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길가의 나무들이 일제히 제 잎들을 떨어뜨려냈다. 지금은 잎을 모두 떨어뜨려야 할 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나무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나님을 만나고부터 그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했음을 고백하는 안요한 목사도 제 몸을 드러낸 나무처럼 아름다웠다.
그를 만나고 돌아 온 뒤, 머릿속에 맴돌던 문장이 있었다.
“때론 눈먼이가 보는 이를 위로했다.”
종교화가 루오(Georges Rouault)의 비애(Miserere)연작 중 한 작품의 제목이었다.
눈먼이라는 존재만으로 보는 이를 위로할 수 있을까. 안 목사는 있다고 했다. 새빛맹인교회를 세운 뒤 만난 맹인들에게 그는 말했다. 대부분 구걸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그는 “여러분 앞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하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엔 목숨을 끊기 위해 주머니에 약을 넣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당신이 불편한 몸으로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살아야겠다고 일어선다면 당신은 가장 귀한 인간의 생명을 구한 일을 행한 것이다. 분명 자신의 어려운 고난을 통해 귀한 생명을 살려낸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듯 눈먼이라는 존재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데, 맹인인 안요한 목사는 그에 더하여 불편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위로할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맹인인 안요한 목사가 영혼의 눈을 뜬 뒤, 그의 위로를 받은 이들은 얼마나 될까. 국내의 외진 시골 교회부터 지구촌 구석구석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곳이 어디라도 땅끝으로 여기며 말씀을 전했던 안 목사는 그동안 50여 국가 7,500여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2
1939년 10월 15일,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안진삼 목사는 그를 ‘요한’이라 이름지었다. 돌림자를 넣어 지은 형제들의 이름과 다른 이유는 그가 태어날 무렵 귀의한 기독교의 소명에 대한 아버지의 굳은 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태어남을 계기로 가산을 정리하여 재산의 대부분을 평양신학교에 헌납하고 당신도 늦깎이 신학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가난과 고난의 시간들 속에서 성장한 소년 요한은 죄 없는 가족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안겨주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목회자로 택한 하나님도 싫었다. 게다가 3남5녀의 대가족 목사를 청빙하는 교회는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소신껏 목회하기 위해 시골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식구들이 달려들어 힘들게 교회를 지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목회를 하다가 교인이 4~50명쯤 되면 또 다시 개척할 곳을 찾아 떠났다. 그는 개척교회의 목사아들로 자라면서 중학교만 8번 옮겨 다녔다. 지방 곳곳을 전전해 다니다가 대전에 자리를 잡고 대전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선언했다. “죽어도 전학을 안다닐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자취까지 하려니 그는 늘 동가숙서가식이었다. 친구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책상 하나 없이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마침 유행하던 대중가요가 <하숙생>이었다.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그의 인생도 구름덩이였다. 정처 없이 가는 인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반항도 더 심해져갔다. 주말이나 방학 때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로 내려가 치기를 부렸다. 그는 교회 문 앞에 커다란 종이를 붙여 놓았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느니라아. 안요한 복음 1장 1절.”
교인들은 그의 소행인 것을 알고 수군거렸으나 아버지 안진삼 목사는 그런 그를 보며 화를 내지 않은 채 밤새워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다음 주일에도 그는 다른 글귀를 써 붙였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네미 할애비를 믿어라. 안요한 복음 1장 2절.”
그 뒤 계속된 ‘안’요한 복음에 교인들은 노골적으로 힐난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의 허물을 속죄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만 드릴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안요한 목사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기도와 용서’였다. 아버지 또한 교회일을 하면서 억울한 일도 많이 겪고 모함도 당했지만 그런 일에 대해선 한 말씀도 안하셨다. 그가 그렇게 아버지와 하나님께 반항할 때도 아버지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가만히 바라보는 것,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만큼 무서운 게 없는 일인데, 그때 그는 알 리가 없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마음껏 해방감을 느끼면서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장차 외교관이 되고자 하는 꿈에 부풀어 공부를 하고, 희망과 밝은 빛이 보이는 젊음을 즐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진학과 외무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당시 강원도 영월에서 목회를 하시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그를 찾았다. 그동안 아무런 말씀도 없이 잠잠하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언젠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며, 신학대학원을 가라는 말씀을 내렸다.
그는 가난한 지난날을 상기시키며 분노하며 항변했지만, 그를 설득하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뜨거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랐다. 결국 그는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신학생이 되었다고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뿐이었으니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하나님을 남들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목사는 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신학대학원을 나오고 말았다. 해방감을 느끼며 그는 자유로웠다. 그 후의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군대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로 인해 미8군에서 통역일을 하며 계속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형편도 나아졌다. 또한 결혼을 하고 두 아이까지 얻었다. 그러던 중 미국 국방성 산하의 군사외국어학교에 응시할 기회가 생겨 지원했고, 선발을 받았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던 중 어느날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더니 사물들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병원을 다녔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온갖 좋다는 치료는 다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무리한 치료법으로 건강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미국행을 점점 연기하며 3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아두었던 재산은 거의 날려버렸다. 어느 날 점점 실명해가는 눈의 상황을 잘 모르는 친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충남 논산에 있는 여학교에서 불어교사를 구하고 있으니 가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논산으로 내려갔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골생활을 하면 좀 나아질 것을 기대했지만 두 눈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수업준비를 미리 하는 등 애를 써봤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교사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 실명이 되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도 떠나가 버렸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3
절망의 나락으로 그는 추락해 나갔다. 그는 더듬거리며 자살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그는 자신이 그토록 없다며 믿지 않았던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을 느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5-9)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건져낸 삶의 의미였다. 담대한 마음으로 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용기이자 의지가 되었다. 그는 죽음만 기다리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 하나님을 믿고 바깥의 공기를 마시며 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노숙을 뜻했다.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더듬거리며 밥을 구걸하고 처마 밑에 잠을 청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눈치료 때문에 얻었던 상처가 덧나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도둑으로 몰려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사람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멸시의 말을 들어야 했다. 당시는 맹인을 비롯한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형편없었을 때였던 것이다. 영악한 사탄은 속살거렸다. “하나님은 말뿐이지 책임을 지지 않아. 지금 네 꼴을 봐라. 더 이상 속지 말고 그만 차에 뛰어들어 죽어버려. 그러면 아픔도 고통도 배고픔도 사라질 텐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의 옆으로 사탄만 다가 온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도 찾아와 아픈 그에게 약을 사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더듬거리며 돌아다니고 헤매며 다닌 몇 개월, 결국 그는 서울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떠난 집으로부터 차로 1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몇 개월의 시간 동안 그는 차츰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훈련시키기 위해 그리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안전하게 그의 가나안, 서울역에 머물 수 있었다. 게다가 거기서 만난 수많은 천사들은 또 어떤가.
“제가 거기서 구두닦이 아이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잖아요. 하나님이 없다고 한 목사아들인 저같은 죄인 괴수에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함께 하시며 저를 사랑하셨어요. 그러니 저에게 관심 갖고 저를 도와 준 구두닦이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소명 두 가지를 깨달았어요. 하나는 그들의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 있는 배움의 기회를 주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저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없었어요. 그들은 내 육신이 불쌍했지만 저는 그들의 영혼이 불쌍했기에 내가 만난 하나님의 복음을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했어요. 그 마음의 결심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죠.”
구두닦이 아이들은 왜 그가 맹인이 됐고, 어째서 집을 나와 살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들에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여학교에서 불어를 가르치던 선생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그가 ‘선생님’이었다는 말은 아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 아이들도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 아이들의 마음을 우리는 백번이라도 헤아릴 수 없어요. 그 애들에게 ‘선생님’은 메시아였어요. 그 아이들이 저를 선생님하면서 부둥켜안고 놓질 않으면서 다시 저희들의 선생님이 되어달라고 할 때 제가 확 뒤집어진 거예요. 그때 성령체험을 다시 한 겁니다. 여호수아 말씀을 주셨을 때가 첫 번째고 그때 다시 ‘이것이 너를 향한 나의 계획이다. 넌 끝난 게 아니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넌 다시 선생님이 되는 거야. 내가 너를 도와주마.’ 그때 왜 내가 맹인이 됐고, 버림받았나 하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그 ‘Why me?’ 란 질문이 해결이 됐어요.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시고, 이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에 제가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 제가 맹인된 거 감사하고, 버림받은 거 감사하고, 서울역으로 보내주시고 이 아이들 만나게 된 거 모든 것 다 감사합니다.’”
4
구두닦이 아이들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그는 한국신학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뒤 목사 안수를 받고, 새빛맹인선교회를 설립하고, 교복 입은 학생들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구두닦이 아이들을 위해 진흥야간학교를 열었다. 아이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주변의 도움을 받아 학교가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조그만 장소였지만 대문에는 ‘진흥야간중학교’란 간판도 걸었다. 한번은 교육청에서 사람이 찾아와 왜 허가도 받지 않고 중학교란 이름을 거냐고 했지만 그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싶어 하는 사정을 잘 설명하자 그가 도리어 우리들이 할 일을 목사님이 한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기도 했다. 점점 학생수가 많아지고 장소를 옮겨야 했을 때는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화된 사람들이 찾아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어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맹인이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안요한 목사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다 중단된 맹인들을 위한 유일한 잡지 ‘점자 새빛’을 다시 인수받아 발행하여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고, 새빛맹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의 고통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쓰러진 그를 보고 신문에 기사화가 되면서 더 많은 격려와 도움이 찾아들었다.
그의 구술로 소설가 이청준 씨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가 발간되고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를 기다렸다.
안요한 목사가 감사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쓰실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 주셨으니 저도 감히 약속드립니다. 제 생명을 부르시는 그날까지 제가 만난 하나님을 땅끝까지 증거하며 증인으로 살겠습니다.”
안요한 목사는 어떤 어려움에도 집회사역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그 약속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새빛맹인재활원을 거쳐 시각장애인의 양로시설인 새빛요한의 집을 건립한 것도 영혼구원의 한 방법이었다. 그에게서 맹인들을 위한 복지는 덤이고 목적은 영혼구원이었다.
안 목사가 지금도 어두운 눈과 불편한 몸으로 다니면서 집회사역을 통해 환대든 박대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것은 단지 그 약속 때문이지만, 사실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고, 모함도 많이 당했다. ‘안하면 그만이지’ 란 생각이 솟구칠 때도 많아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곧 회개했다. 불순종이 어떤 것인지를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힘들어 거절했다가도 곧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곧 반성하고 다시 가겠노라고 연락을 했다.
5.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새빛맹인선교회는 2004년 사회복지법인 새빛복지재단으로 인가를 받았다.
건물 입구로 가까이 가자 ‘땡 땡’하는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입구를 알려주기 위한 맹인들을 위한 장치였다. 지하에는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교회가 있고, 1층은 식당, 2층은 사무실, 4,5층은 생활관으로 여기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은 32명이다. 법인이 되면서 직원도 늘어 맹인의 숫자만큼 되었다. 이곳의 특성은 중도실명자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실명하여 맹인학교를 나오고 침술이나, 안마 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짜 맹인’들이다. 안요한 목사처럼 뒤늦게 실명이 된 이들이 많은데, 그렇기 때문에 실명 뿐 아니라 다른 복합적인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고,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항상 사고가 생기기도 하고 사건이 생기는데, 그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는 선생님들의 어려움이 많다고 안 목사는 이야기했다.
간혹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배시간엔 언제나 은혜가 넘친다. 안 목사는 당신의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주일마다 ‘좋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이곳을 찾아 온 사람들은 거의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알음알음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비신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분들은 예수님 믿기 전에 실명하신 분들이라 자살도 기도해 보고, 절망도 많이 느꼈던 이들이에요. 그래서 정신질환도 생기게 되고…,그것을 신앙적으로 회복하고 이겨나가는 거예요. 영적으로 꽉 붙잡아 놓지 않으면 여기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꽉 붙잡아 놓고 영적으로 훈련시켜서 오래 같이 모시고 살아야죠. 여기에 20대에 오신 분들이 세월이 많이 흘러 5-60대가 되어 가잖아요. 그러니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리에 의해서 양로원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이곳은 보시다시피 도로 앞이라 사고 위험도 있고 해서 용인에다 맹인양로원을 하게 된 거예요. 아휴, 지역사회에서 엄청나게 반대를 했죠. 좋은 기관이 들어오지 왜 하필 맹인시설인데다 게다가 맹인양로원이냐고, 몇 년 동안 재판도 많이 하고, 우리가 힘이 없으니 고소도 많이 당했어요. 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 은혜로 해결이 되어 2006년도에 식구들이 모일 수 있었어요. 거기는 재활이 거의 불가능한 분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정신장애를 앓는 분들도 많지요.”
안요한 목사는 재미난 얘기를 해 주겠다며 LA집회에서 가서 본 신문기사 얘기를 했다. 80이 넘은 남녀가 사랑을 위해 LA에서 다른 주로 도망간 내용이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이렇게 말하며 웃는 안 목사는 새빛요한양로원을 개원하고 총 7쌍의 주례를 했다며 건물 3층에 맹인부부방을 만든 사연을 이야기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곳을 가는 안 목사는 거기는 시골이고 땅이 넓기 때문에 농사도 짓고, 닭이나 돼지를 기르면서 살기 때문에 그로 인한 재미있고 소소한 이야기가 많다며 그 예의 유모를 섞어 여러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새빛맹인재활원이 법인으로 늦게 인가를 받은 것은 그곳에 기거하는 맹인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어 한 달에 40만 원정도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법인이 되면 그 돈을 개인이 받을 수 없고, 그 돈은 시설에 들어가도록 제도화가 되어 있었다. 안 목사는 법인이 되면 한 달에 만원이라도 필요한 사람들이 혜택을 못 받게 되기 때문에 법인을 미루고자 했지만, 사람들 세상에서는 말이 많았다. 물질과 관련해서 여러 억울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법인을 하면 이런 저런 소리 안 들어도 되었지만 맹인들이 받는 혜택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결국 서초구에서는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안 되지만 그동안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에 한해서 생보자로 대우해주기로 결정해 주었다. 물론 다른 맹인시설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여기 분들은 그래서 몇 년 돈을 모아 장애인아파트나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대부분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요. 거기다 침술이나 안마 등 기술을 배우니 생활할 능력을 갖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집나갔던 처자식들이 다시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이 새로 합치는 걸 많이 봐요. 한 부분의 재활이 아니라 가정회복이란 완전재활이 되니 보람이 있어요.”
6.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안내해주던 이영아 간사가 어떤 분을 보고 인사를 했다. 맹인인 그분은 천천히 더듬거리며 5층에서 지하까지 오르내리면서 계단손잡이를 닦고 있었다. 맹인들은 계단손잡이를 잡고 다니기 때문에 그분이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하에 있는 교회로 가니 몇 사람이 연주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과 여유, 농담, 그런 것과 만나면서 그들의 얼굴에 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시설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생님들과 바깥나들이를 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표정과 올해 1년 치의 <월간 새빛>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에 깃든 평안과 기쁨, 감사를 간접경험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분들이 이런 환경 속에서 행복하다 얘기할 수 있을까. 다른 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영적치유를 해주겠다며 성경강의도 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이분들의 내적치유, 영적치유는 그것으론 안돼요. 이분들이 살아온 힘든 생과 수준은 일반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과는 다른 거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고민도 많았어요. 그러다 제가 부활절 설교준비를 하면서 깨달았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상심하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실 때 그 제자들의 고백이 나와요. 예수님 말씀하실 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래서 그거다, 말씀이 가슴에 와 닿으면 뜨거워지고, 그러면 치유가 되는 겁니다. 그분들이 거의 예수 믿지 않는 분들이라 이곳에 아무리 명강사가 와서 얘기를 해도 귀로 들을 뿐이지 이들의 가슴엔 닿지 않거든요. 그래서 악기 연주를 시켰어요. 본인들이 원하는 악기가 어떤 것이든 선택하도록 하고, 모임을 꾸렸어요. 대신 연주를 할 때 절대 세상 노래는 안 된다 그랬어요. 찬송가나 복음성가만 하도록 요구했어요. 찬송이 영적인 멜로디이고 믿음의 간증이니까 이분들이 연주를 하면서 가슴이 서서히 뜨거워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누가 와서 별 짓을 해도 안 되더니 이 찬양 멜로디를 통해 이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거지요. 이분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얘기하세요. 지적장애가 있는 분들이 성경암송을 줄줄 하고 찬양을 하니, 여기 오신 목사님들이 다 놀라요.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이렇게 각기 원하는 악기 팀으로 모여든 이들 중 새빛맹인핸드벨콰이어와 풍물선교단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 나가 공연할 정도로 그 수준과 열정을 인정받고 있다. 새빛바디매오 합주단도 창단되고, 음악으로 이들이 하나 되자, 2008년도엔 새빛선교 30주년 사랑의 콘서트도 열고, 작년에는 새빛낮은예술제도 성황리에 개최할 수 되었다.
7.
안요한 목사는 요즘 국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금년 여름에 어느 교회 새신자집회에 갔는데, 교회의 배려가 넘쳐 에어컨과 선풍기의 찬바람을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그만 거기서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한동안 몸이 완전히 다운되어 일어나질 못했다. 그러다보니 선교회의 쌓여있는 일들이 보였다. 이 일, 저 일 챙기느라 8월 21일부터 11월 7일까지 있던 해외스케쥴을 모두 취소했다. 안타깝지만 하나님이 못 가게 막은 듯 했다.
새빛맹인교회에서는 그들도 도움을 받는 처지지만 조금씩 모아 선교후원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금년 7월에는 인도네시아의 메단이란 도시에 메단새빛맹인교회를 세웠다. 또 스리랑카에서 연락이 와 12월 1일 스리랑카의 장애인의 날에 시각장애인들이 콜롬보로 다 모이니 꼭 와달라는 기별이 왔다. 몸이 아직 완전 회복은 되지 않았지만 그런 곳은 꼭 가봐야 했다.
안 목사는 그동안 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앞으로는 큰 나라는 가고 싶지 않고, 조그만 나라, 발길이 안 닿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우르과이의 베르다라는 곳은 그 많은 한국인 목사들이 거의 찾지 않는 외진 곳인데, 선교사 한분만 외로이 집을 짓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안 목사가 그곳을 찾아가니 선교사는 너무 좋아하며 대접을 하고 싶지만 형편이 없어 조그만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나물로 무쳐 내왔다. 그는 눈물이 나 그 반찬을 먹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발길이 안 닿는 땅끝으로 찾아다니고 싶어 한다.
안요한 목사는 그동안 해 온 일들이 모두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라고 했다. 이번에 펴낸 『낮은 데로 임하소서, 그 이후』에는 하나님이 하신 그 많은 일들을 다 표현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3권을 다시 기획하고 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한편 그가 인생의 첫 번째로 꼽는 집회사역을 그는 국내에 더 많이 하고 싶은데도 연결되기가 참 어렵다고 했다.
“제가 시각장애인이고 맹인사역을 하고 있으니까 좀 무겁죠. 부담스럽겠죠. 도와줘야 되나, 어떻게 모셔야 되나. 솔직하게 말합시다. 세상이 그래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지만 기브앤테이크가 있잖아요. 큰 교회에서 불러주면 다시 나도 불러야 되죠. 교단의 자리와 관계있으면 또 연결이 잘 되죠. 저는 초교파에다가 독립교단에 가입되어 있고, 맹인인데다가 시설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능력 있는 종이 못되고, 은혜도 짧으니까 집회에 연결되기가 참 힘들어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연결되어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과정 속에서 혼자 흘리는 눈물이 많았고, ‘그럼 관두지’하는 불만도 많았어요. 하지만 다 내 잘못이고, 아직 덜 성숙했기 때문에 후회가 많죠. 요즘 말처럼 내려나야 되는데, 아직 덜 내려났나 봐요.”
안요한 목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천사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전해 주었다. 어떻게 필요를 아시는지 그때그때마다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이 땅의 사람들을 천사화시켜서 그에게 보내 준 천사들이었다. 그는 그들에 관한 얘기를 밤새워 해도 모자랄 것 같다며 다음에 꼭 책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안요한 목사가 겸손한 태도로 유머를 지닌 말씀을 해 주시는데, 그 말씀들이 가슴에 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전하는 말 너머로 위로의 기운이 차가운 날씨에 따뜻한 손길을 남기게 했다.
청각장애를 가진 시인인 서덕석 목사는 루오의 그림과 같은 제목으로 이런 시를 남겼다.
그 중 한 대목이 이렇다.
낯익은 예수만 따라가다가
다른 모습의 예수는 몰라보는 게 아닌가
나는 볼 수 없는 대신에
그분의 숨소리를 듣네만
그래도 절망은 말게
자네가 그분을 찾으려고 휘둘러 보면
언제나 가까이
옆에 계실 것이니
(<때로는 눈먼이가 보는 이를 위로했다> 중에서)
글_이영란 사진_김승범
'잡다한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거스틴의 자기 성찰 질문들 (1) | 2024.03.29 |
---|---|
영국 법원, 어머니에게 12살 장애 딸 안락사 허용 (0) | 2024.03.13 |
화학신동 신희웅 (0) | 2024.01.26 |
차를 들어올린 여인, 안젤라 카발로 (Angela Cavallo) (0) | 2024.01.11 |
마리아 숭배의 기원 (0) | 2023.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