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 거하라 /요일2:24-29/ 조학환목사
2022-12-28 13:58:17
1.오직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하라’는 말씀으로 모두 여섯 번이 나오는데 크게 보면 세가지입니다. 24절에는 처음부터 들은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하셨고, 27절 전반절에서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즉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7절 후반절에서는 주 안에 거하고 하셨습니다. 즉 말씀 안에 거하라. 성령 안에 거하라. 예수 안에 거하라는 세가지입니다.
그러면서 25,26,28,29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데 2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요, 27절에서는 그러면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요, 28절에서는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요, 29절에서는 말씀과 성령과 예수 안에 거함으로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과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있어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에 말씀 안에 거할 때에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이나 마귀 사탄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로운 삶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함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래야 주님 앞에 설 때에 잘했다 칭찬받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말씀안에 거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어떻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겠습니까?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능력과 지혜를 덧입지 않고 어떻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겠으며,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세상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씀과 성령과 주님 안에 거하지 못하여 세상 길로 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기쁨으로 뵙겠습니까?
요15:4절을 보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함같이 우리도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세상의 빛이요, 부활이요, 선한 목자요,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러면 이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부활이시며 유일한 선한 목자를 떠나서 어떻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어떻게 인생이 맺어야 할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인생이 가야할 참 길을 알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묵상할 때에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람으로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부활이시고 빛이신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운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의로운 삶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한다는 것은 그 안에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즉 어느 한 곳을 정해놓고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죽으나 사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황이 어떠하든, 내 생각이 어떠하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세월이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조금 구체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세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24절)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2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모습들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 이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 안에 살아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이성과 경험과 지식헤 따라 우왕좌왕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우리의 잣대와 인도자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셔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시119:98절에서는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고 하였고, 또 딤후3:15절에서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행20:32절에서는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하셨고, 시119:105절에서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 사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령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27절)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선은 말씀 안에 거한다는 뜻이요, 동시에 성령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2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누가 가르치고 강요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론 성령님은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구태여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게 없는 것입니다. 성령보다 더 훌륭한 교사는 없습니다. 요14:26절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근본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사랑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말씀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달려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은혜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27,28절)
사실 말씀과 성령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동일한 말씀입니다. 단지 여기서 말씀 안에 거하라. 성령 안에 거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구분지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역할이 약간씩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그대로 살아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는 의미에 주안점이 있다면,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와 평강과 기쁨 쪽에 주안점이 있고,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총, 부활의 능력,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 생명, 영광의 나라 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늘 27절 후반절과 28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하)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28절 상) 주 안에 거하라. 그 안에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고, 장차 그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게 뭡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으나 사나 주님께 붙어 있어서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삶의 행위가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과 생각과 행동들이 주님이 인정하실 만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당연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까 주님 안에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영광이 있으니까 그 좋은 것들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말씀과 성령과 주님 안에 거함으로 주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갈 때에 주의 은총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왜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까?
우리가 왜 말씀과 성령과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지는 앞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주고 계시기에 다시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24절)
오늘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즉 24절에서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할 것이라고 하시고, 그러면 우리가 왜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해야 하는지, 혹은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을 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물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으나 사나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 일단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지요.
2)마귀에게 미혹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26절)
25절을 봅니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즉 말씀 안에 거하고, 성령 안에 거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이 별 소리를 다해도 그까지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비웃고 협박을 해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가 정말 말씀과 성령과 예수님 안에 거하면 마귀 따위가 우리를 유혹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도리어 슬슬 도망갑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데 제까짓 게 감히 어떻게 대들겠습니까? 성령 대든다해도 주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과 성령과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세상의 그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나 조롱이나 왜곡된 가치관에도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3)주님이 강림하실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28절)
28절을 봅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즉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담대함으로 즉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세상 안에 거하며 세상 즐거움과 영광과 명예와 권력과 돈과 만족만을 따라다니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슨 낯으로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오십니다. 나도 세상 영광도 즐거움도 금방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목적과 방향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마음 뿌듯하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당당하게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기쁨으로 뵙고 잘했다 칭찬받으며 상급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의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29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의롭게 바르게 진실하게 성실하게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말씀과 성령과 주님 안에 거하며 그 인도하심을 받으며 지혜와 능력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것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며 주님의 향기를 발하고 주님의 은총을 흡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9절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주님이 의로우신 줄 알면,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줄 알면 당연히 그 안에 거하게 되고, 그 안에 거하게 되면 주 안에서 행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생명과 진리와 지혜와 은혜와 선과 의가 있다는 것을 알면 어찌 그 안에 거하지 않겠습니까? 그 안에 거한다면 어찌 그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그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어찌 주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겠으며, 세상 사람들이 어찌 주님 안에 생명의 기쁨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 왜곡되고 혼돈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과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그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여기서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잘 했다 칭찬받고 상급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은혜는 /요일2:22-27/ 김진흥목사
2022-01-07 11:51:09
(22)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1.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북미회담을 앞두고 양 진영 간의 줄다리기가 한참입니다. 이 회담은 그냥 일상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회담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회담이 어떤 회담인지 그 중요성과 성격과 내용을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우선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나라의 명운을 가를 중요한 회담입니다. 수십 년간 평화통일을 위해 우리 교인들은 기도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공멸을 불러올 전쟁을 하지 않고 어찌하든 평화로운 대화의 방식으로 하나씩 풀어가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게 하필 지방선거 시기와 맞물려 있어서 정치인들은 당장의 선거승리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선동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이 좋은 기회에 꼭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보우하시어서 공동의 평화와 안정의 길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온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지는 실수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이건 우리 동네 시장이 누가 되고 국회의원이 누가 되느냐 하는 것 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차대한 일이요, 나와 우리의 후손들이 장차 살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 회담이 가지고 있는 위험요소들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막 시작된 회담은 진행하여 가는 동안 어느 한 쪽에서 조금만 세게 나가면 금방 깨질 위험요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70년 세월을 원수처럼 여기고 살던 사이인데 그간 쌓인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적대하고 있던 그동안 하도 많은 사건들이 있어서 이리저리 다친 감정들이 많습니다. 자꾸 그간 섭섭했고 속상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상대를 자극하면 이번에도 또 중단되고 맙니다.
그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속상한 일들 때문에 쌓인 감정들을 누그러뜨려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서 회담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전에도 몇 차례 시도했었는데 잘 안 되면서 생긴 불신도 깊어서 의심이 들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최대한 인내하고 자제하면서 조심스럽게 회담에 임하고 이런 불신요소들을 제거해가면서 진행이 되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회담을 통해서 최대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주장을 하고 전략을 세울 것이며 또 으름장도 놓고 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막대한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서로 돈은 적게 내고 이익은 많이 가지려는 줄다리기가 심할 것입니다. 남북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이 판에 끼어들어 자국의 이익 챙기기에 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별별 짓들을 다할 것입니다.
정말 알면 알수록 우리는 온 마음을 모아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결론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십시다.
2. 당면한 나라의 일을 우리가 바로 알고 기도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얼 하자는 말씀을 드렸다고요? 네~ 하나님께 기도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보우하여 주셔야 된다고 믿기 때문에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면 기도하자고 해도 기도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하려면 먼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마침 오늘이 삼위일체주일이고 감리교회를 창시한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기념일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알려주는 주일이 오늘이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 앎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생애를 사셨던 웨슬리의 믿음을 알리는 주일이 또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 요한의 서신에는 사람이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고 하십니다. “(22)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인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알아야 할 것은 2천 년 전에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이신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셋째로는 지금 이 시간에 믿는 성도들 안에 와 계신 존재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습니다.
“(27)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 나오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 “그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씀의 ‘기름부음’이 바로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성령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깨닫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게 되고”(24절) “영원한 생명”(25절)이 약속되어 있으며, 27절에서는 인간의 지각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깨달아 알게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들으시면서 마음속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그런 반응이 막 일어나는 분들은 하나님을 깨달아 안 분들입니다. 그런데 뭔 소린지 모르겠고,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모르겠는 분들은 자신이 믿음에 있는 사람인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방 집회 때 강사목사님이 하신 예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크루즈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비싼 돈을 냈기 때문에 먹는 것은 대충 먹어야 하겠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컵라면, 미숫가루, 옥수수, 햇반 등 주로 일회용품들을 준비해서 여행 내내 먹었는데,
그 초호화 유람선 안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다 팔고 있는데 얼마나 부러운지 식사 시간이 되면 갑판에 솟아 있는 식당 환기구에서 냄새를 맡으며 아쉬움을 달랬답니다. 긴 여행 내내 그러다가 마지막 날 마침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저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돈을 얼마나 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배표를 좀 보자고 해서 보여줬더니, 그 승무원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생님, 이 배표에는 이 배 안의 모든 식당들을 자유로 이용할 수 있는 비용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3. 죤 웨슬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죤 웨슬리는 외가쪽 친가쪽 3대가 다 목사님이신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글자를 깨칠 때 성경을 보고 글자를 깨칠 정도로 철저한 신앙지도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죤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한 번도 탈선한 적 없이 교회생활도 착실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심을 하고 신학교에도 가서 졸업을 하였습니다. 좀 더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선교사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교회생활은 착실하게 열심히 하고 잘 믿으려고 노력도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다가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합니다.
선교사로 가는 길에 배가 풍랑을 만나 모두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둘러 앉아 찬송을 하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죤은, ‘당신들은 두렵지 않소?’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서 주님이 우리를 영접하실 터인데 무엇이 두렵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죤은 다시, ‘나도 하나님을 믿는데 나에게는 왜 그런 마음이 없을까요?’라고 물었더니, 그들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주이신 것을 아십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죤은 그때부터 자신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답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약 4년 후인 1738년 5월 24일 밤 8시 45분경 올더스케잇이라는 거리에 있는 조그만 교회당에서 설교를 듣던 중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세상에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
이 사랑과 구원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깨닫고 체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수많은 신앙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과 싸웠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종의 믿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제야 아들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믿어야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 들은 22-25절 말씀입니다. 그런 믿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도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 믿거나, 그런 믿음은 장로나 목사님처럼 전문가들이나 갖는 것이지 나 정도는 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히3,1은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고, 베드로사도는 벧후3,18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하였으며,
바울사도께서도 빌3,8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했습니다. 찬송에도 있지요. “주 예수를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하늘나라 즐거움이 매일 새롭도다.”(266장)
4. 심리학에 ‘피터 팬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83년 미국의 심리학자 댄 카일러 박사가 이 이름으로 책을 쓴 뒤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미국사회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몸은 어른이 됐는데 마음은 아직도 아이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영원히 꿈나라에서 소년으로 살아가는 피터 팬과 같이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피터팬증후군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웨슬리처럼 종의 믿음에서 아들의 믿음으로, 아이의 믿음에서 어른의 믿음으로 옮겨졌는지 점검해 보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한일서 강해 (15) - 진리 테스트 /요일2:22-27/ 김형익 목사
2021-05-13 08:57:26
우리는 지금 사도가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도덕적 테스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그 첫째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2:3~6). 두번째 기준은 사회적 테스트로 형제 사랑이 제시되었습니다(2:7~11).
사도는 세번째로 교리적 테스트를 제시하는데, 그 기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말씀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진리의 부재 현상에 맞물려 비진리, 즉 거짓된 이단과 사이비 사상들이 만연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본문은 매우 적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적그리스도의 본성: 그리스도 부인(22~23)
사도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먼저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사도는 이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돌려서 표현하지 않습니다. 매우 직선적으로 선명하게 참과 거짓을 판단합니다. 사도에게 이것은 돌려서 말할 만큼 한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22).” 이미 19절에서 적그리스도들이란 교회를 어지럽히고 나간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사도는 이제 더 분명하게 그들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악한 육신을 입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사람이 세례 받을 때 그의 육신에 임하셨다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떠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으심, 그리고 육체로 부활하심을 모두 부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아버지도 부인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이 22절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것을 부연합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의 두 본성이 한 인격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했던 기독교 복음이었습니다.
2. 양보 못할 본질적인 참과 거짓의 문제가 있다.
기독교 복음은 이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사도는 2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을 머리로 이해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가 20절에서 말한 기름부음은 특별한 신자들이 소유하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부음이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2~14).”
두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말합니다. 그 근본 되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종말과 같은 어떤 주제나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해와 해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성경 구절에 대하여 말할 때, 극단적으로 정죄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 자신의 개인적 감정에 관한 한, 양보하고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는 복음의 본질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로, 적그리스도로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단호한 입장에 서야 하고 그것을 밝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임에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를 쓸 때, 이와 동일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이 문제가 본질적인 참과 거짓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도는 이렇게 단호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기독교의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 교리의 문제에서 조차,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구에 이끌려 사랑이라는 감상주의적 태도로 처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단과 교회들이 집단적으로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더 심각합니다. 사도들이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취했던 태도들을 어리석고 비기독교적인 태도로 여기게 만드는 처신들일 뿐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를 부인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왜 이렇게 단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고(23),
둘째로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도 없다는 것입니다(25). 이것이 이단적 교리를 믿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맞게 되는 결과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0).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못 믿겠는데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며 영생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15~16,36).”
그리고 주님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은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안전 장치(24,27)
기독교 신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리의 테스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리가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진리가 거합니까? 24절에 의하면,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진리가 우리 안에 계속해서 거하도록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여러분은 이단과 사이비 같은 거짓된 교리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나서 이제부터는 너희 하기 나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는 두 가지 안전장치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고(24) 둘째는 ‘기름부음’(27)입니다.
A. 복음의 진리: ‘처음부터 들은 것’(24)
24절은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진리를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던 처음에 들었던 복음의 진리, 메시지 곧 말씀을 가리킵니다.
왜 사도는 이것을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의도적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교리,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갑니까? 그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찾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 우리가 이미 들은 복음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성도가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은혜로 거듭난 성도들은 그 복음을 또 듣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지겹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그들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 사랑의 이야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면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성도는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205장).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 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 듣게 또 들려 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반응입니다.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처음부터 항상 듣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더 밝히 알아듣도록 또 들려 달라고 외칩니다. 참된 성도들은 복음을 들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 복음을 들을 때 세상의 헛된 영화에 미혹 당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게 되고, 천국의 빛난 영광이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강단에서 복음이 아닌 것, 세상의 헛된 영광에 대한 것들을 말하고, 이생에서 잘 살고 복 받는 것이 전부인양 말하는 것들을 듣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해야 마땅합니다. 사도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말로 단순히 전통을 강조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아테네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서 누가가 쓰고 있는 것을 흥미롭게 봅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0~21).”
철학을 숭상했던 1세기 아테네 사람들은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이런 철학적 사색의 산물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하신 일에 대한 사도들의 설명에 기반합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이 부족한 것 인양 새로운 것이 덧붙여져야 할 필요가 없는 온전한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바른 교훈은 오래된 복음이고, 사도에게서 들은 복음이며,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말세에 그것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둔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이지요? 시장이 요구하는 것을 주는 선생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며 이런 거짓된 자들이 그런 선생들을 많이 따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장이 요구하는 것을 주는 것, 그것은 시장의 논리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목적을 가진 기업의 논리이며, 개인의 입신양명에 눈이 먼 타락한 정치인들의 양태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길이지, 기독교회가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도가 말씀한 대로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버리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릅니다. 이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정신은 아테네 사람들이 보여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들어보지 못한 것, 새로운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토양에서 오늘날 신천지와 같은 온갖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났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미 사도들이 스무 세기 전에 성령으로 예언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처음부터 들은 것’ 즉, 온전한 복음의 진리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동사를 잠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동사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구적으로 주소지를 정하고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그저 잠깐 지내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구성, 지속성이 이 단어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정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도는 또 이 단어를 일방적 개념이 아니라 상호적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아버지도 우리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23절에서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아버지가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또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 자신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24).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거한다는 것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머무는(거하는) 것과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처음부터 들은 것’ 복음의 진리는 우리가 거짓된 교리에 미혹 당하여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는 하나의 안전장치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 그것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귀가 가려워서 새로운 것, 허탄한 것들을 들으려고 하는 성향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들이야말로 십중 팔구 미혹함을 당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B. 기름부음(27)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기름부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에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20절 말씀을 통해 살폈습니다. 기름부음은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선물로 받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20절에서 ‘모든 것을 아느니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아느니라’는 의미라고 했지요? 모든 신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영적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적인 은사들과 관련되기 전에, 먼저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성령님은 홀로 일하시기 보다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기름부음은 영적인 분별을 가져옵니다. 27절은 20절을 좀 더 부연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봐라.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목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은 교회를 제도화, 화석화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교회, 기름부음을 받은 교회는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이미 사도 자신이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 목사와 교사의 직분도 동일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들입니다(엡 4:11).
27절의 문맥도 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이단과 사이비의 온갖 거짓 교리들로부터 지켜줍니까? 그것은 주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기름부음입니다. 이 기름부음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를 붙잡게 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며, 그 복음의 진리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함으로써 이단과 사이비의 거짓 교훈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이점에서 성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성도는 근본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더해야 하는 추가적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진리에 대한 분별과 확신을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27절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온갖 거짓 교훈들로부터 지켜주는 두 번째 안전장치를 주셨고 그것이 바로 기름부음입니다.
C. 진리와 성령
주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서 주신 두 가지 안전장치는 ‘처음부터 들은 것’ 곧 복음의 진리와 ‘기름부음’ 이것을 우리는 성령을 주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성령입니다. 성도는 회심할 때 이 두 가지 안전 장치를 받습니다. 말씀은 객관적인 안전장치이고 기름부음은 주관적, 경험적인 안전장치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 우리는 사도들이 전했던 그 오래된 복음을 하늘의 교사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배우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신자들을 면제하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 대로 우리는 더욱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교인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는 것은 율법주의 교회들의 특징이다’라고 가르치는 어떤 무식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데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나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도는 두 가지 안전 장치를 가진 자들입니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모든 거짓 교리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 경력이나 이성적 판단력이나 은혜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의 기준으로서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테스트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깨달아 은혜를 받고 확신하게 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모든 참된 성도들 안에 거한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4. 교훈과 적용
말씀을 정리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진리의 테스트는 중요합니다. 그냥 열심히 행하고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신자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자는 진리의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 처음부터 들었던 그 말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근본 진리에 대해서 명확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것이 머릿속 지식이나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관적 확신이 되도록 주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기름부음을 주사 그것이 언제나 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주께서 주신 이 두 가지 안전장치가 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온전한 복음의 진리를 들으셨습니까?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여전히 거하고 있습니까?
그 복음의 말씀을 여러분은 옛 것이라고 진부하다고 여기지 않고 여전히 또 들려달라고 말할 만큼 그 복음의 은혜를 주관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기름부음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버지를 소유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십시오(벧후 3:18).”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하고 더 영광스럽고 더 유익하고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너무나 크고 광대하며 영화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드리고 열정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더욱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믿는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안전장치가 풍성하고 견고하게 여러분 안에 자리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이 모든 일에서 아직도 불확실하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 나는 아직 확신이 없고 잘 모르겠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할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은혜를 베푸시는 주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간 사람들 가운데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4절을 따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는 이 말씀이 우리 벧샬롬 교회 공동체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 각자의 심령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 /요일2:24-29/ 손재호목사
2021-04-14 04:40:01
요한일서가 쓰여질 당시 교회에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자들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나 복음을 훼손하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고 세상과 온갖 거짓 사상을 좇아갔습니다.
교회는 이런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살펴봤습니다. 그러면 이런 마지막 때에 참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24절을 보면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요한일서 저자는 성도가 하나님과 진리의 사귐을 사귀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말한 후 이제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할 때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 참된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요한일서를 수신하고 있는 성도들은 복음을 들어놓고서는 지금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을 변개하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난 것입니다.
18-19절을 다시 보면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난 것이 마지막 때인데 이런 마지막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들은 그 복음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적그리스도의 활동은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왔습니다.
시편 2:1-2절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고 했습니다. 온 열방과 민족들이 분노하며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분주하게 경영합니다.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에서는 새로운 정권을 위해 분주합니다.
경제를 살리고 국민소득 3만 달러로 가는 선진국의 길을 놓기 위해 분주합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고자하는 것입니까? 다시 더 높은 소득을 향하여, 더 살기 좋은 나라, 더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또 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영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일하는 내용이 결국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세상에서 끊어지면 죽는 줄로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 처음에 들은 복음, 오직 은혜는 교회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계속하여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 교회는 오직 성장에 관한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경영 마인드에 기초한 성장프로그램들이 인기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돈을 드려 그런 프로그램을 배우는데 좇아다닙니다. 물론 그런 것이 다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원리를 좇아 바르게 목회하고자 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외적인 성공 목회를 추구한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소위 개혁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조차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바르게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섬기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하나의 자격을 따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가르침대로 목회하기보다 온갖 성장 원리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좇아다닙니다. 이런 것은 다 가짜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들은 복음이 성경적인 복음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입맛에 맞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된 복음이라면 처음부터 가짜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들은 내용이 요한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식물도 없고 물이 없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쳐다보는 자는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자신들이 그런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놋 뱀을 처다 보았을 때 나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린 것이 자신의 저주임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도 주께서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2-33절을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자신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3:35-36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만물을 다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0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도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3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몇 구절을 찾아본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셔서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이렇게 처음 들은 것을 믿고 그 안에 거하면 아들 안에 있는 것이며,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26절을 보면 너희를 미혹하게 하는 자들이 있어서 이것을 썼다고 합니다. 이미 복음을 들어서 믿고 있는 자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적그리스도들이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리스도란 구원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이루어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것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환난과 핍박을 주든지, 세상의 재미와 쾌락을 주든지, 교묘하게 복음의 내용을 변개하여 인간의 행함을 개입시키고자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공로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하는 자들이며, 어느 시대에나 활동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너희는 주께 기름부음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다는 것은 성령이 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이미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이 있는데 그 복음을 버려두고 다른 교묘한 이야기들을 배우기 위하여 좇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유혹하는 것은 처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게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처음부터 전한 복음을 계속하여 믿을 뿐 아니라 그 처음 받은 그 복음의 내용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7-19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처음 복음을 들은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27b절에 보면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주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복음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주안에 더 깊이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자는 세월이 지나가면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더욱 더 절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기초를 다시 든든히 하자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나 공부하는 학생들도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처음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그 기초를 익히면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처음의 들은 이야기 곧 복음 안에 나중의 것까지 몽땅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들은 그 복음이 족하다,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생각을 잘 못하는가 하면 시간 개념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과 나중을 따로 생각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처음과 나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완성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어디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골로새서 2:1-4절에 보면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힘쓰는 이유는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부족한 것인 양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자녀들이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 강림하실 때에 그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은 무엇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까? 우리의 행함입니까?
히브리서 4:14-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굳게 잡아야 합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보좌 앞에도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어 부끄럽지 않는 길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자가 주님 안에 바르게 거하는 자입니까? 어떤 자가 주님 안에서 담대함을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까? 29절을 보면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합니다. ‘의를 행하는 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의’는 우리가 사도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주로 ‘칭의’와 관련해서 그렇게 집중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를 행한다’라고 할 때에 이 의는 ‘칭의적인 차원의 의’가 아니고, ‘성화적 차원의 의’ 곧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그런 차원에 있어서의 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출생을 가진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의 모든 삶의 기원을 가진 자를 증거하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될 때에 무엇으로 나타나냐하면 ‘의를 행하는 자’가 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닮은 꼴이 되어지는 것, 곧 우리 주님과 같은 삶의 형태가 우리 안에 만들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바르게 거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닮은꼴의 사귐이 있는 자들 가운데서 그 사귐의 최상급 상태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질 수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주님과 터놓고 말하는 사이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에, 적그리스도의 유혹이 많은 이때에 처음부터 들은 복음 안에 거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이루어가게 하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치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요일2:26-27/양향모목사
2019-08-30 23:51:30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라고 정했습니다.
먼저 미혹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혹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조치들을 취해 놓으셨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미혹(迷惑)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이 미혹이라는 말을 플라나오(πλαναω)라고 쓰는데 그 뜻은 우리말과 비슷합니다.
배회, 속임, 방황, 이탈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진리 안에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하고 배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속임을 당하고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삶에 있어서도 미혹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속아넘어가지 않아도 될 일을 아차 하는 순간에 무엇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헷갈리게 되어서 많은 손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전화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대만에서 한참 유행했던 것이 이제 대만에서는 정부차원에서 광고를 하고 방지를 시키니까 슬그머니 우리 나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기라는 것이 너무나 허술해서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당하지 않는 것인데 순간적으로 귀신에 홀린 것처럼 속아넘어가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기 검찰청이다, 여기는 카드회사다, 여기는 은행이다 전화를 해서 자기들이 전화 해 놓고 이름이 뭐냐 주민등록 번호가 뭐냐 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 이 놈들아 요즘같은 시대에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바보가 어디있니 라고 끊어 버리면 될 것인데 친절하게 다 가르쳐 주고 은행까지 가서 자동이체로 돈 있는 대로 홀랑 다 이체시켜 저 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전화를 미리 해 가지고 아이들에게 아이들 이름을 물어보아서 알고 있다가 아무 아이 울음소리나 들려주고는 내가 당신 아들을 납치했으니까 돈 얼마를 송금하시오라고 협박을 한다고 합니다.
아들 울음소리를 잘 들어보든지 자기 아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든지 하면 될 텐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돈을 부치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한번도 이런 사기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일에 속임을 당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아예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기도 하고 인생을 망쳐 버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그렇다고 치자구요
세상이 그냥 살아집니까 살자니 돈도 있어야 되고 좀 편히 살고 싶고 좀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그런 욕심 때문에 속기도 하고 또 다행히 속지 않으면 성공도 하기 때문입니다.
속지 않으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살면서 한두 번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일에는 좀 신중을 가해야 합니다.
전 재산을 다 털어 넣는 일이나 가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일이나 평생 노력을 해도 복구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조심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 진짜 진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을 가졌느냐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실수는 최악의 경우 좀 덜 살고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는 수 천년 수 만년 영원한 세상을 사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혹 이사를 해서 다른 교회를 결정할 때 그 교회가 진리를 가르치느냐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회당이 크고 사람들이 많은가, 혹 유명인사가 출석하지는 않는가, 교회의 시설들이 좋은가, 담임목사가 유명한가, 설교가 재미가 있는가... 이런 것들에만 관심이 많고 정작 중요한 진리 가운데 있는가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우리를 미혹케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을 하시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혹을 받고 엉뚱한 길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조치들을 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1.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7절 말씀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20절 말씀 즉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라는 말씀을 배우면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님을 받았다라는 말과 같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왜 성령님을 받았다는 말로 바로 쓰지 않고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했는지도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간단하게 성령님의 임하심이라든지 성령님을 받았다고 할 것이지 이렇게 어렵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도 요한 당시의 이단들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의식을 행하고 자기들에게 기름부음을 받으면 모든 지식과 분별력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참된 지식을 아는 것은 그들에게 그 기름부음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령님을 받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멘
여기 "너희는" 여기에 앉아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 받은"이라고 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승천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광성교회 성도 여러분이 정말로 특별하신 분들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를 벗어난 잘못된 교회에 가지도 않고 십자가의 복음이 바르게 전파되고 있는 이런 교회에 출석을 하시는 것으로 보면 여러분은 정말로 특별하신 분들입니다.
교회가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이번에 4백여 만 원의 거금을 투자해서 이렇게 수리를 잘했지만 다른 교회들은 수억 원을 들여서 정말로 잘 꾸밉니다.
목사가 정말 잘난 것도 없습니다. 다른 교회 목사들 보면 정말 저도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외국 유학에 박사학위에 그 유창한 말솜씨 하며 기가 죽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와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화려함도 없고 뭐 특별한 것도 없는데 왜 하필 여기에 오시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7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왜 그들이 광야로 나아갔느냐는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려고 광야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화려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는 왜 오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입니까
화려한 자연의 세계를 만끽하기 위해서입니까
문화나 오락을 즐기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그렇다면 잘못 오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 세상의 것들이 더 화려하고 좋습니다.
이 세상의 문화들 오락들 즐기는 것들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것을 위해서라면 잘못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 선지자를 보려고 갔다면 잘 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처럼 훌륭한 사람이 더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정도로 그는 선지자 중에 선지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정말 바르게 말씀을 하고 가르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예수님의 길을 안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참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제일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요한 보다 더 큰 자가 있는데 누구라고 했습니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고 해도 누구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까
세례요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제일 크다고 평가한 그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저 오실 예수님만 증거를 했지만 우리는 오신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일과 부활하신 일과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과 때가 되면 다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다 알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바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큰 교회에 어떻게 여러분이 오시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잘나서 선한 일을 많이 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주일을 잘 지키고 율법을 잘 지켜서요
아니요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계시면서 여러분의 발걸음이 이 교회로 오게 역사해 주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끔 왜 이렇게 좋은 광성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이겠지요 사람이 모든 일에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살다 보면 잘 못하는 것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일도 많겠지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는 확실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든지 그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든지 아예 택한 백성이 아니든지 그 이유 외에는 이렇게 복음을 강조하는 성령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일을 핵심적으로 하는 교회를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충만하신 분들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교회입니다.
그의 말씀이 너무나 분명하게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성령님께서만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여 야 이제 아무도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마 나는 성령님께서 직접 배우는 사람이고 직접계시를 받아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마 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가르치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성령님도 말씀을 기록하시면서 성부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록을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으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말씀만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유일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엉뚱하게 가르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핵심이 무엇인지 중심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는 자에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다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관계가 없고 성경적인 바른 믿음과 관계가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거나 교회의 역사를 보거나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것을 가르치며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가서 3:11절에 보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지도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을 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돈을 위해서 점을 쳐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재앙이 우리에게는 임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엉터리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당당하게 해야 할 일입니다.
무슨 가짜 약을 파는 사람처럼 비굴하게 사람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올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장사 속으로 친절하게 보이고 때로는 화려하게도 보이고 때로는 정말 멋있게 보이기도 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에 진리가 없는 참된 복음이 없는 사이비 이단들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시면 이런 사기꾼들에게 속아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성령님의 가르치심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에 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가르치심은 즉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성경말씀은 참 단순합니다.
너무나 간단해서 왜 이렇게 간단한 것을 이렇게 장황하게 기록을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 특별하고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복음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진리가 아닌 것들을 가지고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복음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찾아다니게 합니다.
세상의 돈이나 쾌락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만약에 어떤 목사가 우리 교회에 오면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진리에서 떠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게 해 줄지 모르지만 천국에는 갈 수 없게 만드는 나쁜 사람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힘이 들고 가난한 자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목사가 우리 교회에 오면 모든 병이 다 낳고 만사가 형통 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이미 지은 죄들 때문에 늘고 병들고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만사가 다 형통 하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천국을 사모할 수 없게 됩니다.
병들고 늙고 죽는 그 괴로움을 통하여 우리가 천국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거짓말로 우리를 속여넘기려는 사탄과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과의 사이에서 모든 인생들이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술전략은 날로 교활해져서 보통 인간의 생각으로 지식으로 분별을 할 수가 없이 그럴듯하게 위장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박사들도 넘어가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속아넘어갑니다.
성령님에게 배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바르게 배우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참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성경말씀만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미혹케 하여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이제 그 안에 거하라/요일2:28-29/양향모목사
2019-08-30 23:51:57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아"라고 부르시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진실되게 부르시는 호칭입니다.
마치 사랑이 많은 부모님이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주 소중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그 부르심입니다.
"이제 그 안에 거하라"라고 하십니다.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사도요한은 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조목 조목 설명을 들으셨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로 들으셨지만 한마디로 무엇을 말씀을 하시는지 잘 정리가 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구조가 복잡해서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질서정연하게 1장의 주제는 무엇이고 2장의주제는 무엇이며 3장은...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잘 안 되는 것이 요한일서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라는 것이 전체 주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한 사귐 충만한 기쁨"이라는 주제로 요한일서를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 거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그것을 제거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그것을 제거함으로 참된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 요한일서의 기록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 즉 신앙생활을 바르게 함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검증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 신자는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참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고 바른 신앙의 고백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윤리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바른 신앙고백을 한 자는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빛이 되시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했으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계명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앞으로 우리가 배우게 될 3장과 4,5장에서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 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거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이 말씀들을 실천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면서 살고 특별히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이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진리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반대되는 길을 가르치고 그래서 우리를 미혹케 하여서 우리를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진리가 아닌 이상한 가르침들이 들어와서 천국 가는 길보다는 이 세상의 축복을 가르치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신앙의 전부인양 가르침으로 천국을 향해서 바르게 가고 있는 우리를 비웃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길은 외롭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그 안에 거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이라는 말씀과 "그의 강림하실 때에"라고 하신 말씀은 다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천군천사와 함께 영광 중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그 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오실 그 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상을 받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어진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 최후의 종말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어차피 한번 살다가 죽는 몸 아무렇게나 즐기면서 살면 될 것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심판도 없고 상급도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나 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고생하면서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바르게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언제 다시 오실지 그 날을 우리가 잘 모르고 우리 인간의 시간으로 오랫동안 오시지 않으시니까 혹시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절대로 그냥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 날을 대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도적들은 꼭 설마 설마 할 때에 옵니다.
설마 오늘밤에 오겠어라고 생각한 그 날에 꼭 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그와 같습니다.
설마 지금 오시겠어라고 대비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을 때 이 세상의 쾌락에 젖어 있을 때 그 때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우주의 종말이 하루 하루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개인 개인이 당하는 인생의 종말이 하루 하루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이 진리 안에 이 말씀 안에 이 십자가의 복음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는 그 날이 오면 알게 될 것입니다.
2.그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에 그것으로 인해서 담대함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ραρρησιαν)은 헬라 세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말을 자유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그 앞에 나아가서 자유롭게 제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을 예수가 어떻고 라고 막 먹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있어라고 불평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내가 꼭 그렇게 순종하라는 법이 있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죄 좀 짓는다고 하늘에서 날벼락을 내리지도 않는데 슬금슬금 죄를 좀 지으면 어때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으니까 사람들 마음대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무시하고 살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당장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지
교회에 다닌다고 밥이 나와 고기가 나와라고 비웃기도 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적당히 다니면 되지 뭐 그렇게 열심히 뭐 그렇게 대단하게 목숨 걸고 신앙생활 한다고 난리야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말들을 하면 우리가 바보인가 우리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을 하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그 영광스런 주님의 재림의 날이 오고 다시 오시는 주님의 그 화려한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런 말들이 쏙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입을 벌리고 할말을 잊을 것입니다.
그 때에 담대히 입을 벌려서 주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습니다 반갑습니다라고 담대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주님의 말씀 안에 바르게 행하면서 살고 있던 우리는 그 날에 남들이 입을 벌리고 닫지도 못하고 있을 그 때에 담대하게 자유롭게 주님 앞에 나아가서 말을 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무슨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습니까
예수님 저 아시죠 저 양 아무개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늘 고백하고 살던 아무개입니다.
남들이 세상에 부자로 살려고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살려고 다른 길로 갈 때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있던 아무개입니다.
힘들어도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썼던 아무개입니다.
빛 가운데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던 저를 기억하고 아시지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면서 살라고 해서 보기 싫은 사람 나를 욕하는 사람 아니꼽고 치사하게 행하는 사람 가서 주먹으로 한대 올려 버리고 싶은 사람까지 참고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애썼던 접니다.
그 안에 거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한 사람은, 십자가의 진리 안에 거한 사람은,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산 사람은, 말로만 믿습니다가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하면서 산 사람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신 그 날 그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담대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3.그 날에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를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26절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면 예수님께서도 영광스럽게 재림을 하실 때에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부끄럽고 예수님도 우리를 천국에 들여놓기가 부끄럽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자랑스러워야 할 것이고 예수님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바르게 살면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교회가 모든 면에서 세상을 앞질러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억지로 할 수 없어서 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 가면 부모님이 뭐라고 하고 아내나 남편이 뭐라고 하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다녀 주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니까 보험 드는 심정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학적인 세상에 미신을 믿는 사람처럼 챙피하게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자랑스럽게 여겨야 될 일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교회에 다닌다면 주님 앞에 섰을 때 참 부끄러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잘 다니기는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없어서 부끄러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주시는 줄 알았다면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좀 화끈하게 할 것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장례식 때 부르는 이 찬송가를 늘 기억하면서 삽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다 한 일 많아 부끄럽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특별히 한 일이 없으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주님 다시 오셔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 섰을 때 내가 한 일도 없이 너무나 좋은 것을 상으로 받았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이왕 신앙생활 하시는 것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 살피며 눈치보면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4.의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 말씀에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삶을 삶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서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의롭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의롭게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안에 거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왕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기웃거리지 말고 남 눈치보지 말고 확실하게 그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진리 안에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시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았노라고 담대하게 말 할 수 있도록 사시기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사시기 바랍니다.
칭찬과 상급을 받고 기쁨으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의 길3-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출40:9-16, 요일2:25-29/ 배의신
2018-02-19 16:14:04
출애굽기 40:9-16, “9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10 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 11 너는 또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2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13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14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15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이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16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요한일서 2:25-29,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인생의 삶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본다면 배움의 시기와 행동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배움의 시기란 모방이든지 학습이든지 어떤 유형으로든지 행동하기 위한 이론정립이 시기입니다. 사람은 유아기를 거쳐 아동기 청소년기 동안은 배움을 통한 삶의 이론을 정립하게 됩니다. 직업이나 어떤 일을 접할 때에도 먼저는 그 일을 위한 이론 정립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 배움의 시기는 실제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나 성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능력이 드러나고 성과를 이루는 것은 실제 활동의 시기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는 육신적인 삶과 영적인 삶, 이 두 삶에 대한 네 가지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 두 삶에서 영적인 삶은 육신적인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요한삼서 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뿐만 아니라 영의 삶은 육신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로마서 8:6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시간에는 영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움의 시기에 머물러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한지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배우는 시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히브리서 5:12-13절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들은 사는 것이 기쁘지 않고 염려와 걱정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싶다면 배움의 시기를 벗어나서 행동의 시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9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0절에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주체는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복된 인생이 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임재하심, 그리고 성령님께서 마음껏 나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충만하시게 되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은 성령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성령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을 찾아봅시다.
※ 성령의 기름 부음이 왜 필요합니까?
먼저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름부음(anointing)’이라는 말은 ‘기름을 바른다.’ ‘기름을 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뜻을 알려면 구약의 제사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예배였습니다.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 동물이 대신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7:11절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렇게 피를 흘리는 희생이 필요한 이유는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한 처소였습니다. 출애굽기 25:8-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모양과 제사에 필요한 모든 기구의 모양까지 보여주시면서 그대로 만들고 짓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성된 성막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준비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기름을 바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본문말씀입니다. 9절과 13-15절을 봅시다. “9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13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14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15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이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이렇게 성소와 성소의 기구들과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기름을 바른 후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이처럼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임재하실 수 있도록 거룩함으로 준비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 임재하시기 위하여 기름부음이 필요했습니다.
이 성막이 신약시대에서는 교회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셔서 다시는 동물의 피로 제사하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동물제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제물로 속죄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9:11-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렇게 우리는 나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다시는 동물의 피로 하는 제사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셨지만,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된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에베소서 2:21-22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즉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직 자신이 성전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못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본문 25-27절을 봅시다.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 성령의 기름부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받습니까?
기름부음은 어떤 느낌이나 생각 혹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 위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없게 하시려고 속죄 제물이 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처럼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님이 내주(內住) 하셔서 거듭난((重生, born again)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거듭나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 산다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감각이 무뎌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지 못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사정이 이쯤 되면 생활도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삶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님의 손길을 느끼도록 자신의 영을 민감하게 연단해야 합니다.
이 연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쉼 없는 기도와 깨달음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영이 민감하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때로는 목회자나 성령 충만한 사람의 안수함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을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마치 우리의 모든 삶이 성령으로 덧입혀진 것과 같습니다. 즉 모든 일에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령님의 손길이 민감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삶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모든 삶에서 염려와 두려움과 혼란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게 보이며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분명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은 생활 속에서 나타납니다. 즉 생활 속에서 꼭 필요한 물질이 없어서 마음을 졸이거나, 육신의 병으로 고통스럽고 두려울 때나, 삶의 환경이 어둡고 힘들 때나 어떤 때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의심 없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서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저에게 역사하신 성령님의 능력을 간증하려면 많은 시간이 정도로 많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임재를 알게 하심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 본문 28-29절입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그러므로 나의 모든 삶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입으로 시인하고 그렇게 행동하십시오.
특히 마음에 들리는 성령님의 작은 소리에 민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예컨대, 아이가 병이 나서 아플 때, 마음에서 ‘아이를 안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면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또한 꼭 필요한 돈이나 어떤 물질이 있을 때 ‘주님께 말씀드리고 의지하라.’는 마음의 음성이 들리면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이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며, 믿음으로 순종하고 응답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이 대강절 첫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첫 번 성탄절 즉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나에게 주인으로 오심을 감사하며, 약속하신 대로 언젠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매일을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산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충만하여 능력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정체 /요일2:22-29
2017-10-26 17:21:42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를 알려주는 표시가, 적그리스도가 온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은,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마지막 때’라 했다. 성도는 말씀으로, 이단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적그리스도의 정체는 ① 올바른 그리스도인과, 정상적인 사귐을 거부하고,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으로 진리를 알기에, 나가지 않고 거한다. 내가 편지를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고,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 말씀에서 ②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고, 거짓고백을 한다. ③ 미혹한다고 했다.
1. 적그리스도의 정체(22). - 거짓말하는 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는 거짓말하는 자다. 그 거짓말은 2가지다.
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한다. ②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핵심교리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인 예수님과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는, 결코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 때부터 있었다.
유대 제사장을 비롯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나사렛 예수님을 결코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마26:63中)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구하자, 예수님은 (64)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했다.
대제사장이 (65)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라고 하면서, (66中)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초대 교회 때부터 목숨을 내놓고, (행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다.’고 가르치고 전도했다. 이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요한이 서신을 보냈던, 1세기 말에는, 헬라 배경을 지닌, 영지주의 이단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했다. 지금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이단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침례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영이 떠났다고 한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통합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거룩한 그리스도가,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통에, 예속될 수 없다고 한다. 예수는 나사렛 예수일 뿐이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시대 시대마다 구원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담 이후에, 범죄 함으로 멸망할 때, 노아에게 하나님이 영이 임해서, 그 시대의 구원자가 되었고, 가나안이 멸망 받을 때,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 그 시대의 구원자가 되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기에, 이만희, 안상홍과 어머니 하나님, JMS…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다.
이에 대해, 요한은 단호하게 말한다.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에게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시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도 있다고 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0:30)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러므로 이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며,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의 통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 땅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을, 지금도 계속한다. 영지주의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평범한 사람도, 이러한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불신자들이 주장은, ‘하나님은 없다.’면서, 거짓말을 한다.
또한 ‘이 땅에는 여러 신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하나님이다.’ 이는 거짓말이다. 이처럼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은 현명하고, 지혜롭고, 중용의 덕을 간직한, 교양 있는 사람이라 착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성도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분명히 알기 바란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들이 주장과 같은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며, 참 신으로,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신이다. 하나님은 신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신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유일한 신이다. 이것이 진리이며, 우리가 힘 있게, 증거 해야 할 진리다.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요일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2. 적그리스도에게는, 영생이 없다(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처음 들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에 거해야,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처음부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말한다. 그 후에 듣게 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별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말을 들어야, 영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은, 복음의 말씀을 들었던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한다. 따라서 들은 것을 ‘거하게 하라, …거하면, …거하리라.’는, 3개의 동사 모두, ‘메노’(머물다, 기거하다)로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복음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면, 우리는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된다.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약속’은 신적 약속으로, 인간에게 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방적인 약속이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은, 하나님이 약속이며 희망인, 영원한 생명을 주는, 메시아가 오기를 기대했다(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님이 와서, 구약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는, 이 약속과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이 약속은 사도들에 의해, 처음부터 전해진 증언이고, 초대 교회 공동체에도, 이미 증언되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들이 영생을 준다고 하지만 거짓이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이유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영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부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심판의 부활’을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핍박하던 자들도, 예수님이 다시 재림할 때 부활하지만,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한 장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행복함을 말한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따라서 ‘안다’는 말은, 정보나 지식으로, 인식함이 아니라, 사귀어 안다는 말이다.
결혼한 남녀가, 친밀한 사귐을 통해, 서로를 깊이 알아감과 같이, 그렇게 아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귐에는 하나님과 동행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보호함을 받고, 주님을 사귀는 행복한 삶이,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강림할 때, 저 하늘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말한다(2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
3. 적그리스도는 미혹한다(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요한이 요한일서를 쓰게 된 이유다. 성도들을 미혹하는(플라나오, 헤매다, 속이다, 벗어나다), 적그리스도들을, 조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상한 말로, 사람들을 속여서, 거짓을 믿게 한다. 성도를 속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에게 멀어지게 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멀어지도록 미혹한다. 미혹하는 자들의 길은, 영생의 길이 아니다. 그들이 말에는, 죽음과 사망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미혹하는 뱀의 말을 따름으로, 인류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행동하나? 미혹하는 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미혹하는 자들은, 항상 가까이, 교회 안에도 있다.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또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겉모습이나, 세상의 논리에 의존하면, 반드시 아담과 하와, 또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도간의 사귐에서,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미혹하는 자들이, 우리 결에 가까이 있어, 누구도 그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크리스마)은 일반적으로, 성령침례, 성령과 하나 되는, 인침이다.
기름을 부어, 성령의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되어 있었다. 요한은 이러한 성령의 특수한 사역을, 일반 성도들에게도 적용시켜서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다.
너희는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이 있는 너희는,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기에, 다른 지식이 필요 없다면서,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오직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성령의 인침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다.(고전12:3)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안에 거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친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주님의 가르침 안에 거하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말세에,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난다고 예고했다. 예고한 대로, 수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출현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적하며, 복음을 혼잡하게 했다. 초대 교회의 대표 적그리스도는 영지주의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고, 극단적인 쾌락주의나, 금욕주의를 지향했다.
그래서 사도 요한과, 다른 많은 서신들은, 이를 경계했다. 오늘의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이와 같은 적그리스도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바른 정통 신앙을 수호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거하라는, 현재 명령이다. 떠나지 말고, 계속 거하라는 말이다.
기름 부음이 있는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강림할 때,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다.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았고, 처음 배운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의를 행하는 자가 되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의로운 줄 알면, 그분처럼 살라. 기독교의 의는, 세상이 말하는 정의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의다.
의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적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유일한 길인 복음을 알고, 복음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늘 창고에 쌓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라 겸손하고 낮아지며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적그리스도의 추종자들과 다른 점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기름 부음을 받았는가? 처음 들은 복음에, 충실한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의의 열매를 삶으로 드러내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라.
내가 변화된, 진정한 기적임을, 삶으로 증거 하라.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했다. 우리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증거는, 의를 행하는 삶에 있음을 기억하라.
주께 기름 부음을 받고 /요일2:27-29
2015-04-21 16:38:51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이 귀한 약속만큼이나 잘 못 사용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수시로 나타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우쭐대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결말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름이 없는 한 낱 일반적인 사람이었음을 보아 왔고 또 앞으로도 이런 교만한 사람들의 결과는 그럴 것이다.
구약 율법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연결하고 또 신령한 일을 하게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에서 그리스도나 메시야라는 명칭을 생각하면서 나눈 바 있다.
어쩌면 이 말씀을 일반적인 교회들 속에서도 잘 못 사용되는 경우들을 더러 보는데 앞에서 예를 들었던 구약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가르치면서 일반적인 신앙인들과 차별화를 가르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과연 ‘복음의 시대에 기름부음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받은 것인가?’ 라는 질문에는 결론부터 말한다면 말씀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인침의 표로 성령을 주셨고 이것이 기름부음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으므로 복음 속에서 사사나 선지자 같은 특별한 사람은 없다. 다만 각자의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은사가 다른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실을 확신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이해하고 그 주신 은혜들을 바르게 활용하고 복음을 감당하는 하늘의 사람들로 살 수 있었으면 한다.
Ⅰ. 기름 부음은 성령의 오심이다.(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같은 말씀 바로 앞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 기록되어 있고 이 27절에 두 번씩이나 꼭 같은 헬라어로 언급된 “기름부음[헬, chrisma, 성령 주심]”은 그리스도[헬, Christos,]와 같은 어근이다. 복음 속에 “그리스도”가 구약에서의 “메시야”이시면서 구약시대의 3중직의 의미들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서신서와 꼭 같은 기록자인 요한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보내실 보혜사를 언급하시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한 바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그런 다음 오순절에 이 땅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 성령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가 복음을 전한 다음에 그 말씀에 반응하는 천하각지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신비한 방언의 역사와 나타난 일들을 설명하면서 그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확인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그리고 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수혜자를 말하는데 모든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선언한다.
오늘 읽은 본문과 요한복음의 내용이 다르지 않는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한일서) 라는 말씀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한복음)는 내용이 같은 성령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으로 여기 기름 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성령의 임재를 증언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Ⅱ. 기름 부음은 특별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복음 시대에 기름 부음은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약속이 구약시대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시대처럼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신다는 약속을 복음 속에서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을 이미 앞에서도 말씀 드린바 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성령 받음에 대한 신앙의 부분에 더러 오해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령충만에 대한 오해의 소지들도 이런 것으로부터임을 깨닫게 된다.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안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이 없다. 다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당부를 듣는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이후에는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인용한 요엘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2:17f)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행2:18f) 한 것을 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약속이 분명하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상으로 말하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는 역시 차별 없이 성령 부어주심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롬3:12; 고전1:24; 갈3:28; 기록되고 있고 골로새서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하였는데 차별 없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이 가능하다는 말씀은 기름 부음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귀한 약속이다.
성령 주심 역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처럼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고 충만을 받을 수도 있고 근심하게 할 수도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성령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분명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고, 인도하시고 지도하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성령은 우리가 어떤 사물처럼 빼앗아 오거나 던져버릴 수 있는 그런 어떤 물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5:19) 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믿음에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안타까워 하시거나 무시될 수도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도 사람들은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라는 데 관심이 있으면서도 정작 성경의 이 부분의 가르침에 대해 어려워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많이 하여야 성령을 받는다.” 하는데 이것은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의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 같다.
대부분 기도를 가르쳐주신 누가복음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그러나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기 전에 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도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주님의 약속에 의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을 주님의 승천 이전의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성령의 선물을 잘못 사용하는 건전치 못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물을 바치라!” 즉 물질을 바침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값에 대한 대가이지 선물이 될 수 없고 성경 어디에도 그런 가르침을 일어볼 수 없다.
가장 분명한 성령 주심의 말씀은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이보다 분명한 성령의 약속은 없다.
죄와 사망을 향해 가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개와 그리스도만이 저주와 영원한 형벌의 해결자이심을 믿고 고백하여 많은 물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예식인 침례를 받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순종이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옴과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에 씻김을 받은 영혼 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그의 영원의 삶을 지도하시고 가르치심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 말씀하셨던 요한복음 3:5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신 말씀의 순종이자 성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는 약속은 물과 성령으로 난 모든 사람들에게 꼭 같이 주신 약속이다.
Ⅲ. 그러므로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28~29)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은 당연히 또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이 된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28ff)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담대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
그러므로 성령의 함께 하심은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약속되고 있고 성령을 순종하는 삶의 내용이 29절에 기록되고 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이 말씀은 나타나는 결과들이 우리가 의로우신 주님으로부터 난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령의 열매들 또한 성령을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회복된 삶의 열매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그러므로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는 내용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사실 건전하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말씀이나 은사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구약적인 하나님의 역사들을 많이 인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때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 대한 다윗의 조심성에 대한 것으로 같은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사울의 말년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혼란케 할 때도 심중한 모습을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몇 곳을 찾아보면 대부분 사무엘상에 기록되는 내용들이다. 24:6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26:9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시 26:11에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등등의 기록들이 그것이다.
시편105:15에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기록되고 있는데 이러한 약속들은 복음 시대에 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서로 간에 조심해야 할 자세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복음 속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특별한 존재는 더 이상 없다. 제목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상호 간에 다윗과 같은 자세로 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직책이나 역할에 관계없이 성령과 더불어 말씀을 순종하려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이 될 수 있다.[이 원리는 나와 여러분의 관계 속에서도 당연하다.]
복음 속에 기름부음은 바로 성령의 오심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임재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이라고 확인했다.
이제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하여 말씀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고 대적하거나 모함하거나 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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