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들 /사35:1-4/ 김기석 목사
2020-06-10 10:15:1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코로나19 이후의 세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한 주간도 부활의 몸으로 사셨는지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치른 총선도 끝이 났습니다. 결과를 두고 잘 됐다고 하는 이도 있고, 걱정스럽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는 뽑힌 이들이 국민들 앞에서 한 약속을 잘 지키도록 감시하고 도와야 할 때입니다. 역사를 정의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무거운 때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하나님을 등진 백성에게 닥쳐올 재앙을 무섭게 예고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삶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고, 그들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의 언어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가차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심판은 늘 회복의 약속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통치할 이들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그들을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는 막는 곳‘,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사32:1-2). 우리가 선출한 모든 이들이 이러하기를 빕니다.
이사야는 공의로 다스릴 통치자들의 덕성을 몇 가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이 밝고, 백성의 요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은 경솔하지 않고, 사려 깊게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할 말은 분명하게 합니다(사32:3-4).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마음껏 소비와 향락을 즐기고, 하고 싶은 일을 다하며 살던 세상은 지나갔습니다. 잔치는 끝이 났습니다. 지금은 잔치 이후를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흥겨운 잔치가 끝나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집 주인은 뒷정리를 해야 합니다.
수북이 쌓인 그릇들을 말끔히 닦아 제자리에 넣고, 어지럽혀진 집을 정돈하고, 환기를 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잔치 이후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합니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는 삶, 경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의 방식으로 개종해야 할 때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이지만
이사야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무질서와 혼돈에 진노하시지만, 그래서 심판의 불을 보내시지만, 희망의 씨를 남겨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석과’란 종자가 되는 과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듬해 농사를 위해 여퉈두었던 씨앗까지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을 이어간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 또한 그러합니다. 예언자는 앞서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 속에 깃든 파멸도 보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메마른 광야에서 피어날 꽃들을 바라봅니다.
작년 4월에 미국 샌디에고에 갔을 때,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거기 목사님이 나를 데려간 곳은 시내에서 근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광야였습니다. 굳이 광야로 데려가신 까닭은 그곳에 황홀하게 피어난 꽃들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많은 꽃들이 시들어버린 때였지만, 그래도 그 척박한 광야를 가득 채웠던 꽃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연해졌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사35:1-2)
물론 이것은 메마른 땅에 피어날 자연의 기적을 노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광야와 같은 현실, 사막과 같은 현실 속에서 지속될 하나님의 은총을 이렇게 구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언자의 이런 비전은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낭만적 낙관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가지고 그런 세상을 만들라는 일종의 명령이 아닐까요? 광야에 메마른 땅에 꽃을 피워내는 삶, 그곳에 씨앗이나 묘목을 심고 물을 주어 가꾸는 끈질긴 노력 없이 이런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광야는 누구나 강인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편리와 풍요로움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광야 혹은 사막 하면 생각나는 동물이 낙타입니다. 낙타는 몇 백 킬로그램의 짐을 지고 며칠씩 물도 없는 사막을 걸어갑니다. 몽골에 갔을 때 낙타를 타 본 적이 있습니다.
낙타는 사막을 걷다가도 듬성듬성 나있는 사막 지표 식물들을 만날 때마다 멈춰 서서 그 풀을 뜯어먹곤 했습니다. 혀로 풀을 감아 뜯는 소리가 마치 낫으로 풀을 베는 것처럼 경쾌하게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낙타 등에서 내려 그 풀을 뜯어보려다가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습니다. 어찌나 뻣뻣하고 질긴지 제 힘으로 뜯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풀을 낙타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강인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별자리
황지우 시인은 <나는 너다>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 ‘503’에도 낙타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면서 시인은 낙타를 향해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지평선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바람에 떠밀려 오는 새날을 보자는 것입니다. ‘새날’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바람에 떠밀려 옵니다. 그런데 시인은 낙타에게 ‘일어나 또 가자’고 말합니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걸어갔던 자취는 이미 모래 바람이 지운 지 오래입니다. 시인은 자기 수중에는 ‘칼’도 ‘경經‘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보호할 것도 하나 없고, 길을 가르쳐주는 지침조차 없습니다. 암담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이 시에게 가장 놀라운 구절은 그 다음입니다.
“길은,/가면 뒤에 있다.” 시인은 ‘길은,’이라고 말한 후에 행을 바꾸어 ‘가면 뒤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분명한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우리가 걸은 그 자리가 길이 됩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가 어떠할지 예측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어느 하나 전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낙타 걸음으로 걸으면 됩니다. 다시 시인에 기대어 말해 봅니다.
시인은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싸움입니다. 새로운 세상과 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외로운 싸움입니다. 하지만 외롭다고 투덜거릴 것 없습니다. 넘어지거나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곁에 있는 이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시인은 낙타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니까./우리는 自己야.” 그리스도의 꿈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산고수장山高水長 도처유청산到處有靑山‘이라지 않습니까. 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게 흐릅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나 푸른 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적 과학자들이 뭐라 하건, 지혜를 자랑하는 인문학자들이 뭐라 하건, 그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땀 흘리는 ‘자기들’이 있습니다. 황지우 시인은 길을 걷다가 마침내 이런 고백에 이릅니다. ‘우리 마음의 地圖 속의 별자리가‘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지도 속의 별자리가 흐려지지는 않았는지요? 우리가 바라보는 별자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 꿈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별자리를 향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별자리를 따라 걷는 사람들을 가리켜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히13:14). 게오르그 루카치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빛나는 샛별이신(계22:16) 예수를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날다가 떨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꽃을 피우듯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를 소명의 자리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사막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영화를 봅니다. 이제 우리도 힘을 낼 때입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지금은 투덜거림을 멈추고 씨앗을 뿌릴 때입니다.
무릎을 굳세게 하여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주위 사람들에게 건네는 친절한 말 한 마디, 다정한 미소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천천히 가도 지향만 분명하면 됩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이들은 용납하고 인내하는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서로의 속도를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만 행군했습니다. 급하다 하여 서둘러도 안 됐고, 쉬고 싶다 하여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야 합니다.
힘 있는 이들은 연약한 이들의 짐을 나눠지고 걸으면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연대입니다. 더디다 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고, 빠르다 하여 으스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이야말로 새 시대에 꼭 필요한 이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이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함께 모여 손을 잡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하지만, 세상 곳곳에 흩어져 나가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습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습니다.‘ 광야에 물이 솟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는 세상, 우리가 길 없는 곳에서 함께 걸었던 자리가 누군가의 길이 되는 세상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망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일에 힘쓰시기를 빕니다. 아멘.
우리가 바라는 구원의 궁극적인 소망 /사35:1-10/ 오주철목사
2017-06-08 06:16:13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흔적이 언제나 아름다워야 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걸어가는 삶의 발자국들이 아름다운 믿음의 흔적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중단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보면 하나님과의 친교가 이루어질 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친교가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개인적인 야망을 추구할 때입니다.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친교는 멈추어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믿음의 비전은 개인적인 야망을 포기하게 합니다. 이생의 자랑을 포기하게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포기하게 합니다. 안목의 정욕도 다 포기하게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인도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친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말씀을 시작하면서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의 친교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그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그 마음에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추구하며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기 시작할 때 그의 마음은 강퍅해지기 시작합니다. 강퍅이라는 말은 떠나는 마음입니다. 부부가 다툴 때 아내가 남편에게 대단히 강퍅해집니다.
마음이 그에게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 앞에서 마음이 대단히 강퍅하다. 그러면 그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떠나는 마음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시도, 한 순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신뢰를 받았으면 모세처럼 신뢰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신뢰했으면 모세처럼 신뢰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랬던 그가 한 순간의 마음의 흐름을 감당하지 못하고 떠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구절이 많이 있지만 제일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모세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애썼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얼마나 기나긴 날을 사모했는데 …. 그런데 그 땅에 한 발자국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비스가산 정상에 올라가서 바라보다가 죽었습니다.
모세는 한 순간 마음을 떠나 교만했던 자신을 회개하면서 신명기 3장 23절 이하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시작부터 저를 참여시키셨습니다. 부디, 이 일의 마지막까지 저를 참여시켜 주셔서 제가 저 강을 건너서 요단 강 저편에 있는 좋은 땅, 초목이 무성한 언덕, 레바논의 산들을 보게 해 주십시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됐다. 더 이상 이 일로 내게 말하지 마라.”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한 순간의 마음의 떠남이, 한 순간의 교만이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교만하지 않도록 시간마다 때마다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면 교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때에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마지막 날 열방의 민족들이 보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영화로운 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가담했다가 실패했던 한 정치가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된 계기가 오히려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문학적 장르로 돌아가는 계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한때 유망했던 정치가요 작가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이 영국인은 어느 날 자기에게 밀려오는 삶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그의 나이 44살에 실명을 하는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불행 속에서도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자신을 사랑했던 아내는 잠시 그를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왔지만 세 명의 딸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48살에 재혼한 두 번째 아내도 재혼한지 1년만에 그의 곁을 떠나 영원한 나라로 갔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세속적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 그가 특별히 좋아했던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실명을 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빛이 더욱 더 소중했을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는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각오로 기도하며 자신에게 영적인 빛을 제공했던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다행스럽게 55세에 세 번째로 결혼을 했던 아내 엘리자베스는 헌신적으로 그를 돕습니다.
그는 밤이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작품 구상에 몰두하다가 아침이 밝아오면 자기를 돕는 사람들을 통해서 작품을 구술해서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가 실명한지 15년만인 그의 나이 59세에 그는 무려 10권으로 펼쳐지는 기독교문학 최대의 서사시요, 영국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인류의 불멸의 명작인 ‘실락원’을 탄생시킵니다. 이 주인공은 바로 존 밀턴이었습니다.
‘실락원’은 사탄의 유혹으로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써 가져왔던 낙원 상실에 대한 성경적 증언을 생생한 시적 표현으로 엮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밀턴은 이 작품을 끝낸 다음에 그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밀턴의 퀘이커교도 친구였던 카마스 엘루드라는 사람이 와서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은 낙원 상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낙원을 다시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이 말에 도전을 받은 그는 그때부터 다시 작품 구상에 들어갑니다. 1674년 그가 66세로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자신의 나이 62세, 그러니까 실낙원을 완성한지 3년만에 실낙원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는 ‘복락원’(Paradise Regained)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다시 찾은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제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고 마침내 인류가 상실했던 그 낙원을 다시 찾아주시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복락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낙원을 잃어버린 실락원, 그리고 낙원을 다시 찾게 되는 복락원의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낙원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타락의 징후가 농후한 이 고통과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세상은 이런 고통과 갈등을 계속하게 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메시아가 다시 오시기까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회복하게 될 구원의 궁극적인 소망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를 통한 궁극적인 소망의 약속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땅의 회복입니다.
본문의 1절과 2절에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이것은 본문 이사야 35장이 오기 전에 33장 9절에서 보여주었던 이 세상에 대한 완벽한 회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33장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이것은 타락한 땅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슬퍼하던 땅이 이제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막은 백합처럼 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메말랐던 땅이 아름다움과 영광의 땅으로 다시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약속은 35장 7절에서도 계속됩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땅들의 회복이 필요할까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는 인간의 죄와 타락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과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여기에 보면,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땅의 저주로 말미암는 피조 세계의 고통을 가장 실감 있게 증언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에 보면, 탄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자연이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자연이 겪고 있는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습니까?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입니다. 자연도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자연의 세계에도 약육강식, 질병과 전쟁, 치열한 생존경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병과 죽음이 자연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시를 경험하고, 바이러스를 경험합니다. 병해충의 피해로 말미암은 고통과 죽음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는 모습들을 식물세계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현대적인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쓰레기 공해, 공장 폐수, 전쟁의 연습, 엘리뇨 현상, 원전의 폐해로 죽어 가는 자연의 안타까운 절규의 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문제는 인류 최대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우리를 이 땅의 청지기로, 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에게도 이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을 회복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면 자연이 우리를 보호한다는 말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연보호 운동에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서구세계에서는 ‘그린 크리스천’(Green 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섬기는 이웃 사랑은 중요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 못지않게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정화하고 자연을 회복하는 자연 사랑에도 성경의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 메시아를 대망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온전한 회복을 다시 오실 그분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는 땅의 회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서 우리가 기대해야 할 궁극적인 또 하나의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둘째로, 인간됨의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의 상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지어졌을까요? 시편 8편 4절과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 5절에서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와 ‘존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영화롭고 존귀하게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영화롭고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영화롭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축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영화로운 분이십니다.”
감동이 별로 없습니까? 여기에서 ‘영화롭다’는 말은 아주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제 짝을 바꾸어서 반대편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축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존귀한 분이십니다.”
영화롭고 존귀함,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부끄럽고도 추한 인생들로 가득 차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몸도 약함과 질병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겁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재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궁극적인 소망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몸의 속량’, 몸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아직도 병듦과 고통과 같은 타락의 현상 속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신음하면서 마지막 구원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날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3절과 4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떨리는 무릎이 다시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인간됨을 온전히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강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질병은 치유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더 이상 겁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서 계속되는 이 약속의 말씀을 5절과 6절을 통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여기 자연의 회복과 함께 인간됨의 완벽한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놀라운 소망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서 거룩한 기대로 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가 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만지시고 보게 하셨습니다. 청각 장애인들의 귀를 만져 듣게 하셨습니다. 말을 못하는 언어 장애인들의 입술을 만지셔서 그들로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미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경험하는 치유는 부분적 치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우리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몸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회복되는 존재로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이 궁극적인 회복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조금 힘들어도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지금부터 강하고 담대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팔과 다리가 정상이 아니어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굳세게 하실 그분, 지금도 나를 붙들어 주시는 그분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궁극적인 구원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놀라운 구원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입니다. 팔다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1982년 12월에 호주 멜버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서 보니까 팔도 없고, 다리도 없습니다. 몸뚱이 밖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담당의사도 놀라고, 아버지 목사님도 놀랐습니다. 그 교회 모든 교인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느 날 마침내 가족 예배에서 그들은 요한복음 9장 3절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면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부모의 죄가 아니다. 조상의 죄도 아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온 가족이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팔다리는 없지만 몸의 다른 모든 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주 앞에 감사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닉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더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가 드렸던 감사는 이것입니다. 내가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지만 자신의 몸뚱이 아래쪽에 붙어 있는, 다리 쪽에 가는 곳에 붙어 있는 작은 뼈 두 개를 이용해서 자신이 기어갈 수도 있고, 굴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에게 다가왔던 놀라운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닉 부이치치는 이렇게 적용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내가 이 치킨 본을 가지고 굴러갈 수가 있다면, 움직일 수가 있다면, 내가 이것을 통해서 나는 모든 것을 통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다. 팔도 다리도 없는 그 몸이지만 닭뼈 같은 작은 두 개의 뼈, 뭉뜨러진 그 뼈들을 사용해서 드럼을 치기 시작합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합니다. 수영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을 합니다. 축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골프를 치고,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치아에다가 낚시 줄을 문 채 낚시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어깨를 들썩이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정상인처럼 자유롭게 걷고,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고, 도구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그 어느 날을 주께서 나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면서 오늘 저는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그것들로 기적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기적을 바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적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실재로 그가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되는 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저는 팔도 다리도 없지만 한계도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과 내 인생을 허그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나에게 플라잉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두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첫 번째 책의 제목이 ‘허그’입니다. 나는 어느 날 주님을 허그했다고, 그리고 내 인생을 받아들이기로 허그했다고,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허그하고 살기로 했다고. 그가 두 번째 책을 펴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나에게 플라잉의 축복을 주셨다고. 나는 내 한계를 넘어서서 그의 능력을 통해서 플라잉의 인생, 한계를 초월하는 비상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고.
사랑하는 여러분, 닉 부이치치가 바라보았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라보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닉 부이치치가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저의 주님이라면 우리도 동일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남은 내 인생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는 놀라운 삶에 한 번 도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약한 손을 펴십시오. 그리고 주의 손을 붙드십시오. 내 무릎이 아프지만 그 아픈 무릎으로 꿇어 기도의 무릎으로 삼아보십시오. 그리고 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랑하는 주님의 거룩한 능력을 힘입으십시오. 그 주님을 허그하십시오. 주님이 나에게 주신 내 환경과 인생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이 고통스러운 오늘의 삶 속에도 모든 것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믿음으로 도전하십시오.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푸실 플라잉의 인생, 한계를 초월하여 비상하는 인생이 시작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무엇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랑하는 주님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한 그의 손길 앞에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의 손을 붙드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이 나를 붙들어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 인생의 한계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마침내 내 인생 속에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 회복의 기적을 지금부터 경험하는 놀라운 삶이 여러분과 저의 인생 속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벽과 문 /사35:1-10/ 김기석목사
2015-06-29 15:36:41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서성이면서 그 집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을 열려고 무던히 애를 쓰다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벽' 앞에 서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분입니다.
절벽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밑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아찔한 현깃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없는 벽 앞에 섰을 때는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세상에는 벽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도 때로는 벽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고, 가까운 사람들이 벽으로 바뀌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열려라, 참깨" 하는 주문으로 그 벽을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벽 너머 세계
한 해를 마감해 가는 지금, 여러분은 어떤 벽 앞에 서 계십니까? 그리고 누구 앞에 벽이 되어 서있지는 않으십니까? 가난하고 외로운 하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옆방에 살고 있는 얼굴이 창백하고 아름다운 한 처녀를 짝사랑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는 그는, 성탄절이 되자 전 존재가 애정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홀로 자기 방에 있다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 이상한 신음소리…벽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배신감에 사로잡힙니다. 세상에 더할 수 없이 순결하게만 여겨졌던 처녀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옆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마침내 살 희망을 잃고 목을 매고 맙니다. 경찰이 와서 그 젊은이의 시신을 수습해가는 동안, 하숙집 아주머니는 처녀의 방을 열다가 비명을 지르고 맙니다. 처녀는 침대에 엎딘 채 죽어있었습니다. 비소중독이었습니다.
처녀의 유서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외로운 두 혼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쓸쓸해하다가 죽고 만 것입니다(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에서 [벽]). 세상은 이처럼 사랑을 갈망하는 외로운 혼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벽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에게 강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인정이 메말라 팍팍한 세상입니다. 저마다 바쁘다고 아우성이니 이웃들의 처지를 살뜰하게 보살펴주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되어 내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 인정의 꽃을 말없이 피워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1-2)
이 대목은 미래에 어떠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서술법은 항상 명령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저절로 올 테니 중뿔나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지금 결단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게 하라"(Let the wilderness and the dry-lands exult). 광야같은 세상에서 성도들은 꽃을 피워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인류는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것은 타락한 인류의 모습일 뿐입니다.
전쟁에 패한 자들이 항복할 권리마저 부정하는 미국의 오만을 보면서 우리는 가인의 후예들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렇다고 낙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투덜거리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고, 세상에 기쁨의 꽃을 피워내라고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제 아무리 척박해도 우리 속에 있는 꿈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겨울에 내리는 차가운 눈이 오히려 씨앗을 이불처럼 덮어줘서 이듬해 봄에 싹이 움트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마주치는 죄악된 현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꽃 피우는 삶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혹은 나약한 자들의 미망이 아닙니다. 세상에 꿈보다 힘이 센 것은 없습니다.
서양 속담에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수 조영남씨가 영화촬영감독인 정일성씨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정일성 감독은 한 때 직장암으로 다 죽게 되었답니다.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임권택 감독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새 영화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그 영화를 당신이 꼭 찍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구요. 정감독은 그 말 때문에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조영남씨가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이래요. "하,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치료제는 없네요!" 그래요. 희망보다 더 좋은 치료제는 없어요.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계시고, 나도 그 일에 동참하도록 요구받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함부로 낙심할 수 없어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이 분명해요. 이사야는 우리가 하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까 쉽게 이야기 하네요.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3-4)
'약한 이를 무시하고, 무릎이 후둘거려 비틀거리는 이의 딴죽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게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너희는 그래선 안된다.
오히려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부축해주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쩔쩔매고 있는 이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어라. 하나님 여호와가 다 보고 계신다는 것, 하나님이 공평하게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라.' 이럴 때 세상은 살만한 세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술에 걸려 깊은 잠에 빠져든 공주, 개구리로 변한 왕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마술이 풀리는 것은 언제지요? 왕자가 공주에게 입맞춤할 때, 공주가 흉한 개구리를 친구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때 세상은 아름다운 본디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회복된 세상의 꿈
이사야는 그런 세상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5-6)
세상은 지금 마녀의 마술에 걸린 것처럼 흉하게 변했습니다. 몸에 장애를 가진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는 너나없이 영혼의 장애를 지니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사니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때 우리는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에 대해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애완견에게 온통 정성을 기울이는 분을 만났습니다. 지나친 것 같아서 여쭈어보았어요.
"왜 강아지를 키우세요?" 그분은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더군요. "최소한 개는 주인을 배신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얼마나 쓰린 경험을 많이 하셨으면…", 하고 혀를 찼더니 웃으시데요.
그러더니 "세상을 이렇게까지 만든 게 다 사람 아닙니까?" 하면서 열을 올리셨어요. 딴은 맞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내 속에서 이상한 의혹이 떠올랐어요. '아니, 내가 지금 어떤 동물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그분은 자기도 그 경멸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주 잠깐 잊으신 것 같았어요.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사람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
너무 쉽게 사람에 대해서 절망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세상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보고 시험보라고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 걸요.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끌고 읍장 앞에 가서 소리쳤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행17:6). 영어 성경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The people who have been turning the whole world upside down have come here now." 한 마디로 세상을 전복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의 혼에 사로잡히자,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때를 만나지 못했고, 그들을 선한 길로 이끌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비노바 바베라는 분은 세상에는 문 없는 벽은 없다고 했어요. 벽처럼 마음을 굳게 닫고 사는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외면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마음을 열 문을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는 누가 와서 내 마음을 좀 열어달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내와 사랑과 존중과 이해가 아닐까요?
담을 낮추라
한꺼번에 우리가 답답한 세상의 문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제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담의 높이를 낮출 수는 있겠지요. 한 칸 두 칸, 우리 사이에 쌓아올린 분리의 벽돌을 덜어낼 때 우리는 이웃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말을 건넬 수도 있을 겁니다.
먼저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눈길이 생기고, 말을 주고 받으며 말길이 열리고, 마음을 통해 마음 길이 생기고, 내왕하면서 상호소통의 길이 열리면, 그 길은 '거룩한 길'이 됩니다. 사랑과 이해로 만든 그 길은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걷는 길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은모래를 깔아 귀한 손님을 맞이했던 옛사람들처럼 오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깔아야 할 은모래는 마음의 벽들을 낮추고, 벽 속에서 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겨울에 여러분이 머무는 곳마다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동행 그리고 기적 /막2:1-5/사35:5-6/ 이정익목사
2015-05-16 00:32:54
하나님은 조화와 협동과 협력과 함께 하는 삶을 좋아하십니다. 혼자 사는 삶, 독불장군, 이기적인 삶의 형태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지으실 때 사회성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어려서는 부모와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고 성장한 후에는 부부가 되어 가족을 이끌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인생은 동행하는 삶입니다. 혼자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에도, 식물의 세계에도, 철새들의 세계에도, 물고기의 세계에도 다 동일합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혼자일 때 보다 둘이 있으면 더 강해집니다. 셋이 있으면 더 강해집니다. 그것이 더불어 하여야 할 이유입니다. 특히 인생은 좋은 동행자를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내 인생에 그런 좋은 동행자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문은 그런 협동의 삶과 동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버나움 사역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고 가난한 지역을 사역지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곳에 각종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계신 가버나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왔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기다렸는가 하면 예수님이 여기에 오시기 전에 많은 기적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1장21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십니다.
30절을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고 34절에서 귀신들린 자를 또 고치시고 40절에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병자들이 고침 받는 기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도 무슨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모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시대에 그리고 가난한 동네에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이 많습니다. 무당과 점쟁이들도 그런 곳에 모여듭니다. 부자 동네는 병자들도 적습니다. 부자들이 더 장수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강남 사람들이 강북 사람들 보다 더 장수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4-7년 더 산다고 합니다. 북한 사람들 보다 남한 사람들이 평균 10년 더 장수한다고 합니다. 부자 중에서도 선한 일을 많이 하는 부자들은 그중에서도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부자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천적 장수설입니다. 부잣집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게 태어나니까 장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부지원설도 있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좋은 것만 먹어서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죽음 항거설입니다.
부자는 돈이 많으니까 그 많은 재산을 두고 죽기가 억울해서 죽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티다 보니까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버티면 좀 오래 갈 수는 있습니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외국에 사는 아들이 올 때까지 죽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는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나누다 보니까 더 장수한다는 이론입니다.
미국에서 암에 걸려 치료중인 어느 부자에게 목사님이 죽기 전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서 진심으로 나누고 봉사해 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암 환자가 열심히 나누고 권면하고 봉사하는 중에 마침내 암 병이 치유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부자 병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그대로 따라서 시행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앓던 암 환자들이 고침 받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원리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원리를 시행하였더니 그 삶에서 기적일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면 가난한 동네에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과 무당들이 많이 몰려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지역을 택하여 전도사역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오시기 전에 여러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소식이 퍼져 오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 계신 곳에 사람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중풍병자 옴
그때 한 중풍병자가 왔습니다.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모습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중풍병자가 동네 사람들에 의해서 들것에 실려서 왔습니다.
그들이 친구들인지 가족들인지 이웃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하여간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고치려고 네 사람이 동원되었습니다. 참 아름답고 흐뭇한 장면입니다. 한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고 함께하고 동행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통해서 하나로 한마음으로 협동으로 뜻이 모아진 것입니다. 어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면 내가 듣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동행자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주저하지 않고 함께 동행하여줄 이웃이 있습니까. 있다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님에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름 받고 보니 두렵고 떨려 어쩔 줄 몰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동행을 요청하였더니 거절하였습니다. 그 다음 친한 친구에게 동행을 요구하였더니 그도 거절하였습니다.
평소 그리 친하지 않던 친구에게 혹시 동행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기꺼이 동행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함께 해 주는 사람이 동행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동행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동행자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건강한 삶의 모습이고 건강한 이웃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동행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가 한 사람을 구원하는데 이렇게 온 교우가 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을 치유하는데 모든 교우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되고 기적이 일어나게 되고 치유가 나타나고 회복이 나타나고 감동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께 가기만 하면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곧 바로 안타까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2절을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 접근이 불가능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표현은 없으나 중풍병자 보다 더한 병자들도 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녹녹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좋게 보이거나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은 다 언제나 실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한결같이 형편이나 사정이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전혀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고 반석위에서 물이 나왔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는데 이것은 모두가 불가능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소망스럽고 환희적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에게 환희가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처한 현실 때문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처한 현실은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꾸만 숨으려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의 환희보다 오늘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놔두었던 그물을 손질하여 바다로 나아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는데 제자들은 부활보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중풍병자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예수께 가기만 하면 고칠 줄로 믿었습니다. 뜻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현실은 녹녹치 않았습니다. 벽이 너무 두껍고 컸습니다.
길을 찾으라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이 사람들이 그냥 돌아갔습니까. 포기했습니까. 그들이 그냥 돌아갔더라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기분 나쁘다고 그냥 돌아갔더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할 수 없지 하고 그냥 있었더라면 그런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사람이 많다고 그냥 돌아갔더라면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여기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한결같이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4절을 보면 “사람들이 지붕을 뚫었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요. 우리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들어본 이야기라서 그렇지 이 생각은 참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이들은 예수께 가기만 하면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지붕을 뚫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기적은 협동이 이루어지는 곳에 나타납니다. 네 사람 중 한사람이라도 자꾸만 그냥 돌아가자 헛수고다 그랬으면 그날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협동하여 예수께 가기 위하여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말이 많은 곳입니다. 이론도 많은 곳입니다. 이론이 많다 보니까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일도 발생하게 됩니다. 싸우는 것을 보면 교회들이 본질을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일 때문에 싸웁니다. 이를테면 절차나 형식 때문에 갈등합니다.
오늘 교회들이나 가정들 그리고 나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네 사람이 지붕을 뚫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시 지붕은 우리나라 같이 콘크리트 치고 슬래브 치는 그런 지붕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오지 않는 곳이니까 허름합니다. 어떤 주석자는 이 집이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이고 그 옆에 처가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장모의 열병도 고쳤습니다.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을 때 순간 예수님이 보시고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네 집으로 가라(5)”
하시니 그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2)고 하였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오늘 이런 이웃이 없습니다. 오늘은 장애인 시설이 동네에 들어온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반대합니다. 아주 인심이 고약한 시대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병을 앓고 있었지만 인심을 잃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누워 있으면서도 선을 베푼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사시 이런 협력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이 중풍병자는 방향을 잘 잡았습니다. 본문의 키는 3절 “예수께로 올새”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네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예수께 주저 없이 왔습니다. 아무리 협력한다 해도 길을 잘못 잡으면 헛수고입니다. 이미 이사야서 35장에서 이런 사실을 예언하였습니다. 5절을 보면 “그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메시야가 오시고 도래하고 임하실 때입니다.
메시아 즉 예수께서 임하시면, 그리고 예수께 가면 이런 일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여기서 3가지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귀한 것일수록 그 과정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금은 캐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금입니다. 오늘은 너무 쉽게 간단하게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편법이나 지름길 그리고 속성과까지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그날 이주 쉽게 병을 고쳤다면 그것은 기적도 아닙니다. 불치병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일이 이루려면 그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일에는 시험이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호사다마라고 했습니다. 여기 중풍병자가 고침 받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축하하고 박수치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중 서기관들 그들은 그 시대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고침 받은 중풍병자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향하여 “저가 어찌 죄를 사할 수 있느냐,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하시는 것 아니냐, 이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냐” 하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여기 중풍병자가 오랜 만에 고침 받고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데 이 서기관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수도 축하도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천사가 아닙니다. 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공동체를 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유지되어 가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협동과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오늘의 기적의 원인은 협동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날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병자를 들 것에 들고 온 네 사람의 동행 모습에서 예수님은 감동하신 것입니다. 미국 에모리 대학 정신의학 행동과학 연구팀이 사람의 행동 중 협력과 배신 중 어느 쪽이 유익한가를 연구하였습니다.
20세에서 60세까지 여성 26명을 대상으로 협력과 배신할 때 뇌의 움직임을 MRI로 촬영하였습니다. 결과 협동 시 뇌에서 즐거움을 유발하는 신경조직이 최고로 움직이고 배반 시에는 움직임이 극도로 저하되더라는 것입니다.
미국 워싱턴은 1993년도에 한 해 동안 454명이 살해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워싱턴을 미국에서 살인 도시라고 부릅니다. 그때 뜻있는 신앙인들 6천명이 그 도시를 위해서 감찰필요인물들 명단을 입수하여 놓고 매주 같은 시간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6년 후 범죄율 폭력율이 60%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강도가 70%, 강간이 40% 로 줄어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나아가 전도하다가 순교하고 피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화합과 중보와 협력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요소입니다. 여기 중풍병자가 치유 받았습니다. 그 원인은 그에게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인 마음가짐도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동네 사람들의 협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그 모습에 예수님이 감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병자가 걸어가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아름다운 동행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이 기적이 여러분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여러분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감동받으시는 일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이런 기적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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