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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4:7 - 1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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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보여 주옵소서 /14:7-11/ 곽선희 목사

2014-11-25 04:26:15

 

'안소니 드 멜로'라고 하는 분의 '일분지혜'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 있는 그대로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그래야 보게 될 것이라고. 제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스승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달을 바라볼 때에 달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예컨대 배고픈 사람은 달을 보면서도 '저게 빵떡이 아닌가.' 빵을 생각하면서 보면 달을 달로 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달빛을 쳐다보면 달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생각하니까 또 달을 바로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볼 때에는 하나님만 보아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의 아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중요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말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원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벌써 보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못보았느냐? 아직도 너희는 하나님을 못 보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래 전에 젊었을 때 읽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 목사님께 찾아온 아주머니가 있는 대로 자기 근심 걱정을 다 털어놓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직장에 대해서 좌우간 숨도 쉬지 않고 자꾸만 주워섬깁니다. 목사님이 한 시간을 듣다 듣다 못해서 "이제 그만합시다.

 

그런데 하나만 물을텐데요" ", 물으세요." "혹시 이 모든 생각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럼 나도 하나 물읍시다." "물어보세요"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거기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은 "No, I don't"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그 말을 저는 늘 기억합니다.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풀 포기 하나에서부터 별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고 삽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명답이올시다.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윈 대령이라고 하는 분이 달나라에 갔다왔습니다. 그 분을 공교롭게 제가 어떤 호텔 로비에서 만나서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참 좋은 기회였습니다. , 제가 그 분을 면회 신청을 한다고 만나겠습니까?

 

그런데 우연히 만나가지고 서로 소개하면서 한시간 동안 얼마나 진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달나라에 가서 이 지구를 보면요 다르답니다. 우리가 달을 볼 때에는 흑백입니다. 흑백영화같지 않습니까, 흑백 텔레비젼처럼. 그러나 달에서 지구를 보면 총 천연색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세계,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할렐루야 찬송을 하고 감탄했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구 소련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 한마디했더니 거기에 있는 공산주의자가 그러더랍니다.

 

"우리 우주인들은 우주 밖에 나가서, 대기권 밖에 나가서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데 어떻게 당신은 달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래서 어윈 대령 자신이 하는 말이 나는 그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랬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는데 보니까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개가 무릎 앞에 앉아서 루터를 쳐다봅니다.

 

루터가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열심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아서 한 조각 찢어서 주고 나서 무릎을 탁 치고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개가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 같이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개는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집중하는 거예요. "나는 어떤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해 놓고 또 이 생각 저 생각 이래서 되는 것인가" 그것 참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쳐다보아야 하나님을 보겠는데 무엇을 그렇게 복잡하고 가리우는 것이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이라는 것은 먼저는 논리적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맑은 이성, 투명한 이성일 경우에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온 세계를 똑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병들면 이것이 문제가 달라집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비판, 추리, 분석, 통합하면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으로 봅니다. 왜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만물의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Energy다 이거야.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물질이냐 인격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참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이것을, 그분의 말을 참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물질로부터 물질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생명체로부터 물질이 온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학적 지식에 의한 하나님을 설명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라고.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만큼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맑은 이성으로 그 능력을 따라, 그 기능을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감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아는 것처럼. 울 때에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압니다. 그 아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사정을 충분히 어머니는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압니다. , 이제 보십시오. 사랑을 하게 되면 가슴이 열립니다. 그래서 알 수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되면 가슴이 닫힙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식의 문이 꽉 닫히고 맙니다.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그들은 아직도 그 옛날 생각을 하면서 일본놈 미워하고 미 제국주의 미워하고 남한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폭격을 해서 우리가 많이 죽었다고 그냥 50년 동안 미워합니다.

 

아직도 미워하니까 아무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 미움에서 벗어나야 무엇인가가 생각이 나겠는데 무엇인가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겠는데 아주 너무 답답합니다. 그 증오 아, 무섭습니다. 이 미운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이 꽉 닫히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의심하게 되면 지식이 굴절작용을 하게 됩니다. 의심하게 되면 오해가 생깁니다. 의심이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이래도 오해하고 저래도 오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지식인데 소중한 것입니다만은 경험 자체만으로는 지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 이미 있는 지식이 그 경험 속에 작용해서 이미 있는 지식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그 분량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무엇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고집이 생기고 자기 우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의 Psychotherapy and Existentialism 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에서 현대인의 고장난 징후에 대해서 인간심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삶에 대한 하루살이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순간,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생각합니다. 순간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죽든 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한 순간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마치 마약환자가 한 번 주사를 맞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맞고 죽어도 좋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한 순간만 생각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병든 상태라고 말합니다. 또 한가지는 운명적 태도입니다.

 

일단 운명에 맡겨버립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긍정적인 것 같으나 이것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하려고 합니다. 아주 기피적인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입니다. 집단주의로 향합니다. 그래서 집단적 역사에 편승해보려고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덕에 삽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할 때에 광신주의에 빠집니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우상이 무엇입니까? 요새 보니까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 그것 고칠 수 없는 병이더군요. 자존심 하나 때문에 망칩니다. 오늘과 내일을 다 망치는 그런 것을 볼 때에 자기 우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올시다.

 

또한 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운동 선수들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뛸 때에나 혹은 볼을 찰 때, 저기서 오는 볼을 보고 '가만있어보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탁 갖다 대는 것이 아닙니까? 감각적입니다. 아주 자동적으로. 여기에 무슨 판단하고 무엇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주 몸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화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벌써 보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벌써 깨달을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 인식적인 방법론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계시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을 보고 삽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지 않았느냐?

 

네 마음속으로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벌써 만났어야 되는데 아직도 못 만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 모릅니다. 경험은 있으나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늘 네가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속에 오해가 있고 의심이 있고 정욕이 있고 욕심이 있고 무엇인가 가득찬 잘못된 것이 있어서 아직도 하나님을 못 보았구나" 하는 말씀입니다. "내게 듣는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느니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영으로 내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음성을 듣고 양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영이 깨끗한 자는 계속 들려지고 계속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집니다. 충분하게 보여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돌아오는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가 그만큼이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 생각해도 못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기에 그는 그만큼 소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가치를 높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탕자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맞이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그럴 때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볼 때에는 버려진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만은 아버지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니 내가 너무 소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 믿는다'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자기 존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비극 작품 중에 리어왕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리어왕이 이렇게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육신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이 멀었고 나이가 드니 마음의 눈은 떴으나 육신의 눈이 멀었도다." 차라리 육신의 눈이 멀더라도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쯤은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우리는 월드컵 사건 때문에 온 국민이 떠들썩하고요 제가 평양에 있으면서 궁금해서 못견디겠어요. 이걸 어떻게 알긴 알아야겠는데 여기는 전화가 안되고. 할 수 없이 거기에 있는 분들이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중국에 있는 분들에게 물었어요. 이겼다고. , 그래서 우리는 이긴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만은 자,

 

이 사건을 놓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예외가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간단하지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그렇지 않습니까? 인천비행장에 들어오면서부터 얼마나 교만했는지 누구라고는 안하겠습니다.

 

교만했는데 다 부끄러워 돌아갑니다. 거기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더라구요. 그런가 하면 또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미국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하고 한국하고 붙는다며. 아이고, 이거 큰일났어요. 미국이 이기면 자존심이 상하고, 한국이 이기면 장사를 못해먹겠고. 아이고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거 이겨야 합니까 져야 합니까? 뭐라고 기도할까요?"

 

그래서 "내 주여 뜻대로" 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묘하게 비겼습니다. 그 뿐입니까? 미국이 한국 덕분에 16강에 올라갔습니다. 신세졌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쓸 수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하나님께서 묘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미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조용히 마음 문을 열고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음성이 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건만 마음 문이 닫혀서 주를 뵙지도 못하고 주를 듣지도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완악한 마음을 다 깨뜨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가운데 정결한 심령을 이루어 항상 주의 역사를 보며 주의 역사를 몸으로 경험하며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들으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암울한 가운데 여기까지 왔사오나 남은 해는 밝고 명랑한 저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주의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 목 : 주여 보여 주옵소서

본 문 : 요한복음 14711

 

2002. 6. 16.

 

'안소니 드 멜로'라고 하는 분의 '일분지혜'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 있는 그대로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그래야 보게 될 것이라고. 제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스승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달을 바라볼 때에 달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예컨대 배고픈 사람은 달을 보면서도 '저게 빵떡이 아닌가.' 빵을 생각하면서 보면 달을 달로 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달빛을 쳐다보면 달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생각하니까 또 달을 바로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볼 때에는 하나님만 보아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의 아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중요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말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원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벌써 보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못보았느냐? 아직도 너희는 하나님을 못 보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래 전에 젊었을 때 읽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 목사님께 찾아온 아주머니가 있는 대로 자기 근심 걱정을 다 털어놓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직장에 대해서 좌우간 숨도 쉬지 않고 자꾸만 주워섬깁니다. 목사님이 한 시간을 듣다 듣다 못해서 "이제 그만합시다. 그런데 하나만 물을텐데요" ", 물으세요." "혹시 이 모든 생각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럼 나도 하나 물읍시다." "물어보세요"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거기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은 "No, I don't"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그 말을 저는 늘 기억합니다.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풀 포기 하나에서부터 별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고 삽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명답이올시다.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윈 대령이라고 하는 분이 달나라에 갔다왔습니다. 그 분을 공교롭게 제가 어떤 호텔 로비에서 만나서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참 좋은 기회였습니다. , 제가 그 분을 면회 신청을 한다고 만나겠습니까? 그런데 우연히 만나가지고 서로 소개하면서 한시간 동안 얼마나 진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달나라에 가서 이 지구를 보면요 다르답니다. 우리가 달을 볼 때에는 흑백입니다. 흑백영화같지 않습니까, 흑백 텔레비젼처럼. 그러나 달에서 지구를 보면 총 천연색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세계,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할렐루야 찬송을 하고 감탄했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구 소련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 한마디했더니 거기에 있는 공산주의자가 그러더랍니다. "우리 우주인들은 우주 밖에 나가서, 대기권 밖에 나가서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데 어떻게 당신은 달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래서 어윈 대령 자신이 하는 말이 나는 그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랬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는데 보니까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개가 무릎 앞에 앉아서 루터를 쳐다봅니다. 루터가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열심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아서 한 조각 찢어서 주고 나서 무릎을 탁 치고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개가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 같이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개는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집중하는 거예요. "나는 어떤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해 놓고 또 이 생각 저 생각 이래서 되는 것인가" 그것 참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쳐다보아야 하나님을 보겠는데 무엇을 그렇게 복잡하고 가리우는 것이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이라는 것은 먼저는 논리적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맑은 이성, 투명한 이성일 경우에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온 세계를 똑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병들면 이것이 문제가 달라집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비판, 추리, 분석, 통합하면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으로 봅니다. 왜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만물의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Energy다 이거야.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물질이냐 인격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참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이것을, 그분의 말을 참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물질로부터 물질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생명체로부터 물질이 온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학적 지식에 의한 하나님을 설명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라고.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만큼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맑은 이성으로 그 능력을 따라, 그 기능을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감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아는 것처럼. 울 때에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압니다. 그 아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사정을 충분히 어머니는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압니다. , 이제 보십시오. 사랑을 하게 되면 가슴이 열립니다. 그래서 알 수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되면 가슴이 닫힙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식의 문이 꽉 닫히고 맙니다.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그들은 아직도 그 옛날 생각을 하면서 일본놈 미워하고 미 제국주의 미워하고 남한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폭격을 해서 우리가 많이 죽었다고 그냥 50년 동안 미워합니다. 아직도 미워하니까 아무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 미움에서 벗어나야 무엇인가가 생각이 나겠는데 무엇인가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겠는데 아주 너무 답답합니다. 그 증오 아, 무섭습니다. 이 미운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이 꽉 닫히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의심하게 되면 지식이 굴절작용을 하게 됩니다. 의심하게 되면 오해가 생깁니다. 의심이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이래도 오해하고 저래도 오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지식인데 소중한 것입니다만은 경험 자체만으로는 지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 이미 있는 지식이 그 경험 속에 작용해서 이미 있는 지식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그 분량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무엇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고집이 생기고 자기 우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의 Psychotherapy and Existentialism 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에서 현대인의 고장난 징후에 대해서 인간심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삶에 대한 하루살이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순간,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생각합니다. 순간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죽든 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한 순간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마치 마약환자가 한 번 주사를 맞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맞고 죽어도 좋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한 순간만 생각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병든 상태라고 말합니다. 또 한가지는 운명적 태도입니다. 일단 운명에 맡겨버립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긍정적인 것 같으나 이것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하려고 합니다. 아주 기피적인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입니다. 집단주의로 향합니다. 그래서 집단적 역사에 편승해보려고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덕에 삽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할 때에 광신주의에 빠집니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우상이 무엇입니까? 요새 보니까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 그것 고칠 수 없는 병이더군요. 자존심 하나 때문에 망칩니다. 오늘과 내일을 다 망치는 그런 것을 볼 때에 자기 우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올시다.

또한 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운동 선수들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뛸 때에나 혹은 볼을 찰 때, 저기서 오는 볼을 보고 '가만있어보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탁 갖다 대는 것이 아닙니까? 감각적입니다. 아주 자동적으로. 여기에 무슨 판단하고 무엇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주 몸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화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벌써 보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벌써 깨달을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 인식적인 방법론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계시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을 보고 삽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지 않았느냐? 네 마음속으로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벌써 만났어야 되는데 아직도 못 만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 모릅니다. 경험은 있으나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늘 네가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속에 오해가 있고 의심이 있고 정욕이 있고 욕심이 있고 무엇인가 가득찬 잘못된 것이 있어서 아직도 하나님을 못 보았구나" 하는 말씀입니다. "내게 듣는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느니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영으로 내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음성을 듣고 양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영이 깨끗한 자는 계속 들려지고 계속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집니다. 충분하게 보여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돌아오는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가 그만큼이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 생각해도 못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기에 그는 그만큼 소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가치를 높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탕자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맞이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그럴 때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볼 때에는 버려진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만은 아버지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니 내가 너무 소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 믿는다'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자기 존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비극 작품 중에 리어왕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리어왕이 이렇게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육신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이 멀었고 나이가 드니 마음의 눈은 떴으나 육신의 눈이 멀었도다." 차라리 육신의 눈이 멀더라도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쯤은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우리는 월드컵 사건 때문에 온 국민이 떠들썩하고요 제가 평양에 있으면서 궁금해서 못견디겠어요. 이걸 어떻게 알긴 알아야겠는데 여기는 전화가 안되고. 할 수 없이 거기에 있는 분들이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중국에 있는 분들에게 물었어요. 이겼다고. , 그래서 우리는 이긴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만은 자, 이 사건을 놓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예외가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간단하지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그렇지 않습니까? 인천비행장에 들어오면서부터 얼마나 교만했는지 누구라고는 안하겠습니다. 교만했는데 다 부끄러워 돌아갑니다. 거기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더라구요. 그런가 하면 또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미국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하고 한국하고 붙는다며. 아이고, 이거 큰일났어요. 미국이 이기면 자존심이 상하고, 한국이 이기면 장사를 못해먹겠고. 아이고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거 이겨야 합니까 져야 합니까? 뭐라고 기도할까요?" 그래서 "내 주여 뜻대로" 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묘하게 비겼습니다. 그 뿐입니까? 미국이 한국 덕분에 16강에 올라갔습니다. 신세졌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쓸 수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하나님께서 묘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미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조용히 마음 문을 열고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음성이 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건만 마음 문이 닫혀서 주를 뵙지도 못하고 주를 듣지도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완악한 마음을 다 깨뜨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가운데 정결한 심령을 이루어 항상 주의 역사를 보며 주의 역사를 몸으로 경험하며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들으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암울한 가운데 여기까지 왔사오나 남은 해는 밝고 명랑한 저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주의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14:7-14

2023-08-24 09:58:12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안다

 

앞서 주님은 성도들의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은 아버지 집, 거처, 장소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 집에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장차 아버지와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 무슨 소리냐? 장차 아버지 집에 간다든지, 장차 아버지를 만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지금 당장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나를 알면 아버지도 안다! 이제부터, 정말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아버지도 알고 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미래형 신앙이 아니라, 현재형 신앙입니다. 장차 아버지 집에 가고, 장차 아버지를 만나고, 장차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 떠날 때 천당 가는 게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즉시 우리는 아버지 품에 이르게 됩니다. 즉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게 됩니다. 즉시 하나님을 알고,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1:15)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알고 보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 빌립이 감췄던 소원을 얘기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하나님 아버지도 눈에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거처도 눈에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고도 안 믿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구 중에 하나는 자기 확신에 대한 욕구일 겁니다. “나는 너를 못 믿겠어! 뭔가 믿을만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 아내는 남편에게 하루에도 몇 번 씩 사랑을 확인합니다. 당신 나를 사랑해! 그러면 무슨 증표를 보여줘! 옷을 사주든지, 보석을 사주든지! 내가 과연 사랑을 받고 있을까?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근대 사상의 특징은 실증주의, 혹은 과학주의입니다. 내 자신의 존재조차도 믿지 못합니다. 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란 뭔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한 말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 확신에 목마를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입니다.

 

빌립 역시 마찬가집니다. 빌립은 실증주의자입니다. 실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5천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때에, 단번에 머릿수를 세고 음식 값을 계산해 냈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전도할 때에도 와서 보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싶어 했습니다. 시내산의 모세처럼,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앙은 인간에게 가장 확신에 목마른 영역입니다. 사람들 눈에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증거 불충분의 영역입니다. 어떤 저명인사 한 분이 잡지에 이런 글을 싫은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 거리의 종말론자들이 많은데 그들이 믿는 것이나, 유리 겔러의 초능력이나,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이나, 기성 교회가 믿는 하나님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신이란 존재는 어차피 과학으로 실증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모든 것이 회의적이다.” 만일 하나님이 레이더에 잡히고 전파 망원경에 포착될 수만 있다면? 혹은 화학자의 눈에 발견되고, 물리학자의 관찰로 확인될 수만 있다면? 아니면 어떤 기적이나 경험으로 확인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은 물질세계에서 볼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누가 본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고, 우연히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신앙에 확신이 없는 근본 이유는 대상물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결함에 있습니다. 대상이 아무리 확실해도 믿지 못하는 한 증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의처증을 가진 남편은 아내가 아무리 순결해도 믿지 않습니다. 사상에 찌든 사람은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을 얘기해도 듣지 않습니다. 최근 어떤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한 말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대한민국보다 북한이 더 믿음이 간다고 합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대통령을 맘대로 욕하는 대한민국보다, 가장 탄압적이고 폐쇄적인 북한 정부가 더 믿음이 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대통령이 의심스러웠으면 급사하기를 바란다고 합니까? 이런 사람을 국회의원이라고 추천한 정당도 괴롭고, 이런 사람을 임기동안 신분보장 해 줘야 되는 국민도 괴롭습니다. 맛을 모르는 사람을 味盲이라 하고, 색을 모르는 사람을 색맹이라 한다면, 靈界를 못 보는 사람은 靈盲이라 할까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인간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눈이 먼 영맹들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영적 맹인이 된 경위를 창세기 3장에서 명백히 말씀합니다. 아담은 아내와 더불어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등질 때에 하나님도 아담을 에덴에서 내어 쫓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손들은 세상에서 영적 방황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영적 맹인들이 할 수 있는 요구는 똑 같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오. 그러면 믿겠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다시 7절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 아버지란 뜻인가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은 엄연히 성부와 성자가 다른 격을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성자와 성부가 존재 방식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지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 중요한 교리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만들어 낸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각기 분명한 신격(神格)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항상 일체로 결합되어 계십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 주님의 신격 속에 성부의 신격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본성과 권위와 능력에 있어서 성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동등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 아버지는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셨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우선 구약적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주로 이적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기적은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을 불로 태우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로서 보이신 것입니다. 삼손의 부친이었던 마노아, 사사 기드온, 선지자 엘리야에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왕 바로 앞에 나갈 때에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통해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나타내셨습니다. 강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 메뚜기 떼가 동원되고, 백주에 흑암이 오고, 생축과 사람이 전염병으로 몰사하고, 천재지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왕은 이러한 증거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잠시 굴복합니다. 잠시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곧 불신앙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도 마찬가집니다.

 

시내산 아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심을 천둥과 번개와 불과 구름기둥으로 확인했습니다. 광야 시절에는 무수한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했습니다. 하늘의 만나, 메추라기 떼, 반석의 물, 홍해와 요단강을 이적으로 건넌 사건, 여리고성 정복 등등. 그러면 이러한 이적들이 과연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성공했을까요? 결코 성공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적을 경험한지 사흘도 못돼서 불신앙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완악한 罪性이 있습니다. 이적을 보았다고 항상 믿음을 간직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구약적인 기적의 방법은 영이신 하나님을 계속 믿게 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빌립은 영이신 하나님을 異蹟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무슨 꿈이든지, 환상이든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천사처럼! 그러나 애굽왕 바로나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적을 그다지 신봉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인간은 경험과 상식에 어긋난 것이면 대부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사람들은 자연 법칙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고 假定하기 때문입니다. 이적이란 어떤 형태로든지 자연 법칙을 깨뜨린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유전의 법칙, 운동의 법칙을 깨뜨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은 한 인간이 자연 법칙을 깨뜨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적을 별로 신봉하지 않습니다. 빌립은 영이신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빌립의 요구대로 어떤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준다 해도 빌립의 신앙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빌립이 눈앞에 보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수많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기적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증표입니다. 그런데도 빌립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가장 완전한 계시 방법! 빌립이 그렇게 보고자 했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사람과 더불어 살고,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계시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 인내, 자비, 정의, , 겸손.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귀신들이 굴복합니다. 바다와 풍랑이 잔잔케 됩니다. 모든 질병들을 치유하십니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빌립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기간은 인간사에서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을 보고 아는 데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이렇게 전한바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4,18)

 

여러분, 하나님 보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세요. 빌립은 인간 예수만 봤습니다.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를 허심탄회하게 관찰해 보세요. 모든 선입견이나 경험이나 지식에 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세요. 있는 그대로만 본다면, 분명히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신 증거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 와서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심을 무엇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두 가지 증거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증거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 주님은 자신의 모든 말이 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4)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7:16)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12:49)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34)

 

우리는 수많은 賢者들의 교훈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교훈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인간 자신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교훈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을 마태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 과연 청중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의 반응 때문에 주님의 교훈이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 그 자체에도 그 신성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고상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윤리만큼 가장 고상한 덕목을 가르친 예가 없습니다.

 

둘째는 말씀의 진실성입니다. 철학이 변하고 사상이 변해도 성경 말씀은 불변합니다. 고칠 필요가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지난 수천 년 간 그 추종자들이 실천함으로써 진리임을 입증했습니다. 셋째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명 구원을 받았습니다. 삶이 변화되고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여러 가지로 미루어서 주님의 말씀은 신성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들을 통해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주님의 행적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 예수님이 걸어가신 삶의 자취는 곧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공의로우신 삶! 대속적인 죽음! 부활, 승천! 가장 큰 행적은 바로 기적들입니다. 오늘날의 과학 신봉자들은 예수님의 이적들을 모조리 부정합니다. 동시대의 보잘 것 없는 역사 문서는 다 믿을지라도, 예수에 관한 이적의 기록들은 아무리 많아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이적을 과장된 기록이거나 신화라고 단정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든 사도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전하려 했던 예수 생애의 진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외침을 그들은 굳이 외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적은 주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표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나셨습니다. 풍랑 이는 물위로 걸으셨고, 파도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문둥병 중풍병 앉은뱅이 소경을 고치셨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이적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길이요, 어떤 이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와 빠져 죽는 함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적은 바로 예수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증거로 인하여 예수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을 믿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주님의 행적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제까지 성자를 통하여 계시된 성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부 성자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시는가?

 

하나님은 내 삶에 어떻게 관여할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주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행한다고 하십니다. 주님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주님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야를 고치고,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감옥에서 천사의 인도를 받아 나왔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으며, 미문가의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넓은 지역에 다니면서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도적을 변화시켰습니다. 매 맞고 갇히고 파선과 굶주림과 독사와 돌에 맞는 환란을 당당히 이겼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주님의 삶처럼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3-14)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이름만 빌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면서 구하라는 말입니다. “내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은 내 기도를 직접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돈 주세요!”라고 구하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선 문맥에서 보면 주님의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하시던 일이 뭡니까? 천국 복음 전파하는 일, 귀신 쫓아내는 일, 병든 사람 고쳐주는 일, 연약한 사람 붙들어주는 일,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 일,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과 같은 것들입니다. 아무튼 주님을 믿음으로써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할 때마다 주님께 구하세요. 주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러한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삼중 관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인격과 성품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도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들의 모든 삶은 예수 안에서이루어진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에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봄 /14:7-11/ 박형근목사

2023-03-05 00:51:03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지요.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발사에 성공해 위협하고, 김 정은의 큰형인 김 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살해되고, 삼성의 이 부회장이 구속되었지요. 지난 주 수요일, 고 이 두수 권사님 일주기 추모예배를 댁에서 드렸습니다. 일 년이 금방 지났습니다. 예배 후 식사하면서, 최 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잘못한 사람들을 철저히 밝혀내 합당한 처벌을 하고 속히 안정을 찾으며, 모든 일이 더 나은 대한민국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성도들은 자신이 더 믿음에 굳게 설 뿐만 아니라, 안 믿는 이들에게 복음을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단테가 지은 <신곡>을 보면, 주인공이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서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는 가상적인 이야기 나옵니다. 안내자를 따라서 어느 곳을 갔더니, 죽을 상을 하고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일단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선인도 못 되고, 지옥에 처넣을 만큼 악인도 못되는 겁니다.

 

안내인이 단테에게이들은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고, 사탄도 좋아하지 않는 버려진 인간들입니다. 만나 볼 가치도 없으니 그냥 지나갑시다.’지어낸 이야기지만, 우리가 얻을 교훈이 있습니다. , 여러분 중에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미적거리지 않습니가? 교회를 다니면서,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는 이나, 나처럼 믿어선 천국에 못갈 거야 하는 것도 옳지 않지요. 믿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천국백성이 되었음을 믿고, 천국백성답게 행복하게 살아야합니다.

 

오늘말씀은, 예수님은 이제는 제자들이 알겠지 하고 말씀하셔도, 제자들은 이해를 못하고뭔 말씀입니까?’하지요. 엇박자입니다. 14:4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하시자, 도마가어디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 길을 압니까?’오늘말씀은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하시니, 빌립이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 그러면 족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앞서 가는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것을 자세히 요한복음에 기록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잘 알게 했습니다. 비슷한 예를 찾아봅니다. 3장에,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하자, 예수님께서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하시니, 니고데모가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납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조차 예수님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말을 하지요. 사도요한은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ㅣ에게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알려줍니다. 4장의 불량한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도 그러합니다. 여인은, 물 긷는 것이 힘들어 물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은네가 구하면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않으리라.’여인은 화급히그 물을 제게 주소서.’처음엔 물이 그저 물인 줄 알았다가 영생의 생수임을 깨닫고, 동네로 달려가서와 보라.’외칩니다.

 

하나 더, 오병이어의 이적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사람을 먹이겠느냐?’하시니, 빌립이조금씩만 떡을 나눠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예수님은 이적 베풀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빌립은 인간적인 생각을 말합니다. 빌립의 말은, 이백 데나리온 그 많은 돈도 없고, 돈이 있더라도 그 많은 떡을 사올 곳이 없으니, 먹일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우리 생각이 세상에만 머물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한 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많은 이를 배불린 이적보다, 그 떡은 십자가에 살이 찢기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라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3년이나 가르치고 놀라운 이적을 보였으면, 이제는 알만 하지 않느냐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질 못합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면 족하겠다고 하나, 성경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합니다. 함께 출 19:21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께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 줄 알고, 모세에게 하나님말씀을 듣고 와 전해 달라하지요. 누구나 빌립처럼 보는 것을 꽤 중히 여기지요.‘내가 이 두 눈으로 확실히 봤다.’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다는 것을 더 잘 알고자, 본다는 것의 의미와 본 것이 오래가지 못함을 성경에서 살펴봅니다.

 

먼저, 본다는 것의 의미를 살피면 세 단계로 나뉩니다. 성경을 생각하면, 성경책을 그저 보는 단계가 있습니다. 저기 성경책이 있구나, 보았지만 별 의미가 없지요. 성경책을 펴서 읽어도, 이런 말씀이 있구나, 그저 본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성경을 보면서아하, 그렇구나, 이 말씀이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이네.’다음단계는, 성경을 읽고 깨닫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본 것이지요. 본다는 것의 세 단계는 예배도 그렇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예배 보러 간다.’교회에 왔습니다. 예배를 보았지요. 끝나고 그저 나갑니다. 성경은 성전의 마당만 밟을 뿐이라 하지요. 다음 단계는, 예배를 드리며 찬양 중에, 말씀에 은혜와 위로를 받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예배 때 깨달은 말씀과 은혜로 세상에 나가 믿음으로 삽니다. 성경을 보던, 예배를 보던, 본다는 것의 완성은 삶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성도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제대로 본 성도입니다.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보는 것이 오래 가지 못함을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린 후에야 애굽을 나올 수 있었지요. 그리고, 홍해바다가 갈라져 맨땅으로 건넙니다. 바위가 터져 물이 나오고, 만나가 내리고, 메추라기가 몰려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며 체험한 백성들이,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요. 못 봐서, 체험치 못해서가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엘리야 선지가 갈멜 산에서 바알선지자 850명에 대해 홀로불로 응답하소서.’대결을 벌이는데, 바알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외치고 몸부림쳐도 아무 기색이 없던 하늘에서, 엘리야의 두세 마디 기도에 불이 내려 제물을 몽땅 태웁니다. 이어, 몇 년이나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단비가 쏟아집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봤음에도, 엘리야선지는 이사벨 왕비가 죽이러한다는 말에 정신없이 도망칩니다. 보고 체험한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제자들도 그렇지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라 변화 산에 올라가니, 예수님이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합니다. 보고 너무 좋아서,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사오니 여기서 사십니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제자들은 날래게 도망쳤지요. 우리가 몇 번 보고 놀란다, 별 게 아님을 알려줍니다. 본 다음에 깨닫고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초를 보면 초인 줄은 알지만, 어두울 때 불을 밝혀야 제 역할을 하지요. 초로만 별 쓸모가 없습니다. 전구도 그렇지요. 전기선에 연결해서 불이 들어와야지, 아니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믿은 성도도 세상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의 성도다운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교회 다니니 마음이 좀 편하다, 그런 정도로는 성도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부족함을 살폈지요. 이적을 본다, 은혜를 체험한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성도답게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유지해야합니다. 갓난아기를 생각해봅니다. 아기가 태어나 제일 먼저 아는 것은 어머니지요. 어머니와 가까이만 있어도 기쁘고 평안하고 잠이 듭니다. 이때 어머니들은 아기가 엄마를 알아본다고 대단히 좋아합니다. 아기가 엄마를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기가 엄마의 나이나 이름, 직업을 아나요? 엄마의 성품을 아나요? 그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거죠.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아기가 얼굴을 가릴 때,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냄새로 구별한다 합니다. 엄마의 특유한 냄새를 맡으면 우선 평안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으며 처음 찾고 누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짐으로 갓난아기가 어미 품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평안을 누려야합니다. 아기가 엄마의 냄새로 엄마를 알 듯, 성도는 서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김으로 그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합니다.

 

아기가 엄마의 성격, 용모, 배경 등을 알아서 내 엄마구나 하지 않듯, 우리는 기독교, 하나님, 예수님, 성경에 대해 알기 전에, 예수 믿으니 평안하구나, 시편시인의주의 전의 하루가 다른 곳의 천 날보다 낫다.’는 마음부터 가져야합니다. 물론, 처음 교회에 나온 이가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없으니, 오래 믿은 이들부터, 하나님의 평안이 내게 있는지 살펴서, 찾아 누려야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가 보고 따를 수 있지요.

 

믿는 이가 가장 먼저 찾고 누릴 것이, 평안임을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셨지요. 팔복 중에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우리는 믿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화평케 하는 자라야합니다. 화평케 하려면 먼저 내가 평안을 누려야지요. 내 안에 평안이 없으면서 남을 화평케 한다, 말이 안 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볼 때마다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셨지요.

 

이처럼 성도에게 평안이 가장 중요한데, 주위여건이 평안해서, 즉 몸이 건강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고, 자녀들이 잘 되어서만 누리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평안을 누려야하기에 성도의 평안은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답게 살려면 주님을 더 알아가며 믿음이 자라야합니다. 갓난아기가 엄마 품의 평안이 좋다고, 엄마 품에 계속 머물 수 없는 것과 같지요. 나이가 들고 키가 자라고 학교를 다니며,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며 믿음이 자라야하지요.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지만, 성도는 자라가며 새 사람이 되어갑니다. 성도는 전과는 다른 새 사람이 되어야지요. 달리 표현한 것이, 12:2인데 함께 읽습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분별은 다름을 알고 그리 행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같은 세상에 살아도, 안 믿는 이와 삶의 목표와 내용이 달아야합니다. 이것이 올해 교회 표어인다시 거룩한 교회로!’교회와 교인이 안 믿는 이와 구별되지 않으니 더 구별되게 살자는 것이지요. 그 중에 우리가 힘쓸 것이 살전 5:16이하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기쁨과 감사를 실천하면, 첫 번 째 말씀드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며 주의 평안을 누릴 수 있지요.

 

세 번째로, 성도답게 살려면, 즉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평안을 누리려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라야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완결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후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용감히 복음을 전하며, 교회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 오늘에 이르렀지요. 성령은 성경을 기록하게 했고,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말씀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게 하고, 불의와 유혹을 물리치고, 참된 성도의 길을 가게 도와줍니다. 이렇게 중요한 성령이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신 요 16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성령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정리합니다. 오늘말씀에서 제자빌립이 예수님께하나님아버지를 보여주시면 족하겠습니다.’하자,‘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하시면서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내가 하는 말과 이룬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

 

그러니,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주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도의 삶을 살라는 뜻인데, 그러려면 내 속에 성령이 계심을 믿고 의지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셔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을 더 알아가며 뜻을 이루는 능력의 성도로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을 의지하며, 성도다운 거룩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강해 81. 하나님을 보는 자 /14:7-14/ 이종철목사

2022-06-07 10:52:01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나님을 보여주옵소서

 

도마에 이어 이번에는 빌립이 요청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이는 빌립의 요청만은 아닙니다.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가진 소원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면 믿겠나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 인생에 당한 어려움도 하나님의 얼굴 한 번만 보고 나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을 보고 나면 신의 뜻도, 섭리도, 사후 세계도 다 이해될 것입니다.

 

이런 요청은 이미 모세가 했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33:18) 하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완전한 모습이 아닌 그 등만 보여주었습니다. 출애굽기 3320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까? 보긴 보았지만 그 완전한 모습을 본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은 인간의 소망과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한계가 교묘하게 중첩되어 있습니다.

 

신의 영광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나타납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박카스)를 낳았던 세멜레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제우스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를 질투한 제우스의 부인 헤라 여신이 세멜레를 충동질하여 제우스의 본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게 만듭니다.

 

세멜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스틱스 강에 맹세했기에 제우스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빛나는 모습을 본 순간 세멜레는 불에 타서 새까맣게 재가 되고 맙니다. 이 때 세멜레의 뱃속에 잉태되었던 디오니소스를 급하게 꺼내어 제우스의 허벅지에 넣어 키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의 영광을 인간이 직접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거나 보여주기 어렵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이미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었기에 빌립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등이 아니라 그 온전한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가까이 두고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깨달음, 또는 앎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이를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를 깨달은 자는 하나님을 보는 자입니다.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의 고백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서신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요일1:1-2) 요한은 영원한 생명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약의 사도들은 모세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예수와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일어났습니다.

 

문자에서 영광으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영광을 폭발적인 빛의 분출, 황홀경 또는 경외감. 압도적인 거룩함 또는 지극한 평화의 감정 등으로 연관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모습 속에서 신의 영광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하나님 체험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1-5) 천사들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발과 얼굴을 날개로 가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환한 빛 앞에 자신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는 죽을 것같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포로된 땅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불타는 수레 가운데 좌저하고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1:4-28)

 

에스겔의 하나님 묘사는 대부분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네 생물, 곧 네 천사들의 압도적인 영광스러움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 전차와 같은 수레 위에 계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세 유대교에서는 이 장면에서 메르카바(전차, chariot) 신비주의가 태동하였습니다. 일곱 단계의 천상을 향한 상승 여행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불의 전차 앞에 이르려는 신비주의입니다. 신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고 신의 영광은 말할 수 없는 위엄 가운데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은 초라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아무리 현자라 해도 인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한이야 깨달았기에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빌립이나 우리는 바로 앞에 예수님이 계신다할지라도 그 얼굴에서 신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전제를 바꾸십시오. 우리의 전제로 말씀의 사실성을 따지지 마십시오. 거꾸로 계시된 말씀 앞에 세상을 보는 우리 눈을 바꾸십시오.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는 이제 신의 영광은 그런 환상적 신비적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사 속에서 신의 영광은 발견될 수 있다는 새로운 계시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에서 찾지 말라. 하나님을 성전에서 찾지 말라. 하나님은 바로 우리 곁 먼지 나고 땀 냄새 나는 한 인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영광의 일상화이고 인간의 신성화입니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의 형편은 또 다른데 우리는 이제 성서라는 문자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합니다. 인간의 몸은 단지 육체가 아니고 신성을 드러내는 통로였듯이, 문자는 단순히 글씨 정도가 아니고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릅니다. 이어지는 16절 이하에서는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성령이 바로 문자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영입니다.

 

유대 신비주의도 이런 유사한 교훈을 줍니다. 이탈리아의 사회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2014)에서 인용한 카발라 유대 신비주의 에피소드입니다. 그 창시자 바알 셈 토브는 아주 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면 숲속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뀐 뒤 그의 뒤를 이은 마지드 메세리치도 같은 상황에 봉착하면 숲속의 그곳에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불을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고 그의 뒤를 이은 랍비 모세 라이브 사소프도 힘든 상황에 처할 때면 숲속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어떻게 드리는지 모르지만 이 장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처럼 장소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그의 희망은 곧장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세대가 또 바뀐 뒤에 랍비 이스라엘 리신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자 성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드릴 줄 모르고 기도드리는 숲속의 장소도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랍비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우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감벤의 책 제목 불과 글이 의미하듯 글은 우리를 불로 인도하는 통로입니다. 글의 목적은 감동 정도가 아니라 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곧 요한복음에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가 아닙니다. 불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살아있음과 풍성함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는 목적입니다. 문자가 우리를 신비로 이끕니다. 문자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13절과 14절 말씀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이것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까?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됨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과 하나 됨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니 예수님은 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하시지도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를 통해 산이라도 옮길 수 있습니다. 돌이 빵이 되고, 바다 위를 걸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물에 빠질 수야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자연도 사람의 말에 순복합니다.

 

이 연합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대가 조지 뮬러의 기도에서 이런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지 뮬러는 평생에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2천여 명의 고아를 먹인 고아의 아버지며, 300만 권의 성경을 보급했던 선교사였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서 뮬러는 손을 맞잡고 식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끝날 무렵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대의 마차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을 위한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그 마음으로 기도하자 그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조지 뮬러의 기도 응답 사례 중에는 좀 의아한 것도 있었습니다. 퀘벡에서 리버풀로 횡단하는 배를 타고 가려는 데 주문한 자신의 의자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약한 그의 아내는 그 의자가 없으면 안 됩니다. 조지 뮬러는 그 의자를 정시에 보내주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불가능하다 하였지만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 의자를 기꺼이 주시기를 특별히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리라 믿을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출발 직전에 의자는 배에 실렸습니다. 조지 뮬러는 너무 사소한 것을 기도한 것 아닙니까? 이를 통해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는 기도의 능력을 찬양해야 합니까? 저는 오히려 여기서 뮬러와 하나님의 하나 됨을 봅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것을 기도하고 또 들어줄 정도로 친근합니다. 기도 응답의 비결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무릎을 꿇고 성경을 100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기 기도 내용이나 응답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드리는 기도였기에 항상 응답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뮬러의 기도는 다 응답되었는가? 위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죠지 뮬러에게 사랑하는 외동딸이 발진티푸스로 죽어가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는 그때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자 이런 확신이 들었다고 그의 전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완전히 평안했고, 우리 아이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심지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내게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감동이 들었을 때조차 조지 뮬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여 당신에게 좋다면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뮬러의 기도는 응답이 되어 그 외동딸은 살아났습니다. 뮬러는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 중 하나였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 만일 사랑하는 내 딸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면 우리 딸을 살리는 것보다 그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확신이 있었다.”

 

기도 응답의 비결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이 연합에 더 힘써야 합니다. 단지 주문처럼 예수 이름으로를 외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 될 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든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요한복음 강해 (97) -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14:7-11/ 김형익 목사

2021-05-08 15:58:32

 

1. 인간 안에 있는 본성적 갈망(7)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거의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봐하는 말이 비록 갈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보고 싶다혹은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하는 식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빌립 처럼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하는 갈망을 신자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체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뭔가 화끈한 것을 경험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일 것입니다. 물론 아주 경건한 신자도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앞의 사람들과 그 방법이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실재하시는 분이시지만, 보이지 않으시지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2.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

 

A. 하나님을 본 사람들(24:10; 33:18)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주제지만, 성경에 보면 그런 표현들이 종종 나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했습니다(33:18).

 

이 구절이 구약의 헬라어 번역 성경인 칠십인경에 보면, “주를 보게 하옵소서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광을 보여달라는 것이나 하나님 자신을 보여달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시면서도(33:20)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신 채, 당신의 영광 곧 모든 선한 형상이 지나가는 것을 모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후에, 모세와 아론, 그리고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와 70인의 장로를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24:10~11).”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과 같은 예들도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볼 것에 대한 예언(40:5).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0:5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한복음 1:14이 그 해석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드러나서 비추일 것이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세상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이런 구약의 사건들과 말씀을 기억하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한 갈망이나 경험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오래도록 그리스도 곁에 있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9a)

그럼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위대한 선언 후에 이어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7).

 

이것은 일단은 주님의 예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이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어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련의 사건들이 메시아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텐데 이때에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하게 알고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주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는 빌립은 제자들을 대표해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주님께서 빌립의 요구에 대해서 약간의 책망조로 말씀을 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빌립이 하나님을 보고서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책망하시는 요점은 하나님을 보고서도 왜 보여달라고 하느냐에 있지 않고 주님이 그와 그렇게 오래(3년 동안)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누구신 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빌립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수없이 많이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도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더 이상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10:30).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하여 돌로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보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7,9).”

 

4. ‘본다’(seeing)는 것의 의미

이 지점에서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가끔 어떤분들에게 제가 이런 질문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만날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모호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답도 제 각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만났든가 못 만났든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역시 문제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입니다.

 

A. 빌립의 기대(추측): 보는 것, 감각적 경험, 큰 것.

먼저 빌립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빌립은 이제까지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이 행하시는 엄청난 기적들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권세 있는 말씀도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요청하는 것은 뭔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대단한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들이 한 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것 하나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이제껏 주님을 좇으면서 경험하고 들은 것들을 생각하면 어찌 그가 더 큰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저는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어떤 것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사실상 아무리 큰 것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본문에는 본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빌립이 쓴 말과 주님이 쓰신 말은 단어가 다른 단어입니다. 빌립이 보여주옵소서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보여주다, 전시하다. 증거를 제시하다와 같은 뜻입니다. 말하자면, 빌립의 요구는 하나님을 보게 해서 증명해 달라는 식의 요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이해하다, 깨닫다는 뜻입니다. 사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B. ‘본다는 말의 용례

참고로 우리가 성경에서 본다는 말을 쓸 때 얼마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가를 볼 수 있는 좋은 본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요한과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젊었기에 먼저 무덤에 도착했는데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구푸려 (무덤 안에)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 5절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어 도착해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는데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 6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도 무덤에 들어가서 그 상황을 보고믿었다는 말이 8절에 나옵니다. 첫번째로 요한이 세마포를 본 것은 세마포가 그의 눈에, 시야에 들어왔다는 가장 평이한 의미에서의 봄(seeing), 의식적이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 본 것은 세마포가 놓여있는데 머리를 쌌던 수건도 다른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본 것입니다. 이상하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 본 것입니다. 그 뒤에 요한이 따라들어와서 보고 믿었다고 했을 때 그가 보았다는 것은 이해심을 가지고 본 것, 즉 깨달은 것, 이해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 단어가 다 다른 단어들이 사용된 것입니다.

i. 시야에 들어오다(20:5)

ii. 의식적으로 쳐다보다(20:6)

iii. 이해심을 가지고 보다(20:8).

 

우리가 여기서 본다는 말에 대해서 왜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인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힐끗 보듯이 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주님이 아버지를 본다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바로 위에서 사용된 단어의 용례 중 세번째로 사용된 것, 즉 요한이 보고 믿었다고 할 때 본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조금 더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주님은 아버지를 본다고 말씀하실 때,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을 보는 방법

아버지를 본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버지를, 하나님을 깨닫는다, 이해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깨닫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명제, 둘째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명제입니다.

 

A. 깨닫는 것이 보는 것이다(고후 3:18).

먼저 깨닫는 것이 보는 것이다 하는 명제를 살펴보지요. 고린도후서 3:18을 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도 주의 영광을 본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본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4:2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사도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거짓 교사들처럼 행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4:6입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바로 복음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다시 3:18주의 영광을 보매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명확해지셨습니까?

 

B.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11:40; 고후 5:7).

두번째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명제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은 일면 보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개념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인식 감각이기에 종종 보는 것에 비교하여 설명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가령, 바울 사도는 조금 전의 말씀을 하고나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합니다(고후 5:7). 믿음은 육안이 아니라 영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무덤 앞에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여기서 주님은 분명하게 믿으면 본다는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보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두 가지 차원에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임이 자명해졌습니다. 즉 복음의 진리를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는 말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신 하나님(1:18)

결국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 대상과 열쇠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라고 말할 때에도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1:2).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원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A.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내주하심(indwelling)

예수님은 당신을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이미 제자들이 들은 바요 믿는 바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는 서로 내주하는 면에서 완전히 하나이시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행하시는 일을 주목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라는 근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 하나됨을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맹목적 신앙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지 않으십니다. 두 가지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입니다.

 

B. 예수님의 말씀(10)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독자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이런 말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주권적으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불렀을 때 나사로가 살아나온 것 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전능한 능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을 입증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C. 예수님의 일(11)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혹시 안 믿어지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다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의 근거로 당신의 행하신 일들을 제시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사도 요한은 이미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100여 차례에 걸쳐서 이 말씀들을 상고해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하나 하나 살펴보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7. 성령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다(2; 고전 2:14)

그러나 이 말씀을 맺기 전에, 결정적인 것을 하나 더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7절에 이제부터는이라고 하신 말씀을 저는 예언이라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부어주심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라고 책망조로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완전한 지식, 온전한 이해는 성령이 부어지고 나서야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동행하던 이야기가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도 주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갈 것이 아니냐?”(24:25~26)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교회에 부어지고 나서 베드로나 기타 사도들은 놀라운 믿음으로, 그리고 놀라운 영적 지각으로 설교를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은 결코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다른 어떤 인식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영적 지각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자,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본 자들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교회를 다니고,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듣고서도 오늘 주님의 책망을 들어야 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그 말씀을 인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예수 그리스도 없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께로 갈 수도 없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 복된 은혜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께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너무나 놀라운 약속 /14:7-18/ 유기성 목사

2016-08-03 15:01:31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즘 우리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주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전심으로 기도하던 120명 문도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임하였듯이 교회 안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요즘 바람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들판에 나가면 봄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꽃들이 핍니다. 꽃이 싫다고 꽃을 꺾고 돌아다녀도 꽃은 핍니다. 봄 바람 때문입니다.

지금 봄 바람만 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성령의 이 바람이 모든 성도들의 심령에도 가정에도 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대단히 두려워하고 근심했습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영생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는 너무나 중요한 세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하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12) 둘째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약속입니다. (13-14)

 

정말 믿어지지 않는 약속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데 그것을 제자들이 한단 말입니까? 정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며 그 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까?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질까? 그러나 이 두 가지 약속들은 또 한 가지 주실 약속에 따라 오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 지실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께로 가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다시 승천하신다 하더라도 근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님은 분명히 다르시지만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십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기도 합니다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본문에서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사실상 한 가지로 역사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기적은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본 것이나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과 같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일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셨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 때 빌립이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8) 질문하였는데,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9)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되면 내가 그 동안 행했던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까, 사람이 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처럼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께서 앞으로는 성령님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을 믿게 하시려고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따를 때는 또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예수님이 승천해 가시고 눈에 보이는 분은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은 똑같은 사역을 계속하신다. 성령님으로 주님은 역사하신다는 그 사실을 제자들이 믿어야 이제 성령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오늘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것도 참 신비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보고도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역사이지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깨닫게 하고 믿게 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님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게 하고 깨닫게 하고 그리고 예수님에게 순종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성령님의 역사를 그냥 예수님의 역사라고 같이 쓰고 있는 부분이 여러 구절이 나옵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같이 쓰셨어요. 물론 성령님과 예수님은 다른 분이시지만 왜 이렇게 썼느냐 하면 성령님은 전적으로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성경은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또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입니다. 얼핏 잘 이해가 안됩니다만,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6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해 가시고 성령님이 오신 것이 우리에겐 더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왜 그렇습니까?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육신으로 계속 계시는 것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성지순례 중에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권사님 한 분이 조크를 하셨습니다. “이상한데요, 그 주일에 예수님은 우리 교회에서 큰 은혜로 역사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육체로 같이 계셨다면 예수님의 역사가 성남과 예루살렘에서는 동시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한국, 너무나 먼 곳이라 두 곳에 동시에 역사하는 것이 언듯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태양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을 보면 어떨까요? 동시에 두 곳을 다 봅니다. 성령님은 지구상의 모든 성도들에게 동시에 역사하실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고 살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다녀왔지만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었다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예수님을 단 5분 정도만 만나려 해도 몇 십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24시간 365일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친밀하고도 살아있는 관계 속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하셨습니다.

여기서 고아라는 말을 사용하셨는데, 이 말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이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처럼 산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혼자 살아간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 고독하다, 보호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알아도 실제로는 혼자 산다는 뜻입니다. 먹어도 자기가 책임져야 되고 잠자리도 자기가 책임져야 되고 자기 미래도 자기가 다 계획해야 되고 그 결과도 다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공자 믿듯이 부처 믿듯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내 구주시고 내 주님이셔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서 그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병든 것이 고침을 받고 세상을 이길 능력을 받게 됩니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심히 보신 분들은 깨달으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시기 보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신 관계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설혹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라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가 성령의 역사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5-16절에 보면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사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역사를 그대로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를 그냥 예수님의 역사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난 다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새롭게 믿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것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갔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아는 것과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다가 제일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는 부분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감사와 찬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이 믿어지니 이미 모든 응답을 얻었음이 믿어졌습니다. 더 이상 다른 기도가 없어졌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그 고백이 그대로 믿어지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버지 품 안에 있는 것 같은 은혜를 누립니다. 이것이 저만의 체험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의 체험이고 축복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자신이 모세나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좀 더 하나님을 잘 믿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빌립과 같은 심정이십니까?

 

오늘 이 시간에 나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 내가 진짜 하나님을 분명히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신앙 생활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텐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붙잡으세요. 이미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은 이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모든 믿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하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며 주님이십니다. 이 믿음이 분명한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이 분명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요즘 안수 기도 중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가 바뀌면서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에는 안수 기도할 때 그저 간절히 하나님께서 그 성도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그리고 풍성한 복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도 나는 죽고 예수님이 하셔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안수할 때 나의 생각, 열정 조차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 역사하옵소서. 성령님, 역사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당황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성령님의 역사입니까?” 기도했습니다.

 

그 때 부목사들이 안수하게 하라. 내가 역사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심야기도회 때 부목사님들께 안수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으로 역사하신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주님 혼자서 이 땅에 계시면서 주님이 역사하셨다면 얼마나 하셨겠어요?

 

주님은 하나님께로 가시고 성령님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니까 복음이 유럽으로 아시아로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저 혼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 혼자 기도했다면 밤을 새워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일임을 알았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하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예수님은 36개월 동안 열두 제자 중 한 명은 실패하고 열한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한 번 말씀을 전할 때 3천 명, 5천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3년 동안 사역하였으나 베드로는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안드레는 러시아 정교회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으며, 도마는 인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1:4-5)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모든 성도들은 아버지의 이 약속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주시옵소서! 저에게도 약속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두 다 성령님을 받습니다.

 

오늘 성찬을 합니다. 성찬은 놀라운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주님이 만나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라.’ 성찬을 통해서 주님을 우리를 계속해서 만나주시겠다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제 성찬을 받으실 때 여러분에게 오늘도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어린 아이과 같이 믿고 구하십시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이 시간 저에게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는 영적인 회복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는 두려움과 근심에서 평안을 얻어야 할 때입니다. 제게 확신을 주십시오.” 오늘 성령님께성 여러분에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제 성찬을 받기 전에 우리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근심을 덜려면 기도하라 /14:12-14/16:23-24/ 옥한흠 목사

2015-05-09 16:39:01

 

지난 20여 년 동안 교회에 나와 도 기도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마음 고생을 하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기도할 장소를 찾지 못해 마당 이 곳, 저 곳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제 마음이 얼 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 양관을 지으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 분이 있다면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와서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기도 전용실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여러분이 비디오를 통해 보 셨지만, 누구든지 우리 교회 성도면 와서 하루 종일 아니면 밤새도록 하 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분 위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옆방에 서 기도하는 소리가 가능한 들리지 않도록 배려한다고 했는데 어느 정 도 효과가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오래 전부터 우리 교 회 안에는 기도의 열기가 달아오르 고 있는 것을 봅니다. 중보기도실에 서는 중보기도단이 매일매일 시간을 맞추어서 함께 모여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봅 니다.

 

예배 드리고 있는 바로 이 순 간에도 중보기도단이 예배 실황을 비디오로 보면서 설교자를 위해, 또 예배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부, 청년부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면 의례 뜨거운 기도 소리로 진동하는 것을 저는 자주 목격을 합니다. 하 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기도에 열 심을 내는 뜨거운 분위기를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 는 사상 최악의 무신론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 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눈 으로 분명히 목도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마귀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시대에 우리 모두가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열두 명 의 제자들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교 회를 지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사 도들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 는 일에 전념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 청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지난 5주간 동안 사랑의 교회가 지난 20년 간 하나님이 주신 소명대로 특별히 힘을 쏟아온 사역 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리고 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리는 페스 티발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페스티발로 내년부터 우리가 시작해 야 될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또 하나 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주말 교회 프로그램과 영성 훈련 프 로그램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런 페스티발을 하는 마당에 말씀을 통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기도 할 때 어떠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일이라 고 저는 확신합니다.

 

근심이 많은 인생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제자들 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권면하신 말씀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 용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 나시면서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 게 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41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 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내용의 목적이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 보 십시오. 그들은 3년 동안 미친 사람 들처럼 예수님만 따라 다녔습니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어떻 게 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 다.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해방자요,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 자다.

 

지금까지 기다린 메시아다. 이 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을 좇 았던 사람들이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 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예수 가 지금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 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민족 반역 자로 몰려서 처형을 당하면 그 선생 을 따르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생명을 보장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한 근심에 눌려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는 도무지 떨치고 나갈 수 없는 근 심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 다. 이것이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기 갈 길을 갈 수 없 으셨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나 마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 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에 있는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입 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 흔 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 만들기 위 해서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첫 마디에 예수님의 심정이 고스 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에 근 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모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기를 원하셨 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27절과 166, 20절로 23절 말씀 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도리 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 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단단히 붙들어 주기 위해서 여덟 가지 실제적인 권 면을 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 도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근심해 보지 않은 사 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근심이 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좋 지 않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정의했습 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반쪽 의미 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 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내일의 문제를 놓고 염려하는 것도 근심이 지만, 이미 눈앞에 터진 일을 가지 고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것도 근심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앞의 일만 놓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 에 벌어진 일을 놓고도 근심을 합니 다. 이런 점에서 근심에서 면제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이 이런 명언을 남겼습 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 람은 낮에는 너무 바빠서 근심할 틈 이 없고 저녁에는 너무 피곤해서 근 심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아주 그 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도 사실은 허점이 많습니다. 왜냐하 면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리 바빠도 근심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아무 리 피곤하여 잠이 쏟아져도 꿈속에 서 마저 근심 때문에 악몽을 꾸기 때문입니다.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인생이 어찌 할 없는 팔자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10층에서 탔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약 간 이상한 기질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면 왜 그 렇게 좋은 지 모릅니다. 짧은 시간 이지만 쉴 수 있을 것 같고, 저 자 신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분도 금방 끝나고 말았습니다. 엘 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 멈추어 서더니 어떤 아주머니 타는 것이었 습니다. 이사 온지 그렇게 오래 되 지 않아서 저하고 안면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인상도 그렇게 곱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부인이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옵니다. 생소한 남자와 생소한 여자 가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것은 현대 문명이 주는 고약한 스트레스입니다. 불과 30초밖에 안 되는 시간임에도 제게 는 3분이나 되는 것 같이 길게 느껴 졌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인상을 주어서 다음에 언젠가 전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넵 니다. 엘리베이터가 3층쯤 내려왔을 때 제가 그 부인에게 말을 걸었습니 다.

 

"요즘 살기가 괜찮으세요?"

 

그 랬더니 그 부인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습니 다.

 

"아니에요. 새로운 근심이 또 생 겼어요."

 

그리고는 문이 열리자마자 허둥지둥 뛰어 나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래, 저게 인 생이다. 넓은 아파트에 살고, 겉모습 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 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묵은 근심을 가지고 고생하다가 조금 살만해지니 까 또 다른 새로운 근심이 들어오고 하는 게 인간이야' 하고 생각했습니 다. 이것은 아마 우리 모두가 경험 하는 느낌이 아닌가 합니다.

 

근심을 될 때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번 이상 근심 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고 권면하 고 계십니다. 1413, 14절과 15 장에,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나중에 우리가 하나 하나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기 도하면 정말 근심이 날라 가는가?"

 

제자들의 형편을 보면 예수님의 말 씀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제 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해 서 당장 근심이 날라 갈 수 있을 만 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 입니다.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 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 살렘에서 마음놓고 걸어 다닐 수 없 게 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해서 금방 근 심이 날라 가겠습니까?

 

우리의 경험 을 놓고 보아도 우리가 무슨 근심거 리를 안고 고민할 때 기도한다고 해 서 금방 근심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 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가 아스피린이라는 약 과 같지 않나 하고 생각할 때가 가 끔 있습니다. 두통이 날 때면 우리 는 아스피린이라는 약을 먹습니다. 아스피린 한 알을 먹으면 서너 시간 정도는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 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금 머리가 지긋지긋 아프기 시작하면 또 한 알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이 쌓이는 것 같으면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 하는 그 순간에는 마음이 평안해지 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눈을 뜨 고 나면 또다시 근심하기 시작합니 다. 마루 밑에 숨어 있던 개가 손님 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 갑자기 짖으 면서 튀어나오듯 근심이 우리에게 확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시적인 진통효 과를 가져다주는 아스피린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만약 기도가 그런 효과를 주는 데서 끝났다면 기도는 벌써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 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미 폐물 처리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도가 아스피린 같은 것이라면 처음에는 속아서 몇 번 해보겠지만 계속 해 봐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면 누 가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돌 이켜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이 악 하고 더러울수록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더욱 새로워졌 습니다. 기도에 아스피린과는 비교 도 안 되는 그 이상의 효력이 있다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근심하는 사람에게 효력이 있기 때 문에 기도해 본 성도들은 이렇게 말 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십니 다. 성경을 보아도 기도하라고 하시 지 않아요?"

 

기독교 역사로 보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나 우리 신앙생 활에 있어 기도가 이처럼 중요한 요 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절대 우연 이 아닌 것입니다.

 

근심이 몰려 올 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자신들의 경험을 통 해 입증을 했습니다. 제 경험을 통 해서도 저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 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얼마 동안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진짜 정신없는 일을 한번 당해 보세요. 한동안 정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기도도 잘 안됩니다.

 

솔직한 심정입 니다. 눈을 감기는 감아도 기도가 안됩니다. 김진경 박사는 북한에서 한 40일 억류되어 있을 동안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 가 안 나오더랍니다. 내일 생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판에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저 녁까지 주기도문만 수백 번 계속 외 웠다고 합니다. 그는 주기도문의 능 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 고 간증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궁지 에 몰리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 러다가도 예수 믿는 사람은 견디다 못해서 마침내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골방을 찾게 됩니다. 기도 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집니다.

 

이내 근심이 밀려와서 불안 해지면 또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 나서 불안하면 또 기도하고, 낮에 시간이 나면 교회에 와서 기도합니 다. 이렇게 자꾸 기도하다 보면 놀 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이었구나.\'하고 새삼스 럽게 깨닫게 되는 신비한 세계가 우 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6-7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 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 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 키시리라.\"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 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러나 이 말씀은 약간 비약된 것입니 다.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하 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 러니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염 려가 되면 모든 간구와 기도로 하나 님께 구하라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않다고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 다. 염려하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약속의 말 씀을 따라 기도하기를 힘쓰면 정말 희한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 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천국의 평안을 안겨 주는 것을 체험하게 되 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한 다음에 눈을 뜨면 근심거리가 여전 히 남아 있습니다. 염려가 됩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논한다면 나는 여전히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 입니다. 기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근심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 하 나님의 평안이라고 하는 햇살이 비 쳐 듭니다. 하나님께서 근심이 더 이상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그 손으로 내 마음을 굳게 붙들어 주시 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에 붙들려 기도하다 보면 문제가 하나 하나 해 결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 니다. 할렐루야!

 

기도는 금방 울던 사람을 금방 웃게 만드는 무슨 요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무조건 없애주는 무 슨 묘약도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신비스러운 저항력을 길러 줍니다. 마음에 평안이 밀려들 때도 근심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그 근심에 짓눌리지 않게 만드는 저항력이 됩 니다. 우리는 이 저항력 때문에 근 심 가운데서도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태산처럼 우 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그 무시무 시하던 문제가 희한한 방법으로 하 나하나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 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 이것은 진리입니 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왜 기도가 이와 같은 엄 청난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줄까 요?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 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 문에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키워주고 나중에는 그 모 든 근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받 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 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 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1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23-24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 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 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 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 리라.\"

 

이 모든 구절이 무엇을 말합 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말은 한자로 \'\'() 인데, 저녁 석()자 밑에 입 구() 자가 붙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글자를 놓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서() 사람들의 얼굴을 잘 분별하지 못할 때 입으로() 소리를 내서 사람을 찾는데 필요한 것이 이름이다."

 

그 럴 듯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름은 더 나아가 그것의 주체가 되는 사람 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나사렛 예수 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이신 그분을 가리킵니 다. 그만큼 주님의 이름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우리는 그 의 피조물입니다. 만드신 자와 만들 어진 자, 이 두 존재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 므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자를 만난다든지 창조자를 찾아간다는 것 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 는 죄 가운데서 날마다 죄만 짓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아무리 헤매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길로 가 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 리는 그 해답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멀 고 먼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부드러운 관계로 만드시고 자 중간에 채널을 하나 마련하셨습 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입니다. 디모데전서 25절을 보십 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 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 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 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유일한 중보 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 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채 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 게 자기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소리친다고 하나님이 들 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처럼 불상 앞에서 천 번을 절 한다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 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 리는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이 붙 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 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중보자 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중보자가 되시 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나의 기도가 어 떤 기도이든 간에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도록 해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기 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예수 이름이 붙인 기 도는 거절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얼마 나 기뻐하셨는지 그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사 도행전 4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 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 니라."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 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이 름인지, 거짓 선지자들도 이 이름을 가지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하나님 을 엉터리로 믿는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희한한 일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의 이 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예수 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 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른다 하십 니까?"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 한 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 리가 이러한 대단한 이름을 들고 나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기도 를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이야 기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한참 남 북 전쟁에 휘말려서 많은 사람이 죽 어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농촌에 있는 청년이 징집 을 받아서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런 데 너무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고 두 려워서 그는 탈영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해 체포되어 사 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 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는 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 다. 그야말로 삶의 의욕이 다 사라 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아들을 살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 고민하던 그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대통 령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한번 탄원 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만나러 백악관을 찾아갔습 니다. 그러나 경비들이 이 시골 남 자를 들여보내 줄 리 만무했습니다.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바 람에 그는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서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비탄에 빠져 있는 그를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소년 하나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그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소년은 느닷없 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 아듣다가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그 소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그를 수위실로 데리고 가더 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가 데리고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랬더니 모든 수위들 이 아무 소리 않고 그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를 대통령 이 집무하는 집무실로 데리고 가더 니 링컨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 니다.

 

"아빠,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 에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세 요. 너무 가슴 아파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 소년이 대통령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대통 령이든 누구든 간에 아들은 언제든 지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 예수의 이름 부르면 우리 자신이 마치 예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하 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 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둘째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 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읽은 요한복 음 1413-14, 157,16, 16 23절을 보면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 지'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티안 \'(tian)인데,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서 기도를 가려서 듣지 않으시겠다 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든지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도든지 하나님께서 가리지 않고 다 들이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몰 라서 잘못 구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 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고 그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기 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 구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에 100 퍼 센트 일치하는 기도만 해.\"하고 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원 으로 가야될 사람이든지 아니면 하 나님이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입 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완벽한 기도를 드리지는 못합니다. 로마서 82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땅 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 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는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도와주셔야 됩니다. 염려에 막 짓눌려 보십시오. 그 기도가 무 슨 조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매달 리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 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중소기업 사장이 은행에서 대 출을 받기 위해서 서류를 들고 가다 가 돌아서서 도장은 빠진 데가 없는 지, 이름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보 고 또 보듯 신경을 곤두세워서 기도 하라고 하셨다면 우리 중에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 에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를 과연 들어 주실까? 안 들어 주실까?\'하는 것이 도리어 염려가 되면 혹 떼려다 가 혹 붙이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감사하게 도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가리지 않고 다 들어주시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한번 여러분 자신의 기도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큰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 는 내 마음의 감정에서부터 시작해 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큰 일까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다 양합니까? 우리에게 이 모든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제롬 스미스라고 하는 분이 신구약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기도 목록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하는 위대한 하 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를 목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제가 세어 보니까 328가지나 되더라 구요. 그 가운데는 날 죽여달라는 기도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 보 게 해 달라는 기도까지 별의별 기도 가 다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 다. 성경 안에 이렇게 다양한 기도 제목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른 데 있 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 어주시겠다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자가 어떻게 근심 때문에 희생을 당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자기를 죽여 달라는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에 짓눌려서 병들고 절망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완벽하게 구하지 못하 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응답이 약속된 기도

 

셋째는, 기도하면 반드시 받을 것 이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4절을 보 십시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 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 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 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앞부분은 약간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 동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의 아들 되신 그분을 직접 모시고 자고, 먹고 매일 다니는데 무엇 때 문에 엎드려서 기도하겠습니까?

 

그 러니까 제자들은 기도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시고 나면 제자 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기 만 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응답은 근 심을 삽시간에 날려 버립니다.

 

금방 받는 응답이든 오랜 기다림 후에 받 는 응답이든 간에 응답이 임하면 우 리 가슴에 기쁨의 샘이 솟구치고 그 기쁨의 샘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을 싹 쓸어 냅니다. 할렐 루야! 우리가 기도해서 이러한 기쁨 을 체험하기만 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7일부터 일주일 동안 교회 중보기도단, 수양관 중보기도단, 주 일날 예배를 위해 특별히 중보 기도 하는 중보기도단에 참가한 인원은 총 478명입니다. 중보기도단에서 제 목을 내 놓고 같이 중보 기도함으로 써 응답 받은 내용들을 담당 교역자 가 갖다 주어서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응답을 해 주시는지요.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정말 \'무엇이든지\'입니다. 가지각색 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18년 동안 남편이 교회를 피해 다니면서 안 믿고, 최 근에 들어와서는 부부 사이에 심각 한 문제가 터져서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그 문제 해결할 길이 없어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중보기도단에 내어놓고 기도 를 부탁했는데, 기도하는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 까? 남편이 자기 발로 우리 교회 상 담목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끝난 것 아닙 니까?

 

또 어떤 집사님은 자기 집에 값 비싼 예술품이 있는데 요사이 경기 가 안 좋으니 팔고 싶어도 안 팔려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 팔아서 특별 헌금도 하고 싶은 데요 팔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다 가 잘 안되니까 중보기도단에 그 제 목을 내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중보 기도단에서 그 기도제목을 놓고 기 도하는 가운데 그 물건이 팔리게 되 었다고 합니다. 참 희한한 일이 아 닙니까?

 

어떤 분은 치매로 고생하는 친정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는데 찾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단에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 제목을 두고 기도하는 동안 산에서 어머니를 찾았다고 합니다. 금강산 인지 북한산인지 모르지만 산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니까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집이 회사담보물로 잡 혀서 날라 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중보기도단에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됐다고 고백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전세 문제를 가지고 돈을 받지 못해서 어 떻게 하나 고민하는데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하 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 를 냈는데 그만 뺑소니차로 고발이 되어서 참 난처한 처지가 됐다고 기 도를 부탁했는데, 그것도 하나님께 서 기가 막히게 해결해 주셨다고 고 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뺑소니차가 된 데서부터 시작해 서 남편 문제까지 얼마나 가지각색 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느 기도도 가리지 않고 때를 따라 응답 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면 가슴이 불이 붙게 마련입니다.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 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근심이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 왜 그렇게 공을 좋아하 냐?\"하고 묻는다면 멍청한 질문입니 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열심히 사랑을 하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사랑 하 냐?\"하고 묻는 것은 멍청한 일입니 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 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 하면 내가 반드시 응답해 줄 것이 다. 너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근심을 싹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주님이 약속해주셨는데, 그 약 속 받고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를 매우 부자연스럽게 여기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오만 가지가 눈앞에 다 나옵니다.

 

친구하고 수다 떠는 것은 1시간도 짧게 여기면서 기도하라고 하면 5분 을 못 견딥니다. 기도하는 것을 너 무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 들은 아직 믿음이 어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기도가 자연 스러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근심 이 있을수록 기도는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근심을 해결해 준다는데 왜 내가 근심을 끌어안고 걱정을 합니까? 아 버지, 어머니가 다 책임져 준다는데 자녀가 방에 앉아서 금식을 하면서 입학금 걱정을 한다고 상상을 해 보 십시오. 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입 니까?

 

비록 집안이 어렵고 힘들어도 아버지가 책임지고 학교를 보내주신 다고 하면 그것을 걱정 끝입니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아버지의 약속을 듣고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하 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 다.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 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분입니다. 능력이 너무 많아서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이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나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을 끌어안고는 청 승맞게 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삽 니까? 왜 기도하지 않느냐 그 말입 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도 하십시오. 기도를 하시되 기도가 밥 을 먹듯이, 잠을 자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처음에는 아스피린 먹는 것처럼 기 도를 해도 여전히 염려가 남아 있어 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계속 기도하면 나중 에는 희한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를 체험 해야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됩니다.

 

내년에 IMF가 어느 정도 해결 될 지 모르지만 한번 밑바닥을 치는 위기는 올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쳐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 도하면 아무 염려 없습니다. 무엇이 든지 예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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