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안에 좌절이 없다 /행13:42-52/ 유기성 목사
2016-08-09 09:46:36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지난 목요일, 친구 목사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5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100 명이 넘게 모이는 부흥을 주셨는데, 교회가 세들어 있는 건물이 부도가 나 경매에 들어갔는데, 유찰이 계속되다가 전세 보증금도 받지 못할 형편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차라, 길가 제과점에 들어가 팥빙수를 하나 시켜 놓고 근황을 물었습니다.
대책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떨까 안타까왔습니다. 그 때 나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목사, 오늘은 이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나누지만 5년이나 10년 뒤에는 이 일이 반드시 큰 간증 거리가 될 거야.”
제가 말을 해놓고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말을 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주님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하셨다고 생각되는 것이 그 말 한 마디에 그 목사님도 저도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렇지? 유목사, 이 일이 분명 간증 거리가 되겠지?”
어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생각만 하면 좌절만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그 어려움이 큰 간증 거리가 될 것이란 믿음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를 낙심하지 않게 하시는 분임을 그 때 놀랍게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더라도, 좌절의 순간이 수없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낙심과 좌절에서 건져내십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가 막힌 어려움, 좌절에 빠지신 분이 혹시 있다면 여러분도 동일하게 얼마 가지 않아서 이 일이 큰 간증 거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확신을 심어주시는 시간이 오늘 이 시간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가면서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했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고 같은 설교를 또 해달라고 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얼마나 은혜가 되었으면 그러했겠습니까?
그리고 모임이 끝난 후에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바울을 따라 다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때가 있지요? 집회 후에 설교자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서 기다려 본 적이 있었습니까? 은혜가 되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했습니다.
그다음 안식일에 바울이 말씀을 전하려고 갔는데 그 시의 거의 모든 사람이 모였다니 그 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얼마나 꼭 말씀을 들으러 오라고 전했는가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오라고 한다고 또 옵니까?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 시민들이 거의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말씀에 보면 병자를 고쳤다거나 귀신을 내좇았다는 이적을 행하는 일이 없이, 오직 복음만 전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단한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의 복음 증거에 성령님이 크게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부흥이 일어나고 말씀에 역사가 일어났는데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 일행이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 일행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유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하여 그 지역 집권자들을 충동하여 쫓아내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가게 된 사도 바울은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 뭐 하십니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는 계신가요?” 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니 참 신기한 말씀이 나옵니다.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지금 되어지는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도하다가 말씀의 역사는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 지역 집권자들에게 쫓거나가는 제자들 마음에 도대체 기쁨이 충만했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오늘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동일한 역사를 경험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도 그 일 속에 처음에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는 일어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놀랍게 일어나는데 핍박이 오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내좇길 형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낙심 중에 주님을 바라보다가 해답을 얻었습니다. ‘아, 이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구나. 이것이 복음의 장벽이 되고 훼방이 된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이 이렇게 되도록 만드신 일이었구나.’ 하는 답이 오고 나니까 기뻤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실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던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47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을 것 같은 유대인은 핍박하고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복음의 열매가 풍성히 맺힌 것입니다.
환란을 당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핍박이 일어나서 전도 역사가 일어나는데도 좇겨나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끝까지 가게 할 거야.”
‘아, 그렇구나, 내가 지금 복음을 전하다가 여기서 좌절을 당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빨리 이방인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구나. 할렐루야! 알겠습니다. ’ 이렇게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이방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48~49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핍박은 복음 전파의 좌절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이제 다른 곳에 가서 전할 때가 되었다는 싸인으로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니 좌절이 될 상황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어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오늘 바울과 바나바처럼 반드시 좌절에서 다시 일어나서 기쁨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이시려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반드시 기쁨을 주십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환란이 있어도 성령의 기쁨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지금 건강 때문에 또는 재물의 문제로 인간관계로 인해서 또는 어떤 불의의 사고로 기가막힌 어려움이 있어 실족하고 낙심하고 좌절한 분이 있으시다면 오늘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떤 일도 그 속에 기쁨을 발견하게 되고 어떤 사람도 다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왜 복음을 비난하고 반대했을까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다시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말입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시기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유대 지도자들은 말씀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이방인들이 별로 모이지 않았는데, 바울이 와서 전한 후에 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을 보고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시기심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지 알려줍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큰 이유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을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시기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면 신앙이 좋다고 하면서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D.L. 무디(1805-1898)는 ‘인간은 깨진 그릇과 같으므로, 계속 충만하게 되는 방법은 물이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그 깨진 그릇을 갖다 놓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정말 깨진 그릇과 같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다 깨진 그릇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성령으로 충만해졌다고 해서 그 충만함이 계속 지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계속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 성령 충만한 제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40세에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모님은 그만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남편 목사가 미웠습니다. ‘남편 때문에 내가 병이 났어! 개척 한다고 고생만 시키더니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어느 날 심방을 온 한 목사님이 사모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오셔서는 노트를 한 권 꺼내주시면서 “사모님, 감사 거리를 찾아 적어보세요.” 하시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앞에서는 “예.”하고 받았지만 속에서는 불같이 화가 나더랍니다.
‘내가 이 꼴이 되어서 감사 거리가 어디 있어? 뭘 적으라는 거야!’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감사 거리를 한번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내 육신은 죽어가지만 내 영이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첫째는 영혼 구원에 감사드렸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을 옷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공부도 잘하고 부모 말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런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거리가 생겼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남편 때문에 속상하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남편이 좀 고지식한 것 말고는 이런 남편도 없다 생각하니 감사 거리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감사 거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감사 거리를 적다보니 노트 한 권이 부족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회개가 터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평하고 원망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회개를 하면서 사모님의 마음 속에 성령이 기름 부어졌습니다. 기도 문이 열리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암이 치유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좌절할 수 밖에 없어. 지금 내게는 절망 밖에는 없어.” 이런 처지에 있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반드시 내 절망 가운데 형편에서 살아날 믿음을 주시고 감사를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 일이 힘들다고 생각 되는 것은 내가 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싫다.’ 사람을 이렇게 판단하는 것도 은혜가 내게서 빠져나가니까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은혜가 넘치면 힘들다, 어렵다 하는 생각도 없어지고 좋다, 싫다 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내게는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가?’ 탄식하고 원망하지 마시고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주님을 더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가 막힌 수렁에 빠졌고 절망과 좌절이 와도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중에는 넉넉히 이길 힘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분명히 깨닫게 하셔서 여러분이 능히 기쁨이 충만해서 위기와 시험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무거운 율법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축복입니다. 18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 그러면 어떻게 항상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까?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볼 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지니까 이런 말씀을 하셨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으니까 그 말씀을 하셨는데, 단 하나 조건이 필요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 그대로 우리의 삶에도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7: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산을 옮기기는 커녕 범사에 감사도 안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진정한 믿음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계속 보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좌절에서 이겼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에 비추어 보니, 유대인의 핍박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습니다.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것이구나!”
좌절과 낙심이 올 때,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무덤에 묻혔을 때,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제 끝났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혔을 때 여인들이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 속에는 슬픔, 낙심, 좌절로 꽉찼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눅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제발 좀 슬퍼하지만 말고 놀라지도 말고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너 왜 그렇게 낙심 가운데 있니? 너 왜 그렇게 좌절하고 있니? 내 말 좀 기억해 봐!’ 예수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주님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지게 됩니다. 양떼들이 많고 목자들도 많아서 같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카 롯은 먼저 좋은 땅 소알을 선택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이제 헤브론 산지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때 순간 마음이 너무너무 허전했던 모양입니다. 좋은 땅은 조카 롯이 차지하고 이제 남은 산지 자신이 살아야 되는 땅 헤브론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잠시 롯이 내려간 소알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마음도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일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브라함이 너무너무 잘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억울해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조카 롯을 떼어 놓은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게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정을 이기지 못해서 조카 롯을 계속 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완전한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조카 롯은 좋은 땅을 차지한다고 좋아서 가긴 했지만 하나님의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롯은 어차피 떨어져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보라. 동서남북의 모든 땅이 다 너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사는 동안에 누구로부터 배신 당했다고 느끼고 또 어떤 재물을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내게 이런 어려운 손해가 오는가? 섭섭한 일이 생기는가? 배신 당하는 일이 생기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내 생명인 것만 고백하고 주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러면서 심령에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고 애굽에 노에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니 애급의 총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한 형들이지만 복수할 마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겪는 좌절 중에 제일 큰 좌절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온전히 예수님만 바라보면 완전히 바뀌는 것을 아십니까?
지난 안식월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분명히 주신 말씀이 선한목자 교회가 교인 수나 건물 크기로 소문난 교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멘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 목적이 달라지자 사람이 달라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안되는 사람, 부흥에 걸림돌 되는 사람이 너무나 귀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허락한 사람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전에는 ‘선한목자 교회가 교인도 많고 예배당도 크고 부흥되는 교회로 소문 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있다 보니까 사람이 구분이 되었습니다.
교회 부흥에 큰 도움이 될 좋은 사람, 문제가 있는 걸림돌이 될 사람으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소문 난 교회를 세우리라는 교회 목표가 정해지고 나니까 문제가 많다고 생각되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가 많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는 사람끼리 모이면 사랑으로 소문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으로 소문 날 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면 그 교회는 저런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저런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품을 수 있을까? 그래야 사랑으로 소문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문제 많은 사람이 다 하나님의 계획이더라는 것입니다.
1944년, 35세 된 어느 목사님이 사냥을 갔다가 멀리서 노루 한 마리를 보고 정조준을 해서 쐈는데 달려가 보니까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 총에 죽은 것입니다. 목사님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와 언론이 들끓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당연이 교회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인들이 모여 이 일로 의논하다가 “사람 죽인 젊은 목사님을 어느 교회가 받아주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용서하지 않으면 목사님은 평생 갈 곳이 없습니다.
지금 한번 큰 결정을 내려 봅시다! 목사님을 한번 용서합시다!” 교인들의 용서로 그 분은 계속 그 교회에 남게 되었고, 그 뒤부터 그분 목회 중심 철학은 ‘용서’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인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고 54권의 저서를 쓴 크리스웰목사님 입니다.
새들백 교회 릭워렌 목사가 19살 때, 이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았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 젊은 설교자에게 내게 주신 영감을 갑절이나 부어주소서.”
크리스웰목사님은 교인들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를 2002년 93세에 죽을 때까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용서에 관해 설교할 때는 매번 눈물을 펑펑 쏟았고, 끊임없이 용서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용서 받았기에 평생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그만 미워하시고 용서하십시오.”
크로스웰 목사님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다 예수님 때문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용서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람 때문에 좌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 지방연합 성회에 강사님의 간증에서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형이 한 분 계신데, 아버지의 유산을 나눌 때
“저는 목사가 될 사람이니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형이 다 가지세요.”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도 되겠느냐?” 하며 두말도 않고 다 가지시더랍니다. 또 목사님 결혼식 때, 형이 축의금을 받았는데, 그 축의금을 가지고 도망가 버려서, 하객들을 대접했던 갈비탕 집 주인의 손에 붙잡혀 신혼 여행도 가지 못하였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지만 그런 형이 있다면 어찌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그 형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는데, 그것 때문에 혈기내고 실수하고 좌절할 뻔 하였지만 다 이겨냈답니다.
“그래도 우리 형보다는 낫다.” 그러니 용납 못할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으면 사람으로 인해 실족하는 일이 다 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기가 막힌 수렁에 빠진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 좌절이 왔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내가 예수 안에 죽고 예수로 산다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가? 이런 처지에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바랍보십시오. 주님이 반드시 답을 주실 것입니다. 이길 힘도 주십니다. 놀라운 기쁨으로 복을 주십니다.
오늘 마음 상한 이들 실족하고 낙심하고 좌절에 빠진 이들을 주님이 일으키는 시간입니다. 정확하게 주님께 구하십시오.
“예수님, 제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저를 건지실 말씀을 주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십시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예정론에 관하여 /행13:46-48
2015-08-11 17:34:32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b
▲예정론
위 구절에서 ‘작정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타쏘’는
‘지정하다. 지명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지정하고, 지정한 자는 다 믿더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지명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는 뜻이 된다.
이런 여러 구절들에서 신학적 개념인 ‘예정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면, 도리어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예정론은 성경적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오해할 소지가 매우 크다.
그 오해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기로 개별적으로 지명 받고 선택받은
즉, 예정된 사람이라면,
내가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산다 한들
영생을 얻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아닌가?
또한, 내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온 정성을 다해 헌신하고 봉사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도록 지명(예정)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는 결국 영생에서 제외될 것이 아닌가?
이런 예정론 한쪽에만 치우친 생각이 발전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또 세상에 전해야할 필요성도 없어진다.
(예정된 사람은 다 믿을 터이고, 예정 안 된 사람은 어쨌거나 안 믿을 터인데.. 전도할 필요가 없어진다.)
▲예정론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안경, 미래를 보는 안경은 아니다.
위와 같은 질문들은, 예정론을 미래를 향한 안경으로 잘못 사용한데서 기인한 오해들이다.
예정론은 미래를 향한 안경이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기 위한 안경임을 이해한다면,
그와 같은 오해들은 절로 해소되게 된다.
※예정론을 ‘미래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미래에, 장차 구원 받을 지, 못 받을 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를 단정적으로 ‘구원 받지 못할 자’로 그의 미래를 단정지을 수 없다.
오직 구원 받은 사람만, 자기가 예정에 의해 구원 받은 것을 알 수 있고,
지금 구원 못 받은 사람은, 앞으로 장래에 구원 받을 수도 있으므로,
살아있는 사람은, ‘그가/내가 예정 못 받았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을 보니, 예정론을 생각하게 된다. 아니고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론을 설명했다.
태어날 때부터 죄 공장에서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이 전혀 없다.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는 롬3:10절의 증언처럼,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만약에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메시아도 필요 없을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도 불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은 한 길밖에 없다.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고,
구원의 은총과 자비를 그저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구원의 은총과 자비를 얻지 못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내게 영생을 주시기로 나를 지명(예정)하셨구나!’ 고백하면서,
감사드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교회/교인 된 것을 보니.. 그것은 은혜/예정이었다.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와 관련해서 예정론을 설명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저절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평생토록, 예배당에 단 한 번도 발을 디디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교회/교인으로 살게 된 사람들은,
자기가 크리스천이 된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예정)하셨다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구원과 관련해서 보나,
(칼빈이) 교회와 관련해서 보나,
우리가 우리 실력으로 구원을 받거나, 교회에 들어오게 될 실력이 없었는데,
내 과거를 돌이켜보니, 뒤돌아보니
내가 구원 받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하, 하나님이 택하여, 예정해서, 불러주셨기 때문이구나!’
그렇지 않고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 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의 사도바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도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그곳에 모여 있는 회중들을 한번 쓱 훑어 본 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서,
‘아, 너희들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되지 못한 사람들이구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13:46
또 다른 무리를 향해서는 ‘여러분들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구나!’
이렇게 단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간 사도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한 유대교 지도자 무리들을 향해서는
결과적으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지 못한 자들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찬송한 이방인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로’.. 판정한 것이다.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위의 말씀 역시, 미래를 향한 안경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그 이전을 되돌아보는 안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철저한 무능, 무력, 무자격을 인정하면서,
내 실력으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을 강조하기 위한 예정론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경이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기 위한 안경인 것이다.
▲내가 예정 받고, 은혜 받고, 구원 받았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우리 모두, 그 ‘과거를 되돌아보는 안경’을 쓰고,
나의 지난 세월을 한 번 되돌아보자.
내가 어떻게 지금, 영생을 얻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교회에 나와서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의례히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인가?
...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크리스천보다 넌크리스천이 3배나 더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가 크리스천 아닌 사람들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교회에 나와 앉아 있게 되었는가? ...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얼마나 흉측한 심보를 지닌 인간인지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 대한 증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고, 지금 이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창세전부터 우리 개개인을 개별적으로 지명하시고, 선택(예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43:1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야곱아, 이제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자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은총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개별적인 지명을 받고 영생을 얻는 크리스천으로
선택되었음을 믿는다면, <선택, 예정> 관련글 모음
우리는 더욱 겸손하며, 더욱 그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다. (후략) ▣ 기독교 사상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행13:14-52
2013-06-04 16:00:08
요즘의 사업들은 거의 다 소위 '프랜차이즈' 즉 연쇄점의 형태로 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의 비법이 자자손손으로, 혹은 장인으로부터 도제에게 수직적으로 시간의 축을 따라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런 특별한 비법들이 프랜차이즈를 통하여 수평적 즉 온 세계에 공간적으로 동시에 널리 퍼져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즉 같은 프랜차이즈에만 속해 있으면 비록 가게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나 파는 물건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똑같게 된 것입니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서 그 유명한 '노란색의 M자'가 걸려 있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똑같은 맛의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스타박스' 역시 마찬가지 예로서 그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파는 커피의 종류와 맛은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프랜차이즈에 속해 있는 모든 가게들이 그 제공되는 서비스나 상품을 각 가게의 주인의 마음대로 정하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프랜차이즈 본사의 지시대로만 따르고 거기에서 제공해 주는 똑같은 재료와 상품들만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한 가게가 그와 같은 본사의 지시에 어긋나는 상행위를 하거나 본사에서 제공하는 것 대신에 그와 유사한 물품을 다른 경로를 통해 구입한다면 당연히 처음에 맺은 계약에 따라 패널티를 받거나 아니면 아예 프랜차이즈의 특권을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게는 그 프랜차이즈가 표방하는 것과 다른 서비스나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고객에게 제공함으로써 결국은 그 프랜차이즈 전체의 신용과 명성을 떨어뜨리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전개되고 있는 복음전파 운동은 그런 면에서 비유해 볼 때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최고의 영적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그 전파 방법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 시절이나 오늘날 21세기의 현대교회에서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정하고도 꾸준한 복음전파의 패턴을 이미 사도 시대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의 교인을 얻었던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나, 순교당하기 직전까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당당하게 선포했던 스데반 집사의 설교나, 그 핵심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전도자 사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에서도 역시 그 비법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부터 16절의 말씀에 "14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 일행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수리아 안디옥'과는 다른 곳으로서 당시 소아시아 한가운데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 곳 역시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회당"이 있었으며, 바울 일행은 항상 행하던 선교 전술을 그대로 따라서 거기서도 역시 "안식일에"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통상 회당장은 각 회당에 한 명씩 있는 것이 관례였지만, 본문에 "회당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 곳은 두 사람 이상이 회당장으로 있던 특수한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관례에 따르면 회당장이 그날 회당에서 설교할 사람을 지정하는데, 그 곳의 회당장들은 타지에서 찾아온 바울 일행에 대한 호기심이나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청해 왔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로서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당장 응낙하고 "일어나 손짓하며" 말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손짓하다'란 그가 제스처를 쓰면서 설교했다는 뜻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서 어떻게 전도를 했습니까?
오늘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신약 시대 최고의 전도자로 이름 높은 사도 바울의 전도 비결, 그 이후로도 역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바꾸면 안 될 '불변의 전도 비결'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전파의 내용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17절부터 22절에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언약의 백성이었다는 역사입니다.
그 택하신 백성을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 이어서 사사들과 왕들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다윗은 사람 앞에서도 이름 높은 명군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할"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 다윗 왕가를 통하여 보내 주실 완벽한 군주 즉 메시아에 대한 언약과도 직결되었습니다.
즉 장차 오실 최고의 왕, 진짜 구세주야말로 다윗과 오히려 비교도 안 될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하게 합한 사람, 그리고 다윗조차도 못 다했던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사람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전 구약 예언의 핵심이었으며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공감하며 기대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을 재확인해 놓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그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이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 이하 37절에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는데 그 분이 "곧 예수라"고 선포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다윗 언약의 완성이요 정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에 해당되는 세례 요한이 그의 평생을 통해 증거한 사실이기도 했다고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 점에 대하여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된 이유를 가리켜 그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아주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알지 못한 것이야말로 최악의 무지였으며,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제 발로 스스로 차 버린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이 '선지자의 말' 즉 구약 예언을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안식일마다 낭독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따라서 "구원의 말씀"으로 오신 그 분을 영접할 수도 없었다고 사도 바울은 실로 정확한 분석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확증해 주면서, 우선 그 모든 것은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 역시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한 것"이었으며, 죽었다가도 '썩음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살리신' 부활 사건 역시 시편 곳곳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되고도 유일한 구세주시라는 사실은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조금만 눈뜨고 살펴보아도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증인 것입니다.
이 설교가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첫 공식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이것 하나만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물론 이 복음의 내용은 바울의 나머지 전도 여행들이나 목회 사역들을 통해서도 조금도 바꾸어지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최고의 군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완전한 사람이셨으며, 또한 성자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언약에 있어서 그 주인공은 '오직 예수' 한 분이실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이 곧 '구원의 말씀' 즉 복음 그 자체이며 따라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복음전파의 주제인 동시에 핵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결코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수님이 곧 구세주이심을 알려 주고 깨닫게 해 주고 믿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복음은 무슨 유창한 달변이나 재치 있는 화법이나 논리적인 설득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라 오직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선포되고 전파될 따름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길은 '오직 성경' 외에 다른 왕도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변화되어도 결코 바뀔 수 없는 복음전파의 '알맹이'입니다.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오로지 '성경에서 예언된' 예수님만이 참된 메시아라고 전도해야 합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오직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을 위해 찾아오신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소리 높여 외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가 완전히 성취될 그날까지 그 교회들에게 주신 '불변의 오리지널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참된 교회라면 그 어떤 대상을 향해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성경이 증거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해야 함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음전파의 요령은 오직 '택하신 자를 믿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맡기는' 것입니다.
38절부터 41절에 기록하기를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후에 이제 사도 바울은 청중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합니다.
복음의 결론적 핵심은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면서 그 분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는 즉시 "죄 사함"을 받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죄 없다고 인정을 받는 '칭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이 놀라운 은혜는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은 자신의 공로로써는 그 무슨 수를 써도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전적으로 '이 사람을 힘입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고 사도 바울은 그 청중들을 초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와 반면에 사람이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 그 결과는 실로 무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곧 이어서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때를 당하여" 즉 마지막 날에 "한 일" 즉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은 불신자들이 "놀라고 망할" 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 최후의 심판은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 즉 전도자들이 사람들의 귀에 아무리 외쳐 주어도 불신자들은 도저히 믿지 못했던 일이지만, 결국은 반드시 '그들에게 미칠' 즉 일어나고야 말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실로 두려운 심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똑똑히 일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함과 동시에 불신앙을 경고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은 결코 바른 전도도 아니며 그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태도도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심판' 대신에 주어지는 것처럼 참된 복음전파는 항상 엄중한 경고가 따라와야 마땅한 것입니다.
42절 이하 52절에 "42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는 어떤 설명이 아니라 단순한 선포였습니다.
그의 전도에는 '예수님은 이래 저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저렇게 증명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구세주 되심을 천명하고 성경 말씀에 경고하고 있는 대로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선포된 복음을 바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믿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를 두고 본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감탄스러운 어조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어떤 인간적 지혜의 깨달음의 결과도 아니요 어떤 인위적 노력의 산물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결과'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바울 일행을 적극적으로 핍박하고 성내의 유력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여 결국 그들을 쫓아내기까지 한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불신자들을 두고 '전해진 복음을 버리고 스스로 영생 얻는 일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무리라고 간단히 일축해 버렸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영생 얻는 일에 대하여 무자격자임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는 비극적인 최악의 결정이지만 바울 사도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바울 자신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 즉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을 찾아 전도하는 것을 계속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의 결과는 전도자의 책임이나 능력에 속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복음을 전해 듣게 된 각 개인이 양심적으로 판단할 문제이며, 근본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누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인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그저 땅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이 유일한 전도 방침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신자를 전도하면서 '이 사람이 과연 전도가 될까, 안 될까?'하고 지레 염려하면서 겁을 낼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 전도 대상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안 하고는 우리가 얼마나 전도를 잘 하나 못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를 했는데도 상대방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좌절감을 느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도를 받고도 믿지 않은 그 본인에게만 전적으로 있을 뿐이지 전도한 사람에게는 조금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기만 하면 그 모든 전도는 다 '완전히 책임을 완수한 전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패한 전도'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전도를 하지 않는 것'만이 필연적인 실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실로 마음 편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게 누구에게나 어디서든지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도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완전히 맡기는 가운데 일단 '나가기만 하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택자를 반드시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믿게 만드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실 줄을 믿고 담대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베드로의 첫 설교로부터 시작하여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 그리고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복음전파에는 늘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법'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 해서 무슨 남다른 화술이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택자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전도'는 실로 놀랍게도 셀 수 없는 수많은 심령으로 하여금 믿고 영생을 얻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정해 놓으시고 시행하시는 유일무이한 방침이며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는 그 어떤 추가나 삭제가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비법'이라는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습니다.
이웃전도와 세계선교를 위하여 초대교회 시절부터 조금도 변함없이 전수되어 온 이 복음의 내용과 전파의 방법을 바꾸는 것은 그야말로 원래의 '프랜차이즈'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닌 '타사 제품'을 사용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난 목사라 해도 그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재료로 하지 않으면 그는 그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연사일 뿐이지 복음 전도자는 아닙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 해도 그 안에 '영생 구원' 얻은 것을 확신하는 진짜 신자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그 대형교회란 그저 쭉정이들로만 가득한 '잡동사니 교회'가 될 뿐입니다.
그런 목사나 교회는 그저 기독교라는 '영적 프랜차이즈'의 간판만 내걸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이미 예수님께서 '그 촛대를 옮겨 버리신' 다시 말해서 '교회 고유의 영권, 즉 구령의 권능을 박탈해 버리신' 빈껍데기 교회인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택자'는 항상 '똑같은 예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똑같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신자들과 우리나라의 초기 선교사들에게까지 이어졌으며 이 경향교회와 경향선교회를 통해서도 지난 40년 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던 이 복음전파의 비결을 끝까지 지키고 발휘함으로써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14만4천인'의 수를 조국전도와 세계선교를 통해 계속 채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admin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행13:42-52
2003-10-24 08:43:56
해마다 연말이 되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읍니다. 작년 말에도 예외 없이 구세군 자선 냄비 등을 통해 성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IMF 파동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얼어붙어 있었고, 또한 실제로 물질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성금이 예년만큼 걷히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예년보다 10% 정도가 더 걷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 김대중씨는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 시간에 우리 국민의 저력을 보여준 사건이라 평가하였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금 부족합니다.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사람은 가난해져야 서로 돕고 상부상조할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이는 동시에 쓰고 버리는 생활습관을 뿌리내리며, 물건과 사람과 생명을 아끼고 귀하여 여기는 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 숫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 북한 동포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맞는 것이면서 동시에 틀린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풍요의 메커니즘은 쓰고 버리는 것을 구조적으로 강제하기 때문입니다. 실컷 쓰고 버린 다음 다른 돈으로 북한 동포를 도울 수는 있을지언정, 쓰고 버리는 것을 아낀 돈으로 북한 동포를 돕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물자가 귀해지면 물건을 아끼고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하여 공경심을 갖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공경심은 사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자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확장됩니다. 따라서 절제된 가난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물자나 사람에 대해 관심이 줄어들게 될까요? 그것은 어려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입니다. 감각에는 육체적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적 감각도 있습니다. 불우한 이웃의 존재에 대해 관념으로는 알지만, 자신이 현재 어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에 대한 정신적 감각이 무뎌져 그들을 도울 마음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올챙이의 형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움을 직접 당해 보아야 어려움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 상대방의 어려움이 실감나게 되고, 이어 도울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여기에서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IMF로 말미암아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어떻게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더 늘어났는가,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이제 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풍요롭게 살다가 경제가 어려워지자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의 어려움 앞에서 이렇게 아픔을 느끼는데, 나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라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역설적이게도 IMF 한파 속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더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한편 '금 모으기' 운동의 실적을 동네별로 보면,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구로구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구로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입니다. 반대로 가장 실적이 낮은 동네는 서울에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강남에 있는 구라고 합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과 비슷한 현상 아닙니까?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50대 여인이 최근 아들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200만 달러 복권에 당첨된 아들이 약속을 어기고 상금을 혼자 몽땅 챙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입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얼마 전 메릴랜드주 복권 당첨자들이 백만장자가 된 뒤 어떤 삶을 누렸는지를 추적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벼락치기 백만장자들은 대부분 가정 불화, 이혼, 생활 파탄의 비극을 겪었다는 게 기사의 줄거리였습니다. 로버트 브룬슨이라는 복권 당첨자는 아내와 이혼하고, 생활의 근거까지 잃어버린 채, 지금은 플로리다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청소부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복권 당첨으로 내 인생은 송두리째 파괴돼 버렸다"고 한탄한다고 합니다. 풍요가 가져다 준 비극입니다. 물질적 풍요에는 이런 악마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와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을 만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을 맞아 안디옥에 있는 어느 회당으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알아보고 회당장들이 설교를 부탁합니다. 그 설교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 달라고 청합니다. 심지어는 회중이 흩어진 다음에도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다고 합니다. 대단히 큰 은혜를 받은 모양입니다. 일주일 후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온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곧 이방인들도 모두 몰려든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에 대한 소문이 퍼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든 것입니다. 지난 주 안식일에는 유대인들만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인데, 이번에는 평소 회당에 오지 않던 이방인들도 모두 온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바울과 바나나를 비방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난 주 안식일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일주일 후 다시 바울의 설교를 들으려고 회당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온 동네 이방인들이 다 모여든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곧 은혜는 자기네만 받아야 하는데, 이방인들도 은혜를 받게 생겼으니 시기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한된 것이어서,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으면 그만큼 자기네들이 받을 은혜가 줄어드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런 것도 아닌데 이방인들이 은혜받고 구원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길게 설명하였습니다. 그 부분이 유대인들에게 은혜로 와 닿았을 겁니다. 그런데 설교 끝 부분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고 말했는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의 고유한 신학적 성찰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로마서에서 다시 집중으로 설명됩니다. 이는 나중에 기독교의 핵심적 사상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그 말은 유대인의 특권을 무너뜨리고 이방인이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인데, 그렇게 이해를 못 하고 그냥 좋은 말이라고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다음 안식일에 다시 설교해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은 나중에 특별히 이 말에 자극을 받아서 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신인줄 알았는데 자기네를 위한 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바울의 설교를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몰려온 것을 보고 뒤늦게 유대인들은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자기네의 특권을 무너뜨리는 내용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오해하였던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로서는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처음에 바울의 설교를 바로 이해하였다면 바로 그 때 바울 일행을 내쫓았을 겁니다. 뒤늦게 자기들의 실수를 깨달은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가 틀린 것이라고 비방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의 비방에 물러서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신들이 복음을 배척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인하므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겠다고 외쳤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이방인들이 그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주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져 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와 실수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징검다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실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인들의 실수뿐만 아니라 나의 실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러니 나의 실수도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실수를 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 실수가 열매로 승화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됩니다.
아무튼 이런 사태 앞에서 유대인들은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 일행을 박해하고 그 지방에서 내쫓아버립니다. 안디옥은 유대 나라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직접 힘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도시의 유력 인사들을 꼬드겨 바울 일행을 박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귀부인과 지도층 인사가 나옵니까? 왜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는 악역을 떠맡게 됩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입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그것을 감당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유대인들이 선동했다고 합니다. '선동'이란 말은 불씨에 부채질을 한다는 말입니다. 불씨가 없으면 부채질을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불씨가 있을 때 부채질을 하여 불을 지피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유대인들이 부채질을 할 불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불씨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귀부인이고 지도층 인사라고 하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바로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산다는 것 자체, 바로 그것이 불씨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물질적 풍요가 물질에 대한 공경심을 잃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우한 이웃이 당하는 아픔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게 만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던 귀부인과 지도층 인사들,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불씨의 내용은 바로 진리에 대한 감각이 무디다는 것입니다. IMF 한파 속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더 늘고, 금모으기 운동에서 부자 동네보다 가난한 동네가 더 앞장 서는 현상이 2,000년전 바울이 선교 사역을 펼치던 동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 많고 힘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또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약자가 진리에 예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진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52절 말씀대로 박해의 한가운데서 또한 바울 일행이 쫓겨가 버린 후에도 제자들, 곧 대부분 이방인들, 다시 말하면 소외된 약자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경륜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노동자 출신의 작가 호퍼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실업자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매일 새벽 무료 직업 소개소에 나가 일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헛탕을 쳤습니다. 막벌이 하루 일을 구하려는 사람은 매일 5백명이 넘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직원이 나타나 "잔디 깎을 사람" "가구 운반할 사람" 하고 소리치고 뽑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한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무엇을 기준으로 한두 사람을 뽑는 것일까?" 그는 그 비결을 찾기 위해 날마다 다른 방법을 써보았습니다. 하루는 맨 가운데 앉아도 보고, 또 하루는 맨 앞에, 어느 날은 맨 뒷자리에 서 있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책을 들고 있어 보고, 눈에 띄는 색깔의 옷을 입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애타게 일자리를 찾다가 어느 날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다! 환하게 웃는 거다. 무슨 일을 맡기든 행복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의 표정으로, 불평 불만 의심 불안 없는 웃음을 웃는 거다!" 다음 날 소개소 직원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자리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장내를 한바퀴 둘러보고 "저기 가운데 웃고 있는 사람!"하고 불렀습니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IMF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온 국민이 경제 회생을 바라고 있습니다. 저 또한 우리 경제가 회생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경제 회생이 물질과 사람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그런 풍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만, 이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기회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곧 물질과 사람에 대해 무뎌진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노력하여 그 감각을, 그 감수성을 예민하게 단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가 회복되었을 때도 그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게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검소한 삶을, 정신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구 쓰고 버리는 생활은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하는 죄를 짓는 삶이 됩니다. 단순한 절약의 차원이 아니라, 물질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에 여기고 사랑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개미'라는 소설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개미와 같은 미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내가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감수성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 감수성이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살립니다. 그런 감수성을 지닌 사람에게 하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역할을 맡기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감각이 무뎌진 사람은 남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합니다. 상처를 입어 본 사람만이, 상처를 지금 입고 있는 사람만이 남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게 됩니다. 남을 치유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기뻐합니다. IMF 한파에 짓눌려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우리는 웃습니다. 나의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걸 느끼며 웃습니다. 이러한 나에게 은총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웃습니다.
마구 쓰고 버리는 것이 익숙하게 될 물질적 풍요한 삶을 추구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억지로 높은 자리를 추구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억지로 귀부인, 지도층 인사가 되려고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 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게 될 불씨가 사탄의 선동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지도층 인사가 되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그릇이라는 판단에 의해 하나님께서 지도층 인사로 세워주시는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요.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로 정했습니다. 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주신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 기쁨과 성령은 바울 일행이 박해를 받고 쫓겨간 후에 맞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IMF 한파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서 맞은 것입니다. 그들은 평소 기득권자가 아니고 소외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진리를 외면할 때, 그들은 진리를 수용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요즘 보면 IMF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듯 합니다. IMF 앞에서 사람들은 설설 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IMF를 두려워합니다. 물론 IMF로 말미암아 직장을 잃은 분들의 아픔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그러나 움츠러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아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웃을 일이 있어 웃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앞의 호퍼라는 사람 이야기에서 그는 결코 웃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웃었습니다. 그러자 웃을 수 없는 형편이 물러갔습니다. IMF 앞에서 움츠러드는 사람은 IMF에게 지고 맙니다. IMF의 고통 앞에서 웃는 사람이 IMF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IMF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입니다. IMF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요 하나님의 도구라고 믿는 믿음에서 입니다. 자연에 대한 감수성, 이웃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져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구조적으로 제공되었다고 믿는 믿음에서 입니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사모하여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박해를 받고 쫓겨간 황량한 도시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무리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히 내리듯,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IMF에게 웃음을 던지는 배짱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눈부시게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은총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따스한 마음으로 힘을 합해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로 우리 공동체를 일구어 가지 않으시렵니까?
복음의 감격에 빠져라! /행13:13-41/ 유기성 목사
2016-08-09 09:40:39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정말 무더웠던 여름, 참 비도 많이 왔던 여름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국내외 선교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번 여름에도 국내외 단기 선교를 나갔던 교우들이 많습니다. 젊은이 교회 단기 선교까지 다 마무리 지어지고, 이제 단기 선교 시즌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많은 국내외 선교 여행 중 특별히 마음에 감동이 있는 것은 젊은이 교회에서 떠나는 거지 순례 전도입니다. 잠잘 데도 없고 밥 먹을 데도 없고 돈도 없이 오직 성령님께서 먹여주시고 재워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인도하심을 믿고 2박 3일 전도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녀온 젊은이들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봅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반드시 성령님은 역사하시더라, 내 길을 인도하시더라.’ 그만큼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지순례 전도를 떠날 용기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2박 3일 동안 성령님이 인도하실 줄 믿고 전도 여행을 어디로 가라고 하든지그냥 떠나실 수 있겠습니까? 거지순례 전도 하나만 가지고도,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 나를 인도하신다. 나를 보호하신다!’ 는 믿음이 실제인가 아닌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국내 거지순례 전도 여행도 아니고 해외 거지순례 전도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음식도 다 다른데. 적어도 말은 통하는 국내 거지순례 전도 여행이면 어떻게 용기를 내볼만도 하겠는데, 굶으면 3일 굶지 뭐, 3일 동안 잠 안자지 뭐. 이런 오기라도 해 보긴 하겠는데, 해외 거지 순례 전도를 떠나라 그러면 이것은 전혀 다른 답답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이 바로 그 해외 거지순례 전도였습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 여러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여행 경비를 준비하고 또 여행 스케줄을 만들고 그리고 가이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행 경비조차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에 맡기고 심지어 죽인다는 사람, 감옥의 위협도 감수하면서 그들은 정말 거지 순례 전도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여행이었는가를 1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도 여행을 함께 떠났던 요한이 버가에서 중도 탈락한 것입니다.
13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육신적인 고생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구브로에서 박수 엘루마와 대적할 때, 지켜보던 요한은 너무나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구브로 섬의 실력자인 무당 엘루마와 싸우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죽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사울이 이겼습나다만. 특히 앞으로 가야 할 밤빌리아 지역은 야만적인 해적들이 활개치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이 도무지 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만 가겠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 요한을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요한과 정서적으로 비슷합니다. 아마 떠난 것 자체가 칭찬받을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요한을 비난하기 보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선교 여행을 포기하고 중간에 돌아간 요한이 아니라,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선교 여행을 계속하였던 사울과 바나바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두렵지도 힘들지도 않았겠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힘들고 두렵고 낙심했었다는 고백이 도처에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 어려운 전도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 것일까요?
그 답은 사울에게 있었던 복음의 감격입니다.
요한이 전도 여행을 중단했었던 것은 사울에게 있었던 복음의 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유명한 고백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사도 바울은 그 마음 중심에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하여튼 듣고 믿기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에 갈 자가 천국에 갈 자로 마귀의 종노릇을 하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고 가정과 가문과 나라와 민족이 바뀌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여겼을 정도입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우리가 전도를 왜 안하느냐 하면 전도하면 힘들고 전도 안하면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도 안하면 사람들에게 말 들을 리도 없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귀찮은 일도 없으니까 전도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전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자기는 전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까지 고백합니다.
여러분, 지금 신종 플루가 확산되고 있고 신종 플루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전염병이 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때, 여러분이 타미플루라는 치료약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지 않으면 죄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심정이 꼭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될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복음의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런 형편에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복음을 전해주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만약에 내가 고생이 되고 어려움이 있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화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교인들이 많아도 복음을 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인들 중에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새가족 과정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새가족 교재를 꼭 공부를 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은 알아듣습니다. 은혜도 받고. 그런데 복음을 말해 보라고 하면 말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직 정확하게 내 안에 복음이 정리되지 않은 분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말할 만큼 내게 충격이고 감동이 아닌 분들입니다. 아직 입은 안 열리신 분들입니다.
셋째는, 복음을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훈련도 받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누구나 복음은 알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교인이 다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복음을 들으실 수는 있습니까? 복음을 말하실 수 있기까지 되었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아직도 목사님이 말씀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좀 애매하다.’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리교를 세우신 존웨슬리 목사님도 아버지가 목사였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홀리클럽이라는 경건 단체를 만들어 성경 공부도 했고, 미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그는 복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선교사로 가는 뱃길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그는 죽을까봐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 선교사 벨러목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은 것을 믿습니까?”
웨슬리는 대답하기를 “나는 구원받기를 또 구원받은 것을 믿게 되기를 원합니다.” 했습니다. 그의 미국 선교 여행이 실패로 끝나고 귀국한 뒤에 “나는 믿음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인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다.” 눈물로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거리의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그 마음에 부딪혀 오면서, 그렇구나! 내가 아무리 죄가 많아도,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된다고 하셨구나! 믿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웨슬리 목사님의 죄짐이 다 사라졌습니다.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는 동생 챨스웨슬리에게 달려가서 외쳤습니다. “나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짊어 지셨음을!” 이제 웨슬리목사님이 복음의 감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요한웨슬레는 전도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복음의 감격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웨슬레 목사님처럼 복음의 감격을 한번 외쳐보셨습니까?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을 듣고 너무 감격스럽고 그것이 너무 놀라운 복이라 사람들에게 막 외쳐보셨습니까? 아마 복권 1등 당첨되면 외치지 말라고 그래도 외칠 것입니다. 하다 못해 친교회 모임에서 경품 하나 당첨되어도 소리를 지르고 뛰어나오지 않습니까?
그것과 비교가 안되는 것이 구원의 복음 속죄의 복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웨슬레목사님 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붙들고, 친구를 붙들고, 이웃을 붙들고 “나는 이제 믿습니다! 나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나 속죄함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외쳐보셨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30절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그래서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38-39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 속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어떤 고생도 죽음 조차 감수하고 전도 여행을 하게 한 동기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전해 주고 싶어서. 여기서 전하고 나면 빨리 저기 가서 전하고 그리고 또 저기 가서 전하고. 정말 ‘땅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행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이 복음의 감격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한 두 번 들으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복음의 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속죄의 복음이 변질되어가는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복음의 변질이란 무엇입니까? 속죄의 믿음은 있으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속죄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 예수님이 피흘려주셔서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 믿음이 있으십니까?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속죄의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감격은 없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 누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것때문에 하루종일 기쁜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 이 기쁜 소식은 왜 네게 이렇게 덤덤하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부모님 은혜 만큼도 감동이 오지 않는 이가 실제로 이 자리에도 있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이 해외에서 들려오는 우리 선수들의 승전보 만큼도 기쁘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속죄의 고백은 있으나 전도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게 변질된 복음입니다. 속죄 받았다고 하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질된 복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똑같은 복음을 들어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들어보았고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복음의 감격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감격때문에 죽음의 위협 앞에 있어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나갔습니다.
사울은 생명을 바쳐 그 복음을 전하러 온 세상을 휘젖고 다니는데, 요한처럼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떠나지도 않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아, 나는 도무지 힘들어 못하겠어.” 그러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요한은 떠나기라도 했습니다. 복음을 믿는다, 속죄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한번 전도 여행 떠나보지 못한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속죄 받았다는 믿음이 있는데 전도가 어려워서 못하는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더 못한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듣고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면서도 전도 한번 못한 분도 아주 밑바닥은 아닙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1절에 보면 그보다 더 못한 이가 나옵니다.
41절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말씀을 듣고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같은 복음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도대체 누구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어떤 분들은 복음을 배척하고 멸사하는 사람도 있는가 말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을 들어도 감동이 없는 것입니까? 복음은 듣지만 자기 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면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왜 복음은 아는데 복음의 감격은 없을까요?
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속죄의 복음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사함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천국 백성이다! 다 알지만 문제는 속죄 받음에 대한 감동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진정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착하고 온순하고 순종 잘하는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정말 십자가의 감격 없이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의 실상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제겐 교리일 뿐입니다. 제 머리로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질도 많고 선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선한 사람 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이 감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에게 제 죄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1984년 4월 광주 통합병원 수술 대기실에서 저는 비로서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정말 엉터리같은 목사인 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밤 11시에서 다음 날 아침 동틀 때까지 네가 어떤 자인지 아느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처럼 제 모습을 들추어 보여주시는데, 제 은밀한 죄가 얼마나 추악한지, 완벽한 위선자요, 이중인격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의 나의 모습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의 가장 큰 죄는 남 비판한 것입니다. 자기 죄를 모르고 남의 죄만 비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차이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느냐 차이가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닫느냐 아니냐 차이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제가 할 수 있었던 말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본 십자가는 완전히 다른 십자가였습니다. 하루 사이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늘 무덤덤하게 보였었는데, 그때는 깊은 바다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진 생명줄이었습니다. 지옥에 빠져가는 자에게 던져진 천국 가는 구원의 외줄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오직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수고했다 내 종아!’ 한 마디만 듣게 해주세요!” 그것이 나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죄 사함의 복음이 운명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모르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까 복음은 복음대로 있으면서도 내 마음이 헐떡거리고 갈급하고 목마르고 “안돼요, 힘들어요. 더 견딜 수가 없어요! 못하겠어요!”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완전한 죄사함을 받으면, 천국에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하나님을 아는 눈과 생생한 체험이 이 땅에서 체험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십니다. 이렇게 죄 사함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입니다. 돈벌이 보다, 공부 보다, 죄사함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 주간 읽고 감동받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
바보 같은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고려대 의학과 91학번 내과 전문의 안수현(1972∼2006). 그는 유명한 명의도 아니었습니다. 의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조문객 4000여 명이 줄을 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그는 정말 참 의사였다고, 예수님처럼 살았던 의사라고 사람들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국군 의무사령관 육군 중장이었던 김록권 장군은 군의관이었던 안수현 대위를 추억하면 예수님께서 군의관의 옷을 입으시고 한국 땅에 나타나셨다가 가신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환자의 살이 베일 때 아프겠거니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베인 것처럼 아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달랐습니다. 환자의 생명을 마치 내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의사들이 파업에 나섰을 때 그는 가운을 입고 진료실을 지켰습니다.
군의관으로 훈련을 나가면 앰브런스 안에서 생활하면 좀 더 편하고 안전했을텐데, 그는 풀밭에서 사병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부하들의 건강을 먼저 챙겼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계속 전도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환자나 가족을 만나면 책과 CD, 테이프, 선물을 사서 찾아갔습니다. 병실만 아니라 집에도 빈소에도 찾아갔습니다. 말로만 전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갑자기 유행성 출혈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처럼 33세였습니다.
영정 사진이 걸리기 전부터 장례식장은 물밀듯 밀려오는 조문객으로 들어설 곳이 없었습니다. 병원 매점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저씨부터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노점상 할머니까지 눈물을 훔쳤습니다.
예배와 찬송이 넘쳤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마치 결혼식 같았습니다. 한 신실한 청년을 예수님께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혼례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겐 복음의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나환자 촌에 들어가는 김대영 집사는 조경 전문가인데, 방탕했던 사람이었다가 십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성령을 체험한 후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중국 나환자 촌에 가라는 부름을 받고 선교훈련을 받기 위하여 교회 경비로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는데, 중국 나환자 촌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으로부터 급히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고 출국합니다. 왜 암 말기 때 부르시나? 생각이 들었으나, 조금도 망설임이 없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여러분, 개인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또는 가정에서 하나님 뜻대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가족을 섬기며 가족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다가, 교회에서 맡은 사명 충성해보려고 열심히 애를 쓰다가
“하나님, 이제는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어려워요, 나도 이제 지쳤어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요?”
이런 분이 있으십니까? 일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눈 앞에 장벽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감격을 어느 순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느 순간에 놓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얼마든지 다시 일으키십니다. 우리를 막을 것이 없습니다. 산이 옮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해결이 안된 문제가 없습니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그 십자가가가 나를 복받는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리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날 그 길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혹시 지친 분이 있으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붙잡으십시오. 가정 안에서 그렇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랬는데도 안되셨습니까? 여러분, 기도하면서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여기가 끝인가? 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너무 힘이 드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얼마든지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 시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보이지 않는 전쟁 /행13:6-12/ 유기성 목사
2016-08-06 16:32:5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최근에 한 신실한 남자 성도가 기도 요청을 하셨는데, 기도 제목이 있으신가 묻자 한동안 대답을 못하시다가 괴로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계속 음란한 생각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그런 문제로 고민할 것 같이 보이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깊은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성도에게 앞으로 음란한 생각이 일어나면 “사단아 내 마음에서 물러가라!” 하고 대적하라고 권해드렸습니다.
그 후 그 성도는 음란한 생각으로 시달리는 것에서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성도에게 “음란한 생각이 떠오를 때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라고 조언을 한 것은 저도 역시 음란한 생각으로 너무나 시달렸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러한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또 누가 알까 봐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평생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습니다. 곁으로는 경건한 목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인가?
마치 위선자처럼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것이 정말 두려웠었습니다. 그러나 음란한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민수기 22-25장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술가였던 발람은 모압 평야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는 모압 왕 발락의 끈질긴 요청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시므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발락 왕이 크게 화를 내자 발람은 발락에게 사악한 계교를 일러줍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발락에게 모압과 미디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바알의 제사에 참여하게 하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모압 백성들의 음행은 단순한 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음행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종교 행위였습니다.
신전에서 제사 드릴 때 여사제들은 거의 창녀같은 일을 했습니다.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제사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 여인들과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 것은 단순히 음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죄까지 범하게 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략을 통해 드디어 발람의 음모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2만4천 명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기록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음란함 뒤에 악한 영의 역사가 있구나!’ 그제서야 음란한 생각과 유혹이 단순히 부끄러운 일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운 일이 아니라, 음란함 뒤에 성도를 무너뜨리고 나라와 민족을 파멸하는 악한 영의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음란과 관련된 악한 영의 역사를 보는 눈이 뜨인다면 음란의 유혹이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끔찍해서 가까이 오기 싫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보는 눈이 열려져있지 않습니다.
음란과 그 뒤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음란의 유혹에 맥없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 눈을 뜨게 하고 난 다음에 음란의 문제는 저에게 그저 부끄럽고 사람들이 알까봐 무서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이 음란의 문제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음란의 유혹이 올 때는 이것이 악한 영이 공격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적인 승리를 그 분에게 그대로 누리실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음란의 문제 뿐 아니라 수없는 영적 전쟁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시험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한 영의 역사를 실제로 눈으로 본다면 우리는 아마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으시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은 반드시 영적인 싸움 한복판에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여러분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만의 명수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마귀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악한 영들은 목적이 하나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밤에 주무실 때 우리가 집의 문 단속은 얼마나 철저히 합니까? 창문도 걸고 대문도 걸어 잠그고 그런 다음에야 편안하게 주무실 것입니다. 대문을 잠그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 단속을 할 것이 악한 영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집 문 단속을 할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의 재산도 지키고 또 여러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문 단속을 합니다.
그러나 지켜야 될 것 중에 정말 지켜야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집의 문은 단속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은 단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정말 바보입니다.
집 문 단속을 하지 못하면 악한 자가 집에 들어와서 여러분의 재물을 도적질해 가고 여러분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단속하지 않으면 영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귀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문 단속을 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수시로 들락날락 거리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놀라운 복과 은혜를 다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보면 마귀가 우리 마음에 심어넣어주는 악한 것들이 무엇인지 죽 목록이 나와있습니다. 이 목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지 못하는 자들의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마귀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고 영생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우리에게 눈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것이 악한 영의 역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문화 속에 빠져서 그들은 복음을 전혀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세상 문화에 깊이 침투하였습니다,
세상 문화를 주의 깊게 보면 그 배후에 사단의 무서운 전략이 숨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상 문화가 요즘에는 방송과 손을 잡았습니다.
역술인들을 인간 문화재로 만들고 책을 내고 영화화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보는 만화나 놀이를 보면 귀신 이야기, 마법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결론은 예수 못 믿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리려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막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여러분이 만약에 신앙의 결심을 했는데도 너무 쉽게 그 결심이 무너져버리고, 어떤 거룩한 열정이 일어났는데 너무 쉽게 식어져버리고, 예수를 믿은 연한은 오래 되었는데도 믿음은 자라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태를 보고 여러분 영적인 상황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마귀가 영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시험을 겪고 사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악한 영의 역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혈기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염려때문에 어떤 사람은 세상 욕심으로 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갖가지 형태로 악한 영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주인 노릇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악한 영은 역사하는가? 우리 주변 가까이서 역사하는가 알고 싶다면 복음을 전해보면 됩니다. 귀신이 정말 있는지 사람들을 미혹하고 훼방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정말 알고 싶다면 전도를 해보십시오.
악한 영의 역사는 우리가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거나,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전도를 시작하게 되면 귀신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기 전에 먼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사울이 찾아간 첫 번째 선교지가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그 땅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영적인 갈급함이 있어 바나바와 바울을 초대해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바예수라는 박수가 복음 증거를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전도하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마귀가 왕 노릇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브로에서 총독이 가장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총독을 조종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무당입니다. 이것은 당시가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 철이 되면 국회의원들이 점을 보러 다닙니다. 정치인들이 무속인을 찾아다닙니다. 세계 수많은 나라의 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배후에는 무당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구브로 섬 전체를 실제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악한 영의 권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전도를 해보면 금방 드러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우리가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도록, 우리 믿음이 자라지 못하도록 악한 영이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할 때,
우리 가정을 은혜가 충만하고 천국같은 가정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 우리 가정을 무너뜨리려고 악한 영이 역사할 때,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또 내가 사회 생활할 때 내가 담대하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도록 알게 모르게 악한 영이 우리를 공격할 때, 영혼을 구원해야 되고 전도를 해야 되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영적인 공격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싸워서 이길 것입니까?
9절-11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아,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렇게 싸우는 것이구나.‘ 하는 교훈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주목했다는 말은 노려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싸우려면 제일 먼저는 악한 영의 역사를 분별하고, 아 이것이 악한 영의 역사였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분별했다면 노려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여러분도 악한 영의 역사에 대해서 노려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싸움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한 영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9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사울은 성령 충만하여 박수를 주목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이처럼 악령과 싸울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원수 마귀를 알아야 하지만, 원수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악한 영을 제압할 권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 16:18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왜 습관적인 죄 문제를 이렇게 계속해서 극복하지 못할까? 여러분 스스로도 부끄럽고 계속 죄책감에 눌리고 그러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습관적인 죄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다면 아, 이것이 영적인 공격과 관련이 되는 문제구나.
또 왜 우리 가정은 다 예수를 믿는데도 그렇게 싸움이 많고 기쁨이 없고 항상 분위기가 어두운가? 이것이 영적인 전쟁과 관련된 문제가 있구나. 왜 믿는 성도들끼리 성령 안에 연합되지 못하고 자꾸 의견이 갈리고 분열이 되는가?
이것이 영적인 공격과 관련된 문제가 있구나.
여러분, 나라와 또 우리 사회 여러 현상들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볼 때 아, 이것이 영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구나.
여러분이 분별하였다면 그 다음에는 노려보시기를 축복합니다. 피하지 마시고 그냥 힘들어만 하지 말고 “사단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가 너를 이제 분별했다! 내게서 떠나가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악한 영의 역사라고 분별되면 눈을 딱 부릅뜨고 그것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엘루마를 꾸짖었습니다.
“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박수 엘루마는 총독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구브로 섬의 실질적인 실권자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처지는 구브로 섬의 손님일 뿐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두려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담대함으로 박수 엘루마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자신과 함께 계시고 영적인 전쟁은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를 대적하여 내좇는 권세가 있음을 그가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악한 영을 향해 꾸짖어야 합니다.
“이 더러운 영들아 우리 집에 가만히 들어와 부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자녀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 악한 영들아! 지금 결박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성경 지식이 있다고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산다고 악한 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악한 영을 대적할 때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사울이 아주 강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
랬더니 그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서 인도할 사람을 찾게 되었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래서 서기오 바울 총독 뿐만 아리고 구브로 섬 안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지금도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도 더욱 믿음 안에 서고, 그리고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담대하게 사도 바울처럼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여 악한 영을 대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꾸짖어도 변화가 없다고 탄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말씀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저도 한번 대적해 보았습니다. 음란의 영아 떠나가라! 혈기야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 가정에 있는 모든 불화가 예수의 이름으로 다 떠나갈지어다!
질병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서 좇김을 당할지어다! 그런데 실제로 내게는 그런 역사가 안 일어나니 답답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박수 엘루마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여 그가 소경이 되는 역사가 나타나고 그래서 하나님 영광도 나타나는데, 나는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떠나가라! 좇김을 당할지어다! 해도 아무 역사도 안 일어난다는 분들이 있으십니다. 여러분,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겉으로 흉내만 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소리 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 소리 지른다고 영적 전쟁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사도 바울을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 박수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에게 그저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고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한 것이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성경은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단아 물러가라!” 고 소리만 질렀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온전한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자기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복음을 분명히 믿었고 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과 선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마귀를 제압하는 권세를 주셨는데 여러분이 분명한 십자가의 사람일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나옵니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우리들이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주로 중보하는가? 대부분 가족들의 건강, 자녀의 성적 그리고 교회 부흥 등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사도 바울은 속 사람이 강건하길 가장 우선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영적 전쟁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속 사람이 강건한 것입니까?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 이것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열쇠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이 쫓겨난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귀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귀신은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역사를 이기려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 이기심, 시기심을 십자가에 처리해야 합니다.
우상 문화의 핵심은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박수 엘루마가 복음을 반대한 이유는 자기 이익을 잃어버릴 위기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도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우리 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 예산을 주로 자기 교회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대외적인 봉사나 선교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 교회에도 할 일이 많고, 돈 쓸 일이 많은데.”라고 말하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기의 이권을 챙기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봉사를 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만 하려 하고, 자기 부서가 더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 부서의 사업 예산을 서로 많이 확보하려고 다투는 일들이 다 이런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마귀가 실제로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온갖 더럽고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라고 말한다면 따라 하겠습니까? 금방 긴장하고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시기심은 마귀의 역사인 줄 모르고 넘어갑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복음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심으로 나보다 더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사람을 막는다면 박수 엘루마가 복음을 방해한 모습과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사 시절 시골 교회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귀신을 내쫓는 것을 시도한 적이 있었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앞에 놓고 죽 둘러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는데, 그래도 악한 영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는데 시원찮게 믿고 있는 한 사람의 차례가 되니까 조용히 앉아있던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눈을 치켜뜨더니 ”너는 안 믿잖아! ”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그만 믿음 없던 이 분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오 주여,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소리 지르며 엎드려 통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들린 한 사람 때문에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신 들린 자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대적할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귀신이 좇겨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오늘 말씀을 그냥 읽기만 하지,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야. 그렇게 넘기지 ‘그래 맞아! 나도 만약에 악한 영의 역사가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지.’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분들은 이유가 하나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를 분명히 붙잡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영적인 대적 앞에서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귀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마귀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마귀 밥이니까.
여러분, 박수 엘루마가 복음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은 이유는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 동안에 구브로 섬의 실질적인 지배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에게 얻어지는 유익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참 생명의 복음이 증거 되게 되면 자기 수입이 다 끊어집니다. 자기 권세가 다 사라집니다. 박수 엘루마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떤 사람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욕심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이고 욕심의 사람이라면 마귀가 여러분으로부터 떠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영적인 권세가 있는 사람으로 인해서 귀신이 좇겨나간다 하더라도 그 귀신은 일곱 귀신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먹이가 있으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을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줍니까?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달라집니다. 예수 믿고 나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은 비참하게 살고 속도 없이 남에게 다 퍼주고 살고 자기는 가난하게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정말 믿어진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데 하나님이 왜 나를 위하세요? 이제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배풀어주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건드리려고 해도 건드릴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데 어떻게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영적으로 계속 시달리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는 자아를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생명이고 주님 되시니 마귀가 더 이상 나를 대적할 수 없고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권세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무서운 자아 추구, 이기주의,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이기적인 마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사는 삶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마귀에게 당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내가 나를 위하여 산다면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능력이 사라지고 상처를 주고 또 받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은 망하라, 손해만 보라, 바보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더 이상 우리가 스스로를 위하여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한 십자가 믿음에 설 때,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도 주님을 위하는 것이기 보다는 자가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교를 위해서 우리 것을 내놓으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위해서 우리 것을 내놓으라 할 때 순종하는 교회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다 퍼주고 다 나누어주고 나면 우리 교인은 어떻게 하라고!” 교회를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철저히 이기적입니다. 박수 엘루마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위원회와 부서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되어지는 것을 보면 무슨 예산 하나를 따낼 때도 자기 부서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부서만 잘 되면 하여튼 다 잘 된 거야.”
그것도 철저히 이기적인 것입니다. 교회 일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내가 그 일을 하느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느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어야지. 나보다도 저 사람이 하면 이 일이 더 잘 될 것 같아.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나는 다른 일을 하면 되지 뭐. 그러면 교회가 더 잘되지 않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교회 안에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보다 내가 더 중요하면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이 가지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영적인 권세가 없습니다. 악한 영이 좇겨나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 중심이 마귀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성도 여러분, 악한 영이 역사하는 세상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무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담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상 문화, 악한 귀신 문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길을 주셨습니다.
흥분되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악한 영들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기도하실텐데, 여러분도 알지 못하게 시달리고 살았던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내 마음은 이럴까? 우리 가정은 왜 이럴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주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귀에게 조롱 당하고 해코지 당하고 눌려지냈던 것이 있습니까? 주님,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온 것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분별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에 놓임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admin
성령께서 인도하는 삶이 가장 복되다 /행13:1-5/ 유기성 목사
2016-08-06 16:23:43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 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 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
오늘 여러분들 중에는 ‘안식월에서 돌아온 유목사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도 교회로 돌아오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한달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그저 쉬다가 가는 것만은 아닌가?’ 안식월을 떠날 때 모든 교우들이 한결같이 말씀하기를 “푹 쉬다가 오셔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교회 일도 다 잊어버리고 푹 쉬세요!”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그저 쉬다가 왔다고 하면 교인들이 너무 실망하지 않을까?
제게 얼마 전부터 위기감이 생겼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가와야 하는데, 전화가 오면 겁부터 나고 사람들이 만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받은 어느 목사님 메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책을 읽고 목사님은 진실 된 목사님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번 실망을 했습니다.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나 지신의 나약함을 회개하고 강팍함을 회개했는데... 배부른 목사의 말 속임이었을 수도 있다는 아픈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목사님께 마구 흔들리는 저 자신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 상담하고 싶어서 여러 번 전화를 하고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도 보냈는데... 아무 응답이 없군요.
목사님은 참 바쁘신가 보네요. 목사님은 참 겸손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도 여느 목사들처럼 말만 멋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 보낸 메일을 회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작년부터 많은 분들이 보낸 상담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답장을 드릴 힘이 없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너무 많은 메일이라 답장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제 어려움은 메일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담임 목사로서 해야 할 일과 교회 외부에서 말씀과 강의에 대한 요청과 지방 감리사로서 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들, 게다가 최근 감리교 사태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된 각종 모임 등 제 일정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사역과 삶을 점검해 볼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에서 안식월은 주님의 소환 명령이었습니다. 주님께 모든 사역을 맡기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한 달은 제 사역과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 삶과 사역을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게 하시는 훈련을 갖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경험한 한 달이었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위하여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안식월을 갖는 저에게 주시는 응답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될 때, 이방인 선교의 중심인 안디옥 교회가 사도 바울을 순회 선교사로 파송하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순교 선교사로 피송을 받는 장면이 오늘 본문인데, 본문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너무나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실제적인 인도하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2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같이 들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들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지시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그들을 순회 선교사로 파송하라. 그런 지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람들이 회의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시하시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시는데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3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안디옥 교회의특징은 성령님께서 정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신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안디옥 교회는 정말 하나 되기가 참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1절 말씀에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같은 부류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바나바는 부자입니다.
밭을 팔아 교회에 바쳤던 사람이었고, 시므온과 루기오는 출신은 달랐지만 흑인이었고, 마나엔은 헤롯 왕의 젖동생이라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철저한 유대인으로 바리새인 출신입니다.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 교회로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교회에서 가장 실력있고 영향력이 있는 바나바와 바울을 순회 선교사로 아낌없이 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로 말하면 담임 목사인 저를 여러분이 순회 선교사로 파송하라. 이런 문제로 의논하게 될 때 의견이 쉽게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그 문제를 분명하게 결단하고 순종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그렇게 하라고 분명히 강력하게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조그만 갈등도 없이 금식하고 기도하여 안수하고 파송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이 그렇게 구체적이고 분명히 지시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왜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에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 지시하는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개인 가정일이나 여러분 일터의 어떤 문제, 또 교회 공동체의 모든 부서의 일들이 하나같이 주님의 뜻을 알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는 안디옥 교회처럼 분명히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안디옥 교회처럼 역사하신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교회 일은 일사천리로 되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놀랍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묵상하는 중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안디옥 교회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안디옥 교회가 받은 성령의 인도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라” “하나 되라”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내용이 모르시는 내용입니까? 그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말씀을 우리 모두가 다 듣고 있습니다.
못 들었다, 몰랐다고 하실 분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뿐만이 아니고 지금 우리에게도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반기 전 교인 필독서 한 권을 추천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을 쓰신 켄블랜차드의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랑으로 굴러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만 고여 있지 않고 교회 밖으로까지 사랑이 흘러넘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웃을 단지 전도 대상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대상자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갈등과 반목의 현 시대에서 교회가 화해와 사랑의 메신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주제를 다루면서, 따뜻한 유머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교회 안에 고여 있는 사랑을 밖으로 흘러넘치게 하는 성경적 비결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시면 성령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심령도, 여러분 가정도, 교회 공동체 안에도 사랑하고 하나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을 지금도 성령님은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번 안식월 동안 귀한 선교사님 한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무섭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중동의 한 나라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제 연말쯤 그 나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교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순교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13살 된 아들과 9살 된 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순교할 상황에 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아이들에게 순교의 축복에 대하여 계속 강조하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들이 불쑥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아빠,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아빠가 순교하게 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당황하였답니다.
이 아들은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순교를 하나님이 허락해 줄 것이라고 아빠를 격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님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만 역사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놀랍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허전합니까? 성령께서 직접 내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읽은 것 처럼 성령께서 그렇게 직접 말씀해주실 수는 없을까? 나도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직접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여러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분명히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막연하게 인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막연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성령의 실제적인 역사가 우리 삶에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단 우리가 어떤 물질을 보고 만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고 만질 수 없을 뿐 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런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때때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우리 인생을 맡기려고 할 때 마음에 주저함이 오고 두려움이 오고 그리고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정말 내 인생을 책임져주실 수 있을까? 성령님이 정말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일까?’
그런데 여러분, 너무나 놀라운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그리고 성령님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사랑하면서 나아가면 성령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성령님께 반응하면 우리는 성령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요 14:15~1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가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경험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특별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위기 때, 고통스러울 때 가족과 친구는 얼마나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는 지 모릅니다.
그것은 서로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친구 사이에 있는 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만 경험됩니다.
여러분,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여러분의 친구이고 가족인지 겉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느낍니다. 내 가족이 옆에 있고 내 친구가 저쪽에 있는 것을 나는 느낍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이 막연한 이유는 성령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령님을 믿고, 믿는다는 말을 더 이상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랑하게 되면 성령님은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가족이나 친구가 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과 정말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내 삶을 지켜주는 힘이시고 그리고 내 길을 인도하는 정확한 인도자라는 사실을 놀랍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월 기간 중 감사한 것은 프랭크로바크 선교사(Frank Laubach)에 대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1884년생이신데, 달라스윌라드, 필립얀시, 맥스루카도 같은 분들이 강력하게 추천한 분입니다.
그는 필리핀의 외로운 선교지에서 사역하셨던 선교사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던 분으로 세계 문맹퇴치선교회 (World Literacy Crusade)를 설립하였고,
미국 우표에 등재되신 유일한 선교사이고 정치적 지위 없이도 세계 2차대전 후 미국의 외교 정책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쳤던 분입니다.
그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45세가 될 때까지는 신앙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도 우리가 가졌던 비슷한 신앙적인 갈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 하실까? 순간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은 가능할까?
숨 쉬고, 생각하고,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쉬고,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수 있을까? 잠들 때 그 분의 품 안에 잠들고, 다시 그 분의 임재 안에 깰 수 있을까? 하나님과 24시간 함께 하고 있다는 친밀함을 과연 느낄 수 있을까?
이렇게 갈등하다가 1930년 그는 남은 인생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실험으로 삼으리라! 결심하게 됩니다.
1월부터 그는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면의 소리에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끊임없이 “아버지, 뭐라구요? 제가 말하기를 원하세요? 제가 지금 이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발걸음마다 묻는다. "하나님, 지금 뭘 바라시죠?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물살을 거꾸로 헤쳐 올라가기 위해 노를 젓는 사람 같았다. 나는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귀를 기울였고,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사람들의 옷이나 신체, 또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30분에 한 번씩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일 분에 한 번씩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리는데 성공했고, 그 간격은 점점 줄어 들었다.
1930년 기록한 프랭크로바크 선교사님의 일기가 맥스루케도의 「예수님처럼]에 일부 실려 있습니다. 그 중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930.01.26. 매 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 지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손가락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걷는 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흘러나오기 바란다.
1930.03.01. 보이지 않는 한 손이 내 손을 잡아 이끄시고 또 다른 손이 앞에서 내 길을 예비하신다는 의식이 내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고 있다.
1930.04.18. 하나님과의 교제의 참맛을 느끼자 그분께 합당치 않은 모든 일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오늘 오후 하나님의 임재 의식에 강하게 붙들리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전에는 모르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이제 한 주에 여러 번씩 찾아온다.
이것을 경험하고 나자 모든 더러운 것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1930.05.14. 매 순간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내 생각의 주제로 삼고, 내 대화의 짝 삼는 것, 이것이야말로 평생 접해 보지 못한 가장 놀라운 일이다.
점점 된다. 물론 아직은 한나절도 못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루 종일 그렇게 될 날이 있을 줄 믿는다.
1930.05.24. 요즘은 걱정이 전혀 없고 잠도 잘 잔다. 거의 온 종일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거울을 봐도 내 눈빛과 얼굴에 새로운 광채가 있다. 어떤 일에도 더 이상 조급한 마음이 없다. 모든 일이 잘 된다.
1930.06.01. 오 하나님, 하나님은 더 이상 낯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온전히 제 안에 계십니다. 여기에...
정말 믿고 성령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마치 육신으로 같이 있는 어떤 한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기를 실험했습니다. 계속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주님께 계속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서 하나님이 정말 자신과 함께 계시다고 하는 놀라운 임재하심 속에 살게 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프랭크로바크는 수도원에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바쁜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과 신비로운 만나며 동행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러기를 6개월 만에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교육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신학교 설립을 도왔으며, 아프리카 부족들 속에서 사역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겼으며, 문맹 퇴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필리핀 외로운 선교지에서 하나님은 프랭크로바크를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 정치가요 그 분의 대변자의 지위로 들어올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자가 가장 복된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믿음으로 그리고 성령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만큼이 곧 우리의 믿음의 수준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막연하다면 아직 내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냥 사람의 노력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정말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저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도 매번 갈등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안식월을 갖는 것도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제가 안식월을 가지면서도 처음에는 어떻게 한 달을 보내야 될지 상당히 갈등이 심했습니다.
허둥지둥하기도 하고 생각이 바로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한 달을 쉬게는 되었는데, 우리 교인들 중에 한달의 안식월을 가질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특별한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안식월을 갖는 것이 과연 성령께서 인도하심일까? 그런데 문제는 한 달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제가 아무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고 그냥 놀고만 왔다고한다면 좇겨나지 않을까? 한달 동안 쉬라고 허락은 받았지만 끝날 때가 문제였습니다.
안식월을 가지면서 처음에는 이것을 해야 하나, 저것을 해야 하나, 헛되게 보내면 어떻게 하나? 긴장하고 염려하고, 조급했습니다. 방학을 시작하는 학생처럼 계획만 잔뜩 세웠습니다.
책도 보아야 되겠고 기도도 많이 해야 되겠고. 하여튼 한 달 뒤에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 손에서 불이 나오든지. 이런 강박관념이 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더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월을 어떤 계획을 세워서 보내려 하지 말고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맡기고 지내도 한달 뒤에 보람되었다고 느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님을 믿고 맡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다 맡기기로 했습니다. 주님이 하십시오. 제가 읽어야 할 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제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되는지 다 주님이 지시해 주십시오. 주님이 인도하시는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불한했습니다. 주님이 인도 안해주시면 어떻게 하나? 정말 주님이 인도해주실까?
제가 제주도에 가서 한달을 보냈습니다. 제주도에 가서 어촌 마을에 방 하나를 구해서 보냈습니다.
저희들이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날이 저희 결혼 기념일이었는데, 마을 교회 새벽 기도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회 시간에 목사님께서 택하신 설교 본문이 에베소서 5장 21-33절이었습니다. 부부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결혼 기념일에 맞춘듯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결혼 기념일도 준비해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한 달 동안 주님의 인도하심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한 달을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고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우리가 힘들어하는 문제, 주님은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친히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정말 그 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디옥 교회에 역사하신 것처럼 제게도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역사해 주시옵소서.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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