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사5:1-7/ 김기석목사
2016-06-04 14:50:48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 관계의 시작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완연한 봄 기운이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새싹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매우 큽니다. 매화나무에 피어난 흰 꽃이 등잔처럼 환하고, 산수유나무 노란꽃망울이 해를 머금은 것 같습니다.
효창공원에는 벌써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더군요. 어제가 절기상으로 경칩이었으니 그럴 때도 되었습니다. 한가롭게 웬 계절 이야기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계절의 변화야말로 변함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다양한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닐까요?
이제 농부들이 바쁜 때가 되었습니다. 잘 아는 농부 목사님에게 이제 농번기가 되어 분주하겠다고 묻자 설레는 눈빛으로 이미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지인들의 작은 텃밭이나 터앝을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땅에 씨를 심고 그것이 새싹으로 돋아나 하루가 다르게 생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자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설명하면서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고전15:36-37, 42)
라고 말했던 바울 사도도 대단한 관찰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이런 언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포도밭에 빗대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뽑아 오셔서, 뭇 나라를 몰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땅을 가꾸시고 그 나무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더니, 그 나무가 온 땅을 채웠습니다"라고(시80:8-9) 노래합니다.
그 나무가 그렇게 무성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심고 가꾸신 분 덕분입니다. 포도밭은 또한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랑하는 그이는 나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 꽃송이"(아1:14)라고 노래합니다.
지중해성 기후 아래에서 잘 자라는 포도는 옛날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식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사야는 아주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기름진 언덕에 있는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낸 후 그곳에 심으신 아주 좋은 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그 포도원을 얼마나 아끼셨던지 그곳에 초막이 아니라 굳건한 망대를 세우고, 수확철을 내다보며 포도주 짜는 곳도 이미 만들어 두셨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금방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지만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습니다. 이사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누구나 출애굽 사건을 떠올렸을 겁니다.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고,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천대받던 이들을 자유의 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말입니다.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몫의 삶을 한껏 누리며 사는 세상, 억압과 착취와 경쟁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협동이 삶의 원리가 되는 세상의 꿈이 바로 포도원 이야기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 현실의 어둠
호세아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라가 강대해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호10:1).
제단과 돌기둥은 모두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풍요로워지자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 앞에 엎드리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버릇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바짝 엎드리지만 위기가 지나가고 나름대로 살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타락이 시작됩니다. 풍요로움이라는 것이 어쩌면 영혼의 가장 큰 유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5:4b)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마음이 좀 울컥해졌습니다. 지금 개신교의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한국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선한 뜻을 품고 애쓰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국을 대표한다는 목회자들이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성장주의야말로 한국교회에게는 독이 든 성배라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성장을 목표로 삼는 순간 복음의 본질은 왜곡되거나 숨겨지게 마련입니다. 성장이 결과일 수는 있지만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배우느라 많은 목회자들이 분주합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듯이 교회가 커지면 좋은 목사 대접 받습니다. 교인수와 예산액의 증가가 한 목회자의 목회 성공을 가늠하는 요소가 된 순간 교회는 확고하게 본질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개신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힘있는 이들 편에 서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약자들의 편에 서거나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자고 말하는 순간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거나 내쫓기기도 합니다.
저는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을 자처하시던 분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실종된 것입니까?
서럽고 원통합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이 가속화된 것은 1980년 신 군부가 들어섰을 때 그들을 하나님이 내신 종이라며 추켜세웠던 조찬기도회 멤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국 개신교회의 흑역사입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힘있는 이들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이들이 그들에게 빌붙어 권력의 단맛을 나누려 합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던 이들은 늘 박해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현실을 통탄하셨습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연 하는 이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마23:29-30)
지금 그들 곁에 있는 예언자들은 죽이거나 몰아내면서 지나간 세대의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꾸지람이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출판사의 편집인이 제게 책 몇 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담장을 넘는 크리스천>이었는데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 책의 원제는 흥미로웠습니다.
그 본래의 제목은 'Gaining by Losing', 즉 '잃어버림으로 얻는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 뜻을 포기한 이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바친 이에게 주어진 대가입니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는 순간 십자가를 지는 일은 사라집니다. 십자가를 그저 찬미하거나 싸구려로 판매할 따름입니다. 다 나가서 고난을 받거나 죽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향만큼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장을 넘는(도종환의 '담쟁이') 담쟁이처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 피흘림과 울부짖음이 넘치는 세상
포도원 주인은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사람들을 불러 따져 묻습니다.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이런 질문 앞에서 그들은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마침내 주인의 엄중한 선고가 내려집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5:5-6)
택함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무참하게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를 철회하시는 순간 포도밭은 결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나 들어가 그 밭을 짓밟을 것이고, 그러면 그 아름답던 포도원은 금세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묵정밭으로 변한 그 땅에서는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에 빗대 보아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혼들이 어떻게 타락해가는지 우리는 참 많이 보았습니다.
꽤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어느 순간 낯선 사람으로 변해 버린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불안과 근원적 외로움이 그의 마음을 거북의 등처럼 갈라놓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이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맺었던 들포도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신명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교훈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그들의 포도는 소돔의 포도나무에서 온 것이며, 고모라의 밭에서 온 것이다. 그들의 포도에는 독이 있어서, 송이마다 쓰디쓰다.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으로 담근 독한 술이요, 독사의 독이 그득한 술이다.“(신32:32)
그들은 물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의 포도가 소돔의 포도나무에서 오고, 고모라의 밭에서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이웃들에 대한 환대의 의무를 저버렸다가 멸망한 도시들입니다.
낯모르는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두 도시는 낯모르는 이들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이웃과 낯선 이들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 바로 그것이 독이 든 포도주입니다. 본문에 의지해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5:7)
이 짧은 구절은 매우 강력합니다. 번역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이사야는 일종의 말놀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인상깊게 전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이라 번역된 단어는 미슈팟(mishpat)입니다.
법관이 법에 따라 편벽됨 없이 판단하는 사법적 정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슈팟 대신 돌아온 것은 미슈파흐(mishpah) 곧 '살육, 피흘림'이었습니다. 정의가 사라지진 자리를 폭력이 채운 겁니다. '옳은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쩨다카(tzedakah)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단어를 회복적 정의라고 번역합니다. 안식년법이나 희년법은 바로 회복적 정의를 위한 장치입니다.
그런데 쩨다카 대신 들어선 것은 쩨아카'(tze'akah) 곧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쩨다카가 아니라 쩨아카가 가득 찬 세상이 바로 지옥에 가까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요?
• 오하나
인간의 탐심이 하나님을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자기 시대의 참상을 고통스럽게 직시하고 있습니다. 한 대목만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5:8)
간단합니다. 다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 탐욕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은 간 데 없고, 넉넉한 이들끼리 즐기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자기들을 향해 크게 벌린 스올의 입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조롱하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황무지로 변합니다.
이제는 정말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욕망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우리 삶의 키를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돌려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어려운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다녀온 LA 연합감리교회 이창민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아주 귀한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하나'(O'hana)는 하와이 말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피로 맺어진 관계에 한정하여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약속으로 맺어진 관계 또한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오하나'의 가족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No one gets left behind)입니다. 못났다 욕하거나 따돌리지 않고, 사랑으로 품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약자들의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삶을 성공의 사다리 오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삶을 원을 이루어 추는 춤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가리켜 보인 삶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밭에 심기운 좋은 포도나무에서 들포도가 열리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누구보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삶이 욕망의 강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걸음씩이라도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그런 자리로 이끄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사야강해-6> 사5:1-
2011-01-06 16:33:43
나는 아주 좋은 포도나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족보를 중요시 여깁니다. 내가 누구의 뿌리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화‘뿌리’를 아실 겁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아온 흑인들이 있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말하는 가축’ 취급을 받고 살아온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길들여져 오다 보니 이젠 흑인들 스스로가 그렇게 자아상이 정립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부정적인 자아상이 생기니 별 문제 없이 세상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노예 해방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빛이 들어왔는데, 백인들의 인식과 흑인 자신들의 자아상은 그대로입니다. 자유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무얼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합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래서 자기의 뿌리를 찾고자 합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처음 조상으로 올라가보니 역시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또 좌절감에 빠집니다. 난 원래 노예의 자식이니 자유인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이주해오기 전의 아프리카의 역사를 파고들게 되고, 거기에서 추장 쿤타킨테의 후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 나는 왕족이었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서 드디어 당당히 첫발을 내딜 각오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상태도 이와 똑같이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래 고향은 들포도가 맺히는 황폐한 따, 황무지가 아닙니다. 본문 5b에 있듯이, 심히 기름진 산에 있는 포도원이 고향입니다. 에덴인 것입니다.
원래 뿌리가 황무지라고 자아를 형성해온 사람은 계속 들포도만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뿌리가 심히 아름다운 포도원이었고, 그 처음이 하나님이었음을 알게 되면, 자기의 형상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좋은 포도를 맺을 수 있는….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당한 행보를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옆 사람에게 말해주겠습니다. ‘나는 아주 좋은 포도나무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당신은 아주 좋은 포도나무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주께 돌아오게 되리….'
2절에 보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다시 말하면, 최고 품질의 포도를 얻기 위하여 최고의 시설을 갖춘 것입니다. 땅을 일구었죠,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죠, 망대도 세웠죠, 거기에다 포도주 짜는 곳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산에서 출고까지 다 갖춘 완벽한 시설이었습니다. 이 포도원은 전국에서 가장 좋은 포도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들포도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깜짝 놀랍니다. 4b에 ‘들포도가 맺음은 어찌 됨인고’ ‘들포도’의 뜻은 ‘악취를 풍기다’인데, ‘쓴 야생 포도’를 가리킵니다. 70인역(LXX)은 이것을 ‘가시나무’, ‘엉겅퀴’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들포도’는 먹기에 부적합한 열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들포도를 맺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본문 5절과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한 마디로 모든 가능성을 다 막으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최고의 포도원을 만들어 주셨듯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완전히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 모두가 아주 좋은 포도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1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처음 시작하는 말씀이,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이어서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또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라고 세 번 반복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가서의 말씀이 연상 되듯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토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밭을 일구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만 보더라도,
38:17에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43:4에도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는 종이나 죄인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거기에서 못 박아 죽게 두게까지 사랑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시작한 곳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첫 사랑 장소는 어디냐,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첫사랑의 회복을 위한 첫 걸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감격이 없는 사람은 이기적인 동기로 일을 하게합니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 할 때에도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욥기에서 사단이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할 때에도 욥이 이기적인 동기가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라고 우겼습니다.
만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봉사나 섬김, 모든 은사의 활용이 자기 신령화의 작업이라면 분명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가 영광을 받는다면 이가 들포도를 맺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신령해져서 성자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도 들포도를 맺을 사람입니다. 허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라는 책의 제목 처럼, 믿음생활의 목적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일을 하게 되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자원함으로 지극히 작은 일도 주께 하듯 섬길 수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은사도 아니고, 능력도 아닙니다.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늘 마음속에 확신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이유,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4a)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이 말은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 여기서 뭐가 더 부족한 것이라도 있느냐’ 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무 쓸모없는 들포도만 맺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했고, 악을 행하는 나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복적인 죄와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힘들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와 열심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것도 베란다의 화단을 가꾸듯이 정성스럽게, 꼼꼼하게, 필요에 따라 인도하셨습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더 강한 종교입니다. 완벽 주의적이고 독재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잡힌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늘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실 내 힘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개선될 수 있는 것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아무리 결단하고 힘써보지만 오래가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심각한 병일지도 모르는 복부에 갑작스런 통증이 오거나, 또는 갑자기 신문에 우리가 전부 멸망할지 모른다는 기사가 등장했을 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의 작은 행복들은 부서지는 장난감처럼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서서히 이런 장난감에 마음을 둬서는 안 되고 나의 행복은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나 이틀 정도는 주님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위협했던 위험들이 떠나는 순간, 나는 대번에 다시 내가 버렸던 그 장난감들을 향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장난감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작 48시간 동안만 나를 소유하신 것이고, 그나마 그것도 나의 모든 것들을 빼앗으심으로써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마치 싫어하는 목욕을 끝낸 강아지 꼴이 된다. 몸을 마구 흔들어서 털을 말린 다음, 예전처럼 지저분해지고 싶어 가까운 걸음덩어리로 내빼거나, 거리와 마당으로 뛰어 다닌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 그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잠시 우리를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주님은 거기에 만족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전보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를 간섭하시고, 잘못된 것 있으면 수리해 주시고, 때로는 벽을 허물어트리기도 하시는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 왜 벽을 허무시지? 주님 괜찮습니다. 저는 이 정도 수준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제 제발 좀 그만하시라고...’하면서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궁전이 될 때까지, 최고의 포도열매가 맺힐 때까지...어떻게 해서든지 인도해 가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교인이 5명 정도 모이는 작은 개척교회입니다. 사람이 왔다가도 얼마 안 있어 다 떠나갑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가니까 너무 낙심이 되고, 실망이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이 개척목회를 해야 되나….그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실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슴의 뼈를 만지는데, 뼈가 정말 아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요즘은 어떠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즘은 하나님이 매주 사람들을 보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내시지 않을 때는 한 가족이 여행을 왔다가더라도 들리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정말 열심히 전도하고, 밤새도록 기도하고….이럴 때 영혼들을 보내주셨다면 내가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구나 ….할 말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자기가 가장 힘들어하고 가장 방황하고 심지어는 목회를 떠나야 되나….이렇게 고민하고 그래서 성도들을 깊이 돌아보지 못했던 시간 중에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아무 할 말이 없다고….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어도 그래서 스스로 망할 때 까지 방치해도 되는데 하나님은 다시 좋은 땅 좋은 환경에 좋은 것을 심어주셔서 축복의 길을 또 열어주셨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는 정신 차리고 열심히 노력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열심히 해보려고 했지만 결과는 들포도 뿐이었습니다.
아마 이사야 후반부에 해당되는 40장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거라는 예언자의 계속되는 메시지를 접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을 까요?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이 여러분들의 삶 속, 깊은 곳에 개입되어 있음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이유, 하나님이 나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절)
누군가 나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7절 중반절에,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여기서 ‘바라셨다’는 것이 기대죠. 저는 개인적으로 ‘기대’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앞으로 계속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 가정 위에, 교회 위에,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할 것에 대한 기대….또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갖는 기대,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갖는 기대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수준이 있습니다. 그 단계에 까지 오르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를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되면 그 기대치를 향해 정확하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 그 분의 기대를 모르는 사람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기도’라는 책에서 지은이의 이런 고백을 보았습니다. “기도의 눈물이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나를 만났습니다”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뿌리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알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의를 기대하셨지만 엉뚱한 포학이 난무하고, 공의를 기대하셨지만 엉뚱한 울부짖음만 들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의 비유를 생각하시면서 마태복음의 그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6)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참으로 귀한 포도원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가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기름진 산에,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어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포도원입니다. 이 포도원을 아름답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가장 좋은 포도가 이곳에 가득 가득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최고 품질의 포도열매를 맺는 ‘아주 좋은 포도나무’입니다.
거짓(deceit) /사5:18/ 유은호목사
2021-07-25 09:57:14
모리스라는 동물연구가가 워싱턴 동물공원에서 코끼리 연구를 했습니다. 동물원에는 펫이라는 코끼리와 하나코라는 코끼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두 코끼리는 경쟁관계의 사이였습니다.
우리안에는 코끼리가 체인을 당기면 샤워기가 작동하여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날인가는 펫이라는 코끼리가 경쟁자인 하나코와의 경쟁을 피하려고 하나코를 위해 체인을 당겨서 하나코가 시원하게 샤워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펫이 체인쪽으로 가니까 하나코는 기대를 하고 샤워기 밑으로 가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펫이 잡아당기는 척하며 실제로는 잡아당기지 않았습니다. 펫이 하나코를 속인것입니다. 결국 하나코는 자신을 속인 펫을 향해 돌진을 하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찰스 포드, 마음을 읽는 거짓말의 심리학, 이끌리오,2006,p.80).
모리스는 코끼리도 기만하고 거짓행동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물이 생존을 위한 위장이나 거짓이 아니라 상대를 놀려주기위해 거짓행동을 한것을 볼 때 동물에게 거짓행동의 책임을 돌리기 보다는 거짓을 밥먹듯이하는 인간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미들버그 대학교수인 데이비스 스톨은 19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과테말라의 시민 운동가 리고 베르타 멘추여사가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내전을 자서전적으로 쓴 책을 분석했습니다. 스톨은 그 책에서 과장되고 거짓(허구적인)내용을 많이 찾아냈습니다. 그중에 리고 베르타 멘추는 남동생이 굶어 죽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 남동생은 지금 과테말라에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고 썼지만, 그녀는 사립기숙학교를 두 군대나 다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윌즐리 대학 교수인 마조리 어고진 교수는 그녀를 옹호하며 “나는 그녀의 책이 사실에 충실한지 아닌지에 대해선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과테말라 군대의 만행과 그 군대에 자금을 지원하는 미국의 잔학 행위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고 썼습니다. 노벨 평화상 위원회 역시 “모든 자서전은 어느 정도 미화된다”며 리고베르타 멘추를 옹호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세상은 잔인하고, 모순되며, 사람을 현혹하고 어리석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름끼치는 현실을 견디며 살기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를 나와 영국일간지 이브닝 스텐다드(The Evening Standard)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는 제레미 캠블은 ‘거짓말의 역사 거짓말쟁이 이야기’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이 삶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간존재의 무섭고 불확실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인류는 진리와 함께 빈약하고 불충분한 음식으로는 진화사다리에서 현재의 높은 자리까지 오는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생각이다”라고 말했습니다.(제레미 캠블, 거짓말의 역사 거짓말쟁이 이야기, 나무와 숲,2006,pp.10-15).
우리 사회는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니체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을 견디며 살기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이 시대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언론인마저도 거짓말은 삶에 꼭 필요하며, 진리라는 불충분한 음식으로는 현재의 높은 인류문화를 이룰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짓을 마치 당연히 우리들의 삶속에 있어야 할것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것을 배운 코끼리가 동료 코끼리를 기만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거짓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거짓된 사회의 가치관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끄는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거짓을 내 출세를 위한 끈으로 사용한다면 결국 그 끈은 더 큰 죄악을 저지르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을 끈삼아 죄악을 끌면 그 사람은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 잠언서 12장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뿐이니라
요즘 우리 사회도 거짓으로 인해 사회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마치 도미노현상같이 거짓된 사실이 여기 저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짓 혀는 눈깜짝할 동안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거짓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으로 하루아침에 멸망을 당하는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앨라배마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찰스 포드교수는 그가 쓴 ‘마음을 읽는 거짓말의 심리학’에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욕심, 소망, 성취 가학적충동, 자존심이 거짓말을 하는 동기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거짓말이 ‘자기기만’을 촉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남을 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 바란다. 이는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속이고자하는 심리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찰스 포드, 마음을 읽는 거짓말의 심리학, 이끌리오,2006,p.38).
거짓말을 계속하면 자기기만을 촉진하게됩니다. 자기마저 속이고 사는 것은 당장은 기분이 좋은것 같지만 어느날 현실이 드러나면 인생이 파괴됩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는 ‘거짓말쟁이는 행복하다’는 그의 책에서 거짓말을 이렇게 합리화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위장 능력도 점점 더 세련된다....비지니스쪽으로 가면 거짓(기만)은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상이다. 전투에 있어서는 기만이야말로 승리의 열쇠이다. 2000년전에 손자는 장군들을 위해 쓴 <병법>에서 ”모든 전쟁은 거짓(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거짓을 물리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기기만을 하며 스스로 거짓에 속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삶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거짓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병적인 사회현상으로 돌리며, 거짓을 필요악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거짓말쟁이는 행복하다라고까지 미화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거짓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 거짓의 끈의 끝에는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짓을 계속하면 죄가 끌려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향해 뱀이이 다가와 거짓말을 하여 죄를 짓게 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오늘도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살라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의 원인자는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지배를 받는 개인이나 사회는 도저히 거짓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인간에게 거짓을 말하고 행동하게하여 더욱더 죄로 끌고 들어가 마침내는 지옥으로 끌고가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은 단순히 내 명예의 실추정도가 아닙니다. 거짓을 회개하지 않으면 그 결국은 지옥불에 떨어지기 때문에 거짓이 심각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을 회개하고 날마다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된자를 물리치시고 정직한 자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거짓을 회개하고 날마다 정직한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마음에서
거짓을 회개하게
하시고 날마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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