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자손
- 김윤희
일제 시대에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미미한 것에 대해 아직도 비판의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6.25 때의 친공 세력이나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기회만 주어지면 그들의 과거의 행적들을 들추어내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그런 자들의 가정 속의 구성원들이다. 특히 그들의 자녀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그 자녀들도 어두운 그늘 속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그 자녀들이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관심이 없다. 성경 속에서는 그런 유사한 경우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고라라는 인물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의 위치와 특권을 탐하려다 심판 받은 인물의 대명사로 등장한다(민수기 16장의 사건. 고라 편 참고). 즉, 인간적인 욕망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하나님의 저지로 실패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심판의 장면은 한국적인 표현을 쓴다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도록 만든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 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민 16:30~33)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치 헤리슨 포드(harrison ford)가 등장하는 <레이더스>(raiders)라는 영화의 한 장면같이 땅이 갈라졌다가 심판 받을 사람들만 삼키고 다시 맞물려 버리는 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가차없이 형을 집행하신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역자인 고라의 무리들과 어떠한 연계성도 피하려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 민수기 27장에 등장하는 슬로브핫의 딸들(슬로브핫의 딸들 편 참고)의 말 속에서 엿볼 수 있다. “그들(슬로브핫의 딸들)이 회막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가로되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민 27:2, 3)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들의 아버지의 죽음이 고라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 받는 것이 두려워 아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당시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고라의 무리들이 일으킨 사회학적, 심리학적 영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고라와의 연결성을 기피하는 현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그러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 과연 살아남은 고라의 혈족이 있었는가 라는 의문과 함께 만약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다면, 위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자손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그러한 각도에서 말씀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고라의 자손들(민 26:9∼11, 58)
민수기 2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간의 광야생활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하여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만한 자’(민 26:2)의 숫자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계수한 것을 기록한 장인데, 특이한 것은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민 26:64, 65)는 점이다. 즉, 여기에 기록된 인구 조사 기록은 출애굽 첫 세대가 아닌 제 2세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불평과 반역과 불신으로 얼룩진 세대는 다 사라지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에 기대를 걸고 가나안 땅의 정복 준비를 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곳은 26장 9∼11절의 말씀이다: “엘리압의 아들은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라 이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러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여호와께 패역할 때에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는 구절이다.
이 말씀은 민수기 16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시 한번 요약한 것으로 새로운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의 말로를 상기시킴으로 일종의 경계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고라’라는 단어를 세 번씩 언급함으로 그가 사건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그를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은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고라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그의 자녀들에게는 형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천명하신 원리에 대한 좋은 예라 하겠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擔當)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라는 비록 자신의 죄의 대가로 심판을 받았을지언정 그의 자녀들은 당당히 레위인의 계수 속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민수기 26:58(“레위 종족들은 이러하니… 고라 가족이라….”)은 바로 그러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은 아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위 족속의 반열에 속하여 제사장을 도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의 일을 담당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2. 고라 자손들의 행적(대상 6:31∼38; 9:19; 26:1∼9; 대하 20:19∼22, 28)
역대상의 저자는 레위인들의 성전에서의 역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제사장들의 역할에 우선적인 관심을 보이지만, 또한 레위인들의 사소한 것 같지만 실제로 중요한 역할들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찬송대원의 직무라든가 성전 문지기들의 역할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역대상 6:31에 보면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니까 성가대의 기원이 다윗에게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아래의 무리’라는 것은 이 구절 다음에 33절부터 나오는 성가대원들의 명단을 일컫는다. 그 중에서도 세 명의 음악가가 구약에서 유명한 자들인데, 그들의 이름이 헤만(6:33), 아삽(6:39), 에단(6:44)이다. 그 중에서도 헤만은 중심인물로서 셋 중에서 그의 계보가 가장 길 뿐만 아니라, 아삽과 에단은 각각 헤만의 우편과 좌편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헤만이라는 자는 다름 아닌 고라의 자손으로 나와 있다(6:37). 고라의 자손 속에 훌륭한 음악가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보다는 성경의 저자는 가장 훌륭한 음악가의 한 사람의 집안을 소개하면서 가계의 수치스러운 인물일 수 있는 고라를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차피 모든 조상들의 이름이 다 기록된 것이 아닌, 선택적인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고라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그 조상 속에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의 자손들이 훌륭하고 경건하게 자라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찬양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하나님 나라의 한 면모를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편견이나 차별대우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이 모압과 암몬 자손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의로운 왕인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20:3,4).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려 주시는데, 그때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고라의 자손들이다. 말씀에 보면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19)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호사밧이 실제 전쟁에 나갈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표현으로써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20:21)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보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셨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승리 후에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무리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合奏)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20:28)고 되어 있다. 역대하 20장의 사건은 당시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데에 찬양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거기에 고라 자손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또한 역대상 9:17에 보면 레위인들 중에서도 성전 문지기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살룸이라고 불리우는 자는 문지기들 중에서도 두목(chief)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살룸이 다름 아닌 고라의 자손 중에 하나이다: “고라의 증손 에비아삽의 손자 고레의 아들 살룸과 그 종족 형제 곧 고라의 자손이 수종 드는 일을 맡아 성막 문들을 지켰으니 그 열조도 여호와의 영을 맡고 그 들어가는 곳을 지켰으며”(대상 9:19)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들은 또한 “다윗과 선견자 사무엘이 전에 세워서 이 직분을 맡긴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9:22). 대상 26:1∼9에 보면 문지기들의 명단이 또 나오는데, 그들 중에서도 ‘고라’ 족속들을 소개하고 있다. 대상 9:22∼32에서는 문지기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기록상 보면 문지기는 성전의 보물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능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에게 그 직무가 맡겨진 것을 알 수 있다. 고라 자손들이 그러한 일들을 감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라 할 수 있다.
3. 시편의 저자들
150편에 달하는 시편 중 열두 편이 놀랍게도 ‘고라’ 자손들과 연결되어 있다(시편 42∼49; 84∼85, 87∼88). 여기에서 이 시편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그들의 경건됨과 신앙심이 각각의 시편들 곳곳에 배어 있다. 특히 시편 42:1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渴急)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渴急)하나이다.”로 시작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민수기 16장에 나타난 고라 자신의 삶은 심판과 분노의 비극이었으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건하게 산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많은 영적인 공헌을 한 믿음의 자손들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를 배워야 한다. 그 중에서도 그 분의 편견 없으심과 무한하신 은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 중에 혹시 부모님들의 어두운 과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주시지는 않을까’ 혹은 ‘복을 안 주시면 어떻게 하나’ 라는 염려 속에서 지내는 자가 있다면 그러한 생각은 성경적이 아니므로 즉시 머리 속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아비의 죄악과 죄 없는 자녀의 삶을 분리하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러한 하나님께 더욱 헌신해야 한다.
출애굽기 말씀 중에 “그것들(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 6)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그 자녀들이 그 아비의 죄악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하나님께 범죄할 경우에 그들의 죄를 삼, 사대에 걸쳐서라도 계속 물으시겠다는 것이지 죄 없는 자녀들을 삼, 사대까지 무조건 벌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벌하시는 것보다는 복 주시는 데에 더 관심이 있으신 분임이 그 다음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천대까지도 그 은혜를 베푸신다는 표현으로 그 아비의 의로움으로 인하여 천대까지라도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즉, 복은 후하게 주시되 벌은 최소한 해당되는 자에게만 주시겠다는 것이다. 은혜(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함으로 그러한 뜻을 잘 표현하고 있다.
둘째, 복의 근원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첫 번째 요지의 맥락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설사 부모님들과 조상들의 행적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삶을 살았을지라도 우리 자신들의 대(代)에 와서 그 경로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나로 인해 우리의 후손들이 천대까지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삶은 과거 지향적이기보다는 현재와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나의 조상들과 나의 과거가 어떠했는가보다는 나의 현재와 미래가 어떠할 것인가가 더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믿음의 사람들이 될 때 우리의 후손들이 나를 분기점으로 하여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나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팔자 탓이 아닌 헌신이 중요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흔히 잘 쓰는 표현에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말이 있다. 젊었을 때는 그런 표현들에 대한 거부감과 이질감을 많이 느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자신도 모르게 공감을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만큼 삶의 어려운 경험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감정이입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으로 건전한 발언이 아니다. 팔자소관은 지극히 비관적이고도 수동적이요,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라의 자손들은 고라를 원망하여 ‘조상 탓’과 ‘팔자 탓’을 하며 사회에 대해 삐뚤어진 시각으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역에 대하여 헌신을 다함으로 능력 있고 신뢰있는 자들로 인정받은 것을 볼 수 있다(고라 자손들의 행적 참조). 우리 각자가 하나님 중심으로 헌신적인 삶을 살 때, 설사 인간적으로 볼 때에 ‘팔자가 세게’ 보이더라도(예: 사도 바울도 힘든 삶을 살았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것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아가자.
김윤희 박사는 미국 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명쾌한 논리와 언변으로 기독교방송(cbs)의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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