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 76. 바울의 거침없이 담대하게 /행28:17-31/ 이종철목사
2022-06-04 10:42:29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 선교
사도행전 마지막 강해입니다. 사도행전의 땅 끝은 로마입니다. 바울 선교의 최종 목적지 또한 로마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꿈에 그리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마치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지중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숫자를 대략 5% 정도 잡습니다.
이 분포로 본다면 인구 1백만의 로마 지역에는 대략 5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살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수도에 거주하였기에 영향력도 있어 본토 유대의 산헤드린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 때문에 제일 먼저 유대의 높은 사람들에게 접촉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황제 앞에서 이루어질 바울의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적지 않은 규모의 기독교 공동체도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안부를 묻고 있는 신앙인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포함하여 모두 27명에 달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까워 올 때 바울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압비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네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곳은 교회 공동체가 이미 서 있기에 더 이상 선교가 필요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로마는 잠깐 들린 후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아서 서바나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저간의 상황에 대해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롬15:23-24)
그런데 이후의 과정을 보면 로마는 마치 복음의 불모지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안부를 묻던 사람들도, 또 바울을 환영했던 성도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을 도와주는 손길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앞서서 여타 지역에서 선교할 때의 상황이 똑같이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로마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서바나가 아니라 로마가 바울의 땅 끝이 되었습니다. 거쳐 지나갈 곳으로 생각했던 곳이 그 인생의 종착역이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으로만 보면 로마는 바울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의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로마는 땅 끝이고 목적지입니다. 로마는 우리 앞에 놓인 큰 산입니다. 우리가 등산을 하다보면 정상이라는 목표가 보입니다. 그곳에만 오르면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그래서 마치 그곳은 안식처요 천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산은 끝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산을 넘고 나면 새로운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로 하던 산에 이르렀는데 다시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올 때가 행복합니다. 그 목표를 이루었으면, 아니면 완전한 승리가 아니더라도 만족해야 합니다.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채비를 갖추고 다음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영원한 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랬습니다. 이사야서 구조가 그렇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55장까지는 바벨론 포로기 때 선포되었습니다. 제2 이사야라고 학자들이 이름을 붙인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곧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56장부터 66장까지는 제3 이사야라 부릅니다. 상황은 포로지에서 돌아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하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꿈에 부풀어 바벨론 땅에서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온 조국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습니다. 해방령과 함께 포로지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돌아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잔득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기에 실망감은 그에 비례해서 더 컸습니다. 재건도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때 제3 이사야라는 사람이 혜성같이 나타나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 예루살렘의 비전을 말한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기대했던 목표는 이미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목표입니다. 금년 한 해의 일들을 인정하고 감사로 보내기를 바랍니다. 새해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나라도 민족도 끊임없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길을 걸어왔습니다. 민족해방이라는 산을 넘고, 근대화라는 산을 넘고, 민주화라는 산을 넘어왔습니다. 이어서 평화와 통일, 또는 공동체의 번영이 목표가 되어 달려가야 하는데 지금은 잠시 주저하고 있습니다. 망설이자 분열과 탐욕과 이기심이 민족정신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 위에 말씀을 보내셔서 다시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바울은 이전처럼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3)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부합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24) 바울은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며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26, 28)
이 선언은 벌써 세 번째입니다. 먼저는 1차 선교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지 않자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6)고 선언하였습니다. 2차 선교시 고린도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18:6)
누가는 왜 세 번에 걸쳐서 이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정통 종교였던 유대교와 함께 하려는 노력입니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방인 교회들의 뿌리 찾기 작업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혁명이 아니라 종교개혁이라 불렀습니다. 뿌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개혁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떨어져 나가면 이단이나 소종파가 됩니다. 초대교회는 구약이라는 역사를 붙잡았습니다. 신생 종교가 아니라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한 교회임을 주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방인 교회의 출범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밝힙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했기에 이방인에게로 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롬11:24) 유대인들이 좋은 감람나무였지만 저들이 믿지 않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그 가지에 접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합니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11:20-21)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27)란 말은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둔감하고, 눈과 귀를 다 닫고 있고, 깨달음이 없고 순종이 없다면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2천 년 전 로마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 오늘 시대를 향해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단의 설교를 통하여, 선지자와 같은 소수의 목소리를 통해서, 아니면 세상의 돌들을 통해서 소리치고 있습니다(눅19:40).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계2:5)
거침없이 담대하게
바울의 마지막은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헬라 어 원어로 보면 가장 마지막 두 단어는 파르레시아스(담대하게) 아콜루토스(거침없이)입니다. ‘담대하게’는 어떤 권력이나 위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침없이’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란 뜻입니다. 공권력이나 어떠한 위협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가이사에 앞에 소송을 하기 위해서 로마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바울의 마지막에 대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마치 지금도 살아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은 영웅이지만 사도행전은 한 영웅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복음이고 예수입니다. 우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인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마지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우리 목숨보다도 민족이나 이념이나 어떤 뜻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더 소중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우리라는 존재나 우리의 이익을 손해 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바울이라는 모범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뒤를 따르는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증인에게서 필요한 두 가지 태도는 바로 ‘거침없이’ ‘담대하게’입니다. 거침없이가 외부적인 장해물에 강조점이 두어진다면 담대하게는 내부적인 삶의 태도에 강조점이 주어집니다. 담대한 인생에게 방해물이 없습니다. 담대한 사람은 거침이 없습니다. 방해물이 오히려 피해갑니다. 정면돌파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삶이 필요합니다. 눈치 보거나 우회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 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태도입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삶의 태도입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는 복음에 대해서만 요구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삽니다. 초대교회에서 그것은 선교로 나타났습니다. 중세교회에서는 성화의 길로 나타났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라는 복음의 불모지를 살고 있습니다. 내 안에, 내 인생에,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과업입니다. 때로는 두려움이, 때로는 나태함이, 때로는 가난이, 때로는 탐욕이, 때로는 상황의 녹록치 않음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그때에 필요한 것이 ‘거침없이 담대하게’입니다. ‘한 번 해보자’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고백은 바로 이 담대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이 담대함으로 과감히 도전하며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거침없이 /행28:30-31/ 이재철 목사
2019-01-14 02:59:27
- 이재철 목사의 마지막 사도행전 설교 전문 -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지금 바울은 세를 내고 얻은 로마 변두리의 싸구려 헛간에 2년째 연금당해 있다. 그 싸구려 헛간으로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바울은 모두 영접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렇게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아니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가 사도행전 20장 24절을 통해 천명했듯, 주님의 마르튀스(종)와 휘테르케스(증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인 본문 31절은 다음과 같이 막을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강조한 두 단어가 있다. 첫째는 ‘담대하게’이다.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에서 왜 담대함을 강조했을까. 다시 말해 귀로 들은 하나님 말씀을 삶으로도 듣기 위해, 왜 담대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한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에서 강조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단어는 부사 ‘거침없이’이다. 총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바울이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 말 ‘거침없이’라는 헬라어 부사 ‘아콜리토스’는 거침없이, 방해없이 혹은 자유로이 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강조점 역시 두 가지이다. 먼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일관한 바울의 자세이다. 바울은 이 때 인생 말년, 노년에 평생 그를 괴롭혔던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 신분으로 2년 동안 로마 변두리 싸구려 헛간에 연금당해 있던 바울의 한쪽 손목에는 그를 지키는 로마 군인의 손목과 연결된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와 같은 바울의 상황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영접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복음을 가르치기에는 전혀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바울의 상황은 인생 말년의 인간이 당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편 119편 165절 말씀처럼, 그 어떤 악조건도 바울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악조건에 굴복하기에는 다메섹 도상으로 핀셋으로 집어내 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컸고, 자신이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오히려 강하신 주님의 섭리가 더욱 신비롭게 성취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거침없이 전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거침없이 기록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인 본문의 부사 ‘거침없이’는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말씀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본래 거침이 없다.
한강을 보라. 도도하게 흘러가는 한강에는 거침이 없다. 한강은 갇히거나 막힌 호수가 아니라 흐름이 멈추지 않는 살아있는 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발원한 한강은 서해에 이르기까지 481.7km를 거침없이 굽이쳐 흐르면서 무려 3만 4,473㎢ 지역을 거침없이 적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생명의 물을 제공하고 있다. 한강이 살아있는 덕분이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티끌 정도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할 한강도 그 정도로 거침이 없다면, 하물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거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흑암과 혼돈 속에서 당신의 말씀으로 거침없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인간의 역사 속으로 거침없이 침투해 들어오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거침없이 십자가 죽음의 제물이 되셨고, 사흘째 되던 날 거침없이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시어 인간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가 되어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을 거침없이 일러 주는 인생 사용설명서이다. 이렇듯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 하나님 말씀, 복음은 본질적으로 거침이 없다.
인생 말년의 바울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거침없이 전하고 가르치며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자신이 위대한 영웅이거나 초능력자여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생을 걸었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적으로 거침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의 막을 내리면서 최종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울은 본문 이후 잠시 석방됐지만, 주후 64년 발생한 로마 대화재로 촉발된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로 다시 투옥됐다.
감옥에서 최후의 서신서인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바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해 이 땅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공포의 참수형마저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바울에게는 거침이 될 수 없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 9장부터 바울에게 초점을 맞춰왔다. 따라서 누가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바울의 최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주님을 위해 참수형마저 거침없이 감수한 바울의 영웅담을 다루는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누가라면, 바울이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어떻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전하기 위해 반드시 그의 참수형을 상세하게 다루는 29장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가가 사도행전의 초점을 바울에게 맞춰온 것은 그의 영웅전을 집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도구삼아 거침없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누가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침없이 전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을 마무리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침없는 하나님의 말씀, 거침없는 하나님의 능력, 거침없는 하나님의 사랑, 거침없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의 참수형으로 사도행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29장을 기록하여 그를 영웅시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서는 바울의 참수형이 위대한 순교로 투영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거침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비춰보면 바울이 당한 참수형은 하나님 은혜에 응답하기 위한 일상의 삶이었을 뿐이다.
본문 이후부터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바울의 삶은 일상의 삶이었고 그가 참수형을 당한 것은 주님의 휘페르테스가 겪어야 할 일상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의 그 일상을 다룬 사도행전 29장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우리 일상의 삶으로 엮어가야 한다는 결론이다.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감사주일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상대적인 조건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십자가의 보혈로 거침없이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헤에 대한 절대적인 감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가난을 통해서도, 병듦을 통해서도, 고통을 통해서도, 우리를 위한 당신의 신비한 섭리를 거침없이 이뤄가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에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겠는가?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바칠 최상의 감사 예물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님을 위해 거침없이 참수형을 당하는 일상의 삶으로 자신의 사도행전 29장을 완결했던 바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로마서 12장 1절을 통해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1)영적 예배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올려드릴 최상의 감사 예물은 영적 예배요, 그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옛날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짐승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다. 짐승을 잡아 그 피와 고기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러나 짐승을 제물로 바치긴 했지만 정작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이미 생명이 끊어진 죽은 짐승의 피와 살로 그 제물은 더 이상 산 제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산채로 거침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문자 그대로 산 제물이 되어주셨다. 그 거침없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침없는 은혜에 우리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거침없이 바쳐드림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을 우리 교회의 용어로 설명하면, 우리의 삶으로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인 오늘 본문에 기인한 사도행전의 결론을 빌어 표현하면, 일상의 삶으로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거침없이 엮어가는 것이다.
누가가 파피루스에 먹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은 분명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28장 31절에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종결을 의미하는 닫힌 끝남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향한 열린 끝남이다.
사도행전이 끝나는 28장 31절은 우리 각자의 삶으로 우리 자신의 사도행전 29장을 엮기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다. 질병에 시달리던 인생 말년의 바울이 주님을 위해 참수형마저 거침없이 감수하는 자신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엮었다면, 주님을 위해 우리 일상의 삶으로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엮어가려는 우리 앞에 대체 무엇인들 거침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쁜 일을 맞았다면 기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슬픔을 당했다면 비통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부유하다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가난하다면 핍절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실패했다면 실패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건강하다면 강건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병들었다면 병약한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고, 젊다면 젊은 일상의 삶으로 사돟애전 29장을 엮고, 늙었다면 늙은 일상의 삶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엮어간다면, 그렇게 거침없이 엮어가는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통해 주님께서 이 시대 역사 속에 거침없이 이뤄가실 섭리는 또 얼마나 눈부시겠는가.
이것이 13년 4개월에 걸친 사도행전의 여정을 끝내는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감사주일인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의 메시지이다.
오늘은 감사하게도 제가 100주년기념교회를 떠나는 날이기도 하다. 2천년 전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를 눈으로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시므온은 평생 날마다 누가 메시아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영적 부담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영적 부담감 속에서는 매일의 삶이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성전에 갔다가, 마침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해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성전으로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보았다. 그 순간 시므온은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그 아기가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제 평안하게 눈을 감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자기 가슴에 안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는 영적 부담감에서 놓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다.
오늘 제 심정이 그 때 시므온의 심정과 똑같다.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한데 어우러져 결성된 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창립된 100주년기념교회는, 처음부터 지역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한 묘지기와 길닦이의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이다.
100주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과 2대 이사장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의 보수 신앙과 강원용 목사님의 진보 신앙을 한데 아우르면서, 온갖 도전에 맞서 ‘묘지기와 길닦이’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제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 걸쳐서 부족하기만 한 제게 그것은 엄청나게 큰 영적 부담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부로 저를 그 큰 영적 부담감에서 평안히 놓아주셨다. 지난 13년 4개월 동안 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혜도 능력도 모자란 저는 육체마저 부실해서, 지난 13년 4개월 중 2년여 동안은 암 투병으로 목회에 전념할 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고 보고 있고 누리고 있는 100주년기념교회는 모두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결과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저를 평안히 놓아주신다. 감사주일을 맞아 저는 저를 평안히 놓아주시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신 재단의 어르신들, 그리고 오늘 100주년기념교회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주신 교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특히 이름 없이 헌신한 수많은 봉사자들에게 깊이 감사하다. 잠시 제 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 후임 4인 공동 담임목사 체제가 잘 안착되고 있으므로, 후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7개월 앞서 퇴임하겠다고 공지해 드린 것은 6월 셋째주일이었다. 그때부터 퇴임일인 오늘까지는 5개월이 남아 있었다.
그 5개월 동안 모든 교우님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작별인사를 드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5개월은 우리 교회 355개의 구역과 74개의 봉사팀 구성원들을 일일이 만나기에도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특정 구역이나 봉사팀 구성원들만 만나 작별인사만 갖는다면, 다른 교우님들이 시험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저희들과 함께 자리하기를 요청하는 구역과 봉사팀이 있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그 요청에 모두 응하기로 하고, 그대로 실행해 왔다. 그때마다 제 처가 모임에 참석한 모든 봉사자들에게 선물을 드렸다. 아내는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교회가 창립될 당시 목사는 저 혼자뿐이었다. 두 달 후부터 전임목회자가 차례로 합류하기는 했지만, 매주 늘어나는 교인들을 섬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했다. 갓 조직된 교회 봉사팀들의 기틀이 확립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회 창립 초기 양화진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의 현장에는 저를 대신해서 제 아내가 불려 나갔다. 가장 많게는 하루에 9번 불려 나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13년 4개월의 세월이 흐른 지금,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문서 어디에도 정애주라는 이름 석 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아내는 ‘교회 곳곳에서 이름도 없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봉사자들의 귀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그 귀한 마음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초청해준 모든 봉사자들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문서에 이름이 기록되지도 않은 수많은 봉사자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교회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이름 없는 봉사자들과 보이지 않는 밑가지들이다. 13년 4개월 동안 수고하신 이름 없는 봉사자들과 보이지 않는 밑가지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비록 100주년기념교회 공식 문서에 여러분의 이름이 단 한 글자도 기록돼 있지 않아도, 이사야 49장 16절 말씀처럼 여러분 개개인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놓으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그 귀한 헌신을 거침없이 다 보고 알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으로 여러분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몰라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알고 계시고 우리 각자를 개별적으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형언조차 하기 어렵다.
많은 분들이 오늘 100주년기념교회를 퇴임하는 제가 내일부터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궁금해 하신다. 13년 4개월 전 제가 살던 집 옆에 100주년기념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세워졌더라도 저와 무관한 교회였다면, 저는 당시 이미 20년째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양화진에서 계속 살면서 양화진에서 제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제가 양화진에 세워진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된 이상, 퇴임 후 제 여생을 양화진에서 보낼 수는 없게 됐다. 퇴임 후에도 제가 양화진을 떠나지 않는다면, 제 후임자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창립 직후부터 저희 부부는 퇴임 후 여생을 시골에서 지내기로 하고, 한반도 어느 곳이든 평당 10만원짜리 땅이 나오는 곳을 생애 마지막 정착지로 삼기로 했다. 평당 10만원이라고 책정한 것은 그 정도 가격이라야 저희 부부의 형편에 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집을 지을 수 있는 마을 속의 땅으로 평당 10만원짜리 땅은 부동산 투기가 판을 치는 한반도 땅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정해 주셔야만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희 부부는 지방에 연고가 있는 몇 분에게, 평당 10만원짜리 땅에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 년이 지나도 평당 10만원짜리 땅을 만날 수는 없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나왔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정작 매입하려 하자 가격이 치솟았다. 그런 땅은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놓으신 곳일 수 없었다.
2013년, 제가 암 수술을 받고 투병할 때였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다 경남 거창으로 이사한 교우님이 제 아내에게 연락했다. 거창군 웅양면 산 중턱 마을에 평당 10만원짜리 땅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땅의 주인은 서울 사람이 땅을 매입하려는 것을 알고서도, 땅값을 올리지 않았다. 바로 그 땅이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놓으신 땅이었다.
저희 부부는 돈을 모으지 않으므로, 아이들이 그곳 땅을 매입해 주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대출을 받아 집을 짓기 시작했지만, 건설업체를 잘못 만나 공사가 중단되고 공사비가 떼이는 곤욕을 치르며 겨우 완공되어 이사까지 모두 마쳤다.
처음에는 15평 컨테이너 두 동을 붙이려 했는데, 한 교우님이 재능기부로 설계해 주셔서 애초 계획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있는 집이 되었다. 오늘 4부 예배가 끝나는 대로 저는 그 집으로 갈 예정이다.
저희 부부는 내일부터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주신 그 마을에서, 저희 부부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그 마을에는 40가구 8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대대로 땅의 작물을 수확하며 살아온 분들이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손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받아주지 않으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고 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에도 누군가의 손을 빌어 이 세상을 떠나간다. 연고자 없는 걸인조차 죽으면 누군가의 손을 빌어 매장되거나 화장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누구에겐가 빚을 지고 태어나서 누구에겐가 빚을 지며 세상을 떠나가는 빚쟁이들인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 사랑의 빚을 감는 채무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여생 동안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대상으로 붙여주신 분들이 바로 그 마을 사람들이다.
근래 제 눈길이 아내의 손등에서 멈췄다. 서울에서 먼 길을 오가면서 그 마을에 집을 짓고 이사하느라 수고한 아내의 손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 손을 제가 측은한 마음으로 쓰다듬자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용하고 가야지’.
그 말에 제 마음이 찡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과 발을 주신 것은 예쁘게 가다듬기만 하라고 하심이 아니라, 흙이나 재로 사그라들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더 많이 사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제 저희 부부는 주님의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로,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는 동안 더 많이 사용해서 그 마을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저희 부부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엮어갈 것이다.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거창군 웅양면의 산 중턱 마을에서, 저희 부부의 마지막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엮을 수 있도록, 거침없이 섭리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4부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담임목사는 후임 4인 공동 담임목사이시다. 훌륭한 네 분의 목사님들을 100주년기념교회 2대 공동 담임목사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거침없는 은혜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 네 분의 영성과 역량이 한데 어우러지면, 저 같은 사람은 그 분들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0장 17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체의 생명을 거침없이 버리신 것은 죽음을 깨뜨리는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기 위함이셨다. 주님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제물로 거침없이 버리지 않으셨다면, 만민을 살리시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을 거침없이 버려야 깊은 영성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을 거침없이 버려야 새로운 내일을 얻을 수 있다. 낡은 부대를 거침없이 버려야,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을 통해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얻기 원하신다면, 교우님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이재철을 버리셔야 한다. 저는 13년 4개월 전에 100주년기념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제 자신의 유익을 취하기 위해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른 마르튀스와 휘페르테스의 사명을 다한 뒤 떠나기 위해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됐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그리고 저의 떠남은 여러분들이 저를 버림으로써만 완결된다. 여러분은 이재철을 버리시되,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하게 버리셔야 한다. 이재철을 크게 버리면 크게 버릴수록, 후임 공동담임목사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더 크게 누리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실 그 거침없는 새로운 차원의 은혜 속에서 온 교우님들과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 그리고 온 교역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 주님의 휘페르테스와 마르튀스로 사도행전 29장, 각자의 사도행전 29장과 100주년기념교회의 사도행전 29장을 일상의 삶으로 지금부터 엮어가자.
그 사도행전 29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이 시대의 미래를 지구 반대편의 미래까지 날마다 당신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새롭게 심어주실 것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는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 /행28:23-31/ 유기성 목사
2016-08-10 11:04:05
지난 주 연회에서 파키스탄 정재화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이 분을 10년 전에 만났습니다. 당시는 중국 청해성에서 사역하였는데, 선교 보고를 하시는데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리셨습니다. 몇 년 동안 한 사람 전도가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몇 년째 새벽에 혼자 새벽 기도회를 하는데,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몸이 갈갈이 찢겨져 한 조각 한 조각이 구원받은 영혼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님께 원하는 조건은 순교를 하되 가족 모두 한꺼번에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마음이 진심임은 알겠는데, 어떻게 저런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저 분이 보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스코틀랜드 선교사였던 데이비드리빙스턴은 말년에 잠비아의 깊은 밀림 속에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1871년 헨리스탠리라는 탐험가가 리빙스턴을 찾아내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1년 만에 겨우 밀림 속에서 병들어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식료품과 의약품이 거의 다 떨어진 채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스탠리는 그에게 간절히 권면했습니다.“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30년 간 헌신해 오셨으니까 이제 그만 하시고 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리빙스턴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아프리카의 선교 사역은 헌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873년 5월 1일, 우리가 잘 아는대로 리빙스턴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무엇이 선교사님들을 이렇게 살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들은 삶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들은 생각도 판단도 소원도 다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이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소유하고 누리고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가 절대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길어도 100년을 못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삽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발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강해 마지막 설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꼭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는데도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하는 마음에 로마로 갑니다.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전하고 싶었던 복음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었습니다. 이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3절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전하고 예수 믿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 구절이며, 성경의 마지막 결론이 계시록 11장 15절입니다.
계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전부인 줄만 알고 있던 이 세상 나라가 한 순간에 두루마리 말리듯이 말려버리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나면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기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충격인지 아시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어느 나라를 가장 사랑하십니까? 대한민국 입니까? 아직도 그런 수준입니까? 대한민국!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나면 문제가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판단과 소원과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혼을 결심한 남자 집사님이 상담을 하러 오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절대 이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분은 어떤 말을 해도 결론은 이혼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더 이상 그 분을 설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현 듯 어떤 생각을 주셨습니다. 집사님 절대 이혼할 수 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한 달 뒤에 죽어 하나님 앞에 간다고 해도 이혼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왜 그렇게 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까?’그 분이 가만히 계시더니‘만약에 제가 한 달 뒤에 죽는다면 이혼할 것 까지는 없겠지요.’그러셨습니다. 그러면 한 달만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 보세요.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만 산다고 생각하고 사세요. 다행히 그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나면 나는 도무지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없어집니다. 해결이 안될 문제가 없어집니다.
지난 주 감리교 목회자 기도 모임이 2박3일 동안 기도원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목사님께서 가슴을 울리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외모가 탈렌트같이 멋진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유행가 가사처럼 “난 참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하며 간증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뛰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혔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사시” 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술을 하여 눈동자가 바로 잡혔지만, 학교 다닐 때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팔뜨기라고 말하는 것이 죽는 것 보다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열등감은 지독한 가난이었습니다. 중1 때 부친이 돌아가신 후,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생이 되었지만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했답니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분노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제 뭡니까? 왜 내게는 이렇게 하십니까? 왜 내게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 보고 무슨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슨 하나님을 전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한번 화가 나면 성경책도 찢고 강대상도 뽀개었답니다. ‘이렇게 살게 할 거라면, 왜 날 태어나게 하였나요?‘ 분노 중독에 빠지고 음란물 중독에 빠져 살면서 사모님과 아이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답니다.
이 분노를 다스리려고 상담도 받아보고 세미나도 참석해 보고 금식도 수없이 해 보았지만 다스려지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조금만 더해 주셨으면, 하나님이 나를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내가 이러지는 않을텐데.’ 이런 생각에 매여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번 기도 모임에서 회개가 터지며 해결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박보영 목사님이 첫날 저녁 집회 때 말씀을 전하시는데, 성경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읽고,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 복음을 전하려고 가진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의사면허증도 반납하고, 부랑 청소년들과 함께 살던 간증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조차 하나님께 맡기고 사명을 위하여 헤어졌습니다. 그때의 눈물겨운 간증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나님도 안 믿겠다던 아들이 부랑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는 곳에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얼마나 반갑고 좋던지.
아들에게 다른 아이들 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두려워서 이제 가라고 했을 때, 화를 내며 나가던 일, 이번 부활절에 아버지 보고 싶다고 아들이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지. 그런데 그 아들이 예배에 오면 부활절 예배를 하나님께 집중할 자신이 없어서 오지 말라고 했던 일 등을 눈물로 간증하는 것을 듣고 이 목사님이 꺾어졌습니다. 속에서부터 통곡하며 “성령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고 회개가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왜 안 주셨냐고 평생을 원망하고 분노하며 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심이 감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살았던 사모님에게 그날 저녁에 무릎꿇고 용서를 구하였고 사모님에게 있던 질병이 고침을 받은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눈이 뜨이면 더 이상 불평 원망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달라집니다.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해결 안될 문제, 도무지 견디지 못할 상황 자체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왜 공평하지 않으신가? 세상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세상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알고 나면 어려운 환경 여건이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날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내가 옥토에서만 일하지 않고 돌짝밭같은 그 삷이 오히려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도 불평하고 원망할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로마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마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24절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이 구절만 보면 양분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 분위기는 거부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잠시 복음을 거절할 것이라.”고 했던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깨달았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줄까 함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방인들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방인 선교의 역사가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정말 땅 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복음이 유대인에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므로 이 땅에서 역사는 끝납니다. 우리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이 말씀이 제 가슴을 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으면서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한 번 두 번 들은 것도 아닌데 온전히 세상만 바라보고 삽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직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 열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에 마음을 온통 뺏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솔직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막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듣기는 들어보았지만 그게 뭐지? 내게는 너무 현실감이 없어.’ 그런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어느 여 성도가 예배당에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본 안내위원이 기겁을 하며 막았습니다. 그 부인이 자기는 강아지와 조금도 떨어질 수 없다고 떼를 쓰는 것을 겨우 설득하여 강아지를 예배 마칠 때까지 잘 보호해 주기로 하고 부인은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10분도 안되어 그 부인이 나왔습니다. 강아지 생각에 마음이 안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웃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교인도 다 있을까?
그러나 여러분은 오늘 예배당에 들어올 때, 정말 마음에서 강아지를 떼어 놓고 오셨나요? 몸은 예배당 안에 들어왔지만 마음은 이 세상이 여전히 사로잡고 있어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돈 생각, 집안 생각, 사업 생각, 먹는 생각, 온갖 세상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까지 내게 있어 실체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예수를 믿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죽고 난 다음에 가서 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사는 이유는, 예수님을 분명하게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곳입니다.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희미한 이들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고서도 예수님이 왕이신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꼭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살게 되어있습니다. 예수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왜?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예수임이 왕이 되시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왕이라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정말 주님이시고 왕이시면 그때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고 사느냐 아냐는 우리의 장래를 엄청나게 바꾸어 놓게 됩니다.
여기에 도토리와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누구나 다이아몬드를 더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묻은 뒤 100년이 지난 다음 보면 어떻겠습니까? 도토리를 묻은 곳에는 엄청나게 큰 떡갈나무가 서있을 것이고, 다이아몬드를 심은 곳은 그대로 일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 이사야의 예언이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실감도 안나고 내 삶의 현실도 아니고. 로마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도 그랬단 말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듣고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캐나다의 유명한 피플스 쳐치의 담임목사였던 O.J.스미스목사님은 설교 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단히 두렵고도 엄숙한 다섯 가지 사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마지막 심판 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다.
셋째, 구원받으리라고 여겨졌던 사람들 중에도 멸망 당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넷째, 죽은 뒤에는 구원받을 기회가 다시 없다.
다섯째, 지금이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이다.
모두 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다음 주일에는 만나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부인이 천국 문 앞에 갔습니다. 가브라엘 천사가 명단을 확인했는데 그 부인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더니 막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부인 당신이 무엇을 했기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기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죄를 지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듣기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 경험이 없이 예수 믿는 삶은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여러분의 주님으로,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감동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성령의 역사인 줄 믿고 결단을 뒤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구경꾼으로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고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내가 비록 몸은 이 세상에 살지만 내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함하고 삽니다.” 그러신 분들은 사명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 주어야 됩니다.
사도행전은 미완성으로 끝났습니다. 신약 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한 책을 기록하고 마칠 때에는 분명히 마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분명히 책을 마친다는 말이 없이 28장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참으로 멋진 책입니다. 왜냐하면 끝이 없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29장, 30장, 31장... 계속 쓰여지고 있는데, 지금 우리들이 바로 주역들입니다.
사도행전은 계속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입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입니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모두 사도행전 29장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소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단순히 놀랍고 기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4절에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지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 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주님이 시작한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왜 보여주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며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빚진 자의 심정이 된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삶의 이유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다 똑같은 심정이 됩니다.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 내 인생의 남은 목적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사는지, 여러분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아십니까?
왜 사십니까? 죽지 못해서 사십니까? 자식 때문에 사십니까? 나중에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나라가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할 때 정말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이것이었는데 나는 그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엉망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가 되면 다 후회하고 가슴을 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안다면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니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가 발견했지만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화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당장이라도 죽어서 가는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을 알고 나면 세상에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집니다.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 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빌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 복음 전하는 것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주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게 해준다고 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구나! 하나님이 오라고 하실 때까지 내가 이 일을 해야 되겠구나.’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빚진 것은 사도 바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알았다면 전해야 합니다.
제 신학교 동기 중에 한 분이 목회가 어렵다고 도중에 사업가의 길을 가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암으로 세상 떠날 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을 찾아갔더니, 복수가 차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유 목사, 잘 왔어. 내가 목회할 교회 좀 찾아줘, 하나님께서 나 다시 목회하게 하려고 이렇게 하신 거야. 나 이제 다시 일어나 목회할 거야. 유 목사, 내가 갈 교회 있지?”
딸이 전화를 하니 ”아빠 이제 목회할 거야.”“ 여보, 빨리 집 처분해, 이제 퇴원하면 이사해야 하니까!”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이제 목회하겠다는 친구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고 병실을 나오면서 울었습니다. 얼마 뒤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가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 조미옥 목사님, 김보명 전도사님 뿐 아니라 김창겸 장로님 최재순 권사님, 전성환 권사님 송남희 권사님,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진정 사도행전 29장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해외 선교사로 부름을 받지 않았지만, 선교사의 삶으로 부름 받은 것은 동일합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가정 일을 하든 직장을 나가든 사업을 하든 선교사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어느 중소기업 사장인 집사님이 어느 날 회사에 나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비서가 들어오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비서에게도 한 번도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서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사장님이 교회 다니시는 것은 아는데 저한테는 한 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 집사님이 얼마나 부끄럽기도 하고 충격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전도하지 않아서 상처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한다고 핍박하던 사람도 지옥에 가서는 여러분이 전도 안해준 것 때문에 원망할 사람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어디입니까? 아직도 대한민국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행전 29장의 주인공이 되셔야 합니다.
사도행전 29장에는 여러분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이 이제 이렇게 끝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뢰와 같이 도전하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느냐?’ ‘너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명자냐?’ 여러분, 오늘 기도 중에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주여, 제 눈을 열어주소서. 하나님의 나라의 그 영광을 보게 하소서. 제가 하나님의 나라의 사명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admin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행28:30-31/ 이동원 목사
2014-11-28 10:27:27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모두는 기대하지 않은 실망스런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보는 관점
만 바꿀수 있다면 실망도 희망으로, 불유쾌한 경험도 독특한 흥미로운 경험으로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 중에 암과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
난 서강대 영문학과 장영희 교수의 유고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장영희 교수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을 한국에서 온 여
동생, 조카들과 함께 방문했던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행은 미술관 방문 기념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점잖게 생긴 중년 남자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 그는 자신이 가진 카메라와 같은 모델을 갖고 있어서 부탁을 하자 쾌히 승낙을 했다고 합니다. ‘김치~~
예, 완벽합니다. 한번 만 더, 예~ 한번만 더 찍겠습니다.’ 아주 능숙하게 세 차례에 걸쳐 촬영을 마친 그 분에게 장 교수 일행은 감사를 하고 헤어졌다고 합니
다. 그러나 며칠 후 필름을 현상해 본 장 교수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사진은 가족 모두의 머리를 짤라 놓았고, 두 번째 것은 동생의 발만 크게 확대
해 놓았고, 세 번째 것은 가슴만 확대해 놓은 괴기한 사진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장 교수는 사진 찍은 사람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와 불쾌감으로 열이 뻗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옆에서 열심히 사진을 함께 들여다보던 장 교수의 초등학교 1학년 조카 건우라는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와, 이모! 이
사진들 짱 멋있다. 그때 그 미술관에서 본 추상화같다. 우리가 미술관앞에서 찍으니까 이렇게 찍어 주신 모양이지. 완전 예술품이다. 예술품!” 그리고 보니
자신을 방금전 까지 불쾌하게 한 사진들이 전위 예술품으로 아니 샤갈의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관점의 전환>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관점을 갖게 되면 고난의 상황조차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한 기회로 우리에게 다
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재판받게 된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가 하
나님의 선교적 관점에서 자신의 고난을 본 순간 그것이 오히려 놀라운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이 모든 고난은 아직도 미완의
선교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비전 매핑 설교의 마무리, 바울의 로마 입성 선교 경험을 통한 주님의 두 가지 특별한 섭리적 계획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복음 전도의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둘중의 하나입니다. 그 열린 전도의 기회앞에 순종으로 응답하든가 이런 열린 문을 무시하고 살아가던가 말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바로 쓰임받는 사람
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쓰임받으려면 무엇보다 열린 문에 대한 민감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아~하나님이 나에게 문을 열어 주고 계시구나”를 깨달아
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것을 ‘성령 사역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난 우리 모두가 이런 민감성을 갖고 일생을 살게 되시
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그런 우리의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그는 비록 로마의 감옥에 매여 있었지만, 미결수로서 그것이 완전 감옥이 아닌 연금 상태에 처하
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회인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본문 30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어디 머물렀다고 했습니까? ‘셋집’이라고 했
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가택 연금상태이었던 것입니다. 행28:23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날자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
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중요한 것은 그가 기회를 잃지 않았다는 사
실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열린 기회를 복음 전도의 기회로 최선을 다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믿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24절
을 보십시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다시 중요한 것은 바울을 통해 이제 로마가 복음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고 믿는 사
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로마에 하나님 나라의 지평이 넓혀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전도의 기회, 선교의 기회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로마에 와서 열린 선교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무리하게 로마행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
도 있습니다. 문이 닫혀 있을 때에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그 기회 앞에 최선을 다해야 합
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 가정에, 마을에, 직장이나 일터에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셨는가를 주목하십시오. 계3:8에 보면 주님은 소아시아 빌라델
피아 교회를 칭찬하며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
지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전도하라는 선교하라는 명령에 순종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 작은 능력으로 열린 기회의 문에 순종의 응답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지
평을 넓히시고 계십니다.
2. 시간의 선물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도록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은 시간이었습니다. 본문 30절에 의하면 바울이 이 셋집에 머문 시간이 모두 2년이었
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바울이 AD62년경에 로마에서 로마법을 위반한 특별한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가택 연금
(AD60-62)에서 석방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 후 다시 체포될 때까지 약 4년 동안 최후의 전도 여행을 그레테, 에베소, 밀레도, 마게도냐, 고린도 지방을 여
행하며 교회들을 굳게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AD66) AD67년 6월에 순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장 선교의 열매가 컸던 때가 에베소 3년 사역
과 로마의 가택 연금 2년의 기간이었다고 평가됩니다. 그리고 보면 로마의 가택 연금의 시간은 아주 특별한 섭리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비록 몸은 쇠사슬에 매어있고 감시당하고 있었지
만 복음은 거침없이 전파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복음화 아니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위해 하나님은 여기 로마에서의 아주 특별한 2년을 준비하신 것입
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인생을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인생
의 평가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사는 동안 어떤 특권을 누렸는가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보람찬 시간을 보냈느냐가 가장 중요한 인
생 평가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장영희 교수의 카메라 사진 찍기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이 사진 사건보다 더 큰 황당했
던 자신의 인생 경험으로 뉴욕 주립 대학의 박사 논문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년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그녀는 논문을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그런
데 마지막 논문 최종본을 여행 트렁크에 넣은 채로 친구 집에 잠간 커피 마시러 갔다가 그 논문이 들어있는 트렁크를 도둑맞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내 논
문내 논문을 외치며 기절한 그녀는 닷새를 어둠속에서 지나다 다시 일어나 논문을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의 시간을 연장하며 마침내 논
문을 완성하며 통과 받으면서 논문의 헌사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
원고를 훔쳐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장을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
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도행전 강해를 마치면서 이런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친 인생이야 말로 투자할 가치
가 있는 진정한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사도행전 29장>이라고 했습니다. 왜 일까요?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도
행전의 마지막 구절을 가르쳐 학자들은 ‘오픈 엔딩’(open ending)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났지
만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에서 이제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을 위해 이제 다시 우리의
주인되신 그분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인생을 그분에게 후회 없이 헌신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순종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
안 솔직히 헌신을 못하셨다구요? 순종을 못하셨다구요? 괜찮습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자, 다시 한번의 도전을 위하여 이제 헌신의 인생, 순종의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영희 교수는 그녀의 유작에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 <괜찮아>였다고 회상합니다. 어린 시절
몸이 불편하여 친구들의 놀이에 끼지 못해 서운했을 때 지나가던 깨엿장수가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괜찮아>!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졌을
때 대한민국의 관중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괜찮아>! 혼자 끝까지 남아 골든벨에 도전하다가 마지막 문제를 풀지 못한 친구들에게도 우리는 이렇게 말합
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동안 우리가 비록 실패 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어도 아니 불순종의 인생을 살았어도 부끄러움의 인생을 살았어도 남은 인생 <사도
행전29장>의 과업을 향해 다시 일어 설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오늘 우리를 응원하실 것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admin
사도행전/행28:30-31
2005-01-03 11:45:51
지구의 자연현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가 화산활동입니다. 화산활동이란 지구의 내부 에너지가 지표로 분출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지구의 내부 에너지가 내부 물질을 녹여서 만들어낸 마그마에 실려서 지표면 밖으로 분출됩니다. 이 때 지각에 변화가 생기는데 그 분출되는 자리에 화산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마치 화산활동과 같은 놀라운 영적현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이 땅에 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의 한 복판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화산활동과 같은 영적 현상의 그 시작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고 이 땅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될 때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초창기 이야기를 28장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 이후 계속되었고 오늘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들은 사도행전 28장 이후를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 대열에 서 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 29장을 써 가고 있는 것입니다.
화산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지금도 지구 내부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지금도 뜨거운 마그마를 뿜어냅니다. 둘은 역사상 활동 기록이 남아있는 휴화산입니다. 활동했던 시기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화산을 말합니다. 그리고 셋은 사화산입니다. 화산과 같은 모양은 있지만 가까운 과거에 활동한 흔적을 찾기 힘든 그래서 지금은 죽은 것과 같은 화산을 말합니다.
화산이 세 종류가 있듯이 교회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오늘도 뜨거운 마그마의 운동처럼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나타나 수많은 영적 사건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둘은 휴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과거에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휴화산처럼 많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흔적은 있지만 지금은 잠자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셋은 사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활동한 기록을 찾아볼 수없을 정도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사화산처럼 성령의 역사가 전설처럼 아득한 그래서 거의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갈 때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여라도 휴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절대로 사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됩니다. 1:4-5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 그대로 행 2장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마치 화산 폭발 예고가 있은 뒤에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분출해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듯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갖가지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교회적 차원
성령이 오시면 교회적으로 성령 주도적 역사가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빌립이 전도할 때의 기록입니다. 8:29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8:39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안디옥 교회의 사역에 관한 기록입니다. 13:2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13:4절에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려면 우선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마치 풍향계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 지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처럼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끼리 모여 회의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휴화산과 같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사화산과 같은 교회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개인적 차원
성령이 오시면 개인적으로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2:4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집사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주의 사역을 담당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충만하다는 것은 가득 채워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며느리가 1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었는데 10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됐답니다.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 기쁨이 권사님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한 사람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가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가 그 사람의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심령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심령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교회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 두 가지입니다.
담대함
성령이 오신 뒤에 우선 사람들이 담대해 졌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 때문에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박해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성령이 오시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담대하게 사람들 앞으로 나갔습니다.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스데반처럼 순교를 당하게 되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2:12-3을 보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4:13을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6: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이 담대해 집니다.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 다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담대한 사람들 그들이 활화산 같은 교회를 만들어갑니다.
하나됨
행 2장을 보면 성령이 오시자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사건으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한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간적인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하나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별히 2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나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마다 가진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고 서로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장벽이 다 무너졌습니다. 함께 모이기를 기뻐했습니다. 매일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함께 말씀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대화가 단절되고, 마음이 갈라지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서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진정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도 하나, 마음도 하나, 헌신도 하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셋째, 복음의 전진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저들이 주님의 일꾼이 되어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나아감
마 28:19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행 1:8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대로 성령이 오신 뒤에 초대교회 사역자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Outreach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때로는 국내로 또 때로는 국외로 활발하게 나아갑니다. 우리 교회도 활발하게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청년들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강릉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린이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제가 격려차 가보았습니다. 공원에 큰 이벤트 마당을 만들었습니다. 어디서 왔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왔습니다. 신나게 한 바탕 물놀이를 했습니다. 맛있는 간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강릉 땅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8월에는 저 중국 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중국의 오지 감숙성에서 중국교회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게 됩니다. 교사 강습회도 엽니다. 청년 수련회도 하게 됩니다. 그곳에 또한 놀라운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담장을 쳐놓고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끼리만 우리끼리만...” 곤란합니다. 아파트 단지로, 직장으로, 농어촌으로, 중국으로, 전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증거함
행 1:8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오신 뒤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주된 목적은 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행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3:12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병도 고쳐주고, 배고픈 문제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회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예수의 증인이 되려 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그 분을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저들이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의 능력으로 저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예수를 증거할 때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48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활화산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앞으로 더욱 불타는 활화산처럼 뜨겁게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더욱 왕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를 통해 복음이 더욱 전진해야 합니다.
asdf
효과적인 전도전략/행28:23-31
2008-06-09 13:57:50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미국에 살아서 우리가 누리는 문화하고는 좀 다른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지하철을 타 보신 분이 있으시지요? 저도 이번 주에 집회 인도하기 위해서 한국에 가면 지하철을 탈텐데, 지하철을 타면 007가방이나 이민가방처럼 생긴 것을 들고 타는 아저씨들 보셨지요. 일명 봇다리 장사인데, 한국의 지하철 문화를 모르시는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아저씨가 지하철을 타더니만 헛기침을 하고 이내 본색을 드러내더랍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인데 잘될 지 모르겠어요.
'자 여러분 안∼녕하쉽니까? 제가 이렇게 나선 이유는 여러분이 가시는 걸음에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고자 나섰습니다' '물건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 프라스틱 머리에 솔 달려 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여?' '칫∼솔입니다' '이걸 뭐 하려고 가지고 나왔을까여?' '팔려고 나왔쉽니다' '한 개에 200원씩 다섯 개 묶여 있습니다. 얼마일까여?' '천∼원입니다. 뒷면 돌려보겠습니다' '영어 써 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이게 무슨 뜻일까여?' '수출했다는 겁니다.' '수출이 잘 됐을까여?' '망했쉽∼니다' '자, 그럼 여러분에게 한 개씩 돌려보겠습니다.'
이 아저씨가 승객들에게 칫솔을 다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합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제가 몇 개나 팔 수 있을까여?' '여러분도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합니다.' '잠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몇 개나 팔렸을 것 같아요? 4개가 팔렸답니다. 이 아저씨가 4개를 팔고는 이어서 말을 합니다.
'자 여러분, 칫솔 4개 팔았습니다. 얼마 벌었을까요?' '4천 원 벌어쉽니다' '제가 실망했을까여? 안했을까여?' '예. 쉴∼망했쉽니다' '그렇다구 제가 여기서 포기하겠쉽니까?' '다음 칸으로 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더니 가방을 들고 유유히 다음 칸으로 가더라는 거예요.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이 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어요. 아마 모르기는 해도 칫솔 많이 팔았을 겁니다. 성공했을 거예요. 마케팅전략을 잘 세웠거든요.
요즘 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는 전략이라는 말입니다. 나라나 기업이나 학교나 병원이나 할 것 없이 경쟁하는 시대이다 보니까 저마다 전략을 세웁니다. 국가전략, 경영전략, 군사전략, 수산전략, 에너지전략, 마케팅전략, 방송국은 채널전략, 엔터테이먼트 회사는 스타전략 등등...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전략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전략을 세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독창성이 있다는 겁니다. 요즘 경영에서는 Toyota way, 도요타 방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도요타 자동차가 잘 나가잖아요. 그래 벤치 마케팅을 하는데, Toyota way는 도요타를 똑같이 따라하면 도요타를 능가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는 거예요. 전략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세상 사람들을 구원시켜야 합니다. 여기에는 보다 효과적인 전도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보면 전략을 세우셨어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안드레를 비롯한 12명의 사람을 부르셔서 훈련시키고 훈련시켜서 제자로 만드는 전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지요. 12명의 제자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여 초대교회가 만들어졌어요.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보다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교회가 기도는 하는데 전략이 없어요. 물론 기도하면 전도가 됩니다. 기도 많이 하는 교회가 부흥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을 가지고 기도하고 나아가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게 됩니다. 효과적인 전도전략이 교회를 더욱 부흥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겁니다.
요즘 앞서가는 교회들을 보세요. 전도 전략을 잘 세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서 전략을 세우는 거예요. 어느 교회는 교회 건물 안에다가 커피숍을 만들어서 운영하기도 하고, 어느 교회는 주민들을 위해서 독서실을 운영하기도 하고, 어디는 문화센터나 법률상담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는 청소년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길거리 농구대회를 열기도 합니다.
이단이긴 하지만 몰몬교 같은 데서는 영어를 가르쳐 주는 전략을 세우지요. 그래 많은 나라에서 영어를 배우려고 몰몬교 선교사를 만납니다. 실제로 영어를 배우다가 몰몬교인이 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상당수가 있고 유타주에도 꽤 많이 있습니다. 설트레익 시티에 가면 몰몬교 성전이 있는데, 한국 유학생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전략을 세운다면, 오늘날에는 어떠한 전도전략이 좋을까요? 오늘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탁월한 전도전략을 세웠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로마서 15장 22절 이하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에 가 있는 장면입니다. 사실 바울은 죄가 있어서 로마에 간 것이 아니지요. 사도행전 보면 바울을 심문했던 여러 사람들이 바울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3장 29절에서는 천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만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5장 25절에서는 베스도 총독이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가 사형을 받을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이 굳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했느냐 하면 로마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를 움직이는 곳이었습니다. 경제 정치 문화 체육 등의 모든 부분의 심장부였습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로마로 모여들었고 시골에서 도시로 모여들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이 세계로 전파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효과적인 전도전략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에 가는데 감옥에 들어가지요. 재판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아무런 방해 없이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28장 16절에 보면 "바울을 지키는 병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30절에 보면 "셋방 집에서 2년 동안 살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바울 이전에는 예루살렘 중심으로만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바울에 의하여 이방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복음이 전해짐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 되는 중대한 계기가 마련되게 됩니다. 그 이후에 바울의 전략대로 복음이 엄청난 속도로 이방 세계에 증거 됩니다. 바울의 전도전력이 그대로 적중했던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효과적인 전도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날의 효과적인 전도전략은 무엇일까요? 저는 문화를 통한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문화가 시대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문화가 우리 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문화가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문화는 국경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지난 12월에 중국에서 최근 10년 동안 방영했던 한국의 인기 있는 드라마를 발표했는데, 1위가 무엇인지 아세요? 겨울연가입니다. 배용준 최지우가 나오는 거. 아시지요. 2위는 호텔리어, 그 뒤로 풀 하우스, 내 이름은 김삼순, 궁, 인어아가씨 등이었어요. 일본에서도 1위가 겨울연가였어요. 2위는 무엇일 것 같아요? 대장금이랍니다.
한류 드라마가 인기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많아졌고, 한국을 방문해서 촬영장소를 가기도 하고, 한국 음식을 먹는 사람도 생겨났어요. 이런 현상이 1-20대만이 아니라 연령을 뛰어넘어서 아줌마 부대가 생겨났잖아요. 배용준, 이병헌, 최지우..., 이런 배우들이 일본에만 가면 난리가 나잖아요. 이것이 문화의 영향입니다.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을 합니다. 21세기에는 7대 변화의 물결이 있을 것이다. 정보화, 세계화, 기술혁명, 메가 컴피티션, 환경, 복합화, 스피드를 꼽는데, 이 중에서 정보화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요즘은 멀티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시간과 거리가 초월하잖아요. 예전에는 서울에서 유행하는 것이 있으면 여기서는 몇 달 있다가 유행했는데, 요즘은 동시에 유행합니다. 미디어의 영향입니다. 미디어가 인류 생활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 복음이 문화를 통하여 전달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하면 비판하는 분이 있는지 몰라요. 기독교 복음이 문화의 옷을 통하여 전파될 수만 있다면, 동시간에 아주 짧은 시간에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저는 문화를 통한 전도전략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0배 60배 100배로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를 통하여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에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문화선교의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의의 병기로 문화 쪽에서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방송과 언론을 장악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해 보세요. 방송의 영향력이 엄청납니다. 예전에, 80년대에 우리 나라에 좀 좋지 않은 역사가 있었잖아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장악하는데, 제일 먼저 방송국을 점령하더라구요. 방송국을 점령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들의 방법에 의하여 술술 풀어지더라구요.
예수 잘 믿는 교인들이 방송 쪽으로 나가서 예수 정신을 가지고 일하는 거예요. 예수 잘 믿는 가수, 예수 잘 믿는 PD, 예수 잘 믿는 감독, 예수 잘 믿는 기자, 예수 잘 믿는 아나운서, 예수 잘 믿는 모델이 나와야 합니다. 제가 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많이 이야기를 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우리 교인 중에 언론에 한 사람씩 나가고 있어요. 두 신문사에 벌써 나가 있지요. 방송국에도 있어요.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이 친구들이 큰 일을 저지를 거예요. 기대하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유승준이라는 가수가 너무 아깝습니다. 병역 문제 때문에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데, 조금만 지혜로웠더라면, 한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복음을 위하여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친구였어요. 예전에 한국에서 활동할 때에 굉장한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어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컨서트를 했는데, 간증 집회이지요.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는지요. 여의도 일대의 교통이 다 막혔어요. 청소년들에게는 우상일 정도예요. 청소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찬양을 부르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막 따라서 부릅니다. 그러다가 예수 믿은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화를 통한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문화를 통한 전도전략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에서 전도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는데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고 지금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홈페이지는 전도 전략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거 여러분이 아세요? 샌프란시스코는 서울하고는 달라서 여기에 우리 교회가 있고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전도전략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오신 분이 있는데, 한국에서 여기를 오려면 잘 모르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집니다. 그러다가 좋은교회가 나오면 여기는 어떤가 하고 들어오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도 들어오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들어옵니다. 도움을 받으려고요. 교회에 가면 도움을 준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래 들어왔다가 도움을 받고 예수를 믿는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홈페이지를 잘 만들어서 복 받은 교회입니다.
앞으로 인터넷을 통하여 복음을 더 많이 증거하려면 여러분이 좋은교회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오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좋은교회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할 때에 "샌프란시스코 교회"라고 씁니다. 그 때에 방문자 수가 가장 많은 홈페이지가 가장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터넷이 되는 우리 교우들은 날마다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야 돼요. 볼 것이 없어도 방문자 숫자 올려놓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문화선교가 된다니까요. 전도전략이 된다니까요. 요즘 인터넷은 문화입니다. 문화.
우리 교회에 농구부가 있는데, 이것도 역시 전도 전략적인 차원에서 만든 겁니다. 제 나이 또래는 족구를 좋아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농구를 좋아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농구공 하나를 가지고도 하나가 돼요. 우리 교회는 유니폼까지 맞춰주면서 농구를 시키는데, 농구부는 열심히 농구하세요.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할 수만 있으면 농구하세요. 그렇다고 공부하고 담 싸면 안 됩니다. 농구는 A학점인데 공부는 CD를 구우면 농구는 내려놓아야지요. 우리 청년들은 공부하고도 친하고 농구하고도 친하도록 하세요.
농구할 때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끼리 하거나 교회간 친선 경기만 하면 좋지 않습니다. 농구를 매개체로 삼아서 예수 믿지 않는 친구들을 데려다가 함께 농구하세요. 한번 두 번 세 번..., 농구하다가 친해지잖아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도 한번 가보자. 그러고는 데려오세요. 그 친구가 처음 나올 때에 잘 준비해서 감동을 시키세요. 그러면 그 친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농구도 하고 예수도 믿지 않겠어요? 축구하는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볼링, 테니스, 골프, 기타 다른 운동을 하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을 혼자서 할 때에는 건강으로 하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할 때에는 전도전략으로 하는 거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문화팀 안에 영상부가 있어요. 지금은 교회소식을 전하는 수준이지만 앞으로는 여러분이 놀라실 겁니다. 당장 다음주부터 여러분이 직접 참여하시는 영상이 될 겁니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기대하고 나오세요. 앞으로는 유투브나 UCC처럼 여러 교우들이 찍은 영상을 누구나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도록 할겁니다. 홈페이지를 조금만 더 보완하면 됩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교우 중에 애니메에션을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교회 소개 영상을 애니메이션으로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공부하기도 바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재주를 하나님을 위해서도 한번 써보세요. 여기까지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우리 교회에서 아예 영화도 만들고, 애니메이션 영화 만들지 못할 것이 없잖아요. 전도 전략적인 차원에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우리 교회만을 위한 사역은 아니지요. 전세계를 위한 사역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 있는 애니메에션 영화 하나 만드는 것은 선교사 몇 명 파송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금년 한해 동안 우리교회는 가만히 있어도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셔서 우리교회의 좋은 소문이 많이 나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세상을 구원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전도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전도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은 전도 전략적인 차원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아야지요. 내가 예수 믿고 천국의 생명을 얻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서 그도 구원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이러한 일을 위해서 효과적인 전도전략을 세워서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금년 한해에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셔서 효과적인 전도전략을 세우고 한 생명 한 생명을 구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하여 전도전략을 세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전도하기 위한 것이 되도록 하여 주시고, 문화를 통하여 엄청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문화의 고지를 점령하는 교우들이 되게 해 주시고, 생활 속에서도 문화를 통하여 전도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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