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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마태복음 설교 모음

마태복음 27장 45 - 56절 설교 모음 (고난주간)

by Jessi J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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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아이러니 /27:39-44/ 이재훈 목사

2023-12-28 08:05:40

 

우리가 믿는 복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빠져있어 진노의 자녀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음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하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십자가가 삶의 중심이 되고, 원리가 되며,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았던 바울처럼 살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의 여정에서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에 가담했던 로마 군병들, 사형을 언도했던 본디오 빌라도, 빌라도를 압박했던 유대 지도자들, 지나가는 군중들 모두 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특히 로마 군병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내뱉은 조롱의 말들이 아이러니로 나타납니다.

 

아이러니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 시치미를 뚝 떼다’, ‘위장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르고 무지하게 내뱉은 말들이 그대로 나타날 때,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 실제로 나타났을 때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오늘은 세 가지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난 전체가 그것을 나타내지만, 오늘은 <마태복음> 28장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왕이라고 조롱받으셨던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다

 

첫째, 군병들에 의해서 왕이라고 조롱받으셨던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또 가시로 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는 그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의 왕, 만세!’ 그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습니다”(28~30).

 

27절 이하에 나타난 로마 군병들의 행동은 평상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총독 관저 앞으로 들어오자 모든 군병이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마치 왕이 입는 화려한 가운처럼 자주색 옷을 입히고, 왕관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가시로 만들어서 씌우고, 왕이 휘두르는 홀과 같은 갈대를 들게 하고, 모두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었습니다. 마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이 화려한 옷과 홀, 왕관을 쓴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평소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수에게는 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진정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그분이 진정 세상의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왕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 위에 죄패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모든 죄수의 죄목을 붙여놓는 것입니다. 그 죄패를 정하는 책임은 빌라도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 죄패는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만들어서 당시 모든 사람이 지나가면서 죄명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죄패에 이렇게 써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다.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거절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였습니다.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죄패를 쓴 것일까요?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칭이라고 해야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써달라고 했는데, 빌라도는 그것을 거절하고, 자칭이라고 쓰지 않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자칭이라고 쓰면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되지만, ‘자칭이라는 말을 뺌으로써 유대 민족 전체를 조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칭이 아닌 실제 유대인의 왕처럼 만듦으로써 봐라. 이것이 유대인의 왕의 종말이다. 이 나라의 왕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가 되었으니 유대 민족은 얼마나 형편없는 민족인가라고 조롱하고 모욕하기 위해서 자칭이라는 말을 뺀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그 머리에 쓴 죄패대로 그분이 왕이셨음이 증거되었습니다. 모든 구체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아이러니로 나타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패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로 썼지만, 그 또한 하나의 아이러니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둘째, 다른 이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고 조롱받았던 예수님은 실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니 어디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어 주겠다’”(41~42).

 

유대 지도자들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병자를 고치는 능력, 예수님의 모든 교훈의 영향력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또한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니 어디 한 번 내려와 보라지하는 것도 조롱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처럼 유대의 지도자들도 아이러니를 만들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으로써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능력을 보여주셨다면, 그는 다른 이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한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만 보면 십자가의 죽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어서 우리 모두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계획을 지지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가야바는 다른 속셈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날까 봐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로마 민족이 우리 민족을 완전히 제거할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하고, 선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포장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아야 한다고 지도자들을 거짓 선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 자체는 맞는 말입니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으로 우리 모두를 살게 한 것이 얼마나 유익합니까?

 

그는 거짓으로 자신의 죄를 포장하고, 예수님을 빨리 제거함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거짓 선동이 실제로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음으로 그들을 살렸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도 십자가의 아이러니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셨다

 

셋째, 하나님의 버리심을 절규했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구원하시겠지.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었다”(43)

 

오후 3시쯤 돼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46).

 

세 번째 아이러니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죽임 당하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가리켜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나보다’, ‘어떤 기적을 일으키려나보다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지금까지 순종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실제로 버리신 사건이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 쏟아 부은 저주의 사건이기에 하나님은 아들을 어둠 속에 버리시고, 죽음에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나를 버리시면 안 되는데 왜 버렸습니까?”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앞에 있는 내 하나님, 내 하나님‘”라는 말씀 속에는 버림 받는 시간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를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것은 하나님께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탄, 탄식,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아들을 버릴 만큼 놀랍고 크신 사랑이군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버리실 만큼 놀랍고 크신 사랑이시군요라는 의미입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부르짖음은 예수님을 버리실 만큼 이 모든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여전히 순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렇게 버리셨는데 어떻게 신뢰할까?‘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오해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조롱하고 쏟아낸 모든 말들을 가려내면 아이러니가 많이 나옵니다. “저가 성전을 헐고 3일만 짓는다고 한다는 조롱도 실제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로 새로운 성전을 3일 만에 지으셨습니다. 모든 아이러니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인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고 너를 구원했다.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너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은 언젠가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믿어야 할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뱉는 말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 말에 의해서 더 밝게 빛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진리셨기에 예수님을 모르고 내뱉은 이들의 조롱이 모두 아이러니로 나타나 예수님이 진정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모르기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모르기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편에 온전히 서 있다면,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조롱도 언젠가 그들의 삶 속에 아이러니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전도자로 바꾸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그분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아이러니로 나타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역사상 정말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도리어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뀐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아갈 때 놀랍게도 세상 가운데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십자가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십자가의 역설이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부활의 증인이 되다 /27:54, 28:1-10/ 김병삼목사

2019-05-03 03:59:58

 

수난주간 설교 6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 .

오늘 수난의 파사드는 에수님의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작품이 아주 역동적입니다. 앞으로 달려가는 말을 급히 세우고 있습니다. 말에 제동을 걸기 위해 고삐를 힘차게 잡고 있는 로마 군사와 급제동으로 인해 힘겹게 정지하려고 애쓰는 말의 모습니다.

 

그의 한 손에는 칼이 들려 있는데, 칼이 성전에 박혀 있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롱기누스입니다.

 

로마제국의 병사였던 롱기누스는 당시 심각한 백내장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님이었다는 설도 있다.) 골고다 언덕에서 그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순간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피가 그의 눈에 튀였고, 그의 눈이 감쪽같이 낫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한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 및 선교자로 기록됩니다. 롱기누스는 후에 카파도키아(터키)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오늘 작품을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적을 경험한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삶의 방향을 드라마틱하게 바꾸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급작스럽게 고삐를 당겼는지 말의 목이 틀어져 있고, 얼마나 힘 있게 고삐를 당기고 있는지 그의 몸이 들려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상징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그의 칼이 파밀리아 성당 벽에 박혀 있는 모습이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전에 칼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허리에 칼을 찔렀던 그의 과거 행적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54절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어떤 이유에서든지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일들을 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 사건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확신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를 믿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렇구나!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예배를 참석하고, 선한 일과 봉사를 하고, 말씀을 듣고 읽어도 십자가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자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만남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의 현장과 무덤에 있던 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부활을 생각하기 전 십자가 죽음의 현장을 잠시 되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는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량의 차이, 그리고 관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두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도 예수님의 수난의 이야기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23-27절에 보면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먼저 롱기누스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본다면, 십자가 아래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악역을 담당했던 로마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도 이 일이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누구 흔쾌히 나서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망나니들은 사람의 목을 치기 전에 술을 먹고, 총으로 사형을 시킬 때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총을 쏴서 사형을 집행해 누구 총에 맞아 죽었는지를 모르게 하고,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집행 할 때도 사형수의 눈을 보지 않도록 보자기를 씌우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 군인들 역시 명령을 받았으니 사형을 집행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왜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때리며 수치스럽게 했을까요?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거나 양민을 학살하기 전에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일부러 이성을 잃으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두려운 감정을 감추기 위해 과장된 일들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로마 군인들이 한 일은 시편 2218절에 예언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말씀을 이루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인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찔렀던 사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3일 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고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악한 짓을 하며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들도 십자가 아래서 변화를 받고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바로 그 핍박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어쩌면 로마 병정들의 변화야 말로 십자가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골고다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또 다른 두 개의 십자가에 두 명의 강도가 매달렸습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에 의하면 왼편의 강도는 게스타이라는 사람이고 우편의 강도는 데스마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두 명의 강도를 매달았을까요? 이런 예측이 가능합니다. 가능하면 예수님을 더 모욕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요. 당연히 죽어야 하는 강도와 함께 매달려야 예수님의 죽음을 정당화 하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의도한 대로,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모욕하고 죽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이 놀아도 교회에서 놀아야 소망이 있고, 나쁜 짓을 해도 교회와 믿음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나쁜 짓을 하거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도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자꾸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하지 말고, 가능하면 십자가 아래로 인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또 다른 사람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이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시는 그 길을 같이 걸었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그 아래에서 애통해 했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힌 후에도 찾아와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모든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이 복되도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시카고에서 공부하던 때, 마이클 조던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와서 시카고의 자랑인 불스3회 연속 우승을 했습니다. 그 당시 농구장 티켓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 경기를 보기 위해 밤을 새며 텐트를 치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애플에서 아이폰 신형을 출시하면 제일 먼저 사서 사용하려고 밤새 줄을 서서 매장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정도의 수고와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십자가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으로 가슴을 쥐어짰던 사람들.

그러고 보니 그 여인들은 다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인생이 변화됐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구나!

십자가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구나! 그 감격을 지니고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구나!

여인들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죠. 주님으로 인해 고침을 받았던 여인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베로니카는 열 두해를 혈루병으로 앓았던 여인이라고 전해 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하도 많아 누군지 명확하지 않지만, 향유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도 그들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5절 말씀.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겠다고 예언했지만 제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켰던 바로 이 여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일하게 그 자리를 지켰던 제자 사도 요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끝까지 지켰던 요한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켰던 자에게 사명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앞에선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 제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십자가를 외면할 때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우리들이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십자가를 지켜야 사명도 받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서 순교한 사람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니지만, 오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요?

 

제자들이 다 순교하고 바울도 순교한 후에 초대교회가 흔들릴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일컬음을 받으며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쓰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까지 초대교회를 지켰던 귀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부활은 돌이킴이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성 파밀리아 성당에서 수난의 파사드 작품 설명을 들으며 가장 은혜스럽게 듣고 감격했던 장면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롱기누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역동적인 모습의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상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멀었던 눈보다 더 큰 상처는 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칼로 예수님을 찔렀던 마음의 상처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자진의 구주로 고백했을 때, 그가 했던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깊은 아픔과 상처만큼이나 큰 은혜로 인해 그는 먼 터키 땅에서 선교사로 살다 순교까지 하게 됐을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여인들도 동일했습니다. 그 여인들 역시 상처흔적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죠.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았던, 귀신들렸던, 간음했던, 그 시대에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 시대에 누구에게도 치료받지 못했던 아프고 힘든 상처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회복되었던 간증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던 그 여인들로, 그리고 그 롱기누스와 같은 사람들은 부활의 현장 앞에서 그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돌이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단어인 돌이킴이 일회적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부활의 돌이킴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십자가의 상처와 부활의 흔적들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을 보다 제 눈에 띈 단어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7-9.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7 Then go quickly and tell his disciples: 'He has risen from the dead and is going ahead of you in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Now I have told you."

8 So the women hurried away from the tomb, afraid yet filled with joy, and ran to tell his disciples.

9 Suddenly Jesus met them. "Greetings," he said. They came to him, clasped his feet and worshiped him.

 

NIV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세요.

‘quickly’

‘hurried away from the tomb’

‘afraid yet filled with joy’

‘ran to tell his disciples’

‘suddenly’

‘came to him’

‘clasped his feet and worshiped him’

 

저에게는 부활의 그런 느낌입니다. 새벽에 일어난 정적인 일이 아니라, 무척이나 극적이고 역동적인 일입니다.

수난의 파사드인 롱기누스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급브레이크를 밟고 삶을 돌이키는 모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빈 무덤을 보고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하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분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이 좀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7.

, 어서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여라.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분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 너희는 거기서 그분을 뵐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내가 전하는 소식이다."

8-10.

여자들은 크게 놀라고 기쁨에 겨워,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무덤을 떠났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멈추어 세우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잘 있었느냐?”

 

여자들은 무릎을 꿇고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붙잡고 있구나!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여라. 거기서 내가 그들을 만나겠다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향하던 여인들의 발걸음을 갈릴리로 가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확인하러 온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기쁨이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하냐?’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걸음을 돌이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두려움이 평안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실망이 소망으로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각기 다른 체험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어떠하든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돌이킨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냐고 말입니다.

 

영수

출처: disciple 6월호 25p 오생락 목사(하늘평안교회)

 

초기 한국 교회사에 영수라는 직책이 있었다. 영수는 당시 조직화되지 않은 교회에서 교회를 관리하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경동제일교회에서 그 직책을 감당하던 엄영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직업은 왕손을 모시는 마부였다. 하루는 왕손을 모시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는 길에 나으리, 예수 믿으시죠.” 하고 전도를 했다. 이어 왕손이 물었다. “아니, 너는 예수를 믿느냐?” “, 그렇습니다. 3년 됐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마음이 너무 기쁩니다.”

 

그 말을 들은 왕손이 마부에게 빈정거렸다.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더냐?” 그때 엄영수가 대답했다.

나으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양반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 노릇을 잘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이 왕손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줬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고, 훗날 승동교회의 목사가 됐다고 한다.

 

부활,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신분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가치 있게 동참하는 우리들에게 부활은 어떻게 너희 인생을 돌이켜 살아갈 것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죠.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는 그의 책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문다는 것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렇죠.

넓은 문은 쉬운 길이고 좁은 분은 험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넓은 문이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좁은 문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따른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길을 가는 이유는, 그 길이 참 자유와 놀라운 생명력이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가치가 있는 것은 소비적인 인생이 아니라 생산적인 삶이기 때문이죠. ,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말씀이 정말 중요한 것은,

제자가 되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그 길이 쉽다고, 빨리 가는 지름길이라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2. 속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본 작품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말을 멈추고 있는 롱기누스의 모습니다. 그의 인생이 바뀌었는지 아닌지 겉모습을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가 입고 있는 군복,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찔렀던 칼, 그리고 타고 다니던 말에 앉은 모습이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인 자아가 어떻게 바뀌었느냐는 것이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는 이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덕이라는 가면을 쓴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좁은 문에 들어서서 어려운 길을 인내하며 가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삶을 향해 달려가는 말을 잡고 멈춰 서려는 힘겨운 노력과 아직 성화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안고 고뇌하는 삶에서 나오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란,

단순히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키던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의 54.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3. 오직 하나의 길을 향해.

말을 멈추는 롱기누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통해 우리는 또 하나 역동적인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말을 멈춰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마태복음 7장의 산상 수훈을 통해 주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은 말과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고백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롱기누스는 왜 그렇게 힘겹게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있을까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대변하고 있는 말이 가고 있는 방향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죠.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라고 믿었는데,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주님의 이름을 빌어 했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준비하던 아침에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잘못된 믿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졌던 믿음의 강점은 하나님을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와 반대가 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면 밀고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신념을 위한 헌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신념의 종이었다면 그는 이삭을 죽이지 말라는 천사의 음성을 마귀의 음성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큰 헌신과 확신이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그런데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순간에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들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결정한 고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초점을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는 것을 보시고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언제든지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꺾을 수 있었던 순종에 의해 증명된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신념을 아름답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신념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주님과 죽는 자리까지 가겠습니다를 옳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뭐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오로지 순종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내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맞추기 위해 인생의 고삐를 잡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의 뜻을 얼마나 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힘찬 롱기누스의 고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이 어떠해야 할지를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27:27-31/ 김병삼목사

2019-05-03 04:06:41

 

수난주간 설교 7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NIV] Matt 27:27-31

27 Then the governor's soldiers took Jesus into the Praetorium and gathered the whole company of soldiers around him.

28 They stripped him and put a scarlet robe on him,

29 and then twisted together a crown of thorns and set it on his head. They put a staff in his right hand and knelt in front of him and mocked him. "Hail, king of the Jews!" they said.

30 They spit on him, and took the staff and struck him on the head again and again.

31 After they had mocked him, they took off the robe and put his own clothes on him. Then they led him away to crucify him.

 

믿음이 있다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

오늘 본문 말씀과 성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 파사드 작품 중 하나인 베로니카의 수건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로마 병정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희롱을 당하시는 장면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가장 힘든 것은 그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많이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기적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시는 길에 누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켰던 사람들은 단지 여인들 몇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55-56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오늘의 주인공인 베로니카의 이름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행전]이라는 외경과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주님의 얼굴에 흐르던 땀을 닦아 주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닦았던 그녀의 손수건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선명하게 새겨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주위에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없었을까요?

그렇게 예수님을 열광하던 사람들의 믿음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던 사람들은 더 이상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 예수님께 흥미를 잃었습니다. 십자가의 현장에는 오로지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로니카의 수건은 바로 그런 인간들의 비 본질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작품을 보면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베로니카의 모습은 있지만 얼굴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얼굴이 아닐까요? 얼굴을 보아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미 베로니카가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고 합니다. 실례로,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성물로 베로니카의 수건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비라치는 수난의 파사드를 만들면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베로니카의 얼굴이나 그녀로 인해 만들어진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베로니카의 얼굴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그녀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수비라치는 베로니카의 옷에 예수님의 얼굴을 음각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흥미롭게 보았던 작품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어가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눈이 보는 사람을 따라온다는 것이죠.

베로니카의 얼굴은 비워놓고, 그녀의 옷에 예수님의 얼굴을 새겨놓으므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작품을 만든 의도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지켰고, 자신의 손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는 신실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은 베로니카의 믿음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가 믿음으로 행했던 일로 일어난 결과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풀어가기 위해 작품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로니카의 수건

베로니카의 얼굴 형체가 없는 이유는 수비라치가 너무나 깊은 슬픔에 젖어있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 흔적이 있는 수건을 들고 있는데, 이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준 수건에 예수님의 흔적이 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 성녀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그리스어로 승리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성녀 베로니카는 그리스도가 갈보리 산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행진을 할 때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땀을 닦아준 예루살렘의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았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손수건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카로 알려졌는데,‘베로는 라틴어로베라(, 진실한)’이고, ‘이카아이콘즉 성화상을 뜻하므로, 그녀의 이름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이란 뜻이 된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새겨진 예수의 눈이 음각으로 되어 있어서 관찰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눈이 따라오게 되는데 이는 예수가 늘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조각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베로니카 성녀의 얼굴을 없애서 성녀보다는 손수건에 드러난 예수의 얼굴에 눈길이 가게 한 것이라고도 한다.

 

위의 설명은 가톨릭 전승에 따른 것입니다. 천주교인들은 베로니카의 옷이 오늘날까지 바티칸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데, 그 옷은 가톨릭교회의 가장 가치 있는 교회 유산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베로니카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그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베로니카는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재 바티칸에서 보관 중인 이 옷이 특별한 이유는,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고난 뒤 그 옷에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와 땀으로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베로니카의 veil’로 불리는 이 옷은 8세기 초에 교황 요한 7세에 의해서 처음 언급되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베로니카의 veil은 대부분 중세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616, 교황 바울 5세는 베로니카의 veil이 유명해지자 모든 가품 제작을 금했습니다.

물론 교황의 이러한 결정은 veil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처사로 이해할 수 있겠죠. 중요한 것은 왜 이 veil이 유명해 지고 가짜들이 만들어 졌느냐는 것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Patrick Geary에 따르면, 중세 성물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당시 성물은 도시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는데, 이는 성물을 보기 위해 여행하는 수도사들이 귀중하거나 혹은 많은 양의 성물을 가지고 있는 도시를 순례 여행지로 삼았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많은 도시들이 성물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하였고, 심지어 인기가 떨어진 성물들을 다른 도시로 팔기도 했습니다. Geary, Patrick J. Furta Sacra: Thefts of Relics in the Central Middle Ag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c.1978.

 

아마도 베로니카보다 베로니카의 veil이 더 유명하게 되었던 것은 veilimprint된 예수님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안겨주고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중세시대에 가짜 유물들이 많이 제작된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이 유물을 우상처럼 의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베로니카의 믿음보다는 베로니카의 veil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베로니카는 멀리 떨어져서 주님을 바라보기만 했던 자들과는 달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베로니카의 ‘veil’은 그녀의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에 불과 합니다.

 

사람들은 베로니카의 수건을 보면서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 수건을 보면 우리에게도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의 결과에 집중할 때,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믿음을 놓치게 됩니다.

 

수비라치가 베로니카의 얼굴을 그려놓지 않은 이유를 잊는 것이죠. 아무리 그 기적이 훌륭하다 해도 주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데 말입니다.

사순절을 지나고 수난주간도 지나고 부활절도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부활의 감격을 경험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지, 그 고난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를 바라보며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인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이 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지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주위에 수없이 많이 걸려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걸어놓고 소원을 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던 주님의 아픔을 알고, 당신의 독생자에게 그 십자가를 지도록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수난의 파사드 베로니카의 수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십자가 앞에 내가 서 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 조롱하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 앞에 그 십자가가 서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늘 그런 도전을 받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 박는 무리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이 우리들 자신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때문에 가시관을 쓰시고, 희롱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갈대로 머리를 맞으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행하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 기념 주석]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이 홍포는 로마 군인들이 쓰고 있던 망토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군인들은 예수에게 홍포를 입힘으로써 군인으로 만들었다. 이제 군인 예수는 그에게 몰려든 군대를 이끌고 유대인의 왕이 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예수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었다. ‘너를 무장시켰고 군대도 모았으니, 어디 한 번 왕으로 궐기해 보시지라는 모욕적인 뜻이 담겨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가시관을 씌웠다는 것은 계속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예수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관을 가시나무로 만든 것은 가시가 광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광채 나는 관을 씌움으로써 그를 왕처럼 분장시킨 것이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갈대를 오른손에 잡게 한 것은 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하기 위한 것이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두 가지를 독자에게 원한다.

 

하나는 예수의 눈물겨운 수욕의 장면을 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이야기 속에서 큰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무지한 로마 군인들이 몰라서 예수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고 있지만, 예수는 홍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시고 임금으로서의 홀을 드신 진정한 왕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무렵에 어떤 목사님이 했던 설교였던 것 같습니다. 유명한 장모이우 감독의 작품이 개막식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개막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십자가의 작품을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를 넘어 설 수 없다는 것이죠.

 

아무리 훌륭한 작품도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지고, 더 훌륭한 작품 앞에서 초라해 질 텐데,

하나님의 작품인 십자가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변하지 않는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2008년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중국은 굴기하는 나라를 자랑하고 싶겠지만, 그 자랑과 교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한없이 초라하고 무참하게 조롱당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그 십자가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감동과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절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가장 수치스런 모욕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주님의 얼굴이 영광스런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구경꾼처럼 치욕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멜 깁슨이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만들었을 때, 유대인 단체에서 심각하게 반발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있었던 유대인의 학살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우리 유대인들 때문이라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하여 멜 깁슨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깊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흉악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는 모습들 가운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애통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저는 2018년 고베 BTD를 인도하는 가운데 썼습니다. 일본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곡하게 하시도록 기도하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통곡하는 자들을 통해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통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애통함이 먼저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죄 사함은 착각이나 자의적 위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가 나가 설교할 때, 사도행전 319절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십자가 앞에 서있는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회개하고 애통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강하게 체험합니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비기독교적인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복음을 놓치고 있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죠.

 

깐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전도연 씨가 열연한 주인공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슬픔과 번민에 휩싸인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대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애가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선을 용서하러 왔다.”

 

고 하자 유괴범은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 후 영화는 내내 신애의 방황을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죄 사함 받았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믿음을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용서 받았다.’ 면서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고백 한 마디 없는 살인자, 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는 자가 임을 고백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37-1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질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7b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래전 옥한흠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기독교는 천박한 기독교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우리들에게 더 이상 눈물이 없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애통함이 없는 십자가는 천박한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애통함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우리의 신앙에서 객관화되고, 상대화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십자가의 진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왜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까요?

우리에게 죄가 들어와 더 이상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으면 죄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저희 아버지 김우영 목사님에 대해서 다른 분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30대에, 40대 초반에 부흥회를 하실 때 그렇게 하셨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는데, 이 십자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셨나 봐요.

 

설교하시다가 강대상에서 면도칼로 손바닥을 긋고, 수건을 부여잡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셨대요.

그리고 설교하다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전할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때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때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셨는데 제 마음에 뭐가 느껴졌는지 아세요? 어떻게 이 십자가를 전할까! 어떻게 이 십자가로 아파하는 것을 전할 수 있을까! 느끼셨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십자가로 누리는 결과들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 섰던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십자가로 설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아프고 힘든 겁니다. 왜 십자가 아래서 애통하고 십자가에서 왜 죽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를 잘 알아요. 죄 된 우리들에게 참 생명이 없구나! 죄 된 우리들에게 소망이 없구나! 죄 된 우리들이 이렇게 무기력하구나! 십자가 아래서 내가 죽지 않으면, 십자가와 함께 사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나 수난절을 기념하고 난 후 부활절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념에서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1207년 봄에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말을 타고 시골 길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정말 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지금 네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고, 혐오하던 모든 것이 달콤하고 더 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타고 가던 말이 놀라서 움직이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몇 발짝 앞에 심한 나환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문드러진 손에 돈을 쥐어주고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감정에 북받쳐 울었습니다.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자기가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그 날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주님이 그를 이기고 최고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선 내가 바로 주님을 조롱하던 자요,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는 애통함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조롱당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고백됩니다.

이사야 504-7절 말씀은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합니다.

 

4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6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이 대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아침마다 반복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수치와 수욕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당하고 참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버지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기 전에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하나님을 조롱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이사야는 이미 예언했던 것이죠.

 

오늘 우리는 말씀과 수난의 파사드를 통해 중요한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베로니카의 믿음, 그녀의 신실함을 보아야 합니다.

그녀의 믿음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그녀가 지켰던 그 자리를 말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우리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통곡하며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새롭게 살아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아파하는 것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긴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진정으로 맞이하며 승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새겨진 주님의 모습이 명확한 증거가 되었듯이,

그 기적에서 베로니카의 얼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우리를 통해 고통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끝까지 수치와 모욕을 참으셨던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우리가 비로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현상 /27:51-53

2015-10-07 19:43:45

 

성경을 보면, 약속이 참 많이 나온다. 신약과 구약이라는 말도, 약속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있었던 약속이 구약이고, 새롭게 주어진 약속이 신약이다. 성경을 보면, 그 안에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그 약속대로, 이 땅에 와서 활동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는, 격이 다르다. 사람의 약속은, 우선 믿을 수 없다. 환경에 따라, 입장에 따라, 사람에 따라, 약속이 늘 변화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약속은, 영속성이 없다. 결혼할 때, 얼마나 철석같이 약속하는가? 그런데 살다보면, 깨지는 경우가 많다.

 

돈을 빌려갈 때, 얼마나 철석같이 약속하는가? 그런데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목사안수를 받을 때, 뜨겁게 하나님 앞에 다짐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약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잊어버린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찬송을 부르며 서원했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다르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신실하다. 반드시 지킨다. 구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실 일들을, 예언적으로 기록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몇 가지 현상들이 일어났고, 부활할 때도 몇 가지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1. 성소 휘장이 찢어짐(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서, 둘이 되었다(15:38; 27:51).

 

누가는 성소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고 했다. 성소 휘장은, 소나 말이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을 때, 하나님은 두껍게 만들어진,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다.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21:23)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니라, 이와 같이 그가 내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성소 휘장으로, 죄 지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는 길을 막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열었다.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우리 예수님이, 몸을 찢고 죽으심으로, 이제는 어떤 죄인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이 되는 시대이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했다.

 

또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된 것은, 구약의 제사제도가 폐지되었음을 보여준다(13:2). 구약 시대에는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에,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구약 시대에는, 아론과 레위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친히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셨기에,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3:1).

 

구약시대에는 성막이나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오셨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기에,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예수님은 이전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 만에 이를 다시 세우리라!’고 말씀했다.

 

이 말은 구약시대의 성전 제도가 사라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전이 완성될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옛 언약시대의 종교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51)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성소 휘장이 찢어질 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다. 이 기록은 마태만 기록했다.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지진과 바위가 갈라진 일은,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을 나타낸다(왕상19:11, 29:6, 10:10, 3:16).

 

지진과 바위가 갈라진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준다.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심을 말한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18: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진과 바위를 깨뜨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니, 피난처와 산성이 된다. 사망권세를 깨뜨린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지진과 바위를 깨뜨린,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2. 죽은 자들이 살아남(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지진과 동시에 일어난, 다른 사건을 기록했다. 그때 무덤들이 열리고, 죽었던 많은 성도들이 일어났다고 했다.

 

앞에서 일어난 지진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문들이 열리게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의 무덤은 대부분, 천연동굴이나, 바위를 쪼개서 만든, 인공동굴이었다. 유대인은 이곳에, 시체를 안치하고 그 입구를 큰 돌로 막아놓았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잠자고 있던 수많은 성도들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망의 권세가 무너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잠자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준다.

 

죽은 자들이 일어난 사건은, 53절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일어났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사망의 권세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앞에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부활할 때, 죽은 자들의 몸이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나옴은, 예언된 일이다. (23:9-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초실절 때 요제로 드리는, 주요제물인 곡식은 첫 이삭 한 단(첫 이삭과 한 묶음)이었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첫 이삭이신 예수님과, 한 단 묶음인, 구약시대의 성도들까지 부활한다고 했다. 예수님이 부활 때,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할 때,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한 단 묶음으로 예표 되었던 성도들도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도들의 부활은, 성경에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에서는 이를 초실절이라 했다.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1)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승리가 가져다 준, 생명력을 상징한다(고전15:55-57). (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성도들이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음을 보여준다(4:8-9).

 

여기 언급된 성도들’(하기오이), 전승에 구약시대의 위인들,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하지만, 확증할 수 없기에, 그들이 구약시대의 위인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아마 이때 다시 살아났던 사람들은, 구약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중간기에 활약했던, 영적인 영웅들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위해 순교한, 경건한 성도들이었을 것이다. 그 때에 살아난 성도들은 생존했을 때, 메시야를 대망하던 경건한 성도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서, 그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생시에 그들이 가졌던 소망을, 성취해 주셨다.

 

이 일이 사실이었다면, 예수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은 초실절로, 이방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부활절을 기념한다. 그리스도는 안식일, 이튿날에 부활했다(23:11). 이는 지금의 주일에 해당한다.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태는 그때 일어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게르신) 후에 무덤에서, 나왔다고 소개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그 영향력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왔다.

 

 

원래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영생의 능력을 강조하려고, 시간적인 순서를 무시하고, 이 사건을 앞에 기록했다. 그때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온 성도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살아난 몸을 보였다.

 

이러한 일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부활 시에, 무덤에서 일어난 사람들을 본 목격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을 것이다. 마태도 이런 증인들을 목격한 사람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에게 가져온 축복은 크고 위대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망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사망의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을, 영생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능력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함으로, 신약교회가 폭발적으로 확장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죽은 자들을 살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세워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으로 부활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생활 현장으로 다시 들어가서,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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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 /82:1-5/27:51-53/ 이성희목사

2015-01-24 16:11:02

 

20085월 중국 쓰촨성에서 있었던 지진은 진도가 7.9로 가깝고 먼 나라들에게 큰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20101월의 아이티 지진은 진도가 7이었고, 20102월 칠레 콘셉시온의 지진은 진도가 무려 8.8이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점점 진도가 강한 지진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지진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의 진도가 6.2이었는데 이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지진들입니다.

 

화산의 활동도 빈번해졌습니다. 얼마 전의 아이슬란드 화산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유럽의 항공 대란이 일어날 만큼 화산은 많은 피해를 준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곳저곳에 활화산이 즐비합니다. 세계에는 활화산이 무려 850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80가 태평양 연안에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화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원주라는 분이 쓴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백두산이 10세기에 대폭발을 했다고 합니다. 한반도 전체가 1미터 높이의 화산분출물로 덮일 만큼 큰 폭발이었습니다. 백두산 폭발로 인한 화산재가 일본에까지 날아갔다고 하며, 심지어 발해의 멸망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기 79년 폼페이를 멸망하게 했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은 백두산 화산폭발에 비하면 장난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세계적 재난이 있지만 점점 강한 화산폭발과 지진은 가장 위협적이 될 것입니다. 지구의 화산폭발과 지진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환경변화에 따른 이상 징후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백두산의 화산폭발 징후는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진회수가 이전보다 10배가량 증가하였습니다. 천지의 지형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화산가스의 분출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백두산이 폭발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를 태평양 시대라고 합니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기구’(APEC)가 가장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환태평양이란 결국 지진과 화산대가 있는 지역입니다. 태평양 시대에 세계가 번창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번창한 태평양 연안국들이 재해로 멸망하는 것이 이것이 종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평양 연안국인 한국도 지진과 화산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성경에도 지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열왕기상서 19:11에는 호렙산의 엘리야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아모스 1:1에는 웃시야 시대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4:7에는 마지막 때의 징조로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7:51에는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6:26에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있을 때에 이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지진과 기근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땅의 흔들림은 말세의 징조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82편의 주제는 불의한 재판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재판장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불의하고 공의롭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땅의 터가 흔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땅이 흔들리는 것은 땅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의하고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관동대지진을 아실 것입니다. 192391일에 발생한 지진입니다. 그 때 얼마나 큰 규모의 지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어느 시인은 대지진을 보고 어머니 같은 대지의 반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관동대지진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려 재일동포 6,661명을 학살하였습니다. 땅이 흔들리면 사회가 불안합니다. 땅은 우리 생명의 근거입니다. 삶의 근거입니다. 이런 땅이 왜 흔들립니까?

 

첫째, 공의를 베풀지 않으므로 땅의 터가 흔들립니다.

 

시편 82:3에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여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라고 합니다. 이것이 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입니다. 2절에는 불공평한 판단이란 말이 있습니다. 재판의 본질은 공정성입니다. 재판의 공정성은 모든 권위와 공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장들이 공정성을 왜곡합니다. 이런 재판장들의 자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작은 차를 타고 가면 냉대를 받으므로 가급적 큰 차를 타고 가라고 합니다. 관공서에 갈 때는 꼭 양복을 입고 가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사람이 사는 곳이면 신분이나, 인종이나, 성별이나, 학력이나, 계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별의 차별보다 비만의 차별이 더 심하다고 합니다. 비만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별 것이 다 공의롭지 못한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모세가 지도자를 세울 때의 일입니다. 출애굽기 8:21에 보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때에 그 자격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고 합니다. 불의한 이익이란 무엇입니까? 뇌물입니다.

 

공정하지 못한 재물을 바라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롭게 못하고, 뇌물을 받고, 차별의식을 가진 자는 재판관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자격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은 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인 요엘과 아비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같지 않아서 지금도 그들은 타락한 지도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잠언 24:24에는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공의롭지 못한 재판은 저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죄가 되고, 강한 사람에게는 죄가 안 되는 고무줄 잣대는 결코 공의로운 사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공자는 3,000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하여 공자의 열 명의 수제자가 있었습니다. 수제자 중에 하나인 자공이 한번은 스승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이라고 하였습니다. 족식이란 풍족한 식사를 말하며 생활의 안정을 뜻합니다.

 

족병이란 풍족한 병사로 자주국방을 뜻합니다. 신이란 믿음 즉 국가의 공신력을 뜻합니다. 자공은 다시 묻습니다. “세 가지 중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병을 버리겠다”. “나머지 둘 중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식을 버리겠다. 신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공신력, 믿음, 공의가 없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공의가 없는 나라는 바로 서지 못합니다.

 

해방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구티에레즈는 건강한 영성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영혼을 세 가지로 먹여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공의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영혼을 원만하게 해주고 감사로 지켜 나가게 해주는 우리 삶의 여러 가지를 통해서 건강한 영성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의의 실천은 건강한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세요. 복을 주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야곱도 약은 데가 있고 바르지 못한 성품도 있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신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반드시 죽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지만 공의로움은 그 약속을 지키고 죽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노니 라고 하셨는데 복 받을 만하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저주를 받을만하면 반드시 저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0에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초를 두어 견고하게 하신 땅이 왜 흔들립니까? 인간이 불의하고 공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옳으심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이며 공정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마구 세상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오용합니다. 이런 인간의 잘못은 결국 우리 지구의 땅이 흔들리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받는 대가입니다. 땅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배워 살아야 합니다.

 

둘째,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터가 흔들립니다.

 

시편 82:5에는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라고 합니다. 땅의 터가 흔들리는 까닭은 백성들이 흑암 중에 왕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다 알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만물에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것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저희는 무지무각(無知無覺)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과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것입니다.

 

땅의 터가 흔들리는 것은 흑암 중에 왕래하니라는 말로 묘사합니다. ‘흑암은 무지(無知)나 불의, 또는 도덕적인 어두움을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고, 의로운데 둔하고, 도덕적인 기준을 상실하여 사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을 많이 얘기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안전사고는 반복됩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마비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도덕불감증이란 말을 쓰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가 도덕적으로 불감증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덕적 흑암 속에 살면서 도덕적 해이를 가지고 도덕적 불감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상태는 무질서했습니다. 왜 무질서했습니까? 흑암 때문입니다. 온 천지가 깜깜하니 질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질서는 흑암을 몰아냈습니다. 혼돈과 흑암이 창조 이전의 상태입니다. 창조 후에는 질서와 밝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므로 다시 혼돈과 흑암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최근의 성폭행 사건을 보세요. 나영이 사건과 같은 끔찍한 사건도 있습니다. 김길태 사건처럼 파렴치한 사건도 있습니다. 김수철 사건과 같이 철면피한 사건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10대 남자아이들이 여자 초등학생을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어린 아이들이 왜 이런 범죄를 저지를까요? 왜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줄을 잇는지요? 인터

 

넷 음란 사이트와 케이블 TV 등의 노출된 영상들을 통하여 아이들이 알 볼 것을 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모방심에서 그렇게 따라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추행범들은 아무리 잡아넣어도 안 됩니다. 화학적 거세로 해결될까요? 제가 볼 때는 근본적인 치유는 힘들다고 봅니다.

 

도덕의 붕괴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이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없습니다. 스승에 대한 공경심도 사라졌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배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무질서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도 없습니다.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적 기준이 무너졌습니다.

 

조나단 글로버의 인류: 20세기의 도덕사에 보면 20세기의 역사는 현대악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도덕적 고독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즉 의식 있는 소수가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지배적 양심으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도덕적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싸움입니다.

 

시편 11:3에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고 합니다. 악인 때문에 터가 무너지고, 무너지면 의인이 할 일이 없습니다. 의인들이 터가 무너지기 전에 터를, 기초를, 땅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자기별을 떠나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임금님의 별이었습니다. 임금은 내 가신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어린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의 생활이 따분해졌고 이내 작별인사를 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어린 왕자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할 테니 자기별에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합니다. 어린 왕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데 법무장관이 왜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너 자신을 재판해라. 남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기를 재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네가 훌륭히 자기를 재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참으로 현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내적 도덕률이 이 땅의 기초를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말세의 징조가 기록된 마태복음 24:7에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합니다. 기근과 지진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세의 징조입니다. 우리 시대를 보는 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결론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황청에 잡혀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교황이 직접 갈릴레오를 재판하였습니다. 교황은 시편 93: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을 들고 지동설이 성경에 비차된다고 하여 파문하였고 후에 사형하였습니다.

 

과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이 증명되자 교황청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구는 돌고 있고, 갈릴레오는 이미 죽었고, 교황은 잘못이 없다는 교황무오설이라는 교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머리가 좋은 추기경이 교황에게 얘기하여 이렇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제부터 지구는 돌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로는 통했던 이야기입니다.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불안입니다. 인간의 삶의 터전이 요동한다는 것은 사회적, 종교적 생존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땅이 흔들리는 것은 심리적 불안의 요소입니다. 땅이 흔들리는 것은 사회가 소요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면 약탈과 방화와 신앙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흑암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회복하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이 땅의 터를 만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27:27-44

2007-04-10 16:06:38

 

 

악역도 중요하다

 

8살 난 어린이를 유괴 살해한 파렴치범을 보며 지금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있습니다. 유괴살인 자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지만 아이를 유괴하자마자 산 채로 물에 던져 죽게 하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목소리를 이용해 마치 아이가 살아있는 듯 부모를 계속 협박한 것을 보면 정말 인면수심, 사람의 탈을 쓴 짐승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 유괴범이 한 살 난 아이까지 가진 가장이며 돈도 잘 벌면서 유흥비로 탕진한 돈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모두는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영화제작소라는 단체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관객이 선정한 영화사상 최고의 악당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악당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B급 영화는 주인공만 잘 생기고 멋지게 활약하면 되지만 완성도 높은 A급 영화를 만들려면 조연배우뿐 아니라 악역을 맡은 사람까지 연기가 빛나야 합니다. 악역이 정말 '저런 나쁜 놈' 소리 나올 정도로 연기를 해야 영화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화사상 가장 끔찍한 악역으로 인기 아닌 인기를 누린 악당은 누구일까 조사한 것인데 그 결과 쟁쟁한 악역들을 다 물리치고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온 한니발 렉터 박사가 1등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의 악역 연기가 정말 빛났지요. 2위는 영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3위는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악역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성경에서 최고의 악역은 누구인가?“ 묻는다면 1, 2, 3등은 누가 할 것 같습니까? 저는 1등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2등은 히브리인들을 핍박한 애굽의 바로 임금, 3등은 여성 중에는 유일하게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순위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이 고백되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1500년 이상 세계 수십억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이 구절을 외웁니다. 그러니 빌라도가 지옥에 가면 만날 1순위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디 빌라도뿐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 보면 참 여러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거나 돕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인들이요 기독교 사상 최고의 악역을 감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빌라도 총독과,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십자가 주변에 서서 주님을 조롱한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사주하고 사실상 이 일을 주도한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사형을 적극 지원한 헤롯 임금도 빠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악역을 담당하게 된 바라바(예수님 대신 풀려난 죄인이지요)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있습니다.

 

설교 첫머리에 악역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악역이 나쁜 역할 제대로 못 해주면 영화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명의 악역을 쓰고 계십니다. 물론 가룟 유다가 악역 중에 주연 역할을 맡았습니다. 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도 조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세 주에 걸쳐 가룟 유다와 제자들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악역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라도, 로마 군병, 유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 헤롯, 바라바, 두 강도들입니다. 사순절 기간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이 악역들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하는데 왜 하필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이냐?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여러분, 이 악역들이 결코 잘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말 나쁜 인간들'이구나 하고 분노하며 치를 떨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회개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 선 주역들을 살펴보면서 남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죄인 아닌가? 나는 오늘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바로 그 십자가 현장에 서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조롱한 죄인 아닌가?“를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오늘은 십자가 주변의 악역 중 두 사람만 다루지요. 제일 먼저 살펴볼 악역이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때론 빌라도가 참 억울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아니, 아마 제일 억울해 할 사람은 빌라도 자신일 것입니다. 아마 빌라도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면 이런 항변을 할 지 모릅니다. “아니, 한 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라는 말이야. 당신이 그 때 유대 총독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냐고?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인데 어떻게 바라바 대신 예수를 풀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억울하다고 말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빌라도의 이런 항변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대중의 요구와 위협 앞에서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언제든지 악이나 죄와도 타협할 사람입니다. 본문 19절에 빌라도의 아내가 자기 꿈에 대해 전하면서 죄 없는 예수님을 그냥 두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 빌라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경고하셨음에도 그는 악과 타협하고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라도는 본디 로마의 상류계급출신이 아니라 중류계급 출신 군인인데 부인 잘 만나서(빌라도의 부인은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사생아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라고 합니다) 귀족이 되고 유대의 총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성공과 이익에 민감한 법입니다. 늘 성공과 출세를 따라 살았겠지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았겠지요.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했겠지요. 아마 이런 습성 때문에 오늘도 군중들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도 이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무슨 똑똑한 사람인 양 생각합니다. 유연성 있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치켜세웁니다. 괜한 고집 부리다가 손해 보지 말고 세상의 흐름을 잘 따라가고 사람들의 요구에 적당하게 자신을 변신시키면서 살라고 말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들려준 하여가(何如歌)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얽혀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경고하셔도 무시하고 그 길로 갑니다. 오직 자기 성공과 이익을 위해 눈치를 보며 시류를 따르다가 그만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가 이 빌라도나 빌라도 같은 현실주의자, 타협주의자들을 보고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혹시 신앙적인 신념보다 현실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해 안 보려면 얼마든지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인 세계보다 육적인 이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빌라도 비난할 자격 없습니다. 나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세상과 벗 삼아 이리저리 얽혀 살면서 어떻게 빌라도를 비판합니까? 나도 대중의 비난과 따돌림이 무섭고, 그들의 요구가 부담스럽고, 그래서 손해 볼까 무서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빌라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15:15에서는 분명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리에게,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나님을 희생시킨다면, 또한 나 자신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빌라도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정몽주처럼 오늘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신앙의 단심가(丹心歌)를 부를 줄 알아야 빌라도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

 

두 번째 십자가 주변의 악역은 바로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군병들도 빌라도 이상으로 억울할지 모릅니다. 군병들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총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제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저야말로 정말 억울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 군병들 말이 맞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잔인하게 굴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 잔인하게 하라고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몹시 잔인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 박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27절부터 보십시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부터 희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그 앞에서 무릎 꿇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더니 다시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툭툭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요한복음) 모욕한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 갑니다. 35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한 줌이라도 자기들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는 모습입니다. 어떤 영화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망치로 못을 내려치는 이 군병들이 잔인하게 웃으면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안 나왔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 조롱하며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 이렇게 로마 군병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로마 군병보다 나은 사람이냐?“ 오늘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불의를 저지르지는 않습니까? 윗사람 명령이라 어쩔 수 없고, 부모님이 원하시니 어쩔 수 없고,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고, 세상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한다고요? 변명이 안 됩니다. 군병들도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시키지도 않은 조롱을 하며 자기를 만족시키고, 어쩔 수 없이 사형시킨다면서 옷 한 벌이라도 얻으려고 제비를 뽑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실은 내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 위해 얼마든지 손해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 이익 포기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주님 위해 안 하겠다고만 결심하면 가능합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오늘 나는 누구의 군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세상 사람들입니까? 빌라도나 로마 같은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마귀사탄의 군병 노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딤후 2:3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싫으면, 예수님의 군사 되기 싫고 고난도 받기 싫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세상의 종노릇 하던지, 세상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지, 마귀의 군사 노릇을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군병입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제가 좋아하는 렘브란트(Rembrandt)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그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서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많이 그렸고 그 중에도 십자가에 관한 작품을 참 많이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다>라는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십자가를 세우는 로마 병정들 사이에 이상하게도 베레모를 쓴 남자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세우고 있습니다. 참 안 어울리는 복장입니다만 이 사람은 바로 베레모를 쓴 화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니, 그 현장에 서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로마병정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병정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그림을 보는데 성지순례 갔을 때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본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이즈미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입니다. 이 서머나에는 순교자인 폴리캅 감독을 기념하여 세운 폴리캅 기념교회가 있고 그 안에 각종 벽화와 장식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유난히 페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제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폴리캅 감독의 화형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칼을 들고 폴리캅을 화형 시키는 무리들 뒤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이 밧줄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그림을 그린 페레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페레 역시 순교자 폴리캅을 생각하며 내가 그 화형 장소에 서 있었다고 자기 그림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아니, 페레는 한 술 더 떠서 아예 내가 그 순교자 폴리캅과 함께 화형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페레는 자신을 순교자와 함께 화형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내 자신도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들 중에 나도 들어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조롱하던 사람이 바로 나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병정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 136장 가사처럼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하고 물을 때 ,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병정으로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저도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고 인정할 때 진정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두 번째)/27:27-44

2007-04-10 16:05:42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오늘 주보를 보시면 알겠지만 설교제목이 지난주와 똑같습니다. 설교제목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본문도 똑같고 설교 후 부를 찬송도 똑같습니다. 다만 설교 중에 다룰 인물만 다릅니다. 지난주에는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 중에 빌라도 총독과 로마군병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어서 군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두 부류는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중들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 모두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요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분임을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나 하나님'' 아는 것이나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른가 하는 분이 있다면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한 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저런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등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에서 꽤 유명하다는 이 아무개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안식년이 되어 전국을 여행하고 다니던 중 주일이 되어 마침 어느 이름 모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듣자니 유난히도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식의 설교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듣던 중, 드디어 그 목사님 왈,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이 아무개 목사님도 잘 안다고 하더랍니다. 그 유명한 이 아무개 목사님이 난데,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것도 내가 바로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를 잘 안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하지만 모른 척 하고 예배 후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시무하며, 나이가 몇 살이고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지를 안다면 그 목사님을 아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 목사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을 잘 안다고 하면 적어도 서로 만나서 인사도 나누고 밥도 먹고, 나아가 삶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정도 나누는 그런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인격적 만남이 없는데 그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인지 잘 구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모른다고 하시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두 부류, 즉 군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 모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보는 많이 알고 지식적으로는 누구보다 많이 알았는지 모르지만 정작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입니까?

 

 

 

 

군중들

 

이제 첫 번째 부류를 살펴봅니다. 바로 군중들입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인들입니다(27:21~2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이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본문 39절부터 보면 이들은 지나가며 머리를 흔들면서(조롱하는 몸짓)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심하게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쓰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 유대인 군중들이 바로 앞서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어떤 행동을 하던 사람들입니까? 다음주일이 종려주일입니다만 이들은 불과 닷새 전만 해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환영하던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하던 유대인들이 이제 와서 태도가 돌변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치고, 조롱하는 자들로 바뀐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는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군중심리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군중 속에서 그 분위기에 한번 휩쓸리면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몰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들도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믿어서라기보다 상당수가 우르르 몰려가서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흥분하다가, 이번에는 못 박으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소리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는 지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설교 첫 머리에 설명한 것처럼 정말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기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금세 뜨거워졌다가 금세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서 믿는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휩쓸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학생회 때 여름수련회에 가서 다 같이 통성기도 하면 나도 왠지 은혜 받은 것처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련회 끝나고 며칠만 지나면 그 은혜 다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에 하던 습관과 생활로 되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은혜 받은 것처럼 생각된 것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위기나 군중심리로 예수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아야 참된 은혜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대와 생각과 다르면 언제든지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줄 구원자요 메시야인줄 알고 그토록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며칠 사이 예수님이 하는 행동이나 말을 살펴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원수 로마를 대항해 혁명을 일으키고 쳐부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말합니다. 원수를 엎어버리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토록 의지하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기대와 너무도 다른 메시야임을 깨닫고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유대인들처럼 나의 기대와 다른 하나님, 내 뜻대로 안 되는 예수님 때문에 실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혹 교회를 다니다가 실망했다며 안 나오던지 다른 종교로 가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분명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했는데, 교회 나오면 잘 된다고 했는데 자기 기대와 너무 달리 잘 안 되고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생각, 내 기대에 맞춰 따라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그런 종교 찾으신다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기대, 내 생각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기대와 생각에 맞춰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마음대로 예수님을 떠날 수도, 배신할 수도, 조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니다. 사명 문제입니다. 이 군중들, 이 유대인들은 그들 말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이지만 그 사명 감당 못해 버림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으로서 어떤 백성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만나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으면 결국 버림받고 맙니다. 나는 어떤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내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신실한 백성입니까?

 

 

 

 

유대종교지도자들

 

두 번째 부류는 바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입니다. 우선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알기로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레위지파 중에도 아론의 후손들만 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뽑았는데 어떻게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면에서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두 제사장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성전제사의 최고지위인 대제사장조차도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에 의해 언제든지 해임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안나스는 주후 6년에 로마 황제에 의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이 되었다가 9년 뒤인 주후 15년에 해임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몇 명의 대제사장이 임명된 후에 주후 18년부터 안나스의 조카이자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비록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해임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대제사장은 누구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하는 자리가 아니라 평생토록 감당하는 종신직이라고 여겼기에 비록 안나스가 대제사장직에서 해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대제사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의해 새로 임명받은 가야바가 공식적으로는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인인 안나스가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바로 이런 까닭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들과 함께 등장하는 '서기관'이란 율법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해석하는 전문적인 율법학자들이며, '장로들'이란 유대인의 최고기관인 공회(산헤드린)의 의원으로서 이스라엘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핵심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라고 하면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지도층의 사람들을 모두 열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형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 마태복음 26:3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사에 모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자고 모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를 이용해 은 삼십 냥을 주고 스승을 팔아넘기도록 회유하고 그 유다를 앞잡이 삼아 종들을 보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그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제일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사에서 예수님을 심문할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온갖 거짓증거들을 만들어 예수님을 모함하고 참람죄, 즉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 후에 누군가를 사형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재판하게 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서는 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희롱합니다. "너는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꼴좋다. 그렇게 나서더니만 지금 네 처지가 어떻게 되었나 봐라." 하는 뜻입니다.

 

,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이렇게 총동원 되어 한 마음으로 협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종교적 정치적 지위를 예수님이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종교적인 지도자로 대접 받고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며 누리며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이상한 설교를 하고 이상한 기적을 행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온 지도층이 마음을 합해 예수를 제거하는 데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예수님은 이들의 음모에 희생되고 만 것입니다. 둘째로 이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 특히 앞서 설명한 안나스와 가야바 같은 사람들은 과연 누구의 눈치를 보았겠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임명할 수도, 파면할 수도 있는 로마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도자로 떠받들어 주는 유대인들의 눈치도 보아야 했습니다. 이들이 정말 진정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당연히 사람이 아닌, 권력도 아닌 하나님의 눈치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로마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일만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로마의 하수인이며 백성들의 하수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군중들을 우매한 판단으로 멸망으로 몰아넣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3:1)는 말씀처럼 이들은 앞서 설명한 유대인 군중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 그만큼 지도자는 책임이 크고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는 백성들의 영원까지 좌우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주에 설명한 빌라도처럼, 또 오늘 말씀드린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처럼 자신의 이익과 자리를 지키는 데만 급급한 자들은 아닙니까? 오늘 내가 지키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지위, 지금 내가 누리는 좋은 것들과 특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악과 타협하고 얼마든지 앞장 서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또한 저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사로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지도자인가? 이 나라는, 우리 교회는 지금 어떤 지도자가 필요로 하는가? 우리 성도들이 교회의 영적지도자를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그 지도자가 바른 길로 가도록 기도하고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조롱하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희롱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보면 이 '희롱하다'는 말이 '엠파이조''비웃다, 조롱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낱말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이 본디 '무엇을 가지고 놀다, 이리저리 춤추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조롱하고 있는가? 십자가라는 방법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세상에서 어떤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조롱하다'는 원어의 뜻처럼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남을 '속이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낱말 뜻처럼 권력을 좇아 이리 저리 춤추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아슬아슬한 권력의 줄타기를 하며, 어느 장단에 춤추어야 할까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이쪽이 더 강해 보이면 그 장단에 춤추고, 저쪽이 좋아 보이면 얼마든지 그 장단에 춤추며 살았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내 권력과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라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자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자였습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주고 희생하는 삶을 살다가 지금 그 목숨까지 내주려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음껏 예수라는 자를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바보 같은 놈, 우리처럼 살아야지 왜 저렇게 바보같이 손해 보는 삶을 사는 거야?" 하며 십자가라는 방법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은 십자가를 부인하고 조롱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까?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지만 정작 우리의 처세술은 십자가와는 정반대의 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나도 지고 따라가야 할 대상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세 번째)/27:27-44

2007-04-10 16:05:01

 

(종려주일)

 

거기 너 있었는가?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저는 종려주일마다 머릿속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그려보곤 합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글씨만 읽을 수도 있고, 그림으로 그려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중에 성경을 상상력으로 읽는 방법이 참 좋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성경의 어떤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는 것인데 성경을 이렇게 읽으면 참 감동이 큽니다. 여러분도 이 시간 함께 해보시겠습니까? 특히 오늘 종려주일을 맞으면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많은 유대인들이 길거리에 서서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보세요.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가 136장도 바로 이런 상상력을 갖게 해주는 아주 탁월한 찬송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연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 "옛날에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때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그 부활의 현장에 서있었다고 고백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주를 그 무덤 속에 뉘일 때, 주가 그 무덤에서 나올 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가사입니까? 그런데 한글 가사도 좋지만 영어로 된 가사가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영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당신은 그들이 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거기 있었는가?" 저는 이 찬송을 쓴 사람이 특별한 영감을 받은 분이라고 생각해서 누가 작곡하고 누가 작사했나 살펴보니 곡과 가사 모두 Traditional Spiritual, 즉 흑인영가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끌려와 노예생활을 했던 흑인들의 한이 영감으로 승화(昇華)되어 이 놀라운 찬송을 만들어내고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겪은 그 고난과 억압을 분노로 폭발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영적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있기에 이 놀라운 영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체험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과 함께 영광 받는 체험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라바 : 주님 대신 살아나다

 

오늘은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 마지막 시간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빌라도와 로마병정, 군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이 두 부류도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악역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앞의 네 부류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든지,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우연히 연관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보면 우연인 듯 보이지만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 첫째가 바라바입니다. 오늘 본문 15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에게 잡혀 왔을 때 마침 예수님과 함께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또 한 명의 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별명이 바라바고 본명은 예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 보면 17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는데 마침 십자가형을 받을 두 죄수 이름이 다 예수였기 때문에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물을 때 두 사람을 구분해서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바라바 예수를 놓아주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마태복음은 이 바라바가 어떤 죄를 지은 죄인인지 설명하지 않지만 16절에 보면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 바라바라는 자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죄수였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은 죄수 길래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죄수였는가? 그 답은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나옵니다. 마가복음 15:7은 이 바라바가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라바를 '강도'라고 설명합니다. 즉 살인강도는 살인강도인데 단순히 돈을 빼앗으려고 남을 죽인 강도가 아니라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강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바라바가 당시의 셀롯(Zelotes) 당원이었다고 봅니다. 성경은 이들을 '열심당원'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정당을 뜻합니다. 이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히 로마에 대항해 폭력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옷 속에 칼을 품고 다니면서 로마사람뿐 아니라 로마에 협력하는 매국노 유대인들도 살해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바나바 역시 열심당원으로 누군가를 살해했다가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아무나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반역자들 수준의 죄수만 십자가에 달아 죽였기 때문에 이 바라바도 여느 평범한 살인강도가 아니라 바로 열심당원 테러리스트였고 그에 대한 소문이 유대인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감옥 속에서 유명해진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안중근, 이봉창 의사 같은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이 유명한 독립투사요 혁명열사인 바라바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본문 15절로 다시 돌아가면 당시 명절 때 총독이 유대인들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때마침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은 죄 없다고 생각되는 예수님을 놓아주기 원했지만 워낙 유대인들의 반발이 거세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날까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지요.

 

성경에는 바라바가 그저 예수님 대신 풀려났다는 것으로만 끝나고 다시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 첫 머리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사실 저도 이 바라바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바라바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스웨덴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라는 분이 예수님 대신 풀려난 죄인 바라바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설 <바라바>라는 작품을 써서 195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도 봤는지 모르지만 이 소설이 1962년에 유명한 배우 안소니 퀸을 주연으로 해서 <바라바>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살인 방화를 일삼다가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만 기다리고 있던 바라바는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어 사형을 모면하고 석방됩니다. 바라바는 자유를 얻었으나 도대체 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만 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으로 뛰어가서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며 감동을 받고 그 후에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 후 바라바는 평생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비록 이 소설 내용이 상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저도 충분히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일보 200731일자에 <현대판 바라바, 스즈키 히로유키 목사>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기사를 읽어드리지요. "누구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바닥인생도 다시 시작했는데,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일본 야쿠자 출신인 스즈키 히로유키(51) 목사의 말에는 힘이 넘쳤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와 다시 산 자의 기쁨이 가득했다. 스즈키 목사는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야쿠자 조직의 중간 보스로 카지노 두 곳을 경영한 소문난 도박꾼이요, 두 번이나 교도소 생활을 했고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였다. 그러던 그가 1989년 예수를 영접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이 대신 짊어진 십자가로 인해 풀려난 강도 바라바가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역자가 된다는 현대판 바라바 스토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정말 현대판 바라바 같은 사람이네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은 이 야쿠자 출신 일본인 목사가 바라바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바라바는 바로 '' 자신입니다. 왜냐? 정말로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살인죄수는 바라바 아닙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진짜 죄인은 바로 이 바라바인데 바라바 대신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바라바는 무죄로 풀려난 것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진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난데,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는 난데 주님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는 대신 풀려나고 살아난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 바라바가 바로 내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바라바를 보면서 무심코 지나가거나 "이런 죽일 놈이 있나?" 하고 느끼셨다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 대신 풀려난 이 죄인 바라바가 바로 너라고, 예수님은 바로 너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대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죽어야만 하는데 예수님 덕분에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피값 주고 사신 생명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내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내 모든 소유는 누구 것입니까? 내 안에는 과연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이 시간 결단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주님 것이라고, 내 평생 주님 위해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평생 만나는 사람마다 바라바처럼 이렇게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두 강도 : 주님과 함께 못 박히다

 

이제 마지막 악역들을 생각해 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함께 못 박힌 좌우편의 강도들입니다. 이 강도들 역시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바라바 같이 정치범 혹은 열심당원 같은 저항 운동가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름이나 신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성경에 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두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과 오른편에서 십자가에 달려 함께 처형당했는데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군중들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도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너처럼 바보 같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무기력하게 죽지는 않는다."고 조롱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래도 반란이라도 일으켜보고 사람이라도 죽이고 이렇게 처형당하지만 너는 뭐냐? 이 바보 같은 인생아!" 하고 조롱했을까요? 아무튼 이 강도들은 예수님의 양옆에서 비참하게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다 죽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가면 이 두 사람이 똑같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23:39을 보면 두 강도 중 하나는 정말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하며 조롱하다가 죽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맞냐고, 그렇다면 어디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강도는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비방하는 동료 죄수를 꾸짖는데 그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큰 죄를 지었지만 지금 이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만한 죄는커녕 아무런 죄도 없는 의로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름 없는 강도는 지금 중요한 핵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아무 죄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다른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이 죄수는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구원자로 이미 인정한 것이요, 그 분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도 구원해달라고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선포하십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나중이 아닙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다음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늘, 네가 신앙고백을 하고 나를 구세주로 인정한 그 순간,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는 비록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죽었지만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미 낙원을, 천국을 허락 받았습니다.

 

갈라디아 2:20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 강도는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내 믿음과 고백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낙원을 허락받았으니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고,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 내가 다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내 주인도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내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니 나는 이제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톰 휴스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해골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그날 세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죄를 위해 죽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죄 가운데 죽었는데, 예수님을 모욕하고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죽은 강도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는데, 그는 비록 이 땅에서 살날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영원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의 십자가, 나의 부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살펴본 바라바와 강도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반란도 일으키고 얼마든지 사람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구를 만납니까? 바라바는 자기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납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순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납니다. 물론 바라바는 십자가형을 모면했고 강도는 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두 사람이 똑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했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의 십자가, 내 영혼 속의 십자가입니다. 바라바와 강도 모두 주님이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체험을 했습니다. 똑같이 내 옛 자아가 죽고 옛사람이 죽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주님과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도 <바라바>라는 소설처럼 바라바도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이제 두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오직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살았습니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내 목적 이루기 위해 남도 죽이고 희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산 후에는 내 삶의 목적이 세상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이 체험을 한 후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을 한 것이요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이 체험을 하고 삶이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 체험이 정말 중요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거기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고, 예수님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처럼 내 인생이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참으로 체험하고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바로 여러분이 이런 체험을 하는 소중한 기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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