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과 지혜의 십자가 /고전1:18-25
2021-05-23 11:03:26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특히 묵상해야 할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오늘날 십자가는 목걸이를 비롯해서 각종 악세사리 장식품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가장 악한 악당들이 사형 당할 때 사용한 사형틀이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는 기독교의 상징인 이 십자가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불신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23, 24절에서 이 십자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한다.
(23-24)“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1.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다(22-23절)
(22-23)“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왜 거리끼는 것이었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 즉 기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메시야의 증거로 기적을 원했다. 구약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10재앙으로 애굽의 바로왕을 꼼짝 못하게 하였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여 백성들을 구해내었다. 그리고 200만명이나 되는 많은 백성들을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하여 먹였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였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5병2어의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이는 일을 행하자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자 “호산나”하며 환영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초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인들을 기적을 이용하여 단번에 몰아내시고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그 일을 할 것이라고 잔뜩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왠걸? 예수님은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아니하셨고 그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만 쫓아내시고는 제사장 무리들에게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러면 재판당할 때 천사가 나타나던지 희안한 기적으로 모든 권세자들을 물리치고 기적적인 역전극을 펼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무능하게 재판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메시야로 믿을수 없었다.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적이 나타나서 십자가 지우는 군병들이 갑자기 꺼꾸러져서 죽든지 벼락이 쳐서 죽든지...무언가 기적이 나타나야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더욱 거리끼는 것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라고 외쳤다. 자기들이 빌라도에게 청원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니 거리낌이 되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는 메시야가 아니라 권능으로 임하여 표적과 기적을 마구 행하는 그런 영광의 메시야를 믿을려고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한없이 무능해 보이는 것이니 그들은 못믿었던 것이다.
**어떤 신기한 이적만 보고 믿으려고 하면 안된다....예수님의 온갖 이적을 다 경험하고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한 사람....가롯 유다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는 것도 보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도 경험했고, 갈릴리 바다를 한마디 호령만 하시어 잔잔케 하심도 보았고, 죽은지 나흘이 다되어 썩어가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이적들을 다 보고서도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표적이 사람을 놀라게는 하는데...다 믿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2. 이방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다.(22-23절)
(22-23)“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민족으로 유명하다.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사랑, sophy...지혜)’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연을 알려고 노력했고, 인간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서양에서 물리학과 수학이 발전하였다.(여러분이 들어본 피타고라스의 원리...그리스 수학자였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문학 윤리학 논리학도 발전시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등 유명한 철학자들 모두 그리스 사람들이다. 오늘의 대부분의 학문들은 다 이런 그리스 철학의 열매들이다.
당시 헬라인들은 특히 지혜, 즉 세상적 지성을 중요시 했다. 그래서 비논리적인 것은 안믿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묘한 철학과 논리로 당시 그리스 로마의 석학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면...그러면 복음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 바울이라는 사람이 와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믿어라는 것이다. 말이 되나? 당연히 안된다. (당시에 십자가 형으로 죽은 죄수는 가장 악랄한 죄수가 그렇게 죽는 법인데...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사형수를 믿으라고 하니 말이 안되는 얘기였다.)
그래서 헬라인들과 이방인들에게는 십자가는 미련한 소리, 허튼 소리였다. 당시는 요즘처럼 매스컴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요즘처럼 신문이나 라디오, TV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신 것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몰랐다. 고린도에서는 유대나라 사건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이란 사람이 고린도 시에 나타났다. 죄악이 많으면서도 문화가 발달하고 부유하고 지식 수준이 있는 도시, 철학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성과 죄악의 도시인 고린도에 와서 그들이 생판 모르는 예수를 전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다고 전했는데...그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허튼 소리로 들렸겠나? 당시에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개죽음 당한 사람인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로 들렸겠나?
그래서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신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면 2000년 전에 우리나라 땅도 아닌 저 먼 유대땅에서 죽은 그 사람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안믿는다.
과학시대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라니 의학적으로 이해가 안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믿으라고 하니 더더욱 황당한 소리로만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안믿는 자들이 볼 때에 예수 믿는 자들은 무언가 좀 모자라니까...믿는 것처럼 여긴다. 이 땅에서 못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무언가 초자연적인 것을 믿어서 마음에 위안이라도 누릴까?...그들은 신앙을 그렇게만 생각한다. 한마디로 신앙은 못나고 어리석은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다는 생각이다.
3.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18, 24절)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은? (마16:24)“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처럼...나 자신의 모든 지성이나 경험이나 종교적인 노력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가능성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은혜를 깨닫고는 십자가를 가장 귀한 것으로 믿고 전하는 것이 신앙이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라는 큰 도시에 어떻게 복음 전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아, 잠잠하지 말고 외쳐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조건 십자가의 복음만 고린도 시민들에게 전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너도나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마침내 고린도에 큰 교회가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바울이 생각해도 신기했을 것이다. “나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만 했는데, 예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예수님을 믿어 이렇게 큰 교회가 되었는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에 선교사들이 처음 와서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선교사가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하는 그 말이 우리에게는 허튼 소리였다. 아니, 2000년 전에 났다가 죽은 예수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시는 것을 보았나?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나?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와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하는 그 말을 듣고 안창호 선생이 예수를 믿고, 조만식 선생이 예수를 믿고, 김구 선생이 예수를 믿고, 이승만 대통령이 예수를 믿고, 윤보선 대통령이 예수를 믿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그것은 그들이 전해들은 복음...십자가의 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인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가?
십자가 진다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무슨 지혜이고 무슨 능력인가? 불신의 눈으로 보면 희생이란 어리석은 행동이다. 희생이란 능력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할수 없어서 당하는 수동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 지고 희생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고 무능하고 거리끼는 행동일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왜? 내가 십자가 질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기에 오묘한 역사가 나타나고 생각지 아니한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희생은 희생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 함께 하지 않는 희생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예)탈북자 김권능 목사 이야기
김권능 목사는 북한이 90년대 기근에 허덕일 때 먹고 살기 위하여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떠돌이 생활 하다가 한국에서 온 최광선교사를 만났다. 최광선교사 말이 먹는 것 자는 것 다 책임질터이니 시키는 것 시간표대로 생활하라는 것이었다. 그게 성경통독이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탈북했는데 먹고 사는 것 책임져 준다는데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그 성경통독 시간표가 이랬다. 6시 기상 7시까지 기도, 아침 먹고 7시반부터 12시까지 오전 통독, 오후3시까지 점심 먹고 휴식, 오후4시부터 8시까지 오후 통독, 저녁8시 식사, 저녁 9시부터10시까지 묵상, 11시 취침이었다.
가서 중노동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성경만 들어주면 밥 먹여준다는데 까짓것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 매일 반복해보라...지겨워서 힘들다. 그런데 그것을 3개월 계속하니 사람들 반응이 조금 나타나더니... 5개월째 되니 성령이 역사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더라고...그렇게 해서 은혜 받고는 그들은 다시 복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김권능씨는 당시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루트를 개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김권능씨는 베트남 태국 몽고를 통하는 탈북 루트를 개발하고 그길로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날 중국 공안에 잡혀서 북한으로 송환되고 말았다. 그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주범임이 밝혀지면 그는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신의주 감옥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평생을 저를 위해 살지 않고 탈북민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되어서 그는 3개월만에 풀려나서 다시 탈북하였다. 그는 한국으로 와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그는 신의주 감옥에서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다짐한다. ‘다른 탈북자들을 먼저 구출하고 자신은 맨 마지막에 한국으로 오겠다’고 결심하였다. 마음만 먹으면 한국으로 올수 있었지만 중국에 남아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어느날 중국 공안에 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불법밀입국 조직혐의로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중국 감옥에 형을 살지만 도중에 북한으로 송환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김권능씨의 존재를 알고 중국에 김권능씨를 송환하라고 재촉하였지만 중국 검사는 김권능씨가 한국 빨리 갈수 있음에도 포기하고 탈북자들을 도운 점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그가 중국에서 형기를 마칠 때까지 송환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문제는 10년형을 마치면 중국은 더 이상 김씨를 붙잡아 둘 수 없으니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감옥에서 다른 사람들은 형을 마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김씨는 형을 마치면 북한 보위부에서 바로 데려갈려고 벼르고 있기 때문에 그는 형을 마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드디어 10년형을 마치고 중국공안이 김씨를 데리고 북한으로 넘겨주는 날이 다가오고 말았다. 그날이 2011년 12월 19일이라고...그런데 그날이 어떤 날이었나?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한 날이었다. 그래서 북한땅 바로 앞까지 갔는데....북한의 행정이 다 마비되어서 김씨를 데려갈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석방되어서 한국으로 올수 있었다.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도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 중국에서 김씨를 한국으로 보내려면 한국에서 발행한 가족관계 증명서가 필요했다. 마침 한국에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먼저 탈북해 있었다. 동생이 통일부를 찾아가서 서류를 만들어 달라고 하니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면 한국에 올수 없는데 중국 공무원이 가족의 머리카락을 보내주면 중국당국이 유전자 검사를 해서 가족관계를 증명하여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중국 간부가 나서서 유전자 검사까지 시켜주어서 한국으로 왔다. 하나님의 도움이었다.
그렇게 하여 김권능씨는 한국에서 신학교 졸업하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인천에서 탈북민들이 모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다.
오묘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가 북송되는 날 김정일이 죽어서 그는 북송될 위기에서 벗어나서 한국으로 올 수 있었나?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었나? 그가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지는 것은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다. 그래서 중국 검사가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도록 도우고...김정일이 죽어 북한 문앞까지 갔다가 석방되는 일이 일어났다.
기억하라!! 십자가의 도(길)은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2. 이방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다.
3.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18, 24절)
admin
댁쟾쇰줈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자랑하리라 /고전1:18-31/ 유기성목사
2020-03-18 22:06:21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일 ‘마음조차 하나 되자’라는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렇게 사셨습니까?
그 말씀 때문에 더 좌절에 빠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 된다 못 한다’고 포기하지 말고 주 예수님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안될 것이라면 말씀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말씀에서 은혜 받고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사 시대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성경 말씀대로 되기를 기도하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 가면서 ‘마음조차 하나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조차 하나 되려면 십자가 복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정말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어떤 점에서 능력입니까?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이 큰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음을 받았음이 믿어지는 것이 큰 능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갈 자가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초대 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조롱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증오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누구든지 이것을 믿기만 하면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산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이 복음을 이해할 수도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으로 세상 지혜를 멸하고 폐하신 것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도대체 세상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내가 더 옳다. 내가 더 강하다, 내가 더 잘났다’ 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철저히 강자의 논리입니다. 성공한 자가 선이고 강한 자가 정의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고 약한 것이 죄입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입니다. 그러니 파가 생기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바다가 갈라지고 죽을 병이 낫는 기적이 나타나야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신비한 영적 비밀을 알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니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인이지 않습니까? 복음에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새가족 한분이 양육 수료 간증을 하였는데, 일대일 양육 첫 과를 마치고 자신이 죄인임이 믿어지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2과도 3과도 9단원까지도 믿어지지 않더니 마지막 10단원을 공부할 때, 갑자기 자신이 죄인임이 깨달아지고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졌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6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본래 학식이 많거나, 권력을 가졌거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겐 복음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선택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약한 자, 어리석은 자, 비천하고 멸시받고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통하여 주님이 더 드러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한번은 부목사 한 분을 뽑아야 할 상황이 되어‘성품도 좋고 설교도 잘하고 신실하고 인물도 좋은 목사’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는데, “너마저 그렇게 기도하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모두 다 신실하고 설교 잘하는 목사를 찾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어 그러신가?
그렇다고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사람을 보내주소서!”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기준은 다름을 알았습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분명한 목사님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일로 부목사들에게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죽었음만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세상 지혜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였을 때, 깜짝 놀란 것이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열등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생이라면 한국의 같은 학생들 중 가장 실력 있고, 잘 살고,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열등감은 무슨 열등감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열등감으로 좌절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세상 지혜를 붙잡고 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한데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데요’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약한지 솔직히 대답해보기 바랍니다.
목사님 한 분이 반복하여 짓는 음란한 일에 대하여 고백하셨습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죄를 이기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하였더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우리가 약한 것이 아니라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안 된다 못 한다’고 하니 자아가 너무 강한 것입니다.
저도 열등감에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러다 고전 1:27-29 말씀을 믿겠다고 고백하는 순간 얼마나 통곡하고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믿는다는 것은 자아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고 나면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요, 예수님이 나의 의요, 나의 거룩함이요,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어떻게 사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길 수 있습니까? 내가 개척 멤버요, 담임목사편이요, 원조라고 싸우고 분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 자랑이 되지 못하니 그런 것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한 성도님이 동료 학부모 중에 1등만 하는 아이의 엄마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꼭 전화를 해서 자기 아이가 1등 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 입니다. 어느 날 중간고사가 끝난 후 또 전화가 왔는데, 안 받았답니다.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요즘 맘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개 엄마가 시험이 끝나니 또 전화를 합니다. 우리 아이 성적이 낮아 그 엄마의 자랑을 듣고 있기가 싫었습니다. 오늘도 두 번이나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주님, 제 안에 아직도 자녀를 두고 시기, 질투, 욕심, 불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피하는 것이겠지요. 주님 저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예레미야 말씀을 묵상하는데 한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렘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주님께서 그 성도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엄마에게 당당하게 전화했고 축하한다고 만나자고 말했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면 세상 자랑하는 사람이 불쌍해 보입니다.
여러분, 은밀한 죄가 사라졌습니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천국을 믿으니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기쁘십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졌습니까? 부족한 것이 없이 너무나 만족하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자아가 죽었습니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이 질문에 “예”라고 답을 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십자가' (무엇이 변치 않아)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서진규목사
2019-11-05 03:54:39
어느 미국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찾아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아프리카에 오래 머물면서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맸지만 다아아몬드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낙심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마을에 들렸을 때 동네 아이들이 길거리에 앉아서 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을 무심결에 들여다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깎아 놓으면 예쁘지만 깎지 않으면 꼭 차돌과 같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둥글둥글한 돌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아이들에게 껌을 하나씩 나눠주며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는 돌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껌을 주며 이와 같은 돌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껌을 받아 들고 좋아하며 다이아몬드 원석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가공해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보석으로 가공된 다이아몬드는 부르는 것이 값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의 단단한 성질을 이용해 쇠와 유리, 콘크리트를 자르는 도구와 기계들을 만들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보석만이 아니라 산업화에 없어서는 안되는 광물질이 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이아몬드는 단순히 단단한 돌일 뿐입니다. 아이들의 손에서 공기돌로 취급되며 길거리에 버려지기도 합니다. 껌 하나와 다이아몬드 원석을 바꿀 만큼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놓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 생명을 걸고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신 ‘십자가의 도’가 바로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조롱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미련한 짓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이유와 그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끌어 안고 무릎을 꿇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담긴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합니다.
성경은 온 인류가 죽음의 두려움과 온갖 고통 속에서 사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창세기는 죄가 인류 속에 들어오는 과정과 그 죄로 인해 겪게 되는 죽음의 절망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 거하게 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세우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는 창조자와 창조물의 관계를 세우는 기준이었고 법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물인 사람의 관계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창조물인 사람이 창조자인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분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사단의 교묘한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에덴에서 추방 당하고 에덴의 영원한 삶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죽음의 공포와 온갖 두려움에 매여 살았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전쟁과 테러, 자연 재해와 기근, 폭력과 음란이 만연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의 죄, 불순종의 죄’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사람의 선행이나, 사람의 지혜,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끌어 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치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십자가의 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두 부류로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혜, 과학의 힘으로 모든 질병과 인류의 문제를 극복하고 결국은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추구한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영어로 필로소피입니다. 필로는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인류가 가지고 있는 죽음, 고통, 질병과 자연 재해 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 즉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창조자인 신이 인간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천하고 천한 사형의 틀인 십자가 위에서 창조주 신이 죽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생각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인류의 구원이 인간의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메시야가 오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여주시오, 표적을 보여주시오’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다윗 왕과 같은 능력을 가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능력한 것이었고, 우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마지막까지 조롱하며 외치기를 ‘네가 메시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를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외칩니다.
끝까지 표적, 능력을 요구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나무에 달려 죽는 자가 가장 저주 받은 자로 나오는데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헬라인과 유대인과 같은 속성의 믿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그 표적이 보이는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병낫게 해 주십시오.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보게 해 주십시오. 표적을 구하고 능력을 구합니다.
표적을 보면 놀라고 표적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믿음입니다. 항상 놀라운 일들이 내 주위에 일어나야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받습니다.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불안해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구도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지혜와 지식을 찾아 나섭니다. 항상 어느 곳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 있는가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전을 가르치는 곳에 가서 원전을 놓고 공부를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원전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배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원전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새로운 성경에 대한 배움을 자랑해도 그 지혜가 십자가의 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본문을 쓴 바울은 자신이 바로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과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적인 삶을 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율법에 정통한 랍비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사기꾼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비웃고 조롱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180도 바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변화를 본문 22절-23절을 통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말로 보면 ‘스칸달론’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스칼달론’ 이라는 말에서 나중에 ‘스캔들’이라고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을 수없는 이야기로 남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비웃었던 십자가에서 아주 놀라운 ‘십자가의 도’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은 만난 후에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신비적인 종교적인 행위를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집니다. 십자가의 도로 바울은 만족합니다. 바울은 ‘내가 평생에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를 향해 바울과 같은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고 고백함으로서 ‘십자가의 도’를 통해 만족하는 삶입니다. 더 큰 능력을 보기를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불안해 하며 또 다른 능력과 표적을 찾아 나서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으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통해 깨닫게 하신 구원의 지혜를 가지고 선포하며 섬기며 사는 삶입니다. 이루어 가는 구원이 아닌 이미 십자가 안에서 이뤄진 구원을 감사하며 선포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힘찬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성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1:18-31
2019-12-24 11:34:52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오늘 설교 제목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와 그리스도라는 낱말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걸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말은 둥근 삼각형이라는 표현처럼 형용 모순입니다. 이런 곤혹스런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초기 기독교의 입장을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 그리스도는 삼십대 초반 나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대개는 반(反)로마 무력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된 이들에게 일벌백계 차원에서 이런 형벌이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쳤던 예수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로마 체제를 위태롭게 할 만한 요소들이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의 메시지는 당시 절대 권력자들에게 불온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말이 되던 안 되든 어쨌든지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기독교인들은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거리낌의 대상인 십자가
위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두 세력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거리낌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똑같이 로마의 불의한 통제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던 이들에게 십자가 처형이 내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비호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동정심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속으로는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으로 인해서 불편한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마을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나왔다고 합시다. 로마 제국은 그 마을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하고 뭔가 트집을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증거를 기적적인 특별한 현상에서 찾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이 그것입니다. 애굽의 기마병들을 하나님이 홍해에 수장시켜서 그들은 무사히 광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고전 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런 신앙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즉 기적을 구한다.’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기적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로마 군대를 박살내는 기적을 보였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마 27:40)고, 그리고 관리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눅 23:35)고 빈정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 현대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기적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신화를 누구나 꿈꿉니다. 세상은 성공하는 길을 제시하고, 거기서 낙오가 되지 말라고 닦달합니다. 그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런 꿈을 꿉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느 누가 자신이나 자기 자식들이 삼십대 초반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따돌림 받는 운명을 용납하겠습니까. 기적적인 성공신화에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거리낌의 대상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부류는 이방인들, 즉 헬라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 것은 헛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고전 1:22b절에 따르면 ‘지혜’가 그들의 최고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지혜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즉 신(神)에게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철학 전통을 이어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 philosophy는 사랑이라는 뜻의 필로스와 지혜라는 뜻의 소피아의 결합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의 죽음은 무가치한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로마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되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도 헬라 사람들처럼 지혜를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구원으로 여깁니다. 현대 물리학, 심리학, 경제학, 컴퓨터 공학을 포함하여 모두가 지혜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가 특히 강합니다.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이 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의 태도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무식하게 사는 것보다는 유식하게 사는 게 여러 가지로 바람직합니다.
시를 이해하고, 물리학도 좀 알고, 예술과 음악도 감상할 줄 알고, 철학을 아는 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분명히 됩니다. 신학도 그런 지혜를 얻는 한 방편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에만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미련한 사람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는 기적을 추구하던 유대인들과 지혜에 몰두하던 헬라 사람들이 대세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생각을 물리칩니다. 고전 1:24절에서 바울의 강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구한 기적, 즉 하나님의 능력이고,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라는 바울의 진술은 놀랍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진술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이게 말이 될까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일까요? 단순한 종교적 덕담일까요? 심리적으로 황홀경에 빠진 한 광신자의 독백이나 넋두리에 불과할까요?
먼저 유대인들의 기적 신앙과 헬라인들의 지혜 신앙이 과연 우리를 구원하는지, 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그걸 뚫어보았기 때문에 과감한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 신앙은 오늘날 성공신화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붙들고 있어야 할 진리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상대적으로 편해질 뿐이지만 그것이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회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말합니다. 수천, 수만 명 신자가 모이는 교회의 신자들과 담임 목사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백 명도 모이지 않는 대구샘터교회의 신자들과 정용섭 목사가 행복할까요? 물론 교회의 크기로 목사의 행복을 단순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눈에 기적처럼 보이는 목회 성공이 반드시 그 교회 신자들과 목사의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교양인이 되는 수단입니다. 교양인과 지식인이 반드시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행복한 게 절대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 오늘날 스펙이 높고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출과 일몰의 장엄한 순간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세상에서 실패하고 무식해야만 행복하거나 구원받았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과 행복은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 전혀 다른 차원을 아는 데에는 성공신화나 지식이나 스펙이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26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초기 교회에는 사회적으로 이름 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중산층 이하, 오히려 하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공동번역으로 26-28절을 읽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과감하다 못해 무모하다 느껴질 정도의 발언입니다. 이걸 상투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값싼 말로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말은 신앙과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지혜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묶이기 쉽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데에 길들여집니다. 대학교 교수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법조인들도 자기가 아는 법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국정농단 중심에 선 최순실 씨의 딸 정 아무개 씨가 sns에 올렸던 ‘돈도 실력이야 너희 부모를 탓해.’라는 문자가 이화여대 부정 입학과 연관해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재미있으라고 날린 문자였겠지만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본다는 게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고위 관료는 민중들을 개나 돼지처럼 먹을 거만 주면 된다는 식으로 폄하했습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왜곡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부단히 성찰하지 않으면 자기 주관에 떨어져서 편견을 갖고 세상을 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뚫어 보고,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복음의 세계로 부르셨다고 말했습니다.
해방의 능력인 십자가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의 지혜로 무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늘 잘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부끄러움 운운은 사람들이 거리끼게 생각하고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로 인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한쪽이 절대 생명을 얻으면 다른 쪽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30절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구절에 핵심 단어는 지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해방입니다. 이런 성서 언어를 실감 있게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며칠 전 아침 식탁에서 제가 둘째 딸과 나눈 대화입니다. ‘창문 밖을 봐라. 응달에 아직 눈이 남아 있다. 대나무, 아침햇살, 그리고 딸과 대화하는 이 순간이 꿈결처럼 아름답지 않니?’라고 내가 말하자 딸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래요? 그런 게 정말 느껴져요?
나는 그런 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저걸 보면 그냥 춥다는 느낌만 듭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해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게 실제로 어떤 건지 이해가 되고 느껴지고, 그래서 거기서 어떤 삶의 능력을 경험하는지요? 아니면 전혀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지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덕택으로 우리가 해방을 받았다는 말을 봅시다. 나머지 세 가지 항목도 해방과 다 연결됩니다. 해방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이고, 그것이야말로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이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처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당신 스스로도 십자가의 죽음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타협적으로 대처했다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위기나 위협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체포당하여 재판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한 결과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전혀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무기력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떨어지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의 후예들입니다. 이제 세상의 여러 가지 주장에 솔깃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잘 났냐, 하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admin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고전1:18-31/ 김병삼 목사
2016-03-16 16:36:50
[고린도전서 1장 18-31절]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제 세 번째 고린도교회 속으로 들어갑니다.
첫 번째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사무치게 간절했는지를 알았고, 마음만큼이나 교회의 갈라진 모습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도 보았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아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는지 말입니다. 마치 선물을 주시는 분은 바라보지 않고 선물에 감격하는 유치한 어린아이들처럼 말이죠.
오늘 말씀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식이자 가장 중요한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방식’이란 마치 수학 공식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문제를 보느냐는 것이죠.
얼마 전에 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너무너무 오토바이가 타고 싶은데, 사모님이 계속해서 반대합니다.
자꾸 목사님이 조르니까, 사모님이 극단적인 말을 한 것이죠. “여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갑자기 밖으로 나가더니 흙을 한 줌 쥐어 와서 사모님의 눈에 뿌리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참 답답한 사람, 그리고 절대로 자기 생각이 바뀌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프레임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 결국 신앙이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문제를 사람이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방법과 지혜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회를 다시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 내가 세상의 지혜를 뒤집어엎고 전문가라는 자들이 얼마나 정신 나간 사람들인지 폭로하겠다.”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장단점을 계속해서 대비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 약함과 강함, 천함과 귀함.
세상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사람의 방식이 같다면 왜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 자체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제 다시 십자가의 복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십자가의 방식).
십자가 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십자가를 걸어놓고 바라봅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도 다닙니다. 밤에 높은 빌딩에 올라 아래를 보면 참 많은 십자가 네온사인을 봅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배경에 잡히는 그림에 여지없이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의 정신, 아니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달아놓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 “달아놓고 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누가복음서 기자는 ‘날마다’라는 말을 적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는 것으로 들었던 모양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영광으로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길은 필연적으로 ‘골고다 언덕’을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이기신 최후 승리의 길입니다.
제가 지난해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고민했던 마음이 요즘 교회를 보면서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 그 마음이 이 부분을 가장 잘 정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은 ‘지식’으로 일하지만, 교회는 '지혜'로 일합니다. 지식은 사람들이 배워서 쌓아가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문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식으로 풀려 한다는 것이지요. 왜 교회의 문제를 세상으로 가져갑니까? 더 이상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세상의 전문성을 의지하겠다는 것이죠. 그 순간 교회의 기능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든 가치와 상식을 무시하는 공동체 즉 '몰상식'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상의 가치와 상식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모르거나 전문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전해진 "십자가의 복음"이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자랑해도 "하나님의 약함"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제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번 주일도 예기치 않게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참 어렵게 저에게 설교 부탁을 합니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
제가 설교하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사례비를 주지 않으면 설교를 합니다."
제가 모든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례비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저라고 돈이 싫겠습니까? 그 사례비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주고 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지난해 제가 섬기던 미국의 교회에서 집회하고 사례비를 다 놓고 왔습니다. (혹시라도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저를 초청하는 교회가 있다면 실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감사하는 옛 교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죠.
제가 깨끗하거나 청빈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모든 목회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는 만나교회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받은 사례비, 결혼 주례비를 다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죠. 조금씩 돈을 모으다 보면 돈을 모으는 목사가 될까 봐 스스로 경계합니다. 저 자신 속에 있는 약함과 세속적인 면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그렇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환경이기에 그렇게 합니다. 단지 목회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생각할 뿐이죠.
적절한 예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모든 일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들어온 십자가 때문에 세상의 상식을 적용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참 당황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큰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할 때마다 '리베이트'라는 말이 나옵니다.
"목사님 조심하세요! 혹은 목사님은 공사에 관여하지 마세요!"
저에게 답답한 것은 왜 교회에서, 교회 일을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냐는 것이죠. 한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목사님! 세상에서는 공사를 하면 리베이트라는 것이 관행입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에서 공사를 하고, 건축을 하면 리베이트가 오고 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교회를 세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죠.
이쯤 되면 교회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번 공사를 하면서 공사를 담당하는 테스크포스 팀이 참 바보 같이 일했습니다.
‘공사를 책임진 장로님들이 밥 한 끼도 업자들에게 얻어먹지 말고, 일하는 모든 업자의 모임에서는 장로님들이 돈을 낸다.’
세상 사람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교회에서 일하는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리베이트'는 생각도 못 하는 곳입니다.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방식"이라면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사도 바울이 오늘날 교회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 가졌던 답답한 마음을 가질 듯합니다. 어쩌면 교회에서 ‘성공’이라는 것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느냐고. 어쩌면 교회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느냐고.
언젠가 제가 꿈꿨던 것이 있습니다. 집 팔아서 돈이 많이 남았다고 감사헌금하기 쉽습니다. 우리 자식이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감사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집을 손해 보고 팔게 되었는데 왜 그리 감사한지 눈물이 나온다고, 우리 자식이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데도 사명 따라 다른 대학에 간 것이 매우 기쁘다고, 우리 남편 좋은 직장에서 편히 살 수 있는데, 그곳에 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 직장을 옮겼는데 감사하다고.
세상과 다른 감사를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를 생각하며 다른 가치 때문에 고민하며 살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다 보면 조금은 십자가에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이번 주간을 시작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장 미련한 일"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지식으로가 아닌 하늘로부터 행하는 "지혜로운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방식이라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나요?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기로 작정할 때, 십자가의 방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18~19절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가 교회의 분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모든 분열의 시작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우월감,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 학식과 위치를 자랑하는 데서 왔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들의 지혜에 의존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가졌느냐, 자신이 어떤 존재이냐를 자랑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폐하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는 곳이요,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본질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도전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는 일들이 십자가의 능력에서 행해지는 일이냐, 아니면 교회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이냐, 오늘 여러분이 하는 수없이 많은 사역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눈물, 사랑의 흔적이 있느냐는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아니 조금 더 본질에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세상의 가치와 기준, 지혜에 의존하여 믿는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냐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두 가지 경향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또 하나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가 능력이 되지 못할까요?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은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정치적인 변혁, 놀라운 힘, 삶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당하고,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며, 매를 맞고 벌거벗은 채 돌아가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믿겠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비참하게 죽지 말고 천사들을 보내어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멸해라!”
바로 이것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이 아니라 패배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단의 세력 앞에서 허무하게 무릎을 꿇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도 용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피와 눈물을 통해 우리가 변화되었고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바로 이런 유대인들처럼 십자가는 너무 무능해 보여서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내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한 그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우리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지신 사건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고, 우리를 얽매고 있던 율법에서 해방됩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두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신비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표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능력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지 너무나 불합리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왕권을 휘두르지 않고, 인간이 되신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해하려고 하니까, 설명하려고 하니까 설명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너를 사랑해!”
“그래, 왜 사랑하는데?”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유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 이유가 불합리해집니다. 가진 것으로, 생긴 것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그냥!”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가 믿을 때 와지는 확신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고, 위로가 되며, 확신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원수가 용서되고, 실망 가운데 용기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음을 믿기에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과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십자가 외에 그 어떤 능력도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하나님의 택하심).
본문 27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또 하나의 놀라운 방식은 미련한 것을 통해 지혜롭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올해로 제가 만나 교회 목회를 시작한 지 만 11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때는 교인들을 설득해서 끌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때에는 저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여 년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제가 목회를 가장 편안하게 잘할 수 있었던 때는, 제가 가진 것으로 교인들을 설득하려 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늘, 제가 아프고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 나면 교인들이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저를 이해하려는 교인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지혜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회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는 힘으로 증명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힘을 쓰지 않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위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과 피 흘림을 통해 그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문제를 제기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교만과 우월성, 비교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지혜와 표적을 구함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세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힘 있고 잘 난 사람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26~29절을 보세요.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잘난 사람이 잘 되고, 못난 사람이 못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의 지혜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정말 약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세요. 잘 나가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자신이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주변을 보세요! 예수를 믿고 부자 된 사람들은 많지만, 부자들이 예수를 믿는 데는 문제가 생겼을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힘이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소위 ‘팍스 로마나’라는 ‘평화의 로마 시대’는 힘으로 짓누르는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6천만 명 정도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믿은 자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간혹 귀족들이 예수를 믿으면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귀족들이 노예들을 사람 취급 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예를 힘으로 다스리지 않는 귀족들은 형편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로마제국을 복음화시킨 것이 귀족들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예들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노예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고통 가운데 찬송을 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주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검투장에서 순교를 당할 때 당당하게 죽어가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강력한 로마가 가장 비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통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그람마타’라고 불렸던 사실을 아십니까?
이 말은 문법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들이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았을 때 일어난 일들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렇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기적을 행함을 보고 똑똑한 체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힘과 실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랑하는 모든 것이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지난달 몇몇 목사님들과 교제하며 하룻밤을 지낼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꽤 큰 사역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다 인생의 문제,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문제와 약함이 없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고, 나의 삶에서 나의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우리의 참된 진리는 주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들어 쓰셔서 내가 이렇게 불림을 받았다는 고백,
미련한 나를 주님께서 이렇게 지혜롭게 사용하신다는 고백,
연약한 내가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부흥회 때,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우리의 지혜나 자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시는 그 믿음 위에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지금 우리가 안는 문제와의 싸움이 하나님과 문제와의 싸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신앙인들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를 믿으시고,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을 믿습니다.
이것이 참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 되시며, 그리스도의 보혈 가운데 우리가 여기 불림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가실 것에 대한 확신이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 참된 진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admin
고전1:18-25/ 십자가의 도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53:3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一․十八)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말씀은 원서대로 말하면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올시다.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태초에「말씀」이 있으니』하는 말 가운데 말씀이라는 말은 도라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최고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 복음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한 전기인데 보통 세상 사람들이 어떤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전기로 말하면 그 사람이 난 것과 장성한 것과 그의 사업 같은 것들을 길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의 죽은데 대해서는 별로 기록하는 사람이 적고 혹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간단히 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네 복음을 보면 복음에 적어도 三분지 二이상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된 일, 곧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은 곧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요.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지마는 그저 간단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대략 네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제일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벌하십니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안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에 죄 가운데 묻힌 만민들을 멸망을 받을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친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셋째로, 이 십자가는 대속의 제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갓 애국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다만 순교자의 죽음도 아닙니다. 어떤 진리에 대한 희생을 당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자기 목숨을 주려 오신 것입니다. 이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만민의 죄 사함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멸망가운데서 생명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대속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 십자가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의를 행함으로가 아니라, 법률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대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이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는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종류는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여기 본문대로 좀더 분명히 번역하면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현재 진행으로 썼습니다. 또 구원 얻은 우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마는 좀더 분명하게 번역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우리라고 현재 진행 사를 여기에 썼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많지마는 이 모든 사람들을 간단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 중에 있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경에 보면 구원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방면으로 기록한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보면「구원을 얻었다」고 과거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는다」고 현재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겠다」고 미래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말을 깊이 생각하면 다 옳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올시다. 그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득의(得意)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 그 때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다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화의 견지에서 보면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성화의 교리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다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이올시다.
매일 매일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 나가는 생활이 우리 신자들의 생활이올시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구원을 얻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이올시다.
그러나 미래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구원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신의 온전한 구원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도 미래에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온전히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육체까지 부활해서 신령한 몸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구원은 아직까지도 미래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기록한 대로 보통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는 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거니와 구원이라고 하는 뜻은, 본래 뜻대로 말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고친다고 하는 뜻입니다.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병난 사람이 치료를 받아서 점점 나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신령한 뜻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 병은 육신의 병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죄를 가르치십니다. 죄는 전염병 같습니다. 죄는 문둥병 같습니다. 이런 무서운 병을 다 우리가 들었는데 그 병 가운데서 점점 치료를 받아서 온전한 자리에 나아가는 중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죄 가운데서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 둘째로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건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위태한 자리에 있다가 점점 안전한 자리로 옮겨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져서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그를 건져내서 점점 물이 옅은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도 신령한 의미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서 위태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서 점점 안전한 곳으로 옮겨온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아치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가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나아서 건강하여지는 중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위태한 물 가운데 빠졌다가 헤엄 잘 치는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점점 물 속에서 이끌려 나와서 안전한 자리로 옮겨가는 중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앉은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구원을 얻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대로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형편입니다. 병이 점점 중하여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오늘 좀더 열이 오르고, 내일은 좀더 열이 오르고, 모래는 좀더 열이 오르고, 점점 중해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점점 죽음을 향해서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하였지마는 방콕에 가서 아편굴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참혹한 형편에 있는지 마치 중병 환자가 점점 죽음에로 나아가는 그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 문둥병자 수용 병원에 가보면 문둥병 환자들 가운데 그 병의 경중을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멘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만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환자를 보면 손이 다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화자를 보면 팔목이 다 없어지고 심지어는 발이 다 없어지고 다만 두부 덩어리처럼 된 문둥병 화자까지 여러분이 볼 수가 있습니다. 점점 병이 중하여지는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이올시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형편이 이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는 점점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배로 말하면 점점 가라앉고, 조금 가라앉고 한 시간 후에는 좀더 가라앉고, 며칠 후에는 좀더 가라앉는, 점점 가라앉은 배와 같은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멸망 중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영혼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영적 견지에서 본다고 하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점점 고침을 받아서 위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점점 중한 병이 더해서 아래로 내러 가든지 우리의 심령은 그 두 가지 형편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멸망하는 중에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구원을 얻어서 독수리와 같이 날개를 치며 그 심령이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종류에 속합니까? 내 심령상태가 하루하루 거룩한 자리로 올라갑니까? 그렇지 아니하고 내 심령 상태가 불의한 자리, 더러운 자리, 멸망의 자리로 내려가는 가운데 있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이지마는 이 두 종류의 사람 중 종류를 따라서 십자가의 도에 대한 반영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마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구경하신 분이 여러 분 계실 줄 압니다.
그 만물상은 돌입니다. 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겨서 참 만물처럼 보인다고 만물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기쁜 사람이 보면 그 만물상이 무엇처럼 보이는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또 마음이 슬픈 사람이 그 만물상을 보면 그저 상제들이 곡하는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같은 만물상이올시다. 같은 바위올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같은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지만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 하는 말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멸망 중으로 점점 내려가는 사람은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들립니다.
우선 십자가 자체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든지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형할 때 쓰는 형 구올시다.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정 무서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이런 데 처형을 받은 어떤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미련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미련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련하게 들었습니다. 알 수가 없고 미련하게만 들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너무나 단순한 교리입니다.
거기에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합니다.『기독교는 깊은 맛이 없다. 차라리 불교는 깊은 맛이 있는데, 그리고 옛날 노자가 가르친 도덕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깊은 맛이 있지. 기독교야 깊은 맛이 있어야지. 그저 애들과 부인들이 믿기를 좋지.』나같이 학식이 많은 사람이야 믿을 것이 못 되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렸습니다.『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니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덕을 닦고, 그야말로 도고덕부(道高德富, 도가 높고 덕이 부)하여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무엇 어떤 진리를 믿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 덕이 없는 사람들, 그 천한 사람들이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덕을 행했으면 얻지.』라고 말하며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또 더욱이 대속한다는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야 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하며 자기는 자기 덕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합니다. 물론 인류의 깊은 연대성과 자기의 성품이 얼마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여졌다고 하는 보다 더 깊은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모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멸망의 상태가 이만큼 중태로 빠졌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입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맑은 날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가 밝지 못하고 어둡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눈 병신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도 됩니다. 그렇지만 지혜라고 하는 것보다 더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의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능력은 십자가밖에 다른 데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해서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불의한 마음을 의롭게 하고 부정직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즉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빠지고 죄악에 얽매여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에게 그로 하여금 죄의 쇠사슬을 끊고 해방을 받아서 자유스러운 사람을 만드는 능력은 십자가의 말씀밖에는 다른 데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과 기쁨과 화평을 주는 능력이 십자가의 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수난 주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수난 주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더욱 가까이 나오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를 전파하는 기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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