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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사도행전 설교 모음

사도행전 1장 1절-11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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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1:1-8/ 원영대목사

2022-04-12 03:01:46

 

증인이란? 법정적 용어이다. “경험에 의하여 알게 된 사실을 법원의 신문(訊問)에 대하여 진술하도록 명령받은 소송 당사자 아닌 제3라고 정의하고 있다. 증인의 주된 사명은 사실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으면 위증죄로 처벌 받게 된다. 종종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들이 위증함으로 위증죄의 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로변에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는 프랭카드를 보게 된다. 사고 당사자에게 절실하게 목격자가 필요한데 찾지 못하면 큰 손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국회에서 증언을 하든 아니면 교통사고의 목격자로서 증언을 하던 증인을 서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래서 증인의 자리를 피하려하고 목격자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증인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이다. 누구에 대한 증인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든지 사실대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해야 한다. 증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증인으로서 증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부끄러워 한다.

 

종종 국회 청문회에서 증인들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잘 모르겠는데요.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참으로 수치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자신 있게 증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고픈 열망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실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될 수 있는가? 오늘 본문 속에서 그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의 기록자는 누가라는 사람이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누가의 기록물을 인정해주고 보급해 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일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헌정하는 문구로 이 위대한 증언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물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하여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담대한 증인으로 준비시키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어떻게 증인으로 준비시키셨는가?

 

 

1.부활하심을 나타내 보이심

 

누가가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다룬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후의 사역이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셨는데 그 기간 동안 어떤 일을 하셨는가?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부활하심을 나타내셨다.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에 못자욱과 허리의 창자욱을 보여 주신 것은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신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풀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만나주시는 것이다. 도마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고백할 수 있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고 있을 때도 또 나타나셔서 그들을 만나주셨다. 새벽녘에 숯불을 피우고 떡도 굽고 생선도 구워서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함이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확실히 믿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나셔서 만나주셨다.

 

 

2.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심

 

3 ...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삶에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성도들을 만나시고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다.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제자들은 그들의 조국인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쭌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는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주의적 삶을 살게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주 정확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

 

 

3.성령 충만을 약속하심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세워진다. 물세례 가지고는 안된다. 5절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개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한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천국은 의미가 없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회개한 자에게 세례를 베푼다. 회개하지 않은 자가 세례를 받은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은 세례 의식에 참여했을 뿐이지 구원 받은 사람이라 확신할 수 없다.

)군대에서 받은 세례.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받는 세례가 아니다. 이미 제자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표적 사건이 베드로의 부인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그는 큰 소리쳤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부인한다할지라도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4.구체적으로 분부하심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충만을 받기 위한 구체적 지침을 두 가지로 말씀하시고 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증인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 진득하게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의 장소다. 그 자리는 은혜의 자리요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다.

 

은혜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려는데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핸드폰이다. 주일날 핸드폰 꺼놓든지 아니면 집에다 두고 오면 훨씬 더 은혜 받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4절 후반부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씀은 사모하라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사모함이 없는 사람에게 임하시지 않는다.

 

누구나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해 보면 사모함이 약하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변화되기는 원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지지부진한 모습으로 불편한 신앙생활을 한다.

 

두 가지만 점검하기 바란다. 나는 은혜 받을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은혜를 정말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는가? 이런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이다.

 

 

5.증인이 되리라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절의 말씀을 잘 보아야 한다. 어순을 따라 살펴보면, 첫 번째가 성령의 임하심이다. 두 번째가 권능을 받는 것이다. 세 번째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는 것이다. 네 번째가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자기들끼리 성 안에 어느 집에 숨어 있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어도 그들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자기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에게 예수님 부활하셨어! 다시 살아나셨어!” 이렇게 말 못한다는 것이다. 밖으로 한 발자욱도 옮길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하신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권능을 부어 주시면 어떻게 되는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자발적으로 가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로 사도행전 2장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 안의 어느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들이 앞장 서서 성전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순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참배객들을 앞에서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선포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8절의 말씀과 반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않고 먼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니까 불편하고 힘들고 하기 싫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데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무지요 오해요 교만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고 방해거리가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뤄가실 때 힘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성령의 사람을 쓰신다. 성령님을 보내시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결론적 메시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3절의 말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하신 사역은 제자들을 만나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 나라는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다. 공평과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나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을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두 번째는 제자들을 증인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증거로 살아나심을 보여 주셨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다 하실 수 있지만 증거의 사명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 믿고 영육간에 평안을 얻고 이 땅에서 잘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도 참 복된 일이지만 그런 소망은 예수님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위대한 비전을 함께 세워나가기를 원하신다. 낙심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성령을 약속하시고, 결국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삼으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던 그 일들을 오늘 우리에게도 위임하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좋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하다. 살만한 것 같은데 고통과 탄식의 소리가 높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잘 분별해야 한다. 그 근본 원인은 우리 인생들이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 죄와 죽음의 문제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소망이 되신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보면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보면 나는 만족하겠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절망과 슬픔 속에서 탄식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소망과 기쁨을 전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전파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신다. 그 시작은 우리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리도를 증거할 때 주님의 관심에 동참하는 것이고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번 한 주간,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증거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증인입니다!”

 

 

 

잊혀진 명령, ‘내 증인이 되라’ /1:1-/ 조정의목사

2022-02-18 08:39:57

 

사도행전 강해를 다시 시작하면서, 어느 때보다 성경에 기록된 사실과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간의 차이가 이처럼 크게 느껴진 적이 없다. 목숨을 염려하여 모이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 가운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증거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을 다룬다는 것, 너무 이질적인 이야기 같다. 나 하나 혹은 우리 가족 하나 챙기기 버거운 현실 가운데 자기 것을 내어놓으며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던 성도들을 만난다는 것,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초대교회가 믿는 예수님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같다. 초대교회가 받은 성령과 우리가 받은 성령도 같다. 그들이 붙잡은 복음과 우리가 붙잡은 복음이 같다. 그들과 우리의 사명이 다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왜 이렇게 차이가 느껴질까? 그들은 사명을 잊지 않고 목숨을 걸고 충성했고, 우리는 그 사명을 어쩌면 잊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강해를 하는 동안 주께서 우리가 받은 사명을 확실히 알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길 기도한다. 그래서 새로운 성도를 만나는 것도 감사하지만, 새로운 영적 가족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한다. 가족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나아가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충성하기 원한다.

 

1. 주님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使命: 사자로서 받은 명령)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그분의 첫 사자들(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명령을 주셨다(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 명령의 핵심인데, 누가가 평서형으로 쓴 이 문장을 마태는 명령형으로 기록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20)

 

예수님의 제자로서 계속해서 제자로 삼는 것, 그래서 예수님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얻은 새로운 증인이 그 일을 이어서 하게끔 훈련하는 것이다(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를 낳는 제자. 증인을 낳는 증인.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명의 바통을 이어받은 상태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사명을 지상대명령’, ‘대위임령이라 부른다. 이 땅에서 가장 큰, 우리에게 위임된 명령이기 때문이다.

 

2. 초대교회는 어떻게 사명에 순종했나?

 

사명을 위해 사도를 충원하다(1):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다락방으로 돌아온 초대교회 성도는 대략 120명이었는데(1:15),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열두 사도 중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를 택하는 것이었다. 기도 후에 그들은 맛디아를 사도의 수에 추가했다(1:15-26). ?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1:22). 사명을 위해서다.

 

사명을 위해 성령 충만을 받다(2):

 

며칠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다.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권능을 받아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전했는가? 복음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 ‘내 증인이 돼라는 사명에 순종했다. 그 결과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다(2:41).

 

제자화: 교회는 더해진 성도를 제자로 훈련했다. 사도의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것(성찬), 기도하기를 힘썼는데, 이를 통해 제자화 곧 예수님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한 것이다(2:42).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랑을 실천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는 진실한 사랑을 통해 세상으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했다(2:42-47; 13:35). 이 일로 온 백성이 교회를 칭송하고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2:47). 사명을 위해서 많은 교인, 좋은 프로그램이 필요한 게 아니다. 참 제자가 필요하다.

 

사명 때문에 박해를 받다(3-4):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고, 그 표적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하지만 그 일로 박해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심문당한 공회 앞에 서게 되었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및 예수님을 부당하게 사형 판결 내린 원수들이 그대로 모인 자리에서 사도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했다. 다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했지만,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히 맞섰다(4:19-20). 죽어도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교회는 이 일로 더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그 결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4:31). 예수님 사랑을 나타내는 성도 사랑도 뜨겁게 실천했다(4:32-37).

 

사명을 안팎의 문제가 방해하다(5):

 

:

 

교회의 내부에 성령을 속이려는 범죄가 일어났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의 죄를 심판하시고 누룩을 제거하여 계속해서 예수님 증거하는 일에 막힘이 없게 하셨다(5:1-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5:11). 제자가 된다는 건 절대로 가벼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증언하는 예수님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

 

성령님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 계속해서 표적을 나타내셨고, 이를 통해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했다(5:12-16).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는 시기심에 불타올라 그들을 옥에 가뒀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다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자(5:20), 이튿날 또 그들을 잡아 공회에 세웠다(5:17-27). 이번엔 위협으로 그치지 않고 채찍질을 했는데, 사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예수님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며 날마다 성전, 집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을 가르치고 전도했다(5:41-42). 사명을 감당하며 매 맞는 일을 오히려 특권으로 여겼다. 그만큼 사명에 사로잡혀 있었다.

 

(6):

 

교회를 갈라놓을 만한 큰 문제가 생겼다. 유대인과 헬라인 과부 중 헬라인 과부가 구제에 빠진 것이다. 교회를 갈라놓을 만한 원망이 생겨났을 때 교회는 대사명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성령 충만한 일꾼을 세워 그 일을 감당하게 하고, 계속해서 사도들을 중심으로 말씀과 기도 곧 예수를 증언하는 핵심 사역에 힘을 쏟았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6:4). 그 결과 하나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6:7).

 

(7):

 

스데반이 예수를 증언하다 잡혔고 공회 앞에서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하지만 스데반은 이 기회를 통해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설교 중 가장 강력한 설교였다. 또한 스데반은 죽는 모습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증언했다(59-60). 그는 그가 증언한 예수님의 영광을 죽기 전에 보았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니라(바울). 스데반이 먼저 그런 삶을 살았고 그런 죽음을 택했다.

 

사명이 확장되다(8):

 

스데반의 순교로 본격적인 핍박이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쳤다. 사도들 외에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오히려 예수님 말씀대로 복음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흩어진 성도들이 숨어지낸 것이 아니라 흩어진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8:4). 대표적인 인물로 빌립이 등장한다. 교회는 핍박으로 삶의 터전과 안녕을 포기해도 사명은 포기 안 했다.

 

원수를 사명자로 삼으시다(9):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한 주범은 사울이다. 그는 흩어진 성도까지 모두 잡아 교회를 완전히 잔멸하기 원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허락 하에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가리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말씀하셨다(9:15). 주님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은 그렇게 예수를 증언하는 사명자로 바꾸셨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 사명자가 세워졌다.

 

사명이 땅끝까지 확장되다(10-12):

 

교회가 예수를 증언하는 일, 제자를 삼는 일에 이토록 헌신했지만,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소외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방인이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의 구원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성령님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그리고 베드로에게 각각 말씀하시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할 때 오순절과 똑같은 권능을 베푸심으로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고백하게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1:18). 이제 사명은 이방인까지 확장되었다. 모든 민족에게 열린 것이다.

 

복음은 민족적으로 모두에게 열렸지만, 지역적으로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에만 선포됐다. 이제 누군가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성령님은 이제 그 일을 행할 사자들을 세우실 것이었고(13), 그 전에 그들을 파송할 교회를 안디옥에 세우셨다(1119-30). 안디옥 교회는 주님이 세우실 일꾼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섬기는 교회였다(11:26).

 

12장과 13장을 연결하는 마지막 지점에 흥미로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던 야고보가 순교했다(12:2), 베드로도 거의 죽을 뻔했다가 주의 사자가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옥에서 빠져나왔고 무대에서 사라진다(12:5-19). 핵심 인물이 베드로에서 바울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명이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에서 모든 민족에게로 전달된다.

 

12장 마지막엔 헤롯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한 장본인이다. 그는 하나님 영광을 가로막고 교만하게 자기를 높이는 범죄의 대가로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12:20-25). 그리고 이제 13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나타낼 이들, 예수를 증언할 이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선포할 증인들이 세워질 차례다.

 

3. 우리는 어떻게 사명에 순종할까?

 

사도행전 1-12장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사명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초대 교회는 사명에 충성했다. 일상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도들이 말씀 사역과 기도에 헌신했고, 성도들도 일상을 살면서 사명을 잊지 않았다. 교회 안팎의 문제가 일어나도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명을 감당하느라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특권으로 여기고 기뻐했다. 흩어지면 흩어진 곳에서 사명을 감당했다. 가르침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 섬김에 오로지 힘쓰는 참 제자가 되어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에 똘똘 뭉쳤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어떻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충성할 수 있을까?

 

먼저 예외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사명자다. 성경엔 구원받은 목적을 여러 가지로 밝히는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2:14),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8:29),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2:7),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벧전 2:9), 모두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면 선하신 주님이 증거된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으면 아들의 형상을 세상이 본다. 풍성한 은혜를 나타내면 은혜의 주님이 선포된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할 때 주인공은 단연 아름다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명을 위하여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은 직장인에게 주께 하듯일하라고 한다(6:7). 그러면 주님이 증거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고 명령한다. 십자가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신 예수님이 나타나도록.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한다(6:4). 주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제자화). 자녀 양육은 확실히 대위임령의 일환이다.

 

남편이 아내를 주가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교회가 주께 하듯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 그럴 때 누가 증거되겠는가? 예수님이다(5:22-33). 부부생활도 대위임령의 일환이다.

 

성도를 사랑하되 주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뜨겁게 끝까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이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누구의 제자로 알아보는가? 주님의 제자다(13:35). 성도 사랑도 대위임령의 일환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내 증인이 돼라는 예수님의 사명과 직결되어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아들을 통해 나타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전 10:31). 그러므로 사명을 잊으면 우리는 일상의 목적을 잃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결산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청지기는 맡겨진 임무를 땅에 묻고 살 수 없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세우라. 사명을 붙들고 죽도록 충성하라.

 

 

 

사도행전의 시작 /1:1-2/ 조정의목사

2020-09-18 02:48:41

 

오늘부터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려 한다. 우리는 2015322일 누가복음 11~4절 설교를 시작으로 20196월까지 약 43개월 정도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자세히 살펴봤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분이 하신 일, 나아가 그분이 명령하신 일이 무엇인지 배웠다.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 배웠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는 시점부터 시작되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역사서, 사도행전 말씀을 나누려 한다. 누가복음과 함께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1/4을 차지한다.

 

사도행전은 영화로 치면 스케일이 매우 큰 영화다. 유럽, 아시아, 중동 등에 위치한 30개 이상의 나라 5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 올로케 촬영.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60명을 포함한 100명의 인물 등장. 1세기 지리, 지역, 정치, 종교, 관습, 항해 등 다양한 문화와 정보 풍부. 신약 다른 성경에서 사용된 적 없는 단어 400개 이상 사용.

 

단순히 스케일만 큰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엔 분명한 교훈이 담겨있다. 사도행전의 1/5이 사도의 가르침으로 채워졌다. 거의 대부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강해 설교 형식이다. 그들의 성경이었던 70인역 성경(BC 4세기경,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LXX라고도 부름)을 대부분 그대로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한다(시편 10, 5, 이사야 3, 소선지서 4, 직간접 인용, 암시, 반영, 어투 사용).

 

역사서로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약 3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와 그들이 전파한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 로마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오늘은 1-2절을 통해 이 책을 쓴 사람(저자)과 대상(수신자), 그리고 줄거리를 살펴보기 원한다. 누가 썼는가?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가? 무슨 내용인가? 사도행전의 시작(1:1-2).

 

 

1절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절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1. 저자: 누가 썼는가?

 

본문 1절에 저자에 대한 정보가 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여기서 저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그가 사도행전에 앞서 한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받는 사람인 데오빌로의 이름이 매우 익숙한데, 누가복음 13절에 누가복음의 저자가 그 이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을 쓴 저자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가 같다는 걸 알 수 있고, 그가 먼저 쓴 글이 누가복음, 나중에 쓴 글이 사도행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저자를 알 수 있는 다음 힌트는 사도행전 본문에 종종 등장하는 우리라는 표현이다. 바울의 2, 3차 전도 여행과 로마로 호송하는 여정을 기록할 때 우리라는 표현이 계속 등장한다(16, 20-21, 27-28). 그러므로 저자는 바울의 복음 동역자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동역한 일꾼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사도행전에 바울의 동역자로 등장한 인물과 겹친다. 하지만 누가의 이름은 서신서에 나오지만(4:14), 사도행전엔 나오지 않는다.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누가가 저자이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우리라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은 대표적으로 AD 180년 이레니우스가 증언했고 3세기 초부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강력한 외적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누가는 아마도 바울의 가택 연금 시기 즉 60년대 초반이나 늦어도 바울이 순교 당하기 전(67)에 사도행전을 기록했을 것이다.

 

저자가 누가란 걸 알았으니, 우리는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누가가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을 사실적이고 상세하며 체계적으로 기록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사도행전의 역사의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산증인이 아닌가. 우리는 생생한 성령의 역사를 누가를 통해 들을 수 있다.

 

2. 수신자: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가?

 

 

1절데오빌로여

 

본문의 시작부터 누가는(원어는 1절 중반) 독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혔다. 데오빌로. 누가복음에선 데오빌로 각하”(1:3).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θεόφιλος 떼오+필로스). 사회적 위치는 각하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높은 지위 아마도 로마 정부 관료 내지 지방 관료였을 것이다. 데오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거나 믿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며(“각하가 알고 있는 바”, 1:3), 어쩌면 그는 누가복음과 함께 사도행전을 기록할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해줬을지도 모른다.

 

사도행전이 누가복음과 같은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면 독자는 단지 데오빌로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이제 막 들어온 흩어져 있는 여러 신자를 포함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사역을 설명하며 그들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해 누가복음이 기록된 것처럼, 사도행전 역시 같은 대상을 위해 그들의 믿음을 더 굳건히 하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신실하게 순종하도록 격려하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 굳건해지기를 소원한다. 확실한 믿음에 사로잡힌 초대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했는지 보고 배우기 원한다. 수많은 박해와 장애물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보게 되기를 간절히 구한다. 사도행전이 전파되는 기간 동안 우리가 말씀으로 도전과 권면을 받고 철저히 하나님께 구하며 의지하게 되기를,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3. 줄거리: 무슨 내용인가?

 

 

1절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절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오늘 본문엔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쓴 글의 요약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아니라 누가가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앞으로 우리가 차근차근 살펴보며 파악하겠지만 우리는 저자가 직접 요약한 누가복음의 줄거리를 통해 후속편 사도행전의 줄거리를 예측할 수 있다.

 

누가는 먼저 쓴 글에 대하여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소개한다. 무릇은 각각’, ‘모든이란 뜻을 가졌으며 그래서 첫째,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둘째, 그분이 가르치신 내용이(사역+설교) 그분의 공적 사역 시작부터 2절에 나오는 승천하신 날까지각각, 모두 상세히 기록됐다는 걸 의미한다.

 

누가는 먼저 쓴 글 누가복음에서 매우 강조한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을 여기서 말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 중대한 사건이 전제되어 있긴 하다(‘승천하신 날’, 2). 누가는 오히려 누가복음의 마지막 열 구절의 내용을 요약하여 두 번째 책 서론에 과감히 기록했다: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통해 자신을 증언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그 후 제자들 앞에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려지셨다(24:44-53).

 

1)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44절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하시고 45절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 그가 택하신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의 성취라는 걸 깨달았다.

 

 

46절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절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절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아버지 하나님의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단지 그분이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47절부터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된 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은 바로 48절에 나오는 너희곧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이었다.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중대한 사명을 성령을 약속하며 사도들에게 내리셨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주신 능력의 영이다. 그 영으로 입혀질 때까지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머물러야 했다.

 

누가복음의 이 내용을 두 번째 책에선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2)”라고 요약했다.

 

2)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

 

누가복음의 마지막 50-53절 내용은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시는 날까지의 일(2)”로 요약되었다.

 

 

50절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절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절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절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사도들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베다니 앞까지 나갔고,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그분께 경배했다. 그들은 슬픔이나 두려움, 걱정과 염려에 휩싸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

 

잡히시던 날 밤 거처를 예비하러 그들을 떠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두려워하며 방황했던 제자들(14),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 이렇게 고백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 목자가 있을 때도 방황했던 제자들이 목자가 떠나고 어떻게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첫째, 그들이 하나님의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사명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 이 사명을 확실히 알았고 붙잡았다.

 

둘째, 그 사명을 담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곧 그들에게 능력의 영,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14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러 제자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성령의 능력으로 입혀지기를 간절히 구하며 사모했던 것이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사도들이 주님께 받은 사명에 어떻게 충성했는지, 어떻게 행했는지 기록한 내용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땅끝까지 목숨을 다하기까지 증인이 되었다.

 

다른 측면에서 사도행전의 진짜 제목은 성령행전이다. 사도들이 자기 힘으로 이 사명을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셨다. 성령이 그들을 담대하게 하셨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시고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믿는 무리를 굳게 세우신 분, 바울과 바나바를 세워 복음을 세계 여러 지방까지 폭발적으로 전달하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다.

 

물론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여러 가지 중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어떻게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는지, 초대교회가 어떻게 믿지 않는 세상 속에서 새 언약의 백성 역할을 충성스럽게 행했는지, 구원이 어떻게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흘러가게 되었는지, 구약의 복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 시대 완성되었는지, 교회 안에 직분을 세우고 징계를 내리며 회의를 하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지키셨는지 배울 수 있다. 또한 선교에 관한 열정을 얻을 수 있고, 복음에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사명을 되새길 수 있다.

 

누가가 쓴 사도행전은 28장까지 있다. 하지만 성령님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 여전히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사명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 교회를 통해 사도행전 29장이 지금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 원한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사도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이 기록하신 사명을 분명히 깨닫게 하신 것처럼,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러 성경 전체 말씀을 통해 오늘날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가 이 땅에서 분명히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그리스도는 지금도 오직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신다.

 

또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가까이 두고 그분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며 온전히 그분을 의지함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큰일을 이루시기를 갈망하기 원한다. 물론 초대교회 처음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강력하게 나타난 이적과 기사를 오늘날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성령이 소멸되시거나 힘을 잃어버리신 건 결코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능히 이기게 하시기를, 잠들어 있다면 우리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기를, 사명을 잊었다면 또렷이 기억나게 하시기를, 소극적으로 사명에 임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고난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시기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삶이 종교 생활이나 개인과 가족의 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잃어버린 영혼을 불 속에서 구하고 비방이나 핍박 심지어 순교의 칼이 목에 들어와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명령하신, 가장 중요한 우리의 정체성임을 늘 잊지 않게 하시기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지혜를 더하시기를 간절히 구한다.

 

 

 

내 증인이 되리라 /1:3-11/ 조정의목사

2020-09-18 02:45:28

 

오늘은 사도행전 두 번째 시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날까지 하신 일에 관하여 살펴보기 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 일을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눈앞에서 승천하셨다. 한 달 넘게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님이 집중적으로 하신 일은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시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1:8). 예수님은 곧 그들을 떠나실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 없이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으로 충성스럽게 행해야 했다. 그래서 사십 일간 예수님은 그들을 특별히 훈련하셨다. 그들이 증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시는 데 총력을 다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1)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셨고, 2) 성령으로 세례받은 증인이 되게 하셨으며, 3) 하나님의 권한 을 인정하는 증인이 되게 하셨고, 4) 다시오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1)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 2) 성령의 능력, 3) 하나님의 권한 인정, 4)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필요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우리도 예수님의 특별 훈련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훈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으로 살도록 빚으시길 원한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3)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바로 승천하셨다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라고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전까지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숨 쉬며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던 사람, 메시아로 착각했던 사람에 불과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들의 말을 허탄한 듯 듣고 믿지 않았고,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믿지 못했다. 엠마오로 간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경을 풀어 증명해주신 예수님을 증언했어도, 그들 중에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놀라고 무서워 귀신 보는 것처럼 여기고 마음에 의심했다(24). 그런 반신반의 상태로 어떻게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겠는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모르면서 어떻게 목숨 걸고 예수님을 땅끝까지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나타나 살아나셨다는 것을 확증하고 그들이 전파할 메시지를 분명히 가르치셔야 했다.

 

 

3절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고난 받으신 후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확실히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다. 심증과 물증을 많이 남기셨다는 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다는 말이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친히 보여주시고 음식을 잡수시거나 옆구리, 손과 발을 만져보게 하셔서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셨다(24:39-43).

 

사복음서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예수님은 적어도 막달라 마리아(16:9-11; 20:11-18), 무덤가 여인들(28:8-10),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24:34; 고전 15:5), 엠마오로 간 두 제자(16:12-13; 24:13-35), 닫힌 문 뒤에 있던 열 제자(도마 제외, 24:36-43; 20:19-25), 열한 제자(도마 포함, 16:14; 20:26-31; 고전 15:5), 갈릴리에 고기 잡으러 갔던 일곱 제자(21:1-14), 갈릴리 산에서 만난 열한 제자(28:16-20; 16:15-18), 오백여 명의 군중(고전 15:6), 형제 야고보(고전 15:7) 등 수많은 사람에게 친히 자신을 여러 번 나타내셨다. 사십 일 동안 그렇게 하셨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계속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건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오랜 기간 여러 차례 친히 자신을 나타내셨다.

 

사십 일 동안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천국 비유-달란트, 전도 훈련), 이제 그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 제자들에게 맡겨진 것이고, 그 사명을 맡기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참 메시아이고 그들이 전파할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얼마나 확실하고 진실하한 것인지 친히 증명하셨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폭발적인 전도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확실한 증거를 많이 보여주심으로 예수께서 살아계심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의 일,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증인은 우리다. 우리는 고대문서에 나오는 허구 인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영웅을 전파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며,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은 죄로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을 몸도 다시 살리는 복음이다. 자신감 없이 소극적으로 말하거나 창피해하지 말라. 담대하게 부활의 주를 증언하라.

 

2. 성령으로 세례받은 증인(4-5)

 

예수님은 이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다. 그 말은 하나님 나라의 일, 사명이 오롯이 제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의심 많고 연약한 제자들, 두려워하며 낙심하는 그들을 예수님은 홀로 버려두실 것인가? 그렇지 않다.

 

 

4절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절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셨느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셨을 때(‘소금을 쳐서 먹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다. ?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대로(내게서 들은 바, 14:16-17),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몇 날이 못되어 제자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승천하신 후 열흘 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했던 말을 기억나게 하셨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6). 요한의 말대로 예수님은 며칠 후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능력과 지혜를 더하셨다(3:22). 마찬가지로 곧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 세례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 기쁨을 부어주사 그들로 하나님 나라 일, 증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에 따라 말했으며(2:4), 성령에 충만하여 백성 관리와 장로들과 맞섰고(4:8),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4:31), 성령으로 교회의 범죄를 다루고(5:3), 성령으로 일꾼을 세웠고(6:3-5; 20:28),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고(8:29), 성령의 위로를 받고 기뻐했으며(9:31; 13:52), 성령으로 이방인뿐만 아니라 많은 영혼의 거듭남을 경험했고(10:45), 성령에 따라 선교사를 파송하고(13:2), 선교지를 결정했다(16:6; 20:22).

 

사도행전에 기록된 폭발적인 전도의 능력은 오직 성령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70번 등장). 예수님은 살아계심을 증명하셔서 제자들이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확신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셔서 증인의 역할을 능력있게 하도록 만드셨다.

 

우리는 이 땅에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 우리의 손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달려있다는 과도한 부담을 안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그러므로 증인의 삶은 홀로 무거운 책임감 아래 완수하지 못할 목표를 향하여 억지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그분이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목표를 향하여 기쁨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롭고 능력있게 나타내시기를 간절히 구하라. 그리고 그분의 도움과 인도에 따라 기쁨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라.

 

3. 하나님의 권한을 인정하는 증인(6-9)

 

 

6절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하니 7절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절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니라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한 이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믿지 않는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 영적() 이스라엘이라 믿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불못만 남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무슨 말이냐? 이제 내 나라는 교회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서신서와 계시록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다. 천년 동안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천하를 통치하실 것이다.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계획이 아니라 때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크로누스)는 순수한 연대를, 시기(카이푸스)는 시대의 특징과 상황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언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지 그때가 시작되는 징조나 특징이 무엇일지 알려고 하지 말라고 못 박으셨다. 추측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 아버지만 아신다(24:36,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권한에 두신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대신 이 일에 집중하기 원하셨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 세례를 받고 그 능력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이 거절당하고 죽임당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온 유대인의 땅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원수이자 상종하지 못할 자들로 여긴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는 곳,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힘쓰라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믿는 관점을 가진 교회가 복음에 열정을 보이면서도 예수님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명하신 때와 시기를 추측하고 헤아리는 일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진, 온난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지구멸망설, 베리 칩, 3 성전 등 각종 징조나 특징으로 주 오심을 계산하고 추측하는 일에서 손을 떼라.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 아래 두신 것에 신경을 쓰지 마라. 동기부여가 된다? 휴거를 기다리는 우리는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늘도 임하실 수 있다는 걸 믿는다. 그걸로 충분히 동기부여가 된다.

 

오직 우리가 전심전력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는 것을 어떻게든 훔쳐보려는게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이 명하신 일이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20).

 

세상 끝 날이 언제인지 계산하지 말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으로 그분이 맡겨주신 사명에만 전심으로 충성하라. 예수의 증인되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전심으로 할 일이다.

 

4.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증인(9-11)

 

 

9절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절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절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하였느니라

 

9-11절은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가진 사명에 관한 이해를 바로 잡아주신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셨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3km) 나가셨다고 말했는데(24:50), 12절을 보면 제자들은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1km). 베다니가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동네였기 때문에 베다니 앞감람원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승천 장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셨을까? 왜 하늘로 올려져 가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왜 그냥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시고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을까? 누가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누가는 예수님이 올려져 가셨다고 말한다. 나중에 두 사람(천사)이 제자들에게 말할 때도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신 것이다.

 

누가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셨는가? 하나님 아버지시다. 올려져 가신 예수님을 구름이 가리어 보이지 않게했다. 구름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실 때, 성막과 성전 위에 임하실 때(13:21-22; 16:10; 19:9), 예수님이 변화되셨을 때 이는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실 때(9:35)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와 함께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셨고, 구름과 함께 나타나 아들을 맞이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올라가실 때에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이 모든 장면을 목격했다.

 

여기서 승천의 의미가 끝난 게 아니다. 두 사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홀연히 나타났다(원문에는 이두, ‘갑자기포함).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 제자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열 한 제자 모두 갈릴리 출신),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약간의 책망이 담겨있다. 하늘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 올려지셨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10절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만물을 충만하게하시려고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가 되셨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제자들이 이 땅에서 증인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통치자와 중보자로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할 수 있다(스데반,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5).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 보좌와 함께 그들이 본 그대로 통치하러 이 땅에 내려 오실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가? 주님이 왕국을 이끌고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 분명하니 세상이 제자들을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환난, 핍박, 비방, 순교),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이기며 맡겨진 임무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증인인 우리도 그분의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린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우리 삶과 만물을 통치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증인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교회를 비방하고 복음을 무시하며 그리스도인을 거스르는 세상과 맞서 싸우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말하고 행동할 때, 주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분명히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지고 있는 게임이 아니라 이기고 있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담대하게 승리의 주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다.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능력의 증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한을 겸손히 인정하며 오직 전심전력으로 주를 증거하는 증인이다. 우리는 지금도 만물을 통치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다시 오실 만 왕의 왕을 선포하는 증인이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라.

 

 

 

너희가 세상을 변화시키리라 /1:4-11/ 유기성 목사

2016-08-05 14:50:39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강해가 끝나고 하나님의 강한 인도하심으로 오늘부터 사도행전 강해설교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영광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 복음에서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강력하게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강해를 하면서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일로 인해서 굉장히 마음이 흥분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사람의 감정으로 흥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 온 세상에 나아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 뒤 큰 권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불과 몇일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예루살렘 시민들이 3천명, 5천명씩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에서처럼 가족들의 회심도 일어났습니다. 개인 회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란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두 주간 동안 다녀올 성지순례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로마에 있는 카타콤. 지하 공동묘지입니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피해 집도 버리고, 재산도 포기하고, 공동묘지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하 공동묘지에서 지낸 것입니다.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죽기를 몇 대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 지하 동굴에 묻힌 시신만 200만구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인구가 100만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의 시신이 이 카타콤에 묻힌 것입니다.

어떻게 로마 교회 성도들이 300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을 지키며 카타콤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정말 흥미진진한 성경입니다. 이런 부흥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다고 믿지만, 성령의 권능은 일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하여 들으면 나도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지만, 성령의 권능에 대하여 들으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 나는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는 신앙 생활은 내 체질하고 잘 안 맞아!..”하고 별의별 의견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해당된다면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도 모든 기독교인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일이 사도행전을 같이 읽어내려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약속하신 삶은 권능의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어느 기관에서 불신자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예수 믿는 사람은 술 담배 안한다가 첫째이고, 제사를 거부한다, 욕하지 않는다, 예배드린다, 기도한다, 전도한다, 말 잘 듣고 성실하다. 그러나 좀 나약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인 상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상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은 정말 술 담배 안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수 믿는 사람 모습이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도전적입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전쟁터로 나가면서 군대 맨 앞에 성가대를 앞장 세워 행진했던 여호사밧 왕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이런 발상을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할 수 없는 위협과 방해 앞에서 한 손에 칼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쟁기를 들고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했던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권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도무지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잡아 죽이고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였습니다. 감히 접근하기 힘든 사내였습니다. 언제부터 삼손이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할 때였습니다. (15:14)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받고온 세상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모두 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원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데 약간 과장을 해서 고생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편안하게 지낸 이야기는 절대 안합니다.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 표정을 보면 그때가 좋았어요.”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생할 때는 방위가 부러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전방 부대에서 고생한 사람 앞에서 방위 출신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다 해병대 출신 앞에서는 입을 다뭅니다. 특수부대 출신 앞에서는 모두 조용합니다. 고생하던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때가 좋았어!” 합니다. 편안하고 쉬고 즐기는 시간을 좋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천국에 가서도 이 세상 사는 동안에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은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놀라운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기시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어떤 역사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지만, 뭔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을 이루고 난 다음에 느끼는 희열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기쁨은 편안하고 조용히 살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내고 승리를 노래하고 흥분이 가득한 삶을 살 때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셔서 주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창조 원형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을 때 그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시 회복시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받은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주변에 아이들을 거느린 조용하고 인자하신 남자였습니다. 예수님의 그림이 거의 다 그렇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선한목자 교회이지만 항상 예수님은 어린 양 한 마리를 품에 안으시고 많은 양떼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다른 인상에 대하여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너무 거칠고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반드시 죽여야 될만큼 위험한 인물, 그냥 살려두면 너무너무 위험한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빌라도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를 대적하는 무리에게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풍랑 위를 걸어보신 예수님, 5천 명이 배고파할 때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제자들에게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예수님,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님.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로마 병정들에게 내가 예수다!”하고 당당히 걸어나오신 분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도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도 어떻게 보면 모험을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에게 물매만 들려 골리앗에게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에게 사자 굴에 세 친구에게 풀무불에 가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군대를 세울 때 모여든 32천 명을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어떻게 보면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권능이 없다면 하실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이 이렇게 권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지만 아직 성령 세례를 알지 못하고 권능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습니까?

 

오늘 여기에 성령의 권능을 받는 계획에서 애초에 하나님께서 제외시켜 놓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성령의 권능을 부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권능을 받는 삶을 살게 되는가?

8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을 단순히 성경 구절로 받지 말고 나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받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이 약속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할 것이라고 믿지 못합니다. 나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늘 그 믿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려움이 올 때마다 하늘만 쳐다보면서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 예수 믿는데 왜 나는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습니까? 예수님 언제 오십니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목이 빠져라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을 때 천사가 나타나 답답하여 말했습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권능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믿사남 모임에서 한 집사님이 고백하시기를 자신은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자발적으로 새벽기도회에 나오기는 지난 주간이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을 멸시하고 살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기도회 중 변기수 목사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서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를 말씀하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 열 명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있는 온 회중에게 나타나 이들을 지켜주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백성을 가리켜 나를 멸시한 백성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광야에서 죽이리라 하셨습니다.

 

이 집사님에게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았던 것 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셨는데, 안 믿는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16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세례를 이미 받았거나 받지 않아도 된다면 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 부분이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 정도면 예수를 믿어도 너무나 잘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음 49절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하였습니다.

 

예수를 통해 죄 사함, 천국, 영생을 알게 된 것은 너무도 큰 복이지만 그 다음에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을 것을 믿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전에는 먼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여러분, 마음에 이것이 성령의 권능인가 보다 성령님께서 지금 내게 역사하셨어!’ 이런 답이 오기 전까지는 이제는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여, 성령께서 정말 내게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없다면 저는 이제부터 아무 말을 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명령을 철저히 지키면 반드시 성령의 권능을 힘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는 말씀이 믿어지지도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권능을 받으리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내 증인이 되리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그날로부터 기도에 전혀 힘썼습니다.

 

그러기를 열흘이 지나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큰 불덩어리가 각 사람의 심령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 입에서는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부터 제자들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영국에 유학하던 한 자매에게서 받은 편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자매가 영국에서 유학 중 향수병에 걸려서 집에 돌아오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교회도 오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달려오고 싶었답니다.

 

너무 힘들어 견딜 수 없던 어느 날, 살고 있던 집 주인인 영국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미칠 것 같은 마음에 문을 닫아 걸고 소리 소리 질렀답니다.

'하나님! 집에 가고 싶어요. 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고 교회도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나 어떻게 해요. 하나님, 유학이고 장래고 다 포기할 거예요. 나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엉엉 울면서 소리쳐 기도하는데. 그 순간 성령이 임했답니다. 방언이 터지면서 그렇게 애통한 눈물이 나오고 그리고 찬양이 나오더랍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영국이나 한국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 얌전한 자매가 거실에서 찬송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답니다. 그리고는 장장 4장에 걸친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여기에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했어요. 이렇게 기쁘고 평안하고 좋을 수가 없어요. 저 이제 한국에 가지 않아도 되요.’

 

환경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성령의 권능이 임하니까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고 견디지 못할 어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서울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잘 아는 집사님이 그 부흥회에 오신 것입니다. 직장에서 도무지 더 견딜 수가 없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안되어서 직장을 그만 둘 마음으로 한 주간 휴가를 내고 기도원에 올라간 마음으로 부흥회에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흥회 마지막 날, 그 집사님이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부흥회 때 은혜 받고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직장으로 돌아가렵니다. 제 직장이 제게 주신 사명지요 직장 동료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30분 일찍 출근하여 직장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부터 하겠습니다.” 환경과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집사님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한 것입니다. .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마음의 문제, 생활의 문제, 공부 문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제자훈련을 받았어도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지만, 성령세례를 받은 후부터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3,동안 예수님 뒤를 따라다닐 때는 예수님 따로, 제자 따로 있었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연합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예수님은 밖에 계신 분이 아니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64절에서 우리가 세례'받음으로 예수와 함께 연합해서 죽고 예수와 함께 연합해서 다시 사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세례로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을 계속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고 난 다음부터 예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복음의 역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이제부터 사도행전을 읽어가게 되겠습니다만, 흥미진진합니다. 정말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이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으로 사는 성도들의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를 생생하게 우리가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성령님으로 여러분 안에 와계신 주님을 주목하고 환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이미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무시받고 계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과 어떤 태도로 살고 있습니까? 늘 함께 계신 성령님께 한번 말을 걸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고 살지 는 않으십니까?

 

아내가 무시하고 바가지를 긁는 집에 어느 남편이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남편이 관심도 사랑도 하지 않는다면 그 아내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도 별로 환영 받지 않는 모임에는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령님을 그렇게 대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님을 필요로 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님 사모합니다. 저는 성령님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저에게 오시기 원합니다.

제 삶을 변화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 성령의 권능을 받으리라, 내 증인 되리라, 세상을 변화시키리라

하셨으니 제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증인되는 성도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족들에게 기쁨과 생명의 열매를 나눠주고 싶습니다.

저에게 오십시오. 사모합니다. 초청합니다.”

 

이렇게 입으로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들이 보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성령님을 초청하여야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와계신 주님을 기뻐하고 더 의지하고 입으로 감사를 고백하십시오.

 

리고 성령님께 계속해서 부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반드시 권능으로 역사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무너지고 하늘만 쳐다보지 마시고, 이미 여러분 안에 권능의 주체이신 성령님께서 와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성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성찬을 받을 때 여러분은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믿으십시오. 성찬을 받는 자로서 주님, 제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교회 사명에서나 주의 권능으로 쓰임받기 원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다같이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셔 감사합니다. 이제 성령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매일, 매주, 매달, 사사건건마다, 일을 할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성령이여 나를 새롭게 하시고 능력을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입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을 만민이 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1 /1:4-5/ 박영선목사

2015-07-30 15:31:53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니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4,5)

 

성경에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대망, 큰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나누어 보면 메시야가 오신다라는 약속과 성령이 임하신다는 약속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약속 속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봐서는 하나고 둘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창섹기 3:15에서 이미 여자의 후손에서 인류를 구원할 자가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은 후렴처럼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하며 신약은 메시야가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직도 유대인들은 오신 메시야를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오심을 두 번에 걸쳐서 설명합니다. 즉 처음에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자녀들의 회복인 영적인 회복과 두 번째는 역사적인 회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이것을 오해하고 있어서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으로는 저들이 바라는 메시야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에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한 선지자로 인정은 하지만 오신 메시야이신 하나님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만을 믿으며 그들을 유태교라고 해서 기독교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는 것같이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끼치는 여러 가지 특권들 중의 하나인 성령강림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이렇게 주님께서 이 세상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거룩한 나라를 새로 완성하시며 죽음이 없고 해함이 없는 나라를 시작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오신다! 오신다! 하는 구약 이야기에서부터 오셨다 하는 복음서,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는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로, 요한계시록의 예언된 인류 미래사는 아직도 다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셨고 주께서 다시 오실 그 사이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모든 신자의 마음 속에 임재하시는 사건이 여기 약속되어 있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실현되었고 지금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에게도 실제로 성령님께서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많은 힘과 위로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이루시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된 신분으로부터, 벌 받아 지옥에 갈 처지로부터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는 복된 자리로 인도해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완성하시며 그 일을 역사 속에서, 시간 곳에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이 있다는 동적인 신앙 개념을 갖기를 여러분에게 촉구했습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죄도 없고 악한 것도 없고 상하는 것도 없고 해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고 거룩과 의와 축복된 모든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백성들의 초대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알고 있고 지금까지 널리 사람들에게 전파된 기독교의 핵심되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더 많이 부르시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쓰고 계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자체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고 계시다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그도께서 오셔서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려 우리를 죄 사슬로부터 풀어 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같이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존재에 빛과 생명을 허락하사 우리의 인생, ,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죽어가던 영혼들을 구원해 내시는 일에 우리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그 일에 동참함으로써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수준이 깊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와 함께 만들어져 가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는 우리가 거기에 살 집을 짓고 먹을 우물을 파고 다닐 깃을 만들고 하는 것 이상으로 거기에서 살아야 할 백성들이 백성다와지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 곳에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난방 시설을 하고 꽃을 피게 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곳에서 살아야 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흠도 점도 주름 잡힌 것도 없는 자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속에서,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적인 개념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우리 인생을 바라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점진적인 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주께서 오십니다.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권세자, 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한 작업을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죄값을 치르는 동시에 우리를 붙잡고 있는 권세자를 없이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히브리서 2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마임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4-16)

 

우리를 꺼내기 위하여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없이 하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전리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권세자를 깨부수고 우리를 거기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작업이 있는 이후에,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그 자리에 소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20: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갖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주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그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종노릇 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꺼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십니다. 초대보다는 입적했다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가리켜 형제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물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내 자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적인 환경과 조건의 개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공부 잘하게 하려면 뭐부터 해야 합니까? 우선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자녀가 고3이면 부모도 고3이 됩니다. 공부 잘하도록 모든 배려를 해야 하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방을 따로 주고 새벽에 먼저 일어나 따뜻한 밥 해주고 독서실에 데려다 주고 잘 때도 시끄러울까봐 막아주고 감기 걸리지 않게 주의하며 1년을 지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물 가에까지 끌어갈 수는 있어도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과정을 잘 보십시오. 우리를 붙잡아 죄를 짓게 하고 악한 일을 시키던 주인을 깨부수고 우리를 구해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줬습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외적 조건의 개선으로 사람이 사람다와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 훈화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국토 방위에 전념하여 충성을 해야 하는가 내적인 동기 부여가 됩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더니 우리 자녀들이 독서실 간다면서 오락실 갔다 올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마음에 어떤한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로 성령강림이 갖는 가장 커다란 목적이 등장하게 됩니다. 에레미야 31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었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

 

이것이 유명한 새 언약에 대한 예언입니다. 옛날에 세운 언약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이든지 새 언약이든지 내용상으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옛 언약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구별했느냐 하면 그 언약의 성취 방법에서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31:32).

 

이것이 새 언약을 주는 이유가 됩니다. 옛날에는 그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외적 조건을 완벽하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 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내용은 같아도 내적 조건을 바꾸는 방법으로 달리 쓰겠다는 것입니다.

 

외적 조건인 공부방에 녹음기와 비데오, 미국인까지 붙여서 공부하게 해줘도 효과가 없으니 속을 고치는 도리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바로 속을 고치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내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이 옛날에는 벌 받을 자리에서 예수 믿어서 복받게 되었고 죽으면 천국 가고 이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목적, 한 완성을 향하여 어떤 과정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을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즉 시간 속에서 추진해 가고 계십니다. 역사 속에서 주께서 오시며 또 그 속에서 죽으시며 부활하시며 승천하시며 역사는 끝나도 시간은 계속해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에 있어서 중요하게 우리가 대비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창세기 3장으로 가면 인간이 맨 처음 타락을 하자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노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2-24)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하자 하나님과 같이 있지 못하게 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화염검으로 오는 길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내용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것은 우리인데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며 그 화해를 방해하는 모든 난관을 하나님 쪽에서 지금 해결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6장을 보시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1-3). 인간이 밤낮 나쁜 짓만 하니까 이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던 자리에서부터 우리를 완전히 내버려 두고 떠나가셨습니다.

 

구약성경이 인간의 타락을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두 가지 내용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던 장소로부터 쫓겨 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의 끈이 끊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와 계시던 성령님도 떠나고 이제 우리와 영원히 있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나 보십시오. 내쫓기고 함께 있기를 거부당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회복시키실 것을 구약에서 예언하시고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을 보시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28-30). 하나님께서 말일에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신을 충만히 부어서 우리와 함께 있으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으면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못 고칠 병도 낫고 못 붙을 학교도 붙고 사업도 되고 하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지금도 만들어 가고 계시고 완성하고야 말 것이며 그 일을 진행하는 중에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성령님도 드디어 오셨다 하는 시각에서 이 사건을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대학입시 준비를 언제부터 시킵니까? 보통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서두르는 사람이나 고3 때도 느긋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정상일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눈금들을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루시고야 말 것이며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져 가고 있는 동적인 신앙을 가지고 그런 의미의 진지함과 엄숙함,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눈금이 어디까지 왔나 하는 눈길이 없으면 나 혼자 살다가 문제에 부딫힐 때면 하나님을 찾고, 해결되면 다시 태엽이 풀리고 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는 반복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의 신앙이 어떤 초점을 향하여 모아지거나 쌓여가지 않고 흩어져 있는 코코블럭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이런 문제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밤새도록 기도하다가도 다른 분야에서는 어림없는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도무지 인격이나 사고방식이 어떤 방향성으로 모아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하나는 반짝이지만 모아지지 않고 전부 흩어져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가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권능은 율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0-58)

 

이 말씀들은 전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완성된다.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야 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갈등은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성경 말씀의 약속과 현실적인 나와의 차이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고 완성된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안되는가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성령님이 등장하시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1:21).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끝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태는 아닌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또 나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그가 오셨으니 기쁘다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며 건설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주된 대상물인 우리를 그 나라에 걸맞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로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꺼내신 것같이 집념과 열심과 능력과 지혜로 우리 자신은 내적으로부터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성령강림의 골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보증인 이유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변화가 성공될 수 밖에 없다는 우리 쪽의 확인이며 하나님 쪽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실패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고린도 후서 5장에 또 나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5-7)

 

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결과 맺을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케 하기 위해 외적 조건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도 분명하게 성공으로 끌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꺼내 올 때는 내가 너희의 남편이 되고 손을 잡아 왔어도 너희를 빼앗겼지만 이제는 손을 잡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겠다.너희 마음에 내 영을 주어 너의 마음으로부터 나를 따르는 자로 만들어서 이 일을 이루겠다고 해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게 와 계시는 것으로 보아 실패가 아닌 성공한다는 증거로 삼고 성령님이 실제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로마서 7장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도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5,6)

 

옛날에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는 죄와 사망이 우리의 주인이어서 좀처럼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사 우리를 주장하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전개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1-7)

 

육을 좇으면 죄를 짓고 영을 좇으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영을 좇느냐 육의 좇느냐의 선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8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8,9)

 

앞에 있는 성경 구절을 보면, 우리가 착한 생각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겠다고 하면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생각으로 하면 악한 것을 열매 맺으리라 하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육신을 좇아 행하면 육신의 일을, 사망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영을 좇아 하면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같이 되어 있는데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우리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누구 손아귀에 있는가를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있으면 내가 그 성령을 좇느냐 안 좇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게 와 있으면 나는 영에 속한자이고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 편에 든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자의 존재론이 나옵니다.

 

신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중 인격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느냐 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것으로 나를 보십니다. 성령이 죄를 좇겠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나를 평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것에 맞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이 하신 일을 그 분 혼자 하신 것으로 보지 않고 내가 같이 했다고 보아 주셔서 그것을 나누지 않고 성령을 나에게 보내셨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기도, 성령의 생각, 성령의 한숨, 성령의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취급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은 우리를 대언하며 우리 대신 우리 몫을 하나님 앞에서 하시며 동시에 우리를 변화시켜서 성령이 우리를 전부 사로잡을 때까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 가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0,11).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절의 앞에 있는 6-9절까지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도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이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과정을 잘 보십시오. 예수를 여러분이 언제부터 믿게 되었느냐 하면 개인의 이성이 동의 할 때부터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여러분 마음에 먼저 오신 성령이 하나님 편에 들어서 신자가 됩니다.

 

실제적으로 내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때는 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나를 부단히 간섭하사 이성의 눈을 뜨게 하고 난 다음입니다. 만일 나 혼자 공부한 것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의 복음된 은혜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비밀은 여러분 마음 속에서 좋은 신앙에 대한 결심이나 열정이나 성실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어떻게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오셔서 성경도 안 찾고 설교 시간에 졸기만 했는데 어느 날 친구가 기독교에 대해서 뭐라고 하니까 내가 할 말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늘 잠만 자고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던 내가 언젠가 보니 이미 많이 알고 있고 하나님 편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냥 놔 둬도 크고 싸워도 크고 비, 바람 맞아도 크듯이 생명은 자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입니까. 교회 성장론이나 신앙 교육이라는 것은 정리시켜 주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와 계셔서, 여러분을 주장하시고 여러분도 모르는 것을 여러분을 대신해서 기도하시며 안타까와하시며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사소한 대목에까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사실은 바꾸어 가고 간섭하고 인도해 가고 다듬고 완성시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강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래서 고린도 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1-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 깊은 사랑, 무한한 능력, 그 무궁한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그런데 그 마음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볼 때에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부합되는 자로 완성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녀라는 신분과 성령이 여러분 안에 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입니까? 완성을 향한 놀라운 현실적인 과정이며 엄연한 사실임을 기억하시고 다시는 절망하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더 많이 항복하고 깨우침을 받고 여러분의 모든 정성을 모아 성경이 요구하는 것같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악에게 지지 말며 그 나라가 오기를 고대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여러분의 여러분 되신 복락들, 영광들을 다듬어 나가시고 승리하시는 신앙생활을 권합니다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 -2 /1:4-5/ 박영선목사

2015-07-30 15:33:19

 

사도와 함께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4-5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시고 사도들로 하여금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예수를 믿은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들이라면 성령강림에 관한 문제가 신앙생활에 상당히 큰 문제성을 안고 있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고 또 직접 목도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성령강림을 왜 약속하셨고 성령을 보내시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성경 자체에서 찾아봐야 되고 성경에서 설명하고 의도하는 대로 추적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성령강림,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선물, 성령의 확인하시는 일들은 다른 사람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특별 취급을 받고 있는가 하는 데에 더 많이 오용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도 이런 것 때문에 많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강림 이후에는 한 번 설교에 삼천 명이나 회개시키는 역사를 일으켰으며 담대함을 가졌다,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신자의 신앙은 달라진다, 강해진다, 능력으로 가득차게 되고 기쁨과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된다 하는 것으로 많은 신자들이 이해하고 있고 또 경험하고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을 목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에 대한 약속을 그런 의미로 설명하거나 의도한 적이 없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종종 성령행전이라고도 별칭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초대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와 교회를 세우시는 것과 또 신자들의 모든 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셨는가 하는 것이 사도행전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경이 의도하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처음으로 추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어떤 목적과 어떤 의미로 약속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그의 누가복음 마지막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24:49).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이 누가에 의하면 능력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강림을 이해하고 있는 특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는다 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소개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들에게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약속하시고 성령강림 이후에 능력을 받아서 나가 그들의 사역을 완수했다고 하면 이야기는 쉽습니다만 성경에서는 한 번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그 사역을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성공으로 약속한 예가 없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을 통틀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나가서 전파하고 깨우치는 사역자들의 사역이, 그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라고 약속되어 시행되는 적이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에 이사야거 6장을 보십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8-10)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일을 자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시고 보내십니다만 보낼 때의 약속이 네가 가서 하는 것을 아무도 못 알아 들을 것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생애를 보내시는 동안에 늘 이사야 6:8 이하의 말씀을 언습하시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신약에서의 베드로에 관한 예언을 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21:18,19)

 

베드로의 끝은 분명히 순교인 것이 자명합니다. 그는 그가 원치 아니하는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마치니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주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고 지혜를 얻고 능력을 입히었다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령의 간섭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들, 예를 들면 예언을 한다든가 병을 고친다든가 감동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허락하셨으며 약속하신 것인가 하는 문제에까지는 손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령의 간섭은 지금도 있고 또 있어야 마땅하고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약속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 뜻과 약속들을 우리 마음대로 오용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면 성경이 성령강림,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사 함께 있게 하시는 이 일은 무슨 목적으로 약속하셨는가 하는 것을 추적할 필요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약속은 구약 요엘서에 예언되었던 일의 성취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요엘서 2장의 말씀을 봅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28,29). 또 신약에 나오는 성령강림에 대한 다른 설명을 봅시다. 요한복음 16장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3, 14)

 

성령을 보내시는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관한 깨우침, 진리에로의 인도, 진리 가운데서의 보호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이 묘하게도 요엘서 2장에 있는 말씀과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오심과 성령을 약속하신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래 일이라는 공통된 단어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4:26은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이쪽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는 다만 저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만 14:26에서는 더 뚜렷하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통된 몇 가지 내용을 추리해야 됩니다.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하는데 그것은 진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또한 이 진리는 주님에 관한 것이라는 이 셋을 묶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성령강림을 약속하시며 제자들이 사역에 들어가기 이전에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를 능력에 두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능력을 입히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신.구약을 통해 추적해 보면 능력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장래의 일과 진리에 관한 것으로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진리라는 차원에서부터 이 문제를 조금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언뜻보면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능력, 진리,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모아지느냐 하는 것은 성경을 차근차근 추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이며 그리고 같은 내용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 우선 이런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십시다.

 

성경이 신자와 신자 아닌 자를 나눌 때에 이 진리라는 단어로 나눕니다. 불신자는 진리에 의거해서 자신의 인생 목표와 방법을 삼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목표와 방법을 삼는 자이고 신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깨우치는 것을 벗어난 진리와 절대와 영원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인생의 목표와 방법을 가지는 자라고 나눕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예를 들면 디모데 후서 3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3-15)

 

불신자와 신자를 갈라 놓을 때 불신자의 생활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짓이라고 얘기 합니다.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면 설명이 조금 더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7-19)라고 얘기합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오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 할 때 진리라는 차원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감각하는 테두리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정하고 어떤 성취가 있고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서 신자는 지금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줄 아는 자들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는 것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담당하시는 이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내용 속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언제나 이런 몇가지가 포함됩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나라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 그쪽이 우월하고 우리가 그쪽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의 말 속에 십자가가 포함되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수 밖에 없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라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유일한 신 되심이 거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이 모든 진리들이 함축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요엘서의 주장이나 요한복음 14장이나 16장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설명이 그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엘서에서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 너희 자녀는 장래 일을 말 할 것이다,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고 표현했느냐고 하면 그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 입니다. 장래 일이라면 우리가 70-80년 살고 죽는 이후의 일, 우리의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길이보다 더한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역사와 영원이라는 나락 있음에 대한 깨우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한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꿈을 버리게 됩니다. 이제는 죽을 날만 남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꿈은 젊은이들이 갖지 늙은이들이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분명히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면 늙은이가 꿈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살아있는 것과 죽는 것 중 죽는 쪽이 더 행복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대에서 제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령, 대령에서 옷 벗으라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병장에서 옷 벗거나 상병, 일병에서 옷 벗게 해주면 더 좋습니다. 왜입니까? 제대하고 살 사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하고 끝이라면 곤란합니다.

 

신자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땅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인생이거 영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죽으면 그 다음이 있지 않습니까? 늙으면 늙을수록 꿈이 없고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천국에 가서 주를 뵈오리라, 이제 다가온다. 천국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왜 꿈이 없어집니까?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젊은이는 이사을 봅니까? 이 이상은 다를 이()자를 쓴 이상입니다. 젊을 때는 꿈이 많은 때입니다. 그림을 보면 미술가가 되고 싶고 음악회 가면 음악가가 되고 싶고 설교 들으면 목사되고 싶고 무엇이든지 다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그것들은 욕심에 속하는 데서 나오는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언제나 대통령이 되리라, 무슨 장관이 되리라, 과학자가 되리라 하는 등 인간의 생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에게 이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가 상상하지 못했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습격을 받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약속하신 이유입니다.

 

인생이 뭐냐,세계가 뭐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우리는 누구냐,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깨우침이 성경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 쪽으로 인도하시며 간섭하기 위하여 약속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일 필요한 것은 이런 것 아닙니까?

 

내가 어느 목적지를 분명히 선정하지 못하면 사실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은 참으로 이상해서 그가 정당한 목적지로 가고 있느냐, 정당한 방법으로 가고 있느냐는 하나도 안 따지고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있느냐만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방법같이 아주 우스운 것이 없습니다. 누가 열흘을 금식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고 그래서 그 다음 목표는 열 하루, 열 이틀이 되어 갑니다. ‘40일 금식 3회 실시라는 것을 명함에 써서 다니는 웃지 못 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했느냐, 내가 얼마나 금식했느냐가 자랑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얼마나 목적지에 접근되었느냐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한 잔도 안 자고 대학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떨어졌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왕 떨어졌으면 지난 해에 많이 놀았다고 해야 말이 맞지 않습니까? 실컷 놀아서 떨어졌지 밤새워 했는데 떨어졌다면 밤 새면서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진전, 누적, 쌓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이 마치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점이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부분에서 앞에서 우리가 읽은 디모데 후서 3장에 나오는 것 같이 저들이 속도 모르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알고 있는 자들 아니냐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오래전 20년도 넘은 때입니다. ‘자랑과 정열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소피아 로렌, 케리 그란트가 배우로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배경은 스페인 내란입니다. 민란이 일어나서 반란군들이 성을 공격하러 가는데 아무 무기가 없어서 어디서 큰 대포 하나를 구했습니다. 반란군의 장이 프랭크 시나트라이고 그 애인이 소피아 로렌인데 이 반란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서 장교 한 명이 밀파됩니다. 그 사람이 케리 그란트라고 기억이 납니다.

 

이 큰 대포를 끌고 가면서 정부군에게 들키지 말아야 합니다. 산길로 숨어서 가다가 어느 강에 도착했습니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케리 그란트가 부력 계산을 해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대포를 실으려고 합니다.

 

소피아 로렌을 사이에 두고 프랭크 시나트라와 케리 그란트가 삼각 관계가 됩니다. 용감한 것으로 치면 프랭크 시나트라가 앞서겠지만 영화의 대부분의 줄거리가 싸우러 가는 데까지여서 프랑크 시나트라는 고함만 쳤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속수무책 입니다. 모든 면에서 케리 그란트에게 지는 것입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속상하던 판에 강을 건너고자 하는 케리 그란트의 모습이 보기에 한심합니다. 대포는 큰데 뗏목 몇 개 수수깡 같이 붙여 놓고는 그 위에 대포를 띄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띄우면 가라 앉는다, 쇠는 물보다 무겁지 않느냐 그러니 어떻게 띄우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케리 그란트가 대포가 뜰 만큼의 부력을 계산해서 뗏목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프랭크 시나트라는 띄웠다가 가라 앉으면 어쩌느냐고 해서 둘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거기에 대한 진리가 없으면,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것은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띄웠다가 빠지면 할 수 없고 안 빠지면 다행이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합니다. ‘띄워봐라! 띄워서 가라앉으면 나도 넣어라.’ 이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래서 넣었더니 뜨는 것입니다. 다들 놀라지만 안 놀라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뜰까 안 뜰까를 염려한 것이 아니라 뜨는 것을 당연히 안 사람 쪽에서는 놀랄 일이 없습니다. 뜬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능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의 인생과 시간과 노력이 누적되어 갈 수 있는 목표와 방향과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을 능력있는 자라고 지금 지칭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은 우리에게 보내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한 깨우침과 그 사실에 관한 현실적인 준비와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은 약속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남과 비교하여 펄펄 뛰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남과 다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남보다 더 양보하고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도 양보 안 합니다. 싸움만 잘하고 밤낮 하는 자랑은 성령을 받아서 속이 사이다같이 튄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병이 나았다. 그런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을 허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입니다. 그러니 사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고달파집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그 기록들이 제시하고 있둣이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진리의 깨우침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쉽게 회개하고 항복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안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간섭하셔서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미련한 대로 결정을 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를 제어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볼 때, 자녀들이 부모가 있는 것을 고마워 할 때가 많습니까? 귀찮아 할 때가 많습니까? 귀찮아 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의 큰 책임 중의 하나가 자녀가 자기네들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게 간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 중의 가장 큰 욕이 저 놈들은 부모도 없나, 부모가 있다면 어떻게 저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보면 톰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이 허클베리 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안 가도 되고 세수를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어도 시비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흠이 있다는 손으로 집어 먹을 음식이 늘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 누가 무어라고 하는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겪는 아주 신비로운 경험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바로 우리의 계획과 뜻과 욕심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도록 간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십시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8:26-29)

 

성령이 직접 빌립을 좌우합니다. 빌립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아는 바도 없고 예지한 바도 없고 필요성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그를 강권하여 이 광야로 내보냈고 이 내시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가 전혀 모르던 일에 그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사건이라는 의미와 우리가 지금 인정하는 사건 속에서 이 일이 진행되어 있으니까 빌립이 대단한 사람이겠습니다만 빌립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이 오셔서 광야로 가라고 호통쳐서 몰아낸 것입니다. 광야는 좋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계획대로였다면 여러분 중에 이 자리에 있었을 사람이 몇 없었을 것입니다.

 

역시 사도행전 13장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를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게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슴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1-4).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성령께서 간섭하셔서 바나바와 바울을 보냅니다. 초대교회에서 만일 사람들끼리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을 하고 사람을 뽑았다면 누구를 뽑았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을 뽑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첫 설교에서도 이름을 남긴 자이고 성전 앞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사도들 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뜻 밖의 사람을 지목합니다. 이 둘은 원래 열 두 사도들에 끼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더욱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성령께서 훨씬 더 강하게 간섭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데 성령이 이렇게 간섭하십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열이 허락치 아니하시는지라.”(6,7)

 

만일 이때 성령께서 막지 아니하셨으면 구라파보다 아시아가 문명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성령께서 아시아로 못 가게 해서 결국 로마로 가서 유럽으로 복음이 먼저 전파되고 서쪽으로 돌아서 미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일이고 필요한 일 임에도 불구하고 막으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일단 없고 또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할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배워야 하며 거기에 있는 것을 습득해야 하며, 우리가 고쳐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나의 삶과 존재와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을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사 우리에게 이 일을 넉넉히 하도록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된 기록이 말하자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받는 위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손에 맡겨두지 않으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하거나 가만히 있어도 좋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하며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과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연약한 자이고 미련한 자인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신경써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대하여 민감할 준비를 하며 민감하게 반응할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우리의 생각에 민감하고 우리의 욕심에 훨씬 많이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내 욕심에 사로잡히면 종교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열심을 부리면서도 하나님 뜻에 합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령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우리로 장래를 내다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서 우리에게 깨우치사 우리를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자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이 얼마나 쉽게 하나의 스타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서 툭 튀어 나올 수 있는가를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많이 두렵게 점검하셔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바울에게 성령강림을 허락하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며 기뻐 뛰게 하시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셨지만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하여 쓰여질 수도 없고 쓰여진 적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그들의 뼈를 묻었고 소리없이 죽어갔던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주를 향하여 가진 모든 열심과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정열이 무엇을 위해서인가를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십 년의 인생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미국의 어떤 유명한 예언가에 의하면 서기 2100년 이전에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가 핵전쟁에 의해서든지 지진에 의해서든지 다른 공해에 의해서든지 잿더미가 될 것 이랍니다. 맞느냐 안 맞느냐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려는 허황된 꿈은 꾸지 마십시오. 미국에 가서 사는 것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우리의 목숨은 그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는 약속

 

할 수 있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이 지구가 종말을 고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종말을 고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여러분과 제가 죽는 날은 앞으로 50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준비를 왜 못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허락되어 있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 여러분을 말씀으로 인도하여 여러분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간섭하는 것을 왜 물리치고 여러분이 사회에서 이루어야 할 업적과 남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기 집념을 위하여 자존심을 세우는 일 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합니까?

 

왜 남에게 지지 못하며 양보 못하며 악에게 져서 악으로 악을 갚는 시험에 말려들고 있습니까? 왜 여러분 마음에서 평온을 빼앗기며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리에서 떠나 사람들이 박수치는 자리에 가 있습니까? 돌이키셔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 것과 그런 이유로 부름을 받지 않았던 것을 마음에 다시 한 번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새삼스럽게 결심하는 이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9/1:6-8/ 이동원 목사

2014-11-28 14:52:42

 

학생들 사이에 한창 유행하던 유머 시리즈 가운데 "엽기 고사성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험지에 나온 한자 고사성어들을 한 학생이 이렇게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동문 서답-동쪽 문을 닫으니 서쪽이 답답하다. 군계 일학-군대에서는 계급이 일단 학력보다 우선한다. 박학다식-아는 것은 없고 먹는 것만 탐한다. 희노 애락-희한하게 놀다보면 애가 태어난다. 새옹지마-새처럼 옹졸하게 지랄하지 말라.]

 

귀국하면서 비행기에서 신문을 보니까, 어제 나온 고사성어가 있다고 합니다. "노발대발-노씨가 발끈하니까, 대학이 발끈한다."

 

이런 유머의 재미는 예로부터 전래하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우리가 이런 단어들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유머는 유머임을 전제하니까 이런 단어 사용으로 상대에게 큰 손해를 입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머와 상관없이 진지하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상대에게 전혀 다른 뜻으로 전달되고 이해될 경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열리면서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러나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6절에 보면 제자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적인 나라 곧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로 오해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7절에서 때와 기한은 주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대답하시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상으로 가져야 할 우선순위적 과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8절의 말씀에 나타난 선교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일차적인 관심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아파트 값 오르는 것,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 출세하는 것,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변하지 않는 주님의 우선 순위는 선교입니다. 복음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행전1:8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교, 혹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사도행전 29"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사실상 28장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제목을 사도행전 29장으로 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시대 즉 1세기의 복음 선교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의 역사가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오늘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행전1:8의 말씀은 하나님의 세계 선교의 예언적인 열쇠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역사적인 세계 경영을 4가지 큰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단계-예루살렘과 유다의 선교단계

 

구약시대 전체와 신약 시대 초기까지는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 민족을 통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손길을 나타내는 시기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결코 세계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 대표 선수로 뽑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30명의 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한 학생을 대표로 교단위로 불러내어 문제를 풀게 하며 그가 잘할 때 칭찬하고 잘 못할 때 벌주면서 결코 나머지 29명의 학생을 잊은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 한 학생을 통하여 나머지 29명의 학생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잘하면 이렇게 칭찬받고 잘 못하면 동일하게 벌받는 다는 것입니다. 고전10:10-11을 보십시오.

 

"그들(이스라엘)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이방인)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래서 이 시기의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은 이스라엘 민족이었고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에워싼 남쪽으로 다윗의 유다 왕국의 못자리였습니다.

 

다윗의 왕국을 중심으로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시다가 메시야되신 예수님이 오신후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에게 이 복음을 온 세계에 전달할 준비를 위하여 성령을 부어 주시고 모든 성령받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십니다.(2) 그리고 사도행전3-7장까지 초기 교회 공동체를 내적으로 외적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2단계-사마리아와 이방인 선교 단계

 

사마리아 땅은 팔레스타인 내에 위치하고 엄격하게 말하면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라고 할수 있겠지만 실제적으로는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북쪽 지역에 존재하던 이 땅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외부의 적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항상 이곳을 지나며 점령당하는 역사를 경험했고 그 점령의 결과로 혼혈이 되었습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인들에게 멸망 당할 때 광범한 혼혈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혈통에 집착하던 전통적인 남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 가까운 이방이라고 할수 있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일상적으로 유대인들이 피해가던 사마리아를 의도적으로 찾아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한4:4)

 

그러나 행전1:8에서 사마리아에서도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명을 받고도 초대교인들은 아직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박해가 일어납니다. 행전8:1을 보십시오.

 

"사울은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리고 8:4-5을 보십시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러면 이때의 예루살렘 박해 사건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사마리아와 이방에게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습니까? 우리에게 선교의 순종이 없다면 이렇게 그는 박해까지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할래, 맞고 할래"입니다.

 

3단계-안디옥에서 로마까지의 선교단계

 

행전8장에서 12장까지는 이제 복음이 사마리아를 넘어서서 안디옥(터키-당시의 소아시아)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는 교회로 떠오르게 됩니다.

 

행전13-14장은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 행전15-18장까지는 제2차 선교여행, 그리고 18장에서 21장까지가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을 기록한다음 바울이 드디어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감옥생활을 한 다음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로마에서 재판받기 위해 드디어 사도행전 마지막 장 28장에서 배타고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로마행은 바울의 로마로 가기 위한 그의 기도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복음이 전해지기 까지는 세계 복음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그는 로마로 가기를 열망하고 로마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1: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는 재판 받기 위해 로마로 온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이런 방법으로 죄수가 되어 로마에 올 것을 예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신묘하신 섭리였는지요? 세가지 특별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1)죄수로 호송되어 왔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노리던 유대인들에게서 보호받을수 있었고, 2)교통비도 절약할수 있었고 3)바울은 특별한 죄수였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억류된 집에서 자기를 만나로 오는 로마의 관리들에게 앉아서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이들을 전도할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 28:30-31을 보십시오."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16--군인이 지킴)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온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할렐루야! 여기서 사도행전은 끝납니다. 이제부터는 행전 29장입니다.

 

4단계-로마이후의 선교시대

 

저는 로마이후의 선교시대를 다시 두 시대로 나눌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시대는 복음이 로마에서 시작하여 구미에 도달하기까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 2천년의 역사 곧 AD시대입니다.

 

이 시기의 끝머리에 복음은 한국 땅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로마를 통해 복음은 독일에 전해졌고 불란서, 화란, 북구라파, 스페인 반도 그리고 마침내 대 영제국에 전파되어 찬란한 구라파 기독교 문명시대를 열게 됩니다.

 

종교개혁 이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처음에 독일-덴막 모라비안교회를 시작으로 나중에 영국 교회 윌리암 케리의 인도 출발을 필두로 한 19세기 위대한 선교시대를 열게 됩니다.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복음은 신생제국 미국을 거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땅에도 상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8545일 부활절 오후 일제 미스비시 기선을 타고 온 벽안의 두 서양청년은 인천 제물포 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갑판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이 땅의 백성들을 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에서 이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시고 어둠속에 있는 이들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해달라"--

 

이 들이 바로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였습니다. 공식적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시대가 개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 한국 교회는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에 선교사를 둘째로 파송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4단계의 두 번째 시대, 선교의 마지막 시대를 함께 주목하고 싶습니다. 여러 선교학자들은 이 마지막 선교시대를 가르쳐"백투 예루살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선교 역사 방향을 살펴보면 복음은 계속해서 서진(westward)해 왔습니다.

 

이제 중국과 한국에 도달한 복음은 마지막으로 복음이 가장 전해지지 않은 지구상의 지역을 지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989년 필립핀 마닐라에서 로잔 선교대회가 열렸을 때 세계적인 선교학자들인 랄프 윈터(Ralph Winter)와 루이스 부쉬(Luis Bush)는 세계 24천 종족중에 11천 종족에 교회가 하나도 없다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나라로만 파악한 우리는 막연히 전세계에 복음이 대부분 전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님의 지상명령에 나타난 그대로 세상을 족속(종족)으로 파악했을 때 아직도 그렇게 많은 종족들이 복음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운동이 소위 미종족 선교 운동입니다. 그래서 전세계 교회들이 미전도 종족 입양운동을 시작했고 우리 교회도 위그르와 라오 두 개의 종족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여하간 세계 교회들의 노력으로 지난 15년동안 5천개 종족에 복음이 전해졌고 2004년 통계로 이제 약 6천개의 미전도 종족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미 전도 종족의 대분분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소위 북위 10/40창문지역에 위치하고 특히 고대 실크로드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슬람, 회교, 불교도들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내에서 예외적으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나라가 두 나라입니다. 한국과 중국(세계에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는 나라-1억 이천명)입니다. 중국 지하교회는 열악한 선교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미 최소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유명한 윈 형제가 쓴 책 "백투 예루살렘"의 서문에서 백투 예루살렘이란 수천 수만의 중국 성도들이 마지막 선교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기꺼이 죽기를 각오한 비전을 일컫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책 65페이지에 보면 처음 이 비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중국에서 예루살렘까지 이르는 그 도상에서의 선교를 위해 서쪽으로 떠난 두명의 남자와 다섯명의 여인중 한 자매가 출발을 하며 이런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까지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아마 도중에 죽을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시온산으로 향하는 대로에 우리의 피를 쏟겠습니다." 이제 한국 성도들의 결심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번 예루살렘 대 행진도 단순한 성지 관광이 아니라, 거기서 시작된 복음이 다시 그곳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이 마지막 시대에 그 땅을 밟으며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때니이까 /1:4-8/ 곽선희 목사

2014-11-27 08:15:35

 

성도 여러분, 프랑스의 화가 밀레(J. F. Millet)를 아마 다 아실 겁니다. 밀레하면 '만종'을 우리는 늘 생각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말씀입니다만 제 침실에도 비록 카피이지만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습니다. 밀레의 만종은 그 말 그대로 '저녁 종'입니다.

 

그런고로 밀레의 만종을 보면서 종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실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종소리를 그린 겁니다.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이 그림을 바로 감상했다 할 것입니다. 두 내외가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고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 그들은 서서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엄숙한 그림입니다.

 

밀레는 1814년서 1875년까지 살았는데요, 그는 농가에 살았고 빈곤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그리기보다 오히려 일하는 농민, 일하는 농사꾼, 그 자신을 그린 겁니다. 농민 생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그림이 만종, 이삭줍기, 씨 뿌리는 사람 뭐 이런 등등의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밀레의 만종을 흔히들 해석하기를 3대 신성이 있다고 합니다. 가정신성, 노동신성, 사회신성 이렇게 말해오고 있습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려워서 화방은 물론이고 화실도 없었고 조그만 집에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았답니다. 그래서 방안에서는 어림도 없고 부엌에서 이 그림을 그렸답니다. 그 부엌을 제가 얼마 전에 가 보았습니다.

 

만종을 그렸다고 하는 그 초라한 집 부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밀레가 그림을 그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들에 가서 일을 하는 한 사람의 농사꾼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내외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는 그림을 좀 그렸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활은 날로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어려웠는데 어느 날엔가 그림 하나가 아주 고가에 팔렸습니다. 너무 감격했고 생활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친구 집에 놀러가 보니까 친구 집에 그 고가에 팔린 그림이 거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친구 밀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의 후원금을 준 게 아니고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의 그림을 고가에 사 주었습니다.

 

밀레의 만종, 이 그림이 지금 한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보험금이 일천억 원 입니다. 도대체 이 그림이 얼마짜리라는 말입니까? 일천억 원의 보험을 들고 지금 이 그림이 한국을 방문하고 이제 전시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150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그림 한 폭이 이같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150년의 시간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성공을 이루기 위한 대체적인 4대 원리가 있습니다.

 

자본이 있고, 지식이 있고, 기술이 있고, 정열이 있어야 한다. 4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 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초조한 한 제자의 질문이 있습니다. 아주 불안할 정도로 초조한 가운데서 끈질긴 질문을 합니다. "주여, 이 때니이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하고 묻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물론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당시에 로마의 속국으로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많은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이 시대가 인류 역사에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 도덕정치종교 할 것 없이 다 썩어빠져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대망사상입니다.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고 메시아가 오기를 바랬습니다. 메시아가 오고야 메시아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학사상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Messianic Age, 메시아의 시대가 와서 메시아가 오는 게 아니고 메시아가 옴으로 메시아의 나라가 메시아의 세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Messianic Person.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저들은 철저하게 뭐 사회를 개혁하고 뭘 고치고 뭘 어떻게 하고 해서 메시아를 맞이하던가 메시아의 시대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늘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묵상하면서 계속적으로 그 메시아를 간절히,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칩니다. 율법을 강론합니다. , 오천 명을 먹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립니다. , 굉장한 일이 있고 바람을 조용하게 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생길 때에 이분이 메시아다, 확실히 이 분이 메시야다. 깊은 감동과 함께 그 분이 메시아 됨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끈질긴 질문으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여러 정황을 봐서 '이 분이 메시아다. 이 분이 메시아다, 확실히 메시야다' 그런 생각으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눈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메시아다. 이제 이 분이 왔으니 메시아의 시대가 올 것으로 크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아니 그 큰 능력은 다 어디가고 그 권세는 어디가고 십자가에 그대로 돌아가시고 맙니까. 그들의 절망감, 그들의 낙심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오직 한 가닥의 희망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여실히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뭐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꿈같은 얘기이고,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에 의심이 있지만 그래도 부활하신 예수가 눈앞에 서 계신 것만은 분명하거든요.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때니이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정말 그 대망 사상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그 마음속에 깊이 깔려 있던 세속적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묻게 됩니다. 이 때가 그 때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기다렸던 바로 그 시간이 바로 이 시간입니까? 이 때니이까.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 위대한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그래 조그마한 이스라엘 나라에 국한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메시아가 그 중동의 조그마한 나라에 그래 왕으로 오신다는 말입니까?

 

그 나라 정치 문제나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의 나라 그 조그마한 나라 유대나라에다가 국한시키려고 했어요. 이 때니이까. 또 예수님은 만왕의 왕입니다.

 

만주의 주가 되시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그리고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시고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그 만왕의 왕을 어떻게 그 조그마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그 뿐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설명한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보세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이거요. 천국이……, 천국이……. , 보세요.

 

내가 가서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리라. 천국, 영원한 천국, 영원한 나라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래 그 메시아를 어떻게 세속적인 이 땅의 조그마한 나라의 왕으로 그렇게 모실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입니까?

 

또한 저들은 하나님의 큰 뜻,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 그 큰 세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뜻을 생각하고 자기 뜻에 국한하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질문입니까?

 

이 때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의 대답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6)"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때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너희들의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의 대망 사상, 그 세속적인 욕망, 그것에서 벗어나야 되고 그걸 깨뜨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네가 할 일이 무엇이냐. 네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고 그 역할을 묻습니다. Function & Role을 묻습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느냐? 그러면 지금 네가 할 일이 무엇이냐? 그걸 묻는 겁니다.

 

여러분, 때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성령이 임할 때 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위로부터 오는 명령이 있을 때 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여러분,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응답은 무엇입니까? 기다림입니다. 그게 언제냐고 묻지 마세요. 어떤 방법으로냐고도 묻지 마세요. 약속을 그대로 받고 조용히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는 마음, 약속하신 것에 대한 바른 응답은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림이 부족해요. 초조하고 불안해요. 아직도 내 뜻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내 생각, 내 욕망, 내 계획, 내 지혜에다가 딱 맞추려고 하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기다리다 지쳐 버리는 거예요. 실망해 버리는 거예요. 이것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북한 선교를 위해서 일하다 보니까 - 이제 이 주간에도 제가 주말에 한번 평양을 다녀오겠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평양, 과학기술대학 설립을 위해서 여러모로 힘쓰다 보니까 가끔 본의 아니게 북한 문제, 북한 선교에 대한 내가 전문가가 됐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끔 엉뚱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생각에 언제 통일 될까요? 통일은 언제 되는 겁니까? 될까요? 안 될까요? 통일은 언제 되는 겁니까? 그런 다급한 질문을 받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분은 ", 나 죽기 전에 될까요?"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런 분의 손을 잡고 저는 이렇게 다시 물어 봅니다. "당신이 통일을 위해서 한 일이 뭐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통일이 있느냐고, 지금 북한의 지하에서 고생하는 우리 성도들을 내 형제로 내 자매로 그렇게 영접하고 있냐고, 당신의 마음속에 통일이 있느냐 그거예요.

 

그것부터 물어보자고.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해야 할 일이 엄연히 있는데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것 많이 보면서도……. 여러분, 자신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통일은 왜 물어보는 겁니까? 이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권능을 주실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내 증인이 되는 것, 그건 너희가 할 일이요. '이 때니이까?' 하는 질문은 고만 해라.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장자(莊子)의 제1편은 소요유(逍遙遊)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정신과 인격이 완전히 자유로울 때 창의력이 있고, 완전히 자유로울 때 능력이 있는데 그 자유는 어디서 오느냐고? 그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을 말합니다.

 

잘 들어 두세요. 무기, 자기 아집을 버려야 된다. 자기 생각의 꽉 붙들려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무공, 업적 성과를 버려라 이거예요. 무슨 업적을 세우고 큰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문제에요. 무명, 명예를 버려라. 명예에 대한 욕심을 털어버려. 그러면 자유로울 것이고 그래야 무엇인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보면, 여기에 붙들려서 오늘도 이 제자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 때니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 버려. 그리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만 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 출판계에서 지금 베스트셀러로 알려지고 있는 김두식 목사님의 전도는 어명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중에 보면, 전도왕의 10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야 한다는 10가지를 말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째가 감사입니다.

 

초조한 마음이 아닙니다. 불안한 마음이 아닙니다. 될까 안 될까 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이래서 무슨 일이 이루어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녜요. 무슨 말을 할까 그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전도자의 제1조건은 감사입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행복한 마음입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어요. 늘 교회에 나갔지만 은혜를 못 받다가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확 달라지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나는 행복하다. 남편은 교회 안 나와요. 그런데 집에 가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분이 영문과 나온 분이예요. 그래 고상하게 말했어요. "I am so happy because of you. I am so happy because of you." 그러니까 남편이 ", 미쳤냐?"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또 행복하다고 그러니까 "고만해라" 그러더니,

 

"아니, 술망나니하고 살면서 뭘 행복하냐?" 그러니까 그 때는 아내가 정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다 건강하고, 당신이 술을 많이 먹지만 건강하니 행복하고, 항상 취해가지고 돌아오는데 제집 찾아오는 게 행복하고, 그리고 또 내가 예수 믿는 것 시비 걸지 않으니 행복하고, 이래 보아도 저래 보아도 행복합니다."

 

했더니, 남편 하는 말 들어보세요. "고만해라. 다음 주일날 교회 나가 줄께"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 보세요. 아니에요. 감사요, 감사합니다. 감사함만이 사람의 마음을 열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거예요. 짜증내봐야 안 됩니다. 사랑은 강탈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감사에서 오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이 때니이까',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할 게 아니에요. '이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렇게 물었어야 했죠. 때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에 있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야지,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기한도 시간도 방법도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 원하는 뜻대로 완전히 Total Commitment, 완전히 위탁해 버립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며 십자가를 지십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권능에 붙들린 사람은 사람을 얻습니다. 사람을 감동케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His part, Our part.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저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My part. 내가 할 일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때니이까. 이제 그만하십시다.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으십시다. 그리고 권능을 받아서 힘차게 부활의 증인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 주시고 그렇게도 끈질기게 버리지 못하는 아집과, 자기 의견과 자기 고집, 자기 철학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다시 일깨워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주의 큰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사 주의 뜻을 알게 하시고 주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게 하시고 그 뜻을 위하여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나라/1:3-11/ 옥한흠 목사

2014-11-08 17:33:17

 

지난 3주 전 저는 네 분의 장로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좋은 교제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특별히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인생의 마지막을 선교 현장에서 좀더

헌신하고 싶어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배순호 장로님이라는 분은 3년 전 국내에서 본

 

인이 맡고 있던 외국은행 책임을 벗어 놓고 선교 훈련을 받은 뒤, 중앙 아시아의 키르키즈

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3년이 넘도록 부부가 너무나 멋진 사역을 펼치고 있는 중입

니다. 그런데 잠깐 귀국을 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쳐다 보면서 언젠가 그분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에겐 두

아이들이 있는데, 한번은 둘째 아들에게서 OM선교에 소속된 둘로스 선에 얼마간 승선을 해

서 선교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문득 '혹시 이 아들이 나중

 

에 선교사가 되어 외국으로 나가려는 궁리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는 것입니다. 참 인간적인 일면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자식이 선교사가 되는 것마저 겁내던 사람이, 결국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중

앙 아시아에 가서 그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면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선교에 힘쓰고자 지금도 준비하고 있는 분입니다.

 

또 한 분은 최상일 장로님이신데, 그분은 한국 통신의 최고위급 간부입니다. 그리고 통신 분

야에 관한한 한국에서 내노라 할 정도의 기술자입니다. 그런데 평생 하던 그 일을 접어두고,

50대 중반이 넘어선 나이에 선교를 하고 싶다는 뜨거운 가슴을 억제하지 못해 지난 1년 동

 

안 호주에 있는 선교학교에 가서 1년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미 선교지로 떠났을 것입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이자 자비량 선교사로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통신분야

에서 교수 사역을 하고자 떠나려는 분이었습니다. 20억이 넘는 IT 장비를 기증 받아 그 학

교로 갔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남창희 장로님이십니다. 이분도 한국의 유수한 은행에 고위직으로 있다

가 은행직을 그만 두고, 이제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 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로 임명 받

아 가게 됐습니다. 한국어 교수가 목적이 아니고, 거기에 가서 제자훈련과 선교훈련을 통해

러시아에 복음의 씨를 뿌리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습니다.

 

그도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계 선교를 해야 된다. 우리의 남은

인생에 꿈이 있다면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교회 안팎에서 자주 들었는데,

때마다 '나는 아니겠지. 나는 아니겠지.' 하고 남의 이야기로만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

 

제는 '나는 아니겠지.'라는 그 말이 계속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

님의 음성에 붙들려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습니다. 그 학교에서 교수에게 주는 사택이라고

는 주방도 없는 형편 없는 방 한 칸 뿐, 이제 그 부부가 그곳에서 살면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은 홍주관 장로님이신데 그분은 한국에서 수재들만 들어 간다고 하는 학교에 모 학

부 출신입니다. 그리고 외국계 은행의 대표 이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아직 나이가 창창

 

한데 다 접어두고, 이제 부부가 미국 풀러 신학교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선교학을 전공하기

로 하고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학 공부를 마치면 멕시코로 건너가 복음 전하는 일에

한 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떠나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들이 함께 앉은 저녁 식사 자리가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흔히 사람들

이 모이면 얼마나 잘 사느냐,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즐기느냐를 이야기를 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제가 한 분, 한 분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서 이런 생각

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저렇게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했을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던 하나님 나라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 사람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장로가 될 정도로 헌신했다면, 그 모든

삶이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

. 쉽게 결단하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고민하면서 주님의 손에 맡겼더니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몰고 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렇게 우리 인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한 가

 

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이 대중 앞에 나타나셔서 입을 여실 때 그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나라 표현입니다. "회개하라. 하나

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 이것이 그의 첫 마디였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전한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죽음이 서

서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분의 마지막 마무리

메시지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손에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지고 생애를 마무

리 지으시더니,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그 무서운 고통을 당하

시고 죽음까지 맛 보신 다음 사흘 만에 살아 나셔서 제자들을 간간히 만나셨습니다. 40

동안 제자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에 보면 주제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과 만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나옵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

하실 때까지 주님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

였습니다. 주님의 꿈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 나

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 나라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소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현실 문

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러한 불만이 16절에 표출된 것

으로 보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눈 앞에 계십니다. 세상의 죽음을

이겼다면 최고의 관계가 아닙니까? 게다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위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능한 자도, 강한 자도, 높은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제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에 관

한 이야기만 자꾸 할 것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을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16절과 같이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가 해방될

날이 언제입니까?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수

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착취와 고통을 받으면서 신

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다급한 현실입니까? 얼마나 답답한 현실입니까?

 

힘만 있다

면 당장 로마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고싶은 생각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처참한

환경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놓고 주님은 한마디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

라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해

서 약간의 불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

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손에 쥐기 보다는 신문을 먼저 듭니다. 그만큼 우리의 관

심은 세상에 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경건하게 살기를 작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성경 말씀 들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

나님 앞에 앉는 분들 외에는,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보다도 신문지를 먼저 손에 쥐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세상 일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사안이란 말입

니다. 세상 일 치고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정치 상황을 보십시오. 이래서는 나라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누구를 해임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신문지 전체를 도배질 하면서

 

날마다 이 일만 거론하고 있습니다. 쳐다보면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

게 될는지 누구나 자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 문제가 우리에게는 발등의 불입니다.

치가 바로 안되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 잘못되어 망하는 우리 민족을 바로

코 밑에 놓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경제문제 또한 얼마나 우리에게는 시급한 문제입니까? 온 세계가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탐탁치 않은 말들을 신문, 혹은 TV를 통해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안해집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갖추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세계에서도 민족으로서 대

우 받을 수 있는데 경제가 급격히 나빠지게 되면 남미와 같이 처참한 상황으로 굴러 떨어질

확률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문제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 문제도 얼마나 시급합니까? 그 밖에 부부 문제, 사업, 건강, 앞으로

내가 추구하는 목표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성공의 문제 등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것 하

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다 속된 것이 아닙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신앙과 관계가 없지 않습

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배하는 우리라고 해서 현실문제와 동떨어진 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셨을까요? 병든

사람의 사정을 예수님이 모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압박 당하면

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사정을 주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관심은 현실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현실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하나님 나라를 잊

어 버리면 우리의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생관 안에 하나님 나

라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 끼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그 사람의 인생

의 끝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설 땅이 없는 인생관을 움켜쥐고 세상을

산다면, 그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비참해 질것입니다.

 

허무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심 없는 인생관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

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삶이요,

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입니다. 어떤 면에는 일평생 후회하는 잘못된 인생의 마무리

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후회 없는 삶을 살길 원합니까?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원합니

? 처음보다 끝이 화려한 사람을 원합니까? 영원히 넘는 인생을 한번 살고 싶습니까?

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인생관의 우선 순위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내 모든 관심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하나님 나라가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이었고, 예수님의 사상이었고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더 가깝습

니까?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대답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정확히 대답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관심은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빨리 정의가 내려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그만큼 흐트

러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흔히 천국을 이야기 합니다.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로 말합니다. 그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들어가는 천국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더 넓고 더

크고 더 높은 의미를 갖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서 부활하

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통치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배를

받는 곳입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통치하실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3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왕 노릇 하는 나라요, 영원

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이 있습니다. 잘 기억해 두

십시오.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영적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영토를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총칼로 정복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지도에 표시해 두어 언제든지 들여다 보면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20절 이하에 보면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

. "예수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합니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었습

니다. "예수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임하는 것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눈에 보이도록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마음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영혼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니라." 곧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세상 나라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이해가

안됩니다.

 

가치관도 다르고, 그 나라의 특징도 다르고, 그 나라가 지향하는 목표도 다릅니다.

따라서 세상 나라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귀가 아프도록 외쳐도 그 나라에 대한 개

념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중생 받고 그 영혼에

눈이 열린 사람, 그 영혼에 귀가 뚫린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

떤 사람입니까?

 

또한 하나님 나라는 범세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독점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수 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여서 세우는 나라가 아닙니다.

18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처음에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합

니다. 그리고 '온 유다와 사마리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

에 가서는 어디로 확장됩니까?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나라는 협소한 민족주의가 절대로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인종의 차별

도 없습니다. 국경의 차이도 없습니다. 계층간 차이도 없습니다. 남녀 성별 차이도 없습니다.

 

모든 백성, 모든 민족이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완성될 즘이면 요한계시록 79, 10절에 나타나는 황홀한 정경이 우리

눈 앞에 벌어지게 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백성과 족속과 방언에서 누구든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백성 중에, 방언 중에" 이 말

은 범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말합니다.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이 말

 

은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해주신 예수님의 의를 힘입었음을 말합니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큰 소리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찬송

하고 있다고 예언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여러분, 한번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그

나라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흑인, 백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흰 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

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면 저 끝에선 소프라노, 저 끝에선 엘토로 우렁차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무슨 증오, 무슨

악의, 무슨 미움과 사기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죽임, 아픔, 눈물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런 범세계적인 나라가 온다고 예언했으므로 그

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금방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

니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8절에 의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13절에 가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 두 사건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 시작됩니까? 하나님 나라 생일이 언제입니까? 하나님 나라 탄신일은

성령이 임하시던 날입니다. 그래서 1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2장에 넘어가면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 탄생이 이제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완성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11절에 보면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십

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고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중간기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갔

습니다. 따라서 그 중간기는 점점 더 좁아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기 때문

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중간기에 살고 있

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간기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들로 인해

계속 선교로 채워져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던 그 날로 시작해서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까

지 그 중간은 오직 증인들을 통해서 복음으로 이 세계를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

든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 오도록,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

 

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전력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

하였습니다.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는 그 나라를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직분을 소명으로 받고 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희박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삶 자체가 빗나간 것

이요, 세속화 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이 됨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악의 세력이 이토록 무서울 정도로 온 세상을 짓밟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가 절망하

 

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오

만 가지 악이 자녀들을 끌어가고, 이 세상을 더럽히고, 이 세상을 지옥같이 만듦에도 불구하

고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

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졌다가 다

시 일어나 "주여" 하고 하루하루를 힘있게 살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

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주인이요, 세상 나라만 늘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늘 대망하고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가 임할 것을 기대하는 그 사람이 이 역사에 주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

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이상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

거나 행동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저는 나이가 좀 들어 가면서 예수님이 왜 하나님 나라만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시고 말씀하

셨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은 너무 악합니다. 우리 눈에도 이렇게 악한데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악하겠습니까? 이것

은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10년 전에 비해 오늘날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입니까? 사람들은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인간입니까? 과연 마음 놓고 살 만한

곳입니까? 얼마나 악합니까?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세상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

입니다. 세상은 갈 때까지 갑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세상은 갈 때까지 갑니다. 구제

불능인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도, 어떤 과학의 발달도, 어떤 사상의 발전도 이 세상을 구제

하지는 못합니다.

 

이 악한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달려가고 말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세상이나 인생은 덧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겠습니

? 우리가 살아봐도 덧없는 인생이라고 하루 몇 번씩 고백을 하는데, 예수님이 인생을 보

면서 덧없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하셨겠습니까? 덧없는 인생의 종말은 허무입니다. 허무 밖

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허무한 인생을 놓고 우리가 한 생을 희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

.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보고 명령하셨습니다. "나가서 외쳐라." 그러자 이사야가 하나님

께 뭐라고 외쳐야 되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육

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40:6-8) 이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

기가 사는 인생이 꽃이나 풀이 아니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래서 깨우치고자 이 말씀을 하

시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어 외쳐라. 인생은 풀이라고. 인생의 아름다움이 대단해도 그

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아 하루 아침에 시드느니라. 하루 아침에 말라 버리느니라. 인생은 그

렇다고 외쳐라." 한 마디로 덧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어 예수님이

세상 이야기를 자꾸 하시겠습니까?

 

최근에 집안에 환자가 있어 중환자실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2

번씩 드나들었더니 생각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같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이쪽 끝에는 신생아실, 저쪽 끝에는 중환자실이 있었습니다. 참 묘했습니다. 한쪽에선 시도

때도 없이 "응아응아" 하며 애가 태어납니다. 반면에 중환자실에서는 회복 되는 사람도 가

끔 있지만 거의 절망적인 사람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체가 자주 나옵니다. 복도를 사이에 두

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에야 가능한 수명인 7,80년이 그 복도 안에서 다

결정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얼마나 덧없습니까?

 

여러분, 한번 뒤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던 어린 시절. 지금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 기억이 여러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듭니까? 그 황홀했던 허니문,

과연 돌아보니 어떻습니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게 아름답고 힘이 넘치던 20, 30

대의 젊음,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 마음을 다 하고 시간을 바치고 나의 젊음을 송두리째

쏟아서 뭔가 손에 넣고 싶어했던 어떤 목적, 아마 달성하신 분들이 꽤 될 것입니다. 그것을

손에 쥐고 보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밤낮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해서 우리가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는 그 막강한 권세와 명예를 가졌던 그 인물들. 하지만 5, 10, 20년 지

난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의 인생은 풀과 같은 인생에 속고 꽃과 같은 아름다움에

속아 한 생을 살다가 벼랑 끝에 서버리고 맙니다. 허무만 남습니다. 이런 세상인데 예수님이

무슨 기대를 가지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비록 현실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현실 문제를 적당히 다루고 넘

어가면 됩니다. 다 꿈이요, 꽃이요, 풀이므로 적당히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그냥 넘어가

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됩니다. 세상 나라가 아닙니

.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려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선택 받은 자들이 계속 돌아와야 합니

. 그들을 불러 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권능을 갖고 전도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서 전도하면 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

는 것입니다. "예수 믿읍시다."라고 한 마디 했는데 이상하게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성령의 권능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

 

은 성령의 권능을 주시고 우리 입에 복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

기 위해서는 5대양 6대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민족 방언을 하는 족속들이 회개하고 돌아

와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우리가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셨습

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다, 옆에 안 믿는 사람을 보아도 전도할 생각도

없다, 어떤 사람이 예수 안 믿다가 내 옆집에서 죽어도 마음에 아픔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

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1982년도에 우리교회가 시작했습니다. 벌써 1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18회의 대각성 전도집회를 했습니다. 통계를 보니 그 동안 우리가 전도해서 이 자리

에 나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총 수가 38,326명에 달합니다. 거의 4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

이 지난 18년 동안 이 자리에 와서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들

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예수 믿겠다고 그 자리에 일어나 카드를 써낸 사람이

13,872명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 중 4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

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14,000명이 적은 수입니까?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한꺼번에 가장 많이 예수 믿기로 결

신한 것이 작년이었습니다. 작년 나흘 동안 전도집회를 통해 2,622명이 예수 믿기로 결단했

습니다.

 

여러분, 지난 18,20년 동안 대각성전도집회가 우리 교회에 없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 기독교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들, 소위 영적으로 영발

이 서는 사람들만 모여 날마다 "예수, 예수" 했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과 같은 생

명력이 있는 교회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놀라운 집회를 앞두고 있는데 주보를 보십시오. 지금까지 3개월 동안 준비하면서 태

신자 등록하신 분이 535명 밖에 안됩니다. 2만 명 성인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535명이 3개월

동안 태신자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1,200명 정도의 태신자가 지금 교회 등록이 된 상태입

니다.

 

그러고도 사랑의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

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전도 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어요? 아직도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 나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덧없습니다. 아무

리 호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허무만이 남습니다. 하나님 나라 모르는 인생. 어떤 면

에서 그것은 살아갈 가치 조차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자꾸 좋은

말 하려고 떠들 뿐, 우리가 영적으로 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태산을 지나 험곡을

가도 찬송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하여 무언가 소명을 갖고 하

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증인들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가난하던 잘

살던, 못 살던, 잘났던, 못났던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벽돌 하나씩 옮

 

기는 엄청남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세상을 사는 것 아닙니까?

제가 지난 주에 재미있으면서도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부산에 가면은

부산에서 지금 제일 성장이 빠른 교회가 호산나 교회 아닙니까? 우리 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간 최홍준 목사님이 지난 15년 가까이 목회를 한 교회 입니다. 그 교회에 어느 여집사님이

계셨는데 남편이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편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

, 나는 교회에 가면 꼭 과부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과부라고 그럴 거에요. 날마

다 혼자 와서 앉아 있으니 말이예요. 그러니 여보, 한번만 나와서 내가 과부가 아니라는 것

좀 증명해 줘요."

 

그러자 그 말을 듣다, 듣다 남편이 어느 날은 작심을 했습니다. '그래. 나가주자. 그것도 내

가 안 들어 주어서야 되겠냐.' 그래서 나왔는데 성령께서 그 마음을 어떻게 뒤집어 엎었는

지 나오자 마자 그 날 등록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을 해 버렸습니다. 그 후 이들 부부가 지

 

7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특별히 장애인 사역을 하는 사랑부에 들어가서

열심히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 가정은 사업을 하는 아주 잘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 가정에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이 이태리에 성악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 중

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그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그런

일은 안 당해 보면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 절망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바로 살겠다는 집안에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믿음이 그냥 뿌리

채 뽑힐 것입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아마 몇 달 동안 일어 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 부부가 이제 이태리로 가고자 비행기에 탔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승객을 보니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태리로 가면서 그 부부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한 것입

니다. 그 승객이 가만히 보니 목사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여행을 다니는 사람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자기에게 진지하게 예수 믿으라고 하기에 물어보았답니다. "근데 선생님,

선생님은 뭘 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부부는 지금 어떤 상

 

에서 이태리를 가고 있는지 자초지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얼

마나 큰 쇼크였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야 될 판인데 멀쩡하던 아들이

죽었으니 저주 받은 거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욕하지 않고 자기에게 예

수 믿으라고 하니 얼마나 쇼크였겠습니까? 그래서 그 승객이 예수를 믿었나 봅니다.

이태리기 도착해보니 사고를 낸 사람은 평소 자기 아들이 전도하고 싶어 친하게 지내던 천

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보상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

아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에 있는 사람을 또 전도했습니다. 나중에 교회에 돌아와 이런 간

증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돌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상한 짓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딱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더 다가 오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면 주님께서 내가 당한 이 모든

슬픔에 대한 대답을 분명히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것이 절대 비극이 아니었고

나에게 불행이 아니었다는 분명한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기에 나는 전

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처럼 여러분의 관심에, 중심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까?

삶의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 나라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종점은 하나님 나라입니까? 그리

고 그 나라에 지금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만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러분은 세상 나라를 위해 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뛰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되면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

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여러분의 삶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 중심입니까? 내가 월급

쟁이든 사업을 하든 간에, 내가 세상에서 똑똑하든 어리석든 간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

라 완성을 위해서 기여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주변에 믿지

 

아니하는 형제 자매들을 볼 때 직간접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내가 오늘 쓰임 받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누굽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대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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