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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9:13 - 41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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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9:13-41

2023-08-24 11:12:29

 

고침받은 후의 이야기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13) 고침 받은 직후에 사람들은 이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역사다하는 사실을 공인받게 하려는 의도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회나 회당의 주역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정받는다면 곧 메시아의 이적을 공인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를 배척하기로 결의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자마자 고침 받은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14-15)

 

고침 받은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우선 안식일에 금지된 방식으로 고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것입니다. 눈 뜬 맹인은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15) 바리새인들은 즉각 치료자 예수를 정죄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16) 유대인의 전통인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금지된 39종류의 일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세 가지 금지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무엇이든지 반죽하는 일을 금합니다.(미쉬나 안식일7:2) 흙을 반죽한 일은 이 조항에 위반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물질을 섞는 일을 금합니다.(24:3) 침을 뱉아 흙에 섞은 것은 이 조항에 위반됩니다. 셋째로, 상처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를 금합니다.(14:4) 그러니 소경의 눈에 발라 준 것도 위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 규칙을 위반하면서 치료했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 사람들은 예수가 행하는 이적들(복수형)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다시 고침 받은 본인에게 묻습니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 그는 한마디로 단정합니다. 선지자요!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17)

 

그가 예수를 지체 없이 선지자라고 고백한 것은 매우 단호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선지자라 한 것은 예수를 가장 높여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선지자는 율법보다도 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8-19) 그들은 소경으로 났다가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본래 소경이 아닌데 소경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무슨 마술이나 부려서 일시적으로 눈을 떴다고 홀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말을 믿지 않고 이제는 부모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간단히 답합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0-21)

 

부모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과, 소경으로 난 것만을 확인하고, 치유 사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마다 회당에서 출교하기로 결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22-23)

 

출교란 회당에서 쫓아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형벌은 견책과 근신과 출교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출교는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출교에도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가벼운 출교 조치로써, 이 처벌을 당하면 당사자는 30일간 회당 출입이 금지되고 사람들에게 4규빗 이상 접근치 못하도록 했습니다.

 

둘째로, 무거운 출교 처분이 있었는데 이 조치를 받으면 회당 출입이 무기한 금지될 뿐만 아니라, 교제나 매매나 함께 식사하는 것까지 금지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후에도 돌팔매질을 하고 그를 위해 우는 것까지 금지시켰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두려워서 부모는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미성년의 경우는 부모에게 책임이 있지만 성년이 된 후에는 책임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13세가 되면 성인 취급을 했습니다. 눈 뜬 사람의 부모는 자식의 문제로 인하여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에 대한 입장 표명을 회피했습니다.

 

부모에 대한 심문이 별 효과가 없자, 다시 본인에게 화살을 겨눴습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말입니다.(7:19) “소경으로 났다가 눈을 떴다고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하게 진실을 말해라. 그리고 예수란 자가 속임수를 행한 것을 인정하고, 안식일을 범한 죄인임을 시인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시 한 번 사실만을 확인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 심문자들이 이론적으로 묻는데 대하여 이 사람은 사실만(fact) 대답 합니다. “나는 소경으로 태어나서 이때까지 살다가 예수에 의해서 눈을 떴습니다. 예수를 정죄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

 

그들은 여전히 어떻게떴는가를 묻습니다. 안식일 위반 사항에 대해서 계속 따지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대답합니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 그의 말 속에는 자기는 이미 그의 제자가 된 것을 암시하고, 한편으로는 심문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비꼬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 심문자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펄쩍 뛰면서 욕을 했습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8-29)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예수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믿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모르겠다고 공언한 이 말에 의해 이들은 결정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또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0-33)

 

내가 당한 큰 이적을 당신들 같은 종교 전문가들이 모른다면 누가 알겠는가 하는 비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 죄인이라면 어찌 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다급하니까 저주가 나왔습니다. 네가 죄 가운데서 소경으로 난자가 아니냐는 말인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가 소경으로 난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소경으로 난 주제에 남을 훈계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쫓아냈습니다. 드디어 유대 사회에서 출교해버린 것입니다.

 

그가 쫓겨난 후에 예수께서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출교 당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으셨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35) 인자란 말은 유대 사회에서 메시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박해당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예수를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출교를 당하면서까지 예수를 옹호했습니다. 이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주님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열렸는지를 묻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 그는 메시야를 믿고자 했습니다. 다만 누가 메시야인지 몰라서 못 믿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 이 사람은 감격했습니다.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분을 위해 변호했는데, 이제 눈앞에 계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본인의 입으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미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로 인정함은 물론 그 이상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 없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그는 엎드려 절하고 경배했습니다. 이제 중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바로 이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

 

사도 요한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맹인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눈을 뜬 기적보다 그가 영의 눈을 뜨게 된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그의 신앙이 어떻게 발전됐는지 살펴봅시다.

 

첫째로, 그는 처음에 오직 육신의 눈을 뜨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전혀 상관치 않았습니다. 눈만 뜨게 해 준다면, 누구의 말이라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무조건 가서 씻었습니다. 박수무당이든 산신령이든 눈만 뜨게 해준다면야! 육신적 문제, 먹고사는 일, 의식주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전형적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참 신앙에 이르기 전까지 누구나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너는 왜 의식주에만 관심이 있느냐? 비난할 필요도 없고, 비난할 자격도 없습니다.

 

둘째로, 눈을 뜨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예수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집니다. 내 자신만 바라보던 눈이 이제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향합니다. 이런 관심도 자의로 가지게 된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면서, 예수를 정죄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면서 점점 예수가 누구인지 생각합니다. 나를 고쳐주신 고마우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정죄하는데, 과연 내가 예수를 정죄해야만 하는가?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 분이다! 아니,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부인하면 안 된다! 그는 처음 예수를 비범한 사람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지자라고 했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옹호한 것 때문에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단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것은 신앙의 직전 단계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9:40) 신앙은 긍정에서 옵니다. 믿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절대로 입으로 부인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그런 처지에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출교당한 직후 두 번 째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는 지체없이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갈망하던 바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는 처음에 육신의 눈만 떴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영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를 한 사람으로 알았다가(11), 그 다음은 선지자로(17), 그 다음은 스승으로(27), 그 다음은 하나님께로서 온 분으로(33), 그리고 마침내는 메시아로(38) 믿고 경배합니다. 그는 처음에 소극적으로 예수를 정죄하지 않는 선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다음은 제자로(27), 마침내는 경배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될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 나와서 돈 문제만 해결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고민하던 건강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관계가 해결되고, 소원이 성취되면 믿음의 효능이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좀 더 발전된 사람들은 몇 가지 은사를 받았으니 신앙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신앙이 정체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정체되면 기계적인 신자가 됩니다. 감동은 없고 습관적으로 오락가락 합니다.

 

교회를 십년 이십년 다녀도 여전히 시험에 넘어지고, 유혹에 빠집니다. 고난이 심하면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진정한 신앙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그를 믿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워질수록 생명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습니까? 예수님과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나의 모든 삶이 풍성해집니다.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믿나이다!’ 하고 고백하는 단계까지 발전했습니다. 이런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반이나 주님과 숙식을 같이 했으나 주님을 영적으로 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육신적인 예수만 보고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무당 집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름 석 자만 올려놓아도 복을 빌어주고 액땜을 해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에 이르러야 합니다.

 

욥은 시련을 통과한 후에 고백했습니다.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매일의 삶을 통해서 더 깊이 알고,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시기 바랍니다. 육신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인간 예수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선지자 예수에서 신성을 지니신 예수로 발전하고, 날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통 속에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도 소경인가 /9:35-41/ 조학환목사

2022-12-31 15:29:04

 

앞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을 보았다. 바리새인,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 소경이었다가 나은 사람이다.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어둠속에 있는 자들이며,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현실에 굴복한 사람으로 이 두부류의 모두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소경이었다가 나은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예수님을 증거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것인가는 너무나 당위적이다. 은혜를 체험했다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속에서 어둠을 벗어던지고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님 편에 서야 한다.

 

오늘도 소경이었던 사람이 고침 받은 후에 있었던 이야기다. 앞부분은 소경이었던 사람과의 대화이고, 후반부는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이다. 그리고 그 대화의 초점은 메시야에 대한 온전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을 거부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 스스로 본다고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소경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1.메시야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하라(35-38)

 

앞에서 보았든 소경이었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맞서 당당히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그분이 나를 고쳤다. 왜 자꾸 물어보느냐,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느냐, 하나님이 죄인을 들으시겠느냐, 하나님이 그분을 들으셨는데 어찌하여 죄인이라하느냐, 나는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심을 확신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들은 출교시키기로 결의한 상황에서 거의 목숨을 내 놓고 예수님을 증거한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출교를 당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찾아오셔서 그에게 물으신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러자 그 사람은 말한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인자다. 그러자 소경이었다가 나은 사람은 즉시 신앙을 고백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앞의 33절에 보면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다시 인자를 믿느냐고 묻고 계신다. 왜일까? 그것은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알긴 알았지만 아직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분은 결코 배척해야 할 분도 아니며 죄인은 더더구나 아닌 그의 가르침을 받아 들여야 할 위대한 선지자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하여 바로 알려 줄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자를 믿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다.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하신 말로 복음서에 82회 나오는 말이다. 인자는 성육신하셔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인간 예수로서 많은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속하신 구속주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자는 곧 구속의 주님을 말하며 예수님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단순한 선지자로서의 예수가 아닌 구속의 주,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고,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바로 그 인자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소경이었던 사람은 그 즉시로 내가 믿나이다하며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하고 믿느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물으셨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선지자, 엘리야, 세례요한 정도로 생각하였다. 이 때 베드로는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이 아니다. 단순한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다. 단순한 마음의 평안을 주는 분이 아니다. 메시야다. 구세주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고백하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라.

 

2.메시야에 대한 고백이 없으면 심판을 받는다.(39)

 

소경이었던 사람이 인자에 대한 고백을 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고 이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란 육신의 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의 무지를 알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결국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보는 자들을 소경되게 하러 오셨다는 것은 물론 예수님이 고의적으로 그들을 못보게 만들 것이라는 말씀은 아니다. 스스로 본다고 즉 안다고 여기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더욱 심각한 어둠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내가 심판하러 왔다는 것은 죄인들을 색출해 내어 혼내주려고 왔다는 의미보다는 겸손하게 자기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것이요, 끝내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자들은 그 죄와 무지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려고 오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구원을 호소해야 한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려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심판을 면한다.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자신의 죄와 무지로 인하여 심판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정말 인간이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과 연약함과 허물속에 있는 지를 인정하고 주님앞에 엎드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자.

 

3.진짜 소경은 스스로 본다고 하는 자들이다.(40,41)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묻는다. “우리도 소경인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소경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물론 소경이라고 생각하고 덮어 놓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경이라고 즉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면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다고 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다 안다고, 자신이 맞다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들은 그 생각으로 인하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죄와 무지에서 벗어날 길이 영원히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다고 하는 자들은 여전히 죄가운데 머물게 되고 그러니 그런 자들은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이 그렇지 아니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지 가운데 빠져있나? 우리도 소경인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 자기가 마치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가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렇게 무지몽매한 인생이 없다. 진짜 아는 사람은 나는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긴다.

 

과학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인간의 무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과학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학자는 마치 자기가 과학을 다 아는 것으로 여긴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아는게 얼마나 될까? 우리가 경험한게 얼마나 될까? 우리가 배운게 얼마나 될까? 우리가 들은 게 얼마나 될까? 실상은 쥐꼬리만큼도 안된다. 아는 것도 보는 것도 경험한 것도 배운 것도 모두 쥐꼬리만큼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다 안다고 여기며 뭐 어쩌구 저쩌구 개똥 철학을 말하고 제 잘났다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진정 지혜로운 인생은 자신을 아는 인생이다. 자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지식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 나는 무지한 인생이라는 것, 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 나는 단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것, 이런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인생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

 

오늘 말씀들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바르게 알자. 단순한 선생, 종교의 창시자, 성인이 아닌 메시야로 온전히 고백하고 그 은총을 덧입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 안다고 여기지 말라. 본다고 생각지 말라. 다 경험했다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가 아는 것은 쥐꼬리 만큼도 안된다. 우리는 무지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리라.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자.

 

 

 

믿음과 구원에 관한 몇 가지 진실 /9:1-41/ 김형익 목사

2021-05-07 09:40:52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여섯번째 표적이 9장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빛이라고 하신 선언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8:12). 그런데 이 표적이 왜 기록되었을까요? 특히 요한복음의 모든 표적과 기록은 다 20:30~31의 빛 가운데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회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에 따라서 이 표적 기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을 넘어서서 영적인 교훈, 믿음과 구원에 관한 영적 교훈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몇 가지 진실을 우리가 오늘 깨닫고자 합니다.

 

1. 두 종류 인간: 자신이 소경임을 아는 자와 자기가 본다고 주장하는 자(39)

본문은 두 종류 인간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에서 나누어지는 구분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히 소경과 소경이 아닌 자의 구별이 아닙니다. 자신이 소경임을 아는 자와 자기가 본다고 주장하는 자의 구별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구분입니다.

 

수님을 믿기 전의 모든 사람은 다 이 두 종류 중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모두 다 영적인 소경인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소경이라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인간의 상태를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영적 인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인식이 없지만, 자연적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영적으로는 소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연적 지식이 있고, 상식도 있습니다. 39절에서 주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빛이 어두움의 세상에 비추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본문이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처럼, 눈이 떠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은 반대로 눈이 멀어서 빛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신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믿지 않고 거부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려고 하시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있다고 말하면서 눈을 열어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이 감긴 채, 소경이 된 채 영적 실재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 시작하셨다(1)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소경은 근본적으로 누가 길을 지나고 있는지 볼 수 없습니다. 이 소경도 당연히 지나가고 있는 분이 예수님인지 누구인지 알 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사람을 지나치실 수도 있으셨을텐데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약간은 복잡한 형식을 거쳐서 그의 눈을 열어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본래 소경인 사람이 눈을 떴다는 것은 중생에 대한 좋은 비유입니다. 중생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던 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실재들을 보기 시작하고 영적인 진리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3. 중생은 전적인 변화를 초래한다(8~9).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에게서 즉각적으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첫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물론 소경의 눈이 뜨여질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외모는 그의 외모인데, 그가 눈을 떠서 다니니까, 정말 아까 그 사람인지 아닌지 이웃 사람들 조차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생, 거듭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전적인 변화라고 말씀을 드릴 때 이것은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전적인 변화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순간에 그가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된다, 그의 인격이 갑자기 성숙해지고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자신도 남들도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미미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본질상의 전적인 변화입니다. 보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된 것과 같이 분명한 변화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서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그의 속에 새로운 본성이 심겨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본성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본성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본성,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 본성이 심겨진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새로운 본성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반응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 자신 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것은 단지 결심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이 본질적으로 변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런 전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제가 전적인 변화라고 말했을 때, 단지 감정적인 뜨거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그리고 전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도 아닙니다. 잠깐동안은 뭔가를 경험한 것 같고, 대단해진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것은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전적인 변화는 그의 감정 뿐 아니라, 그의 인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생, 거듭남은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또 제가 전적인 변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어떤 사람의 결심의 수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결심은 한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내가 이제부터 믿기로 결심했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듭남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어떤 일이지, 자기가 하기로 결심한 어떤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중생을 이런 미미한 인간 편에서의 변화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예가 허다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거듭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 중생의 변화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소경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25).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이요, 거듭남의 사건인 것입니다.

 

거듭남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이 떠져서 이웃 사람들조차 그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화된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경은 내가 그로라고 말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변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이전의 자신, 날 때부터 소경되어 구걸해서 살아가던 바로 그임을 말해야 했던 것입니다. 중생은 전적인 변화를 초래합니다.

 

4.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11, 17, 30, 33, 38).

예수님을 믿게 되면 또 인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전적인 변화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고백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실, 처음에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눈을 뜨게 해주실 때, 그는 자기에게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묻자, 그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설명합니다(11). 여기서는 단지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란 사람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그 사람에 대한 견해를 요구 받았을 때, 그는 “(그는)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17). 그가 주님을 다시 만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을 아는 이 소경은 이제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예 이 사람이 소경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 기적이 행해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18). 그래서 그 부모를 불렀습니다. 부모는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시킨다는 결의를 두려워하여 아들에게 물으라고 하면서 빠져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소경을 불러서 그를 위협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강요합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습니다(30).”

 

그리고 그는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분이라고 말하고(31),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선언합니다(33). 보십시오. 그는 거듭난 후에, 특별한 새신자 성경공부나 제자양육 성경공부 과정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현상을 드러냅니다. 그는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전적인 변화입니다. 그는 마치 신학교라도 막 나온 사람처럼 신학의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 앞에서 놀랍게 웅변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예수님께 대한 인식의 변화의 절정은 그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그는 결국 출교되었습니다(34). 주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신 후, 그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 그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36). 주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셨을 때 그의 반응을 주목해보십시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그는 주님 앞에 절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처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할 수 있는 말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었지만, 예수님께 대한 그의 인식은 계속해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한 수준의 고백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서 그의 고백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을 믿으면 반대에 직면한다(34).

그러나 이렇게 환한 전망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이 소경이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이 소경의 경우와 같이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반대와 핍박일 수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미묘한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그가 직면하게 된 반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견해와 관점의 변화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심문하는 핵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그가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출교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소경은 아무리 몰라도 최소한의 대답은 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부모와 비교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에게 소환을 당했을 때, 출교를 두려워하여 자식에게 책임을 넘기고는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러나 아들인 소경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출교를 당할지언정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성도는 어떤 불이익과 손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어려도, 그가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 것입니다(11:26).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이 반대는 예수님에 대한 견해와 관점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부 간에 갈등이 벌어지게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리고 가까웠던 이웃들과도 갈등이 벌어지고 반대를 직면해야만 하기도 합니다. 결국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출교 당하고 말았습니다(11).

 

6. 예수님을 믿으면 예배자가 된다(39).

그 청년이 나중에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고 나서 예수님께 절하였다고 했습니다(39). 절하였다는 이 표현은 굴복하다’, ‘순종하다’, 또는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엎드렸고 그의 신앙을 고백했으며 주님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인정하고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께 대한 굴복이고, 이 소경과 같이 예수님께 복종을 약속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주일 아침 예배만을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예배자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예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예배에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나는 것입니다.

 

7. 분열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39)

결국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신 사건은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39절에서 주님은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3:17). 주님은 여기서 모순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빛으로 오신 주님은 불가피하게 그 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판단에 따라서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판단을 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의해서 사람들은 나뉘어집니다.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리는 것을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자기는 다 알고 있으며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이 가진 세상의 지혜를 전복시키실 것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분열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나 그 분열을 지나서야 진짜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8. 당신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너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십니까? 이 소경은 비록 처음에는 미미했지만,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결국에는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복종과 예배를 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가장 중앙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달리고 있는 방향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밖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어떤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십시오. 혹 지난 1년 아니면 3년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분에 대한 여러분의 고백이 더 깊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여오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계십니까?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여러분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리로 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감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셨고 여러분 안에서 일을 하고 계신 것이며,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구체적인 인식과 관점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수준에서 신앙 생활을 해오고 계시다면 근본적인 질문을 여러분 자신에게 하셔야만 합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정말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온전한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내가 아는 한 가지 /9:24-33/ 곽선희 목사

2014-11-27 13:55:27

 

여러분, 명절 동안에 가족들과 혹은 친지들을 만나면서 덕담 많이 나누셨습니까? 이런 말 들어 보셨어요? '덕담에 비상 걸렸다.' 무슨 말인고 하니 덕담 조심해야 됩니다. 세 가지 덕담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첫째는 '너 언제 시집 가냐?' 누군 가고 싶지 않아서 안 가나요? 자꾸 너 언제 시집 가냐? 언제 장가가냐? 이 말은 절대 덕담이 아닙니다. 이 소리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답니다. 그러니까 그 덕담은 그만 합시다.

 

둘째는 ', 너 언제 취직 하냐?' 이거 사람 죽이는 겁니다. 셋째, '공부 잘 되냐?' 그만 합시다. 공부 힘들어요. 누군 잘하고 싶지 않습니까. 안돼서 못하는 거지. 덕담이랍시고 사람 죽입니다. 그러니까 덕담에 비상 걸렸습니다. 그저 듣고 싶지 않은 말이거든 하지 말고, 대답하기 싫어하거든 묻지도 마세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 시골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는데 공교롭게 손님이 없어서 나룻배의 노를 젓는 총각과 선비 하나가 그 배에 올라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서 한가운데쯤 왔을 때에 이 선비가 한가하고, 조용하니 장난기가 들었어요. 그래서 노를 젓고 있는 총각에게 한마디 물어 보았습니다. "

 

이 사람아, 나 하나 뭐 물어 보세." ", 그러세요." "자네 삼강오륜을 아는가?" "모릅니다. 저 같은 촌부가 삼강오륜이 뭔지 그거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하늘의 이치는 아나?" ", 그건 더 모르지요." "땅의 이치는 아나?" ", 모르지요."

 

"그럼 자네가 아는 건 뭔가?" "글쎄올시다." 그리고 한참 노를 저어 가는데 아, 바람이 일면서 그만 배가 휘청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아이구 이 사람아, 조심하게. 잘못하면 빠져죽겠네" 선비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총각이 하는 말이 "선비님, 헤엄칠 줄 압니까? 저는 헤엄칠 줄 아는데요. 이 배에 올라탄 사람은요. 다른 거 몰라도 괜찮아요. 헤엄칠 줄만 알면 됩니다." 이 한마디에 그만 선비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 많이 알아요. 아니 불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최근에 출간된 블라인드 스팟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블라인드 스팟'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백미러로 보지 않습니까? 그 백미러에 나타나지 않는 그 부분, 사각지대입니다.

 

그것을 블라인드 스팟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말입니다.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고 있어요. 이게 블라인드 스팟이에요. 또한 전체는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있어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매여 있어요. 사실 중요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또한 자신의 결점을 모르고 있어요. 남의 결점, 세상 이치는 많이 아는데 결정적으로 자기 결점은 자기가 모르고 있다 그거예요. 이게 블라인드 스팟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 없는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복잡해요. 웬만하면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으면 좋으련만…….

 

요새 인터넷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헤매면서 쓸데없는 것 잔뜩 주워 들어가지고, 머리가 벙벙해 하는데, 뭘 어쩌자는 거예요? 도대체가 정보의 처리가 되질 않습니다. 정보 홍수 속에 밀려가면서 진작 알아야 할 문제를 놓치고 살아가고 있다 하는 얘깁니다.

 

베르너 티키 귀스텐마허(Werner Tiki Küstenmacher)의 그 유명한 단순하게 살아라하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저자가 쓴 두 번째 책이 Simplify your love입니다. 이 책에서 말합니다. 사람은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수록 좋다. 단순하기 위해선 초점을 모아야 된다. 그게 뭡니까? 

 

랑이에요. 사랑하면 성공한 거고, 사랑 없는 건 실패한 거예요. 돈이 있으면 뭘 해요?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 음식이라는 게 음식입니까? 사랑이 있는 음식이 음식이지. 사랑이 빠져나가고는 음식이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거요? , 그거 선물에 사랑이 빠져 나가면 뇌물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사랑이 빠져나간 선물이라면 인격모독입니다. 그건 굴욕적인 겁니다. 보세요. 초점을 사랑에 딱 맞추고,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듣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이 주는 실용적 기적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Simplify your love. 대단히 중요하고 충격적인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zer) 박사는 인생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떠나면 인간일 수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은 수고를 말하는 것이고, 수고 다음에 희생을 말하는 것이고, 그 희생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러분, 수고하고 희생하고 희생을 즐거워하면 성공한 사람이요, 수고가 힘들고 희생은 더더욱 해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겁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세요. 내가 뭘 얻었나?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제가 보는 대로는 아주 특별하게 단순한 마음, 단순한 대답을 하는 아주 깨끗한 인간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거 보세요. "한 가지 아는 것은(25)" 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요. 알 필요도 없어요.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어요.

 

딱 한 가지, '한 가지 아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애들은 말도 못하는 것 같아도 애들이야말로 사랑을 이해하는 데는 도사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나 하지 않나? 딱 보고 압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밝은 얼굴로 대합니다. 벌써 느낌이 이 사람은 나 사랑하는 게 아니다 하면 '' 하고 울어대고 맙니다. 얼마나 민감합니까? 어머니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어머니 품에 딱 안겼을 때 말입니다. 아는 게 뭡니까?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 어머니의 젖이 하나는 먹으라는 거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거다. 전적으로 사랑입니다.

 

사랑 하나만이면 만족합니다. 그 외에는 아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가끔 우리 애들이 눈이 마주칠 때 웃습니다. 애들이 좋아하면 애가 어머니를 알아본다고 말 합니다만 알아본다는 게 뭡니까? 뭘 안다는 얘깁니까? 나이를 압니까? 생일을 압니까? 딱 하나, 사랑을 알고 있어요. 사랑을 아는 그 하나 가지고 만족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 딱 한 가지를 알고 있어요. 내가 아는 한 가지. 그는 용기가 있습니다. 한 가지를 알기에 용기가 있습니다. 출교도 불사합니다. 비난도 불사합니다. 누가 무슨 시비를 벌여도 상관없습니다. 왜요?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91절에서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맹교회에서 들은 얘기입니다만 한국에도 많은 시각장애자가 있지만 17%만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랍니다.

 

그 외에는 다 중간에 된 사람들입니다. 뭐 당뇨병, 고혈압…… 병으로 된 거구요.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는 17%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입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데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일행이 같이 가는 길에 이 사람과는 관계없이 이 사람에 대하여 시비가 벌어졌어요. 이 사람은 다 듣습니다. 시각장애자는 청각이 예민합니다. 다 듣고 있는데 그 앞에다 대고 엉뚱한 시비를 벌입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본인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거 참 어려운 시비꺼리 입니다. 한 사건을 놓고 부모 죄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끝없는 수수께끼요 끝없는 질문입니다. 끝없는 시비입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건 누구 잘못입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 잘못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정말, 정말 괴로운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이런 시비를 벌이는 동안 이 사람은 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늘 듣던 소리라서 들은 척 만 척 했습니다. 시비가 벌어집니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가 된 이 하나의 사건을 놓고 사람들은 말이 많아요. 해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동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겁니다. 이 어려움을 이 사람은 다 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그 점에서도 훌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불러서 눈을 뜨게 했는데요. 그거 좀 이상해요. 예수님이 하신 이적 중에도 이 이적만은 이상합니다. 왜요? 아니 그 침을 땅에다 뱉어서 그걸 이겨가지고 눈에다 발랐대요. 뭐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 장님의 눈은 눈이 아닙니까?

 

먼지만 들어가도 아픈데, 아니 침을 땅에다 뱉어서 이걸 갖다가 눈에다가 발라 놓으니……, 아 참, 이거 참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저 성격 급한 사람 같으면 펄쩍 뛰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걸 잘 참았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거기서 실로암 연못까지가 한 오리길이거든요.

 

이 사람이 지팡이 짚고 가노라면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가야 돼요. 거기까지 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 이거 일진 사납다. 가만 있자. 이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거 지금' 이런 생각 안 했겠습니까? 의심도 많고, 생각도 많고. '뭐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어쨌든 가보자' 하고 반신반의했을 것 같아요.

 

가서 자기 손으로 실로암의 물을 떠서 눈을 씻었는데 눈을 뜬 거예요. 그 동안에도 마음속에 많은 의심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돌아오는데 또 시비가 생겼어요. 눈 감고 있을 때도 시비가 있더니 눈 떴는데 또 시비가 있어요.

 

? 이게 기가 막힌 얘기랍니다.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막대기를 들고 다녀도 그건 죄가 안 됩니다. 안식일 날에도. 그건 당연히 시비가 안 되는데, 눈을 뜨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그건 죄입니다. 막대기 들고 다니는 거니까 안식일 범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문제가 된 거예요. 눈을 감고 막대기를 들고 다닐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눈을 뜨고 지팡이를 짚고 나섰더니 이게 시비가 돼요. 안식을 범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까지 올라갔어요. '너에게 이렇게 안식일 범하게 만든 자가 누구냐?

 

이렇게 하라고 한 자가 누구냐? , 그 사람도 안식일 범했다. 그런고로 그 사람도 죄인이다. 너를 눈뜨게 한 그 사람도 죄인이다. 안식일에 있던 사건이 이게 전부다 잘못된 거다.' 이래가지고 예수를 죄인으로 몰고 이 눈 감았다가 눈 뜬 사람까지 죄인 만들었어요. 그래서 시비를 벌이는 거예요.

 

부모에게 가서 이 사람이 언제 이렇게 됐으며, 언제 눈 떴는지, 이렇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부모는 '나 몰라요, 저 사람이 나이 사십이나 됐으니까 본인한테 물어 보시오' 하고 기피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 시비는 복잡했는데, 이 와중에 이 사람을 만나서 묻습니다.

 

이 사람은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안식일을 범했는지 안 범했는지, 율법이 이런지 저런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나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어. 딱 한 가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눈을 떴습니다.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저 예수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눈을 떴습니다. .' 그 이상의 아무것도 생각 않는다.

 

아주 담담한 대답입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마지막에 '내쫓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출교를 말하는 겁니다. 출교당하면 돌로 쳐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건 조용하지만 무서운 형벌입니다. 바로 그런 출교입니다. 스데반이 출교당하면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는데도 관계없습니다. '내가 한 가지 아는 것, 내가 한 가지 아는 것, 너무 너무 확실합니다.' 이 사람은 담담합니다. 다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는 것 한 가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눈을 떴고 저 사람 예수가 나를 눈 뜨게 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 바가 아니요. 본인이 설명합니다. 내가 믿는 대로는 창조이후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 떴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눈을 떴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아는데 내 눈을 뜨게 한 이 분이 어떻게 죄인이겠느냐?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어떻게 그를 정죄할 수 있느냐? 말이 아닙니다. 나는 그가 메시야인줄로 믿노라. 뒤에 이 고백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인줄로 믿노라. 정말 대단합니다. 예수께서 내 눈을 뜨게 했다. 그것뿐입니다. 이 한 가지 지식, 한 가지 믿음에다 초점을 맞추고 확실하게 삽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었지요. 그리고 내게 주신 은혜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지금 눈을 떴다. 여러분,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가 받은 은혜, 거기다가 초점을 딱 맞추고 나니까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저 감사한 것뿐이에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또 하나 있어요. 현재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현재 내가 눈을 떴어요. ,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장난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간에 사십 세가 되도록 장님으로 산 거 억울하다. 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질문이 나가는 거예요. 현재 받은 은혜에다 딱 초점을 맞춰야지, 지난날에 어떻고, 과거에 뭐 어떻고, 이렇게 시작하면 또 복잡해집니다. 생각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여러분, 팔자가 어떠니 환경이 어떠니 그만 하세요. 지금 내게 주신 은혜, 내가 받는 은혜에다가 딱 초점을 맞추세요. 그리고 흔들리지 마세요. 아니 그 이상 알려고 하지도 마세요. 그 다음에 또 어떻게 되느냐? 그건 또 알아서 뭘 합니까.

 

'이제 내가 뭘 하고 어떻게 먹고 사느냐, 그 동안에 내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데……' 이 생각 다하고 나면 언제 하나님 찬양할 것입니까? 그는 지금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떴어요. 이 사건 하나에다가 딱 초점을 맞추었어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소설 중에 다시 오신 예수라고 하는 단편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쳤는데 혹시 어떻게 됐나 해서 잠깐 세상에 와 봤대요. 한 곳에 갔더니 알코올중독자가 있더래요. "너는 왜 이렇게 됐냐?" 그러니까

 

"제가 원래 절름발이인데요. 예수님이 고쳐주었어요. 절름발이일 때는 얻어먹어서 괜찮았는데 걸으니까 벌어먹어야 되는데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알코올중독자가 됐어요." 한쪽에는 조폭이 있더래요. "너는 왜 조폭이냐?" 그러니까 "제가 원래 장님이었는데요.

 

장님으로 있을 땐 그런 줄 몰랐는데, 눈 뜨고 보니까 세상이 아니꼽고 매스껍고 치사하고 더럽고 못 살 세상이든요. 그래 화가 나서 조폭이 됐습니다." 그러더래요. 그 말도 맞는 얘기예요. 안 그래요? 오늘 이 사람 할 말 많아요. 생각하자면 복잡해요. 그는 생각을 단순화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 한 가지, 그것만 생각합니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있죠? 뚜르 드 프랑스에서 6연승을 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암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조그마한 책 1%의 희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말합니다.

 

그가 암의 진단을 받고 절망했다가 그러나 이겨야겠다고 강한 의지로 밀고 나가면서 암 진단 받은 지 3년이 됐습니다. 암과 투병하면서 3년을 끌고 나갔습니다. 1999102일 날짜를 정해놓고 3년이 되는 그 날을 기념하면서 그는 '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말했습니다.

 

까르페 디엠이라는 건 오늘을 즐기라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나는 3년을 이겼다.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용기를 가졌어요. 마침내 사이클 대회에서 6년 연승을 하는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입니다.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정신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자기 나이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모르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제자가 이 대학자가 이렇게 멍청해 지다니 너무 기가 막혀서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지금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또 하나는 예수가 내 구주라는 것. 두 가지는 확실하네."

 

여러분, 무엇을 더 알고 싶습니까?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그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현재 내게 주신 은혜에 확실하게 초점을 맞추고 서러웠던 과거, 암담한 미래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훌쩍 뛰어넘어서 내가 아는 한 가지 내가 아는 한 가지, 그가 내 구주시오, 저가 나를 구원하셨다고. 그 믿음, 그 신념 위에 서서 다시 세상을 보십시다. 밝은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주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은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혼미해서 때때로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도 못하고 은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도 못할 때가 많은 미련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많은 헛된 지식을 버리고 한 가지 지식, 한 가지 사랑, 한 가지 믿음에 초점을 두고 중심을 두고 다시 출발하는 그런 은혜의 사람,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빛에 속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삼상16:1-13, 5:8-14, 9:1-41

2009-09-09 09:48:34

 

사울왕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라를 이끌어가게

되자, 그를 기름 부어 세운 사무엘선지자는 아주 적잖이 실망

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더군다나, 사울왕이 자기 본분에서 벗

어나 제사장이 할 일까지 자기 멋대로 감행하자, 사무엘선지자

는 크게 절망하면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위로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는 이미 사울을 버렸다. 내가 이미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

들 중에서 왕이 될 사람을 하나 골라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

.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중

그 누구라고 딱 집어 말씀하시지 않고, 그 여덟 명의 아들 중

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사무엘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이새와 그 아들들

을 제사에 초청했습니다. 이새와 그 아들들이 도착했을 때에

맏아들인 엘리압을 보니, 그 용모가 아주 잘 생기고 키도 컸습

니다. 그래서 사무엘선지자는 속으로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서 선택하신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잘생긴

겉모습이나 큰 키만 보고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지만, 나 여

호와는 그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컨대, 사람의 겉

모습만을 보고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

이 어떠한지 잘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웅시대에 나오는 박대철이라는 사람은, 그 실제인물이

현 서울시장인 이명박 장로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거의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 시장은 약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현

대그룹의 모기업이라 할 수 있는 현대건설사장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정주영 씨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도 여섯이나 있었습니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다 잘

생기고 훌륭했습니다. 공부도 할 만큼 다 했습니다

 

. 그런데, 정주영 씨는 그 아들들과 동생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원모집을 통해서 입사한, 인척관계가 전혀 없는 이

명박 씨를 현대건설 사장으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극중에서 정

주영 씨는 봉급쟁이 신화를 보여주라고 하면서 박대철 씨에

게 현대건설 사장직을 맡기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이명박 씨가 훌륭한 업적을 많이 보여주었

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서 현대건설 사

장직에 임명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이명박 장로라는 분

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파격적인

선택을 받았겠지만, 아무 혈연관계도 없고 34세밖에 안 되는

이명박 씨를 현대건설 사장으로 임명한 정주영 씨야말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명박 씨가 그동안 아무리 놀라운 실적을

보여주었더라도, 그리고 또한 그가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

능성이 무한했다 할지라도, 어떻게 여덟 명씩이나 되는 아들들

을 젖혀두고 어찌 그렇게 결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보통 사람

으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

해서, 정주영 씨는 아무런 사심 없이 사람을 보고 판단했기 때

문에 그와 같은 선택과 결정을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사무엘선지자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했던 이

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유

념하면서 이새의 다른 아들들을 죽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중에는 적임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들 중

에서 하나를 선택하라 하셨고, 외모를 보고 선택할 것이 아니

라 그 마음속을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새에게 이 사람들밖에는 다른 아들이 없

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이새가 말하기를 막내아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는 지금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은 당장 그를 불러오라고 지시했습니

. 그리고 그가 올 때까지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급히 데려왔는데, 사무엘선지자가 그를 보니,

그는 총기도 있고 힘도 있어보였습니다. 물론, 외모도 잘생긴

홍안소년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바

로 내가 택한 사람이니,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

신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그 사람은

예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해주셨다고 열심히 증거하고 다녔습

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는 그 사실 여부

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

하고 질투한 나머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맹인이었던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축출을 당하

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님께서는 일부러 그 사람을

만나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인이었던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기 눈을 뜨게 해준 예수님이 자기 앞에 있는데도, 그는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주님과 헤어진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음으로써 비로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

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맹인이었던 그 사람은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다음에, 예수님 발 앞에 엎

드려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영적

으로 눈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눈이 멀었으나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

.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맹

인이라는 말이오?”하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차라리 너희가 맹인이었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가 하는 일을 스스로 다 안다고 주

장하기 때문에, 너희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자신

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

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겉에 나타난 것만을 보고서 다

른 사람을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영적인 눈이 밝을 때에는 자

기 자신의 죄까지도 밝히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남의 잘못만 보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의 눈은 원래 자기 자신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

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

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랫동안 선지자로

활동했던 사무엘까지도 그런 잘못을 범했으니, 우리네 보통 사

람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체념한 채 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운 이 세상에서 밝은 빛이 되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사명

을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1.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잠시 실수를 했으나, 하나님께서 항상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큰 실수를 하지 않고 하나

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자, 그 순간 성령께

서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로도 성령께서는 다윗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다윗과 함

께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야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다시 말해

, 세상욕심과 질투심이 없고 겸손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을 잘못 판단하

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세상 욕

심과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

하러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거듭나기 이전에는 주님을 몰라보고, 그를 따르는 사

람들을 잡아 죽이고자 열심히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눈이 밝아지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

었고, 그래서 그는 주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서 죽는 순간까

지 그 사명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과거에는 우리의 마음이 어둠

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5:8)’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이란, 참빛이신 예수님

의 반대세력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욕심과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

는 모든 세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요컨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악령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빛이 되시는

주님을 우리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면 됩니다. 세상욕심에 끌

려 다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그 뜻대로 살고자 애쓸 때, 우리 마음에는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 생각해보라(5:10)’고 권면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찾아서 그 일을 다

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십

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욕심이나 미운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순간 악령이 그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악령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무

가치한 일에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악한

일을 보게 되면, 그런 사실을 숨길 것이 아니라 폭로해야 한다

, 바울선생이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본래 속성은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보다는 세상유익과 즐거움에 더 쉽게 빠

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항상 빛의 자녀라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어두움의 일에 함께 빠져들 것이 아

니라, 그런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춰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

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

별히 선택함을 받은 빛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춰야 할 하나님의 자

녀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면서

 

2.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과거에는 우리의 마음이 어둠에 싸여 있었

으나, 지금은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생활로 증명해야 한다(5:8)’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

울은 주장하기를 이 빛을 간직한 우리는 선한 일과 옳은 일,

그리고 진실한 일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과 옳은 일, 그리고 진실한 일이 어떤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은 성령

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욕

심을 잘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모든 마음을 기울이

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시면서, 무엇이 선한 일이고 옳은 일인

, 어떻게 살아야 진실하게 살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시고,

한 그대로 살 수 있는 힘과 지혜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강사가 세미나를 인도하던 중에 호주머니에서

10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높이 쳐들고서 이 수표를 갖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참석자가 다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강사는 수표를 마구 구기고서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다시금 수표를 구둣

발로 마구 짓밟은 다음에 먼젓번 같이 물었습니다. 물론, 사람

들은 이번에도 모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때, 그 강사는 힘찬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

100만 원짜리 수표를 마구 구기고 더럽게 했을지라도,

가치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별 일을 다 겪

게 됩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거룩한 자

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훨씬 더 많습니

. 그래서 때로는 상심도 하고 절망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사람들이 종이에다가 글로

쓴 계약서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나 우리 자신의 공로에

따른 것도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그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만 갖고 있으면 아무런 소

용이 없습니다. 그 가치가 드러날 수 있도록 실제생활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우리가 선하고 옳은 일에 힘쓰면서

언제나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힘쓸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되시

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

. 결코 어둠에 속해서 살면 안 되는 빛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어두운 세력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우리는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잠자는 자여, 잠에서 깨어나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환히 빛을 비

추어 주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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