼들이 살아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구체적으로 입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설교 처음에 소개한 조운파 집사님이 캐딜락을 포기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렇게 작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버스나 전철에 타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재빨리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고 합니다. 그 다음 누군가가 앞에 서면 다시 재빨리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냥 일어나면 내리는 줄 알고 고마운줄 모를테니까 "피곤하신 것 같은데 앉으시지요"하면서 자리를 양보한다고 합니다.
상대가 고마운 마음으로 착석하자마자 주머니에서 4영리를 꺼내어 "선생님, 이 책은 내가 평생 읽은 것 가운데 가장 귀한 책인데 읽어보시겠습니까?"하면 예외없이 다 받는다고 합니다. 그가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옆으로 다가가 설명을 해주면서 복음을 전하여 결신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의 증거는 성도들의 종의 태도가 동반할 때 능력으로 결실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소개 드린 조운파 집사님이 이런 정신으로 전도하게 된것도 그가 그런 종의 정신과 태도로 전도한 분을 만나게 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예수 안믿던 시절 80년대초 개인 사정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집주인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언제나 조운파 집사님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셨는데 심지어 아침이면 자기 구두를 닦아놓았다고 합니다.
너무 황송해서 하루는 구두는 제가 닦을터이니 그만 두시라고 만류하니까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고 합니다. "조 선생, 더러운 구두도 닦으니 반짝반짝 빛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몸도 옷도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조선생, 만일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어떻게 하지?"하고 묻더랍니다.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이 질문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 화장실을 가던중 조운파씨는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집주인의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자기를 위해 새벽에 기도하다니--이 새벽의 충격으로 그는 교회를 나가게 되고 마침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를 변화시킨 예수를 전도하기 위해서 헌신한 평신도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 가을 이런 우리의 기도,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바울이 본문 19절에서 그가 자유인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뜻은 무엇인가를 설명해 보십시오.
2. 믿지 않는 사람들과 연대화된다는 의미를 나누어 보십시오.
3.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린도전서 15:1-3로 설명해 보십시오(필요하면 롬4:25을 참고하십시오).
4. 우리 각자의 이웃 사랑 축제를 통한 이웃 사랑 계획을 나누어 보십시오.
종된 삶 /고전9:19-23/ 이동원목사
2014-12-04 22:56:46
추석을 잘 지내셨는지요? 우리 중에는 참 즐겁고 기쁜 명절을 지내신 분들이 있는가 하면 복잡한 가족 구도 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도리를 다하고자 애쓴 추석 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마음이 가볍지 못한 의무적인 섬김의 시간을 보내신 분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진정한 섬김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계절입
니다. ‘섬김’의 어원은 본래 ‘종’입니다. 영어로는 ''''''''''''''''servant''''''''''''''''(종)라는 단어에서 명사로''''''''''''''''service''''''''''''''''(섬김) 혹은 동사로 ‘
serve''''''''''''''''(섬긴다)라는 단어가 유래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종이란 단어는 때로는 부정적으로 때로는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자유가 박탈된 종은 부정적인 종의 모습
이지만, 자원하는 종의 모습은 긍정적입니다. 이런 종을 우리는 ‘자유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종은 오히려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고 봉사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가장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최대의 상징물이 있다면 1886년 10월 28일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 리버티 섬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
상>일 것입니다. 이 여신상은 본래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Bartholdi)라는 사람에 의해 21년간에 걸친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통설에 의하면 바르톨디가 누구를 모
델로 이 자유의 상징물을 만들 것인가를 오래 동안 고심하다가 어느 날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떠 올리고 이 작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 통설이 사실이라면(바르
톨디는 이 질문을 받고 시인도 부인도 안했다고 전해집니다.)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그는 미녀가 아닌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했을 가가 의문입니다. 한 저널리스트는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닌 어머니의 책임감과 같은 깊은 애정과 땀 흘리는 섬김에서 나오는 것임을 바르톨디가 말하고 싶어한 것이라고 해석한 이가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도 보
면 진정한 자유는 섬김으로 종노릇할줄 아는 자유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것은 바울 사도가 갈5:13에서 가르친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레슨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래서 우리는 이 좋은 시즌에 진정으로 ‘종된 삶’의 비밀이 무
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인 된 자유의 특권을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삶을 가르치면서 먼저 자신이 자유인인 것을 천명합니다. 때로 우리의 봉사가 피상적이
고 감동적이지 못한 것은 우리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노예의식으로 섬기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섬김의 자리에 서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자유
로운 사람인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서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라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의 말씀이 갈5:1에서도 고백됩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제일
먼저 주어지는 선물이 자유인 것입니다. 이 자유는 죄책으로부터의 자유요, 형벌로부터의 자유요, 우리를 압박하던 모든 관계로부터의 자유인 것입니다. 돌을 들고 그녀를 처
벌하고자 에워싼 군중들 앞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해 예수께서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이 순간 이 여인이 경험했을 영적 자
유의 감격이 이해가 되십니까?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노예 해방 선언이 있고 얼마 안 되어 아틀란타의 한 새 가게에 흑인 노인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는 새장안의 새들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한 새장을
가르치며 그 새의 가격을 묻습니다. 얼마라고 하자 그는 값을 지불하고 새장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더니 새장 문을 열고 새를 꺼내 푸르른 창공을 향해 날려 보냅
니다. 새 가게 백인 주인이 이 광경을 보다가 깜짝 놀라 뛰쳐나오며 항의를 합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고 당신 제 정신이냐고?” 그러자 이 흑인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모르는 것은 당신이라"고. 주인이 되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느냐?”고. 그때 흑인 노인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두 가지를 모르는데 첫째는 “당신은 백인으로 자유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둘째는 “당신은 자유를 다시 찾은 감
격을 모른다”고.
저도 오늘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참된 자유를 경험하고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죄를 용서 받은 자유의 고마움, 나는 이제 그 누구에게도
정죄될 필요 없이 그 누구에게 얽매일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나 자신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이 자유의 은혜를 알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의 특권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자유와 감사의 마음 안에 있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섬김
을 시작할 자리에 서시게 된 것입니다.
2. 이웃들을 위해 다시 종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19절의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참된 자유인이 되었지만 이제
그 자유를 반납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종을 자유의 종, 자발적인 종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종의 개념은 구약에서
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 개념이 출21장에 증거됩니다. 구약의 법규에 의하면 한 사람이 어떤 집에 종으로 팔려 오면 그는 6년을 무조건 자기 주인을 위해 일해
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이라도 안식년이 되는 제 7년이 되면 일단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7년에 어떤 종이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면 주
인은 재판장에게 데리고 가서 영원한 종이 된 표지로 그의 귀를 뚫습니다. 그 다음부터 주인은 그를 사실상 종이 아닌 자기 자식처럼 대우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그는 자유한
종, 자발적인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지평을 넓혀 온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발적인 종들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그렇게도 ‘종의 멍에를 메지 말
라’고 말하던 바울이 이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당신의 종이 아닌 특별한 자녀로, 하
나님 나라의 사신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인으로서의 특권을 <내려 놓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우리가 우
리 자신을 내려 놓을수 있느냐가 우리의 쓰임 받음의 한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 아마도 이 땅의 많은 성도들 특히 기독 청년들의 의식을 강타한 책이 있었다면 그
것은 몽골 선교사 이용규의 <내려 놓음>이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수년전 하바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코스타 집회에 참석했다가 학위를 내려놓고 몽
골 선교사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아주 특별하게 쓰임을 받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가 종으로 헌신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아들 동연이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두 손에 움켜 쥐고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가 배워야 할 교훈은 그가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계산대에 <내려 놓음>의 레슨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종으로 쓰임받기 위해 다
시 우리의 자유와 특권을 내려놓아야 할 이유라고 그는 말합니다.
3. 종된 삶의 초점은 이웃들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종이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여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종된 삶, 즉 섬김의 명료한 한
초점을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섬김으로 우리 이웃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20절에서 그는 율법이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율법아래 두겠다고 합니다. 22절에서는 약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약한 자의 자리에 던지겠다고 합니다. 직접 22
절을 읽어 보실까요?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 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쉽게 말해 볼까요? 그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포기 하겠
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저는 내려 놓음의 저자 이 용규 선교사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용규 선교사가 그후 또 하나의 책을 더 펴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더 내려 놓음>이었
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가 하바드 학위와 촉망받는 국내의 대학 교수 직을 내려놓고 몽골로 간 것은 그에게 필요했던 진정한 헌신의 껍데기에 불과 했다고 그는 고백합
니다. 사실 그는 촉망 받는 미래의 성공을 내려 놓고 몽골로 갔을지 모르지만 몽골로 간 후에도 그는 선교사로 자신 안에 쥐고 있었던 그가 아직도 집착하고 있었던 그가 내려
놓지 못하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 용규 선교사의 <더 내려 놓음>에서 그는 특별히 우리 모두가 섬김의 장에서 반드시 씨름해야 할 두 가지 문제 <자기 애>와 <자기 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의 일을 하면서도 아직도 자기 사랑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일도 여전히 자기의 생각, 자기의 방식으로만 일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사실은 <내려 놓음> 자체도 내 노력으로는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 일의 성공보다도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오직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자리에 설 때 진정한 <내
려 놓음>이 이루어진다고 그는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고백도 그런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기꺼이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생각, 자신의 스타일
까지 버리고 이웃들에게 다가 설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들을 스스로의 관점이 아닌 이웃들의 관점에서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는 자신과 자신의 주관적 기준, 자신의 주관적 방식 그리고 심지어 나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포기하고 다가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이름의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
고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의 병을 얻
어 말년에 병원에 입원했을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 사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것이야 말로 한 영
절제의 열매 /고전9:24-27/ 이동원목사
2014-12-04 22:54:42
미국의 농구 코치 가운데 커튼 피시 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조금 유명하게 이유는 이 사람이 인도하는 농구팀이 항상 꼴 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데 놀라운 사실은 구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치를 해직하지 아니 하고 그대로 썼다는 사실입니다. 거 의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등하는 것 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 커튼 피시먼스라는 코치가 자기팀도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 심리적 전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심 리적 설득을 자기 선수들을 데리고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 러분! 우리팀이 게임에 나갈 때 마 다 항상 지는 팀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가지 마십시다. 이번 게임만 은 여러분이 나가실 때 이런 생각을 하고 나가세요. 우리는 항상 이겨왔 던 팀이다. 그래서 이긴 척 하고 나 가십시오
. 영어로 pretend라는 말이 죠. Just pretend 그냥 한번 계속 이 겨왔던 팀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나 가십시오. 이긴척하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이번 게임이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이겨서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에 최후에 마지막 결 정전 게임까지 올라왔다.
올라온 척 하고 그렇게 pretend하고 여러분 한 번 나가십시오. 그렇게 해야 자신감 self confidence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졌어 요. 코치가 화가 났습니다. 막 화가 나서
"아니 여러분, 내 말을 뭐로 들으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호소하 지 않았습니까?"
이런 코치를 한 선 수가 가만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 더래요.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번 게임도 이긴척 하세요. 그냥. 이긴 척"
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우리가 경 기의 승리를 위해서는 심리적 전술 이 필요할 지 모르지만 승리라는 것 은 심리적 전술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죠. 실력이 없으면 이길 수 없습니 다. 그리고, 실력이라는 것은 훈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훈련이 라는 이 단어를 성경에서는 독특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 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훈련이야 말로 승리와 패배를 결정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겠 습니까? 이 절제라는 말은 본래 희 랍어의 '애크 크라테이아'라는 단어 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크라토스라 는 단어로부터 나온 말인데, 이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욕망을 훈 련을 목적으로 자제한다는 그런 의 미를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영어로 이 단어를 번역할 때 self-control 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 령의 열매를 말할 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그리 고 마지막 열매가 뭐예요? 절제의 열매입니다. 마지막 열매가 절제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마지막 열매 이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제일 중 요하지 않은 열매라는 인상을 가질 지 모르겠어요. 바울이 강조할 때 아마 제일 중요한 의도로 강조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절제없이는 다른 선행하는 모든 인 격적인 열매들이 맺어지지 않아요. 그만큼 절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해가 다 지 나가고 있습니다. 올 한해가 처음 시작할 때, 금년에 올 초에 우리 마 음속에 나름대로 금년 한해를 향한 우리들의 꿈이 있었습니다.
목표가 있었습니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비 젼이 있었습니다. 그 꿈과 목표가 얼마큼 이루어 지셨습니까? 얼마큼 우리들의 꿈과 목표가 이루어 질수 있었느냐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했느 냐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 나 control 하고 우리 자신을 얼마 나 잘 훈련했느냐 저는 거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절제라는 것은 우리가 절제합시다라 는 절제의 결심, 결단만으로 가능하 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제할 수 있는 어떤 동기가 부여되 어야 합니다. 어떤 동기부여적 삶의 열망이 필요합니다.
절제하기 위해 서는 어떤 삶을 열망해야 하느냐 이 것이 제가 묻고 싶은 중요한 질문입 니다. 절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 떤 삶을 열망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찾 아볼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쓰임받는 삶을 열망 해야 합니다
. 우리가 쓰임받는 삶을 열망하게 된다면 절제하게 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에 위 치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속에서 바울 은 인생을 게임에 비유합니다. 혹은 신앙생활을 게임에, 경주에 비유하 고 있습니다.
인생은, 신앙생활은 일 종의 게임입니다. 당시에 아테네에 서는 이미 올림픽 비슷한 게임들이 이루어져 있었고, 당시에 고린도에 서는 소위 이투미안이라는 체전이 매년 고린도 도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이런 게임의 룰이라 든지 규칙, 문화에 대해 매우 익숙 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사 람들은 이 게임에 선수로 출전하는 자체를 커다란 명예로 생각했습니 다. 최대의 명예, 인생을 살면서 명 예는 이투미안이라는 게임에 선수로 한번 나가보는 것이다. 그것을 명예 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최대의 불 명예는 뭐냐면 이 게임에 선수로 뛰 던 선수가 자격을 박탈당하고, 실격 당해서 선수로써 자격을 상실하는 것을 최대의 불명예로 생각했습니 다. 이런 배경속에서 문화적 습관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 십시오. 바울은 틀림없이 이런 문화 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의 본 문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특별히 마지막 절을 읽어 보시 면 다같이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 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 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 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버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뭐냐?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토론을 합니 다. 혹시 바울이 다시 구원을 잃어 버릴수 있다고 얘기한 것이 아니겠 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서 학 자들은 그런 의미는 아니고, 이것은 바울이 현재 주님께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있는데 이방인의 사도 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쓰임을 받고 있는데 내가 어느 한순간 자격을 상 실하고 주님이 나를 더 이상 쓰시지 않는다는 그런 사태는 일어날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버림이라는 단어를 어떤 성경번 역에는 disqualify 라는 단어를 사용 해서 번역한 일이 있습니다. 실격했 다. 자격을 상실했다. 자격을 상실하 게 될까봐 바울이 두려워했다. 지금 은 나를 쓰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 안되겠 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쓸수가 없 다. 뭐 그 사람을 다시 지옥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더 이상 주님 에 의해서 쓰임을 받지 못한다 이것 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이 겠습 니까? 1988년 그리 오래전 일이 아 니죠. 불과 12년 전인가요? 9월 27 일 월요일 아침 캐나다의 CBC 아 침뉴스에서
"오늘은 우리 캐나다의 국가적 수치의 날입니다."라는 아나 운서의 멘트로 뉴스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캐나다의 국가적 영웅, 세계적인 육상선수,
세계에서 가장 빨리 뛰는 선수를 보유하고 있 다고 자랑스러워 했던 캐나다 국민 의 hero, 영웅이었던 벤 존슨이 약 물복용으로 선수의 자격을 박탈당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기 록은 깨끗이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약물복용을 했습니다. 기자가 인터 뷰를 했습니다.
벤존슨에게 왜 약물 을 복용했냐고... 솔직히 저는 그 동 안 훈련을 게을리 해 왔습니다. 의 욕이 없었습니다. 캠피언의 명예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할수없이 저는 약물을 복용했습니다. 그렇습 니다. 그에게 의욕이 상실되었을 때 더 이상 그는 훈련을 기피하게 되었 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계속 쓰임을 받고 싶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정말 열망한다면 우리는 훈 련을 기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기피해서도 안되겠죠? 그래서 바울 은 오늘 이 마지막 절을 다시 읽어 보시면요. 바울이 자신의 결심을 단 호한 결단을 말합니다.
내가 내 몸 을 쳐서 복종시킨다. 내 몸을 쳐서 내가 복종시킨다. 그 이유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다시는 쓸 모없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하기 때 문이다. 나는 계속 쓰임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훈련한다. 절제한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 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 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가 있는데 너희로 항상 과실을 맺는 삶을 내가 보고 싶어한다.
과실을 맺는 삶, 열매를 맺는 삶, 다시말하면 이것은 유용한 삶, 쓰임을 받는 삶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써 주실려고, 사용 하실려고 부르셨단 말입니다. 선택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쓰임을 받으 려고 한다면
, 내 은사가 많든 적든, 달란트가 크든 적든, 내 모습 그대 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 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 여,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 가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인생을 살 려면 무엇보다 절제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절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쓰임받는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끝까지 쓰임받고 싶어요. 이 모습 그대로 쓰임받고 싶어요. 유명해지진 않아도 좋아요. 그러나 쓰임받는 인생 살고 싶습니 다.
이 쓰임받는 삶을 열망하는 사 람마다 절제의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새천년에 쓰임받는 삶을 열망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길 바 랍니다. 쓰임받는 삶을. 아멘하는 사 람만 쓰임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 아멘- (그러니까 다 아멘 하네요)
우리가 절제있는 삶을 살려면 두 번째로 목표있는 삶을 열망해야 합 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마도 두가지의 게임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요. 자, 24절에 보시면
"운 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달음 질, 육상의 race를 생각했겠죠. 또 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 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또 달음질이 나와요. 그 다음에 싸우기 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고 이 것은 무슨 게임을 연상했을까요? 허 공을 치지 않는다. 아마도 복싱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권투경기를 연 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어 집니 다. 자, 여러분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육상게임이 시작됩니다. start line에 서서 출발신호와 함께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한 선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골 라인, 결승 라인은 저쪽에 있는데 결승라인과 정 반대 방향으로 죽어라고 사력을 다해서 열심히 뛰어요.
무서운 속도 로 스피드로 뛰었어요. 반대방향으 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력을 다 해도 땀을 흘려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거죠. 이따금씩 사각의 링에 오 른 복서가 열심히는 해요. 열심히 하면서 땀을 흘리면서 계속 주먹을 휘두르는데 그냥 허공을 향해서 휘 둘러요. 그는 결코 승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우리 가운데는 열심 은 있는데 목표를 잃어 버린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표 없는 열심, 목표없는 최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게임은 패배일 수 밖에 없습 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정 말 왜 우리가 제대로 자기 인생을 훈련하지 않습니까? 목표가 없기 때 문입니다. 목표가 설정되어 있으면,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에 준 한 진정한 훈련이 이루어져 갈수가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절제된 삶을 훈련된 삶을 추구할수 있으리라 생각이 되 어 집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 가운데 린든 비 존슨이라는 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이 사람이 먹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탐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몸무게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미세스 존슨 여사가 first lady가 남편에게 경고도 했겠고, 호 소도 했겠고, 애걸도 했겠죠. 하지만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몸무 게가 불어 났어요. 그러니까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던지 남편에 게 어느날 이런 자극적인 말을 했다 고 합니다.
한국에는 그 말이 있는 데 미국의 영어에는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말이 자극적으로 들렸다고 해요. 뭐라고 했냐면 자기 남편보고
"여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 이어떻게 나라를 다스립니까?"
한국 유식한 부인같으면 수신제가 치국평 천하도 모르오 이렇게 했겠죠. 그 말이 없으니까 자신을 다스리지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 냐 그런데 이말이 화살처럼 박혔대 요. 그것이 자극이 되고 충격이 되 었대요.
내가 미안하오. 내가 노력 하겠다고 내가 좋은 대통령 되겠다 고 그리고 좋은 대통령 될려면 건강 해야 하겠고, 건강하기 위해선 몸무 게 이제부터 조정하겠다고. 당신하 고 약속하고 1년동안 20파운드 줄이 겠다 그리고 그 한해동안 23파운드 를 줄였대요.
그리고 훨씬 정치력도 높아지고 아주 건강하고 명석한 판 단을 하면서 그 해를 잘 보냈다고 합니다. 뚜렷한 목표라는게 그만큼 중요합니다. 윈드 존슨은 23파운드 성공했다고 하지만 우리주변에도 20파운드 이상 의 기적적인 몸무게를 줄인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20세기 말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 리교회 김기태 목사님을 아시나요? 20파운드가 문제가 아니라 20kg을 줄였습니다. 지난간 여름에 제가 탐 식 설교를 했었죠? 설교는 제가 했 는데, 은혜는 그쪽으로 갔어요. 나 한테 오지 않고.
지금은 날씬한 몸 으로 서 있습니다. 그 분이 언제 그 렇게 뚱뚱했는지가 과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감량에 성공했 습니다. 아마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매일 뛰고, 매일 소식한대요. 그러니 까 성공할 수 있었죠. 저는 왜 이것 이 20세기 10대 뉴스에 나오지 않나 궁금해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기 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 다.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여기에 다툰다는 말이 내 온 에너지 를 다해서 소모한다. 승리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 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 든일에 여러분 절제의 영역은 한가 지 영역만이 아니라 여러 영역입니 다. 우리가 식욕도 컨트롤해야 하고, 성적 욕망도 컨트롤해야 합니다. 명 예욕도 컨트롤해야 합니다. 우리 안 에 있는 온갖 이기적인 욕망도 컨트 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컨 트롤되지 않으면 모든 일에 절제하 지 않으면 승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뚜 렷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무 엇을 위하여 절제하자는 것인가? 바 울은 지금 무엇을 위하여 절제하겠 다고 말합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목 표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뚜렷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 구절 23절이 되겠는데요. 우리 같이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때문이었어요. 복음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내가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내 사명 완수 하기 위하여. 이 복음 전도의 위대 한 소명을, Vision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내 자신을 절제하겠다. 그렇습 니다.
새로운 천년을 향해 가면서 먼저 목표 설정을 하세요. 새벽기도 도 하면서 앞으로 남은 며칠만이라 도 뚜렷한 목표설정을 하세요. 그리 고 내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절제하겠다. 목표있는 삶에 대한 열 망 그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속에 절 제의 삶을 가져 오게 될 줄로 믿습 니다. 목표있는 삶을 열망합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상급받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우리가 절제하기 위 해선 어떤 삶을 열망해야 합니까? 첫째로, 쓰임을 받는 삶, 둘째로 목 표가 있는삶 셋째로 상급받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당시 올림픽 게임이 나,
소위 이투미안 게임의 승자에게 주는 최대의 명예는 저 유명한 월계 수 면류관이었습니다. 월계수는 나 무죠. 최대의 명예를 상징하는 상임 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오래가지 못 해요. 두면 나중에 시들어 버리죠. 지금은 그런 것 안 주지만 옛날에는 월계수 면류관이었다구요.
시들어 버려요. 썩어버려요. 바울은 이런 걸 생각할 때 시들어 버리고 썩어버리 는 월계수 면류관 하나 쓰자고 오래 간직하지도 못 할 면류관을 위해서 사람들이 시간을 컨트롤하고, 땀을 흘리고 자신을 조절하고 욕망을 조 절하면서 그렇게 애를 쓰는 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
영원한 가치를 위해 서 노력하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 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삶속에 자신을 투자하고 있느냐. 바 울은 이 질문을 묻고 싶었던 것입니 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번 25절을 읽어 보 시죠. 25절 다같이
"이기기를 다투 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 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 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 라"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썩지 아 니할 면류관 그것은 어떤 면류관일 까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어떤 이 는 황금 면류관 그러더라구요. 금면 류관.
천국에 가서 금으로 된 면류관 쓸 것을 기대한다고. 뭐 그럴지도 모르 죠. 저는 그 금이 상징이라고 생각 해요. 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면류관은 물질적 면류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면류관에 대 한 study 성경공부를 해 보시면 이 런 낱말들이 나옵니다.
어떤 면류관 이 나오냐면, 영광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혹은 기쁨의 면류관, 혹은 소망의 면류관. 이런 것들이 물질적 인 것들이 아니죠.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사람들에게 전도 를 해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요. 전도하는 과정이 쉽지 않죠. 전도를 해 보면 한사람 예수 믿게 하는 것 이 얼마나 힘듭니까?
붙들어 놓으면 도망가고, 한 사람 예수 제대로 믿 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 다. 더군다나 믿은 사람을 신앙적으 로 잘 세워주는 일 정말 어려운 일 이예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해서 그 사람들의 신 앙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데살 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 서 데살로니가 전서 2장 마지막부분 에 이런 편지를 씁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여러분은 저의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 의 기쁨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희망의 면류관, 여러 분은 저의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 니다. 여기서 면류관은 무엇을 얘기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을 얘기하 고 있습니다. 천국가서 내가 그렇게 전도하려고 애썼던 사람이 나 때문 에 예수 믿고 천국와서 영생을 함께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요?
'야 그렇게 나를 속썩이더니 예수 믿고 여기 와서 영원을 같이 누린 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기쁨 이 영원을 갈꺼예요. 영원한 기쁨. 그리고 내가 전도한 사람 자랑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저 사람 제 가 전도했거든요.
저 사람 제가 전 도했어요. 하는 이 끝없는 자랑. 이 자랑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그 영 원한 가치를 지닌 자랑. 여러분 주 님앞에 서는날 그 놓칠 수 없는, 그 영원히 계속될 그 명예를 위하여 그 명예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상급이예 요. 우리의 상급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자는 자, 그 상 때문에 race에서 경주 자들은 그 마지막 면류관을 위해서 뛰는 것입니다. 그 상급을 위해서. 제가 상 얘기를 하니까 성경 공부하 다가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 님, 뭐 그리 상 얘기를 하십니까? 어렸을 때는 상이 좋았지만 우리가 지금은 유치원생들이 아니지 않습니 까? 그 유치했던 유치원 다닐때나 상타면 좋아했지 지금은 어른이 되 었는데요. 제가 그분한테 그랬습니 다. 집사님, 노벨상 줘도 안 받아요? 노벨상이라면 생각해 보지요 그러더 라구요.
여러분, 노벨상보다도 더 명예스러 운 우리 주님앞에 인정받아 영원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 면류관을 그 상급을 얻기 위하여 그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내가 투자 한 사람, 내가 눈물 흘려 전도한 사 람,
전도하고 세운 그 사람 내년에 는 그 목표가 있다면 주일학교교사 도 하시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해 보세요.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요. 미국의 필라델피아 근교에 가면 듀퐁 가든이라는 아주 아름다 운 가든이 있습니다.
저는 워싱턴에 살았는데 한 두시간 반쯤 되나? 저 도 여러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손님 들을 모시고. 이 듀퐁가든이 만들어 졌을 때 듀퐁백작이 자기 부인을 위 하여 만든 아름다운 가든에 많은 손 님이 왔어요.
손님들에게 자랑을 하 면서 그 정원을 돌고 있을 때 사람 들이 칭찬했겠죠. 너무 아름다운 가 든이라고. 참 예쁘다고. 이때 듀퐁 백작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이 정 원에 대해서 저만큼 자랑스러워 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 또 저만큼 정 원 때문에 기뻐할 사람도 없을 것입 니다. 왜냐하면 이 정원은 사람들을 시켜서 한 것 뿐만 아니라 저의 아 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처음 에 손수 일을 하여 저의 정성이 들 어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꽃 을 심고, 가꾸고, 뿌리고 그 모든 일 을 제가 같이 했기 때문이죠. 나의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 정원을 볼 때마다 기쁨과 자랑을 느낍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우리가 전도한 사람 우리가 세운 사람을 만날 때 똑같은 감격을 느낄거에요. 내가 전 도한 사람, 내가 눈물 흘린 사람 내 가 이 땅에서 뿌려진 눈물과 봉사와 정성의 씨들이 천국에서 열매를 맺 는 광경을 보았을 때 우리는 크게 기뻐할 거예요. 영원히 기뻐할 거예 요.
그 놓칠수 없는 상급 그 마지막 면류관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 간다 는 사실 이 얼마나 특권이에요? 그 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절 제할 수 있다. 내 시간도 다른데 쓰 지 않고 보람있는 일에 쓰겠다.
이 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 제한다.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하기 를 푯대를 향하여 목표를 향하여 위 에서 부르신 부르심에 상을 위하여 나는 좇아 가노라.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금년은 다 지나갔습니다. 새로운 천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새로운 천년에는 내가 주님앞에 저 영원을 통해서 놓치지 않을 상급을 주 앞에 자랑스럽게 붙들기 위하여 새로운 천년은 훈련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QT 훈련도 받으시고, 제자훈련도 받으시고, 기도훈련도 받으시고, 전 도훈련도 받으시고, 또 봉사의 장에 서 직접 봉사를 통한 훈련도 받으시 고 여러 가지 봉사의 기회들이 있는 데 거기에 들어가서 참여하시고 그 러면서 내가 짤막한 인생이 끝난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부족하지만
저를 쓰셨는데 여기 저의 열매들이 있습 니다. 이 열매들에는 나의 눈물과 기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주 앞에 영원을 두고 자랑스러워 할 상급과 명예를 위하여 새 천년을 절제의 열 매를 안고 들어서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 /고전9:19-23/ 곽선희 목사
2014-11-26 12:29:50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합니다마는 원하는 행복을 찾지 못하고 불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의 원인은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가운데 살고 있건만 내가 얼마나 많은 은혜 중에 복되게 살고 있는지 그 사실을 자기 스스로 모르기 때문이고 때로는 그 은혜를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배반……. 바로 그 마음, 그 행위 속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 9장 16절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많이 수고했어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한평생 수고해도 자랑할 것이 없다. 왜?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바로 그 마음이 행복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일거리가 없다는 겁니다. 실은 일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었건만 주신 일거리를 내가 찾지 못해서 스스로 쓸모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할일 없는 사람을 세상에 두시지 않습니다. 분명히 일은 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일을 바로 찾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안하고 할 수 없는 일만 하겠다고 해서 쓸모없는 자로 자신이 비하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행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헛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하고 무의미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억지로 산다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것도 단 한 번도 사랑해본 일이 없이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일……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야하는 것 바로 여기에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행복을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어떤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해서 하는 그 일에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얼마나 자발적으로 하느냐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또 하나는 인생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얻는 행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라는 것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데, 결과에 의해서 평가받고 평가하는 것처럼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을 바꾸십시오.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바른 목적에 바른 과정으로 오늘을 살았다면 그만큼 오늘은 행복할 뿐입니다.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는 묻지 마세요.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행복을 얻는 지혜를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그렇게 철학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행복의 비결을 누누이 낱낱이 그리고 자기 경험에 준해서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행복은 자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유한가? 과거로부터 자유하고, 무능함으로부터 자유하고, 무지함으로부터 자유로움 입니다.
나약함으로부터 자유하고, 특별히 비굴함과 증오로부터, 시기질투로부터 자유한 온전한 자유, 자유인의 자유, 자유인의 깨끗한 영혼…… 바로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유를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소중한 자유를 스스로 버리는 자유로 누린다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이에요. 자유를 버릴 줄 아는 자유, 거기에 행복의 신비가 있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10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노라." 스스로 버리노라! 자유입니다. 빼앗기는 것하고, 주는 것은 다른 거예요.
여러분, 혹 자녀들을 키우면서 애들한테 시달리십니까? 용돈 달라고, 뭐 좀 더 달라고, 뭐 좀 해달라고 ……. 그럴 때, 조심하십시오. 줄 때에 만원 달라고 하면 이만 원 주세요. 그저 한 가지 달라고 하면 두 가지 주고요, 아예 못준다면 "못줘서 미안하다 더 주고 싶은데"
요렇게 말하면서 주세요. 이와는 반대로 줄 때마다 강도 만나는 마음으로, "이 녀석아 어쩌다가 태어나가지고 날 고생시키냐?" 그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또 그래요. "왜 낳아가지고 말썽 이예요? 제 자식 키우면서 왜 말이 많아?" 이렇습니다.
여러분, 자유한 가운데서 줘야지 빼앗기는 마음에서 주면, 자녀에게 주어도 강도 만나는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요. 빼앗기는 마음이 아니라, 베푸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는 마음 말입니다. 꼭 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고 싶어서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함,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마는 저는 물건을 살 때 절대로 물건 값을 깎지 않습니다. 사람, 추해지고 싶지 않아서……. 고 몇 푼 깎아봐야 별도리도 없는데……. 제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줬어요. 공짜 좋아하면 오래 못산다고 했습니다.
그것 좀 깎는 것도 공짜라고 조금 깎아 보려고 바락바락하면, 사람 추해지는 법입니다. 추해집니다. 그건 아주 불행해 집니다.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추위에 떨고 있으니 몇 푼 더 버세요' 하는 마음으로 주면 이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종이 되는 것, 그리고 매이는 것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스스로 종이 된다는 말은 미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미쳤다." 정신없다는 말이죠. 그 정신없는 것, 그게 행복한 거예요.
여러분, 미친 사람 남 보긴 딱하지만 자기는 행복한 겁니다. 미쳐야 행복한 겁니다. 공부에도 미치고, 사업에도 미치고, 더구나 사랑에 미친다면 그것은 더 할 나위가 없는 거죠. 매이는 거죠. 정신적으로 완전히 매이는 것입니다.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온전한 자유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선택적인 매임입니다. 확실한 대상이 있고 확실한 의미가 있고 확실한 목적이 있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결코 막연한 희생이 아닙니다. 확실함에 자기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이런 묘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얻고자 하여, 무엇과 같이 된다'는 말씀이 있어요. '얻고자 하여, 같이 되었다'고 여러 번 반복해 말합니다. 이 얻고자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건 돈 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평생을 살면서도 마음을 얻지 못하고, 존경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얻은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인격을 얻고, 성품을 얻고, 인간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먼저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얻기 위하여 내가 나를 먼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Incarnation,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기 위하여 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은 우주적 원리입니다. 마음을 얻고, 인격을 얻고, 사랑을 얻고, 사람을 얻는 것은 곧 구원을 이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유일한 계시적 방법은 '무엇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차를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나옵디다.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갔어요. 군대에 갔다가 나오니까 첫사랑 애인이 딴 남자하고 결혼해버렸어요. 아, 이 녀석이 속이 상해가지고 밥도 안 먹고, 공부도 안하고, 그냥 고민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초췌해가면서까지 고민을 해요. 어머니가 위로를 해봤습니다. 위로가 안 돼요. 첫사랑을 잃어버린 그 아픔에 아들이 너무 고생을 하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남편한테 부탁을 했어요.
"여보, 당신이 남자니까 남자끼리 좀 얘기해서 좀 위로하라"고……. 아버지가 찾아가서 밥도 안 먹고 초췌해진 첫 사랑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아들을 놓고 위로를 합니다. "뭐 쌔고 쌘게 여잔데 뭐 걱정하냐 괜찮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뭐라고 해도 안돼요. 아무리해도 위로가 안돼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한마디를 했어요. "얘야, 나도 옛날에 다 그래봤다. 나도 옛날에 첫사랑이 있었는데, 아 그게 그만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가지고 나도 고민을 해봤는데 지나고 나니까 별거 아니더라."
그러니까 아들 녀석이 "아버지도 그랬어요?" "아, 그럼……."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어요. 아, 그러니까 어머니가 "얘야 너 어떻게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괜찮아졌냐?" "아버지가 그러는데 아버지도 첫사랑을……."
아, 그날 밤 부부싸움이 났어요. "당신은 내가 첫사랑이라고 하더니 뭐 어쩌고 어째?" 그래 가지고 한바탕 싸웠답니다.
정말 같이 되기가 어렵네요. 사람하나 얻기가 힘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 내가 그와 같이 된다……. 보세요. 그래서 비로소 '저를 나와 같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 그것이 성서적이고 기독론적 진리입니다.
2005년 올해의 CEO로 선정된 대교의 강영중 회장님이 계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늘 모자란다는 생각에 삽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직원이 소중합니다. 나는 늘 모자라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훌륭한 직원들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 분들이 아니면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경영자의 최고의 덕은 겸손이다." 잘났다고 하는 회장을 밀어줄 직원은 없어요. 자기교만에 빠져있는 사람을 위해서 충성을 다할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 오직 겸손으로 사람을 얻고, 사람을 얻고야 돈도 얻을 수 있더라는 것이 그의 경험입니다.
영국의 정치가인 로이 시씨온(Roy Sission)이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성공의 비결에 대해서 'Three H's Leadership'에 이라는 말을 합니다.
Humanity, Humility, Humor입니다. 휴머니티, 인간성이 중요합니다. 휴밀러티, 겸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 유머가 있는 이 세 가지가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나는 유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유대 사람같이 되었노라. 이방 사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이방 사람이 아니지만 이방 사람처럼 되었노라. 나는 약한 자가 아니지만 약한 자를 얻기 위하여 약한 자같이 되었노라. 나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미련한 사람같이 되었노라. 나는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모르는 자같이 되었노라.' 여러분, 능력이 있으나 능력 없는 자같이, 의인이지만 죄인같이,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 아니겠습니까?
이건 아주 미스터리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권을 다 쓰지 않았다"고 했어요. 내게 주어진 권, 권력, 능력, 할 수 있는 것 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없는 자처럼 무능한자처럼 죄인처럼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라코스 창업자인 밥 데이비스(Bob Davis)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서비스(Service)라는 말의 어원을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서비스라는 말의 어원은 서번트(Servant)라는 것입니다. 봉사라는 말의 어원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이 되어야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얻고, 마음을 얻고, 그러고 나서야 큰 영광 큰 역사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는 확실하게 우리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지 않습니다. 그저 줄 뿐입니다. 아플 때까지 주십시오. 기도하면 믿게 될 것입니다. 믿으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섬기게 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 그리스도의 몸을 씻는 것 같은 체험을 얻습니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열고 있습니까?
유명한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비밀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기도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2세 세상 떠나기 전에 써놓은 마지막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아니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을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여러분,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을 이젠 접어둡시다. 자존심 살리고 명예 살리겠다는 것도 잊어버립시다. 이제는 깨끗한 마음으로 오로지 섬기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기로 다시 시작하십시다.
행복은 자유에 있습니다. 스스로 버리는 자유에서 행복을 얻습니다. 얻고자 하신다면 먼저 버려야 합니다. 같이 되는, 버려서 같이 되는 그 행복 말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모습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고, 또 그런 모습으로 마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행복의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행복을 원하면서도 불행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영영 불행하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참 믿음을 주셔서 주께서 보여주신 길을 걸으며, 이제는 섬기는 마음으로 살면서 주께서 주신 고귀한 자유를 스스로 버리는 자유인으로서 그 영광 그 행복에 살도록 은총을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경기자의 윤리 /고전9:22-27/ 곽선희 목사
2014-11-21 06:13:39
독일에서 출간된 지 2주일만에 7만 부나 팔렸다고 하는 베스트셀러 한 권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번역되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고 감동을 받은 책입니다. '요쉬카 피셔'라고 하는 분이 쓴 "나는 달린다" 라고 하는 아주 평범한 책입니다.
저자는 (전문)작가가 아닙니다. 현재 독일에 연방 공화국에 외무부 장관이면서 동시에 부총리이기도 한 분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나라에도 다녀간 일이 있는 그 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분이 정치인으로써 정치 평론을 한 그런 책은 아닙니다.
다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한 경기자 인생을 묘사한 하나의 간증서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인생, 자기가 산 생을 아주 진솔하게 이렇게 간증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이 피셔 장관은 그 이력이 남다릅니다. 푸주간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삶의 밑바닥을 헤매는, 그리고 방랑하는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택시운전기사 일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35세 때에 연방 의회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헤센주 환경장관이 되면서부터 일약 정치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포츠를 즐겼고 181센티미터라고 하는 훤칠한 키에 75kg의 몸무게를 가진 아주 당당한 그러한 청년이었습니다만은 그가 정치 성공을 위하여 열심히 뛰는 가운데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마다 먹고 마시고 그렇게 했더랍니다. 이제 그 결과로 몸무게가 112kg가 나가는 그런 거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1996년에 마침 그의 아내는 별거를 선언하고 이혼을 하기까지 됩니다. 이유는 너무 뚱뚱하다는 겁니다. 이제 그는 그것을 계기로 해서 자신을 위한 중요한 계획을 세웁니다. '이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75kg으로. 방법은 달리기. 그리고 원칙은 과감한 결단, 끈기 있는 지속, 철저한 현실에서 출발하는 생활, 그리고 꾸준한 인내. 이렇게 해서 75kg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 몸 하나도 내가 조정하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간단한 말이지만 위대한 선언입니다. 다시 한 번 들어보세요.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인간이 무얼 하겠다는 거냐?
오늘 본문에 보면 인생을 한 경기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운동선수의 모습으로 사람을 비유해서 말합니다. 여기 몇 가지 운동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철학이 있습니다. 운동경기장에 나선 사람, 첫째는 향방을 정해야 합니다.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겁니다. Purpose. 목표는 Goal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겁니다. 여러분, 때때로 보면은 구체적인 목표는 있는데 추상적 목적이 없어요.
추상적 목적은 있는데 구체적인 목표가 없어요. 이 둘 다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목적은 언제나 추상적인 것이요. 높은 것이어야 합니다. 목표는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내 앞에 있는 현실이어야 합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동시에 목표가 분명해야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인천에서 15년 동안을 목회했습니다. 목회하면서 동시에 신학대학에 교수로 나가고 여러 대학에 강사로 나가고 그러면서 일주일에 4일을 서울로 출근을 했습니다. 출근하는 길은 지금같이 무슨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늘 기차로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뭐 새벽부터 밤까지 어지간히 바쁜 세월을 살았는데 그저 기차 안에서 그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책을 읽기 시작을 했어요. 그 기차 안에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서울역에 나가서 인천 가기 위하여 기차표를 사 가지고 기차를 타고,
전과같이 습관에 따라서 책을 펴 들고 아무리 시끄러워도 나는 집중적으로 책을 보고 있는데 한참 보다가 차창을 내다보니까 바깥 경치가 틀려요. 보던 경치가 아니더라구요. '아 이거 웬일인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제가 기차를 잘못 탔어요. 아 인천으로 가야 할 사람이 안양으로 가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날 따라 수요일 저녁입니다 이게. 이게 빨리 돌아가서 설교를 해야되겠는데 아이고, 안양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 버스가 얼마나 느린지 좌우간 간신간신히 예배 시간에 도착을 했어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제가 저녁 설교를 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이 경험과 함께 제가 중요한 진리를 하나 깨달았습니다. 아주 평범한 거예요. 아무리 바빠도 기차는 바로 타라. 바쁘다고 기차를 바꿔 타서야 되겠습니까? 목적을 분명히 하라 이 말이에요.
목적은 분명히 하라. 요새 우리는 가끔 보면은 노하우(Know-how)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노하우, 노하우, 노하우. 노하우는 있는데 노와이(Know-why)가 없어요. 이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여기 헛점이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서는 도사까지 된 거 같은데 기술자도 있고 지식인도 있는데 노와이가 없어요. 목적을 잃었어요. 여러분, 무슨 일을 하던지 D-day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간이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 마지막 종착을 생각해야지요. 최종 목적을 생각해야지요.
가끔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나 혹은 후배들 찾아와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지금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를 의논할 때가 많이 있어요. 저는 언제나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십년 후에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 있을 것 같으냐?
십년 후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그걸 정하고 오늘을 결정하라. 오늘 이 한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십년 후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냐? 그 때를 생각하고 오늘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좀더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에는 어떤 모양으로 죽을 것이냐?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Final goal, Ultimate concern, 마지막 문제 D-day의 문제, 그걸 잊어서는 안돼요. 그것부터 미리 생각해 놓고 거기에 따라서 오늘 하루하루를 결정해 나가야 한다 그말이요. 운동선수는 골인 장소를 먼저 생각합니다.
마지막 승부를 생각하고 그날을 위하여 오늘을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찌 그 현장에 나가서 뛰는 것만 있겠습니까? 그 일생 전부가 마지막 하나의 그 순간을 위하여 거기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의미의 문제입니다. 허공을 친다. 현재 철학의 가장 무서운 과제가 Nihilism 입니다. 허무라고 하는 겁니다.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거죠. 무슨 일을 해도 그것에 담긴 아주 무거운, 확실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의미 창조에 구멍이 났어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요새 젊은이들을 상대로 해서 전문 연구 기관에서 한번 통계를 내 보았답니다. "결혼은 꼭 해야되느냐?" 하고 물었더니요 통계가요 '17%만이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대요. 40%이상이 '그거 꼭 해야할 이유가 없다' 그런답니다.
물론 자기 마음대로 하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50, 60이 되면은 땅을 치며 후회할 것입니다. 지금 편리한 생활 이거 하나 때문에 미래를 잃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에요.
전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종종 외어봅니다. 너무 좋은 기도문이기 때문에요. 영어로 읽어 나가다 보면 맨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헛된 생을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내용이 뭐냐. 나에게 이런 아들을 주시옵소서. 내 아들이 이렇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쭉 말하고 나서 끝에 가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헛된 생을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삐꺽 하면은 인생은 완전히 헛된 생이 돼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남는 게 뭐겠습니까? 뭘 남긴다는 겁니까? 무엇으로 이어지는 것입니까? 순간의 일만 생각하고 의미없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그 군상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란 말입니다.
목회상담학자인 하워드 클라인벨이라고 하는 분이 쓴 Well Being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Empowering your mind 라고 하는 그런 부분에서 "사람의 마음에 힘을 주는 일이라는 게 어디서 오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라고 하는 자기 존재 의식, 다시 말해서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의미있게 태어난 것이요. 내가 알건 모르건 간에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내게 꼭 어떤 의미를 담아서 나로 세상에 존재하게 했다. 그런고로 나는 소중하다. 자기 자존감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내가 기술과 지식을 습득해야한다. 즉 능력을 얻어야한다. 능력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런고로 능력을 얻어서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된다. 셋째는 스스로를 이끄는 내적인 힘이 있어야한다. 자신감이 있어야되요.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나를 믿어줍니까? 내가 나를 못 믿는 주제에 누구를 믿어라 할 것입니까? 자신이 자기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라"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미가 없는 일처럼 피곤한 일은 없습니다. 의미창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문제올시다.
또 한가지는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보면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길게 설명했지마는 한 단어입니다. 둘라고고 그랬습니다. '둘로스' 라는 말은 '노예' 라는 말이고 '아고르' 라는 말은 '인도한다' 는 뜻입니다.
노예를 인도한다. 의역을 하면은 '노예를 길들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내 몸을, 내 몸을 길들여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이 몸을 내 마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못해요.
가장 가까운 내 몸을 내 맘대로 못한 이것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운동선수라는 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자기 몸을 강하게 훈련해서 길들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거는 Self-discipline 입니다. 자기를 훈련시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버리는 훈련이 있어야지요. 욕심을 버리고 시기를 버리고 헛된 생각을 버리고 게으름을 버리고, 버려야할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그 용기가 있어야 되요. 그 훈련.
또 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과 진실, 좋은 습관을 길들여가야 합니다. 몸을 길들여야 됩니다. 우리 가운데는 새벽기도에 나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는 '나도 새벽기도에 나오고 싶다' 하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야기인 즉은 몇 일 나와 봤더니 하루종일 정신이 없더랍니다. 졸려 가지고. 그래 나보고 묻기를 "아이고 목사님은 그렇게 한 평생하고 어떻게 삽니까?" "나 살아있지 않소. 당신보다 내가 건강한데." 여러분 생각에는 일찍 일어나면은 약해질 거 같죠. 나하고 내기합시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건강하게 돼있는 게 사람이에요. 자 그런데 이거 하나를 못하는 거예요. 빠지지 않고 3년을 해야 되는 거예요. 3년은 해야 몸이 길들여지는 거예요. 바이오 리듬이에요.
몸은 하나의 리듬을 타는데 리듬이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면은 무려 3년이 걸린다는 이 말이에요. 그것뿐입니까? 모든 일이 시간이 걸리죠. 내 몸,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데 요만한 거 하나도 3년이 걸리는데요 그걸 하루아침의 결심으로 해결하려 그래요?
그렇지를 않아요. 더구나 우리 마음, 내 진실한 마음, 내 겸손한 마음, 내가 바라는 바람직한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데 이거 하나 훈련하는데 이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까?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성경에는 절제한다 했어요. 절제! 이 절제가 뭡니까? Self-control,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거예요. 절제가 없는 운동선수는 바랄 것이 없어요. 오랜 전 얘기입니다만은 실례가 되어서 제가 이름을 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권투 선수인데 세계타이틀에 도전해서, 거 여러 번 여러 번 애써가지고 세계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1차 방어전을 일본에서 하게되는데 일본 가서, 아니 그래 방어전을 몇 번 해야지 한 번 타이틀 얻어 가지고 그 다음에 1차 방어전에서 그대로 KO 가 됐어요. 그 신문에 해설 난 것을 보고 제가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패했느냐구요? 그래 일본 가서 권투 시합하기 전 날 술 마셨대요. 이 사람이 선수가 되겠느냐 이거예요. 뭘 더 기다려야 되요. 그거 하나 이기지 못하는데. 절제가 없는 사람, 아무 일도 바랄 게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긴 훈련 끝에 다스릴 수 있어야 돼요.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보면 법대로 경기하지 못하면 상을 얻지 못한다. 법대로 경기하는 것도 훈련이요. 긴 시간 훈련을 해야 법을 지키게 되어있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게 지켜지나요? 아무리 거기다가 무서운 형벌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거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법 지키는 준법도 오랜 기간 훈련을 해야된다 그 말이에요.
특별히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Time Managing 입니다. 시간을 조절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운동선수에게서는 시간이 금입니다. 생명입니다. 자, 이제 2시간동안 뛰어야하는데 요 2시간동안 힘을 안배해야 합니다.
그냥 마구 뛰다가 중간에 쓰러지면 안되니까요. 또 마지막에 힘이 남아도 안되고요. 시간조정을 잘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자산입니다. 우리는 요만큼의 시간밖에 없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간혹 외국에 다니다 보면은 우리 한국에서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있지만은 어떤 학생은 좀 빈둥거려요. 그래 제가 좀 마음이 아파요. 이 얼마나 귀한 돈을 가지고 얼마나 귀한 기회에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그래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느냐구요. 이건 안되는 거죠. 큰 죄죠. 죄송하지만 제가 한 5년 유학을 했는데, 전 여름방학을 방학으로 지내본 일이 없어요. 지금도 옛날에 알던 분들 만나면 "당신은 참 미련한 사람이요. 그래 여름방학 한 번도 놀지않고 밤낮 기숙사에 있더니 오늘의 곽목사가 됐다" 고 그러더라구요.
글쎄올시다. 어떻게 놀 수가 있습니까? 아, 미국 사람은 놀아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미국 가서 놀 수가 있냐구요. 이게 얼마나 금같은 시간인데. 일생에 딱 한 번 주어지는 기회인데 말이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한 거예요. 요것밖에 없어요.
이걸 우리가 어떻게 Manage 하느냐가 참 중요한 것이죠. 요새는 그것을 '시테크' 라고 그러죠. Time Technology, 시간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사용하느냐가 이게 인생의 운명,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 버림이 된다는 말은 실격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지도자란 누구를 지도한다는 사람이 아니에요. 누구를 인도하겠다고 떠드는 사람이 아니에요.
문제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이에요. 그에게 감동을 받아서 모든 사람이 그 뒤에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지도자예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고 남을 구원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남을 인도한다고 가르친다 뭘한다 뭘한다 해 놓고 나는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 사도바울의 간증입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의 간증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리하고 남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경기자의 모습을 보세요. 그 중에 내가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지금 뛰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어디까지 왔습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귀한 시간 주시고, 주의 전으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경기를 돌아봅니다.
그리 착실한 사람으로 살지 못했습니다마는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 주시사 우리의 남은 시간은 충실한 경기자로 목적을 향하여 바르게 전진하면서 나 자신을 구원하고 내 인격을 구원하고 내 성품을 구원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 구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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