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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마태복음 설교 모음

마태복음 16:20 - 28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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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열쇠의 비밀 /16:13-20/ 곽선희 목사

2014-11-19 11:18:40

 

기독교 서적분야에서 한때 베스트 셀러였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있습 니다. 그 책이름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가지 이유' 그런 책입니다. 교회 안 다니 던 사람이던 다니던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이유, 일흔 일곱가지 있 답니다.

 

이 책은 사십대 이후에 예 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 만재 선생께서 신세대들 젊은이들에 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 놓은 책입니다. 일흔 일곱가지 이유를 상세하게 다 말씀드릴 것은 없고요 분류해서 보면, 간추려 볼 때 다섯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우선 인상이 시끄럽고 유 난스럽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꼭 거리에서 노방 전도를 한다고 북을 치고 말이지요. 또 뭘 이렇게 교회 에 나오기만 하면 그대로 붙들고

 

"어디에 사느냐? 이름이 뭐냐? 직 업이 뭐냐? 식구는 몇이냐? 결 혼은 몇 번이나 했냐?"

 

별것 다 갖 고 물어보는데 아주 질색이에요. 아주 너무 유난스럽게 이렇게 나오 기 때문에 '에이 겁이 나서 교회 못 나가겠다.' 그런 얘기고요.

 

두 번째는 교회생활 한다는 사람 들이 집안 살림을 전혀 신경 쓰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또 문제예 요. 그래서 교회 열심히 나가는 사 람들이 더 가정 생활이 좋아야 하겠 는데 소망교회는 빼고…… 그렇게 좀 문제가 있어요. 이게 문제가 많 아요. 열심히 믿는 사람일수록 집 안에 대해서 충실치 못하다.

 

아이 들은 문제아가 되고 남편들은 밖으 로 나돌고 그리고 부부싸움이 잦고 뭐 소리가 나거든요. '도대체 이렇 게 교회에 나가면서 가정과 자기생 활에 불충실하다. 내 이 꼴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겠다.' 이런 것들이 교회 걸림돌이 되고.

 

또 하나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이요. 교회 오자마자 아직 믿음이 생기기 전에

 

"여전도회 나와라. 구역예배 나와라. 남선교회 나와라. 봉사하 러 가자."

 

그러면 이 사람이 지쳐 가지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이 자라는 것과 이것이 병행을 해야 하 는데 그만 이런 외적 일에 대해서 너무 강요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다 는 거예요.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 하는 얘 기고요. 또 한번만 빠져도 당장 찾 아와서

 

"왜 안 나왔느냐?"고 그럴 수도 있지. 그것을 따지면 참 힘들 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배타적이고 고리타분 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잘 났다고 그러고 착한 사람인양하고 이렇게 된다는 거요. 그리고 먼저 믿었다고 해서 무슨 큰 벼슬이나 하 는 것처럼 뒤에 온 사람 무시하고 말이에요.

 

"그것도 모르냐?". 여 러분 그것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믿었다고 성경구절도 좀 알고 찬송 가도 좀 잘 부른다고 해서 처음 와 서 어리둥절한 사람을 이렇게 해서 는 안되죠. 그래서 제가 성경 읽을 때도 꼭 "신약 몇 페이지 찾으세 요."

 

왜요? 그냥 호세아 몇 장하 면 알 수가 있나? 호세아 몇 장이 어디에 들었는지 그러나 믿는 사람 은 잘 아나 오래 믿은 사람은 처음 믿는 사람은 모르는데 이럴 때는

 

"구약성경 몇 면을 보십시오."

 

하면 페이지를 찾으면 되잖아요. 어쨌든 간에 '먼저 믿었다고 되게 잰다'는 거예요. 이게 참 힘들다고. 뒤에 나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뒤에 나오는 분들이 '교회 가 기 싫더라. 잘난척하는 사람들 보 기 싫어서' 그런 얘기고 자기들만 다 의인이고 세상사람은 다 죄인인 것처럼 다 몰아 치는데 이런 것들이 거슬린다고 합니다.

 

다섯 번 째는"교회와 세상이 별다를 뜻이 없더라."

 

하는 얘기입 니다.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 지더라. 왜냐하면 교회에서도 보니 까 학력, 신분 따라 대우하고, 경쟁 심 많고, 공명심 많고, 자기 이름 내 려고 하고, 시기, 질투가 많고, 돈으 로 사람을 평가하더라. 그래서 저 희가 결혼식을 한다든가 할 때 절대 돈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똑같이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화분 딱 두개 놓고 그 대로 할 것이지.

 

"우리는 돈이 많 으니까 화려하게 하고 싶습니다."

 

안돼요. 이 교회에는 그런 것 없어 요. 교회에 들어선 이상에는 있고 없고, 가난하고 부하고, 세상에서 높 고 낮고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여 기는 똑같아야 되는데 이렇지 못하 고 이걸 세상의 신분대로 또 돈 있 는 대로 특별하게 대해주고 이런다 고 하면 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 다. '이런 것들이 거슬리더라'합니 다. 그래서 '예수는 좋으나 교회 가 기 싫다.'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 왜 나왔다고 생각 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은 예수님께서 귀한 교훈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쭉 가르쳐 나가다가 그 교훈의 클라이 맥스에 도달합니다. 이 절정에 이 르렀을 때 주시는 아주 소중한 말씀 입니다.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말이 나 오는데 지금도 이 도시가 있는데요.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 이 중동지구를 지배하는 군사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번영 지입니다. 거기에 로마 사람들의 군사령부가 있어요. 지금도 그때의 지어 놓았던 건물들이 있습니다. 이 로마의 그 어느 부분을 옮겨놓은 것 같은 그럼 시설들이 원형극장도 있고 다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 군 인들이 여기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 어요. 그 로마 군사기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한번 가 볼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제자 들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 들이 이 길로 지나가며 이 로마 사 람들의 그 군사기지를 보고 그 군인 들이 훈련하는 모습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 이런 걸 볼 때 약소 국가에 사는 사람들, 피지배국가에 사는 이 소수민족으로 볼 때에는 참 부러워죽겠거든요. '우리는 언제나 나라가 독립하나? 언제나 우리는 이렇게 큰 소리를 치며 살 수 있을 까?'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 유대 나라는 불쌍해요. 빼앗기고 짓눌리 고 약탈당하는 거요. 그리고 남의 나라 군사들이 와서 제멋대로 자기 나라처럼 이렇게 휘젓고 돌아가는데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침 을 흘린 것 같아요. 부러워하는 마 음으로 ', 참 좋다. 어떻게 우리 고 저럴 수 없을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자유함을 얻고 정권을 회복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러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 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묻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열 세 사람뿐입니다. 열 두 제자를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 물 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 냐?""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 을 할 때 고백하는 순간 여기서 결 정적인 역사가 창조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창립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여기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초라 하게 보입니다. 적은 무리요 하찮 은 사람들같이 보이지만 거기서 역 사가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의 역 사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기원이 시 작이 됩니다. 놀라운 얘기가 아닙 니까? 그런고로

 

"주는 그리스도시 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이 말 한마디, 이 고백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건립이 되고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 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 오늘 본문 을 자세히 읽으면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고 교회와 하 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베드로와 천 국열쇠"

 

이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들이 모여서 오늘의 복음 을 이루고 있습니다.

 

, 이제 핵심은 오늘 말씀 드리 려고 하는 주제는 천국열쇠입니다. 오늘 이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국열쇠 이거 무슨 뜻입니까? 천 국열쇠라고 하는 말의 개념은 먼저 는 이 천국문제가 결코 심리학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무슨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고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인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때 좀 편안하게 일도 잘 되고 누가 다 좀 안정이 되면은 '여기가 천국이 다.' 그래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따위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 떤 분은 그런 얘기도 합디다마는 죄 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저 시골에 계 신 분이 한번 우리교회 와서 큰 예 배당에서 많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 를 드리고 오늘 같이 이렇게 좋은 성가를 듣고 하는 말이

 

"여기가 천 국이구먼."

 

그럽디다만은 여러분은 그걸 못 느끼죠? 정말이에요. 우 리는 때때로 이렇게 너무 감격하고 은혜로울 때 여기가 천국이다, 가정 이 천국이다, 내 마음이 천국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마는 오늘 성경말씀은 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천국은 종말적이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 천 국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이요 원리요 중심이요 획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천국이 열쇠다'하는 말은 결코 천국 을 건설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혹은 제자들에게"너희들이 천국을 건설하라. 천국을 만들어라."

 

뭐 그 런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께 서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주님의 십 자가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천국은 들어가는 것이지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천국 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요. 이걸 잊지 말아 야 해요.

 

그런고로 천국은 전파되 는 것이지 내가 천국을 건설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절대로 그 런 일이 아니에요. 이루신 천국을 전파하는 것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들어간다는 것 거기에 중 요한 의미가 있고요.

 

또 하나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 문제 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 천국 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도덕이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그의 의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 같 아서는 좋은 일 많이 해야 하고, 적 선을 해야 하고, 고행도 많이 하고, 명상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 고 그래야 어느 수준에 도달한 다음 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듯이 말이죠. 그렇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마는 예 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에요. 천 국열쇠는 열쇠 가진 사람만 들어간 다 그 말이요. 천국열쇠는 딱 하나 뿐이요. 이걸 가지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14층 아파트 꼭대기 에 사는데 어느 날 밖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차에서 내려 가지고 방 으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엘리베이터 가 마침 고장수리! '아이구 큰일났 구나!' 무릎이 아프지만 어떻게 하 겠어요.

 

걸어서 헐떡헐떡 걸어서 14층을 간신히 올라갔습니다. 올라 가서 문을 열려고 열쇠를 찾는데 열 쇠가 없어요. 차에다 두고 왔어요. '이런 낭패가 있나?' 이거 분명히 내 집이지만 열쇠 없다고 들어오지 말래. 안 그렇습니까? 열쇠 없으 면 그만이예요. 그래서 답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두들긴다고 되겠 습니까? 부신다고 되겠습니까?

 

호령을 한다고 되겠습니까? 오로지 열쇠만 필요한 거예요. 그것도 자 물쇠에 맞는 열쇠, 그거 하나만 필 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걸어서 내 려왔습니다. 내려와 자동차에 가보 니까 자동차에도 열쇠가 없어요. 이게 어디로 갔나 보니까 주머니에 그대로 있어요. 여기 웃는 사람들 다 경험했어요 보니까.

 

그러나 중 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내 집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맞는 열쇠가 없으 면 못 들어간다 그거예요. 그러나 열쇠 가진 사람이면 도둑놈이라도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 니다. 그런고로 주님 앞에 갈 때는 바로 이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는 거 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가 운데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그런 말 씀이 있습니다. 어떤 때 왕의 아들 잔치가 있었다. 왕은 기뻐서 사방 의 사람들에게

 

", 내가 아들의 잔 치를 하게 되니, 내 아들 잔치가 있 으니 백물을 갖추어 놓았으니 와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했더니 저마다 오지 않았대요. 나는 내가 할 일이 많고 밭을 샀고, 소를 샀고, 나도 장가를 갔고, 나 안 간다고 거 절을 하더라. 왕이 섭섭해서 그 다 음에

 

"산으로 다니면서 모조리, 누 구든지 병신이든 뭐든 상관없다. 다 불러 오라. 그래서 내 집을 채 워라."

 

손님이 없으면 이것 잔치는 낭패거든요. 내 집을 채워라 그래 서 채웠답니다. 주인이 마지막에 나와서 그거 다 보고 기뻐하게 되는 데 보니까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옷들이 다 좋지 않았거든요. 2000년 전 에 옷이 오죽했겠어요?

 

그러니까 잔치를 할 때 만일에 그냥 손님들 오게 하십시오 하게 되면 분위기가 영 엉망이 되니까 그래서 이 손님을 청하는 주인집에서 예복을 보냈어 요. 보내서 이것을 입고 오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 예복 을 입고 왔는데 오직 한 사람은 예 복을 안 입었더랍니다. 왜 안 입었 을 것 같습니까? 내 옷이 더 좋으 니까…… '주인이 보낸 저 옷보다 내 옷이 더 좋다.' 그런 생각을 해 요. 옷 자랑하느라고 안 입고 요새 말로 개성있게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아주 엄 하게 책망합니다.

 

"바깥 어둠에 내 어 쫓으라. 지옥으로 떨어뜨려라.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렇게 말 씀하십니다. 전 그런 생각을 합니 다. '아니 잔치에 와서 먹으라고 초 청을 할 때는 언제고 옷 좀 안 입었 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벌을 해야 하 나?' 여기에 신학적 의미가 있는 거 예요. 자기 의를 가지고 나오는 건 안돼요. 주인이 보낸 의의 옷을 의 롭다하는 그 의의 옷을 입고 나와야 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열쇠입 니다.

 

그런데 오늘 분명히 생각해야 됩 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이 고백, 이것이 열쇠요. 이 고백과 함께 교 회가 설립이 되고 천국의 열쇠가 주 어집니다. 이 믿음이 아주 중요합 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를 아시죠? 창세기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합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영 적으로는 이미 다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방주를 만들고 이 모든 사람 들을 다 진멸할 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 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의로우냐, 선하냐, 선한 일을 많이 했느냐? 그거 하나도 묻지 않아요. 오로지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 살았 어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 방주의 의미가 있습 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에 의미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신앙이 뭡니까? 나는 복잡하게 생 각 안 해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선행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하나님이 아시지 난 알 바가 아니 요. 제가 40년 목회 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회 출석 잘해야 되요.

 

교회 출석이 뜸해지기 시작하면 시험에 빠져요. 틀림없이…… 교회에 나 오면서 은혜 받고 교회에 나와서 깨 닫고 교회 나와서 여기서 깨닫고 사 업도 하고 여기서 깨닫고 화목도 하 고 여기서 깨닫고 결심하고 원수도 사랑하고 이렇게 되더라고요. 열심 히 교회 나와야 해요. 시간 시간 이게 방주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보면 이 교회를 등한 시 여겨요.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졸다가요. 그래서 공치는 날 도 있죠. 그래도 나와서 졸아야 되 요. 졸아도 나와서 졸아야지. '오 늘은 어떠니까 분위기가 어떠니까 안 나온다.' 그러기 시작하면 시험에 빠져요. 이것은 사회학적 통계가 나와 있어요.

 

넉 달만 안 나오면 완전히 Non Christian이 되어 버려 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이걸 깨 닫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하루도 안 나가면 안 된다. 한 시 간도 빠지면 나는 내 영혼은 죽는 다. 이것이 교인이요. 방주에 들어 가야 구원받는 거지요. 내가 의로 워서 내가 어째서 구원받는 것은 아 니지요. 이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자세히 보면 도대체 이 천국열쇠 천국에 들 어가는 이 열쇠가 아주 신비로운 의 미를 가졌어요. 이건 뭐 책에 얼마 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는. 그러나 그 신비로운 말씀을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요점만 몇 가지 말씀합니다. 문제만 제시 합니다.

 

첫째는 이 열쇠는 축복이라는 거예요. 오늘 이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입니다."하니까 주님 말씀이

 

"네가 복되다."그럽니다. 복입니다. 복이 뭡니까? 하나님께로 주어지는 은사를 말합니다. 내 노력으로 얻 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건 복입니 다. 예수 믿는 것 큰 복입니다. 꼭 믿어야 할 사람인데도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못 믿어요.

 

제가 목회 하면서 임종하는 사람들 을 많이 만나잖아요. 만나면 그저 안 믿는 사람 마지막이라도 붙들고 전도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간절 히 기도하면서 부탁을 합니다.

 

"예 수 믿고 구원받으십시다."그러면은 좀 가만히라도 있으면 좋겠는데"안 믿어."

 

그러고 죽어요. 참 이거 어 떻게 하면 좋아요 이거. 그럴 때는 며칠 동안 어떻게 기분이 나쁜지 몰 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거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또 그 런가 하면 어떤 분은 그렇게 시원케 믿은 것 같지 않았는데 임종하는 순 간에 하늘을 바라보며 환한 얼굴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저기 하얀 가마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고 죽잖아요. 이게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게 복이지 이게 자기 노력으로 되 는 겁니까 이게?

 

그런고로 말씀이에요. 천국열쇠 요? 이건 축복입니다. 내가 복이 있다. 여러분은 복된 사람인 걸 알 아야 되요.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이유가 있어요. 교회 안 나온 사람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 끝 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믿는 사람 은 믿어요. 믿어지어야 믿지 안 믿 어지는데 어떻게 할거요? 무슨 수 로 믿게 할 수 있어요? 그걸 알아 야 합니다. 이건 큰 축복이라는 것 을 알아야 되고요.

 

또 성령으로 말미암았어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혈육이 알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알게 한 것이다. 즉 성령이 너를 감동해서 내가 그리 스도임을 알게 했고 믿게 했다. 성 령의 역사지 네 지식도 아니고 네 경험도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여기에 신비가 있고요.

 

또 한가지는 교회와의 관계입니 다.

 

이제 교회를 세우리라. 오늘의 역사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네가 구원받는데 머물지 않고 이제 계속해서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될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의 신비. 이것이 천국열쇠요. 또 베드로 그 는 증인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 뿐만 아니라 그는 중요한 의미를 가 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증인 그에 게 천국열쇠가 있는 것이에요. 복 음을 들어야 구원을 받으니까. 너 는 이 천국열쇠를 가지고 전하는 엄 청난 권세와 책임을 맡은 거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더욱 신비한 것은 하늘과 땅의 역사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 늘에서도 맬 것이요. 참 중요한 말 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평생 목 회 하면서 당회를 통해서 누구를 책 벌하는 일을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하려고 합니다.

 

왜요? 땅에서 매 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니까요. 교 회의 권세가 천국열쇠와 같은 의미 를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 요. 교회에서 풀면 풀리고 교회에 서 매면 맨다는 것이에요. 땅과 하 늘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깊 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나온 목적이 뭡니까? 교회를 무엇으로 알고 나오셨습니 까? 친절을 원하십니까? 친절하 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떻습니까? 그 악수해 주는 것을 원하십니까? 저 악수를 다 못합니다마는 그러나 그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끔 어 떤 때에 우리 여집사님들이 저를 만 났어요. 저 교회 앞에 만나 가지고

 

"목사님, 제가 누군지 모르시죠?""저는 모릅니다.""저 소망교회 집 사인데 모르세요?"

 

"모릅니다."제 가 한마디합니다. "자고로 나는 여 자 얼굴을 똑똑히 안 봅니다."

 

그 러나 한마디합니다. "내가 알고 모 르고가 뭐 그렇게 중요하오? 그리 스도가 알면 되고 하나님이 아시면 되고 이게 중요한 거지."

 

곽목사가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때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여러분 이 교회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예요. 천국열쇠를 내가 네게 준다. 이제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 오늘을 사는 거예요. 언젠가라도 이 열쇠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갈 것 이에요. 천국에 가는 티켓을 받아 가지고 오늘을 사는 거예요. 이것 이 그리스도인이요. 이것이 교회입 니다. 이것이 교회 생활입니다. 기 도하십시다.

 

 

 

 

 

 

 

admin

 

댁쟾쇰줈

 

주여 그리 마옵소서 /16:21-28/ 곽선희 목사

2014-11-26 22:02:06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이러한 심오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이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생각하면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진실을 묻는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과 뜻과 이상은 천사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행동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 같습니다. 이 갈등 속에 문제가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Super Ego True Ego 초자아와 현실적인 자아의 갈등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 이 두 얼굴, 이 두 인격을 진실하게 인정을 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분명히 동물이면서도 동물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다른 동물들이 그럴 겁니다. '우리보다도 더 못된 것들이 되게 거만하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요새는 걸핏하면 이 '개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만 개가 만약 말을 할 수 있다면 '말조심해라. 우리만 해봐라.' 그러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진실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게 진실입니다. '옳다, 그르다'를 말하지 마십시오. 단 사실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걸 인정하면서부터야 바른 길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얼굴, 그것은 두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두 마음이 있으면 두 인격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누군지? 나를 모르면 안 됩니다. 이 긴장관계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확실하게 나의 나 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성경을 읽어가노라면 깜짝 놀라게 되고 또 어떤 때는 '예수님 좀 지나치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는 거 좀 지나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너는 베드로다" 귀한 이름을 주십니다.

 

페트로스. 페트라,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 너는 반석이다. 귀한 이름을 주십니다. 그것뿐입니까? "천국의 열쇠를 내가 네게 주노라." 여러분, 로마나 유럽에 어디에 가든 많은 석상들을 봅니다.

 

열 두 제자의 석상들이 쭉 있는데 베드로를 찾는 법은 간단해요. 커다란 열쇠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베드로에요. 커다란 열쇠 들고 있는 것은 베드로고 말씀의 검,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입니다. 이 두 가지로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베드로 됨은 바로 열쇠에 있는 거예요. 천국 열쇠를 주노라. , 기가 막힌 시간이 아닙니까? 얼마나 우쭐하고 감격을 했겠습니까. ', 내가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예수님을 3년 따라 다녔다. 소원을 성취했다. 이건 기대 이상이다.' 크게 우쭐하고 감격하고 기분이 좋았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바로 생각을 확 돌려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를 져야겠다. 그리고 부활해야겠다." 십자가를 지신다니. , 십자가라는 게 보통 처형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 그렇게 비참한 처형 법은 없었습니다. 이 무서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베드로가 말씀하게 됩니다. 간하고 만류하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 그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네가 안 것이 아니고 네 혈육이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로 알게 한 것이니라."

 

좀 신학적 용어로 바꾸면 '성령이 너희를 감동해서 그 고백을 하게 한 것이니라. 네 지식이 안 것이 아니고, 네 경험이 안 것이 아니고, 네 인격이 안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나님이 알게 해서 네가 이와 같은 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된 거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한 것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네 안에 성령이 있다. 네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네 안에 성령이 함께 할 때에 이 고백을 하게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십니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 베드로는 "안 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만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가만히 보세요. 십자가를 지고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영어로 말하면 must를 사용하십니다.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반드시 죽어야 하고 반드시 살아야 한다. 죽고야 사는 것이다.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반드시 부활해야 할 것이다. , 이 말씀이 귀중한 클라이막스요, 예수님 사역의 절정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말씀을 하시는 순간에 베드로가 그 귀한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왜요? 그 마음속에 별 다른 마음이 있었거든요. 가득 찬 딴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만류합니다. 여기에 붙들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몸으로 붙들었다는 뜻입니다. '프로스라보메노스'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take입니다.

 

그리고 간했다고 하는 '에피티만'은 특별한 말입니다.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었다, 귀신을 꾸짖었다 할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꾸짖듯이,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그냥 간청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꾸짖었다는 얘기예요. '어찌 그런 생각을 합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뭐 이런 얘기죠.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 좀 전에 베드로라고 부르고 곧 돌아서서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습니까? 단호하게 한 치의 타협도 없습니다.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둘이 있어요. 성령이 역사할 때에 신앙을 고백했고, 사탄이 들어갈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방해합니다.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자기희생이 순조로워야 참 사랑입니다.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희생이 없었어요. 여러분, 누굴 사랑하십니까?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들어가야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하니까 오해가 많아요. 뭐 복잡해요. 편견이 많아져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되요. 아마 그 뒤에 깜짝 놀랄 겁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왜요? 그 속에 딴 마음이 있었거든요. 깊이 들어 있었어요.

 

바로 이 순간 베드로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에 포로 되어 있는지를 몰랐더라는 거예요. 내 속에 사탄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지금 사탄의 노예가 되는 순간이라는 걸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그저 천국 열쇠를 준다니까 우쭐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 마음 깊은 곳에 자기도 모르게 오랫동안 마귀가 있었어요.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이제서 깨닫게 되고, 이제서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아마 베드로가 깜짝 놀랐을 겁니다.

 

어쩌면 한 평생 생각했을 겁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탄을, 내 마음 속에 있을 수 있는 사탄을, 내가 사탄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두고두고 한평생 뉘우치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함께할 때에 천국 열쇠를 손에 든 위대한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갈 때,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거룩한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더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꼭 부활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결정적인 진리의 시간입니까. 그런데 소중한 말씀을 그는 알아먹을 수가 없었어요. 귀에 들려지지도 않았어요. 왜요?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얼마나 귀중한 시간입니까? 오히려 베드로가 묻는다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해야 한다면, 예수님 정말 꼭 그래야 되는 겁니까? 꼭 십자가를 지고야 부활하시는 겁니까? 그 부활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뜻입니까?"

 

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신비로운 말씀에 대해 다시금 깨닫고 진리에 대하여 물어야 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 욕망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이 노출된 시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공자 선생님은 성장 배경이 아주 불행했다고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마저 소년시절에 세상을 떠나서 참으로 어렵게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많은 역경을 무릅쓰고 마침내 이 모든 고난을 거름 삼아서 성숙한 인간으로 도에 통한 성현이 되었더라는 겁니다. 그가 한평생 마음에 간직했던 것이 있습니다.

 

소위 "절사(絶四)"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가지를 꼭 끊어버려야 한다.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늘 생각을 했습니다. , 절사. 그래서 무의, 무필, 무고, 무아 네 가지를 말합니다.

 

무의(毋意)라고 하는 것은 편견과 주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 편견처럼 무서운 게 없습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 판단이 꼭 옳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적어도 죄송합니다만, 오십이 넘었거든 편견을 버리세요. 그 동안 후회한 것도 너무 많아요. 편견 이걸 떠나야 합니다.

 

또한 무필(毋必)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무리하게 관철하려고 하지 마세요. 반드시 이래야 한다. 반드시라는 말을 잊어버리세요. 세상에 그렇게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어요. 반드시라는 건 없습니다. 그것도 오십이 넘었거든 잊어버리세요. 그럴 수도 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반드시가 어디 있어요? 젊었을 때는 반드시 이 여자래야 된다. 결혼하고 나서 이혼하던데요. 반드시 이 남자가 아니면 나는 죽는다. 죽긴 왜 죽어~ 안 죽던데요. 뭘 그래요.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반드시라는 말. 이제쯤 철이 났으면 그만 지워버리세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 말입니다.

 

또 무고(毋固)입니다. 자기의 판단에 집착하지 마세요. 내가 가진 생각에 집착하기 생각하면 아주 인생이 망가지고 끝나고 맙니다.

 

마지막에 무아(無我)입니다. 자기 사정만 생각하지 마세요. 내 생각, 내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부터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이 공자의 한평생 지녔던 가슴 깊이 있는 철학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집착했어요. 오랫동안 해묵은 것, 이것이 이제 와서 노출되는 시간이었더란 말이에요. 여러분, 깊이 생각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소유에 대한 욕망, 명예와 지식과 안일이 있는데 뺄 수 없는 것이 안일입니다.

 

Easy going. 편하게 얻으려는 것. 편하게 하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성취, 이 생각이 속에 깔려 있을 때 어느 사이에 어느 사이에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버리더라 그 말이에요. 값싼 동정에 말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지 마세요. ,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만류하는 것, 십자가를 만류하는 마음, 동정이죠. 그래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늘 이런 말을 씁니다. "값싼 은혜"라고.

 

여러분, 은혜는 귀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과정은 고난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없이 은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소중한 것이로되 많은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그 은혜에 들어갑니다.

 

은혜를 내가 소유할 수가 있는 것. 내가 내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 "그리 마옵소서" 하고 동정을 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요. 그런 일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왜요? 아마도 이랬던 것 같아요. 베드로가 생각하는 성경, 구약 성경의 문맥 속에 보면 영광의 메시야가 있어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있어요.

 

자기가 아는 성경 해석 구약 콘텍스트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신다면 그는 영광의 메시아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자라고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런고로 '당신은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런 고난은 없을 것입니다' 하는 얘기 같습니다.

 

또 하나는 그저 그리스도의 인기를 말하는 것 같아요. '지금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히 높은데 십자가라니요. 불결하게……,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또 있지요. '예수님, 예수님께만 있는 이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병자를 고치고 죽을 자를 살리는 능력이 거기에 있고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이 거기에 있는데 아, 그 능력 그 귀하고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십자가라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능력을 가지고 왜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베드로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본다면 베드로의 생각에 '내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십자가를 진다면 내가 대신지지, 내가 충성하지, 아이고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베드로의 충성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깊고 깊은 곳에는 정욕이 있었고, 세속적 출세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 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고난 없는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순교 없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리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듯하면서, 자기의 일, 남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 자기 사랑입니다.

 

여러분 가정교육 때문에 시달립니까? 저는 이 나이에 와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면 가정교육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문제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거예요.

 

자기 명예,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 이걸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이 안 되는 거예요. 정말로 사랑하면 짝사랑은 없습니다. 문제는 참사랑이 아니라는데 문제예요. ?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내게 돌아오는 걸 먼저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이것이 사랑의 속성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생각하는 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더 큰 일, 더 위대한 일, 엄청난 일, 하나님의 사역, 나라가 이루어지는 만백성을 구원하는 이 엄청난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하고 자기 출세 생각했더라는 겁니다. 그런고로 베드로는 사탄입니다.

 

그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깊이 생각하십시다. 자기희생이 어렵습니까? 그건 참사랑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이 순조로워야 합니다. 여러분, 어느 땐가 한번 참으로 사랑한 때가 있었겠지요? 그 때는 어땠습니까?

 

이대로 죽어도 좋다. 그런 때가 한 번은 있었나요? 그런데 그게 오래가지를 못했지. 이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그저 발이라도 닦고 그저 생명이라도 바치겠다. 뭐든지, 뭐든지. 그런 자기희생, 그것이 순조로워야 됩니다. 편안하게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힘들구만요. 그것은 참사랑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를 따랐습니다. 자기 딴에는 직업을 버렸고, 가정을 버렸고, 전 생애를 걸고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내 영광을 위해 따랐습니다. 내게 돌아오는 세속적 명예를 위해서 예수를 쫓아가고 있었더란 것입니다.

 

그가 그리하고 있는 동안 그를 언제든지 사탄의 그 궤계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어요. 십자가를 이해할 수도 없고, 따라서 부활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내 제자가 되려거든 나와 함께 내 영광에 동참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오랫동안 주를 따랐습니다. 다 버리고 주를 따르는 것처럼 주를 따랐습니다. 정말로 주를 사랑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달을 위했던 것 이 모든 것 깊이 잠재해 있는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이 모든 악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제 남은 해는 정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찬송하며 주의 길을 함께 가도록 하시고 주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의 영광에 함께하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기 의 끊기- 베드로 /16:18-24/26:75/21:17/ 박영선목사

2015-07-30 10:45:14

 

 

앞 시간에서 보셨듯이,

성경이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신앙의 모델을 삼지 않고,

다윗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이 조명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짓겠다 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답이었죠.

‘(오히려) 내가 네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다윗의 왕권의 영원함과 승리함이

다윗의 어떤 것, 그의 능력이나 믿음에도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그런 일을 작정하시고,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안에 가진 남다른 종교심, 남다른 신앙심에 의하여

성경이 그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안에 죄만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용서하심의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가.. 의 본보기로

다윗이 서있다.. 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이 시간에 확인할 베드로에 있어서나

(다음 시간에 살펴 볼) 바울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모든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 내용도

베드로가 어떻게 베드로가 되는가.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이,

베드로의 생애 속에서 어떻게 그대로 반복하여 강조되는가를 확인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천국 열쇠를 주어 매고/ 풀고의 권리까지 교회에 주었습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교회가 선다고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사실 위에, 교회가 섭니다.

 

이것하고는 다릅니다.

베드로의 불같은 고백 위에 서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진심과 헌신과 열정에 서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베드로의 믿음 위에도 서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한 고백의 사실, 예수, 그는 메시아며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 위에 교회가 섭니다.

 

예수께서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인 사실 위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의 남다른 헌신 위에 서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앞 시간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으로 다윗을 만들지 말고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무너진 다윗의 깨우침,

우리는 죄의 종자입니다. 주께서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않습니다.’와 연결됩니다.

 

이 사건에서의 초점은 교회를 예수님이 세웠다. 하는 것과 함께

그것은 예수의 누구 되심,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열심/헌신/순수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걸 증명이나 하듯이

베드로가 그런 놀라운 고백을 한 후에

방금 넘어지고,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21절에,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죠.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죽도록 내가 놔두지 않겠습니다.’ 이것이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라고 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그의 고백이

맞는 고백이면서도,

그가 기대한 그 고백의 핵심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해방자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해방자이기를 바랬다는 것이 여기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베드로(인간)의 헌신, 순수함, 결심, 신앙고백 위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예수께서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인 사실 위에, 교회를 세웁니다.

라는 사실을, 16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22장으로 가 봅시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또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베드로의 자기 의가 깨어지는 사건들이, 이렇게 전개되어집니다.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고

제자들은 누구 공이 더 크냐를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때 예수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는 청천병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22:31~32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한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대표로 해서 하셨고,

사실 따져보면 제자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믿음의 핵심이 빗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같이 동행한 제자들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이 실제로 잡혀가자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승리를 할 것이고

그때 누가 더 큰 상을 받을까 외에는 모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탄이 내달라고 할 만하죠.

다만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늘 일종의 대표자입니다.

사단의 청구를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랍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3

 

그러니까 아까 마16장에서 볼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충성의 다짐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34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특별한 진심과 열심을 가지고, 주를 편들며 충성을 약속하고 있는데도

주께서 이 세 번 부인하는 이 실수, 실패를 방치하십니다.

 

심지어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한 것을 거절하시면서도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놓아두셨습니다. 참 의아로운 일이죠.

 

26장에 가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75

 

운다는 것이 뭐죠?

소원은 있으되, 이룰 능력이 없을 때.. 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충성 서약은 진심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심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왜 필요했을까요?

베드로는 조금 더 멋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베드로를 영웅시하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영웅화 합니다. 남다른 사람이라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대표적인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우리는 사실 성경이 말 하는 대로 쫓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성경 속에 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위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을 자신의 실력으로 이룰 자가 없으며

죄 아닌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누구든 윤리 도덕적으로 꽤 깨끗한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라는 것은, 또는 선, 또는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며 화목 되어 있지 않으며 연결 되어 있지 않으면 죄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의 이전의 문제죠.

 

베드로에게서도 확인하는 것이 뭐냐 하면

베드로가 가진 남다른 열심 때문에, 그가 제자가 된 것이나, 그가 쓸모 있게 되었다..

성경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다른 자들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쓰셨기 때문에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썼다라는 것은 그들이 남달라서, 유용했다, 쓸모 있었다..

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면 그가 아무리 못났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전달되는 한 모든 능력들이 결과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마치 그 일을 만들어 낸 것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차단하려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21장으로 가 보시면

이 모든 일의 결론이 이렇게 납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이, 요한복음 2115절 이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시는 것으로 마감이 됩니다.

 

이 내용은 물론 베드로의 세 번 부인 때문에,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키는 사건으로서, 그 첫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첫 질문이 이것이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 것은 진심입니다. 충성도 진심입니다.

그 때는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용감하게, 자기 의에 가득 차서 고백했지만,

 

지금 요21장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내용상 다른 고백을 하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7

뭐가 달라졌나요?

제가 진심이 있사오나, 능력은 없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죠.

자기 의가 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진심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고, 진심을 결실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자기 의의 깨어짐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상의 여러분 교회 안에서 믿음의 이웃들과 보세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런 비판적 마음이 생기면, 여러분은 신앙을 개뿔도 모르시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의가 죽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한 말을 하고, 잘 가르쳐주면 알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도 없고, 알아도 행하지 못합니다.

행해도, 정당한 결실로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하여, 굉장히 자존심상해 하고는 합니다만,

다윗, 베드로, (다음 시간에 살펴 볼) 바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실상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완성 시키려고 하십니다.

베드로서식으로 이야기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앙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자꾸 나를 좌절시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의 진심, 능력, 열정 까지도 하나님이 좌절시키는 이유는

그것으로 대신 채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채우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철저히 하는 일보다 존재에 우선합니다.

됨됨이가 우선하고

그것이 인생 상의 모든 삶의 보존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 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드러난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는가를, 배웁니다.

 

다윗에게 그랬다시피

베드로에게도, 베드로의 진심, 헌신, 충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왜요? 우리가 하나님이 의도하는 구원의 완성과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주시려는 것들로 채워서 완성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

 

그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성경에 다윗의 생애나,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증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후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으로 가봅시다.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나오고

그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제 갑작스러운 설교를 하게 되었죠.

 

3:11~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고백을 보면, 베드로가 확연히 달라졌지요?

이전에는 베드로가 자신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에 어떤 조그마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즉 이제는, 자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만이 시작이고 끝이며, 모든 것으로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베드로가 한 경험(자기 의의 깨어짐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을 가졌으니

당연히 세상적인 일에서 승리하고 형통하게 되리라..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제 이루시는 일에,

내가 쓸모 있기를 바라고,

나의 열심과 헌신을, 당연히 하나님이 바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이렇게 잘못해도, 신앙생활이 꽤 괜찮게 가기도 합니다.

얼추 비슷하게 가지만,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꼭 우리가 신앙에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자기 의라는 것이 붙어 다닙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 이렇게 심판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너는 왜 안 하냐. 너는 왜 그 꼴이냐.’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충만한 것이죠.

 

우리 중에 누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는 자가 있으며

우리 중에 누가 자기 진심을 바쳐서, 뭘 이룬 것이 있습니까.(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인데도

베드로를 통해서, 성경이 확인 시키고

다윗을 통해서 확인 시킨 이 일을.. 성도들은 늘 오해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식으로 경험을 하느냐 하면

예수를 만나고, 구원함을 얻고, 열심을 가지고..

그 때로부터 사실 다윗의 경험과 베드로의 경험을 하는 꼴이 되죠.

 

(신앙에 열심 있고, 믿음 있는 자들이.. 먼저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져서, 자기 의가 깨어지는 것이.. 오히려 은총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신앙의 가장 중요한 표준은

누가 더 많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가.

누가 더 많이 그리스도께 의지하는가.. 하는 싸움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실 일은 다 해주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주를 위해서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지없이 실패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뜻밖의 모든 성도들이 경험하는 신앙의 현실은 무엇이냐 하면..

좌절이에요. 그리고 실패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느냐 하면.. 절망하게 되요.

내가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이 생각을 하죠.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이 내 진심을 안 받아주실까?’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고백에서 본 것과 똑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혈서 쓰는 것과 같은 정열이 있어서,

그래서 내가 주를 위해서 다 할 테니, 주는 가만히 계십시오.’

그렇게 했다가, 뭐라고 욕을 먹는다고요? 사탄이라고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 결론이 뭐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지니라.’ 16:24

그러니까 신앙은 결국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처음 하게 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구원 받은 신자의 현실의 승리를 주시지 않는가?

죄에 대한 승리를 왜 주시지 않는가?

죄에 대하여 나는 왜 지는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자기 의를 꺾기 위해서입니다.

이 자기 의를 꺾는 싸움이야말로 다윗에게 나타난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베드로에게서도 나타나는 제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반복하지만

마태복음 5장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있다. 라는 성경의 표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고,

스스로 의로운 행동을 만족스럽게 할 자가 없어서

목 말라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을 소원하는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고

자신의 파산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놀라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분명히 어딘가 열심히 부족했다. 어딘가 진심이 부족했다. 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금식기도를 들어가거나, 산 기도를 들어가거나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거나 하는 열심과 진심을 더 치열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감동할 때까지요.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뭐였다고요?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을 내려놓으라고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는 생각을 버리시고 무엇을 하라고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도우심을 구하라고요.

 

 

베드로전서 1장으로 가봅시다. (중략)

 

마치는 말.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절망과 좌절입니다.

 

여러분들의 절망과 좌절은, 여러분의 신앙적 열심과 진지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행하는 일과

여러분의 욕심내는 것이, 초점이 달라서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왜 필요 했는지 기억하셔서

사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 제대로 지금 인도하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번듯한 신앙의 승리 한 번 못했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모든 실패 속에서 더 자기를 부수는, 더 자기를 부인하는,

마태복음 1624절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을 완성해나가는, 신자의 신앙이 진전이요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하는 올바른 이해로

여러분이 자랑할 것 없어 보이는 신앙의 현실이

사실은 하나님의 귀한 인도하심 속에 있고 인도함을 받아 자라나가고 있는 과정인 것을

꼭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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