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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고린도서 설교 모음

고린도전서 4장 14절 이하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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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강해 ⑪ 아버지 같은 사람 /고전4:14-21 

2019-04-26 22:02:48 

 

1. 아버지 

 

최근 終映된 모 방송사의 <추적자 THE CHASER(극본 박경수/연출 조남국)>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교통사고로 죽은 딸의 죽음 배후에 어떤 흑막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밝혀가는 형사인 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딸의 교통사고는 어느 고위층 인사의 婦人이 부정을 저지르던 중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 진실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여자의 남편, 즉 재벌의 사위로서 곧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 사람의 욕망, 부조리한 현실, 거미줄 같이 얽히고설킨 경제와 정치, 권력이 된 자본, 권력이 된 언론 등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이 드라마가 ‘근래에 보기 드문 秀作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드라마의 원래 제목은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사고로 잃은 아버지가 그 딸의 억울함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그것이 젊음을 지향하는 방송사의 지침과 맞지 않아 <추적자>로 바꾸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 드라마는 딸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한 아버지의 死鬪를 그린 것으로, 우리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만든 드마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사전적으로 ‘자신에게 혈통을 직접 이어 준 남자’ 부르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처음 시작했거나 가장 발전시킨 사람’에게 “음악의 아버지 바흐” 라는 식으로 ‘~의 아버지’라는 呼稱을 붙이기도 하지만, 여성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잉태시킨 남성을 그 자손의 관점에서 부르는 호칭이지요. 

 

오늘 제가 “아버지”란 주제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아버지”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 하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 이것 저것 살피기 전에 사실 이 15절 말씀은 정말 대단합니다. 

 

“나는 너희 아버지다!” ‘내가 애비다!’ 무슨 삼류 드라마 대사 같은 이 한 마디는 사실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이 지천에 널려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오늘 이 말씀은 목회자인 저를 정말 부끄럽게 만들고 또 죄송스럽게 만드는 말씀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설사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제가 여러분에게 아버지처럼 사역하고는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오늘 본문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아버지”라는 주제를 다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방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복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8). 

 

사도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는 정반대라는 것과, 또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이 模範으로 보여준 삶과도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사도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인생의 막장, 제일 끄트머리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구경거리였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인하여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며, 죽도록 일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등, 자신들을 괴롭히는 세상을 도리어 축복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의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길이요, 사도의 길이자, 성도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 길을 거절하고 넓고 좋은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처럼 살아라’, ‘인생의 끄트머리로, 낯 뜨거운 구경거리처럼, 만물의 찌꺼기처럼 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런 삶을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의 모델로 삼을 수 있습니까? 만약 성령 충만하고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바울처럼 사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이런 삶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고린도 성도들은 “아니요”하고 거절하고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고린도 성도들의 삶은 복음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삶과는 너무나 다르게 살려고 한 것이죠. 예수님은 ‘종이 주인이 받은 대접을 넘어설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아니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사신 예수님과 그 뒤를 따른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을 믿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삽니다. 그러니 

 

여러분, 복음이 얼마나 왜곡되었습니까? 어쩌다가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셨고, 사도들이 뒤 따른 그 복음은 어디로 가고, 세상에서 힘과 능력과 영광을 얻는 복음으로 바뀌어버렸을까요?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망한 바울은 자신의 행동이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4, 15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음이라.” 즉 아버지이기 때문에 심한 책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요? 

 

① 첫째로 아버지는 자식을 낳은 자입니다. 조금 전 사전적인 정의를 설명해 드린 대로, 아버지는 ‘자녀를 낳은 남자를 그 자녀가 부르는 호칭’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 성도들과 자신의 관계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은 어떻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그들을 낳은 아버지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성들은 충분히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뿐 아니라 갈라디아서에서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라고 했습니다. 

 

그가 “낳는다”, “해산한다”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이 고린도나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한 일이 무척 힘들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탄과 죄에 사로잡힌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일이 아기를 낳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육신을 입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가 영적으로도 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시죠?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고전2:6~16). 따라서 전도란 육에 속한 사람을 영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으로, 성경은 그것을 ‘영적인 생산’, 즉 ‘아기를 낳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에서부터 예고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1:2)”로 오직 육신적인 생산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족보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육신적인 계승이 사라진 이유는 그것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계승이라는 것이죠. 즉 육신적인 낳고 낳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낳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상명령이자 최후 명령으로서 복음 전하는 일, 영혼 구원하는 일을 명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서 1장 10절에 보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추천할 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육신의 자녀를 낳는 것도 그렇게 많은 고통이 따른다면, 평생 사탄과 죄에 사로잡힌 사람을 영적으로 살리는 일은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통이 따르겠습니까? 옛날, 아기를 낳으러 산실에 들어간 며느리의 진통이 심하면, 시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면서 “효자 하나 나오겠구먼”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해산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모자간의 정이 깊어진다는 뜻이지요. 

 

스웨덴의 한 연구소는 산고를 겪고 낳은 아이들과 무통 분만한 아이들을 비교해 보았더니 모자간의 정과 그 질이 다르더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진통이 심할수록 모자간에 서로에게 끌리게 하는 사랑의 원천이 되는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産母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출생하듯, 한 사람이 구원받아 성도가 되는 일 역시 눈물, 땀,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 그 이상이 든다는 것을 알았기에 바울은 “아버지”라는 표현이나 “낳는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성도들의 아버지라고 말함으로서 그들은 세상적인 법칙이나 인간의 법칙이 아닌 영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수고한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영적으로 낳은 사람, 여러분으로 인하여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오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서 ‘저 분은 내 영적인 아버지다, 저 분은 내 영적인 어머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좋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입니까? 

 

②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버지는 인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송길원 목사의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 가운데는 “코치(coach)”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란 자녀들의 삶에 코치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뜻이죠. ‘코치’는 스포츠뿐 아니라, 비즈니스,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존경받는 모델입니다. 

 

무슨 경영자 모임이나 리더십 세미나에서의 단골 메뉴는 ‘코치를 두거나 다른 이의 코치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일을 멘토처럼 도와주고, 궁극적으로 목표를 이루도록 돕는 코치를 두는 것이 인생의 복 중의 하나라는 것이죠. 이 코치는 감독과는 조금 다릅니다. 감독은 주로 전체 그림을 보면서 작전 지시를 하지만, 코치는 선수들과 함께 뜁니다. 

 

같이 뒹굴고, 같이 땀 흘리고, 어떤 때는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 또 희생을 치루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 혹 어머니는 자녀들의 코치가 되어야 한다고 송길원 목사는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뿐 아니라, 교회에서 믿음의 다음 세대들에게 코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합니다(15). 여기에 나오는 “스승”은 사실 우리가 흔히 쓰는 ‘선생님’, 혹 ‘교사’가 아닙니다. 

 

이 말은 원래 성경 시대에는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똑똑한 노예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그 흔적이 영어에 남아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외국에 사는 교포들이 많이 쓰는 용어이자, 자녀를 유학 보내 본 사람들에게는 다소 익숙한 단어인 “가디언(Guardian, NIV)”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가디언은 ‘보호자, 관리자, 보관자, 후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스승”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단순하게 지식만 전하는 스승이 아닌 후견인을 자처하는 그런 스승이 많지만, 성도는 그런 스승보다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분을 만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은 한시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평생의 길을 제시하고, 평생 살 것을 본으로 보여주고, 평생을 보장해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물학적인 아버지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인격과 삶을 인도해줄 영적인 아버지를 갖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일까요? 

 

『잘되는 자녀는 아버지가 다르다』는 책이 있습니다(존 킹 지음, 아가페). 이 책에서 저자는 “아버지는 코치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코치 역할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함께 걷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라고 말만 하는 사람 … 옆에서 조언만 해주는 코치라면 자녀에게 필요가 없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삶이라는 경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사람이다. 그가 … 아버지다. … ” 코치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선수를 떠납니다만, 아버지는 절대로 떠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코치는 실력에 따라 선수를 선택하지만, 아버지는 실력과 상관없이 자녀를 사랑합니다. 코치의 목표는 시즌이지만, 아버지의 목표는 자녀의 평생입니다. 코치는 경기장 옆에서 고함을 지르지만, 아버지는 라커룸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안고 업고 뛰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는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는 사람보다, ‘자 이렇게 해 봅시다. 제가 먼저 할테니 같이 하시지 않을래요? 당신이 힘들면 제가 대신 할테니 곁에 있어 주기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 그리고 먼저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좋은 교회입니다. 

 

③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버지는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사역 <하이패밀리> 운영하고 계신 송길원 목사님은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3C’ 라는 것으로 답을 했습니다. 그 3 “C” 중 하나가 “동반자, companion”입니다. 

 

즉 아버지, 그리고 부모는 자녀들의 인생의 동반자여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동반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곁에서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상관은 지시하고 평가하고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동반자는 같이 의논하고 협력하며 도웁니다. 상관은 사람을 무시하지만, 동반자는 무시하지 않습니다. 서로 존중함으로 공동의 승리를 얻습니다.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딕 호이트’, 1940년에 태어나 학창시절 미식축구와 야구 선수로 활약했고, 공군 중령으로 퇴역했습니다. 

 

한 아들이 있습니다. 이름은 ‘릭 호이트’입니다. 

 

1962년에 태어났지만, 탯줄이 목에 감겨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의사들은 릭이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수 밖에 없을 거라 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라’고 권했지요. 그러나 여느 부모가 그렇듯 아버지는 자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들이 처음으로 간단한 의사 표현을 하게 되었을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했던 한 마디는 “RUN, 달리고 싶어요”였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들과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는데, 처음으로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가장 늦게 결승선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기가 끝난 후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달리면서 난생 처음으로 제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말은 들은 아버지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일 처음 출전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기권을 했지만, 그 다음 대회에서는 완주에 성공했고, 그렇게 마라톤을 시작한지 4년 만에 두 부자는 <철인3종경기>에 도전합니다. 아버지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고, 6살 이후 자전거를 탄 적이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도전했습니다. 

 

아들을 실은 고무보트를 허리에 묶고 3.9km의 바다를 헤엄쳤고, 아들을 태운 자전거로 180.2km를 달렸으며, 혼자서도 뛰기 힘든 42.195km를 휠체어를 밀면서 뛰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의 도전은 계속되어 마라톤 풀코스를 64차례, 철인 3종 경기 6차례, 단축 철인 3종 경기 206차례, 보스턴 마라톤 대회 26차례, 그리고 마침내 달리기와 자전거로 6,000km에 달하는 미국대륙 횡단을 이뤄냈습니다. 

 

현재 아버지의 나이는 72세, 아들의 나이는 50세입니다. 그들은 더 큰 도전을 위해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해낸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일 뿐입니다.” 아들은 말합니다. “아버지는 단지 내 팔과 다리 역할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내 영감의 원천이고, 내가 인생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들 父子가 보여주는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아버지는 어떤 존재입니까?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 부부와 함께 거니셨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리고 언약궤로 ‘동행’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름 “임마누엘”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함께 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되십시오. 교회 안에 아버지 같은 사람, 어머니 같은 사람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좋은 교회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그렇게 만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아버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 있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우리를 향해 자신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아주 모범적이고 탁월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철저히 예수님의 길로, 복음의 길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면 아마 그는 자신 있게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 만 있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교역자들과 함께 <통성경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세미나 시작에 강사 조병호 목사는 고대로부터 시작되어 여전히 인류를 주장하고 하고 있는 4 가지 운동으로 “농경화”,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 말하면서, 자신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지만 여러 신학자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 특히 이 4가지 분야의 전문가들과는 대화가 안 될 정도로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자신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신감은 바로 성경 말씀에 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분야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경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성경의 전문가라는 것 때문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오대양육대주를 향해서도 당당한 자신감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자신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신감, 그리고 오직 주의 말씀만이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 우리는 교회 안의 어른 노릇 부모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조금 더 살았고, 경험이 좀 더 많기 때문에 ‘선배’, 혹 ‘스승’이라고 자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너도 나도 선배요 스승이라고 우기는 시대에 “부모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으로 영혼을 낳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오직 말씀대로 살아 다른 이들의 삶의 모델이 되는 사람,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과 신앙의 지침서가 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저와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 어머니 같은 사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고린도전서-14] 본받음의 선순환 /고전4:14-21 

2018-07-12 01:24:19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가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 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하지요’ 라고 했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한 달씩이나 또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습니다. 

 

‘얘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먹지 않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간단한 말씀 한 마디 하시는 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보고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 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 사람들이 간디의 이름 앞에 마하트마 ‘성인’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육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것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어렵지만 가르친 것을 삶으로 본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설교입니다. 학교와 달리 교회는 나이, 학벌, 경제, 직업 등이 너무 다양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몇 년이 지나면 학생들은 졸업을 해서 다 바뀝니다. 교회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목회자와 교인들은 수십 년을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제가 일 년에 공식적으로 설교하는 횟수를 세어보니 약 350회 이상을 합니다. 설교 내용이야 어떻든지 그 만큼 설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그만큼 설교하기도 어려운데 더 어려운 것은 성도들이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항상 새롭고, 신선한 내용을 듣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10년 이상 목회를 하면 사실 목사는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을 말할 것도 없고, 성도는 더 새로운 것을 들을 것도 없습니다. 기회가 되어 다른 교회에서 새로운 말씀을 듣고 좋아해도 그 교회에 10년 이상을 다니면 그 분의 말씀도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목사에게 설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목사답게 사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주목해서 봅니다. 성도들이 봅니다. 지역 주민들이 봅니다. 목사의 외모도 보지만 그들은 목사의 삶을 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용납되는 것이 목사이기에 용납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목사답게 살지 못하면 바로 비난과 비판이 일어납니다. 

 

목사의 삶은 목사 한 사람의 삶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아내를 봅니다. 목사의 자녀들을 봅니다. 목사의 부모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와 목사의 가정은 투명한 유리병에 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목해서 보는 가운데 목사답게 산다는 것은 설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목사는 말이면 말, 행동이면 행동, 자녀면 자녀, 아내면 아내, 부모면 부모, 습관이면 습관 모든 것이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저처럼 부족함이 많고, 실수가 많고, 다혈질인 사람은 목회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러 모양에서 목사답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이만큼이라도 목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 여러분들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들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읽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지금도 바울의 이와 같은 모습이 부럽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라면 그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설교는 다른 사람을 향한 설교가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을 위해서 하는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허물과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성도 여러분들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의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데 조금 더 철이 들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숙해져서 부분적으로 나마 성도 여러분들을 향해 ‘나의 이런 모습을 본받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교회 안에 믿음의 본 된 일꾼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에 처음 등록한 성도나, 일반 성도들이 ‘나도 저 분처럼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반면에 ‘야, 저렇게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 않는게 낫겠다’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교회는 항상 아픔이 있고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자녀 앞에서 싸우면서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실수였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부모를 둔 자녀가 가정에 대한 자긍심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부부가 서로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택이었다’라고 말하는 부모를 둔 자녀가 가정에 대한 자긍심과 소중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앞장서서 일하는 직분자들의 생각과 언행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히 항존직분자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의 믿음 생활을 지도해 나가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직분을 주심은 교회와 목회에 힘이 되고, 성도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섬김과 교회의 재정을 뒷받침하는 헌금 생활까지도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헌법에 보면 교회가 장로 한 사람을 세우는데 세례 교인 30명당 한 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장로 한 사람을 세울 때 그 기준이 세례 교인 30명에 한 명을 세운다는 것은 장로는 최소한 세례 교인 30명 이상을 돌보며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수집사와 권사는 그러한 인원수의 기준은 없지만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돕는 일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 직분자들은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또 다른 목회자가 되고,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삶이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을 바울이 본받았습니다. 바울을 보면 그를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바울을 제자인 디모데가 본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본받음의 이어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 디모데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디모데를 보면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 가르쳤던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디모데를 보면 나를 보게 될 것이고 결국은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바울로, 바울에게서 디모데로 이어지는 본받음의 고리입니다. 이 선한 본받음의 고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랑이고,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순환의 고리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저에게서부터 시작되는 은혜의 세계가 우리 자녀들에게로 이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님에게서 바울로, 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로 이어지는 영적인 계보의 모습을 또한 봅니다. 

 

육으로 낳은 자녀만이 아니라 영으로 낳은 자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바울과 디모데처럼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룩하게 쓰임 받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훗날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00’라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고전4:14-21/ 김광일목사 

2017-05-10 02:32:21 

 

1889년 역사에 남을 만한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사교 생활에 흥미를 느껴 나다니기만 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아이를 알코올 중독자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났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독일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 음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정치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출옥의 혜택을 받았으나 더욱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고, 마침내 1933년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이며, 그로 인해 독일과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다른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부모는 농촌생활이 아이의 신앙교육에 유익하리라 생각하고 캔자스 농촌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 교회의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아이는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두 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였습니다. 군대에 흥미를 느끼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이며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하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44년 동갑내기 두 사람은 전투에서 대면하였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패전한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 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는 갈채를 보냈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히틀러보다 25년을 더 살았고,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으며, 그의 죽음을 전 세계가 애석해 했습니다. 동갑내기 이들의 삶은 부모의 가르침이 자녀에게 미친 영향의 얼마나 큰 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하며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믿는 자들이 생기고 고린도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정성을 다하여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 있는 동안 고린도 교회에 시기와 갈등으로 분쟁이 가득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권면을 하였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충고할 때마다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잘못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은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라면,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그 잘못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려는 자들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권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권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복음으로 권하라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가 열 세 살 때에 혈우병을 앓아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중 수혈이 잘못되어 후천성 면역 결핍증 에이즈(AIDS)에 걸려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나 형제도 의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해졌을 때 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라이언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병문안을 했습니다. 대통령 레이건도 친히 방문했고, 가수 마이클 잭슨도 소년을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 

 

소년은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어 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그러자 아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빠가 주신 선물을 준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아빠는 저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고, 예수를 믿게 해 주었고, 그의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선물은 다시 없을거에요.” 아버지는 복음으로 아들에게 권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서 ‘스승’은 후견인 혹은 가정교사를 가리키는데, 당시 노예들이 이런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을 지도하기는 했으나 장래를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스승과 비교하여, 자신을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산고를 겪으며 낳은 복음의 자식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자신을 말씀의 지식만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해산의 고통을 통해 영혼을 낳은 아버지로 비유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거듭나게 하여야 합니다. 머리로만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숙해 가도록 복음으로 권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해산의 고통과 더불어 양육을 위한 수고가 요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들의 사명은 영혼을 복음으로 권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본이 되어 권하라 

 

폴 워커(Paul L. Walker) 목사는 구원의 경험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제가 자라는 동안 교회학교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오직 한 분이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해병대 출신으로 몸집이 크고 얼굴이 붉었는데, 좋은 교수 방법이나 규칙은 하나도 따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을 매우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면서 큰 팔로 우리들을 끌어안고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의 본을 닮다 보니 무려 일곱 명이, 그 반 전체가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폴 워커 목사의 스승은 단순히 가르치는데 그치는 스승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는 본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여기의 ‘나를 본받는 자기 되라’는 권면은 복음의 자식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의미는 부질없는 사소한 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말고 오직 복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기를 힘써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리고, 헐벗고 매 맞으면서도 온갖 핍박과 고통을 참으면서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권위로 사도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을 통해 사도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수고를 다해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바울은 계속해서 본을 보이며 살겠다는 다짐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도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완벽한 교육입니다. 

 

배우는 자들은 본 대로 따라 합니다. 혼탁한 시대에 바울 같은 힘 있고 강력한 권고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의 언행이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권하라 

 

히틀러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고 앞장섰던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히틀러의 전쟁과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단호하게 비판하고 저항하였습니다. “만약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대로로 간다면 자기는 목사로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 

 

즉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나치정권 전복을 계획하며 히틀러를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런 연유로 감옥에 끌려가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회퍼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평생 히틀러를 비판만 했지, 그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본회퍼는 자신의 사랑 없는 항쟁운동을 깊이 회개하였다고 그의 일기를 통하여 고백하였습니다. 삶의 현실에서 우리도 과연 사랑으로 풀어가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인권운동의 선구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은 ‘사랑 없는 권력은 무모할 뿐이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이는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안타깝게 여기고 타이르는 모습입니다. 이는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성도들을 절절이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깊으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타이르고 매를 쳐서 꾸짖습니다. 그러나 꾸짖는 것이 벌이 목적이라면 아들이 아니라 종입니다. 온전케 하려는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의 동기로 인한 가르침이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모두 다 해주는 사랑은 삶을 망치고 말 것이지만 사랑으로 고치려할 때 그들을 파멸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이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권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성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부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헬렌 켈러(Helen A. Keller)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통에 시달렸습니다. 7살이 되던 1887년 3월 3일, 앤 설리반(Anne Sullivan) 교사를 만나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헬렌 켈러가 설리반을 만나기 전까지 짐승처럼 난폭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내하며 가르쳐 주던 설리반에 의해 삼중고를 이기고 빅토리아여왕으로부터 훈장까지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가르쳤던 설리반 역시 불행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고, 안질이 심해 맹인이 되었다가 개안수술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보스톤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간호사의 사랑으로 치료를 받던 그녀는 바아바라 목사를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불행한 이웃을 위해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자원하여 헬렌 켈러를 48년간 돌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는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좋은 교사는 머리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교사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들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긍휼로 그들을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머물러야 하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더 희생하고, 더 섬기게 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으로 권하며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본을 보이며 권하여 가르치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권하며 가르쳐 진정한 제자를 만들어가는 복된 교사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어버이와 그 자녀 /고전4:14-17/ 곽선희 목사 

2014-11-24 23:12:33 

 

얼마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라고 하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잇이 열 세 살 때에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수술에서 수혈이 잘못되어서 이 소년이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고 하는 AIDS 라고 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이 병원에서 잘못한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대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가정도 특별히 의사선생님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기쁘게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 미국에 전해지게 될 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유명인사들이 앞을 다투어서 이 어린아이를 찾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병문안을 드렸습니다.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레이건도 친히 이 어린 소년을 찾아 방문했고요 또 당시의 유명한 팝 가수인 마이클 잭슨까지도 이 어린 소년을 방문해서 위로했습니다. 

 

결국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이 소년은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욱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 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니올시다. 전 지금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아무도 아빠가 제게 준 선물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내게 천국 열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고, 교회에 나아가 예수를 믿게 해 주었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선물은 다시 없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어겠습니까? 윌리암 F. 오그번(Willian F. Ogburn)이라고 하는 교수님의 Recent Social Trends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가정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 가정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가정의 기능이 뭡니까? 먼저는 경제적 기능입니다. 다 같이 먹고살아야 겠으니까요. 또 하나는 교육적 기능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지 않습니까. 또 종교적 기능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가치관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고, 경건한 생활을 배웁니다. 

 

또 하나는 오락적 기능입니다. 가정에서 우리 오락을 얻어야 합니다,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즐거움을 찾아야 됩니다. 이게 오락적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그만 상실되어가고 있다, 라고 아주 면밀하게 비판 분석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경제적 기능, 이 생산적 능력을 공장과 사무실로 빼앗겼다는 것이죠. 이 경제적 기능이라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자, 농사를 짓습니다. 같이 이 농사를 짓고, 보세요. 남편이 땅을 파고 부인이 씨를 뿌립니다. 전 이런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파고 어머니는 서서 씨를 탁 뿌립니다. 그 장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이게 생산적 기능입니다. 자, 베를 짭니다, 실을 뽑습니다, 아 이거 다 아버지가 도와주어야지요. 부인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농사와 길쌈과 모든 생산적, 그 아이들까지 거들어야돼요. 저도 가을만 되면 참 그 일을 같이 나가서 해야되고, 아무리 어린아이지만은, 예?. 또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짜야되거든요. 가마니 짜 보신 분들은 압니다만은 그 기계로 짜는 것도 있지만 손으로 짜는 것은요 한 사람이 자를 대고 하구요 한사람은 내렸다 올렸다 하구요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싸울 일도 없고요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산, 그 과정 속에 가정이라고 하는 유대가 점점 깊어지거든요. 하나되어 가는데 이걸 그만 공장과 사무실로 빼앗겨버렸어요. 그 쪽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가정은 완전히 소비 기관이야. 생산기능은 없고 오로지 소비. '어떻게 쓸까? 어떻게 하면 더 쓸까? 남편의 것을 얼마나 빼앗아 쓸 수 있을까? 아내가 감추어 놓은 것을 내가 어떻게 빼앗을까?' 이 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되겠습니까? 아이들은 '어떻게 용돈을 더 받을까?' 

 

생산적 기능, 그것을 공장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소비만, 오로지 가정은 소비기관으로 되어버렸다. 이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또 하나는 교육기능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뭐, 음식 만드는 것이나 농사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가정으로부터 배웠으나 지금은 학교에서 배웁니다. 교육은 학반에서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거기에다가 위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종교 문제, 이거 더더욱 중요합니다. 

 

이건 완전히 가정에서 배워야 할 것인데 이것도 교회에다 맡겨버렸어요. "교회에 가라" 그리고 끝입니다. 여기서 가정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또 하나는 오락기능입니다. 가정에서 즐겁고 행복한 모든 행복의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요. 

 

가정이 가장 행복한 오락기능을 발휘해야 되는데 이것도 극장과 운동장과 텔레비전과 컴퓨터에게 다 빼앗겼어요. 도대체 이렇게 되고 보니까 가정이 필요가 없어요. 일찍 들어와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재미는 다 밖에서 보고 사니까요. 자, 이것이 가정을 파괴했고 가정이 또 인간을 파괴했고 또 인간성을 파괴해서 이 세상은 불행해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학자의 이론,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가정에서 키워집니다.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에서 성숙합니다. 가정에서 인간이 됩니다. 가정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다 가정에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남는 보람도 가정에 있는 거예요. 

 

나는 그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가끔 외워봅니다. 그거 영어로 외워보면 맨 마지막 말에 참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오. 내 아들이 이러이러한 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고 맨 끝에 기도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그는 장군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큰 일을 많이 했지만은 생각하고 보니 별 일이 아니에요. 그 얼마든지 나 아닌 사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별 일이 아니더라구요. 마지막 남는 보람은 가정밖에 없어요. 

 

'내 아들이 훌륭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때 그리하여 내가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가정에 마지막 보람이 있는 것이에요. 

 

자, 육체적으로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납니다.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말씀과 성령,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랍니다. 인간이 됩니다. 오늘 성경에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내가 너를 낳았음이니라... 복음 안에서 내가 너희를 낳았다. 여기에 '에겟네싸'라고 하는 이 헬라어의 원 뜻은 'Get now'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출생'이라는 말입니다. 이 출생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어요. 우리말은 어머니가 낳는 것도 낳는 거요, 아버지가 낳는 것도 낳는 겁니다. 

 

"내가 낳았다" 이렇게 말하게 되겠습니다만은 영어는 안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낳는 것은 'born'입니다. 아버지가 낳는 것은 'beget'입니다. 'beget!' 그래 오늘 말씀은 beget입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 

 

어머니가 낳는 것 같은 그런 출생이 아니고, 생산적 의미가 있는가 하면 생명적 기원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네게 생명을 물려주노라" 그런 뜻이올시다. "그런 고로 너는 나를 본받으라.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되라. 그 부모의 그 자녀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본받을 만한 부모가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받을 만한 부모가 되었느냐 이것이 문제올시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데이비드 스튜어드라고 하는 분이 Parents as Teachers 라고 하는 논문에서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가르침으로써가 아니라 부모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모화, 부모화, parenting, parent가 아니고 parenting 동사로 썼습니다. 그 특별한 용어를 만들었어요. Parenting! 부모화 함으로써 자녀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가르치려고 하는 별도 노력이 필요없다. 부모만 제대로 되라 이거예요. 

 

부모만 되면 자녀는 되는 거예요. 그 부모 그 자녀예요. 예외 없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면 참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일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 하나가 히틀러가 육백만의 유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6.25전쟁을 치루었지만은 피난민까지 포함해서 백 오십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전쟁 중에 서로 쏘고 죽이고 이런 것이지만은 아, 조용하게 사는 유대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끌어다가 죽였어요. 육백만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숫자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보세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를 해서 늘 집을 비웠어요. 그리고 물건을 다 팔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요. 

 

일주일도 그만, 한 달도 그만. 돌아다니다가 가끔가끔 집에 돌아왔어요. 집을 지키고 있는 그 부인은, 히틀러의 어머니는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서 그만 부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많고 타락한 유대사람, 돈 많은 유대사람, 권세가 있는 유대사람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들이 압니다. 아들이 눈물로 말렸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나 이 어머니는 이 생활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 장사하는 동안에 어머니는 집에서 돈 많은 유대사람하고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대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습니다. 결국은 히틀러가 권세를 잡는 날 유대사람을 죽입니다. 육백만을 죽였어요. 이 얼마나 무서운 사건입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는 충격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만은 제가 결혼 주례를 무려 40년 동안 했거든요. 하면서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옛날에는 신랑은 크고 신부는 작았어요. 아 이거 으례히 그랬어요. 

 

그거 조금 키가 큰 신부는 아예 낮은 신을 신고 오고, 뿐만 아니라 결혼식 할 때도 꾸부정하고 있어요. 작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는데 요새는 뭐 신부가 크고 신랑이 작은데 그래도 또 힐을 신었어요 보니까. 뭐 거침없이. 신랑이 작고 신부가 큰 게 많아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연상의 여인이 많아요. 내가 딱 보면 이건 연상이다. 이건 5년이다 이건 10년이다, 내가 보면 알아요. 연상의 여자가 많아요. 그것도 또 당당해요, 가만히 보면. 그 잠깐 여기서 결혼식 하는 그 동안에도요 남자가 여자 앞에서 꼼짝을 못해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냐구요? 무려 24%가 연상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이들을 엄마가 너무 잔소리를 많이 했어요. 다 챙겨주었어요.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얘들이 컸어요, 남자가 컸는데 그 때는 싫었어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렇게 싫었지만은 이제는 이게 체질화되었어요. 그 잔소리가 없으면 잠이 오질 않아요. 그 간섭이 아니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그래서 연상을 찾아가는 거예요. 엄마 찾아가는 거라고 저게.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렇게 간섭받는 일에 길들여졌다니까요. 

 

이건 알게 모르게 그렇게 배운 거예요 지금. 그런 인간이 되어버린 거예요. 마마보이를 만든 게 바로 엄마라는 것을 생각 못하세요? 그리고 결혼해 가지고 살면서도 여전히 마마보이예요. 조금 언짢으면 엄마한테 전화걸어서 "엄마, 나 지금 매맞았어" 

 

그런 답니다. 어쩌다 이 모양을 만들었냐 이거예요. 이게 다 어머니가 만든 작품이거든요. 이 정신적으로 성품이 이런 관계가 와요. 얼마나 중요합니까? 요새 아이들 가운데서는요 아버지를 향해서 이렇게 대드는 아이들도 있데요. 

 

난 아버지 때문에 창피해 못살겠소, 당신의 아들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연애도 못하겠대요. 누구 아들이라고 그러면 난 장가도 못 가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런 고로 생각해야 합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논리성은 있지요. 지식에 불과해요. 정서로 가르치는 거,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을 보이는 것이에요. 본을 보이는 것. 믿음과 존경으로 본을 따라서 배우게 됩니다. 

 

가장 무서운 교육은 저절로 배워지는 거예요. 가장 확실한 교육은 무의식중에 있는 거예요. 의식보다도 더 깊은 세계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보세요. 여러분 부모간에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그래서 문간에서 키스하는 것도 보여주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이들이 '아 아빠, 엄마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겠지만,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요 대학 졸업하기가 무섭게 시집장가 갑니다. 

 

그 꼴 보기 싫어서 빨리 가야겠다. 나도 간다 나도. 이게 된다고요. 믿으니까. 저렇게 행동 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요새도 보면 내 아들이 저놈이 장가를 안갑니다, 내 딸이 저놈이 시집을 안갑니다. 

 

걱정하지만 그것이 이미 걱정은 지났어요. 당신이 행복을 보여주지 못했어! 여자에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남자에게 여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못 보여주었어요. 애들의 눈으로 볼 때 저렇게 살 바에는 왜 살아야 되나? 우리 아버지 왜 사는 지를 모르겠대요 도대체. 이렇게 자라왔는데 애들이 시집장가 가겠어요? 

 

자 보세요.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어머니를 보았는데 이 딸아이가 시집을 가겠어요? 누가 와서 나에게 사랑한다 뭐란다 하면은 '이렇게 나오다가 결혼식만 끝나면은 이제 뻥뻥할 거지 이제?' 생각합니다. 이게 되겠어요 이게? 겁이 나니까 연애가 안됩니다 연애가. 도대체가 예? 자, 이게 다 말로 되는 게 아니에요. 

 

야, 시집가라 장가가라, 그게 문제가 아니죠. 결혼생활이란 참 행복한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었어야지. 그 본을 보여주었어야지. 이건 보여줌이 없이 강요한다고 그게 될 일입니까? 그것이 말로 될 일이냐고요. 가정 교육이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가치관이 그렇고 행복관이 그렇습니다. 사는 행복,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걸 그대로 저들은 보고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선한 일을 하는지, 선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이런 것을 본 일이 없거든요. 참으로 불행합니다. 

 

현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는 텍스트가 아니고 참고서일 뿐이다. 교과서가 아니고, 교본이 아니고 참고서일 뿐이다. 아니올시다. 부득불 교본일 수밖에 없어요.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교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대로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사도권이 어떻고, 생활이 어떻고 가정이 어떻고. 여러 가지로 비방을 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6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마음을 넓혔노라. 내가 마음을 넓혔으니 보답할 량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내가 복음 안에서 이렇게 행복하다.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우선 그는 자기 만족에 살았습니다.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알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많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행복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명에 만족했습니다. 이대로 관제와 같이 죽을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하고 있는 일을 위하여 전심전력하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믿음과 행복과 사랑과 소망에 본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믿었습니다. 이제 말합니다. "나는 너를 믿노라 내가 너를 낳았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요 사랑은 믿어주는 것이요 그리고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거쳐서 지금은 본으로 교육을 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귀한 가정 귀한 자녀들은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참으로 귀한 본을 보여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새기게 하시고 복음으로써 낳고 복음으로써 키우고 좋은 본을 보여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행복을 찾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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