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 수 있다면! /요11:17-27/ 崔 仁 根 牧師
2023-07-01 00:20:56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다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 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부활도 半信半疑(반신반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어도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고 말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서 믿음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하루살이와 메뚜기와 같이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상대방이 이상하게 된 것으로 판단한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나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모든 믿음도 결국은 헛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고전15:14-18)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부활신앙은 믿음의 마지막 선언이요 인간 삶의 마지막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이 믿음으로 주어진 우리들의 삶을 신령하게 승리하는 진정한 멋쟁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놀랍게 변화 될 것입니다.
다시 살 수 있다면!
고난주간은 매년마다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그때마다 늘 전하고 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들에게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부활주일은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진리를 듣고 배우는 계절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죽으시고 다시 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들의 믿음의 기본으로 삼고 우리들도 또한 그렇게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의 일생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이렇듯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에게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진정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으로 무장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성경 속에서 함께 찾아보면서 진정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단10:19)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마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대충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결 같이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두려워해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최소한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흉악 할수록 형벌은 더욱 더 가혹할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형벌은 사형입니다. 사람을 수없이 죽인 살인마라도 법정에서 마지막 형이 선고될 때 “사형”이라고 하면 그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사실은 이처럼 잔악한 범인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이처럼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그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일케익에 꽂혀 있는 촛불처럼 후- 불어서 불을 껐는데도 잠시 후에 다시 살아나서 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생명도 죽였는데 잠시 후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과연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것처럼 죽음이 그렇게 무서울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왜 무섭겠습니까? 오히려 잔인하게 죽이는 자를 조롱하듯 당당하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더욱 더 강인하게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이란 이와 같이 죽여도 다시 살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더할 수 없이 잔인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끌고 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행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위의 말씀 중에서 밑줄 친 부분을 다시 한 번 더 음미해 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람을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을 어떻게 못을 박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수님을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한 마디로 승리지요! 그것도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더할 수 없이 가장 잔인하게 죽여 버렸는데 그 사람이 버젓이 다시 살아나왔다면 그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당당하게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만 천하에 선포하고 고백하는 계절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만이 그렇게 다시 사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 예수님께 붙어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비밀이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요 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친히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엄숙하게 물으십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와 같은 질문 앞에 당당하게 “아멘” 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화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삶에 그 어떤 것도 우리들을 두렵게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을 쫓아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천국과 같은 멋들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굴 덜햄(Durham)지방에 석탄광이 있는데 전에 그 탄광이 무너져 164명의 광부들이 생매장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구조작업을 하던 중 촘촘히 글이 쓰여 있는 판자때기 하나를 시체와 함께 발굴하였습니다. 그 판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과 함께 같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화요일 오후2시." 그들은 부활과 영생을 믿고 그렇게 떠났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떼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부활신앙은 이렇게도 죽음을 넘어 담대하고 평안한 마지막 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마지막 삶의 고통에서 이렇듯 해방을 주고 자유를 주고 평안을 주어야 제대로 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이처럼 확실한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신앙으로 깊은 탄광 속에서 죽어갔던 이름 모를 성도들과 같이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품안에 머물기를 소망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강하고 담대함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이 죄와 두려움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서 해방 될 수 있도록 죽음을 몸소 실천하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그 주님을 따라 천국까지 승리하고 살아가도록 친히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을 억압하고 누르고 두렵게 하는 모든 세력들을 당당하게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소극적인 두려움을 물리치고 적극적인 담대함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신 방도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는 이 엄청난 축복과 명령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우리들을 죽일 수도 있는 그 모든 요인들을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으로 극복하고 당당하게 정복하고 다스리며 굳게 서는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온갖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만과 반목과 미움으로 동지를 적으로 만들고 오로지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며 그렇게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신선한 롤 모델을 한 사람 세워 주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따라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델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수1:1-9)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 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곱씹어 보면 두려움을 물리치고 담대하게 승리하는 모든 비법이 이 말씀 속에 깊이깊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담대해야 합니다.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이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을 정복하신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모세를 통해 입증해 주셨고 그것을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신 여호수아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그 엄중하시고도 분명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도록 보겠습니다.
(수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이 읽고 듣고 묵상하는 말씀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초라하고 무능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작은 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으로 이처럼 담대하고 강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만사형통한 삶을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들을 살리시려고 몸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미국 보스턴 교외에는 골든 코넬이란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이 세워진 배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 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이 불리하게 되자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 와중에 그만 자신의 指揮刀(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아무도 모르게 링이라는 작은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 속에 들어가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그만 적의 총에 맞고 말았습니다. 코넬이 머물고 있는 천막에 돌아와서 간신히 칼을 바치고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어린 소년은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어린 소년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죽어도 다시 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위해서 저도 이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고 결단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털어서 하나님의 제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었던 것입니다. 코넬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해 냈습니다. 어린 소년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을 따라 강하고 담대하게 한 목숨을 내 놓았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내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앙생활을 넘어서 이제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강력한 부활신앙으로 고넬과 같은 위대한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담대한 결단입니다. 할렐루야!!
자족하며 만족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으로 두려움을 내어 쫓고 강하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부활신앙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도들은 환경을 탓하거나 남을 탓하는 등의 어리석고 초라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의 대전환을 만들었을 때 가장 그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까지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동족들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유대인들로 인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고후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당한 개인적인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산 그의 삶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만의 독특한 삶의 철학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自足(자족)이라는 놀라운 비밀이었습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귀한 두 절의 말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놀라운 사도다움의 단어를 발견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족하기를 배웠고 또한 풍부와 궁핍에 처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사도 바울이 배운 이와 같은 “자족”을 논하는 大人(대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그 많은 위대한 인물들 중에 사도 바울 만큼 “부활”에 탁월한 식견과 믿음을 가진 인물도 없습니다.
아울러 부활신앙인 만이 배우고 익히고 살았던 “자족”의 삶을 또한 사도 바울처럼 살아간 사람도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자족하는 신앙을 본 받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 또한 죽어도 다시 살 성도라면 사도 바울과 같이 자족하는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없는 부활신앙은 논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부활신앙의 최고봉인 자족할 줄 아는 성도는 삶도 죽음도 초월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진정한 영적인 성도들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Chartre)는 1980년 3월에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을 이 병원에서 발악하며 보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묻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유라는 수많은 수필과 글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은 실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불란서의 신문들은 샤르트르의 죽음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에 대해서 어떤 독자는 이렇게 신문에 투고했습니다. “샤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샤르트르에게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에게는 진정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투옥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는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본 훼퍼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돌아갈 본향이 있고 죽어도 다시 살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죽음도 자족하며 맞을 수 있는 담대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히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는 말씀이 있기에 부활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죽음조차도 초연하며 두려운 삶 속에서도 자족하는 여유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8년도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은 단순한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믿음의 가장 소중한 본질을 고백하고 되새기는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확신이 없다면 헛된 믿음이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터리 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절을 우리 나이만큼이나 많이 맞이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활에 반신반의 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 직접적인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육신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거듭나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나 죽음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이 비겁하고 두려움에 떨며 소중한 인생을 불안과 근심 걱정으로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근본이 흔들리고 두려움에 젖어 있으니 이 세상을 정복하기는커녕 늘 그 무엇엔가 지배를 당하며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무장하게 되면 이와 같은 고질적인 우리들의 육신의 한계를 단방에 달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부활의 계절에 우리 믿음을 한 계단 더 업그레이드(Upgrade) 시켜 소망찬 영적인 자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단번에 살려 내시던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귀하고 복된 2018년도 부활주일을 맞아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며 부활의 주님을 모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요11:17-23/ 崔 仁 根 牧 師
2023-06-26 14:30:49
우리는 과연 우리 예수님을 우리 삶에 어느 정도 소중한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워서 낙심하며 주님을 떠나고 잘 되면 교만하여 주님을 잊어버리는 안타까움 속에서 겉사람만 교회에 다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가정의 달을 마지막 보내면서 우리 가정과 삶에 가장 소중하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고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McDonald 의 창업자 Ray 크록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오직 예수님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우리 사업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렇게 살겠습니다."고 다짐하며 도와달라고 해 놓고 사업이 조금씩 일어나고 바빠지니까 예수님은 간곳없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는 끔찍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에 데인 듯 깜짝 놀라 스스로를 책망하며 연약한 자신을 믿지 못해 신문에다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꼭 창업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예수님만을 우리 사업장의 사장님으로 삼고 오직 예수님 우선주의로 사업을 해 나가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McDonald는 전 세계에서 제1의 햄버거 샆으로 그 명성을 당당히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승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안 계셔서 안타까와 눈물짓는 한 여인의 순전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처럼 믿고 의지했던 오라비가 병들게 되자 그는 득달같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리고 속히 와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끝내 오라비는 죽고 말았습니다
. 더운 지방이라 일찌감치 장례를 치르고 이미 나흘이나 지나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날 때, 그 때서야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마르다가 첫성으로 한 말이 바로 원망 섞인 이 말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이 한 말 속에 참으로 많은 것이 들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진정으로 새롭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고귀한 말씀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마음 귀를 기울이고 들어서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으로 우리들의 남은 삶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런 멋전 성도들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을 아주 심도 있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무려 44절이나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요 요한은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성경이 엄청나게 많이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 사도입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까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고 고귀한 것들만으로 요약이 되어 있다고 선언한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는데도 그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이렇게도 길고도 자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가 깊다는 뜻일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아야 될는지?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유익을 주십니다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때 예수님과 마르다와 마리아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오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그 가정을 많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실이 구전으로 전해진 것도 아니고 성경에 명명백백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요11:2-5)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장정 1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던 여인이요 예수님 또한 그와 같은 그들의 가정을 본래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다급히 사람을 보내왔는데도 지체하시며 시간을 보내시고 오시지 않다가 결국 그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야 오셨으니 오해가 쌓일 만도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도 나가보지도 않았고 마르다만 겨우 나가 예수님을 맞기는 했으나 원망에 가득한 마음이었습니다.
(요11:20-21)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생각과 오늘 우리들의 생각에는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작은 생각이 주님을 오해하게 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객관적으로 오늘 본문인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들은 오로지 죽은 오라비 나사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우리 주님은 오히려 이와 같은 슬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과 뜻을 이 땅에 나타내시려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나사로가 죽어 섞은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깊은 우리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섭섭함과 아쉬움과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육신의 한계를 지닌 마르다와 마리아는 우리 주님의 신령한 계획과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이런 내용들이 한결같이 사도 요한이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오해 없도록 설명해 주는 소중한 자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우리 주님을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좁은 안목으로 주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말도록 권했다가 사탄이라는 무서운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칼을 빼들고 말고의 귀를 자르는 우를 범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26:51-52)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연약한 인생들은 우리 주님의 속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도하고 실망도하며 그렇게 주님 앞에서 불충을 저지를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결국은 우리들에게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을 말씀 그대로 믿고 기대하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을 끝까지 기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마르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11:21-22)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미 사랑하는 오라비가 죽어서 장사까지 다 끝냈는데도 아직도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의 기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다는 말이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주님에 대한 기대는 우리 속사람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성군 다윗은 거듭 천명해 놓았던 것입니다.
(시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37:22)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가장 핵심적인 믿음도 또한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포기란 절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당찬 각오를 선포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삼상12:23-24)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이 당찬 믿음을 견지하지 못한 채 조금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조금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그런 어리석은 우를 많이 범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 앞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릇된 신앙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끈질긴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부른 수제자였습니다. 마침내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 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그 스승 엘리야를 순간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돌아가라 강권하시는데도 끝까지 따라 갔던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따를 것임을 알아 챈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받으신 영감보다 갑절이나 더 받기를 원합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제자에게 그것을 약속하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엘리사는 스승에게도 그 기대를 잊지 아니하고 끝까지 따랐는데 오늘 우리들은 어찌하여 주님께 대한 기대를 그리 쉽게 저버리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오라비가 죽어 장사까지 마쳤지만 주님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 곁에서 소망과 기대를 품었다가 끝내는 죽은 오라비를 부활케 하였던 마르다의 기대를 오늘 우리들도 가슴으로 깨닫고 새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기대를 결단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웃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비록 부모 없이 그렇게 고아처럼 살았지만 사람의 근본 됨됨이가 잘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 그 이웃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하였는가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슬픔 속에서 눈물 흘리고 있을 때 그 이웃들은 한결같이 그들과 함께 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이와 같은 말씀들은 한결같이 슬픔을 당한 마르다와 마리아를 그 이웃들이 정성을 다해 섬기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들이 이웃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아름답게 잘 지내왔는가를 단적으로 증거해 주는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이 평소에 늘 강조해 왔던 것처럼 우리는 나날의 생확 속에서 인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사람을 귀하에 여기고 주변에 사랑하고 함께 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두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당했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재물보다 훤씬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재물로 사람은 살 수 있지만 그 마음은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얻은 사람은 재물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얻은 인생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쏟아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을 배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말세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단호히 말씀 드립니다. "백 명의 친구를 두는 것 보다 한 명의 원수를 두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은 많은 친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원수가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아주 극단적이고도 난해하지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강권하셨던 것입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마르다와 같은 슬픈 일이 생겼을 때 과연 몇 사람이나 찾아와 위로하며 아픈 우리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고통의 때에 원근 각지에서 찾아 와 위로해 주었던 욥의 친구와 같이, 위기의 때에 도움과 위로를 주었던 다윗과 요나단 같이 함께 할 인생의 친구가 필요한 때입니다. 평소에 그리고 밥술이라도 먹을 것이 있을 때에 시간과 재물을 투자하여 인생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인 친구를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시 하나를 소개하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함께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함석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가라앉을 때
구명 배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칭송보다도
"아니오"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생을 헛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괜찮은 사람 하나 없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 정도의 멋들어진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면 한 번 멋들어지게 살아갈 만한 세상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위기의 때에 함께 할 좋은 사람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다 보내면서 오늘은 우리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넓은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이해하며 끝까지 그 주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의 어리석고 미련한 판단으로 주님까지도 오해하는 그런 못난 삶을 이제는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기다리며 모든 것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기대하는 그런 멋들어진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비록 세상에서 귀하고 좋은 것은 가지고 누리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주변의 모든 이웃들을 가족과 같이 살아가는 그런, 진정 모든 것을 다 가진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원수를 맺고 미워하며 살아갈 만큼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그런 멋진 친구하나 없이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을 다 모아놓고 독수리도 못 올라갈 그런 높은 벼슬을 누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냄새가 나야 하고 인생은 유한하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오늘이라는 날에 기뻐하고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로 헌신하는 천상의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늘의 하나님은 가슴에 모시고 세상의 사람은 없는 그런 엉터리 신앙을 넘어서서 땅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줄 아는 소박한 소시민이 되어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와 주시는 진정한 신자들로 거듭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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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생명 /요11:17-27/ 김형익 목사
2022-08-10 10:46:25
1. 죽음의 실존 앞에서 무력한 인간 (요 10:10)
사람이 피할 수 없고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실재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죽는 그 순간의 경험만을 일컫지 않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또한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먹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일까지 의존해야 하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던가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길따름이들의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기는 마르다를 봅니다. 그녀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어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요 11:21).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성경은 생명에 관해 많이 말씀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한 이후로 인간에게 찾아온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실존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종종 생명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사도 요한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생명입니다.
이 생명(ζωή)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사용되는데, 요한이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6회(요한복음 36, 요한일서 13, 요한계시록 17)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요한은 주님께서 이 죽음을 죽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죽음 앞에 무력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죽음의 실존 아래 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가 생각하려는 생명이라는 주제는, 단지 우리의 육체적 죽음을 넘어 부활한 이후에 누릴 생명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대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물으셨듯이,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저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2. 죽음을 대하는 태도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는 일반적인 태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첫번째 태도는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신자인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도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선천적 질병을 안고 태어난 딸의 죽음 앞에서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께 욕을 했던 한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과학자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 앞에서 느낀 무력감을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던 하나님을 향한 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이것은 신자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보이는 태도는 더 있습니다. 회의론자들의 반응도 있습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주님이 안 계셔서 죽었다는 마르다의 말은, 한편으로는 좀 시니컬하게 들립니다. “믿음이 별 소용이 없더군요.”하는 말로 들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종종 위기의 순간에,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회의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축복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고백하게 되지요. 이렇게 말하려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오셔서 그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 보다 처음부터 그가 죽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절망과 무력감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테니 그게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과 무력감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알아가고 경험합니다. “내가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 설명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를 기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다가 아니지만, 인생에서 이런 경험들을 꽤나 하면서 살아갑니다. 죽음, 그리고 모든 약함, 낮아짐, 굴욕의 경험들 말입니다.
3. 마르다의 신앙
좀 더 본문으로 들어가봅시다. 마르다의 고백에서 여러분은 그녀의 신앙의 면모를 어떻게 파악하십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1–22).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녀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비록 주님이 늦게 도착하시는 바람에 나사로는 죽었지만, 그래도 나는 주님이 특별하신 분인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보건대, 그녀는 여전히 주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아쉬움과 무력감으로 인한 낙심을 벗어버리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은 그저 마르다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일까요? 인생의 죽음과 죽음에 준하는 사건들 앞에서 무력감에 마음이 무너지고, 망연자실하고 낙심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전부입니까?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시자(요 11:23) 마르다가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마르다의 대답은 그녀가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부활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이 대답이 주님의 의도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장 나사로가 살 것을 의도하신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마르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그녀는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다 알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성에 따라, “주님, 저를 위로하시려고 말씀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빠는 죽었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여기지는 않을지라도,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신앙은 이성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가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겪는 무력감과 그녀가 느끼는 슬픔을 넘어서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믿음이 머무는 자리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종말 부활을 믿지만, 그 신앙이 죽음이라는 실존 앞에서 가지는 무력감과 슬픔에 대해서는 어떤 일을 합니까?
4. 두 개의 부활 생명 (요 5:24,29; 17:3; 롬 8:38-39)
여기서 주님은 두 종류의 부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죽음 이후 부활의 생명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고백하는 부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다른 부활 생명을 언급하십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순간 신자들에게 찾아오는 생명, 그 생명의 영속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부활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적으로 살아나서 부활 생명을 받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믿는 자는 이미 영생—부활 생명—을 누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왜 부활을 먼저 언급하실까요? 칼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는 부활을 먼저 말해야만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그 순서대로 다시 한 번 말씀하신 셈입니다. ‘죽어도 살겠고’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의 순서가 ‘부활과 생명’의 순서와 같습니다. 마르다는 첫번째 부활 생명을 알았고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 것입니다(요 5:29). 우리도 그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상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영원히 사는 생명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생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믿는 순간, 신자 안에서 시작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온전한 의미에서 육체의 부활 이후에 영원히 누리게 될 생명을 현재의 삶에서 미리 맛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고 하신 것도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리셨던 기도에서도 이 생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 말씀에 의하면 영생, 곧 부활 생명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인격적인 지식이기에,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의 사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이 곧 영생이고 부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 생명은 결코 육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 사도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 요한이 ‘영생’이라고 표현한 것과 본질상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것도, 이 부활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그는 선언한 것입니다.
5. 나사로 부활의 의미 (요 11:47-53)
주님은 믿는 자들이 현재의 삶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 생명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1:23).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부활 생명이 반드시 종말에 일어나게 될 부활 사건 이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는 자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실재이며 능력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사로 부활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날 나사로는 다시 살아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만 이후 어느 날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극적인 부활 이적이 주는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부활 생명은 죽음 이후 종말의 부활 사건이 일어날 때 경험하게 될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는 자들이 누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사로의 부활 이적 사건이 우리 삶에서 늘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나사로처럼 그들을 돌려받지 못합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울고 슬퍼할 뿐입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시간에 일어나는 부활만이 아니라, 지금 네가 누릴 부활의 생명이 있고, ‘네 오라비를 포함하여’ 모든 믿는 자들이 오늘 누리고 살아가는 부활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 11:45). 문제는 이 사건이 예루살렘 근교의 베다니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요 11:18). 이것은 예루살렘의 유대 당국자들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게 됩니다(요 11:47-53).
6. 신앙의 실재—부활 생명 살기 (롬 6:4; 합 3:17-18; 고전 15:55-58)
여러분, 주님의 말씀의 요점을 파악하셨습니까? 마르다는 참된 믿음을 가졌지만 그 말씀의 요점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슬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부활 생명을 말씀하셨지만 그녀는 믿는 사람이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고 누릴 수 있는 부활 생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종말에 모든 죽은 자가 몸의 부활 때에 얻게 될 부활 생명 만큼이나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믿음으로 이 현재적 부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종말이 날에 그 부활 생명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신앙은 이점에서 종말론적 실재인 부활 생명을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세례를 받은 후 신자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4).”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새 생명’은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현재에 누리는 부활 생명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생명 혹은 영생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생명의 길이 보다 생명의 질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영생은 문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지만, 그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끝이 없다는 점 보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삶이라는 강조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신자로서 부활 생명을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요한복음 17:3에서 말씀하신 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 삶은 종말의 부활 후에 받아 누릴 생명이지만, 신자는 그 종말의 삶을 믿음으로써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념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또 신앙은 지적 동의도 아니고 입으로 하는 전통적 신앙고백으로 축소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오늘 현재의 삶에서 부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삶입니다.
지난 주일, 길따름이들의 삶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출애굽기 33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공과 성취, 그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어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절망과 낙심, 무력감과 비통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 생명을 산 적이 없으니까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주님과 소통하는 삶이고, 사귐이 있는 삶입니다. 신앙은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거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가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내가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삶의 실재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과 사귐이 있고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죽음 이후에도 끊어짐 없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 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어느 날 나사로도, 마르다도 죽었습니다. 만일 나사로가 마르다 보다 먼저 죽었다면, 마르다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라는 사건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헤어나지 못할 절망과 슬픔으로 몰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테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며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죽음을 삼키셨고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 생명을 보증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말하던 중, 이렇게 소리칩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인용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오 죽음아, 누가 최종 결정권을 쥐었느냐? 오 죽음아, 이제 누가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죄가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고, 율법의 죄책이 죄에게 권세와 파괴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분의 단 한 번의 승리로, 그 세 가지—죄와 죄책과 죽음—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고전 15:55-57).”
죽음은 더 이상 믿는 자들을 무력감에 떨며 슬퍼하게만 만드는 사건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죽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활 생명을 이미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현재의 시간에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은 어떤 삶을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두 주일 전에 상고한대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삶의 주인이 주님이 되십니다. 내 삶의 목적도 바뀝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자가 됩니다. 그 삶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신의 감정과 상태와 삶과 계획과 모든 것을 말씀드립니다.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드린 시편의 모든 기도가 그의 기도가 됩니다.
지난 금요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문에서 배운 대로 사람의 첫째가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의식하고 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자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삶의 모든 조건 속에서 맛보아 알기 시작합니다. 그를 지배하는 정서도 변하게 됩니다. 그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아 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이 똑같아 보일지라도 믿는 자들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이미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 생명은 죽음 앞에서, 혹은 약함과 낮아짐과 실패와 굴욕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 슬픔과 낙담을 느껴야 하는 그 순간에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지금까지 길따름이들 시리즈에서 다룬 주제들이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행하고, 마귀의 시험을 분별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주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단순한 복종으로 반응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 안에,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이고 부활 생명을 사는 삶입니다.
이 생명은 주님의 말씀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죽음도 끊어낼 수 없는 생명입니다. 주께서 이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그 마지막 날에 영원토록 부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부활 생명을 맛보고 누리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58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 여러분을 권면함으로써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이 모든 일을 기억하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 시간 낭비나 헛수고가 아님을 확신하여, 주님의 일에 매진하십시오(고전 15:58 메시지성경).”
요한복음 강해 (75) - 나사로 사건(3): 신앙은 실재다 /요11:17-27/ 김형익 목사
2021-05-08 10:42:29
1.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무력한 실존
사람이 피할 수 없고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은 죽음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죽음 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인간의 무력한 실존은 종종 한 번쯤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A. ‘하나님이 계시다면…’(21)
그래서 보통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도 생각하지도 않다가 죽음 앞에서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하는 외마디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살아왔던 삶의 모든 순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전혀 주님을 알지 못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태어난 딸이 선천적인 질병을 가지고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자, 평소에 믿지도 않던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어?”라고 말입니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줄 뿐 아니라 그 순간에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B. ‘기독교 신앙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본문은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마르다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주님이 오시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비록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마르다에게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의 순간에는 그 신앙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종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바가 아닙니까?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내게 조금의 위로도, 힘도 되지 않는 경험 말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진짜 우리 신앙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지금 허상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
C. 부재를 통한 축복(21)
지난 주일에 잠깐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 늦으신 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생각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음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시간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부재를 통한 축복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런 수준의 신앙을 보게 하시고 동시에 더 온전한 신앙에로 이끄시는 사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2. 마르다의 믿음이 보여주는 것
마르다가 주님께 드리는 말을 보면, 그녀의 신앙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A. 마음으로 승복하지 못하는 신앙고백(22)
먼저 그녀가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할 때 드러내는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22). 이 말은 얼마든지 신앙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 지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 학자의 지적과 같이 이 말은 간구나 간청이라기 보다는 고백입니다. 즉,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는 요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입니다.
“당신이 여기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텐데 내 오라비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여기 안 계셔서 나사로가 죽은 것 때문에, 제가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을 떠나지 않으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조차도 신앙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고 있는 이 고백은 그녀의 마음 중심에서 승복하는 내용은 아닌 것입니다. 약간은 불편한 구석이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제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많은 고백이 이런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워서 알기에 그 주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볼 때, 마음으로 승복해서 주님을 따르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닌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주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갑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한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의 온 마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B. 전통적이고 지적인 신앙고백(24; 요 6:40,54)
이런 점에서 마르다가 하는 신앙고백의 수준은 전통적이고 지적인 신앙고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시자,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물론 주님은 지금 오라비를 살려내겠다고 하신 것인데,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에 사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부활관이었고 특별히 바리시파가 가르치는 부활관이었습니다. 즉 마르다는 기성교회가 가르치던 부활의 교리를 알았고 고백도 하고 있지만, 이것이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리로 데리고 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 전지하심을 다 믿습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위로도 되지 않는 신앙을 경험하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더 이상 실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바로 이런 신앙의 수준에 머무르는 자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3. 그리스도의 선언(23,25~26)
주님께서는 마르다의 이 확신이 부족한 신앙에 대해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유명한 정체성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께서는 아주 직선적으로 마르다에게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시면서 도전하십니다. “너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A. 나는 하나님이다: “I am...”
몇 차례 설명드린 바 있지만,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당신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는 선언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시는데, 헬라어 성경에서 이것은 ‘에고 에이미’(I am)라고 시작하는 말인데, 의도적으로 구약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여호와’ 혹은 ‘야웨’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그 무엇을 가리키기 전에 이미 ‘나는 하나님 여호와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가 기껏 주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입니다.
B. 부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주님은 먼저 당신을 부활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모두 부활할 것을 말합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부활을 먼저 언급하시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는 부활을 먼저 말해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마르다에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마르다가 믿고 말한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부활 때에 모든 죽은 자들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십니다.
C. 생명: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는 생명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실 뿐 아니라 생명이십니다. 이 생명은 요한복음에서 영생이라는 단어와 조금도 차이가 없이 사용되는 동의어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전에 생명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역시 말씀하시기를,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르다는 알고 있습니다. 적잖은 신자들이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대해서 지적으로 동의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다시 사는 부활과 영원히 사는 불멸의 생명이 언젠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이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가르치는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특별히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그리고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들에게 오는 세대의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미래의 생명을 현재에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인간들에게 미래의 생명의 현재적 경험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10:10).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고(6:33) 세상의 영적 주림과 기갈을 채워주러 오셨습니다(6:35). 그의 말씀이 생명이고(6:63)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입니다(12:49-50). 이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질 뿐 아니라 그 분 안에 존재합니다(5:26). 그는 생명을 주시는 산 떡이고(6:51이하) 생수이십니다(4:10,14).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그 생명을 아들에게 있도록 주셨고(5:26) 그래서 아들은 "내가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11:25; 14:6).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은 오는 시대의 생명에 못 미치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것은 종말론적 영생을 솟아나게 할 생명의 근원을 자기 안에 가지는 것입니다(4:14). 예수님 안에서 생명에 참여하는 자는 영원히 살고(6:51),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10:28).
요 17:3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렛(Barrette)은 이것을 영생의 정의라고 했고 다드(Dodd)와 파이퍼(Piper)는 영생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영생은 결코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끊어지지 않으며 죽음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D. 지금: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결국 이 나사로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날 부활 때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당장 살려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주님은 부활과 생명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이게 단순히 먼 미래에 있게 될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실재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영적 부활은 바로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생명의 역사입니다(요 5:24). 물론 미래적 부활의 차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입니다(요 5:28~29).
4. 신앙이 관념이 아니라 실재라는 말의 의미
여러분의 신앙이 어떤 자리에 머물러 있으십니까? 마르다가 가진 한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이 먼 미래에 있을 부활과 심판에 대한 전통적 고백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삶에는 통 능력도 위로도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전통적인 신앙 고백 가령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고백하는 내용들이 오늘을 사는 동안 내 삶에서 진실로 고백되는가 하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아는 수준만도 아닌 것입니다.
A. 이 세상에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현존합니다.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중요한 인식이 있습니다. 성경은 두 시대를 말하는데, 하나는 이 세상(this age)이고 다른 하나는 오는 세상(the age to come)입니다. 이것을 금생과 내생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금생이 끝나야 내생이 오고 이 세상이 끝나야 오는 세상이 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순간, 오는 세상이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이 땅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이 이 땅에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오는 세상이 완전한 의미에서 다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사실상 두 시대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의 능력, 오는 시대의 경험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i. 현재의 생명을 누리는 자만 미래의 부활을 경험한다.
이 말씀은 현재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누리는 자들만이 미래의 부활?생명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이 언제 우리에게 실재가 되는가 하면 우리가 종말론적 실재를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할 때입니다.
ii. 신앙은 종말론적 실재를 지금 경험하는 것(요 5:24~29)
신앙은 종말론적 실재를 지금 경험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실재 중에는 우리가 다 부활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이 본문의 사건에서 죽어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결코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주를 믿는 자들의 삶에서는 지금 여기서 깊이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신자가 얻는 영생이 이미 얻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그 뜻입니다(요 5:24).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바로 그 때 듣는 자는 살아나는 것입니다(요 5:25).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날은 미래의 약속 안에서 충만하게 경험될 것입니다(요 5:28~29). 여전히 그 완전한 성취는 미래의 한 날을 지시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실재로서 맛보도록 허락 받은 것입니다.
B. 신앙은 그 하나님을 아는/경험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즉, 신앙이 왜 관념적이고 느끼고 경험하는 실재가 되지 못하는가 하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된 지식, 참된 경험은 없고 지적 수준의 동의와 전통적 신앙고백만 있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신앙은 실재가 됩니다.
5. 마르다의 신앙고백(27)
주님께서 이 위대한 자기 선언을 하시면서 마르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이 마르다의 대답입니다.
A. 부족한 믿음도 참 믿음이다(39).
비록 마르다의 믿음이 온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마르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부족한 믿음은 참 믿음입니다. 이 말은 틀린 신앙고백을 가진 것도 참 믿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비록 온전하게 그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그녀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경우에도 들어맞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자신이 고백하는 내용의 의미를 알고 고백했을까요? 이어서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을 말리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을 듣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는 그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 고백의 의미를 충분하게 온전하게 알게 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였습니다. 제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제자들 뿐 아니라 마르다가 보여주는 그들의 신앙의 진정성의 증거가 있습니다.
B. 신앙은 자기의 이성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자기 이성에 순복하여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행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래도 내 생각에는 그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실로 현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믿는 최고의 기준은 자신들의 이성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그리고 마르다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보여줍니다. 모두 다 이해가 잘 되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깨닫기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게 믿습니다.” 믿음은 자기 이성의 판단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참된 믿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6. 신앙은 실재다.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마르다에게 미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못했고 이런 답답함은 여전히 주님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마음에 불편함, 마음으로 승복하지 못하는 불편한 신앙을 낳았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신앙은 우리에게 실재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실재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미래에 부활할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 것도 믿습니다. 하지만, 이 신앙은 동시에 제가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 생명은 저의 인생에 언젠가 찾아올 죽음 앞에서도 결코 죽지 않을 생명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죽음은 저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요, 죽음의 승리는 저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죽음을 이기셨고 믿는 저에게도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거는 희망과 기대가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삶의 실재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그런 은혜를 누리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죽음에서 시작된 기적 /요11:17-44/ 김병삼목사
2018-04-13 04:26:45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 죽음 앞에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는 보편적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죠. 그리고 인간들이 철저하게 이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기적, 그리고 오늘의 신앙적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그런 상황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본문 36~37절입니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보편적 죽음의 문제를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 혹은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로 경험합니다.
죽음을 타자의 일로 만나는 경우는 주로 사회적인 이슈로 매스컴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혹은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죽음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같은 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아픈 죽음의 기억입니다. 특히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의해 희생된 ‘강남역 10번 출구’로 기억되는 연약한 여성의 이유 없는 죽음 역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커다란 아픔, 커다란 사건.
또한, 우리 교인들에게는 매주 빠짐없이 접하는 ‘부고’가 있습니다. 저도 참 많은 장례식에 가 보지만 고인의 영정 앞에서 잠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장례절차가 진행되는 내내 유족들이 경험하는 감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문하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검은 옷’을 입었다는 것만 뺀다면 죽음과 관계없는 표정일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자신과 직접 관계된 일이라면 죽음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특별한 아픔의 기억과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이 아픔은 ‘상실의 고통’일 뿐 아니라, 무력함에 대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피해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분노’의 이유는 아닐까요?
이제 자명한 것은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죽음 앞에 선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가장 큰 기적의 사건입니다.
항간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던 죽음 중의 하나가 이어령 박사의 딸 이민아 목사의 죽음입니다. 정작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를 통해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를 신앙으로 이끌었지만, 신앙을 가진 아버지가 경험해야 했던 사랑하는 딸의 죽음 이야기죠.
그런데 그 죽음 역시 한 아버지가 경험했던 사랑하는 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건입니다. 세상이 아파하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어떻게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2012년 크리스천 투데이에 실린 이어령 박사의 마음입니다.
양화진 문화원 목요강좌 ‘성서 스토리텔링’ 대담에 나선 이어령 박사가 전하는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현실의 부재입니다. 사랑하는 손자와 딸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고 아픔입니다. 옛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마음속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내 딸로서만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믿는 많은 형제자매, 같은 크리스천들이 저보다 많이 애도해 주시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조사도 쓰시고 그렇게 떠났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서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데 굉장한 위안이 돼 지금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육체를 떠나면, 오히려 죽음이 그 아픔을 치유하고 하나님 곁에 가는 거니 오히려 축복 아니냐는 말씀을 크리스천들이 가끔 하시는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참 슬픈 것입니다.
오늘 베다니에서 일어난 기적의 사건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어도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더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다는 상실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격렬하게 슬퍼하며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인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모습 역시 당연합니다.
슬픈 것은 슬픈 겁니다. 이어령 박사는 대담에서 가장 마음 아픈 일 중의 하나가 ‘핸드폰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딸의 단축번호를 누르면 언제나 통화가 됐는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되고, ‘아빠 아파’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더는 전화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상적인 이어령 씨의 말입니다.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채 딸이 휴대전화 번호에 저장되어 있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그것이 죽음”이라며 “아무리 떼를 써도 되지 않는, 이 죽음에서부터 종교는 시작된다.”
바로 이런 인간이 실존 앞에서, 오늘 본문은 ‘죽음’이라는 사건만을 놓고 보았을 때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믿고, 또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 때때로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시간과 장소 가운데 참 아쉬운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닌데,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계시지 않은 것 때문에 참 아쉽습니다.
마르다는 본문 21~22절에서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또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지만 이 무엇이든지 역시 자신이 원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말로는 주님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마르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요. 23절과 24절입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그렇게 원했던 일이 제 오라비가 사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늦게 오셨습니다. 실망스럽지만, 주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주님은 그녀의 기대대로 오라비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지만 마르다는 믿지 않습니다. 아니, 마음이 가려져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한번 우리의 눈이 가려지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관계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마르다가 듣는 말이 달라집니다.
“현실과 영광 사이에서”
지금까지의 말씀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든 기적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들은 절망의 끝에서 문을 닫습니다. 더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죠.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 모든 이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무덤이 돌로 막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에서 소망의 문을 여시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냄새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심으로 지금 이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러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들이 맞닥뜨린 현실과 예수님의 관점 사이에서의 괴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인간의 현실이 절망이라면, 예수님의 관점은 ‘영광’이었습니다.
지금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 ‘치유의 기적’이라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부활의 기적’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문제는 늘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안타까워하는 일들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늦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때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무지한가요?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아프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다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잘 계산해 보세요. 예수님이 거하시던 곳과 베다니는 하루쯤 걸리는 거리고, 요한복음 11장 6절에 보니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틀을 유하시고 하루 걸려 오셨는데,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죽은 다음입니다.
시간에 쫓기거나 구애를 받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계시죠.
꼭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가 급하다고 안달하지만, 무관심한 듯 신경 쓰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 말입니다. 느긋한 주님의 시간표는 이미 의학적으로 ‘절망’조차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본문 21절에서,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본문 32절에서 마리아는,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 과거의 사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은 ‘지금’에 머물러 있습니다. 25~26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과거의 절망이 아닌, 지금 부활의 주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장소’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오시기 전 그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때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집에 찾아와 위문하고 있었습니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제 마리아도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뵙습니다. 그녀에게는 참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비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마리아가 나갈 때, 오라비의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30~31절을 보세요.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저는 이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파서 앓던 장소에도, 그가 죽어 묻힌 장소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의 앓던 장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쉽고, 위문하러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직’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신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적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이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 무덤으로 향하십니다. 하지만 기적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장소와 시간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나사로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래서 냄새가 나고, 통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생명’의 언어를 말씀하십니다. 23절에서 ‘살아나리라’ 25절에는 ‘생명’, ‘부활’, ‘살겠고’ 26절에는 ‘살아서’, ‘죽지 아니하리니’
부정의 언어와 긍정의 언어가 아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나요?
죽음 앞에서: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차이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죽음과 친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과 친해진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죽음의 사망 권세를 물리치신 주님과 함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여인이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세요.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계속해서 마르다는 ‘안다’라는 말을 사용하자, 예수님께서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무덤 앞에서 오간 대화에 다시 집중해 보기 바랍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마르다가 믿는다고 고백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분명히 부활을 믿는다고 했는데, 죽어서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우고 성경도 읽는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환자와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고치시기로, 그리고 살리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소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암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리시기 원하시면 살리십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암으로 죽어가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소망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 조용기 목사님과 옥한음 목사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옥한음 목사님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낫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그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죠. 조 목사님은 본인의 믿음대로 파킨슨병으로 고생할 때 기도하며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옥 목사님은 죽음의 그 순간까지 영광스러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믿음의 영웅인 것을 우리가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믿음도,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안다는 지적인 동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만 믿는다는 확신은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마르다 사이에 오갔던 ‘살리심’의 관점이 달랐던 것도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죽음을 이긴 자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 말씀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나사로를 살리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5~26절을 보세요.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는 또 죽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한한 인간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통해서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들이 드리워진 세상에서 두려움에 떨고, 소망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희망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어둠 가운데 소망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돌문을 막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 절망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입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큰소리’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큰소리는 이 세상의 죄악과 악한 세력에 대하여 물리치시는 신적인 권위의 상징입니다.
누가복음 4장과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실 때 귀신이 쫓겨나갔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실 때 병이 떠나갔으며,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실 때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큰소리는 항상 사망의 세력에 대한 완벽한 최후의 공격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누워 있는 무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오늘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드디어 걸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사망의 문은 단숨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사망의 큰 권세 앞에서 절망하던 수많은 사람은 이제 새로운 믿음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44절에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으며 일어나는 영광스러운 삶에 대한 선포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헨리 나우웬이 쓴 [두려움에서 사랑으로]라는 책에 보면 “죽음을 부정하는 것에서 죽음과 친구가 되는 것으로”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우웬은 비유로 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모태 안에 남녀 쌍둥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나는 출생 후의 삶이 있다고 믿어.”
그러자 남자아이가 극렬히 반대합니다.
“아니, 이게 전부야, 여기가 아늑하고 좋아, 우린 밥줄인 탯줄에 매달려 있기만 하면 되잖아.”
여자 아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어두운 곳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만 해, 뭔가 다른 것, 움직일 자유가 있는 밝은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여자아이가 머뭇거리며 말을 합니다.
“할 말이 더 있어. 넌 이것도 믿지 않겠지만,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남자 아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엄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엄마를 본 적이 없어. 너도 그렇잖아. 누가 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넣은 거지?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한텐 이곳이 전부야, 넌 왜 항상 그 이상을 원하니? 여기가 그다지 나쁜 데는 아니잖아, 필요한 건 다 있어,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하자.”
한참을 지나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다시 말을 합니다.
“가끔 이 안이 꽉 조여 오는 게 느껴지지 않아? 꽤 거북하고 어떨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하잖아.” 남자아이가 대답합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여자아이가 말합니다.
“난 이 조여 오는 것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여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 우리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말이야. 넌 가슴이 설레지도 않니?”
이 이야기를 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태속에서 나오면 모든 것이 끝나는 두려움으로 여긴다면, 우리 이생의 삶이 참 두려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세상과 참 자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면, 이 어머니의 태속과 같은 세상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으리라는 것,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절망이지만, 준비된 죽음은 영광과 소망이 아닐까요?
우리는 애써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 죽음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코프 뵈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기 전에 미리 죽지 않는 자는 죽을 때 망한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죽음과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우울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임과 우리를 향한 예비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빠른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때문은 아닐까요?
모든 사람이 후회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서 왜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왜 내가 용서받지 못했을까?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먼저 경험하고 죽음과 친해지는 순간, 우리의 삶이 단순해지고 명쾌해질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오던 우리의 삶에서 평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안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안전하단다. 내가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너는 나에게 속하였고, 나는 너에게 속하였단다. 네 앞에 많은 성도도 이처럼 살았단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교통하게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리 주님이 커다랗게 외치셨던 이유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리고 그를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을 풀어 주어라!”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죽음 가운데 있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 확신하며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적으로 충만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욕심과 어둠, 절망과 유혹에서부터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살아 숨 쉬고 있으나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천 조각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 내려보고, 세상을 얻기 위해 마귀에게 절하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행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부르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다니에서 일어났던 기적의 핵심은, 나사로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눈물과 죽음을 향한 꾸짖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그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보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아이가 된다는 의미.
어린아이의 특징은 ‘의존’입니다. 부모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이가 들어 늙어 가면 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그렇게 의존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절대 의존’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마무리를 짓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손길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노라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주님은 ‘바로 여기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이 기적의 시작이고,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는 현장입니다.
1892년 낯선 한국 땅에 도착한 민로아 선교사 부부는 자녀가 없어 고민하였는데 입국 6년 만에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첫아들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양화진(선교사들의 묘지)에 묻고, 3년 뒤 아픔이 아물어갈 때쯤 둘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1902년 3월 7일 드디어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루 만에 이 아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1년 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이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요?”
그들의 물음에 선교사는 대답 대신 찬송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원망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노래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 나사로야 나오라 /요11:17-44/ 목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2015-05-09 17:29:52
지난주일 예배를 다 끝내 고 집에 가서 쉬고 있는데 여 섯 살 먹은 손녀가 방문을 열 고 살그머니 들어오더니 침대 에 몸을 기댄 채 장난기가 흐 르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면 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 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죽 어도 조금 뒤에 죽으세요.."
야,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니?."
."있잖아요, 할 아버지도 죽을 거 아니에요? 죽어도 좀 늦게 죽었으면 좋 겠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도 망치듯이 문 밖으로 사라져버 렸습니다. 어린애가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그 저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 듣 고는 적당히 한번 해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사람이 세상에 나서 불과 대여섯 살이 되면 죽는 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 살 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얼 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끊임없이 치러 야하는 치열한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죽음의 슬픔을 지고 비틀거리며 걸어가야 하 는 잔인한 여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의식 속에서는 언제나 이 죽음이라고 하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 느끼고 삽니다. 그 만큼 죽음은 굉장한 힘으로 우리를 끌고 가며 막강한 영 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로 라 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젊 은 나이에 죽자 그 누이 동생 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여러 날을 눈물 속에서 보내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 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그 슬픔을 좀더 진하게 표현 하기 위해서 곡을 전문적으로 하는 여인들을 불러서 나흘이 나 일 주일 동안, 길면 십 여 일 동안 집에서 곡을 하게 만 듭니다.
그리고 장례식을 할 때도 장례 행렬 제일 앞에 이 곡하는 여인들을 세워서 무덤 에 이르기까지 곡을 하게 한 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 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 음이 들어오도록 제일 먼저 죄를 범한 자가 바로 여자이 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끌고 들어온 그 책임을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 앞에 가면서 곡을 하게 했다는 것 입니다. 잘못을 범한 것으로 따지면 어디 여자만 죄를 지 었습니까?
아닙니다. 같이 북 치고 장구 친 남자도 분명 잘 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어 쨌든 유대인들은 인류를 죽음 으로 몰고 간 죄를 여자가 먼 저 범한 것이니 만큼 죽은 자 앞에서 곡을 하는 것도 여자 의 몫이라고 해석을 했던 것 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숨을 거 두는 자를 두렵게 하고 절망 하게 할 뿐 아니라 유족들에 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과 상실감과 분노를 안겨줍니 다. 마리아와 마르다 역시 그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찾아 오시자마자 왜 여기 계시지 않았느냐고 따지 고 드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이것이 어디 그들뿐이겠 습니까? 우리 역시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너무나 비 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가슴 떨 리는 전율을 가지고 분노하고 또 대적합니다. 죽음은 인류 최대의 원수입니다. 교통 사 고로 하루에 30명 내지 40명 씩 죽어 나가는 우리 나라의 형편을 보아도 이 죽음의 횡 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 가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건 대 인간이 발악을 하며 한번 일을 저지르면 세계 여기저기 에 끔찍스러운 사건들이 터지 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 니다. 저는 제랄드 라이트링 거(Gerald Reitlinger)라고 하 는 독일 사람이 히틀러가 580여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한 것에 대해 쓴 글을 본 적 이 있습니다.
말이 쉬워 580 만 명이지, 총칼로나 목을 매 어 죽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가스실을 만들어 집단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라이트링거 는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발 가벗긴 채로 가스실로 들여보 내진 후 한꺼번에 죽어 나오 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가스실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가스가 새어나오 는 것을 느끼고 서로 모여들 면서 작은 창문이 달린 거대 한 철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몸부림치게 된다.
철문 앞에 서 그들은 서로 할퀴고 치고 받으면서 결국은 끈적끈적한 피를 뿌리며 피라미드처럼 시 체로 쌓이게 된다. 25분 후 전기 펌프 식의 배출기가 가 스로 가득 찬 실내의 공기를 제거하면 거대한 철문이 열리 고 고무장화와 가스마스크를 쓰고 호스를 손에 든 유태인 모범수들이 들어간다.
그들이 처음에 하는 일은 피와 오물 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다 음으로 시체를 올가미와 갈고 리로 떼어내어 금을 찾거나 독일인이 전략물자로 간주하 고 있는 이빨과 머리털을 뽑 는 소름 끼치는 일이 시작된 다.
그 일을 한 다음에 그 시 체들은 들것이나 화차에 실려 용광로로 옮겨져 태워진 후 분쇄기로 들어가 아주 고운 재로 변하여 화물 트럭으로 솔라강 하류에 뿌려졌다.."
예수님의 눈물
죽음의 횡포나 그 죽음으 로 인해 인간이 당하게 된 처 절한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 현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잔 인한 죽음의 횡포로 인해서 하나님도 우셨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울게 만든 것입니 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 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무덤 앞에서 유족들과 그들을 찾아 온 사람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 셨다고 그랬습니다.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다크뤼센.'(edakrusen)인데, 이 말은 막연히 눈물을 흘렸 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는 강한 의미 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 인간에게 안겨 주는 슬픔 과 절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하나님 자신마저도 눈물 없이 는 그것을 지켜 볼 수가 없었 던 것입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의 감정을 두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심령에 통분히 여 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 히 여긴다.'는 말은 분이 나서 씩씩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 습니다. 무엇에 대해 하나님 이 분노하신 것일까요? 저는 죽음을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를 향해 거룩한 분노를 발 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인간 을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 넣 은 죽음의 실체를 보고 진노 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입 니다.
한편 .'민망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죽음의 슬픔과 공포 아래서 학대받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셔서 그 고통을 자기 것으로 맛보시는 심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기고 슬퍼하 며 고통 하는 그 사람들의 마 음을 고스란히 받으셨고, 그 들과 똑같은 심정을 느끼셨습 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이 죽음의 공포와 슬픔 을 놓고 눈물을 흘리실 뿐 아 니라 마음으로 분노하고 우리 의 모든 아픈 감정을 함께 나 누시는 하나님으로서 지금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흘리신 눈 물은 패배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은 자기를
."부활이요 생명."이 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 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 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 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 냐?."
할렐루야! 주님은 비록 눈물을 흘리시고 계셨지만
."나는 부활이야, 나는 생명이 야.."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 이며, 아직 죽지 않고 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이라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믿는 자 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진 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 다.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죽음의 영역에서 이미 해방되 었기 때문에 안 죽는다는 말 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주님 보시 기에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죽음에서 벗어 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 문입니다.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는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가 부 활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믿는 자의 죽음은 잠 자는 것일 뿐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 친구 나사로 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의 죽 음을 잠으로 여기시는 것입니 다. 이 얼마나 권위 있는 말 씀입니까? 자신이 죽음을 극 복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이요 부활이 되시는 구세주가 된다 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은 이 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우 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 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 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 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 님은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사망을 무력화시켰 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 으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이 마리아와 마르다 앞에서 서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 까? 그가 육신의 몸을 입고 무덤 앞에 서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눈물을 흘리 고 계십니까? 히브리 저자가 그 이유를 웅변적으로 설명하 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을 보십시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 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 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 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 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 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망의 권세를 잡 은 마귀를 정복하고 그 죽음 의 쇠사슬에 묶여서 일생 동 안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놓아 주시려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 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님은 자기를 부활이요 생명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의지하고 믿는 자에게는 죽음은 더 이상 죽 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입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사로 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요 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선정 한 일곱 가지 이적 기사가 있 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장엄 하면서도 감동적인 것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이었습니다. 더 욱이 이 이적은 사복음서 전 체에 기록된 예수님의 36가지 이적들 중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준 것이 었습니다.
47절 이하를 보면 나사로가 부활하는 이 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후 그들이 곧 바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 고 예수님을 처형해야 되겠다 고 최종 합의하는 장면이 나 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죽 음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 해 자기가 사망의 손에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몸이 된 것 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예 수님의 운명이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 로 가셨습니다. 그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는데, 큰돌이 그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을 가로 막고 나섰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은 상 식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이 아 닙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 도에서 보면 그는 지금
."이미 죽어 부패하고 있는 마당에 무덤 입구를 열어 어떻게 하 자는 것입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4절)는 예수님 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 다. 합리적인 사고는 언제나 믿음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를 보시고 예 수님은 별로 곱지 않은 시선 으로 그를 쏘아보시며 한 마 디 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 느냐?."
우리는 이 말에서 .'왜 내 말을 네가 믿지 않느냐? 왜 나를 의심하느냐?.' 하고 추궁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드디어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옮겨졌습니다. 무 덤이 열린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 다. 41절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 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하 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 리신 이후에 왜 나사로를 살 리기 원하시는 지 그 이유를 밝히 말합니다.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 려 함이니이다.."
둘러선 무리 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이 예수님이 세상에 부 활이요 생명이 되는 것을 믿 도록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마치시자마 자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말 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 오라!."
정말 기가 막힌 말씀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그 장면 을 한번 그려보고 싶은데 아 무리 잘 그리려고 해도 마치 컵으로 바닷물을 뜨는 것처럼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무덤 안 에는
."나사로야, 나오라.."
하 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조금 후에 수의를 걸친 나사로가 뚜벅뚜 벅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수의를 풀어 주어 자유롭 게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 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 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자유 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 다.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 으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하셨으 며, 며칠 후에 그 자신이 십 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 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 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 아가 세상 끝날 예수님이 재 림하실 때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한 성도들이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의 부활은 선 택된 모델이었습니다. 모델이 라는 것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충족한 것입니다. 반 복해서 똑같은 모델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 면 제2, 제3의 나사로 사건을 계속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 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데는 나사로의 부활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들어 간 아들을 데리고 등산을 하 는 아버지를 한번 생각해 보 십시오. 어린애의 눈에 아버 지란 존재는 언제나 천하에서 제일 크고 힘이 세고 제일 잘 난 남자로 비춰집니다. 아들 이 산을 오르는 도중에 조그 마한 돌멩이를 보고 아버지에 게 이렇게 말을 건다고 해 봅 시다.
."아버지, 이거 들 수 있 어요?."
."그래 들 수 있지. 너 한번 들어봐라.."
그 애는 자 기 딴에 젖 먹던 힘까지 써가 며 돌을 들어보려 하지만 못 들어올립니다.
."아버지는 너 보다는 힘이 있어. 아버지 힘 센 거 보여줄까?."
그리고는 그 바위를 들어 가지고 멀리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애가
."우와. 아버지, 정말 힘세네 요.."하고 으쓱해 합니다. 자기 가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해서 아버지가 그 산에 있는 돌을 다 들고 던질 필요 는 없습니다. 하나를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아 버지가 힘세다는 메시지를 전 하는데는 돌멩이 하나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 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 인 것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 해서 이 세상에 있는 무덤마 다 찾아다니면서 죽은 자를 다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나사로 한 사람만 일으 켜도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 이시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 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사로 를 다시 살리신 그 예수님을 통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 니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 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우리 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생명 속에 우리가 감추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죽음을) 이김을 주 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 리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 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생명 이 곧 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 람은 이제 죽음에 질질 끌려 다니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감 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신앙의 음지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본 문을 통해서 조금 어두운 면 하나를 살펴보아야 되겠습니 다. 마르다의 신앙에서 우리 가 발견하는 어두운 일면입니 다.
마르다는 굉장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성경에서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두 사람에 들 정도로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 니다. 마르다가 어느 정도로 믿음의 사람인지 한번 살펴봅 시다. 23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르다 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 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그 말을 대뜸 이렇게 받았습니 다.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절). 그는 마지막날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믿 음 아닙니까? 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았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 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 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 나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 힌 신앙고백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를 보면서 석연치 않는 부분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신앙 고백, 이렇게 완벽한 믿 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오빠를 잃어버리고 슬 퍼하는 자기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때문에 뭐가 달라진 것이 있나 하고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달라 진 면모를 찾을 수가 없습니 다.
물론 상을 당한지 일주일 이 안된 마당에 마음이 상하 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것 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 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 람이라 해도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게 빼앗기고 나면 그 슬픔을 한 순간에 다 몰아내 지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특별하다 해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레그라는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들 의 슬픔에 대해 조사를 해 가 지고 발표를 한 것을 보면 자 녀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대 단한 지 불면에 시달리기도 하고,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 지 않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도 나중에 그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슬픔에 정신을 빼앗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아주 오래 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믿 음이 좋아도 그 슬픔이 2년 이상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 회 성도들을 봐도 그런 것 같 습니다.
어떤 면에서 슬픔은 하나 님께서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 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가 가끔 <동물의 왕국>이라 는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에서 보지 않습니까? 평화롭게 풀 을 뜯고 있는 얼룩말 떼에 사 자가 덤벼들어 가지고 그 가 운데 한 놈을 잡습니다.
그러 면 다른 놈들은 다 도망가버 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놈 을 잡으면 사자가 더 이상 추 격을 안 하니까 얼룩말들도 조금 도망가다가 그냥 멈추어 섭니다. 자기 동료 하나가 사 자 밥이 되어 피를 흘리며 죽 었는데도, 언제 그런 일이 있 었냐는 듯 꼬리를 치면서 풀 을 뜯으며 자기들끼리 장난을 합니다. 얼룩말에게는 슬픔이 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슬픔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에게만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에게 슬픔을 주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은 슬픔은 불에 데인 살갗과 같다는 것입니다. 불에 한번 데이면 아무리 좋은 약을 발 라도 한동안은 쓰리고 아프고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야 통증이 가라앉는 것입 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믿 음이라는 약을 가지고 슬픔을 금방 씻어낼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마르다 를 보면서 깊이 생각해야 되 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르다 는 멀리 있는 진리를 믿는 데 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 다.
."주여 마지막날에 살아 날 줄을 믿습니다.."
그는 그 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마지막 날의 진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 하게 될 것이고, 자기 오빠도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 다. 멀리 있는 진리는 주저하 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 나 가까이 있는 진리는 제대 로 믿지를 못했습니다. 주님 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
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 다. 당장 적용이 되어서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야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마르다는 고백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아니합니 다. 고백적인 진리가 무엇입 니까?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 은 틀림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진리는 금방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내 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시 는 주님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당장 죽은 자기 오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을 체 험해야 되는 부담이 있기 때 문입니다.
마르다의 경우 얼마나 유 리한 입장에 있습니까? 하나 님이 자기 앞에 서 계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일대일 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 격 대 인격으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으로부터 직접
."나는 부활이 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네 오라비가 살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먼 훗날의 진리일 수 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장 효 력을 나타낼 수 있는 진리입 니다. 그러므로
."주여, 옳습니 다. 제가 믿습니다.."하고 주님 에게 전적으로 믿음을 의탁했 더라면 나사로가 살아난 이후 에 느끼게 된 그 기쁨과 감격 을 나사로가 살아나기 이전에 벌써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 니다. 그 마음을 짓누르는 슬 픔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그가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 다.
무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평화가 그의 마 음을 고요히 감싸는 것을 그 가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에게서 이러한 변화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 다. 그는 예수님을 지금 나에 게 일어난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 로, 생명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 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와 비 슷한 신앙의 음지가 없습니 까? 마르다처럼
."천국 간다,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신 다, 그 때는 모든 성도가 부 활한다."는 것 같은 멀리 있는 진리는 잘 믿으면서 가까이 있는 진리는 금방 믿으려 들 지 않는 절름발이 믿음을 가 지고 있지 않습니까?
."전능하 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 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고 교리적인 진리는 주저하지 않 고 잘도 고백하면서 천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나에게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역사 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 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기 쉬운 믿음의 약한 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래도 마르다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말씀을 듣기라도 했지."하 고 변명하려 들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하나 님을 만난 마르다와, 부활이 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우리, 누가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아닙 니까? 그러므로 이 부활의 능 력과 생명의 능력은 남의 일 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안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요,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하나님 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입 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가 매일 체험할 수 있는 하나 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현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그 말씀을 통 해서 쉽게 은혜를 받지 못합 니다.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도대체 예수 님이 나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자다운 태 도를 취하지 못하고 세상사람 들과 매 한가지로 죽음에 대 한 본능적인 반응만을 보입니 다. 믿음의 반응이 본능의 반 응에 묻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죽음에서 자유 하기는 고사하고, 죽음 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 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인간인지라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의식하는 것 자체 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식에 끌려 다니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 리는 이미 부활이요 생명 되 시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자 유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함을 가져야 됩 니다. 슬픔을 당해도 자유인 으로서 슬퍼해야 되고, 죽음 의 실체 앞에 공포를 느낄 수 는 있지만 자유인으로서 그 공포를 처리해야 됩니다.
우 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 전히 죽음에 끌려 다니는 이 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마르다처럼 부활이요 생명이 신 주님이 실제로 나에게 어 떤 은혜를 주시는가를 잘 모 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 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생활 태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 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서 바울은 참으로 기가 막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 다 죽노라.."
바울의 생활은 매일 매일이 죽음과의 대결이 었다는 말입니다. 삶이 얼마 나 힘든지, 산다는 것 자체가 죽는 것과 같았다는 말입니 다. 목숨을 잃는 것만 죽음입 니까? 아닙니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지독한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살고 싶지 않을 정도 로 시달리고 고통 하는 것입 니다. 때때로 우리 역시
."날 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말이 마음에 그대로 와 닿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죽음 과의 대결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매일의 삶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고백에서 한 가지 중 요한 진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죽기 위해서 는 날마다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고 끝나면 .'날마다.'라는 말을 쓸 수가 없 습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 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겠 습니까? 바울은 이 .'날마다.'라 는 말을 묘하게 이용하여 예 수님의 생명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는 다."
하는 말은
."내가 날마다 산다. 날마다 부활하고 있다."
는 말입니다. 매일 죽음의 위 기를 당하지만 그때마다 부활 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주시 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고린도후서 4장 8절 이하에서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 니다. 이것은 바울의 체험적 인 고백입니다. 현대어 번역 을 보면 참 실감나게 번역되 어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드릴 테니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리지만 움 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 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절 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습 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는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우 리 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 실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 리 죽을 육체를 통해서 증거 되고 있으며 나타나고 있으며 체험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 니까? 먼 훗날 내가 부활한다 는 그런 먼 훗날의 진리를 믿 는 것과 똑같이 지금 당장 날 마다 죽는 체험을 해야 되는 나에게 날마다 부활하는 체험 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 력을 맛볼 수 있다면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 까?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가 얼마나 당당하게 대할 수 있 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는지 조 용히 스스로를 한번 살펴봅시 다.
1부 예배를 드릴 때 한 형 제가 나와서 간증했습니다. 그는 학원을 차려 가지고 그 동안 꿈을 가지고 일을 하며 여러 가지 고통들을 간증했습 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응답이 없을 때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간증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야, 저 형제는 날마다 죽고, 날마 다 죽었구나..'하고 생각을 했 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죽어 야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어 디 그 형제 하나 뿐이겠습니 까? 여러분 가운데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사시는 사람이 한두 명 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여러분이 반응하 는 태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부활이 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날마다 죽는 그 체험 속에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분 은 스위스의 의사이자 정신의 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그가 쓴 신앙 간증집이 하나 있는데 「듣는 귀」라고 하는 제목의 간증집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금실 좋은 남편 과 아내로 소문났는데 한번은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아내 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 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 스러운 미소를 띠고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숨을 거두기 전에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여 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 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그 말에 그의 남편인 투르 니에 박사가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내가 죽 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 바에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 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내를 떠 나 보낸 후에 그의 믿음은 점 점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 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 음이 강해질수록 그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 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 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속에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들 가운데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사 람이 많기를 바랍니다.
돌을 옮기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 다.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과 같은 그늘진 믿음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먼 훗날 부활하는 믿음만을 가지 고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 세상 현실에서 다시 살 수 없 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어 야 되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부활하는 능력을 체험하기 위 해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며 역 사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 울이 고백한 것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절망해도 다 시 소망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기에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위기를 만나도 다시 털고 일어나는 그런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의 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사로를 살리기에 앞서 돌을 옮겨 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그 돌을 옮겨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이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사 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 문입니다. 날마다 죽는 우리 를 날마다 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 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을 가로막고 있는 돌이 무엇입니 까? 불신앙입니까? 마르다처 럼 따지는 신앙입니까? 무엇 이 여러분의 돌입니까? 이 돌 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나사 로야 나오라."
하시는 주의 음 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생명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을 무덤처럼 만드는 돌이 무 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무식한 것입니까? 그 돌을 빨 리 옮기십시오. 아직도 예수 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믿는 골라잡는 신앙 수 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돌 도 옮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 리지만 마음이 전혀 열리지 않아 딴 생각만 하다가 돌아 갑니까? 그 세속적인 생각의 돌을 옮기십시오. 그 돌을 옮 길 때 주님이 드디어 여러분 의 심령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외치십니다. 그 때 내 안에 다시 부활하는 생 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 렐루야!
우리 중에 사랑하는 자를 먼저 보내고 아직도 슬픔에 짓눌려 가지고 고통 하는 자 있습니까? 돌을 옮겨 놓으십 시오. 부활이요 주님이신 예 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주 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슬픔이 문을 열 고 나가버릴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공포에 떨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병 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고 항 상 불안에 떨고 있습니까? 여 러분은 죽음의 노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와 같은 노예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그렇게 떨게 만듭니까? 약한 믿음입니까? 그 돌을 빨리 옮기시기 바랍 니다. 그러면
."나사로야 나오 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똑 똑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던 공포가 모두 사라 져버릴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이 험 한 세상 살아가야 되는 우리 에게 매일매일 체험되는 부활 이 되기 위해서, 매일매일 체 험되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 예 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에 모셔들이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인생을 사십시 오. 그럴 때 날마다 죽지만 동시에 날마다 사는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 게 될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 /요11:17-27/ 하용조목사
2015-05-27 14:11:19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던 나사로는 결국 죽었고 무덤에 삼일동안 갇혔다는 내용이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능력도 있었고 나사로를 사랑했는데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렸을까요?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삼일 후에 오셨을까요? 우리들의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4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의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죽음도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복과 기적을 주기 위해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첫째, 예수님은 나사로를 향하여 ‘우리 친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친구로 초대합니다. 친구처럼 대해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고 표현합니다. 죽음이란 종말이요 끝입니다. 죽음은 저주이자 심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은 결코 아름다움도 희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저주의 죽음이 부활의 은혜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십니다. 죽은 사람은 깨어날 수 없지만 자는 사람은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시며 발걸음을 옮겨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 이야기가 18절부터 20절까지에 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 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예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가 진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했을 때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었던 것이다’라고 악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절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 죽었습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잔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죽었습니다. 많은 문상객이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나사로와 그 가족이 동네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네의 모든 사람이 와서 문상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품이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두 사람 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척 좋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뛰어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혀 다른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며 개방적인 스타일이었고,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르다가 먼저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솔직한 감정을 예수님께 드러냅니다. 마르다의 말에서 우리는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만약 주님이 일찍 오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라는 말에는 원망과 불평이 섞여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하는 섭섭함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든 자도 고치신다는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늦게 왔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예수님은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 말이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을 가만히 보면 굉장한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이 말을 살펴보면 마르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믿음의 한계
마르다의 믿음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믿음이 아니고 한계가 있는, 인간적인,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말에 다 나와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 믿음의 첫 번째 문제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믿음이라고 착각한 점입니다. ‘주님은 지금이라도 뭔가 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긍정적이고 좋습니다. 희망과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주님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베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한테 잘 해 주실 겁니다’와 같은 마음은 막연한 희망과 기대입니다. 본질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런 기대는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대를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두 번째 문제는 마르다의 말에 있는 허점입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지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마르다가 ‘믿는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압니다’ 라고 말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한 말입니다.
지식과 정보가 기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다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믿습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녀의 믿음의 기초는 이성, 합리성, 지식, 정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은 좋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마른 믿음, 기대와 희망은 있지만 결정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의 믿음에 쐐기를 박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믿음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된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에 기초한 사실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성과 합리성, 정보와 지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해 흔들릴 마르다가 아닙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식의 믿음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온누리교회에서 수 없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지만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식으로 바꿔서 재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수준을 결코 뛰어넘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24절에서 마르다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 보십시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기에서 또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지만 부활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한다고 이성적으로 말합니다. 그녀의 말은 이성과 합리성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마르다는 종말에 모두 부활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지금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러한 구태의연하고 인간적인, 믿음의 관점을 바꾸지 않으려는 마르다에게 두 번째 쐐기를 박습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내가 생명을 주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을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활이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음은 끝, 저주, 심판이 아니라 부활의 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설명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영생’입니다. 주님이 곧 ‘영생’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부활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습니다. 딱 한 사람, 나사로만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십가자에 못박혀 죽고 난 이후에 부활할 것을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고 마르다에게 기막힌 말을 하십니다. ‘네가 믿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믿겠냐’고 도전을 합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결단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결단을 내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에 마르다는 자신의 믿음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이고 제한적이며 합리적 사고에 맞아야만 믿는 믿음이 부활의 믿음, 기적의 믿음, 능력의 믿음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메시아의 부활과 연결되는 기막힌 사건입니다. 이것을 마르다가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멘, 내가 믿나이다
27절에서 마르다가 드디어 ‘아멘’하기 시작합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여 그러하외이다’는 ‘아멘’이라는 뜻입니다. ‘아멘’은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예수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이십니다. 주님이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기적을 지금 베풀 수가 있습니다.’라고 마르다가 말을 바꾼 것입니다. 믿음이 바뀌면 언어가 바뀝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믿음으로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아는 믿음에서 믿는 믿음으로, 이성의 믿음에서 결단의 믿음으로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메시아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도전합니다. ‘아는 신앙’을 졸업하고 결단하십시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분들은 끊기로 결단하십시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식으로는 여러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의지적으로 믿습니다.’ ‘감정이 동의하지 않아도 믿겠습니다. 결정하겠습니다.
내 평생을 가난한 자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런 고백 위에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에게 부활의 믿음, 결정적인 믿음, 내 의지와 결단이 있는 믿음을 오늘 이 시간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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