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으로 사는가? /요일3:1-3/ 조정의목사
2021-09-01 09:09:09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1885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저술했다. 소설은 하나님께 벌을 받아 땅에 떨어진 천사 미하일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깨닫고 천국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미하일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관한 답은 바로 “사랑”이었다.
톨스토이가 이 소설에서 그려낸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잘 맞는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원동력이라는 것은 맞다. 사도 바울은 모든 지식, 모든 믿음, 모든 구제와 헌신적인 삶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 13:1-3). 믿음, 소망, 사랑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13).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요일 4:7).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 삶의 원동력이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이를 분명하게 밝힌다. 말씀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 자녀로 사는 능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영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그리스도인으로 힘 있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1. 영생의 지금을 보고 산다(1절)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주목하라고 요구한다. 보라. 단순히 무언가를 보고 있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열광하라는 명령이다. 무엇을 그토록 감격하며 봐야 하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우리가 감격하며 봐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아가페: 긍휼, 관심, 자비). 요한은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어떠한”(포타포스)은 ‘다른 나라’, ‘다른 세상(종류)’의 의미가 있다(마 8:27,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이 땅에서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은 특별하고 초월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에 우리는 열광해야 한다.
특별히 요한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베푸셨는지가 아니라 (방법) 그 크신 사랑을 베푸신 목적을 주목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차원이 다른 사랑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호칭, 새로운 정체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러하도다.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새 관계, 영원히 지속하는 실제).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자녀로 삼은 자에게 법적으로 모든 권리와 특권을 보장해 주었다(갈 4:4-5, “아들의 명분”). 생각해보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이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모든 좋은 걸 주고 싶어 하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권리, 특권). 이 사실에 감격하는가?
이 땅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고 하셨다(눅 11:13). 최근엔 자기 행복을 위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게 자식을 버리고 죽이는 사건이 자주 보도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이런 사건에 격분하며 부모의 사랑은 당연히 이타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를 생각할 때 그렇다. 요한이 후에 말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다(요일 4: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다고 말하는데(롬 8: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게 하셨다(마 27:46). 누군가를 양자로 삼는 건 일반적으로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병들고 사악한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자기 독자를 희생시킬 정도로 대단한 사랑을 본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그렇다. 우리가 그러하다(롬 5:6-11).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바로 영생의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지금도 아버지의 그 사랑을 받고 있다(2절,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우리는 현재 누리고 있는 영생을 주기적으로 봐야 한다. 이 사랑에 감격하는가?
세상은 이 놀라운 관계와 초월적인 사랑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다. 무슨 재미로 사는지, 왜 하나님, 예수님을 따르며 살려 하는지. 그리스도인이 택한 삶의 방식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요한이 1절 마지막에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1절).
그런데 그리스도인도 영생을 가지고 있지만 누리지 못하며 살 수 있다. 세상이야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다고 쳐도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 자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받은 자가 어떻게?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매사에 적용시키는 데 실패하며 주변 상황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이나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아가게 될 영광된 길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대신, 그저 앞에 당장 일어나는 것들에만 집착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448p).
그래서 우리는 봐야 한다. 열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들과 딸로 부르시고 실제로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내 삶 곳곳에 적용해야 한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는지 깊이 묵상할 시간을 내야 한다.
한 주석가는 “보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할 시간을 가지고 그 사랑의 실재로 하여금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숨을 멎게 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깜짝 놀라서 숨을 멈춘 채, ‘도대체 이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하고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데이비드 잭맨, 요한일서강해 BST, 117p).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으로 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지금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심에 열광하는 힘으로 산다. 하나님 사랑을 보지 않고 영생을 사는 건 죄책감 가득하고 짐스럽고 외식적으로 변질되기 쉬운 삶이다. 요한이 앞으로 제시할 죄를 멀리하는 것, 거짓에 미혹되지 않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 세상을 미워하는 것 등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전될 때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정 때문에 살지 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열광하며 주목하는 것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산다. 주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느 8:10).
2. 영생의 장래를 보고 산다(2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누리고 있는 영생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산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누리는 영생은 장래 더욱더 영광스러워진다. 요한은 독자를 친밀한 표현으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며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라고 요구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2절)
마틴 로이드 존스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고 권한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명백하게 보여지지는 아니하였는데”의 의미로 설명했다. 이렇게 부연설명한 이유는 명백하다. 성경이 우리의 장래를 세세하게 말하진 않았어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너희는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19), 성령님은 바울을 통해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고전 15:51). 바울은 또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선포했다(고후 3:18).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2절). 이것이 우리가 봐야 할 영생의 장래 모습이다.
여기서 요한이 영생의 장래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는지 생각해보라. 그는 황금길과 생명수를 말하지 않는다. 영원한 보상이나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을 말하지 않는다. 그게 장래(종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이 주목하는 영생의 장래는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에 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변할 것이다. 그분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닮는다. 부모와 자식도 친밀한 관계 속에 서로를 닮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한다(롬 8:29). 우리가 죄를 멀리하는 건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벧전 1:16). 우리가 선을 행하는 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다(요일 1:7). 우리가 세상을 미워하는 건 하나님께서 세상을 미워하시기 때문이고(요 15:19),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 13:34).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할수록 그분을 닮는다. 그리고 주님이 나타나시는 날에 주님과 온전한 친밀함을 누리며 주님을 온전히 닮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영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의 사귐이 종말에 온전해진다는 걸 믿는가? 당신은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가? 장래 사랑하는 주님 얼굴을 보게 될 것을 갈망하는가? 그분을 온전히 닮아 영원히 친밀한 사귐을 누릴 것을 소망하는가? 당신은 날마다 영생의 장래를 사모해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쳐야 한다(계 22:20).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지 않아서 그렇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열광하는 자는 장래 하나님과 온전한 친밀함을 누릴 영생의 장래를 소망하며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여, 아버지의 사랑을 보라!
3. 영생의 소망에 따라 산다(3절)
만일 당신이 지금 영생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열광하고 그래서 영생의 장래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산다면 당신은 3절에 나온 말씀처럼 소망에 따라 살 수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절)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라고 말했다. 영생의 장래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기대와 예견). 주님께서 우리의 사귐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지 우리가 완벽한 관계를 이 땅에서 만들어낼 책임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자기의 참모습을 보여주시고 그 영광으로 우리를 그분처럼 변하게 하실 거라는 소망은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감을 준다. 거룩하신 그분을 더욱 닮고 싶은 부담감이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명령이 아니라 사실, 현재 시제).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원했다(빌 1:20). 그 이유에 대해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했다(빌 1:21).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을 가장 좋은 일로 여겼다(빌 1:23).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 그분의 참모습을 보고 그분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소망 가운데 바울처럼 살기를 원한다.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 내 삶에서 그분을 존귀하게 나타내는 것. 죽는 것은 마침내 그분의 참모습을 보고 그분을 온전히 닮아 친밀한 사귐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핵심은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고전 16:22). 성경이 약속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영원한 사귐을 갖는 것이다(요 17:3).
당신은 분명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녀임에도 자주 죄 때문에 멀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에 실망하고 좌절할 것이다. 세상이 너무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 보여 힘이 들 것이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때론 너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이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해 죄송할 것이다. 언제쯤 주님과 친밀한 관계, 달콤한 사귐을 누릴 수 있을까 탄식할 것이다.
그런 당신이 영생을 누리며 사는 비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사랑에 열광하는 것으로 산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신 것을 기억하는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는 비결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갖는 것이다(계 2:5). 다른 말로 하면 처음 사랑을 매일매일 새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는 그분을 향한 처음 사랑을 새롭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많이 닮았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매일 아침을 하나님 사랑에 감격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때로 그들은 냉랭하고 감흥 없는 자기 마음이 뜨겁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채워질 때까지 2-3시간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채웠다. 바쁘지 않아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니다. 바쁠수록 더욱 시간을 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채울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면 그런 삶 자체를 재평가해 봐야 한다.
매일 하나님 사랑으로 당신을 채우라. 시간을 두고 깊이 그 사랑을 묵상하고 감격하라.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 자녀로 사는 원동력이다.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사랑으로 산다.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 /요일3:4-10/ 조정의목사
2021-09-01 09:13:12
코로나 19 바이러스 검사를 통해 매일 확진자 수가 보도되고 있다. 검사의 정확도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일단 이 검사에 따라 모든 국민이 음성과 양성, 비 확진자와 확진자로 구분된다. 코로나 말고도 많은 사망자를 낳는 질병이 존재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망자(300만)와 환자를 낳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누구도 감염되길 원하지 않는다. 검사했을 때 양성이 나오는 건 정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 모든 독자를 검사하려 한다. 이 검사의 정확도는 100%다. 검사 결과 누구든지 둘 중 하나의 상태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마귀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땅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돌봄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영원히 복된 삶을 산다.
마귀의 자녀라면 이 땅에서 마귀의 이용과 학대를 받고 지옥에서 마귀와 더불어 영원히 고통받는 삶을 산다. 이 얼마나 중요한 검사인가? 음성/양성이 아니라 천국/지옥으로 나뉘는 검사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요한일서 3장 4-10절 말씀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검사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유심히 확인해 보라. 천하보다 귀한 당신의 영혼이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한 곳에서 어떤 삶을 누구와 사는지 온통 그 결과에 달려 있다.
1. 검사 기준: 죄를 짓는다(4-6)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를 구분하는 검사 기준은 바로 죄다. 4절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4절)
“자마다”라는 표현은 “누구든지” 이 검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한다(“누구든지 죄를 짓는 사람은”, 우리말 성경). 죄(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롬 3:23). 무엇이든지 생각으로나 마음으로나 행위로나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신 것을 추구하거나,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신 것을 추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요한이 여기서 죄를 “불법”이라 정의한 것에 주목하라. 불법은 기본적으로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70인역 200번 이상 등장). 불법은 원어로 아노미아인데, 여기에서 무질서를 가리키는 아노미 현상이 나왔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한 불법은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거부하는 무법, 그래서 무질서와 혼란으로 빠지는 걸 의미한다. 법과 그 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죄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거부하고 무질서와 혼돈 상태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잘 묘사하고 있다. 죄는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연약함, 부족함, 실수도 아니다. 과거의 나쁜 습관을 반복한 것도 아니다.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법에 대한 적극적 반역이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를 짓는 자 곧 죄인이다(롬 3:2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없애셨고 그들의 신분을 바꿔주셨다(5-6절).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5절)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다. 강력한 표현으로 단순히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게 아니라 죄 자체가 그 안에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라고 소개한다(고후 5:21). 예수님 가까이에서 동행한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다고 증언했다(벧전 2:2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이다. 요한의 독자는 이 사실을 알았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하면서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예언했고(마 1:21). 아버지 뜻대로 그 일을 하시려고 세례 요한에게 나왔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불렀다(요 1:29).
구약시대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흠 없는 희생양이 죽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그를 믿는 자의 죗값을 모두 치르셨고(벧전 1:19)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화목 제물이 되셨다(요일 2:2).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새 신분).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는 죄에 마땅히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6절)
“자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요한이 세운 검사 기준이다. 요한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는지 주목하라.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다(고후 4:6).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요 17:3). 하나님 안에 거하며 믿는 날부터 영원히, 거룩하신(죄 없으신) 하나님과 사귐을 이 땅과 천국에서 누린다. 그런데 누구든지 범죄하는 자는 그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 영광을 본적도 없고, 인격적 앎을 얻은 적도 없다. 기준은 아주 명확하다. 9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이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까?
2. 검사 적용: 죄와 싸운다(7-10)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도 요한의 이 검사 기준 앞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내적 갈등, 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과 너무 거리감이 있는 기준이기 때문이다(롬 7:18-25). 그래서 역사적으로 요한의 이 기준은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되어 적용됐다.
1) 살인처럼 극악한 죄만 해당(가톨릭: 대죄, 소죄)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간음, 지옥 형벌(마 5:28)
2) 신자는 하나님 보실 때 무죄 –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요일 1:9), 형제가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3) 신자의 옛 본성이 죄를 짓는 것이지 새 본성은 범죄하지 않는다 – 옛 본성에 따라 죄를 행한 주체는 결국 나
4) 요한의 이상적인 기대 – 본문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5) 그리스도 안에 살면 짓지 않는다(조건) – 들락거리는 관계?
6) 의지적, 고의적 죄만 해당 – 모든 죄가 의지적, 고의적이다
위의 적용법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어떤 형태로든 죄를 간과하고 허용한다. 계속 저 기준을 적용하며 살면 방종하게 된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쓴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짓는 죄를 간과하고 방종으로 이끄는 거짓 교사,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교회 안팎에 존재했다. 요한은 분명한 기준을 세워 놓고 그들의 거짓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7절)
편지의 독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요일 5:13). 요한은 경계하면서 아무도 그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핑계와 변명을 대며 어떻게든 삶 속에 존재하는 죄를 당연하게 여기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죄가 양립할 수 있다고 정당화한다. 세상과 마귀도 깨끗한 물에 고기가 살 수 없다며 적당히 혼탁함을 유지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것이 요한이 말한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는 방식이다.
4-10절까지 요한이 말한 ‘범죄’는 지속적, 습관적 죄를 가리킨다(4, 6, 8, 9, 현재형, “practice of sinning”, “keep on sinning”, ESV).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계속해서 범하는 것이다. 이런 죄에 대한 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 바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범죄하는 자 곧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죄를 즐길 수는 없다. 죄를 지을 때 자백하여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죄와 싸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삶이다(요일 1:9). 죄와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우는 삶(히 12:4),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삶(골 3:5).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롬 8:13).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롬 6:13). 그것이 요한의 기준을 제대로 적용한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삶이다.
톰 라이트는 이를 피아노 연주에 빗대어 설명했다. “우리는 가끔 손가락이 미끄러져 틀린 음을 치거나, 우리가 예전에 연주했던 음악에 나오는 음들을 치게 된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다시 돌아가 그 옛날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210-11pp).
우리 삶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 찬양이지, 마귀에게 헌납하는 악한 노래가 아니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분명 있고 옛사람의 습관대로 음 이탈을 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노래를 삶으로 연주하고 있다.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용납하는 사람은 그런 삶을 지속할수록 점점 더 마귀를 찬양하는 삶을 산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7절에서 10절까지 요한이 기준을 바르게 적용한 결과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7-8절)
한 주석가는 7-10절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아버지가 누구냐?”로 요약했다. 의를 행하는 자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버지가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한다. 죄를 짓는 자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마귀다. 마귀는 처음부터(태초)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뜻에 반항하여 죄를 범했다. 사람을(아담/하와) 미혹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는 아비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싸우는 것은 오롯이 그들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자녀 안에 창조하신 새로운 성품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마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며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하게 만든다. 평생 죄에 종노릇 하며 살다가 영원히 벌 받게 하는 일이 마귀의 사역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역을 파괴하셨다. 그를 믿는 자를 죄에서 해방하셔서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고 의롭게 살 수 있도록 구원하신 것이 예수님의 공로다(롬 6:6; 히 2:14-15).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된다(위로부터 난 자, 거듭난 자). 그들은 요한의 기준을 바르게 적용하여 죄와 치열하게 싸우며 죄를 반대하는 삶을 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는 이후의 설명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씨는 성령, 말씀, 진리, 성품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 새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고, 말씀의 진리가 심어졌을 때 새롭게 생겨난 성품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확실한 증거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죄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없애야 할 것으로 여긴다. 죄와 공존하지 않고 언제든 죄를 범하면 자백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하게 하심을 통해 해결한다(요일 1:9).
죄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니 우리도 미워한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죄를 없애기 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가 죄를 보는 것처럼 죄를 보고, 아버지가 우리 죄를 벗겨내고 의를 입게 하시는 은혜로운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
결론적으로 요한은 독자가 둘 중 하나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거나 마귀의 자녀들이거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용납하는 삶, 죄와 싸우지 않고 허용하는 삶, 나아가 10절에 말하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삶, 그 구체적인 적용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삶이 관철된 사람, 삶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분명하다.
3. 적용
참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죄를 없애려고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의 상처가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어떻게 죄를 즐길 수 있겠는가? 아버지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을 받아 자녀가 되었는지 지속해서 바라보는 자는 거룩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동시에 죄를 그 교제권 속에 포함할 수 없다. 발견되는 즉시 자백하고 제거한다. 몇 가지 실질적인 적용을 제시하기 원한다.
첫째, 즉시 자백하라. 당신이 쉽게 범하는 죄, 성적인 죄, 분노, 악한 말 등 죄지었음을 깨닫는 순간 즉각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 또한 그 죄의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라. 죄를 묵혀두지 말고 바로 자백하여 용서와 깨끗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라.
둘째, 항상 경계하라. 당신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민감하게 살피고 경계하라. 당신을 잘 아는 이에게 회개할 죄가 있는지 묻고, 하나님께 기도로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셋째, 말씀과 기도로 죄를 물리쳐라. 악한 마귀를 공격하는 무기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이다. 기도는 전장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필수 도구이다(엡 6:17-18).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당신 삶을 판단하고 사탄의 거짓을 분별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 필요한 경우 가까운 성도에게 특정 죄와 싸움을 알리고 기도 요청을 하라. 특정 죄 관련 서적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형제를 사랑하는가, 살인하는가? /요일3:11-18/ 조정의목사
2021-09-01 09:17:30
극단적인 이분법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빛과 어둠, 둘로 영역을 나눠 독자를 압박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가? 어둠 안에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가?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세상을 미워하라. 진리를 따르는가? 거짓과 맞서 싸워라. 하나님 자녀인가? 죄를 짓지 말라. 회색지대는 없다. 왜 이토록 명백한가?
성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보자. 남녀 성별 외에 제3의 성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큰 문제가 된다. 생물학적 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욕구와 싸워야 하는 사람의 존재와 고통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성별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내면의 갈등과 싸우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존재하지 않는 제3 영역을 인정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욕구대로 살며 방종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명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소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아웃사이더 성도’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영적 어린아이로 성장이 필요한 성도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중간에 제3 영역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세상을 즐기고 죄를 범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도 괜찮다고 인정하고, 결국 방종하게 만드는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참 하나님 자녀라면 누구나 맺어야 할 두 번째 열매를 가르친다. 첫 번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 바른 적용으로 죄와 항상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회색지대 걸쳐 산다. 성령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당신을 더욱 빛으로 인도하여 하나님 자녀의 참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거나, 당신이 어둠에 속한 것을 명백히 드러내셔서 그곳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게 하시길 간구한다.
1. 기준: 하나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11절)
조금 전까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곧 마귀의 자녀라고 분명히 선언했다(10절). 두 가지 열매가 모두 언급되었다. ①의를 행하지 않는 것—죄를 짓는 것, ②성도(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서 요한은 “우리”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된 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다. ①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죄와 싸우고 의를 행해야 한다. ②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모든 의로운 일의 완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롬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런 측면에서 참 하나님 자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열매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 가장 크고 포괄적인 의의 열매는 사랑이다.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요한의 독자(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다(요 15:12).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동일한 계명을 주셨지만(레 19:18), 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명이 되었다(요일 2:7-11).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근거),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본), 성령을 통해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힘을 얻는다(원동력).
요한이 3장 본문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생각해보자. “보라!” 무엇을 보고 감격하라고 명하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요일 4:11).
2. 이유: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12-15절)
사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은 하나님 모르는 세상도 캠페인 문구로 자주 사용할 정도로 일반적이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에게 더욱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은 두 가문을 구분하고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미워하는 자를 악한 자 곧 마귀 가문 사람으로 구분한다.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는 사랑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가문 사람은 사랑한다. 결국 성도 사랑이라는 열매는 뿌리내린 곳, 우리가 속한 가문이 어딘지를 밝힌다.
자, 여기 마귀 가문에 속한 가인을 대표적인 예시로 만나보자(12절). 그는 우리 반면교사다. 가인은 누구에게 속하였는가? 그는 악한 자에게 속했다. 악한 자는 마귀다(요일 3:12; 5:18, 19).
가인이 무슨 일을 했는가? 그 아우를 죽였다(끔찍한 살인, 도륙, 도살, 잔인성 강조). 어떤 이유로 죽였는가? 필로는 ‘가인의 죄가 영원한 사망을 낳는 자기사랑에서 나오는 죄’라고 정의했다. 탈굼에선 가인이 심판, 내세, 의인의 보상, 악인의 처벌 등을 모두 부인하는 악인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유대인 문헌 중엔 마귀가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낳은 자식이 가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가인과 그가 행한 일을 이렇게 연결 지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2절).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행위를 낳는 자였고, 아우는 의로운 자에게 속하여 의로운 행위를 낳는 자였다. 그래서 가인이 아우를 죽인 것이다. 이것은 가문 간의 전쟁이다.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의에 속하여 의를 행하는 자를 시기하고 미워한다(요 3:19-21).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42, 44). 아버지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마귀에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 세상에 속했으나 거기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5:18-19). 하나님 자녀답게 살수록 미움은 더 커진다(현재형).
요한은 하나님 가문에 속한 자들에게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12절). 문자적으로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과 같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속한 가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녀는 의로운 분, 하나님께 속했다(요일 3:7). 요한은 그것을 14절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절)
사망과 생명이 대조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사망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분리된 관계가 사망이다(엡 2:1). 그럼 생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 상태다. 15절에 요한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 즉 소속이 바뀐 자들의 마땅한 열매는 “형제를 사랑함”이다. 이것은 토대가 아니라 표증이다.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이로써 우리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알거니와”, 미래 분명하게 드러날, 현재 경험하는 실재).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의 소속은 어디겠는가? 사망이다.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이 있든, 직분이 무엇이든, 교회 다닌 연수가 어떻든 관계없다. 사랑하지 않음은 여전히 그가 사망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날 때부터 속한 소속, 가문이 바뀐 적이 없는 것이다.
15절에서 요한은 더욱 강력하게 이 사실을 피력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하는 것과 살인이 같은 수준의 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마 5:22). 형제를 미워하는 자나 살인하는 자 모두 처음부터 살인한 자 마귀에게 속해있다는 점에서 같다(요 8:44).
결론적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마다 영생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 즉 하나님과 화목한 가족 관계 안에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요한은 이 사실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너희가 아는 바라.
잠시 당신의 뿌리, 가문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라. 때로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할 때가 있다. 심지어 특정 성도가 미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요일 1:9).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성도에 대한 사랑 없음이 드러날 때, 오랜 세월 특정 성도를 향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회색지대에서 어둠 혹은 사망으로 당신의 소속이 드러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라.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어라.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요 5:24).
3. 방식: 하나님께 받은 사랑처럼 사랑한다(16-18절)
그러면 영생이 그 속에 거하는 자, 하나님 자녀는 어떤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한가? 성도 사랑의 열매는 어떤 모양인가?
가인이 마귀 가문의 대표였다면, 하나님 가문의 대표는 16절에 나오는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1).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지만 의인도 아닌 죄인, 선인도 아닌 원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사랑의 크기는 얼마나 더 클까? 바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다(롬 5:7-8). 요한은 16절에서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사랑의 크기와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자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할 성도 사랑의 크기와 형태다. 우리는 자기희생적인 사랑,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 성도를 위하여 자아를 죽이는 사랑을 해야 한다.
흥미로운 대조가 아닌가? 마귀에게 속한 자는 남을 죽이는 자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신을 죽이는 자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정의한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이다(15개 모두 동사).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거나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 모두 자아를 죽이는 행위이다. 우리는 성도를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런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 그런 사랑을 맺는 것이다(엡 3:17-21).
요한은 또 다른 행함에 주목하는데, 17절에 나오는 실질적 도움을 주는 행함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는 재물을 가지고 있고, 형제는 궁핍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봤다(흘끗 본 것이 아니라 오래 주시함). 그런데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 문자적으로 “자기의 내장을 닫으면”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장기(내장, ’속상하다’)을 닫는 것 즉 긍휼, 동정, 연민의 마음이 흘러나오는데 억지로 틀어막는 것이다.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사랑은 말과 혀로 표현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부합하는 행함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요한이 특별히 주목한 행함은 성도의 필요를 보고 긍휼한 마음을 품고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행함이다.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책망했다(약 2:15-16).
우리는 반드시 성도의 필요를 실제로 채우는 행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것을 진실한 사랑이라 했을까?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은 다른 말로 ‘진리 가운데’ 하는 사랑이다. 복음의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궁핍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 자기 아들을 내어줌으로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우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엡 5:25; 딛 2:14). 그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이 무엇인가? 자기희생적 사랑, 자아를 죽이는 사랑, 그래서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 할 사랑의 열매다.
적용
오늘날 하나님 자녀는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딤후 3:1-2, “말세에…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1980년대 세상과 2021년 세상은 얼마나 다른가? 이웃 사랑이 최고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자기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교회도 그 막강한 변화의 급류 속에 서 있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그 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 세상이 갈급해 하는 그 사랑을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이 묘사하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행 2:42-47).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성도를 사랑하는 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 요한은 그래서 3장 1절에 “보라”, ‘감격하고 열광하라’고 간청한 것이다. 당신이 뿌리 박혀 있는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엡 3:19). 성도를 향한 사랑이 방전될 때마다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으로 충전되어야 한다. 마음에 미움이 싹틀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그 사랑으로 미움을 제거하고 사랑을 심어라.
둘째, 사랑하지 않는 죄, 미워하는 죄를 자백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는 본문에서 요한이 ‘사랑하라’ 명령했지 ‘좋아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성도는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고 좋아하기 힘든 면을 가지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랑’이 그 불편함, 어려움을 뛰어넘어 ‘좋아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 죄를 우린 회개해야 한다. 주님이 당하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불편함과 어려움을 넘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셋째, 성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를 채워라. 절대로 자기 자신과 가족만 돌보는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시간, 재능, 영적 은사, 재물의 일부는 반드시 다른 지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성도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최고의 수단은 기도다. 반갑게 인사하고 교제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필요를 발견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도가 모인 곳에 함께 하는 것 역시 서로의 기쁨을 채우는 귀한 일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 성도 사랑으로 시험하여 보라(엡 5:10).
완성된 에덴 /계22:1-5, 요일3:2-3, /김형익 목사
2021-08-18 02:13:45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 22:1-5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21장 전체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지나면,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인 22:6-21이 남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결론부가 새 하늘과 새 땅—새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성경이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담과 그의 신부 하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은 창조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요한계시록 21-22장은 새 창조와 완성된 에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곧 에덴 동산의 완성이라는 점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셈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은 1500년에 걸쳐 4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마치 탁월한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한 권의 책 보다 더 놀라운 통일성과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오류가 없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1. 생명수의 강(1-2a; 창 2:10-14; 겔 47:9; 슥 14:8; 요 4:10-14; 7:37-38)
우리는 앞에서 요한이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고, 성전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었으며, 밤이 없었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성 내부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먼저 1-2절 상반절에서 생명수의 강을 묘사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요한계시록 22:1-2a).”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을 묘사할 때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갈래로 나뉜 강들을 언급합니다(창 2:10-14). 물은 종종 생명의 젖줄로 불립니다. 그래서 고대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에덴에서 흘러나온 강은 동산을 적셨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완성된 에덴에서 그 강은 생명수의 강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이 강이 발원하는 곳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수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에스겔 47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강물이 흘러나와 그것이 미치는 곳마다 죽은 것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고, 그 다음에 무릎과 허리에 그리고 헤엄쳐야 할 강이 됩니다. 그 강물은 미치자 죽은 사해가 살아나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게 됩니다. 에스겔 47:9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에스겔 47:9).”
생명수의 강은 에스겔 선지자가 보고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스가랴 선지자도 생명수의 강에 대한 예언을 하였지만(슥 14:8), 무엇보다 생명수의 강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 자신의 말씀들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셨습니다(요 4:10-14). 또 초막절 큰 날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요 7:37-38). 주님의 이 약속이 완성된 에덴에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요한계시록 7:16-17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완성된 에덴은 오늘 본문에서 그 실체를 보여줍니다.
생명수의 강은 무엇보다 ‘수정 같이 맑습니다.’ 이미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4:6),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인 거룩한 성과(21:18) 그 성의 길을(21:21) 보았는데, 생명수의 강도 ‘수정 같이 맑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맑음은 하나님의 순결하심, 거룩하심, 초월적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강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얼마나 순결한지, 믿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 은혜가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령 오늘날과 같이 하천의 오염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고 마실 수 있는 강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완전히 순수한 물입니다.
이 강의 원친이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강의 원천이 하나님 자신이시니, 이 물이 깨끗하고 맑아서 마시는 자마다 생명을 줄 것은 분명합니다. 2절에 보면, 이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합니다. 길은 거룩한 성의 대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는 말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길을 따라 나란히 강이 흐른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수의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는 성령을 주심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요한복음 7장의 주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해석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좀 더 폭넓게 설명합니다. “물 은유는 주로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나누는 영원한 교제의 삶을 표상한다…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거룩한 성의 핵심 의미라는 점을 증명한다.”
2. 생명나무 (2; 창 3:22-24; 겔 47:12; 계 2:7)
이어서 요한은 생명나무를 소개합니다. 이 또한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창세기 3:22-24이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2–24).”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회복된 에덴, 완성된 에덴에서 우리는 다시 그 생명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생명수의 강과 마찬가지로 생명나무도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바 있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12).”
요한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한 바와 같이 생명나무가 생명수의 강 좌우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기원하는 생명수의 강이 생명나무에 수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한다는 것이고, 생명나무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명나무가 나무들(복수)이 아니라 단수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집합명사의 단수형으로, 강 좌우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나무들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하나의 거대한 뿌리에서 강 좌우로 쭉쭉 뻗어 자란 생명나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본 하나의 생명나무는 이제 강 주위의 많은 생명나무가 됨으로써, 완성된 에덴의 충만함과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 생명나무의 기능을 묘사합니다. 먼저,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완성된 에덴의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과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자연은 때를 따라 결실을 내었지만, 거룩한 성 완성된 에덴에서는 결실의 계절이 따로 없고 언제나 모든 시간이 결실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영원토록 충분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계 2:7), 여기서 우리는 그 성취를 봅니다. 짐승에게 굴복하여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승리한 성도들은 이 열매를 먹고 영생의 풍성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만국을 치료하는 잎사귀입니다. 만국은 물론 구속 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잎사귀가의 치료하는 기능은 천국에서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은 육체적 치료와 영적 치료가 완성된 곳임을 암시하고 내세의 무한한 영광을 현세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브라어인 탭(Brian J. Tabb)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영생을 상징한다.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날 때 영생을 상실했으나(창 2:9; 3:22-24) 새 창조에서 다시 회복한다(22:2).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배제되고 접근을 차단당했던 길이 이제 의인이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열린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붙잡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성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기업을 상징한다(22:14,19).”
3. 완성된 에덴의 제사장과 왕들 (3,4a; 갈 3:13; 계 1:1; 창 2:15; 출 28:36-38; 창 1:26,28; 민 6:25-27)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에 이어 요한이 완성된 에덴에서 세번째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그 성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총 1189장인데, 저주와 저주의 영향력이 없는 장은 네 장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인 창세기 1-2장과 모든 저주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된 후의 요한계시록 21-22장입니다. 하지만 저주가 제거되는 결정적 사건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이제 십자가의 구속이 완전히 성취된 것을 우리는 본문에서 봅니다. 저주가 사라지고 난 후에 요한이 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자기 백성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심으로써 그 성이 성도들에게 모든 것—영생, 충분한 양식, 완전한 치료, 절대적인 안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구속 받은 성도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종은 요한 같은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1:1을 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요한계시록 1:1).” 요한은 성도들을 자기와 동등한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점을 보면, 오늘날 목사를 지나치게 특별한 종으로 구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서 크게 존경할 수 있을 뿐입니다(딤전 5:17).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은 구속 받은 백성이 완성된 에덴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암시합니다. ‘섬기며’라는 말은 구약 제사에서 제사장에 의해서 행해지는 섬김과 경배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헬라어이지만, 구약적 배경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었습니다(창 2:15).
여기 ‘경작하고 지킨다’고 두 단어가 결합되어 사용될 때,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책임 혹은 성막에서 봉사하고 성막을 지키는 제사장의 직무를 가리켰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하나님의 최초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덴 동산을 섬기고 지킨 첫번째 제사장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뱀이 들어와 자신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는 일로부터 에덴 동산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서 실패했고 그 결과 동산—성전을 지키는 제사장의 직무를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4절 하반절에서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도 대제사장의 이마에 쓰던 순금패를 생각하게 합니다(출 28:36-38). 그 금패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메레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기는 자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말이고 즉, 그들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성별됨으로써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거룩한 특권이 모든 주의 백성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은 완성된 에덴에서 성도들이 제사장 뿐 아니라, 또한 왕으로 통치할 것을 말씀합니다. 왕노릇은 천년이라는 한정된 기간의 왕노릇이 아닙니다. 세세토록, 영원히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였듯이(창 1:26,28), 이제 구속 받은 성도들은 완성된 에덴에서 모든 새 피조물들에 대하여 영원한 왕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5절은 다시 밤이 없으며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다는 사실을 21:25에 이어 강조합니다.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 6:25–27).” 옛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었겠지만,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성도들의 영생과 왕노릇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4. 지복직관(至福直觀, 4a; 출 33:18-23; 요 1:18; 시 11:7; 17:15; 27:4; 42:1-2; 고후 3:18; 요일 3:2-3)
끝으로 우리는 완성된 에덴에서 경험하게 될 최고의 복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말합니다(4a). 구속 받은 성도들은 완성된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소위 지복직관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무엇을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 부르실 때, 아담은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전과 같이 뵈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잃어버린 최고의 저주이고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시며 등만 보여주겠다고 하셨습니다(출 33:18-23).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 모세라도(신 34:10)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그러나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완성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이것과도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지복(至福), 즉 더한 행복이 없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필립 휴즈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모든 복의 정상이며 총체이다.” 그러니 이 복의 크기를 어떻게 말로 다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비록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할지라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다니요?
참된 성도들의 소망은 언제나 주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었음을 시편의 고백들이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 1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1–2).”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은 구약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성도가 가진 가장 큰 소망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생후 6주 때 의료사고로 실명을 하고 94세로 임종하기까지 시각장애인으로 살며 수많은 찬송시를 썼던 패니 크로스비는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 생전에 눈을 떠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1서 3:2–3).”
5. 교훈과 적용
말씀을 맺으면서 두 가지 교훈과 적용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 요한일서의 이 말씀처럼 여러분도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보고싶은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 영화로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가 가지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힘을 얻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너무나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완성된 에덴에서 지복직관을 누릴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그날 거기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소망을 품고, 이 소망이 여러분의 어떤 소원보다 더 강렬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게 되기 위해,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둘째 교훈입니다. 성도는 종말론적 안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를 정복하심으로 에덴을 완성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최초의 에덴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에덴 동산을 통해 의도하셨던 영광, 완성된 에덴으로 나아가가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에덴동산에 한정되었던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비치는 하나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밝히고 새 하늘과 새 땅 전부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따라(행 1:8)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선교사와 교회들은 자신들의 수고와 섬김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며 너무나 영광스러운 감격으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날에 영광스럽고 즐거울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1세기 말, 믿음과 복음 증거로 끔찍한 박해를 직면하고 살아야 했던 성도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비전을 보면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을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소망을 가지고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고, 갖은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등지거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힘이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 말씀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복음의 증인된 신자로, 교회로 살아가십시오. 머잖아 완성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지복직관의 행복을 소망하며, 우리의 눈물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즐거이 보며 감격할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안목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일서 강해 (18) -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요일3:4-10/ 김형익 목사
2021-05-13 09:09:00
사도가 앞에서 말했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는 장래에도 하나님의 자녀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설텐데, 그날 주님의 참모습을 보고 주님의 형상으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며 살게 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의 소망이 그들로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를 더럽히는 삶에서 지켜주는 강력한 동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는 독자들의 시선을 장래에서 과거로 데리고 갑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는 밥 먹듯이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일 계속해서 범죄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구주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며 심지어 마귀의 자녀라고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
1. 두 종류의 사람
성경은 일관되게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그로부터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두 종류의 사람을 대변합니다. 아벨을 대신한 셋과 가인의 후손들도 그렇습니다. 사도가 3:12에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할 때, 가인은 마귀의 자녀에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과 의인을 악인, 죄인, 오만한 자와 구별합니다. 세상은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로 나뉩니다. 그것을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라고 표현합니다(10).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마귀의 자녀도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고(9), 하나님께 속한 자이지만(10), 마귀의 자녀는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8).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운 특징을 가지지만(7), 마귀의 자녀는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를 닮아 계속 범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8). 사도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면서, 죄의 본질과 죄의 기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죄와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2:3~6에서 상고했던 말씀, 즉 성도는 빛 가운데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좀 더 정교하게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본문을 상고할 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사귐 속에서 기쁨과 확신을 누리게 하려는 사도의 목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등급은 없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오해를 다루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신자들에게 영적 등급이 있습니까? “신자에서 제자, 그 다음에는 제자 삼는 사람으로 나아가십시오”라고 도전할 때, 신자는 3등급이고 제자는 2등급이며 제자 삼는 사람은 1등급이라는 말입니까? 때로는 직분도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집사도 아니고 그냥 일반 평신도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은 별 것 아닌 저급한 신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신자의 등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고(벧전 2:9)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며(요일 2:20,27) 거룩하게 부름을 받은 성직자들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신자들 중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엘리뜨 그룹을 구별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구별이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암시합니다. 모든 신자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도 그 한 예입니다. 3:3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와 ‘범죄하는 자마다’, 9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10절에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이라는 표현 방식은 ‘이런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예외없이’라고 말하는 일반화를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신자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 거기에 1등급이나 2등급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사도가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말한 것 역시, 그런 식의 구분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도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등급은 아닙니다.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는 가운데, 사도는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3. 죄의 본질과 기원
이제 사도가 말씀하는 핵심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먼저 죄의 본질과 기원의 문제입니다.
A. 죄의 본질(4)
4절은 죄의 본질을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불법은 ‘법이 없이 행하는 태도’로서, ‘무법’(lawlessness)을 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거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고의적 행위이고 자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을 업신여기고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절정에 이르게 될 사탄적 반역을 묘사할 때, ‘불법의 사람’, ‘불법의 비밀’, ‘불법한 자’라고 표현한 것도 죄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살후 2:3,7~8). 죄는 실수가 아닙니다. 사탄처럼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고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역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4절에서 ‘불법’이라는 죄의 본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했던 일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고 거부였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죄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반역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욕되게 합니다. 그래서 죄는 선하신 하나님께 반역의 깃발을 들게 합니다. 하지만 영지주의 이단들은 죄를 단순한 무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즘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는 무지가 아니라 불법,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능동적 거부라고 말합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참된 회개가 시작되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B. 죄의 기원(8)
사도는 더 나아가 죄의 기원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8a).”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전의 이야기이고, 첫 사람 아담의 범죄를 야기한 자가 마귀라고 지적합니다. 마귀의 특성과 그가 하는 일은 죄를 짓게 하려고 사람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그가 하는 거짓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왜곡하여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기원은 마귀이고, 마귀는 거짓말을 통해서 자기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 거짓말을 확신하고 불법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 아비인 마귀를 그대로 닮은 것이고, 마귀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주님께서 오신 목적(5,8)
만일, 이것이 사도가 하는 말의 전부라면 거기에는 절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심으로 그 일을 해오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본을 보이시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은 선하게 산다고 해서 자기 죄의 댓가를 지불하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보다 본질적인 목적은 죄와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고 했습니다(갈 4:4). 사도 요한도 여기서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A. 죄를 없애려고 오심(5)
5절을 보지요.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주님은 죄를 없애려고 오셨습니다. ‘없앤다’는 말은 세례 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할 때, ‘지고 간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요 1:29).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죄에 대한 율법의 형벌과 저주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다 받으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일을 온전하게 흠없이 수행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죄가 없으셔야 했습니다(히 4:15). 그래서 사도는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육신하시기 전만이 아니라,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 부활 후 승천 이후에도 영원히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B.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심(8)
사도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조금 더 말합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여 말씀하실 때,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창 3:15)
그 약속대로 주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마귀의 일은 거짓말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심으로써 마귀의 거짓말을 일거에 박살을 내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치 않고 신뢰하게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당신의 선하심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치 않고 신뢰하게 하는 데에는 십자가로 충분하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기원인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없애고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5.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하지 않는다(9,6)
사도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한 가지 명제를 서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명제입니다(9). 6절도 같은 명제를 말합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명제는 수많은 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신자가 죄 없는 완전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거나, 전혀 죄를 짓지 않거나 어떤 죄도 지을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1장 8절과 10절, 2장 1절에서 자신이 한 말을 뒤집는 것이 되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지금 영적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육적인 행위들과 죄에 의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죄의 유혹도 받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자칫 그들의 거짓된 주장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지금까지 사도는 신자들이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범죄하기도 하기에, 범죄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라고 말해왔고, 또 너희가 범죄치 않도록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9절과 6절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살인과 같은 극악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실상 참된 신자도 그런 죄를 저지를 수는 있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그런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가 가지는 동사의 시제가 보여주는 독특한 의미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9절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말과 6절의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는 현재시제인데,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일을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다 엄밀하게 번역하면, 9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6절도,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계속해서 습관적으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죄의 본질인 불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마치 법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아무 거침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도전하고 반역하는 태도, 이것이 죄의 본질인 불법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9절 하반절에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는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피고 있는 6절과 9절은 각각 4~5절과 8절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5절과 8절에 설명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각각 불법인 죄의 본질과(4), 죄의 기원인 마귀의 일을 멸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목적을 알고,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죽으심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신 주님을 안다면,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불법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범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과 완전히 충돌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이것은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에게 속한 삶의 특징입니다.
신자는 그럴 수 없고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9절과 6절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한 것은,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그것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불법의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 가지 명시적 근거가 있습니다. 9절에,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하나님의 씨’라는 은유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성령님을 가리킨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도 말합니다.
혹자는 씨가 일반적으로 자녀들,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거룩한 자녀들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문맥상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또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바, ‘신성한 성품’을 가리킨다고도 봅니다(벧후 1:4). 그러나 요한일서의 전체 문맥상 가장 자연스럽고 신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또한 신자 안에 거하는 기름부음으로 대표되는(2:27) 말씀과 성령을 함께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도가 강조하였듯이, 말씀과 성령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말씀의 충만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성령님이 내주하시기에 그는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범죄하면서 불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에 대한 사도의 논증입니다.
6.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말씀은 선명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우리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가는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지금 이런 도전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자비한 초청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서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십니까?
A. 신학과 윤리는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신자의 삶에서 신학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은 신자의 삶에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지식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삶에서 아무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 계속해서 습관으로 범죄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을 반증하는 것입니다(6). 바울 사도가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였듯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결코 은혜를 더한다는 명목으로 죄를 짓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롬 6:1~2).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칭의의 은혜를 입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법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여러분은 자라가셔야 합니다. 신학과 윤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B. 죄를 경계하라.
또 하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얻는 교훈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연약하여 범죄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삶의 근본 기조가 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그의 삶의 습관이 되어서 이 죄에서 저 죄로 가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기억하십시오.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고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을 입고 오셔야 했으며, 영광의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또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이 그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더 이상 그 마귀의 일에 조종을 당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일은 신자에게서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7).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죄는 단지 약점이나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불법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합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죄는 불순종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죄를 없애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고전 1:30).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비록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가슴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불법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제 성령님과 말씀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 오늘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십시오 /요일3:1-12/ 김병삼목사
2018-04-14 05:31:36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우리는 누구인가요?
아주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자신처럼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정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는, 왜곡된 의지로 인해 우리의 삶에 죄가 나타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악한 세상과 사탄의 권세가 우리를 창조의 목적대로 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라는 근거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아마도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허리가 아파서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들에게 참 보편적이죠. 그런데 조금 아픈 것을 참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괜찮아지기도 하는데, 결국 못 참고 병원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진찰도 하고 검사를 합니다. X-Ray를 찍기도 하고, CT나 MRI 촬영도 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진단해줍니다. 참 신기하죠. 몸은 내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아프고, 어디가 아프며,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의사가 알려주니 말입니다. 내 몸이 아픈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보는 의사에게 맡기다니.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고민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면 방법이 나올 텐데,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그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도록 하셨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행위의 무질서가 오는 것입니다.”
종종 해외를 여행할 때면 그런 장난을 칩니다.
식당에서든 공항에서든 재미있게 떠들다가 좀 민망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한국 사람으로 알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외국 사람이 지나갈 때, 갑자기 ‘니 하오’를 하든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는 인사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유를 아시겠죠?
왜 사람들은 어떤 단체를 만들면 먼저 ‘로고’를 만들까요? 왜 모든 단체는 새로운 사람이 가입하면 ‘배지’를 만들어 달아주고, 사용하는 물건에 로고를 새겨 줄까요?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면, 사도 요한이 지금 얼마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이 한마디에 참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러니, 2~3절을 보세요.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지금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당하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장래가 어떻게 될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의 모습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죄’의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 죄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왜 죄를 짓지 않아야 하나요?
이 이유도 “우리가 그러하도다!”라는 말과 연관해서 보겠습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결혼한 남편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회사에서 회식할 때면 일정한 시간에 집에 들어갑니다. 아마도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회사 동료가 이렇게 묻습니다.
“마누라가 그렇게 무서워?”
그러자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아주셨다는 그 사실을 깊숙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 그리고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을 가진 자들이 그 소망을 얼굴에 드러내는 것처럼, 그 소망으로 인해 ‘깨끗함’도 나타납니다.
종종 듣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주 고상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말이 아닐까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야 정상이 아닐까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소망을 가진 사람의 기쁨과 깨끗함이 아닐까요?
이런 우리를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1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르고,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인 줄 압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우리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 [내 평생에 가는 길]에 보면 이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가장 절묘한 교차로인 현재에 처해 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에 끼여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안전한 한쪽 그네를 놓고 공중으로 날아가 반대쪽 그네를 붙들어야 하는 그네타기 곡예사와 같다. 양쪽 그네에는 안전이 있다.
그러나 한순간 곡예사는 어느 쪽도 붙잡고 있지 않다. 안전과 안전 사이에 믿음의 행위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지상 생활도 그 공중의 순간과 같다. 불확실하고 위험한 순간은, 우리가 반대쪽에 닿아 그네를 놓치지 않게 꽉 붙잡을 때에야 비로소 막을 내린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긴장을 유지해 주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죄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소망을 두고 깨끗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죄의 문제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하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죄가 경험되고 목격된다는 것이죠.
이제 죄가 무엇인지, 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죄를 통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문제로 삼는 것은 죄를 지은 ‘행위’가 아니라, 자신은 재수가 없어서 죄가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감옥에는 들통 난 죄인들이 들어가고, 지금 우리는 들키지 않은 죄로 인해 여기 있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해 보니, 죄가 드러나고 나면 ‘분’한 생각이 듭니다. 자신만 재수 없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심각한 것은 8절의 말씀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죄’는 본질에서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속한 자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선하시지만,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조금 모순점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실 9절 말씀이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구절인데요. 아무리 묵상해도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자신을 비추어 보면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다면 저는 아직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그런데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읽다 보니, ‘죄를 짓는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습관처럼 죄를 짓는 사람’
그리고 NIV 성경을 봤더니 9절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하나님께로 난 자는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깊이 이 말씀을 묵상하여 보겠습니다.
‘씨’라는 것은 아직 형체가 아니다. 어쩌면 생명체로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죽은 줄 알았던 씨에서 생명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2010년 4월에 보도되었던 내용입니다.
2009년에 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성산 산성을 발굴하다 옛날 연못으로 짐작되는 퇴적층에서 연 씨 10알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2개를 한국지질학회에 보내 성분을 분석해 연대를 알아보니 한 알은 약 650년 전에, 다른 하나는 760년 전에 있었던 씨앗입니다.
그리고 남은 다섯 알은 함안군 농업기술센터에서, 3알은 함안박물관에서 싹을 틔웠는데, 각각 2알과 1알을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씨가 남아 있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또 주목해야 하는 말이 ‘거한다’라는 단어인데, 헬라어 원어에 보면 ‘메노’라는 말입니다. 설명해 놓은 책에 보니,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늘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꼭 잡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죄를 짓느냐가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느냐가 아닐까요? 그러면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전에 참 많이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라는 제목입니다.
1.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2.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3.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하도 못하네.
4.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우리의 문제는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으나 계속해서 짓지 말아야 하고,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은 오늘 말씀 가운데 있는데,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문 5~6절입니다.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이 땅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6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은 예수를 영접하고 죄를 씻는 것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설명할 때 늘 연탄을 비유로 듭니다. 까만 연탄은 닦아도 닦아도 까맣습니다. 까만 연탄이 하얀 재로 변하는 길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불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접’이라는 말이 나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어성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을 ‘receive’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즉,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이 설교에서 이렇게 쉽게 설명하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할 것 같습니다.
손님이 여러분의 집에 와서 ‘딩동딩동’ 초인종을 누를 때 뛰어나가서 문을 활짝 열고 ‘어서 들어오세요.’하고 손님을 반갑게 모셔 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해요. 그와 같이 예수님이 내 마음의 문 앞에서 ‘똑똑’ 두드리실 때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맞이하는 것이 바로 영접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친구는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런 건 관심도 없어요. 교회를 오기는 왔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예수님을 정말 믿는 마음도 없어요. 그냥 구경삼아, 재미로, 친구 따라, 엄마가 가니까, 선생님이 전화해서 오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왔어요.
그런 친구는 교회를 오기는 했지만,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의 문은 예수님만 두드리시는 게 아니에요. 마귀도 찾아와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기쁨이 넘쳐요. 사랑이 넘쳐요. 그래서 서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럴 수 있게 되어요. 하지만 마귀를 마음에 둔 사람은 미워하고, 화내고, 짜증 부리고, 욕하고, 남을 속이고, 욕심부리게 되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오신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죠. 5절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 삶의 주인이 ‘죄’에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많이 배우고 들었던 ‘사영리’에 나오는 그림이 있지요. 내 삶의 의자에 ‘내가’ 앉아 있을 때는 소망이 없지만, 그 의자에 ‘주님’이 앉으실 때, 더는 죄의 권세 아래 놓이지 않게 됩니다.
6절 말씀에, 그 안에 있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더는 우리 인생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신 주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주님을 닮기 원하네.’
주님을 닮기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에서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단’의 순간입니다. 놓을 것을 놓고 잡을 것을 잡는 것입니다. 본문 7~8절을 보세요.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영접한다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지가 생기는데, 죄와 어둠이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선한 의지가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계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마귀’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의를 행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계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교리 가운데 조금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아주 핵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선행은총이 주관적 은혜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의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밥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의지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의지적으로 밥을 떠먹을 때, 영양분이 됩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의지’만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려진 밥상이 없다면 밥을 먹겠다는 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의지적 결단에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마귀의 자녀인지?
김형석 교수가 쓴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오래전 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큰 교회의 한 젊은이로부터 ‘선생님, 우리 교회에서 차지철 씨의 장례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석연치 않은 생각을 가지곤 했는데, 이번에 삼풍 백화점의 회장이 우리 교회의 교우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우리 교회가 어딘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었다. 나는 그 젊은이가 자기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을 보면서 어떤 교회에서 어떤 잘못된 사람이 나왔다는 것으로 평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통하여 어떤 인물과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훌륭한 목사와 교인들이라면, 소위 말하는 ‘목회의 성공’이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해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졌는지,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제 성구로 뽑은 것이 10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납니다.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고 강조하는데, 빛에서 어둠이 물러나고, 더러움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씀은 또한 우리가 어떠한지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 말씀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존재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다면 두 가지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쪼갠다’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조목조목 쪼개기 시작하면 틈새에 숨어 있던 것까지 모두 드러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모든 것이 드러나면 두려운 마음과 수치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 분노로 표출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정체로 인해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깨닫게 되는 정체가 무엇일까요? 아주 근본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도 죄의 문제로 참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죄에 대한 고민은 죄 짓는 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로마서 7장 19~20절을 보세요.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죄를 계속해서 짓게 되는 이유는 자신 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이제 논리적으로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원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면,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즉 우리 속에, 말씀의 씨, 빛, 하나님의 마음이 없으면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죠.
이제 말씀이 들어오면, 결국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떠한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이 들어오며 죄에 대하여 예민하게 됩니다. 죄가 가까이 오면 긴장합니다. 실수 혹은 어쩔 수 없는 죄를 지었을 때 무척 당황하고 진땀을 흘리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런 반응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씨가 없으면, 죄를 대할 때 무감각합니다. 별로 당황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죄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나라한 본성을 보게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대항한다는 것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를 거부하면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일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수입이 적어지고, 세상에서 즐기던 쾌락도 사라지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장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순간 밥을 굶을 염려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과 걱정을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다면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더는 마귀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당장 이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겁니까? 여러분이 내일부터 시작할 한 주간의 시작을 무엇으로, 어떻게 시작할 것입니까?
죄를 지을 계획도 결국은 여러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죄를 짓는 순간, 여러분은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여러분이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는 결단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찾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심한 삶을 다시 다짐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심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우심을 구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 의지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믿는 것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택함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사람 /요일3:1-9/ 유기성 목사
2016-08-24 11:00:17
오늘 우리의 잘못된 믿음 하나를 바로 잡고 싶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죄는 짓고 살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죄 안짓게 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죄는 짓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단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또는 이미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음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죄에 무너지고 맙니다.
중간고사 시험 때, 학생들이 밤을 새워 시험 준비를 하고 강의실에 들어왔는데, 교수님이 사정이 있어서 시험을 연기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항의했다. "교수님, 그렇게 갑자기 시험을 연기하시면 다른 과목 시험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늘 꼭 시험을 치렀으면 합니다."
교수님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학생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대답했다. "김철수입니다." 교수님이 출석부를 펼쳐들며 말했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자세가 보기가 좋군. 자네는 시험을 보지 않아도 A학점을 주도록 하지." 그러자 그 학생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제가 당황해서 이름을 틀리게 말씀드렸습니다. 제 이름은 이영길입니다.“
우리에겐 죄에 대하여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왔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간이 자랑스럽습니까? 감격스럽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이 ‘또 죄짓고 왔습니다!’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죄 안 지어야 한다.’는 생각도 희미하고 죄 안 지을 수 있다는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는 어쩔 수 없이 짓게 마련이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있겠느냐?’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아니 지을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이고 축복입니다.
9절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오해하면 큰 일 납니다.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으니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보시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나의 자녀다. 나는 네가 어떤 죄인이라도 나의 자녀로 받아들인다. 너는 이제 천국 백성이다. 이것을 믿기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자녀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이젠 죄짓지 말고 정신 차리고 바로 살아 달라는 호소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엄청난 것입니다.
요일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여전히 마귀 자식처럼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시겠다는 뜻이겠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겠다는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여러분이 그동안 보았던 가장 도덕적인 사람 보다 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깨끗하게 살고자하는 소원이 생기게 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3절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 짓지 않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5절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6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인지 아닌지는 죄를 짓는지 아닌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각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간 죄를 짓고 살았던 이들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미혹에 빠지면 안됩니다.
7절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죄지어도 구원은 받는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 안지을 수는 없다!’ 는 주장은 미혹입니다. 우리를 죄 짓게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8절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은밀한 죄, 습관적인 죄, 등 예수님을 믿고도 죄짓게 되는 일을 결코 작게 여기면 안됩니다. 생각으로 짓는 죄도 얼마나 심각한지 명심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마귀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주는 줄 몰랐기에 악한 생각, 죄된 마음을 작게 여기고 품었기에 결국 예수님을 판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8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죄에 끌려 사는 사람은 이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여야 할 것은 “죄짓지 말라”가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9절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죄 짓지 않는 일은 우리 노력, 결심으로 안되는 일입니다. 반드시 실패입니다.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짓지 않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적치유 세미나 크리스티 김선교사, 대학생 때 디스코 춤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춤 추는 것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알고 마음이 치료받고 난 뒤, 그녀는 더 이상 춤추는 것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돈주고 춤 추라고 해도 싫어졌다고 했습니다. 만약 여전히 춤을 추고 싶은데, 선교사이기 때문에 춤을 추지 못하고 억지로 참는다면,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죄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9절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씨란 하나님입니다. 곧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 영생이신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임하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씨를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특별한 체험이나 간증이 없을까?” 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간증 중의 간증은 “나 같은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간증을 가지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중거는 죄지을 때마다 괴로운 것입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9절 ...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열쇠는 ‘하나님의 씨’가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계속 마음이 무너집니다. 음란, 욕심, 미움, 질투, 정욕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짓고 살 것이라는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육신이 강하지만 육신 보다 더 강한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엄청난 사실에 눈이 뜨여야 합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지만 내일부터 한 주간 세상에 푹 빠져 상상할 수도 없는 죄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육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놀라 자빠질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지만 오늘 이렇게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왠 까닭입니까? 하나님의 씨가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씨를 주목해야 합니다.‘하나님의 씨’라는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맺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포도 씨를 나누어 드렸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씨를 유리병에 넣어 찬장에 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씨를 땅에 심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씨를 심어 싹이 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 포도 나무가 되어 자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제 첫 열매를 맺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포도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같은 예수님을 믿는데 삶이 다른지,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씨는 받았는데, 그 씨를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순종으로 성령님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내겐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 있구나!”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 나의 왕십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용서받은 축복도 귀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님 앞에 설 때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2절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참 마음 아픈 사연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 사연이 기가막힙니다. 그 아버지가 '성범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40대 중반인 그의 아버지는 지방의 한 철도역에서 일하던 분인데, 봉사활동을 하러 온 여중생을 추행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학급에서 반장을 할 만큼 모범적이었던 중학교 2학년이었던 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성범죄자'라는 낙인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박군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무죄라고 하는 말을 믿고 아버지 재판을 위하여 변론자료 준비를 도우다가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이 나자 박군은 절망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철도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습니다. 초등학생인 셋째 아들은 "나는 불행하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박씨의 이웃들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매년 박씨의 신상과 사진 등의 정보가 담긴 우편물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박씨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했지만 건물 주인이 "우리 건물이 성범죄자가 사는 곳으로 등록됐더라. 나가라."고 요구해 다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박군은 마지막으로 쓴 일기장에 "눈만 뜨면 우울해지고 짜증난다. 나도 모르게 허튼 생각 하게 되고 약이 생각나지만 선뜻 행하지는 못하겠어서 그냥 잠들고 만다. 어젠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었던 것 같다. 너무 괴롭다."고 썼습니다. 박군은 잠시 마음을 잡고 의사가 돼 가족을 호강시키겠다며 공부에 매진했고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만큼 학교생활도 열심히 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가슴 속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박군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붙잡고 "엄마도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너희들 때문에 꾹 참고 살았는데.“ 하며 울먹였습니다. 죄는 무섭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자신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는 그대로 주님 앞에 설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변화되겠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앞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 믿어도 소용없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안 믿는 사람이나 같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더 하답니다.” 말도 안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결단합시다. “주여, 저를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은 죄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증인으로 삼으소서!” “저를 드립니다. 저를 사용하소서!”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 /요일3:10-16/ 유기성 목사
2016-08-24 11:06:30
오늘 설교 제목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 는 너무 거칠어 보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증거하지 않는다면 이런 표현은 너무 극단적이라는 비난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진실을 직시해야 할 때입니다.
10절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로 확연히 갈라진답니다. “환히 드러납니다.” 중간은 없다, 애매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뒤섞여서 누가 누군지 애매한 것 같은데, 아니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심각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구분이 됩니까? 무엇 보다,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악마의 자녀입니까?
어떻게 구분하지요? 무엇을 보고 그렇게 확연히 구분이 된다는 것입니까? 요한 사도는 그 기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악마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이 성경이 아니라면 우리는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절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악마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것을 가인의 예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12절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
가인은 동생을 죽였는데, 왜 동생을 죽인 것입니까?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이유는 한 가지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죽였다는 것입니다.
12절 ...무엇 때문에 그는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상달되지 않았고,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동생이 무엇을 잘못한 일이 있어서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올바로 살고 하나님을 잘 믿는 동생 아벨에게 질투심을 느꼈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죄가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이렇게 무서운 죄입니다. 상대방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잘 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그리고 별로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시기 질투, 악마적인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설교 열등감이 심하여 설교 잘하는 목사님을 보면 질투심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집회 때는 다른 목사님들 설교가 죽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이 너무 무서워 금식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큰 죄, 작은 죄를 구분하지만 죄에는 작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보면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것이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산 것이 큰 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은 죄를 더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기독교인에게 사랑이 빠진다면 기독교는 이슬람교보다 더 무서운 종교 율법적인 종교가 될 것입니다.”“사랑없는 기독교가 가장 큰 이단이라.”
죄,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넘기면 안됩니다. 악마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도들이 이유없이 미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그러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 자체가 미울 수 있습니다.
13절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다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의인을 이유없이 미워하지만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14절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두지만 시기 질투, 미움 정도는 죄로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재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15절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여러분 이제 미워하는 사람 없어지셨죠?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천국에 가야하니까 사랑해야 하겠구나.’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형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가고 영생을 얻는 조건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은밀히 죄를 짓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가 아직 예수님을 바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전도받아야 하겠구나!”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어지간하면 말씀만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잘 못알아 들으면 하늘에 큰 글씨로 몇 달 동안 써 놓으면 누구나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죄지은 사람들 벌 세우면 되지 않습니까? 꼭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악마가 역사하고 있고 죄지은 자는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정말 지옥에 갈 죄인이었음을 깨달았습니까?
한번은 폴 워셔가 오하이오에서 설교를 막 끝냈을 때 아홉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일어서더니 울면서 온 몸을 떨면서 걸어 나오더랍니다. 폴 워셔가 강단에서 내려와 아이를 붙잡고 "아이야, 무슨 일이니?“라고 물었더니, 그 아이는 "저처럼 사악한 죄인도 구원하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더니‘엄마 말 안들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웃을 일입니다. 그것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 울고 떨면서 나와 고백할 일입니까? 그러나 폴 워셔는 성령님께서 그 아이에게 일하고 계심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부흥의 시대에 흔히 일어났던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죄에 대한 심각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른들 모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아홉 살 난 아이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통해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어린아이가 엄마 말에 불순종하는 그 작아보이는 죄라도 심판을 받을 죄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채 지옥에 가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기 위하여 죄를 많이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가지 죄만 있어도 지옥에 갑니다.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 앞에서 몇 번이나 죄를 지었던 것 같습니까? 단 한 번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러분이 지은 죄 보다 엄청나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습니까? 그는 한번 불순종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사였습니다. 죄지을 기회가 없는 곳에서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죄책감에 떨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의 죄만 있어도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하게 그의 마음을 짓눌렀는지 그는 거의 미칠 정도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단 하나의 죄라도 있다면 그 분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자기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밥맛이 있겠습니까? 잠이 오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지옥을 알고 나면 아무리 힘들어도 차라리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낱낱이 보기 시작했고 마음에서는 계속 죄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사제에게 가서 고백했습니다. 사제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루터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님, 죄를 좀 모아가지고 오든지 회개할 만큼 큰 죄를 짓고 오세요.“
그 사제는 루터가 겪고 있는 지옥이 눈 앞에 활짝 열린 것을 보는 죄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루터가 성경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루터를 위해 하신 일의 영광이 그에게 비로서 엄청난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루터는 십자가 복음과 주 예수님으로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종교개혁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以信稱義) 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변화는 없이‘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한번 점검합시다.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 흔적이 있습니까?
‘죄를 청산할 자신이 없다.’ ‘도무지 사랑이 안되는 사람이 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내일 오신다고 해도 안되겠습니까? ‘주님이 내일 오신다면 죄를 청산하지요, 사랑하지요.’ 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음에 주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청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여러분은 주님을 마음에 모셨지만, 무시하고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늦기 전에 주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 은밀한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오늘의 양식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런던 템플교회 교인이었던 에밀 메틀러씨는 식당을 경영하였는데 마음이 넉넉하여 돈을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어 주는 일이 많았고, 기독교 단체에서 사람이 나와 도와달라고 하면 현금 서랍을 열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한 선교단체에 돈을 기부하려고 현금 서랍을 열었는데 그 안에 지폐와 동전들 사이에 못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 단체에서 나온 사람이 물었습니다. '못이 왜 그 안에 있나요' 에밀은 15cm 정도 되는 큰 못을 집어들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값과 그 때문에 내가 진 빚을 잊지 않으려고 이것을 나의 돈과 함께 넣어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정말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사랑하고 베풀며 살 것입니다.
이태리 한제훈목사님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은 커녕 실망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인지 충격을 받았답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성장해야 다른 사람에게 실망조차도 안하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다음 고백이었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 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여러분, 의로은 삶과 사랑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갈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죄의 유혹 보다 심각한 지옥의 실상을 압니다. 어떤 미움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삽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죄를 청산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기 전에 가족들, 교우들, 이웃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지난 주,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쌍둥이를 낳아 기르시면서 힘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학교 선배이신 분이 전화를 하셨답니다.
그 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셋째 아이 이야기를 하시더랍니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너무나 짜증이 났었답니다. 원치 않은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두 아이를 길러보았기에 예상했던 대로 그 아이로 인하여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얼마나 시간을 빼앗기는지, 집에만 들어오면 불평 불만이었답니다.
그런 어느 날 이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데 아무리 해도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울어도 너무 심하게 운다고 생각하다가 순간 섬뜻한 느낌이 들어 아이를 안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는데, 가는 중에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품에서 죽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로서 따뜻한 사랑 한번 주지 못했구나, 계속 눈물이 나더랍니다. 그러면서 후회하지 않도록 힘들다 불평말고 아이들을 사랑해 주라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회개합시다.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사랑만 하며 삽시다 /요일3:17-24/ 유기성 목사
2016-08-24 11:22:35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훈련을 하는데, 도무지 전도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더랍니다. 그들을 어떻게 전도하게 할까, 생각하다가 상가로 데려가 가게마다 찾아가서 단순히 말 한마디만 하게 하였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 나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전도 못하겠다던 교인들이 전도의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간증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에 신선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만 분명히 해도 전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고백도 못하고 삽니다. 간단할 것 같은 이 고백이 쉽지 않습니다. 이 고백을 떳떳하게 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받았다면, 교인으로 등록되었다면, 집사라면?’
오래 전 옷 로비 사건이 있어서 몇몇 고위층 사람의 부인들까지 국회청문회 자리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주일에 누구라고 하면 다 아실 목사님 한 분이 주일 설교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선교사님 한 분께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도무지 주일 설교를 하지 못하겠더라는 것입니다. 청문회 자리에 선 부인들, 평소에 잘 알던 사람들이었고 믿음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이 고백을 떳떳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기준을 주셨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실제로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부부싸움 하고 나면 큐티하기도 쑥스럽고 새벽기도회 나오기도 쑥스럽습니다.
“위선자, 그러고도 큐티할 수 있어, 기도만 하면 다야.” 운전하다 다투고 난 뒤 교회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참 쑥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느낍니다.
요일 3: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그리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축복입니다.
올해 교회에 변화가 하나 있다면 금요성령집회 때 전체 헌금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구제헌금입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든지 어려운 이웃, 어려운 교회, 선교단체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헌금 시간 마다 그렇게 감사한 것입니다.“복이다! 이건 정말 우리가 받은 복이다.”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자면 기쁘십니까?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궁핍한 사람은 이것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 번 어려운 이들을 도와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기쁘냐는 것입니다.
18절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는 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은 나에 복을 주셔.’ 확신이 생기면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확신있는 삶을 사는 열쇠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말씀만 나오면 언제나 자신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항상 마음에 찔리는 문제입니다. 이기적이었고 인색했고 용서하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햇습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마음의 가책이 있다면 아직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씨, 사랑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20절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책을 받고 있는 정도이지만 반드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가책을 느끼는 것을 알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놓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리되게 하실 것입니다.
캐나다 집회 중에 어느 권사님 댁에서 묵는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 하루라도 꼭 묵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그 권사님 집에서 묵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분위기는 어두웠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 그 가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30년 전에 이민을 하여 예수를 믿었는데, 많은 은사를 체험했답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몇번 교회를 옮기다가 지금은 어느 교회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목사님, 저는 어느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에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설교 중에 물었습니다.“당신은 정말‘사랑이 제일이지’하고 여기고 있습니까?”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괴로워하셨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간은 특히 우리 마음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가책만 느끼다 인생을 마치겠습니까?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성령충만은 믿음 충만, 사랑 충만입니다. 지금은 가책을 느끼지만 반드시 “주님 저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담대히 외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2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기도를 해도 주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 믿어집니다.
22절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집사님이 미국 이민을 갔는데, 사기를 당하여 돈을 다 잃어 버리고 심지어 폭행도 당하며 마음에 분노와 미움, 좌절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공부 잘하던 두 아들 마저 방황하며 제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움의 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위기감에 집사님 내외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며 열심히 기도했는데, 자꾸 마음에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가족들 사이에서 회개와 용서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손해를 끼치고 말과 행동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아들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형제 둘 다 함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그 집사님이 울면서 고백했습니다.“진작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다면 돈은 잃어 버렸을지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까지 이런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라” 결코 무거운 계명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고 가족을 살리는 길이고 교회도 사회도 살리는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간단하고 뜻은 선명합니다. 더 이상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토록 과격하고 흥분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사랑이 회복되지 않으면 사회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찾는 것이 왜 이리 힘들어야 합니까?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의논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는 미움의 영입니다. 잘해보자, 바로 해보자는 것과 미움은 전혀 다른 영입니다. 속으면 안됩니다.
미워하고 싸우면 다 망한다고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어른들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영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만약 파업 현장에 나가서, 청와대에 가서 “우리 사랑합시다!” 하면 양쪽에서 돌을 맞을 것입니다. 하품하고 조롱하고 무시할 것입니다. 영 분별이 안되니 미워하고 싸우면서 다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도산 안 창호 선생은 '우리 2천만이 다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2천만 한 민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고 외쳤습니다. 그가 민족을 위하여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 사랑의 힘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라” 우리 힘으로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24절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
사랑해야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되면 누구나 믿음으로 사랑으로 살게 됩니다.
크리스티 김 선교사님이 청년 때, 어느 날 룸메이트가 많은 형제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는데, 자기에게 꽃다발을 가져다 주는 형제는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자기 혼자 방에서 울었답니다.“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창 밖을 보라!’‘무엇이 보이느냐?“가로수가 보입니다.”’이것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황홀하더랍니다.“이 세상에 가로수를 선물로 받은 사람 있더냐?”
그 때부터 김선교사님은 봄 가을로 황홀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그 분이 그렇게 놀랍게 사역하시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거야!”
그러나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기다려야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컴패션의 서정인목사님의 책 [고맙다]가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를 부탁하셔서 읽다가 몇 번이고 울컥하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한 여자아이를 위하여 골수이식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골수이식을 해주려면 1주일 동안 입원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골반에 구멍을 내서 주사기로 골수를 채취해야 했는데, 그만 의료 사고가 일어나 큰 일 날뻔 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골수를 받은 아이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렇지만 5개월쯤 지나 아이의 병이 재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는 골수 기증을 다시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제 다른 사람의 골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식을 해도 아이가 살 확률이 1% 정도였고 지난 번 사고도 있어 아내도 전문의인 매제도 주변 사람들 마다 다 말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이번에는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있는 부담감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 마다 유도 질문을 해서 이번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럼요, 어떻게 두 번이나 하겠어요.” “목사님, 잘하셨어요. 몸도 약하시고 할 일도 많으신데요.”
그런 중에 에콰도르에 비젼트립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장로님께 또 그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고 싶었었는데, 의외로 그 장로님은 “목사님… 하시지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제 큰 아이가 백혈병으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 심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 것입니다. 그 아이가 살고 죽고를 떠나 그 아이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날 호텔로 돌아와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만약 그 여자아이가 네 친딸이었다면 너는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겠니? 설사 1퍼센트의 가능성 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야.’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을 박듯 제게 다시 한 번 마음을 울리셨습니다.‘그 아이는 내 것이라.’
이제와서 병원과 아이의 부모에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전하기가 민망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자원하는 마음도 아니었고 숭고한 동기도 없었다는 것을 꼭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딸 아이의 생명을 놓고 그 부모가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을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부끄러운 목사’라고 편지 제목을 쓰고 그 간의 제 마음과 상황을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항복했기에 골수이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우리 예수님께 매달립시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붙잡읍시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이식 준비를 하는데,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다섯 장의 긴 편지였는데 장마다 눈물이 떨어진 흔적이 보였습니다.“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골수이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애가 무균실에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감사의 편지를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얘기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매달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매달림과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딸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도 다른 아이한테 골수이식을 해줬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주님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기적을 이루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담대히 “나는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서 강과 같이 흘러나가게 되어, 우리 자신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민족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안됩니다.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이번 주간 오직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요일3:9/ J. C. 라일
2015-06-23 15:13:29
‘거듭남’은 인간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전 교회 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거듭났을 거예요."
하는 정도의 대답으론 충분치 못합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성경이 제시한 거듭남의 증거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표적이나 증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요한일서에서 그것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3:9).
거듭난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죄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온 의지를 다 쏟아 부어 거기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도 한때는, 자신의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 따져본다거나,
악한 일에 탄식하는 법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와 죄 사이에는 다툼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둘은 사이좋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는 죄를 미워하고,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며,
대항해 싸우기도 하고, 죄가 불러올 재앙을 숙고해 보고,
자기와 관련해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한 중압감을 느끼며,
죄로 말미암아 실족할 때면 스스로에게 탄식을 하고,
모든 죄악들로부터 구출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는 그에게 더 이상 기쁨이 아니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거룩하신 주님과 멀어지기 때문에,
그는 죄를 기피합니다.
오히려 죄는 그에게 지긋지긋한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죄가 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가 그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요일1:8).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죄를 싫어하며,
자신의 혼이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는 것을 큰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로 나쁜 생각이 일어나고, 많은 결점들이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때때로 말이나 행동 속에 연약하고 미흡한 면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가 많으니(약 3:2)라고 한 것처럼, 여러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점 거짓 없이 고백합니다.
자신의 추악한 부분이 매일 자신에게 슬픔과 탄식이 되며,
온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혐오하고 있다고.
거듭남의 첫째 증거는,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며, 은근히 즐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요일 5:1) *하나님께로 태어났으며=거듭 났으며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시며,
그분만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그분 외에는 구주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의심과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때때로 "나에겐 믿음이 전혀 없는 거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함과, 나아지려는 노력들, 심지어는 자기 기도와 봉사의 사역들,
이런 것들로 구원의 안정감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만 구원의 안정감을 찾습니다.
"제 자신이 연약하고 악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저의 신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징표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3. <의를 행하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서 난 것을’ 아느니라. (요일2:29).
혹자가 거듭났다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분투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피해 가려고 애씁니다.
그는 자신 속에 내제하는 사악함이 자신을 붙들고 늘어질 때마다
몹시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는 자신 속에 죄의 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여,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 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 법의 존재를 없애지는 못할 지라도 말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의 ‘경향’ 전체를 따져 보고 평가 한다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의 행동은 거룩하고, 마음의 성향 또한 거룩하며, 습관들 역시 거룩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꾸만 삐끗하고, 가끔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는 배처럼, 그의 삶이 향하여 나아가는 큰 푯대는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실족하기도 하고,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존 뉴턴이 했던 고백을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되고자 소망하는 그 사람이 아니며,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4.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요일3:14).
거듭난 사람은 형제 크리스천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편안한 느낌을 느낍니다.
또한 그는, 성도들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
더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은 학식이나 지식, 혹은 부의 축적 정도나 사회적 지위로
친구를 고를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은혜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런 이들을 한 가족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동일한 적을 대항해 싸우는 동료 군사로 생각하고 전우애를 느낍니다.
또한 그들을 같은 길을 걸어가는 길벗으로 생각하고 동료애를 느낍니다.
그들 사이에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 혹은 부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거듭난 자의 징표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5.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요일5:4)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의견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길과 생각들, 그리고 풍조들을 거스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하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사고나 행동을 전환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사랑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의 즐거움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를 피곤하게 할뿐입니다.
그의 눈에는 그저 헛되고, 무익하며, 하찮기 짝이 없는 것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영원한 것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그는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하며 오히려 만족을 느낍니다.
세상은 그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비난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를 비웃지만, 그는 가던 길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사모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혐오 거리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자신을 지키나니>... (요일5:18).
*5:18절은 개역성경과 KJV, NIV, 공동번역이 약간 다릅니다.
이 설교문은 KJV, NIV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자기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지키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죄로 이끌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는 아무 장소에나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시답잖은 대화들은 마음을 타락시키고,
악은 항상 선보다 훨씬 더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데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에게는 친절하다거나, 붙임성이 있다거나, 심성이 착하다는 것 등이
친구를 선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매일의 습관이나 행동들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속기 쉬우며,
마귀는 자신을 해할 기회를 잡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그는 늘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적국 한 가운데 거주하는 군인처럼 살아갑니다.
항상 완전 군장을 하고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유혹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겸손한 자세와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마치는 말 : 위 6가지 기준으로는,
여전히 신자의 거듭난 여부를 확실히 구분 짓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구분입니다.
저는 사람에 따라서 이 징표들의 깊이나, 드러나는 정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희미하고 어렴풋하고, 매우 미약하게 드러나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세차고 뚜렷하며 명백하고 분명해서
눈을 감고 봐도 명확히 보입니다.
또 위 6가지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 사람에게 좀 더 명확히 보이고,
또 어떤 것들은 저 사람에게 좀 더 명확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징표들이 한 사람에게 하나같이 균등하게 드러나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거듭남의 증거들을 아주 명확하게 찾아보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제 여기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결론은, 거듭난 사람만이 저 여섯 가지 증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증표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결론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의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징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주를 향해 소망을 가진 자 /요일3:3-6/ Paul Washer
2015-06-19 14:21:08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옷차림, 패션의 목적은?
만약에 지금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이
여러분의 얼굴과 몸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옷이라면,
그것은 믿음의 수준이 아주 낮은 것입니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가 옷 입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옷차림입니다.
여러분의 옷차림과, 몸가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저 형제/자매가 옷 입는 것을 보니.. 참 아름답다.
나도 저렇게 단정하게 입고, 저렇게 품위 있게 행동해야 되겠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옷차림과 행동거지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이
여러분의 몸매를 드러내서 어떤 육감적인 어필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요일3:3절을 보십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재림의 소망)을 가진 자는,
옷차림을 포함한 모든 행동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진짜 재림을 믿는 사람의 증거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꽤나 믿음이 올바른 신자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 여러분이 재림을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에 상관없이
재림은 일어날 것이고,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교리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믿는 것..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든지/안 믿든지.. 재림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재림을 믿는 성도는, 요일3: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전후 문맥상 재림의)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자기 행동거지와 의복을 단정히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주님의 재림을 믿는 성도’이지,
그냥 교리적으로.. 여러분이 안 믿어도, 그것에 상관없이 재림은 있을 것입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서, 자기 행동거지와 자기 옷차림 등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요일3:3절에 의거해서 말씀드리면,
주님의 재림을 자기가 믿었다 하더라도, 그는 땅에 남겨질 것입니다.’ 재림 때 휴거하지 못합니다.
재림을 생각으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재림을 대비한 삶을 사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 무슨 뜻입니까? 요일3:3
성경에는 ‘거룩과 성화’에 관한 두 측면이 나옵니다.
1측면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보시고, 거룩과 성화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1:30
2측면은.. 그래서 우리가 거룩과 성화로 몸부림치고, 애쓰는 것입니다.
요일3:3절의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말씀은
2측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제 곁에 오셔서, 개인적으로 귓속말로, 여러분의 몸부림을 생생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그런데 대부분은..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부림에 대해서.. 간증할 얘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완전히 성화되어서, 몸부림 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과 믿음이 병들어서.. 몸부림 칠 힘조차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일례로,
깨끗한 흰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 흙바닥에 앉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흙바닥에도 거리낌 없이 앉습니다.
자기 옷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이 예는, 믿음으로 깨끗하게 거룩함을 입은 성도는, 고전1:30
이제 자기를 더욱 깨끗하게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일3:3
▲여러분, 성경을 마치 시나 산문처럼 읽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무슨 고상한 문학책처럼 읽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삶>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소망>을 갖고 사십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그리스도와 연합에 관한 소망,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증거는,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삶이, 분투, 몸부림이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이요,
-그의 믿음은 ‘관념적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생각으로만 주님을 믿고 있고, 성경은 그저 ‘시, 산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77세 되신 제 어머니는,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저희들을 혼자서 키우셔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셨는데,
할머니 때 크로아티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가정입니다.)
저는 때때로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에,
어머니가 사시는 집 앞을 지나쳐 갑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집 처마 밑에서 성경을 읽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앙심이 없어. 내가 지금 성경을 보니까,
말을 할 때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말하라고 했는데, 벧전4:11
나는 내 여동생에게, 하나님처럼 말을 하지 못했거든..
내가 지금 빨리 여동생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해!’
저는 지금 ‘구원 받은 증거’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그냥 자포자기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그의 거룩하심과 같이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요일3:3
▲지금 여러분에게 ‘깨끗함에 대한’ 분투, 투쟁, 몸부림이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거룩한 삶’에 대한 불만족과, 갈등과, 투쟁이 있습니다.
이 분투와 투쟁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됩니다.
전에 말씀드렸는데, 성도가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화를 ‘지향’하고 ‘추구’합니다.
혹시 넘어지고 자빠지더라도, 늘 ‘지향’하고 ‘추구’하는 성도는.. 정말 거듭난 성도가 맞습니다.
죽을 때까지 ‘지향’하고 ‘추구’합니다.
‘완전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웨슬리 신학?)가 아니라, ‘지향, 추구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저 머리로만 예수를 믿을 뿐,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또는 영혼이 거듭났더라도, 지금 심하게 병든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성결에 대한 투쟁과 갈등이, 자기 삶에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 목적은,
그저 복 받아서 세상에서 주님을 이용해서 성공하고 출세하겠다는 것이지,
그것은 참된 거듭남의 증거가 아닙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3:4
위 말씀은,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말씀하고 있는 데요.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어떤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죄를 짓는 것은,
작은 시골 마을의 어느 촌장을 대항해서,
그를 거역하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죄를 짓는 것은,
왕중의 왕, 만주의 주, 영광의 하나님께 대적하며/거역하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봉건 시대 때
영주나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몇 만 배 더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를 짓고, 그 분의 명령에 대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함부로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몸을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그러고도 ‘나는 생각으로 예수를 믿기에’ 구원 받았다고 안심하고 계십니까?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3:6
‘범죄하다’는 현재형입니다. *현재 능동 직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적인 시간을 가리키고,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NIV는 ‘범죄를 계속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일3:6, 3:9, 5:18을 보십시오. 훌륭한 번역입니다. '지속적인 행동'으로 번역했습니다.
범죄를 계속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속에 분투의 노력, 몸부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에 대한 소망을 진짜로 가진 성도입니다.
그냥 재림이 있을 것을,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 성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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