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의 승리/삿11:29-33
2001-09-28 20:38:41
어느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병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의식에 빠져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같은 속성들이 다 있으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며 승화시켜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자신감과 기쁨 넘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상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품보다는 좋은 가문과 학벌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시도도 해보지 않고 열등감과 좌절에 빠져 쉽게 포기하거나 문제아로 일생을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혹 오늘 우리 가운데 자신의 외적인 환경이 다른 사람과 보다 열악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보다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진실하게 의지하기만 하면 그의 가문이나 신분이나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그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세우셔서 큰 일꾼이 되게 하시며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오늘 성경 입다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 입다의 배경
입다는 (삿 11: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태어난 환경을 저주하며 일생을 절망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생이라는 말은 돈을 벌기 위해 자리를 옮겨가며 몸을 파는 창녀를 가리키는 '여솨 조나' 라는 말로 공동번역에서는
(삿 11:1) 마침 길르앗 사람 가운데 입다라는 굉장한 장사가 있었는데, 그는 길르앗 이라는 사람이 창녀의 몸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라고 한 것처럼 창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비난하지 아니할지라도 스스로도 깊은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길르앗이 본처에서 낳은 아들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 집에 쫓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삿 11: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고 한 말씀처럼 재산 때문 이었습니다. 한번 입다가 집에서 쫓겨날 때까지 그의 이복 형제들에게 받아온 상처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같은 입다를 동정하고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입다는 할 수 없이 (삿11: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는 말씀처럼 생존을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과 하류 인생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원인은 입다 에게 전혀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의 방탕함과 그의 이복 형제들의 몰인정과 길르앗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입다는 건달패의 두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입다가 (삿 11: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라는 말씀처럼 누구보다 힘이 세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을때 이처럼 볼품없는 삶을 살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곳에서 좌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삿 11: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 여기서 잡류"란 말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생활 안정을 얻지 못하고 유리 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들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힘은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폭력으로 발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모두가 버려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서 입다는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의 힘으로 자신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사용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2. 입다의 소명
기생의 아들이라고 집에서 쫓겨난 입다가 돕 땅으로 피신하여 일평생 자신의 출신 성분을 비관하며 건달패의 두목으로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던 입다 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암몬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누군가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암몬 족속을 막을 만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센 장사 입다가 필요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에게 찾아와서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삿 11: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삿 11: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삿 11: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이것이 바로 세상 인심입니다. 만약에 입다 에게 남다른 뛰어난 힘과 지도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기회가 그에게 오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외적인 환경이 어떠하든지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하고 정반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선하게 사용하며 실력을 키우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입다가 출생 신분으로 인해 가정에서 쫓겨나고 동네 사람들의 멸시의 눈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야만 하였든 슬픈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힘이 있을 때 그를 버렸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필요로 하고 다시 찾는 기회가 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 아픈 과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아픈 과거에 사로잡혀 복수하는 일에 연연하여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는 돌이키지 못할 과거에 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1) 관용과 용서하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
2) 환경을 탓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이든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인생을 가꿈으로 최선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
3)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입다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람은 늘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삽니다. 입다 는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든 싸움을 해야했습니다.
입다 는 길르앗 장로들이 그를 필요로 할 때 선뜻 나서지 아니하고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란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라고 하였습니다(7절).
왜냐하면 지금 그를 찾아온 장로들이 과거에는 그의 가족들이 자신을 내버리는 일에 묵시적으로 동의하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원한다고만 해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필요로 할 때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장담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7:47).
한 때 입다를 버렸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암몬 사람의 침략을 받게되자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입다의 외적인 힘만을 보고 입다를 불렀지만 하나님은 입다의 이같은 내적인 가능성인 신앙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내적인 믿음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처지를 비관하고 세월만 보내는 사람에게 기회는 오지 아니하며 기회가 올지라도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개발하여 최선을 다하며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7-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3. 입다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
입다는 신분이 비천하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암몬과 전쟁할 제의가 들어왔을 때 그가 미스바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군사 작전을 짜고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처한 문제들을 극복하는 입다의 방법입니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는 큰 용사였지만 자신의 힘만을 앞세우고 암몬 자손들과 무모한 전투를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장하여 주시지 아니하는 전투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암몬 자손과 (삿 11: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고 협상과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암몬 자손은 무조건 과거 자신의 조상들이 살았던 땅을 달라고 위협하였을 때 그에 반격하는 입다의 대화 속에 기생의 아들이라고 멸시받던 천한 신분과는 달리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배어 나왔습니다.
(삿 11: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삿 11:15) "나 입다가 말한다. 이스라엘은 모압 영토나 암몬족의 영토를 빼앗은 적이 없다 그러나 암몬 사람들은 입다의 신앙적인 설득력에 할 말을 잊었으나
(삿 11: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고 한 것처럼 후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삿 11: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놀랍게도 입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특별한 능력과 탁월한 지도력을 부어주며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의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입다는 누구였습니까.가문도 혈통도 없는 서자입니다.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그는 쫒겨난 신세입니다.그는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쓰실만한 이유를 갖추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입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애굽에서 취한 아브라함의 여종인 하갈도 역시 보잘것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에서 울고 있는 슬픔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에게 역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이었던 이방여인인 라합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여자였습니까.하나님은 역시 그 여인에게도 사랑을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보십시다. 그들의 신분이 어떻습니까. 모두가 가장 낮은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주님에게 별명을 붙이기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별이나 신분이나 학력이나 가진 것이나 외모나 재능이나 과거의 경력이나 현재의 환경이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똑같이 은혜를 베푸시며 사랑을 베푸시는 분인 것입니다.이 사랑으로 이방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존재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입다가 영웅이 된 것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후에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신이 감동하여 임하기 전에 입다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싸움에 능하든지 약간의 지도력정도만 있었을 뿐입니다.그는 군사훈련의 경험도 없고 전쟁의 경험도 없습니다.
(삿 11: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삿 11: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입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는 자기민족을 사랑하였기에 꼭 승리하기를 바랐습니다.그래서 그는 떠나기전에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약속을 합니다.
30-31을 보십시다.승리하고 돌아 올 때에 제일 먼저 나오는 그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그리고 33절에보니 입다의 용맹과 사기에 눌려 급기야 암몬사람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4-40절에 보면 안타깝게도 자기의 딸이 자기를 먼저 영접하였습니다.그리고 그 딸을 제물로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는 우선 이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입다 입장에서는 너무 비이성적이며 심한 서원이며 또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죽이는 제사를 정말 받으실 정도로 무정하신 분일까하는 생각이듭니다.우선 전통적인 해석은 말 그대로 딸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대두되는 다른 해석은 딸을 바치되 번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저도 성경전체를 볼 때 나중의 해석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성경37과39절을 보시며 입다의 딸이 죽었다라고 써있는 곳을 보면 작은 글씨로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본에는 없지만 문맥을 보아서 한글성경을 번역할 때 써 넣은 내용입니다.그래서 헬라어 원본이나 영어성경이나 다른 성경에는 죽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무었입니까. 번제는 동물을 잡아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가 마스바에서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의 무남독녀(無男獨女)의 딸이 소고를 치고 춤추며 나와서 아비 입다를 환영하였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괴로와 했으나 하나님께 서원했으니 돌이키지 못했다.
그래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고 일단 맹세했으면 죽더라도 지켜야했다. 딸은 아버지의 맹세를 따라서 순종하기로 결심하였으니 효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부득이한 헌신으로 인하여 산에 올라가 두달 동안 애곡하였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인으로서는 무자(無子)함과 독신생활을 일종의 죄로서 취급된다 할찌라도 너무 비열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득이한헌신은 자기와 하나님께 고통뿐이요, 영광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질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는 풍속이 생겼다. 그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부랑자들의 우두머리일 뿐입니다.버림받은 사람들의 무리이며 학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6년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더구나 그의 이름은 신약 히브리서 11:32에 믿음의 영웅인 기드온,삼손, 등과 함께 나란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봉사 잘 하겠습니다." "교사도하고 기도생활도 잘하겠습니다." 약속은 지키는 것이 인간관계에서도 신뢰를 쌓는 기초입니다.그 시간이 지나면 주님과의 약속조차도 잊어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어떤 약속이든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자세인 것입니다.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입다/삿11:1-11
2002-09-25 10:52:47
(서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전혀 예기치 못한 위기나 좌절에 이를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좌절하지 않는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본처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그를 홀대했다.
본문을 보면 형제들이 "입다를 내어 쫓았다"고 했다. 온갖 멸시와 구박 속에서 자라난 입다는 결국 자기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돕땅에 가서 살았다. 돕땅은 가나안땅이 아니다. 길르앗 북쪽변방에 있는 수리아의 땅이다. 그는 조국과 민족, 형제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입다는 좌절과 실의에 빠지거나 타락하지 아니했다. 그는 당당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가 될 재목이 된 것이다. 그는 드디어 자기가 안고 있었던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했다.
그래서 오늘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입다'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한다.
(一) 입다는 불우한 환경에서 실력을 닦았다.
6절에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했다. 돕땅에 거한 입다는 나름대로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사회적으로 지탄과 멸시의 대상인 기생이었고, 아버지는 자기를 낳기만 하고 전혀 책임을 지지않는 무책임한 자였다. 형제들은 그를 미워하고 멸시했다. 급기야는 쫓겨나 불량배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러한 환경에 휩쓸리지 아니했다. 그는 길리앗의 장관이 될 수 있을만큼 큰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그렇게 불우한 환경속에서 자라났지만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고 실력을 쌓았다.
어떤 식물학자는 "새순이 싹을 틔워 올라오는데에는 무려 3만여개의 상처를 입으면서 꽃도 피우고 훌륭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환경이 나쁘다고 원망하지 맙시다. 가정이 어렵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좋지않은 환경을 주신 것은 바로 지금 미래를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다.
다윗은 그의 8형제 중에서 운이 좋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것이 아니다. 시 78:70-72에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형들은 가서 사무엘 선지자와 함께 식사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 왜 그랬습니까? 다윗은 어디에서 무슨일을 했습니까? 그는 양의 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맡겨준 양들을 열심히 돌보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은 동기가 된 것이다.
성도 여러분! 절망과 좌절이 여러분을 끊임없이 찾아와 괴롭히고 있습니까? 낙심 하지 말고 지금 미래를 준비하십시오. 지금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머지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쓰실 것이다.
(二) 입다는 큰 마음을 가졌다.
그는 형들의 요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고 (7절)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길리앗 형제들의 요청을 거부하지 아니했다. 그는 생명을 걸고 싸움을 하기 위해 갔다.
성도 여러분! 입다가 자기를 이용하려는 형제들의 꾀임에 빠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입다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그는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같은 넓은 아량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신앙은 좋은데 마음이 넓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남이 자기에게 조금만 섭섭하게 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도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상당한 방어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강박증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제 2차 대전 후에 네덜란드 교인들은 한동안 주기도문을 외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독일 나치의 학정과 만행의 직접 피해자였던 그들은 독일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얼마후에 독일 교회 대표자들이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지난 과오에 대하여 사죄했다. 그때 네덜란드 대표가 답사 대신 "주기도문을 외웁시다"라고 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주님 가르친 기도를 암송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모든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넓고 큰 마음을 가집시다. 남을 용서하는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실의와 절망속에서 분노의 노예가 되지않고 입다와 같이 오히려 형제들을 용서하고 형제를 구원하러 가는 것이다.
(三) 입다는 승리가 하나님께 있다고 확신했다.
9절에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입다는 큰 용사였다. 큰 용사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전쟁의 명수"라는 뜻이다. 입다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쟁의 명수였다. 특별히 누구의 도움 없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당대의 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나에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습니까? 이것은 전쟁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전쟁의 승패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어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우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생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무리 약한자라도 강한자를 부끄 럽게 할 수 있다. 학벌없는 자라도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
입다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화려하게 자기 고향으로 금이환향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수단이 좋았기 때문인가?
그가 성공지향적으로 살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는 단지 하나님께 모든 인생의 승리의 비결이 있음을 알고 어떠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유다왕 여호사밧왕 때의 일이다. 모압자손과 암몬자손이 연합하여 침공해 왔다. 거기에 더하여 마온 사람들과 아람사람 들까지 협공해 왔다. 이때에 여호사밧왕은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고 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응답했다. (대하 20:15)
입다 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하고 참아낼 수 있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신 하시고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대하고 인생의 성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성공할 줄 믿는다
황무지에서 장미꽃 같이/삿11:1-11
2002-09-25 10:53:52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워지는 노래가 두 가지가 있는데, Amazing Grace'와 'God bless America' 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로 잘알려진 405장 찬송과 '하나님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노래로서 9월11일 테러사건 이후 누구보다도 자신들만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확신이 깨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떠났던 성경이 최근에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 다시 자리매김을 했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 분주했던 그들의 발걸음이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한다는 보고를 들으면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겐 강할 때와 약할 때가 있는데, 강할 때에는 사실 여러 가지 외형적 요인, 즉 돈이나 권력, 혹은 지식으로 포장이 되어 본래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약할 때에는 그 모든 형식적 포장에서 떠나 있기에 가장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생이 길르앗에서 나은 아들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성장해 가면서 적자의 위치에 있는 형제들이 서자의 위치에 있었던 입다를 쫓아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쫓아낸 이유를 성경은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이유였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억울했지만 그는 힘없이 적자라는 아들들에 의해서 쫓겨났습니다.
3절에 보면 '입다가 그 형제들을 피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가지 못하고 아마도 핍박을 받고 '돕'이라고 하는 땅으로 피신을 한 입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입다의 주변에 잡류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잡류란 불량배, 건달,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성경은 잡류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입다에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입다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암몬이라고 하는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암몬의 군대가 강하므로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여러 방향으로 의논하고, 또 의논한 결과 "입다를 데려와야 되겠다" 고 길르앗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결정을 한 것입니다.
길르앗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위기가 왔을 때 자기들의 힘으로 감당이 안된다고 판단한 그들이 입다를 초대하자고 한 것은, 그만큼 입다가 돕땅에 있으면서도 탁월한 리더쉽과 용맹을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시오" 전쟁의 장관이니까 군대 장관이겠지요. 초청을 받은 입다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입다의 마음에 아직도 분노가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분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분노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것을 누르고 누르고 살아가다 보니까 화병이 생기게 되지요. 며느리는 시어머니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식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해요. 이웃 때문에도 그럴 수 있고,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입다에게도 분노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에는 나를 우습게 여기고 적자가 아니라고 쫓아내더니 이제는 나보고 군대 장관이 되라고.." 그런 표현이지요. 길르앗 장로들이 머리숙여 그에게 다시 말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십시오" 이제는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셔서 승리할 때 정말 나로 머리가 되게 하겠습니까?" 입다가 확인을 하자 길르앗 지도자들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증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신뢰가 인정받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래전 기억으로 지나갔지만 옷 로비 사건으로 유명한 세 여인, 그들은 모두 한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같은 그룹에서 성경 공부까지 하던 사이였습니다. 언니, 동생하며 화기애애하던 때의 남편은 장관이었고, 대기업의 회장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잘 나갈 때의 부인들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화기애애했지만 남편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괜찮게 보였던 이들의 모습도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남편이 무너진다고 덩달아서 아내들까지 무너지면 안됩니다. 아내가 혹 무너진다고 해서 남편이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과연 신앙이 있는가는 무너질 때 알 수 있어요. 잘 나갈 때는 누구나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 잘하고, 헌금 잘하고, 뭐 여러분 모든 봉사의 자리에 잘 참석할 때 잘나갈 때 그러는 것은 누구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이 부도가 나고, 도망 다녀야 되고, 삶이 깨지고, 믿음이 깨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리에 여전히 동행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믿음입니다. 잘 나갈 때의 신앙은 그래서 그렇게 인정받기 어려워요. 마치 시집, 장가가기 전의 믿음과 같습니다. 결혼해 봐야 알아요.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고 그래도 결혼할 때 배우자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믿음은 삶이요, 행동이지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두 가지의 부분에서 은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환경의 장애를 뛰어넘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셨다면 환경의 고통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제나 남편이 잘 될 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구요, 언제나 자식들이 일등만 할 수 없어요. 한 반이 40명이면 일등은 하나밖에 없는데 모두 일등만을 원하니 그게 문제 아니예요. 그럼 40등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해줘야지. 누군가는 40등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예요.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어요.
우리의 삶 속에서는 고통이 있습니다. 환경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마음속에 "내가 부모를 좀 더 잘 만났다면 내가 이 모양은 아니었을 텐데.. 좀 부자 부모를 만났다면.. 집이라도 좀 몇 채씩 남겨주고 가셨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혹이라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잘 오신 것입니다. "정말 내가 좀 더 배웠다면 이 모양은 아닐텐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잘 오신 거예요. "내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는 분들에게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은혜로 초대하신 줄 믿습니다.
입다는 운명이 기구했어요. 기생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이나 받았겠습니까? 사람 대우도 못받고 살다가 결국은 거기서도 쫓겨났습니다. 산악지역에서 도움이 안되는 잡류들과 살아야 했습니다.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닌 삶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세계의 여러분야에서 분부신 횔약을 펼치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외적 조건의 열악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하고 있어요. 키가 작은 분들이 정치, 경제, 학계, 예체능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적인 축구선수였던 마라도나의 자서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는 저보다도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만 월드컵을 재패할 수 있도록 우승을 이끌었던 주역입니다.
그의 글을 보니까 남들과 같이 오후 훈련이 끝나면 다른 선수들은 샤워하고, 잠을 자거나, 텔레비젼을 보거나, 여가를 즐기고 있을 때, 그는 다시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날 훈련 중에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부분을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또 연습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 중에 성공한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갑절이나 땀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여러 모양으로 있습니다. 그 환경의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목회자 부모님을 만나서 신앙적으로 무척 행복했지만 환경적으로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초등학교 6년을 무려 6번이나 옮기면서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일 싫었던 일 중의 하나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가서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으니까 인사하세요" 그러면 나가서 자기 이름 대고 인사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어요. 4번이나 그 일을 했어요. 1,2,3학년까지 반장으로 잘 나가다가 그후 학교를 3번이나 옮겼으니 공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졸업시험 때 강단 마루바닥에 엎드려 시험을 치루면서 지금도 제 마음에 생생한 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하고 속상한지 몰라요. 학교 공부가 끝나면 부유한 친구들이 삼삼오오 과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철봉대에 매달려서 그 속상함을 달랬습니다.
턱걸이를 하니까 잘 안되지요. 헌데 배치기를 하니까 됩디다. 그래서 턱걸이를 시작했는데 한 20개씩 했어요. 안되면 배치기를 해서 올라갔어요. 친구들은 과외 공부를 가는 동안 나는 철봉을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이 "나는 좀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 내가 축구를 하면 국가대표가 될거야" 그래서 중학교를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가기 원했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그런 것을 알아서 이렇게 뭐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어요.
중학교를 가니까 하키부가 있습디다. 용산고등학교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우승을 다투는 그런 하키부였어요. 그런데 하키는 하기가 싫더라구요.
제가 단거리를 11초 9를 뛰었더니 육상 선생님이 "너 육상부 해야 된다" 며 수업시간에 불러내었지만 그것도 마음에 싫어서 안나갔어요.
축구부가 있었으면 나갔을 텐데..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축구와는 거리가 멀게 주님께서 길을 인도하신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목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마 중학교때 축구부가 있었으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축구라고 하는 기술로 국가대표는 못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얼마전에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공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목회자 국가대표단 단장'이라는 직책을 통보받은 것입니다. 드디어 국가대표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축구 선수로서가 아니라 스포츠 선교 사역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계에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저에게 그 영광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환경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그 장애의 파묻혀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속상해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면 안됩니다.
오늘 입다는 자기 주변에 잡류라고 표현된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무리들과 함께 거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되지는 않았어요. "너희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말라" 곧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 시민인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게시니 두려움이 없도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두 번째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쓰임을 받을 때를 기다릴 줄 알자" 마음속에 복수심만 불타고 자존심만 가득 차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창세기의 요셉을 기억해 보세요.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아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여기 입다가 형제들에게 쫓겨나듯이 요셉도 형제들에게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일꾼으로 일했고, 노예로 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심치 않은 요셉의 변함없는 신뢰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말입니다. 할렐루야!
요셉에겐 그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머리가 되게 하셨을 때 자기를 미워하고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팔아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왜 놀랐습니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악몽과 같은 기억.. 우리는 그를 팔아먹었는데, 우리는 그를 미워했는데, 우리는 그를 때렸는데, 우리는 그를 빈 우물에 처박았는데 그가 애굽의 머리가 되어 자기 앞에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가 복수심만 불타고 분노에만 불타서 자기의 행동을 했다면 그는 큰 그릇은 아니지요. "형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통하여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해요. 나를 미워하는 그들에게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은혜도 원수로 갚는 시대이지요. 그렇다고 여러분들 같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세상은 은혜도 원수로 갚지만 우리는 원수도 은혜로 갚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요셉이 그랬어요. 입다가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그릇이 컸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커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평화의 도구로, 구원의 도구로, 축복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오늘 입다는 자신을 초대하는 그들에게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부르시는구나" 국가를 위해서 준비된 자신이 쓰이기를 원했고, 민족들을 위해서 자기를 미워했던 그 형제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때때로 고난의 자리에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향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분노와 자존심의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고 자존심보다 더 귀한 것,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믿음으로 서기 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옵소서. 내게 능력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실 때 그 사명에 맞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필립 브룩스 목사님이 기도했듯이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요청하듯이 여러분들도 이 시대에 황무지에서 장미꽃 핀 것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귀한 인물들로 새롭게 준비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때때로 환경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좀 더 나은 여건이었다면.."
주님,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 안타까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고, 돕땅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과 함께 기거했던 입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처럼, 원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ohyun
힘 vs 짐/삿11:12-40
2007-03-29 09:39:04
입다가 군대를 이끌고 암몬 족속과 대치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사자를 보내어 잘잘못을 따졌습니다.
입다는 왜 무고하게 남의 땅에 쳐들어왔느냐고 책망했고 암몬 왕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이 본래 암몬 땅이기 때문에 돌려 받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적에 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자기네 영토를 빼앗았다고 하면서, 그 땅을 평화적으로 양도하라는 것이 암몬 왕의 얘기였습니다.
이 얘기는 마치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억지입니다.
입다가 암몬 왕의 얘기를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암몬 자손의 영토는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던 땅만을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아르논에서 얍복강까지는 암몬 자손의 영토가 아니라 아모리 족속의 영토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대로로만 통행하리이다 하나 시혼이 자기 지경으로 이스라엘의 통과함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다 모아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와서 야하스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파하고 그 땅을 아르논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민21:21-24)
만일 암몬 족속도 자기들의 신 그모스가 준 땅이 있으면 당연히 차지했을 것처럼 이스라엘도 역시 여호와가 주시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 입다의 지적처럼 설령 이스라엘이 지금 살고 있는 땅이 그 옛날 암몬 족속의 땅이라고 해도 삼백 년 동안이나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차지했다는 내용을 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데 입다의 모습이 흡사 그런 것 같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다가 이렇게 힘 있게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조들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지난날에 함께 하셨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입다에게 남다른 식견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정도의 내용은 비단 입다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전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율법 말씀을 외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참 의미를 몰라서 그렇지, 외기는 다 욉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스라엘은 성인식을 할 나이(13세)가 되면 신명기는 다 욉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지금 자기네 집으로 와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모처럼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 친구가 이단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단으로 데려가려고 교회가 왜 틀렸는지를 성경을 펴놓고 얘기하는데 자기는 '말발'이 달려서 일일이 답변하지 못하니까 대신 답변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전화를 했던 분은 분명히 '말발'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말발'이 달리는 것이 맞습니까?
마침 그 분은 저와 제법 친하게 지내는 분이었기 때문에 저도 직설적으로 나무랐습니다.
"집사님, 어떻게 해서 말발이 달립니까? 말발이 아니라 성경 실력이 달리는 거죠. 제발 평소에 성경 좀 읽으세요."
아닌게아니라 가끔 이단과의 논쟁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단과의 논쟁은 백해무익합니다.
논쟁을 통해서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돌이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단보다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멸망에 빠질 지옥 자식들도 성경으로 무기를 삼는데 천국 백성인 우리가 그들만큼도 성경을 모르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단과 논쟁은 하지 말되, 혹시 논쟁을 하게 되더라도 이단의 입을 다물게 만들 실력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다의 얘기에는 그냥 흘려듣기에는 조금 이상한 내용도 있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삿11:12)
입다가 암몬 왕에게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입다의 땅입니까?
암몬 왕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입다는 경우가 다릅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왕도 아닐 뿐더러 설령 왕이라고 해도 이스라엘 땅이 곧 자기 땅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라는 입다의 얘기는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을 탐하느냐?"로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입다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여간 입다의 얘기에 암몬 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를 물리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책 펼쳐놓고 이단과 논쟁을 하여 이겨도 이단이 회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11:29-31)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을 했는데, 서원 내용이 황당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을 향한 지식은 없습니다.
대체 입다가 왜 서원을 해야 합니까?
설마 입다가 서원을 하지 않았으면 전쟁에서 졌을 텐데 서원을 한 덕분에 이겼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입다가 한 서원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서원이 아니라 애초에 등장하는 모습부터 전혀 사사답지 못했던 한 건달의 종교적인 광기에 불과합니다.
입다도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었는지라 종교적인 의식과 절차에는 제법 들은풍월이 있었던 것입니다.
입다에게는 자기가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드보라나 기드온처럼 이미 승리가 보장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서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 입다에게는 하나님께 뇌물을 드려서라도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하나님도 관심을 두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자기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면 별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폐단이 과거 이스라엘의 뒷골목 출신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해도 맨입으로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뭔가를 약속하면서 하면 기도가 더 잘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 꼭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이번 시험에 꼭 붙여주십시오." 하는 것보다 기왕이면 "하나님, 이번에 저를 합격시켜 주시면 다음부터는 절대 예배 빼먹지 않겠습니다." 하고 기도해야 더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이번에 로또복권 1등에 당첨시켜 주시면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습니다." 하는 기도보다 "하나님, 이번에 저에게 로또복권 1등에 당첨 되게 해주시면 절반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 더 수준 있는 기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부자지간입니다.
전혀 낯선 이웃집에 부탁을 하려면 떡 한 접시라도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와 하나님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물론 평소에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게 산 마음의 부담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하나님, 한 번만 제 사정을 봐주시면 저도 정신을 차려서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절대 잘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차라리 뻔뻔스럽게 그냥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저것을 해주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공짜로 제 편의만 봐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저도 제 나름대로 하나님께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감히 하나님을 향해서도 자존심을 굽히기 싫은 발칙한 행동입니다.
어쩌면 자기의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맹세라는 종교적인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을 자기 수하에 두려는 수작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는 분명히 사사입니다.
물론 사사로서의 정통성은 시빗거리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사로 추인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모든 사사의 주된 임무는 전쟁 수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 지도자가 되어서 이방 족속을 물리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고 그 일을 다 하면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다릅니다.
11:1부터 12:7까지가 입다에 대한 기록인데 전쟁에 대한 기록은 고작해야 11:32-33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입다의 가장 큰 관심이었던 전쟁 얘기는 별로 없고 전쟁 전에 있었던 암몬 족속과의 담판과 전쟁 후에 있었던 딸을 번제로 드리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때 입다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승리를 주시면 자기가 개선하는 날 가장 먼저 자기를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황당한 서원을 했다가 자기 딸의 생명을 끊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서 힘을 얻기도 했다가 하나님에 대한 식견이 모자라서 쓸데없는 올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이 한 인격 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입다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이 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올무가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역시 예수 믿기를 잘했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늘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이 있다는 사실이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입다에게 닥친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것이 거추장스럽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신앙이 있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기는 있는데 시원치 않다는 뜻입니다.
입다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할 때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다.
전쟁을 앞둔 비장한 각오로 "하나님, 이번 전쟁에서 저에게 승리를 주시면 제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저를 환영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하는 다짐을 할 때 속으로 누군가를 상상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친구에게 "야, 아무 거나 말만 해. 내가 다 들어줄게!" 하고 큰소리를 치는 경우에도 그 친구가 자기에게 부탁할 만한 목록을 머릿속으로 연상하게 마련입니다.
"아마 이 친구가 나에게 이것 아니면 그것을 부탁할 것이다. 그 정도는 문제없이 들어준다." 하는 판단이 있을 때 그런 큰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이때 입다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가장 먼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하고 서원하면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꼬집어서 상상하지는 않았겠지만 머릿속으로 어떤 범주의 사람들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대체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삿11:34-35)
입다를 가장 먼저 영접한 사람은 입다의 딸이었습니다.
그러자 입다는 몹시 슬퍼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자기를 영접하는 사람은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할 때 '누구든지'의 범주에 딸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체 입다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런 서원을 했겠습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딸이 무남독녀인 것을 감안하면 아마 그의 아내도 아닌 것 같습니다.
입다에게 본처 외에도 세컨드, 써드…… 하는 식으로 수두룩한 처첩이 있었으면 자식도 많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입다의 집에서 나와서 영접해야 하므로 입다와 같이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대상은 결국 입다가 데리고 있는 종 중의 한 명입니다.
애초에 입다는 "내가 이기고 돌아오면 어느 재수 없는 종놈 하나가 환영한다고 튀어나올 거다. 그러면 내가 그 놈을 기꺼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누구든지 가장 먼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하는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말로는 '누구든지'라고 했으면서 그 '누구든지'의 목록에 무남독녀 외동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에게 가끔 속았던 적이 있습니다.
같이 식당에 가면 제가 묻습니다.
"뭐 먹을래요?"
"그냥 아무 거나 시켜요."
그러면 저는 순진하게 그 말을 곧이 듣고 정말 아무 거나 시킵니다.
"여기 설렁탕 둘이요!"
"아니, 설렁탕 말고……"
"그럼 여기 갈비탕 둘이요!"
"아니, 갈비탕도 말고……"
"그럼 뭐?"
"그냥 비빔밥 같은 거……"
처음부터 비빔밥을 먹겠다고 하면 될 것을 괜히 말하기 쉽게 하느라고 '아무 거나'라고 하는 바람에 제가 헛물을 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고 말은 하면서도 그 '뭐든지'의 범위를 항상 자기가 정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는 말씀에 비장한 각오로 '아멘!'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인하지 못하는 목록이 너무나 다양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우리 몸은 주의 영이 거하는 성전입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를 보면 전혀 자유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모양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 때문에 종교적인 형태를 갖는 헌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자유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신앙이 자유가 됩니까, 아니면 굴레가 됩니까?
신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굴레인 줄 압니다.
저도 그런 얘기 여러 번 들었습니다.
교회 다니느라고 모처럼 일요일에 가족들과 놀러 가지도 못하고 무슨 청승이냐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맞는 말 같습니다만 교회 다니는 재미와 예수 안에서 얻어지는 신령한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됩니다.
"야! 너, 쓸데없이 애인은 왜 있냐? 미팅도 제대로 못하게……?" 하고 핀잔을 주면, 이게 말이 됩니까?
애인이 있어서 미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인이 있기 때문에 괜히 미팅 건수를 찾느라고 기웃거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미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에는 바로 그런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절대 굴레가 아닙니다.
부요함이고 넉넉함이고 풍부함입니다.
풍성하게 누리는 자유와 기쁨입니다.
길을 가다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연신 싱글거리는 그 친구는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니까 장미꽃 백 송이 같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가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는 뻔합니다.
자기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친구가 부러워야 합니다.
"야! 여자 친구 사귀느라고 고생 많다. 이 좋은 날 놀러 가지도 못하고 참 안됐다." 하고 위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과 참 가치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그 안에서 누리는 우리만의 기쁨과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니까 신앙이 있으면서도 그 신앙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고 굴레이고 억압인 줄 압니다.
애인 때문에 미팅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것과 같고 쓸데없이 애인 생일이어서 돈 깨진다고 타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전에 상당히 자극적인 광고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귀하에게 영어가 힘입니까, 짐입니까?"라는 광고 문구였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봐도 영어를 잘하는 학생은 영어 때문에 성적이 올라가는데 영어를 못하는 학생은 영어 때문에 전체 성적이 떨어집니다.
영어는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따라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영어 때문에 오히려 천대를 받기도 할 것입니다.
영어가 과연 당신에게 힘이냐, 짐이냐는 질문은 영어 학원에서는 당연히 할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분명히 같은 예수를 믿고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신앙이 힘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영어의 경우 영어를 자기의 힘으로 누리는 사람은 상당 기간 동안 꾸준하게 영어의 짐을 진 사람입니다.
그 짐을 꾸준하게 져서 결국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영어가 짐인 사람은 아직까지 그 짐을 제대로 져보지도 않고 늘 발뺌만 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이라는 짐을 꾸준히 지면 그 신앙은 결국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갖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그 짐을 외면하면 신앙은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짐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힘입니까, 짐입니까?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한 번 더 점검해보십시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우리의 가장 큰 힘입니다.
당신의 시선을 고정시켜라! /삿11:1-3
2008-11-06 11:55:21
믿음의 사람은 "나는 내 속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만났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종교 놀이, 종교 의식을 하려고 하지 말고 생기를 호흡해야 됩니다. 성경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의 체험을 한 제자들은 "나는 믿지 못하더라도 내 속에 있는 생기의 기적만은 믿으라"고 하면서 증거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시대든, 어느 누구든 생기가 들어가면 살아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되시는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여! 내 심령에 성령을 충만하게 하옵소서.
성령이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 부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원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기적, 무슨 기적해도 가장 확실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최고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온갖 질병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환경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악한 세력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여러분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을 느낍니다. 멸망 받을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십자가의 말씀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겠습니까? 저들이 우리를 보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구원받은 우리가 믿지 않는 저들을 바라보았을 때, 세상에서 저들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세상에서 잠시 어려움을 당하겠지만, 저들은 죽음 이후에 영원히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잠시 머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지라도 잠시잠깐 후에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과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고통과 멸시를 받을지라도 곧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신랑되신 주님과 함께 면류관을 쓰고 영화로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게 여겼던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이 십자가의 말씀은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확실히 달라집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저주의 사슬이 끊어지고 축복의 통로로 변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여러분의 팔자가 바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리는 아무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은 복 있는 사람만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강단에서 우리들에게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십시오. 사모하십시오. 사모하는 만큼 들을 수 있습니다. 듣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의 세계는 체험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기만 하면 지금보다 좀 더 간절히 매달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의 소리를 듣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주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믿고 순종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좀 더 애쓰고 매달려야 됩니다. 답답할수록, 캄캄할수록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삶의 승리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삶의 승리를 간구하는 상한 심령들에게 영적 비밀을 전하는 도구가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생애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미래입니다. 그런데 미래라는 도화지에는 색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미래라는 하얀 도화지에 색칠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받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오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다가오느냐가 중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미래는 믿음대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사고의 변혁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학대하거나 비참한 존재로 낙인찍지 마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축복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세워줍니다. "나는 이 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성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내 영혼아, 주 안에서 잘 될지어다!" 낙관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 안에서는 "예"만 있지 "아니오"는 없습니다. 믿음은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결코 이류 인간의 태도를 취하지 마십시오. 이류 믿음을 택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은 일류 인간입니다. 일류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실패자를 승리자로 바꾸는 곳입니다. 사람이 바꾸지 못하고, 물질이나 명예가 바꾸지 못하지만 복음이 들어가면 바뀌어집니다. 실패자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변명의 병입니다. 태초에도 변명이 있었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와 탓으로,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명하는 습관을 버리십시오.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변명을 하는 사람은 결코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양으로 세울 때에 죽으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속죄양이 된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했지만, 창과 칼을 들었던 로마의 권력과 정부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속죄양은 승리합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쓰지 못할 속죄양은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속죄양으로 선택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속죄양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믿음으로 가면 무슨 일을 당하든지 만사가 형통합니다. 속죄양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자는 즐겨 실패자를 부르고, 성공자는 즐겨 성공자를 찾게 됩니다. 참새는 참새끼리 모이고, 학은 학끼리 모이듯이 유유상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자신이 세상 그룹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썩은 사람과의 교제는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의식개혁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과 어울려야 합니다. 삶의 꿈이 큰 사람과 어울려야 합니다. 사랑의 정열이 넘치는 사람과 어울려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나쁜 사람들을 찾으면 나쁜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좋은 사람들을 찾으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정열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삶의 꿈을 크게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참으로 어두웠던 시대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암울했던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을 성경은 '사사'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사사기 3장 1절 이하를 보면 사사기 등장하게 되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그러니까 이들은 가나안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왜 그토록 피 흘리며 전쟁을 해야 했는지 그 이유와 성격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우리 백성이 왜 애굽을 떠나야 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지 그 목적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신들이 이 가나안 땅에서 어떤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세대를 소위 다른 세대, 신세대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을 쫓아내기는 커녕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타락한 문화를 배우는가 하면, 오히려 그들의 풍요로운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신세대 남자들은 이방 딸들을 아내로 삼아 가정을 이루었고, 이스라엘의 신세대 여인들은 이방 족속 가정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가치관의 혼돈이 있었습니다. 풍요의 가치관, 재미의 가치관, 성공의 가치관으로 그들의 신앙체계가 뒤죽박죽 되고 말았습니다. 유일하신 야훼신앙이 혼합종교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타락한 가나안의 가치관, 이방 신들의 종교와 싸우고 그것을 쫓아내라고 했더니 아예 한통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름하여 적과의 동침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라 했더니 오히려 유혹을 환영하고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어내려 가다보면 사사가 등장할 때마다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또' '다시'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야샤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또 또 또 다시 다시... 사사기가 끝날 때까지 이 단어는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사사시대의 범죄의 악순환, 타락의 싸이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범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징계를 받습니다. 아프다고 울다가 회개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자 사사를 보내주시고 백성들을 평온 가운데 지켜주십니다. 사사기는 이 싸이클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인생 싸이클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평온할 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범죄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때문에 인생에서 실패의 쓴맛과 고통으로 울다가 회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또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징계를 받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인 10장 6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이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하고 우상숭배를 한 결과 암몬이라는 이방 나라가 강해졌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대적이 자라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떠나면 우리 주변에는 악한 세력들이 강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약해지면 사악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변의 적들을 섬멸하기에 앞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다스려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의 모습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회와 개인의 주변에 악이 존재하고 언짢은 일들일 일어날 때에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범죄함이 어둠과 악의 세력들이 강건함을 키우는 불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파괴와 멸시와 조롱과 절망의 세력들이 판을 치는 것은 평화와 사랑과 희망을 주어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서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가정의 문제, 내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는 다른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의 불순종과 범죄 때문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보십시오. 그가 처음에 겸손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이후에 교만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흩어질까 두려워서 인간적으로 보기에 좋은 듯해서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내가 좋은 방법으로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실패한 왕으로 남아야만 했습니다. 바로 불순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순종을 미루는 것도 불순종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언젠가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또한 불순종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보다 앞서 가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일은 자기가 다 벌여놓고 주님이 빨리 오시지 않는다며 주님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다 벌여놓고 하나님께서 빨리 정리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민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최고의 축복과 행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따르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의 8대 사사인 입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입다는 첩의 아들인 서자 출신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저주하는 기생의 아들입니다. 이복 형제들의 따돌림과 차별 때문에 고향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돕 땅, 사람이 살기 힘든 산악지대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이복 형제들의 눈을 피해서 쫓겨난 한심한 처지인 그에게 잡류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건달, 또는 백수입니다. 한 마디로 입다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차별 받도록 태어났습니다.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불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성경은 입다를 가리켜서 '큰 용사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환경과 상황이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큰 용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입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깨뜨리는 힘은 믿음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구덩이에 빠지고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들어가도 그 인격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소유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두려워하면 환경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으로 느껴집니다. 두려운 하나님으로 알았을 때는 영적으로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축복이요, 그분을 가까이 해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아프면 차라리 자기가 아픈 게 낫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고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입다가 최악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큰 용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입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을 조금 넘어서 11장 9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입다는 장로들과의 대화에서 승리는 여호와께 달려있다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11절에서는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다의 삶을 보면 그의 환경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엎드려 기도하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환경의 장애를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시선을 바꾸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시선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만 고정되어 있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환경에 두지 마십시오. 세상에 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시선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고정시키면 비록 여러분이 아골골짜기를 걸어갈지라도 마음에는 평안이 가득할 것입니다. 입술에는 찬양과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환경의 장애를 뛰어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힘은 오로지 믿음에서만 나옵니다. 믿음은 모든 운명을 뛰어넘게 하는 능력입니다. 모든 장애를 뛰어넘게 하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반대로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썩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타락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적으로 우리를 썩지 않게 만드는 영적 방부제는 믿음입니다. 우리 안에 믿음만 있으면 아무리 주변 환경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버틸 수 있습니다. 언제나 일어서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주변 환경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평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 살아있는 믿음, 천사도 흠모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시선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고정시키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믿음이 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11장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믿음의 사람인 입다는 결국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역사 안에서 목적을 가지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능력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의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신이 무엇입니까?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선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고정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결국에는 스스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시선을 고정시켜 보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없어도, 부족해도, 연약해도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는 일등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풍랑이 휘몰아쳐도, 삶이 곤고해도, 믿음의 사람은 그의 시선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수많은 전파가 있지만 그것들을 다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전파를 잡을 수 있는 수신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수신기의 성능이 나쁘면 전파가 잡히지 않습니다. 성능이 좋을수록 전파를 잡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수신기가 필요합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로 고정시키십시오. 당신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고정시키면 그때부터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은 잘 사는 것보다 바로 사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선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고정이 되면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믿음의 눈을 하나님께로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반드시 승리했던 승전보를 안고 가야 하는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요, 순종의 싸움이요, 믿음의 싸움입니다. 비전의 싸움이요, 꿈의 싸움입니다. 사명의 싸움이요, 소명의 싸움입니다.
나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는가?
그래서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했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자원들,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왕되게 했는가?
내가 왕이었는가, 하나님이 왕이었는가?
이 싸움이 본문에 나타난 사사기의 싸움이요, 오늘 신앙인의 싸움이요, 나의 싸움이요, 너의 싸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청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무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과 좌절과 낙망에 부딪힐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당신의 시선을 하나님에게로부터 거두어들이지 마십시오. 인생의 어떤 위기를 맞이할 때에, 어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시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만 고정시키십시오.
어떻게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삿11:34-36
2011-04-11 14:35:36
골프의 재미에 푹 빠진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주일에 골프 약속이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갈등하다가 부인 권사님에게 결국 몸이 아파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고 혼자 몰래 골프장으로 갔습니다. 이를 본 천사가 하나님에게 고했습니다. "혼 좀 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장로님은 1번 홀에서 힘차게 스윙했습니다. 볼은 무려 350야드를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진 뒤 홀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습니다. 홀 인원! 평생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대기록입니다. 장로님은 흥분했습니다. 천사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하나님! 뭔가 잘못된 것 같네요. 벌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며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생각해 봐라! 장로가 이 일을 누구에게 자랑하겠니?"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갤럽이 조사한 2005년 130개국 13만 7214명을 대상으로 한 행복 여론 조사 결과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5.3점으로 평균점인 5.5점 보다 낮다고 합니다. 세계 116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이 나라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힘들다’ ‘괴롭다’ 더 나가 ‘죽겟다’입니다. ‘좋다.’ ‘살만하다’ ‘괜찮다’ 이런 말 하는 사람 드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 기쁨이 충만한 곳이다. 살 맛나는 곳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지옥은요? 죽을 맛이 나는 곳이다..... 살기가 힘들고 괴롭고 그래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곳, 그곳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지옥입니까? 천국입니까? 매일 매일 살 맛이 납니까? 아니면 죽을 맛입니까?...... 나는 매일 천국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 겁니까? 명색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장차도 천국에서 살아야 하실 분들인데 이 땅에서도 천국 백성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론 잘 안되지요..
적어도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지만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들이 ‘야... 우리 집은 정말로 천국같애... ’이런 말이 나와야 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엄마가 ‘얘야..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니?’ 라고 물으면 애들이 대뜸 ’우리 집이잖아‘ 이런 대답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되지요? 왜 그럴까요? 행복하지가 않아요.. 기쁨이 없습니다. 기뻐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기쁘지가 않아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보다 이 기쁨을 뺏아 가는 것들이 더 많아요..그렇지요? 그래서 하루에도 웃을 일이 별로 없어요.. 한국 사람들 하루 24시간 가운데 딱 90초 웃는답니다. 1분 30초..그러니 하루종일 날마다 심각한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은 왜 우리는 기뻐하며 살기가 어려운가? 어떻게 하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해답입니다. 입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입다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기생에게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본처 자식들에 의해서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세력을 규합하여 군대를 이룹니다. 꼭 우리나라의 홍길동이나 임꺽정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로 쳐들어 옵니다. 백성들은 큰 용사인 입다를 그들의 사사로 삼고 암몬과 싸우게 합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에 왕 제도가 생기기 전에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지도자이지만 제대로 된 리더십이 형성되기 전이기에 여러 가지로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입다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이 전쟁에서 제가 이기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제가 승전해서 돌아올 때에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입다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것도 참으로 불리한 전쟁이었는데 승리했으니... 그래서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돌아오는데 그를 제일로 먼저 나와 마중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가 애지중지 사랑하는 무남독녀 외동 딸이었습니다.
이걸 어떡합니까? 그가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딸이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사로써 공개적으로 선포한 일입니다. 되 물릴 수도 없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내용입니다. 성경이 왜 이런 내용을 다루어 우리를 곤혹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씀은 그냥 건너뛰어야 합니까? 다루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냥 건너 뛰고 싶은 구절에 더 큰 진리와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보면 참 불행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진리와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입다가 얼마나 하나님께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 바른 신앙 갖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입다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효도를 하기 위해서도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잘 섬길 수가 있습니다.
자식된 도리는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잘 해 주면 잘 섬기고 못 해주면 안 섬기고... 그래선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부모님은 나에게 잘 해주고 못 해주고를 떠나 날 낳아주셨기 때문에 부모님이신 겁니다. 이 사실 잊으면 안 되요..
나한테 잘 해주셨기에 부모님이고 잘 못해 주셨기에 부모님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때요? 애들이 다른 애들하고 비교를 해요.. 그래서 다른 집 부모들 보다 더 못해 주는 것 같으면 불평이 말도 못해요.. 저 혼자 큰 줄 알아요.. 고마움이 없고 감사가 없어요.. 도리어 지가 부모를 위해 희생한 줄 알아요.. 지도 곧 부모될 것 아닙니까?
우리 자식들이 그렇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도 그렇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내 생각대로 해 주시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해요.. 그러다가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만 불평해요.. 괴로워하고 힘들어 해요. 죽겠다고 해요...
그래서 기도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 만약에 이번에 제 기도를 들어주시면... 제가 하나님한테 잘 할게요..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헌금도 많이 하고.. 그럴께요.... 그러니 이번에 꼭 내 소원 들어주세요...
이런 기도 안 해요? 그런데 이런 기도가 바른 기돕니까? 아닙니까? 바른 기도가 아니지요? 왜 그런줄 아세요? ...이런 기도조차 안 하고 사니... 잘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어떤 사람이 복권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복권이 1등으로 당첨되게 해 주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당첨금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꼭 당첨이 되게 해 주세요. 아멘...’ 이런 기도 해 보신 적 있으시죠?
자... 이 기도가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한 기도입니까?....잘 생각해 보세요... 언제 하나님이 복권 당첨된 십일조를 달라고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으로 헌금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기도하는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당첨금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괜히 내가 복권 당첨되고 싶으니까 십일조 운운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바라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인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거래적인 관계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입다가 바로 그랬다는 겁니다. 그의 서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복권에 당첨되거나 아니면 길을 가다가 큰 돈을 줍게 해 주신다면 반드시 그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과 ‘이번 전쟁에 이기게 해 주신다면 그가 누구라도 가장 먼저 환영하러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 같습니까? 틀립니까?....같지요? 같습니다.
그래서 입다의 서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는 부족하신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걸 드릴테니 저걸 주세요... 이게 통합니까?
효도를 한답시고 ‘어머니,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내가 공돈이 생기거나 길 가다가 떨어진 돈 좀 주으면 그것으로 선물을 사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때 까지만 좀 참고 기다리세요.’ 이럴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 한테는 그런 자세를 갖느냐 이겁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도 그래요. 뭡니까? 우리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 아닙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맨날 기도하잖아요... 우리 신앙의 목적이기에..
그런데 입다의 목적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동안 서자 출신이라는 조롱을 받고 자라난 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나라 안 밖으로 지신의 이름을 떨칠 수가 있습니다. 인생 역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꼭 이기기를 바라지요? 남과의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기만을 바라는게 우리들입니다. 입다와 같아요.
그래서 입다는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기게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가장 먼저 맞이하러 나온 사람을 바치겠습니다' 이게 입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왜 우리의 삶이 왜 기쁨으로 충만하지를 못하고 괴로움으로 충만한지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봅시다. 입다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는 무척 기뻤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도 마찬가집니다. 언제 기뻐합니까? 우리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그러면 언제 슬퍼하고 괴로워 합니까? 우리의 바램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죽을 맛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내가 바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리로 인해 기뻐했던 입다가 얼마 안가 몹시 괴로워 합니다. 일순간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고통이 다가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제일로 먼저 자기를 맞으러 나온 사람이 무남독녀 외동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딸이었습니다. ‘아빠’ 하고 달려나오는데 그렇게도 사랑하고 이뻐하는 딸이었습니다. 순간 입다는 지금까지의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괴로움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이 이렇게 덧 없는 것입니다. 오래 가는 줄 알았는데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소원만 이루어지면 영원토록 기쁨이 계속될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요즘은 외모 지상주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외모 외모 하는데 그 외모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남 미녀 끼리 결혼했다 할지라도 3년이 지나면 흥미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미인을 아내로 둔 사람들은 그러면 절대로 이혼하지 말아야 하는데 연예인들 보세요. 걸핏하면 이혼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기쁨도 금방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생이 괴롭다고 말합니다. 죽을 맛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이 내 맘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도 안될까?’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기뻐할 겨를이 없습니다. 걱정 근심이 가득합니다. 한 마디로 죽을 맛입니다.
사실 삶이 우리의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를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 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이 욕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사실 알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짐 케리 주연의 ‘브루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맨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주인공이 어느 날 하나님의 허락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안 합니다’ 라고 살던 그가 하나님이 되었으니 신이 났습니다. 그는 평소 자기가 하나님이 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의 직장 라이벌을 손 봅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게 해서 결국 직장에서 쫓겨 나게 합니다. 이 땅에서 그의 원수들은 모두 그 앞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지구 상에서 올라오는 모든 기도를 자기 마음대로 다 들어줍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듯이 모두가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십시오’ 라는 것들입니다. 그런 기도를 다 들어주고 흐뭇해 있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려면 다른 사람은 피해를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가게 잘 되게 해 주십시오 했더니 다른 가게는 손님이 없어 망하는 것입니다. 모든 병을 고쳐주니 병원과 의사 약사는 다 굶어 죽어야 할 판입니다. 잘 생긴 남자하고 결혼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수 백 수천 명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다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하나님께 원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자리가 얼마나 어렵고 피곤한 자리인지 알게 되었노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바램대로 다 들어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랬다간 이 세상 모든 사람 다 부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 다 1등이 되어야 하고 다 출세를 해야 하고 다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나 명성교회 처럼 커야 하고 모든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 김삼환 목사님 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런데도 내 뜻대로 안된다고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 세상에 혼란이 올지라도 다른 사람이 큰 손해를 볼지라도 나는 잘 되어야 하고 이익을 얻어야 하고 항상 이겨야 한다고 원합니다. 이 고집과 욕심을 아무도 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안 되면 맥이 풀리고 힘이 없어 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함에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괴로워하고 고통 스러워 하고 힘겨워 합니다. 맨날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 사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현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어려운 일이든 힘든 일이든...아니면 좋은 일이든 기쁜 일이든 ....이런 환경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결론으로 입다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는 기쁨을 누리다가 곧 슬픔에 잠겼습니다. 전쟁에 승리로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자기 딸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이렇게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 기뻐하고 또 괴로워합니다. 그 기준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고 이익이 되면 무조건 기쁜 것이고 내게 잘 못되고 손해가 되는 일이면 무조건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고 항상 기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이 잘 될 때는 ‘하나님 어떻게 해서 이렇게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 주십니까?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반대로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물론 이웃을 기쁘게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못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자신의 딸이 나왔을 때 몹시 상심하고 괴로워한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입다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없어도 될 만한 것 그냥 아무 한테 줘 버려도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귀한 딸이 나오자 그만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많은 종들 중에 하나가 뛰어 나올 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조차 없는 우리들입니다. 아깝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에게는 우리에게 없어도 서운하지 않은 것 아깝지 않은 것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증표가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가 바로 우리들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입다의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딸이 왜 죽게 되었습니까? 순전히 입다 때문입니다. 입다의 죄로 인한 죽음입니다. 입다의 딸은 순순히 죽음을 선택합니다.
여기서 입다는 오늘 우리들 자신이고 입다의 딸은 곧 우리들의 허물로 인해서 죽어야 하셨던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괴로움만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허물로 인해서 죽으셔야 했던 하나님의 괴로움과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괴로움으로 인해 가장 복된 자들이 된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도 우리 육신이 잘 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잘 안 되면 괴로워 합니다. 이런 우리를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해 주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잘 되면 기뻐하고 안 되면 낙심하고 그래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직 잘 되는 못 되든 내 안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이 잘된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건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역전을 꿈꾸십시오 /삿11:1-11
2011-04-27 16:13:08
어느 날, 미국의 성공학자 폴 마이어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어항 중간에 유리벽을 세워두고 한쪽에 금붕어를 놓고 다른 쪽에 굶주린 메기를 놓았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메기가 금붕어를 잡아먹으려고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유리벽에 부딪쳐 머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낍니다. 그렇게 몇 번 시도하다가 계속 머리가 아픈 상황을 겪으면서 스스로 자기를 의식화시킵니다. “아! 나는 저 금붕어를 먹을 수 없구나!”
바로 그때 그 유리벽을 들어냅니다. 그러면 그때 금붕어를 잡아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메기는 쏜살같이 금붕어를 향하여 달리다가도 중간에서 획 돌아섭니다. 자기는 금붕어를 먹지 못한다고 미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메기가 실패공포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처럼 실패공포증에 걸리면 자기에게 있는 놀라운 가능성이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해도 실패 공포증에는 빠지지 마십시오.
과거의 실패가 사람을 영원한 실패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로 실패 공포증에 걸리는 사람이 진짜 실패자입니다. 일시적 실패자는 ‘단순한 실수자’이고 실패를 의식화한 자가 바로 ‘진짜 실패자’입니다. 한번의 성공이 사람을 성공자로 만들지 않듯이 한번의 실패가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 역전의 꿈을 가지고 지금부터 새롭게 시도하십시오. 그래야 더 나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 공포증에 빠져 일을 망치거나 아예 일을 시도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큰 일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경기와 같습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승리만 하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패 앞에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패배한 인생 경기장을 나서면서 마음이 물처럼 녹지 말고 패배한 경기장을 다시 바라보며 새로운 투지를 불태우십시오.
미국의 유명한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은 가끔 심호흡을 세 번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심호흡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확신을 들이마시고 불신을 내 보낸다.” 둘째 심호흡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강함을 들이마시고 약함을 내 보낸다.” 셋째 심호흡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승리를 들이마시고 패배를 내 뿜는다.” 그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면 반드시 불운한 현실을 극복하고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생 역전을 이루는 길 >
본문을 보면 놀라운 인생 역전 드라마를 연출한 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입다입니다. 그는 기생 출신의 첩의 자녀였습니다(1절). 그래서 본처의 아들들은 그에게 “너는 첩의 자식이니 아버지의 유산을 받지 못한다.”고 하며 그를 쫓아냈습니다(2절). 얼마나 그 설움과 상처가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설움과 상처를 극복하고 나중에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영웅이 됩니다. 그처럼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입다는 출신도 나쁘고 가족들로부터 쫓겨났지만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낙심하지 않고 돕 땅으로 가서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잡류들의 두목이 되었습니다(3절). 그리고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큰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자기를 내쫓은 형제와 동족들을 찾아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암몬 족속으로부터 고생하는 동족을 보호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는 이미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움과 상처를 타인과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표출시키지 않고 창조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인생을 유익하게 만드는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그처럼 분노의 감정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믿음과 지혜를 가지십시오. 살다 보면 가끔 입다처럼 거절감과 소외감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면 반드시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옵니다. 그에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의 길르앗을 침략했습니다(4절). 당시 길르앗에는 변변한 군대가 없어서 길르앗 장로들은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한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내쫓은 입다가 변경 지방에서 엄청난 세력을 이뤄 맹위를 떨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입다에게 자신들의 군대장관이 되어 적의 손길로부터 보호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6절).
그때 입다는 장로들에게 자신을 미워해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도움을 요청하느냐고 톡톡히 창피를 주었지만 동족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암몬을 물리치고 민족적인 영웅이 됩니다. 그처럼 설움과 상처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설움과 상처를 창조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면 반드시 인생 역전의 기회는 주어집니다.
왜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될 수 있었습니까? 왕이 되기까지 숱한 환란에도 낙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망명했을 때 그는 잠시 시글락 성에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시글락을 비운 틈에 그곳이 아말렉 족속에 의해 노략질 당했습니다. 그 일로 낙심해서 다윗과 모든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습니다(삼상 30:4). 그러나 다윗은 곧 일어났습니다.
비참한 일을 당할 때 누구나 낙심하고 절망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절망의 기간을 최소로 단축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능치 못한 일이 없음을 알고 의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말렉의 뒤를 추격해서 아멜렉을 물리치고 잡혀간 백성들과 재산을 도로 찾았습니다(삼상 30:7-20). 그런 불굴의 자세가 있었기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떤 시련을 당해도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삶은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영적 투사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는 패배와 좌절의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가면 패배와 좌절은 결국 도약과 승리로 귀결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패와 실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승리는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2.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십시오
어렸을 때 입다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지만 점점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 마침내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남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기 전에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인간적인 매력이 발산되고 리더십이 발휘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지 마십시오. 남이 어떻게 평가하든 자신만 자신을 낮게 평가하지 않으면 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내였던 일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에게 열등감을 가지게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천국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구보다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자신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의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어느 날, 한 세미나 강사가 빳빳하고 깨끗한 100달러 지폐를 들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100달러 지폐를 가지고 싶으면 손을 드십시오.” 많은 학생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때 강사가 “이래도 가지고 싶습니까?”라고 말하며 지폐를 심하게 구겼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학생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마루바닥에 그 지폐를 떨어뜨리고 신발로 마구 짓이겨 지폐를 더럽고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학생들이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사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100달러짜리 지폐를 구기고 짓밟고 더럽혀도 여러분들은 여전히 그것을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폐가 구겨지고 더럽혀져도 그 가치는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살면서 여러 번의 실패로 짓이겨지고 더럽혀져도 성도의 내적 가치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이제 자신을 가치 없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가치 있게 보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십시오.
과거에 어떤 불행한 체험을 했고 미래에 어떤 불행한 체험을 해도 성도의 내적 가치는 잃지 않습니다. 물론 남들이 자신보다 더 재능이 있고, 똑똑하고, 더 잘생길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쓸모없는 폐기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가치에 대해 굳은 확신을 가지십시오.
입다가 자신의 가치를 불신했다면 그는 좌절한 상태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결국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새롭게 일어서면 얼마든지 과거의 실패와 아픔을 딛고 일어서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며 복된 미래를 향해 새롭게 도전하십시오.
3.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본문 9절에서 입다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암몬과의 싸움을 수락하고 길르앗의 리더가 된 후에 바로 이어서 자기의 말을 다 하나님께 고했습니다(11절). 그 말씀을 보면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입다의 삶을 역전 인생으로 만든 최고의 비결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신앙을 버리지만 어떤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후자처럼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십시오. 아무리 큰 용기와 재능이 있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인생 역전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를 원하면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붙잡는 일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치의를 세 명이나 두고 건강관리를 아주 잘해서 백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결국 지옥에 갔습니다. 그렇게 백 살 살고 지옥 가는 것보다 차라리 오십 살 살고 천국 가는 게 낫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조금 못 살고, 조금 못 나고, 조금 키가 작고, 조금 공부 못해도 괜찮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결코 괜찮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영생에 비하면 사람의 일생은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정비사를 만나야 하고 병든 환자는 의사를 만나야 하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 매주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깊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만남이 모든 행복과 축복의 원천입니다.
어느 날, 한 총각이 한 처녀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매일 편지를 보냈습니다. 365일 동안 365통을 보내니까 우체부가 매일 그 편지를 처녀에게 갖다 주면서 그 처녀를 거의 매일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처녀가 매일 만나는 우체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만남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고 항상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 지금부터라도 인생 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을 보십시오. 그녀는 돌에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인 창녀였지만 하나님의 뜻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깨닫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여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결국 황무지에 피어난 한 송이 백합화처럼 창녀 출신으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남김으로 멋진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역전 인생을 원하면 라합처럼 현재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민하게 행동하십시오. 과거의 직업이나 행적이 결코 성공의 방해물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과거의 실패가 현재를 결코 주장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면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역전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 역전 인생을 꿈꾸십시오 >
저와 가깝게 지내는 어떤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금은 한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상담 목사로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자녀가 많아서 사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귀국해서 처음부터 한국 교육의 틀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부모는 명문대를 나왔지만 아이들은 바닥을 기었습니다.
어느 날, 공부에 뒤쳐지는 아이들이 과외를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돈이 없어서 못 시켜주고 대신에 돈을 조금씩 저축해서 미국여행을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한국에 부임한지 3년 만에 2개월 휴가를 얻어서 미국여행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런 자유혼을 가진 가정이었기에 아이들도 한국교육의 틀이 맞지 않았고 공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 특별히 공부가 뒤떨어졌던 둘째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말쯤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제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지 않고 1년 더 중학교 2학년을 다니면 안 돼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동생들과 같이 공부해야 되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3학년은 옛 친구로 삼고 2학년 아이는 새 친구로 삼으면 되지요.” 그 얘기를 듣고 아빠는 사회적 체면을 버리고 학교에 요청해 1년을 꿇게 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에서 1년을 꿇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성적은 여전히 나빴습니다. 경기도 용인의 한 고등학교에서 45명 중 42등을 했습니다. 그 아이 뒤의 3명은 운동하는 학생들로서 거의 수업을 받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결국 꼴찌인 셈입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그냥 놔두고 하나님께 기도만 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해서 특별히 선생님께 부탁해 야간 자율학습도 빼주었습니다. 원래는 야간 자율학습을 빼주지 않지만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선생님도 특별히 빼주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없이 돌아오면 매일 집에서 맛있게 초저녁잠을 즐겼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기도의 울타리만 널찍하게 쳐주면서 “네 인생은 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아들이 잠을 즐기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방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고 사무실 형태로 방을 꾸며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도 분위기를 바꿔주면 생활 태도도 바꿔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대로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둘째는 펑펑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나오는데 둘째 아들 방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놀다가 지쳐서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둘째는 학교에서 오면 먼저 몇 시간을 자고 밤새워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새벽기도 갈 때쯤 다시 몇 시간 자고 등교하는 패턴으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중간고사를 쳤습니다. 43등 하던 아이가 갑자기 4등을 했습니다. 그 성적표를 들고 아이가 기쁘게 아빠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그 성적표를 들고 호통을 쳤습니다. “얘야! 공부를 못하는 것은 괜찮지만 거짓된 삶을 결코 안 된다. 빨리 불어!”
둘째 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뭘 불어요.” 아빠는 다짜고짜 말했습니다. “빨리 솔직히 불어!” 아빠는 둘째가 43등에서 24등을 했다면 믿겠지만 4등을 한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둘째 아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를 협박해 베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목사님이 아들을 그렇게 못 믿어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목사지만 이걸 어떻게 믿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러면 아빠가 한번 학교에 와 볼래요?“
며칠 후, 목사님이 학교에 가서 창문 너머로 보니까 둘째 아들이 제일 앞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거의 다 졸고 있었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바로 이어서 학원까지 가니까 잠이 부족해서 정작 수업시간에는 거의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만 제일 앞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을 열심히 받아 적으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둘째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학교 시험은 범위도 작고 선생님이 시험에 나올 것을 수업 중에 다 가르쳐줘요. 그래서 수업만 열심히 들으면 시험을 잘 봐요.” 그때서야 비로소 아들의 성적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둘째 아들은 야간 자율학습 없이 집에 와서 초저녁잠을 맛있게 즐기고 밤새 공부하고 새벽에 잠을 자는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학기말 시험에서 마침내 반에서 1등을 했습니다.
야간 자율학습도 안 하고 학원도 안 다니는 아이가 꼴찌에서 두 번의 시험 만에 1등을 하니까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학교 시험은 금방 일등을 했지만 기초가 없으니까 특별한 범위가 없는 모의고사 성적은 많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나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지 않고 다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가게 해주세요. 다시 공부를 시작할게요.”
항상 아들의 뜻을 존중하며 자유혼으로 키웠지만 한국 사회에서 1년도 아닌 3년을 꿇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목사님도 그 요구만큼은 들어주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로 고민하던 중, 어느 날 캐나다에서 온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도 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얘기 중에 서로 한 명씩 자녀를 바꿔서 키워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교환 자녀’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년 꿇는 것도 큰일이지만 캐나다에서는 그것이 전혀 문제될 것 없어서 마침내 아들 요구대로 고등학교 1학년부터 다니게 했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캐나다에서 최고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히 각종 수학경시대회를 휩쓸다가 수학 특기자로 2군데 대학에서는 4년제 전액 장학금을 제의받았고, 캐나다 이과계통의 최고 명문인 워털루 대학의 입학 허가도 받았습니다. 그때 둘째 아들은 아빠의 재정문제를 생각해서 4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 대학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목사님은 아들의 마음을 읽고 말했습니다. “얘야! 너 워털루 대학에 가고 싶지? 등록금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 소원대로 해라.” 그래서 지금 워털루 대학을 잘 다니고 있습니다.
첫째 딸도 학교 성적은 나빴지만 영어를 잘해서 고등학교 때 처음 본 토플 시험에서 630점을 맞고 한동대 특채로 들어갔습니다. 그처럼 정형된 교육의 틀에서 매겨진 서열이 성공과 승리와 행복의 서열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요새는 많은 부모들이 다급한 마음으로 주일까지 학원을 보내지만 청소년 때에 주일의 삶이 없고 개인의 창조성을 발휘할 기회와 시간조차 박탈되면 눈앞의 작은 승리는 이뤄도 인생전체의 큰 승리는 놓치면서 결국 역전패를 당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거룩한 자유혼을 가지고 사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자유혼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 결국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결코 현재의 모습으로 자신과 자녀를 규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고 더욱 큰 꿈을 꾸십시오. 그래서 오늘보다 내일이 찬란한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고 선교와 구제의 큰손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복된 인물이 되십시오.
환경의 노예에서 환경의 변혁자로 /삿11:1-11/ 김필곤목사
2018-02-15 11:09:06
요즈음 어르신들 입에 이런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못 먹고 안 입고 죽기 살기로 아들 딸 잘 길러 보려고 노력했는데 길러 놓고 보니 모든 게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애지 중지 아들 기르지만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그림자이고, 며느리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각하는 3대 여인은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라고 합니다. “애들 죽기 살기로 가르쳐 봤자 다 쓸 데 없어”라는 어르신들의 자조적인 이야기, 스스로 자기를 비웃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 “사다리가 사라진다”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진다”라는 연재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 사회를 떠받쳐온 '상승의 사다리'가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하면 된다'는 계층 상승의 메커니즘에 균열이 생기고, '노력해도 가난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퍼져 있다"고 했습니다. 560만 명의 빈곤층은 희망이 사라졌고 서울의 어느 판자촌에서 30년 동안 그곳을 탈출한 가구는 3가구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 번 좋지 않은 환경에 빠지면 그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용어로 하면 환경결정론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타고난 환경 어쩔 수 없을까요?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은 입다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환경하면 일반적으로 인간을 둘러쌓고 있는 외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자연적 환경 인문적 환경으로 나눈다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자연적 환경은 사람이 만들지 않은 땅이나 공기 같은 것을 말하고 인문적 환경은 사람이 만들어내 도시나 고속도로 등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조금 세분하여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적인 환경(자연적 환경), 인적인 환경(인적, 정신적 환경), 문화적 환경입니다. 입다가 처한 세가지 환경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환경의 종이 아니라 환경의 변혁자로 살 것인가를 교훈받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물적 환경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요?
1.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물적 환경에 처한다하여도 포기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개발하여 물적 환경을 변혁시키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입다를 보십시오. 8대 사사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8대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날 때 그가 처한 물적 환경을 보십시오. 내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환경을 보십시오. 나라 환경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고국 이스라엘 나라는 전쟁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막강한 암몬이 쳐들어 왔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한 혼돈의 때입니다. 가정환경은 어떻습니까? 그의 어머니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기생이었습니다.
오늘날 말하면 창녀였다는 말입니다. 창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한 아들입니다. 원치 않는 아이입니다. 거부당한 아들입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창녀의 자식이라는 괄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물적 환경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며 분노와 슬픔, 열등감 속에서 심각하게 자존심이 상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 아이들이 어떻게 됩니까? 탈선합니다. 반항아가 됩니다. 환경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입다가 자포자기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한 물적인 환경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마쳤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8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위기에서 구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절 보면 입다는 큰 용사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물리적 환경에 노예가 되어 자기 재능을 잠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개발했다는 것입니다. 성장해서는 그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타인의 힘에 의해 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3절에 보면 집에서 쫓겨나 형제를 피해 돕 땅에서 잡류들과 어울렸다고 했습니다.
무익한 쓸모없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무리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그러나 건달 세계에서 깍두기 건달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 지저분한 환경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지만 대장이 된 것입니다. 대장 건달이 된 것입니다. 지도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잡류들을 그에게 모였고 그를 따랐습니다. 체력만 개발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지혜를 보십시오. 고난 가운데 지력을 개발했습니다. 암몬군대를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먼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택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암몬 왕과 담판합니다. ‘당신이 왜 우리를 치러 왔느냐?’ 하니까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땅은 모두 자신들의 땅이니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 때 입다는 3가지로 대처합니다. 첫째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21-23). 이 입다의 고백을 통해 입다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주어진 환경은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하나님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24).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 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현제 삶의 태도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환경에 비교하면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하여도 하나님이 인도하는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27).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자신이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하시는 분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물적 환경에 처한다하여도 포기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개발하여 내게 주어진 환경을 변혁시키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비관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천대받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천적으로 재능을 별로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아이큐가 태어날 때부터 높지 않았습니다.
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권력, 학력, 매력이 없는 집안의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개천에서는 용이 나올 수 없다고 자포자기 말아야 합니다. 상승리 불가능하다고 되는 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2006년 가을, 천재를 연구한 논문을 최초로 집대성한 책인 '전문지식 및 전문가의 케임브리지 편람(Cambridge Handbook of Expertise and Expert Performance)'이 출간되었습니다. 편집을 맡은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은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책에서 과학자들은 천재가 1%의 영감, 70%의 땀, 29%의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진다고 분석했다. 아인슈타인, 피카소, 다윈은 어린 시절 학교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흐, 고갱, 차이코프스키, 버나드 쇼도 늦은 나이에 비로소 재능을 발휘했답니다.
천재는 보통사람보다 다섯 배 정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천재 중의 천재로 손꼽히는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해 35년의 짧은 생애에 무려 600편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45년간 330건의 논문을 남고, 아인슈타인은 50년간 248건의 논문을 발표했고, 에디슨은 1093개의 특허를 냈으며, 볼테르는 2만1000통의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노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쯔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을 보십시오. 그는 15살 때 자전거 점포에서 일을 시작하여 일본 최대의 그룹인 마쯔시타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었냐고 누군가 물으니까 "나는 3가지 감사할 조건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첫째는 11살에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일찍 철이 들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공부에 대한 아쉬움으로 평생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건강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환경은 중요한 변수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는 것은 공짜를 바라는 거지 근성 때문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를 보십시오.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의문의 변사를 당했습니다. 아버지의 동업자들이 전재산을 빼돌려 가족들은 졸지에 거리에 나앉고 말았습니다. 테레사는 자신에게 다가온 처참한 환경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고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할지라도 환경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변혁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우상 장사 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의 변혁자가 되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입양아 신세로 자랐습니다. 노예 민족입니다. 그는 환경의 종이 아니라 환경의 변혁자가 되어 노예 민족을 자유민으로 해방시켰습니다. 요셉은 어머니가 넷인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신 매매 당했습니다. 억울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족을 살리고 가문을 일으키고 시대를 살리는 시대의 변혁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물적 환경에 처한다하여도 포기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개발하여 물적 환경을 변혁시키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인적 환경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요?
2. 우리는 변하지 않는 인간 보며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인적환경인 사람을 변혁시켜야 합니다.
태어나 보니 부모가 장애인입니다. 태어나 보니 부모가 가난하고 이혼하였습니다. 태어나 보니 형제들이 시기합니다. 인적 환경이 나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아닙니다. 수치스럽고 불행한 환경입니다. 입다를 보십시오. 형제들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해주고 위로해 주고 힘을 주어야 할 혈족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정도 성장하니까 동생들은 그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형을 쫓아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돈에 얼마나 민감합니까? 돈에 눈이 멀면 부모 형제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의 인적환경은 어떻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합니까? 불의에 대하여 지적하며 약자인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동네 사람들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를 미워하여 그들이 입다를 쫓아내는데 함께 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인적 환경에 놓이면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원망합니다. 저주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벼들어 함께 자멸해 버립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보았지 않습니까? 결혼 반대한다고 여자의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죽였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사장을 죽이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교회에 불지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입다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적 환경의 불합리한 처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였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생들에게 쫓겨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실제적으로는 큰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1,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쫓겨났습니다. 나라가 위급하니까 장로들이 입다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입다에게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머리는 ‘카친’이라는 말로 군대 장관, 전쟁의 우두머리가 되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입다는 기분이 안 좋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속을 알고 있는 입다는 구역질 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인간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도 일반적인 통치자 "로쉬"(8)가 되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쟁의 우두머리입니다. 위급하니까 네가 나가 싸워달라는 것입니다. 다행이 싸워 이기면 좋고 죽으면 너나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입다는 그들에게 물어 봅니다. 9절보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머리는 ‘로쉬’입니다. 일반적인 통치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통치자로 삼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불쾌하고 속보이는 짓들을 하고 있지만 나라를 위하여 위기 앞에서 과거 환경의 노예가 되어 그들을 원수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었습니다. 그는 창녀의 아들이었지만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좋지 않는 과거가 있는 장로들이 요구할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삿11:9)” 현재, 내가 쫓아내면 내가 전쟁에서 이기면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넘겨주시면 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적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도 하나님께서 넘겨 주셨다는 것입니다(21,23).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넘겨주시면 적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30).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이기게 할 것을 확신하며(9,24) 기도합니다(11).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이기게 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21,23)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보지 않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적 환경,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 붙들고 다투고, 억울해 하고, 원망하며,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의 힘을 기르면 그 사람들 언젠가 변화되는 때가옵니다. 자식들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 잘 시키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너무 중요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 어르신들 유행하는 이야기 또 해보겠습니다. 아들 아들 하며 아들 죽기 살기로 아들 기르는데 아들 그렇게 교육시켜보았자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이고, 돈 잘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이고, 빚진 아들만 내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여 과외시켜 길렀는데 사춘기가 되면 남남이 되고 군대에가면 손님이 되고 장가가면 사돈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아들 딸 너무 중요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이 힘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하나님이 은혜 주어야 합니다.
힘없어 나를 둘러싼 인적 환경에 대하여 부당하게 생각하며 억울해 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고 영적 능력을 기르고 육적 정신적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은 후패하나 우리 영은 날로 날로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내가 힘있으면 아들 며느리 돌아가실 때까지 효자 효부 됩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인간 보며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인적환경인 사람을 변혁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문화적 환경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요?
3. 우리는 이방 문화 환경의 노예가 아니라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바꾸는 변혁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주어진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환경이 좋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하며 살 수 있는데 그 문화적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퇴패문화, 향략문화, 인본주의, 쾌락주의, 폭력 문화 속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태어 나 보니 불교 집안,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좋은 문화 환경에서 태어났는데 학교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직장 생활하다 보니 아주 좋지 않은 문화 환경에 살 수 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입다를 보십시오. 그가 쫓겨간 곳은 어디입니까? 돕 땅입니다. 이방 땅입니다.
이방 땅에서 폭력배들과 어울려 사니 그의 행동 양식은 이방문화에 흠뻑 젖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30절 보십시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람을 제사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방 문화에 물이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입다는 불우한 물적 인적 환경을 극복하였지만 결국 이방 문화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입다는 이방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방의 잘못된 언어습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방 철학, 이방 사상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먼저 만난 사람을 인육제사를 드린다고 서원하였습니다. 환영하는 사람 칭찬해주고 상급주어야 하지 왜 제물로 바칩니까? 이방 사람들이 몰렉 신에게 바치는 것을 배웠습니다.
입다가 쫓겨나서 돕 땅에 가서 살았는데 수리아 지역입니다. 거기에서 이런 풍습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방 풍습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딸이 처녀의 몸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했겠습니까?
우리는 진공 속에서 살지 않고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이방 문화 환경입니다. 어떤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는 성가 연습을 다 한 후에 "성불사의 밤"을 흥얼거립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배꼽티를 입고 와서 목사님께 인사를 합니다.
목사가 하도 민망하니까 얼굴을 보니 못하고 옆을 보니까? "목사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끝내고 나오면서 바위섬을 부릅니다. 그랬더니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교인들도 따라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큰 교회에 다니는 청년회 회장이 고민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부 예배를 마치고 2부 순서로 인천 앞 바다를 간다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어울려 한잔하고 온다는 것입니다. 교회 어는 여대생 모임에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2부로 카페에 갑니다. 앉자마자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돌립니다.
서울에 있는 어는 목사님은 철야 기도를 마친 후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가 답답하다고 여전도 회장님에게 수원에 가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밤중에 수원에 가서 여전도 회장님과 한잘 걸치고 왔습니다.
남편이 하도 오지 않아 교회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새벽 4시에 목사님과 함께 차에서 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정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는데 옛 문화, 이방 문화, 죽음의 문화, 타락한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예가 됩니까?
제가 요즈음 계속 현용수 박사의 유대인의 교육을 추천도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인성교육, 유대인의 효도 교육, 영재 교육, 경제 교육, EQ 교육 등 다양한 책을 교회 도서실에 사놓았습니다.
유대인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약 0.2%인 약 천 오백만 명인데 노벨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2%인 560만 명에 불과한데 미국 400대 재벌 중 23%가 유대인이고, 맨해튼 빌딩 주인의 40%, 미국 대학 교수 중 25-35%, 뉴욕 중고등학교 교사 중 50%, 뉴욕 의사의 과반, 미국 법조계 70만 변호사들 중 14만 명(2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대학 교수 중 25-35%,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및 주요 책임자 90%, 아이비리그 교수진의 약 40%, 하버드, UCLA 의대 및 법대 교수의 50%, 상위 15개 대학의 21%의 학생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3대 방송사와 할리우드 5대 메이저 영화사를 장악하고 있고 전미 50대 기업 중 17개가 유대인이 설립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은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지만 44%가 중도 하차하고 졸업을 하여도 70% 이상이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 가계를 이어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강조하기를 수직 문화를 도외시하고 수평문화만 강조하고 아이큐만 강조하고 이큐를 도외시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구약 성경과 토라를 가르치며 하루에 쉐마를 두 번 외우게 하고 세 번 기도회를 가지며 3대가 신앙 문화를 전승하는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수직문화는 심연문화 뿌리 문화로 영구적인 가치, 인생의 의미를 찾는 문화, 하나님 말씀, 지혜교육, 깊이 생각하는 문화를 말합니다.
수평문화는 일시적 외형 문화로 시대에 따라 바뀌는 문화, 충동적인 문화, 개인주의, 쾌락주의, 과학만능주의, 물질 주의 등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고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는 문화라고 말합니다. 수직문화를 계승하니까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 문화가 4천년이 넘도록 멈추지 않고 있고 심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자아 개념, 집중력, 고난에 대한 인내력 등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 문화를 통하여 13살까지 정의적 영역 감정과 의지의 영역을 높여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통한 의지력, 사명 감, 가슴에 끓는 열정을 넣어 준다는 것입니다.
쉐마 교육(신6:4-9)을 중심으로 “지혜 교육, 슈르드 교육, 질문식과 탈무드 논쟁식 IQ 계발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 EQ, 수직 문화, 효도, 고난의 역사를 교육하고 외면적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 IQ 계발, 지식 전문교육, 체력 단련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텔레비전을 집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식에게 공부하라며 텔레비전을 보는 부모가 없다고 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3대가 기도를 하며 자녀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쉐마를 암송하며 수직 문화를 계승한다고 합니다.
인성교육과 수직문화를 무시하고 수평문화에 방치하면서 지식 교육만 강조하는 교육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과 다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신약과 구약을 선물받은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얼마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 영원히 변치않는 복음의 문화를 우리 후대에 전승할 수 있습니다. 문화 환경은 물과 같습니다.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좋은 물을 후손에게 남겨주어야 합니다. 100년이 지나면 문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나라는 기독교 문화가 정착되지 못하여 고생스럽게 신앙 생활을 합니까?
우리는 우리 가정 문화, 우리 교회 문화, 우리 시대의 문화를 하나님의 중심의 문화, 말씀 중심의 문화, 살리는 문화, 진정 재미의 문화, 서로 공존하는 문화로 바꾸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에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놓아야 우리 후손들이 조금은 갈등 없이 살만한 신앙 생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 문화 환경의 노예가 아니라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바꾸는 변혁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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