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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사도행전 설교 모음

사도행전 2:42 - 47 설교모음_2

by Jessi J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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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나가는 목적 /2:37-47/ 崔仁根 牧師

2023-12-16 01:47:33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교회관에 무지하게 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교통법규를 모르는 사람이 운전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교회관에 관한 신앙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와 같은 지식을 기초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있어야 제대로 된 교회관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들의 교회에 관한 지식은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 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정답이 무엇인지 알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가는 것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받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드리고 또한 받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성도들과 교제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 네 가지 대답은 다 정답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해답은 3번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의 일부분입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그들은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도 감히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사사로운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오직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모든 소유를 들고 나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함께 나누며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중심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과연 어떠하여야 하겠는지, 우리교회 설립39주년을 한 주 앞두고 바른 교회관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바른 교회관이 없는 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존재할 수 없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가는 목적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4:19-24)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가장 소중한 목적은 누가 뭐래도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는 그동안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감사를 안고 하나님을 찾아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성도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자세는 사사로운 육신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씀은 성령과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와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재물을 하나도 자기의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아낌없이 다 내어 놓고 서로 섬기며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손을 잡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사람의 가치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인 성령을 충만하게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성령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놀라운 대열에 참여하려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을 갖다 바치고도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신의 가치로 성령님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에 인간적인 가치가 들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에 이와 같은 인간적인 것이 가미 되지 않도록 조건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소중한 예배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들의 주보를 관심 있게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드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예를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몸을 드리는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영적인 예배로 받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 몸이 성전으로 올라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예배의 기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성전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5:19-21)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예배에서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찬송입니다. 찬송을 드리되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부르는 우리들이 은혜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처럼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모든 목적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육신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성도들은 늘 그 입에서 찬송이 끊이지 않으나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면 원망과 불평이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드리는 기도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로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처럼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더 나은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간구를 드려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도에는 이 세 가지가 기본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고후9:5-7)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위의 말씀에서도 지적하였던 것처럼 미리 정성껏 준비하여야 하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많이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하시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하시기 때문이요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힘을 다해 드리는 성도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시간에 우리들이 드려야 하는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중심을 다 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되 온갖 정성을 다하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드리는 성도들은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목적은 받기 위해서입니다

 

(2:38-42)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지금 사도 베드로 앞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잔인한 유대인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받고 마음에 가책을 받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기적 같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전하여 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앞서 인용해 드린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를 받으라는 베드로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고, 가르침을 받은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는 성도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사랑이 많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6:1-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 기록된 안식일은 신약에 와서는 주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면 비록 소망 없는 이방인일지라도 넘치는 축복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보장하신 신령한 축복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목적은 변화된 삶을 살기위해서입니다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배는 그러므로 형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믿는 성도들이 드리는 신앙생활의 가장 소중한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의 본질을 지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은총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요?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우리들의 육신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이웃은 하나님을 품은 소중한 지체인 줄 알고 예수님처럼 섬기며 살아왔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발효식품을 먹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김치도 그렇고 된장도 그렇고 식초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잊어버리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발효를 하고 변화를 일으켜 오늘 우리들의 건강을 위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도 변해야 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가치가 변하고 믿음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날마다 성전으로 부르시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추에 소금을 뿌리듯 우리들에게 말씀을 뿌려서 변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변화를 만들어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요? 말세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오로지 세상의 소유에만 정신이 팔려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시는데도 듣지를 못한 채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본문의 성도들은 우리들과 전혀 다른,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악한 자들이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일 만큼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했습니다. 탄식을 하였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모든 재산도 다 내어 놓고 구원 받은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사랑의 떡을 떼며 교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고 변화 받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변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성령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천국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이렇게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 화답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배를 회복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길이요,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길입니다. 짧은 인생 살아가면서 영원히 살 천국을 소망하며 육신의 가치를 던져버리고 영적인 성도들로 거듭나시기를 피 흘려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다시 매력적인 , 교회로 /2:42-47/ 김병삼목사

2023-04-19 03:25:43

 

언제부터인가 온 나라 안에 웰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기억하시나요 남양 ? . 유업의 후원으로 열리던 우량아 선발대회 말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문제이던 시절에는 잘 먹어서 살이 찌고 커지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성장에 . 최우선의 관심을 가졌던 때는 교인들 숫자만

늘어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 , 성장한 한국 교회에서는 보기도 좋고 모양도

제대로 갖춘 웰빙 교회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크기 에 (size) (shape) 대한 문제가 아니라 모양 에 대한 것에 더욱 관심을

모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 이제 더 이상 교인의 숫자나 교회의 크기를 보면서 칭찬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있는 교인들은 교회의 크기가 아닌 어떤 , ,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본질에 충실한지를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 ’ ‘ ’ .(2012 3 ) 위클리 서울 에 나오는 과대포장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년 월 기사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들어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파손 방지를 위해서 라곤 하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완충재를 넣거나 혹은 질소 충전을 ,

해놓아서 과자를 사면 실제로 기대한 부피의 절반도 안 되는 과자만이 들어 있곤 한다 , .

감자칩을 사면 봉지 안의 이상이 텅 비어있다 겉보기엔 빵빵해도 바늘로 구멍만 하나 , 60% .

뚫으면 금세 반도 안 되는 부피로 줄어들어 버린다 두 봉지를 먹어도 한 봉지도 채 안 먹은 것만 .

같은 기분이 된다.

 

그리고 어떤 쿠키 제품은 커다란 종이상자 안에 개별포장이 되어있는데 종이상자의 절반이 ,

‘ ’ 완충재 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 포장된 비닐 안에도 파손 방지를 위한 질소포장이 되어있음을 .

감안하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다 만약 종이상자에 맞게 내용물을 넣었다면 사실 그 , . ,

- 2 -

과자의 포장은 절반 크기가 되는 것이 맞다 고객이 그 종이상자 가득 내용물이 들어있으리라 .

기대하여 합리적으로 가격 등을 판단 소비한 것이라면 절반을 채우고 있는 완충제에 그만 속은 ,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잘 팔리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

노력하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좋은 소비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 .

포장이라는 것은 심리적인 만족뿐만 아니라 올바른 판단 효율적인 홍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

것이다 포장 역시 좋아야만 한다 . .

하지만 거짓된 포장은 사기에 불과하다 한번 속은 사람은 다시 속지 않는다 완충재에 속았던 , , . .

사람들은 다시는 그 과자를 사지 않는다.

 

길게 본다면 포장은 정보가 없을 때 에나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에 속은 사람들은 같은 판단 , ‘ ’ . ,

미스를 반복하지 않는다 물론 포장은 좋을수록 좋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걸 맞는 내용물이 . .

되어야한다 좋은 내용물과 그를 빛내는 포장 이것이 옳은 길이다 . , . .

출처 위클리서울 : (http://www.weeklyseoul.net)

마치 지금의 한국교회를 비유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겉모양은 . 풍성하고

번지르르하게 보이지만 내면을 , . 보며 실망하게 만드는 모습 말입니다

매력적인 교회 되기

저는 이러한 허세가 아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매력적인 교회 라고 표현을 해 보았습니다 “ ” .

 

자 다시 , . 초대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당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속국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처지에 중간 지도자들이 세금을

걷으면서 자기 민족의 돈을 가로채는 상황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신정 국가였던 ( ) 神政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 이러한 종교적 관습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종교적 장사꾼들로

인해 백성들의 삶에 고통은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 ,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질책하셨던 말씀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9 46 장 절에,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에서 돈 버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려운 , 사람들의 돈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갈취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남의 돈을 갈취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 ” .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자 . 이 새로운 종교 운동에 스스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 3 -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 . 이 일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생긴 것입니다

사도행전 4 32-35 장 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5장으로 넘어가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베드로에게 가져간 일이 나옵니다 우리는 . .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단. 지 이들은 예수

믿는 자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그들의 , . 삶을 모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없는 흉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밭을 판 돈을 다 가져다 주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 . 얼마를 숨겨두고 베드로 앞에 가져갑니다 그 당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었는데, . 베드로는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속인 결과로 인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아주 무섭고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사도행전 8 , ‘ ’ 장에 가서 보면 사도들을 흉내 내고 싶은 마음에 사도들의 안수 를 돈을

지불하고 배우려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얼마나 . 사도들의 사역이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제자들을 따라하려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유사종교라 불리는 이단과 사이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며 심각하게 걱정을

하는데 이러한 , .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게 그리고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던 때, . 셀 수 없는 사이비와 이단들이 기독교를 모방하며 등장합니다

하지만 매력을 상실하면 누구도 배우려고 하거나 흉내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단이 더 이상 성행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건강한 교회가 되었다기 보다는 더 ,

이상 교회를 매력 있게 바라보거나 흉내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가 23 [ ] . 년 전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교회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당시에는 ‘ ’ . 교회 성장 에 대한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제가 제안 했던

내용입니다.

 

“ ,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싶다면 지금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내부인들 보다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핵심 포인트는 한국교회의 , , 성장의 열쇠는 교회를 다니는 신앙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교회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신문에 나온 기사를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 4 -

2021년 연말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년 주요 종교 호감도 및 종교 효능감 조사 결과 지표가 ‘2021 ’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국 만 세 이상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천주교 . 18 1000 (50.7%)

 

> (50. 불교 개신교 원불교 순으로 호감을 갖고 있다고 4%) > (31.6%)> (28.8%) . 2020 답했다 년

10 (28.0%) ( 월 같은 조사에서는 개신교 가 원불교 보다 30.8) . 낮은 호감도를 보인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믿는 종교가 없는 응답자에게 불교(49.7 ), ( 점 천주교 48.2 ) 점 에는 보통 정도

호감도를 보인반면 개신교에 대한 호감도는 21.9점으로 원불교(29.8 ) . 점 보다 낮았다는 부분이다

또한 연령대별 개신교 호감도에서 대 이상보다 대 이하 50 40 젊은층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주고 있다 대가 자 . 30~40 녀를 기르는 주요 계층임을 감안하면 교회에 대한 비호감이 대물림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대목이다 표 . ( 1 ) 참조

 

이와 관련해 한국리서치는 개신교는 개신교 신자들만 높은 호감도를 가질 뿐 타 종교인과

무종교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여전하다 표”( 2 ) 참조 고 분석했다 교. 회에 대한 비호감은 이번

조사만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지 . 2020 6 난 년 월 엠브레인 트랜드모니터의 종교 인 및 종교인 ‘ ( )

과세 관련 인식조사 결과는 한국교 회에 충격을 안겨 준 바 있다. 각 종교인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서 개신교인에 대해 거리를 두고 싶은 이 “ (32.2%) ( 중적인 사기 30.3%) (2 꾼 같은 9.1%)”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불교 . 와 천주교의 ‘ ’ 온화한 ‘ ’ 따뜻한 ‘ ’ 윤리적인 이미지를 떠올린 것과 상반된

응답이었다.

 

이와 관련해 사단법인 드림포틴즈 대표로서 다음세대 사역을 하고 있는 라영환 교수( ) 총신대 는

세상과 다음세대에 매력과 멋짐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영환 대표는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이 필요한 곳임에도 한국교회는 이원론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공적 영역에서

신앙의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 며 이 때문에 세상 속에서 신자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세대에게 보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고 지적 했다.

 

제가 종종 하는 이야기입니다.

‘ ’ . ‘ ’ ‘ ’ , 정체성 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가 생각하는 나 가 있고 다른 하나는

외부인들이 평가하는 ‘ ’ . 나 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주장을 해도 다, . 른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교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와 외부인들이 생각하는 교회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죠.

진정한 매력은 누군가의 눈길을 끄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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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부흥의 시대를 걷던 때 세상은 , . 교회에 대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오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더 이상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 매력을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해 방송국 PD . 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방송에서 제작해야 할

컨텐츠 중에 하나가 ‘ ’ . 세상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하는 것 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 ! 목사님 문제는 세상이 더 이상 교회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교회가 , .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답을 주었습니다

당시 로마 치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가는 이상한 기독교에 영적 능력과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회복해야하는 핵심은 ‘ ’ ? 매력적인 교회 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24년 전에 만나교회 청년들과 제가 가르치는 신학 대학원생들이 함께 중국에 선교 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대형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학생들과 함께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도시에 들어가면 차 안에 있던 학생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당시 . , 중국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는데 그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려고 남자들이 말이 없었지요. , 단순한 성적인 것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건강한

남자들의 본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매력적인 . 것에 눈길을 주는 것이

본능입니다 이것은 . , 단순히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 ’ ‘ ’ . 매력적 이라는 말은 사실 본능적인 이끌림 이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본능적 이끌림에 의해 시선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이끌림을 받지 못하면 그, . 내용이 무엇인지 까지 도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언젠가부터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가 믿는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매력을 , 잃은

교회에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의 초대교회를 보면서 ‘ ’ 본능적 이끌림 이 있었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책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했던 것이 년과 , A. D. 300 400년 사이의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년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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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년에는 . 380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하게

됩니다. 10% . 밀라노 칙령을 내렸을 당시에 크리스천은 인구의 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 , 흉년이 들거나 이방 족속들이 쳐들어와 어려움을 당할 때면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을 통해 양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을 크리스천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 그, ‘hospitality’ 렇게 크리스천을 이르는 말에는 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로마 황제 중에 유일하게 기독교를 배신했던 ‘Julian the

Apostate( )’ 배교자 율리아누스 는 이교를 부활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있는 이방 종교의

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본받으라 는” . 글이 눈에 뜁니다

 

이런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는 100 . 년 만에 전 유럽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매력은 박해로 인해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AD 200 . 년 경 지독한 박해의 시기를 지날 때입니다 당시 귀족이었던 페르페투아가

원형경기장에서 순교를 당할 때 그, 녀가 보여준 행동은 경기장을 채운 모든 이교도들에게

아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함께 죽임을 당하는 순교자들과 거룩한 입맞춤을 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게 된 것이죠.

어떻게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거룩한 입맞춤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죽음 앞에서 저렇게 담대할 수 있는가?

 

제가 요즘 늘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 사람들은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자랑하는 것에 감동하기

보다는 어떤 , .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담대한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입니다

불의하게 돈을 버는 그리스도인보다 어, 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신실함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가장 매력적인 삶은 거주민이지만 나그네 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 ’ .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능력을 행하고 매력적인 일탈 행위 를 하는 사람들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 ’ ,

이들이 거주민이지만 나그네와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문서에 보면 한 이교도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비평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 , ’ 공공장소에서는 침묵하고 구석진 곳에서는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 ?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알랜 크라이더 의 (Alan Kreider) [ ] , 초대교회에 길을 묻다 에 보면 당시 초대교회 교부였던

오리게네스가 이교도 켈수스에 대한 논박으로 썼던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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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가정집에서는 옷감을 짜는 직조공, , , 구두를 고치는 수선공 빨래하는 일꾼들이나 가장

무식하고 촌스러운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나이 드신 어른들이나 아는 게 많은 .

주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아이들이나 무식한 여인네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들의 아버지나 , 학교 선생님들의 말을 듣지 말고 자신들을 따르라는 놀라운

말을 하곤 한다. .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이 삶의 바른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Origen, Contra Celsum,

 

3. 55, quoting Celsus, who wrote ca 180

위의 글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요?

* . 사람들은 보통 가정집이나 작은 공방에서 일했습니다

* . 그들은 무식하고 촌스러웠습니다

* . 그들은 지위가 있는 사람들 밑에서 일했습니다

 

* . 주인은 그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로 대했습니다

* . 그들은 자신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했습니다

* . 어린아이들과 무식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 사회적 위계질서를 무시하며 아버지나 학교 선생님 같이 사회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 . 자신들을 따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들이 새로운 권위를 가졌음을 드러냈습니다

* 세상은 불공평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자신들만이 바르게 사는 길을 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당시 . 힘이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자들을 억누르는 세상

한 가운데서 이들은 , 사람들을 자유로 인도하여 자신들이 올바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초대교회 . “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라고 ” . .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나라 대한민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세상 사람들이 서로 교회를 자기가 사는 곳에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매력적인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웃의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 문을 활짝 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나교회 .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 . 꿈입니다 만나교회 때문에 주변의

집값도, . 땅값도 오르는 그런 꿈을 꾸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싶어서 서로 교회 가까운데 집을 구하려 드니 말입니다 교회가 .

사람들에게 혐오시설이 아닌, . 호감 시설이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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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할 때, . 구원받는 숫자를 하나님께서 더하시게 될 것입니다

알랜 크라이더의 [] . 초대교회에 길을 묻다 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글이 나옵니다

AD 200 . 년경 북부 아프리카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숫자가 날마다 증가 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좋은 증거입니다. 삶의 아름다움이 교인들을

인내하게 하고, . . . . , 낯선 이들이 참여하게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것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Minucius Felix, Octavius 31. 6-8: 38. 6 (North Africa

ca. 200)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 . 우리의 설교나 말 또는 우리의 예배가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변화된 삶이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왜 초대교회가 성장했나요?

그것은 그들이 질병과 운명 그리고 , . 귀신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 ’ 생명을 주는 일탈 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신의 아내가 길거리에 나가서 낯선 사람의 집을 돌아다니고, 형제들을 방문하기 위해 이집

저집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겠는가?

저녁 모임에 참석하려고 외출하는 아내를 그저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남편이 얼마나 되겠는가?

부활절이 다가오면 진행되는 엄숙한 의식을 위해 밤새도록 나가 있는 아내를 보고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겠는가?

 

누가 그토록 나쁜 소문이 무성한 주의 만찬 자리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 아내가 가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누가 자신의 아내가 순교자가 차고 있슨 쇠사슬에 입맞춤하기 위해 감옥을 방문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입맞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자신의 아내가 다른 , 남자들에게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놔두겠는가?

누가 자신의 아내가 다른 그리스도인의 발을 씻기도록 두겠는가?

그들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내주는 꼴은 또 어떻게 지켜볼 수 있겠는가?

어떤 형제가 여행 중에 그리스도인의 집에 신세를 질 때 집주인이 제공하는 환대는 또 어떠한가?

 

하나님이 주신 겸손으로 인해 아직 신앙심도 없는 여인이 이런 천상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

이방인 남편의 마음속에서 경외심이 생길 것이다 이. , 런 결과로 그 남편은 아내의 신앙에 대한

비난이 줄어들고, . , 협박과 의심도 적어질 것이다 기적과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되고 진리를 눈으로

보게 되고 아내가 좋은 사람으로 , , 변하는 것을 보며 경외심 가운데 그 자신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될 것이다. (Tertullian, To His Wife 4, 7)

여기에 너무나 멋진 말이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일탈 이라는 말이죠 . ‘ ’ .

일탈이라는 말이 대개는 부정적으로 쓰입니다 모. 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보편적인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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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일탈이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매력적으로 , . 보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일탈이 맞습니다.

 

일탈이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누, . 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일탈입니다

자신들이 감히 흉내지지 못하는 일들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초대교회에 이러한 일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일탈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그,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늘어나지

않을까요?

교회를 바라보며 이러한 일탈을 꿈꾸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종교는 왜 번성할까요? /2:43-47

2014-10-23 11:36:58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 1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라는 제목의 설교는 앞으로 두 주, 또는 세 주에 걸쳐서 진행될 시리즈 설교입니다. 오늘은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얘기를 할 터이고 다음 주일부터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얘기로 들어갑니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시리라 믿고 있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가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을 것임을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데 그 근거는 과거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면 미래에도 그런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19세기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의 종말이 곧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세기 말이 되면 흔히 세상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이고 심지어 세상에 종말이 오리라는 예언이 유행하곤 했지만 19세기 말은 다른 때와는 달리 특별하긴 했습니다.

 

종교의 종말 예언은 그런 특별한 면들 중 하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들 눈에 종교는 사람들의 환상이고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사람들의 집착에 불과했습니다.

 

종교는 사람에게 눈곱만큼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만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머지않은 미래에 사람들은 종교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종교는 저절로 소멸하리라고 봤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물론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들의 예언대로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백 년 이상이 지났지만 종교는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종교는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종교는 숨을 멈추기 직전에 놓여있지 않고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번창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오늘날 종교가 번창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할 지경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 전성시대는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의 눈에만 기현상(奇現象)이 아닙니다.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 눈에도 이 현상이 기이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사정이 왜 이렇게 됐는지, 무엇이 종교를 오늘날처럼 대유행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19세기의 종교와 21세기의 종교는 같지 않습니다. 종교는 세상이 변함에 따라서 변해왔고 적응해왔습니다. 19세기 종교 소멸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가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고 적응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생존해온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말입니다.

 

종교가 변화하고 적응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적응하는 일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적응하지 않으면 사멸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므로 모든 생명체는 변화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소멸하리라는 예언의 근거 중에는 사람들이 종교가 환상이요 착각이요 신기루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리라는 예측 이외에도, 종교는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고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사람의 계몽된 정신 안에 종교의 자리는 있을 수 없을 뿐더러 고정된 교리 중심의 종교가 변화에 적응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봤던 것입니다.

 

종교가 살아남은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백여 년의 역사는 종교소멸론자

 

들의 예언이 틀렸음을 보여줍니다. 종교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번창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가히 종교의 전성시대, 또는 종교 같기도 하고 종교 아닌 것 같기도 한 유사(類似)종교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합니다.

 

왜 사정이 이렇게 됐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종교는 계몽된 시대에도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요? 본회퍼의 말을 빌면 성인이 된 세계속에서도 어떻게 해서 종교는 융성하고 있습니까?

 

가능한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저는 두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첫째는 계몽된 정신 속에서도 여전히 종교의 자리가 있더라는 대답입니다. 종교란 단순히 미개한 정신이 추구하는 미신이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의존하고 그 신의 힘을 빌려 소원을 이루려는 욕망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하는 일이라고 여겼지요.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과거에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점점 신의 입지가 줄어들었지요. 종교가 소멸하리라는 예언도 이런 사실과 관계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부분의 일들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사람의 삶에는 여전히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존재하더란 겁니다.

 

지식의 문제와는 구별되는 의미의 문제도 여전히 존재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계몽된 정신 안에도 그것만의 자리를 갖고 있는 독특한 정신세계요 정신활동임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사람의 생에는 이성과 합리만 갖고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여전히 종교가 필요하며 따라서 성인이 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종교가 갖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삶에는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종교가 그것들을 다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람의 삶에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게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없애려 하지 말고 불편하더라도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도 종교가 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종교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종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얘기입니다.

 

종교가 번성하는이유는 다른 데 있다!

 

두 번째 설명은, 종교가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서 기막힐 정도로 훌륭하게변화해왔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보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너무 변화와 적응을 잘 해서 번성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세상보다 앞서서 세상의 변화를 선도한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대를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그것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종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어느 생명체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변화에 대한 놀라운 적응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종교의 소멸이 예언되었던 19세기의 그리스도교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다른지만 생각해봐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니, 1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와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면 종교의 놀라운 적응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느낌이 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적응 능력 때문에 종교는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지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종교도 다른 생명체처럼 최고의 과제가 살아남는 일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과연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좋게만 봐도 되겠습니까?

 

종교는 절로 생겨난 생명체가 아닙니다. 종교는 누군가가 목적과 의지를 갖고 만들어낸 생명체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종교심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유대교나 회교 같은 구체적인 사회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들은 목적과 의지를 갖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나 석가모니 부처나 모세나 마호멧 같은 개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종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시조(始祖)가 중요하긴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종교를 만들어낸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태어난 종교라는 생명체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종교는 그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인 생명체입니다. 이를 그리스도교로에만 국한해서 얘기하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남고 번성하는 것이 존재 이유와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란 얘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기가 죽어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 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요 교회입니다.

 

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모든 면을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모세는 자기가 죽어야 할 때와 죽어야 할 장소를 제대로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었고 백성들의 불평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는 끝이 나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바라보이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모세가 그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어 했습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은 그의 전 생애의 목표였습니다. 아마 사십 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땅을 멀리 바라다보면서 깨달았습니다. ! 저 땅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여기까지가 내 한계구나! 성경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지만 이 인식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두부 자르듯 구별하겠습니까! ‘여기가 내 한계로구나!’ 하는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면서 동시에 모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온 그 자신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도 모세처럼 자기가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살아남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교회가 번성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죽는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천군과 천사를 동원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을 무찌르는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신 나사렛 예수의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음과 같습니다.

 

이 설교는 앞으로 두 주일동안 계속됩니다. 다음 주일에 할 얘기를 미리 맛보여주는 시를 한 편 읽고 오늘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게 전부입니다. 아주 짧은 시지요. 이 짧은 시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절창으로 일컬어지고 널리 불린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교회, 길을 잃었다! /2:43-47

2014-10-23 11:40:00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 2

 

뇌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가 있습니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머리를 열지 않고 레이저로 하는 수술인데 이렇게 수술하면 기억을 잃어버릴 확률은 낮지만 길어야 5년 정도 더 살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머리를 열고 하는 수술인데 이 수술을 하면 10년 정도 더 살 수 있지만 기억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이편이나 저편이나 모두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단지 확률이 그럴 뿐입니다. 이 환자는 부모도 있고 배우자와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는 어느 편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과거에 종교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신의 권위를 등에 업은 종교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종교가 행사하는 권위에 조금씩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7세기 데카르트에게서 시작됐다는 유럽의 계몽주의입니다. 계몽주의의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가 종교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계몽주의 시대가 왔다고 해서 종교의 권위가 금방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추세에 결정타를 날린 사람들이 19세기의 사회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지금 종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지난 주일에 저는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종교가 살아남은것은 오늘같이 과학이 발달한 세계에도 이성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이 있고 종교의 자리는 바로 거기, 곧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와 의미의 문제들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편 종교가 번성하는이유는 종교가 세상의 변화에 기가 막히게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보통은 넘치도록 살아남으면 번성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종교의 경우에는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번성하는 것은 별개란 얘기입니다.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일과 번성하기 위해 한 일은 다릅니다. 그러니 둘에 대한 평가도 달라야 함은 물론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생존이 최고의 목적인 자연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의식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생물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종교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보니 예쁘고 오래 보니 사랑스럽더라!

 

오늘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와 같습니다. 교회는 길고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어디에선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동의하고 공감할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에 대한 생각은 각각 다를지라도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지금 제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부터 길을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지금의 유럽을 향해 서쪽으로 갔을 때부터 그리스도교는 길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그때부터 복음 메시지는 희랍 철학과 섞이고 혼합되어 복음 본래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되면서부터 길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냈던 교회가 반대로 제국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남을 박해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또 어떤 사람은 중세시대에 교회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소위 정통 교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단이니 심지어 사탄이나 마녀의 낙인을 찍어 죽여 버린 교회는 유대교 권력자들로부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판결을 받아 살해당한 예수와 상관이 없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가 자본주의와 손을 잡고 황금만능의 물신주의에 빠지면서 길을 잃었다고 주장합니다. 황금만능의 물신주의와 성장최고주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고 여우도 몸을 누일 굴이 있는데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돈주머니 갖고 다니지 말라고 가르치신 예수로부터 멀어져도 너무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교회는 어쩌다 잠시 길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갔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예수가 원했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을 택해왔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가 체포되자 그분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하는 길을 택해왔다고 말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요?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와 멀어지는 길을 택해왔고 교회 아닌 것이 되는 길을 택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설교 마지막에 오늘 할 얘기를 미리 예고한다면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소개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시의 백미는 너도 그렇다는 마지막 줄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눈에 봐서 예쁜 사람이 있지만 오랫동안 자세히 봐야 예쁜 사람도 있습니다. 첫눈에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도 있지만 언제 불붙었는지도 모르게 은근히 오래 타는 사랑도 있습니다.

 

이번 설교 제목이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이니 어느 정도는 제 경험 얘기를 하겠습니다. 사랑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경험 말씀입니다.

 

제 경우에는 교회가 자세히 보니까 예쁘더군요. 저도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모습이 실망스러워 떠날까 생각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 오래 살펴보고 그 안에 머물며 온갖 달고 쓴 경험을 다양하게 해보니 교회가 사랑스러워졌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교회가 예쁘더군요. 오래 보니 사랑스럽더라고요. 어디가 그렇게 예뻤고 뭐가 그리 사랑스러웠을까요?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분명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류교회의 역사는 계속해서 예수의 길과 엇나가는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주류교회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들, 곧 예수 정신을 바르게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습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주류가 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소수였고 언제나 목소리가 작았으며 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중세 교회당 건물을 보면 대부분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은 뾰족탑이 있습니다. 그런 건물을 볼 때마다 저는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얘기가 생각납니다. 높이 솟은 뾰족탑은 주류 교회의 열망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늘에 닿고 싶은 겁니다. 하늘의 권위를 소유하고 싶은 거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주류 그리스도교와는 반대로 하늘만 바라보지 않고 밑바닥 현실에 뿌리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흙탕에 머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거기서 울고 웃고 고통당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세히 봐야 보이고 오래 지켜봐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주류교회가 예수의 길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말도 사실이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와 더불어 예수의 길을 걸었던 소수의 무리들이 늘 있어왔다는 말 역시 사실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하비 콕스(Harvey Cox)<세속도시 The Secular City>를 써서 기독교 학계와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사십여 년 전인 1960년대 중반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아직도 책을 쓰고 있더군요. 최근에 나온 책이 재작년에 나온 <신앙의 미래 The Future of Faith>입니다.

 

2백 쪽 정도 되는 작은 책입니다. 제목은 신앙의 미래이지만 많은 부분은 과거에 대한 얘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잘 읽어보면 그가 과거에서 미래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미래를 여는 실마리는 신앙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제 식으로 말하면 과거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를 찾아내면 미래에 가야 할 길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가능성을 여러 분야에서 찾는데 그 중 하나가 남미의 기초공동체’(base communities)입니다. 한때 대단히 유행했지만 지금은 모두 철지난 유행가 정도로 여기는 1960-80년대 운동 말입니다. 저는 콕스 교수가 기초공동체 얘기를 하는 데서 그만 감격하고 말았습니다.

 

알다시피 남미의 지배적인 종교는 가톨릭입니다. 가톨릭은 그리스도교의 어떤 교단보다 위계질서가 확고한 교단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신부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현실에서 기초공동체는 1950년대 어느 날 신부 없는 남미 브라질 어떤 시골에 살던 한 노인의 불평에서 시작됐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집니다. 성탄절이 됐는데 이 노인이 살던 마을에 있는 세 개의 개신교회는 모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한데 가톨릭교회만은 불도 꺼져 있고 문도 잠겨 있더랍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산골까지 가서 일하고 싶은 신부가 없어서 성당 건물은 있는데 미사를 집전할 신부가 없었던 것이지요.

 

개신교회에는 목사가 있어서 북적거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회에도 목사가 없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가톨릭 신부는 중앙에서 파견하고 중앙에서 생계를 책임집니다. 그런데도 갈 신부가 없는 벽촌에 자기가 알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개신교 목사가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활기차게 성탄절을 맞았던 이유는, 개신교는 목사가 없어도 교인들끼리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보는 게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신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니까 성당에 불도 꺼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씨 신부가 그분인데 그는 신부 없는 성당에 신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신부가 없어도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1956년부터 사제 없는 브라질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평신도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 없이 미사 드리고 성찬식 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신부가 없어도 매주 모여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각자의 삶을 얘기하고 나누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남미의 기초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되어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나중에는 교회의 울타리는 넘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됐던 것입니다.

 

누구도 공식적으로 문서로 만들어 선포한 적은 없지만 기초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켰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고 자유를 누리는 복음의 이상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다.

공동체 안의 구성원 중 누구도 소외시키는 구조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공동체 안과 밖에서 누구도, 무슨 이유에서든지 차별하지 않는다.

 

기초공동체는 남미의 시골에서 별로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성경 읽는 순서도 없었다고 합니다. 순회하는 신부가 왔을 때나 그가 읽어주는 성경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루어놓은 일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 주류교회의 흐름을 당당히 거부하고 그 흐름과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영화(?)를 많이 잃어버렸지만 저도 콕스 교수처럼 이것이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피어오를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제가 신앙을 견지하는 이유, 여전히 교회에 희망을 거는 근거는 기초공동체와 같은 운동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끊임없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씀하는데, 저는 주류교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주류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교회만 좋은 교회이고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와 주류 그리스도교는 서로 다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다른 종교이듯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와 주류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주류라고도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상 끊어지지 않고 존재해왔던 바로 그 흐름, 주류에 역행하며 살았던 소수 무리가 만들어낸 흐름, 남미의 기초공동체 운동과 같은 흐름에 발을 맞추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언뜻 보면 분명 형편없습니다. 생각 있는 사람의 눈에는 추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래 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참 예쁜 데가 있습니다. 인내를 갖고 좀 오래 들여다보십시오. 참으로 사랑스런 구석이 거기에 분명히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교회의 생존과 번성하는 모습에 대해서 얘기했고 오늘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오래 들여다봐야 보이는 소수의 무리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 곧 우리교회에 대한 얘기를 할 차례입니다.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오늘 설교 맨 앞의 뇌수술 환자 얘기는 다음 주일 설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 /2:43-47/ 인명진목사

2018-03-23 06:14:21

 

지난 한 주간 동안 제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았던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8.15, 교황방문 그리고 교회의 미래였습니다. 민족이 암울했던 시기에 한국교회는 일제에 저항하며,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사학들이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고, 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지조 있는 신앙을 지켰고, 민족을 살리는 등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교회는 많은 역할을 감당했고, 이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조국교회는 신생교회였지만 민족과 함께, 역사와 함께 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서구의 기독교보다 훨씬 더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흑암에 있던 백성들에게 큰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80년대 90년대 중반까지 급속한 성장을 하면서 교회는 본질에서 이탈하여 자기 몸 키우기에 바빴습니다.

 

교회는 성장과 동시에 건물 짓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이라 부르던 교회 건물도 어느새 교회,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자기중심적으로 개인화 되고, 기복화 되어갔습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복만 받으려는 탈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교회가 자기 몸 키우기에 바빴습니다.

 

역사와 함께, 민족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신앙 전통은 성장에 걸림돌이 되어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교회 구조적으로는 성장주의에 매몰되고, 성도들의 신앙은 기복주의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눈에 드러나지 않던 영적 타락과 탈선은 2천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교회와 교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성도들은 서로가 옳다고 하면서 법정에까지 가서 세상의 잣대로 시비를 가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판단해야 할 교회가 세상에 의해 판단 받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의 문제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가 되었습니다.

 

미래학자인 최윤식 목사는 “2040 교회 미래 리포트라는 책에서 2040년이 되면 한국교회는 현재의 반 토막이 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특단의 회개 없이 이런 모습으로 교회가 지속된다면 2040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빠른 시기에 교회가 반 토막 날 것입니다. 작년 10월 정기국회에 보고된 한국교회의 부채는 심각한 지경입니다.

 

1금융권에만 425백억원 대출했다고 합니다. 2금융권 그리고 교인들 이름으로 대출 받은 것까지 합치면 10조원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이제 일부 은행에서는 교회에 대출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1년 총 헌금액이 5조원이 넘지 않습니다.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빚만 갚아도 꼬박 3년이나 걸립니다.

 

문제는 빚진 내용입니다. 가난한 자를 도우고, 선교 사명 감당하기 위해 빚진 것이 아니라 예배당 건물 짓기 위해 빚졌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도우기 위해서 빚진 것이 아니라 자기 위해 빚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집 사고, 차 사고, 옷 치장하다가 빚진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배당 팔아서 가난한 자와 이웃을 도와주라고 말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해에 헌금 1조원이 은행 이자로 나가고 있습니다. 경쟁적으로 예배당을 신축한 어떤 신도시 은행직원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 지역의 은행원들은 교회가 먹여 살린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금도, 건물도, 사람도 사용해야 할 교회가 자기 몸 하나 유지하기 위해 빚을 내고,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빚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가쁜 숨소리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교황이 이번 주 목요일 방문한다고 합니다. 연일 방송에는 교황 방문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구교의 수장이라도 축하해야 하지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합니다. 카톨릭교회는 교황의 방문으로 100만명 이상의 신자가 늘어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백만명 중에 개신교 신자 30만명 이상이 카톨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8.15, 교황 방문, 그리고 교회의 미래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돌이 되어 저에게 굴러왔습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 앞에 교회의 미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이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고민이 아닐 것이고, 저만의 교회 사랑도 아닐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요, 우리 모두의 사랑일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들추어냅니다. 덩달아 예수 믿는 성도들도 교회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개혁한다고 말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대부분 교회의 구조적인 모순입니다. 정작 갈아엎어야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는 회개의 칼을 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든다면 교회세습은 비판하면서 자신의 부를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판하는 대상에 항상 자기가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개혁해야 하는 것은 교회 구조보다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비판하는 힘을 긍정적으로 에너지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한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인데 눈감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노가 쌓이고 화가 나지만 그 힘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좋은 모습을 가꾸고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외양은 상처나 있고, 재료도 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이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되고, 이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위로받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사람이 함부로 비난하고 헐뜯을 대상이 아닙니다. 질그릇과 같이 약점이 많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28년 전부터 세상에 여러 교회 중에 하나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구체적인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는 갈릴리교회 아닙니까? 우리는 개혁을 논하고, 교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더 건강한 대안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대안을 찾아서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 되는 것이 갈릴리의 꿈 아니겠습니까?

 

스스로의 만족 앞에서 몰락하고 하는 조국교회를 바라보고, 변질되고 타락해 가는 잘못된 신앙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까? 이런 질문 앞에서 뻔한 답을 듣곤 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저의 답 역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입니다. 어찌 보면 내용 없는 외침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슬로건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혜를 찾고 본질을 되새기는 것이 미래를 위한 바른 신앙의 태도일 것입니다. 사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길을 찾으려는 것은 역사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옛 것 속에서 새 것이 나옵니다. 과거 속에서 앞으로 나가야 할 미래가 보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실상을 가장 잘 알려주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얼마 전, 초대교회의 모습을 훨씬 더 자세하게 역사적으로 연구한 학자를 책으로 만났습니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라는 종교 사회학자입니다.

 

그의 책 ‘The Rise of Christianity’ 우리말로 번역은 되지 않았는데, 기독교의 등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종전의 다른 연구와는 달리 초대교회의 실상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교회가 어떻게 거대한 로마제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로마제국이라는 이방 사회 속에서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종교사회학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교회 내부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비춰졌느냐를 연구한 것입니다. 스타크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 그리고 주후 350년 사이 일어난 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주후 40년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불과 1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박해를 견디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300년 동안 기독교는 매년 40%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신자가 33백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가 56백만명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성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던 식민지 국가 유대 땅의 한 종교가제국의 중심에 서게 되는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초대 기독교의 이 같은 경이로운 성장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만일 우리가 이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타크 교수는 다섯 가지 요인을 꼽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는 오늘날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요즘과 같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목회자도 없었고, 신학교도 없었고, 전도자나 선교조직도 없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신앙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조직이나 방법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그렇게 매달리는 예배당 건물도 없었습니다. 건물을 가질 여유도 없었고, 단지 소규모 가정교회에서 자신들의 삶과 고백이 담긴 살아있는 간증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사랑, 돌봄, 나눔의 삶은 주변 사회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부한 자나 가난한 자의 차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한 자는 가난한 형제를 돕는 것을 사명과 책임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는 부한 형제를 진정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사람들의 눈에 비춰진 교회 안의 모습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인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이웃을 참된 사랑으로 돌보았다는 점입니다. 역사를 보면 주후 165년에서 180년까지 로마제국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병이 돌았습니다. 에볼라가 아프리카를 휩쓸고 있는 것처럼 전염병이 번져 로마제국의 인구 중 12분의 1, 5백만명이 사망했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5000명이 죽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기독교인들의 생존율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높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했고, 특별히 병자들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주후 251년에도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아 도시가 텅 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염병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던 시기에 비기독교인들은 전염병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자신의 생명만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을 다했습니다. 위험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병자들의 모든 필요를 돌아보았습니다.

 

심지어 종교가 다른 이교도들까지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전염병이 자신에게도 전파되어 죽어갔지만, 그들은 행복하고 평화롭게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사랑을 실천하다가 장렬하게 죽어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을 온통 기독교 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다시한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그것은 독선입니다. 우리끼리만 사랑하고 다른 종교 미워하는 것 누가 못하겠습니까? 요즘 한국교회 독선과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구원을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종교제국주의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절에 가서 불상을 훼손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나라에 가서 땅 밟기를 한다면서 통성기도하고 다닙니다. 유명한 사원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찬송 부릅니다.

 

여러분,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종교인들이 와서 우리교회를 돌면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무너지라고 외치고 다니면 우리 마음이 어떠합니까? 다른 종교인이 우리 예배당에 와서 자기 종교의식으로 노래하거나 염불하면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까? 이렇게 하면 종교 분쟁 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와의 경쟁과 갈등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 밤 놓라 대추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어 사막과 같은 이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시대적 사명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적어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교도라고 해서 짓밟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 믿음의 형제도 돌보았지만 이교도들도 똑같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결혼과 가정생활을 성결하게 지켜나갔다는 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정복전쟁으로 성장했던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자 군인들이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저들의 소일거리가 오직 먹고 마시는 일과 여자를 탐하는 것과 목욕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대도시와 권력층에서 더 심했는데 동성애와 낙태와 매춘과 성적인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신성한 결혼과 가정이 다 깨어져 버렸습니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여자아이가 출생하면 바로 죽이는 일이 빈번했던 점입니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사회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성비를 보면 수많은 전쟁에서 많은 남성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100명에 남성 131140명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는 견고한 결혼과 가정생활을 이루도록 서로를 도왔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높은 출생률을 유지했으며, 혼인과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귀족들이 정결의 상징인 예수 믿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최고의 로망으로 생각할 지경까지 갔습니다. 초대교회는 믿음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따로, 가정 따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씀대로 생활했습니다.

 

네 번째로, 기독교인들은 인종차별과 신분차별을 강력히 거부했다는 점입니다. 로마제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으로 세계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역병과 함께 결혼과 가정의 타락은 인구 붕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로마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사람들의 이주정책을 장려했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로마의 여러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때문에 문화적, 인종적 갈등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당시 모든 사회에서 신분의 구별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로마제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인종차별, 성별차별, 신분차별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저항했습니다. 물론 저항의 대가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땅에 처음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니게르 시므온을 장로로 세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주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인종차별과 신분차별을 강력하게 저항했고, 어떤 차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공동체입니까? 이런 교회 다니고 싶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은 성실히 일했으며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신분은 종인데 종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인데 가난한 사람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제국에 흩어져 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직과 성실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제국을 무너트리는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다가 점차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313년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없이 제국을 통치할 수 없었고, 기독교인들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제국의 법을 어기는 범죄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반사회적 기피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에게는 근사한 교회 건물도, 변변한 성경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지도자들도 없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가대나 교회학교나 찬양팀이나 신학교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순수했고,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성장했습니다. 로마의 주류문화에 역행하여 노예를 인간으로 대하고 해방시켰습니다. 여성을 지도자의 지위로 높였습니다. 동네에 전염병이 돌면 종교나 인종을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간호했습니다. 낙태와 영아살해에는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았고,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교도를 한 식구처럼 대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미래입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모습과 교회의 겉모습을 보면서 개혁해야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구조적인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되찾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래교회는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을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를 향해 미래를 개척하는 교회, 본질로 미래를 혁신하는 교회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과거를 향해 미래를 개척하는 교회, 본질로 미래를 혁신하는 교회이것이 갈릴리교회 한국교회의 미래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교회는 비판이나 개혁 대상이 아닙니다. 질그릇 속에 있는 보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새롭게 합니다. 교회를 비판할 에너지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사랑하십시다. 예수를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만난 삶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다. 그리하면 교회다운 교회, 세상이 존경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세상을 거슬러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의 영생을 걱정하십시오 /2:37/ Paul Washer

2015-06-18 18:55:43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저는 오늘, 여러분의 체면에 관계 없이 설교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자존감이나,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설교를 하려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의 재정상태가 어떤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 설교는 그런 주제가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걱정이, 어젯밤에 나를 잠을 설치게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한 가지 걱정으로 제가 번민스러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백년 이내에, 아마 여기 수련회에 참석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이 명목상의 신자인 경우에!

 

여러분들 중에, 자기 입술로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요?” 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 그렇게 심하게(정직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미국에서 목회사역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만약에 제가 미국에서 목회 한다면, 여러분의 체면을 봐서 그렇게 심하게 말 못할 것입니다.

저는 주로 남미, 아프리카, 동유럽 등에서 사역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불신앙적인 세상 문화에 오히려 더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고,

정말 많은 청년들이, 정말 많은 장년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 속임은,

그들이 평생에 한번 영접기도를 따라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거죠.

 

지금 폴 워셔 목사는, 결단주의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 결단주의와 쉬운 복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인데,

사람이 아무리 말씀을 믿고, 말씀(언약)을 믿는다 하더라도,

 

폴 워셔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그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와 아울러 (청교도 식으로) 회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가 믿는 결단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자기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주시는 증거가

(그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 증거는)

통렬한 회개, 또는 뚜렷한 회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결단해서, 자기 스스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 것은,

예를 들면, 상대방 여성의 마음에 관계 없이

남성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정했으니, 나랑 결혼된 겁니다.’ 라고 통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닙니다. 남성이 결단하더라도, 여성이 허락해 줘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허락이

초자연적 supernatural 역사로 신비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겉으로는, 주로 통렬한 회개와 뚜렷한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없으면, 스스로 결단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구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걱정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결단주의(값싼 은혜)

회개도 없이, 회심도 없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속고 있는) 신자들은,

자신의 영생에 대해, 또한 이웃의 영생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둘러보니까,

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니까 (대충 믿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기에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다 이렇게 사나 보다..)

 

여러분은, TV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마음 놓고 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들을 보고 즐김에 대해서

전혀 마음에 부대낌이나 거리낌이 없으시죠?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런 식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습니다.

 

또한 남을 유혹하기 위한 옷을 입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옷을 입어야 하는 데요)

 

세상 사람들이 즐겨듣는 음악을 듣고,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을(물질, 명예, 쾌락을), 똑같이 사랑하면서도,

여러분이 단지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니까, 교회 다니는 다른 신자들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다른 신자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뭐!’

-이것이 바로 속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값싸게취급하지 마십시오.

나는 과거에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간구하는 영접기도를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구원 받은 줄로 믿어요!’

 

여러분 저 폴 워셔는

이런 생각이.. 지금 미국에서 가장 우려해야할 이단적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침례교회 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초자연적 역사에 의한 중생과 회심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은 회개 하셨습니까?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1:17

그런데 그 믿음에는, 회개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반적으로 수 십 구절이 그렇습니다.

회개가 빠진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로 회개한 사람은,

그 후 일생에 계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즉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자기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자기도 기뻐하면서,

반드시 믿기 전(BC), 믿은 후(AD)의 삶이.. 뚜렷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되고 싶어하지 않고,

동료 신자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는 것으로 안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을 본받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 초자연적인 역사(회개, 믿음, 회심)가 일어났다면!

 

(이때 청중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짐)

 

여러분, 지금 왜 박수를 치며 환호하십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환호하고 박수 칠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를, 환호하고 박수치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에서 이런 대목이 나옴)

요즘 이상하게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청중들이 환호하고 박수치면,

마치 좋은 설교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무슨 코미디나 강연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저는 아멘소리를 듣자고, 오늘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박수를 받으려고,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께 설교하고 있는 거라고요! 지금 이것이 웃고 박수칠 설교입니까?

 

제가 지금 괜히 여러분을 까다롭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설교를 하고 다니는데, 치르는 대가가 심각합니다.

제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한 번 설교하고 나면, 두 번째 초청받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개의치 않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례비)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요,

제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만도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도 사랑하지만, 제게 더 큰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합니다.

 

자 이제 성경으로 들어가 봅시다.

성경이 진짜 말씀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 주변 교인들이 믿는 모습을 보고.. 결정하지 마세요.

성경을 읽어보시고, 참된 크리스천의 삶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세요.

 

여러분 중 한 사람이,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께

목사님, 저는 제가 구원 받았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질문하면,

그 목사님은

형제/자매님, 언젠가 당신은 영접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하신 적이 있나요?”

, 있어요.”

 

그때 진심이었나요?”

잘 모르지만, 아마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럼 의심을 주는 사탄을 물리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 하세요!

당신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다만 당신의 의심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목사님이 말씀할 것입니다.

 

-이런 미신이 지금 우리 교회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런 미신이 교계를 점령한 이유는,

<언약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약속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구원은 확실히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 느낌과 감정, 생활에 관계 없이요.

 

이런 분위기에 대한, 워셔 목사의 반론은,

 

1) 구원은.. 당신의 결단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어도.. 하나님이 결정 안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진정성이 없었던 경우에는.

 

2) 믿음만 갖고는 불충분 되며,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뭔지 모르겠다는 분은.. 아직 회개 안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라 Paul Washer

 

3)뚜렷한 삶의 변화가 없는 신자는.. 그 믿음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것입니다.

*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 Paul Washer

 

 

성경은.. <네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합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내 자신이 정말 거듭난 신자인지.. 스스로 테스트 해 보라는 것입니다.

* 믿음을 확증하시라 Paul Washer

 

여러분, 여행을 떠날 때는, 예상 경비보다 항상 30% 정도 더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상금을 항상 챙겨 가지요. 요즘은 카드를 갖고 다닙니다만..

 

비유입니다만, 우리가 성경에 보면,

천국 가는 것과 관련한 구절이 수 십 구절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다는 구절 1~2개만 알고, 믿고,

자기가 천국 여행을 가려는 것은.. 너무 커트라인을 낮게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수 십 구절의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 하더라도,

커트라인을 좀 높게 잡는 것이 좋습니다. 내게 너무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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