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보충 /행1:15-26/ 염두철목사
2023-02-09 16:24:39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직위는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 열두 제자를 12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사도는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12사도의 수에 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을 함으로 인해 12사도가 11사도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의미가 없는 숫자라면 그냥 11명으로 계속 갈 수도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12는 정말 중요한 숫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비롯된 12는 하나님의 수인 3과 사람의 수인 4를 곱한 것으로 완전수, 또는 무한의 수를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고, 그 자리를 보충하는 것도 역시 구약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구약 예언에 입각하여 반역자 유다의 자리를 보충하고자 제비뽑기를 하였고 그 결과 맛디아를 사도로 받아들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실패를 딛고 일어선 모습과 사도 선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원리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수에 대해서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의 바울의 증언에 의하면 500여 형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갔느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의심과 불순종으로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120명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여전히 베드로는 수제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 예수님을 부인하고 사도의 반열에서 탈락할 것처럼 보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재신임을 받은 이후 그는 다시 사도들의 머리로서 초대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때로는 크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한 농부의 당나귀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당나귀도 노쇠했고 우물도 오래되었으므로 이 일로 농부는 당나귀와 함께 우물을 메우기로 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을 불러 우물 안에 흙을 채워 넣기 위해 삽질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지 알아챈 당나귀는 크게 울부짖다가는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이상해서 사람들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물 속에 흙을 던져 넣을 때마다 당나귀가 온 몸을 세차게 흔들어 그 흙을 털어버린 뒤 우물에 쌓인 흙 위로 한 발자국씩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삽질을 해댔지만 그럴수록 당나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기 몸 위에 내려앉은 흙을 떨쳐내면서 점점 더 위로 올라왔습니다. 얼마 후 당나귀는 우물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키기 위해 수많은 삽질을 해댑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당나귀에게서 배운 귀한 교훈을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비난, 모략, 고난, 실패 등 온갖 종류의 흙들을 툴툴 털어버린 뒤 치고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5절에서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역시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따지며 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스스로 다른 사도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고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누가가 15절에서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미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형제라고 불렀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일이 베드로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 이 호칭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형제, 자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이 응하였으니’라는 베드로의 발언에서 우리는 성경에 관한 베드로의 두 가지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에 관해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반역하여 무리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이끌어 온 것도, 그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한 것도 모두 성경의 말씀들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응하였으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기도하고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성경을 지침으로 삼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또 인간의 주옥같은 말이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상황 논리가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원칙을 삼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성경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가룟 유다는 많은 사람 가운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고, 주님과 함께 거하였으며, ‘직무의 한 부분’,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사도와 봉사의 직무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사도라는 영광스런 직분을 가진 자였으나 스스로 주어진 특권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18-19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절을 보면 가룟 유다는 죄를 뉘우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은 30을 도로 갖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도 여전히 죄책감이 영혼을 조이자 황급히 성전에서 뛰쳐나가 목을 매고 자살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하게 됩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통곡하고 회개했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뉘우치기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후회만 한 것입니다. 후회의 결과는 자살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함으로써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에 대해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냥 죽었다고 해도 될 것을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잔인하게 묘사했을까요? 그것은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한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 하는 것을 유다의 최후를 통해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는 그가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고 했고, 마태복음 26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간 ‘제 곳’이 어디인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의하면 그는 지옥에 가 있었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한번만 주어지는 것이며, 모두에게 초행길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아무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고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며 가룟 유다처럼 안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첫 번째 인용은 시편 69편 25절의 자유로운 인용으로, 다윗은 선민을 박해하는 자의 말로를 이야기했으나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 적용시겼습니다.
두 번째 인용은 시편 109편 8절의 인용으로 이는 가룟 유다의 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의 사도직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21-22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성경의 예언에 근거하여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열두 사도에 편입할 사도를 선택하게 되는데 누구를 뽑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선거 때만 되면 선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시대마다 훌륭한 인재를 찾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을 찾고, 정치가 흔들릴 때는 사심 없이 나라를 다스릴 깨끗한 정치인을 찾습니다. 기업체에서는 좋은 직원을 뽑으려고 각종 시험과 자격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를 망치게 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이 기업의 책임자가 되면 회사가 휘청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디오게네스라는 옛날 헬라 철학자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인재를 찾아 헤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쓸 만한 일꾼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그 자격과 조건은 세상일과는 다르기 때문에 특수합니다. 사도들은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 첫째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알고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길을 직접 경험하고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본질과 사도의 직무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사도의 직무였습니다.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두 사람이 천거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이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사람들의 천거를 받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은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 이름을 가지고 있고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조금 스펙이 나아보입니다.
24-25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사도들은 추천받은 두 사람을 두고 유다를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도 중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에서 봉사의 일은 나중에 일곱 집사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사도들은 기도 후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의 후보를 놓고 기도한 후 제비뽑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요셉이 먼저 이름이 언급되었고, 스펙이 화려한 점에서 유력한 후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맛디아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방법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으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레 16:7-10, 민 26:55, 삼상 10:20, 욘 1:7). 잠언 16장 33절에는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제비를 쓰지 않았고, 성령께서 오신 후에도 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맛디아를 제비로 뽑은 것은 그 당시에, 그 한 사건에 있어서 적당한 방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 때문에 무척이나 마음이 뒤숭숭해져 있었습니다. 이 일을 적당히 해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때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유다는 제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맛디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 내부의 문제들을 제거하신 뒤 아름다운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보게 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준비된 다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을 뽑아 세우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돌아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admin
사도행전강해 05. 열두 명의 사도공동체 /행1:15-26/ 이종철목사
2022-06-02 10:30:15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오늘 말씀은 유다가 버린 사도직을 대신 할 한 사람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이라는 수자를 채우는데 이 말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구지 12라는 수자를 맞춰야 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냥 11명이면 안 됩니까? 실상 12명을 선택했지만 성경에서 그들 모두가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마태나 도마 정도만 언급될 뿐입니다.
나머지 사도들의 활동은 교회사의 전설로만 알려질 뿐입니다. 예컨대 유다를 대신하여 어렵게 그 자리를 채운 맛디아의 활동에 대해서 성경에는 보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사의 전설로는 에디오피아까지 가서 선교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 그의 유골은 후에 발견되어 독일의 트리어란 곳에 무덤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지만 모든 사도들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활동만 두드러집니다. 13장 이후 마지막 28장까지는 열두 명에 들지 않았던 바울의 행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은 베드로 이후 주의 형제 야고보가 맡았고 야고보의 활동은 사도행전 15장부터 두드러집니다. 그 또한 열두 사도 중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장에서는 열두 사도의 수를 맞추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구약의 계승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과 구약을 포함한 66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율법의 길을 폐기하고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주류가 넘어갔습니다. 충분히 구약을 버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구약은 유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율법이라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 로마 사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예수 그리스도 신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족적인 종교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2세기 중반에는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이 등장했습니다. 구약의 신은 저열하고 폭력적이라며 배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고 하면서 유대주의적 색채를 뺀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일부만이 진짜 성경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신구약을 포함한 66권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교회의 정경화 작업은 이 이단의 도전 때문에 촉발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구약은 유태인 종교의 경전이라는 식으로 격하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 선봉에 누가가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는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교임을 분명히 합니다. 누가는 기독교의 뿌리가 구약 유대교에 근거해 있음을 역설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나 바울의 설교는 항상 구약 말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스데반의 매우 긴 설교는 대부분을 구약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과 언약을 계승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 열둘이라는 사도의 수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열두 사도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체하는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된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유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세계 인류 중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9) 열둘이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을 잇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실패한 그 자리를 누군가 채워야 했습니다.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혼 위에 몸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구약은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 분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매우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은 계승과 재해석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계승은 구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계승이라는 측면입니다. 재해석이라는 것은 구약 말씀은 그리스도를 계시한 책으로 목적이 맞추어져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 곧 신약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걸러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읽고 해석할 때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교회의 질서입니다.
열두 명은 교회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들 열두 명을 공식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열두 명의 증언이 참되고, 모든 권위와 질서는 이들로부터 비롯됩니다. 부활의 증인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21절과 22절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부터 승천하신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둘에 해당하는 후보로 요셉과 맛디아가 추천되었고 그 중 맛디아가 임명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사도는 이 열두 명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사도입니까? 아닙니까? 물론 그는 사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을 사도라 부르는 것에 매우 인색합니다. 일단 바울은 사도의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행전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을 사도라고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함께 섞어 ‘두 사도’(14:4, 14)라고 단 두 번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글 성경은 단순히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도’로 바꾸어 번역했기 때문에 여러 번 나오는 것 같은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사도라 언급하는 것은 여기 두 곳뿐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과 동행했던 의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로 넘어가는 2차선교 여행부터 ‘우리’ 문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때 누가가 동행했다면 누가는 바울의 선교 현장에 직접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바울이 사도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고린도후서의 대부분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과의 싸움임을 몰랐겠습니까? 바울은 이방인 교회를 세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는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누가의 증언에 의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누가는 바울을 사도로 추켜세워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의 질서 때문입니다. 누가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세우시고 교회가 인정한 권위는 열두 명의 사도들뿐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로부터 바나바와 바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열두 사도의 권위에 의해서 움직이거나 파송되거나 임명된 선교자들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울은 싸움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회심부터 1차에서 3차에 이르는 선교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선교보고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정식으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권위와 질서라는 것입니다. 전통의 계승입니다.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열두 사도가 나왔고 이들로부터 나온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초대교회는 중세교회로, 개혁교회로, 장로교로, 기장 교단으로 이어져 우리가 속한 빛과생명교회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또한 당회나 목회자에서 성도에 이르는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서와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이 질서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종교개혁 하면서 만인사제론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개하던 사제의 특권을 폐하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길은 옳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교회의 전통과 질서마저 다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무분별하게 자격도 없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양산하고, 목회자의 도덕성이나 지성이나 신앙이 땅에 떨어진 현실에서 여전히 질서를 강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아무나 은혜 받으면 목회를 하려하고, 정식 교단이 아니라 군소 신학교에서 목사 과정이나 안수를 받는 것을 좋지 않게 봅니다. 목회자와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교회 질서를 문란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든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막중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질서한 곳에서는 우리 영혼도 무질서하게 됩니다. 개신교에 이단이 많이 생기는 이유도 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질서는 대사도 바울일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가는 열두 명의 사도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낱낱이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이 열두 명이라는 숫자를 채우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권위는 이들로부터 나옵니다.
셋째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맡기신 직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 직무를 버렸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17)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20)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25) 유다는 열두 사도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직무를 버리고 갔습니다.
직무를 버리고 떠난 자의 결말은 좋지 않습니다. 그 결말은 매우 끔찍합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18)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목을 매어 자살하려다 줄이 끊어져 이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사고로 지붕이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매우 비참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외에도 자기 소유물을 판 일부를 감추었다고 하여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비참한 결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자신이 취한 헤롯은 충, 곧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전합니다.
이런 비극적 결말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자기 직무에 충실하지 않거나 교만하거나 하나님을 속인 대가에 대한 엄중함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보기처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이것이 특수한 한 사례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이를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경고로 악용합니다. 또는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사고에 이를 적용하려다 무리를 빗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직접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목회자의 욕심이나 어리석은 판단이 작용할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는 심판의 메시지보다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훨씬 더 많고 중하다는 것입니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무나 직분에 대한 소중함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도의 직무 앞에 봉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사도직은 특권이 아니라 봉사입니다. 우리의 직무도 자기 유익을 위해서 쓰면 안 됩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25)고 말씀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욕심이 강했습니다. “불의의 삯”이라고 하였는데 금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저버렸다고 평가합니다. 봉사의 직무가 자신의 이익과 탐욕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직무, 집사로서의 직무, 부모로서의 직무, 직업과 사업으로서의 직무, 나라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직무.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이 부르심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신이 감당치 않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고 맙니다. 영광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마십시오. 유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던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했던 말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4:14) 내가 해야 할 직무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할 것입니다.
제비뽑기
초대교회 공동체는 요셉과 맛디아 중 맛디아를 선택했습니다. 맛디아를 선택한 방법은 그들의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였습니다. 투표는 각자가 선호하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행위이지만 제비뽑기는 주사위를 던지듯 하늘의 뜻에 맡기는 방법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우림과 둠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이야 이것을 마치 운빨처럼 취급하지만 고대 사회나 성경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비뽑기가 인간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이라 믿었습니다. 권위는 인간적인 결정에서보다는 제비뽑기에서 더 주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적인 탐욕들과 술수들이 난무하는 총회장 자리나 어떤 특권의 자리는 제비뽑기 방법을 사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시대에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의해서 합리적인 이성과 민주주의라는 방식이 주어졌습니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운에 맡기는 것 같은 그 방식이 아닙니다. 리더를 선택하는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출된 리더는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시 그 자리가 채워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생 또한 제비뽑기처럼 주어졌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화 『곡성』의 포스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미끼를 물었다.” 이 영화에 나온 대사입니다. “낚시꾼은 그냥 미끼를 던졌을 뿐이고, 고기는 우연히 그 미끼를 문 것뿐이다.” 모든 것이 우연히 결정된 일입니까? 우연이라는 형식을 가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제비뽑기라는 우연 속에 하나님의 결정이 담겨 있듯이 말입니다. 신앙은 우연과 무의미 속에서 의미와 필연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때는 모릅니다. 쌓이고 좀 거리가 두어진 후에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달려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 일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11) - 일어서라 /행1:15-16
2021-05-25 09:23:09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1. 나는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기다리나?
여러분은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래 기다리십니까?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딱 보면 압니다.’처럼 아주 쉽게 베드로를 얻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베드로가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는 중에 베드로를 만나고 이어서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만나 그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는 부르시는 시점이 같은 시간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의 제자로 헌신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베드로가 일하는 일터로 가셨던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의 사건이 있기 전에 누가복음 4장에서 베드로 집을 방문하셨으며, 그곳에서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눅 4:39)처럼, ‘중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가운데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소리를 직접 들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장 2절에 보면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미 고기잡이를 마친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았고, 21절은 “그물 깁는 것을 보았다”(마 4:21) 하셨으니, 이보다 시간상 뒤인 이때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고기를 잡지 못하고 ‘빈배’로 돌아와서 그물을 씻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여러분! ‘빈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실패’ ‘절망’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것’ 또는 갑자기 찾아온 질병일 수도 있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잘 풀리지 않는 사업, 인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지켜보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눅 5:3)는 것입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하셨습니다.
이때 대낮에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의 반응을 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 5:5)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했고, 결과는 만선(滿船)(눅 5:6~7)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쭉 지켜보고 계셨고, 지금 자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언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저는 누가복음 5장 5절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이 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아멘. 아멘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전했고, 말씀의 씨앗을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기적을 통하여 놀라운 ‘회심’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후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삼천이나 되었던 것입니다.(눅 2:38~4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향하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아멘
2. 베드로를 찾으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은 실패를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제 경우는 모두가 제 성공을 부러워하고, 그 이상 완벽한 계획이 있을 수 없다고 했을 때, 지난 주 말씀 드렸던 것처럼, 철저히 무너지고 건물 옥상 난간에 섰습니다. 그리고 ‘통곡’했고, 그곳에서 ‘하늘’이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는 성장과 성숙과 원숙의 단계입니다.
여기서 성장(成長)이란? 아기들이 자라는 것처럼, 작은 것에서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숙(成熟)은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눌 줄 아는 단계라고 한다면, 원숙(圓熟)할 때 ‘원(圓)’이 둥글 원처럼, 큰 나무가 되어 그늘이 되어주는 단계가 ‘원숙’이며, 원숙한 자는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 눅 5:10)인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가 되었으며, 오순절 성령 사건 후 말씀을 전할 때마다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4)처럼,
그는 처음부터 ‘성숙’한 사람, ‘원숙’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에 저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했지만,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라고 한 베드로전서 2장 10절 말씀을 통해 그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생애를 보면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철저히 무너졌고 통곡했으며 너무나 쓰라려 모든 것을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야바의 뜰 안, 차가운 이른 새벽녘 모닥불 옆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이 모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아무리 일찍 일을 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른 시간일 뿐만아니라 그들 얼굴에는 무겁고 긴장하는 빛까지 보였으니,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한 여자 이이가 무거운 침묵을 깨면서 베드로를 향하여 ‘당신은 저 사람과 같이 있던 사람이 아니오?’(막 14:67)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열두 제자 중 리더 역할을 했으며,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들 중 ‘말고’의 귀까지 배면서 호기롭게 ‘누가! 감히’ 하던(요 18:10) 베드로였으니 당연히 ‘그래! 내가 그분의 제자이다. 너희들이 감히 그분이 누구신데 이렇게 대하느냐!’ 그분이 당장 여기서 천군 천사를 불러 너희들을 혼낼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난! 저사람을 모릅니다.’ 그러자 그 여종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분명, 저 사람! 그 사람과 같이 있었던 것 맞아요.’ 그러자 베드로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봐라! 나는 저 사람이 쓰는 발음과 다르지 않니! 하면서 말투까지 고쳐 부인하고 저주할 때 두 번째 닭이 울었다.(막 14:69~71)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에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때 예수님께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마에는 억지로 쓴 가시관을 통하여 피가 뚝뚝뚝 떨어지는 그때, 그것도 똑바로(straight)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때 베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너 내가 분명 사탄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말했지! 그런데도 넌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過信)하여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3) 심지어 “주여!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하지 않았느냐? 너는 실패자다!
과연! 주님이 그런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았을까요?
어찌했던 그는 ‘통곡’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이렇게 그는 철저하게 무너졌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생업으로 돌아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시 그물을 잡았고,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희미하게 동이 틀 무렵, 그러나 그때처럼...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을 그때,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러면 잡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들 수가 없었다”(요 21:5~6)
그렇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찾아오신 예수님을 그 아침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3.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서라
‘와서 조반을 먹어라’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숯불이 놓여져 있었고, 그 숯불 위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았던 것처럼 ‘생선과 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 21:10)했을까요? 그리고 숯불은 왜 놓여져 있었으며, 하필이면 ‘디베랴’ 바닷가였을까요?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느라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 가운데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소망으로 살아야 하는 지 알려주시기 위해 죽음조차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이번에도 직접 관계의 회복을 위해 제자들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아담과 하와’(창 3:10)처럼 숨었다면, 그리고 예수를 은 30냥에 판 가롯유다처럼 ‘후회’는 했으나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죽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얼굴이 빨개지기도 하고, 숨으려 하기도 하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죄책감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치심’에는 ‘긍정정인 면과 부정적인’ 양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죄를 짓고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나아가 회개에 이르게 할수 있으나, ‘죄’를 짓고도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불의한 자(습 3:5하)로 기록했고,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3:3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수치심이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으로서 ‘존 브래드쇼’가 ‘수치심의 치료’라는 책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인간으로서 불합격품이며, 못나고 열등한 면이 많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으로 인생을 움츠리게 하고 실패자요 낙오자의 이미지로 살아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억 속에는 모든 것이 그 종류에 따라 제각기 따로따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들의 감각의 관문을 통하여 기억이라는 창고로 들어갑니다. ...기억의 창고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간직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불러 찾아 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숯불을 준비하셨고,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굳이 물고기가 필요하지 않으신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이는 ‘나도 예수님께 무엇인가?’ 드릴 수 있구나! 하는 마음, 나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있구나! 하는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요? “나를 따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직접 찾아오셔서 회복하게 하시고, 이제 과거를 떠나 오직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의 가는 길을 함께 가자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사랑의 길을 함께 가자고 하시고, 오늘도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아 함께 구원하자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께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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