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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2:36 - 43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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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믿음, 거짓 믿음 /12:34-43/ 옥한흠 목사

2015-05-11 21:14:25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의 흐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와 유대 나라를 다니시면서

 

"회개하라. 천국 이 가까왔느라. "

 

하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만나는 무리들을 앞에 놓고 복음을 전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또 병든 자들을 치유하 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그 와 같은 모든 사역들을 마무리해야 될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 단하셨습니다. 36절 후반부를 보십 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참으 로 이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 다. 일체의 공적인 활동을 중단하시 고 잠적하신 것입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아니한 기간을 이용해서 조용 한 곳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격 려하고 교육하며 그들을 준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3장 이하에는 제 자들과 만나서 계속 말씀하시는 것 만 나오지 무리들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찾아 볼 수 없습니 다.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치료하시던 사 역은 이제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지난 3년 동안 하신 사역이 실패작이 아니었나 하는 느 낌을 받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직접 오셔서 권세 있는 말씀을 가지고 전 하시고 이적과 표적을 베푸사 사람 들의 모든 질병들을 치유하시고 심 지어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이런 엄 청난 일을 보여주셨는데도 3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는 사람이 그 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37 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표적 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 지 아니하니.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 일반 적인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사역이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닦 아 놓으시고 우리가 믿고 예수님 앞 으로 가는 풍성한 열매는 성령과 제 자들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그로부터 불과 한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엄청난 열매가 맺히게 되었음을 분명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하신 사역만을 놓고 볼 때는 결과가 너무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 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이렇게 3년 동안 복음을 듣고도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기현상을 두고 이미 예언된 일 이니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투 로 말씀합니다. 이사야 라고 하는 선지자가 오래 전부터 이런 불신의 세대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할 것 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38절 이하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 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 까? "

 

무슨 뜻인지 금방 안 들어올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누가 우리의 말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이여, 우리 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적 기사를 행하고 하나님의 강한 팔을 보여 줄 때 예수님을 믿고 돌아온 사람이 누 가 있습니까? 모두가 귀를 막고 안 들었습니다. "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야는 장차 예수님 당시에 나타날 불신의 세대를 내다보고 이미 이런 예언을 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까 이 예언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세대는 왜 이적 기사를 보고도 그 마음을 주님 께로 돌이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까요? 39절 이하에 그 이유가 나옵 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 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 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라. "

 

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 고도 안 믿었습니까? 40절 말씀은 하나님이 그 눈을 가려 놓았으니 못 믿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 나님이 그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 버리셔서 믿을 수가 없었다는 말처 럼 들립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깨닫 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을 받을 까 싶어서 아예 그렇게 못하도록 일 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떤 섭리에 의해 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십니 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예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버리고 무 슨 소리를 해도 듣지 못하도록 그 귀를 콱 막아 버려서 마지막까지 하 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다가 저주받 는 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든 그런 경 우가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나 예수님 당시의 빌라도, 대제사장 같 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눈과 귀를 아 예 막아 버린 좋은 예라고 할 것입 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이렇 게 완악하게 되도록 손을 쓰셨을까?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그들은 특수한 경우 에 해당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 다. 그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일반 적인 경우와 같이 놓고 보면 안됩니 다. 사실 40절의 말씀은 특수한 경 우에 대해 이야기라기보다 일반적인 경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이 못 믿도록 방해를 한 것이 아니 라는 말입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이 믿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볼 때 40절 말씀을 읽을 때 조금 각도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고 했습니다. 하 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눈앞에 와도 그분이 하나 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 볼 수가 없 을 만큼 죄로 인해서 그 눈이 어두 워져 있습니다. 이미 어두운 사람인 데 그를 또 어둡게 할 필요가 있을 까요?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두운 존재들인데 더 어둡게 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사람은 이 세상에 날 때부터 마음이 강퍅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돌 처럼 굳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 옵니다. 미련한 마음을 가지고 나옵 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 을 수가 없습니다. 깨달을 수가 없 습니다.

 

인간은 그 마음이 돌짝 밭 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아서 아무리 귀가 아프도록 들려줘도 깨닫지 못 합니다. 날 때부터 이미 완악한 데 또 완악하게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 까? 따라서 하나님이 눈을 멀게 했 다, 완악하게 했다는 말을 액면 그 대로 들으면 안되겠습니다.

 

이 말씀은 완곡한 표현법으로 이 해해야 합니다. 눈먼 사람은 눈먼 그대로 내버려두셨고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완악한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 으로는 깨달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 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예수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고 회개하라고 해도 회 개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데 열 을 내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을 놓고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셨다 "고 했습니다. 로마서 124 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 에 내어버려 두사. "

 

26절을 보십 시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 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 셨으니. "

 

28절을 보십시오.

 

"저희 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 대로 내어버려 두사. "

 

하나님이 내 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눈을 멀 게 하셨다 ",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 다 "

 

하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로 받아들이려면 초자연적인 어떤 역사가 그 마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100 퍼센트 불가능 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눈을 뜰 수 도 없고 우리 힘으로는 마음을 부드 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 나님의 아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믿을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하나 님의 은혜가 100 퍼센트 역사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부 드럽게 해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됩 니다.

 

눈먼 눈을 씻어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셔야 됩니다. 그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백 퍼센트 기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 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되었 습니까?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 세 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내 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할렐루 야! 나 같은 것이 예수님을 나의 구 주로 발견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 같은 것이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 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할 렐루야! 이것만큼 위대한 기적이 없 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 런데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많 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3년 동안 그렇게 온갖 이적 기사를 행하셨는데도 열매가 그렇게 신통치 않았던 것입니다.

 

거짓 믿음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특별히 주목하며 묵상한 것이 두 가지 있습 니다. 하나는 거짓 믿음에 대한 것 이고, 또 하나는 약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당시의 일 반적인 대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 들로 믿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12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예 수님 주변에 몰려 있는 많은 청중들 은 조금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왜 냐하면 그들은 사흘 동안 무덤에 있 다가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불 러 일으켜 무덤에서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그 기적을 보자마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 니다(11). 그뿐입니까?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 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이스라엘 의 왕이여. "

 

하고 환호하면서 하루 종일 열광하던 무리들입니다. 그리 고 하늘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하나 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로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12장에 나오는 일반 청중들은 거의가 믿는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 입니다. 겉으로 보면 믿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러니까 대부분의 칼라가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칼라입니다. 이 것이 12장에 나오는 청중들의 일반 적인 경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 이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17).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 제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 에서 그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었 습니다. 분위기를 따라서 믿는 것처 럼 행세하는 것은 다 거짓 믿음입니 다.

 

이와 같은 거짓 믿음을 가진 사 람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잘 따진다는 것입니다. 잘 따지고, 잘 싸우고, 논쟁도 잘하고, 마음에 별의별 의심을 품고서 끝도 없는 질 문을 늘어놓습니다. 이것이 보통 거 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말이 많습니다. 뭔가 질 문이 많고 끝없는 논쟁을 하기를 좋 아합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면 잘 듣지를 않고 자기 생각에 몰입이 되어 가지고 자기 소리만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 역시 벌써 그런 티를 내고 있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 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 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 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도 요한은 이에 덧붙여 그 뜻을 설명합니다.

 

"자기 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 심이러라. "

 

여러분, 땅에서 들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기억하십니까? 제가 지난주에 두 가지 의미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죽으 시는 것이요, 둘째는 승천하시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청중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 예수님이 죽으신 다는 이야기로구나. '하고 그 의미를 파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 뜸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34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율법 책에 보 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영 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데 너는 왜 죽는다고 하느냐? 네가 죽는다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 보니 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닌 것이 틀림없지 않느냐? "

 

거짓 믿음 을 가진 사람들은 이처럼 뭐라도 꼬 투리가 될 만한 게 보이면 트집을 잡고 따지려고 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입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토록 계승될 것이 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토록 쇠하 지 않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약 에도 보면 그렇게 말씀하는 성경 말 씀들이 있습니다. 시편 89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내 위를 대대에 세우리 라. "

 

그러니까 '영원히 ''대대에 ' 하는 말은 죽음이라든지 쇠한다든지 망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 아닙니 까? 에스겔 3725절을 보십시오.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 라. "

 

여기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 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왕이 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까 구약 성경에 있는 이런 좋은 말 씀들을 이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은 영원히 왕노릇 하실 분이므로 그분은 죽는 것도 없을 것 이요 이스라엘 나라에 파라다이스를 세워서 우리도 죽지 않게 하실 것이 다. '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가 죽는다고 하시니까

 

"네가 무슨 메시아냐 "하고 따지고 들었던 것입 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십 니까?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배우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른 복음을 전하면 잘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쏙쏙 뽑아 가지고 마음에 담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시비를 걸고 들어 오는 군중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어 릴 때부터 구약을 배웠던 유대나라 사람들은 좋은 것만 쏙쏙 뽑아 가지 고 알고 있습니다. 나쁜 것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아예 무시 해 버립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말씀 을 보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보면 예수님이 영 원히 다스린다는 말씀도 있지만 그 영원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통 치를 얻기 이전에 예수님은 먼저 죽 으셔야 합니다. 세상의 죄와 허물을 짊어진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부활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 나님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다고 말 씀합니다. 시편 221절을 보십시 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주님 의 고난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 사야 535절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 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면 먼저 그 살이 찢겨야 합니다. 채찍에 맞아야 됩니 다. 죽어야 됩니다. 상처를 입고 피 를 흘려야 됩니다. 이 십자가의 고 난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영원히 죽 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 되신다고 성경은 분명 히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 고 고난받아야 된다는 이런 말씀을 다 재껴 놓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안보는 것입니다. 메시 아가 죽어야 되는데도 안 죽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죽음 으로써 영원한 왕이 된다고 말씀하 셨는데도 그 말씀을 모르니까

 

"네가 죽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

 

하고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이게 다 그 믿음이 엉터 리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리 중에는 이런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마음속 에 의심을 가지고 씨름하고 바른 말 을 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조금 가까이 와서 보면 되는 데 보려고도 하지 않고 늘 자기 속 에 남아 있는 어떤 선입견이나 자기 가 알고 있는 작은 상식을 가지고 계속 트집을 잡습니다.

 

여러분 가운 데 행여나 이런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면 주의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께 부탁 드립니다. 성경을 펴 십시오. 그리고 성경 앞으로 나와서 어린아이처럼 정직하게 읽어보십시 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알게 될 것이고 영 광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무리 오해가 많이 싸여 있는 사람끼 리라도 직접 만나서 자주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오해가 풀리고 서로가 마음에 정이 가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우 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을 통해 그분을 자주 만날 생각은 않고 성경 은 덮어놓은 채 마음에 있는 의심을 가지고 씨름한다면 안 믿으려는 사 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믿으려고 한 다면 그런 태도는 절대 가지면 안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나 와서 조용히 성경을 펴놓고

 

"하나님 이여, 저의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 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저에게 부드 러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 정직한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게 하옵소서. "

 

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마음은 닫아 놓고 계속 의심에 사로잡혀 질문만 던지며 시비만 걸면 안 되는 것입니 다.

 

약한 믿음

 

두 번째로 제가 생각해 보았던 것은 약한 믿음입니다. 제가 약한 믿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42 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천하가 예수를 안 믿는 대세로 흘러가고 겉으로 믿는 것처 럼 하는 사람도 실상은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2절을 보면 참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

 

참 희한한 말씀입니다. 관원이라고 하면 요즘 우리 사회로 이야기하면 상당히 높은 지도자층에 속한 사람 들입니다. 그 당시 관원 하면 유대 나라에서 100명 미만에 속하는 아주 존경받는 귀족 계급이요, 권세가 막 강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온 사 람 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다 누리 고 있는 이 사람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 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

 

그들은 믿기는 믿는데 바리새인들이 두려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나게 말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서

 

"나는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 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라고 공적 으로 시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리고 또 한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그랬습 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유대교 의 종교 분위기 아닙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시인을 하게 되면 관원들처럼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지위가 다 날아 갈 수 있습니다.

 

성전에 가서 제사 지내는데 참여할 수 없도록 쫓겨 날 수도 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재산상의 손해도 입을 수 있고, 결 국은 사회적으로 고립이 되는 핍박 을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회에서 그런 불이익을 당했습니 다.

 

그런데 일반 평민들이 그런 불 이익을 당한다면 그렇게 표가 안 날 지 모르지만 관원이라고 하는 아주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면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때문에 당할 불이익을 겁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3절을 보십시오.

 

"저 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그들은 마 음가짐이 바르지 못했습니다. 예수 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항상 그 마 음에서 가장 우선 순위가 되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 을 예수님보다 앞세웠고, 하나님보 다 앞세웠습니다. 자기를 먼저 위하 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위하고, 하 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을 더 많 이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들은 신앙 고백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예수 믿다가 손 해 볼까 싶어 날마다 부들부들 떨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 나님보다 자기가 더 앞서고 있고, 자기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놓고도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 "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엉터리 믿음 같은데,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 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을 놓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드러내놓고 자신이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 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로마서 1010절에 이런 말씀이 있 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 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그러니까 아무리 속으 로 '믿습니다 ' 해도 자기 입으로 예 수님을 고백하지 못하면 그 믿음은 의심할만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서 마태복음 1032-33절에서 주 님은 굉장히 끔직한 말씀을 하셨습 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 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 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

 

이 얼마나 무서 운 말씀입니까? 이런 말씀에 비춰 보면 예수님을 드러내놓고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라고 말 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 문은 그들을 가리켜 여전히 믿는 자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기 위해서 값 을 치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세상이냐? 예수냐? 예수를 선택했 을 때 세상에서 핍박받고 환란 받고 예수 때문에 내가 많은 고통을 당하 며 손해를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어 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는 진주와 같습니 다. 누구든지 진주를 발견했으면 그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해서 자기가 가 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지 고 돈을 만들어서 진주가 묻힌 밭을 산다고 했지요? 예수 믿는 것은 바 로 이것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예수 님 한 분을 소유하고, 예수님을 통 해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핍박을 당하면 핍박을 당할 것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 믿는 것은 포기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기쁘게 받는 것이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런 의미 에서 지위가 날아갈까, 손해 볼까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런 관원 을 놓고 믿는다고 하는 것은 참 이 상합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 영광도 놓치고 싶지 않고 하늘의 영광도 놓 치고 싶지 않고, 이세상의 행복도 놓치고 싶지 않고 천국의 복락도 놓 치고 싶지 않은 아주 욕심 많은 사 람들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 예배 때 박은혜 전도 사님이 오셔서 참 기가 막힌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못 들으 신 분이 참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 다. 정말 불쌍해요. 정말 불쌍해요. 기회는 한번 놓치면 영원히 돌아오 지 않는 법입니다. 테이프도 안 만 들 겁니다.

 

이 자매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 자매인데 배운 것도 별로 없 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그는 중국에 서 문화 혁명이 사람들을 한참 힘들 게 핍박할 무렵 가만히 남 몰래 라 디오를 틀어놓고 듣다가 극동방송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 수님이 나의 구주요,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 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 간만 되면 만사를 제쳐놓고 방송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 조용히 방 송을 듣고 있는데 설교자가 설교를 끝내면서 이런 말을 했나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 분이 과연 예수 믿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하는 대로 기도를 따라 하십시오.... "

 

설교자가 그런 말씀을 하니까 이 자매는 그대로 따라했습 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

 

"예수님은 나 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 니다. "

 

"예수님은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 한참 이 렇게 따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확 쏟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 놀래 가지고 벌떡 일어나서 눈을 떠보니까 언제 들어왔는지 자기 남편이 들어와 가 지고 국수를 먹다가 뜨거운 국수 그 릇을 그냥 머리에다가 쏟아 버린 것 입니다.

 

"이 여자가 무슨 개딱지 같 은 소리하고 있나? "하면서 머리에다 그대로 엎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꺾이지 않았 습니다. 중국에는 공산당하고 이렇 게 서로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의 명색을 유지해왔던 삼자교 회가 있습니다. 이제 라디오만으로 는 만족하지 못해 매 주일 마다 삼 자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은 핍박의 정도를 몇 배 나 늘렸습니다. 얼마나 핍박을 하는 지 교회만 다녀오면 그날 저녁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계속 두들 겨 맞는 것입니다. 너무 두들겨 맞 아서 양쪽 귀가 다 터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10년 동안을 두들겨 맞으며 살았습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안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 나를 택할래? 예수를 택할래? "하고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나는 예수님 도 택하고 당신도 택할 겁니다. "

 

라 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판사 앞에 끌려가서 강제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쫓겨와서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 가슴에 얼마나 불이 붙는지 모릅니 다. 저는 그 자매님의 말씀을 들으 며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 다.

 

"한국 교회에 와 보니까 모든 성도들이 대부분 배에 기름이 줄줄 흐르도록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도 이상하게 기도할 때 엎드리기만 하 면 하나님한테 뭘 그렇게 많이 맡겨 놓은 게 있는 지 '주여, 주시옵소서. ' 하고 날마다 달라고만 합니다.

 

중국 성도들은 그렇게 환란과 핍박을 받 으면서 신앙 생활을 해도 무엇을 달 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을 감 사합니다. 우리를 들어 사용해 주시 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게 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주시옵 소서 '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

 

그 러니까 교회 오면 날마다 달라고만 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 생활 하 는 사람들이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 들이겠느냐는 뼈아픈 충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 까?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천국 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환란을 당하 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예수 믿으 면서 믿음을 바로 가져 보려다가 두 들겨 맞는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면에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수 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십시오. "

 

하고 당 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참 믿음을 가 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런 의미에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관 원들을 놓고 성경이 믿는다고 말씀 하는 것이 놀랍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관원들은 속으로는 믿습니다. 속으 로는 믿는데 겁이 나가지고 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믿 음은 믿는다고 말할 수는 있으되 약 한 믿음이요, 어린 믿음인 것입니다.

 

어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 때문 에 환란을 당하라고 하면 겁이나 도 망도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 십시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 녔지만 막판에 생명이 위험하니까 세 번씩이나 눈 하나 깜짝 하지 않 고

 

"난 예수란 사람을 모른다 "

 

하고 부인해 버리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나 믿음이 약하면 이런 어려움이 있 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은행에 저금했 다가 찾아 쓰는 돈과 같은 것이 아 닙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과정을 거 쳐야 하는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처 음에 믿음이 약하고 어리면 이 관원 들처럼 모순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든, 가정에서든 겁이 나 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

 

하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조금만 불 리하다 싶으면 아예 안 믿는 것처럼 행세하려고 하고, 마음은 하나님보 다도 자기가 항상 앞서 있는 이런 모순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믿 음이 아직 어리고 약하기 때문입니 다.

 

이런 믿음은 빨리빨리 키워서 잘 못된 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하나님 께서 교회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의교회를 우리 모두 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 십니까?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어머 니는 양육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 니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입혀 주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 어 머니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은 처음 부터 강한 믿음, 좋은 믿음이 아닙 니다. 어린 믿음인 줄 아시기 때문 에 우리 믿음을 키워주라고 지상에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 와서 이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잘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와 같 은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글쎄 또 있는 지는 모르지만, 얼마 나 좋은 교회입니까?

 

이 교회에 와 가지고 이 교회가 지도하는 대로 부 지런히 배우고 열심을 내서 예수님 을 알기를 원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 아보려고 몸부림치면 하나님께서 여 러분의 믿음이 이 교회 올 때는 아 무리 어린 믿음이고 작은 믿음이었 다 할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좋 은 믿음, 큰 믿음으로 바꾸어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주간에 저는 금년 상반기 중 새가족반을 마친 분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500명 정도 되는 분들이 참석을 하셔서 은 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김 영수 성도라고 하는 분이 간증을 했 습니다. 소아과 의사인데, 이분은 어 려서부터 예수를 잘 믿는 분위기에 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머리 가 커 가지고 자기 생각을 하게 되 니까 조금 빗나간 것 같습니다.

 

한 때 김용옥씨의 동양 철학 관련 서적 이나 불교에 관한 책들, 에리히 프 롬이라고 하는 분의 책들을 읽으면 서 심취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관 심이 없었습니다. 교회하고도 거리 가 많이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랑 의교회로 옮겨오게 되었는데 이 교 회 와서도 처음에는 새가족반에 안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뒤에 서 떠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떤 계기를 통해 뒤늦게 새가족반 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 다. 자기의 어린 믿음이 어떻게 변 화되었는지 그분의 간증을 한번 들 어보십시오.

 

"세상의 온갖 책들을 즐겨 읽으면서도 성경은 거들떠보지 도 않았던 나, 하나님께서 오래 전 부터 자녀 삼아 주심을 깨닫지 못하 고 하나님은 어쩌면 인간의 관념의 소산일지도 몰라. 성령의 은사를 받 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미세한 착각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 지상 에서는 온갖 불의한 사람들이 득세 하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역 사를 주관하고 계실까?

 

등등 하나님 을 모독했던 나, 온갖 욕심과 정욕, 불신용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서 육신이 병든 것은 알아도 영혼이 황폐하여 지고 깊은 병에 걸린 줄을 모르고 있었던 나, 하나님의 참 자 녀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나에게 당신 스스로 내 마음속에 들어와 주신 예수님, 나의 죄를 씻겨 주시기 위해 당하신 십자 가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여 주 신 예수님, 나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아시고 위로하여 주시는 예수 님, 이 어찌 좋은 예수님이 아니겠 습니까? "

 

그 점잖은 남자 분은 간증 을 하면서 내내 울어댔습니다. 새가 족반에 들어가서 살아 계신 예수님 을 만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 리가 어린 믿음, 약한 믿음에 그대 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 평생을 살다가는 나중 에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시고 계속 하 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약한 믿음, 어 린 믿음을 키워 주시려고 하는 하나 님의 선하신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 므로 여러분이 이 교회를 통해서 순 종하고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알 기를 사모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오 면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면 여러분의 작은 믿 음이 금방 큰 믿음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 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남 의 눈이 두려워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 믿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 랍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세상 에서 손해 볼까 겁이 나가지고 항상 예수 믿는 사람답게 담대하게 행동 하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예수님을 포 기하지 못해. ' 하는 자세를 가지고 신앙 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앞세우는 이와 같은 잘못 된 것들이 완전히 뿌리가 뽑히고 오 직 예수, 오직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에 마음이 집중되는 참 믿음의 사람, 강한 믿 음의 사람, 성숙한 믿음의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 주시기를 저는 날마다 간 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 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 다

 

 

 

 

 

 

 

 

12:1-8/ 10:38-42/ 신앙의 향기 / 한경직 목사

2014-08-25 20:42:07

 

예루살렘에서 동남향으로 약 5리쯤 가면 감람산 동편 기슭에 한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베다니라고 부릅니다. 비록 작은 마을이나 널리 알려졌습니다. 거기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 오라비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으며, 또 주님께서 마지막 주간에 이 가정을 종종 방문한 까닭입니다. 이 시간 특별히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의 신앙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 배우는 신앙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그 가정을 방문하실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기에 바빴고, 그러나 그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두 자매가 다 같이 주님을 사랑했고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특별히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신앙생활의 한 특색인 듯싶습니다. 일도 귀하지만 그보다도 더 귀한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먼저 배워야 일도 바로 하고 효과 있게 합니다. 먼저 진리를 알아야 바르게 행동합니다. 잘못된 길로 나가지 아니합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유대인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들은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열심이 있는 교회입니다. 또 일도 많이 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지식이 부족한 점이 아닌가 합니다. 성서적 지식이 부족하여 온갖 사이비 종파와 이단적인 사상에 미혹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싶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이니 전도관이니 통일교 등등 각종 그릇된 종파에 너무나 쉽게 끌려갑니다.

 

열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서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지식은 성경을 배우는 데서 옵니다. 한국 교회는 눈감고 손뼉치기에 열중하는 부흥회보다도 조용히 성경을 공부하던 한국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방향을 옳게 잡을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는 맙시다. 마르다의 봉사를 절대로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배우며 봉사하고 배우며 전도하는 신앙이 더 건전합니다.

 

. 바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신앙

 

또한 누가복음에 기록된 대로 음식을 준비하기에 분주하던 마르다는 주님께 와서 주님, 동생이 모든 일을 제게만 맡겨서 너무 바쁩니다. 좀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별것을 가지고 다 걱정하는구나.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주님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편을 택할 줄 아는, 곧 분별력이 있는 신앙은 실로 귀합니다. 여기에는 사고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사냥을 좋아하는 에서가 종일 산에서 헤매다가 저녁에 돌아오니 물론 매우 시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때에 마침 동생 야곱은 들에서 붉은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허기진 에서는 그 붉은 것을 좀 달라고 요구하였지요. 그때에 꾀 많은 야곱은 곧 대답하기를 형님 그 장자의 명분을 내게 주세요. 그러면 이 팥죽을 올리리다.” 그때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서는 장자의 명분보다도 팥죽 한 그릇을 택한 어리석은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룻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압니다. 룻은 본래 이방나라 모압의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성경의 한 책을 이루었습니다. 룻기입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정이 흉년을 만나 멀리 모압으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두 아들이 있어 자연히 모압 여자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불행하게도 그 집주인이 먼저 죽고 또 수년 후 아들 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결국은 어머니 나오미와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늙고 외롭게 된 나오미는 고향이 그리워 고국을 향하여 떠나게 되니 두 며느리도 눈물을 흘리며 뒤를 따랐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눈물과 함께 간곡히 그들의 장래를 위하여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때에 오르바는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온 이야기 우리는 다 잘 기억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갈까,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갈까, 그 두 갈래길에서 룻은 좋은 편을 택하였습니다. 이 선택이 결국은 룻으로 하여금 오늘 우리가 아는 룻으로 만든 것입니다. 좋은 편을 택할 줄 아는 지혜야 말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귀합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택할 줄 아는 신앙생활은 매우 귀합니다.

 

교회 일에도 이 우선순위가 있는 줄 압니다. 한국 교회로서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5천만의 복음화운동일 것입니다. 이 목적을 빨리 달성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론 온 교회가 복음 전파에 힘써야 될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전도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들인데 물고기를 많이 잡으려면 먼저 물고기가 많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물고기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첫째는 군대, 둘째는 학원, 셋째는 공장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어디보다도 먼저 군대전도, 학원전도, 공장전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또 현대의 모든 장비를 이용해야 합니다. 매스컴 전도가 필요합니다. 곧 문서전도, 방송전도가 필요합니다. 좋은 편을 택할 줄 아는 지혜, 우선순위를 바로 정할 줄 아는 신앙생활과 교회 봉사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실로 절실히 요구되는 바입니다.

 

. 사랑과 전적 헌신의 신앙

 

오늘 읽은 요한복음 12장에는 마리아의 신앙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이 베다니 마을에서 주님을 위한 한 작은 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으니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유대 풍속에는 지극히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향유를 붓는 풍속이 있은 모양입니다. 옥합에 넣은 향유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때 노동자 하루의 품값이 한 데나리온 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바느질을 하여 이 돈을 모았다고 하면, 300일 곧 거의 1년이나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향유를 왜 예수께 부었을까요? 가룟 유다가 비평한 것처럼 왜 낭비하였을까? 또 이 일은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무슨 칭찬을 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 또한 무슨 더 큰 축복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한 일도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였을까요? 한마디로 이 일은 그의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메시아임을 믿었습니다. 더욱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큰 이적을 보고 예수는 과연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참 사랑에는 이해타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 그러한 향유를 부을 뿐더러 여자에게는 생명이라고 하는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곧 생명 전체를 온전히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는 마리아는 주님을 왕으로 높이신 것입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터인데 누군가가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그 특권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이 마리아에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크신 경륜 가운데서 부여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둘째는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장사를 미리 향유를 부어 준비하였습니다.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 몸을 향유로 감싸 그 장사를 미리 준비한 일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런 특권이 또한 마리아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셋째는 향유 냄새 곧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마리아의 신앙의 향기는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온 세계에 가득한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예수님 말씀 그대로 마리아의 이 이야기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또한 들리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도 마리아의 받는 축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Con.

 

봄 동산에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가득하면 벌과 나비는 부르지 않아도 사방에서 모여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꽃동산입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이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아 이 교회 안에 믿음과 사랑과 봉사와 희생과 헌신의 향기가 가득하면 이 교회는 자연히 부흥합니다. 이 외롭고 쓸쓸한 세상에 사는 메마른 영혼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과 화평을 맛보기 위하여 벌처럼 나비처럼 모여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마리아의 신앙의 후계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 자매님들은 이 마리아의 신앙의 향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신앙과 신앙의 원인 /12:37-43

2023-08-24 10:23:58

 

철저한 불신자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든지, 어떤 일을 행하셨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든지, 구세주이시든지, 믿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더라! 기적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표입니다. 그 기적의 하이라이트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기적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나병환자를 고친 모든 기적의 결정판이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일입니다. 이런 기적을 보고도 안 믿는다면 더 이상 기적을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지 않습니다.

 

꽤 오래 전, 개척 당시 얘깁니다. 어떤 임종을 앞둔 분이 있어서 찾아갔습니다. 연세도 많고 병이 위중한데 정신은 말짱했습니다. 대개 세상 떠날 때 쯤 되면 마음도 약해지고 무슨 말을 하면 잘 듣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주 고집이 강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전혀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또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마음이 좀 누그러졌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전합니다. 그냥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습니다. 평생 믿지 않다가 병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고 떠나신 분들이 여러 분이 있습니다.

 

안 믿을 사람은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안 믿습니다. 믿을 사람은 죽으려 하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왜 어떤 사람은 기어이 믿고, 어떤 사람은 기어코 믿지 않을까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불신앙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38) 하나님께서 불신앙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 예고대로 사람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임의로 이루어진 생애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생애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성취된 구약 예언을 53회나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베들레헴 탄생, 애굽에의 피신, 헤롯 임금의 유아 학살, 예수님의 나사렛 거주, 선구자 세례 요한의 행적, 예수님의 가버나움 전도, 병자들의 치유 사역, 나귀 타고 행진하신 일, 유대인의 배척, 가룟 유다의 배반과 죽음,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일, 십자가에서의 목마름, 뼈가 깨지지 않음, 죽으심, 부활, 승천 등등. 예수님 생애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거의 다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도 예언대로 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다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여줬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믿었을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39-41)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고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

 

얼핏 들으면 이 말씀은 참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들의 마음을 악하고 나쁘게 만드셔서, 회개하지 못하게 하시고,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드셨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왕 바로를 강퍅하게 만드셨다든지,(4:21,7:3,9:12) 어떤 사람들에게 걸림돌과 함정과 올무가 되신다든지(8:14),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사람들을 일부러 악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전혀 고의성이 없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13)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의 회개를 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의 죄악 된 본성을 그대로 놔두셨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더 이상 나쁘게 만들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놔둬도 최대한 악하고, 나쁘고, 고약합니다. 그걸 뭐 굳이 더 악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충분히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물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성경을 보세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죄를 짓게 하려고 어려서부터 굳이 죄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감옥에 간 범죄자들을 보세요. 살인, 간음, 강도, 도적질, 사기, 폭력을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배운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대학에 보세요. 살인 학과가 있습니까? 간음 학과, 절도 학과, 사기 학과, 폭력 학과가 있습니까? 그런 과목 전공한 사람을 보셨어요? 그런 일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자동 습득입니다. 사람마다 간섭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저절로 죄인이 됩니다. 반대로 의롭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게 하려면 엄청난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 되는 일은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그냥 버려두셨더라면 지옥에 떨어질 죄인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킨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 할아버지라 해도 다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하고 지옥 갈 것이다! 오늘 불신 세상이 그렇습니다. 굳이 하나님 믿지 말라고 권하고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지 말라고 고사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다 그냥 안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이 그냥 놔두셨다면 다 불신자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한 자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40)

 

이 말씀은 이사야 6장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6:9-10)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고, 마음을 둔하게 하라!

 

육체적인 눈과 귀를 말씀한 게 아닙니다. 마음의 눈, 마음의 귀, 영혼의 마음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눈과 귀가 멀었습니다. 보고 듣지 못합니다. 요즘 고 아무개란 사람 때문에 국민 모두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 7살 먹은 아이를 납치하고 성폭행 한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런 범죄자를 대하는 사회적인 인식입니다. 범죄자의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 다룹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일대학에 다니던 보니 갈런드라는 여학생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녀와 사귀다가 헤어진 남자친구가 밤중에 침실로 들어가 망치로 머리를 사정없이 가격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5주 동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해자인 남학생을 변호하기 위해 모금을 했는데 무려 3만 달러가 모금되었습니다.

 

그는 5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서 학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다른 대학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희생자를 위한 운동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해자를 위한 인권 운동이 소위 문명국가라는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추세입니다. 19894월 뉴욕에서 조깅을 하던 28세의 여인이 10대 소년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잔혹하게 구타하고 겁탈하여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의견을 쏟아냈습니다. “이 청소년들은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며, 그들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표출했다. 사회는 이 소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 한다.

 

그들은 분노와 울분에 싸여 있다.” 뭐 이런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들은 체포되었을 때, 농담을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 쇠파이프로 피해자의 머리를 때렸느냐고 물었더니, 재미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울분은 무슨 개뿔이나, 그냥 눈이 멀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완악한 범죄자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피해자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죄자를 동정하고 옹호하고, 처벌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이 마치 진보적인 생각인양! 정말 개 같은 세상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흉악무도한 범죄를 한 번씩 당해보기를 강하게 권고합니다. 그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할는지?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해자의 인권만 들먹입니다. 사회적인 책임을 앞세워 개인적인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문제는 범죄에 대해 불감증의 사람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뻔뻔하고 당당합니다. 살해당한 사람보다 살인범이 더 큰 소리칩니다. 사기 당한 사람은 고통 받고 사기 친 놈은 떵떵거립니다. 성폭행범은 안면 보호를 받고 폭행 당한 사람은 심문을 받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지고, 눈이 멀고, 귀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보면, 라스코리니코프는 전당포 주인 노파를 당당한 마음으로 살해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소설 백치에 보면 주인공인 므이쉬킨 공작은 한 없이 순진해서 백치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나오는 또 다른 백치가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없는 죄에 무감각한 백치입니다. “백치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백치입니다. 뇌 속에서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죄가 얼마나 나쁜지 보지 못합니다. 듣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못하고 고치지 못합니다. 그런 죄의 백치들이 바로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냥 놔두면 다 지옥 갈 사람들입니다. 본인이 시인하든지 말든지, 성경은 그렇게 진단합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오늘 불신앙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렸지만 불신앙이 주 관심사는 아닙니다.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불신앙을 언급한 것뿐입니다. 세상사람 전부가 안 믿는다 해도 우리는 믿습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완악하게 안 믿는데, 우리는 믿게 되었을까요? 그 점을 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2-43) 관리라면 성전 관리들, 혹은 공회원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으로 믿었지만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출교는 유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출교 당한 사람은 유대인들의 어떤 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출교 당한 사람 곁에는 4규빗(2미터) 이내로 접근이 금지됩니다. 그와 교제할 수 없고, 물건을 팔지 못하고, 같이 식사하지 못합니다. 죽어서도 그 시체에 돌을 던지고, 그를 위해 우는 것이 금지됩니다. 이런 조치가 두렵기 때문에 표면상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하고 나타내지 못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믿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같은 사도들과 초기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6-17)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하나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불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천국 시민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철저하신 주권과 간섭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1-16)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원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열심 낸다고 될 일도 아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기왕이면 숨어서 믿지 말고, 용기 있게 드러내어 믿으세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표시나게 믿으세요. 예수 믿는 것이 외형상 걸림돌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업상의 관계를 맺는데 나는 신자요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학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불편해집니다. 대통령이 장로라고 별의 별 반기독교적인 도전이 다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성인 신자들은 소위 말해서 점잖게믿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를 찾아 와도 남의 눈치 보며 한 밤중에 찾아옵니다.(3:1) 아리마대 요셉처럼 홀로 소신껏행동은 하되 남에게 권면은 하지 않습니다.(19:38) 소극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데는 반대하되 적극적으로 믿으라고는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단계가 아니라, 예수를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단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워 할 상대가 아니라 복음으로 정복해야 될 상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러내 놓고 예수를 자랑한다고 해서 정작 손해나는 일은 없습니다. 사업을 망칠 염려도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깨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사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패배자가 아니요, 세상을 이긴 승리자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세요. 세상 영광에 너무 기대지 마세요. ‘영광이라는 말은 칭찬, praise’ 혹은 존경,esteem'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칭찬이나 존경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칭찬과 영광은 사람들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높이면 얼마든지 높아집니다. 에스더처럼 하나님이 뽑으시면 천만인 중에서 왕비로 뽑힙니다. 세상 영광도 마귀의 손에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오늘 나는 세상살이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소리 안하고 숨죽이고 살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세상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 영광을 먼저 구하면 세상 영광도 따라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영광을 버리고 세상 영광을 취한다면 결국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잃어버립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 버렸습니다. 더구나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3:7-9)

 

그러므로 담대하게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자랑하세요. 사람들을 두려워 마세요. 세상 이익 날아가 버릴까 염려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의 패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더불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세요. 말과 행동으로 자랑하십시요.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생애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할렐루야!

 

 

 

 

 

날 고치지 마세요 /12:34-43/ 김도완목사

2023-04-16 08:52:07

 

1. 무지의 어둠

 

베트남전쟁은 미국인에게 매우 아픈 기억입니다. 미국역사 최초의 패전일 뿐 아니라 시작부터 조작된 통킹만 사건으로 일으킨데다 50여 명의 유아를 포함한 500여 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미라이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전쟁범죄를 자행한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정신과의사 스캇 팩은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이런 전쟁범죄 뿌리에는 미국인들의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무지 때문에 악인이 되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파병미군 중 사병들은 거의 베트남전의 의미를 알지 못 했고 장교들은 10% 정도만이 안다고 답했지만 그들의 앎 조차도 군사령부가 홍보한 정훈자료가 전부였습니다. 즉 미군들은 베트남전의 의미와 목적도 모른 채 베트남인들을 악마화한 채로 총을 쏘았고 이런 상황에서 종종 양민학살을 자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당시 미국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인 대부분은 수렁으로 빠져든 베트남전에 투입할 병사들이 부족해 모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어 자신의 아들이 끌려가기 전까지 전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미국은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고 미국은 항상 옳다고 믿었기에 베트남전에서도 당연히 옳고 당연히 금방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관료조차도 공산화를 막는다는 피상적 명분 정도 외에 베트남의 사정이나 역사적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전쟁을 시작했다고 그는 일갈합니다. 미국정부, 미국인, 미군 모두가 베트남에 대해 철저히 무지했음이 전쟁 후 많은 보도와 연구를 통해 낱낱히 드러났습니다. 무지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인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악으로 이끄는 동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있던 무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 완고함

 

오늘 본문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몇 사람이 헬라인의 방문을 받으신 후 무리와 나눈 대화의 마지막 부분과 그에 대한 평가입니다. 37절은 예루살렘 입성시 예수님을 향해 그토록 환호했던 이들이 그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못 했다는 안타까운 결론을 내립니다.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물을 포도주를 바꾸시고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시고 걷지 못 하는 이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시고 급기야 죽은 지 4일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무지 때문입니다. 34절입니다.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매달려 고난받아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메시야가 누구인지도, 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사야와 시편에서 메시야가 영원히 당신 백성을 통치하신다고 예언한 말씀은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고 예수님도 여러 차례 언급하신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은 전혀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이 무지야말로 악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무지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무지함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스데반도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럼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인들과 예수님 앞의 유대인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세대 사람들을 뒤덮고 있는 이 무지의 어둠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인간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9절 이하입니다.

 

3.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12:39) 저희가 능히 (깨닫고)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언듯 읽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의미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완고하여 고침받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완고함은 자기 고집대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대개 청년 때에는 자신을 새롭게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얼마못가 사라지고 만사귀찮으니 그냥 이대로 살고 싶습니다. 스캇 팩은 이런 마음에서 악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악의 뿌리에는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자아도취)이 자리잡고 있다.’

 

게으름? 난 열심히 일하는데? 이 게으름이란 자신을 돌아보기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 태도, 가치관이 과연 옳은지 검토하는 것은 대단히 수고롭고 피곤합니다. 바로 이것이 QT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평소 하지않는 깊은 사고와 영적 분투, 거울 같은 정직함을 동원해야 하는 무척 피곤한 일입니다. 그런 고민 없이 단순하게 반복할 수 있는 청소나 설겆이가 훨씬 쉽습니다.

 

게으름보다 더욱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췬 자신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 하다가 빠져 죽어 연못가의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한 나르시스즘, 자아도취는 자신은 늘 옳다는 생각입니다. 성공한 사람, 일이 잘 되어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나르시시즘이 강합니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바꿀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지 않았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아만족감에 엄청난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고수합니다. 이 생각에 위협이 되는 도전은 거칠게 저항합니다.

 

게으름과 자아도취는 모래와 시멘트처럼 섞여 마음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완고하게 만듭니다. 이런 완고함에 강도를 더하게 붓는 것이 비겁함입니다. 42절입니다.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 중에는 희미하게 진리를 깨달은 이들도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왕따당하고 불이익을 받는 것이 두려워 진리로 나오기보다 안전하지만 어두운 거짓의 편에 서기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의 비겁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보다 세상이 주는 보잘것없는 안전과 안락을 더 사랑합니다. 43절입니다.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오늘 우리도 혹시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바꾸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아닐까요?

 

4. 진리의 심판

 

예수님이 이 마음이 완고한 이들을 보시고 탄식하신 이유는 그 결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48절입니다.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판사님, 왜 나를 심판하십니까?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내가 당신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형법이 살인자에게는 이런 형벌을 가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무신론자들은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에 내던지는 신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 그런 신이라면 자신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큰 무지입니까? 사람들을 지옥에 내던지는 것은 그들의 죄와 은혜를 외면하는 불신앙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죄가 의와 함께 할 수 없고 불신앙이 은혜를 가로막는다고 분명히 가르침에도 그들이 도무지 듣지않기에 결국 그 진리의 말씀에 의해 정죄되고 심판받는 것입니다. 마치 형법에 의해 살인자가 심판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으로 끝까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하시려 하는 하나님에게 오히려 비난을 돌리니 이 얼마나 큰 무지요, 반역이요, 몰염치입니까?

 

5. 빛이 있을 동안에

 

이런 무지, 고집, 비겁함의 어둠 속에 갇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 하고 외면하는 이들로 인해 예수님은 크게 실망하셨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한번 그들에게 어둠을 벗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믿어야 한다, 어두움에 붙잡히기 전에 믿어야 한다, 즉 회개의 기회가 무한정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그들 곁에 계셔서 진리의 말씀을 해주시는 동안에, 무지의 어두움에 완전히 잡아먹혀버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회개하고 빛으로 나와야 산다는 호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완고함은 마음의 눈을 멀게 만들고 무지의 어둠은 정신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정신과 마음이 모두 눈멀면 어느 순간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고 회개하지 못 하는, 양심이 화인맞은 지경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 빛으로 우리 영혼을 비추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땅의 많은 이가 아예 그러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게을러서 못 합니다. 자아에 도취되어 못 합니다. 비겁하고 두려워 못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져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결국 칠흙같은 무지의 어둠에 갇힙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 한 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 한 채 양민을 학살하고 스데반을 돌로 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36절입니다.

 

(12:3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숨으신 이유는 당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에 말씀의 빛으로 나온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3장부터 그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쳐주시를 원하시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마음이 있다는 것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고 실제 열매를 맺어 우리 삶이 생명되신 예수님에게 속하려면 게으름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아도취를 버려야 합니다. 비겁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직 빛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이런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로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 /12:37-43/ 김기석목사

2022-08-02 08:04:39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한 말이 이루어졌다.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을, 이사야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한 것이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어둠이 이기지 못하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4월의 아침입니다. 연녹색 물결을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님이 걸으셨던 수난의 골짜기 깊은 곳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아주 급박하게 그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소생을 기념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마리아가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것을 일러 한 신학자는 거룩한 낭비’(holy waste)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은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학교 시절 시인 김남조 선생님을 특강 강사로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향유를 주님께 부어 바친 그 여인의 마음 하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라고 말하지만, 마태복음(26:7)과 마가복음(14:3)은 그 여인을 그저 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7죄인인 한 여자’(7:37)라고 말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기 언급된 여인과 82절의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라는 구절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확증편향입니다.

 

김남조 선생도 그런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시에서 선생은 그 여인을 가리켜 일곱번의 일곱갑절/남자를 사랑해, 끝내 한사람의 영혼과도 못 만난 여자/어둡고 더 추워서/누구와도 다르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주님을 얼마나 깊이 연모했는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눈물이며는/눈물에 감아 빗은 머리채며는/잘 비벼 적시는/甘松香油며는/아아 湯藥보다 졸아든 평생의 죄,/모든 참회며는/주님의 발에/간절히 한번만 닿아보게/허락하시올지”(金南祚 詩集, <同行>, 瑞文堂, 1980, p.64-65) ‘허락하시올지라는 말 속에 담긴 염원이 절절하기만 합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들은 여인이 낭비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예루살렘 입성이 이어지고,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곧 죽음의 때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그러나 죽음은 누구든 유희하듯 맞이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주님도 깊은 괴로움과 번민 속에서 조금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흔들림조차 없는 확신은 위험합니다. 오직 고사목만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심정이 되어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12:27-28) 괴로움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생각을 떨쳐버리듯 말합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니다라는 이 말 속이 강력합니다.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아니다라는 뜻의 ‘Nein’이라는 단어를 정말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 단어는 왠지 비장하고 단호한 느낌을 자아내곤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 죽음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자기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두려움의 위력은 줄어드는 법입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신>에는 마치 자기 운명을 예감한 듯 써내려간 시가 등장합니다. ‘자유에 이르는 길 위의 정거장들훈련’, ‘행동’, ‘고난’, ‘죽음이라는 데 정거장을 노래합니다. 그 마지막인 죽음은 처연하지만 결연한 의지와 믿음이 돋보입니다.

 

어서 오라,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여,

죽음이여, 덧없는 육신의 성가신 사슬을 끊고,

눈먼 영혼의 벽을 허물어라,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을 마침내 볼 수 있게.

자유여, 우리는 오랫동안 훈련하고 행동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그대를 찾아다녔노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얼굴에서 그대 자신을 보노라.”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354)

 

본회퍼는 죽음을 가리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라고도 말하고 자유라고도 말합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자유를 하나님의 얼굴에서 본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죽음을 맞아들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통치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이 아니라 어둠에 속한 이들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니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라는 구절입니다. 자기가 누구에게 속한지를 알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이 빛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지레 겁을 먹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어스름이 내렸다 하여 지레 날개를 접지 말라. 빛이 없다면 스스로 빛이 되어서라도 갈 길을 가라. 외부의 빛이 가물거린다면 그 빛을 안으로 모시면 된다.”(김기석,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꽃자리, p.214)

 

저 깊은 은혜의 바다로

오늘 읽은 본문은 복음의 해설자인 요한의 음성이 도드라집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12:37). 표징의 목격자가 되는 것과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징을 보지 않아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표징을 보면서도 예수의 실상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깨닫는 마음, 볼 눈,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맥경화처럼 그들의 생명의 흐름을 가로막아 믿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강고한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나의 평안, 나의 안위, 나의 이익, 나의 욕망, 내 가족, 내 나라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이들은 결코 예수님과 진실하게 만날 수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주님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입니다. 이걸 하지 못해 우리 인생이 누추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쇠사슬에 매인 채 살아갑니다.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는 흥미를 느끼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합류할 생각이 없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또는 소속에 대한 욕구가 예수를 통해 열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출교(黜敎)물리칠 출가르침 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포쉬나고고스(aposynagogos)입니다. 이 단어 속에 회당을 가리키는 시나고그가 들어 있습니다.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의 현실과 일상을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마을의 중심입니다. 거기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철저히 외로워진다는 말이고, 취약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은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가 저 큰 바다보다 깊다고 고백하는 찬송가 302장이 늘 떠오릅니다. 그 은혜를 체험하려면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저 깊은 세계로 헤엄쳐 가기는커녕 얕은 물 가만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값싼 은혜에 마음이 팔린 것은 아닌지요? 앞서도 인용한 바 있는 디트리히 본회퍼는 값싼 은혜는 교회의 숙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는 어떤 것일까요?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 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9)

 

값싼 은혜가 교회의 숙적이라는 말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찬송가 302장은 그래서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를 띄우고 주님의 은혜의 바다로 맘껏 저어가자고 말입니다.

 

빛의 자녀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요한이 한 말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12:43). 사람의 영광이라는 말은 지도자라는 자부심 혹은 평판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가 그 명예로운 지위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저어하는 것입니다. 영광 혹은 명예는 그리스 로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고대에 벌어졌던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장대한 서사시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이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여신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준다고 믿었던 시의 신 무사(Mousa)입니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 혹은 분노 이야기가 서사시를 이끌어가는 핵심입니다. 그는 왜 분노를 품었을까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지 어언 9, 그리스 연합군 진영에 역병이 돌았습니다. 역병에는 늘 원인제공자가 있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호메로스는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밝힙니다. 의술의 신 아폴론의 사제인 크뤼세스의 딸크뤼세이스가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에게 명예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명예의 선물이란 한 사회가 어떤 사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전리품입니다. 딸을 아끼고 사랑했던 크뤼세스가 딸을 돌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아가멤논은 냉혹하게 거절했습니다. 한을 품은 아버지가 아폴론에게 복수를 청하자 아폴론은 그리스군 진영에 역병을 보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크뤼세이스를 돌려주라고 권고합니다. 그는 마지못해 응했지만 자기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명예의 선물로 주어졌던 여인 브리세이스를 보상으로 데려가 버리고 맙니다. 화가 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그리스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합니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전투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는 자기가 분노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어떤 자가 나보다 더 권세가 있다고 해서 자기와 동등한 나를 약탈하고 명예의 선물을 도로 빼앗아 가려고 했기 때문이네.”(호메로스, <일리아스> 1652,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출판부, p.347) 아킬레우스는 명예의 선물을 빼앗긴 것을 인간의 평등에 대한 침해로 보고 있습니다. 명예가 얼마나 소중히 여겨졌는지는 고대 올림픽 우승자에게 주어진 것이 금은보화가 아니라 월계관이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세계에도 헬레니즘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따라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추구해야 할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삶,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시대의 문화적 습속을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자아를 넘어 이웃에게 선물이 되는 삶이야말로 빛 가운데 걷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 속의 빛이 아주 꺼지기 전에 다시금 그 빛을 드러내고 또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몇 차례 말씀 드렸습니다만 초는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애태움을 통해 빛을 발합니다. 약자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어둠에 속한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앞서 걸으신 수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우리 몸과 마음에 밴 어둠이 벗겨지고, 빛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요한복음강해 73.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2:34-43/ 이종철목사

2022-06-07 10:37:33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사야의 말씀

 

예수님은 메시야로, 하나님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어야 하지만 유대인 중 일부만 믿었습니다. 상당수의 유대 엘리트들 그리고 그들의 출교 위협 때문에 많은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요? 역사학자나 정치가들은 예수가 민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힘이 약했다는 그런 평가를 내릴지 모릅니다. 신학자들은 인간이 완악해서 그랬다는 분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른 식의 평가를 내놓습니다. 38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말씀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렇게 계획했다고 합니다. 40절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인간이 완악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 때 완강히 저항했던 바로의 행태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가 완악해서도, 강해서도, 하나님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9:17)

 

여기서 예정론이나 유기론이라는 복잡한 신학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신학이 생겼는가 하는 그 맥락입니다. 이는 단지 약자들의 정신승리 또는 현실을 망각한 허위의식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악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원수가 지금 승리하고 강한 것 같지만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야 그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야 하는 태도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여유가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기고 좌절하거나 포기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이미 영화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 자의 여유와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맞지만 오히려 즐겁습니다. 위기가 있어야 영웅도 탄생하고 영화가 재미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이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당할 것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몸도 힘든데 마음마저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말씀이 이루어진다 또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말씀에서 그 맥락을 이해해야 우리는 제대로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약자들을 위해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힘 있는 자의 횡포에 저항하는 문학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되었습니다. 말씀을 권력자들의 손에 넘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 어떤 주의 영광을 보았을까요? 이사야는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사야는 제사장이었는데 성전에서 기도하다 성전 지붕이 날아가고 하늘이 열리며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6:1)

 

하나님을 본 순간 이사야의 고백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 이런 감정을 누미노제라고 부릅니다. 신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을 보니 자신의 초라함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5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는 말씀을 유대교(아람어 탈굼)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의 영광을 보았다로 번역하여 영광이라는 단어를 더합니다. 영광이라는 단어가 쉐키나입니다. 쉐키나는 원래 현존, 보좌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날 때 사용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의 쉐키나,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본체가 영광입니다. 인간은 직접 하나님 본체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쉐키나는 곧 예수님이고, 곧 쉐키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초대교부들은 이사야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때 보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러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 요한이 증언하는 에수님이 바로 이 하나님의 쉐키나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요한은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보는 영광이고, 손으로 붙잡는 영광입니다. 요한일서 1장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생명을 만지고 말씀을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쉐키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손으로 붙잡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영광

 

그런데 이 영광을 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43절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신앙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실제 우리가 2천 년 전 팔레스틴 땅에 있었다면 이것이 간단치 않음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약간은 비범해 보이지만 그래도 시공간의 한계에 갇힌 한 인간을 보면서 여기서 영광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듯 확연했다면 유대 엘리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들이 믿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사람의 영광을 취했기 때문이라 규정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권력과 힘과 부와 세력과 명예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력이 없었습니다.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냥 갈릴리 어부들과 무지렁이 백성들 일부만 따랐을 뿐입니다. 이런 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존재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평범성에 담긴 영광, 진흙투성이에서 영광을 어떻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눈이 열린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 우리는 예수님의 쉐키나를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열려 이 쉐키나를 본 사람은 잠잠할 수 없습니다. 생명 덩어리가 내 안에서 꿈틀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광을 본 자에게 나타나는 감정이 바로 기쁨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세상의 영광은 시시해 보입니다. 그래서 권력이나 재물이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면서도 여전히 권력이나 재물에 휘둘리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의심해야 합니다. 출교나 세상의 위협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사라짐 사람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

 

영광을 본 자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자는 그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라 어둠에 붙잡힌 부정적 인간입니다. 35절 말씀에서는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경고합니다. 어둠은 하나의 세력이고 힘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깨어 있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빛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둠이 우리를 붙잡아 버립니다. 권력과 재물이 우리를 얼마나 나락으로 몰고 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다 우리 영혼을 망칩니다. 권력과 영광을 두려워하다 우리 영혼을 팔아먹고 맙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빛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할 때 보는 대상은 밖에 있지만 그 지각 현상은 우리 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빛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빛을 보는 순간 우리 안에 빛이 켜진다는 말은, 말이 됩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더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빛의 통로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표정을 읽습니다. 어떤 뇌과학자는 타인의 얼굴을 보고 감정이 안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적인지 아군인지를 판단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복잡한 감정이나 분위기가 우리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링컨이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내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이 나타납니까? 타인은 나를 보며 어떤 느낌을 갖거나 분위기를 느낍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빛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빛을 품고 있습니다. 내 얼굴에서 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까? 분노와 원망과 근심이 가득하면 그 어두운 빛이 우러나옵니다. 욕망과 거짓과 음욕을 품고 있으면 그 사악한 빛이 새어나옵니다. 반대로 많이 사랑받은 사람, 많이 사랑하는 사람, 진선미를 추구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선한 빛이 우러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는 알 수 없는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어둠이 강해서가 아니라 빛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 영혼이 가득할 때 어둠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어둠과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요, 쉽게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빛을 찾아 나가십시오. 사랑과 진리를 찾아 나서십시오. 그러면 어둠이 물러가고, 어둠의 영역은 축소되어 갈 것입니다. 강력한 빛인 성령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가장 큰 재앙 /12:37-43

2021-11-12 15:39:00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자연재해와 전쟁과 기근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 지구 곳곳에 커다란 재앙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 사진은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현장입니다. 그때 약 3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저 사진은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쓰나미현장입니다. 그때 약 16,000명이 사람들이죽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진은 2010년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현장입니다. 그때 약 300,00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21:11에서 앞으로 있게될 재앙들(disasters)을 예언하셨습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911사건이나 일본의 쓰나미나 아이티의 지진을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자연재해(natural disasters)는 아니지만 각종 사고나 질병으로 지금 이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2005년 통계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0.6초에 한명씩 죽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1년에 약 56,670,000명이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텍사스 인구의 두배가 되는 사람들이 1년에 죽고 있습니다.

 

911테러, 쓰나미, 그리고 지진으로 죽은 사람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죽었기 때문에 커다란 뉴스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지진이나 쓰나미로 죽은 사람들보다 수백배 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매년 죽고 있지만 그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뿐입니다.

 

아무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종류의 재앙 즉 자연재해, 질병, 사고 등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당하는 재앙중에서 가장 큰 재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진입니까? 쓰나미입니까? 테러입니까? 질병입니까? 교통사고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재앙 그리고 가장 큰 심판은 믿지 않는 것 즉 불신(unbelief)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3:18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지진이나 쓰나미나 테러를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지진으로 죽었다할지라도 그 사람이 믿음을 갖고 죽었다면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911테러로 죽었다할지라도 믿음을 갖고 죽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아무리 평안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 죽는다면 영원한 형벌(eternal punishment)을 피할수 없기 때문에 불신이 최고의 재앙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또는 표적(sign)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올해 25일 주일설교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사진과 함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1장에 기록된 7가지 기적은 (1) 가나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2) 병들어 죽어가는 신하의 아들을 고치셨습니다. (3) 38년된 병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4)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5) 폭풍이 몰아치는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6) 태어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7)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기적 또는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겠습니까? 답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이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요한복음 12:37을 통해서 확인하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예수님이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수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점은 사람들이 그러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잘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돌처럼 단단한 마음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치 인간의 마음은 저 원자력 발전소의 시멘트 처럼 두껍고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시멘트는 워낙 두꺼워서 방사선이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마음이 원자력 발전소의 시멘트 만큼 두껍고 단단해서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을 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혀 감동도 믿음도 갖기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 이미 약 700년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38을 읽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셔도 사람들의 마음이 원자력 발전소의 시멘트 처럼 두껍고 단단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이 닫혀있고 마음이 강팍해져서(hardened) 눈으로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인용했습니다. 요한복음 12:39-40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말 믿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못 믿게 훼방를 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후서 3:9을 읽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기다리시며 부르시지만, 사람들이 반복해서 거절할때마다 사람들의 영적인 눈은 더 어두워지고 마음은 시멘트처럼 점점 더 두꺼워지고 딱딱하게 굳어져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불신앙의 상태가 더 악화되면 마지막으로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지진이나 쓰나미나 질병이 더 큰 재앙이 아니라 불신앙이 결국은 가장 큰 재앙인 것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재앙이요 가장 큰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믿음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믿음은 모든 축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 어떠한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믿음을 통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중에 가장 큰 일은 우리 안에 심겨진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목회의 중요한 목적은 성도들의 믿음이 부족하지 않고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10을 읽겠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바울을 가장 안타깝게 한 것은 성도들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바울을 가장 기쁘고 감사하게 만든 것은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크게 성장할수 있겠습니까?

 

첫번째, 갓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을 읽겠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의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날마다 시간에 맞추어서 음식을 먹듯이, 우리의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목회의 첫번째 목표는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 즉 큐티(Quite Time)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 없이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저희가 지난주 금요일부터 야고보서 큐티가 시작되었는데 바로 야고보서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 없이 성장하고 완전해질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든 성도님들은 특별히 야고보서를 깊이 읽고 묵상하시면서 믿음 성장에 큰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3-4을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그래서 야고보는 계속해서 무엇을 인내하면서 살아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기도할때도 인내심을 갖고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돈이 없어 가난해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인내심을 갖고 감사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화부터 내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온유함으로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내심을 갖고 순종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 없이 완전해져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안에 심겨진 작은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인내로 순종하며 살아갈때 나의 믿음은 나만을 살리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또한 믿음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내 가족이나 내 이웃들을 불신앙의 큰 재앙으로부터 건져낼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지진이나 쓰나미로 죽는 것이 재앙이 아닙니다. 진정한 재앙은 믿음 없이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모든 축복을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희 모든 성도님들은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셔서 오늘도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신앙의 재앙으로부터 건져내시는 911구조대원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진, 쓰나미, 전쟁, 질병, 사고 등 다양한 재앙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재앙은 믿음 없이 살아가는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내가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 산다면 바로 그것이 더 큰 재앙임을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원자력 발전소의 시멘트처럼 두껍고 단단해져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축복의 시작인 믿음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불신앙 가운데서 살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인내로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작은 믿음을 더욱 크게 성장케함으로써 지금도 믿음 없이 살아가는 내 가족과 내 이웃을 불신앙의 재앙으로부터 건져내는 구조대원으로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강해 (85) - 불신이 낳은 불신 /12:37-40/ 김형익 목사

2021-05-08 15:21:02

 

1. 그리스도의 사역은 실패하였는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이 뭐라고 가르쳐줍니까? 37절입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요한복음의 맨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실패입니까?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나, 요한복음의 시작은 또 이랬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1:10~11).”

 

요한복음은 일관성있게 그리스도의 사역의 실패를 지적합니다.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고 그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믿지 않았다는 결과를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12:37~50까지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에 대한 논평과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은 결국 실패하였는가 입니다.

 

2.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인간(전적 부패)

37절처럼 인간의 부패성을 드러내주는 말이 또 있을까요? 보고도 믿지 않는 인간들 말입니다. 죽어서 나흘이 지나 냄새 나는 송장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고,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눈을 뜨는 것을 보았으며, 38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이것 뿐입니까? 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의 성인 남자와 그 가족들이 배불리 먹었던 경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6:66).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불신이 변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교리는 그 똑똑하고 잘난 인간이 본질적으로 눈먼 소경이고,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깨닫지 못하는 바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만큼 불신의 영역에서는 교활하지만, 믿음의 영역에서는 무지하고 무식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처럼,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17:7). 이 불신이라는 완악함은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 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증언해 보라. 사람들은 믿지 아니할 것이다. 인간의 완악한 불신은 성경이 참되다는 간접적인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여기에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선언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볼 때, 이 성경의 선언,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가 되십니까?

 

3. 그리스도의 사역의 실패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었고 필요한 실패였다.

하지만, 성경이 설명하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사역의 실패의 원인이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이며 불신이었다라는 결론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놀라운 진리는 이런 주님의 사역의 외견상의 실패는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예견되었으며 심지어는 반드시 필요한 실패였다는 것입니다. 예언되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울 수 있는데, 이들의 불신이 필요한 실패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두 부분을 인용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8절은 이사야 53:1의 인용이고, 40절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6:9~10의 인용입니다. 먼저 53:1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라는 말씀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대한 유명한 예언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법상

 

아무도 우리가 전한 것을 믿지 않았고 우리가 행한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반응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전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한 전도를 가리키고, ‘여호와의 팔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을 가리킵니다. 정확하게 주님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을 예언한 것입니다. 두번째 인용은 이렇습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이렇게 슬픈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고,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그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 본문을 그리스도께 대하여 한 예언으로 인용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이 두 구절을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A. 이스라엘의 불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첫째로 이 두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님께 대하여 불신으로 반응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38절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유대인의 불신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해가 없도록 잘 들으십시오. 37절과 38절은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믿지 못하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이사야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사야가 말한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사야의 말씀은 예고이지, 원인이 아니다라고 잘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이스라엘의 불신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참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처럼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고 중심적이고, 또 이처럼 성도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주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처럼 불신자의 심령에 거슬리는 주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제와 그 가르침은 신자와 불신자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던 날, 그의 사역의 실패가 예고되었습니다. 불신으로 응답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하지 않거나 대강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 결과를 앎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합니다. 신실하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합니다. 미련해보이고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그렇게 합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서 내게 행하게 하시는 모든 것은 결과가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고 결코 낭비되는 것이거나 나를 고생하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강퍅)하게 하시느니라(9:18).” 이런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고 그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완전한 자유와 그 권리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깊으신 경륜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은 이스라엘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의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로 퍼져나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로마서 9~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수 년 전에 자세하게 강론을 한 적이 있고 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그림, 구원의 경륜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B. 불신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형벌(judicial hardness)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8문은 이 세상에서 받는 죄의 형벌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답은 현세에 있어서 죄의 형벌이란 내적으로 마음의 굳어짐, 타락한 지각, 강한 유혹, 마음의 고집, 양심의 공포와 부끄러움, 정욕 같은 것이나 외적으로는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저주하신 일, 우리들의 몸, 이름, 지위, 관계, 직업 등에 생긴 다른 모든 악과 더불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굳어짐이 바로 강퍅한 마음인데 이것이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불신의 마음 상태가 바로 이 세상에서 죄인이 받고 있는 죄의 형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불신의 마음 상태는 바로 저주받은 상태요, 소망없는 상태라는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의 영원한 지옥 형벌에 대한 보장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불신의 마음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죄인이 이 세상에서 받는 형벌입니다. 40절에서 인용하는 이사야 6:9~10 말씀은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 형벌이 주어졌는지 아십니까?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이유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가 됩니다.

 

4. 이스라엘의 불신은 그들의 불신의 결과였다.

37절과 39절의 관계를 주의깊게 살피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37절은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they would not believed in Him-NIV). 3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저희가 믿을 수 없었다(they could not believe-NIV)”는 말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믿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들로 믿을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이것은 우리가 요한복음 1장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보지 못하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고, 더 듣지 못하게 그들의 귀를 막으셨고, 더 깨닫지 못하게 그들의 지각을 어둡게 하셨고,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도록 그들의 의지를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벌인데, 그 원인은 그들의 불신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으려고 하는 마음, 열려져 있는 마음,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의 마음을 막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다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고 스스로 아무 소망도 없는 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를 보게 하시고 그 진리를 깨닫게 하사 믿게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전에 출애굽기 강해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나쁜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냥 자연인의 본성대로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지 내가 마음을 강퍅하게 품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처럼 이것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남용될 때 그것을 철회하시고 불신의 강퍅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함도 없고 미련하게 헛된 꿈을 꾸고 살아가는 자들을(1:21)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1:24), 부끄러운 욕심대로(1:26) 그리고 하나님 없는 그 상실한 마음대로(1:28) 내버려두십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불신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형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없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이 바로 형벌이요, 심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여러분의 욕심대로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고통을 겪는 상황은 아닙니까? 이것이 은혜요, 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아셔야 합니다.

 

매튜 헨리가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 크게 기만을 당하도록 내어버려 두신다고 말한 것은 옳습니다. 오래 제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제가 종종 살후 2:10~12을 강조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마귀의 속임을 받아서 멸망하는 자들입니까?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자들인데, 이는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진리를 사랑하십니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를 보내시고 거짓 것을 믿게 하셔서 결국 불의를 좋아하다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불신이 불신을 낳는다는 성경의 중요한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영원을 결정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달고, 유익하며 믿어지고 아멘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5.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렇게 반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는 한 번도 진리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나는 버리운 자구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 자비로운 음성으로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은, “네가 나의 주권을 알았고 배웠느냐? 그렇다면 내게 구해라. 내게 구하는 자를 내가 결코 물리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옵소서(9:24).”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귀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병고침을 얻게 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매몰차게 대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을 고치려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이 이방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자신의 간절함으로 엎드려 구했습니다(7:28).

 

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님의 은혜를 입고 구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도리어 신자들에게 소망과 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29:4에 말씀한대로,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본질상 우리는 그런 마음, 그런 눈, 그런 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버리운 자입니다. 이 아버지처럼 나아가십시오. 더러운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처럼 엎드리십시오. 그런 자는 믿음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며,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곧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믿었나이다. 이제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86) - 연약한 믿음인가, 거짓 믿음인가 /12:41-43/ 김형익 목사

2021-05-08 15:24:16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정리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도전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분별의 문제입니다.

 

1. 문제: 연약한 믿음인가, 거짓 믿음인가?

42절은 관원 중에 믿는 자가 많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결론에 이어서 나오는 또 하나의 결론이기에 놀랍습니다.

 

관원들이 누구입니까? 니고데모와 같은 율법의 선생들이거나 정치적으로 유대 사회의 실권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릴 것이 많은 기득권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고, 무모하기까지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은 그들이 믿었고 그런 자들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판단을 받을까 두려워서 드러나게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는 자들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출교 처분을 당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었기 때문에(9:22) 믿는 관원들은 출교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에게 출교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유대인 사회에서 누리고 살아온 모든 기득권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평가가 43절입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제 질문을 드립니다. 여기 소위 믿었다는 관원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까? 참되기는 한데, 연약한 믿음이었습니까? 아니면 거짓 믿음, 자기를 속이는 거짓 믿음이었습니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믿은 관원들과 유사한 형태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교회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유대인 관원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일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A.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다(12:8,9; 10:9).

첫째로 성경이 구원하는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는 가르침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누가복음 12:8~9입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0:9을 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절의 의미도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복음서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적으로 자기의 신앙,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참된 믿음의 특징입니다.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위 믿는 관원들의 믿음은 연약한 믿음이라기 보다 거짓 믿음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두려움도 있었고 어느 정도 긍정적 반응도 보이지만, 결국은 제 길로 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잠깐에 불과한 돌밭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임이 자명합니다. 이런 것들은 참된 신앙에 대한 결정적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B.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다(4:4; 5:44).

두번째로 살필 것은 43절에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다는 표현입니다. 야고보서 4:4을 보겠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은 세상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입니다. 사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멀리 갈 것도 없이,

 

요한복음 5:44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아마 본문 43절의 표현에 가장 가까운 구절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행위가 불신앙이라고 규정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믿는다고 한 관원들의 믿음이 연약한 믿음이 아니라 거짓 믿음이었다는 결론에 우리는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C. 요한복음에서 믿는다는 표현은 거짓 믿음에 대해서 종종 사용되었다(2:23~25; 8:30).

게다가 이들이 믿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표현은 앞에서 믿는다는 표현이 거짓 믿음을 향해서 사용된 예들을 볼 때, 여기서도 그렇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2:23~25; 6:66; 8:30).

 

D.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서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고 어떤 희생이나 불이익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연약한 믿음이 있지 않은가?

 

이런 판단에 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서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고, 어떤 희생이나 불이익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연약한 믿음도 있지 않은가?”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동정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믿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위 믿는 관원들의 믿음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제기할 수 있는 질문 즉 연약한 믿음론을 그냥 묵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 문맥: 전반적인 불신앙과(37~41; 1:10~11) 예외적인 신앙적 반응(42~43; 1:12~13)

이들의 믿음에 대한 동정론적 입장에서 살펴볼 때,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일관성입니다.

 

프롤로그라고 하면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 1:1~18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물론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이어야겠지만, 주님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에필로그를 바로 12:37~50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특이한 일관성, 강조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을 전반적인 불신앙과 예외적인 신앙적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프롤로그 부분에서 1:10~11을 보십시오.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결과가 사람들의 불신앙이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2~13절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전반적으로는 불신앙의 반응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기 12~13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고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나야만 되는 일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불신앙과 예외적인 신앙이라는 반응이 에필로그에서 똑같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상고한 말씀인 37~40절은 전반적인 불신앙의 반응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본문 42~43절은 예외적인 신앙의 반응을 설명해줍니다. 일반적인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반응했는데, 너무 놀랍게도 관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는 예외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문맥적 관계를 살펴볼 때, 믿은 유대의 관원들의 믿음은 비록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참되지만 연약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동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3. 연약한 믿음의 특징: 확신이 없는 믿음(faith without assurance)

분명히 강한 믿음이 존재하듯이 연약한 믿음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연약한 믿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확신이 없는 믿음입니다.

 

A.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의 영광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중생의 능력을 너무나 적게 알고 있다(1:17~23).

그는 복음의 진수를 알되 너무도 적게 아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의 영광에 대해서 희미하게 나마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중생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 너무나도 적게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한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렇게 구했습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그들은 하나님을 더 알 필요가 있었고, 그들을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과 그들이 얻은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와 그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그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더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연약한 믿음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적게 아는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확신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B. 하나님의 칭찬 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43; 5:44).

두번째로 하나님의 칭찬 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신앙의 표지입니까? 아니면 거짓 신앙의 표지입니까? 앞에서 인용했던 5:44에 의하면 이것은 분명히 거짓 신앙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이들 관원들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이것이 연약한 믿음의 표지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참된 믿음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참된 믿음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자기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은 믿음이로되 확신이 없을 때입니다. 거짓 믿음은 확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도 여전히 자신의 죄성?육체와 세상과 마귀?과 더불어 싸우는 가운데, 때때로 하나님의 칭찬 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이 거짓 믿음의 특징이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이것이 연약한 믿음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이 드러나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치루어야 할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출교를 당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주님 자신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고, 그 대가를 계산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려면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만일, 이런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약한 참된 신앙일 수 있음에 대하여 매튜 헨리가 한 말은 이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들이 겉으로 내놓기는 부끄러워하는 것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이 관원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약하여 마치 연기나는 부지깽이와 같은 믿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드러난 모습보다 훨씬 더 나은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하다.”

 

4.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자는 그것을 사람의 영광과 바꾸지 않는다(41).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이라고 할 때, 영광이라는 단어를 대부분의 영어 성경의 번역은 praise(칭찬)approval(인정)의 단어를 썼습니다. 하지만 헬라어가 사용한 것은 영광(glory)이라는 단어 자체입니다.

 

그런데 사실 43절에서만 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41절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41절을 봅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았다고 한 것은 분명히 이사야 6장의 소명의 장면을 가리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보고는 자기가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본문 41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사야가 그때 본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고라고 할 때 주는 여기서 분명히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43절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배치됩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기에 실패가 보장된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인 성공이나 명예와 바꾸지 않습니다. 이것이 열쇠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한 번이라도 본 자는 그것을 다른 것의 영광과 바꾸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도 넘어집니다. 다윗이 넘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자가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른 영광, 사람들이 주는 영광과 바꿀 수 없고 바꾸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분명히 회심했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영광의 장엄함과 압도적 위엄을 어찌 사람의 영광과 비교하며 바꿀 수 있겠습니까? 41절은 그리스도가 바로 절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말입니다.

 

5. 영적 모험을 하지 마십시오.

결국 이 관원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까? 연약한 믿음입니까? 지금까지 제가 제시한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볼 때, 여러분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주 적은 가능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면 이들의 믿음이 연약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고 말씀 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돌아볼 때, 이런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신다면 어떻게 하셔야겠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를 지불하기가 싫거나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은밀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신앙입니까, 거짓 신앙입니까?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이 중요한 일을 가지고 모험을 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영역에서는 모험을 할 수 있지만,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놓고 모험을 시도하지는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참된 믿음의 증거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까지는 그 신앙은 위험하고 확정되지 않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원 중에 믿었다고 언급된 모든 사람이 다 참된 믿음에 이른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중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해서 자기들을 드러낸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신앙, 자기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영원히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면 결국 자기를 속이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속이는 신앙이기에 거짓 신앙의 확실한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영적 모험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기의 영혼을 건 모험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참된 믿음의 증거들을 가진 참된 믿음의 확신에 거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말하자면 별로 믿음의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믿는다고 한 관원들의 믿음을 상고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의 증거는 이런 것들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는 빛 가운데로 행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이것은 진리의 영역에서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죄를 짓더라도 빛 가운데서 행합니다.

 

둘째로 참된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1:8~2:1).”

셋째로 참된 믿음의 증거는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넷째로 참된 믿음의 증거는 형제 사랑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식구를 사랑하는 것은 참된 믿음의 중요한 증거입니다.

 

다섯째로 참된 믿음은 바른 교리를 믿습니다. 모든 비본질적인 세세한 교리들의 부분들 모두에서 일치하는 증거를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자녀들을 바른 가르침으로 인도하십니다(요일 2:20~23; 요일 4:2~3).

 

“(2)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참된 믿음은 마지막으로 거룩함을 추구하게 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주를 믿고 주께 소망을 둔 자들은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연약한 믿음을 증거하는 불확실한 증거들 위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성경적 객관적/주관적 확증 위에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세워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용감해지십시오. 그것은 정직함을 요구합니다. 사람의 칭찬과 영광이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헛된 영광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믿음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썩어 없어질 영광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생각 속에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혹시 믿는다고 했던 관원들과 비슷한 처지에 서 계시지는 않습니까? 보다 확실한 증거로 나아가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절대로 틀림없는 이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진실한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갖기 전에는 많은 어려움에 부딪혀 오랫동안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값없이 주신 것을 성령께서 알게 하신다면, 그는 특별한 계시 없이 평범한 방법을 사용하여 정당하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의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3).”

 

이 의무를 여러분의 것으로 취하십시오. 그리고 확신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사람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참된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요한복음 강해-61/ 불신의 이유 /12:37-43

2020-01-22 02:45:47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문단에 등단한 초기에 쓴 불신 시대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불신 시대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진영이라는 여인은 하나 뿐인 아들 문수를 위해 삽니다. 아들 문수가 아파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수술을 하던 중에 의사의 무관심과 부주의로 아들이 죽게 됩니다. 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은 그녀로 하여금 사회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진영은 죽은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종교를 찾았습니다. 절을 찾아갔습니다. 아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불경을 읽는 스님으로부터 돈을 적게 내놓는다고 한 소리를 듣습니다. 부자 집 부인이 절에 오자 주지승은 진영의 아들의 넋을 달래는 불경을 읽는 스님에게 대충하고 빨리 끝내라. 서장 댁 부인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진영은 아들의 영혼을 위해 절에 맡겨 두었던 아들의 위패를 찾아와서 태웁니다. 불심의 깊이를 돈으로 측정하는 절에서 아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영은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갔는데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비닐 주머니에 신발을 챙겨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들어가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신발을 잃어버릴까봐 챙기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합니다.

 

거기에 더 기름을 부은 것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던 갈월동 아주머니를 믿고 따랐는데 그에게 맡겨 두었던 돈을 떼이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뒤에는 종교를 빌미삼아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진영은 생명을 경시하는 병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는 교회 사람들, 사람보다 돈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는 절을 보면서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통감합니다.

 

작가 박경리는 불신 시대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 이후와 개발독재 시절이었던 1950년대의 사회가 불신의 시대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담 위에 깨어진 병 조각을 담 위에 촘촘히 박아 놓았습니다. 가시철조망을 담 위에 쳤습니다. 뾰쪽하게 갈아 만든 철근으로 담을 둘렀습니다. 불신의 시대를 보여주는 매우 삭막한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오늘에는 그런 삭막한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불신이 더 깊은 사회가 되어 있습니다.

 

그 불신의 표현이 조금 더 세련되어 있을 뿐입니다. 감시 카메라 등 최첨단 장비가 우리 사회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살 수밖에 없으면서 그 사람을 불신하는 사회가 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불신하는 관계가 되면 그곳은 갈등과 고통을 만드는 진원지가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신만큼 무서운 적은 없습니다.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불신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뿌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3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예수님께서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셨음을 선포하며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라고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불신에 대한 것입니다. 3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문둥병자를 낫게 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습니다.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기적을 볼 때마다 놀라며 환호했습니다.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들은 다시 불신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불신은 사탄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유혹해 불신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사단은 온갖 감언이설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만들었습니다. 불신은 결국 불순종하게 만들었고 불순종은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믿음, 신뢰입니다.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라고 호소하는데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불신의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불신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불신의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을 만큼 강퍅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보고 깨달아 돌이키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는 그들에게 어떤 기적과 표적을 행해도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서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강퍅하다는 말은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수용하지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이미 굳어질 때로 굳어져서 변화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바람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거절하고 거부합니다. 불신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영성이 사탄이 뿌려놓은 불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믿음의 세계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경건의 훈련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이 내 삶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도록 굳어진 마음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있는 돌과 가시덩쿨을 말씀의 쟁기로 갈아엎어 솎아내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가 원하는 것을 강하게 부르짖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따르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엽니다. 불신의 끝이 고통이며 절망이라면 신뢰의 끝은 웃음과 희망입니다.

 

사도 요한이 유대인들이 불신하는 두 번째 이유로 든 것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42-4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유대 관리인들 중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밉보여 유대인들에게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출교를 당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다 보니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사람의 영광을 크게 여기는 사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그 사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영광을 계산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강하게 유혹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하는 욕구는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끝까지 남는 욕구가 명예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내려놓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영광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의 처음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 분위기가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영광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이 집중될 때 숨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의 영광을 뒤로 하고 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시며 높여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섬기는 모든 일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의 영광을 뒤로 하는 지혜로움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의 영광을 뒤로 하며 숨는 가운데 그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은혜가 성도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강해-34/ 믿음에 이를수 없는 사람들 /12:37-43

2018-11-01 14:33:04

 

요한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밝혀왔다. 요한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예수님의 실패도 아니고, 어쩔수 없이 당한 사건도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루어진 주님의 영광의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13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이 그동안 하셨던 복음 사역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을 짧게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37-43절 말씀이다.

 

(37)“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님이 수많은 표적들을 행하였으나 백성들 대부분은 예수를 믿지 아니했다고 총평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한 일과 가르침은 모두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신 일이었는데 대부분은 믿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한 사역이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믿지 아니한 이유는 예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예수님이 표적을 적게 행사하셔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유는 유대인 그들 자신들 책임이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하지만 믿고 안믿고는 본인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성경을 보면 믿음에 이를수 없는 사람들....하나님이 아무리 타이르고 설득해도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어떤 사람들인가?

 

 

1.기적만 추구하는 사람은 믿음에 이를수 없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성경에 기록된 것 말고도 많았다. (20: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안믿는 사람들은 끝까지 안믿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기적을 보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전도하면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기적을 한번 보여 달라고 말한다...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한다.....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기적을 보여주면 믿을까? 아니다. 잠시 놀래고 신기해 할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 시간 지나면 지난번 보다 더 화끈하고 더 놀랄만한 기적을 또 보여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다. 핑계이다.

 

믿음은 기적과 상관이 없다. 즉 기적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참믿음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 시대가 그랬다. 과거 역사에 기적이 많았던 시대....모세시대 아닌가? 사막에서 매일 만나 먹고 반석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먹으면서도 그들은 불평하고 불만하며 모세를 불신했다. 즉 하나님을 불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 중에....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다. 부자로 살았지만 지옥 간 부자가 지옥에서 자기집 문간에서 얻어먹던 나사로가 천국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한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서 자기 동생들에게 보내면 자기 동생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한다....(16:30)“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즉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전도하면 들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한다. (16:31)“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무슨 말인가? 믿을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믿고 믿지 않을 놈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가도 안 믿는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722-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7:22-23)“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고 그것을 볼 수도 있다...그런데 그렇게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고 하나님 앞에 자랑했는데 정작 하나님은 난 너희를 모른다고 하신다. 기적을 보고 행하였다고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실지 이단에 가보면 이단에서도 기적이 일어난다. 심지어 타종교 불교에서도 기적은 있다. 그러므로 기적만 보고 믿으면 안된다. 기적만 추구하는 신앙은 마귀에게 금방 속아 넘어가는 신앙이다. 왜냐면 마귀도 왠만한 기적은 행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귀도 절대 못하는 기적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크고 중요한 기적이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이 땅으로 오신 기적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기적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2.완고한 사람은 믿음에 이를수 없다. 하나님도 완고한 마음에는 포기하신다.

 

(39-40)“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수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완고한 마음이 그들의 영적 눈을 멀게하여 복음을 듣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말씀이다.

 

완악한 마음은? 어떤 일에 대해 고의적으로 무관심하여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경에 완악한 마음의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와 대항했던 바로왕이다. 바로왕은 이스라엘 노예들을 안보내주려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10재앙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도무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다른 사람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이 바로 완악한 마음이다.

 

 

완악한 마음이 믿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방해거리이다.

 

이 완악한 마음은 여러분의 삶에 어떤 피해를 주는가?

 

1)완악한 마음은 영적 기근을 가져다 준다.

 

(95:7-8)“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바로 완악한 마음이었다. 그 이유? 광야생활의 불편함 때문에 그들은 늘 불평하고 불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했고 순종하지 못하였다.

 

광야생활이 좀 불편하지만 왜 불편한 것만 보는가? 광야에서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한명도 굶지 않고 또 갈증내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은 없었고 불평불만에만 마음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고 그 완악함이 1-2년 안에 끝날 광야생활을 40년이나 연장하게 만들었다.

 

오늘날도 불평 불만의 완악한 마음이 여러분의 영적 삶을 기근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완악함은 결국 실패자가 되고만다.

 

교만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수 없다. 그래서 완악해진다. 애굽의 바로 왕이 그랬다. 자신은 백성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존재인데 시골에서 목동생활하던 모세가 나타나 자기 말 들어라고 하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세계 제일의 애굽에서 가장 높은 왕인데?’ 하는 교만이 그를 완악하게 만들었고 그 완악함 때문에 애굽은 망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좀 어리숙한 사람이 실패 잘하겠는가? 아니면 똑똑한 사람이 실패를 잘 하겠는가? 답은 똑똑한 사람이 실패를 더 잘한다. ? 교만하여 완악하기 때문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루이스 터먼(Terman, Lewis Madi-son)’ 교수가 아이큐 160이상의 천재 아이들의 일생을 조사한 결과, 천재 아이들의 대부분은 천재적인 지능을 소유함에도 불구하고 실패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천재 아이들이 실패하는 세 가지 원인은, 첫째 내가 최고라는 교만때문이고, 둘째 마음이 강퍅해져서 남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고, 셋째 고집불통이 되어, 무모하게 행동하다가 마지막엔 실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천재라도 교만하고 강퍅하면 실패하고 만다.

 

 

()또 미국의 범죄 심리학자는 각종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조사를 해 본 결과, 범죄자의 90%가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지고 병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 대화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마음이 사납고 강퍅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폭력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강퍅한 마음은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강퍅한 자의 결말은 심판과 멸망일 뿐이다.

 

 

3)완악한 자는 하나님도 포기하신다. 그래서 완악한 자는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12:40)“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40절 말씀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유대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안믿었다는 말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워낙 고집이 세기 때문에...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고 완고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말씀이다.

 

즉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도 포기하신다는 말씀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끝까지 간섭하시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포기해버리는 사람이다. 반대로 진짜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간섭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섭하신 사람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포기한 사람은 사울왕이다. 왜 하나님은 사울을 포기했나? 고집이 워낙 세었기 때문이다. 그 완악함이 하나님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1: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비극 중에 비극인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님 심판 중 당장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심판도 있지만 그냥 망하게 내버려두는 심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옛날에 고집 센 사람똑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인즉,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하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습니다. 이 다툼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고을 원님께 가자고 말했고, 그 둘은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고을 원님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다음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4×7=27이라 말했느냐?”“,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고을 원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을 열 대 쳐라!” 고집 센 사람이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똑똑한 사람이 원님께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원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4×7=27이라고 우기는 그런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고집 센 사람과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느니 고집 센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어라는 교훈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도 고집 센 사람은 간섭하지 않고 포기하신다.

 

그래서 오늘날도 하나님은 고집세고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도 간섭하지 않고 포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악한 사람은 절대 되지 말아야 한다.

 

 

3.주저주저하는 사람도 믿음에 이룰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결단이 있어야 한다.

 

(42-43)“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믿었지만 유대인 관리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자가 사실은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들 관리들의 믿음은?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서 드러내놓고 믿지 못하는 그런 믿음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이렇게 숨어서 예수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숨어서 예수 믿는 그들의 믿음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 영광보다 더 사랑했던사람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믿지 못하고 숨어서 믿는 사람? 사람의 영광도 취하고 싶고....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고 싶고....세상 재미도 보고 싶고 하늘의 축복도 놓치지 않고 싶은 사람...이런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주저주저하는 믿음....하나님 눈치보다는 세상 눈치를 더 보는 마음...이것이 결단성이 부족한 믿음이다. 이런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결단해야할 때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믿음을 가진채로 살다가 결국 망한 사람? 성경의 롯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다.

 

롯은 죄악의 도성 소돔에 사는 것이 좋아서(세상 재미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이 소돔성을 심판하려고 하다가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롯을 살려줄려고 천사를 보내었다. 그러면 미련없이 소돔성을 빠져나와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롯은 무슨 미련이 남아서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고 롯도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믿음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도 예수는 믿지만 롯과 같이 무슨 세상에 미련이 남아서 결단을 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며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이 함께 할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은 관원들 중에 속으로는 예수를 믿었지만 출교당할까 두려워서 결단하지 못하는 그런 믿음을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 19장에서 나중에 믿음의 결단을 과감하게 한 관원 두명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두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빌라도 총독에게 나아가서 담대하게 예수의 제자임을 밝히고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를 치른 두명의 관원 출신 제자가 있었다고 밝힌다. 그 두명의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라고 밝혔다(19:38-40)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출교를 각오하고...물론 관원이란 직책도 박탈당할 것을 각오하고....예수님의 제자임을 밝힌 참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믿음은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 믿는다밝혀야할 때 당당하게 밝히고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 이번 추석....제사드리거나 성묘할 때.....당당하게 밝혀라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제사에는 참석 못합니다

 

오늘날 예수믿는다고 감옥에 가거나 순교당하지는 않는다...그런데 무엇이 두려워서 신앙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나? 신앙 밝히면 경제적 손해 좀 당하는가? 그런 손해는 좀 당해도 된다. 하나님이 다 계산하고 계신다. 그리고 신앙 밝히면 왕따 당할 일이 생기는가? 그런 왕따는 당해도 된다. 그런 정도의 손해는 마땅히 각오해야 하지 않는가?

 

믿음은 결단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 결단에는 손해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은 결단을 미루고 행동을 미룬다. 나중에 실천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나중에 실천하겠다는 것은 미화된 불순종이다. 참믿음은 결단과 실천이 구분되지 않는 법이다. 주저주저하지 않고 감동받은대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성막세미나로 유명한 감리교 강문호 목사님 경험당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신우회가 있습니다. 육사에 입학하면 6개월동안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6개월만에 휴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육사 생도들 가운데 예수 믿는 이들이 모인 육사 신우회가 있습니다. 신입생들 중에 약 100명 정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6개월 훈련후에 일주일 휴가로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도들은 날라 가듯이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우회 생도들은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 곤지암 수양관에 와서 23일 성막을 공부하고 집으로 가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우리 수양관에 모두 모였습니다. 그 때 23일 동안 공부하면서 잊지 못하던 장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수업시간 내내 부동자세입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무 토막을 100개 깍아 놓은 것같았습니다. 그리고 졸리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에 가서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음이 달아다면 제 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10시경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두 시정도까지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속에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끝나고 돌아갈 때 방에 가보니 이부자리를 두부자른 듯이 각지게 개어 놓았습니다. 청소는 먼지하나 없었습니다. 옆에 흐르는 개천까지 청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섬짓하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휘관이 왔습니다. 수업시간 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귀관들은 돼지다. 돼지를 기르는 이유는 꼭 하나 잔치날 잡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다. 귀관들 한 명 한 명에게 4년 동안 조국이 2억이 투자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앞장 서서 죽어라.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조국은 귀관들의 공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 그들의 하는 함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한국의 발전에 육군사관학교 출신자의 공이 많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특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배운 것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성도들이 육사생도처럼 결단한대로 실천한다면? 그렇게 실천하는 성도가 경주에 100명만 있어도 경주는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주저주저하지 않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성도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에 이를수 없는 사람들??.

 

1.기적만 추구하는 사람은 믿음에 이를수 없다.

 

2.완고한 사람은 믿음에 이를수 없다. 하나님도 완고한 마음에는 포기하신다.

 

3.주저주저하는 사람도 믿음에 이룰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왜 예수님은 숨으셨는가? /12:35-43

2015-07-19 13:09:53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숨으신 예수님

 

본문 요12:35~43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제자(무리)들에게

뭔가 비밀스러운 말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0

 

마치 엄마가 자기 자식에게

다른 아이들 몰래 맛난 것을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유대인들 몰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3장에 보면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알려주잖아요.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 너희들에게만 알려주는 것이야!

저기 저 바리새인들에겐 비밀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아요.

 

위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얘들아! 나는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란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몰라본 단다!’

 

여기서 세상이란.. 유대인을 말하고 광의적으로는 온 인류를 말합니다.

본문에선 유대인을 말합니다.

그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너희들은 나와 다녔으니 내가 빛인지 알겠지?

이제 내가 곧 떠나가야 하거든!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거든!

 

내가 떠나면. 너희도 저들과 똑같이, 어둠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 내 말을 단단히 들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새겨들어야 한다!

귀담아 들어 놓아라!

 

그래야 너희가 빛의 아들이 된단다!

빛의 아들이 되어야 내가 가는 곳에 너희도 올수가 있단다!

그러니 내가 너희와 같이 있을 동안에, 내 말을 잘 듣고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무슨 선문답(禪問答)하는 것 같지요.

맞아요.

빛과 어둠의 선문답(禪問答)이에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나중에 성령이 오시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선문답하듯이 말씀하시고선

예수님이 저희들을 떠나 숨어버리신다는 겁니다.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헬라어에는 미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숨으셨다는 말은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우린 흔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상해집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숨으실 필요가 없지요.

더 예수님을 드러내서 믿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을까봐 숨어 버렸어요.

너희들 예수 믿으면 안 돼!’ 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우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하신다는 것을 몰라요.

믿게한다고만 생각해요.

 

왜 예수님이 스스로 숨으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허구로 흘러요. 헛다리 짚게 되어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 영광 하면서 말이에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숨으셨어요.

죄인들과 격리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엔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숨겨 버린 겁니다.

물론 죄인이 예수께 와서, 믿고 구원 받아야 하지만,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계속 예수를 믿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인듯.. 더 읽어봅시다.

 

그 이유를, 본문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12:38~40,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께서 저희 눈을 멀게 하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소경을 만들고, 마음을 어둡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사야의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 무슨 황당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도 똑같이 말씀했어요.

 

28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자.. 똑같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했어요.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면 누가 복음을 말해도,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낼 일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낸 것은 자기 백성들을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시키기 위함이에요.

 

그럼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서, 예수를 믿게 해 주어야지요.

예수님을 보면 첫 눈에 ! 저 분은 메시야구나알아보게 해 주어야지요.

 

그래서 영적인 소경들도, 척 알아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하여야지요.

가는 곳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타나야 해요.

이게 우리 생각이고, 상식이에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 상식과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말씀합니다.

 

 

그럼 왜 그런가 그 원인을 추적해 봅시다.

 

하나님이, 죄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한 이유를 찾아봅시다.

분명히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안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숨우신 것이니까요.

 

숨었다! 감춰졌다! 라고 하면,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보는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되어 죽은 자가 되자

급히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과 같지요.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큰일 나기 때문에.. 급히 숨기고 쫓아낸 것입니다.

죄인이 생명나무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도록 숨겨 버렸어요.

 

여기에 오늘 본문의 정답이 숨겨져 있어요.

 

생명나무 실과 속에 뭐가 있나요? 영생이 있지요.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였잖아요.

 

이렇게 되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죄인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 부랴부랴 천사들을 동원해서. 생명나무와 그 과실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곧 죄인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큰일 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불 칼을 들고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설명해 봅니다.

생명나무 과실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했지요.

 

이걸 예수님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자기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 또는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러면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같은 뜻이 됩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이니..

그럼 구약의 생명나무 과실, 신약의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럼 구약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감추신 것은

신약 에선 하나님이 죄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님이 스스로 숨으신 것입니다. 12:36

 

구약에.. 죄인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감추었다는 것은

신약에.. 죄인이 예수 믿고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인이 예수를 믿고자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과 같아요.

, 죄인이 회개하고 회개하고자 하는 자세로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인 상태 그대로, 예수를 믿으려 하면.. 절단 나는 것입니다.

 

죄인은.. 세례 받고, 즉 세상에 대해서 죽고 난 다음에, (형식적 세례를 뜻하는 것은 아님)

비로소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왜 죄인이 예수를 못 믿게 하실까요?

그건 죄인이 예수 믿으면.. 죄인으로서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뱀이 선악과를 소개할 때 뭐라고 했나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도,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을 내어 쫓을 때 하신 말씀이

저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같이 되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에게

생명과를 감춘 이유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피조물이 선악을 아는 일로.. 영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안다는 말은.. 심판 한다는 말입니다.

 

심판은 창조주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더러 심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만 뜨면 누구를 심판하고 있어요.

 

누군 옳고 누군 그르고 판단하잖아요.

이게 모두가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처럼 심판하려 하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인이 되었어요.

죄가 뭐냐!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진 겁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하고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것을, 싫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면.. 죄이고

하나님이 의()라고 하면.. 의라고 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인간은 독자적인 눈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독자적인 눈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데도, 자기가 싫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데도, 자기는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치장을 하는 겁니다.

 

좋고 나쁨의 기준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자를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어요.

이런 자가 '생명과'를 먹고 영생을 한다면 이건 재앙이에요.

 

그래서 죄인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떼 놔야 해요.

그래서 예수를 못 믿게 (예수님이 숨으신) 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졌어요.

죄인의 눈이에요.

 

죄인의 눈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겁니다.

자기들 눈으로 판단해서.. 예수를 믿고자 합니다.

 

죄인의 눈에 비친 예수는..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에요.

떡을 주는 예수이고!

병을 고쳐주는 예수이고!

기적을 베푸는 예수입니다.

 

모두가 자기 육신에게 유익을 주는 예수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예수라면 얼른 믿어야지요.

 

얼른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자로 살아야지요.

이게 죄인들이 예수를 믿고자하는 믿음이에요.

이런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을 평생 이용하게 되어요.

 

원래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인간을 창조 했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 했어요.

 

애당초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만 있어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죄가..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들었어요.

자기 뜻대로 살게 하였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자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고요.

 

이런 몸을 어찌 에덴동산에서 살게 할 수가 있나요?

쫓아내야지요.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인간 지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지요.

왜 한탄 합니까?

 

하나님 말을 안 들으니.. 한탄하는 겁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보고 언제 한탄합니까?

말 안 들을 때잖아요.

 

(그러니 말을 안 듣는 자식은

곧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말 안 듣는 죄인임을 알게 하려고

그런 자식을 주신 것입니다.

자식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종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교사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으로서 영생하는 것을 막는 일을 하세요.

 

죄인 그대로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 자기 시각으로 아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 숨겨 버린 것입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숨으신 것은,

이는 죄인(자연인)으로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류역사는 죄인(자연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어요.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인간의 자기 가능성으로 섬기게 되어요.

 

이게 대표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 바벨탑이에요.

이는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이게 신앙으로 나타난 것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자기 의()로 구원을 받고자 했어요.

 

이게 결국엔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식 신앙은, 하나님을 죽이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자기 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의는 율법을 지켰다는 행함이에요.

율법을 지켰다는 행함이 바로 바벨탑 사상이에요.

인간의 능력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을 잘라 냈어요.

그리곤 천국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을 긍휼로 구원을 해 주셨어요.

 

세리와 창기들은 이방인을 상징하는 자들이에요.

이방인은 구원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었어요.

아니 모르고 살았어요,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이란 말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에겐 예수를 감추어 버리고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겐 믿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그러지요.

너희가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그져 죄가 있다고!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였다면 구원의 은혜가 덮쳐 올 텐데

안다고 하니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주여 우리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구원의 은혜가 임할 터인데

주여 우리는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천국에 갑니다! 라고 하니

(나약한 구세주..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자력 구원할 것입니다.)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안다고 하는 자는.. 모른다고 하고

모른다고 하는 자에겐.. 예수를 알도록 눈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눈 뜨게 하고 본다고 하는 눈뜬 자들은 소경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예수를 믿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본다고 하는 자들을 소경을 만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려 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못 믿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본다고 하는 자에겐.. 예수님은 감추어져 있고

소경이라고 하는 자에겐.. 열려져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감추어져 계신다고 하는 겁니다.

비밀’(무스테리온)이라고도 하지요.

죄인(자칭 의인)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라 하고, 세상은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란.. 빛에 대하여서는 소경이란 말입니다.

 

빛을 예수라고 했으니.. 세상은 예수에 대하여 소경이에요.

세상은 예수님에 대하여 소경입니다.

 

죄인(아담의 후손)으로서, 자기 지식으로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으면 세상 복 받고, 세상에서 잘 살아야 된다는 사상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세상) 복 주는 예수!

이것은 소경으로서,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어버리십니다.

차라리 그게 그들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뭡니까?

예수님은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자신들이 어둠인줄 몰라요.

그러므로 자신이 (자기 힘/지식/판단으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접근을 하는 겁니다.

 

이게 유대교 신앙이고 구약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여기에 속하였어요.

인간의 열심과 충성으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신이 어둠인줄도 모르고,

어둠의 방식’(육적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이 막아 버리는 겁니다.

 

적용

 

예수는 소경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소경입니다!’ 고백하면,

예수님이 그의 영안을 뜨게 해 주셔서, 구세주와 영생을 보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나는 잘 봅니다. 소경이 아닙니다!’ 하면..

그들이 보는 하나님, 그들이 보는 예수님은

-죄인에게 복 주는 예수!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

-죄인으로서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그런 예수가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감추어져지지 않은겁니다.

 

사도바울은 이들과 정 반대의 모습으로 사도됨을 증명하고 있어요.

 

나는 예수 때문에 매 맞고!

옥에 갇히고!

굶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고!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후패 할대로 후패했는데!

거짓 종들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돼지처럼 살이 포동 포동 찌고 있어요.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후패한 것인데!

그러나 거짓 종들의 자랑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살찌운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찌 그렇게 분별력이 없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내가 언제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고 왕 노릇하는 예수를 가르쳐 주었느냐?

내가 언제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증거했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그런 가짜 예수를 전하는 자들의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 믿고 있느냐?’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래요.

교인들이 죄인의 소원을 빼앗아가는 예수를 믿지 않고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믿고 있어요.

 

교회마다 기적을 행하는 예수!

내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예수를 믿고 있어요.

예수를 이용해서 육신을 배불리고 살찌우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겉 사람의 후패함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쇠하고 약해지는 아픔은 없고!

예수 때문에 흥하고 강해지는 화려함만 있는 겁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생명이 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판을 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을 내게서 감추어 진 것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감춰지는지를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우린 강한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영웅이 되고 싶어해요.

우리 본성이 늘 이런 삶을 추구해요.

 

그래서 어디서든지 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겁니다.

남에게 알려져야 하고!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남들이 나를 알아주어야 해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시기하고 질투해요.

 

그래서 나보다 강한 자가 있으면 넘어지기를 바라고 사라지기를 바래요.

이게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에요.

 

지금 우리도 바울처럼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 날 좀 강하게 해 주면 안 됩니까?

잘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면 안 됩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종을 만들어 주면 안 됩니까?

 

그래서 교회마다 성공신학과 번영신학이 난무하잖아요.

교인들마다 기복신앙으로 절어 있잖아요.

 

그때는.. 예수님이 스스로 숨어버리십니다.

그것이.. 그런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는.. 오히려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듯이

우리가 <내 육신이 죽는 세례를 통과하고 나서>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볼 때.. 예수님이 제대로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숨지 않으시고,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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