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81) -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실 때 /요12:20-26/ 김형익 목사
2021-05-08 11:18:18
1.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아오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다음 날,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19절과 20절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일이 아마 성전의 바깥 뜰 소위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일이었을텐데, 보통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불리던 이방인들은 여기서 그 일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간주되어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개종자는 아니고 유대교를 따르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여기 성전 바깥 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같은 절기에는 적지 않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헬라인들이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디아스포라로서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 몇 사람의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사 56:7)”고 하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요한복음만이 이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온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마 이것은 빌립이 안드레와 함께 헬라식 이름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빌립의 고향이 갈릴리 벳세다라고 자세히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갈릴리에서 가까운 북쪽에 거하는 헬라인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빌립은 이들의 요구에 일단은 주저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직접 예수님께 이들을 데려가는 대신, 안드레를 불러 말을 했습니다. 아마 빌립의 주저함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셨던 말씀 때문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전도하러 내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이방인 전도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질 선교에 속한 것이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안드레와 의논한 후 두 제자는 이 헬라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 보다는 먼저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 안 만났다 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쑥 들어가고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은 주님이 그들을 만나셨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의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2.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메시야 사명의 절정을 보여주는 표증
예수님께서 이미 때에 관한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전부 다 다가올 어느 때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주님은 현재적 시제로 그 때가 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아온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방문이 메시야 사명의 절정을 보여주는 표증이라고 이해를 하셨습니다. 이 헬라인 몇 사람의 방문으로 메시야의 사명을 성취하실 때가 왔다는 싸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교차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 당국자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는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방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지금 그 일이 이렇게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등장하는 헬라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의 첫 열매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메시야의 사명,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얻으실 풍성한 열매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또한 11:52에서 말씀한 것을 보여줍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에 대한 성령님의 해설입니다.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성령님께서는 요한을 통해서 가야바의 말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말을 적게 하시고 이어 그 말이 어떻게 실제로 성취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앞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이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었듯이 이 헬라인들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영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저는 몇 번에 걸쳐서 이 영광의 때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때, 예수님께서 들리시는 때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 영광이 무엇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헬라인들까지 예수님을 찾게 되니까 그것을 영광이라고 하시는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분명해집니다. 24절입니다. 여기에는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는 강조 문구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죽음이었습니다. 밀알의 죽음이 풍성한 수확을 위한 생명의 발아가 되듯이 결국 주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죽으셔야만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으시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확실하게 결실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늘에서 나는 소리로써 입증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A. 고난이 영광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고난 속에 영광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은 고난이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이라는 고난 속에 영광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광은 고통, 고난 그리고 죽음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의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는 화가 바뀌어 복이 된다는 뜻의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아닙니다. 고난이 단지 부활과 승천이라는 영광의 문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고난과 죽으심 자체가 그 안에 영광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 자체가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의미입니다.
B. 그리스도의 영화는 자기 영광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행하시는 순종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고난과 죽으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무한한 낮아지심과 수치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는가?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행하시는 것이 곧 아들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아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너무나 철저하고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어서 예수님께서 무한히 낮아지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고난 속에 죽으시는 것 조차도 그 일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행하는 것이기에 영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광의 개념에서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철저하게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온전하게 순종하시는 아들의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4. 적용: 그리스도인이 영광을 받을 때
주님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밀알의 죽음으로 당신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고 나서, 주님을 믿는 자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어떤 점에서 주님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을 저는 ‘그리스도인이 영광을 받을 때’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25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 우리 말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 사용된 생명이라는 단어는 다 같은 단어입니다마는, 헬라어 성경에는 이 구절 안에 두 가지의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A. 두 개의 생명: 프쉬케(psyche)와 조에
하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목숨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이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특별하게 강조되는 영생을 의미하는 ‘조에’입니다. 프쉬케는 영어로도 익숙한 단어입니다.
정신과를 의미하는 psychiatry 나 심리학을 의미하는 psychology가 다 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정신이나 마음이나 영혼, 자아, 이고(Ego), 독립적 의지를 의미하지만, 특히 인간이 육과 영혼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원론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넓게 인간의 목숨, 육신적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되곤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미워한다, 생명을 잃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가 프쉬케입니다. 그리고 ‘조에’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했을 때 영생에서 쓰인 단어입니다. 이 조에는 언제나 영생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이 생명(조에)은 영원하고 신적인 생명입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B.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자아숭배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하는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는 말은 금욕을 하라는 말입니까? 여기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자아 숭배를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 보다 더 큰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 삶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모든 삶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얻으려고 해도 결국은 잃고 맙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원어에서 드러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도, 그것을 잃는다고 한 것도 둘 다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이 말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자기 생명을 파괴하고 잃어버리고 있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는 열심히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C.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 자기 삶을 부차적 가치로 여기는 신앙
반면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도리어 그 생명(프쉬케)을 영생(조에)에 이르도록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미워한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법입니다. 실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반의어가 비교급으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미워한다는 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 보다 나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위해서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온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고난과 죽으심의 길을 걸어가시는 아들의 영광에서 주님은 그것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자기 삶을, 자기 영광을 부차적인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그랬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살아가는 최고의 가치이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제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가 잃어버린다고 하셨을 때 둘 다 현재시제가 사용되었다면, 여기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고 한 것은 현재 시제,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한 것은 미래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무 것도 없지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훨씬 더 큰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D.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다.
이런 삶의 전형은 선교사의 삶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함이 없이는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고향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는 가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신자에게 선교사적 삶을 살아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업적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적 삶을 살아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주님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가능합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요. 나는 아직 주님을 섬기지는 않지만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대답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을 섬기는 자이고 주님을 섬기는 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을 섬기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지만 믿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이렇게 질문하고 계십니까?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냐고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요?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러분의 주위에 그리고 여러분이 느끼시기에 우리 교회 안에 많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거짓 평안에 속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찰이 맞다면 그만큼 그리스도인, 참으로 거듭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다는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여러분 자신도 역시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존재론적인 능력을 얻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장사지낸 바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밀알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열매,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존 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받기 원하는 자는 세상 사랑을, 세상의 부와 명예와 향락과 보상과 함께 포기함으로써 현세와 내세에서 더 좋은 수확을 거두리라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매장시켜야 한다.
지금 목숨이 너무나 중요해서 그의 영혼을 위해 아무 것도,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자기 영혼에 방해가 된다면 이생에서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내버릴 각오가 있고 육체를 그의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각오가 있는 사람은 마침내 자기가 잃어버린 자가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E. 그리스도인의 의향: 영생(조에)을 위해서 생명(프쉬케)을 포기할 수 있는가?
저는 주님의 이 말씀에 기초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의 목숨을 포기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주님을 섬기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런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질 의향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을 의향이 있습니까?” 정직하게 이 질문들을 대면해보십시오. 이 모든 질문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십니까?”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이 주시는 새로운 의향, 곧 마음의 방향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영생을 위해서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예수 안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으심과 같은 대속의 의미로서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도 역시 영생을 위해서 생명을 포기하는 삶을 삶으로써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사항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위하여 주실 보상과 약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5.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위한 보상과 약속
26절이 그 내용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A. “나는 나를 따르는 자와 함께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위한 첫번째 보상과 약속은 그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그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자리요, 이미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 자리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있는 영예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는 자,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 땅의 목숨을 미워하는 자에게 주어진 보상입니다.
B.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신다.”
두번째로 주님은 그들에게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본질상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낮아지심과 수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의 길을 가셨을 때, 아버지께서 주님을 귀하게 여기신 영광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셨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께 존귀하게 여김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영광입니다. 영생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는 삶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십자가의 사건을 가리키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을 받을 때도 그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때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시고 그 영광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82) - 아버지의 영광보다 더 큰 목적은 없다. /요12:27-33/ 김형익 목사
2021-05-08 11:21:38
본문은 이미 나사로 사건에서 시작해서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주제 속을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시간을 향해서 돌아가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 요한복음은 주님의 죽으심의 사건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은 그 시각을 알리는 하나의 싸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될 죽음을 죽으실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이어지는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당황스러운 모습을 주님으로부터 보게 됩니다.
1. 아들의 고뇌(27)
주님은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병에서 고쳐주셨고, 귀신을 명하여 쫓아내셨으며, 바다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위엄과 권세가 있어서 어떤 성경 학자, 서기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괴로움과 두려움으로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주님은 잡히시기 직전에 세 번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마 26:36~46; 막 14:32~42; 눅 22:39~46).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요한복음에서는 오늘 읽은 본문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토로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표현을 빌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막 14:34).
우리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신 이 내용의 무게를 아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알겠습니까? 이것은 심장이 떨리고 뼛속 아니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스럽게 할만한 심적 고통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이런 심적 고통을 겪으신 것을 볼 때, 죄로 말미암지 않은 유일한 고뇌를 우리는 봅니다. 하지만 이 고뇌는 인간의 죄와 연관된 고뇌였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두려움의 정체는 정말 무엇입니까?
A.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이 고뇌로 인하여 넘어지곤 합니다. 죽음 앞에서 가지는 이 두려움은 보통 현인들이나 순교자들만도 못하다고 말합니다. 멋진 죽음으로 잘 알려진 죽음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죽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무신론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영혼 불멸을 가르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영혼을 몸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르친대로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적 고통과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은 순교자들 조차도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전에 제가 인용했던 마틴 루터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보다 더 죽음을 두려워했던 이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B. 아들의 고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다.
주님은 보통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야말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분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말한대로 영혼이 자유을 얻는 몸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끊어지는 영적 죽음을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 순간도 아버지와 완전한 사랑의 관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성자께서 아버지의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는 것을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느 순교자도 이런 영적 죽음의 무서움을 알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도리어 스데반처럼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자신을 영접해주시는 것을 보았기에 비록 돌에 맞아 죽는 고통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에 사로잡혀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가능한 기쁨의 죽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결코 순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모든 시대에 일어난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저주를 받아 지옥에 들어가는 고통을 겪는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기를 원하셨고 실로 이 죽음을 생각만 함으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2. 아들의 소원(28a)
A. 사명에 대한 인식(27b,31~32)
주님은 아버지께 이 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하시자 마자 당신 자신이 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주님은 이 죽음의 시간에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가장 절대적이고 변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당신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주님은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원수인 뱀의 머리를 깨뜨리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은 죽음을 멸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주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8). 두번째 사명은 주님이 땅에서 들리시면 모든 사람을 주님께 이끄시리라는 것입니다(32). 여기 모든 사람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종,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B. 궁극적인 목적 인식(28b)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기 주님의 기도를 계속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 짧은 기도 안에서 주님의 마음에 담겨진 모든 갈망이 표출됩니다.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과 이유, 주님께서 이 죽음의 시간까지 행하셨던 모든 표적과 기사들의 목적과 이유,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죽어야 할 목적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지상생애를 이해하는 축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마땅히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궁극적인 목적, 즉 아버지의 영광 보다 더 큰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셨고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만,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시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이 생각, 이 목적 의식입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 보다 더 궁극적인, 더 큰 목적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과 표적 행하심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 보다 더 큰 목적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생애 전체가 철저하게 이 소원에 사로잡혀 있으셨습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으로 하여금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게 한 것입니다.
3. 아버지의 증거(28b)
주님이 아버지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길 구했을 바로 그때 극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자 마자 일어난 일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아버지의 음성이었습니다.
A.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표현(마 3:17; 17:5)
이 신비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은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그 완전한 사랑하심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과 맺으신 구속 언약을 이루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비천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비천함의 끝,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심판을 받으시기 위해서 십자가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그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오직 한 가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시는 지식 위에서 아셨던 것은 아버지의 이름은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견딜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이 하늘의 음성 속에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음성이 무슨 뜻입니까?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는 과거 시제이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미래 시제입니다. 과거 시제는 나사로 사건을 직접적으로 가리킬 수 있지만, 훨씬 넓게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 때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지만 지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성육신만도 아닙니다. 아드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 오시면서 행하셨던 모든 순종을 가리켜 말씀하심일 것입니다.
“나는 네 성육신에서, 네 기적에서, 네 말씀에서, 네 사역에서 내 이름을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미래 시제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히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네 자발적 고난에서, 네 죽음에서, 네 부활에서 그리고 네 승천에서 또 다시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세 번 아버지께서 하늘의 음성으로 아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압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 음성은 세례 요한만 들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번째는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입니다. 이 때에는 주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제자들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5).” 그리고 이제 세번째가 오늘 본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함께 있던 제자들과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들렸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듣기는 들었는데 그것이 어떤 음성이라는 것도 알겠는데, 무슨 말씀인지는 식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뢰가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 요한이 여기에 쓴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지상 사역 가운데 하늘에서 들렸던 성부 하나님의 음성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와 끊어지지 않는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순종하시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B. 너희를 위한 증거(30)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하늘의 음성을 가리켜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리는 들었지만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설령 그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 민감함이 있었다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별을 얻을 수 있는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주님은 하늘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말씀이 꼭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습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은 주님 앞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님 자신을 확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나중에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제가 오래 전에 짐 엘리엇에 대해서 읽었던 한 인터넷 기사가 생각납니다. 제가 좀 더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려고 했는데, 아직 어떤 저자의 책임있는 저서로 확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실성에 있어서는 약간 조심스럽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창에 찔려서 죽은 그 때에, 현장에서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죽였던 아우카 인디언들이 하늘에서 강하고 광채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답니다. 물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들은 몰랐습니다.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을 우뢰 소리로 들었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주님을 믿게 된 아우카 인디언들에게는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향한 분명한 하나님의 증거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여기 너희의 창에 찔려 죽어있는 이들을 통하여 내가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고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결국 아우카 족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또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4. 우리의 고뇌와 소원
무엇이 우리의 고뇌입니까? 주님께서 받으신 고뇌를 볼 때, 저는 저 자신에게 고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거북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이 괴로와 죽게 되었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어떤 일 속에서도 “괴로와 죽겠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죄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철저하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행하신 순종을 생각할 때, 저는 어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의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지 않은지를 압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괴로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아픔과 고통, 고난과 수치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내 지혜와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를 직면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 성자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기도는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주님의 제자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저는 저의 생의 의미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이 보다 더 큰 목적과 의미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동떨어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 제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기도를 생각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주신 게 아닙니다. 형식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그리고 네 삶 전체를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너의 인생의 최고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압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조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의미요, 목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드님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셨던 분이시고 그 주님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소원에 사로잡혀서 이 땅에 오셨고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하게 아신 분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사셨고 죽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제게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크고 높은 목적은 제게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서 주님께 나아왔던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하십니까? 여러분도 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으십니까?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삽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목적입니다. 내게는 이보다 큰 목적은 없습니다. 내가 어떤 고통과 수치를 당할지라도, 나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기만을 구합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의미이고 목적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을 지치게 하고 힘겹게 하는 모든 고통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강해 (83) - 고난받으시는 인자 /요12:34/ 김형익 목사
2021-05-08 15:14:23
1. 오해
A. 질문: 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고생하고 사는가?
B. 욕구: 잘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입니다마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데 이렇게 고생하고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본때 있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나 생각들은 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들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오해들 속에서 혼란스러움을 면치 못한 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에 이르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큰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성장이 일어날까 생각을 합니다. 교정이 없이 성장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 그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이 모든 오해의 근원이자, 출처입니다.
2.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오해: “인자가 왜 죽는다고 하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 하나를 드러내줍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그들은 완전히 무식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율법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때때로 그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뭔가는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거의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무용하게 만들 만큼 치명적인 무지였습니다. 제가 치명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이 무지 때문에 그들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A. 그들이 알았던 것: 구약의 예언들(삼하 7:12~13; 사 9:7; 단 7:14).
먼저 그들이 알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들입니다. 그 중 몇 개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먼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예언된 말씀을 알았을 것입니다.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13).” 이것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일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할 자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두번째는 이사야 9:6~7입니다.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분이고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분임을 알았습니다.
세번째로 살펴볼 구약 예언은 다니엘 7:14입니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오늘 우리가 상고할 주제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메시아의 권세가 영원하고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나라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바른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몰랐던 것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B. 그들이 몰랐던 것: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 42:1~7; 49:1~6; 50:4~9; 52:13~53:12)
그들이 몰랐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모든 유대인들이 해석하기를 꺼려하는 본문이 이사야서에 있는 네 문단의 본문들입니다. 그 본문들의 일관된 메시아 예언 때문에 이 본문들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는 일련의 제목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 이 구절이 문제입니까? 분명히 메시아에 대한 말씀인 것 같은데, 그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이기에 이 본문들은 많은 유대인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이 구절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니라, 가장 은혜스러운 약속들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들이 가진 고정 관념은 ‘메시아는 고난받을 수 없다’였고 이것이 그들의 성경 보다 위에 있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유대인들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12:23에서 “인자의 영광 받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고 밀알의 죽음으로 당신의 죽으심을 예고하셨습니다. 본문 12장 전체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으로 시작해서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유대인들은 인자가 들린다는 주님 자신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왜 당신은 스스로 메시아인 것처럼 말하면서 죽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3. 인자는 누구인가?
오늘 우리는 약간의 신학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매우 자주 당신 자신을 1인칭으로 말씀하실 때, ‘나’라고 하시는 대신 ‘인자’라고 하는 말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고, 왜 주님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인자’라는 말을 쓰신 것일까요?
A. 셈어(Semitic languages)의 관용적 표현: a man
제일 먼저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언어학적 이해입니다. 구약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나 주님께서 당시 사용하셨던 아람어 그리고 아랍어와 같은 언어를 셈어라고 부릅니다. 이 셈어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무슨 아들이다 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사람의 특징이나 속해있는 그룹이나 계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령, 바나바의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란 말인데, 이 말은 아버지가 위로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위로를 너무나 잘 하는 사람이라는 그 사람의 특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가 아들이란 말입니다. 때론 ‘벤’이라는 말로 아들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베냐민이란 이름이 대표적입니다. ‘내 오른 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아들을 뜻하는 ‘인자’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나는 한 개별적인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설명하실 때 이렇게 사람이라고 말씀하심은 일단은 주님의 겸손함이며, 주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뻐하신다는 것을 엿보게 하는 부분입니다.
B. 다니엘서의 인자(단 7:13~14): the Man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 다니엘서의 예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다니엘 7:13~14을 다시 보겠습니다.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이 말씀의 뜻을 알려면 이 구절이 나오는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다니엘이 본 이상입니다.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는데, 이는 각각 세상을 통치하는 제국들을 의미합니다.
첫째의 모습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인데 이는 당대의 바벨론 제국입니다. 둘째는 곰인데, 이는 바벨론을 이어 일어난 메대와 바사제국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이지요. 셋째는 표범과 같은 짐승인데, 날개가 넷이나 달렸습니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렸던 헬라 제국입니다. 마지막 짐승은 너무 무서운 형상인데 뭐라고 집어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고, 큰 쇠이빨이 있었고 먹고 부숴뜨리고 발로 밟는 그 힘이 앞선 짐승들과는 달랐습니다. 당할 자가 없는 엄청난 힘을 가졌던 로마제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이 보게 된 환상이 바로 조금 전 읽은 부분입니다. 이런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정권을 가진 한 분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 곧 ‘옛적부터 계신 자’로부터 폐하지 않을 영원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분이 ‘인자 같은 이’로 묘사되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고 유대인들도 그렇게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 인자 같은 이가 앞선 모든 짐승들로 대표되는 제국들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이분이 구름타고 오시는 모습이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다니엘 이후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특히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신구약 중간기 약 400년 동안에는 이 ‘인자’라는 용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서에서 사용된 인자는 그냥 어떤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그 분’을 가리키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말세에 하나님의 구원을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실 그 분, 영원하신 사람이신 것입니다.
4. 주님께서 인자 용어를 사용하신 이유
일단은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나면 우리는 이제 왜 주님께서 하고 많은 메시아 칭호들을 다 두시고 왜 굳이 이 표현을 가장 많이 쓰셨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오해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A.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먼저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란 말은 이 뜻입니다. 메시아라는 직접적인 칭호는 거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계열의 왕으로 오시는 정치적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는 용어를 쓰실 때 사람들이 어떤 기대를 하게 될지를 아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오해를 피하시려고 일부러 메시아라는 말은 사용을 자제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주님께서 당신은 메시아라고 인정하신 것을 기억하는데 이는 유대인과의 대화가 아니었습니다(요 4:25~26). 주님은 병을 고치시고도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준 것을 아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오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를 받으시는 것을 피하시려고 다소 모호한 개념인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B. 오해를 주시기 위하여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인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혼동을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오해를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라는 용어와는 달리, 인자라는 용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메시아 칭호였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저 ‘한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구름타고 심판을 행하러 오시는 메시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인자가 메시아라는 말이라고 이해는 했어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할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인자의 의미
그러나 이렇게 인자라는 용어가 그렇게 모호한 단어이고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당신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인자라는 모호한 메시아 칭호를 사용하시면서, 그 인자의 정체성, 사명을 직접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몇 가지 살펴보지요.
A.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3:13; 6:62), “태초부터 계신 이”
첫째로 주님께서 인자라고 하실 때 그 의미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란 의미요, 이것은 나아가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3:13을 찾아보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인자라는 말씀을 유대인의 선생인 니고데모에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명확한 말씀이고, 다니엘서를 익히 알았을 니고데모에게 ‘나는 메시아다’라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인자는 인간이셨지만, 하나님이신 분이셨습니다.
B. “고난과 수치, 죽음을 당하시는 분”(3:14~15; 8:28).
그런데 동시에 주님은 ‘고난과 수치, 죽음을 당하시는 분’으로 인자의 의미를 확장하십니다. 니고데모에게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임을 말씀하시자 마자, 주님은 광야에서 모세가 불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요 3:14~15).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태초부터 계신 분께서 불뱀이 장대에 높이 달렸듯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인자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이 연결됩니다. 즉, 주님께서 오신 사명과 관련하여 인자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영광이라는 단어의 뜻이 밝혀집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인자께서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 속에 고난과 죽음은 인자의 영광이 되고 그것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사건이기에 성부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는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고(요 12:23), 나중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다락방에서 나가자 주님께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하신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요 13:31).
C.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6:27, 53~54).
주님은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후에,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6:27).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3~54).” 인자는 여기서 믿는 모든 자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D. “최후의 심판자”(5:26~27; 계 14:14).
또 하나 주님이 인자라고 하실 때 의미하고자 하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자이신 인자입니다. 요한복음 5:26~27을 봅니다.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인자는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십니다.
E. “교회를 통치하시는 분”(계 1:12~14)
그러나 인자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소개됩니다.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계 1:12~14).” 여기서 인자는 누구십니까? 인자는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교회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통치자는 누구인가? 인자이십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자라고 하시면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그 말들은 전혀 모호한 말씀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명확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없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시지만, 그러나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유대인들은 다 알겠는데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만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걸렸던 부분도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메시아는 로마로부터 해방을 줄 수 있어도 죄와 그 권세로부터 자유를 줄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모세가 노예생활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와 그 권세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처럼 단지 로마로부터 자기 백성을 건지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해방되어도 그들은 결코 죄의 권세에서 자유할 수 없는 죄의 종들이었고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로마가 아니라,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난과 수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의 속죄를 완전하게 이루시기에, 그로써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6. 두 세상을 알라!(이 세상 this age, 오는 세상 the age to come, 16:33)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고자 하는 것은 결코 이것만은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우리에게 두 세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세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장소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 성경이 쓰고 있는 방법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각 영어로는 this age(이 세상)와 the age to come(오는 세상)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세상은 이 시대를 말하고, 오는 세상은 오는 시대를 말합니다. 우리는 두 세상, 두 시대를 경험하며 삽니다. 오는 시대는 죽은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는 시대는 이미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임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완전한게 임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 이 시대에 살지만,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임한 오는 세상, 오는 시대를 맛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상한 종류의 갈등이 있습니다. 오는 시대, 오는 세상이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완전하게 임할 때 성도가 누리게 될 영광은 너무나 분명하게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지금 두 발로 서서 사는 이 세상, 이 시대에는 조금 틀립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너무나 놀랍게도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는 인자로서 살아갑니다. 성도의 영원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드러나는 모습은 정말 인자, 평범한 사람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간의 정체성의 혼란스러움이 있지만, 그것이 모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도는 너무나 분명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진정한 정체성과 신분은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는 세상, 오는 시대에 완전하게 온 세상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여기에 성도의 고통이 있습니다. 정말 많이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땅에는 있습니다. 도무지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에 성도가 받을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성도가 얻은 영원한 신분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7.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 주변의 무리들이 곤란을 느낀 것도 사실 동일합니다. 왜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하고 남들 처럼 똑같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물은 것입니다. 메시아는 멋있어야 하고 죽지 않아야 하고, 로마를 물리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어느 정도 바르게 알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머리로는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온 인격으로 그 십자가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주님께 우리의 눈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마 16:13~20). 처음에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번째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유명한 고백을 했고 주님은 이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부르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바로 그 사람, 그리스도요, 사람의 아들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주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인자는 누구십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은 묻습니다. “이 인자가 누구냐?” 여러분에게 이 인자는 누구입니까?
이 대답이 여러분의 영원을 결정하는 대답입니다. “인자는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그러나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고난과 수치와 죽으심을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여 내신 구원자시고, 또한 지금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시며, 장차 오사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분이십니다. “인자는 저의 왕이십니다. 인자는 저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인자는 저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산 자요, 예수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여러분 가슴에서 흘러나올 수 없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에 계신 것입니다. 인자를 만나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만나시려고 당신을 낮추시되 지극히 낮추셔서 인자,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위해서 이해할 수 없게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여기에 모든 죄인의 살 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 (84) - 빛이 있을 때 빛을 믿어라 /요12:35-36/ 김형익 목사
2021-05-08 15:17:5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두 구절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 대중을 향하여 행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 후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떠나 숨으셨고(36), 이후 13장부터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제자들과 보내신 마지막 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중들을 상대로 하신 마지막 말씀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빛에 대한 말씀입니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주제는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지배하고 있는 주제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아주 놀라운 일관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바로 이 빛과 어두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이것은 대중을 향하신 주님의 마지막 복음의 명령이었습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빛이 있을 때, 빛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 없는 세상/사람: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35).”
주님께서는 “인자가 누구냐?”는 무리들의 질문에 즉답을 피하고 계십니다. 조금 둘러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굳이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인자는 바로 빛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단지 하나의 설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주님의 판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세상, 왕이 오셨지만 그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은 어두움이며, 사람들은 ‘어두움에 다니는 자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나고 똑똑하고 성공했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계시다고 해도, 만일 주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어두움에 다니는 자요, 그래서 그 가는 바, 종착지를 알지 못하고 가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A. 세상의 교만: 우리의 ‘빛’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세상의 교만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성은, “우리는 우리의 빛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 빛은 그들이 가진 능력, 지혜, 지식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창조적 능력을 믿습니다.
그들은 자신만만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해내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실로 인간이 지금까지 역사에서 이루어놓은 성취는 정말 놀라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성취에 감탄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이미 인간이 신입니다.
B. 세상의 딜레마: 종착지를 모르고 자기 횃불을 피우는 자들(사 50:10~11)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세상,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결국 이런 성취들을 통해서 도달하게 될 종착지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 앞을 대강 예견합니다.
일년 후의 삶이 이런 인간의 과학적 성취들을 통하여 어떻게 진보할 것인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뒤에 오는 종착지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을 향한 주님의 일갈이고,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인간은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주님이 오시기 700 여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내다 보았습니다.
이사야 50:10~11입니다. “(10)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11)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
바로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어떻게 불을 밝혀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횃불로는 자기가 가는 종착지를 볼 수 없습니다. 종착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딜레마였습니다.
19세기 과학기술이 진보하고 있을 때, 서양 세계는 인류의 진보를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세계 제 1, 2차 대전의 야수적 황폐함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가지고도 인간은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더 똑똑해진 인간은 여전히 자연 재해와 지구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수년간 일어나는 지구 상의 무서운 자연 재해들은 실로 과거에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차원의 재해들이 많았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르는 자신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더 감당할 수 없는 재해들을 주십니다. 원자력 발전을 이루어낸 인간의 기술의 진보도 대단하지만 그들은 한 번의 쓰나미 지진에 의해서 파괴되고 흘러나오는 새로운 시대의 재앙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딜레마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이래로 사실상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고, 도덕적으로 더 향상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어난 런던에서의 폭동을 보십시오. 아주 가난한 나라, 치안이 부재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영국의 런던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 폭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배웠다는 것, 교양을 갖추었다는 것이 조금도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열심히 교육하고,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일해서 뭔가를 만들어내지만, 문제는 그들이 결국 어디로 가게 되는지 그 종착지를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본 그 종착지에 대한 교훈은 대개가 원자폭탄 투하였고, 방사능 누출로 인한 예상할 수도 없는 심각한 결과들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개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종착지를 알고 가십니까? 그 종착지에 대한 지식과 확신이 있습니까? 그것은 정말 보장된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희망사항일 뿐입니까? 개인에게나 세상에게나 이것은 동일합니다. 열심히 살지만, 결국은 죽습니다.
그것도 다양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점점 그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얻지 못한 정직한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인생의 출구를 선택하지만, 그 조차도 정작 그들이 원한 출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죽은 다음에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가 가는 종착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세상의 비극이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2. 좋은 소식: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35).”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좀 더 많은 물질입니까? 좀 더 성공하고 명예를 얻는 것입니까? 좀 더 연구해서 학위를 얻고 인간의 지식과 과학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국 주님이 말씀하신 인간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해 아래서 행하는 이런 모든 노력이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고 절망적 선언만을 하시고 떠나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인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십니다. 그것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어두움 가운데서 돌아다니니까, 어디가 낭떠러지인지도 모르고 자기 횃불만 밝히고서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마는 것인데, 주님은 그 낭떠러지를 아니 온데를 밝혀줄 수 있는 빛이 아직 너희 중에 있다고 하십니다. 결국 어두움 속에서 길을 모르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빛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A. 명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1:4~5, 7~9; 8:12).
그런데 ‘빛이 있다’고 하실 때 그 빛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여기 본문에 빛이란 단어가 5번 사용되었는데, 헬라어 성경에 보면 그 중 네 개에는 정관사가 있고 하나만 정관사가 빠져있습니다.
정관사가 없는 빛은 36절에 ‘빛의 아들이 되리라’에서입니다. 나머지 정관사를 사용하는 빛은 다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명제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빛이고,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물질도, 빚의 탕감도, 깨어진 관계의 회복도, 성공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빛이라고 하실 때, 이것이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사용한 개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에 요한복음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까?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4~5).”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그는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1:7~8).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주님을 소개합니다(1:9).
주님은 또 초막절에 성전 앞뜰을 밝혀주던 빛에 견주어 당신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8:12).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8:12). 요한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할 때 얼마나 빛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움에 행하는 자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다니는 비참한 인간들을 위하여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B. 주의: 기회는 잠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기회는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곧 십자가에 죽으실 것에 대한 암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대면하고 있는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 빛이 지금 당장에는 그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그들에게 기회입니다. 이 지금은 지나가는 기회입니다. 사람들의 고집과 미련함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내가 원하면,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빛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빛은 “잠시 동안” 너희 중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여러분이 가는 바, 종착지를 알지 못하고 가고 계신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여러분의 종착지를 보게 하는 빛입니다. 지금이 그 기회입니다. 언제라도 내가 원할 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 주일이 여러분에게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오늘이라는 시간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만 우리는 알 뿐입니다.
C. 경고: 어두움에 붙잡히지 말라.
더욱 무서운 것은 주님의 경고입니다. 만일 지금 빛 가운데로 오지 않는다면 결국 여러분은 어두움에 붙잡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빛 가운데로 와서 행하여서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이,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어두움이 너희를 붙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이 잠시 동안은 있지만, 그 빛이 곧 십자가에 달려서 잠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올 것이고, 그 어두움이 이들을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붙잡는다’는 말은 ‘지배한다’,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어두움의 소유, 어두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반면에 빛이 사라지면 어두움이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합니다. 이 자연적 이치로, 주님은 당신 자신의 빛되심을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되면 도리어 어두움의 권세, 마귀의 권세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지금 빛이 비추일 때, 빛이 그들 중에 계실 때, 그 빛을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경고가 함께 주어집니다. 그들이 만일 지금 바로 이 시간에 빛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의 상태는 더욱 나빠질 것이고 더욱 어두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결코 빛을 믿으라는 것은 한가하고 여유로운 초청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창조주와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3. 복음의 명령: “빛 가운데 행하고(35) 빛을 믿어라(36).”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초청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신사적인 초청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이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면밀히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을 단지 초청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고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명령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입니다.
초청이란 단어가 가지는 여유로움 때문에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청이라고 할 때, “혹시 시간이 되시면 와 주시겠습니까?” 혹은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저희에게 한 없는 영광이 되겠습니다”하는 식을 생각합니다. 이런 초청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하는 것이 초청을 받는 사람의 편에서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여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명령에 자율적이고 신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왕의 혼인잔치 비유에서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일에 바빠서 이 초청에 반응할 여유가 없습니다(마 22:1~14; 눅 14:16~24). 나는 밭을 사서 나가보아야 하고,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하고, 나는 장가들어서 못 가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결국 자기들의 일에 분주했고 왕의 잔치를 거절한 자들은 영원히 그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복음이 초청이라기 보다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초청하고 계신게 아니라,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이 달려있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빛이 있을 동안에, 빛 가운데 행하라(살라)는 것이고, 빛을 믿으라는 명령입니다.
A. 자기 횃불을 내려놓아라.
이 명령은 이사야의 말씀을 볼 때, 자기 횃불을 먼저 내려놓으라는 명령입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지식, 여러분의 노련한 경험과 재능을 믿고 있는 한, 그것들이 여러분의 판단 가치가 되는 한, 여러분은 결코 빛 가운데로 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소경이며, 빛이 왔으되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하셨던 말씀처럼, “(여러분이) 본다고 하니 (여러분의) 죄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요 9:41). 주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 자기 횃불 따위를 내려놓고 “나는 내 가는 길, 나의 종착지를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소경들을 보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경험, 지식이라는 자기 횃불을 높이 쳐들고 “나는 밝히 본다”고 말하는 자들을 소경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요 9:39). 영원은 커녕, 여러분은 “저는 저 자신의 갈 바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빛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 자신이 똑똑하고 지혜롭고 웬만큼 괜찮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소경이며,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며, 자기가 갈 바, 종착지를 알지 못하고 걸어가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B. 빛이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의지하라.
자기 횃불을 내려놓으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횃불을 든 채, 빛으로 나아오는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온 자는 자기 횃불 따위가 얼마나 무익한 배설물과 같은 것인지를 발견합니다. 그는 횃불을 집어 던진 채, 빛이신 그리스도께 더욱 나아갑니다.
빛을 본 자는 그 빛 가운데로 더욱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의 회심에 대한 매우 놀라운 설명을 사도행전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 주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눈을 뜬 자는 빛을 보기 때문에,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업?천국에서 신자가 영원토록 누리게 될 축복?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빛을 믿으라고 빛 가운데 행하라고 명령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몫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빛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시고 그분을 믿으실 수 있습니다.
4. 사람은 자기 횃불 때문에 망한다.
그러나 치명적으로 방해가 되는 것을 다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바로, 자기 횃불입니다. 그 알량한 자기 횃불을 땅에 던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고, 그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 교만, 자기 지식, 자기 지혜, 자기 경험, 자기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들을 내어던지십시오. 그것들이야말로 소경된 자기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어 자기는 너무나 잘 보고 산다고 착각하게 만든 주범입니다. 자기 횃불을 가진 자의 특징은 계속해서 뭔가를 하고 있고 자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분주히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세 걸음 앞이 보이니까요.
하지만, 자기 횃불 따위를 집어던진 자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그는 빛 되신 주님께 나아올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는 빛이 없이는 한 발 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자기가 필요한 것이 빛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에게 이것은 너무나 절실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5. 복음의 약속: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
빛이 있을 동안에 빛 가운데 다니라고, 그리고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신 분은 주님입니다. 여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빛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빛의 아들’이란 표현은 인자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여기 빛에만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의 빛이 되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은 다 빛의 아들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의 빛이 될 것입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빛 가운데 나아가십시오.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지금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죄사함의 확신과 평안을 얻어 누리십시오. 빛 가운데 행하시고, 빛을 믿으십시오.
◀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12:20-33/ 옥한흠 목사
2015-05-09 17:16:00
제가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을 따 라서 수없이 불렀던 찬송가들 중에 지금도 부를 때마다 진한 감동에 빠 져들게 하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블랜디(Blandy)가 작곡한 .'예수 나 를 오라 하네.'라는 찬송입니다.
어 릴 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어 른들을 따라 불렀지만 나중에 철이 들어 그 가사에 담겨 있는 심각한 뜻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로는 비 장한 각오를 가지고 이 찬송을 불렀 던 기억이 납니다. 이 찬송의 가사 를 한번 보십시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 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
원래의 영어 가사를 보면 훨씬 더 실감나는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지 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주의 부르 심 들리네. 그가 인도하는 대로 어 디든 나는 가리라. 항상 그와 함께 가리라.."
2절 가사는 훨씬 더 비장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 지/ 주와 함께 가려네.."
가사의 의 미를 깊이 깨닫고 있지 못하는 사람 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부 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심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 찬 송가 가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 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려 고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을 앞에 놓고, 특히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
."호산나 이스라엘 왕이여!."라 며 환호하던 그 군중들을 앞에 놓고 비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 라!."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섬 기려고 하면 나를 따라 오라."는 것 입니다. 우리를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코 단순하다고 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말씀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쁘게 받지 못하고 부담 스러워 하는 믿음 약한 분들도 상당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일반적으로 현 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십 시오.."라는 말은 부담 없이 받습니 다.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쉽게 합 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까? 주님을 따라갈 각오가 되 어 있습니까?."라고 하면 매우 부담 스러워 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렇다 고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락방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일 들로 봉사하느라 교회를 제 집 드나 들듯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 님을 섬기며 따라야 한다는 말에는 마음을 활짝 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쉼을 얻기를 바라 면서도 예수님이 메라고 하시는 멍 에는 별로 메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가는 일에는 가능하면 뒷전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모순된 행 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 로 들어오실 때 무리가 뭐라고 소리 쳤습니까? 손을 들고
."호산나 이스 라엘의 왕이시여!."하며 환호하지 않 았습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 이라는 말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작 은 영토의 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라는 말이요, 전 우주를 다스리 는 영원하신 왕이라는 말인 것입니 다.
우리 중에 그들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예 수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 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왕 되신 예 수님을 따르고 섬겨야 하지 않겠습 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으로 믿 고 고백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분을 섬기고 따르기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 지는 몇몇 대선 주자들 주변에 대학 교수들과 세계 명문대 석박사 학위 를 가진 석학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 다고 합니다.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 은 정치 분야를 지원하고,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은 경제 분야를 지원하 고, 기타 자기 전공을 따라 적절한 영역을 맡아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들은 어떤 경우에는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며칠 밤을 새기도 합니 다. 월급이나 보수를 받고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 전히 무보수로 일합니다. 그러나 우 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인물이 대권 을 손에 쥘 날이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리게 될 영광이 곧 자신의 영광이 될 수 있다고 믿 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헌신하려는 사람들 이 이와 같이 줄지어 서는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왕이 되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그분을 섬기 고 따르기를 자원하지 않는다면 그 가 아무리 멋진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도 그의 믿음을 정상적인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안 통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연 이 세상의 대통령에게 우리 가 소망을 둘 수 있을까요? 그가 우 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는 새 대통령을 뽑아 놓고 반년이 채 가기도 전에 실망하며 불평불만 을 늘어놓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꿈과 미래를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 수님이 지극히 높은 보좌에 앉으셔 서 정의와 사랑과 자비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사망도 없고, 아 픔도, 눈물도 없는 그 나라만이 우 리의 꿈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렇 다면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따라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이미 몰락의 길로 달 려가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십 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 니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 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 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안 남은 줄 알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 다. 이 세상의 임금들은 사탄의 권 세 아래서 온갖 부정과 압제를 자행 하며 자기의 욕심을 채웁니다.
그러 나 그 역사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정권 치고 무 너지지 않는 정권은 하나도 없습니 다. 우리가 이런 세상 나라와 그 임 금을 위해 몸바칠 이유가 어디에 있 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32절을 보 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땅에 서 들린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주 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의미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실 것을 가리키고 있 습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재림하실 것입니 다. 그리고 모든 족속 중에서 구원 받은 백성들이 구름 떼와 같이 주님 앞으로 몰려 들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대망 하던 하나님 나라가 우 리 눈앞에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 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완전하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나라 임금을 위해서 섬 기고 따라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수년을 믿었음에 도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청산 유수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을 섬기 고 따르십시오..'라는 말을 부담스러 워 하는 분이 계신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권고하고 싶습니다.
."안 믿 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세상 끝 날까지 그런 믿음 가지고 살 생 각은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종이 되라
26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예수님 은 자기를 둘러싼 무리들에게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여기서 .'섬 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네오 .'로 .'집사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집 사는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다시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이 되 어 나를 섬기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면 나를 따르라!."
저는 .'나를 따르 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 다.
첫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 처럼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 세 상에 귀족이나 왕자처럼 고귀한 신 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으로서 누리던 그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2:6,7)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짓눌리는 우리를 구원하 시기 위해 친히 종의 모습으로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실 동안 하나님한테 죽도록 충성 하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는 이따 금 자신을 가리켜 .'종.'으로 표현하 시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7 절을 보십시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그는 이 세상에 서 시종일관 종의 삶을 사셨던 것입 니다. 스승 되신 주님이 우리를 구 원하시려고 한 평생을 종으로 사셨 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 역시 종으 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자라면 당연히 스승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으로서 하나님께 얼 마나 철저히 순종하셨는지는 본문 2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계 셨습니다. 인간 치고 죽음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아 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 을 입고 계셨기에 마찬가지였습니 다. 그는 자기 마음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 니 무슨 말을 하리요.."
말로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두렵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렇게 기도 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여, 나 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 를 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솔직한 심정이었습 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고백했습 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자기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으로서 죽기까지 순 종하신 예수님은 더 나아가 자기를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종이 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7절 이하에서 종의 일상을 비 유로 들며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 습니다.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머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머 슴.'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한창 바쁜 농번기가 되 면 머슴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하루 종일 들에서 일을 합니다. 해가 져 어두워지면 주인과 머슴이 다 집으 로 돌아옵니다.
주인은 집에 들어서 자마자 우물가로 가서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상 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머슴은 사정 이 다릅니다. 그가 하루 종일 들에 서 일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마루에 걸터앉아 마음놓고 쉬고 있을 수 없 습니다.
여자들은 당장 부엌으로 들 어가서 불을 때고 저녁을 지어야 하 고, 남자들은 농기구를 정리해서 헛 간에 들이고 장작을 패거나 물을 나 르는 등 기타 허드렛일을 해야 합니 다. 그러다 보면 앉아서 쉬기는커녕 얼굴 한번 제대로 씻을 틈도 없습니 다. 저녁밥이 다 준비되면 상을 차 려서 날라야 합니다. 곁에 대기하고 있다가 밥이나 반찬이나 물을 가져 오라는 주인의 잔심부름 시중도 들 어야 합니다.
머슴들은 주인 식구들 이 식사를 다 끝내고 편안히 쉴 때 에야 비로소 부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습니 다. 그렇다고 해서 여유 있게 노닥 거리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 닙니다. 먹고 나면 산더미 같은 설 거지 그릇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다 끝내야만 드디어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울 수 있습니 다. 이게 머슴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그에게 수고했 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머슴은 원래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 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의 입 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7장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 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라.."
종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무슨 사례나 칭찬을 바라지 않는 법입니 다. 주인이 매정하다고 섭섭해하지 도 않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섬기는 자가 바로 종입니다. 예수님 은 지금 우리 모두가 자기에게 이와 같은 종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지 고 섬길 것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 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세상에서 하 나님을 위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 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위해서 종으로 충성하셨을까 요? 요한복음 6장 38-39절에 그 대 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늘로 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 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 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 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 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충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 지의 뜻이란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 하사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구원하는 것이었 습니다. 마태복음18장14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 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어린 아이 하나라도 구 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는 것은 하 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 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까지도 빠짐 없이 구원하시고자 충성을 다했습니 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이 일 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는 오 늘 본문 23절에서도 분명히 나타납 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 렘에 온 헬라 사람들이 빌립을 통해 면회를 요청해 오자 주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 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 도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얼 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헬라 사 람 몇 사람이 자기를 만나고 싶어한 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주 님이 이렇게 흥분하셨던 것일까요? 장차 이루어질 일을 내다 보셨기 때 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 그때부터 모든 민족이 하 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시온의 대 로가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헬 라 사람들의 면회 요청은 단순한 사 건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헬라 인은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머지 않아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문 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을 예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이 성 취될 그 날이 가까웠음을 보시고
."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그 만 큼 소중히 여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서 우리 역시 주 님처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아직도 예수를 모른 채 죄 에 빠져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전심 전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서 영원히 저주받은 영혼을 구원하 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일보다 더 중 요한 일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아 래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업에 성공해 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 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보다도 더 앞세워야 할 소중한 일 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사가 되어 자 기의 젊음을 송두리째 불태우며 복 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만 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할 것입니 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 기에 선교사나 전도자들만큼 큰 존 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 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앞세 우는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기 때 문입니다.
우리가 가정에다 우선권을 두고 정성을 쏟으면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학문 에 생명을 걸고 노력하면 세계적으 로 명성을 날리는 학자가 될 수 있 습니다. 사업에 모든 정력과 시간을 쏟으면 기업가로서 기반을 든든히 닦아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일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입니다. 행복한 가정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 가 명성을 얻게 된 학문 그 자체로 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사업에서 이룬 성공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 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것이 되려면 하나님이 가장 중 요하게 여기시는 그 일과 연관되어 야 합니다. 우리가 왜 가정을 소중 히 여겨야 합니까? 이웃 사람들이 우리 가정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적 인 분위기를 가지고 자녀들을 잘 키 우려고 합니까? 이 자녀가 다음에 자라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온 누리에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 니다. 우리가 왜 사업을 하기 위해 밤낮 정신없이 뛰어다닙니까? 하나 님이 물질을 주시면 그 물질 가지고 복음 사업을 위해서 기쁘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불신자들 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우 리의 사업이나 가정, 학문과 연계가 될 때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 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3장 24에서 바울은 노예 생활을 하는 사 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노 예가 섬기는 자는 자기 주인이지 예 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 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후 에 자기 동료들을 예수 믿게 했습니 다. 그들 가운데서 좀 똑똑한 사람 들은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주인 의 자녀들을 예수 믿게 했습니다. 이 자녀들을 통해서 주인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300년 동안 기독교를 핍박했 지만 이러한 복음 사역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중에는 천하의 박해자 네 로 황제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자가 상당수가 생겨났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된 루트는 바로 이들 노예들이었던 것 입니다.
이들을 통해 퍼지게 된 복 음은 드디어 300년 후에 대제국 로 마를 완전히 삼키기에 이르렀던 것 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신분과 직 업이 비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하나 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삶을 이용하니 까 노예 생활 자체가 주님을 섬기는 가치 있는 삶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 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업, 재능, 젊음, 재물이 주님께서 죽도록 충성 하셨던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직간 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그렇다 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의미 있는 삶이요, 주님을 섬 기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세상을 구원하는 일과는 별로 관 계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당신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 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 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루기 위해 예수님처럼 종되기를 싫 어하는 자는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 람입니다. 그렇게 살다 나중에 주님 앞에 무슨 면목으로 설 수 있겠습니 까?
썩는 밀 알이 되라
둘째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처럼 썩는 밀알이 되어 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한 알의 썩는 밀 알 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시 말해 서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24-5절 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 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 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 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것이 예수님이 종으 로 충성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도 예 수님처럼 썩는 밀 알이 되어야 한다 는 뜻인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늦가을 이 되면 아버지께서 밭에 보리 종자 를 뿌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씨앗들은 흙 속에 떨어져 있다가 혹 한이 되기 전에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잎새들은 작 고 가냘픈 모습으로 한겨울을 난 다 음 봄기운이 도는 2월 말경부터 왕 성하게 자라납니다. 저는 가끔 호기 심을 못 이겨 4,5센티미터에 불과한 새싹들을 쑥 뽑아 보았습니다.
그러 면 뿌리 채 딸려 올라옵니다. 그 뿌 리에는 종자로 뿌려졌던 보리 껍질 이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져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었습니 다. 종자 속에 있던 알맹이는 새싹 을 내는데 자양분으로 다 사용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썩 어 싹을 틔운 한 알의 밀 알은 사오 월이 되면 누런 보리 이삭들을 풍성 히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 있습니까?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 의 보리 알 때문에 그런 풍성한 열 매를 맺을 수 있다니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보 리보다 밀을 많이 재배하고 있었습 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나 알아들 을 수 있는 썩는 밀 알의 비유를 가 지고 자기를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 를 가지는 말씀인지를 설명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 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많 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밀 알 이 되어 썩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 죽노라. 내가 죽어야 만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구름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십자가를 무서워 하여 회피한다면 이 세상에서 한 사 람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 말씀대로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인 우리한테 자 기의 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내 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십자가에 서 죽었던 것처럼 너희도 많을 열매 를 얻기 위해 한 알의 썩는 밀 알이 되어 죽어야 한다.."
.'나를 따르라.'는 말속에는 이러한 요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알의 썩어지는 밀 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 을 의미할까요? 본문 25절을 보세 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 이 나옵니다. 이것은 썩는 밀 알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좀더 분 명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psyche)인데, .'목 숨.'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도 .'자아.', .'뜻.', .'의지.', .'소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은 우리의 뜻이나 소원을 부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에서는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 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 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 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자기의 소원이나 뜻은 다 부정하고 죽였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 르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모든 것 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 이 곧 썩는 밀 알이 되는 길입니다.
찰스 스터드는 100여 년 전에 영 국에 살았던 사람으로 갑부의 아들 이자,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수재요,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크리 켓의 대스타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몰 려드는 바람에 식사도 제때 챙겨 먹 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누리 던 젊은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디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자연히 그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 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의 삶 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자기가 이제 껏 누려왔던 인기나 명문 대학 출신 이라는 자부심, 집안이 부유하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 같은 것들이 너무 나 시시하게 여겨졌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 보 다 더 보람된 일은 없다는 것을 깨 달았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깨달음 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의 젊음 을 바치고자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 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께서 세상 을 떠나시게 되었고 그는 3만 파운 드가 넘는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습 니다. 그 당시의 파운드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유산이었던 것은 분명합니 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유산 을 몽땅 무디성경학교와 조지 뮬러 의 고아원과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단체에 헌금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서 만나 결혼하게 된 아내와 함께 중국에서 18년 동안을 선교사로 헌 신했으며, 이후 6년 동안을 인도에 서 선교사로 사역했습니다.
이렇게 장기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하다 부부가 다 중한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 양차 영국에 귀국했습니다. 영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스터드는 어떤 집회에 참석했다 가 그 곳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보 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 었습니다.
."식인종이 선교사를 기다 립니다!."
당시 그는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천식을 앓게 되어 15년 동안을 고생해온 터 라 몸이 몹시 허약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이도 벌써50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로 가려 고 하자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사 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의 부인조 차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 님께서 자기를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신다는 그의 확신을 꺾을 수 없 었습니다. 그는 만류하는 자기 아내 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 식으로 인해 지난 15년 동안 겪은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 는 고통은 죽음의 고통이나 다를 바 없었소. 더군다나 내 몸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요. 왜 내게 이 제는 쉬고 싶다는 그런 유혹이 없었 겠소?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나는 잠시라도 쉴 수가 없소.."
그는 병든 아내를 영국에 남겨둔 채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났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도박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가복음 8장 35절 말씀을 굳게 붙잡았습니 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렇게 자기를 완전히 제단에 올려놓 는 신실한 종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대우하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정 글을 헤치고 지나가게 되었는데, 29 마리의 당나귀 중 25마리가 죽고 4 마리만 살아 남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와 중에서도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정글에서 그를 지켜 보호하신 것입 니다. 더군다나 그는 70세가 되기까 지 무려 20년 동안을 아프리카 선교 에 헌신하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 습니다. 지금도 그의 사역은 그가 창설한 WEC선교회에 소속된 1,800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 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영국에 있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
당신에게 건강을 줄 수 없는 의사를 멀리하고 예수님께 상의해 보는 게 어떻소? 사랑하는 이여. 예수님께 가서 그 분께 당신을 드리시오. 그 러면 나와 함께 세계를 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오. 반드시 그러리라는 것을 믿 고 있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나와 당신이 살아야 할 다른 길은 없다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제자 도의 알파와 오메가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 리에게 자기를 따르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뜻, 나의 꿈, 나의 욕심, 나의 고집, 그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에 반하는 것은 다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더 높은 생의 기쁨을 위해서는 땅에 속 한 것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 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주님이 기뻐 하시면 자기 목숨까지라도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 영광을 버리라고 합 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 내 뜻을 포 기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는 나의 짧은 한 생을 주님의 제단 에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 로 썩는 밀 알이 되는 것이요, 예수 님을 섬기기 위해서 따르는 것이라 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 년을 믿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 생활을 하기를 원 하십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요,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요 15:8).
주님은 이와 같이 죽도록 충성하 는 자에게 두 가지 보상을 약속하셨 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 니.."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 지께서도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신다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도 이와 비슷한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 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 이다.."
주님이 영광을 누리는 곳에 서 주님을 위해 썩는 밀 알처럼 헌 신한 자들도 그 영광에 함께 동참하 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 리는 예수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종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썩 는 밀 알로 희생한 것처럼 우리도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우리 가 주부이든, 학생이든, 사회인이든, 직장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 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귀한 일에 쓰임 받 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밖에 없는 우리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망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위해 열매 맺는 일에 헌신하겠습니 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나 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을 시 작합시다.
우리의 젊음과 지식, 재 물, 시간, 이 모든 것을 세상을 구원 하는 일을 위해 사용합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복된 삶 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빛나는 삶 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가 장 영광스러운 일에 부름 받은 예수 의 제자들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한 시도 잊지 마십시오. 함부로 살다 그만 둘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 신분에 걸맞는 인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합니 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 아!."
라고 하시는 칭찬을 꼭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의 신비 /요12:20-26/ 곽선희 목사
2014-11-24 22:19:37
지난 2월 28일 어느 신문에 깜짝 놀랄 그런 기사가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친일파 708명의 명단이 발표됐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이 친일파 계보를 보면서 저는 옛날 일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 교육계와 나라를 위해서도 크게 일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그 유명인사 가운데에도 친일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이 유명인사들이 우리가 지목하는, 지금 기억하고 있는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전쟁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고 심지어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은 마치 순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그 당시에 나온 신문에 그대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을 독려해서 무서운 다시 못 돌아오는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이 일로 인하여 친일파라는 씻을 수 없는 이름을 가졌고 본인은 물론 그 자손들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 우리 젊은이들을 향하여 이 전쟁에 나가라고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하고 그렇게 독려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8·15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으면 아니 미쳤다고 그러고 다니겠습니까? 역사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쉽게 빨리 망할 것을 모르고 일본 사람에게 붙어서 그 어처구니가 없는 말들을 하고 반민족적인 그러한 행동을 했더라는 얘기입니다.
또 한가지는 죽음이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목숨은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음, 살고 죽는 문제는 참 심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우선 살고 보자는 이런 이야기는 인간답지 못합니다.
보세요. 부끄럽게 살기가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 창피스럽게 부끄럽게 살아남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좋았는데요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 자손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이 아버지 이름 때문에 장가도 못 가겠다 그랬어요. 한평생 그 이름이 따라다니니까요. 이 부끄러운 이름,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씻을 수 없는 거예요.
또 한가지는 죽음으로서 더 큰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죄송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한번 갑니다. 그런데 잘 죽으면 산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참 훌륭한 죽음은 많은 훌륭한 사람을 탄생케 하는 결과가 되거든요. 이걸 몰랐어요.
8·15 해방이 된 다음에 그 왜정 말기에 그 신사참배문제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신학 대학 간판도 못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육을 못 받은 집사님인데 목사님 안 계시는 시골 교회에서 이분이 전도사로 일하다가 신사참배 반대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7년 동안 고생하고 산 순교자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래 출옥을 해서 나왔는데 이분을 모셔다가 저희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 국민학교 5학년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그때 옷이 많지 않으니까 무명옷, 무명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오셔서 시간시간 일주일동안 설교하시는데 손을 딱 들고 "죽도록 충성하라."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두가 감격 감격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게 총 주제였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는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낮 공부 시간에 그때에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장로님들이 "한번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아 이 옷을 벗고 배를 보여주는데요 이 가슴과 배가 만국지도 같아요. 인두로다가 지졌어요. 고문을 하면서 계속 지져서 여기가 전부 이렇게 데이고 그냥 막……. 만국지도 같다니까요.
정말 우러러 보이고 영광스럽게 보이더만요. 그 부흥회가 있은 후에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교회에 있는 목사님은 바로 사표를 내고 먼 지방으로 가버렸어요. 왜요?
그 분은 부끄럽게도 신사참배 했거든요. 죽음이 무서워서 신사참배 했는데 목사가 신사 앞에 가서 꾸벅꾸벅 했다 그 말이에요. 이러고 나니 해방되니 이게 부끄러워 살수가 있어야지요. 여러분 오늘도 보면 뭐 누가 얼마를 뭐 횡령했느니 누가 얼마를 수뢰했느니……. 참 나는 사실여부를 알고싶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나. 아, 좀 가난하게 살면 안되나. 그 창피하게 이게 뭡니까? 이래놓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니는 이거이거이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생명보다 귀한 것이 명예입니다. 왜 이 생각을 못하고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들어보세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진리를 이 생명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이 생명의 진리를 믿었고 이 생명의 진리를 따라 그는 죽었습니다.
놀라운, 영광스러운 생명을 위하여 그는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건 선택적인 죽음입니다. 안 죽으려고 이리저리 도망가다가 억지로 어떻게 되어서 죽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당당하게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왜요? 그는 저 앞에 있는 영광과 많은 열매를 맺는 저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죠.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이 죽음의 끝이 아니요. 생명의 시작이요 죽음의 끝이 아니요. 이 죽음으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 헬라인이 예수님 앞에 와서 요청을 했다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조금 해석을 드려야 됩니다. 누가 왔을까? 이 헬라인이 누굴까?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게 간청해. 여기에 보니깐 '여짜온대' 그랬어요. '가서 여짜온대' 그런데 무얼 여쭈웠는지 내용이 없어요.
여기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전설이 여기 해석을 주고 있습니다. 이 헬라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에데스다 왕국의 사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에데스다 왕의 아들이 지금 한센병 걸렸어요.
그래 죽어가니까 왕이 백방으로 애를 쓰다가 고칠 수가 없어서 소문을 듣자하니 유대 땅에 예수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는 한센병도 고친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이 헬라문화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 바로 빌립입니다.
그가 헬라 말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만나서 얘기하고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다는 거예요. 뭘 여쭈었느냐. 여기 계시지 말고 에데스다로 가십시다. 왕의 아들의 한센병만 고쳐주시면 우리가 평생토록 왕의 고문으로 추대해서 잘 모시겠습니다.
저들은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까지 그 정보를 다 알고 왔다는 겁니다. 이 위험한데 계시지 마시고 우리 나라로 가십시다, 그랬다는 거예요. 어쩜 그럴 것도 같아요. 그래 예수님은 이 시간에 말씀합니다. 아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은 이 돌연 말씀은 어디 뜻이 뭐냐 하면 이쪽에는 에데스다 나라에 가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세속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이쪽에는 십자가의 권한이 있고 저 앞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세속적인 영광과 영원한 영광 사이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그 순간입니다. 그런 결단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결심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는 바로 결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의식이요. 예수님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이요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 있었던 그의 소신이올시다.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는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게 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865년 아주 추운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날입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고 하는 곳에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없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지금 갓난아이를 안고 그리고 가던 길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추위에 떨다떨다 못해서 이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눈보라가 다 그친 다음에 사람들이 이 여자가 앉아서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자가 홀랑 벗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안고있는 아이를 살리려고 자기는 하나씩 하나씩 옷을 자꾸 벗어서 그 아이를 감쌌던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었는데 아이는 살아 있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착한 사람이 키웠는데 이 아이가 커서 1916년 영국수상이 됩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라고 하는 수상입니다. 그는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내 대신 죽었다고 알몸으로 죽었다고.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고 한평생을 부모 없이 살았으나 그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어느 분 하나 피아니스트를 압니다. 아주 훌륭해요. 남편도 훌륭해 보이는데 단란한 가정이에요. 그런데 밤낮 티격태격해요. 그리고 한번씩 별거했다가 또 만났다가 별거했다 만났다. 온 교회가 걱정을 해요 그 집 때문에. 그래 제가 한번 만나서 개인적으로 물어보았어요.
아니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랄 세상에 우리가 보니 두 사람 다 좋은 여건인데 왜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했더니 대답이 재미있더라구요. "있지요." "아, 있으면 그럽시다" 그랬더니 "뭔데요" 그랬더니 "내가 죽으면 되지요." 여러분 내가 죽으면 됩니다. 별것도 아닌 거 살아 가지고 야단이요.
죽어버려 까짓 거. 어차피 죽을 건데 죽어버려. 어차피 끝난 건데 죽어버려. 그러면 되는 건데요.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것, 별것도 아닌 자존심, 다 없어진 그까짓 체면, 그 무얼 가지고 그럽니까. 툭툭 털어 버려. 그러면 살 길이 있어요.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르게 죽으면 영광의 아침이 옵니다. 이게 사는 길이지요. 죄짓고 부끄럽게 사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나죽고 남 죽이는 겁니다. 여기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신비가 있습니다. 죽으면 산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린다. 바르게 죽으면 영생이 있다. 오늘 죽고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인도에 갠지스강이라고 하는 강이 있지요. 거기에 어떤 노인 하나가 강둑에 앉아서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조용히 보는데 아주 유리알 같이 맑은 물에 이렇게 흘러가는데 그래 보니까 꿈틀꿈틀 하는 게 보여요.
이게 뭔가 하면 전갈 하나가 지금 물에 떠내려가고 있어요. 떠내려가면서 육지로 나와 보려고 하는데 이게 헤엄을 잘 못 치거든요. 그래서 나뭇가지를 붙들고 하려는데 그 나뭇가지도 흘러가고 있어요.
이러 모로 이러 모로 그냥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는 것을 보고 이 노인이 전갈을 건져주었어요. 건지자마자 물잖아요. 아 그 다음엔 유명한 전갈 꼬리로 쏘잖아요. 그 지나가던 사람이 "노인, 아 그 전갈은 살려줘서 뭘 하겠다고 그를 그렇게 구출하려고 하는 거요. 쏘이면서……."
이 노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갈은 쏘는 것이 본능이고 나는 구원하는 것이 본능이요." 대상을 묻지 마세요. 나는 나대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에요. 희생할 것이요.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네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리리라.
성도 여러분, 현재에 죽고 미래에 삽시다. 나 하나 죽고 많은 사람을 살립시다. 순간에 죽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봅시다. 이것은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진리를 버렸기 때문에 나라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고 부끄러운 생을 살고 저 가문도 망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얻기 위해서는 주저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한 알의 밀의 신비를 다시 생각합니다.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있고, 죽음의 신비가 있고, 영생의 신비가 있음을 압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이 진리를 따라 살고, 이 진리를 따라 가게 하시고, 앞에 약속된 영생을 얻을 뿐더러 나의 희생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그러한 영광된 삶과 영광된 미래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12:20-30/ 예수를 보고자 하노라 / 한경직 목사
2014-08-25 19:34:47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요한복음 12장 21절의 말씀을 다시 봉독합니다.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멀리 헬라 나라에서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경건한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예수의 제자인 빌립에게 와서 예수를 뵙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로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직접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당시 대표적인 문화인들, 곧 헬라 사람들도 모두 예수를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깊은 심령 속에 영적인 기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갈을 멈추어 줄 만한 지도자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에 사는 모든 사람도 모두 참 예수를 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옛날 헬라인들이 예수의 제자 빌립에게 와서 간청한 것처럼, 오늘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와서 예수를 보여 달라고 구합니다.
옛날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보여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힘을 썼습니다.
우선 말로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첫 순교자 스데반을 비롯하여 베드로, 빌립, 여러 사도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때로는 환난과 핍박을 당하나 입으로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제 1세기부터 예수의 제자들은 글을 통하여 예수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책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제자 마태는 마태복음을 썼고, 마가는 마가복음, 누가는 누가복음, 그리고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오늘을 특별히 성서주일로 지키게 되는 것도, 온 성경이 한마디로 우리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까닭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모든 기독교 서적이 그러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재능을 따라 어떤 이들은 음악을 통하여 예수를 보여 줍니다. 찬송가 가사를 지은이들이나 그 곡조를 작곡한 이들도 그 근본 목적은 예수를 보여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헨델의 <메시아> 등 위대한 작품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특별한 재능, 예술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이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성화를 그린 이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 가운데도 특별히 호프만의 예수의 초상화나 다빈치의 성 만찬의 그림이나 스텐벅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등의 성화는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예술인 중에도 이 방면에 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한데 모두 감사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문학, 시, 소설 그리고 영화를 통하여도 예수를 보여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은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일찍이 해방 후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에 피츠버그에 가보니 거기 이스트 리버티(East Liberty) 장로교회란 큰 교회가 있는데, 그때에 저와 같이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스키너(Skinner) 목사라고 하는 분이 그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예배당은 제가 옛날 학생으로 공부할 때에 미국의 큰 재벌이었던 멜론가에서 수백만 불을 들여서 전부 돌로, 또 고딕(Gothic) 스타일로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이었습니다. 저는 친구 목사의 초청을 받아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올라가니 바로 내 앞에 영어로 ‘We would see Jesus.’ ‘우리는 예수를 보고자 하노라.’라고 하는 말씀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읽을 때에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강단에 서는 목사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를 보여줄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킨 까닭입니다. 사실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누구나 참 예수를 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20세기에 사는 인류들, 핵우산 아래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며 불안과 공포 중에 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누구나 그 깊은 심령 속에 구주를 찾습니다. 예수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 예수를 믿는 이들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말로도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고, 글로도 곧 문서와 서적으로도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고, 특별히 재능을 받은 이들, 곧 음악가나 예술가는 그 노래, 그림, 또는 조각을 통하여도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며, 혹은 문학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시나 소설 등을 통하여서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사실 이상의 방법들은 그 방면에 특별한 은사를 받은 소수에 제한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 또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길이 무엇일까, 혹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귀의 시대에서 눈의 시대로 변하여 간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전에는 라디오를 귀로 듣는 데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눈으로 TV를 보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글을 읽기보다는 그림이나 영화 보기를 더 즐거워합니다. 현대에 관광의 붐이 일어나는 것도 귀로 듣는 것보다 실지로 눈으로 보기를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또 관광으로 가는 이들은 흔히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이 또한 보기를 즐겨하는 현대인의 심리입니다. 또 옛날 사람들도 사실은 듣는 것보다도 보기를 좋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말이 내려옵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모습을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예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우선 우리 하나하나의 개인 생활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얼굴, 우리의 성품, 우리의 말, 우리의 성결한 생활, 또는 우리의 봉사 자체가 예수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면을 생각할 때에 누구나 송구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기억할 엄숙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찍이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분이 어떤 목사를 향해서 “저 목사는 어떻게 목사로 보이지 아니하고 꼭 경관처럼 보인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처럼 보이지 아니하고 경관처럼 보인다고 하면 그건 좀 곤란할 겁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그분이 제직인데, 또 다른 제직을 향해서 하는 말이 “저 집사는 성품이 그저 당나귀 같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의 성품이 당나귀 같다고 하면 그건 좀 곤란할 것이란 말이오. 믿는 이들이 모여 앉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에, 특별히 그 험구를 잘하는 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험구를 잘하는 이가 말을 하려고 들어서니까 그 옆에 앉았던 이가 하는 말이, “그 쓰레기통 덮개를 열지 말라.”고 그렇게 충고합디다.
여러분, 물론 얼굴의 표정이나 성품은 스스로 관리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라고 하는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숨은 생각은 우리의 얼굴, 우리의 성품, 우리의 언행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뿐더러 자연히 점차로 우리 언행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 자체가 점차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은 가정생활을 통하여서도 이 세상에서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의 가정은 간단히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결, 둘째는 화평, 셋째는 봉사일 것입니다.
현대는 한국을 비롯하여 온 세계가 가정의 위기를 당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경건치 못한 가정이 증가됩니다. 화평치 못한 가정이 점점 많아질 뿐 아니라, 파탄 이혼의 가정의 수가 격증하여집니다. 따라서 사회는 불안하여지고, 불량 소년소녀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각종 범죄는 날로 증가되는 것이 세계적인 한 현상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세계에 있어서 우리 믿는 이들은 우리의 가정을 통하여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을 모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하여도 또한 예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지체는 많습니다. 아무리 지체가 많아도 지체 속에 불화는 없습니다.
이런 면을 생각할 때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이점에서 특별히 실패하였습니다. 분쟁과 분열이 너무나 많았고, 연합 사업에는 어디나 열의가 부족하였습니다. 이점을 생각할 때에 실로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생활은 화평하고 성결하고 협동할 줄 알고 화해와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 100주년을 기하여 특별히 이 죄를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오직 화평한 교회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우리 가정에 모시고, 우리 교회에 모실 때에 자연히 이 믿지 아니하는 세상은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자연히 성장합니다. 봄 동산에 각종 꽃들이 만발해서 향기가 가득할 때에는 벌과 나비는 각처에서 스스로 모여 듭니다. 교회의 화평과 사랑과 성결의 향기가 가득할 때에 교회는 저절로 부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꼭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주기로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 계절이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크리스마스의 뜻을 이런 말로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크리스마스는 말씀, 진리 곧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할 때에 주님은 솔직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의미심장한 말씀이올시다.
물론 하나님 지으신 천지 만물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하나님을 좀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과거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여러 말로 가르쳐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하였습니다. 최후로 그 독생자를 친히 보내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게 하여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얼굴과 성품과 교훈과 십자가와 모든 하신 일로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개인생활, 가정생활, 그리고 교회생활을 통하여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북에서 오신 분은 아마 아시는 분 더러 계실 거예요. 이북 피현이라고 하는 곳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그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신,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계시던 최명준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최 목사님은 별명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흔히 최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듣건대 그 옛날은 이제 촌사람들이 나무를 소에다 싣고 와서 팔지 않았습니까? 또 시가지에 사는 사람은 그 나무를 사서 불을 때고 살았는데, 어떤 촌사람이 나무를 싣고 와서 파는데 누가 “이거 얼마요?” 물어보니까 에누리를 많이 해서 팔 생각으로 아마 한 곱을 부른 모양이오. 그런데 그저 이분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갑시다.” 그래요. 그저 에누리 생각해서 불렀는데, 아무 말 없이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주더란 말이오.
그래서 나무를 다 팔고 가서는 자기 동네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했다 합니다. 아, 난 오늘 횡재했다고. 그저 에누리를 많이 해줄 생각으로 곱을 불렀는데 아무 소리 안하고 돈 다 주더라고. 그러니까 그 듣던 사람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던가? 머리가 하얗지 않던가?” “아 그렇더라.”고 하니 “임자, 큰벌 받겠네. 그 최 예수로구먼, 최 예수. 본래 그 최 예수는 에누리 하는 법이 없는데, 그저 말하는 대로 다 주는 사람인데, 그걸 모르고 자네가 그렇게 곱을 받았으니 그거 하나님께 벌 받지 않겠나?” 그래서 이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돈을 절반 가지고 가서 절반을 도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무엄한 말 같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임을 능히 감당하리만큼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본래 더럽고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이나 하나님께서 저희를 불러서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 다 사하여 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사오니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모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과연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생활, 우리의 교회생활이 참 예수님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만큼 심히 높은 자리, 경건한 자리까지 다 끌어 올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간구하옵나이다. 아멘.
성공 같은 실패 /요12:26/ 달라스 윌라드
2015-06-15 17:58:03
◑사역의 계승이 어렵다.
▲핵심 알맹이가 빠진 성 프랜시스 유적지 관광
아시시에 가면, 거기 모인 사람들 입에서 성 프랜시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를 기념하는 유적지의 기념물도 많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즐비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성 프랜시스가 품었던 불을, 팔거나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를 흠모해서 거기를 찾아온 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성 프랜시스의 성품과 그의 정신적 유산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정신 유산은 다음 세대에 계승되기가 무척 어렵다.
역사 속에, 간혹 영감과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 나타나서,
자기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 그 시대에 큰 인물이 된다.
다윗 왕, 소크라테스, 성 프랜시스,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정말 “뭔가”가 있었다. 그들은 남달랐다.
그들이 그토록 큰 역사를 이뤄낸 것도,
그들을 중심으로 여러 운동과 단체들이 생겨난 것도,
바로 그들에게는, 남다른 비범한 “뭔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남다른 “불”이 내재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서,
남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그것을 역사에 남겼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추종자들과 인재들이 모여들고,
그들의 활동을 계승하려는 기관이 생겨나면서,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이들 후계자들이 시작한 사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창시자가 가졌던 불과 비전에서 조금씩 이탈해 나간다.
머지않아 그 기관은 창시자의 불과 비전과는 거의 관계없는,
무늬만 남은 기관이 되고,
과거 창시자가 생존할 때처럼 활발히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쓸쓸이 사라져 버린다.
▲이런 현상은 교계, 사회가 마찬가지다.
종종 창업주의 정신과 열정이 살아 움직이던 기업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후계자가 등장하면서
창업주 1세대의 정신과 열정을 승계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창업주의 퇴장과 함께,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간판을 내리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부흥사 찰스 피니는 오벌린 대학을 설립했다.
이 대학 말고도, 많은 크리스천 대학들이, 다음 세대로 지나가면서
설립자의 마음의 불과 정신 유산을 계승하지 못하고,
세상 대학과 거의 마찬가지의 길로 가버렸다.
그 이유를 한 번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성공 같은 실패
기독교계에 유행하는 말로 ‘성공 같은 실패’라는 말이 있는데,
(내적 내공이 없이, 외적으로만 버젓하게 성공하는 것은, 결국 실패라는 말)
정말 뼈가 있는 말이다.
▲사람만 모여들면, 불이 꺼져 버리는 성향
처음에 그 신앙 운동이 출발할 때는, 당연히 “뭔가”가 있다.
사람들의 깊은 내면의 필요를 채워주는 ‘불, 정신자원, 사랑’ 등이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거기로 모여들게 된다.
거기서 나눠주는 불, 비전, 사랑의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그 ‘불, 비전, 사랑의 온기’를 꺼버리는 역할을 해 버린다.
(저자는 그 구체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지만, 대충 짐작 할 수 있음)
그래서 처음에는 ‘불, 비전, 온기’로 시작했던 많은 사역단체들이
시간이 지나면, 일세대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기념품이나 팔고, 사람들이 와서 한 번 휙 둘러보고 가는 장소로 전락한다.
사람만 많이 모여들면... 처음의 상태에서 변질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는 당연히 ‘그러려니...’ 할 일이지, 깜짝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기한 기적이 될 것이다.
(사람이 다 그렇지, 별 수 있나?)
이런 ‘쇠퇴’의 원인은,
*자원의 부족은 당연히 아니고, (오히려 자원은 늘어났고)
*‘바른 교리’의 문제도... 사실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라서, 사실 그런 쇠퇴를 감지하기조차 매우 어려운데,
본질적으로 ‘내면적인 문제, 즉 불, 비전, 사랑의 온기의 문제’이다.
즉, 예전 같은 불, 비전, 열정, 뜨거움이 미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창시자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과거와 같은 “진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나와야 회원들이 감동되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약화되다가
마침내 중단된다는 것이다.
그 ‘내적 불, 비전,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고갈되어버림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과거의 명성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사역이 점점 형식화/화석화 된다.
이런 현상은 일세대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성경에 사울, 아마샤, 웃시야 같은 왕들이 그 예)
2세대 등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점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다윗-솔로몬-르호보암, 여호수아-타락한 다음 세대)
과거 개신교 역사를 보면, 모든 ‘교단’들도 거의 예외 없이 이런 길을 갔고,
오늘날 개별적인 ‘기독교 단체, 구제기관’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매너리즘에 빠지고, 내면적 열정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과연 뭘까?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헨리 나우웬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선의의 봉사가(사역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비전 등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역을 통해 자기가 성공하려 하고, 입신양명, 자아실현 하려고 할 때 그렇다.
사역이 잘될수록, 실제로 그런 위험에 더 잘 빠지게 된다.)
▲잘 되다가... 교만해져서... 망하는 패턴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왕들 중에, 재임 초기에는 부흥 운동을 일으키다가도
성공한 다음에 실패하고, 퇴임이 좋지 않은 왕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례로 웃시야를 보면,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대하26:16
웃시야가 강성해 진 것은, 재임 초기에는 하나님을 힘써 섬겼기 때문이다.
웃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대하26:4~5
그래서 ‘성공 같은 실패는 없다!’는 말이 생겼다.
차라리 성공 안 했더라면, 실패도 안 했을 터인데...
▲다시 한 번 패턴을 정리하면,
개인이나 단체가 처음에 뜨거운 헌신을 해서 상당한 외적인 성공을 낳는다.
외적인 성공은 자기들에게 자부심을 주지만, 심해지면 교만하게 만든다.
그 다음부터 외적인 성공에 더 높은 목표를 두고, 거기에 몰두하게 된다.
외적인 성공, 업적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갈채와 존경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면적인 불, 비전, 사랑은 점점 식어져 간다.
그것은 남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칭송도 크게 못 받는 것이니... 개의치 않는다.
대중들은 그저 큰 건축, 대중 집회, 이런 가시적 성과에 더욱 환호를 보낸다.
결국 사역은 본질을 잃고, 규모는 커졌으나, 내면이 약한 결과를 가져온다.
여전히 눈 먼 대중들은 그에게 환호할지 모르나,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져 간다.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외적 사역)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내면적 신앙)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라고 헨리 나우웬이 갈파한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을 그가 꿰뚫어 본 것이다.
▲특히 주변에 모여 든 사람들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시자들보다는,
그들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일 수가 아주 많다.
그들은 창시자를 존경하고, 섬기며, 예우를 갖추어 대접한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그 단체에서 측근으로서 갖는, 권리와 특권을 누린다.
창시자와 측근들은 상생相生적으로, 이런 권리와 특권을 나눠가질 수 있다.
▲물려줄 신앙/정신유산이 대단히 중요하다.
진정한 측근과 제자는,
창시자의 불, 비전, 사랑, 정신자원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재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분야에서 창시자도 별로 물려줄 것이 없고,
측근과 제자도, 창시자로부터 별로 물려받을 것이 없다면... 실패하는 것이다.
결국 서로 물려주고 받는 것이 ‘건물, 재정 등 외적인 자산’만 될 때,
그 다음 세대에서 소멸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아닌가!
그래서 ‘제자양육’의 결과는, 다음 세대인 제자 세대에서 판명 나게 된다.
진짜 여호수아 같은 뛰어난 제자가 나오면... 그는 모세 같은 훌륭한 스승이었고,
그 다음 세대에 사역이 점점 소멸된다면... 그는 평범한 스승이었다고 평가 받는다.
‘외형적 자산’만 물려받은 제자는... 얼마 못가서 허덕이게 되고,
일세대가 이룬 큰 외형적 업적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의 주제는, 외형적 결과에 너무 연련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했고, (↔외모)
무한하신 우주를 가지신 전능자께는, 사실 인간의 업적이란 그게 그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형, 성취, 가시적 업적을 본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거기에 유혹을 받아,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
내 역량을, 가시적 업적인 <건축, 재정, 숫자> 등으로 자꾸 나타내려 한다.
그래서 <‘사역’이 도리어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앞서 나우웬이 지적했고,
<성공 같은 실패는 없다>는 말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기 혼자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인데,
온 성도를 어떤 외형적, 가시적 프로젝트에 끊임없이 드라이브(몰고)해 간다.
그 행사에 열심 내는 사람은 ‘참 신자’, 아니면 ‘나이롱 신자’...
이런 분위기는 사회 전반적으로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위화감 느끼는 그 사람도 문제지만, 그것을 제공한 측도 다소 책임이 있다.
더욱이 시대조류가 ‘외형적 성공, 가시적 성과’를 중요시 하는 문화 가운데서
거기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 과정process, 이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깨닫지도 못하고 떠내려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현상을 정직하게 지적한 저자 달라스 윌라드는 용감한 선지자이다.
▲자존심을 내려 놓으시라! (달라스 윌라드의 권고)
기독교 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 자기 개인 소유 사업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열심히 봉사하되, 자기가 무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즉 그 사역 아래 숨어 있는, 자기 야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저자 윌라드 교수는 ‘자존심을 내려놓아라!’고 권고한다.
구역장을 하더라도, 내 자존심이 있으니까, 몇 명은 끌어 모아야 한다는 그 자존심!
내 나이가 몇 살이고, 내 경력이 이러하니, 이 정도 규모는 해야 한다는 그 자존심!
사람들이 외적으로 자꾸 나타내려는 이유가,
<자기 자존심> 구기지 않으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내면적 신앙, 정신자원은 다음 세대로 계속 승계된다.
그래서 외적인 사역 규모가 작아서 비록 자기 자존심을 구기더라도,
내적인 불, 영혼 사랑, 비전, 열정 - 이런 것들을 목표로 삼아라고 권한다.
결국 내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불, 사랑, 인격, 비전, 열정 등 내면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역하셨다.
그래서 그 분의 사역은 다음 세대로, 다음 세대로 계속 지속되었다.
적어도 3세기 말까지는(콘스탄틴 대제 이전) 그렇게 계속 지속된 것이다...
저자는 매너리즘에 빠져서 쇠퇴해 가는 기독교의 근본 원인과 처방을
나름대로 뛰어난 관찰과 혜안으로 정직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조금 듣기 싫은 부분도 많지만,
이런 내용을 다 배운 다음 세대들은,
아예 처음부터 올바른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통해 얻은 생명 /요12:23-25/ 유기성 목사
2016-08-27 11:30:21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십자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인류 최대의 사건이요 사랑의 이야기요 복음입니다. 그 이야기를 이 시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한 주간 새벽마다 나눌 것입니다.
오늘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요 십자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서서히 죽어가고 그곳에 방치되어 독수리나 까마귀의 밥이 됩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끔찍하여 로마인들은 본국인들에게는 십자가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지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은 우리의 죄가 얼마만큼 무거운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일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요 12:23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3년 일생 전체가 어느 하나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도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 못 박혀 거룩한 몸이 높이 달려 계시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볼 때마다 새삼 주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은 일체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알려고 했고 주 예수님만 자랑했습니다.
성 프랜체스코는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제군에게 전해줄 만한 책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나는 제군에게 전할 만한 설교를 갖지 못했습니다. 내가 제군들에게 전해줄 유일한 것은 바로 이것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며 십자가 지팡이를 들어 보여 주었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조심스럽게 그 십자가 이야기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삶의 변화를 주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면 거듭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정말 거듭났는지 주위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함께 사는 가족들조차 우리가 정말 거듭난 것인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만 아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런 것입니까?
이제는 목사가 “도덕적 실패”를 이유로 교회를 사임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지도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드러나는 도덕적인 실패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들이 십자가 이야기를 몰라서 그럴까요? 잊어버린 것일까요?
달라스 윌러드 [하나님의 모략]에 보면 하버드 대학의 남미 출신 여학생이 학교 교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종차별적이고 성적 모멸감을 주는 백인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윤리과목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행동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여학생이 이러한 대학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자퇴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노래하는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자화상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은 정말 거듭났습니까?
흔히 듣는 말씀이 “기독교인이라고 완전하지는 않다. 용서받았을 뿐이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병원이다. 환자들이 모인 곳이 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세요.” 과연 그런 것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단지 용서받았을 뿐이고, 기독교인이란 여전히 환자일 뿐인가?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하여 더 이상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인가? 불신자와 다른 것은 미래에 천국에 가는 것만이 다른 것인가?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은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 용서받은 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삶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심각한 왜곡입니다.
주님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이 취소되었다고 했습니다. 두렵게도 이것이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받은 은혜는 엄청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려고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만나는 잘못한 사람, 미운 사람 하나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십자가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 첫 머리에 오늘 십자가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하품이 나온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뻔히 아는 이야기 재방송 같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죄송한 표현이지만, 예수님도 남은 남이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 들으면 더 이상 감동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였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말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한 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죽고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생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때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일 뿐 아니라 자기도 죽은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왜 나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점을 분명히 믿지 못하면 아직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에 가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라고 설교했더니, 여선교회 회장님이 분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는데 자아가 왜 죽어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 옛사람이 죽지 않았는데, 죄만 씻음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죽었기에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 묘사했습니다.
롬 6:13 ...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되, 바로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죽은 것입니다.
제가 죄 때문에 극심한 내적 고통을 겪을 때였습니다. 강대상 뒤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나님, 저 죄짓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주님은 제게 “죽으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응답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지간하면 죽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만일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죽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더러운 놈인가? 내가 이렇게 가증한가? 내 속에 죄가 이렇게 강한가?’ 저는 이 문제로 몸부림쳤습니다. 저는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하시니 저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저에게 주시는 주님의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비로소 죄에서 승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아가 죽는 것은 고역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쉬운 길입니다.
누구나 특효약, 좋은 병원, 맛있는 음식점 하나라도 알고 있으면 추천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해롭고 손해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에게 명령하시겠습니까? 십자가 지는 길, 자기 부인하는 길,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복된 길이요, 사는 길이요, 살리는 길이 분명하니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작 힘든 것은 자아가 죽지 않고 자아를 추구하며 사는 길입니다. 결혼하고 불행하게 사는 이유는 “나 행복하게 해 줘!”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목사도 설교 잘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설교를 망칩니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 때문에 사업을 망칩니다.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내려고 하니 공부가 힘든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몸에 힘이 들어가니 결과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한 결 같이 괴로운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아가 죽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니 신앙생활조차 종교생활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종교 생활하지 말고 진정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삶, 참 생명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교인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뜨겁습니다. 자아가 죽으면 진정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음을 믿게 될 때, 우리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만약 자신의 인생이 답답하기만 하다면 자아가 안 죽어서 그런 것입니다.
가정에 행복의 열매가 없다면 자아가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 힘들고 실패만 하고 남에게 짐만 되고 있다면 자아가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죄를 이기고 살고 싶으십니까?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며 오직 사랑만 하며 살기 원하십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살아 있는 기도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원하십니까?
가정을 구원하기 원하십니까? 직업이나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기 원하십니까?
십자가 하나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삶을 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도 이미 주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 “나는 죽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의 죽음을 보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육신이 죽어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와서 여러분을 들여다보고 여러분의 몸을 흔들어보고 여러분을 붙잡고 애통하며 우는 것을 보게 될 때 “아, 내가 죽었구나!” 하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아무 의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죽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죽었음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신의 죽음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죽기 전에 우리 옛사람이 죽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우리 옛사람도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심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내가 죽었구나!” “나는 죽었습니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부터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꼭 죽어야 하나” 탄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씨를 보면 얼마나 작고 초라합니까?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그 한 알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제 봄이 되어 땅에 심어 보시기 바랍니다. 씨를 심는 것은 시체를 땅에 묻는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씨를 심은 곳을 무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밭이고 정원입니다. 너무나 작고 초라한 씨 한 알을 심은 자리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씨 한 알과 비교가 안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은 정확히 이처럼 사는 것입니다.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고 구원의 약속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도 죽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남의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
저의 부친은 6.25 전쟁 때 피난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늘 들었던 이야기는 6.25 전쟁 이야기였고 피난 이야기였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기에 말만 꺼내시면 저도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친이나 친척 분들의 눈빛을 보면 달랐습니다. 언제나 지금 겪는 듯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분들에겐 6.25 전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분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분의 삶은 6.25 전쟁 이전과 이후로 갈라집니다. 6.25 전쟁은 그 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에게 십자가 사건도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만 하시면 눈빛이 달라지십니까?
십자가가 남의 이야기일 때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로 거듭나는 역사는 십자가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요, 나도 죽은 십자가의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것을 원한다면 고난주간이 십자가를 쳐다보고 지나가는 주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 남의 일 보듯이 지나치지 않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이 죽은 십자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눈이 뜨이기를 기도하시며 기도회에도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한 장로님께서 예배를 드리는데, 옆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던 한 자매가 질문을 하더랍니다. "장로님이시죠? 오늘 목사님께서 죽으라고 하시는데, 저도‘나는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장례식 치르고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계속하여 “나는 죽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주님은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죽음으로 얻은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이 주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통하여 여러분 자신의 십자가 이야기를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순절에 찾은 희생의 십자가 /요12:23-26/ 김병삼목사
2018-04-14 12:44:16
다시 찾은 나의 십자가 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한 알의 밀이 떨어지는 아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흔히 ‘희생’을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정작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사건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장사된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시체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사람들은 죽어 냄새가 나는 시체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그 된 일을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작 그런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예수님과 나사로조차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목격한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한 주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종려주일’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왕 되심을 선포하는 일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24절의 말씀입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는데, 그 때에 예수님이 죽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죠.
아무리 세상이 환호해도 피 흘림이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왕 되신 주님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 분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날 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고백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 18)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참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노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자리가 무엇이냐면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배우고 있지 않나요?
기업이 크게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영광을 돌리고,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영광을 돌리고,
대통령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어서 영광을 돌리고. . .
그런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성공과 자리에서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뭔가 신앙적 본질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명과 연결 지어 본다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희생이 있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것은 ‘어떻게 썩을 것이냐?’는 것이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참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과 박해 그리고 고난이 없이 어둠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피 흘림에 있는 것이지, 피 흘림으로 얻는 열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해 4월 필리핀에 있는 UMC 신학교 졸업식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자인 저를 소개하기 위해 학장이 묻더군요. “어떻게 소개할까요?”
그래서 “만나교회 목사라고 소개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교회 규모를 이야기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신학생들과 손님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고, 한국에서 그런 정도의 규모면 랭킹이 몇 위정도 되는지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에 대해 소개를 하자 신학생들이 “와 우!”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인 반응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가 모였을 때. 제자도를 말씀하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하셨는데. . .”
말씀을 묵상하며 ‘영광’과 ‘축복’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감사한 것이기는 하지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축복은 ‘효율성’을 생각합니다.
축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보이는 열매가 없어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효율성이 아니라 ‘무모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기꺼이 한 알의 밀이 되었기에 생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밀알’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필요하다면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희생의 재물 필요하시다면
내 생명 제단 위에 드리리 주 영광 위해 사용하소서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 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 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딱 일 년 전의 일입니다.
‘한 셈 치고’ 헌금을 기억하시나요?
그때 저는 폭발사고로 인해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1부 예배에 참석했던 한 부부가 저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어요.
우리 아들이 지난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죽기 전 한 달에 얼마씩 적금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가 지나면 돈을 찾을 것이라고,
그런데 아들이 죽고 나니 그 돈이 생명 보험이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으로 얻은 돈을 그냥 쓸 수 없어서 기도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으로 그 가정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주셔서, 그 보험금을 헌금 하려고 합니다. 빨리 결정해서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헌금합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한국 예술 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찬양을 하며, 귀한 재능을 가지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그런데 그 아들의 생명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더니 또 하나의 생명을 낳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과 그 부모의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른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효율성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입니다.
한국의 선교역사가, 양화진에 뼈를 묻은 많은 선교사들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에 선교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사역을 했나요?
6.25를 전후에 참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좀 더 안전한 곳, 효율적인 곳, 열매가 드러나는 곳에서 선교하는 것이 좋다고 누군가 그들에게 조언하지 않았을까요?
“떨어짐의 위대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떨어진다는 말 자체만으로 우리는 낮아짐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온전한 헌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낮아짐’ 만으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충분한 도전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신자의 낮아짐이 신앙의 상승’이라는 진리를 염소들을 통해 배웠다고 합니다.
어느 날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 위를 걷다 좁은 산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를 보았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또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길이라 두 마리가 다 오르고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서로 팽팽히 맞선다 싶은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올라가려던 염소가 길가에 누웠고 그 위를 밟고 위에서 염소가 내려왔습니다. 그런 다음 누웠던 염소가 일어나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폭삭 엎드리는 사람이 은총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조동천목사 설교 중에서)
낮아져야 올라가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야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원리와 반대가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인생에는 낮아짐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왕자에서 도망자로 살았던 시간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무명의 목동으로 살아야 했던 시간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 지내야 했던 고난의 시간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져야 했던 시간들처럼 말입니다.
낮아짐과 땅에 떨어지는 밀알을 통해 예수님이 보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것은 아닐까요? 낮아져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연적인 원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공기가 이동할 때 바람의 힘이 생깁니다. 낮아짐이 창조의 원리라는 것도 참 새롭지 않으신가요? 우리는 올라가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주님은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쓰시는데, 겸손해지지 않으니 우리를 낮추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 바로 낮아짐과 떨어진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는 것이죠.
우리는 떨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려주일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낮아짐의 자리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기꺼이 낮아짐의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낮아짐의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쓰셨던 가시관을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가시관을 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모슬포에 가면 ‘대정교회’가 있습니다.
1934년 세워진 대정교회가 특별한 것은 제주도 1호 목사이자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의 순교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핍박을 지나 해방이 되었지만, 제주에 남아 있는 목사는 은퇴한 이도종 목사와 현역으로 일하는 조남수 목사뿐이었습니다.
이도종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제주 노회가 굴복하자 교회를 사직하고 1942년 귀농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 이도종 목사를 부른 이는 아들 뻘 되는 조남수 목사였습니다. 둘은 합심하여 제주도 교회 재건에 나섰고, 목회자가 청빙되기 전까지 산북 지역은 이도종 목사가, 산남 지방은 조남수 목사가 순시하며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4.3 사건 때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다가 길에서 마주친 재산무장대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도종 목사의 신앙이력은 제주 선교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1907년 이른 봄, 어느 날 육지에서 기독교미션스쿨인 경신학교를 다니던 이웃마을 출신인 조봉호라는 청년이 금성마을 사람들에게 한양 소식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도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친척들과 이도종 가족 등 몇 사람이 양석봉씨 집에 모여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 날이 1907년 3월10일 주일이었다.”
앞에서 보았던 제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 이도종은 국권을 잃은 민족의 비극 앞에서 고민했고, 나라와 민족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 선진 교육을 배움으로 구국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추천서를 들고 평양 숭실 학당에서 공부한 그는 1926년 34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김제 중앙교회를 설립하므로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평소에 민족의식이 특출했던 그는 김제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시국과 관련된 발언으로 인해 일제에 연행되었고, 1929년 복음의 불모지였던 제주도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그는 제주 출신 첫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남다른 복음전파의 열정은 한 곳에서 목회하기보다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끊임없이 순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된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는 양민과 폭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토벌대의 중심을 이룬 서북청년단은 외지인인 데다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무장대들은 교회를 상대로 복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이도종 목사는 심방을 멈추지 않았고 공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1948년 6월 18일 금요일 이었습니다. 1919년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심하게 받은 후 후유증으로 다리를 약간 절었던 이목사는 자전거로 제주 곳곳을 다니며 심방을 했습니다.
이도종 목사의 조카인 이인신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 순교를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동생 기종을 만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동생이 집안을 잘 돌보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습니다.
토벌대 차들이 내려오다가 고밭이라는 입구에서 이 목사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경들이 “목사님 위험해서 못갑니다. 우리 같이 차타고 내려갑시다. 우리가 지금 탄환이 다 떨어져서 총을 더 쏠 수 없어서 철수하고 내려옵니다.
목사님 위험합니다. 내려갑시다.” 하는데, 이 목사님께서는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교회를 가야 한다. 나를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다. 나는 가야한다. 하면서 완강히 거부를 하셨답니다.
(이인신 권사, 이도종 목사 조카)
이 목사는 자전거를 타고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속칭 ‘고린다리’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 부근)근처에 다다랐을 때, 숲속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공비들이 튀어나와 길을 막았습니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이도종 목사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공비들은 “목사는 우리와 원수요, 반동이니 죽여야 한다. 죽여라!”고 외쳤고, 마지막에 기회를 주었습니다. “좋소, 당신이 목사라면 이번 난리 중에 우리 측이 승리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소? 그러면 당신을 살려줄지 모르지. . .”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도종 목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 순교했습니다.
“나는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종일뿐이다. 하지만 나 살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거짓되게 드릴 수 없다.”
이 일은 1년 이 지난 후 ‘뭉치’라는 무장대원이 잡혀서 취조 받는 중에 알려지게 된 사실입니다. 뭉치라는 사람에 의하면, 서슬 퍼런 공비들 앞에서 이도종 목사는 담대하게 마지막 설교를 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너무 잔인한 일이지만 공비들은 일제 때 참호로 파놓은 구덩이에 이도종 목사를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가방을 잠시 달라고 하더니 성경책과 찬송과 그리고 회중시계를 꺼낸 후 공비들에게 주고는,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순간 공비들은 흙과 돌, 가시덤불과 풀 가지들을 단단히 덮어씌우기 시작했고, 희미한 기도소리와 함께 이 목사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서야 생매장된 이도종목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제주 출신 1호 목사요 1호 순교자인 그의 유해는 대정교회 마당 유해 봉안비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우리 팀들이 방문한 순교성지 대정교회 마당 성경책이 펼쳐진 모양의 봉안비에는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는 그렇게 제주 땅에 떨어져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지는 기쁨!
이도종 목사의 순교의 씨가 뿌려지고, 한 알의 밀이 되어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직은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죽어야 열매를 맺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5절과 26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과 다른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제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 ‘기쁨’에 대하여 말씀 나누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포기할 때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때 찾아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늘 열어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십자를 통해서 왔다면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누리는 기쁨 역시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기인 사순절에 ‘기쁨’을 생각하며 우리는 또 다른 본질적인 신앙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란 과연 무엇이며, 언제 기쁘십니까?
오늘 성경의 본문이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은 ‘헌신’이라고 할 때, 고통의 순간들과 희생의 아픔만을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보셨습니다.
본문 25절과 26절을 보세요.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헌신의 끝이 아니라, 헌신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종점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만들어 내는 생명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헌신은 기쁨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순절 하면 ‘십자가’ ‘금식’ ‘절제’ 뭐 이런 단어가 떠올라야 정상 아닌가요? 아니,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기쁨"하면 "출생의 기쁨" "승진의 기쁨" "합격의 기쁨"이라든지 아니면 "성탄의 기쁨" "부활의 기쁨" 이렇게 해야 맞는 표현이라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넘치는 기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순절의 기쁨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기쁨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채워짐의 기쁨이 아니라 비움의 기쁨입니다.
나의 것을 이루는 것으로 찾아오는 기쁨이 아니라, 그 분의 뜻에 순종할 때 찾아오는 기쁨 말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본문 한 절을 가지고 자꾸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기쁨이 또한 우리에게 충만하게 넘치는 일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요?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계명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명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고난이 있었고, 그 사랑 가운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었기에 그것을 깨달아 아는 순간 기쁨이 넘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순간 우리들에게 물밀듯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잃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그 길을 걸으라]
이 책에 멋진 말이 나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줄 곧 천국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 특히 고난 주간을 지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기쁨과 평안함은 우리가 가고 있는 그 길이 천국을 향해 하고 있는 길이기에, 그 길을 즐기며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 힘들고 어렵게 달려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등산을 하며, 아니 차를 타고 아름다운 곳을 지날 때, 그저 목적지를 향해 지도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의 십자가는 무엇이고, 왜 희생이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명을 피하고, 우리의 안전과 평안함을 얻기 위해 선택했던 삶이 아니라,
때로는 작은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기쁨 말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요한복음 15장 11절의 말씀처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 .”
Living Bible에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When you obey me you are living in my love. . ."
그렇습니다. 희생하는 자, 순종하는 자,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 사순절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광야의 시험가운데서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당신이 감당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원하는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 대한 승리의 결과가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4장 11절을 보세요.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순절의 기쁨은 바로 유혹과 죄를 이기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참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우리 딸아이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 부부가 가장 염려하고 기도해야 하는 제목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누나를 둔 동생 역시 동일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늘 아픈 누나를 돌봐야 했기에,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쩌면 누나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엄마 아빠라기보다는 늘 옆에 있었던 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도 누나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동생 웅기를 찾아가 말을 하고,
선생님이 바뀌고 학년이 바뀌면 이놈이 선생님을 찾아가 누나에게 대하여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픈 예진이의 기도를 참 잘 들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동생이 외고를 간다고 하니까 자기와 함께 학교를 다녀야 되기에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외고 시험에서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같은 학교에 배정을 받았거든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기에 아이들을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때 미국에 보내서 공립학교에 잠깐 공부를 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 살던 고모는 웅기가 1년만 학교를 여기서 다니면 영어를 잘 할 수 있겠다고 맡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고모 부부에게 예진이 까지 맡기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웅기를 맡아 주겠다고 했지만,
혼자서는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던 누나 때문에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아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1년 만 미국에 있었더라면 영어를 아주 잘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웅기야! 네가 누가 때문에 포기한 그 1년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아서 갚아 주실꺼야!”
그리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이놈이 누나를 돌보면서 보냈던, 때로는 가슴 아팠던 시간들 때문에 이놈이 목회를 할 때에는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저의 가슴 속에는 잔잔한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어쩌면, 때로 자신이 져야할 부담과 십자가를 뿌리쳤더라면 결단코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 그리고 충만한 마음 말입니다.
바로 오늘 저의 마음에 생각나는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헌신한다는 것,
희생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희생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잔잔한 기쁨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깊은 기쁨은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것이라는 것을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김종우 선교사의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는 늘 환한 얼굴로 꿈을 이야기 하던 젊고 열정 많은 남아공 선교사였습니다.
땅을 사 놓고 학교를 시작하고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잘 하지 못했던..
그가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의 기도편지입니다.
그에게는 항상 고민이 있었습니다.
땡볕에 그을려 얼굴이 여기 사람들처럼 거매져도,
여기 사람들의 음식을 김치찌개보다 더 좋아했어도,
그는 늘 어떻게 하면 그가 진정한 남아공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런 고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소원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현지인들이 그에게 답해줬습니다.
당신이 여기서 죽은 후에 우리 땅에 묻히면 남아공 사람이 되는 거라고요.
그는 마침내 그가 그리도 소원했던 남아공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에게 자기가 힘껏 쥐었던 바톤을 넘겨주었습니다.
바톤을 받는 순간 그것이 플라스틱으로 된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이 땅을 사랑했기에 그는 바톤을 놓지 못했습니다.
때론 천천히 때론 빨리 때론 무식하게 그렇게 달렸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바톤을 쥐고 달렸습니다.
옆에서 그와 함께 달리면서 그는 늘 이야기 했습니다.
잘 버텨보자. 버텨보자.
그 분이 사랑함으로 끝까지 인내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잘 버텨보기라도 하자고요.
그는 늘 허허 벌판에 서서 나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다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찬양하는 모습도, 가정들이 회복되는 모습도, 교회들이 연합하는 모습도 다 보인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늘 눈을 감고 살자고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오려면 큰 산을 넘어야만 합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운전을 하며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저 산을 이미 넘은 우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한발 한발 다시 산을 넘어보겠습니다. 그가 나에게 준 바톤을 가지고 말입니다.
저에게 온 바톤에는 그의 땀 냄새가 흠뻑 배어 있습니다.
그 땀 냄새는 쉬이 없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
제가 쥐고 달릴 그 바톤은,
그가 쥐고 달린 것보다 가벼울지, 더 무거울지 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그가 나에게 남겨두고 간 나머지 경주를 힘을 다해 달리겠습니다.
아마 그처럼 빨리 달리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보다 더 빨리 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의 손에 있었던 하나님의 꿈들,
마지막 순간까지 손으로 고등학교 건물을 그려가며 흐뭇해했던 그의 미소,
그 꿈들로 인해 현재의 어려움을 웃음으로 견디었던 그..
쉬지 않고 뛰었던 그의 경주는 이제 끝이 났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일에서 자유해 졌습니다.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선교사는 삽질하는 사람도 아니고 배관을 고치는 사람도 아니고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현지인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그는 함께 삽질을 하며 페인트칠하며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3000개나 되는 못을 박은 후 수저도 들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이렇게라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나눌 사랑이 부족하니 그저 그 자신의 땀이라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일에서 자유해 졌습니다.
비전을 나누며 후원자들을 일으킬 일도, 미련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누군가들의 시선에서도
그는 자유 합니다.
잘한다고 말해주는 모든 격려로부터도 완전 자유해 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들을 섬기고 하는 모든 일에서 자유해 졌습니다.
그저 그는 이제 하나님과 커피를 마시며 놀기만 하면 되겠지요.
몇 년 전, “왜?” 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몇 년 동안 하나님과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요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왜요, 왜요..
대답은 없으십니다. 아니 대답을 이미 하셨는데 제가 못 알아들었겠죠.
그러나 그분의 신실하심을 가슴에 담고
다시 이 땅의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안고 있습니다.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안고”
그는 아프리카 최남단 땅 끝 바닷가에 뿌렸습니다.
우리가 늘 그 땅 끝에서 불렀던 찬송을 부르며 그를 하나님께 양보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한 줌을 뿌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께 드릴 열매는 그가 사랑했던 남아공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 바로 종우였다고요.
그리고 한 음성 더,
참으로 애썼다 내 아들 종우야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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