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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2:1 - 8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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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위한 곳에서. /12:1-8/ 김병삼목사

2023-04-17 10:37:39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

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

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아주 유명한 기적사건 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잔치

자리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거기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나는 그 때 동일한 사건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6-7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가복음 143-4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두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세 복음서에 동일하게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에서는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주를 위한 자리에서 일어난 일. . .

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대한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나오는 곳은 요한복음이 유일합니다.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되 조금 다르게 묘사하고 있든가,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개연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의 사건을 다른 두 복음서와는 다른 사건 중에 하나로 보고 싶은데,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식사하실 새라고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예수를 위해 잔치할 새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

는 곳이라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기념하는 잔치 자리를 굳이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가질 이유가 있었

을까요?

또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유월절 이틀 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여인에 대한 이름도, 나사라도 마르다도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아주 비슷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전제아래서 오늘 말씀을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주를 위한 이 자리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자리이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고마운 예수님께 무언가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는 것 말입니다.

또한 이 자리가 얼마나 결연한 자리였을까요?

 

모르기는 해도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분명하게 ‘coming out’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결연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느냐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

를 살리신 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했기 때문이죠. 요한복음 11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

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위의 말씀으로 미루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예수님을 위해 잔치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잔치라고 하니 비밀스러운 모임이 아니라 누구나가 알 수 있는 그런 자리 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1주일의 사건을 기록하는 시작점 입니다.

 

그러니 그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만으로 유대 공동

체에서 이단아가 되거나,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는 자리니 말입니다.

주를 위한 자리는 단순히 마리아가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주를 위한 자리가 그리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를 위한 그 자리에서 우

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주를 위한이 잔치 자리에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주님을 향해

헌신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

나사로는 주님을 초청한 자리에서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각기 다른 이들의 모습은 모두 헌신이 있습니다. 헌신은 주님을 위해 드려지는 거룩한 낭비

입니다. ‘낭비가 무엇인가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의 가진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한자리 그 어떤 것도 낭비로 보일 것입니다.

헌신은 주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헌신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늘 계산합니

. ‘계산적이다!’라는 말이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신앙적인 용어는 아닙니다. 계산적인 사람

에게 거룩한 낭비는 불가능합니다.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 사람의 다른 헌신을 보게 됩니다.

부엌에서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는 마르다의 헌신이 있기에 지금 잔치 자리가

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헌신

또한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또 한 번의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과 함께 잔치 자리에 참여한 나사로의 헌신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헌신이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값비싼 향

유옥합을 깨드렸다는 경제적 가치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녀가 향유 옥합을 깨뜨렸을 때, 집안을 진동한 향내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그

녀의 사랑이 퍼져 나간 것이죠.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이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시면서 사랑의 헌신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참 많이 와 닿았습니다.

주를 위한 자리에서 마리아는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에 먼저 주목하면 좋겠습니다.

익히 아는 것처럼, ‘300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한 사람의 노동자가 1년 동안 벌 수 있는 정도

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 한다면, 3천만 원 정도의 가치가 나가는 돈

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단 숨에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왜 일까요? 사랑은 을 묻지 않습니다. 값을 묻는 순간 계산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가룟 유다의 문제는 그 돈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돈 중에서 자신이 취

할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종종 듣는 이야기인데, 젊은 커플들이 결혼을 준비하다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경우들이 종종 있

습니다. 혼수품, 혹은 결혼 예물을 준비하려 함께 나갔다가 일어나는 일들인데, 물건을 보러

갔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싼 경우에 좀 더 싼 곳을 찾게 되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싼 곳에 갔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는데, 계속해서 숍을 옮겨 다니며 좀 더 싼 곳에

가보자라고 말을 한다면,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마음속에 나는 어는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니 무조건 질러라!”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이 자신을 경제적 가치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하는 행동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하는 일을 간직하고

기념하고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헌신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만큼 사랑하시고 용납하셨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행동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한 없이우리 인생을 사랑하셨기에, 그에 합당한 사랑의

헌신을 받으시는 것은 아닐까요?

잘 알려진 이야기죠. 인도에서 선교하던 어떤 미국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갠지스 강가를 걷는데, 어떤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으로 걸어가고 있었

습니다. 직감적으로 그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신에게 제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최고의 헌신은 최고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죠.

 

한 번 오늘 본문의 상황을 상상 하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표정이 어땠을까

? 가장 귀한 것을 깨뜨리는 순간 아깝다는 생각에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아니면,

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음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줄 수 있을 때

가 아닌가요?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우리나라에서 ‘4B 운동이라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비 연애, 비 성관계, 비 결혼, 비 출산)을 의미하는 것인데,

더 이상 한 남자에게 종속되거나, 아이를 낳고 얽매이거나, 출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이 사회가 여자들로 하여금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고, 정당한 자기

주장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자든 남자든 자기를 주장하며 손해를 보지 않겠다라는 마음들은 모

두가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이기는 하지만 사랑의 관계는 아니다!” 라는 것이죠.

헌신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 논리도 아닙

니다. 만일 우리 인류가 단순히 종족 보존이라는 것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얼

마나 불행했을까요?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헌신은 일방적인 희생이기에 기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만류해 보았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이 보니, 그 여인이 손을 잡고 있는 두 아이 중 하나는 아주 잘생긴 남자 아이

였고 다른 아이는 몸도 불구고 눈도 보이지 않는 장님이었습니다.

한 참을 지나 선교사님은 궁금한 마음에 강둑으로 나가 보았답니다. 그런데 여인의 손

에는 한 아이의 손만 붙잡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직감적으로 한 아이를 제물로 드렸다

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데 잘 생긴 아이가 아닌, 불구의 몸을 가진 아이의 손을 잡

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 것이죠.

그 순간 선교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답니다.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

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치셨나요?“

그러자 여인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우리가 섬기는 신

은 우리가 그에게 최선의 것을 드리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

니다. 드리려면 두 아이 중 좋은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덜 좋은 아이를 드리겠습니

?"

지금 이 여인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시선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계산적인 눈으로 보는 유다의 생각과, 그녀의 사랑을 가슴으로 받으시는 예수님의 시

선이 있는 것이죠.

주를 위한 자리에서마리아가 주님께 행한 일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면, 그리고 사랑으로 하는 행동은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마리아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본문 3,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

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모습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가룟 유다였죠. 순전한 나드 한 근이나 되는 향유를 그렇게 낭

비하니 말입니다. ‘사랑의 헌신계산하려고 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죠.

주를 위한 자리에서 마리아는 주를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렸지만, 유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주를 위한 자리에서 가룟유다는 주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를 생각하며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유다의 생각이 거짓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라 도둑이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 공동체에서 회계를 맡아 한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큰돈

은 아니었지만, 공동생활을 위해 돈궤를 맡고 있었는데, 그 돈 중에 일부를 훔쳐서 자신을 위

해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가 향유를 공동체에 기부했더라면 자신에게 돌아갈 몫이 있었을 텐데,

런 기회를 상실한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결국 주를 위한 자리에서 자신이 취할 이득을 생각하니 마리아의 행동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산이 빠르다는 것은 또 이런 의미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마리아가 한

행동이 몰고 올 파장 같은 것, 그 행동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에게 들을 평판 같은 것들도 생각

을 했습니다. 주변을 고려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것 때문에 정작 본질을 잃어버

린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가 흔히 이런 표현을 씁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애 까지 버렸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고민하는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를 구별하는 것 말입니다.

유다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유다의 생각입니다.

지금 마리아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늘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돌보시는 분인데, 저렇게 호사를 누리며 낭비하

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지점은 사실은 목회를 하는 저에게 참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목회자라는 이유로 교인들에게 과분한 대접을 받을 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

변의 시선을 의식해 과도한 대우를 받는 것이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벌써 십 수 년이 흘러간 일입니다.

당시 우리 교회에는 교인들 중에 직원으로 청소를 감당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참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하던 권사님이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교회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죠.

 

저에게 있어서 제일 행복한 일 중에 하나는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원이 아니라 교인

과 목사로서 만남을 가지는 일이죠.

그런데 그 분이 청소를 하다말고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폐암

말기였구요. 안타까운 일은 그 권사님에게 곧 결혼할 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퇴원을 하고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던 때, 권사님이 저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아들 결혼을 위

해 주례를 서게 된 저에게 봉투를 가져온 일이죠. 그런데 그 분의 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 이런 거 없어도 제가 주례를 잘 설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세요.”라고 했

습니다. 그 때 권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아시죠? 그리고 이 돈이 목사님에게 제가 마지막

대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 꼭 받아주세요. . .”

저에게 그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마음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지 않나요?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지 않나요?

저에게 요즘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책들이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전기를 읽는 것인데, [조선 회상]이라는 책이 저에게 참 많이 와 닿았습니다.

세상적인 스펙으로 보면 뉴욕에서 의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조선 땅에 와서 선교를 한

다는 것이 어떻게 계산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윌리암과 로제타 홀 선교사 부부는 1891년 한국 땅에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한국에 온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미국에 돌아갔던 로

제타 홀은 다시 한국에 돌아와 43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땅 양화진에 남편과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딸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로제타 홀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 셔우드 홀을 의사로 만들어 함께 한국에서 사역을 했

.

셔우드 홀은 조선 땅에 처음 결핵병원을 세웠던 사람이요, 조선 사람들의 결핵을 퇴치하기 위

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사람입니다. 결국 그가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 땅에서 추방

될 때까지 부모님의 사역을 이어갔던 사람입니다.

그들의 헌신을 우리가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을 우리의 논리와 가치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8.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서 마리아가 진짜 예수님의 장례할 날을 생각하며 옥합을 깼는지 아닌지 나

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그녀의 행동을 의미 있게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종종 그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고백한 일들이

나의 고백보다는 더 깊고 의미 있게 사용되는 것들을 말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한 곳에서하는 헌신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

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아시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하지만 주님의 말씀

을 들었던 한 아이가 가져왔을 때, 그 헌신이 밀알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현실적 가치와 헌신의 열매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깊이 곱씹게 됩니다.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에게는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음에 해도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에 혹시 헌신의 핑계가 없는가?

그 이유가 혹시라도 내가 얻을 이득 때문에 불평을 가지고 이유를 대는 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 앞에 있는 헌신의 기회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은 없는가?

언제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인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78) - 복음은 교양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12:1-8/ 김형익 목사

2021-05-08 10:52:59

 

1. C.T.스터드(Charles Thomas Studd)의 광신?

선교역사에 결코 놓칠 수 없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날 WEC International 이라고 알려져있는 국제선교기관을 설립한 C.T.Studd 입니다. 1860년에 영국의 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캠브리지에 다니던 시절, 무디의 전도집회를 통하여 크게 각성을 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캠브리지 대학의 크리켓 팀의 주장이었고 영국 최고의 크리켓 선수라는 평을 듣던 유명인이었습니다. 그는 무디 집회에서 함께 회심한 친구들과 함께 중국 선교에 헌신하여 부와 특권을 다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서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약 10여 년을 사역했습니다. 이들은 선교역사에 캠브리지 세븐이라고 알려지게 되는데, 스터드와 친구들이 중국으로 갈 때, 사람들은 경솔한 행동이다. 학식과 재능의 엄청난 낭비다라고 떠들었습니다.

 

영국으로 귀국한 후 약 6년 동안 그는 학생선교운동에 헌신하여 미국을 오가며 강연을 하면서 수많은 선교 헌신자들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인도에 가서 영국 거류민들을 위한 사역을 6년 간 감당하지만 중앙아프리카의 사람들이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다가 결국은 나이 53세에 아무 후원자도 없이,

 

심장병을 앓던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사람의 조력자만을 데리고 벨기에령 콩고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하루에 18시간을 일했고 다른 선교사들에게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의 삶을 살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그는 아프리카를 섬기다가 1931년 영광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성격 면에서나 교리 면에서 많은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사랑했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명함, 성공, 엄청난 유산을 다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향유 옥합을 깨듯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열심이 광신이나 극단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남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줄곧 이 사람, C.T.Studd가 생각났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야말로 광신자, 극단주의자라고 비난을 받을만한 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유월절 엿새 전”: 때가 가까웠다.

본문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제 정말 때가 왔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주님이 돌아가신 때는 유월절 양 잡는 때였습니다. 이제 딱 엿새가 남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부분 즉 12장부터 예수님의 수난의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의 1/2의 분량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베다니에서의 저녁식사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태나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잔치는 문둥이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벌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문둥병을 고쳐주신 사람일 것입니다. 이 잔치는 특별히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잔치였을 것 같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을 알고 있었을 시몬이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이런 잔치를 연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이야기의 정황

이 잔치에는 살아난 나사로가 배석하고 있었고, 물론 마르다와 마리아도 함께 했습니다. 마르다는 늘 그렇듯이 잔치를 섬기느라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10:40). 하지만 마리아는 더욱 복잡하고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 늘 그랬듯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었을 것입니다(10:39). 그리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0.5리터)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있으니까, 향유 냄새가 집에 진동했을 것입니다. 이 향유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한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면 일년 노동자 품삯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용입니다. 이 돌발적인 사건에 대해서 입을 연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말 자체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심령을 꿰뚫어보시는 성령님께서 요한으로 이렇게 적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 그리고 주님은 마리아를 변호하셨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

 

4. 마리아만 알았다!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 특이하게 받아들일 사실은 오직 마리아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그 일을 말씀으로써 표현하기 전에(13:31)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들어있던 생각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죽으실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서 아무도 깨닫지 못하던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분깃점이라고 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주님에게 일어날 일과 뜻, 그리고 주님의 심정에 대하여 무지했으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가 크냐하는 논쟁을 벌였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 그리고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녀가 등장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언니인 마르다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의 모습이 마뜩지 않아서 예수님께 불평을 했을 때에도 예수님은 마리아를 변호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10:41~42).” 어떻게 마리아만 알았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이것입니다. 그녀가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그 발치에 앉아서 듣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 앞에 그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녀가 언제나 제자들처럼 주님과 동행했던 여인도 아니었음에도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하심이나 마태복음에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하심은(26:12) 그녀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복음이 전하는 바,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심도 그녀가 우연히 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얼마나 복음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었는지를 말씀하심입니다(26:13).

 

언젠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이 일을 알아 깨닫게 된 마리아는 이 향유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적당한 기회에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사용하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일이 화근이 되어 결국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제 유월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은 말씀하셨던대로 마지막을 보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이 기회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5. 허비하는 사랑, 광신?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이것만은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이 일을 하는 깊은 동기가 있었을텐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리스도께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하고 계시는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가장 값진 것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단연 그녀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은 향유였습니다.

 

마리아는 나드 한 근?그 값어치가 일년치 연봉에 해당하는?으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드러낸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을 때, 주님은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의 이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랑은 허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허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대상의 가치를 어느 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기에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그리스도께 보여주는 사랑은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그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이상, 내가 어떻게해서든지 그리스도께 대한 나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이런 것은 언제나 광신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광신이 아니라 올바른 광신입니다.

 

6. 옳음(교양)이 중요한 사람, 유다

이 자리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은 다름아닌 유다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틀린 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성령님은 그가 자신의 거짓을 교양으로 숨기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교양은 대개의 경우에 옳습니다. 문제는 그 교양이 말하는 사람의 가치와 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달랐습니다. 성경은 날카롭게 우리의 교양이 우리 자신과 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교양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를 지적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추구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 듯이 보여지고 싶어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보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의 옮음이나 교양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유다의 말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19:21; 10:21; 18:22).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이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한 부정이나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게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7. 주님께 허비하는 사랑을 드림 vs. 가난한 자를 도움

마리아가 주님께 보여준 허비하는 사랑과 유다가 말하는 바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것입니까? 또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분별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집에 찾아오신다면 문제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리아의 곁에 오셨던 방식으로 오시지는 않으십니다. 또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심판하는 임금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할 때(25:40,45),

 

이것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또는 가난한 자)와 주님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주님은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중 하나에게 한 일은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5~6,10). 주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 혹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당신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구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

 

이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단순논리의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런 가르침이라면 유다는 칭찬을 받을 말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주님께서 작은 자, 가난한 자들과 당신을 동일시한 말씀들을 유념하더라도, 본문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닌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 즉 유다가 말한 것을 교양이라고 일단 정의합니다. 교양의 사전적 정의를 생각해도 이것은 무리한 적용이 아닙니다. 교양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교양은 학문, 지식, 성품 등으로 갖추어진 품위. 일반적으로 인격적인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지(), (), ()의 수련, 즉 단순한 학식의 풍부나 전문가적 직업생활 외에 일정한 문화이상(文化理想)에 부응한 정신적 능력의 전면적 계발로서의 세련을 의미한다.” 우리의 질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보여준 사랑과 유다가 보여준 교양을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성령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십니까?

 

8. 가치의 충돌: 복음은 교양을 넘어선다.

본문은 이렇게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굶주리던 많은 사람들이 배부름을 얻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하는 대신 주님께 그 값진 향유를 부었습니다.

 

우리는 기아의 고통에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 죽음 가운데 있는 자에게 복음을 주는 것은 더 궁극적인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본질상 더 절박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사역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5; 4:18).

 

실제로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복음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실 것과 그 죽으심의 뜻을 그녀만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치, 그리스도의 죽음의 무한한 가치를 그녀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한 자의 가치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죄인들의 구원이라는 가치가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거의 언제나 충돌합니다. 교양은 유다가 말한대로 말합니다. “그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교양을 넘어섭니다. 교양을 능가합니다. 교양은 나의 옳음과 정당함을 드러내지만, 복음은 언제나 나의 틀림과 부당함을 드러냅니다. 아니, 복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자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향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모든 민족에게 펴져나가게 될 것인지를 예시하는 말입니다. 마리아를 비난하는 유다는 복음이 아니라 교양의 편에 선 종교인이며, 사실은 돈 밖에는 모르는 도둑놈이었습니다.

 

그런 도둑놈은 아닐지라도, 복음의 편에 서지 않고 교양의 편에 서는 종교인들을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하는 말들은 혹시 유다처럼 똑똑한 판단과 생각들을 드러내지만, 그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향한 허비하는 사랑이 없음을 가리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를 판단하고 그녀를 꾸짖을 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금하시고, 주님께서 그녀를 변호하십니다. 내가 할 일은 그 알량한 교양 위에 서서 판단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과 그 뜻을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 무한한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9.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마리아의 행위가 지닌 구속사적으로 특별한 성격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주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 집에 저녁을 드시러 오지는 않으십니다. 그 일은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있었던 일이고, 죽으심을 준비한다고 한 것은 마리아에게 주어진(하지만 누구라도 깨닫고 원했다면 그 은혜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죄인이었던 여인의 행위가 그것이다)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주님은 주님께 문을 여는 모든 자에게 오셔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약속하신 대로 그렇게 하십니다(3:20). 그러나 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몸에 향수를 쏟아 부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보다 더한 주님의 칭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늘 주님의 발 아래서 그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깨닫는 것이 기쁨이었던 여인, 결국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인하여 그녀는 이 일을 행한 것입니다. 교양은 이렇게 하는 힘이 없습니다. 교양은 언제나 나를 치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교양을 상회하는 그리고 어떤 핑계/판단/교양으로도 제쳐 놓을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도 마리아를 광신이라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양도 복음을 판단하는 자리에 가지 못합니다.

 

아무도 C.T.스터드를 광신이라고 비난하지 못합니다. 비록 당대의 사람들은 경솔한 행동이며 학식과 재능의 엄청난 낭비 심지어 광신이라고 비난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교양은 교양일 뿐입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교양은 우리의 병든 마음을 고칠수도, 우리를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복음 앞에서 교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듯이 말입니다(고전 1:25).

 

10. 마지막 질문들: “너무 큰 희생은 없다(No sacrifice too great).”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유다의 편, 교양의 편에 서 계십니까, 마리아의 편, 복음의 편에 서 계십니까? 교양이 여러분의 지식과 정당함과 옳음을 드러내게 합니까,

 

아니면 복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향유를 붓는 허비하는 사랑을 하게 하는 힘을 경험하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의 발 아래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는 것이 정말 소중한 가치입니까? 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그리스도께 마리아와 같은 허비하는 사랑을 드릴 수 있는지 아십니까? 복음?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사랑을 깨닫는 자가 깨닫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여러분이 아는 복음은 무슨 복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최고의 값진 것으로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안다고 말하는 그 복음은 마리아가 알았던 복음은 아닐 것입니다. 재물, 성공, 자기의 이미지, 가족, 자녀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복음의 가치를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복음의 무한한 가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어떤 헌신도, 희생도 광신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 번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로 가서 자기의 인생을 허비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이야말로 세상이 볼 때는 광신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저들이야말로 내 죽음의 무한한 가치를 아는 자들이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왜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스터드가 떠올랐는지 이제 압니다. 왜냐하면 스터드야말로 마리아와 함께 복음의 가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그들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으로 표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스터드의 말을 기억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앞에 너무 큰 희생은 없습니다. ,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무한한 가치를 드러내는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요한복음 강해-58/ 명품 신앙, 짝퉁 신앙 /12:1-8

2020-01-22 02:40:49

 

신문에 이탈리아가 혹독한 재정 위기를 겪으면서 주춤거리는 명품 산업을 다시 살리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 중에 명품을 소개하는데 수제 구두 명품 중에 가장 비싼 것은 4200만원이나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7개월에서 1년에 걸쳐 제품이 완성됩니다.

 

구두를 완성한 후에는 땅속에 6개월간 묻어서 변색을 통해 독특한 무늬와 색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명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장인이 온 힘을 기울이고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는 부분까지 정성을 다합니다.

 

명품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리 만족으로 찾는 것이 명품을 모방해서 만든 짝퉁입니다. ‘짝퉁이라는 말은 신조어로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부르는 말입니다. 명품과 짝퉁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차이가 납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보면 금방 명품인지 짝퉁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명품은 보이진 않는 부분까지 정성을 다 하지만 짝퉁은 보이지 않는 부분은 엉성하게 대충 처리합니다.

 

신앙에도 명품 신앙과 짝퉁 신앙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를 비교해 보면 명품 신앙과 짝퉁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기뻐하며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제자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곁으로 왔습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 어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보면 삼 천만 원 정도 되는 값비싼 향유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열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향유의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그 비싼 향유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좋았을 것인데 어찌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가룟 유다가 화를 내면서 왜 그것을 허비하느냐고 화를 낸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화를 내는 가룟 유다를 향해 그녀가 한 일을 꾸짖지 말라. 나의 죽음을 위해 한 것이니 그녀가 한 일을 그대로 간직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베다니로 올라오실 때 유대지도자들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을 통해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런 긴장된 분위기를 읽었습니다. 유월절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을 위해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이 발을 닦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과 정성을 표현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예수님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명품 신앙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이 명품 신앙이라는 것은 알 수 있는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유대인들에게 잡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고난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에까지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고 안식일이 끝나는 주일 새벽에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향유를 준비해 얼떨결에 대충 수습한 예수님의 시신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즐거운 때든지, 어려운 때든지 동일했습니다. 겉과 속이 항상 똑같은 명품 신앙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신앙은 달랐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모습을 보고 왜 그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더 좋을 것이 아니냐며 화를 냈습니다. 가룟 유다가 한 이 말만 생각하면 그는 누구도다도 현명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명품 중의 명품 신앙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가룟 유다의 겉과 속이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라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고 품었던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었고 그의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전대를 관리하면서 몰래 돈을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도 야망이 컸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재정을 다 맡아서 관리할 만큼 가장 측근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을 저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은 30냥에 예수님을 팝니다. 당시에 은 30냥은 노예 한 사람의 가치입니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예수님께 실망을 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야망이 꺾인 분노와 실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로마 병사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는 로마 병사들에게 자신이 입맞추며 인사하는 사람이 예수이니 그를 잡으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로 다가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춥니다.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입맞춤을 하지만 그의 입맞춤은 배신의 가증한 입맞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갈 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가장 잘 믿는 사람 같았고, 지혜로운 사람 같았고, 어려운 사람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의 속은 욕망과 간사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명품 신앙은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 모두 동일하게 정성을 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은 명품의 삶이고, 신앙인이라면 명품의 신앙인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감동적인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어느 의사가 생존 가망성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씌워져 있는 산소마스크를 떼려고 다가갔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병상으로 바짝 다가가서 할아버지 귀에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요.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어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이 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라고 속삭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의사가 감동을 받아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한 말을 트윗터에 올렸습니다. SNS에 감동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나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글이 이어졌습니다. 저도 그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명품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성도들이 저의 아내에게 목사님 참 좋지요라고 물으면 살아 봐요라고 대답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편하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저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부교역자들입니다. 제 삶의 뒷모습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사람으로, 목회자로 명품의 신앙인이 되려면 가족과 가장 가까이에서 제 목회를 들여다보고 있는 부교역자들이 인정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잠깐 보는 이들이 인정하는 삶도 중요하지만 함께 생활하면 삶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보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삶이 명품의 삶이고, 명품의 신앙입니다.

 

명품 신앙의 또 하나의 기준은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수도원의 원장은 제자들 중에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는 못생겼고 기억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못난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원장에게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원장은 제자들에게 내가 문제를 너희들 모두에게 하나 주마. 그것을 풀어가지고 오면 내가 왜 이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지를 너희들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원장은 제자들에게 작은 새를 한 마리씩 나눠주고는 해가 질 때까지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그 새를 죽여 가지고 와라. 다시 말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해질녁이 되자 제자들은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들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사랑하는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의 손에는 작은 새가 산 채로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조롱했습니다. ‘저 바보는 원장님이 무엇을 시켰는지도 모르나봐!’ 그러나 원장님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그 아이에게 너는 왜 새를 죽이지 못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절대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으슥하고 은밀한 곳을 찾아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명품 신앙은 하나님을 먼저 의식합니다. 그러나 짝퉁 신앙은 사람을 먼저 의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짝퉁 신앙이 아닌 명품 신앙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명품 신앙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며 그의 삶에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한 주 동안살면서 짝퉁 신앙이 아닌 명품 신앙인의 모습이 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 /12:1-8/ 하용조 목사

2015-05-27 22:42:37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건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감동적인 일입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9장에도 동일한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26:13, 14:9)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예비한 여인

 

예수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실 만큼 이 사건은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감동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또 감동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지극히 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자가 영적 통찰력을 발휘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사건의 감동이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유월절이 있기 6일 전입니다. 앞서 1157절 말씀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공연하게 예수님을 체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유월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그런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때 가룟 유다와 로마 군인들이 따라와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야간을 이용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일몰 후에 심문하지 못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법으로 심문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에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유월절 6일 전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했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1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는 구절을 보면 베다니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신 곳은 나사로의 집의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문둥병에 걸려 고침을 받았던 시몬의 집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고, 그곳으로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시몬의 집에 모인 이유가 2절 말씀에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잔치가 시몬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시몬은 문둥병을 고침 받은 감동이 있고,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나 더 깊은 감동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심방하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선 마리아

 

여기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있기 전에 이미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체포 명령과 잔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말씀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각 사람들의 위치입니다. 마르다는 잔치를 위해 일을 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 그리고 마리아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위치는 다릅니다. 마르다는 일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사람들 중에 있었으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밀착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 교훈과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을 만큼 영적 통찰력이 뛰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거리를 둔 채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주님과 밀착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않으세요? 마리아에게 저를 도우라고 말씀하세요.’ 마르다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한 가지 일만 해도 족하다. 마리아는 좋은 일을 택했으니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주여,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동생 마리아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얘기해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앞서 1132절 말씀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로 다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야기했고,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이야기했습니다. 세 가지 사건에서 마리아는 모두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상태로 주님과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영적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향유를 아낌없이 발에 붓다

 

우리가 능력있고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하려면 예수님과 거리를 두지 말고 밀착해 있어야 합니다. 후방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예배, 찬송, 기도할 때 주님께 밀착해야 합니다. 철야, 새벽 기도하며 아웃리치도 떠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하면, 일단 그 시간만큼은 주님과 밀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생각하도록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밀착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통찰력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을 성경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에 밀착시키면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비결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밀착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준비해 뒀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을 행하는 동안 마리아는 말이 없이 그냥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깊은 의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가 값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갑자기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오래 전부터 마리아는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가룟 유다가 저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데,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02절에서 노동자들에게 하루 임금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일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한꺼번에 헌금하려면 오래 전부터 많은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를 마리아는 오래 전부터 주님을 위해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이런 준비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마리아는 나드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마리아는 아낌없이 향유를 부었습니다. 우리는 살기 힘들다며 적당히 드려도 된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녀는 전량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셋째,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드 향유는 머리에 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수건이 아니라,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씻겼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헌신이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얼마 동안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돈을 모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비싼 향유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예수님의 발에 전량 쏟아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고 예배이며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입니다.

 

 

머리카락까지 드리는 사랑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만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을 아셨습니다.

 

군대에서 만났던 한 하사관이 생각납니다. 저는 군대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마산에 있는 결핵 요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 하사관 한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텐트 교회에서 신앙 생활했는데, 철야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사관은 토요일이 되면 걸레를 들고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강대상, 의자, 마루 등을 닦았습니다. 제가 전역하는 날까지 그 일을 한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 분은 수줍어하면서 제가 좋아서 그냥 닦는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먼지 하나 없도록 열심히 닦는 그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닦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누군가가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을 열심히 닦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주일마다 15천 명 이상이 왕래합니다. 많은 먼지가 발생하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듯이, 누가 교회의 한 구석이라도 닦았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누가 시켜서 아니라, 마치 그 하사관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녁에 강대상을 닦듯이 교회의 구석구석을 닦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봐도 깨끗하고 잘 정돈 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크리스천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은 신문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성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한참동안 달렸습니다.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사람은 옆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고 마음속으로 다음부터 나도 성경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 밀착해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모습은 찾기 힘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일은 잘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처럼 교회의 더러운 곳, 보이지 않는 곳, 냄새나는 곳에 자신의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

 

마리아가 부은 나드 향유로 집 안에 향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드 향기가 어디서 나는 줄 몰랐습니다. 두리번거리다가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막힌 영적 통찰력의 사건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칭찬하진 않습니다. 이 사건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정의감과 도덕성이 있으며 휴머니즘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적어도 말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4~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당시 가룟 유다에 대한 6절 말씀의 후반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룟 유다에 대해 아는 것은 그의 박애주의, 정의감, 휴머니즘이 넘치는 모습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에 속아 넘어 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의 말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고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의 해설에 가룟 유다의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실제 다른 속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과 이해 관계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말처럼 스스로를 멋진 사람이라고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의 선동적인 발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 8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의 헌금하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 교회 오는 모습 등이 예수님의 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셨지만, 가룟 유다를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만 둬라. 여자는 나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추가돼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섬기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르다나 가룟 유다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고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항상 마리아에게 맞춰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는 예수님과 밀착하기를 원합니다.

오랫동안 준비해 두었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전부 쏟아 붓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향기가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헌신 /12:1-11/ 옥한흠 목사

2015-05-11 18:29:33

 

성경에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깊 은 감동에 젖게 하는 한 주간의 사 건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신약과 구약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씩만 말해 본다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한 주간과 요 한복음 12장 이하에 나오는 수난 주 간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창 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일주일 동 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어떤 면에 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엄한 스케일의 이야기가 나옵니 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면 창조의 웅장함과 신비를 다는 알지 못하지만 황홀함과 놀라움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낍 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 복음 12장 이하에는 예수님이 수난 을 당하신 한 주간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유 월절 엿새 전에 "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날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돌아오는 금요일까지의 육일 동안의 사건이 12장 이하로 집중적 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 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 상의 죄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멀 고도 험한 고난의 여정을 보게 됩니 다.

 

이 한 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행 하신 일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사도 요한은 자기가 쓰는 요한복음 의 전체 분량 중 거의 2분의 1을 할 애해서 이 한 주간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3년의 90퍼센 트에 해당되는 기간에 있었던 이야 기에 대해 열 한 장을 할애한 것과 비교해 볼 때 그가 마지막 한 주간 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가 늠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마태와 마 가, 누가도 자기들이 쓴 복음서의 30퍼센트 이상을 이 마지막 한 주간 의 사건을 다루는데 할애하고 있다 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복음서 기자들이 하나 같이 이 한 주간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요?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결정적 인 진리가 이 한 주간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성령이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하며 오늘 본문 으로부터 전개되는 말씀 앞에 좀더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로 앉아야 합 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이미 수년간 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처 음 나오신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합 니다만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지 않 은 설교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 나 귀담아 들으시면 한마디라도 하 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리라고 봅니 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수년간 하신 분들이라 나름대로 성 경도 많이 읽고 설교도 많이 들으셨 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 을 읽으면서 ', 오늘 무슨 설교를 하겠구나. 대충 이런 내용을 얘기하 겠지? ' 하고 감을 잡으시리라 봅니 다.

 

왜냐하면 본문이 담고 있는 메 시지가 워낙 명료하고 단순하다 보 니 백 명의 설교자가 서서 설교한다 해도 대동소이한 내용을 말할 수밖 에 없기 때문입니다. 옥 목사도 마 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 은 이 본문의 내용을 얼마나 깊이 설명하느냐가 아니라 이 말씀이 주 는 메시지를 어떻게 나와 연관시켜 서 깊이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이 설 교를 들으면서 계속 되새김질하면서 물어야 할 세 가지 질문을 먼저 드 립니다. 먼저는, '내가 예수님을 사 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 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의 사랑의 표 현은 헌신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 다. 여러분이 이 세 가지 질문을 마음에 두고 반복해서 묻고 답하면 서 설교를 들으면 성령께서 하나님 의 음성을 들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용기 있는 헌신

 

본문 말씀에는 세 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 리아입니다. 그들은 지금 베다니에 서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66절 이하를 보 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집은 나사 로의 집이 아니라 문둥이 시몬이라 고 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 니다.

 

아마 한때 문둥병자였는데 예 수님을 만나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은혜에 특별히 감격 하고 있었던 사람인가 봅니다. 아무 튼 이들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922절에서 알 수 있듯 이 그 당시는 누구든지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다가는 유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될 수도 있는 살벌한 분위기가 감도는 때였습니다. 사람이 사회로 부터 매장되어 외톨이가 되는 것만 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제가 직 접 당해본 일은 없지만 충분히 상상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즈음 대통령 아들이라는 분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 시오. 길을 걸어다닐 수 있습니까? 어떤 신문기자가 그가 살고 있는 아 파트의 경비원과 한 이야기를 잠깐 들은 일이 있는데, 그 경비원이 지 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 다.

 

"요즘 어디 함부로 사람들 보는 데 드나들겠어요? 요즘에는 꼼짝도 안 하세요. "

 

그의 경우만 보아도 사 람들로부터 돌멩이질을 당하고, 외 톨이가 되고, 사회로부터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문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 수님이 베다니에 와 계시는 이 기간 에 예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는 못할 일입니다. 그 러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시몬은 그런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감 사해서 세상이 무어라고 하든지, 자 신들이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든 지, 욕을 먹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감사의 표를 하고 있는 것입 니다. 이를 유대인들이 가만히 넘어 갈 리가 없습니다. 10절을 보면 이 일 이후로 유대인들은 이제 나사로 까지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 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꼭 짚 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 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 기 목숨이라도 걸고 헌신하기를 원 하는 바로 이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 '제자 '라고 말씀합니다.

 

"나 를 따라오너라. "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왜 이런 사람들 을 원하셨을까요? 이 세상을 변화시 키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주님이 분 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 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방 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 입니다. 인간은 방법론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십니다. 용기 있게 자기를 주님 앞에 헌신하는 제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님은 세상을 떠나가면서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

 

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 찾으시 는 사람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사람이 아닙니 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당 할지라도 용기 있게 예수만 따라가 고 예수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 는 제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헌신의 세 가지 모델

 

어떤 면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인 물들은 예수님에게 헌신하는 사람의 세 가지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 다. 먼저 마르다를 살펴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제자들까지 합하면 한 20명 내외 정도였으니 아 무리 적당하게 대접한다고 해도 특 별한 연회를 준비했다면 얼마나 뒷 손질이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 을 보면 마르다는 부엌에서 일을 하 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그는 언제나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저는 이런 여성을 좋아 합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남이 보든 안보든 신나게 이리 뛰며 저리 뛰며 봉사하는 부인들을 보면 왠지 모르 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르다는 주 님을 위해 몸으로 헌신하는 전형적 인 인물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시간과 정력을 쏟아서 자기 몸이 지 쳐 쓰러질 때까지 봉사하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마르다 형의 헌신자라 고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나사로입니다. 그는 예 수님 덕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입장이 됩니다. 말 한마디 안해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예수님을 생각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나사로와 같은 헌신자들이 많은데 오늘 1부 예배 때 간증을 하신 형제 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분은 참 유명한 만화가인데 술독에 빠져 지내던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 게 되고 술에서 해방되게 되었는지 에 대해 은혜로운 간증을 들려주었 습니다. 사실 그분처럼 폐인처럼 되 다시피 했다가 중도에 예수를 믿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 사람들은 회 사에 가든, 어디로 가든 가만히 앉 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와 술친 구 하던 사람들이 달라진 그를 보며 누구를 생각하겠어요? 예수를 생각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를 믿고 돌아 오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 처럼 3,4대째 믿는 집안 출신은 도 대체 할 말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는 데, 나사로는 같은 유형의 헌신자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예수님의 은혜 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입니다. 마리 아는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그 값비 싼 향유 옥합을 몰래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참으로 독 특한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스타일의 헌 신을 놓고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덜 좋으냐 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떤 스타일의 것이든, 주님께 드려지는 헌신이기에 아름답고 가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마리아의 헌신이 특별히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우리의 관심을 끌 고도 남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예수님이 내리신 평가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266절 이하의 말씀과 오늘 읽은 말씀을 나란히 놓고 보면 예수님이 유독 마리아의 행동에 대 해서만 특별하게 코멘트를 하고 계 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자 기에게 붓고 머리털로 씻기는 것을 보시고는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 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26:10).

 

"그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일이 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에 대해 매우 흡족하게 여기셨 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 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 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 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26:12). 장례식을 위해서 마리아가 향유를 자기 발에 부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심 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읽으신 것 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져야 할 십자가를 기다리며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고스란히 다 겪고 계 셨습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 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 이다. "

 

예수님의 고민과 갈등을 그 대로 읽어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 리아는 예수님의 그런 심정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잔치 자리 에 와 계시지만 심령으로는 몹시 고 통스러워하시는 주님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싶어 그 귀한 향유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 님의 마음을 이렇게 잘 읽을 수 있 게 되었을까요? 정확하게는 모르지 만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한가지 힌트 는 얻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 수님 오실 때마다 항상 부엌에 있는 여자였지만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 발 앞에 앉아있는 여자였습니다.

 

손 님이 오면 나가서 대접할 생각을 해 야 할 텐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 에 앉아서 이야기만 들으려고 했습 니다. 유대 나라에서 '발 앞에 앉는 다 '는 것은 배우는 자세를 의미합니 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서 무엇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 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듣 고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도 그런 마리아를 보시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하 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하 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자기가 마음에 갖고 있는 감정도 마리아에게 털어 놓았을 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주 님의 말씀을 이토록 많이 들었기에 그 만큼 주님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런 심정을 아시고 큰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 태복음 2613절을 보십시오.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 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 는 것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 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

 

이 말씀대 로 그녀가 죽은 지 벌써 1,90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오늘 우리가 마리 아의 헌신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은 혜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리아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예가 됩니까?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이와 같은 큰상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는다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마 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 와 발에 부었던 헌신은 부엌에서 열 심히 식사 준비를 했던 마르다의 헌 신이나 예수님 곁에 앉아 자기를 다 시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나사로의 헌신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헌신이 특별히 다르게 보이게된 이 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값비싼 향유 옥합 때문일까요? 물론 그것도 부분 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마리아의 헌신이 특별 히 돋보이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리 아의 행동에는 향유보다 더 진한 향 기를 토하는 사랑이 배어 있었습니 다. 사랑하기 때문에 억누를 수 없 어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말합니다. 입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사랑으 로 말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사랑으 로 하는 헌신은 독특한 면들을 가지 고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의 헌신에 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독특한 면 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고의 것 을 드렸습니다. 사랑은 최고의 것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 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 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의 계산대로라면 300 데나리온, 곧 노 동자가 일년 동안 수고해서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입 니다.

 

요즘 시세로 따지자면 1,000만 원 내지 1,200만원 정도가 되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대단한 액수입니 다. 그녀는 그것을 주님께 부어 드 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사랑은 계산하 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 니다. 값을 따진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인지 아닌지 제가 정확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 다만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은 결혼할 날짜 까지 정해 놓고 있었는데 한번은 둘 이서 백화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 로가 사랑하니까 좋은 것을 사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비 신부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따라 다니는데 이 남자가 집는 물건마다 가격을 보더 니

 

", 너무 비싸다. 좀더 싼 데 가 보자. "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이 일 이 화근이 되어 가지고 두 사람이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물론 돈 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럴 때는 차라리 값을 묻지 말든지, 돈 이 모자라 비싼 것을 사줄 수 없으 면 아예 값비싼 물건이 없는 곳으로 가든지 해야지 괜히 값을 따지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면 순수한 사 랑의 꿈을 꾸고 있는 예비 신부가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사랑 이란 원래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 다.

 

그리고 사랑은 항상 미안한 마음 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주지 못해 서 미안하고, 더 잘해 주지 못해 미 안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젊어 서 연애할 때 다 경험해 보시지 않 았습니까? 그 때 심정이 어땠습니 까? 뭐든지 다 주고 싶었잖아요? 그게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너무 비싸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다 고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심정이었 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늘 보좌의 영광도 내놓으신 분입 니다.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 시고 다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최고 의 것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값 을 따지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그러면 이렇게 사랑해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 랑해라. "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최 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 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받을 만한 자격 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 자신이 우 리를 위해 모든 것, 최고의 것, 완전 한 것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렇기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 시면서도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시 지 않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 아의 행동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 닙니다.

 

저는 어느 선교사의 글을 읽으면 서 무척 충격 받았습니다. 오래 전 에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던 어 느 미국 목사님이 어느 날 갠지스 강가로 나갔다고 합니다. 거기에 나 가보니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인 도에서 오랫동안 선교 사역을 하면 서 그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 었습니다.

 

', 저 여자가 두 아이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갠지스 강에 집어넣어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가는구나. ' 그래서 그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 그건 아무 쓸 데 없는 일이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느냐? "

 

하고 간곡히 만류 했지만 그 여인은 완강했습니다. 너 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보니 한 아이 는 아주 참하게 생긴 남자애입니다. 그리고 또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 다가 장님입니다. 그 여인에게 아무 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는 줄 알 고 선교사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 참을 있다가 궁금해서 또 강가로 나 갔는데 아까 전의 그 여인이 강둑으 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두 아 이 중 하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잘 생 기고 성한 아이는 없어지고 불구요 장님이 된 아이만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아 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치셨나요? "

 

하고 물었다고 합니 다. 그랬더니 여인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우리가 섬 기는 신은 우리가 그에게 최선의 것 을 드리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배웠 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드리 려면 두 아이 중 좋은 아이를 드려 야지 어떻게 덜 좋은 아이를 드리겠 습니까? "

 

여러분, 저는 인도의 힌두교 신이 어떤 신이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신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 늘의 보좌를 내버리고 이 세상에 오 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 신이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 대신에 자기 생명을 십 자가에 내어놓고 희생하셨다는 이야 기도 못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그에게 최선의 것을 드 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 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가 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 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 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를 믿는 사 람들 가운데 매정하고 인색한 분들 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 수를 십자가에 대신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 리의 반응이 뭔가 달라야 할 것 같 은데, 너무 속이 들여다보이는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 다.

 

6.25 전쟁이 나서 남편을 잃어버 린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얼마 후에 유복자를 낳았습니다. 20 대에 과부가 된 그 부인으로서는 삶 이 비록 고달팠지만 그 아들이야말 로 생명 그 자체요, 꿈이요, 기쁨이 었습니다. 그 부인은 젊음을 바치고 평생을 바쳐 아들을 키웠습니다. 때 가 되어 결혼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2,3년을 아들 내외와 함께 참 행 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부부가 어머니를 찾아왔습니 다.

 

"어머니, 우리 이민 가겠습니 다. "

 

그 어머니는 너무나 충격을 받 아 입만 벌리고 쳐다보고만 있습니 다. 이런 어머니는 아랑곳 않고 아 들 내외는 모든 수속을 다 마치고 이민을 떠나버렸습니다.

 

"어머니, 생 활비는 보내드리겠어요. "라는 한 마 디를 남기고는 훌쩍 떠나버린 것입 니다. 이런 아들을 보고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눈 꼽만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서 희생하고 싶은 생 각은 더더군다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곁에서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까 짓 생활비 조금 보낸다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 은 사랑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사람이 많습 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간이 진정 행복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끼지 않고 내놓을 바로 그 때입니다. 그것이 자녀를 위한 것이 든, 남편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예 수님을 위한 것이든 간에 마음속에 서 사랑이 끌어 올라서 도저히 내가 움켜쥐고 있을 수가 없어 아까운 줄 모르고 흩어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언제 가장 불행한지 아십니까? 움켜쥐고 내놓 지 않으려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인 간은 가장 불행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 람이 있다고 봅니다.

 

행복한 신앙생 활을 하는 그룹과 불행하게 신앙생 활을 하는 그룹이 그것입니다. 행복 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날마 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십 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 생명 다 바 쳐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만 생각하 면 그분을 향한 사랑이 항상 가슴에 차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 게 하면 그분에게 좀더 기쁨을 드릴 까? 그분에게 더 좋은 것을 드릴 까? 그분에게 더 최고의 것을 드릴 까? 하는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그 래서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시간도 아끼지 않습니다. 돈도 아끼지 않습 니다. 내 몸도 아끼지 않습니다. 기 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드 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얼굴이 밝습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신앙 생활이 그들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 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똑같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왠지 어두운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놓지를 않습 니다. 그 마음이 너무 인색합니다. 지극히 계산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 다. 그렇기 때문에 풍족하게 가져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늘 안 내놓으 려고 벌벌 떨고 있으니 불행한 것입 니다.

 

그들에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차라리 안 믿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할 것입니 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마리아처럼 최고의 것을 드 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늘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 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 '사랑한다면 나 의 표현은 어떤 것인가? ' 그리고 '나 의 표현은 헌신적인 것인가? '

 

사랑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

 

둘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옥합 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에 부은 뒤 자기의 치렁치렁한 머 리털을 그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속에서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저 걸 저런 식으로 못쓰게 만들다니. 도대체 저 여자가 정신이 있나 없 나? '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를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니, 차라 리 가난한 자들에게나 줄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야? 삼 백 데나리온 이나 되는 거액을 이렇게 한순간에 다 날려버리다니. , 세상에. "

 

가룟 유다는 계산이 빠른 사람입 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돈을 많 이 만져본 사람입니다. 더욱이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살림을 맡고 있 는 회계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돈이 있었다 해도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가끔 제자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했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필요 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가 주든지 간에 헌금이 들어오면 그것 을 받아 가지고 장부를 정리하고 포 켓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지출하는 일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 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는 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제정신이 있는 여자라면 그것을 그대로 들고 와서

 

"주님, 이것 받으세요. 값이 꽤 나가는 것이니 팔아서 주님이 사역 하는데 필요할 때마다 쓰세요. "하고 주님께 드렸을 것이요, 그러면 주님 은 그것을 회계를 맡고 있던 자신에 게 넘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300 데나리온에 팔고는 장부에는 250 데 나리온만 쓰고 50 데나리온은 자기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 다. 가룟 유다는 그러고도 남을 사 람입니다. 6절에 보면 요한은 그를 '도적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금 을 슬쩍 하는 일이 이전에도 가끔 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가 한 몫 챙길 수 있는 철호의 기회 를 마리아가 날려 버렸다는 생각에 괜히 화가 났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불평을 하자 마태복음에 보면 다른 제자들도 그 불평에 동조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 의 선동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가 난한 자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는 이중인격자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볼모로 하여 자기 욕심 을 채우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이 안되어 그는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 습니다. 자기 선생되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은 삼십 하면 데나리온으로 따지면 한 120데나리온 정도 밖에 안 되는 돈 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드린 향유 옥합의 액수의 반도 안 되는 미미한 액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는 그 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넘긴 악한입 니다.

 

입으로는 자선을 외치면서 속 에 악한 욕심을 숨기고 있는 사람, 입으로는 군자의 말을 하면서 속으 로는 무서운 계산을 하고 있는 탐욕 의 사람, 이런 사람의 눈에는 사랑 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허비요, 낭 비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다가 무슨 소 리로 비난을 하든 일언반구 대꾸하 지 않고 그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사랑은 귀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마리아처럼 별나 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 까? 그런 사람들이 가끔 보이면 주 변에서는 그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 이 생겨납니다.

 

집안에서 부인이 별나다 싶을 정 도로 예수를 믿는 경우가 있지 않습 니까? 남편 입장에서는 그런 부인이 참 불안할 것 같습니다.

 

헌금을 했 는데 또 헌금하겠다고 그러지를 않 나요? 십일조를 바친다면서 거의 십 의 오조를 가져다 바치지를 않나요? 남자가 쩨쩨하게 장부를 뒤적일 수 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자니 광신자가 될 것만 같아 은근히 불안 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해보고, 더러는 쥐어박기 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사랑하 는 마음으로, 성령에 감동이 되어 주님께 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앞뒤 없는 행동을 절대 안 합니다. 남편 을 사랑합니다. 자식도 사랑합니다. 집안 살림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염려한 나 머지 뒤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경 우가 가끔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남편이 예수 님에게 미쳐 가지고 주머니에 있는 것마다 다 내놓으려고 하니 그 부인 이 안절부절을 못합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자녀가 예수님에게 미쳐 가지고 젊음을 바쳐 헌신하겠다고 나서니 그 부모가 야단법석을 떱니 다. 머리가 총명한 것이 앞으로 대 학 졸업하면 판검사나 교수가 될 것 이라고 잔뜩 기대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로 나가겠다니 부모가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 너는 예 수를 믿어도 뭐 그렇게 별나게 믿 냐? 판검사가 되어도 얼마든지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잖아, 이놈 아. "하면서 그 뜻을 꺾어 보려 하지 만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속에 뜨겁게 깨닫고부터는 한번밖에 없는 젊음이지만 그것을 옥합으로 깨트려 주님께 드리고 싶은 것입니 다. 그런데 집안 식구나 학교의 선 생님이나, 친구들이 그 심정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도 이런 일들이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람을 비난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런 사람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미지근한 태도에 맞추려고 자신의 뜨거운 열정의 온도를 낮춰 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옥합을 입으 로는

 

"주여, 주여 "

 

하면서 주의 제 단에 드리기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들의 헌신과 비교할 필요 가 없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이면 두리번거리며 남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 드리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 니다. 저는 그것을 받으신 주님께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 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 축복은 주님께 드린 자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 순위

 

셋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우선으로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보고 왜 그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예수님 의 발에다가 쏟아 낭비하느냐고 화 를 냈습니다. 돈을 쓰는 용도가 틀 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의 우선 순위가 잘못된 것 임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 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구제보다 앞서는 것입 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237절 이하에 나오는 대계명을 보아도 분 명한 사실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 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째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다 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순서를 절대 바꾸면 안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 에 두고 있었습니다. 같이 죽고 싶 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조 금이라도 동참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음이 번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 같이 갔던 세 제자를 불러 놓고 자기와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앉아서 눈만 뜨고 있 기만 해도 자기에게 힘이 되고 위로 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은 모두 잠들어버렸습니다. 가장 고 독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저는 7년 전에 불면증으로 1년 반 동안을 씨름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잠을 도무지 못 이루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코를 쿨쿨 골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면 마음이 얼마나 허전한지 모릅니다. 우리 집사람이 그랬다는 말이 아닙 니다. 환자의 경우 누군가가 자기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잠이 와도 잠을 자지 않고,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않고 붙어 있어 줄 때 제일 고맙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 까?

 

마리아는 주님께 바로 그런 사 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마리 아는 이제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찾 아올 기회가 다시 없을 것이라는 사 실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마 지막 기회야. 이때 내 사랑을 표현 하고, 주님의 고난에 내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 ' 그래서 그것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 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찬양하고 예 배하고 높이는 일을 가장 앞세웁니 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위하는 것을 동등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혼동하 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사 회 복지를 동일하게 다루시면 안됩 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최우선순위 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바 로 이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 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까지 우리는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 사랑으로 하는 헌신의 세 가지 독특 한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최고 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주님께 드 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최우선으 로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 은 아름다운 헌신을 본받아야 합니 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 랑한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 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표현은 과 연 얼마나 헌신적인 것입니까? 해링 톤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 니다.

 

"마귀가 가장 요긴하게 사용 하는 사람은 활동적인 죄인이 아니 라 비활동적인, 다시 말해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다. "

 

오늘날 사탄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 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헌신기피증이 전염병처럼 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조금 살만 하니까 헌신하기를 기피합니다. 쉽 게 예수 믿고,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보면 헌신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 니다. 오늘날 왜 교회가 이토록 힘 을 잃고 있습니까? 이 나라에 교회 가 몇 만개나 되는데도 세상 꼴이 이 모양입니까? 헌신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득실을 계산 하면서 철저히 자기 본위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수만 명이 모인 다 한들 그런 교회가 무슨 힘이 있 겠습니까?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잘 모 릅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에게 그 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 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 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 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1 ,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 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 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라 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 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 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 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 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야 어떠 해야겠습니까?

 

주님은 헌신자를 부 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의교회 에 몇 만명이 모이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으십니다. 주님이 찾 으시는 것은 마리아처럼 사랑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드린 세 가지 질문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시기 바 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 는가? ' '내가 사랑한다면 나의 사랑 의 표현은 어떤 것인가? ' '그리고 그 사랑의 표현은 헌신적인 것인가? 아 니면 이기적인 것인가?

 

' 한번뿐인 인생을 우리가 주님을 위해 깨트리 는 옥합으로 드려야하지 않겠습니 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가진 능력이나 재산, 시간, 그 무엇 이든 전부 주님께 드립시다. 예수님 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 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 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성령께 서 하늘 문을 여시고 예수님의 사랑 을 우리 마음에 풍성히 부어 주사 그 사랑에 젖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그 사랑에 감격 해서 우리의 남은 생을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해 온전히 드릴 수 있게 되 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시기를 하 여 그분을 위하여 드리는 아름다운 제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옥합 /12:1-8/ 홍정길목사

2014-12-10 20:23:14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 서 가장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남는 사건이 있다면 어떤 사건입니까? 우 리들이 너무 좋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면 그 추억 속에 그냥 머물러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추억 이 내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언제든지 가슴 가까이 두고 추억의 박물관에서 꺼내보고 싶어하는 목록 이 됩니다. 이런 추억이 우리 주님 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 씀하시기를 이 추억만은 내가 전파 되는 곳곳에 반드시 회자되어야 한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 서 그처럼 소중하게 붙잡고 머물러 있고 싶은 한 순간, 이 베다니 마을 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 일이 생긴 주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한 주간입니다.

 

이 주간에 주께서 십자 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 당하시고 구원을 주신, 사망 권세가 깨지고 부활의 능력으로 덧입는 영 광을 안겨준 주간입니다. 장소는 베 다니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는 이 사건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문둥이 시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추측하기를 주 께서 치료해주신 열 문둥이 가운데 다시 돌아와서 감사한 한 문둥이였 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문둥이였고 지금은 치료받 은 상태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사 람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마 그 문둥이 시몬이 라는 사람이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우리 주님이 베다니 에서 한 집의 잔치를 받고 계셨습니 다.

 

오로지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 다. 만약 문둥이 시몬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자기를 그 저주에서 풀러주신 주님을 향해서 감사가 쏟 아져 주님 앞에 드려질 자리였을 것 입니다. 어떤 학자는 문둥이 시몬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에 마르 다가 그 집의 실질적인 주인이어서 베다니의 사건이 기록될 때마다 문 둥이 시몬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무지 추측이니 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에게는 가정 의 기둥인 오라비 나사로가 얼마 전 에 다시 사는 놀라운 축복을 누렸기 때문에 그 감사와 감격은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잔치가 배설되었 는데 역시 행동파인 마르다는 열심 히 오락가락하면서 그 잔치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상황이 바뀝니 다. 마리아가 그 때까지 무엇을 하 고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 니다. 갑자기 뛰어나오더니 예수님 발 앞에 순전한 나드향 한 근을 옥 합을 깨뜨려서 붓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우리 주님 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합 니다. 기름을 부어주는 것은 당시 최대의 영예입니다. 다윗은 시편 23 편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 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 위에 바르셨 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 잔칫상에 들어갔을 때, 주인 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최 대의 영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 론이 처음 대제사장으로 부름을 받 고 즉위식을 가지던 날, 모세는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축 복을 선물했습니다. 시편 133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배로운 기름 이 시온,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같고"(133:2) 그냥 바른 것이 아니라 너무 좋고 귀할 때는 머리에 부었습니다.

 

부으 면 그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 을 타고 흐르고 수염을 타고 흐르는 그 기름이 옷을 적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부었던 이 기름은 얼마나 양이 많던지 머리 위에서 몸 을 타고 그 발까지 적셨단 말입니 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기 머리털 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 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극진한 대접을 할 때는 반드시 그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발을 씻길 것을 하인들에게 명령하는데, 하인 들이 심기가 불편할 때는 주인에게

 

"주인님, 나는 오늘만은 발 씻는 것 을 면제해주세요."

라고 그 발 씻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 요즘 이스라엘에서 나온 문서 에서 발견됩니다. 남의 발을 씻는다 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혹시 사랑하는 남편 의 발을 씻겨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 까? 우리가 등은 쉽게 밉니다. 그렇 지요? 그런데 발을 씻겨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아내의 발을 씻어본 남편이 계십니까? 심리적으 로 이 발을 씻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하인들이라도 너무 모욕감을 가질 때는 거절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하인이 씻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발을 씻어줍니다. 그 발은 어떤 발 입니까? 자기 집에 오셔서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있을 때 그 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발은 어떤 발입 니까? 인생에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 고 아팠던 사랑하는 오라비가 죽었 을 때, 슬픔을 가눌 수 없어 그 발 아래 자기 삶 전체를 엎어놓고 무릎 꿇었던 발입니다. 그 발이 자기를 구속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의 모든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 집에 왔습니 다.

 

그 거룩하신 발 앞에 머리를 풀 었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지금도 여 인네들이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진 머리로 다른 사람 앞에 나가는 것이 실례입니다. 그녀는 발을 씻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걸레가 준비되 지 않았는지, 의식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머리채를 걸레로 삼아서 그 발을 씻고 있습니다.

 

그 러자 그 방에 향기가 진동했다고 합 니다. 이 나드는 원래 티벳과 인도 접경에 있는 히말라야의 높은 고산 지에서 나는 향료입니다. 너무 귀했 기 때문에 당시에는 다른 향료와 조 금씩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4복음서 에 나온 말이 조금씩 다릅니다.

 

아 주 값비싸다고 기록된 부분도 있고, 아주 고귀한 것이라고도 기록된 부 분도 있고,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극상품이라는 뜻도 있고, 순전한 향 유라고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람 들은 이 충격적인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 중 하나가 불평하 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팔아서 300 데나리온을 받으면 가난한 사람을 잘 섬길 수 있을 텐데.."

 

계산 잘하 는 가룟 유다가 이 나드가 300 데 나리온이 나간다고 셈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에 제자들에게 이 야기합니다. 그랬더니 그 부정적이 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시에 퍼집니 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분기가 충전했다(26:8)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옥합이라고 말하는 이 사라석 고는 지금도 유럽의 골동상에서 고 가를 주고 매매되는 일종의 도기입 니다. 그냥 그 병에서 따라도 됩니 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불평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들이 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 교제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귀 한 일을 먼저 앞서 행했어야 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불평하 고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제자들의 사고는 돈 중심이었습니 다.

 

어떤 안목으로 사태를 보느냐는 참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제 자처럼 매사를 돈 중심으로 생각합 니다. 돈이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 다. 저는 일리는 있지만 멸시해야될 단어 중의 하나가 시간이 돈이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의 중심인 것처럼 잘 못 오도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룟 유다가 그랬어요. 그는 예 수님 따라다니면서 돈 만지는 일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충성하고 몰입 하다 보니까 예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 는지도 잃어버린 채, 최대의 관심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돈입니다.

 

우리 가 조심해야될 것은 교회에서 봉사 하고 헌신할 때, 잘못하면 우리가 맡고 있는 일 때문에 주님의 의도와 관심사를 멀리할 수도 있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성가대하시는 분 중에는 성가대 외 에는 예배가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 도 있더라구요.

 

기도를 안 하면 예 배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하지 않는 것은 교 회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야 되고 그 최후의 권위가 우리 주님께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잘 하고 자기가 관심있고 자 기가 맡아있는 그 일 중심으로 모든 일을 평가하려고 드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나쁘게 변질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예요. 그는 돈을 만지며 예수님의 모든 뒷 바라지 하며 돈을 쓰는 권리를 가지 고 자기 개인의 적은 영달에 만족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는 도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님이 가난했는데, 어떻게 도적질 해 먹었겠습니까마는 돈을 늘 만지다 보니까 콩떡을 만들면 떡고물이 떨 어진다는 그런 사고입니다. 적극적 으로는 안 했는데, 결국은 쓰다보면 내 중심으로 바뀌어지는 경우를 봅 니다.

 

요즘, 서울의 큰 교회에서 누 가 재정위원장이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교회가 많다고 합니 다. 50, 100, 200, 어떤 은행 에 돈을 맡기느냐에 따라서 실적이 달라지니까 재정위원장 하려고 노력 하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봅니다.

 

마태복음, 마가 복음에는 제자 들이 분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주께 서 말씀하십니다.

"저를 괴롭게 하 지 말라."

여기 요한복음은

 

"저를 가만히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 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 상 있지 아니하리라."

두 마디 말씀 을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행하 고 있는 일은 나의 장사를 위한 것 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는 너 희를 곧 떠날 것이다. 그리고 주께 서는 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그 모든 일은 반드시 알려져야 된다"

 

그렇다면 오늘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배워야 될 것은 마 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과연 무엇인 가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 가의 골고다에 달리실 때 이 베다니 의 마리아는 곁에 가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예수님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모두 썼기 때문에 그 후에는 가지 않습니 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요?그 비결은 우리 주님의 발 앞에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기쁜 날, 예수님의 발 앞에 있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무 엇을 생각하고 계신가? 예수님께서 어떤 의지를 가지셨는가? 우리 예수 님께서 무엇을 가장 원하시는가? 였 습니다. 그는 자기 언니와 함께 일 하면서도 예수님의 동정 하나를 놓 치지 않으려고 마음 전체를 기울였 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그의 눈은 예수님 의 눈동자와 부딪쳐 있습니다. 그의 귀는 예수님의 입에 집중되어 있습 니다. 그의 심장은 주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그 뜨거운 사랑을 받으 려고 몸 전체로 나갔습니다.

 

여러 분,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에 실패하 면서도 그 발 앞에 앉아있는 시간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불러냅니다. 사랑하면 깊은 관심이 쏟아집니다. 이 여인은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 분의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집중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생 애, 가장 쓰라린 비극, 사랑하는 오 라비가 죽었던 절망의 그 시간에도 이 여인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그 분께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는 주님이 얼마 있으면 십자 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알았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말씀 중에 제자들이 귓등 에 흘려 버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얼마 있으면 유대 관 원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십자가에 죽으리라."

계속해서 말씀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애 시작 하면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높이 들려야 되리 라."고 주께서 어떤 죽음을 당할 것 인가를 계속해서 말했는데, 제자들 은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신 보 니까 물위를 걸어다니시던데, 당신 보니까 에워싸인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없는 투명인간처럼 그냥 지나 가시던데, 당신이 명령했더니 바다 와 바람도 잔잔해지시던데, 당신이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덩이 로 사람들에게 나눠주니까 5천명이 먹고도 남던데,

 

당신이 이미 죽어서 썩기 시작한 시체를 향해서 나사로 야 나오너라 명령하니까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던데, 그 권능을 가지고 죽어요? 어림없습니다. 당신은 메시 야입니다. 이 땅을 다시 회복시킬 분이십니다. 그 때 나는 당신의 좌 편, 우편에 앉겠습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주께 서 죽으신다는 의미를 그들은 몰랐 습니다. 주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주님이 되 기 원했습니다. 주께서 어떤 길을 가시겠는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단 말이예요. 사랑은 상대편을 향한 관 심입니다.

 

우리가 장애 가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때도 말로만은 안 됩니다. 관심입니다. 그 사람 중심 이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있는 시 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래서 그 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그 대로 순전하게 받는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기도해도 그냥 내 소원 말하고, 성경을 봐도 내 이익된 것 만 뽑아 쓰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사랑할 줄 아는 마 리아는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 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나드를 담은 그 옥합이라도 쓰게 안 깨뜨려야 될 것 아니예요. 또 다 준 다고 해놓고 따라놓고 보면 좀 남으 니까 떡고물이라도 남길 수 있쟎아 요. 그런데 이 여인은 다 주기로 작 정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주기 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한 당시의 도기인 옥합을 깨버립니다. 완전히 쏟아 부었습니다. 하나도 남 김없이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여러 분, 사랑은 그러합니다. 우리가 자 식들에게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 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낌이 없습 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 사랑이 주님께로부터 자기에게 날마다 넘쳐 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 니까? 자신을 주셨습니다. 주시다 주시다 못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영광의 사랑을 알았습 니다. 아낌없이 자기를 향해 쏟아주 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역시 아낌없이 자기에게 가장 소 중한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의 머리 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걸레로 삼아 주님의 발을 닦는 헌신으로 나아갔 습니다.

 

"내게는 당신 이상 존귀한 분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로는 사랑 은 기회를 잃지 않습니다.

 

이 여인 은 주변의 여러 정황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 실 날이 임박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깜짝 놀란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 다. 나사로를 불러내니까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발 앞에 있을 때, 자기에게 부어 준 그 사랑의 멧세지, 온 인류 대속 을 위해 죽으시기로 작정한 어린양 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대로 온 예 루살렘과 유대의 모든 세력들이 움 직인다는 사실을 이 여인은 감지했 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더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 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유월 절 어린양 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영광의 장례식을 생각하면서 향유를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여러 분, 우리들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사건에 대해 기회를 놓치는 경우 가 참 많습니다. 토마스 칼라엘은 평생 살면서 자기 아내에게 수고했 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아내가 어느 날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그는 그 시체를 붙잡고

 

"여보, 5분만 눈 을 떠다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이 말을 하고 싶다구요."

울부짖 었습니다. 우리들이 귀한 시간들을 놓쳐버리고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리 고 이처럼 5분만 눈 떠달라고, 혹은 임종 직전에 내게 1년만 달라고, 그 러면 주님을 위해서 사랑의 헌신과 봉사를 하겠다고 붙잡습니다.

 

부끄 러워서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회를 놓치고 후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많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끝냅 니다. 이 여인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사랑은 그 분을 향한 관심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아낌없 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 양보하는 것 같은데 기회만은 절대 로 놓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헤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코메디에나 나올 소리입니다. 사랑의 소중한 기 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5년 전인가요? 이 본문을 설 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자고 했습니 다. 나드 한근이 300 데나리온이니 까 한 데나리온이 한 사람 하루 품 삯이에요. 그러니까 300일 품삯입 니다.

 

우리가 1년에 300일을 일 못 합니다. 52일 쉬고 공휴일 쉬면 280일 좀 넘습니다. 그래서 1년 연 봉의 옥합을 깨뜨리자고 했습니다. 그 옥합 깨뜨린 결과로 이 아름다운 건물, 밀알학교를 주께서 주셨습니 다. 제가 당시에 로스엔젤리스에 갔 었는데 어떤 장애인 가정에서 저를 초청해서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남 서울교회가 장애인들을 위해서 학교 를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가 얼마나 소망하며 기뻐했는지 모 릅니다."

 

장애 가진 자식 때문에 미 국으로 이주해오신 분이에요. 그러 니까 우리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 금은 미국 정부에서 자기들을 잘 섬 겨준대요. 그런데 한국에서 한 교회 가 장애인 학교를 짓는다는 소식이 미국에 있는 장애인 가정에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깨뜨려진 옥합은 향기가 진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이런 옥합이 있을 수 있습 니다. 소천하신 우리 교회 공석남 장로님, 증권사 사장으로 계시다가 1년을 떼어내서 일본에 가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시다 돌아오셨습니다.

 

정운길 장로님은 고등학교 영어교사 하다가 명예퇴직을 하시고는 오클라 호마 주립대학에 가서 외국 사람으 로서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영어를 가르쳐야하는가 하는 대학원 코스를 마치시고 또 성경공부 해야겠다고 달라스 신학교에 가서 성경을 잘 공 부할 수 있는 기초적인 학문을 했습 니다.

 

그리고 지금은 태국 방콕에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다. 유제영 장로님은 지난 해 1년간 일 본 사역을 잘 마치시고 올해 우리와 함께 예배를 같이 드립니다. 주 앞 에 드려진 옥합이라고 저는 믿습니 다.

 

윤영곤 집사님은 연해주에서 우 리 동포들과 러시아 사람들을 섬기 기 위해서 병원을 정리하고 선교훈 련도 마치셨습니다. 바보들입니다. 생애 소중한 부분을 허비해버린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 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 러운 교회가 될 것인가는 중심으로 주님 앞에 옥합을 깨뜨린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로 결정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준비하는 분도 봤습니다. 은퇴하면 선교사로 갈 거래요. 어떻게 갈 겁니까?

 

그러 니까 자기가 다른 돈은 벌어놓은 것 은 없지만 집 한 채는 있으니까 그 전세금 받아서 은행에 넣어 이자 나 오면 선교비 염려할 것도 없고 저개 발국가로 가려고 하는데 일반회사 생활하면서 배웠던 개발도상의 과정 을 도와주며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 하겠다고 합니다

 

만약 모든 그리스 도인들이 그렇게만 결정하면 우리 나라에서 10만 명의 선교사도 보낼 것 같아요. 우리에게 전체를 주신 주께서 전체를 받으시길 기뻐하십니 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마 리아의 귀한 헌신이 우리의 생애의 푯대가 되어서 주님 마음에 지워질 수 없는 주님과 나만의 아름다운 러 브스토리를 만들어 나가야 되겠습니 다. 이것 하나는 가지고 주님 앞에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사건만 생각하면 신이 나고 그 사건 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으시고 그 사 건만 생각하면 흐뭇해하시는 이런 헌신 말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그 영광스러움으로 채워지는 복된 한 평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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