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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4:1 - 6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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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 생명 /14:1-6/ 이재훈 목사

2023-12-28 07:43:12

 

우리 인생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직면한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문화재 법으로 건물 외형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내부를 술집으로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고 해고 위협을 받는 일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공립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징계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밝힌 교수는 소수종교보호법에 보호를 받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런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배당이나 개인의 사생활에서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흐름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도 거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사립학교에서도 건학이념에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도록 많은 규제를 받습니다. 이런 현상이 최근에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수세기 동안 흘러온 흐름이 최악의 상황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진리와 권위로 받아들여졌던 모든 사실을 이성과 경험으로 의심하고 비판하는 문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회의와 의심이 전염병처럼 온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다음 세대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신앙보다 의심과 회의가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사상이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위치에 인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느낌은 어떤 것이든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념이 절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만큼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모순과 거짓, 앞뒤가 맞지 않는 사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을 규정해서 이름을 붙인다면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우리가 믿는 복음이 사실(fact)’의 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 사항인 가치(value)’의 세계라고 주장합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선택영역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각자 가치 있게 여기는 것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계시된 진리는 수많은 이데올로기, 마치 상점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 중에서 하나의 브랜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진리의 기준을 믿고 찾는 것은 독선적이고, 분열을 일으키며, 차별을 조장하는 태도라고 비난합니다.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고, 진리와 거짓의 구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거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다섯 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첫째, “어느 종교가 모두를 위한 절대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배신행위에 가깝다.” 둘째, “모든 종교는 같은 범주에 속하기에 궁극적으로는 같은 진리에 이를 수 있어서 표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하려는 소위 전도는 예의가 아니고 대화의 수준에 멈춰야 한다. 그것은 강요가 될 수 있고 심지어 폭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어떤 종교든 진리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하더라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만 주장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특히 공적 영역에서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누군가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이것이 나에게는 진리다라고 말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진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명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바로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항상 수많은 종교와 사상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구약과 신약,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와 사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는 유대교와 씨름해야 했고, 그 후에는 로마의 여러 종교와 사상, 고대 그리스 종교, 여러 종교의 도전과 씨름했습니다. 요즘은 이주로 인해서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원화된 세상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종교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며, 교회만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중세시대에 실패했습니다.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적 다원주의와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다원주의는 구별해야 합니다.

문화적 다원주의란 무엇입니까? 사회 안에 다양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무엇입니까? 종교 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각자의 선택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서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진리이고, 절대적인 진리인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같이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혹은 종교적 다원주의입니다. 이 근본적인 사회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사상을 우리가 규명하고 진단하지 않으면 휩쓸려 갑니다. 언어적인 화려함으로 성도들의 삶을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

 

예수님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가 출연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절에서 도마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고, 그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 곧 예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갈 것인지 둘 중 하나일 뿐이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가 맞는 것 같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양쪽에 설 수 없습니다. 둘 다 포함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명하게 구별되는 주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은 세상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고, 또 한편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있으며 그것이 곧 예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에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가치일 뿐입니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지 않고 계속 변한다면 어떻게 과학을 공부합니까?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일정한 속도를 대입해서 연구하지 않습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움직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언제나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거리에 따라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과 역사, 세상을 지탱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합니다. 과학의 영역에도 존재하듯이 우리의 삶과 역사에도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교계에서도 이 시대는 다원주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세상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도 전부 상대적으로 바꿔서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생각이지 이 시대는 아니라면서 성경도 다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퀴어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합법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그들에게 맞게 성경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시라고 선포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던 시대도 다원화된 세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시대와 그리스 시대 수많은 종교와 사상, 그 시대 다원적인 세계에서도 예수님은 유일한 주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세속 권력이 종교화돼서 황제를 큐리어스(주님)’이라고 불러야 했던 시대에 예수님이 주님이고 고백했던 이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흐름과 조류를 거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시대의 흐름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 교회가 세상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많이 안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회사업을 해야 한다고 결론 낸다면 저는 잘못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봉사에만 집중하면 세상이 흐름을 바꿀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순교의 각오로 이 시대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에 사로잡혀 휩쓸려 갈 때 유일한 진리가 있습니다.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유일한 생명이 있습니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세상에게 신뢰 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서 교회마저 참된 신앙고백을 희석시키고, 지켜야 할 진리를 포기하고, 질서를 내어 줘서는 안 됩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가 그래서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 성을 받아들였던 영국의 교회가 일주일에 평균 10개 정도 문을 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 생명 되셨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증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을 세속의 이념에 내어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견고하게 믿고, 주장하는가에 따라서 대한민국 성도들이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느냐 아니면 세속의 이념의 먹이가 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정말 중요한 해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교회가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먹이가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해라고 느낍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그 신앙고백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심판자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고, 십자가의 피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다시 살아나셔서 그 대적이 모두 항복할 때까지 지금 아버지 곁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죽으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B.C.A.D.로 구분하는 것은 그 영향력입니다.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대개 어떤 지도자든 살아 있을 때 영향력을 미치고, 죽고 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점점 사라집니다. 기념일은 있지만 그 영향력이 점점 쇠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향력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하심이 사실이고,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악을 이기는 승리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 고백을 개인의 가치 영역, 책 속에, 예배당 안에 가둬 버리면 우리는 이 세상의 거센 이념과 사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몸만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세속의 사상에 팔아넘긴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과 모든 판단에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굳게 믿고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6).

 

우리 모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신 그분께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분께 인도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15세기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수도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풀어썼습니다.

 

길이 없이 가는 곳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리가 없이 앎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명 없이 살아가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따라가야 될 길이며, 너희가 믿어야 할 진리이며, 너희가 소망해야 할 생명이다. 나는 침범할 수 없는 길이며, 흠이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가장 올바른 길이며, 진실로 옳은 진리이며, 축복된 생명이다. 너희가 나의 길에 거하고, 나의 진리를 안다면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붙잡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통화기에 어느 길로 가든지 꼭대기에만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어떤 길은 낭떠러지로 향하고, 어떤 길은 골짜기로 빠지고, 어떤 길은 막다른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진리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신학자들도 진리라는 단어가 분열을 시키기 때문에 사랑이란 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거짓을 믿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를 설명하는 대표적 예화가 있습니다.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인용하는 예화입니다.

 

어떤 인도의 왕이 기르는 코끼리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서로 코끼리를 만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아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몸통을 만졌습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면서 다리를 만진 사람이 , 코끼리는 엄청난 둔탁한 벽과 같다고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과 같다고 합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고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를 못하기 때문에 부분을 만지고, 부분을 말하는 것이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핵심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짚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틀렸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왕이 나옵니다.

 

코끼리인 줄 알고, 코끼리를 몇몇 부분만 알고 잘못 이야기한 것을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평가하는 왕이 있습니다. 틀리게 말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왕의 이야기는 싹 빼버리고,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고, 그 부분을 전부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전체를 알고, 전체를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모든 것을 판단하실 만왕의 왕이 계십니다. 교회가 절대적이라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왕이 계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세상 속에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가야 할 영원한 집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수많은 종교와 사상, 우상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분들을 지탱해주는 게 무엇입니까?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위로입니다.

 

아프리카에서 25년 사역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건강도 무너지고, 미래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은퇴한 그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귀국하는데, 그 배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항구에 배가 도착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을 환영하는 팡파르와 환영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부부를 환영하는 인파는 없었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낙심과 절망 속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남편 선교사가 아내에게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야. 우리는 선교지에서 수십 년 동안 생명을 다해서 사역을 했는데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고, 대통령은 여행을 다녀오는데 환영을 받는 거는 불공평한 일이야.” 낙심에 빠져 있는 선교사 아내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처와 아픔, 불평을 쏟아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고쳐주셨어. 나의 아픔, 불평을 쏟아냈더니 하나님께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주신 걸 느꼈어.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집에 도착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집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고,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유일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속입니다. 이 세상의 헛된 이데올로기와 다원주의에 속지 않고, 우리가 진정가야 할 영원한 집으로 확신 있게 걸어가십시오. 수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진리, 생명(2) /14:1-6/ 이재훈 목사

2023-12-28 07:48:17

 

올해 온누리교회의 영적 표어는 길, 진리, 생명입니다. 이 시대 세상을 주관하는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이념에 대해 이 말씀은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올 것을 아셨기에 이 말씀을 남겨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빼내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독교가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확신하지 않으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이 말씀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이 말씀이 참이기에 교회는 역사 속에 존재해 왔고, 이 말씀이 진리이기에 세상의 그 어떤 공격과 위협에도 교회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는 벌써 세상 속에 사라져야 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 이 말씀이 살아있는 진리,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는 것을 체험한 믿음의 선배들과 이 시대 사역자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말씀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 삶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꼽으라면 아버지입니다. 어떤 분은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은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합니다.

 

관련 통계도 있습니다. 미국의 ‘National Center for Fathering’이라는 단체에 의하면 미국에는 2천만 명이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가리켜 아버지 없는 전염병(Fatherless Epidemic)’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합니다. 청소년 시기 감옥에 간 사람의 85%가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나왔습니다. 문제 행동을 가진 어린이 85%, 약물 중독에 있는 사람 75%, 고등학교에서 중퇴하는 이들의 71%, 10대 임신하는 이들의 71%, 모든 노숙인과 가출 어린이의 90%, 청소년 자살의 63%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사회에서 심각하고,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Fatherless Home’입니다.

 

‘Fatherless’란 단순히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시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친 아버지인 경우입니다. 세계 역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무신론 사상가들의 대부분이 아버지와 심각한 문제에 빠진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 아버지들에게 질문하면 그들도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고 할 것입니다. 비슷한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조상 탓만 할까요? 아버지의 문제, 그 아버지의 아버지 문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의 문제일까요? 인류가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입니다. 입양된 사람들이 친부모를 간절히 찾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기도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고, 그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인류 전체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26, 15장에서 11, 16장에서 14, 17장에서 52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합하면 103번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는 호칭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위해서이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러 세상에 오셨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103번이나 사용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뜻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주셨고,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셔서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셔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때에 다시 오셔서 믿는 자들을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이루신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원래는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아들이기에 예수님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루실 일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아버지 집에 거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아버지로 부르며,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리 큰 상처와 아픔을 줬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고아로 자랐다 할지라도, 육신의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이 땅에서 주는 최고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오심, 이 땅에서 행하심, 떠나심, 다시 오심을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때,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운명을 결정짓는 일을 행하셨다는 의미가 바로 길, 진리, 생명이라는 세 단어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축복을 예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삼중적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과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었고, 아버지의 생명 안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 세 가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진리가 아닌 거짓을 따라 살게 되었고, 아버지의 생명이 아닌 육신의 자연적 생명에 갇혀 결국 죽음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렸고, 진리를 잃어버렸고,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행하신 일은 죄 가운데 처해있는 인류에게 필요한 세 가지 축복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인류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하는 상태라면 아버지 집 밖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집이란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현재 상태, 실존이라고 말하는 이 상태는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들어 주신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세 가지 비유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 양을 끝까지 찾아 와 기쁨을 나누었다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그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결국 찾아내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먼저 요구하고 아버지 집 밖으로 나가 방탕하게 살다가 먹을 것이 떨어져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상태에 이르러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쁨으로 그 아들을 맞아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연속적인 세 가지 비유에서 주시는 교훈도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교훈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목자에게는 양이 소중한데 그 양이 잃어버려져 있고, 여인에게 드라크마가 소중한데 드라크마를 모두 잃어버렸고,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소중한데 그 아들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죄 가운데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존재로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잃어버려진 상태이기에 인간에게 결핍이 있고, 근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있기 때문에, 잃어버려져 있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열심히 산 거 같은데 허무하고, 스스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루었어도 허무감이 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잃어버려진 것이 소중한 만큼 찾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그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의 양에 대한 사랑, 잃어버려진 양을 찾는 목자의 기쁨과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마음을 강조합니다. 아버지는 찾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달려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 번째 교훈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함께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연속적인 비유는 인류의 상태, 실존을 의미합니다. 초점은 세 번째 비유에 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찾듯이 아버지는 집을 떠난 인류를 찾고, 찾아오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드라크마를 찾듯이, 찾을 때까지 열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찾은 자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아버지 집 밖에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 그냥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아버지 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 회개한 흔적이 있습니까? 거짓말로 변명하고, 숨겼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 스스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자각과 이성적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게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 아버지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 회개는 인간 스스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유일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회개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길이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회개의 길입니다.

 

인류에게 진정 필요한 길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이 회개입니다. 회개가 가능하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이 예수님을 긍휼히 여겨 주는 주간이 돼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너희 자신과 너희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난당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불쌍해서 믿어주고, 예수님이 불쌍해서 교회 나와 준다면 신앙의 근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죽음이고 곧 나의 옛사람의 죽음임을 믿을 때 회개가 가능하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이제 아버지의 집에 예수님과 함께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갈라짐으로 히브리서 말씀처럼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길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회개의 길이 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진리

 

둘째, 인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남으로 진리를 잃어버렸고, 예수님이 바로 그 진리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버지 집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를 버림으로 거짓을 믿었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을 버리고,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짓말을 믿음으로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타락의 본질은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일컫는 말이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입니다. 탈진리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이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증거가 있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바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시대가 그것을 규정하고, 분석을 할 능력이 발달한 것뿐이지 태초 타락부터 그랬고,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스트 트루스는 진리를 버린 인간의 죄악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사실이 나왔는데도 믿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아무거나 믿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거나 무엇인가를 믿고 있습니다. 가훈을 믿든지, 과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믿든지, 어떤 책에서 나온 말을 믿든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인생철학을 믿든지, 무엇인가를 믿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짓의 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을 살펴보면 거짓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거짓말을 진짜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각한 인간의 질병은 바로 타락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잃어버렸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는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양심이 남아 있고, 윤리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본능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넣어 주신 진리의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윤리입니다. 인간의 윤리는 진리의 그림자입니다. 원래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우리는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 존재하고, 바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 아버지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윤리를 뛰어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보면 당시 그 어떤 법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합니다. 하나님 진리의 그림자를 율법에 담아서 보여주셨는데 세상 그 어떤 나라의 법전보다 탁월합니다. 십계명이 모든 윤리와 법전의 근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인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이 세상에서 많은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지혜로운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은 진리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이 없어도 예수님을 바르게 믿었던 믿음의 조상들에게 놀라운 영적 분별력이 있었기에 이 나라와 민족이 이처럼 번영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그분이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그분이 육신이 되셨기에 그분은 살아있는 진리이십니다. 그분이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지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세상에서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세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거하기에 양심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

 

셋째, 인류는 죄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이 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조치하신 것이 있습니다.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셨지만 두 번째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계속 먹으면 하나님이 영생하도록 계획하신 실과이기 때문에 타락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징벌로 그들이 죽음에 처하도록 하셨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획이 있으셨기에 타락한 상태,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의 실과 12그루가 나오는데 그것이 완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가 있는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습니다. 다시는 시험이 필요 없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래서 동산 밖으로 쫓아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적 생명만 의존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생명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인 조에(zoe)’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적 생명인 비오스(bios)’입니다. 자연을 의지해야만 하는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제한적인 자연을 의지해야 하는 생물학적 생명만 남았습니다. 자연적 생명에는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있습니다. 동물의 생명을 보면 본능과 자연 질서에 순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만큼은 땅에 딛고 있지만 우주를 탐험하고, 바다를 탐험하고, 자연 질서에 의존하면서도 자연 질서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연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연적 생명에 국한한 인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 아들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가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인류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되셨고, 사탄의 거짓에 속아 살아가는 인간에게 진리가 되어 주셨고,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얼마나 확신하느냐에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확신하고 체험하는 것은 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전하는 삶이 없다면 확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이 선교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이 진리, 이 생명, 이 길을 온 세상에 알리는데 힘을 다하는 온누리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원한 거처 /14:1-6/ 이동원 목사

2014-11-29 10:26:26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동네 한 구석진 마당이나 아니면 동네 학교 마당에 한 구획을 정하고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려 해가 저물 때까지 공놀이, 자치기, 줄넘기, 땅 뺏기, 숨박꼭질 게임을 하고 놀던 추억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놀이는 보통 우리 친구들 중 한 부모님의 출현으로 그 막을 내리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해가 졌다. 그만들 놀고 집으로 가거라저는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에이 씨하고 놀이의 중단을 항의하고 늘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한 친구의 모습이 추억의 영상에 떠오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는 사회 복지 시설(고아원)이 집이었던 친구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를 따뜻하게 마중할 아빠나 엄마가 없는 그 친구의 귀가는 별로 신바람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저에게는 또 하나의 상상의 영상이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인생의 놀이터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게임에 분주한 우리에게 저 하늘에 계신 분이

 

그만 놀고 집으로 오너라고 부르실 순간이 온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돌아갈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한 주간도 분주하게 세상살이를 하다가 이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 모두 분주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신일이 있는지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것은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더 빨리 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경쟁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루는 그가 제자들을 떠나 어디론가 가셔야 한다고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에게 물은 유명한 질문이 성경 요13:3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답이 바로 본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을 떠나 거하게 될 영원한 거처 곧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고자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마침내 도착할 영원한 거처(, 처소)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교훈하고 있을까요?

 

1. 이 영원한 거처는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천국의 교훈을 살펴보면 천국은 하나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소입니다. 천국의 본질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습니다. 성경은 천국은 의의 나라요 화평의 나라요 기쁨의 나라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의롭고 평화로운 기쁨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우리 인생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의로움과 화평과 기쁨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맛보는 천국 경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천국은 하나의 완벽한 장소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 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본문 2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오늘 우리는 발달된 현대 과학의 눈부신 진보를 목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은 창조주가 엿새 동안 창조한 만물의 신비한 경이로움의 지극히 적은 한 부분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요한복음서의 본문인데 요1장의 서문인

 

1:3에 보면 만물이 그(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자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자이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라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 세상을 떠나가신 이후 지금까지 준비하시는 천국은 얼마나 경이로운 장소이겠습니까.

 

유명한 설교가 스펄존 목사는 성경에 생각보다 천국에 대한 설명을 많이 제공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천국은 ''surprise kingdom''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서양에서 살다 보면 소위 ‘surprise party’라는 것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파티의 특성은 파티의 주인공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그들이 이 파티를 놀라움으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신 서프라이스 파티인 것입니다.

 

이런 경이의 나라, 영원한 거처를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선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여러분이 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신다면 여러분이 바로 이 영원한 거처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이 영원한 거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천국에서 일어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우리가 예수님과 다시 만난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거기서 그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여 파티를 준비하면 파티의 주인공보다도 파티를 준비한 이들이 더 흥분하며 그 순간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성경은 계속적으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함보다 하나님이 인생을 만나기를 더 소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생들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원하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년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요 문화부 장관을 지내신 이어령 선생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그의 인문학적 지성으로 때로는 반 기독교적 언어를 주저 않고 토로하며 종교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해석하던 그의 회심이어서 그의 세례는 사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딸의 투병과정에서 목격한 기적이 하나의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그가 인생의 성숙기에 들어서면서 경험한 지성의 한계가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기 전, 그러니까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발표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그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가를 우리는 헤아려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하나님 당신의 제단에/꽃 한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절 기억하시지 못하실 겁니다.그러나 하나님/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그리고 너무 적적 할 때 아주 가끔/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헤엄치게 하셨을 때/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새들이 일제히 날아 오를 때/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 자락을/이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무신론자의 시요 무신론자의 기도란 말입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구도자의 기도요, 구도자의 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이어령 선생을 만나러 오신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새겨주신 시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동일한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아십니까? 왜냐구요? 그가 준비하신 저 영원한 거처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3. 이 영원한 거처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수 있는 장소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런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곳으로 갈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의심많은 제자 도마는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유명한 본문 6절의 말씀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그의 나라인 영원한 거처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 1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던 한 선교사님이 정글속 오지 마을로 가기 위해 그곳 지리에 익숙한 한 원주민 그리스도인 청년을 길 인도자로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마을은 보이지 않고 청년은 계속 정글속 길 같지 않은 곳을 헤쳐 가며 나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정색을 하고 다시 청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나의 형제여, 형제는 확실히 길을 아시나요?”이 때 청년은 이런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여기서는 제가 곧 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모든 믿음의 구도자들,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우리가 그 분의 안내를 받아 드리기로 결심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 보다 길을 앞서가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거처의 입구에서 또한 먼저 기다리시다가 우리를 손짓하고 우리의 손을 잡아 저 영원한 거처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씨는 무신론자의 기도 2”편을 또한 써 냈습니다. 이 시에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고 계신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들어 보시지요.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어둠의 벼랑 앞에서/내 당신을 부르면/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네가 거기 있었느냐/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못 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그 상처를 조금만 만져 볼수 있게 하소서./그리고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 지라도/용서하소서.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라고 선언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이미 하나님께 나아오기 부족하고 더럽혀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고 우리 대신 거룩한 피를 흘릴 각오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일은 그 분을 우리의 인생길의 유일한 안내자, 완벽한 안내자, 우리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의탁하고 믿는 것입니다. 미국에 조니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의 전도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갖게 된 그는 주일은 물론이고 학교를 오가는 길에 늘 교회를 들르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 머무는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냥 교회 제일 뒷 좌석에 앉아 하나님, 저에요 조니.”이 한마디 하고 그는 교회당을 나오곤 했습니다. 그는 힘든 일이 생기거나 아플 때도 역시 교회에 잠시 들려 이 짧은 인사말을 하고 교회당에서 나오곤 했다고 합니다.

 

조니는 고교 3학년 때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병원에 입원하여 생사를 헤맬 때 갑자기 그가 미소를 지어서 부모가 물었다고 합니다.

 

조니야 무슨 일이 있니?” 조니는 웃으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어요” “뭐라고?”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조니, 나야 네 하나님.”

 

그리고 그는 이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비한 그 영원한 거처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나를 믿으라 /14:1-6/ 곽선희 목사

2014-11-20 04:22:07

 

여러분이 잘 아시는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에 '인간이 무엇으로 사 느냐' 하는 그러한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은 작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또 세 가지 해답을 하 는 그런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말씀드리진 않습니다만은 너무나 아는 상식적이면서도 그리고 심각한 그런 질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미 하엘이라고하는 천사가 하나님의 명 을 어긴 죄로서 지상으로 내어쫓깁 니다. 그래서 한 거지가 되가지고 추운 겨울날 시골 조그마한 교회에 서 엎드려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 무 인연도 없는 가난하게 사는 구두 직공이 이 사람을 보고 그에게 사랑 을 베풉니다. 갈 데가 없다고 해서 자기 집에 데려다가 구두 만드는 기 술을 가르쳐서 이 천사가 이 구두 만드는 직공이 됩니다. 어느 날 잘 생긴 신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구두 를 맡깁니다. 맡기면서 하는 말이

 

"내가 타국에 갈 일이 있는 데 일 년 동안 신을 신입니다. 튼튼하게 최상으로 좋은 구두를 만들어 주시 길 바랍니다"하고 돈을 주고 구두를 맡기고 갑니다.

 

그 때에 천사 미하 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바로 앞에 지금 죽음의 천 사가 지키고 있었어요. 이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기 죽을 건 모르고 일 년 동안 신을 신 을 맡깁니다 하는 그 말이 너무나도 안쓰럽고 불쌍한 거예요. 그 때 그 는 깨닫습니다.

 

"아 사람들은 자기 죽을 날을 모르는 구나……"

그래 요. 자기 죽을 날을 몰라요. 그리 고 그는 여기서 중대한 문제를 생각 합니다. 사람은 자기 죽을 날을 모 르고요 또 하나 모르는 게 있습니 다. 세상에는 없는 거 같으나 사랑 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서 이 세 상은 버티어 나가는 것이올시다. 없는 것 같으나 있는 것이 사랑이 요. 때때로 우리는

 

"사랑 없다"

하 지만은 아니올시다. 이 만큼도 세 상이 아직도 지탱해 나가는 것은 그 속에 깊은 곳에 사랑들이 있어요 아 직 사랑 많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 요. 사랑이 있어서 오늘 내가 있고 세상이 있다. 사랑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

또 하나는 사람들의 능력, 사람들 의 재간, 사람들의 지식, 또 인간들 의 상식, 이렇게 살아가는 것 같아 도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에요. 사람 들의 수고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은총으로 사는 것이에요. 그 래서 꼭 망할 것 같은데 망하지 않 아요.

 

꼭 잘못돼서 이거는 저주받 을 수밖에 없고 상식적으로 이렇게 되면은 세상 끝나는 건데 끝나지 않 습니다.

그래서 미하엘은 깨닫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 휼로 세상은 존재한다 이것이 해답 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에 많은 걱 정 근심이 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 겠습니까? 때로 우리는 뭐 물질이 다 혹은 가정 관계다 혹은 친척들이 다 무슨 아이들이 다 멀리 가버렸 다……. 뭐 어째든 스스로 걱정 근 심이 많은데 그 복잡한 것 제가 분 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오 직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믿지 않기 때문 이예요. 모르기 때문에 믿지 못하 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게 된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걱정하는 거죠. 이제 보십시다 근심의 뿌리 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것에 있는 것이고 확실한 보장이 없어서 걱정 하는 것이예요.

 

아무리 어려운 문 제가 있더라도 미래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어요. 그걸 우 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근심은 미래에 대한 것이에요 그것 이 불확실하기 때문이요. 또 철학 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합니다

 

"현대의 문제는 불확실성이다. 미 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라고 말합 니다만은 사실 그것도 알고 보면 웃 기는 얘기예요. 언제는 확실했나? 새삼스럽게 뭐 오늘 와서 불확실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건방진 생각 이에요.

 

역사는 원래 그랬어요 누 구도 미래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불확실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한 것까지만 확실하면 돼요. 그 이상 모든 것이 우리 지식의 확실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또한 자기 지식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뭘 좀 아는데.' 알긴 뭘 알어? 뭘 아는 줄 알았는 데 세월 가면서 보니까 정말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정말 멍청했구나. 형편없이 멍청했구나 하는 생각 안 들어요? 아는 게 아 무 것도 없어요

 

.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에게 자기가 기만당한 것이 죠. 이제서 그걸 알고 있습니다. 내 지식을 내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불안한 것이에요. 또 하나 는 내 능력을 믿을 수가 없어요.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제 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속수 무책이에요. 들어도 소용없고 알아 도 소용없고 빤히 보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능력이 없어요. 그 뿐만 아니라 좀 더 세계를 좁혀 서 생각하면 나 하나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자기 의지를 내가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내 의지를 믿지 못해요.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 수님 앞에 장담하는 것을 볼 수 있 지요.

 

"너희들이 다 나를 모른다고 할 때가 올 것이다."

베드로가 선 뜻 나서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부 인할지라도 나는 아닙니다. 나는 죽을지언정 죽는데 까지 주님을 따 르겠습니다."

 

하고 큰 소리

""하 고 쳤지요. 맹세했지요. 그런데 하 루도 아니요 불과 몇 시간 후에 보 기 좋게 그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 른다고 합니다.

 

아주 비참해요. 아 마 그 뒤에 베드로가 가슴을 치며 울었을 겁니다. '이 내가 이게 이렇 게 형편이 없나?' 여러분은 어떻습 니까? 여러분의 의지, 그거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맹세하고 결심하 고 혈서를 쓴다고 한들 그거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나 자신을 내 의 지를 내가 믿을 수 없기에 이제서 불안한 것이에요.

 

그럼 뭘 믿어야 됩니까? 오늘 성 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합니 다. 주 문장만 잘라서 생각하십시 다.

"근심하지 말라, 믿어라."

그거 아닙니까? 근심하지 말라. 믿으라.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 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문제 는 여기에 있어요. 근심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지 못하기 때 문이에요.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믿 음뿐이에요. 이 믿음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귀중한 선물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 합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전 그런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세상에 믿을 사람 어디 있나. 아무 것도 못 믿는다"

그 사 람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믿 을 사람 많지요. 그래도 좋은 사람 이 더 많지요. 이 믿음! 어딘가 모르게 계속적으로 믿어지고 든든하 게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사람,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귀한 보 물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지식이다 의지다 하지만 이것이 해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공부 많이 했다고 해서 확신이 생깁 니까? 공부 많이 했다고 믿음이 생 깁니까? 그거 아니에요. 많이하면 할 수록 점점 더 비겁한 사람이 돼 요. 걱정은 더 많고……. 여러분 소유도 그렇습니다. 뭘 가졌다 하 면 거기에 믿음이 있는 겁니까?

 

안 그래요. 소유는 나를 점점 더 근심 의 수렁에 빠뜨리고 맙니다. 여러 분 흔히 우리가 말하는 대로 스트레 스라는 말을 하죠. 긴 얘기를 안 하겠습니다.

 

스트레스라는 것은 알 고 보면 잘못된 자기 지식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에요. 또 믿음이 없 어서 오는 고통을 그 괴로움을 스트 레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가 하 면 해결할 수 없는 죄책이 있습니 다. 사람들 앞에는 자기가 옳다고 하지요. 남보다 더 옳다고 하지요. 항상 옳다고 자기를 정당화하고 있 지만은 자기가 죄인됨을 자기가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감 기만 걸려도 이게 죄 때문인가 보 다, 애들이 집을 나가도 내가 잘못 한 거고, 계속 내 양심이 나를 정죄 하고 있어요. 내 마음에 있는 율법 이 나를 심판하고 있어요. 그런고 로 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한 것이에 요. 변명하지 마세요. 마지막 한 번만은 진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는 성공이 우리를 근심에 빠뜨립니다. 여러분 그런 일 있잖 아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하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불안하 고 그렇지 않습디까? 미스코리아에 당선되려고 아 몸부림을 치고 얼마 나 애를 써서 예, 그 당선이 됐다 말이에요. 아 이제 면류관을 쓰여 주고 이렇게 해서 축하하면서

 

"축하 합니다."

그러면

"나는 소원 이루었 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래야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불안합니다."

 

불안하지……, 왕관 을 쓰기가 쉬운 게 아니에요 왕관을 지켜가기가 어렵지.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안 쓰는 게 훨씬 났 지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역시 미래에 대한 보장 믿음이 없기 때문 이에요.

 

그래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때 나는 피조물이 됩니다. 그는 창 조주요 나는 피조물이요, 그는 아버 지요 고로 우린 자녀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경륜하시고 우리는 그의 경륜에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정직하십시다. 인간이 뭡니까?

 

아무 것도 아닌 주 제에 뭘 또 걱정은 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일입니까? 언제 당신의 능력으로 살았습니까? 언제 당신의 지혜로 살았습니까? 언제 내 의지로 한 일이 한 가지인 들 있습니까? 그렇다면 손들어요

 

. 하나님을 믿어요. 그는 창조주요 그는 능력이시고 그는 지혜로우시고 그는 긍휼히 여기시고 또 그 속에 사랑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 보세 요. 하나님의 능력, 지혜, 긍휼, 사 랑, 확실하나 그걸 믿을 수가 있어 야죠. 여기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본 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믿으 라. 또 나를 믿으라."

 

"", 예수 그리스도 나를 통해서 저 하나님을 믿으라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깊 은 뜻이 있습니다. 엄청난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올시다. 예수 안 에서 예수를 통하여 오로지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 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무궁무진한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 다. 걱정이 있고 근심이 있습니까? 잠깐 멈추시고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생각하세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속에 해답이 있습 니다. 예수님 제자들에게

 

"나를 믿 으라."하고 말씀하시는데 나를 믿으 라 하고 하시는 예수님 얼굴을 쳐다 보세요. 이제 몇 시간 후에 십자가 를 지실 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 음 1232절 같은 데 보면 이런 말 씀도 있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 워하지 말라."

 

적은 무리지요. 열 두제자와 예수님, 초라하게. 옷이 변변합니까, 인물이 잘났습니까? 이거 초라하게 모여 앉아서 지금 하 시는 말씀이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좀 더 심각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 시면서 어디로 갑니까? 지금 예수 님 손에 돈이 있습니까 권세가 있습 니까?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라 이거예요. 그리고 예 수님은 십자가 지실 말씀을 하십니 다. 십자가로 향해 가시면서 하시 는 말씀이

"나를 믿으라"

 

나를 따 르라,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 다. 이 십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 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 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압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폭군적 능력이 아 닙니다. 때려부수는 능력이 아닙니 다. 파괴적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 은 천지를 개벽하는 그런 진동케하 는 능력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생명적 능력 입니다. 조용히 겨자씨 하나가 땅 에 들어가서 싹이 나는 거와 같은 그러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홍수가 나고 벼락이 칠 때 아 이거 굉장한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큰 능력 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 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돌아오게 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 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십자 가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는 영적 생명의 깊은 근원 이 십자가 안에 있어요. 그래서 사 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 님의 능력이라고…….

 

또한 이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지 혜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고 우리 를 바른 길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 도하고 계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매를 많이 맞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좀, 내가 지금 생각 해 봐도 조금 지나쳤어요.

 

언제 한 번도 칭찬 할 줄을 모르고 그저 조 금만 잘못하면, 삐꺽하면 저를 때렸 어요. 거기서 말대답을 한 마디라 도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냥 맞 아야지. 그런데 아무리 아버지가 저를 때렸지만 저는 아버지를 무서 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저의 어머 니입니다. 저는 어머니로부터 한 번도 맞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잘못했을 때 손을 딱 붙들고

 

"내가 너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는데 네가 그래서 되겠냐?"

그러면 살살 빌어야 됩니다. 꼼짝 을 못합니다. 어느 쪽이 능력이고 어느 쪽이 지혜입니까. 여러분 하 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십자가 안에 계시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 니다.

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 시입니다. 여기 확증되어 있습니다. 간혹 젊은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해 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소원을 이루어 줘야죠",

"내가 결혼 하고 싶은 저 여자와 결혼하게 해 줘야죠",

"내가 자기로 싶은 무엇무 엇을 가지게 해 줘야죠"

 

"그래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 …….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은 것 은 주지 않고 되지도 않고 그리고는 엉뚱하게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 하 나 세워놓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죠. 그렇습 니까? 바로 여기에 신비가 있는 거 예요. 오늘도 하나님은 이 방법밖 에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고

"내 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노라."

 

이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을 보여줍니 다. 이것만이 사랑이니까요. 여러 분 자녀들이 뭘 달란다고 달라는 대 로 줄 수 있습니까? 줄 것도 없지 만 줘서는 안 되잖아요. 그리고 내 가 늘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잊지마라. 이것을 믿어라. 내가 못 주는 것도 사랑하 기 때문이고 때로는 너를 어려운 시 련에 버려 두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 이고 그리고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 랑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어요. 이 제자들을 놓고 떠 나면 어떡합니까? 이 철없는 제자 들을 놓고 십자가를 지면 어쩌자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그 길 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 를

"내가 먼저 간다. 고난의 길도 십자가의 길도 내가 먼저 가노라."

또 하나

 

"가서 예비하리라."

그 다 음에는

"다시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영원히 함께 하리라."

철없는 제자 들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 아무 걱정도 없습 니다. 이제 이 믿음을 가진 확실한 믿음의 사람, 대표적인 사람을 소개 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4세기에 교부 로 있다가 로마에 왕, 시이저가 주 가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라고 강력히 주장한 죄로 그는 왕 앞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순교했습 니다. 아르카디우스가 그를 심문하 는 내용, 너무나 귀합니다. 보세요.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집에 서 추방해 버리겠다"하고 말했더니

"왕이여, 그거는 불가합니다. 온 세 상이 다 아버지 집이기 때문에 어디 로 추방해도 그건 다 내 집입니다. 그런고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 러면 네 전 재산을 다 몰수해 버리 겠다."

 

그러니까 그는 또 말합니다

"그것도 폐하여 불가능합니다. 그 것은 내 재산은 다 하늘나라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내 재산을 빼앗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면 너를 감옥에 넣어서 아주 고독하게 아무도 못 만 나게 평생 동안 고생하다 죽게 만들 겠다."

 

그랬어요. 그는 조용히 웃으 시면서 말했습니다

"그것도 불가능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친구가 되어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 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누가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에 게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이 믿 음에 무슨 절망이 있다는 얘기입니 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 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 느니라. 내가 길이다, 나를 따르라. 내가 진리다, 나를 배우라. 그러면 자유 하리라. 내가 생명이다"

그것 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토마스 에 디슨은 1931, 85세로 세상을 떠납 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의 훌륭 한 물건을 발명한 발명왕이 아닙니 까? 그에게 기자들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왕 성한 정력으로 일 하실 수 있는 겁 니까?"

그 노인이 대답합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 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 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 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 니다"

 

여러분, 영원을 소유한 사람 이래야 현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영원을 믿는 사람이 되야 오늘을 승 리 생활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 미 래가 없는 사람은 현재는 더욱 없습 니다. 확실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 께 하시고 이 귀한 사실을 알게 하 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낙심도 없고 속박도 없습니다. 무한히 자 유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여유가 있습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들 어보십시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 리고 또 나를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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