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당할 때 더욱 주를 바라보라 /행25:13-22/ 유기성 목사
2016-08-09 16:54:07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
수요일 저녁마다 진행되는 김명현교수의 창조 과학 특강이 대단한 인기가 있습니다., 저는 김명현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아직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말하는 돌대가리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초등학교 때 같이 교회 다니던 많은 친구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 아들이라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과 교회가 세상에서는 무시 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나서 그 때 교회를 떠났던 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우연히 있었는데 한결같이 삶이 내적으로 무너진 상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그 때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하는 생각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 본문을 읽다가 중학교 1학년 생물 시간에 느꼈던 무시 당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유대 나라에 새 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였는데, 새 총독으로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었던 베스도에게 유대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감옥에 갇힌 바울을 죽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과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가 바울을 조사를 해 보니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법을 적용을 하려면 죽일 죄목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로마 법을 지켜야 하는 총독으로서 분명하게 죽일만한 죄목이 없는 사도 바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일 만한 아무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느냐고 했더니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로마로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베스도는 사도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 수 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사도 바울의 죄목이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베스도가 고민을 하다가 유대 본봉왕인 아그립바 왕이 부임해서 예방차 가이사로 오게 되었을 때 그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유대 왕 아그립바 왕을 만났을 때 베스도는 사도 바울의 재판 건에 대하여 의논하면서 협조를 요청합니다.
그 때 베스도가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합니다.
18~19절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한 마디로 베스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죽여야 된다고 해서 ‘바울이 굉장히 흉악한 자구나.’ 생각하였는데, 막상 조사를 해보았더니 별것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 뿐이더라.
저는 베스도의 이 말이 너무나 마음에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받았던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시 당한다는 느낌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이 부활의 복음이 베스도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복음을 듣고도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종교 논쟁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 나는 대단한 일인 줄 알았어요. 다 죽이라고 해서. 그런데 들어보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종교 논쟁 밖에 아니더라구요.”
이것이 베스도가 부활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었고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일본이 망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 그래요?” 라는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믿어지지 않은 사람도 “정말이냐? 사실이냐?” 확인하고 또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한 인생이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 모든 인류가 부활하게 되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베스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충격입니다.
베스도는 이 뿐만 아니고 나중에 사도 바울은 베스도에게서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과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였을 때,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보니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때는 2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었고, 베스도 총독에게서는 철저히 무시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무시 당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복음 자체가 무시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당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반응은 충격은 커녕 관심 조차 없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부활절입니다. 예배당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현수막을 걸고 길거리마다 부활절 연합예배 광고판이 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절이 온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관심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절입니다.” 얘기하면 “아 그래요? 기독교의 명절이군요. 축하합니다.”
마음에는 전혀 믿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논쟁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잘 해 보세요. 당신들이나 잘 믿으세요.” 이런 분위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에 완전히 무시하고 또 조롱합니다. “부활이 있대. 예수님이 부활했대. 말도 안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부활의 복음을 무시하는 세상의 반응 앞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무시해도 조롱해도 상관 없습니다.
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는데, 조금도 위축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그저 듣기만 한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나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부활의 복음의 능력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듣기만 해서는 아무런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에야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베스도는 부활의 복음을 듣고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지금은 감옥에 갇혀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되었길래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외쳤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만나지 못한 차이입니다.
베드로에게 물어 봅시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당신이, 어떻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도마에게 물어 봅시다. “당신은 그렇게 의심이 많았는데, 어떻게 충성스런 종이 되었으며,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에게 물어 봅시다. “당신은 어떻게 돌에 맞으면서, 얼굴이 천사 같을 수 있었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서서 내려다 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살인자 고재붕도, 무장 공비 김신조도, 중국대사였던 김하중 장로님도, 수많은 인기 연예인들도 그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세상이 어떻게 말해도, 무시하고 조롱해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그리고 지금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너무 분명하니까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에 임하여 역사하십니다. 2천년 교회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당시 통치자들은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처럼 전도자를 잡아 가두고 죽이면 얼마 안가서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도 교회는 더 부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부흥과 전도의 역사가 사도들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전도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당시 권세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때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을 보면 교회는 당장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안에 새 생명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기도도 계속되고, 새 부흥이 임합니다.
교회는 사람 지도자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망 권세 이기신 능력의 예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움직여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반드시 교회를 통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고 생명의 구원 방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믿음을 지키고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무시하고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부활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싸움 하나 해결하지 못합니다. 부부싸움 뿐 아니라 교단 정치 싸움까지, 이게 뭡니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여 사실상 부활의 복음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때문에 억울하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고, 베스도 총독에게서는 무시를 당했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겼습니까? 항상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나는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여러분, 한 가지만 점검해 보면 됩니다. 나는 세상과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 정말 자유해졌는가? 그것만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칭찬들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칭찬들을 일을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십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목사의 아들이기에 교인들 뿐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나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칭찬 들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칭찬하는가 눈치만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할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범생이다, 착하다, 말 잘듣는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칭찬이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 삶의 이유요 유일한 기쁨이었는데, 나는 칭찬받기 보다 칭찬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되면 이제 누가 나를 칭찬해줍니까? 그 동안에는 항상 저보다도 위 어른이 계셨습니다. 전도사 때는 목사님이 계셨고, 부목사때는 담임목사님이 계셨고 젊은 목사 때는 연세 많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나를 칭찬해줍니까?
담임목사가 되고도 얼마 동안 여전히 교인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심지어 부목사 전도사들에게 까지 칭찬 듣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칭찬이란 위의 권위자가 아래 권위자에게 해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대가 되면 아부가 되기 쉽고 진위를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더 이상 저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담임목사가 되고 이 변화를 적응하지 못할 때,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칭찬 받아야 사는데, 그래야 만족이 되는데 이제는 제가 칭찬해줘야 되는 위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면서 더 이상 사람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칭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칭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전에도 알았지만 막연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칭찬, 예수님의 칭찬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칭찬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나니까 사람의 칭찬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칭찬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를 발견하고 나니까 더 이상 사람들의 칭찬에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도 자유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사람들의 비난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님 목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 아들이 잘못해서 아버님 목사님이 교회에서 좇겨났다는 이야기를 그리도 많이 해주는지.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욕먹는 일, 비난받을 일은 절대 안하는 원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욕먹을 일도 없고 야단 맞을 일도 없었지만 마음에는 항상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침묵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말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제가 이따금 부교역자들에게 지나쳐 보일 만큼 화를 내고 조급해 하는 이유가 역시 비난 받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부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이 하는 일이 다 내 일인데, 다 잘하다가도 한두 가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와 상관없는 교역자들에게는 관대하면서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는 칭찬하기 보다 책망하는 일이 많은 것은 교인들로부터 책망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도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형편을 다 잘 아시기에 굳이 조급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옳다고 하시면 사람이 뭐라고 한들 상관이 없지요. 그때부터 제 마음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주님은 잘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됐지. 또 부교역자들이 부족함을 받아주는 것도 마음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지금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들 하겠지만 옛날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실수라든가 부족한 것에 대해서 까다로운 분이 아니셨습니다.
얼마든지 받아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주님으로부터 용납받는 기쁨을 얻고 난 다음부터 부족한 사람들도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칭찬이 진정한 칭찬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람의 칭찬과 비난은 얼마든지 극복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7-9절 처럼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는 한 가지 소원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진짜를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주님의 칭찬 그것 하나면 황홀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학위가 있어야 되고 돈이 있어야 되고 지위가 있어야 되고 신분이 높아야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이 아무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상 금상 은상 동상이 있을 때, 대상을 받을 사람이 금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금상 받으면 속상합니다. 금상 같은 것은 배설물처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없습니다. 항상 사람의 눈만 의식하고 삽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못 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평가가 더 중요하니까.
여러분, 아까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23절 이하 말씀을 보면 아그립바 왕과 바울이 등장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왕 위에 합당한 격식을 차리고 등장합니다.
머리에 금으로 된 왕관을 쓰고 네 가지 색깔로 조화를 이룬 로얄 칼라의 의상을 입고 바울을 심문하러 나왔고 왕후격인 버니게는 5미터 이상 땅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베스도 총독은 로마 권위의 상징인 자색 망토를 입고 천부장들과 높은 사람을 모두 정열 시키고 그 중앙에 위엄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이에 반해 사도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대조가 되겠습니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에 서고 싶습니까? 사람의 평가에 목을 매는 사람은 아그립바 왕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사도 바울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그립바 왕이 누구입니까? 로마 사람들이 유대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세운 꼭두각시 왕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책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무마시키려고 그냥 형식적인 왕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폼만 그럴듯하지 실제 권한은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인사를 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 아내 버니게는 사연이 복잡한 여인입니다. 실제로는 아그립바 왕의 누나입니다. 상당히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었는데 남매가 같이 산다고 주위에서 비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왕권으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자는 이렇습니다. 실상은 지옥에 갈 자인데, 왕관이 무슨 소용이며 왕복을 입은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그립바 왕과 사도 바울 중 누가 존귀한 자입니까?
여러분, 사람의 평가에 목을 맨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복주시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니게 총독 앞에서 죄인 신분이었던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행 26:29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당당했습니다. 부활하여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당당함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신앙 고백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시면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떤 사람의 평가에 매여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국민 여론입니다. 아마 우리 대통령께서도 국민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매일 매일 노심초사하실 것입니다.
국민의 여론을 살피는 대통령, 좋은 대통령이지요.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국민의 여론도 무시하는 악한 대통령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국민들 여론만 살피는 대통령은 실패하게 됩니다. 국민들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은 아닌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여론이라는 것 하루에 열두 번도 바뀌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유대인들의 여론 때문에 예수님이 무죄한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아브라함링컨이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려고 했을 때 다수 국민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끝까지 노예 해방을 이루어냈습니다.
비록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 당했지만 아브라함링컨 대통령은 미국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여론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 그 일을 위함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만 의식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복음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때 가장 활발하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습니까? 감옥 속에서 2년 동안 이유 없이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마침내 때가 되니까 애굽 총리로 삼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로마로 인도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옥살이 했습니다. 그리고 베스도에게 무시 당하고 그랬지만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도하던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되어 재판받는 길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죄인이 되어 재판 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모욕과 멸시, 천대는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재판을 통해서 바울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무시 당한다고 비난 받는다고 조급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만나주십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만날 수 있을까? 성경이 정확한 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려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입니다. 나는 죽고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 믿으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으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복 받는 길, 믿음의 길, 승리하는 길을 가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베스도 앞에서 /행25:1-27/ 하용조 목사
2015-05-25 03:27:35
오늘 25장에 보면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4장과 25장 사이에는 2년이라는 세월이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바울에 대한 재판의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미결상태로 2년 동안 감옥에 있게 됩니다. 총독이 바뀝니다. 벨릭스 총독에서 베스도 총독으로, 그렇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2년의 시간만 흘렀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감옥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2년이란 시간이 허무하게만 흐른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2년 전에 바울이 무죄를 선언을 받고 감옥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40명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25장을 보면 그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2년동안 사도 바울을 잘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의 쉬지 못함을 2년동안 쉬게 하십니다. 바울에게 안식년을 주신 것입니다. 감옥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위로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쉰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쉰다는 것이 영적인 재충만과 하나님의 사랑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부임을 했습니다. 부임을 한지 3일 후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총독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만나게 됩니다.
1-3절,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은 2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꼭 죽여야 했습니다. 총독이 바뀐 것을 기회로 해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송을 시킬려고 합니다. 그들은 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매복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유대인들의 의견을 들어줄려고 합니다.
4-5절,
베스도는 유대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가 송사한 이야기를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그를 즉시 예루살렘으로 후송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을 송사할만한 실제적인 증거와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걸고 넘어질려고 해도 걸고 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6-7절이 그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적인 관점에서도 바울을 재판정에 세울 수 없었고 성전이나 로마의 법에도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에 바울을 송사할 수 없었습니다. 증거를 실제로 댈 수가 없었던 것이죠.
8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제 베스도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송사하려고 듭니다. 정치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리가 든든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재판하려고 하니 전혀 재판을 할 증거가 없습니다. 베스도는 두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베스도는 바울에게 이런 요청을 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겠느냐?’ 그러나 단호하게 바울은 베스도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로마 가이사의 법정에 서서 가이사에게 재판받기를 원합니다.’
9-12절의 내용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를 로마의 법정에 서게 하라. 나는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정식으로 요청을 합니다.
고민에 빠진 베스도는 배석 심판 위원과 함께 의논을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재판 결과를 내립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재판을 호소했기 때문에 너는 가이사에게 갈지어다.’
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바울을 재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이사 외에는.
왜 베스도가 정치적인 부담을 가지면서 이런 결정을 했겠습니까?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스도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가야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을 이렇게 하기로 생각 했는데 다른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너는 로마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재판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도 이렇게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사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업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결정이 났을 때 베스도에게는 두 손님이 찾아 옵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여동생인 버니게가 베스도를 찾아 옵니다.
13-14절,
여기를 보면 베스도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나타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베스도는 가이사의 재판에 이 재판을 이송한다고 하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내 결정이 잘한 것인가? 이 결정뒤에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그래서 그는 아그립바 왕이 왔을 때 일종의 재판 상담을 요청을 합니다. ‘내 전임인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속을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바울이라.’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내용들을 15-21절 사이에서 그는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해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그 사람을 재판해 보니까 문제는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전혀 잘못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물증이 없었고 증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송치하기를 원했지만 자기가 보기에는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의 소원대로 이 사람을 가이가의 재판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15절에서 21절까지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아그립바 왕에게 상담을 합니다.
여기 상담하는 내용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18-19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죄에 대해서 주장하는 부분을 베스도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형사적인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그 주장 때문에 생긴 문제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장에 가는 이유는 예수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입니다. 재산싸움이니, 사기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교도소에 가지, 예수님 때문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얘기 하다가, 부활을 얘기 하다가, 십자가를 이야기 하다가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누구의 얘기입니까? 베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문제는 형사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의 문제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이 송사를 보았습니다. 벨릭스의 재판을 보았습니다. 베스도의 재판을 보았습니다. 이 세 사람의 얘기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주장한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요,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주장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의 입장을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에게 정확히 전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딛치게 됩니다. 문제에 부딛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 예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당하셨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고민을 하십니까?
다 자기 문제요, 욕심의 문제요,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런 일로 인한 고난입니다. 자기 분수껏 살지 못한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그런 문제들로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고, 밤새고 하는 일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어야겠습니까? 다 시시한 것이 때문에,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간의 정욕 때문에, 다 이기적인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고난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고난을 당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고생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은 누구 때문입니까?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분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욕심 때문에 오는 고난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고생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고통스럽고...
우리가 아무리 못 살아도 세끼는 먹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들, 아무리 큰 집을 소유한들, 여러분의 몸을 누일 수 있는 것은 침대 하나 뿐입니다. 아무리 에어로빅을 해서 살을 빼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70-80세면 족합니다.
더 이상 못삽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값지고 보람있게. 고생은 했으면서도 수모는 겪었다 할지라도 내가 보람있는 삶을 사느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감옥에도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바울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결말은 허무함뿐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갈지라도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삶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의 재판 상담을 하는 데 그는 재판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딴데 있었습니다.
22절, 바울 좀 보자.
23절,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고 권위있는 왕의 신분을 표시하는 옷을 입고 바울에게 나타납니다.
천부장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을 다 초청을 해서 신문소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베스도의 명을 따라 초라한 바울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한 그림을 보게 됩니다. 불륜과 죄로 가득찬 내면에는 그런 것이 있지만 겉으로는 화려하고 품위있고 권력있는 높은 지체의 왕과 비록 죄수의 몸으로 끌려 나와 있지만 하늘의 영광과 그리고 놀라운 복음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는 여기한 초라한 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평가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로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성공했다. 이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자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갖기를 원하고 권력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치장을 잘했어도 그 속에 불륜이 있고, 거짓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감옥에 있고 낮은 자리에 있고 별볼일 없어도 영광스러운 소망이, 사랑이 있는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도 희생도, 손해도 기뻐하는 그런 축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심에 부끄럼움이 없게 하시고, 신앙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바울처럼 주님을 전하는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목적이 있는 인생/행25:13-27
2005-07-19 10:25:40
몇 년 전, 한 대학생이 자살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자살한 거라면 이해가 갑니다만, 그는 우수한 성적을 받아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었다.
합격을 축하하던 사람들은 그의 소식을 듣고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 책상 서랍에서 그 학생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자살 이유가 적혀 있었다.
-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위해 공부했습니다만 합격한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유능한 청년이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살했는가?
- 그동안 공부하느라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가?
- 갑자기 죽고 싶다는 일시적 충동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 이 청년이 자살한 것은 삶의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몰랐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이다.
삶의 목적이 없이 사는 인생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 "물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으로는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확신이나 목적이 없는 삶의 공허함이 물자를 축적한다고 해서 채워 지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없는 삶의 공허함은 - 아무리 재물을 많이 소유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 아무리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돈을 쓴다할지라도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목적이 없는 인생은 삶의 공허함을 그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발버둥치다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공허한 인생은 곧 허무주의에 빠져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성도 여러분!
삶의 목적이 있는가?
나는 어떤 가치와 목적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였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에베소서 3:7)
-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 1:11)
바울은 -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 복음을 위하여 일군이 되었다.
-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고, 일군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이다.
바울의 분명한 삶의 목적은 복음이다.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사는 바울은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바로 로마이다.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로마에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마지막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전 세계의 모든 길이 로마를 통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복음은 더 쉽게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수가 있었다.
땅 끝까지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진 바울의 목적은 로마로 가는 것이었다.
행19:21 -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행23:11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롬1:15 -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복음을 위해 사는 바울의 목적은 오직 로마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목적이 이루어졌다.
바울의 목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흉년과 기근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이방인 교회에서 구제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
예루살렘에 온 바울은 예견한 대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고소로 결박당한 바울은 구류당한지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답답한 일이었다.
율법을 범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로마의 법을 어겼다는 유대인들의 고소가 다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결박할만한 죄가 없음이 드러났다.
무죄가 판명되었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해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릴스 총독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구류하여 두었다.
물론 누구든지 만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지만, 바울은 감옥에서 2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야 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 일인가?
하루 속히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감옥에 갇혀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감옥에 구류된 바울은 - 목적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환경이 처하였다.
도저히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울에게 로마로 가는 길을 열려졌다.
유대 총독이 바꾸게 되었다.
벨릭스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해 왔다.
신임총독 베스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바울을 죽이고자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베스도가 - “너희 중에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바울에게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다음 날 재판이 열렸다.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다.
-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 악행의 사건을 제출하지 못하였다.
베스도가 유대인들 마음을 얻고자 묻는다.
-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은 대답한다.
-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총독 베스도가 선언하였다.
-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가이사는 그 당시 로마의 황제이다.
총독은 바울이 호소한대로 로마 황제에게 갈 것을 선언하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울이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가게 된 것이다.
바울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살았는데 - 자신의 방법으로는 도무지 로마에 갈수가 없었는데 정말 뜻밖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연속된 고난의 환경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도 여러분!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다.
솔로몬은 말한다.
-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
-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전도서 3:17)
뭐가 있다구요? -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을 것을 뽑을 때가 있듯이 -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듯이 -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듯이 -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할렐루야! 믿는가?
- 작정된 일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다니엘 11:36)
-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목적 - 반드시 이루어진다.
목적 - 이룰 줄 믿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된다.
모든 목적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윗은 외친다.
-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편 57:2)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4)
그렇다!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목적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을 가지고 살면 목적이 이루어질 때가 있다.
목적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어 주신다.
그러면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목적 - “헤페쯔” - '기쁨' (추상명사)'소원' 구상적으로'가치 있는 것'
1) 목적은 기쁨의 뜻이 있다.
여러분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목적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기쁨이 있다.
내가 하는 일에 기쁨이 있는가?
내가 하는 사업에 기쁨이 있는가?
기쁨이 있다면 - 그 일에 목적이 있고, 그 사업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에 기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하는 일에 목적이 없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목적이 없다면 그 일을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분명한 목적을 갖는 성도가 되자.
그러면 내가 하는 일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기쁨으로 하여 - 목적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2) 목적은 소원의 뜻이 있다.
빌 2:13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신다.
내가 하는 일에 소원이 있는가?
목적이 있는 사람은 -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 천직이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일하지 않는다.
-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에 소원이 있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여기에 계신 분들이 하는 일이 다 다를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소원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에 소원을 두고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시 20:4 -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소원을 두고 일할 때 -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목적을 이루어 주실 줄 믿는다.
3) 목적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가치 있는 일을 할 때는 보람과 행복이 있지만, 가치 없는 일을 할 때는 그 어떤 보람도 행복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할 것이다.
- 참된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일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하는 일에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가치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내가 하는 일에 가치를 가지고 하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 그 하는 일의 목적을 아름답게 이루어 주실 줄 믿는다.
기차가 출발한지 15 분이나 늦게 기차역에 도착한 대학 교수님 한 분의 이야기이다.
교수는 기차시간에 대기 위해 성급히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운전수에게 소리쳤다.
- "빨리, 빨리! 너무 늦었소. 빨리 서둘러 갑시다."
운전사가 악셀레이터를 밟자, 택시는 골목길과 복잡한 한 거리를 빠져나와 어느새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목이 부러질 듯한 속력으로 질주하였다.
이렇게 30분쯤 달렸을 때 그 교수는 기대었던 몸을 바로 앉히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 "아직 도착 못했소 "
당황한 운전기사는
- "아니 어딜 말입니까? 손님께서는 빨리 달리라고만 했지 어디까지라고 말씀안하셨는데요."
세상에 이처럼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목적이 없는 인생은 -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국은 후회하게 된다.
- 돌이킬 수 없는 인생, 헛수고의 인생이 되고 만다.
지금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가고 있는가?
지금하고 있는 일에 목적이 있는가?
당신은 과연 목적이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요즈음 웬난한 사람은 - 차에 “네비게이션”을 설치하고 운전한다.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해 놓으면 - 목적지까지 ‘네비게이션’ 안내를 받으며 운전할 수 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초행길이라 할지라도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하게 된다.
우리 인생에 ‘네비게이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 인생의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하자.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안내해 주시므로, 삶의 목적을 이루며 인생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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