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소리 높여 외칠 고백 /행2:14-36/ 유기성 목사
2016-08-05 16:02:09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모두들 경제위기다, 살기 힘들다,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어려운 때란 항상 기적의 때요 간증의 기간입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모든 어려웠던 기간은 다 간증의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다들 어렵다, 힘들다고 할 때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두려운 일도 염려도 없게 됩니다.
저는 짧은 생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고비들이 다 한결같이 간증의 때였고 기적을 경험하는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고 할 때 믿음 안에서는 사실 가슴 설레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는 때가 되었구나.’ 여러분,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올려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왜 하나님이 역사를 안해주시는가?”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특히 어려울 때 여러분이 먼저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을 보여드리는 것 중에 놀라운 것이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역사도 인생도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 살 길은 항상 너무나 간단합니다. ‘왜 그것을 몰랐을까?’ 탄식할 만큼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축복, 십자가의 복음을 당당히 고백하고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일 먼저 말이 달라집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5절-13절에 보면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한결같이 말 문이 열려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저들이 어떻게 우리 방언으로 말을 하는가?”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 14-36절까지도 보면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설교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겁쟁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가다가 결국 가야바의 궁전에 가서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 부인했고, 두 번 부인했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과 자기는 전혀 상관없는 관계라고 분명히 밝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력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이 달라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너무 수다스러운 것도 좋지 않지만, 말없이 젊잖은 것도 결코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말없이 젊잖다는 말은 그가 속이 뜨겁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속이 뜨거운데도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여러분 속에서부터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터져나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았음을 그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설교를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설교를 하고 있는데, 시편 16편과 110편의 다윗의 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도무지 스스로가 깨우칠 수 없는 일을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다윗이 이미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25절에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였음을 증거하였습니다.
27-28절에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기서 “내 영혼”은 다윗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놀라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는 사실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논쟁을 걸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도 다 있었니?” 하면 끝입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어떻게 이런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 여러분이 보고 듣지 않았느냐고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32-33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는 신학적인 논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아니다’ 그는 증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그러냐?” 이렇게 넘어갈 만도 한데,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와계시다. 그것을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이 아니냐고 증거할 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증인이 나서니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세상을 살리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베드로에게만 예수님이 오셨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처럼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당당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언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 공부를 많이 하고 큰 건물을 짓고 성공하면 관심을 가져주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세상을 주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당당하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담대하게 증거할 때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조용히 믿는 것이 좋지, 그렇게 요란하게 말하고 믿을 것이 무엇인가?” 합니다. 그 분은 지금 아직 복음을 정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복음을 알고 나면 혼자 조용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례까지 치렀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길거리에 뛰쳐 나가 큰 소리로 외칠 일이 아닙니까?
아무리 놀라운 진리요 복음이라도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진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내게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죽었다고 하니 이것은 무슨 역사가 있는 메시지가 아니면 미친 사람이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다. ” 이렇게 고백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의 복음의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고백한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라고 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 예수님을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가족들에게도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웃 사람들에게도 여러분이 정말 소리 높혀서 베드로처럼 고백할 것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는 것을 주저합니다. 무언가 부자유할 것 같고 불이익을 당할 것 같고, 논쟁에 휩싸일 것 같고, 계속 그리스도인 답게 살 자신이 없고, 너무 튀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바꾸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 고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데, 우리가 주저하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호주에서 만난 한 의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교민 교회들 사이의 다툼, 교인들의 갈등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자로 찾아온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들은 것들입니다. 왜 불신자들에게 이런 것만 말하고 살아야 합니까?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정신 안에 조국 인도를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영국의 부당한 처사에 굴복할 수도 없고 그러나 무력에 호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대안이 십자가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유명한 “비폭력, 비협조” 운동입니다. 그것은 힘이 넘쳤습니다. 대영제국을 흔들었습니다.
간디의 소집으로 인도의 지도급 인사 20만,명이 감옥에 갔습니다. 화를 잘 내던 사람들이 대나무 곤봉에 머리를 맞고 아무 저항 없이 감옥에 들어가고 가장 가혹한 형벌을 자청하였다. 그들은 법정에서 감옥으로 이송될 때 영국인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힌두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힌두교인이 선교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십자가를 가지고 말하려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감옥은 우습게 되었습니다. 양심적인 영국인들은 괴로와 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우리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있는가?’ 이것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힘이 있었고 거의 기독교적이었다.
그 운동에 폭력이 슬금슬금 들어오면 간디는 운동 중지를 명하고 대신 스스로를 참회하고 정화하는 뜻으로 단식을 실시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였다. 한 힌두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었듯이 마하트마 간디도 예르바다 교도소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고 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비폭력, 비협력 운동도 십자가가 아니었고 단지 목숨을 걸고 십자가 정신을 적용하려 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스탠리죤스 선교사가 간디에게 “기독교가 인도에 뿌리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네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십시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유력한 힌두교인이 기독교가 인도에 뿌리내리려면 더욱 기독교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 한국 복음화, 토착화를 위하여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 종교를 배우고 그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로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통하는 기독교인이요 교회가 되려고 세상을 배우고 닮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진실이요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해되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엄청난 보화를 가지고만 다니다가 죽을 것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번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 예수님과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진리를 증거해 보십시오. 여기에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걸어 보십시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죤스 선교사 자서전 [순례자의 노래]에서 개종자 베누고팔(C. T. Venugopal)이란 사람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는 형의 권유로 스탠리죤스 선교사 전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차에서 예수님이 곁에 앉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영원토록 서로에게 속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철도 공무원이었는데. 뉴델리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하 직원과 고위 공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기독교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이거든 내게 다가와 그것을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얼마 후 두 명의 힌두교인인 직원이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베누고팔씨. 오늘은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닌 것 같군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아침 고요한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 될 때, 서로 적대적인 사이에서 철도와 관련한 분쟁을 해결할 특사로 파키스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인도가 필요한 서류 뿐 아니라 배상금까지 받아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인도 정부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산상설교에 나온대로 했을 뿐입니다. 10리를 더 가주고 원수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산상설교대로 살 수 있나 말합니다. 하지만 산상설교는 그대로 살기 시작할 때, 산상설교는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그는 브라만 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은 일로 인하여 집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회심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2년 동안 아들에게 와서 살았습니다.
그 후 가족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베누는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베누고팔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가진 신앙을 가지기 원합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당당히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번에 호주 코스타에 갔다가 서울 법대 교수이고 전 공정거래위원장이었던 권오승 장로를 만났습니다. 그는 40세에 예수를 믿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법전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소위 선진국의 법에서 도움을 받으려 했었지만 가장 귀한 지혜는 성경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한번은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한국 경제법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공산당 고위 간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질문을 하더랍니다.
“당신은 참 이상하다. 당신같은 사람이 왜 그만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기 돈을 들여서 이곳에 와서 이런 강의를 하는가?”
그 때 장로님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했습니다. 그 말에 통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중국에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안되지만 내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느냐? 계속 통역을 하라.” 고 하고는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이 시장 경제로 발전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온 것입니다.”
했더니 모두들 크게 감동받는 것을 보았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다르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 그렇군요.” 하더랍니다.
그 자리에 여자 관리가 반 이상이었는데 얼굴에 기쁨이 없어 보였답니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으니 “1년에 한번도 듣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권장로는 자신은 하루에 세 번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하니까 믿지 않더랍니다. 자신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변했다고, 예수 믿고 난 다음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간증하니 모두 크게 감동을 받았답니다. 이것이 전도요 선교가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특별 기도 기간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하지만 뜨겁게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합니다. 왜 뜨겁게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 안에서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었고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라고 가족과 이웃에게 큰 소리로 당당하게 고백해 보십시오. 매일 매일 기도가 뜨겁게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여러분이 믿음으로 고백한 그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왜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은 지금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선언해 놓고 나면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대신 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나는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로 산다.”고 당당히 고백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언하고 살면 정말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만약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내 생명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가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과 같은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물 위를 걸은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믿음을 도전했고 몸을 던졌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 밖에 물 위를 걸은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사신다고 선언할 때 그와 똑같은 심정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걸었고 다른 제자들은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도전도 없었고 물 위를 걷지도 못했습니다.
죠지뮬러 목사님.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아들을 먹여 살리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임이 증거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책을 출판하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 제목 밑에 저자 유기성목사 라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너무 지나치게 보든지 너무 교만하게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수준 높은 영성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누구나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하셨을 때, 혼자서 감격해 했지만 나가서 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복음을 힘써 가는 데마다 가르치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미숙하고 부족하였지만 받은 은혜대로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를 15년이 지났습니다. 그러하므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계속하여 가르치시고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하시고 구체적인 체험을 주셨고 엄청난 영향력을 일으키셨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삶에 시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패가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고백이 분명하게 되어야 예수로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길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소리 높혀서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사는 이 복음을 증거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음성 듣기 /행2:17-21/ 하용조목사
2015-05-27 15:39:29
성령집회 넷째날
구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6개월 전에 이 땅에 태어나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의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상통합니다. 세례 요한은 신약과 구약 사이에 서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예수님의 음성이 같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줄곧 제자들에게 하셨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성령체험을 위한 두 가지 비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느니라. 이것이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천국백성으로 살아야 할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팔복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처럼 살지 않기 때문에 애달프고 외롭고 목말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대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남을 대접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정말 예수를 잘 믿는 분들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도 주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부활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더 얘기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권능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기 전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중요한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주님이 마지막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을 제자들이 다 들었지만 순종한 사람은 1백2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여 무슨 일을 했을까요? 할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으면 기도하십시오. 떠나지 말고 기다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한 곳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을 체험하기 위한 중요한 두 가지 비밀을 발견합니다. 순종과 기도입니다. 순종은 순종할 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내가 내 문제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상관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다 가르쳐주십니다. 원망·불평하던 어느 날,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떠나라”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와의 싸움은 다릅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기도를 합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말씀이지만, 자기를 꺾는 비결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오만, 교만, 원망과 불평이 점점 녹기 시작합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다락방에 모여 말씀대로 순종했고 모여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도중에 성령의 음성이 한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을 보면 베드로가 나타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사건의 해석이고, 둘째는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가룟 유다가 자살한 사건 때문에 굉장히 마음이 뒤숭숭해졌습니다. 어떻게 해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유다는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안심을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죽은 유다의 자리를 채우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다 채우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문제점들을 다 지적하고 들추십니다. 이것을 제거한 후 하나님의 깨끗한 아름다운 복을 주십니다.
가룟 유다 사건이 지나가고 맛디아라는 사람이 새로 들어옵니다. 그런 후 오순절이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1백20명에게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좀 더 깊이 생각할 게 있습니다.
이전에도 성령님은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도 성령이 역사했고,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사로잡아 능력있게 역사하던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인의 몸을 통해 때가 차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계셨지만, 정식으로 공식으로 나사렛에 오신 예수님은 역사에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도 성령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공식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큰 차이입니다. 이 전까지 개인에게는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한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온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탄생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개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겠지만 지금 모든 분들에게 이런 성령이 이 임할 줄 믿습니다.
이제부터 오시는 성령님은 어떤 개인에게만, 특별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공동체에 교회적으로 역사합니다. 이제부터는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역사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님은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옵니다. 성령님은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님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면서 왔습니다. 바람! 성령의 바람, 하나님의 영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거기 앉아 있는 온 집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북한 땅에 성령의 바람이 급하고 강하게 불 줄 믿습니다.
불 같은 역사들이, 혀가 갈라지는 것 같은 그런 역사들이 각자에게 일어났습니다. 바람은 공동체에 오지만 불은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 불이 사람들 눈에 보였습니다.
하박국은 창자가 뒤집어졌다고 했습니다. 입술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은 거룩의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이?거듭나기 시작하고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육을 초월합니다. 성령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육은 육과 겹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은 육을 뚫고 들어갑니다. 내가 2천년 전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과 악수하고 포옹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내 몸 안으로 들어와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내 안에 거하십니다.
내 안에 계시면 내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은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추악한 인간이 놀랍게도 눈이 빛이 달라지고, 부드러운 말을 하고, 찬양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겸손해집니다. 할렐루야!
4절을 보면 저희가 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컵에 물이 차듯이 성령이 내 영 안에 가득 찬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않고 그분이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내 안에 있는 모든 이성이나 내 안에 있는 모든 심리적인 현상들이 전부 성령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이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도 모르게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방언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방언으로 찬양과 기도를 하기 바라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말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귀신과 하나님의 역사를 구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자기도 모르는 언어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언어, 주님의 찬양, 주님의 생각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주님의 생각, 마음을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우선순위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망에서 영생으로
성령이 충만하면 일반적인 언어가 특별한 언어로 바뀝니다. 방언입니다. 이 특별언어가 다시 선교언어로 바뀝니다. 이건 더욱 새롭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뛰쳐 나갑니다. 나가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께서 생각하게 해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각 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가득차기를 축원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얘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이게 선교언어입니다. 한번은 제가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외국인이 설교를 잘 들었다고 했습니다. 통역을 통해 들었냐고 그랬더니 그냥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연세대 교수 자매님이 중국에 일대일을 하러 갔는데, 한국 사람을 못 만나고 중국 사람을 만났습니다. 중국말을 못 하는 이분이 결국 일대일을 다 끝냈습니다.
동반자가 처소교회 지도자였는데 이 사람이 정말 알아들었는지 궁금해서 몰래 따라가봤답니다. 뒤에 앉아 들어 보니까 자기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가르치더랍니다.
이런 일들이 초대교회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교의 역사,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니까 베드로가 너무 놀라서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인 것을 확인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처럼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베드로가 정신 없이 물위로 뛰어들었습니다.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제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고 이성으로 돌아오는 순간에 자기가 믿는 바대로 물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손을 내밀어서 베드로를 구원해 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사건을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물 위를 걷겠습니까?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는 상처뿐인데, 어떻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주님께 사로잡히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물위에 뜰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에 붙잡히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선택도 하고 결단도 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 같은데 그 길을 그냥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교회’의 꿈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열한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모든 육체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부어지면 너희 자녀들은 예언을 하게 될 것이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 60세, 70세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꿈을 갖게 되길 축원합니다.
무덤에 들어갈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천국갈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어린이들은 예언하게 될 것이요, 당신의 젊은이들은 방황하지 않고 환상, 비전을 갖고 살게 될 것이고, 늙은이는 다시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부정과 부패와 혼돈과 절망과 상관없이 성령받은 사람들, 성령받은 교회들은 계속 부흥할 것이고 기적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고 축복을 계속 이어갈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성령충만입니다. 교회의 특징도 성령충만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시대, 인종, 언어, 문화, 지식, 남녀노소를 초월해서 역사합니다. 성령 안에서는 온 세계가 하나입니다. 온 민족이 하나입니다.
온 언어가 하나입니다. 온 문화가 하나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를, 열방을 덮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에 있던 그 교회나 2천 년이 지난 지금 교회나 똑같다고 믿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3년을 지냈을 때, 서울에서 서빙고에 온누리교회를 하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연예인 교회를 하다가 굉장히 지쳐서 특별히 집을 짓다가 지쳐서 ‘하나님, 나는 절대 집을 안 지어요.’라는 교만한 말을 했었습니다.
‘서울에는 좋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나는 지방에서 목회할 거에요.’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서울서 목회하게 됐고 내 손으로 집을 짓게 됐습니다. 1년을 고민 했습니다. ‘주님, 사랑의 교회, 충신교회, 소망교회가 있는데 교회를 또 지어야 합니까? 경제적으로 보면 손해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욕심은 났지만 해석이 되지 않아서 머뭇거렸습니다. ‘내가 사막에다가 교회를 지으라면 지을 텐데, 선교지에 교회를 하라면 할 텐데…’ 그때 주님이 제 마음에 주신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교회를 세워라. 초대교회에 있었던 그 교회, 사도행전적인 그 교회, 교파와 상관없이, 장소와 상관없이, 주님이 원하는 그런 교회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필요하다.” 그 말씀을 듣고 눈물이 나고 눈이 떠졌습니다.
그렇게 소수의 몇 사람과 함께 그 비전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온누리교회입니다. 그 생각 하나로 17년 동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 교회에 대한 꿈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목마릅니다. 우리 교회가 더 주님의 마음에 맞게, 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이 다 흩으실 것입니다. 선교를 하지 않으면 교회는 흩어지게 돼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2천년 전에 초대교회에 있었던 얘기를 기록한 것인데, 이것을 보면 이 모습이 그대로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 만남 속에, 설교 속에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목사가 다 됐을까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 목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 일을 합니까?
우리는 건강이 있는 사람이 아니요, 좋은 마음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교회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날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축제
사도행전을 보면 재미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때까지만 해도 안식일 문제로 싸웁니다.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들어오면 안식일 논쟁이 없어집니다.
얘기의 요점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안식일이 굉장히 중요한 논쟁이었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뒤로는 안식일을 가지고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성령 받은 사람이 모여서 성경공부하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처럼 지키는 게 주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은 축제입니다.
그래서 제일 어리석고 손해 보는 사람은 주일에 예배만 보고 가는 사람입니다. 주일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도행전처럼 사는 날입니다. 음식도 만들어 먹고, 심방하고, 병든 자를 찾아가고, 가난한 자를 돕고, 열심히 일하고, 전도하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천국의 그림자를 경험하는 게 주일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주일은 사실 피곤합니다. 밤 9시까지 예배를 드리면 초죽음이 됩니다. 하지만 토요일에 안식하고 주일은 성령축제를 하는 날입니다. 사랑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찬양하고 움직이고 부활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목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하고 월요일에 세상에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드디어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가 떠납니다. 선교사로 가지 않는 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다 떠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성도들이 언젠가는 다 떠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대로 다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온누리교회 성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임하길 축원합니다. 성령의 생각을 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교회가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성령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일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이것을 듣는 게 성령의 음성듣기입니다. 이상한 것 기대하지 마십시오. 제가 많이 아팠기 때문에 아픈 사람들에 대한 눈물이 있습니다.
돈이나 있으면 괜찮은데, 돈도 없고 몸은 아픈 분들 생각하면 눈물납니다. 안수해서 다 고쳐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음성듣기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의 음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성령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리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설교하시다(1) /행2:14-36/ 하용조 목사
2015-05-25 09:12:21
오늘말씀 사도행전 2장14절부터 36절까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가지고 하목사님 나오셔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선포하시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순절날 사모하며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홀연히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그들은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움직임은 성령님의 임하심은 그들의 귀에 들렸고 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무리들 사모하고 있는 그 무리들에게 집단적으로 성령님은 임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령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져주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과 내가 만났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기 오셨을 뿐만 아니라 불처럼 임하시고 바람처럼 오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거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접촉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운행하셨고 지배하셨고 통치하셨습니다. 그들의 인격 속에 내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충만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성령 충만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들의 지정의 모든 인격 속에 그들의 삶속에 그들의 육체 속에 그들의 생각 속에 그들의 정신 속에 이 성령님은 충만하게 채워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을때에 그들은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15개 지방의 다른 나라들이 다 거기에 모였습니다.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보면 그 당시의 세계 모든 백성을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랏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을 했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고 하는 것은 바벨탑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언어가 흩어지고 인간이 흩어진 바벨탑 사건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모든 언어로 성령의 말씀이 전해진 것은 이 성령의 역사가 전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 모였던 사람들 그때 이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혼돈에 빠졌습니다. 소동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다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기대 이상 상상이상 상식을 초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부인할 수는 없지마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저들이 새술에 취한 것이라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였습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14절과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
이렇게 해서 36절까지 베드로는 거침없이 그들에게 설교를 하게된 것입니다. 설교는 무엇입니까? 설교란? 사람이 말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전달해 주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인간의 어떤 철학이나 어떤 사상을 전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말을 하게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다른 언어로 성령은 말을 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그때 그 상황 속에서 메시지 설교를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설교라고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설교하면 잔소리하는 것 또 설교하네 그럽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인간의 잔소리로 듣습니다. 교훈으로 듣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면증 걸린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는 조는 것이다. 왜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느냐 25분이 좋은 설교다. 30분 이상 가지 말아라. 사람들은 이렇게 설교를 하나의 교훈으로 설교조라고 그럽니다. 하나의 잔소리로 하나의 그것은 인간의 이야기로 형식으로 얼마나 많은 예배와 설교가 형식, 의식, 제도가 되고 말았습니까? 이것은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 하나님의 음성이 선포되었다면 메시지가 선포되었다면 우리는 타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타락을 합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이 타락을 합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사도행전 사건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된 설교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설교의 내용은 정치나 경제나 철학이나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설교가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설교가 정치 경제 철학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그런 이야기를 할만한 중요한 환경임에 분명합니다. 정치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결사대를 만들어서 조국을 찾는 그런 운동도 있는 그런 정치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선 순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령님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메시지 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첫 번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직장에 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결혼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밥먹는 일입니까? 자녀교육하는 일입니까?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입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큼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프라이어비티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이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우선 순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문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위기를 건져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우리를 보조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그분이 우리의 왕이요. 하나님이요. 주권자로 그분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우선 순위는 성령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정말 중요한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우선 순위는 무엇과 상관되어 있습니까? 자기의 이기적인 요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중요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사건이 여러분의 생애에 중요한 사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이 여러분에게 중요한 사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최우선 순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는 우선 순위가 아닙니다. 제일 뒤로 시간 남으면 하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시간 남으면 하는 것이고 전도라는 것도 시간 남으면 하는 것이고 봉사도 시간 남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뒤켠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일어서서 그가 첫 번째 한 설교는 자기를 위해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말씀에 의해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한 것이었고 설교의 주제는 이기적인 자기의 사사로운 주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베드로가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예 여기 베드로가 혼자 서서 설교했습니까? 아닙니다. 열한 사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의 권위와 함께 설교는 개인적인 것보다는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신해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한사도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같은 신앙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베드로가 대표해서 큰소리로 외쳤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설교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의 타락은 한 개인에 의존한다는 것이고 설교는 진정한 성령의 음성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 것이요 120여명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한 개인에게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120명에게 성령이 공동체적으로 임했고 베드로가 설교할 때 열한사도와 함께 서서 그가 대표해서 말을 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삼시에 술취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삼시라는 것은 오전 9시입니다.
오전 9시는 모든 사람이 출근하는 때입니다. 여러분 언제 기운이 다 빠집니까 퇴근할 때 기운이 빠집니다. 그래서 퇴근할 때 술한잔 합니다. 다 술취하는 것은 밤에 취하고 저녁에 취하는 것이지 아침 9시부터 술취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성령님이 이 시간에 임했다고 하는 사실에 굉장히 감동을 합니다. 정신이 제일 말짱할 때 비몽사몽간에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늘 정신이 맑을 때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오순절날 주일날 오순절은 언제나 주일이었습니다. 주일날 오전 9시 성령이 임했습니다.
제가 그래서 1부 예배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부 예배 때가 성령이 임할 확률이 제일 많다고, 베드로가 성령에 대해서 이 성령의 사건은 술취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 성령의 사건은 우연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 성령의 사건은 인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사건은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몇 사람을 이용하여 교회를 만드셨을 뿐입니다. 이렇게 모인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일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된 것은 누구 때문에 믿게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은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교회가 좋아서 프로그램이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성령의 사건은 내가 주장하는 사건도 내가 인위적으로 주장하는 사건도 아니라 그것은 구약의 요엘서에서 주장했던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사건이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곧 선지자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선지자 요엘이 말씀하신 것인데 17절부터 21절까지 요엘서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목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요엘서 2장 18절과 32절에 보면은 비슷한 말씀이 있는데 제가 구약의 말씀을 읽을 테니까 여러분이 신약의 말씀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용어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요엘서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엘서에서 말한 성령의 사건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요엘서와 사도행전 두곳을 종합해 보면서 이 말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신약에 어떻게 응답이 되었는가를 우리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17절 시작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이 요엘서에 의하면 성령님은 말세에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내신을 요엘서는 신이라고 말했어요.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했습니다. 요엘서에서는 그후 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후에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바로 그 후에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약속하신 메시아가 온 후에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자 메시아가 이 땅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가 30년을 사시고 3년동안 공생애를 시작을 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후에 메시야가 그의 사역을 완성한 후에 성령이 임할 것인데 사도행전적 표현을 빌면 그것을 말세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말세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올 미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말세였던 것입니다.
즉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4절에 의하면 때가 차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바로 이 말세는 예수와 함께 시작이 되어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 말세의 중심이 이루어지고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다 마치신 후에 말세 때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이 내영을 너희들에게 부어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오순절날 오전에 그것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9시경에 바로 그 시간 경에 성령님이 오순절날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인 다락방에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셔서 역사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7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에 하나님이 내가 내 영을 어디에 부어준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육체에게 부어 준다고 말했습니다. 요엘서에서는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준다고 말했습니다. 만민은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에 굉장히 놀라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누구에게 임하십니까?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임하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구약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고 선택된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세 때에 그후에 주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오순절이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이 내신이 이 내영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다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병든자나 건강한 자나 실패한 자나 감옥에 있는 자나 살인자나 간음한 자나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배운 자나 못배운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여러분 이 성령은 이 구원은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나라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원은 어떤 지역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다락방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이것이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끝까지 이 성령의 역사는 지금가지 진행되어 왔고 이 성령의 역사는 한국 땅에 이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서 오늘날 엄청난 이 지상에서 가장 기적이라고 말하는 한국에 이 복음화의 역사가 이로워진 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의 역사들이 성령의 역사들이 이북에까지 갈 것을 믿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들이 철의 장막을 들어갈 뿐만 아니라. 모슬렘 세계를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 안가는 곳이 없이 이 성령의 역사는 부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가서 이 성령의 역사를 전해줄것입니까? 누가 가서 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전할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을 통하여 이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들을 통하여 이제 우리를 하나님은 흩어지게 하셔서 이 천명 삼천 명이 다 선교사로 가게 하셔서 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세계 전한국에 다 뿌려지게 하여 주셔서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성령의 역사는 전파될 것입니다.
세 번째 성령이 말세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때에 주님이 사역을 마치시고 난 그 후에 일어나는데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이 성령이 다 부어지게 되어 있는데 성령이 부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너희의 자녀들은 뭐한다고 그랬습니까? 할렐루야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예언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누가 예언을 했습니까? 예언자들이 예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대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이런 사람들이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두 소선지가 있습니다. 아모스, 다니엘, 호세아 이런 많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예언은 미래의 막연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종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미래의 예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에게는 언제나 역사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약의 예언은 누가 했습니까? 특별한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어떤 사람들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언을 했지만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언을 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예언하게 될 것이며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 받고 구원의 확신과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의 미래가 알아집니다. 자기의 삶의 미래에 대해서 굉장히 친숙해 집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게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기도하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예언적인 일들이 성령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서서히 침투해 가듯이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이 여러분들에게 친숙해 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떤 기도를 해야 하며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알아지기를 저는 기도 드립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성령 받지 아니한 사람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마는 그러나 주님이 너무나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내가 죽을 때 불안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에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내일 세계가 깨지고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왜 미래가 언제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또 무슨 일이 생깁니까?
거기 성경에 보면은 17절에 보면은 너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이 꿈을 꾸리라고 그랬는데 요엘서에서는 늙은이들이 꿈을 꾸리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성령이 임하면 물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능력도 나타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많은 기적과 이적과 기사와 역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들이 일어날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오순절의 예언을 통하여 베드로가 설교하는 말씀의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하면 젊은이들이 예언을 할 것이요. 두 번째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고 그랬습니다.
이 늙은이라는 말을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늙은이 이렇게 할 수 없고 그냥 어른들 이렇게 여기 보면 젊은이의 상대 개념이니까 그저 어른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이든 나이 많으신 분들 인생을 살만큼 산 사람들 늙은 사람이지요. 여러분 늙은 사람들이란 무엇입니까?
은퇴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은퇴한 사람들 본일 있으십니까? 나는 은퇴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은퇴한 사람 직장에서 은퇴한 사람 일하다 은퇴한 사람 겉으로는 웃지만 은퇴한 첫날밤은 그렇게 웁니다. 외로워하고 고독해 하고 이제 자기는 은퇴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퇴하는 사람들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언젠가는 양로원에 가야한다는 불안감이 잇습니다. 이제는 내가 내 발로 걸어다니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년들은 절대로 나이 많으신 분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늙어보지 않아서 절대 모릅니다. 늙은이들은 외롭습니다. 자식이 있고 친척이 있고 돈이 있어도 그 외로움은 숨길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어야 된다는 죽음에 대한 무서운 두려움의 그림자를 안고 삽니다. 그것은 늙은이들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여러분 성령이 임하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기대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특징입니다. 그 교회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교회 늙은이들이 어른들이 어떤 꿈을 갖느냐로 결정합니다.
정말 이 교회에 성령이 임했다며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늙은이들이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양로원 갈 준비를 한 사람들이 무덤을 팔 준비를 한 사람들이 은퇴한 사람들이 이제 새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시작을 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시작은 믿음의 여정은 나이 75세 였습니다. 여러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다는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자기의 세크립트를 버리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자기의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려고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신앙적 행위나 모든 사람의 말속에는 언제나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자기 발전이라든지 자기 보호라든지 자기의 안전이 기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흔들면 사람들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120살 때에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모세는 죽었을 때에 눈이 쇠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온누리교회 어르신들이 늙은이들이 꿈을 갖고 용기를 갖고 비전을 가지고 눈이 쇠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모험을 다시 시작하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놀라운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갈렙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에 그 후계권이 여호수아에게 결정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제일 갈등할 사람은 갈렙일것입니다. 갈렙이 모세를 섬기는 것은 쉬웠을 것입니다. 나이 차이도 있고 경륜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르기 때문에 그러나 같이 시작을 했고 같은 나이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섬기는 것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40년동안 여호수아를 정말 잘 섬겼습니다. 그가 나이 85세때에 여호수아 앞에 나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14장 10절에 보면은 오늘날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이라. 얼마나 멋있는 노인입니까?
40대의 정열이나 내가 지금 80이 되었지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지금 힘이 똑같다. 나는 지금도 전쟁할 수 있고 나는 뭐든지 맡기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사람이 자기에게 무엇을 맡겨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시키는 데로 했습니다. 이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한일을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이 땅을 나에게 주십시오.
여러분 얼마나 멋있어요. 의욕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나이 85세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교회 온누리교회 어르신들의 모임이 살아 움직이시기를 바랍니다. 친교회 이거 하지 마시고 선교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선교 여행을 떠나십시오. 여러분의 경험과 여러분의 지혜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이제 후배들에게 다 나누어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움직여서 여러분들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인대학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분들이 꿈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늙은이들이 꿈을 꿀 것이요. 그 다음에 17절에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젊은이들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환상을 보리라. 그런데 요즘은 젊은이들이 늙은이만큼 꿈이 없어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구름떼 처럼 몰려다니는 세상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은 동태눈깔 같아요.
비전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조금더 이익을 챙겨 먹을까? 어떻게 하면 좀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남보다 앞서 갈까? 그게 인생의 전부예요. 사기 치고 술먹고 담배피고 타락하고 방황하고 요즘은 오죽하면 그런 것을 오랜지족이라고 하겠어요.
젊은이들의 하나의 모습입니다.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젊은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환상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손해보고 없고 무지하다 할지라도 꿈을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젊은이가 아닙니까?
성령이 임하면 젊은이들이 환상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기껏해야 시집 장가갈까 하는 환상들 기껏해야 좋은 직장에 가서 어떻게 안주하고 살아볼까 하는 환상들 박사한번 해볼려는 환상들 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꿈이 제한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내 젊음을 한 번 모험해 보고 투자해 보고 영원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새 나라와 새 하늘을 위하여 내 인생을 한 번 모험해 보는 이런 도전과 모험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노인네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환상을 가지고 세계를 품게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학 생활이나 여러분의 젊은 생활에 2년 정도를 떼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볼 용기가 없습니까?
그렇게 대학을 일찍 졸업해서 뭐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남을 앞질러서 월반해서 천재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가서 그렇게 열심히 성공하고 성공을 한 다음 그 다음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젊음을 한 번 멋지게 하나님을 위하여 옛날 미국에는 평화 봉사단이 있어서 예수님을 안 믿어도 그런 헌신과 봉사를 했습니다. 전세계에 나가서 나의 젊음을 한 번 써보는 것입니다.
대학을 한 7년 다니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꿈이 있느냐? 환상을 가지고 있느냐? 바로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는 바로 노인네들에게 꿈이 있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18절을 읽어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예 여기에 또 다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 영이 그때 임하게 될 터인데 모든 인간에게 임할 뿐만 아니라 여기는 종으로 나옵니다. 종도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도 예언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얼마나 이 말씀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 좋으신 성령님 하나님 왜 우리는 이것을 제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누리 교회라는 것으로 제한해서도 안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어찌 온누리 안으로만 제한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터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라 세계를 향하여 나가라.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교통사고 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내 병낫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내가 부자 된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더 엄청난 것입니다. 성령은 남녀노소 종들까지 다 임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무엇이 임한다고 그랬습니까? 할렐루야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난 옛날에 어떤 부흥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번 준비하다가 생각이 났어요. 개가 아니면 다 방언 받는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하다가 요즘에 이 말씀을 보니까 그게 맞아요. 여러분 오늘 성령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믿지 않거나 교만하거나 악하지 않으면 다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여러분이 정말 사모하고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사모하면 예외 없이 성격과 상관없이 성령은 임하시는 것입니다. 왜 안 받습니까? 왜 주저하십니까? 지금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임하도록 사모하십시오.
왜 누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누구는 못 듣습니까? 왜 누구는 방언하고 누구는 못합니까? 왜 누구는 성령님을 체험하고 누구는 안해야 합니까? 다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령님은 모든 육체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종들에게까지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모하십시오. 20절을 보십시오.
19절부터 보겠습니다. “또 내가 위로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피가 되리라”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는 기적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이 없으면 무슨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나 합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살도록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인간의 이성에 제한될 수 있는 분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상식과 경험에 제한될 수 있는 분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인간의 지식에 제한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만약 하나님이라면 그것보다 뛰어난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늘로 기적과 이사와 땅의 기적과 이사를 베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불과 피와 연기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재앙때 피가 있었습니다. 제사를 할 때 피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불로 임하십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주실 때 옹기점에 불같이 나타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그곳에는 연기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20절을 보시며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 세상에는 이런 많은 변화와 역사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오늘 이 역사 속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기독교가 너무나 점잖고 침묵하고 제도화되는 것을 슬퍼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제도와 건물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건물이 없으면 어찌 예배를 드렸겠습니까? 제도가 없으면 어찌 우리가 만났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로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건물도 있고 은도 있고 금도 있지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힘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집단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오로지 오락프로그램과 게임 프로그램이나 서로 인간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겨 하는 것들로만 교회가 가득차 있다면 그것이 어찌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세례받는자가 나타나며 귀신이 나가며 병이 나으며 이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우리가 이 시간에 어린아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모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이여 오늘 이 설교를 들은 자들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 내신을 만민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심지어 종들에게까지 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오늘 여기 머리 숙인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님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졸다가 설교 듣는 사람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사건에 오늘 저자들이 감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 오시옵소서
. 말씀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시옵소서 회개할 바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오주여 우리를 부숴주시옵소서 깨 주시옵소서우리의 죄악을 노출시켜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성령께서 설교하시다(2) /행2:14-36/ 하용조 목사
2015-05-25 09:09:49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 사도행전 2장 14절부터 36절까지 말씀입니다.
교독하신 말씀을 가지고 목사님께서 성령께서 설교하시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해 주시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순절날 사모하고 기다리던 무리들에게 임하셨을 때 그들은 엄청난 영적 경험을 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을 보게 되었고 홀연히 급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고 성령이 그 집에 가득치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성령의 만남을 그들은 실재로 경험을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을 때 그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천하 각국으로 부터 온 사람들이 유대에 예루살렘에 집결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은 성령 받은 이들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 받은 이 사람들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다 놀라 기이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현상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는 조롱을 했고 어떤 이들은 새술에 취한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짜 성령이 오면 소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성령님이 오시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논쟁이 생기고 충격을 받고 갈등을 하고 몸부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는 평생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정말 예배가 생기기 시작하면 회개가 있는 성령이 계시는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참된 예배가 내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을 하면 소동이 일어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소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령님이 오시면 정말 예배가 이루어지면 우리는 충격을 받고 소동을 하게 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여서 바로 그 성령 받은 사람을 목격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목격을 했을 때에 사람들은 일대 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일어났습니다.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그는 큰소리로 외쳐서 말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란 사람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강연이 아닙니다. 설교는 세미나가 아닙니다. 설교는 깊은 지식의 축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문 발표도 아닙니다. 설교는 성경공부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공부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것이며 설교는 당신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회개를 명하셨습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설교하십니다.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첫 번째 설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성령의 역사는 지금 너희들이 목격하고 있는 이 성령의 역사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작해서 만든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 인간이 조작해서 만듭니다.
정부의 사건도 국가의 사건도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흥회도 종교집회도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의 사건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인간이 조작해서 계산해서 만든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성령의 사건은 인위적인 사건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연한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 사건은 구약 요엘서에서 예언한 사건의 응답이 바로 오순절 성령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의 요지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 베드로는 계속해서 다른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놀라운 사실은 성령의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요 연속된 사건이라는 것을 지금 여기서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성령사건 오순절 사건을 이해 할 때 이 오순절에 나타난 음성만을 가지고 이야기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오순절의 사건은 오순절의 체험은 오순절의 능력은 성령을 따라 말하게 하는 이 엄청난 사건은 그리스도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사건은 성령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건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요 연속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은 어디서 근거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요 인위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구약 요엘서에서 예언한 사건이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건이었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의 사건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22절에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실수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온누리교회만 성령운동을 합니까? 아닙니다. 과거에도 많은 교회가 해왔고 그것 때문에 교회는 변화되었고 갱신되었고 부흥되었고 세계선교역사는 일어났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이 성령운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치명적 실수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성령의 현상만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잘못된 성령의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운동은 정말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성령이 말해지는 것 성령이 임재하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여지는 것입니다.
성령 예수의 사건이 없이 성령 사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두 번째 설교의 요지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소개했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 가지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작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첫 번째는 그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위대한 생애는 큰 권능으로 이루어진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큰 모든 사역은 기사와 표적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갈릴리에서 많은 문둥병을 고쳐 주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셨고, 봉사를 눈뜨게 하여 주셨습니다. 각색 병든자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 주셨으며, 성난 바다를 꾸짖었으며,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이 엄청난 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그는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애 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가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가지고 권능을 가지고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그분은 그의 생애를 살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권능과 표적과 기사와 이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여주는 단어들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3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23절 시작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
이 23절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내 뜻대로 이 십자가를 피할 길은 없습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것은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근데 여기 재미있는 표현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하나님에게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죽인바 된 것이 십자가 였다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게 한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인들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죄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이나 그 하수인들을 통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했지만 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인 것은 너희들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를 못박혀 죽게 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다 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성령의 말씀입니까? 여러분 십자가가 다른 사람이 죽였을 때에는 별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죽였다고 했을 때는 이것은 보통일 이 아닙니다. 이번의 사정의 일이 다른 사람의 일일 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장본인일 때에는 밤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유태인이나 로마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이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4절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계속 머물도록 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사망의 고통을 풀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망의 고통의 빗장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를 사망의 고통에 빗장을 걸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빗장을 예수에게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일 후에 그것을 사망의 고통의 빗장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망의 고통의 빗장을 풀어 예수를 다시 살리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 성경 구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사망에 메여 있을 수 없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에 얽매여 있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는 부활이십니다.
아 어떤 죽음도 어떤 사망의 고통도 예수를 묶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망의 고통을 풀으시고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모든 악의 세력을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그는 무덤에 갇힌 분이 아니라 빛으로 살아 계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에 얽매일 수 없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사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마귀에게 얽매일 수가 없습니다. 질병에 얽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얽매임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사망에 묶어둘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를 사망에 묶어둘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사건은 인위적이고 조작된 사건이 아니며 우연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건이었다. 요엘서의 예언의 응답이었다 그랬습니다. 두 번째 이 성령의 사건의 중심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성령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삶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인 것이다. 부활 없는 성령이 없고 십자가 없는 성령이 없고 그리스도의 삶이 없는 성령은 없는 것이다. 성령의 핵심과 성령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거예요
지금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령을 말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 성령만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세례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삶이 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세례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보혈의 능력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세례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이 성령체험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베드로는 이 부활의 부분은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부분이 부활의 사건이 죽음을 깨뜨리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예수를 부활시켜서 승리하게 하셔서 통치자로 왕으로 구세주로 승리자로 되었던 이 사건이야말로 바로 성령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오순절은 무엇인가? 부활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예수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늘 그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과 나에게 나타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 나에게도 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죽은 자는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내가 이것을 믿느냐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의 사건이 되는 것이 오순절 사건입니다. 이 성령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기서 놀랍고 절묘하게 구약의 다윗의 부활 신앙을 인용을 합니다. 나는 이 설교 본문을 읽다가 제가 늘 설교하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설교자로서 감동과 충격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이 짧은 메시지 속에 어떻게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을 다 이야기하시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시고 오순절을 이야기하고 구약의 사건을 두 번씩이나 인용을 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성령님이 하신 메시지가 아니면 인간은 이런 메시지를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자 이제 다윗의 메시지를 다윗의 부활신앙을 바로 예수의 부활과 연결시키기 시작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25절부터 28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시편 16편 8절에서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구약 시편을 읽을 테니까 여러분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시면 몇 가지 차이점이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비교하십시오.
다윗은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잘 압니다. 그러나 다윗이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굉장히 놀랍고 새로운 일입니다. 다윗이 이 부활신앙을 간증합니다.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언을 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부활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고 이 예수의 부활이 기쁨과 감격과 축복과 기적이 바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부분을 다윗의 이 부분을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작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다윗의 부활신앙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자기 앞에 주님이 항상 계시다고 말합니다. 내 앞에 계신 주를 내가 뵈었으며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내가 모시었으며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내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있었으며 그분은 공기처럼 내 앞에서 한 번도 떠나보신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그분은 내 우편에 계시며 내 오른편에 그분은 늘 계시며 그분은 졸지 아니하시며 주무시지 아니하시며 계시다가 안 계시다가 사라지는 분이 아니시며 영원하신 분이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나의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살아 계신 그분이시며 여러분 그분이 내 앞에 항상 계시고 그분이 내 오른편에 늘 계시기 때문에 다윗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뭐하지 아니하리로다.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 세상이 얼마나 요동합니까? 성난 바다와 같지 아니하지 않습니까?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언제 교통사고로 죽을지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언제 망할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요동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면 그분이 내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결코 내 심령이 요동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부활신앙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다윗은 세 가지 간증을 했습니다. 26절입니다. 시작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첫째는 그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어찌 세상에는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눈물날일도 있고 고통스런 일도 있고 오해도 있고 여러 가지 실수도 있고 영광스런 날도 있고 수치스런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건강할 때도 있고 병들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감옥에 있든 감옥밖에 있든 내가 모든 일이 잘됐든 못됐든 간에 내 마음은 기쁨에 충만하도다.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외쳤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금 기쁨에 충만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도 이 고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기쁘도다. 나는 기쁘다. 지금 상황은 좋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기쁘다. 감사하다. 정말 눈물이 날만큼 감사하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두 번째 보면은 내 입술도 즐거워 하도다. 그랬습니다. 내 입술도 즐거워 하도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는 영광이 즐거워 하도다 그랬습니다. 입술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입술에 찬송이 있습니다. 입술에 감사가 있습니다. 입술에 기도가 있습니다.
나의 입술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입술이 저주로 가득찬 사람도 있어요. 밤낮 불평을 말하고 비판하고 욕을 하고 그 입술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셋째 무엇이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육체가 희망이 있다고 어찌 육체가 희망이 있겠습니까? 썩어질 육체 그러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이 아니하리라.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영광스럽게 우리는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시작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러분 인간의 가장 깊고 본질적인 즐거움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인간의 행복이라든지 즐거움의 본질은 내 눈을 만족시켜주는 것이거나, 내 귀를 만족시켜주는 것이거나. 내 입을 만족시켜주는 것이거나, 내 피부를 만족시켜주는 것이거나, 내 몸뚱아리를 만족시켜 주는 데에 인간의 진정한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에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가지면은 좋기는 하지마는 내 영혼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은 불안한 것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고독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외로워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불안해하느냐 여러분 무엇이 없어서 불안해합니까?
인간의 영혼의 깊은 불안에는 하나님이 없는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영원에 대한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췄다 할지라도 그 불안을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지식이 여러분을 만족시킵니까? 사람의 박수소리와 명예가 여러분을 만족시켜 줍니까?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인간의 평화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내가 지옥에 안 간다는 사실 내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고 춤을 추며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사람을 미워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과 갈등을 가져본 일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너무 속상해서 그런데 정말 구원받은 사람 자다가 벌떡 또 일어납니다. 잠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 정말 내가 구원받았단 말입니까? 내가 정말 당신의 생명 책에 기록되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까? 아 하나님 정말입니까? 아멘
그리고 자요 또 너무 좋아서 그게 진정한 행복입니다. 내가 음부에 버림받지 않았다. 내가 지옥에 안 간다. 이것이 참된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서 썩임을 당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8절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부활의 신앙을 노래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28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
할렐루야 이것 꼭 신약 요한 복음을 읽는 것 같지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여 주셨음이니라. 주의 앞에서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을 가졌던 주님은 항상 내 앞에 계심이여. 그가 늘 나의 오른편에 계시며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내가 음부에서 건짐을 받았고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입술이 찬양하며 내 육체가 소망을 갖습니다.
생명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니 내가 기쁨에 충만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지금 다윗이 말한 부활의 기쁨을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령의 임재, 충만, 오순절이라는 것입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를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
다윗은 분명히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그 묘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윗의 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어서 묘에 갇혀있지마는 다윗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문의 씨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가문에서 나타나게 될 사람은 음부에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육신이 썩지 않게 되는데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
예 거기서 다윗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미리 보는 고로 여러분 그렇게 많은 과거 속에서 있던 그 다윗이 믿음의 눈으로 영안으로 그리스도 메시야 다윗의 씨에서 나타날 메시야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은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듯 얼마나 놀라웁니까?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대 보았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으로 영안으로 성령 받은 그 마음은 주님께서 구름가운데 다시 재림하실 것을 믿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러 오시는 심판주로 오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믿음이 있으면 과거가 해석이 됩니다. 현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미래를 예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는 보았습니다. 부활을 보았습니다. 32절입니다. 시작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여러분 이 설교가 얼마나 절묘합니까? 참 어찌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이건 사람이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자 다윗이 미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미리 보았던 그 그리스도를 베드로가 지금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이 그리스도를 약속대로 다시 살려주셨는데 내가 주님이라고 그랬습니다. 다윗과 베드로가 지금 만나는 거예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다윗이 예언한 사건을 지금 베드로가 친히 경험하고 목격한 사건이요. 이 사건은 바로 여러분이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다윗이 말했던 그 부활이 지금 이루어졌다. 나는 이 일의 목격자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실망하고 좌절이 되어서 모두다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고 그리스도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믿음의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덤에 달려가서 들어가 보니까 돌문이 열렸고 무덤은 비어있고 세마포는 곱게 개켜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후에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열한 사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숨을 쉬면서 평안이 그대들에게 있을 지어다. 숨을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했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두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엠마오의 두 청년에게도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고기 잡는 새벽에 예수님은 해변가에 나타나셔서 고기를 구워 그들을 먹였던 것입니다. 일시에 오백여 형제들에게도 보인 일이 있었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님은 지상 명령을 주시면서 가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것은 바로 다윗이 미리 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그 다윗이 보았던 부활의 감격과 기쁨과 승리와 그 능력이 지금 사라져 있어요 없어져 있어요.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보는 순간에 아주 몰라요 언제 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까?
오순절, 오순절을 통하여 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들이 오순절의 성령을 다 체험하셔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이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재현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시작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지금 베드로의 설교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중요한 구절이 33절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사망의 고통을 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에 메이지 않게 하시고 그를 다시 부활시켜서 승리의 주님으로 부활의 주님으로 그가 인류의 메시아로 왕으로 통치자로 다시 오시는 재림주로서 높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국이나 미국의 이 복음주의 교회를 가보면 십자가를 걸어놓지 않고 HE IS RISEN LORD 이렇게 써놓았어요. 그는 부활하셨다고 써놓았어요. 그는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를 높이 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아십니까? 그가 약속하신 무엇을 성령을 누구에게 받아서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보고 그날 성령이 보이게 나타났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 뭐라고 그랬지요. 듣고 성령의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을 그들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33절에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오시고 성령님이 나오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성령사건입니다. 이것이 오순절입니다. 부활의 능력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성령부활주일절에 바로 이 생기에 대해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어떻게 뼉다귀들을 변화 시켜서 군대를 만드십니까 이게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령의 역사들이 오늘 여러분과 내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저기 있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맘에서 부활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영혼에서 부활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 부활의 기쁨 부활의 승리 부활의 축복은 성령의 기초와 모체가 됩니다. 성령 받으면 오늘 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편에서 설명을 했는데 34절과 35절입니다. 한 번 읽겠습니다. 시작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예 여기서 첫 번째 주는 하나님이시고, 두 번째 주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편에 앉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36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어떤 결론입니까? 시작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아멘 베드로의 설교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사건은 인위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약속의 사건이었다. 그 성령의 사건의 주인공은 핵심은 성령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과 승리와 축복이 바로 성령의 임재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은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정녕 알지니 너희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은 그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설교 끝이예요. 이것이 설교끝.
그런데 이 말씀이 불덩어리가 되어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순간 가슴이 찔리고 회개가 일어나고 통회가 일어나고 그날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맞습니다. 우리가 죽였던 그분이 우리의 주님 이셨습니다. 내가 배신했던 그 사람이 나의 주님이었습니다. 내가 못살게 했던 그분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는 얼마나 통회하고 울게 될까요.
내가 그렇게 못살게 했고 죽였고 미워했고 시기했고 질투했고 그를 괴롭히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분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신약 사도들의 예수님의 신앙고백을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 로마 병정이 못박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나의 신앙의 교만으로 나의 불 신앙으로 나의 못된 것으로 지금까지 예수를 못박아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상처를 주고 괴롭힌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괴롭히고 죽이고 미워하고 무시했고 알아주지 않았고 자기가 징벌을 받아서 저렇게 매맞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영광스러운 메시야 크리스토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그 동안 우리는 성령님을 사모해 왔습니다. 소리쳐서 기도도 해보았고 몸부림도 쳤고 많은 것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성령 못 받는 것 아닙니다. 교만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강퍅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회개합시다. 겸허합시다. 성령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능력이 내게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관념이나 신앙적 지식이 아니라 성경적 지식이 아니라 성령을 지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인격의 대상으로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이여 이제는 내게 능력이 필요합니다.
능력으로 오시옵소서. 이제는 내 몸에 오시옵소서. 나의 삶의 부활의 주인으로 오시옵소서. 이런 축복이 이런 사모함이 이런 간절함이 여러분 개인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부모를 기억하십니까? 제자들이 못쫓아 주었습니다. 예수에게 왔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예수님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그 아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가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을 했어요. 그 부모의 신앙 속에 절대로 믿는 믿음이 없고 할 수 있거든 주님이 해보실 수 있으면 한 번 고쳐주십시오라는 연약한 의심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할수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고 너 믿음부터 고쳐라. 그때 이 부모가 주여 내가 믿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에게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때 그 아이가 귀신이 나갑니다.
여러분 문제는 성령님이 오시기 싫어서도 아니고 성령님이 우리를 미워해서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부림이 없습니다. 생명을 거는 그런 애타는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그런 애타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것을 이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죽게된다. 죽어버리겠다. 뭐 죽어버리면 안되겠지만. 그런 그 간절한 마음이 지금 밥먹는게 문제가 아니다. 직장가는게 문제가 아니다. 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에 대한 갈증 성령님에 대한 목마름 주님 나는 지금까지 너무 얕은 물에서만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줄만 알고살아왔습니다. 몇십 년을 나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령의 깊은 바다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깊은 물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깊은 지식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런 간절한 마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거의다 끝나갈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다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도 성령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분이 있었습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 너무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있었는데 성령이 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스톱을 할 수는 없지마는 성령이 강권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령이 움직이는 것을 그가 느꼈습니다. 울면서 회개하며 운전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너무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기 때문에 그는 한 곁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공부를 하다가 어쩐지 어젯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날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많은 기회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여러분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능력을 여러분에게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기쁨을 주기를 원합니다. 입술의 찬양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육체의 소망을 갖게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내가 주님을 멀리서만 뵈었으나 이제는 만나게 하옵소서 이제는 멀리 듣기만 했지만 보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없이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여 우리가 벌려논 이 많은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령이 거두워주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동행하지 아니한다면 인간이 만들어논 이 바벨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 성도들에게 오시옵소서 이 교회에 오시옵소서 불로 오시옵소서 바람처럼 오시옵소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만나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 설교의 열매 /행2:37-42/ 하용조 목사
2015-05-25 03:19:26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오늘 말씀을 가지고 목사님께서 베드로 설교의 열매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전해 주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잊지 못하는 그 당시 예루살렘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과 유대인들 조롱하는 그 무리들을 대항하여 담대히 일어나서 세 가지 메시지를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그것이 지난주까지 저희들이 공부한 내용입니다.
그 세 가지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순절날 임한 성령의 사건은 여러분들이 조롱하듯이 그것은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아침부터 술취한 사람들이 소리지르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또 인위적인 조작된 어떤 사건도 아니다.
오순절날 임한 성령의 강림 사건은 친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건이요. 약속하신 사건이요. 더구나 구약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한 사건이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이 순간에 임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두 번째, 베드로의 메시지는 그러면 이처럼 오늘 임한 오순절의 성령의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 성령의 사건의 내용이 무엇인가?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단순한 외적인 현상이나 기적이나 방언이나 신비한 사건을 일으켜 성령사건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임한 오순절날 임한 하나님의 약속하시고 예비하시고 구약에서 예언한 이 사건은 그리스도 사건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성령 사건이란 진정한 성령 사건이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오순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는 큰 권능과 기사와 생애의 표적을 살았던 그런 삶을 살았던 분이었다. 초자연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대로 미리 정하신 뜻에 따라 내어준바 되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분이었다.
세 번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갇혔지마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놓으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부활하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큰 권능과 기적과 표적으로 우리의 구원의 삶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성령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가 이 부활의 모든 목격자들이었고 증인이 되었는데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순절날 성령님을 통하여 다시 여기에 강림하셨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선언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한 설교의 요점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이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선포되어지는 순간에 그 말씀을 듣고있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감동을 받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 내용이 37절에 있습니다. 37절 같이 보겠습니다. 시작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보면은 성령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첫째는 마음의 찔림을 받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어찌할꼬 라는 반응입니다. 마음의 찔림을 받는 사건 두 번째 어찌할꼬라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칼로 베임을 당한 것과 같은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리한 면도칼로 뭐를 짤라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판판한 이 책상 위에다 종이를 놓고 면도칼로 자르면 그 면도칼이 예리해서 이 종이가 잘렸는지 안 잘렸는지 잘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조금 흐뜨러 보면은 그 종이는 너무나 분명하게 짤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검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면도칼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예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이 면도칼보다 더 예리한 그 칼과 같은 그 째는 찌르는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내 영혼을 뒤바꿔 내 영혼이 뒤죽박죽 되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말씀의 역사가 임할 때 분리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것 마귀의 것들이 전부 분리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까지도 감찰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은 우리의 속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숨겨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노출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숨기는 동물입니다. 자기의 영혼과 자기의 내면의 세계와 자기의 생각 그래서 우리는 수없는 뱀들과 칼들과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우리 속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지성적으로 웃고 아주 굉장히 매력 있게 겸손하게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아주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아주 표정을 잘 짓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그럴듯하게 자기가 성자라고 둔갑을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순수하고 위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를 변장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이것이 숨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앞에서는 이것이 숨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과 뜻을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오직 마음 문을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내느니라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하나님을 접하게 되면 성령의 역사에 접하게 되면은 우리가 입고 있던 옷을 다 벗는 것과 같습니다.
순식간에 내가 벌거숭이가 되는 것과 같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수치감을 느끼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어떤 충격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설교를 하다보면은 어제 목사님이 내 얘기를 하시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고 누가 내 얘기를 목사님에게 했지 순장한테 찾아가서 항의를 합니다. 순장님이 가서 고발한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 벌거벗은 것처럼 내 정체를 다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예리한 칼에 의해서 난도질을 당하는 것처럼 찢겨 졌습니다. 왜 그들의 마음이 찔렀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을 모독했던 성령을 슬프게 했던 성령님을 거슬렸던 그 사건 때문에 가슴이 찔린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지금 이 설교를 왜 하고 있습니까? 오순절 성령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성령의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조롱하고 비웃는 무리들을 향하여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조롱과 비웃음에 대해서 베드로가 설교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듣고 그들은 가슴이 찔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오순절날에 임했던 성령에 대한 모독 여러분 하나님을 모독할 땐 나중에 하나님을 알고 날 땐 얼마나 가슴이 찔리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태도를 취했다가 어느 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때 눈물을 흘리고 통회 자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성령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술취한 사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 전체가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가슴이 찔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들이 가슴이 찔린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 동안에 그들은 예수를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죽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로마병정이 죽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때에 그대 거기에 없었다고 사람들은 변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께서 설교하실 때에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서 죽였던 그 예수는 그들이 죽였던 것이 아니라 네가 죽였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깜짝 놀랬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성령님께서 이천년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이 죽인 것도 아니요 제사장이 죽인 것도 아니요. 빌라도가 죽인 것도 아니요, 로마병정이 죽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고 있다고 자처하는 여러분이 죽인 것이다. 이런 음성이 들렸다고 하면은 얼마나 놀랬겠어요.
내가 예수를 지금 잘 믿고 있고 성가대도 하고 봉사도 하고 있고 반사도 하고 있고 선교사로 다 나가고 주를 위해서 봉사를 하고 희생도 하고 헌신도 했는데 네가 예수를 죽였다고 그런 말이 들렸을 때에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나는 입으로 찬양을 하고 나는 봉사도 육신적으로 하지마는 사실은 너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하여 너는 네걸 챙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 결정적인 순간에 너는 예수를 버리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네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 같지마는 정말 예수에게 영광을 돌렸느냐? 영광을 네가 다 받지 않았느냐?
수치와 고통과 창피함과 이런 것들은 다 예수에게 돌려버리지 않았느냐? 네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이다. 만약에 그런 메시지가 우리에게 들렸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다 자기가 안한 것처럼 합니다. 요즘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 자기가 안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님이 이것을 지적합니다. 네가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이 찔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지나온 목회와 신앙 생활을 회고해 볼 때 이 부분에 대해서 저도 가슴이 찔리는 것이 있습니다. 참 성령님께서 그렇게 역사 하여 주셨고 그렇게 보여 주셨고 그렇게 인도해 주셨지마는 성령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앞세우지 못하고 제한하고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그랬던 과거의 일들이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만 믿고 예수를 믿었기만 하면 다 된 것이 아니냐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됐지 성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성령님을 제한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한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병을 고칠 수 없다고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 수 없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돈이 중요한 것이고 과학이 중요한 것이고 합리가 중요한 것이고 세상적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교회도 그래서 세상 적으로 해야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그런 세뇌를 받고있는 것입니다. 누가 성령님을 부인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을 제한하고 있는 죄를 짓고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부인하지도 않지만 성령님을 기쁘게 하지도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위대한 역사에 우리들이 몸을 던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 18장 24절에 나타난 아볼로와 같습니다. 아볼로라는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요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사도행전 19장2절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인용하여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을 때에 성령 받으셨습니까?
성령체험 하셨습니까? 여기 결혼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결혼 하셨습니까? 그분이 대학을 다녔거나 안 다녔거나 돈이 있거나 없거나 내가 결혼했냐고 물었을 때에 결혼 한 사람은 결혼을 했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대답을 않고 얼굴이 빨개진다든지 우물우물 한다든지 하면은 그 사람은 수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당신 결혼했습니까? 예 아주 간단해요.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예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갈등하지를 않습니다. 비록 자기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성격적으로 아직 불완전한 부분이 있지마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를 안 지으면 구원받은 것 같고 또 며칠 죄를 지으면 구원이 없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 속에서 삽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받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감정을 믿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성령받은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예수 믿을 때에 정말 성령을 받았소? 예, 아멘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의 성숙과 상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너희들이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 바울은 그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강단을 통하여 오늘 똑같은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 체험 하셨습니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온누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번 13, 14, 15일 성령집회 두 번째 집회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적극적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을 사모하시고 그분을 기다리시고 그분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역을 시키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는 여기에서 내가 약속한 아버지께서 그 약속한 것을 받기까지는 떠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더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십자가를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성령님의 음성은 십자가의 예수를 죽인 것은 저들이 아니고 바로 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책감에 몸부림 쳐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죄 문제는 너무나 본질적이고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인하고 거짓말하고 간음하고 강간하고 모든 악한 일을 했을 때에는 죄를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죄문제에 대해서는 도피를 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죄문제는 인정을 합니다.
여러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능력이 없는 줄 아십니까? 왜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줄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자기가 죽는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 중에 교통사고 나보신 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몇 년전인가요. 가을에 너무 열이 고열이 되어서 기진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기절을 해서 엠브란스에 실려가 본적이 있는데 그런 죽음의 경험들을 사람들은 다합니다.
병들어서 죽음의 경험을 한다든지 인간적인 상처를 받아서 배신을 당해서 죽음의 경험을 한다든지 그러나 그런 죽음의 경험이 아니라 교통사고의 죽음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내면의 죄 때문에 죄와 싸우다가 죽음의 경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경험을 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내게 없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죄의 깊은 심연을 보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진정한 죽음과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예수를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오후에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게 물에 빠졌던 물로 뿌렸던 그런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기가 한 번 죽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는 죽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셨다. 이런 영적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바로 너희들이 죽인 예수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두 번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반응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찌할꼬 한 번 따라 하시죠. 우리가 어찌할꼬. 오늘 여러분이 그 말이 진정한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이 어찌할꼬 라는 말이 없는데 있습니다.
성령운동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찌할꼬 가없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값싼 감상주의 은혜와 십자가의 고난을 거부하는 구원과 부활의 축복만을 받으려고 하는 태도는 여러분 고난 없는 축복이 어찌 축복일수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없는 부활이 어찌 부활일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령운동의 위기는 고난 없이 축복만 받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물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는 그 부분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나 우리는 감각적이고 감상적인 체험의 근거 또한 영적 쾌락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피부 적인 쾌락주의적인 그래서 성령의 어떤 신비한 체험만 추구하는 물질적 축복만 원하는 내가 의롭게 살든 안 살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런 문제는 묻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축복만 받아야 하겠다는 결과주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를 통하는 부활의 역사인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인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경험 속에서 진정한 성령님의 능력과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할꼬 이 어찌할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돈이 있는 사람은 어찌할꼬라는 말 잘 안합니다. 돈이 바닥이 나야 어찌할꼬 은행에 저금한 돈 몇 푼 있어도 목에 힘주고 다닙니다. 웃어도 아주 이상하게 웃어요. 그래도 그래도 망해도 나는 산다 이래요. 건강 있는 사람은 어찌할꼬 안합니다.
내 육체가 있는데 우리가 뭐 못사냐. 망해도 산다. 이러고 다닙니다. 배경과 빽이 좋은 사람들은 이 어찌할꼬 라는말 안합니다. 이게 다 무너져야 어찌할꼬 해요. 하나님도 대개 답답해하세요. 그 말까지 가게 해야 되는데 안가니까 자꾸 뺏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씩 거기가도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의 애굽은 살인을 했습니다. 사십년동안 살인자로 쫓겨나서 말을 못하는 짐승과 함께 광야에 살았습니다. 그 세월은 철저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도움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지식 나의 지성 나의 모든 인간적인 출생 이게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날 그는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대면을 합니다. 하나님의 불을 만난것입니다.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라. 이때에 모세가 무슨말을 합니까? 하나님 나는 못합니다. 이게 바로 어찌할꼬 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일을 합니까?
이사야가 자기의 친척왕이 죽었을때에 이사야 6장에서 그는 성전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임재를 했습니다. 거룩 거룩 거룩 그룹들과 이 여러 가지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났습니다.
문지방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이사야가 무어라고 그랬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참담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뿔이 지금 자기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뿔이 지금 자기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지금 자기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어찌하면 좋습니까? 내가 무엇을 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베드로가 고기를 잡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옆에있는 배에게 고기를 나눠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아멘 할렐루야 했습니까? 아닙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늘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 필요하고 내게 필요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어찌할꼬 내가 어찌 그런일을 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심정이 바로그런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능한 상태 하나님 내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로 돌아와서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나갑니다.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내가 주를 믿노라 부르짖지마는 사실은 내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문을 닫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나갔고 그렇께 열심히 헌금을 했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고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았다고 하지마는 내 심령 깊은곳에 보며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위선뿐이었습니다. 형식뿐이었습니다.
내 영혼은 갈급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과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껍데기 크리스챤이 아니었습니까? 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통회와 자복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통회와 자복앞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38절입니다.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의 응답은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 회개가 두 회개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권면 따뜻한 사랑의회개를 촉구하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너 회개안하면 죽어 이렇게 막 공갈하고 협박하고 무섭게 하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성령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네가 회개하라 정말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는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없는 구원이 없습니다. 회개없는 성령의 임재함은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부활이 없듯이 영광이 없듯이 회개없는 시작 그것은 구원도 성령도 아닙니다. 사람의 강요에 의한 물리적인 회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칼날같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심령을 뒤흔들어서 가슴을 찌르고 어찌할꼬라고 하는 통회자복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가장 축복이 됩니다. 죄짓는 잘못보다는 회개하지 않는 잘못이 더 큽니다. 나는 오늘 성령님의 권면과 강건함과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 모두가 우리 심령의 깊은곳을 바라보며 폐부를 찌르는 어찌할꼬하는 그런 깊은 영적인 회개가 우리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집회입니다. 이번 성령집회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이 임했다면 우리가 눈물 콧물 흘리며 우리 영혼의 깊은곳에 통곡을 하며 숨겨진 죄악들을 다 드러내며 부끄러운 모든 것을 다 드러내며 벌거벗으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너희들이 회개하라 회개하여 두 번째는 예수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어요. 여러분 회개한 후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란 간단하지요. 이쪽 방향으로 가다가 180도 회전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까? 너무 돌아가지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회개는 180도 방향을 회전해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죄로 부터 from God to God 하나님 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안가면 회개가 안됩니다. 마음을 바꾸었다고 회개가 아닙니다. 가슴을 쳤다고 회개가 아닌것입니다. 옷을 찟었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정했으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걸어가는 과정이 크리스챤의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요. 평생 그 자리에서 뺑뺑 도는 사람이 있어요. 회개했다 세상으로 갔다. 회개했다 세상으로 갔다. 한발자국도 위로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신앙의 불구들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세월을 보냈어도 그가 영적으로 성장한 일이 없어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맵돕니다. 십년전에 얘기해 보았는데 지금 얘기해 봐도 똑같은 사람이 있어요.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어요. 나는 여러분들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기를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세례입니다. 죽지 않으면 세례가 안됩니다.
나를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질병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지 않습니까? 안죽으면 절대 살지를 않습니다. 옛날 그대로인것입니다.
병든채 그대로이며, 죄진채 그대로이며, 썩어져 버릴 옛날의 구습 그대로인것입니다. 그것이 죽어야만 다시 새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지않고는 다시 새로사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우리의 질병에 대하여 죽고, 우리의 절망과 우리의 좌절감과 우리의 모든 것이 세례와 함께 우리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진정한 세례입니다. 근데 거기 재미있는 것은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말할 때 그위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각각 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도매급으로 안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세례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부인이 세례 받았다고 남편이 자동적으로 천국가지 않습니다. 부인이 배부르다고 남편이 배 안부른것과 또같습니다. 자기가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결단과 여러분의 믿음이 필요로 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자기의 신앙적 결단과 고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두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죄사함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으리라. 할렐루야 마귀가 어느날 우리에게 찾아와서 네 이름이 무어냐고 물을 때 네 이름은 죄사함이라 이렇게 말할수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무슨 대학 나왔고 내 직업은 무어라고 말하면 마귀가 여러분을 조롱할것입니다. 그래 나는 돈이 얼마나 있고 나는 지식이 얼마나 있고 나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잘났고 이렇게 여러분 어떤 사람 명함을 보면 앞뒤가 빡빢한 사람이 있어요. 이렇게 마귀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속죄함 입니다. 우리 옛날에 부흥회때 불렀던 속죄함 이라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의심이 가득한 것을 다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여러분 회개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는 자기가 죽지않는데 있습니다.
죽지않고 세례받고, 죽지않고 교회나오는데 문제가 있고,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공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요. 제자훈련 받지 못한것도 아니요. 봉사와 헌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의 신앙의 연약함과 갈등은 속죄함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기쁨, 확신 오늘 난 여러분들이 이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 신앙고백 확신 또 하나 있습니다. 죄사함과 또하나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랬는데 그게 아니고 성경이 표현이 조금 오해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러니까 성령의 선물들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오늘 성령의 능력들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온누리 교회가 이 능력이 강렬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처럼 나는 사도행전의 모든 성령의 능력들이 온누리교회에 경험들이 되기를 바라며 그런일이 실제로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모든 사도들의 내용 신앙고백과 간증이 온누리교회의 성도들의 삶이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런일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들이 내 삶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좋아요. 어떤 사람은요 혼자 그냥 미친 사람처럼 자꾸 웃고 돌아 다니는 사람이 있지요. 빙긋빙긋 그거 이해하세요. 그래요 당신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느냐고 자 이 성령의 은사들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39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작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것이라 하고”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는 부르시는 자들 줄쳐 두세요. 얼마나 좋은 말들이예요.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 너나 네 자녀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주님 오실 때 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약속과 축복이 주어졌다 할렐루야
왜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제한해야만 합니까? 왜 한국만 교회 부흥을 해야 합니까? 왜 한국만 영적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아시아에 중국에 이북에 동남아시아에 비참하게 굶어가고 죽어가고 그 지옥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어지하여 우리만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자녀여 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바로 기쁜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의 진리란 간단합니다. 그가 공부를 아무리 많이한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그가 교회 경험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선교사라 할지라도 그가 어떤 누구라 할지라도 기독교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얻고 성령능력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입니다. 선교사가 가서 해야할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이거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집지을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능력있는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시작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여기 재미있는 말이 나오지요. 여러분 지금 여기를 보세요. 가슴이 찔려 어찌할꼬라고 했던 그 사람들이 베드로의 아주 명쾌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들의 태도가 또 그렇게 달라질수가 없었어요. 40절에 보며는 이 말씀을 들은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습니까? 여러말로 뭐라고 그랬지요. 여러말로라는 말은 간증이 있겠지요. 아니면 간증이나 가르침이나 무슨 토론이나 이런 것이 있겠지요. 요즘 온누리교회식으로 말하며는 온누리방에 간다든지 일대일 양육을 한다든지 무슨 오후에 일대일 토론식을 한다든지 간증집회를 한다든지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부흥회를 한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다 동원하여 두 가지를 했어요. 첫째 무엇을 했습니까? 여러말로 뭐했어요. 확증하는 일 확인시켜주는 일을 했어요. 뭐 성경공부란 무엇입니까? 확인시켜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는것을 그 사람이 믿게해주는 것이지요. 확인시켜 주었어요. 세례는 무엇이예요. 내 구원을 확인시켜주는 드라마이지요.
두 번째 뭐했어요. 권면했다 서로 권면했다 여러말로 확증하고 권면하면서 그들이 주는 메시지의 요점은 이 패역한 시대에 구원을 받으라 패역한 시대에 구원을 받으라. 그들은 전도하기 시작했고 간증하기 시작했고 권면하기 시작했고 상담하기 시작했고 가르치기를 시작을 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는 각각 받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순간은 그날에 순식간에 전파되기를 시작해서 몇 명까지 몇 명이예요. 삼천명 지금 여기 앉아있는 수가 거의 삼천명이예요. 이만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으니 얼마나 물이 필요했을까요. 이렇게 뿌리는데 삼천번 이렇게 안했으며는 요단강에 다 집어넣었을거예요.
그것이 하루에 있었다는 말이예요. 하루에 우리가 오늘 오후에 세례를 합니다. 여러분 세례 백명정도주면요 그냥 진액이 빠집니다. 제가 그런 실수를 가끔 해요. 너무 힘들고 혀가 가끔가다보면 이름도 바꿔서 해요. 그래서 꼭 이름표를 확인하고 합니다. 그렇게 힘이 들어요 사실은 그런데 삼천명이 세례를 받았으니 어찌했겠습니까? 뭐 세례 문답이 있었겠어요. 거기 그날 우리 같이 간증집회가 있었겠습니까?
그날에 세례받은 사람이 삼천명이었다. 여러분 그당시와 지금 인구밀도를 비교해보세요. 요즘 우리 교회 올려면 자동차도 있고 전철도 있고 버스도 있고 그러니까 모일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대중교통수단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모인것입니다.
4장4절 그 다음 페이지에 보며는 4장4절에 보며는 무슨말이 있습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중에 믿는자가 많으니 뭐라고 그랬지요. 남자만 오천명이예요. 여자하고 애들은 다뺐어요. 합하면 만명이 넘을 거예요. 오천명이 계수가 되고 그 다음부터 계수가 안나와요. 많더라 많더라 이렇게 되있지요. 숫자가 안 나옵니다.
아마 오천명이상 세기가 힘들어요. 우리도 언젠가 수세는 것 포기할거예요. 아마 하루에 삼천명이 며칠 지난 다음엔 오천명이 남자만 그당시에 이천년전에 예루살렘에서 이런일이 있다면 정말믿으십니까 여러분 이게 사도행전이예요.
우리는 오늘날 시시한 경험속에서 삽니다. 상식적인 경험속에 삽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아올때가 많습니다. 교회는 이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나는 오늘 온누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힘있게 능력있게 체험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 성도 한사람 한사람속에 그런 간증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 이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제일 흥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사도행전3장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걸으며 찬송하며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던 이게 사도행전적 상징적 사건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상징적 모델입니다. 여기가 나면서 앉은뱅이가 내가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그랬을때에 그가 걸으며 뛰며 발과 발목에 힘줄이 생겼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고 싶지않습니까? 능력있는 사람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얼마든지 부르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이걸다 주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아침에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이여 오늘 이 자리에 임하여 주시고 오순절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건이 우리교회안에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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