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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생명수에 관한 설교 <요한계시록 22장, 에스겔서 47장>

by Jessi J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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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에덴 /22:1-5, 요일3:2-3, /김형익 목사

2021-08-18 02:13:45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 22:1-5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21장 전체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지나면,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인 22:6-21이 남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결론부가 새 하늘과 새 땅새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성경이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담과 그의 신부 하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은 창조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요한계시록 21-22장은 새 창조와 완성된 에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곧 에덴 동산의 완성이라는 점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셈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은 1500년에 걸쳐 4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마치 탁월한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한 권의 책 보다 더 놀라운 통일성과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오류가 없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1. 생명수의 강(1-2a; 2:10-14; 47:9; 14:8; 4:10-14; 7:37-38)

 

우리는 앞에서 요한이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고, 성전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었으며, 밤이 없었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성 내부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먼저 1-2절 상반절에서 생명수의 강을 묘사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요한계시록 22:1-2a).”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을 묘사할 때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갈래로 나뉜 강들을 언급합니다(2:10-14). 물은 종종 생명의 젖줄로 불립니다. 그래서 고대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에덴에서 흘러나온 강은 동산을 적셨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완성된 에덴에서 그 강은 생명수의 강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이 강이 발원하는 곳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수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에스겔 47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강물이 흘러나와 그것이 미치는 곳마다 죽은 것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고, 그 다음에 무릎과 허리에 그리고 헤엄쳐야 할 강이 됩니다. 그 강물은 미치자 죽은 사해가 살아나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게 됩니다. 에스겔 47:9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에스겔 47:9).”

 

생명수의 강은 에스겔 선지자가 보고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스가랴 선지자도 생명수의 강에 대한 예언을 하였지만(14:8), 무엇보다 생명수의 강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 자신의 말씀들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셨습니다(4:10-14). 또 초막절 큰 날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7:37-38). 주님의 이 약속이 완성된 에덴에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요한계시록 7:16-17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완성된 에덴은 오늘 본문에서 그 실체를 보여줍니다.

 

생명수의 강은 무엇보다 수정 같이 맑습니다.’ 이미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4:6),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인 거룩한 성과(21:18) 그 성의 길을(21:21) 보았는데, 생명수의 강도 수정 같이 맑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맑음은 하나님의 순결하심, 거룩하심, 초월적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강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얼마나 순결한지, 믿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 은혜가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령 오늘날과 같이 하천의 오염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고 마실 수 있는 강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완전히 순수한 물입니다.

 

이 강의 원친이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강의 원천이 하나님 자신이시니, 이 물이 깨끗하고 맑아서 마시는 자마다 생명을 줄 것은 분명합니다. 2절에 보면, 이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합니다. 길은 거룩한 성의 대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는 말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길을 따라 나란히 강이 흐른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수의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는 성령을 주심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요한복음 7장의 주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해석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좀 더 폭넓게 설명합니다. “물 은유는 주로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나누는 영원한 교제의 삶을 표상한다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거룩한 성의 핵심 의미라는 점을 증명한다.”

 

2. 생명나무 (2; 3:22-24; 47:12; 2:7)

 

이어서 요한은 생명나무를 소개합니다. 이 또한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창세기 3:22-24이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224).”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회복된 에덴, 완성된 에덴에서 우리는 다시 그 생명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생명수의 강과 마찬가지로 생명나무도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바 있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12).”

 

요한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한 바와 같이 생명나무가 생명수의 강 좌우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기원하는 생명수의 강이 생명나무에 수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한다는 것이고, 생명나무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명나무가 나무들(복수)이 아니라 단수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집합명사의 단수형으로, 강 좌우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나무들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하나의 거대한 뿌리에서 강 좌우로 쭉쭉 뻗어 자란 생명나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본 하나의 생명나무는 이제 강 주위의 많은 생명나무가 됨으로써, 완성된 에덴의 충만함과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 생명나무의 기능을 묘사합니다. 먼저,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완성된 에덴의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과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자연은 때를 따라 결실을 내었지만, 거룩한 성 완성된 에덴에서는 결실의 계절이 따로 없고 언제나 모든 시간이 결실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영원토록 충분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2:7), 여기서 우리는 그 성취를 봅니다. 짐승에게 굴복하여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승리한 성도들은 이 열매를 먹고 영생의 풍성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만국을 치료하는 잎사귀입니다. 만국은 물론 구속 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잎사귀가의 치료하는 기능은 천국에서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은 육체적 치료와 영적 치료가 완성된 곳임을 암시하고 내세의 무한한 영광을 현세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브라어인 탭(Brian J. Tabb)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영생을 상징한다.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날 때 영생을 상실했으나(2:9; 3:22-24) 새 창조에서 다시 회복한다(22:2).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배제되고 접근을 차단당했던 길이 이제 의인이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열린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붙잡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성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기업을 상징한다(22:14,19).”

 

3. 완성된 에덴의 제사장과 왕들 (3,4a; 3:13; 1:1; 2:15; 28:36-38; 1:26,28; 6:25-27)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에 이어 요한이 완성된 에덴에서 세번째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그 성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총 1189장인데, 저주와 저주의 영향력이 없는 장은 네 장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인 창세기 1-2장과 모든 저주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된 후의 요한계시록 21-22장입니다. 하지만 저주가 제거되는 결정적 사건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이제 십자가의 구속이 완전히 성취된 것을 우리는 본문에서 봅니다. 저주가 사라지고 난 후에 요한이 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자기 백성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심으로써 그 성이 성도들에게 모든 것영생, 충분한 양식, 완전한 치료, 절대적인 안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구속 받은 성도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종은 요한 같은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1:1을 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요한계시록 1:1).” 요한은 성도들을 자기와 동등한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점을 보면, 오늘날 목사를 지나치게 특별한 종으로 구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서 크게 존경할 수 있을 뿐입니다(딤전 5:17).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은 구속 받은 백성이 완성된 에덴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암시합니다. ‘섬기며라는 말은 구약 제사에서 제사장에 의해서 행해지는 섬김과 경배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헬라어이지만, 구약적 배경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일이었습니다(2:15).

 

여기 경작하고 지킨다고 두 단어가 결합되어 사용될 때,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책임 혹은 성막에서 봉사하고 성막을 지키는 제사장의 직무를 가리켰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하나님의 최초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덴 동산을 섬기고 지킨 첫번째 제사장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뱀이 들어와 자신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는 일로부터 에덴 동산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서 실패했고 그 결과 동산성전을 지키는 제사장의 직무를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4절 하반절에서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도 대제사장의 이마에 쓰던 순금패를 생각하게 합니다(28:36-38). 그 금패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메레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기는 자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말이고 즉, 그들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성별됨으로써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거룩한 특권이 모든 주의 백성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은 완성된 에덴에서 성도들이 제사장 뿐 아니라, 또한 왕으로 통치할 것을 말씀합니다. 왕노릇은 천년이라는 한정된 기간의 왕노릇이 아닙니다. 세세토록, 영원히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였듯이(1:26,28), 이제 구속 받은 성도들은 완성된 에덴에서 모든 새 피조물들에 대하여 영원한 왕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5절은 다시 밤이 없으며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다는 사실을 21:25에 이어 강조합니다.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 6:2527).” 옛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었겠지만,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성도들의 영생과 왕노릇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4. 지복직관(至福直觀, 4a; 33:18-23; 1:18; 11:7; 17:15; 27:4; 42:1-2; 고후 3:18; 요일 3:2-3)

 

끝으로 우리는 완성된 에덴에서 경험하게 될 최고의 복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말합니다(4a). 구속 받은 성도들은 완성된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소위 지복직관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무엇을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 부르실 때, 아담은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전과 같이 뵈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잃어버린 최고의 저주이고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시며 등만 보여주겠다고 하셨습니다(33:18-23).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 모세라도(34:10)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그러나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완성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이것과도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지복(至福), 즉 더한 행복이 없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필립 휴즈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모든 복의 정상이며 총체이다.” 그러니 이 복의 크기를 어떻게 말로 다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비록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할지라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다니요?

 

참된 성도들의 소망은 언제나 주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었음을 시편의 고백들이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 1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12).”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은 구약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성도가 가진 가장 큰 소망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생후 6주 때 의료사고로 실명을 하고 94세로 임종하기까지 시각장애인으로 살며 수많은 찬송시를 썼던 패니 크로스비는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 생전에 눈을 떠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13:23).”

 

5. 교훈과 적용

 

말씀을 맺으면서 두 가지 교훈과 적용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 요한일서의 이 말씀처럼 여러분도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보고싶은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 영화로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가 가지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힘을 얻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너무나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완성된 에덴에서 지복직관을 누릴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그날 거기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소망을 품고, 이 소망이 여러분의 어떤 소원보다 더 강렬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게 되기 위해,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둘째 교훈입니다. 성도는 종말론적 안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를 정복하심으로 에덴을 완성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최초의 에덴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에덴 동산을 통해 의도하셨던 영광, 완성된 에덴으로 나아가가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에덴동산에 한정되었던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비치는 하나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밝히고 새 하늘과 새 땅 전부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따라(1:8)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선교사와 교회들은 자신들의 수고와 섬김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며 너무나 영광스러운 감격으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날에 영광스럽고 즐거울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1세기 말, 믿음과 복음 증거로 끔찍한 박해를 직면하고 살아야 했던 성도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비전을 보면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을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소망을 가지고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고, 갖은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등지거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힘이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 말씀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복음의 증인된 신자로, 교회로 살아가십시오. 머잖아 완성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지복직관의 행복을 소망하며, 우리의 눈물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즐거이 보며 감격할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안목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95/생명수의 강 /22:1-5/3:9-11/5:1-2/ 김성수목사

2015-07-20 20:03:44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리는 지난 주 94강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 하나님의 백성,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본문인 요한 계시록 21장 후반부를 통해서

장차 올 그 나라에서하나님의 백성들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본 것입니다.

 

아울러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석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 그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은 오늘 본문의 묘사를 통해서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생명의 근원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장면을 구약의 어디에선가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동산 중앙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 그리고 또 한군데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새로운 성전에서

물이 흐르는 장면이 나오지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러니까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회복된 에덴과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새 성전이, 성도 안에 구현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성도는 단순히 구원받은 한 개인일 뿐 아니라

회복된 하나님 나라를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그림자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는 성전(지성소)에서 물이 흐릅니다.

오늘 본문1절에서는 그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지요?

우리가 지난 주 본문에서 성전은 곧 누구이셨습니까?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서 471절이 오늘 본문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배우신 것들을 머릿속에 잘 떠 올려 보셔요.

제가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충만하게 흘려 보내주시는 생명력을 무엇이라 한다고 했습니까?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원래 차단되었던 것을,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는 생명력을 성경은 바라크, 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그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바라크, 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수의 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이미 이 땅에서 그 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산상수훈 팔복이 나옵니다. 그 팔복이 전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카리오이, 복 있는 자여라고 시작됩니다.

그 산상 수훈의 팔복은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보여 지는가를 설명하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서, 이미 영적으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흘러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성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땅을 살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존재하는 우리 성도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이미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말인데, 그 생명수가 도대체 뭡니까?

 

그리고 그 생명수는 어떻게 다시 우리 성도들에게 부어지게 된 것이지요?

답은 예수입니다.

 

(4:10-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그 샘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잘 보시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명수와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생명수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달라고 하는 샘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나온 기적 같은 세상의 물이었습니다.

 

오늘 날 교회들의 모습이 꼭 이 사마리아 여인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수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 예수님에게, 자기 육신의 목을 축일 기적 같은 물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지요?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여인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자기 목을 축이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게 바로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흐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님 앞에서 물동이를 들고

이 물동이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기적 같은 물을 채워주세요라고 징징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인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라는 그 참 생명수를 세상에 소개하고 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생(신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4)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 안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성도들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 예수를 이용해서, 육신의 목을 축이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실과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온유, 자비...)

 

그 생명수가 어떻게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게 되었지요?

십자가로 주어지게 된 것이지요.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의 이 땅에서의 삶

 

그러면 그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땅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삶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제가 조금 전에 그게 바로 팔복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이 산상 수훈에 나오는 팔복을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팔복은 이렇게 살면 복 받는다가 아닙니다.

이 팔복은 복을 받은 자들은 이렇게 살게 된다를 보여주는 것이 팔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대한민국 남자는 모두 군대에 갑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의무 복무를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라면 이렇게 사는 거야를 가르치지

너희는 이제 군대에 왔으니 열심히 노력해서 남자가 되어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팔복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은 이렇게 살게 된다.’가 팔복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 우리에게 부어진 생명수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지요.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언뜻 봐도 이건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다르지요?

 

먼저 3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복이 있는 자는(생명수를 가진 자는) 심령이 가난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자리하실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있는 세상의 욕심과 야망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이며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진짜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 있는 자는 애통하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 펜데오라는 단어는 억울함에 대한 애통을 말합니다.

복을 받아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면서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처사를 감당해 내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우리가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손해보고 내가 양보하고 내가 져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펜데오,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복 있는 자는 온유하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온유하다, 프라우스는 단순히 성품이 온순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프로슈케, 하나님께 기도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지금 현재 세상의 환경이나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골고루 나누어 갖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 땅을 나누었습니까? 가나안을 정복한 뒤에 나누었습니까?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나누어 갖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는 자신들의 대적들이 우굴 거리고

그 대적들은 이미 철 병거를 가진 철기 문명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청동기 문명을 살고 있는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어떻게 공격도 안 해보고 그 땅을 미리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까?

자기들의 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고 여러분의 생명을 그 분께 걸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의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가 로 향해 있습니다.

 

라는 것은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열심히 기쁘게 수행하는 것을 , 짜다크라 한다고 했지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복을 받게 되면

그 의에 대한 욕구, 다른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무엇일까?’가 그의 욕구가 됩니다.

당연히 그들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상 적인 욕구를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다섯 번째로 복을 받은 자는 긍휼이 여긴다.’라고 합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이시는 그 자비와 사랑을

긍휼, 엘레에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성도는

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역시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요.

 

여섯 번째로 복 있는 자들은 마음이 청결하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비워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 부패성 이러한 것들을 비우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죽이기를 열심히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일곱 번째로 복 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화평케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화평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예수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절대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케 하고 다투게 하는 자가 되지요. 화평케 하는 자들은

그들이 상대방의 아래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힘이 듭니다.

 

여덟 번째로 복이 있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힘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 받은 사람, 생명수의 강이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 팔 복을 다 합쳐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수 = 팔복 = 십자가

 

여러분 중에 혹시 지금 이 팔복을 들으시고

그게 뭐가 천국이야. 난 그럴 거면 천국에 안 살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 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국에서도

여러분이 핍박을 받고 늘 남에게 당하고만 살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그 삶 속에서 죄인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훈련하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땅에서 이성을 간직한 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으로 살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이런 생각 해 보셨어요? 만일 우리가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래도 우리는 더 갖고 싶고 더 유명해 지고 싶어 할까요?

 

그 때는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적고, 내가 덜 유명하다는 기준을 내릴 상대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적다/많다 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모두가 내 옆 사람과 비교해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많이 갖고 더 유명해지려고 하는 그 욕구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결국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이겨서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나를 과시하려는 인 것입니다.

 

그 것을 저는 세상의 힘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새 사람들은 세상 것을 자꾸 포기하고, 양보하고, 져 주면서

힘의 원리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원리를 벗어나서

나 말고 하나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십자가라는 삶을

이 땅에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은 자들의 삶은 고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하실 수 없으셨나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떤 삶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할 것입니다.

힘이 최고야, 예수 잘 믿으면 그 힘을 주셔, 그러니까 십일조 떼어먹지 말고 열심히 해,

봉사 열심히 해, 집을 팔아서라도 건축 헌금 해봐.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몇 배로 그 힘을 불려 주실 거야

 

여러분 그건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절대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 바로 그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잘 보시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마귀에게 데리고 가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생명수를 마시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 받은 자들을 마귀가 어떻게 미혹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하지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예배당에 와서 온통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의 떡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그걸 우리는 불신자라 부릅니다.

 

어떤 힘센 초월자의 힘을 빌어서, 자신에게, 기적처럼 이 세상의 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소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시험하는 마귀에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잘 보세요. ‘나는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가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지금 모든 성도들을 대표해서

그리고 대신해서시험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신명기8:3절을 인용하셔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신8:3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지 그들의 배를 불리는 음식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는 양식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음식과 양식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음식은 내 배를 불리기 위해 그 때 그 때 먹는 먹거리를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식사람이 그 것을 바탕으로 어떠한 목표 지점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을 말합니다.

 

예전에 한국에 보리 고개가 있을 때에 광에다가 쌀 두어 가마니를 척 쌓아두면

온 식구가 겨울을 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것을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헬라어는 전자를 프롭페라고 하고, 후자를 브로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그 두 단어를 혼용해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그들이 광야에서 쏟아지는 만나를 보고 이런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반드시 저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 실 것이다라는 힘을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지

음식을 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음식도 하나님께서 주시지요. 그러나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우리의 생존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만나를 음식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음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나를 음식으로만 보니까 불평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부추와 마늘과 고기도 먹었는데, 왜 여기서는 맨날 만나만 먹어야 하나?’

 

그래서 신명기 8장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을 위해 살고 오직 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 우리가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조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 광주리 들고 가서 만을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의 내용이신 예수를 힘 삼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두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주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네 힘으로 너를 증명해 보라는 시험입니다.

그게 마귀의 세력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그런 힘이 있으신 분이시지만 거절하십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마귀는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하면 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거부하십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에 와서 세상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전부 어떤 사람들이라는 말입니까?

마귀에게 경배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것이 없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나에게 없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 세상의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수를 이미 마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그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왜 그렇게 못 생긴 모습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가셨는지 아세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난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따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황제로 오셨다면 이 세상 전체가 그 분을 좇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가지신 힘과 재물을 좇는 것이지 영원한 생명수이신

구세주를 따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그 예수의 초라한 모습 속에서 생명수를 발견해 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들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눈에 보이는 번영과 행복이 찾아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일을 하신다면, 누구나 다 예수를 믿겠노라고 나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골라내시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십자가를 걸림돌로 두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좇는 자들은 모두 그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버립니다.

가짜 들은 십자가 앞에서 이내 포기합니다. ‘이게 무슨 복이야? 난 안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그 십자가를 묵묵히 통과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의 별이 동방박사들을 헤롯의 궁으로 데리고 갔을까요?

하나님은 그 동방 박사들로 하여금 세상에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인도했던 것이라면

그 별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갔어야 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별을 헤롯의 궁으로 끌고 가십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유대인의 왕 헤롯의 궁에 가서 다른 왕을 찾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동방 박사들을 통해 이 세상의 왕, 이 세상의 힘을 부정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세상의 힘이 진짜 힘이 아니라 비록 구유에 놓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삶이 바로 진짜 힘이며

진짜 왕의 삶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의 원리에 의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은

완전히 잘 못된 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시자마자 세상 힘의 상징인 헤롯 왕의 정체가 잔인하게 폭로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까지도 서슴없이 죽여 버리는

그러한 세상의 정체가 예수 앞에서 폭로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늘의 왕 노릇 할 사람들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세상 왕들에게 핍박받고

쫓겨 다니는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인 것입니다.

 

(5:1-2)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말씀을 의역을 하면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칠 분이,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을 다스리시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미가는 이제 베들레헴에서 다시는 이스라엘이 그러한 심판에 놓이지 않게 하실

한 왕이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예 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재판 자들이 세상의 힘의 원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등장하여

이 세상의 다스림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원리로 세상을 다스려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재판자의 뺨을 치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재판자가 누구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가 3장에서 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어떻게 표현을 하는가 보세요.

 

(3:9-11)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종교 지도자들이 돈을 받고 재판을 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해서 교훈을 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해서 점을 치면서,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절대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지도자가 돈을 보고 축복하고, 돈을 위해 예언을 해 주고,

헌금을 많이 내면 잘 산다고 가르치고, 봉사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잘 산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자들의 뺨을 갈기기 위해

예수를 베들레헴의 구유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그게 정말 승리의 모습으로 보입니까?

그게 정말 세상의 뺨을 치는 모습으로 보이나요? 그러나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가 승리이고, 그 십자가의 삶이 세상의 뺨을 치는 모습이라고

 

여러분, 예수께서 탄생하시고 헤롯이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하지요?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원래는 내 아들을 애굽으로 불러 들였다가 맞지 않습니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애굽은 지리적 의미의 애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 다른 말로 세상 왕이 다스리는 곳을 애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의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 모든 곳을

애굽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탈출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끊임없이 그 출애굽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출애굽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2:34-35)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두움들이 드러나 버렸기 때문에

그분은 늘 세상의 어두움들로부터 비방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표적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성도의 삶이 그러한 삶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이 드러나고 그들이 정죄를 받아

여러분을 미워하는 그 십자가의 삶이, 여러분에게서 나오고 있습니까?

 

(고전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0:32-35)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여러분, 이렇게 우리 생명수의 강을 소유한 자들의 삶은 이 억지뿐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영광을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하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달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맺어야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힘이 든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힘내십시오. 그 십자가 너머에 우리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은 그 십자가 너머의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열심히 그 길을 가십시오.

 

그들이 진정 그들의 속에 생명수의 강을 소유한 자들이며

그들이 결국 영원한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3,4,5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2:3-5)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여기가 바로 여러분이 가야 할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들이 이곳을 바라보십시오.

 

 

 

 

 

admin

 

 

 

생명수의 강/22:1-5

2003-10-30 21:20:06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에 의해서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힘있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할 것 다하면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돈 없는 사람들은 온갖 낙심과 절망 속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돈에 의해서 삶의 모습들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것은 장차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린다는 의미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간다면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란 그 속에 새로운 생명이 흐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삶 역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2절을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다시 보여주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흐르고 있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에스겔 47:1절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에도 역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도 보면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 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세상 만물은 물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물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본문 2절에서도 그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길 가운데로 생명수 강이 흐르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 두 가지 과실을 맺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 생명수 강으로 인해서 큰 풍성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본 이 환상은 우리에게 생명수로 인해서 풍성함을 얻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 드린 대로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어린 양의 신부가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의 생명의 근원은 바로 생명수의 강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에 흐르는 생명수 때문에 어린 양의 신부된 예루살렘은 다달이 과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린 양의 신부에게 있어서 참생명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수 강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삶에 대해서 소망을 가져본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돈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치 돈이 생명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한탄해 하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1절에 보면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수의 근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라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강의 물이 생명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강 좌우에 다달이 열 두 가지 과실을 맺는다는 것도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결과를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21:22절에서 언급한 대로 성전은 곧 하나님과 어린 양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란 다만 죽어서 천국 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즉 생명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속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때 여인은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는 대답을 합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주겠다고 한 물과 여인이 기대한 물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생각하는 물은 사람의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는 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하시니까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을 대했던 여인의 수준이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관심은 오직 갈증을 해결하는 물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체를 목마르지 않는 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축이는 물이 우물에 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덕분에 한번 먹으면 목마르지 않는, 즉 다시는 우물에 물을 기르러 올 필요가 없는 편리한 물을 기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에 의해서 내 목을 축일 물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는 것도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목을 축일 물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즉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꺼내시고 결국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과 대화한 그분이 그리스도이며 그분이 자신에게 생수가 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생명수는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라는 것을 표현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목을 축이는 물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인생의 전부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알았고 그분을 우리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물동이를 버린 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물동이를 붙들고 그 통에 내 목을 축일 물을 담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 없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피흘리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 있습니다. 내 세상 것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실체는 죄인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인간의 실체를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다면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 것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겠습니까? 신자라면 자신을 죄에서 건져내시고 하늘백성 되게 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목말라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 생명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돈에 대해서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돈을 요구합니다. 돈이 힘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생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돈없이는 살아가도 그리스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생명이 그리스도임을 알기 때문에 나타나게 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곧 생명에 거하는 신자가 영원토록 거할 나라의 실체입니다. 이 나라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이지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일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돈도 내 수중에 있을 때는 영원히 내것같이 여겨지지만 결국 다 내 손을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힘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나를 살리는 것이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하시고야 말 멸망의 자리에서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그리고 참생명을 소원하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의 그 소원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세상 것에 대해서 목말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자는 이미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은 자입니다. 그 속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 것은 지나가는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고 모든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생명수가 흐르는 어린 양의 아내입니다.

 

 

 

 

 

22:1-7/ 목자되신 예수그리스도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27:32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추심이라(二十二)

 

하나님께서 본래 인생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 동산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생명나무와, 또는 선악을 가릴 수 있는 나무도 있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또한 물 근원이 있어서 온 동산을 적시고, 그 근원이 강이 되어서 네 갈래로 나누어져서 사방으로 흘러갔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첫 거주지가 아름다운 동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이 동산에서 쫓겨나서, 밀론의 유명한 시로 묘사한 것과 같이, 낙원을 잃는 비극을 연출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인생들은 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제일 마지막 장인 二十二장 이하를 읽어 볼 때에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나라를 역시 아름다운 동산으로 묘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또 저기 수정 같은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여기에 잃었던 낙원을 다시 찾는 복낙원(福樂園)의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인생으로 하여금 잃은 동산을 이윽고 다시 찾게 만드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가 내세에 이 동산을 회복하기 전이라도,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도 영적 의미에서 이 도안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五十八十一절을 읽으면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대인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물댄 동산같이 만들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같이 만드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아 三十一十二절을 보면그 심령은 물 대인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했습니다. 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에도 영적 의미에서 우리 심령 속에 에덴 동산을 회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어떠합니까? 과연 우리의 심령이 물댄 동산과 같습니까? 여호와의 동산인 에덴과 같습니까? 혹은 우리의 심령이 황폐한 거친 들 같습니까? 오늘 우리 마음의 동산을 살피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동산을 생각하게 될 때에는 먼저 동산은 그를 두른 울타리가 있는 것이 기억됩니다. 동산은 그저 빈들이 아닙니다. 동산은 단지 꽃밭도 아닙니다. 동산은 일정한 목적 아래에서 다른 곳과 분리되는 경계가 있고, 울타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비원을 가보면 이 진리를 잘 알게 되실 것입니다. 이 울타리가 있어야, 이 경계가 있어야 동산을 바로 지킬 수가 있고, 소나 나귀나 또는 난잡한 사람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동산에도 울타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분리하는 경계선이 필요합니다. 사상이라도 다 우리의 마음동산에 들어올 것이 못됩니다. 사상도 우리의 마음 동산에 들어올 것이 있고 못 들어올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애정의 꽃도 우리의 동산에 심을 것이 있고, 뽑을 수밖에 없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동산에도 이 성별의 울타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성별의 원리에 대해서 이와 같이 직접 교훈 하십니다.

 

너희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니,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했습니다. 마음동산에도 성별의 울타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로 동산을 생각할 때에 동산은 아름다운 곳이요, 조화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자연히 연상하게 됩니다. 풀도 아름다운 풀을 심습니다. 꽃도 아름다운 꽃을 심습니다. 돌이나 바위도 아름다운 돌과 바위를 갔다 놓습니다.

 

풀이나 나무나 꽃이나 돌이 다 조화가 되게 알맞게 적당하게 동산을 만드는 것입니다. 동산이 아름답지 못하면 동산이 아닙니다. 동산에 조화가 없으면 동산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의 동산도 아름다워야 되고, 마음의 동산에도 조화 곧 평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는 배우라고 하셨고, 또한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강퍅한 마음은 추합니다. 맑은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흐린 마음은 더럽습니다. 정직한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거짓된 마음은 추한 것입니다. 충성된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간사한 혀는 가증한 것입니다. 인자한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잔인한 마음은 추한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은 꽃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 찬 가슴은 추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동산이 아름답고 조화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흔히 말하는 가운데비단결 같은 마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흑인이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의 얼굴을 보고 화장을 하다가 암만 화장을 해도 새까만 얼굴을 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흑인이 결심하기를나는 내 얼굴은 비록 검으나 내 마음은 희게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외모로 단장을 중지하고 마음의 단장을 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보면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미장원은 도처에 생깁니다. 그러나 신상 더 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고 추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갖은 추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에 일어나는 현상은 먼저 마음의 더러운 가운데서 경험하고 계획되어서 추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마음이 아름다운 청년, 마음이 아름다운 여자, 마음이 고운 어린애들이 그립습니다. 동산은 아름다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와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동산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히 장성이 연상됩니다. 동산 속에는 모든 것이 자라납니다.

 

풀이 자라나고, 나무가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동산을 만드는데 한 가지 즐거움은, 오늘 아침에 나가면 꽃이 둘, , 넷 점점 많이 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산에는 모든 것이 장성해서 매일 새로워지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산에도 이렇게 장성이었어야 되겠습니다. 마음의 동산에도 새로움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마음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마음의 동산에도 열매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모든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지 할 때에,너희들은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는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는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는 또한 인내를 더하고, 인내 위에 경건(敬虔)을 더하고, 경건 위에 형제우애를 더하고, 형제우애 위에 사랑을 더하라.이와 같이 믿음으로 시작하여 점점 장성하라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이와 같이 권면 했습니다.

 

조금 내려가서 다시 계속하여 하시는 말씀이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 시니 곧 그리스도니라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에게 미치기까지 장성하라고 권면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동산에 제일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여기에도너의 심령이 물 대인 동산과 같겠다고 말했습니다. 물이 없이는 동산이 되지를 못합니다.

 

지난번 성지를 순례할 때에 솔로몬의 동산이라는 곳을 가서 보니 거기는 좋은 샘이 있어서 큰 호수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매 마른 성지에서, 그 곳에는 아름다운 옛날 솔로몬의 동산이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로마 교외에 유명한 옛날에 건설된 동산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산비탈에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심고 층층이 내려오면서 동산을 건설했는데 그 동산의 특색은 분수인데, 이 물이 뽑는 분수가 열, 스물, 서른……셀 수 없으리만큼 사방에서 물을 공중에 솟습니다.

 

그리해서 햇빛이 그 분수를 비추어서 사방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생기는 참 세상,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동산을 구경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동산에는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 없이 풀이 자랄 수 없고 나무가 큰 수가 없고, 꽃이 필수가 없습니다. 물은 동산의 근원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동산에도 이 물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물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나나는 이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하도록 솟아나는 이 샘물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의 심령은 문자 그대로 물 대인 동산이올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성신의 생명수,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수,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 주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 주님께서 주시는 그 만족, 주님께서 주시는 그 화평이 우리 마음 가운데 언제나 충만합니까?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야말로 물 대인 동산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하라 사막과 같이 쓸쓸한 심령이라도 매 마른 심령이라도 이 광야나 사막을 변해서 아름다운 동산, 물 대인 동산을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이와 같은 마음의 동산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 가지 경계의 말씀을 더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산에 제일 경계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동산에 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거니와 에덴 동산이 그렇게 아름다웠지마는 뱀이 들어온 까닭에 그만 파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동산에도 경계할 것이 있습니다. 독사와 같은 악한 마귀의 유혹, 마귀의 시험이나, 또한 그와 같은 악한 마귀의 생각이 우리 마음의 동산에 깃 들지 못하도록 하여야 되겠고, 비록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내어쫓아서 깃 들지 못하도록 우리가 경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마음의 동산을 아름답게 간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산에는 다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동산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아가서 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내 동산에 오도다.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동산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의 동산은 그리스도에게 속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 값 주시고 이 동산을 사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마음의 동산에는 언제든지 주님께서 계셔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보전해서 언제든지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동산에 머물도록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 심령이 물 대인 동산 같고, 모든 근심이 없으리로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와서 온 과거를 청산하고 온전히 죄를 뉘우쳐 고치고, 주님을 우리가운데 영접하면 사막 같은 우리의 마음, 쓸쓸한 광야와 같은 우리의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의 동산, 물 대인 동산, 에덴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께서 이 예배당 문을 들어오실 때에는 어떠한 마음의 동산을 가지고 오셨던지 나가실 때에는 물 대인 동산과 같은,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이와 같은 풍부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기쁨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생명 살림이라는 소명 /47:7-9/ 김기석목사

2019-09-13 12:51:41

 

[내가 돌아올 때에는, 보니, 이미 강의 양쪽 언덕에 많은 나무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로 내려갔다가,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그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그 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될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

 

기후 위기 시대

길 잃은 이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이고, 감리교회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성령강림과 환경 살림의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영국 신문 가디언은 기후 변화(climate change)라는 용어보다는 기후 위기(climate crisis) 혹은 기후 붕괴(climate breakdow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기후 위기의 징후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폭염과 한파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고, 산불도 자주 발생합니다. 고농도 미세먼지가 우리 삶을 괴롭힙니다.

 

푸른 하늘을 보면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우리 하늘이 흐려 있다는 말입니다. 물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국경을 넘나드는 전염병이 우리 삶을 위협합니다. 핵발전소의 위험이 시시각각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생산되는 플라스틱이 우리 삶을 위협함은 물론이고 바다 생물들의 대량 폐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2017년을 기준으로 볼 때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34800만 톤이고,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사용된 후 매립되거나 방치되고 일부는 소각됩니다.

 

그 가운데 매년 800만 톤이 바다로 유입되고 있고, 바다를 떠다니는 플라스틱의 양은 무려 5조 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고래, 거북이를 비롯한 바다 생물들이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하여 삼켰다가 죽은 사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 동물들의 위에서 소화되지 않은 채 발견된 플라스틱 쓰레기는 인간의 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에서 발생되는 쓰레기의 일부가 가난한 나라들에 몰래 수출되기도 합니다.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정책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정치인들에게 온실가스감축에 노력할 것을 요구해야 하고, 생태계의 건강함을 회복하도록 하는 일에 그들의 역량을 발휘해줄 것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변화가 또한 절실합니다. 나의 편리함이 간접적으로나마 다른 이들이나 피조물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답게 산다 할 수 있겠습니다.

 

며칠 전 젊은 교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홀로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트에 가서 햇반과 조리된 음식을 사다가 먹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수줍은 듯이 답했습니다. “집에서 다 해 먹어요.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으려고요.“ 그 대답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의 작은 실천이 생태계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그런 거룩한 부담을 갖고 산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옳기에 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계산이 아니라 모험입니다. 누가 뭐라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로 나아가면서도 비애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끈질긴 사랑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그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그 쓸모를 모른다고 하여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또 쓸모로 세상을 평가하는 세상이 건강하다 할 수도 없습니다. 있음 그 자체로 사람들의 영혼을 굳게 붙들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과 산과 바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36:5-6)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경탄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는 순간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우상에게 마음이 팔린 사람들을 보고 아파했습니다.

 

종교조차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할 때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 강도들의 굴혈로 변하는 법입니다. 기독교가 역사를 이끌기보다는 역사 발전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던 그룹에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았습니다(9:3).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정신은 무너지고 형해만 남은 성전은 짓다 만 건물처럼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세상의 추문거리로 변한 한국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닌지 아프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깁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하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사랑을 심으시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시련의 시간을 보내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죄로 인하여 세상 도처에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 속에 일치된 마음과 새로운 영을 심어주십니다(11:19).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만 버석거리던 계곡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자 뼈들이 일어나 하늘 군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욕망의 전장에서 경쟁으로 여일이 없던 이들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일종의 부활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과 접속시켜줍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합니다.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 말라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것이 이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깨끗이 비워지면,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절실하면 하나님은 우리 곁에 다가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땅은 새로워집니다. 에스겔은 정화의 시간이 지난 후에 주님의 영광은 다시 돌아와 성전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습니다(43:5).

 

어느 순간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물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습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졸졸졸 솟아나는 것 같았지만 흐르고 흘러 마침내 큰 강을 이루었습니다.

 

물이 풍족한 강 양안으로 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고, 그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은 작은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흐릅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기어코 큰 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다면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별 하나는 희미하지만 그 별들이 모여 성단을 이룰 때 어두운 밤하늘을 찬란하게 밝히는 법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작은 헌신과 사랑은 솟구치는 샘물이 되어 이 척박한 땅을 흐르다가 마침내 강물을 이룰 것이고, 그 강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어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 문제를 잘게 쪼개서 옮길 수 있는 것들부터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실천을 통해 이 땅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용기와 희망이 우리 삶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생명의 강 - 주님의 재림 직전 교회의 모습에 관한 메시지 /47:1-12

2015-06-08 09:09:59

 

에스겔 선지자는 놀라운 이상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이 에스겔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려가셨는데 거기서

 

"모양이 놋같이 빛난" 한 사람이 에스겔에게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0:3).

 

 

 

요한도 밧모섬에서 자신에게 나타났던 한 사람의 모습을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1:15).

 

 

 

이 두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에스겔을 하나님의 전 문으로 인도하셨는데

 

거기서 그 선지자에게 놀라운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 때,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밝혀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이상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 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47:1, 3-6, 12).

 

 

 

성경에서 물은 거의 항상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이상은 분명히 마지막 시대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상은 너무나 강력하며, 너무나 광대한 것이라서, 에스겔은 이 이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그 이상을 본대로 서술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실상 그 이상이 끝나기도 전에, 주님께서 에스겔을 멈추게 하시고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47:6).

 

 

 

제가 이 구절을 재차 읽어나갈 때, 성령께서는 에스겔을 멈추게 하신 바로 그 성구에서

 

저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구약의 선지자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제게 하셨습니다.

 

"데이빗, 너는 이것이, 아버지의 보좌로부터 직접 임한 놀라운 예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느냐?

 

이 마지막 시대 교회를 그 예언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겠느냐? 불어나는 강의 의미를 이해하느냐?"

 

그 이상은 분명 에스겔을 놀라움 가운데 빠뜨렸을 것입니다.

 

 

전례 없는 엄청난 성령의 부으심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역사상 가장 영화롭고, 가장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몸은 결코 약해지거나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수가 줄지도 않을 것이며 영적 권위나 힘에서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타오르는 힘과 영광 속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완전한 계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라고 기록했습니다(47:10).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불어나는 주님의 임재의 바다 가운데, 헤엄칠 성도들의 무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종말이 올 때까지 불어날 것입니다.

 

 

 

슬프게도 저는, 이 마지막 때의 일부 교회와 기독교 단체 가운데 끔찍한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단체들은 하나님의 이상을 자신들이 속한 단체, 심지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만 한정시킵니다.

 

그들의 태도는 흔히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움직이심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바로 이곳, 우리 가운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체로부터 흘러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오셔서 참여하십시오.

 

우리에게 이상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일의 중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확장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도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사실상 그것은 수세기 동안, 주요 종파와 교단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훼방합니다.

 

 

 

과거에 그러한 교단들은, 자신들만이 지구 상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대변한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현시점에서 슬프게도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의 거짓 교리가 오늘날 다시 부활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교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도시나 지역이건 오직 하나의 교회만을 두십니다.

 

따라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영적 권위도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끔찍한 교리를 조장하는 자들은 그 지역을 "다스릴" 사도나 지도자들을 지명합니다.

 

 

 

저는 뉴욕시에 있는 그러한 자천(자칭) 사도와 선지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이곳의 영적 세계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에 더하여 교회가 오늘날 스스로를 제한하는 경향을 보이는 방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은 1세기 경의 초대 교회와 원래 사도들을 회고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치 고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단체들은 자신들의 모든 활동과 헌신, 성경에 대한 연구를

 

오직 초대 교회의 방법들을 흉내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쏟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초대교회의 방법으로 돌아가기를 반드시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사실 이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은 것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헤엄할 물"을 주신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에 있었던 몇 방울의 물을 추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본 불어나는 이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47:3-4).

 

 

 

에스겔은 여기서 성령의 불어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불어날 것입니다.

 

 

 

이 강의 발원지와 기초는 바로 십자가 입니다.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이 물의 문자적인 표현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19:34).

 

 

 

이 적은 양의 물이 바로 에스겔에게 이상이 열리기 시작할 때, 그가 본 최초의 물의 양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응시하다가 소량의 물이

 

"그 문지방 밑에서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고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47:1-2).

 

 

 

이 불어나는 물의 흐름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했던 오순절의 상징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며

 

그 강이 전 세계로 흘러 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8-39).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 생수의 강이 성령이라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며 영광이 가득한 행2장의 오순절은, 바로 미미한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며

 

폭과 깊이, 부피와 힘 그리고 영광의 회복에 있어서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가 바로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시작인 오순절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 물이 흐르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다른 120명의 사도들에게 이 물은 발목 정도까지 차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가 갈수록 그 양은 불어났습니다.

 

 

 

교회가 탄생하고 처음 몇 세기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콘스탄틴 황제가 권좌에 올랐을 때

 

그는 감옥과 수용소의 문을 열고 노예로 전락한 모든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석방했습니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선언했습니다.

 

 

 

그러한 박해의 시기 동안 교회의 성장은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그때가 바로 물이 불어나기 시작한 때입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계시를 받음에 있어서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물이 무릎에까지 차오르는 것을 누렸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을, 새로운 믿음의 장으로 인도한 또 하나의 통로입니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 흐른 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허리에까지 찼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계시를 더욱 받아 성장하였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상상해 보면 참 즐거워 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계시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습니까!

 

 

 

허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그들이 한 때 복을 빌던 우상의 조각들을 부숴버리고, 하나님의 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목도 하는 것은

 

분명 가슴 벅찬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물이 주는 기쁨과 생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생수의 강은 주님의 재림 직전에

정점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에게 임한 이상에 예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놀라운 여정에 대동 시키셨습니다.

 

척량줄을 가지고 주님은 일천 척, 450 미터 가량을 재셨습니다.

 

주님과 에스겔은 물속에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물의 높이는 발목에 닿는 정도였습니다.

 

 

 

에스겔은 "주님께서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47:3).

 

주님은 계속해서 에스겔로 하여금 앞으로, 더 깊고 멀리 물길을 따라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일천 척을 더 가자 물은 무릎에까지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에스겔은 미래를 향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상에서 강의 마지막 일천 척 부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을 마지막으로 척량한 때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이 마지막 척량의 단계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물이 너무나 깊고 장대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47:5).

 

그는 우리에게 "물이 내 머리 위로 불어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에스겔아, 이 창일한 바다가 무엇이냐?

 

이 강이 생명과 부활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런 영광 가운데 헤엄칠 복을 받을 자들은 누구이겠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가 얼마나 어리둥절 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도 에스겔의 이상에 나타났던 바로 그 강을 어렴풋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본 것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사탄의 공격으로부터의 보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이사야 33:21).

 

 

 

이사야는 여기서 노예들이 노를 젓는 전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큰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대적 마귀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혼돈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입구를 밀폐하라. 출항하라. 돛을 팽팽하게 하라"고 자기 선원들에게 짖어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와 그의 하수인인 항해사들은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 돛을 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노예로 사로잡힌 사공들은 완전한 혼돈가운데 앉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이점을 명확히 해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생명의 강에 사탄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시편 35:4-6).

 

 

 

전례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적 사망에서

소생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47:9).

 

에스겔이 강변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그는 강의 양 둑에 있는 "수많은 각종 나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그 강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잎은 결코 시든 적이 없고 그 열매는 놀라운 치유를 가져왔습니다.

 

생명이 이 높이 솟은 열매 맺는 나무들로부터 사방으로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강은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동일한 사망의 홍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에이즈는 우리 시대 파멸의 대양, 현대의 사해를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끔찍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였습니다(마태복음 24:12).

 

 

바울은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비웃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의 주님 재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사장시킬 것입니다. 그들의 조롱은 도덕의 쇠퇴와 죄의 창궐을 유발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사망의 교리를 전파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디모데후서 3:13). 지금도 영적 사망이 배교한 교회들에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사망과 파멸의 한 가운데서도

 

저는 제 영혼에 쩌렁 쩌렁 울리는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나의 강은 더욱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이 흐르는 곳은 어디에서든 모든 것이 소생할 것이다."

 

 

 

몇 년 전 까지 중국의 교회는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적이 성도들을 지하로 내몰았으며

 

수 십년 동안 중국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관한 언급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중국의 교회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강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서방이 중국의 형제 자매들의 운명을 궁금해 하는 동안에도, 강은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에서 수천만 명의 성도가, 하나님의 생명의 강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이 흐르는 곳은 어디든 무엇이든 소생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신 것과 꼭 같이 말입니다.

 

 

 

그 강은 동구 유럽 전역에서도 홍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25년 전만 해도 누가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러시아라는 요새에서

 

그 강이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흐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의 생명은 이 모든 나라들과 전 세계 다른 나라들 가운데서도 솟아나고 있습니다.

 

 

 

2001911 테러 이후 많은 뉴욕 시민들은 외부로의 이주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곳에 깊이 흐르는 생수의 샘을 파셔서 강물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거대 도시의 한쪽 구석에서 도시 전체로 주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극장가도 하나님의 강의 물결을 막지 못했습니다.

 

월스트리트 금융가도 불어나는 강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진적 동성애자들도 자신들이 모여 사는 구역 안으로 이 물결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낙태 옹호론자들도,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임신한 여성들의 가슴에

 

이 생수의 강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시청과 시 당국도 그 범람의 속도를 늦출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이슬람의 율법학자들도, 자신들의 회당과 사원으로 범람하는 강물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은 점점 더 불어나고 있으며,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소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는 혼돈이 주재하고 있습니까?

 

사망이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날뛰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47:9).

 

 

 

저는 주님께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실지 그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이 불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세기 전 세계를 휩쓸었던 세계적 운동인 공산주의를

 

동독에서, 동구 유럽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하루 밤 새에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도 성취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치유와 소생의 한복판에서도

일부는 제외될 것입니다.

 

 

 

이 경이로운 강물의 소생에서 제외되는 자들은 "소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47:11).

 

 

 

에스겔은 진흙으로 가득한 시궁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습지로 강이 흐를 때에도 그것은 치유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강이 그곳을 완전히 비껴감으로 그곳은 말라 소금으로 변할 것입니다.

 

 

 

에스겔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소금 늪은,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죄와 사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구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약속하고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을 이행하지 않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이사야가 기록했을 때 그는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강물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만지도록 허락 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생명은 그들로부터는 솟아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배에서는 생수가 아니라, 더러운 험담, 경솔한 아첨, 거짓말과 왜곡된 말들이

 

시냇물처럼 꾸준히 흘러나옵니다.

 

 

 

그들은 생명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진흙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방에 사망을 퍼뜨리는 영적 위선자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물 없는 샘"입니다(벧후2:17).

 

에스겔을 따르자면 사망선고가 그들에게 이미 내려졌습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47:11).

 

 

 

이것은 황폐케 되리라는 저주로서, 열매도 없고 완전히 쓸모없는 삶으로 내쫓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패역함에 견고히 서서 파괴적인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슬프게도 하나님께서는 생수의 강이 그들의 주변부로 흐르게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몰아넣은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소경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시자

 

그들은 속임수에 넘어가 사방에 파멸이 닥쳐올 때 "평화, 평화"를 외칠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 사망의 지대를 목도하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이 흐르는 곳마다 사방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있는 일부 사망의 지대는, 황폐하여 하얗게 메마른 상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어떻게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그토록 공허하고 메마른 상태가 되어, 주님의 생명수로부터 단절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을 따라 살았다. 그들은 뻔뻔스러우며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거역하였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비방하였다.

 

그들은 세상에 너무나 깊이 연루되어 세상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을 구원하였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섰다"(벧후2:10-21 참조).

 

 

 

이 비극중에서도 제게 가장 슬픈 부분은, 이 마른 샘의 대부분이 한때는 생수의 샘이었다는 점입니다.

 

한 때 그들의 삶으로부터는 치유와 축복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비통함, 증오심 그리고 사망을 뱉어냅니다.

 

 

 

여러분, 간곡히 촉구합니다. 생명의 강이 여러분의 사방에서 흐르는 동안에도

 

고집과 비통함에 매여 있으시다면, 스스로에게 그 길을 계속 가도록 허락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배를 생수로 가득 채우시도록 허락하십시오.

 

여러분은 인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 주님의 계시가 홍수처럼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육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에스겔에게 주어진 광대한 이상을 이해하셨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는 그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광대함을 볼 눈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생수의 강이 임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교회 /47:1-12

2009-04-08 14:11:13

 

지난 주에 호주를 다녀왔습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성시화 대회가 열렸는데 그 집회의 설교를 맡아 갔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는 올림픽이 열렸던 체육관에서 집회를 하였고, 주일에는 오후 3시에 시드니에 있는 한인교인들이 연합하여 시가지 퍼레이드를 하였습니다.

 

이 퍼레이드는 37일 시드니에서 있었던 마디그라라고 하는 동성애자들 퍼레이드에 맞불을 놓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3년 전에 시작된 운동입니다. 마디그라는 세계 10대 축제로 꼽힐만큼 유명한 집회입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몰려와 축제를 하고 퍼레이드를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동성애를 합리화하고 합법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추세를 막기 위하여 마디그라 축제가 끝난 후 곧 이어 시드니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여 성시화대화를 열고 시가지 퍼레이드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도 퍼레이드의 제 앞에서 서서 약 40분 정도를 걸었습니다. 조금 쑥스러웠지만 의미가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교회는 세상을 위한 자동온도조절장치였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그저 온도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킹 목사님은 교회가 자동온도조절장치가 되지 못하고 겨우 온도계의 역할만 감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세상에 대한 온도계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에 대하여 온도계 역할을 하려고 하고 있고, 실제로 하고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드니 성시화 대회는 그런 면에서 세상에 대한 온도계 역할을 자처하고 또 실제로 담당한 집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뜻이 있는 집회였고 나름 성공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회에서 저들을 격려하면서 이왕이면 온도계 역할이 아닌 자동온도조절장치와 같은 교회가 되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퍼레이드만 가지고는 안 되고 교회 자체에 회개운동과 정화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세상이 거룩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교인들이 거룩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거룩해 지기를 힘 쓴 후, 우리가 먼저 그 동안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한 후 그 거룩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말해야 할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초대교회는 자동온도조절장치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수는 작았지만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한국의 진정한 의미의 개화와 발전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였고 은근히 존경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바탕이 있어서 한국 교회는 세계선교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과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부흥과 성장이라고 하는 열매에만 집중하여 교회의 본래 사명을 잊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을 위한 교회에서 그저 교회를 위한 교회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흥과 성장이 가져다 주는 세상적인 매력 때문에 거기에 빠져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엉뚱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적을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온도계가 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교회에 대한 온도계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흥과 성장으로 엉뚱해지고 교만해진 교회는 세상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자기 힘을 과시하고 공갈하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대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 개신교는 공공의 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람들은 우리 개신교를 개신교라고 부르지 않고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중세 때 천주교는 상상할 수 없는 힘과 권력을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왕과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주교는 타락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개신교는 그 중세 때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너무나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한국 개신교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흥의 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 개신교는 18% 정도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감소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추락의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이었습니다. 저들의 관심은 빵과 육체적인 건강과 권력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 까지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궁극적인 목적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었을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까?’였으니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들이 애처러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병든 자들이 불쌍하여 저들을 고쳐 주시었습니다. 그리고는 애써 그것을 감추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자꾸 집중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점점 무관심해 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 그와 같은 이적을 베푸신 후에 아무에게도 가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반대로 가고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고 예수를 믿으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형통한다는 것을 표면에 걸고 목회를 하는 교회가 우리 한국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것을 영적야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적인 소명이 아닌 목회 야망에 의한 영적 호객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교회가 잠시 부흥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 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심에 취약한 것은 교인들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를 하는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치 잘못하면 소명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소명을 가장한 개인적인 야망을 위하여 목회를 하기가 쉽습니다.

 

교회다운 바르고 건강한 교회 보다는 우선 크고 힘 있는 교회에 더 집중하기 쉽습니다. 자신도 수 천 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그 안에 형성되어 있는 세상적 권력의 핵심이 되어 그 특권을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타락하게 됩니다. 빵과 치유와 권력에 혹하는 교인들과 개인적인 야망에 눈 어두운 목회자가 만나면 교회는 매우 위험해 지게 됩니다. 교회는 잠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점점 교회로서의 특성과 자기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깨끗한 부자를 설교하고, 청년들에게 고지를 정복하라는 설교를 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청부론과 고지론이라는 이를 붙여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기복주의와 성공주의로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설교의 목적은 부자되고 고지를 정복하여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설교의 목적은 세상을 섬김입니다.

 

바울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도 로마시민권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로마 선교에 유용한 도구로 이용하였듯이 우리도 물질과 권력을 바울의 로마시민권과 같이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는 것 뿐입니다. 주를 위하여 잘 쓴다면 물질과 권력을 무조건 부정하고 죄악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제게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세상적으로 출세하여 권력을 잡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는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요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건강하든지 약하든지, 높든지 낮든지 상관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과 실패, 부함과 가난, 높음과 낮음과 상관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부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말고 세상적인 부함과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가난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낮고 천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도구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대신 이것 즉 부함과 권력도 부인하지 말자는 것 뿐입니다.

 

우리를 정말 잘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법과 식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전에서부터 물이 스며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물이 점점 불어나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고 나중에는 헤엄을 칠만한 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땅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강가의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강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넘쳐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것은 생명수였습니다. 생명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전 이 세상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 하나님이 말씀이 떨어지자 공허하던 세상은 온갖 아름답고 의미있는 것으로 충만하여지게 되고, 혼돈하던 세상은 질서 있게 그리고 어둡던 세상은 밝은 빛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살리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해도 그의 삶 속에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늘이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이 물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뜻이 흘러 나와야만 합니다.

 

그것이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계속 흘러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도 살고 세상도 삽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그것이 끊어졌습니다. 성전에서부터 세상으로 흐르는 물이 없어졌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정신을 잃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고센 땅에 눈 어두워 가나안을 잊고 살다가 애굽 땅에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축복으로 주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바울의 로마시민권과 같이 주를 위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로마시민권을 탐하듯, 세상 사람들이 로마시민권을 휘두르고 그것을 즐기듯 하다가 사명을 잊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잊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는 높은 뜻 교회입니다. 높은 뜻은 높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high will church가 아니라 God"s Will Church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우리의 뜻과 욕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식입니다. 우리는 높은 뜻 교회에서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교인들에게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것을 배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식을 삼고 원칙을 삼고 살면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세상으로 성공하든 혹 실패하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의 큰 문제가 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칠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가 자꾸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채워주는 사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점점 무당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폭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독재자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독재자를 닮아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면서부터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자체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습을 한다고 당장 그 대형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저들은 세습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고 당위성까지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기들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체면과 위상이 얼마나 실추되었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 전체가 침몰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비탈에서 미끌어지기 시작한 교회입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우리 혼자 그 일을 다 감당할 수는 없으나 우리 교회가 그 중에 한 몫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물이 흘러나와야만 합니다. 세상으로 흘러가는 물이 나와야만 합니다. 세상의 물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세상과 교회를 살리는 생명수 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식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욕심과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욕심 즉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과 자신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모든 생명들이 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풍성해 지기를 원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살고, 한국 사회가 건강해지고 건전해지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 자체에 욕심을 부리지 말고 우리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욕심을 부리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있습니다. 높은 뜻에 있습니다. 높은 뜻에 욕심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높은 뜻이 이루어질 때마다 맺어지는 열매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되어 여러분이 속해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을 바꾸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에 사람들 /47:1-12/ 류영모목사

2015-01-04 21:24:40

 

천국가는 마차도 1등석이 있고 2등석이 있고 3등석이 있답니다. 1등석은 자리에 앉아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개울을 건너나 언덕을 넘어가나 버티고 앉아 있으면 됩니다.

 

2등석은 언덕을 오르거나 개울을 건너갈 때는 의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된답니다. 3등석은 언덕을 올라갈때는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밀어야 됩니다. 개울창에 빠지면 그것을 번쩍 들어서 함께 옮겨야 된답니다. 그것이 3등석이랍니다.

 

천국문 앞에 도착했는데 1등석부터 앞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문 앞에 베드로가 서 있다가 뒤로 돌아 앞으로 왓! 그렇게 해서 3등석이 제일 좋은 일산신도시에 살게 되고 2등석에 앉았던 사람은 저 낮은 동네에 가고 1등석에 천국에 오신 분들은 개집에 웅크리고 살게 되더라. 그렇게 비유로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은혜에 잠겨 사는 사람들교회의 어려움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험 드는 일이 있으나 아픔이 있으나 흔들림없는 바위같은 신앙인들 은혜에 잠겨 사는 사람들이 됩시다 하는 말씀입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도 있고 또 그런 책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상처받은 치유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일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많은 문물을 약탈해 갔고 1만명의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이 함께 갔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던 해,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면, 아모스가 정의의 선지자였다면, 에스겔은 소망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임금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녔습니다. 비참하게 끌고 다니다 처참히 죽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소망을 선포하던 에스겔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에스겔은 이런 아픔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동안 귀를 막고 있던 백성들이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의 위로와 격려 희망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환상입니다.

 

이 환상의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실패를 겪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에스겔은 조국이 망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고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습니다.

 

이런 비극속에서도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가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러한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붙들어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그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이 백성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에 강력한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었던 에스겔은 고통받은 동족을 위해 더 진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자른 사람에게 찾아가서 손을 붙들고 "그만하면 다행이라고." 위로했더니 "너도 다리 한번 짤라 볼래." 그러더랍니다. 그러나 두 다리 없는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했더니 함께 손 붙들어 울며 위로를 받더라지요.

 

II. 환상

 

오늘 본문 위로의 환상을 보시겠습니까?

 

하루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성전에 물이 그득히 고이며 한번 걸어보라고. 그래서 걸어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찰랑 찰랑 흘러 넘쳤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물은 점점 차 올라 허리까지. 오늘 본문에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가슴까지. 급기야 물은 성전에 가득하여 헤엄하지 않고서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한바퀴 휘감아 돌더니 사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해 바다에 도착하자 죽었던 사해 바다가 살아나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어 노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막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데 보니까 사방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환상을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지만 반드시 찬란한 아침 태양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비춰지게 될 것이다. 우리민족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실패했지만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민족은 전능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민족을 치료해 주시고 새롭게 일으켜 주실 것이다. 에스겔의 환상을 통하여 백성들은 희망을 가지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본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강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상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흐를 수 없지요. 더구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그 물이 사막을 통과하고 사해 바다까지 이르러 마침내 죽은 사해 바다를 살렸다고 하니 이 말씀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 조차도 71%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일강의 애굽문명, 유브라데스 강의 바벨론 문명, 인더스강의 인도문명, 황하강의 중국문명이 그것들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도 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물과 성령으로 너희들이 거듭나야 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III. 제단

 

오늘 본문에서 성전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러갔다고 했는데 여기 성전 문지방은 무엇이며 제단이 무엇입니까? 신음하는 민족을 살릴 수 있고 쓰러져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낼 수 있는 강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지옥의 백성들을 건져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 삼을 수 있는 능력의 강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골고다 언덕에서 흘려주신 피의 은총, 보혈의 능력, 그것만이 인류를 살려내는 생수의 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생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보혈의 은총에 적셔진 영혼들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보혈은 이 역사 한가운데를 힘 있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본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역사를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 생수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서는 성령의 물에 감동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란 권세를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성령의 생수가 아니고서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성령의 생수가 제단에서부터 흘러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가 흐르기 때문에, 구원의 보혈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칼빈은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죠. 거기가 화려한 교회라도 괜찮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농촌교회라도 괜찮습니다. 커도 좋습니다.

 

예배당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손을 붙들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괜찮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 신앙생활하다 보면 교회가 못나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허물이 우리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하게 보여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가 힘에 겹습니다. 어지럼증이 있습니다. 멀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태평양 한가운데로 여행하다가 거기서 멀미가 난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는 구원방주입니다.

 

흠이 있어 보여도 때로는 어지럼증이 있어도 여기서 뛰어내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문제는 똑같이 교회생활을 한다고 똑같은 신앙의 깊이, 은혜의 깊이를 맛보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IV. 물의 깊이

 

본문 : 네 신앙의 깊이를 측량해 보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묻는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네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냐? 너의 신앙을 측량해 보려무나.

 

1. 발목을 잠근 사람들

 

사람들은 발목에 물을 잠그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발목에 물을 잠근다는 것은 신앙의 초보상태를 의미하지요. 즉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에 왔다 갔다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아직 체험도 없고 감격도 모자라고 그냥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출석교인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법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잘 드립니다만은 한 2-3년 어간을 우리교회에 마당까지만 오는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일찌감치 아내를 차에 태우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서 교회 마당까지 옵니다.

 

그리고는 차 문까지 열어 주면서 가서 예배 잘 드리고 오라고. 예배끝나는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찾아와서 가족들을 태워 갑니다. 그런데 한번은 아이들 손에 이끌려서 예배당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한번 오기가 어려웠지 두번 오기는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1년동안 다니는데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렇게 훌륭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배를 잘 드리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발목 신앙인이 된 것이지요. 그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여전히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도 여전히 구원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성 가는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안에는 발목신앙도 되지 못하는 오늘 본문 11절에 말하는 진펄과 개펄 신앙이 있기는 합니다. 이들은 교회 냄새만 맡았을 뿐 은혜의 강물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까지 영접하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천국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성경의 복음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은혜의 강가에서 구경만 했지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잔인한 한 선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에 그 영혼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 구원의 강물에 뛰어들지 못한 사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무릎까지

 

그래서 물은 차 올라야 합니다. 이제 물이 점점 차 오르게 되면 무릎까지 오르게 되지요. 무릎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교회를 위해 바지를 걷어 부칩니다. 팔을 걷고 일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엔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 욕하고 교회를 비판했더랬는데 이제 친구들이 교회를 비판하면 그게 그렇게도 싫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게 아니라고.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다고 방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릎까지 차 오른 신앙인이 되어가는 거지요. 이전에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혼자서 헐떡거리고 뛰어다녔습니다.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 보려고 했습니다. 선배들을 만나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더 얽히고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 해보자.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신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더 꼬이더니 하나님이 도와주기 시작하자 그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그의 무릎이 기도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무릎이 은혜의 강물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신앙 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물통을 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 마을 우물에 가서 물통을 져 나른 적이 있습니다. 하도 어릴 적 일이니까 물통에다 물을 가득히 담고서는 일어 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물을 반통쯤 담아서 일어섭니다. 겨우 일어서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물이 출렁하면서 두걸음 나를 밀어 제킵니다. 그래서 한걸음 갔다 또 한걸음 갔다 출렁 출렁 몇번하고 집에 도착해 보면 양철통에는 빈통입니다. 물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물이 차 올라야 합니다. 반통 신앙 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고 열매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빈 수레는 요란하고 가랑잎은 바시락 거리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허리까지

 

그래서 물은 또 다시 불어나야 하는 겁니다. 다음 단계는 물이 허리에 차는 단계입니다. 허리는 중심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중심이 잡히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이 옛날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성경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옛날 역사책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저 양반하는 얘기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핑돌며 감격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허리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는 단계입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하도 울면서 눈이 벌개서 일어서니까 미안하던지 자기 아내에게 그러더랍니다. "이놈의 교회에 체류탄 뿌렸냐."

 

벌써 물이 허리에 차 오르고 있는 거지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안전무장이 나옵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구. 성령의 칼을 들라구. 그리고 구원의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으라구. 그러나 진리의 허리띠를 띠지 못하면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한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창피당하기 쉽상입니다.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둘러야 앞으로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신앙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향상하는 신앙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이 잡혀있는 신앙 말입니다.

 

4. 가슴까지

 

물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또 불어납니다. 본문에 문자적으로는 생략이 되었지만 당연히 거쳐야 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슴까지 물이 차는 단계입니다.

 

가슴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연조만 깊어지다 보면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자칫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상이지요. 습관에는 원래 감격이 없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빨을 닦으면서 아~ 이빨이 닦여진다.

 

은혜가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수하면서 아~ 세수하는구나. 눈물이 핑돌면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세수하시는 분 계십니까? 빨리 헤치우는 겁니다. 예배 한시간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감격이 없는 겁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모태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이 없어요. 아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래 모태신앙이란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못해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이 물에 잠기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감사가 없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훈련의 자리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우리교회 성도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40년동안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님이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더랍니다. 그래서 누구하고 논쟁을 하더래도 진적이 없더랍니다. 성령에 대해서 수없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더랍니다. 성경지식, 초등학교 때부터 퀴즈대회하면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진리가 머리속에만 터질 듯이 고여있지 가슴속에는 아무런 기쁨도 은혜도 감격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받고 나니 이 모가지를 타고 진리가 흘러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10cm를 내려오는데 40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모가지가 뚫어졌더니 가슴에 벅찬감격이 용솟음 쳐 오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생각할 때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던 성령이 얼마나 섬세하게 나를 지키고 동행하고 돌보셨는가 깨닫고 땅을 치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당신앙엔 기원만 있고 감사가 없습니다. 축복은 바라나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말씀속에서 진리에 바로 서는 신앙, 소중하지요. 헌신하는 신앙, 찬송하는 신앙,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감사가 없는 기도는 자기 독백에 그치고 맙니다. 감격이 없는 찬송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감격과 감사가 없는 헌금은 뇌물에 물과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제 e-mail에 자주 편지를 올려줍니다. 그리고 가끔은 편지를 붙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님 병이 났습니다. 목사님이 고쳐주셔야 되겠습니다. 교회 와서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이 테잎을 들었는데 주처없이 눈물이 쏟아져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닦으며 차를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 테잎을 목사님에게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행복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예전에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신앙생활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들인지 모릅니다.

 

저는 요즘 찬송을 부르면 찬송가 가사 하나가 놓쳐지지 않습니다. 찬송의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때부터 찬송가를 불렀기 때문에 찬송가에 나오는 찬송만 찬송인줄 알았습니다.

 

충신교회에서 청년들을 인도하는데 이 교회 청년들은 모두 기타를 치면서 경배와 찬송을 부릅니다. 찬송가는 박자가 맞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면~ 박자가 척척 맞습니다.

 

3/4박자, 4/4박자, 뒤에서 1박자 치고 들어가면 되는데, 젊은이들 찬송은 따라갈 수가 없어요. 마음이 불편하더라구요. 어느날 성경을 읽다 보니까 "새 노래로 찬송하라"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새 노래를 배워보기로 하고 불러보기로 했습니다.

 

나중에는 엇박자도 잘 따라가 지더라구요. 한번 가슴에 와서 꽂혀지고 나니까 막혔던 뚝이 터지듯이 찬송의 은혜가 터지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부터 모든 찬송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더라구요. 이게 예배구나. 이게 찬송이구나.

 

기도를 하더라도 저는 활동가이지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제 체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길게 해야 듣나. 하나님 아시지요? 그러면 되지요.

 

어린나이에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망원제일교회에 담임으로 부임을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심방하고 새벽에 새벽예배를 하고 난 다음에 강단 뒤에 앉아서 방석 하나를 깔아놓고 기도를 하는데 20분 정도 기도하면 저는 대한민국 모든 기도 제목을 기도하고 끝납니다.

 

일어서서 갔더니 우리 어머니께서 "류 목사야 젊은 목사들이 궁뎅이가 가벼워서 교인들이 가기 전에 벌떡 일어나서 가는 것 보기 싫더라. 교인들 다 갈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그러십니다. 20분 기도하고 교인들이 갔겠지 쳐다봤더니 아무도 안갑니다.

 

기도는 다 끝났는데 그 다음에 자는 겁니다. 깜짝 놀라 깨어서 갔겠지 보면 아직 절반이 남아 있습니다. 자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알려야지요. 자다가 일어나서 아버지~ 주님~ 그래놓고 또 자는 거예요. 깨서 교인들 갔겠지 강단에서 교인들을 쳐다보니까 아직도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주님~ 그래놓고 또 자는 거예요. 젊은 전도사가 이러고 목회를 했으니 얼마나 웃겨요? 어느날 하나님께서 '종아, 이왕 아바지 할바에는 기도 한번 해 봐라.'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방언이 터지고 기도의 문이 열려지기 시작하고,

 

두 마디 기도했는 줄 알았는데 30분이 지나고 아직도 기도의 제목이 남았는데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납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밥 먹으라고 부릅니다. 기도의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5.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사람들

 

이제는 우리의 가슴이 은혜에 적셔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을 느끼며 감동하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 감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서 감사하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과 은혜의 단계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5)

 

여기에 큰 은혜의 강물이 흐른다 할지라도 억지로 끌려서 다닐 수는 없습니다. 강물에 사람들이 지금 놀고 있습니다. 헤엄치며 노는 사람이 있고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은혜의 강물이 은혜의 생수가 흘러 넘쳐도 여기서 허우적 거리며 퍼득거리고 물 마시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여기서 헤엄하며 노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어떤 나라에 임금이 공주를 시집보내야 되겠는데 어떤 사람에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이 나라에서 가장 용기가 있는 젊은이에게 시집을 보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용맹하다는 젊은이들을 다 불러 모아서 연못가에 둘러서게 했습니다.

 

거기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하품하듯이 입을 벌렸다 오무렸다 하는 악어떼가 우굴 우굴 있었어요. "누구든지 악어떼가 있는 이 연못을 가로질러서 헤엄쳐 달려오면 공주와 결혼을 시켜 주겠다."

 

그런데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뛰어들어 갔다간 악어의 밥이 될텐데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용감한 한 젊은이가 뛰어가더니 그냥 잽싸게 수영해서 뛰쳐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느냐?"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뒤를 두리번 거리더니 "어떤 놈이 밀었어!"

 

우리가 은혜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사람이 있고 허우적 거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땅을 깊고 헤엄치는 단계를 지나서 몸을 담그고 물을 끼얹는 단계를 지나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기고 나면 저절로 뜨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신비의 세계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믿어야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축복이란, 내가 노력한대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에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넘치는 강물에 가서 내 다리를 띄고 나면 죽을 것 같지만 땅에서부터 다리를 띄고 나면 내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헤엄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세계가 우리 가운데 준비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시간의 우선순위, 내가 철저하게 계획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반듯한 삶이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쫓기듯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물질도 하나님의 것, 하나님 앞에 깨끗이 드리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정직하게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맡겨놓고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것 도적질하여 조금 더 잘 살면 뭘 하겠습니까? 맡길 것 맡기고 살아보면 내 발이 세상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지만 거기에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한 구절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되 억지로 지지 말아라. 이왕 십자가를 지려면 기꺼이 지거라. 그러면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내 재주로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려면 무거워서 질 수가 없어. 십자가를 지려면 기쁨으로 감당해 보려무나. 그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네가 짊어진 인생, 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 인생에 짐을 감당해 주시기만 하면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신비의 세계가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단계를 척량해 보십시오.

 

우리교회 김 집사님은 남다른 인생길을 달려왔습니다. 고난에 부딪힐 때마다 문제에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 사람도 만나보고 저 사람도 찾아가 보고 여기 가서 울어도 보고 저기 가서 매달려도 보고 법에 호소도 해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인생의 상처는 깊어져만 갔습니다. 문제는 꼬여져만 갔습니다. 인간관계는 허물어져만 갔습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 내 발목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자! 무릎 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내가 그렇게 애를 쓸 때마다 꼬이던 문제들이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하자 그렇게 쉽게 해결되어지는 것을. 무릎까지 물이 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잠시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주일마다 예배당에 찾아올 때마다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슴까지 허리까지 지금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찬송을 부를 때마다 모두 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내 찬송이요 내 고백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지 나의 찬송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예수를 위하여, 죽어도 예수를 위하여 은혜의 강물에 몸담고 살아야지. 헤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V. 은혜에 잠겨서 사는 사람?

 

한 원양어선이 먼 항해길에 들어섰습니다. 며칠 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칠 간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바람이 그쳤을 때는 이미 물도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 다 쓰러져 누워있었습니다.

 

때마침 배 한척이 옆으로 지나 가길래 큰소리로 옷깃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여보시오. 물 한 컵만 우리에게 주고 가시오. 우리가 지금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 되었소." 그때 저만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옆에 있는 물을 퍼서 마시시오." "아니 목마른 사람에게 바닷물을 퍼서 마시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소." "아니요. 당신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착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 몸담고 살지 못하고 목말라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 없습니까? 주님에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의 문제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사회가 살아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은혜의 강물에 맡겨놓고 살아가십시오. 세상에서 발이 떨어지면 그 문제를 내가 놓으면 내가 망할 것 같지만 내가 놓으면 주님이 대신 잡아 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막에 강이 흘러가게 될 것이고 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게 될 것이고 이 한해동안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가정도 살고 목장도 살고 사업도 살고 이웃도 살고 자식도 살아나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를 배우십시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주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목마르십니까? 힘드십니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말씀의 깊이를 누리면서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지금 이미 여러분들은 깊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퍼 마시면 됩니다. 성령의 신비에 젖어 사시길 바랍니다.

 

말씀의 깊이를 체험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은혜의 깊은 단계에 들어가 보시길 바랍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말씀의 생수가 지금 우리 가운데 넘치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6666일 성경통독 대행진! 온 성도들이 말씀에 중심을 잡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접어두었던 먼지 쌓인 성경책을 펼치시고 성경을 읽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말씀이 힘이 되어지고 말씀이 등불이 되어지고 인생의 지팡이가 되어지고 성령의 검이 되어서 그동안 자르지 못하던 문제를 자르시길 바랍니다.

 

새벽에 모이십시다. 성경 통독 시간에 모입시다. 집에서 성경을 읽읍시다. 어디에 가든지 차안에 성경책을 들고 가서 잠깐 쉬는 시간에 성경을 읽읍시다. 온 교회가 말씀의 반석위에 서길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기업이 일어납니다.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비전채플 말씀의 반석위에 서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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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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