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행2:37-41, 고전12:13/ 김형익 목사
2023-11-16 09:58:15
교회가 초자연적 공동체라는 것은, 교회가 자연적 요인들로 설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교회는 뛰어난 사람들의 지혜나 리더십 같은 자연적 요인들로 세워지는 모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로 갈릴리 사람들로 구성된 초기 길따름이들이 어떻게 3천명의 길따름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의 경이로운 헌신과 놀라운 결속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 본문은 교회가 자연적 요인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모임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는 종교나 제도,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중심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영혼들로 구성됩니다. 그들은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이었고, 역사 속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1. 그들은 설교를 들었다! (37; 시 51:17)
신약 교회의 탄생을 설명하는 결정적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최초의 길따름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인 대중(그들 다수는 여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이 자기들의 난곳 방언으로 듣게 된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구약 성경, 특히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으며, 이 사건은 사람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며 주 하나님 자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메시지는 모호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명쾌한 메시지였고, 청중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배려에 배려를 더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 아침에 예루살렘에 모인 예루살렘 주민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귀를 울렸고 마음을 찌르는 너무나 강렬한 설교였고 그들은 이 메시지 앞에서 자신들이 피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은 대중의 반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였습니다(37). 설교는 이런 것입니다. 설교는 단순한 강연이 아닙니다.
또 그룹 성경공부도 아닙니다. 설교는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설교라는 이 미련해 보이는 방편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초자연적 수단입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친구가 다니는 새문안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을 때, 뿌리칠 수 없는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 깊은 사랑 앞에서 저는 정말 “어찌할꼬”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에 입학하던 해,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를 읽기 시작하면서 설교가 이런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놀랐던 일을 기억합니다. 이후 20대 청년 시절, 조지 휫필드의 전기를 읽고 받았던 충격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하나님께서 2억이 넘는 그 땅에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들을 몇 사람만 일으켜 주시면 그 나라를 복음으로 뒤흔들 수 있으니 그런 사람을 저의 제자들 가운데 일으켜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먹이사 거룩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목사로서 제가 하는 일들의 필요가 다 중요하지만, 지금 제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는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설교자인 제 눈에 눈물이 터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런 설교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아픔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데, 팔짱 끼고 앉아서 들을 수 있다니요? 사람들은 “아, 오늘 설교는 좋은 깨달음을 주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설교)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는데(시 51:17), 이들이 이르게 된 마음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참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갈망했으며,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자리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물론 설교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때로는 오순절과 같이 큰 무리가 회심을 하는 것으로 설교의 열매가 나타났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설교자를 조롱했고 심지어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그들의 권능 있는 설교에 언제나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처럼 반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현실은, 설교가 회심이거나 반대로 조롱과 대적함의 어떤 반응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어쩌면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닙니까?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는 우리가 설교를 통하여 이런 영광스러운 은혜의 역사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마음이 아닙니까?
2. 구원에 필요한 것들 (38-41; 고전 12:13; 요 14:12)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37),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대답합니다(38). 이 말에는 죄인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핵심적 요소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고쳐 먹고 앞으로 도덕적 삶을 살라고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에는, 회개, 세례, 죄사함, 성령의 선물이라는 요소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두 가지 명령과 그렇게 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두 가지 약속입니다. 먼저 오해하지 말 것은, 베드로가 여기서 개인 구원의 단계를 설명하거나 구원의 모든 요소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령, 죄사함은 세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례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세례는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치는 표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백성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가담한 죄를 회개해야 했습니다. 어떤 죄인도 회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했고 그 죄를 슬퍼했으며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회개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까? 제가 거듭 강조하듯이,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인생에 일어나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입니다. 회개 없는 죄사함은 없습니다. 죄사함의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사실에 있지만, 회개를 통해서 그 죄사함과 구속의 효력이 죄인에게 주어집니다. 죄사함은 회개를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회개가 죄에 대한 돌이킴이라면 믿음은 그리스도께만 죄사함이 달려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을 한 단어로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그들이 회개했고 죄사함을 받은 것에 대한 표입니다. 신자는 세례의 표로서 공적으로 교회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요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세례가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유대인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 앞에서 태생적 유대인으로서의 자기들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설교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베드로의 명강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설교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끝으로 말한 것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온 3천명의 사람들에게 그날 아침 120명의 첫 길따름이들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다시 발생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가시적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누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말대로,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것이 그들이 받은 성령 세례입니다. 그들은 참된 회심과 세례를 통하여,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진 저수지인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시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입니다(고전 12:13).
여기서 성령의 선물(gift)과 성령의 은사들(gifts)은 구분해야 합니다. F.F.브루스의 설명입니다. “성령의 선물은 높아지신 주님이 아버지의 권위 아래서 주시는 성령 자신이지만,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적 재능이다.”
낯선 언어를 말한다든지 하는 어떤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죄인이 구원받은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음 앞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고 참된 신앙의 고백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가 삶과 성품에서 맺는 열매를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약속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도 말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 여기서 ‘너희’는 유대인이고 ‘너희 자녀’는 단순히 청중의 어린 자녀들이 아니라 유대인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먼 데 사람’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가 시간적으로는 청중의 모든 후손들에게 미칠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온 세상에 미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 부르심은 우리가 교리 공부에서 배운 바, 성령의 부르심이고 유효한 부르심, 저항할 수 없는 부르심을 가리킵니다.
사실, 베드로의 설교는 36절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청중의 탄식어린 외침 때문에 중단된 것이었습니다. 40절에 보면 베드로는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거부한 사실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영광 받으신 메시아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41).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3년 동안에 보지 못한 큰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는 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걸림이 되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아마 베드로와 사도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저녁 그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한복음 14:12).”
3.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 본문에 근거하여 조금 더 생각을 해봅시다. 이 삼천 명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교리를 믿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들이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란 그들에게 무언가가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기독교를 자기의 종교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행해지는 그 무엇이고, 여러분에게 일어난 어떤 일로 설명됩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셨고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청중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을 터뜨렸습니다. 성령님께서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죄를 책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이 그들 자신과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중립적인 구경꾼이나 객관적 입장을 취하는 방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께
서 죄를 깨닫게 하시자 그들은 이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지적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자신들의 영혼이 큰 곤경에 처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덧 없는 세상의 것들에 매여
살아온 것을 깊이 후회하고, 그에 대한 형벌을 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흔들어 놓는 어떤 일이 일어난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회심은 그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이 되심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형편 없는 죄인이며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심은 교회 공동체의 삶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회심의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 공동체의 삶에서 나타났는지는 다음 주일에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부인할 수 없고,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지요. 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복음이 목숨을 던질 만큼 강력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과 복음과 기독교와 교회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에게(그들 스스로가 고백하는 바에 따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문제는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이 곤경에 대한 인식 그리고 탄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출발하여 회심의 과정에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일을 ‘제대로’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행전 2:42-47에 기록된 초기 교회의 삶에 대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37-41절을 건너뛰고 42-47절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초자연적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은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초자연적 사건이 일어난 사람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무언가가 그들 안에 일어났고, 이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보다 더 높고 고상하고 귀하고 값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었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돈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전 존재를 흔들어 바꾸시는 일을 그들에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당에 가서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거듭났는지, 회심을 했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전에 교회를 다녔었고, 또 그전 교회에서 집사를 했다는 사실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인정해줍니다. 교회는 이렇게 스스로의 초자연적 본질을 훼손해갑니다. 여기서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초자연적 삶이 발생하거나 형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37-41절을 건너뛰고 42-47절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에게는 그 초자연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식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탄식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의 덧없음에 매여 살아왔음을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까? 그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살아온 죄에 대한 깊은 깨우침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그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 가운데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고 인정했습니까? 참된 회심의 열매가 있습니까?
아무도 스스로 결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어떤 일을 일으켜 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지속적으로 빚어내시는 열매가 존재합니다. 과연 그 열매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교인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어떤 일들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서,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한 번도 이런 탄식이 있었던 적이 없는 분들이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도 세상의 헛된 것을 따라 살아가고 돈을 위해 살며 세상이 주는 것들을 우상으로 섬겨 살았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회개한 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듯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는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구주와 주가 되심과 그분께 여러분의 구원이 달려 있음을 알고 주님을 업신여긴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주를 의지할 때, 죄사함을 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초자연적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는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바, 초자연적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벧샬롬교회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주님의 교회에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치실 때 /행2:37-41/ 유기성 목사
2016-08-05 16:27:3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저는 이 본문을 읽고. 흥분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그 날 3천 명이 회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한다면 이런 설교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설교를 하고 싶어하는 저에게 꿈을 통하여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사람들 앞에서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화가 난 모습으로 제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은 사람들은 "형제들이여, 어찌할꼬!"하고 회개했으나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은 돌을 들어서 스데반 집사를 쳐 죽였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너는 스데반처럼 되어도 좋겠느냐? 물으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설교의 은혜도 욕심으로 구할 것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하나님 비록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를 설교자로 택하신 이유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설교에 제 자신의 의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내용으로 설교하고 싶은 것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받는 설교 방법 중 하나가 강해설교입니다. 어느 성경 하나를 택하여 1장 1절부터 연속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만 설교하자.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경 본문을 제 의도를 가지고 택하지 않으려고 하는 뜻입니다. 주어진 본문 말씀으로 설교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전하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으니까 말씀 준비를 다 해놓고도 마지막에 “하나님,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성령의 기름부음을 확인하고 전합니다.
셋째는 어떤 결과가 있어도 그 결과를 받아드리자는 것입니다.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든지 아니면 돌이 날아와서 내가 죽든지 첫째 둘째 원칙을 잘 지켰다면 결과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다. 결과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목사님, 성령 충만하여 우리 마음을 치는 그런 설교 한번 해보세요!” 하지만 말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올바른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회중과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회중이 달랐듯이 설교를 드는 사람도 말씀 듣는 자세가 올바라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원칙은 말씀이 찔러오면
첫째, 설교자를 생각하지 말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 그 설교 내용이 정말 성경에 있는 내용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내 감정과 상관없이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여러분에게 허락하십니다. 말씀 받는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도 동일한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찔림을 직역하면 심장을 관통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큰 자극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니!’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치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런 죄책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마음을 치시는 것은 큰 복이고 은혜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에 찔림이 있나요? 좋은 징조입니다. 영적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표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불행은 하나님이 마음을 치서도 마음의 찔림이 없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의 다른 감각은 참으로 예민합니다. 누가 내게 잘하는지, 아니면 잘못하는지, 아주 잘 알아차립니다. 정욕과 탐욕, 미움, 시기, 질투의 감각, 슬픔, 불쾌함은 다 잘 느낍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께 대한 감각은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하나님이 마음을 치셔도 전혀 느낌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무뎌진 사람들을 이렇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마 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인도의 영성 신학자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라는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든 채 태어나서 잠든 채 살며 잠 속에서 혼인하고 잠 속에서 자녀를 낳고 깨어나 본 적이라고는 없이 잠 속에서 죽는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생리적인 수면이 아니고 영적 차원의 잠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감각적인 교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치셔도 깨닫지 못하는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그냥 죽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그냥 죽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종노릇하며 살면서도 심각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누가 여러분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인생 자체가 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겠지요? 그런데 죄가 여러분의 주인이라면 이보다 심각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는 죄의 종노릇하면서도 그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하나님의 심판이 그렇게 심각한 일인지? 사람들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심판 앞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그것을 깨우치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치실 때, 우리는 평소에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일이 심각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삶 전체를 바꾸어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집사님이 보통 한국 어머니처럼 자녀들을 위한 열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이 마음을 치셨습니다. ‘네 아이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느냐?’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아이들의 대학 입시나 유학, 직장, 결혼 문제에 대하여 관심 가진 것에 비하면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는 너무나 무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적에 대하여는 너무나 예민하면서 성경 읽고 기도하고 교회 나가 예배하는 것에 대하여는 얼마나 무신경하였던가? 너무나 바보같이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음을 깨닫고 회개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쳐서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열심히 살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인지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소중한 부모이고 형제고 자식이고, 아내이고 남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가족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지날 때가 많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영원히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처해있는 심각한 상황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이렇게 찔러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본당 건축을 앞둔 때, 의사 전도왕 이병욱 장로님을 초청하여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나오신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다가 “용서하고 하나 되십시오!” 하시더니 우셨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모두 일어나 서로 마음에 상처준 이들을 찾아가서 화해하라고 하였습니다. 좀 어색한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도 찾아가기가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그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우리 교회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시면서도 강단에 서셨을 때, 교인들 마음에는 벽이 있는 것을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어떤 특별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장로님의 눈물을 통하여 성령님의 마음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교회가 여러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교인들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하나 되었습니다. 저는 이 정도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본당 건축을 앞둔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마음 중심까지 하나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쳐서 깨닫게 하시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속으로는 ‘저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어요. 저 사람은 안돼요. 저 사람은 싫어요.’ 하는 마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배당 잘 건축하면 무엇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 후 저에게는 예배당 건축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령 안에 하나 되는 것임을 깨달았고 끊임없이 그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소에는 먹고 사는 일에 시급하게 살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 과정도 예배당 건물을 짓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다 보니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하나님께서 다루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반응이 컸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37절)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찌르실 때 무감각하게 넘기면 안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치실 때 우리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1907년 한국 교회 부흥 당시의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회개가 강하게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 이어 사람이 일어서서는 죄를 자복하고 넘어져서는 죄책감으로 땅을 쳤다.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온 청중이 통성기도를 하는 데 청중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기도회는 새벽 두시까지 자백과 울음과 기도로 계속 되었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도 그랬고, 한국 평양의 초대 교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치실 때 회개하면 삽니다. 부흥이 일어납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치시고 찔림을 주셔도 그것이 회개로 꼭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마음을 치셔도 반응해야 되겠다고 하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 마음을 치셔서 찔림은 왔는데 반응은 정반대로 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한 자에게 돌을 던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이 오셨습니다.
평양의 부흥 운동보다 약 10년 전에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소래교회는 만주에서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이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운 교회입니다.
1889년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인 선교사 말콤 펜윅 선교사가 1896년 말 소래를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약 300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으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펜윅은 한 사람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제 눈에는 감격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신자 두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곳 신자들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펜윅의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며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 했습니다.
펜윅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미워했던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길로 미워하던 두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다음 날인 주일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모든 신자들이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었을 때, 한 작은 교회의 한 부인이 주기도문을 하다가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워하고 있는 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중단하고 그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갈등은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라고 그 여자는 자백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에 큰 부흥이 임했다는 소문을 듣고 보석 가게를 경영하던 한 상인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격한 감정으로 기도하고 우는 것 외에 특별히 마음에 감동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부흥'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교인들의 '요란한 감정의 잔치'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안 들여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자기 가게에 한 젊은이가 오더니 자기가 이 보석가게에서 보석을 훔친 일이 있다고 보석을 내놓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마음에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서 자기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교회에 나가 자신도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손기철 장로의 책 [기름부으심]에 규장 출판사의 여진구 대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분이 2006년 성령의 기름부음을 체험한 후 어느 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직원들에게 회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니 하나님, 갑자기 회개라니요?" 너무나 당황했지만 직원들에게 잘못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는 직원 예배 시간에 전 직원들 앞에서 공개 자복을 했습니다.
회사 대표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자기 마음에 품었던 사랑하지 않은 죄, 미워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상처를 준 말과 행동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니 직원들도 당황했지만 그 후 출판사 안에 놀라운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4월 6일 규장과 갓피플 전 직원에게 강력한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는 성령체험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직원들이 공개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나 업무적으로 반목한 직원, 개인적으로 마음에 앙금이 쌓인 직원들과 부서 간에 회개와 용서, 화합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가족들에게도 사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가정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가족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내와 초등학생인 큰 아들과 딸, 다섯살 막내 아들 모두 깜짝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아내와 막내 아들까지 한 명씩 손을 잡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잘못을 낱낱이 말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가 마주잡은 손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전심으로 회개하자 가족 모두 울음을 터뜨려 거실이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회개하는 가정 예배 이후로 가족들의 기도가 깊어지고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역시 더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부모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큰 아들이 말하더랍니다. “아빠, 성령님 만나더니 많이 착해졌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시고 실제로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치실 때 즉각 반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교세가 1만3천 명이나 되는 큰 교회 담임 목사님이 교인들을 대상으로 세례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들을 파악해 보았더니, 40%인 최소한 5천 명 이상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세례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입교인은 2700명 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원입인은 100명도 안됩니다. 등록 과정에서 세례를 확인하고 세례를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셰례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안 받고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있는 까닭은 세례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은 공개적으로 예수 믿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성령님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가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 입니다.
거듭남은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대의 선물로서 우리는 영생, 천국, 구원 등을 말씀합니다만,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담아서 주시는 큰 그릇이며 실체인 선물이 성령님이십니다.
영국의 버트란트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도덕률은 너무 높아서 나는 도저히 감당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쟁이가 되지 않겠다.”
정확한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뜻대로 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할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마음을 치실 때 회개하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세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마음을 치실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반응했던 그들처럼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겸손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지배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에게 이런 성령이 충만히 임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우리에게 그 놀라운 믿음의 세계를 열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전에 한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던 분들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붙잡으세요. 예수님의 손을 잡고 파도 위를 걷는 것입니다. 남은 생애를 사시기 바랍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을 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즉각 반응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정말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사람들 앞에 선포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생을 걱정하십시오 /행2:37/ Paul Washer
2015-06-18 18:55:43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저는 오늘, 여러분의 체면에 관계 없이 설교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자존감이나,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설교를 하려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의 재정상태가 어떤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 설교는 그런 주제가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걱정이, 어젯밤에 나를 잠을 설치게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한 가지 걱정으로 제가 번민스러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백년 이내에, 아마 여기 수련회에 참석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이 명목상의 신자인 경우에!
여러분들 중에, 자기 입술로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요?” 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 그렇게 심하게(정직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미국에서 목회사역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만약에 제가 미국에서 목회 한다면, 여러분의 체면을 봐서 그렇게 심하게 말 못할 것입니다.
저는 주로 남미, 아프리카, 동유럽 등에서 사역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불신앙적인 세상 문화에 오히려 더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고,
정말 많은 청년들이, 정말 많은 장년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 속임은,
그들이 평생에 한번 영접기도를 따라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거죠.
※지금 폴 워셔 목사는, 결단주의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 결단주의와 쉬운 복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인데,
사람이 아무리 말씀을 믿고, 말씀(언약)을 믿는다 하더라도,
폴 워셔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그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와 아울러 (청교도 식으로) 회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가 믿는 결단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자기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주시는 증거가
(그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 증거는)
통렬한 회개, 또는 뚜렷한 회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결단해서, 자기 스스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 것은,
예를 들면, 상대방 여성의 마음에 관계 없이
남성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정했으니, 나랑 결혼된 겁니다.’ 라고 통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닙니다. 남성이 결단하더라도, 여성이 허락해 줘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허락이
초자연적 supernatural 역사로 신비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겉으로는, 주로 통렬한 회개와 뚜렷한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없으면, 스스로 결단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구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걱정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결단주의(값싼 은혜)로
회개도 없이, 회심도 없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속고 있는) 신자들은,
자신의 영생에 대해, 또한 이웃의 영생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둘러보니까,
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니까 (대충 믿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기에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다 이렇게 사나 보다..)
여러분은, TV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마음 놓고 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들을 보고 즐김에 대해서
전혀 마음에 부대낌이나 거리낌이 없으시죠?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런 식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습니다.
또한 남을 유혹하기 위한 옷을 입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옷을 입어야 하는 데요)
세상 사람들이 즐겨듣는 음악을 듣고,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을(물질, 명예, 쾌락을), 똑같이 사랑하면서도,
여러분이 ‘단지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는 구원 받았다’ 라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니까, 교회 다니는 다른 신자들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다른 신자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뭐!’
-이것이 바로 속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값싸게’ 취급하지 마십시오.
‘나는 과거에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간구하는 영접기도를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구원 받은 줄로 믿어요!’
여러분 저 폴 워셔는
이런 생각이.. 지금 미국에서 가장 우려해야할 이단적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침례교회 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초자연적 역사에 의한 중생과 회심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은 회개 하셨습니까?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롬1:17
그런데 그 믿음에는, 회개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반적으로 수 십 구절이 그렇습니다.
회개가 빠진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로 회개한 사람은,
그 후 일생에 계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즉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자기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자기도 기뻐하면서,
반드시 믿기 전(BC)과, 믿은 후(AD)의 삶이.. 뚜렷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되고 싶어하지 않고,
동료 신자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는 것으로 안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을 본받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 초자연적인 역사(회개, 믿음, 회심)가 일어났다면!
(이때 청중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짐)
▲여러분, 지금 왜 박수를 치며 환호하십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환호하고 박수 칠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를, 환호하고 박수치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에서 이런 대목이 나옴)
요즘 이상하게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청중들이 환호하고 박수치면,
마치 좋은 설교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무슨 코미디나 강연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저는 ‘아멘’소리를 듣자고, 오늘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박수를 받으려고,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께 설교하고 있는 거라고요! 지금 이것이 웃고 박수칠 설교입니까?
▲제가 지금 괜히 여러분을 까다롭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설교를 하고 다니는데, 치르는 대가가 심각합니다.
제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한 번 설교하고 나면, 두 번째 초청받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개의치 않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돈(사례비)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요,
제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만도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도 사랑하지만, 제게 더 큰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합니다.
▲자 이제 성경으로 들어가 봅시다.
성경이 진짜 말씀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 주변 교인들이 믿는 모습을 보고.. 결정하지 마세요.
성경을 읽어보시고, 참된 크리스천의 삶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세요.
여러분 중 한 사람이,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께
“목사님, 저는 제가 구원 받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질문하면,
그 목사님은
“형제/자매님, 언젠가 당신은 영접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하신 적이 있나요?”
“네, 있어요.”
“그때 진심이었나요?”
“잘 모르지만, 아마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럼 의심을 주는 사탄을 물리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 하세요!
당신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다만 당신의 의심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목사님이 말씀할 것입니다.
-이런 미신이 지금 우리 교회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런 미신이 교계를 점령한 이유는,
<언약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약속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구원은 확실히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 느낌과 감정, 생활에 관계 없이요.
이런 분위기에 대한, 워셔 목사의 반론은,
1) 구원은.. 당신의 결단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어도.. 하나님이 결정 안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진정성이 없었던 경우에는.
2) 믿음만 갖고는 불충분 되며,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뭔지 모르겠다는 분은.. 아직 회개 안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라 Paul Washer
3)뚜렷한 삶의 변화가 없는 신자는.. 그 믿음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것입니다.
*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 Paul Washer
▲성경은.. <네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합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내 자신이 정말 거듭난 신자인지.. 스스로 테스트 해 보라는 것입니다.
* 믿음을 확증하시라 Paul Washer
※여러분, 여행을 떠날 때는, 예상 경비보다 항상 30% 정도 더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상금을 항상 챙겨 가지요. 요즘은 카드를 갖고 다닙니다만..
비유입니다만, 우리가 성경에 보면,
천국 가는 것과 관련한 구절이 수 십 구절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다는 구절 1~2개만 알고, 믿고,
자기가 천국 여행을 가려는 것은.. 너무 커트라인을 낮게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수 십 구절의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 하더라도,
커트라인을 좀 높게 잡는 것이 좋습니다. 내게 너무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중요한 반복업무/행2:37-41
2005-02-02 12:43:25
고든 맥도널드가 신앙의 반응상태를 네 종류로 나누었다.
1. 방관자: 가장 흔한 부류. 이기적인 이유로 예수님 근처를 서성거리며 그저 받기만을 바람.
그 기대가 무너지면 험악한 모습으로 기독교의 약점을 잡으려 함. 자신의 영적 공허를 인정하나 부담이 되는 것은 수용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오묘한 말씀이라도 그 가슴에 열매를 맺지 못함.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지만 결국 물러간 대중들.
2. 구도자: 하나님이 삶의 변화가 무엇을 감수케 하는지 깊이 깨닫도록 요구할 때에 진지한 호기심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배워서 변화시키려 하는 사람들. 오랜 시간 주님 곁에 머물 수 있으나 무슨 계기로 언제 믿음의 선을 넘게 될지 아무도 모름. 밤중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나, 영생에 대해 질문한 부자 청년 경우. 오늘날로 하면 예수를 스승으로 보고 그 가르침을 좇으려는 이성적 신자.
3. 추종자: 구도자에서 추종자가 되는 건 소수. 최초의 변혁을 이룬 자들. 그리스도의 초청에 정식으로 응한 자들. 인생 방향은 철저하게 전환되었고 삶을 다르게 생각하며 자신의 소명은 깨닫지만 그 길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있음. 추종한 것만으로 최종 지점이 아님을 스스로 앎. 은혜로 거듭나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길에 들어선 신자들.
4. 왕국 건설자: 하나님나라 건설이 하나의 삶의 생활방식이 된 사람들. 자신이 받은 소명에 철저하게 헌신하여 조용하고 일관성 있게 주님을 섬기며 종 된 삶을 삼.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고 내면에 무성하게 자라는 자.
어떤가?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은 지금 각자 어디에 해당되시나?
이 구분에 의하면 진짜 크리스천은 사실 3번(추종자)부터 해당된다.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1번, 2번에서 3번, 4번으로 올라오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전환이 이뤄졌다.
그들은 원래 2번 단계(구도자 단계)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평생토록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인 절기 준수도 잘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50일 전 자기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가, 그들의 그 모든 기대를 한꺼번에 성취한 분이라는 메시지를 그 자리서 듣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성령강림의 현상과 경험들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해석설교였다.
그런데 그 메시지에 대한 들음은 단순한 들음이 아니었다.
어떤 이성적인 판단력을 갖게 하는 들음도 아니었고, 어떤 순간의 감성만 자극하는 들음도 아니었다.
그들이 귀로 들었던 것은 자신들의 인격의 변화를 초래하게 하는 들음이었다. [37절]
여기에서 “마음에 찔려”라는 표현은 ‘관통하여 뚫다’라는 뜻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진짜 활 맞아보신 분 계신가? 안 계실 것이다. 계신다면 아마 이 자리에 안 나와 계실 것이다. 저는 고대 전쟁영화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른다. 총이나 대포로 전쟁하는 현대전은 보기에는 좀 가공하지만 그 고통은 잠시다. 그러나 활과 칼을 쓰는 전쟁은 다르다. 활 맞고도 오래 버틴다. 고통도 오래 간다.
이 단어가 바로 그런 뜻이다.
화살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 같은 고통을 말한다.
여러분들께도 질문하고 싶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었는)지?
말씀이 여러분의 심장을 뚫고 지나서 어떤 심령의 고통이 있었던 그런 경험 말이다.
Jonathan Edwards 목사님이 Connecticut 주에 있는 North Hampton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든 자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시자, 거기 모인 청중들이 설교를 듣다 때굴때굴 굴렀다고 한다. 뒤에서 사회 보던 목사님은 설교 도중인데도 목사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으면서, “목사님 제발 설교 그만두실 순 없나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했단다. 그러자 Jonathan 목사님은 “아닙니다. 아직 좀 더 해야 합니다” 하면서 설교원고를 계속 읽어내려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마치 전설 같이 들리지만 실제로 있었던 실화다.
이에 버금가는 말씀의 역사가 1907년에 평양에서도 있었다.
그렇게까지는 못 되어도,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의 화살이 우리의 마음을 꿰뚫는 아픔이 우리의 예배 속에서 그것의 10분지 1정도만 있어도 정말 좋겠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명 팝가수의 concert 장면을 보면서 많이 부러워한다. Britney Spears가 팔만 뻗어도 괴성을 지른다. 서태지의 한 곡에 아줌마들까지도 뿅 가버린다. 욘사마라고 불리는 배 모 남자배우가 일본 공항에 뜨니까 일본 하네다 공항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그 친구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분이다.
그 분의 말씀은 그들의 노래나 연기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시적이고 유행을 타지만(얼마 못 감)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다.
그런데도, 하나님 말씀이 주변에 뜨는데,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그래서 그 검이 우리의 마음을 내리치면, 우리의 마음은 그 찌름 때문에, 그 골수까지 느끼는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라고!
골수까지 아픈 경험 해보셨는가? 이빨 치료할 때 왜 마취를 하고 신경치료를 하는가?
신경은 온 몸에 연결되는 조직망이기 때문에, 신경 하나 건드리면 전신이 아프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전신을 아프게 하는 힘이 있다.
최근 다니엘서를 보셨나?
하나님의 계시가 해석되어지니까 다니엘은 혼절하는 수준의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나 말씀이 주는 그 고통은 우리에게서 없어져야 할 고통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고통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지만, 이 고통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우리를 구도자에서 추종자로 바꾸는, 혁명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여러분을 찌르면 그 고통을 그대로 받으셔야 한다.
그 고통은 여러분을 살리는 고통이요, 회복시키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인생의 혁명을 초래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말씀에 찔림 받아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아프면 상처가 나는데 상처가 났으면 그 상처는 언젠가는 반드시 아물어야 한다.
그래야 낫는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후]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 모인 청중들에게 드디어 변화가 일어났다.
말씀의 화살이 그들의 심장에 박혀서 구도자에서 추종자로 바뀌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들의 심장에 뚫린 말씀의 화살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한 사도들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38-39절]
일단 그들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말씀의 화살이 와서 영적 가슴에 박힌 것은 외부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것을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그 내부적 처리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선물을 받는 일이었다.
바로 성령의 선물이었다.
저는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가장 감사했던 것이 바로 자존감의 회복이었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저도 피해의식, 열등감, 상처 같은 것들이 있었다. 상담학, 심리학 책을 읽어보면 모든 것들이 다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는, 저의 그런 것들을 제 자신의 인위적인 자존감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친구에게 성적이 밀리면 다음 달에 오기로 더 공부한다. 그건 그래도 낫다. 그런데도 밀리면, 그 친구를 몰래 약 올려놔야 속이 후련했다. 외모가 딸린다. 그러면 가능한 한 비싼 옷과 신발을 사서 그것으로 저의 부족한 외모를 덮어보려고 했다. 예수 믿고 나서 머리가 벗어져서 다행이지 안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별 걸로 다 덮어보려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자존감을 그런 식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안 다음에는 정말 많이 나아졌다. 이 세상에서 저의 허물을 덮어주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모두 다 저를 있는 그대로 안 봐준다. 자기보다 나으면 누르려 하고 못하면 무시한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어째도 그분만은 저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이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안에 큰 찔림이 일어났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거의가 다 유대인들이었다.
자기들은 자동으로 하나님 자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자존감은 은근히 그들을 힘들게 했다.
명품 신발과 옷으로 딸린 외모를 가리는 사람의 불안감 같은 것이다.
경쟁에서 밀렸던 사람이 top을 도로 찾았을 때의 불안감 같은 것이다.
한번 유대인이면 영원한 유대인이 아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백방의 불안한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그 모든 불안과 한계의 담을 허무셨다.
유대인만이 아니다.
먼 데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유대인이 가증스럽게 여겼던 이방인들까지도, 이제 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우리가 섬기는 유대민족의 하나님이 ‘원 세상에!’ 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하니까!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민족과 계급과 성별과 빈부와 신분의 차등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모든 이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40절의 ‘패역한 세대’가 왜 ‘패역한 세대’인가? [40절]
바로 그런 인간적인 차등과 경쟁 때문이다.
정권으로, 돈으로, 신분으로, 그리고 심지어 종교로 사람들을 차별한다.
그래서 그들의 자존감을 박살낸다.
자기들이 만든 구조로 기본적인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영원히 가두어버린다.
그래서 패역한 세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든 차등을 철폐시켜 버리셨다.
그래서 그 사랑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구조와 상황 속에 있든지 간에, 그는 완전히 회복된 존재로 태어난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이게 바로 그들을 살렸고, 또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었던 것이다.
Jesuite파 신부인 Henry Nauen이라는 분이 계신다.
그 분은 이 시대에 세 가지 병이 있다고 진단했다: (1) “현실적이 되라”; (2) “멋있게 보여라”; (3) “힘이 최고다”.
저도 이 분의 진단이 맞다고 생각한다.
왜 이게 병이냐면, 이 세 개를 다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 가지려고 하니까 병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멋있게 보여라”를 보자. 화장품 선전에서, 왜 유명 탤런트들이 그 엄청난 고가에 모델로 나오는가? 어디서 들은 건데, 여자 배우로서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 화장품 광고 모델이 되는 거란다. 예를 들어 태평양화학에서 A 여자배우를 모델로 채용해서 효과를 봤다. 그러면 한국화장품에서는 더 돈이 될 만한 B 모델을 더 많은 웃돈을 줘서 채용한다. 그래서 잘 되면 괜찮지만 결과 시원찮다. 그러면 또 다른 대안을 쓰기 위해서 거기에다 돈 더 쓰고 힘도 더 쓸 것이다. 그래서 이게 병인 것이다. “힘이 최고다”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조폭을 보면 두목은 항상 하나다. 두목이 둘이 되면 파벌이 형성되고, 그 중 더 강한 계파가 되기 위해서는 꼭 피를 보는 전쟁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반복]는 병이다.
그런데 더 기막힌 사실은 이게 병인 줄 알면서도 못 고친다는 점이다.
병인 줄 알면서도 못 고치는 경우는, 그 병이 말기적 상황까지 갔든지, 아니면 고치기 싫어서든지, 둘 중에 하나다.
말기적 상황이야 이해가 되지만, 알면서도 고치기 싫은 경우는 문제가 있다.
고쳐야 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지만 그 병이 주는 일시적 쾌감 때문에 잘 안 된다.
중독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일 것이다.
마약이 주는 일시적인 쾌감 때문에 병은 더 불려간다.
콜레스테롤이 높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있는 고기, 새우에 젓가락이 간다.
이건 제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바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중독현상[반복]이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저변에, 구석구석에,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영역에, 아주 골고루 퍼져있다.
그러면 문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과연 없을까, 하는 것이다.
아니다! 길은 있다! 그 길은 바로 ‘복음’이라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회복과 사랑의 ‘복음’이라는 길이다.
이런 마음의 질병들을, 또 이것이 가져다주는 총체적인 병적인 현상들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이 시대의 마음이 병든 모든 이들을, 새로운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유일한 처방전은 복음뿐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혹시 여기에 아직도 구도자 단계에 계신 분들이 있는가?
그러면 이 치유의 복음을 받아들이시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회복시키는 은총 앞으로 나아오시라.
그러면 반드시 그 안에 심령의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한없는 자유를 맛보게 되실 것이고, 온전한 자존감이 여러분 안에 형성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그 치유의 복음을 통하여, 놀라운 변혁의 역사가 여러분들 심령 안에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인류역사가 지내오는 동안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하게 계속되어온 행위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일단 먹고, 자고, 일하고, 성욕 채우고, 자손을 번식하고, 번영을 증진하는 일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보편적이거나 본능적인 것들이다. 혹시 후천적인 것들인데도,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계속되어오거나, 또 온 인류를 하나로 묶는 일 같은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4년마다 한번씩 온 세계가 들썩거리게 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것도 100년 남짓한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런 것(장구한 반복의 패턴/사이클)이 딱 하나 발견된다.
그게 무엇인가 보자.
베드로 사도는 이 뒤로도 계속 말씀을 전했다. [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그러자 순식간에 120명에서 3120명으로 그 추종자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부흥된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그 일을 계속했던 것이다.
한번도 변하지 않고, 꾸준하게, 똑같은 일을, 아주 의지적으로, 자발적으로 2000년 동안, 어떤 일을 반복적인 패턴으로, 아주 단순하게 해왔다.
그럼 그 반복적인(순환적인) 패턴은 무엇이었는가?
누군가가 말씀을 전한다. [본문에서는 베드로] 그러면 누군가가 그 전한 말씀을 듣는다. [본문에서는 120명의 청중들] 그러면 말씀을 그 듣는 이들 가운데 마음이 찔린다. 마음이 찔리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교회가 된다. [41절] 그럼 그렇게 생긴 교회는 그 뒤에 조용히 있지 않는다. 그 교회는 또 다시 이 일을 반복한다. 그들은 어디선가 들었던 이 말씀을 전할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 반드시 마음이 찔려서 회개한 후 세례를 받고, 그들이 모여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그 교회는 또 다시 이 패턴을 반복할 것이다. [들음 - 찔림 - 회개와 세례 - 교회 세워짐.... 다시 반복!]
실제로 이 뒤에 보면 사도행전 역사가 이 일의 반복의 역사다.
그래서 2000년 동안 이 일은 단 한번도 끊임이 없이 지금까지 있어왔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반복행위는 그게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반복적인 일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앞으로 지구가 1000년 더 존재한다면,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앞으로 1000년 동안 지금 만큼이나 열기가 있을지 의문이다.
잘 보라! 지금 하고 있는 올림픽만 해도 벌써 시들하지 않는가?
그러나 복음 전파라는 이 단순한 행위는 지구의 종말이 언제 오더라도 끊이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럼 그 일을 하는 자들이 누군가?
바로 여러분이고, 또 그 여러분이 속해 있는 우리의 교회들이다.
교회가 이 반복적인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2000년 동안 해왔던 이 일인데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반복의 체인을 잇고 있는 한 부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자들이 된다.
그러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차지하는 부분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는 일의 한 코너를 잘 맡아주셔야 한다.
이제 이 영원하면서도 중요한 반복 업무에 남은 생애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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