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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0:1 - 18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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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의 자화상 /10:1-6/ 곽선희 목사

2014-11-18 15:21:09

 

'목자는 시편 이십삼편을 본다하'는 그런 이름에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저자인 필립켈러라고 하는 분은 팔년 동안 목장주인으로 생활한 경 험을 토대로 해서 양에 대해 서 나름대로 기록을 하고 특 별히 시편 이십삼편에 있는 내용을 더깊게 더확실하게 경 험해서 방정해 주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는 유니벌스티 토론토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많이한 사람이고 그리고 토양 학자 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책에서 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참으로 나약한 동물이다. 그렇습니다.

 

뿔 도 없고 여러분 아시는 대로 물어찢을수 있는 온곳니도 없 습니다 뱀같은 독도 없습니다 어는 짐승처럼 사나운 발톱도 없습니다. 그저 무방비적인 나약한 동물입니다. 자지기보 다 작은 동물한테도 꼼작 못 하고 먹혀죽는 그런 하잘턱없 이 약한동물입니다. 그야말 로 순하고 착한 양입니다. 그러나 양에 특징이 있습니 다. 그 분이 하는 말은 이렇 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보수적 습관이 강한동물이라 고요"

 

이점에 문제가 있습니 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 면 도랑이 생길 정도로 같은 길을 간다. 같은 길로 다닌 다 말입니다. 그래서 중동에 다니면서 보면 아주 넓은 산 이 있지요. 산에 오선지를 그려 놓은 것 같이 길이 있어 요.

 

하나 줄줄이 길이 있는 데 이 길이 뭐냐? 양이 그 길 로만 거기로만 수백 마리가 계속 다니니까 도랑이 생길 정도로 자기 다니는 길로만 계속 다니는 거예요. 이래서 아주 땅을 못 쓰게 만들어요. 그런가하면 황폐하게 될 만큼 같은 언덕에서 풀을 뜯는다는 것입니다.

 

먹기 시작했으면 그 언덕에서만 계속 풀을 뜯 어요. 그저 그 마른풀 노랗 게 말라버린 1cm도 안되는 풀을 그냥 뜯어먹어요. 이렇 게 해서 양이 그 자리에 머무 는데로 내버려두면 그 산이 완전히 못쓰게 되고 그들이 다 황폐하고 말아요.

 

그런가 하면 질병과 기생충이 들끌을 만큼 그는 그 목장 그 목양장 을 더럽힙니다. 그 우리를 더럽힙니다. 도대체가 자기 로서는 그 대책을 세우지를 못해요. 거시서 그냥 싸고 먹고 이렇게 해서 마침내는 거기서 병이 들끌어요.

 

그래 도 그냥 거기 머물러 있는 거 예요. 죽을 때 까지 이게 양의속성이라는 거지요. 대 게 고집이센 그런 짐승이라는 말이에요. 글쎄올시다.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 고집이 있긴 있습니다만은, 양은 철저하게 보수적 고집이 있는 그런 동 물이라는 거지요. 결론은 뭐 냐하면 그럼으로 양에게는 목 자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이 들은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자연도 망치고, 자기도 죽고, 그래서 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이동을 시켜야 합니다. 환경 을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목 자가 저들을 인도해서 그 다 음 초장으로 그 다음 목장으 로 계속 장소를 옮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풀밭도 살고 목장도 살고 양도 살고 그것 이 양에 생리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는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목자다. 비유적으로 말 하며 목자에 자화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신 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단어 일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 냐하면 예수님 친히 나는 이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말은 영어로 I am 직선적으 로 나는 무엇이다 나는무엇이 다. 일곱번 말씀하시는데 이 것이 요한복음에 주제입니다. 그것은 나는 말씀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다. 이 일곱마디에 말을 설명하면 이것이 요한복음입 니다 나는선한 목자다 그 말 에 깊은뜻이 뭐냐하면 나는 선한 목자다. 너는 선한양이 되라 그말씀을 하십니다 여 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뭐냐하면 선한 목 자인 자기자신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양들이 선한 양이 되 어줄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 오늘 본문 에 말씀대로 나는 선한 목자 다. 그걸 먼저 말하면서 선 한 목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안다는 문제가 있어 요. 선한 목자를 선한 목자로 알아야 선한 양이 되는 거지 요 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보니까 아침에 목 자가 양에 우리를 방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밤새껏 얼 마나 수고했는지 그 축축한 양에 우리에서 고생을 했는것 목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적당한때 적당한 장소에 적당 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아 침에 이제 푸른초장에 햇빛이 들고 그저 풀을 뜯기위해 좋 은시각이 되서 적당한 시간에 오신것 또 양들이 지금 먹어 야 될 시간이에요. 모든것을 아시고 선한목자는 아침 일찍 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대로 잠 깐 암시됩니다만은, 문지기가 양의문을연다 그랬어요 양에 우리에 문을연다. 양에 우리 의 문을열면 이제 목자가 저 들을 만나게 되는데 양이 목 자를 알아보고 목자가 양을 알아본다는 거지요.

 

여러분 아시는대로 문지기나 목자나 양에눈으로 볼때는 사람인것 마찬가지요. 누가더 키가 크고 작고 하는 것도 아니고 요. 또 여기에 암시된바같이 도둑이요 강도요 그 사람들 도 사람은 사람이요 양이 볼 때는 그러나 양은 알고있습니 다.

 

이사람은 강도 이사람은 뭐 이사람은 문지기 돈 받고 밤새 양에 우리나 지켜보고 있는 그런사람 진정으로 사랑 하는 목자는 이사람 그들은 목자를 알아봅니다. 선한목 자 자기를 위하여 찾아오시는 목자 자기를 사랑하는 목자를 알아본다는 거지요.

 

예수님 말씀이 이비유속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선한 목자다 내 음성을 들어야하고 나는 너를알고 너는 나를안다 서로 알아야지요 목자와 양사이에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 지는 거예요. 그게 무슨 지 식이 뭡니까? 뭐 이름을 압니 까 생일날을 압니까 뭐 과거 를 압니까 그런얘기가 아니지 요.

 

오직하나 저분은 나를 사랑한다 저분은 나를사랑한 다. 이사실을 알아요 선한 목 자와 양 사이에 이런 아름다 운 관계가 이루어져요. 그래 서 으레이 이 시간되면 오실 거다 기다렸다가 목자에 음성 이 들리면은 초초해집니다 웅 성웅성 합니다 그래이제 문지 기가 문을 열면은 양들이 목 자를 보고 반가워 합니다.

 

아주 반가워하는 모습이지요 상상을 해보세요 서로이렇게 안다는것이지요. 그뿐 아니 라, 오늘 본문에 더아름다운 말씀은 양에 이름을 부른다는 거예요. 하나하나 이름을 부 른다 이것은 개인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에요. 개별적으 로 안다. 그래서 뭐 검둥이 흰둥이 뭐 점백이 이렇게 부 르면 다 알아서 하나씩 하나 씩 턱을 넘어서 밖으로 나온 다.

 

양은 목자에 이름을 안 다. 얼마나 아름다운얘기인 지 모릅니다. 가끔 우린 그 런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아실까? 내 게 관심이 있을까? 대단히 죄 송하고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은, 우리 교인들이 저를 만났 을때

 

"목사님 저 모르시지 요?"아이고 전 정말답답해요 괴롭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건망증이 많아서 그걸, 어떻게다 기억을 하겠습니까? 아니 집사가 오천명인데 내가 어떻게 집사를 알겠습니까? 그런데 아니 이분이 딱 이렇 게 묻거든요 참어려워요 특별 히 해외에 갔을때

 

"목사님 저 누군지 알겠어요"이것은 고 둥고시 시험보다 더어려운거 예요 참 뺨을치는것 같아요 꼭알아야 되겠는데 본듯 안본 듯 한데 알제간이있나 그래서 그럴때에 제가말합니다

 

"죄 송합니다 아이고 참 죄송합니 다"

 

그런데 제발 그러지말고 제가 소망교회권사 입니다. 요렇게 말해주면 참좋겠는데 아니 이것 남을 심문하는 거 예요. 이것도 고욕입니다. 어쨌든 전 그럴때마다 죄송하 게 구구한 설명을 드립니다.

 

그러나 저도 할말은 있어요 사람의 기억력은 삼백명 이상 의 이름을 기억못합답니다. 아는척 해봐야 삼백명 이내입 니다 평균 삼백명밖에 기억못 한다. 그러니 내가 삼만명을 어떻게 알겠어요. 알려고 하 지도 않이요.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다 알지도 않이요. 그렇게 덤덤이 되는데 그러고 보면은, 목자로서는 시원치안 은 목자지요. 그러나 한가지 잊지마세요. 하나님은 아십 니다.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 을 다모릅니다만은 하나님은 여러분 하나하나를 By name 이름을 하나하나 Personalic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아신 다는 말입니다.

 

알되 특별히 여러분의특징을 압니다. 형 편을아십니다 나약함도 아십 니다 잘못된 습관도 아십니다 말썽꾸러기인 것도 아십니다. 하필이면 꼭못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그런 인간됨도 다 아십니다. 양이라는 것이 많 다보면 거기 오족 별것이 다 있겠습니까?

 

다 알고 있어요. 같은게 아니예요 양이라고 이 모든 사실을 개별적으로 알고 계시단 말씀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목자는 압 니다. 양에 입맛을 알아요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지 양을 위하는 것인지 목자가 압니다.

 

양은 몰라요 양은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지만은 아니다 이놈아 그 건 네게 해로운거다. 이리와 라 이것이 네게 이로운것이 다. 분명히 목자가 알고 있 지요. 양이 아는것이 아니예 요. 여러분 다보셨을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만은 유명한 영 화 쉰들러리스트 라는 영화가 있지요. 너무나도 유명한영 화입니다

 

. 못본사람하고는 얘기 안합니다. 이영화 육백 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 을 히틀러와 그일당들이 죽일 떼에 그 때에 살아남기 위해 서 여러가지로 백방으로 애쓰 는 그런 모습입니다. 많은 방법으로 애를써서 얼마간에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기회 를 얻었습니다. 이제 그쉰들 러가 살려낼 사람에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그 장면이 가장 감격적입니다. 기억력을 발 해서 자기가 아는사람에 이름 을 거기에 적습니다. 천명을 여기이름이 쓰여진 사람은 살 아남는것입니다. 그리서 빼 내는것입니다. 죽을때서 빼 내는데 그것이 쉰들러리스트 입니다.

 

리스트에요 리스트 에 기록합니다. 기록된 사람 은 삽니다. 문제는 쉰들러라 는 사람에 머리속에 기억되어 있는사람은 사는 거예요. 여 기서 빠지면 죽는 거예요. 그것을 밤새워 가면서 기억을 해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적 어나가고 그 명부를 가지고 헤매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 나 감격스러우십니까? 여러 분 분명히 구약성경에서 말씀 합니다. 너희 이름이 내손바 닥에 있으니라 하나님은 우리 에 이름을 손바닥에 써넣고 기억하고 있다. 절대로 이름 을 잊어버리지 않겠다. 너희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사랑 한다는것을 말해주고 있습니 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있 는바와같이 아브라함와 모세 야, 사무엘라, 또 솔로몬아 모 든 허물이있고 부족한 사람들 이지만은 하나님께서 하나하 나 불러서십니다. 거기에 의 인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 님이 그하나하나를 다 사랑하 세요. 개별적으로 사랑해서 글을 쓰시는 것을 볼수있어 요. 이거 하나님에 사랑이예 요.

 

특별히 오늘 본문에말씀 우리에 마음을 뜨겁게하는 부 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 게 다 이름을 부른다음에 앞 서가신다는 거예요. 저는 이 대목이 너무 마음에 은혜가 되요. 양을 다 불러낸 다음 에는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이 뒤따라 가더라 어찌 생각하면 간단하게 생각되지만은 이게 얼마나 오묘하고 귀한말씀인 지 모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리저스 다 이제트에 나타난 이야기인데 요 서양목동과 동양목동을 비 교했어요. 그런기록이 있는 데 그얘기는 이렇습니다. 서 양목동은 그 가축을 뒤에서 몬다는 거예요. 자 생각해 보세요 가축을 앞에다 놓고 몰게되면 어떻게 됩니까? 여 러분 서부활극에서 봤지요. 그 소를 몰때 소를 앞서가게 하고 뒤에서 모는 거에요 때 리고 곁길로 가는놈은 붙들어 오고 또 이리 때리고 저리 때 리고 앞으로 그냥 몰로 갑니 다.

 

이렇게 가축을 몰지만은, 동양목동은 양을 인도한다. 자기가 앞서가고 가축을 뒤따 라 오게 한다는 거지요. 그 런 풍속에 대한 차이점을 비 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귀 한 이야기에요. 보세요. 앞 에다놓고 뒤에서몰때는 결국 은 강꾼이 발동되는 거예요. 위협을 하는거에요 잘못된길 로 가는놈은 때려가면서 인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간다 할때는 어떻게 됩니까? 양이 자기를 따라올것을 믿고있는 거에요. 저는 예루살렘에 갔을때 그 어린 아이가 목동 하나가 양 삼백마리가량을 인 도하는것을 봤어요. 전 그 뜨거운 햇빛에서서 일부러 한 삼십분 동안 본것 같습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조그만 아이가 목동이 땡강땡 강땡강 총을 치면서 가니깐요 그 양이 삼백만이나 됩니다.

 

많은양이 줄을서고 따라가는 데요 한놈도 이탈자가 없어 요. 내 그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뭔지 아세요. 우리 교 인이 다 이러면 얼마나 좋을 까 아 참아름다운 장면이예요 목자는 양을 믿어요.

 

따라올 것이라고 그 가운에는 말썽꾸 러기 있어요 고집센놈도 있어 요. 또 가끔 가다 쓰러지는 놈도 있어요 또 비틀거리는 놈 별놈다 있는것 알아요. 알지만 꼭 따라올거라고 믿어 요. 그리고 저는 앞서가고 양들은 절렁절렁 따라와요. 그게뭐 한 눈파는 놈도 있지 그러나 결국은 다 따라온다 말입니다.

 

이것이 목자에 믿 음이예요. 양이 목자를 믿는 건만 아니예요. 목자가 양을 믿고있는 거에요. 그러기 때 문에 앞서가는거지 생각해 보 세요. 양이 목을 맵씁니까 자갈을 물렀습니다까 그냥 내 버려둔거예요. 목자가 앞서 가면 졸졸졸졸 따라온다 이거 에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 계냐 이거예요. 거기에믿음 이 있고 신뢰성이 있는 거지 요.

 

사랑이 있고 얼마나 아 름다운 이야기 입니까 언젠가 한 번 여집사님이 그래요 자 기아이가 어린아이가 벌써 말 썽꾸러기입니다 어찌나 사고 를 많이내고 게다가 너무너무 말썽을 부려서 걱정이라고 게 다가 한마디 더해요.

 

제에비 닮아가지고 그래가지고 내가 물어봤어요 말썽꾸러기라서 낙심이 된다해서 몇살이요 그 러니까 국민하교 사학년이래 요.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마 세요. 물론 세계적인 인물이 라고는 합니다만은, 성어거스 틴에 어머니는 그 아들이 방 탕할때 형편없이 막당하고 죄 로해 갈때 십삼년을 기달렸습 니다.

 

전혀 낙심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오로지 하 나님 앞에 성실하게 끝까지 사랑하고 믿고 기도하고 기달 렸어요. 결국은 그 아들이 로마로 갔다가 암무르스를 만 나고 가출까지 했다가 성자가 되어가지고 돌아옵니다.

 

기 다려요 그게 믿음이예요 좀 죄송한 고백입니다만은 제가 개인적으로 목회자로서 고백 합니다만은, 어떤때 교인들이 와서 어떤 교인이 있는데 아 그분이 어떻게 어떻게해서 말 썽을 부리고 어떻게 말이많고 뭐 좀 문제에인물입니다.

 

그 렇게 말할때 제가 삼십년전에 목회할때는 철없이 그래요 또 찾아가서 군면을 했지요. 군 면해달라고 지금은 부탁을 누 가해도 제가 잘안합니다. 가 도록 해볼께요 하고 안갑니 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 리고 기다립니다.

 

하나님께 서 인도해서 성령으로 말씀으 로 함께해서 그속이 변화될때 가 오더라구요 가만히 기달리 면 언젠가 이루어져요. 내가 만일 그를 직접만나 군면을 하게되면 나에게 치부를 들어 냈다는것때문에 더 멀어져요.

 

목사님 만나는게 꺼리고 부끄 러워지고 이거 안된다 말입니 다. 그러니까 뭐 부부싸움 했다고 네가가서 말려달다고 해도 저 안갑니다 그거는 요 그 모른척 해야지요 그것 다 알면 됩니까 어쩌다가 실 수가 있다하더라도 그러지 않 아요 목자는 양을 믿어요.

 

앞서가면 줄렁줄렁 따라와요. 뭐 이리가고 저리가다가도 따 라와요. 이걸 잊지말아야 되 요. 그리고 목자는 앞서가면 서 모든위험을 자기가먼저 당 합니다. 맹수를 만나도 먼저 함정에 빠져도 자기가 먼저 자기가 먼저가며 먼저 고난을 당합니다. 양들은 믿고, 안심 하고, 그를 따릅니다. 전적으 로 믿고 따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안습니다. 그러기 에 하나도 흐트러지지 안고 삼백만이나 되는 양이 줄줄이 따라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한 길로 따라가기 때문에 한 번 지나가면 골이 패일정도로 된단 말입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또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귀한 말씀을 주시고 하나 더 있습 니다.

 

십일절과 십팔절에 보 면은, 나는 선한 목자다 선 한 목자는 양을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는 목숨을 버리고 양을 사랑해서 어떤 때는 대신죽어요. 그런가하 면,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노라 스스로 목숨 을 버려가면서 양을 사랑해 이걸알기 때문에 이걸믿기 때 문에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거지요.

 

긴얘기가 필요없어 요. 왜이리로 인도합니까? 왜저리로 가라는 것입니까? 왜하필이면 이골짜기 입니까? 절대 묻을 필요가 없어요. 사방이 움침한 골짜기로 지나 가도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거예요. 이 언덕을 넘어서면 저기 푸른초장이 나타나는 거 지요.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예요. 더 이상 아무말 도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그저 믿고 조용히 따라가 기 다려 보세요.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뉴욕주에 한 휴양지에 거기에 문레이크 나 치라고하는 그런 레스토랑하 나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거 기에 조지 쿠렐이라고 하는 그런 인디안출신에 요리사가 하나 있어요. 요리를 정성껏 만드는 분인데 어느날 까다로 운 손님 하나가 왔어요.

 

주 인도 이걸 알아요 저분은 한 번 음식 갔다주면은 도로 물 러 다시 해와 골탕먹이는 것 을 알지만은, 단골손님이라 그럴수 없어서 단단히 주위 를 주었지요. 주인은 왕이다 몇번말씀하시든 몇번 퇴자를 놓든 그저 줄거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순종을 해야 하는니 라 잘 모셔야 하느니라 그랬 어요.

 

아니나 다를까 아 그 저 후렌치프라이 감자를 이렇 게 썰어서 기름에 튀긴건데 이것을 만들어 주었더니 너무 크다고 조그만하게 또 다시 만들어 주니까 너무 두껍다고 얇게 또 하면 또 얇게 마지막 에 그냥 집어치우고 싶지만은 주인이 말했거든요. 손님은 왕이라고 그래서 참고 죄송합 니다 죄송합니다.

 

그래가지 고 이감자를 얇게 얇게 종이 장처럼 얇게 썰어가지고 튀겨 가 주었더니 바삭바삭 그걸 씹으며 젓가락으로 집을수 없 을 정도로 얇게 씹으면서 음 좋다고 만족하다고 아 소문이 나는데 그 집에 가면 종이장 처럼 얇은 감자튀김이 있다고 그래가지고 손님이 모여드는 데 이게 포테이토칩입니다 때 돈을 벌었답니다 때돈을 벌었 어요 그저 어떻게든 마음대로 안되는것 같지만은 이것은 주 인에 명령이요.

 

그래서 순종 해라했기때문에 순종순종 했 더니만 이런 결과가 왔다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 니다. 여러분 선한목자 믿습 니까? 그러면 나는 선한 양이 되야지요. 여러분 스스로 생 각해 보세요. 네가 어느정도 에 양인가 정말 착하고 좋은 양인가 목자는 양을 믿고 있 는데 나는 이모양이래요. 언 제까지 말썽꾸러기가 될것입 니까?

 

사방에 움침한 골짜기 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 려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 편 이십삼편일절을 보세요. 여호하는 나에 목자시니 네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 그것이 바로 우리에 고백이요 선한 목자에 신앙입니다. 선한 목 자에 선한 양에 순종입니다. 그에 찬양입니다. 기도하십 시다.

 

 

 

 

 

 

10:1-10/ 양의 문 / 한경직 목사

2014-08-25 19:33:02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요한복음 107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그 다음 한 절 건너가서 9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아침 우리를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 혹은 상징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가령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들이라고 비유합니다. 또한 머리와 그 지체의 관계로, 예수님은 머리요, 우리는 그 지체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혹은 목자와 그 양들의 비유로, 예수님은 목자요, 우리는 그 양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7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양의 문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문을 통하여 방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문을 열면 방을 들여다볼 수도 있습니다.

 

일찍이 야곱이 에서의 노를 피해서 하란으로 도피하여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므로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 삼아 자다가 꿈 가운데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보았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잠이 깨어 하는 말이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이와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문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말하자면 하늘의 비밀을 보았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문이 열리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시편 7823절과 24절을 보면 저가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이와 같은 말씀이 있는데, 문이 열리면 만나와 모든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양의 문이라는 말 가운데는 이러한 뜻이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곧 예수를 통하여 하늘의 비밀을 볼 수 있으며, 예수를 통하여 하늘의 모든 축복을 받으며, 또 문이 닫히면 그 안은 안전한 것과 같이, 우리가 언제나 주 안에 있으면 안전하고 행복하게 됩니다.

 

이제 그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는 하늘의 문입니다.

 

곧 하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진리의 문입니다. 하늘은 신비합니다. 이 우주는 신비합니다. 우주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크고, 높고, 깊고, 신비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바다와 나무와 돌, 곧 우주 자체를 숭배하였습니다. 자연계 자체를 신으로 알았으며, 또 자연계의 만물을 모두 신으로 알고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원시인들은 대체로 자연숭배의 종교를 지녔습니다.

 

또 어떤 종교인들은 우주 전체를 한 신으로 봅니다. 이런 이들을 흔히 범신론자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1절을 여러분은 다 기억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 자체가 신이 아니요, 다만 피조물인 사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하나님은 자연 법칙으로써 물질 우주를 다스리시고, 또 인간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진리를 알려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히브리서 1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느니라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보면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하늘의 문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는 천국 곧 하늘나라의 문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양의 문인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사도행전 41절 읽어 보세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천국은 거룩하고 깨끗한 곳입니다.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었습니다. 죄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성이 부패하여 모든 인간들은 또한 자기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느니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모두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슨 깨달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노력과 선한 행실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탄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분명히 선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사도 요한은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로마서 5장에 선언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 무거운 죄의 짐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셨으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드는 이들은 모두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오직 하나의 문입니다. 양의 문입니다.

 

 

 

셋째, 또 문은 보호와 안전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방 안에 들어가서 그 방문을 닫게 되면 그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안전하고 보호를 받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나라 초기에 어떤 이가 그만 실수로 사람을 다치게 해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그러한 범인은 도피성이란 곳이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면 아무나 그 생명을 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죄인으로 형벌을 받아 마땅하나 그리스도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면 우리는 안전하고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로마서 81절을 읽어 보세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로마서 8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고 천국 안에 들어간 이들은 과거의 범한 죄로 말미암아 조금도 고민이나 고통을 더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안전합니다. 모든 죄는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 안에 있는 이들은 언제나 풍부한 생명의 양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다윗은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시편 23편에서 이러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또 그 후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리스도의 문을 통하여 여호와의 집에 들어간 이들은 언제나 풍부한 생명의 양식을 받고 선함과 인자하심이 그 평생을 같이 하십니다. 참된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혹은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인 축복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고,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로 보고, 바로 찾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절망에 빠진 인간들이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간 이들은 아주 안전하고 풍부한 생명의 양식을 받으며 가장 행복한 삶을 이 세상에서도 누리고, 또 이 축복은 인간의 육신을 벗어놓은 후에도 영원히 하늘나라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문입니다.

 

전에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가 그만 일시 감정에 휩쓸려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큰 범죄를 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오래 복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감방에서 성경을 읽게 되어 예수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되어 찬송가의 한 절과 같이 빈 손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십자가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너무 감격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습니다.

 

그는 본래 그림을 잘 그리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수에게 종이와 붓과 먹을 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간수는 하찮게 생각하여 오래 응하지 아니하다가 계속해서 간절히 구하게 되니 마루를 닦던 걸레를 하나 내어던졌다고 합니다. 거기에 그려보라고. 그리고는 필묵도 던져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죄수는 그저 감격한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의 얼굴을 그 걸레 위에 그렸다고 합니다. 걸레 위에. 그 후, 그 걸레 위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초상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져서 말하자면, 쓸데없는 걸레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주께 나아와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하여지면, 우리의 삶에도 주님의 거룩하신 얼굴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비록 더럽고 부족하지만, 참 우리 얼굴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날 수 있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근본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감사함을 드립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몽매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우리는 죄가 많아서 죄 가운데 더럽게 살았지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문을 열어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여 주셨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주셔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셨고,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나 하늘나라에서 금생과 내생에 무한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함을 드리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우리가 무슨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서 나온 것이 아니옵고 우리가 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걸레 같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고 구원하여 주셔서 우리가 비록 부족하나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얼굴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나타날 수 있는 그 은혜의 자리까지 우리 모두를 높이 끌어올려 주시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오직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목자와 강도 /10:1-6

2023-03-23 23:49:37

 

사람 목자에 대한 기대는 성경을 통해서도 그렇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도 무너지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이 사람들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이처럼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소위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그들의 양 떼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 떼를 먹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들의 악행을 보면 양 떼를 먹이기보다는 오히려 양 떼 가운데 살진 양을 잡아먹었고, 그 가죽을 벗겨 자기들이 입었습니다. 결국은 양들을 실질적으로 돌볼 목자가 없어 양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슬프게도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친히 목자가 되어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그들 위헤 한 목자를 세워 먹이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423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오랜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우실 목자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에서도 이스라엘 목자의 문제는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양 떼를 잘 먹이지도, 보호하지도 못했습니다. 자기의 배를 불리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예수께서 고치셨을 때 그들의 왜곡된 성향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지 못한 놀라운 일에 대해 손뼉을 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소경을 고쳤다는 이유로 즉시 예수님을 비난했고, 그들이 품어야 할 양인 소경을 예수님을 옹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공동체에서 쫓아 내버렸습니다. 그것은 직무유기였습니다.

 

이들의 악한 행동은 에스겔 344절의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사람 목자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제는 그들을 진정으로 돌볼 선한 목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직무유기를 지적하시면서 예수님은 에스겔서 34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내 양 떼의 목자가 되시며 내 종 다윗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오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기는 양의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양을 치는 것이 경제생활의 주요소였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집마다 수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 마리의 양을 길렀을 텐데 이를 위해 마을에는 커다란 공동 우리를 만들어 두고, 밤에는 안전하게 우리 안에 양을 몰아넣고 밤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지붕이 없이 울타리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 문을 하나 만들어서 밤에는 문지기를 고용하여 문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문지기의 역할은 양을 절도나 강도, 혹은 짐승들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혹 문지기를 둘 형편이 되지 못할 때는 목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밤새 문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문지기가 파수를 서도 절도와 강도를 막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살진 양을 잡아먹고자 밤에 슬쩍 담을 넘는 절도와 강도를 막아내는 것은 그들이 밤새 행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목자와 강도의 차이는 정상적으로 문으로 들어가는지, 아니면 담을 넘는 것인지에 있습니다.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몰래 담을 넘어가면 절도요, 강도입니다.

 

반면에 목자는 아침이 되면 양 우리로 들어가 양을 몰고 나오기 위해 우리의 문으로 갑니다. 그때 문지기는 우리로 들어가는 하나밖에 없는 문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목자들이 도착하면 목자를 알아보고 우리의 문을 열어주어 참된 목자만을 들여보냈습니다.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그래서 양들은 상황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밤중에 우리를 슬쩍 넘어온 절도이며 강도인지, 아니면 아침에 문을 통해 우리에 들어온 자신의 목자인지 말입니다. 절도와 강도의 난입은 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치기 위해 문으로 들어옵니다.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다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해서 목자가 아닐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명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유익을 챙기고자 슬그머니 들어온 절도, 강도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을에서 여러 목자가 공동 우리를 사용하게 되면 아침마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양 무리 속에서 자신의 양 떼를 불러 모아 내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인데 복잡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들에게 그 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어떻게 수많은 양 떼 속에서 자기 양들을 찾아내고 데리고 나아 가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에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면 목자는 양 우리로 들어가 자기가 기르는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3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단순한 집단적 관계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수이기도 하지만 목자와 양의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살펴보고 양의 특징을 보아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목자는 양을 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하나하나 살펴서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때 양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가 자기 목자임을 알고 목자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고 그 소리에 즉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 섞여 있던 양떼 속에서 자신의 양을 불러내고 인도하여 갑니다. 그때 목자는 양을 앞서갑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갔습니다.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가파르고 험악한 지역이 많아서 목자가 먼저 앞서 갔습니다. 양들을 먼저 보냈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앞서가는 순간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러기에 목자이신 예수님이 앞서 가시도록 그분에게 나의 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을 따르는 것은 어두움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의 인도를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삶이란 규칙을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규칙을 가지고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 길에 서 있지 못했습니다.

 

요즘 이 시대의 리더임을 자임하고 있는 586세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삶이란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도 규칙이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고, 그로 인해 살아 계신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신의 삶의 통치권을 기꺼이 예수님에게 내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따라가면 양은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우리를 속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이 보호받는 길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른 달콤한 유혹의 소리들로부터 우리는 돌아서서 즉각적으로 도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혹되면 죽습니다.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매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참 목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4장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 양 떼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됨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목사들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굉장히 크고 잘 생긴 개를 보았습니다. 이 개은 어떤 개냐고 여쭈어보니까 잉글리쉬쉽독이라고 했습니다. 양치기개로 유명한 개입니다. 양들이 허툰데로 가지 않도록 목자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자를 돕는 쉽독은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사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음성만을 듣고 응답하여 그 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음성은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때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생명의 자리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양은 오직 목자만 따라간다 /10:1-21/ 유기성목사

2022-09-23 12:44:06

 

10: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18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19 이 말씀 때문에 유대 사람들 가운데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20 그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귀신이 들려서 미쳤는데, 어찌하여 그의 말을 듣느냐?" 하고, 21 또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말은 귀신이 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어떻게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양이라는 내용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라 오히려 설교 준비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정말 예수님의 양이 아닌데 자신이 예수님의 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또 심각한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선한목자교회! 이름만 들어도 교회가 얼마나 은혜로울지 상상이 된다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목사님이 아닐걸요하시는 것입니다. 다들 왜요?” 하고 물었더니 선한목자교회지 선한 양 교회는 아니잖아요?” 모두들 잠시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여러분, 다 예수님의 선한 양입니까?

 

생각해보니 저도 최근까지도 진지하게 나는 양이라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싫어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유치부 때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성극을 하였는데, 제가 하얀색 타이즈를 입고 양 한 마리로 출연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창피했는지 울었습니다. 마치 내복만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같은 것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솔직히 독수리나 사자가 되고 싶지 양은 너무나 싫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양이 되고 싶습니까? 양이 된 것이 감사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양의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은 약하고 미련합니다. 양은 내버려 두면 도랑이 생길 정도로 같은 길만 가고 한번 먹기 시작하면 한 곳 풀만 계속 뜯어 먹어 주위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시력도 좋지 않고 냄새도 잘 맡지 못하고, 쉽게 구렁텅이에 빠지고, 절벽에 잘 떨어집니다.

소나 닭, 개는 주인 없이도 얼마든지 삽니다. 그러나 양은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우리를 양이라 하셨을까요?

반드시 돌보는 목자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은 똑똑하지도 강하지도 않습니다, 단 하나 목자만 죽어라고 따르는 짐승입니다,

이렇게 예수님만 붙잡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7) 하셨습니다.

양은 양의 문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양은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을 해도 결정을 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하여 아멘이 되는 분은 양입니다.

이 말씀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주님의 양이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에 비유하신 것은 절도와 강도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도둑과 강도”(:8)가 양을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10) 온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지금 알지 못하는 곳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하고 싶어 합니까? 복된 가정을 꾸리고 싶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기르고 싶고, 사업도 잘하고 싶고, 명예로운 삶을 살고 싶고, 신앙생활도 은혜 충만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왜 이렇게 실패와 좌절의 연속입니까?

마귀의 존재와 역사를 모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왔습니다.

다윗 왕에게도 정욕의 시험으로 마귀는 역사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가룟 유다에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도 마귀는 역사했습니다.

마귀는 지금 우리에게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아니면 다 절도요 강도라니요? 예수님 말고도 훌륭한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도 들을 만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천국 문 앞에서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교훈과 가르침이라도 그것 때문에 영생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였다면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 돈 번 것이든, 명예를 얻은 것이든,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도적맞고 강도맞은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양이 목자를 따르듯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독수리 중의 독수리요 사자 중의 사자이시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목숨을 내어 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리하셨다면 우리야말로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때, 구원도 받고 꼴도 얻게 됩니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인생 성공의 문이 오직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데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성공적인 기업을 꾸려가는 데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목회에도 문이 있습니다. 교회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정말 구원의 길일까,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 더욱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순종해야 합니다.

 

104세에 소천하신 방지일 목사님 아버지는 방씨 문중 종가집 아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어 온 문중이 모여서 붙들어 매놓고 두드려 패는데, 물을 뿌려가며 때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때리는데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보고 할아버지가 내가 예수 믿을란다하며 아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문중 재산 다 버리고 거지 같이 고향을 떠나 산으로 가서 밭을 일구며 감자 심고, 옥수수 심고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농사가 그렇게 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나고 남쪽으로 피난 내려 왔는데, 방 목사님 후손들 85명의 목사, 박사가 났습니다.

 

여러분은 매사에 예수님께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살고 싶지만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알기 어렵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진정 양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그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보기 바랍니다.

 

저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비로소 예수님의 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예수님만 원하고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고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양이 된 것입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얻은 유익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은 점점 더 크고 강하게 느껴지고 육체의 욕심은 더 작고 약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갈 때, 친구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장교의 삶이 어떻습니까? 평생 군복을 입고, 군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얽매여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괴로워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는 것도 이렇게 자랑스럽다면, 주의 종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몰랐으니 주의 종의 길의 영광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저를 진짜 종으로 부르시는 순간이 왔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느냐는 부름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저 자신의 꿈과 계획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더 분명히 더 속히 응답하지 못했나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울면서도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 선택은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제 계획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2024년 세계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뉴욕 L4NY 로잔 회의 중에 뉴욕 교민 목회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로잔 4차 대회를 계기로 한국 교회 영적 대각성이 임하기를 기도하자는 갈망을 나누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에 너무나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로잔의 스텝 중에 도저히 임신할 수 없는 부부가 기적적으로 임신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모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흥분하여 그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는데, 그 가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겨 거부한다는 소식에 다들 당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부부를 원망하며 힘이 빠져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왜 누군가 영적 각성의 불씨가 되어주기만 기대합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철저히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살면한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보다 훨씬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예수님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반드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를 사용하소서!” 하고 기도합시다눈물로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깼는데 한밤중이었지만 일어나 그 꿈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양으로 살기만 하면 반드시 우리 자신의 삶만 아니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사회와 나라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 은퇴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주님은 계속 제게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여러 가지 일을 통하여 일관되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계속 반복하여 깨우쳐주셨던 메시지이고 전하고 또 전했던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저는 죽어라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가는 주님의 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한 다윗의 고백이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의 양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이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든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든 죽어라 주님의 인도만 따라 살겠습니다.”

마음이 간절한 분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양: 선하신 목자, 날 사랑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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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1) /10:1-18,25-31/ 김형익 목사

2021-05-07 09:53:35

 

1. 이 가르침은 비유가 아니라 비사(6): 비사(比辭)는 비유를 포함하는 가르침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매우 특징적인 가르침, ‘목자와 양에 대한 말씀을 10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10장 거의 전체에 해당하는 이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양인 성도들이 가지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이 관계를 잘 알고 그 관계 속에서 간다는 것이지, 혼자서 뭘 잘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적으로 관계이고, 그 관계는 근본적으로 주님과 성도, 목자와 양이 맺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이 가르침은 비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천국은 무엇과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아주 익숙한 어떤 소재를 가지고 영적 진리를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도 그 비유가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 전체를 비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6절에는 비유라는 단어가 있는데, 사실 이 비유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데 가령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에 대한 가르침에 나오는 비유라는 단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것은 비사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6:25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사실 비사라고 번역해야 옳은데, 비사란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비유보다는 큰 이야기입니다. 비유로서는 진리를 충분하게 드러낼 수 없을 때, 비사가 사용됩니다.

 

비사는 비유와 함께 은유들이 포함됩니다. 은유는 가령, “나는 선한 목자다혹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실 때 사용된 것입니다. 비유는 자연스러운 설명입니다. 그리고 핵심 요점이 하나 정도로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사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나니라고 하실 때,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이스라엘에나 어디서나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는 목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성도의 관게에 대한 영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목자와 양이라는 관계에 중심을 두고서 이런 식으로 하셔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큰 가르침을 비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포함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10장에 있는 주님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2. 두 개의 주요 은유

본문의 내용을 조금 들어가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주님은 여기서 두 개의 은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나는 선한 목자다” (11, 14~15)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는 양의 문이다” (7, 9)하신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알고 양들도 그를 압니다(14~15, 27). 그리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11, 15b, 17~18). 그러면 양의 문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3. 질문: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양인가?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본문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양인가?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까? 성경의 다른 말씀들도 그렇지만, 특별히 우리가 10장에 주님의 가르침,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 이 질문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첫번째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번째 질문입니다. 이것은 확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 것, 여러분이 진짜 그리스도의 양인 것을 여러분의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증거를 가지고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환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입니다.

 

4. 목자와 양의 관계: 먹이고, 보호하고, 인도한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쉬운 문제였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개주인과 개의 관계로 설정을 해야 더 알아듣기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팔레스틴의 당시의 삶의 정황을 아는게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보편적인 양치기 문화를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칠 때 그저 자기 동네에서만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씩 떠나서 소위 방초 동산을 찾아 양들을 먹이고는 또 이동하고 합니다. 그 때, 밤이 되면 그냥 들판에서 양들을 재우는 것이 아니고 그런 광야 같은 곳에서도 양들을 위한 우리들이 만들어져 있어서 야영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우리는 다른 짐승들이 넘어들어갈 수 없도록 돌을 쌓아서 울타리를 높이 만들었고 안으로 잠글 수 있는 문이 하나 있답니다. 목자가 그 우리를 빌려서 양을 집어넣으면 양우리를 지키는 문지기가 안에서 문을 잠그게 됩니다

 

. 이런 식으로 여러 목자들이 자기의 양들을 이렇게 하나의 우리에 집어넣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목자가 오면 문지기는 양을 맡긴 목자인지만 확인하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면 목자는 소리를 내서 자기 양들을 다 불러서 나갑니다. 양들이 섞여 있는데 어떻게 문지기가 관리를 하는가 하면 숫자도 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소리를 정확히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당시의 정황입니다.

 

여기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주님이 성도들과 맺으시는 관계를 설명하실 때, 당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이해 속에 공통적인 사항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먹이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상고할 때, 그리고 믿는 성도들과 주님의 관계를 묘사할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양을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 사이에 가장 근본이 되는 사항들입니다.

 

5. 관계의 근거1: 양은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조금 전에 제가 드린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양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오늘 서론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첫째로 그 관계의 근거는 양은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는 양은 그 목자의 양이 아닙니다.

 

아침에 목자가 양 우리에 오면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고 목자는 양들을 불러서 나갑니다. 5절에 보면, 다른 사람(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만일 목자가 왔는데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가지 않고, 다른 목자가 왔는데 혹은 도둑이 와서 부르는데 나간다면 그것이 그 양이 목자에게 속한 양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A. 인도와 섭리는 다르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목자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는 전혀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섭리적 인도하심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결국에는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는 목자의 인도는 매우 구체적이고 우리 삶 속에서 감지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목자의 인도는 양의 순종이라는 책임을 요구하게 됩니다. 적극적인 반응이 요구되는 수준이 목자의 인도하심입니다. 이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선하신 목자에 대한 의식적인 신뢰와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가령, 사람들이 주님이 인도하셨지요라고 말할 때, 주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물으면, “그냥 인도하신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이것은 섭리적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인도하심은 주님, 제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요?”라고 묻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구체적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 이것이 주님의 뜻이구나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저 인도해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하고 인도해주시겠지라고 생각만 한다면 그것은 목자의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하심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직 신자들, 주님의 양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바로 목자의 인도하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목자의 인도를 받고 사십니까? 그렇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양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되고, 성경은 절대로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6. 관계의 근거2: 양은 목자의 우리에 있어야 한다.

두번째로 내가 그리스도의 양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은 목자의 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목자의 우리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공동 양우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목자가 자기 전용의 양우리를 생각하고 하는 말씀일 것으로 이해합니다. 목자에게 속한 모든 양이 다 우리에 함께 있는데 홀로 우리 밖에 있거나 목자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양떼와 함께 있다면 그것은 그 목자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 있다는 것은 목자의 소유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목자가 소리를 내서 부를 때 따라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부르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만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목자의 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의 우리가 교회인가? 이 질문을 던지면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마는,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 하나를 다루려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저는 한국교회사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요, 설교자라고 할 김홍전 목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과거로부터 흘러내려온 폐풍 중의 한 가지가 바로 문턱을 아주 낮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인이 되면, 그 양의 우리 가운데로 들어갔다는 확증이 있느냐는 것을 물어 볼 시간도 없고, 물어 보는 일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인도를 구하지만, 그때에 그가 양으로서 목자에게 무엇을 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격, 그 전제조건이 구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자에게 인도를 구하게 되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현상이 심화되고 만연해지면 결국 기독교는 무당 종교와 하등의 차이를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의 양이냐,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여러분이 목자의 우리에 있다는 사실로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로서 단순히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다 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입니다.

 

A. 우리 안에 있는 양이 누리는 축복: 안전감과 평안

그러나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 우리가 참으로 목자의 우리에 있는 양이라고 할 때 얻게 되는 유익과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안전감입니다. 안전하다는 생각, 안도감 같은 것입니다.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는 것이 아니라, 높게 쳐진 돌 울타리를 보면서 누가 사나운 짐승이 넘어 들어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래서 안전감으로 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양이 누리는 안전감입니다.

 

영원히 목자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수 없고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가 회심하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전함, 빼앗길 수 없는 구원에 대한 확신인 것입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주님의 것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낮아져서 기독교인이 되는 현상이 만연한 이 시대에는 이런 경험은 매우 낯설 뿐 아니라, 대단한 믿음의 거인들이 가지는 경험인 것처럼 생각하는 거짓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전감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평안입니다. 주님이 떠나실 것에 대한 염려가 들기 시작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14:27). 바로 이런 평안이 목자의 우리에 속한 양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유익이자, 축복입니다. 어디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목자의 우리에 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바로 바로 우리 밖의 현실 세상의 위험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7. 양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상의 위험을 인식하라.

비록 그리스도의 양들은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좋은 꼴을 얻어 먹고, 보호를 받으며 인도하심을 받지만, 그 양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만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주님도 이 본문에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 위험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A. 공격하는 원수들(10, 1, 12~13, 벧전 5:8)

먼저는 공격하는 원수와 적들이 난무한 곳이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양들을 멸하려고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공격하는 적들이 있습니다. 1절에는 절도와 강도가 나옵니다. 10절에는 도적이 나옵니다. 도적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양을 도적질하여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12~13절에는 삯꾼이 나옵니다. 그는 목자가 아닙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양이 자기 양이 아니기에 그는 결코 마음을 다해서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고 인도하지 않습니다. 또 이리가 나옵니다(12). 이리는 양을 늑탈하고 헤칩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을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신 말씀을 놓고 볼 때 이리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7:15). 이들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깨뜨리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묘사하시는 바, 양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위험들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전쟁, 씨름, 경주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유혹하고 헛갈리게 하고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B. 목자를 따라가는 여정의 험난함(7:14; 23:4)

그러나 양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위험은 단지 그런 적들로부터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이 방초 동산으로 양떼를 인도하실 때에 가끔 험한 계곡과 산을 넘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7:14)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목자를 따라가면 그 길은 장밋빛 주단을 밟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습니다”(딤후 3:10). 그 대표적인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부족함이 없다고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말합니다. 목자를 따라가는 여정에 그런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8. 양들의 고백: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러나 그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어떤 해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그 손에 가지고 계시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이끌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모든 신자들, 그리스도의 양들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이고,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원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가 안전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음은 우리가 그분의 우리에 거하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양은 그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와 양에 관한 주님의 비사를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사, 우리 모두로부터 한 목소리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하는 고백을 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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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2) /10:1-18,25-31/ 김형익 목사

2021-05-07 09:55:59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일면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고 주님은 지금 이 본문 요한복음 10장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관계는 그냥 그렇고 그런 관계이거나, 혹 애매한 관계가 아니라, 매우 분명하고 확실한 관계입니다.

 

그것이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구분하여 알아듣는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3~5). 지난 주일에 우리가 주님과 가지는 관계의 근거는 첫째로 목자의 인도를 받고 있느냐, 둘째로 목자의 우리에 들어 있느냐에 놓여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내가 주님의 양인지를 확인하는 근거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임을 또한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밖을 걷어차고 나간다면 그는 결코 아침에 우리에 와서 각각 이름을 불러 목자가 인도하여 나갈 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따라서 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가운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에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양 우리의 문이 아니라 양의 문(7, 9)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은유가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나는 양의 문이다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는 선한 목자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저 선한 목자다라고 하시는 것으로 부족해서 양의 문이다 라는 은유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선한 목자의 은유에 비하면 이해하기가 약간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선한 목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 때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일까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선한 목자의 은유가 주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목자가 아무리 선해도 목자가 양에게 생명 그 자체를 줄 수는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양에게 생명을 주는 관계라기 보다는 십자가에서 죄를 속해주시는 사건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이 우리들, 주님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여기 또 하나의 은유,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말씀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께서 양의 우리의 문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잘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 이미 우리의 문이라는 개념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7절에서 문을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의 문이라고 하시지 않고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양과 주님이 가지시는 특별하고도 깊은 관계를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생명을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구원 얻은 다른 양 무리와 함께 한 무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양의 문이라고 하신 은유의 의미입니다.

 

2. 우리 안에 있는 양

주님께서는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오는 자는 다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누리게 되는 은혜와 축복과 보장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문을 통해서 우리로 들어오셨다면 여러분이 누리는 은혜와 축복과 보장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보장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주님은 이것을 이 말로써 표현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것이 양의 문으로 들어왔다’, 혹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 가지는 보장입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이것을 바르게 깨닫지 못함으로 마귀의 공격에 힘을 잃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문의 은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을 놀랍게 묘사해주고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A. 안전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안전입니까? 첫째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안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안전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양의 문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 들어오셨다면 그는 결코 길을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길 잃은 양의 비유는 무슨 뜻인가 질문이 일어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중에 우리는 길 잃은 양의 비유가 무슨 의미인지를 상세히 살필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안의 양은 악한 짐승으로부터의 보호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짐승들이 울부짖고 겁을 주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그 모든 짐승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 안전함은 우리 안에 있는 양이 느끼든 느끼지 않든 주어지는 보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양 자신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안전함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지곤 하는 부분입니다. 자꾸만 자기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염려가 그치지를 않게 됩니다.

 

그렇게 염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염려와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양의 문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악한 자가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영적 삶의 질이 차이가 나게 됩니다. 우리 안의 양이 누리는 안전함은 양이 느끼는 것과 상관없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안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B. 평안

그 결과는 평안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만큼, 그 양을 지배하는 것은 평안함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입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은 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전함이 없다면 어떻게 그 마음에 평안함이 깃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평안함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믿음으로 평안함을 네 것으로 만들라는 식의 명령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알맞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훈련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이미지입니다. 평안함이 어떤 의미에서 외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그냥 한데에서 내가 너희를 지켜줄테니 평안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에 우리를 들여놓으시고 나서 평안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냥 무조건 믿으라가 아니라, 우리의 환경적인 면에서도 우리가 견딜 수 있고, 하나님의 보호를 느낄 수 있을만한 환경을 주심으로써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감에 따라서 나중에는 이런 외적인 그리고 환경적인 요소들이 없이도 내적으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풍파가 많은 이 세상 속에서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양의 우리 안에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C. 신뢰

세번째로 우리는 양의 우리 안에서 신뢰를 배우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신뢰,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 안에서 형성되고 자라나게 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앞서 언급한 안전함과 평안함을 우리 안에 있는 양이 외적으로 내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배우는 것이 바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시는 방법은 그냥 믿어라 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시면서 신뢰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안전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경험하고 또 거기서부터 주어지는 평안함을 누리는 삶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다져지고 보다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양 우리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리 자라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D. 찬양과 감사

여기서 비로소 신뢰의 열매로서 찬양과 감사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찬양은 언제나 믿음의 열매입니다. 내가 양의 우리에 있구나, 참으로 목자에게 속한 양이로구나 하는 확신이 있게 될 때, 그의 마음 속에서부터 무엇이 흘러나오겠습니까? 찬양이 흘러나오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이 흔들릴 수 없는 소속감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E.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함.

그러나 양의 우리에 있는 양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좋은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간 양에게 무엇이 보장된 것입니까? 바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꼴을 먹는 것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감금의 개념이 아닙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들을 하나씩 불러서 데리고 인도하여 방초 동산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양의 특권입니다. 우리 밖에 있다면, 양이 어찌 목자의 인도를 받을 수 있으며 좋은 꼴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꼴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목자가 양에게 주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것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0절에서 조금 더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을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양의 우리에 있는 당신의 양들이 그들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가장 분명하고 충분하게 나타낼 수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기 본연의 존재의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내고 삶을 살 수 있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할 수 없게 된 것,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던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비로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전 존재가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고 살게 됨으로써 그는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모든 성품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함으로써만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그는 최고의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3.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양들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의 우리에 들어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하는 걱정의 70%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은 30%마저도 그가 한 걱정 때문에 모면하게 되는 것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염려와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당신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양의 우리 안에 집어넣으시고 단단하게 문을 잠그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서 높이 쌓여진 돌담을 보게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로 안전함, 평안함을 더 누리게 하시고, 거기서부터 신뢰,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여기서, 그는 불확실성이 가져다 주는 모든 불안함의 요소들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평생을 목자이신 주님께서 인도하시면서 그렇게 길러가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길러가시는 데에는 오히려 최적의 환경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선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4. 우리 안에 있는 양의 매일의 삶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정직하게 여러분 자신의 내면에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런 과정, 우리 안에 있는 양이 경험하고 배우게 되는 그런 삶의 과정이 있습니까? 우리가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양에 대한 보호하심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 우리 안에 있는 양으로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고 경험되는 과정이 있으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안전함이 있습니까? 객관적 사실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경험되는 바가 있으십니까? 평안함이 있습니까? 그리고 선하신 목자 자신에 대한 신뢰가 날로 깊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작년에 비해서 지금 그 목자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습니까? 5년 전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선하신 목자를 신뢰하는 것이 더 깊어져 간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찬양과 감사가 더욱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가사가 무슨 의미인지를 더욱 알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먹고 그로써 생명을 유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육신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을 때 주님께서 의미하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가면서, 여러분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본연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셨습니까?

 

이 과정을 성경의 교리는 성화라고 말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평생의 과정입니다. 그 길을 인내함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기억하고서 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에게 주어진 안전의 보장과 평안, 그리고 신뢰와 찬송, 들어오고 나가면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도 감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지금 나는 아무래도 양의 우리에 있다는 확신이 없으시다면, 나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양이라는 증거를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으시다면, 이제 구하십시오. 저도 양의 문이신 주님을 통해서 그 우리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십시오. 우리 안에 있지 않은 양에게 보장된 것은 결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목자와 양(3) /10:1-18,25-31/ 김형익 목사

2021-05-07 09:58:34

 

목자와 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미 두 차례 이 본문을 상고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참된 양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살고 있고, 양의 우리 안에 있는가 하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양의 우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상태인가, 그 양이 누리는 평안과 안전에 대해서도 상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상고하려고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양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우리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양은 보편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에 속한 자다.

그렇다면 양의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단지 교회를 다니느냐, 교회에 속했는가 하는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보통 죠이선교교회 라고 하는 어느 한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만은 아닙니다

 

. 가령 사도신경을 보십시오. 거기서 우리가 거룩한 공회와라고 말할 때 그 거룩한 공회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죠이선교교회와 같은 개념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룩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전 세계의 모든 참된 신자들로 구성된 하늘과 땅에 속한 하나의 교회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편교회라고 말합니다. 이 보편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칼빈은 보편교회를 떠나서 구원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았다면 그는 교회의 멤버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편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개인은 전체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점에서 자신을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교회에 붙어있지 않다면 그는 생명이 없는 자에 불과합니다.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보편교회에 속했다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의 무리에 섞여서 주님께서 목자로서 양의 무리를 인도하여 다니시며 꼴을 먹이고 기르실 때, 거기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를 개별적으로 인도하심이 아니라, 양 무리 속에서 함께 나를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역 교회에 속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문턱을 한없이 낮추어놓은 결과로 주님과 관계가 없지만, 교회에서는 매우 열성적인 멤버가 되기도 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모든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이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더 특별하게 진통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이 진통이 어디로서 오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난히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거듭난 자이며, 그리스도의 참된 양인가 하는 것을 늘 확인하시라고 도전하는 것은 이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적어도 지난 스무 세기 동안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많은 거짓말을 퍼뜨려 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문제와 함께, 여러분과 함께 계속해서 살피려는 주제는 참된 양이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 길을 잃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양이 길을 잃게 되는 경우

목자가 양떼를 치는 경우를 마음 속에 한 번 그려보십시오. 양떼가 여기 저기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목자가 두리번거리면서 양떼를 살피고 한편으로 위험 요소가 있지 않은지도 살핍니다. 양들은 다 풀을 뜯고 뜯으면서 풀이 있는 곳으로 땅만 보고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혹시 다른 양들이 발견하지 못한 맛있는 풀이 어디 있나 생각하는 양 한 마리가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면서 양무리들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또 목자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목자가 어련히 가장 좋은 꼴이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그 양무리들을 인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더 맛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양이 있습니다. 이게 양이라기 보다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 양은 정도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가 하는 것을 혼동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뭔가 새로운 것, 뭔가 짜릿한 것을 찾아서 헤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길을 잃게 되는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찾으려는 별미, 특별한 것은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좀더 도덕적이고 고매한 인격적 향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경 자체에 대한 복음적, 생명적 관심보다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차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이나 기적에 대한 추구의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그들의 중심 과제가 되기도 해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주변적인 것들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이 주변적인 것들에 심취하여 목자가 인도하는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결국 길을 잃게 되기가 쉽습니다. 이런 주변적인 것들에 취하고 그것들을 먹고 그것들을 추구하다보면, 나중에 복음의 핵심되는 것들을 먹으라고 하면 맛이 없다고 거부하게까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맛이 느껴지지 않게 될 정도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런 사람들이 회복한다는 것, 다시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아 정도로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 길을 잃게 될 때에는, 아주 기분이 좋고 기대가 되고 또 어느 정도 새로운 것들을 맛보면서 목자가 인도하는대로 갈 때보다 훨씬 더 좋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좋은 것들을 먹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런 마음은 점점 시들해지게 됩니다.

 

저는 실제로 다락방이란 단체에 간 사람들이 처음에 하던 말들을 기억합니다. “, 이제는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흥분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다시 또 새로운 것을 찾아서 길을 헤메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양이라는 전제에서 말씀드리고 있다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아예 양이 아닌 자들이 다른 곳으로 헤맨다는 것은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된 양이라고 할 때에도 그가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이 자기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길을 잃으면 짐승의 위험에 노출된다.

이렇게 길을 잃어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짐승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전에 양무리와 함께 있을 때에는 목자가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었지만, 이제 양무리에게서 벗어나서 우리 밖에 있을 때에는 경우가 다른 것입니다.

 

짐승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할 때 짐승이 가리키는 것은 마귀의 역사와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길을 잃어버린 양이 그리스도의 참된 양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양을 반드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든 양들이 다 그리스도의 참된 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역 교회의 선택은 양 자신의 책임이다.

양이 어떻게 길을 잃게 될 수 있는가를 우리가 생각했습니다마는, 이제 제가 처음에 제기했던 그 문제와 함께 이것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양은 반드시 보편교회에 속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에 속해서 신앙 생활을 해간다고 할 때, 이것 또한 쉬운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고 살아왔습니다.

 

가령,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순진하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들은 특별한 잘못이나 나쁜 심정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교회 자체가 배교를 하거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현저하게 잘못된 가르침으로 잘못 행하게 될 때, 대개는?특별히 적극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그 모든 악한 결과를 다 함께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교회가 분열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참된 교회이며, 어떤 교회에 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실제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에 대해서 그 책임은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옛날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것은 또한 우리 시대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그 교회의 목사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교회에 여전히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교회에 남을만한 현저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나오기 싫은 조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복음의 진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대부분의 솔직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온 관계 때문입니다. 주님 보다는 사람을, 주님과의 관계 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저는 몰랐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 또한 길을 잃고 있는 한 경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지역 교회 안에는 있지만 길을 잃고 있는 한 경우인 것입니다. 이처럼 지역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같이 교회가 전반적으로 인본주의화되어 있고, 지역 교회들이 많이 있는 때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미국의 이민 교회 현실이나 한국 교회의 현실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정도(正道)를 진지하게 추구하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지하게 추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입니다. 은행의 경영진인 어거스트 오돈의 5살 짜리 아들 로렌조가 어느날 ALD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됩니다. 2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임상 결과를 알게 됩니다. 의학이 포기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 부부는 도서관을 다니며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치료약을 스스로 찾기 시작합니다.

 

아들을 치료하는 약을 발견하기 위해서 전 재산을 다 사용하여 연구를 하고 결국은 약을 개발하게 되고 로렌조를 살리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약은 FDA의 승인을 얻어서 현재는 로렌조 오일이라고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로렌조의 부모는 정말 진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추구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진지한 추구였습니다. 오늘 기독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진지함입니다.

 

복음에 대한 진지한 추구를 찾아본다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교리를 버리거나 멀리 하는 경향이 농후하고, 그저 쉽게 믿으려고 하는 생각들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쉽다기 보다는 좀 더 새롭고 좀 더 짜릿한 어떤 것들을 계속해서 원하고 바라는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교회는 복음의 정도를 떠나서 좀 더 새롭고 맛있는 새로운 프로그램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수많은 길을 잃어버린 양들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접하게 될 때 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어렵다’, ‘부담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깊이 이해하고 거기서 참된 기쁨을 얻고 살아간다는 것은 기독교의 무슨 성자 정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너무나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바로 그 복음의 진수 속에서 인간은 가장 아름답고 온전하고 풍성한 묘미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붙잡고 목자에 대한 애정으로 그를 따르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자기 삶에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결정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착각을 가지고 살게 되면 길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잃지 않으시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분명하게 붙잡고 가셔야만 합니다.

 

목사를 붙잡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잘못 될 수 있고, 거짓 교사와 목사도 참으로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고 그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말씀을 붙들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참된 복음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양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따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우리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제대로 단단히 붙들고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붙잡는다는 것과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따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양이 길을 어떻게 잃게 됩니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아닌 주변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감화나 고매한 인격 같은 것에 대한 추구나 학문적인 추구나 지적 호기심 만족과 같은 것들, 또는 기적이나 신비 체험에 대한 추구나 사회 문제 해결 같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때, 그 모든 태도의 근본에는 목자이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인도하여 주시고, 목자가 허락하는 꼴을 좋은 꼴로 여겨서 먹고 만족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모든 좋은 것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어서 더 이상 목자의 인도를 받기 보다는 자신이 인생을 인도하는 형국이 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든든히 붙잡고 간다고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안전하게 양 무리들과 함께 양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험한 착각을 버리라.

양이 일단 길을 잃게 되면 그는 스스로 자기 힘으로 목자에게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목자의 찾아가심이 필요하고 목자께서 먼저 부르시는 것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모든 길 잃게 되는 양들의 공통적인 착각은 자기가 언제든지 원하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자기를 너무나 믿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양이 스스로 산전수전을 겪어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양의 목자께서 산전수전을 겪으셔서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원하면 언제라도 나는 돌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꼭 붙드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엎드리십시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붙드십시오.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다른 모든 양떼들과 하나가 되어서 복음의 진수 가운데로 더 들어가서 그 묘미를 맛보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은 결코 어렵고 지기 힘든 짐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곳으로 양 무리들을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양들은 한 무리가 되어 목자의 인도를 받아 그 길을 기쁨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비록 목자의 인도하시는 길이 때로는 광야를 지나야 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목자와 양(4) /10:1-18,25-31/ 김형익 목사

2021-05-07 10:01:30

 

1. 목자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는 의미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하나의 강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주님과 성도의 관계를 묘사하실 때,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고 하셨고, 양은 그 음성을 식별하여 듣는다는 것입니다(3).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고 하셨습니다(14).

 

서로가 아는 정도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들으면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시듯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아시듯이 그렇게 목자와 양이 서로를 안다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서로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다음에 좀 더 상세하게 상고해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여 상고하려고 하는 것은 목자와 양이 서로를 알며, 목자가 자기 양을 각각 불러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일까요? 목자가 실제로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주고, 개똥이, 말똥이 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목자는 가자하고 말하면 이제 그 목자에게 속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양들이 식별할 수 있는 목자의 소리는 매우 단순한 것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무리한 것을 목자와 양의 관계 속에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단지, ‘가자’, ‘풀을 뜯어 먹어라’, 혹은 다시 가자하는 말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포함하겠지만 말입니다.

 

2. 주님은 나만의 특성을 아시고 나를 다루신다.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고 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양들을 한 무리, 한 떼로 인도하시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주님은 그 양들 각각의 특성을 아시고 그 특성을 따라서 다루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전에 군대에 입대하면 군복을 주고 모자를 주는데, 대중소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씩 던져주고 옷에다 몸을 맞추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전체는 있지만,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들을 인도할 때, 전체로 인도하시며, 양들은 그 무리 속에 들어감으로써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교회를 떠나서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먼저 보편교회에 속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보편교회와 맥을 같이 하는 바른 지역교회에 속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체 교회 속에 개별 신자들이 들어가게 될 때, 그들의 독특성과 개별성이 다 무시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것을 지금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이 신앙에 대해서 가지는 체험이나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삶은 신자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개별적인 신자들이 다 예외없이 각자를 향한 주님의 소명을 받아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나는 남다른 소명이 없이 그저 조용히 따라가면서 살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특성을 살려서 그것을 배려하고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를 우리가 잘 이해하게 되면, 베드로가 범했던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그를 배신 사건으로부터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특별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21:18).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갑자기 요한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1) 매우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것을 생각하면 되는데, 베드로의 마음은 우리 모두와 같아서 요한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22).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할 때 의미하신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특성을 따라서 그에게 주시는 소명이 존재하고, 요한에게는 요한대로의 소명이 다르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일찍이 네로의 치하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주님은 요한을 오래도록 남겨 살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의 계시를 보여주시고 그 계시를 전하게 하시려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베드로와 요한의 특성을 따라서 그들에게 주신 소명대로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주님께서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 세대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해주도록 하기 위해서 그 환난을 피하게 하십니다. 이런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 이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나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데, 당신은 왜 믿는 사람이면서도 잘 사는가?” 혹은 나는 믿음 때문에 직장에서 승진이 안 되고 쫓겨났는데 왜 당신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승진하는가? 과연 당신도 신실하게 믿고 있는 것인가?” 또는 나는 믿음 때문에 가게를 내려놓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믿는 사람이 그 가게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참 많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가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는 것과 비교하여 무엇이 더 나은지 가리려고 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대로,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가 할 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고, 주님께서 내 특성에 따라서 주신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자기 양을 각각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고 하셨을 때 가르쳐주고자 하신 내용입니다.

 

3. 목자의 부르심은 유효하며 내적인 부르심(effectual and internal calling)이다.

주님께서 자기 양을 각각 이름을 불러 인도하신다고 하는 두번째 의미는 그것이 유효하고 내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본질적으로 하나지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부르심 또는 유효한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미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성부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부르시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잘 요약했습니다.

 

로마서 830절을 보지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도 부른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왕으로부터의 호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응답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유효한 부르심 혹은 내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내적인 부르심과 구별하여 외적인 부르심이라고 할 때, 이것은 당연히 유효한 부르심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거절할 수도 있는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행위도 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가령, 혼인 잔치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22:2~14).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청했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다 자기 바쁜 일들로 청함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길에서 누구든지 데리고 오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22:14). 외적인 부르심은 죄인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간절히 권면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시하고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청, 그 부르심을 받는 대상들이 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 혹은 유효한 부르심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까? 누구에게나 동일한 말씀이 외적 부르심에서 들려지게 되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다른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이 최초로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외적인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그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심으로써 외적인 부르심을 내적인 부르심으로 만드십니다.

 

이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이고, 그 부르심은 유효한 부르심으로서 거절할 수 없는 부르심이 되며, 죄인은 이 부르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응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이런 점에서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편입니다. 이런 부르심의 주체는 굳이 구분하여 말한다면, 성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라고 하실 때, 의도하신 것과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내적인 부르심이며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효한 부르심이 되게 만드시고, 내적인 조르심이 되게 하신 그런 부르심을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자되신 주님은 자기 양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식별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죄인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시고 마음을 비추어주시고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시며 의지를 새롭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은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이 응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중생의 사역이 완성되는 것이고, 회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바뀌고,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제대로 감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부르심,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4. 내 마음을 신비하게 감화하셔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이것을 신자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조금 적용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날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는 성령님의 감화와 은혜를 입게 되고 그 말씀을 따라서 그 원리와 방법을 행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 특별한 성령의 말씀하심이나 음성을 듣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그런 식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이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정상적인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들고 나오며 꼴을 먹는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방편을 무시한 채, 특별하고 예외적인 방편이 더 우월한 것이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물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목자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사십니까?

 

그 음성을 분명하게 식별하고 순종하고 계십니까? 이것을 단순히 매일 성경을 읽는가 하는 질문으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개인적으로 그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맥체인 캘린더를 따라서 매일 빠짐없이 읽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신앙의 중요한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는 날도 있고 읽지 못하는 날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과거에 설교를 통하여 들었던 어떤 말씀이, 혹은 언젠가 읽었던 말씀이 오늘 성령님을 통하여 다시 살아오르고 내 마음 속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나를 이끌어가는 것을 경험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삶의 환경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장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하신,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고 하는 것의 실제적 내용입니다.

 

좀 더 와닿는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서 제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래리 크랩의 책에서 인용을 좀 하겠습니다. 그 책은 <하나님의 러브레터 66 Love Letters > 입니다. 저자가 잠이 안 와서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있는데,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호세아 515절이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에는 그들이 애타게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표준 새번역 개정판). 그는 그 앞부분에서 어떻게 뒷부분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애타게 찾아 나서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애타게 찾아 나서야 하는 분은 환난을 당한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찾아오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직접 인용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건 적극적으로 그분을 기다리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리라. 하나님이 뭔가 더 해주시기를 바라기보다, 오히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내 쪽에서 더 잘 듣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인용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내 영혼의 눈이 열려(그게 무슨 의미이든 간에) 하나님 보기를 기다리는 대신, 이른 아침 고요한 시간에 내면 세계를 잠잠히 다스리며 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대신(어떤 방식으로 하건 간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탐구해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경 각 권을 통해 제가 무엇을 듣기 원하시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알고 싶습니다.

 

당신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야기에 뜨거운 열정을 느끼고 싶습니다.” 저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러브 레터, 하나님의 변덕스런 친구요, 하나님을 속이는 배우자요, 말 안 듣는 자식 같은 자신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의 각 책 66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신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책 <하나님의 러브레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성경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잘 알고 싶은 마음 조차 없는 것은 아닌가요? 기독교의 다른 많은 일들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너무나 적은 것이 아닐까요? 대충 하는 성경 공부 정도로 기독교를 꽤나 아는 양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저 몇 구절에 은혜 받고 그것을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요? 저자 래리 크랩은 말합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당신은 가장 깊이 변화되고 당신의 삶을 소망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다성경의 도끼 날이 우리 안에 얼어붙은 차가운 얼음장을 깨서,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신 우리 내면의 중심부에서 더운 물이 콸콸 흐를 때,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빚어져 간다.”

 

, 바로 여기에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양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평생에 지내게 되는 수많은 나날들이 이렇게 그분의 음성을, 아니 나의 특성을 아시고 나를 특별하게 다루시며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그 음성을 들으며 꼴을 먹고 배부르고 주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은혜로 채워지기를 소망합시다. 그런 소망을 주 앞에 가진 자마다, 그런 은혜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목자와 양(5) /10:1-18,25-31/ 김형익 목사

2021-05-07 10:04:10

 

오늘 우리가 목자와 양의 주제로 상고할 결론적 핵심은 주님의 양이 제대로 꼴을 먹은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이라면 제때 제때 좋은 꼴로 먹이시는 목자로 인하여 배를 곯지 않고 살 것입니다. 비록 가끔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목자가 그를 찾아내실 것이며, 때로는 좋은 꼴로 먹이시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배고픔을 느낄 때도 있을 것이지만, 결국은 좋은 꼴로 먹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삯군이 아니기 때문이며, 도적이나 절도, 혹 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선한 목자이시고, 양을 위해서 생명도 주시는 분이시며, 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고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주님의 양은 꼴을 먹게 되어 있고, 그 꼴은 양으로 생명을 누리게 하고 뿐만 아니라 통통하게 살이 찌고 좋고 실한 양으로 성장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상고하는 말씀에서 얻고자 하는 결론적 주제는 주님의 양이 꼴을 먹은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어린 양이라도 아는 것

아무리 어린 양이라도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양이 주님의 양이라면, 아무리 어린 양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목자를 아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린 아기가 낯을 가리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의 이름을 알 나이도 아닌데 그 아이가 신통하게도 자기 엄마, 자기 아빠의 얼굴, 말 소리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 사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아니, 아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면, 하나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목자가 누구신지는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적이나 강도가 헛소리를 하고 유혹을 하는 것을 보면 저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아주 성숙한 신자가 되면 그런 분별력이 한층 더 분명해질 것이지만, 미숙한 어린 신자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의미에서 자기 목자를 알아보는 정도는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별과 식별에 기초해서 그 양이 가지는 신뢰가 있습니다. 그 신뢰는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인생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가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금방 믿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 속에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과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자기의 목자를 알아보는 것과 더불어 목자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조차도 없다면 어찌 그것을 그 목자에게 속한 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평안과 만족은 믿음?목자에 대한 신뢰?에서 흘러나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아무리 어린 양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양이라면 다 아는 것입니다. 이 기초 위에서 그 양은 목자가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면서 목자가 주는 꼴을 먹게 될 것입니다.

 

2. 주님의 양도 넘어지고 방황하고 침륜에 빠짐으로써 길을 잃을 수 있다.

이미 우리가 함께 상고했었지만, 주님의 양이라고 해서 길을 잃어버리는 법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을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주님의 양도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다가도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목자를 따른다고 해도 넘어짐, 방황, 침륜에 빠지는 일은 발생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주변부를 혼동하게 될 때 길을 잃는 경우가 많고, 뭔가 새로운 것들을 항상 찾아 다니다 보면 길을 잃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한 양으로서 꼴을 잘 먹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상고할 때,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입니다. 물론 목자되신 주님께서 주시는 꼴을 잘 먹고 만족을 누릴 때에는 그가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길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날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그가 아예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제 갈 길로 가는 경우가 하나입니다. 이것은 26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은 주님의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지 않는 이 사람들이 왜 믿지 않는가? 그러니까, 더 좀 잘 설명을 해주어야겠다, 노력을 좀 더 해보아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은 매우 단정적인 것으로써 내 양이 아니니까 믿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양인데,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까지 주님과 상관없이 살아온 길을 잃은 양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16). 주님은 그들을 찾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 있다가 잠시 우리를 벗어나거나, 주님의 양무리들 가운데서 함께 꼴을 뜯고 먹다가 잠시 길을 잃어버리는 양들이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주님을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경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 교회 안에서 속해 있지만, 길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양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길을 잃은 양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길을 잃었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꼴을 제대로 먹고 거기서 평안과 만족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이런 류의 교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한듯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 자신이 자기 자신을 살펴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바른 분별을 할 때,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섬김이 실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꼴을 먹고 자라가게 될 때, 점차 성장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현상들을 분별하고 바르게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런 두 가지 경우는 아주 다른 것이다 하는 인식을 먼저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에 나오게 하고, 교회 안에 머물게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것 정도는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우리가 어떻게 해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많은 조직들의 생리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원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목자로 따르는 양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그렇게 될 때 목자의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따르면서 제대로 된 꼴을 먹고 목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절대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주지 않으셨기에, 저의 권면은 우리가 이런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으로도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길을 잃은 주님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통해서 영혼이 소생된다.

주님은 길을 잃어버린 주님의 양이라면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길 잃은 자기 양을 찾으실 때, 그 양의 잃어버려졌던 마음, 상실된 마음, 상처받은 마음, 냉담한 마음, 조급하거나 불안한 마음, 낙심에 빠진 마음 등 이런 마음들을 어떻게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목자의 음성만이 그 영혼의 잃어버려진 바 된 것을 회복하고 소성케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하는 다윗의 시편 23편의 고백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자기 양의 심령을 소생케 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길을 잃어버렸던 적이 없는 양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내 귀에 그 말씀이 더 이상 울려지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내 옆에 오셔서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확신도 사라지고,

 

예전처럼 주님을 생각해도 냉담함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 지내게 될 때, 우리 마음이 회복되는 것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잘해주니까 내 영혼이 회복되었습니까? 결국 그것이 사람을 통해서든 어떻든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고 소생케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 내 영혼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될 때, 우리 영혼이 회복되고 소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가 길을 잃고 있다고 판단될 때 할 수 있는 최상의 조치는 그냥 잘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수준으로 문제를 풀려고 해서는 잠시 잠깐의 결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혼의 회복과 소생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나는 길을 좀 잃은 것 같다고 느끼시게 되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여러분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은 목자의 음성 밖에는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목자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개중에는 이 일과 별개로 기도원에 들어간다든지, 실천 목록들을 만든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모든 일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과 별개로 가는 것은 바르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느낄수록 그 말씀 속에서 목자의 음성을 들으려고 부단히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미 잃은 양을 찾으려고 오셔서 큰 소리로 부르시지만, 우리 자신이 이런 저런 생각들로 분요해서 듣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일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4. 두 가지 식별해야 할 것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목자에게 속한 양으로서 살아간다고 할 때, 두 가지를 식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 목자의 음성만은 식별하라.

먼저 목자의 음성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지혜가 있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하는 공식을 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할 것은 목자의 음성만 식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 모든 상황을 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어떤 일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당황치 않고 하나님께 엎드리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어 행하게 됩니다. 그가 목자의 음성을 최소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B. 믿음 좋은 사람을 식별하라.

그러나 목자의 음성만 식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은 낯설게 들리실지도 모릅니다마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또한 식별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서 양 무리들 속에서 따라간다고 할 때,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모습을 보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앞서 가는 양의 궁둥이를 보면서 앞서 가는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바르게 간다는 것을 알고 따라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자와 양> 시리즈에서 종종 강조한 것이 목자는 개개인을 개인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양 무리 전체를 함께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개인의 특성이 무시된 채 전체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씀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 무리가 함께 목자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 무리가 함께 인도함을 받을 때, 이것이 교회라고 할 때, 누가 믿음이 좋아서 주님을 잘 따라가는 사람인가를 식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 제가 종종 말씀드리곤 하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을 식별하고 그 사람을 가까이 따라가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참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종종 우리의 눈이 흐려서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으로 나중에 실망하게 되거나, 잘못 인도함을 받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단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깊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앙망하는가 같은 것들을 살필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그저 외면적인 것들에 불과하다면 그런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내면의 변화를 진심으로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런 참된 경건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이 좋다고 인정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간다고 할 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목자의 음성만을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식별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5. 과거와 비교할 때 현저한 변화를 보이는가?

이제 우리는 오늘 이르게 될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님께서 먹여주시는 좋은 꼴을 먹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만큼 영적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 자라남, 이 성장과 성숙은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의당 일어나야만 하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한 두 달만에 일어나는 변화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일년이나 이년 정도의 시간을 놓고 볼 때,

 

그 전과 지금의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관찰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이제는 정말 그리스도의 양 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늘 염두에 두게 되고, 그것이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게 되는 것도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이런 변화를 보십니까?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과연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장과 성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A.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좋은 꼴로 먹고 살아가고 그렇게 성장하게 된다면, 그 성장의 특징은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가지게 되는 특징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성숙한 자녀는 없습니다. 이 특징이야말로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 사랑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입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면 모든 것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안일함이나 성공 따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주 어린 사람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그런 강요가 아닙니다. 신앙은 마음 속 깊은데서부터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헌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한다고 말했습니다(고후 5:16).

 

그를 움직이는 동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않게 되는 동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사랑을 의미하고 있지만,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입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좋은 꼴을 먹고 성장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B. 자존심과 명예가 아니라 주님의 명예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두번째로, 주님의 꼴을 잘 먹고 성장한 사람은 자존심과 자기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예를 생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매사에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자존심 상한다고 해서 마음 아파 하거나 상대방에게 쏘아붙이거나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 생각, 행동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꼴을 먹고 성장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자기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변화를 여러분 안에서 발견하십니까?

 

6. 성숙한 교회 공동체의 비전

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주님의 꼴을 먹고 성장하게 될 때 드러내는 특징을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차원, 즉 주님께서 목자로서 양들을 인도하실 때, 양 무리 전체를 하나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꿈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의 양들이 다 각각 개별적으로 위와 같은 은혜를 받아서 성장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무엇이라도 드릴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자존심과 자기 명예가 아닌 주님의 명예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때, 그 교회?주님의 양 무리?는 얼마나 힘있게 이 세상 앞에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귀한 역사를 이루는데 사용하시는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로 오늘날 우리를 복주시고, 그렇게 영광스럽게 사용해주시는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세상은 이런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가 오늘날 주님께서 찾으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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