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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이사야 설교 모음

이사야 7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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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7:10-14/ 김기석목사

2015-07-06 10:15:52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깊은 스올에 있는 것이든,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것입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 특히 태안반도 주민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손문상 화백은 <태안과 성탄>이라는 그림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방제복을 입고 바위에 묻은 기름을 닦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기름을 닦고 계신 예수님은 어쩌면 가슴이 새카맣게 타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닦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 삶의 자리와는 무관한 편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 오시는 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God-(is)-with-us)이라는 뜻입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친구들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 광야로 내쫓긴 하갈과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야말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책상에는 케테 콜비츠(Kaethe Kollwitz1867-1945) 판화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작품에는 손으로 밥그릇을 받쳐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동정을 바라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떠돌이가 아이들이 구호단체의 급식을 받는 모습입니다.

 

위를 향한 아이들의 시선은 필경 밥을 나누어주는 어른들을 향한 것이겠지만, 제게는 그것이 하늘을 향한 하소연처럼 보입니다. 성탄을 기뻐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의 밥그릇을 채워주는 , 아이들의 슬픈 눈동자에 기쁨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임마누엘의 비전은 남왕국 유다가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신흥강대국인 앗시리아의 팽창정책에 맞서기 위해서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앗시리아를 막아낼 없었기에 그들은 유다도 동맹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유다가 거절하자 시리아-이스라엘 동맹군은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왕과 백성의 마음은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때 예언자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임금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

 

시리아 이스라엘 동맹군이라는 것은 “타다만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으니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위기는 분명 위기입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은 ‘중심’입니다.

 

중심이 무너지면 모든 무너집니다. 이사야가 데리고 아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는 끝내 중심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남은자들에 의해 계속되게 마련임을 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기

 

그러나 공포심에 넋을 잃은 아하스는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구하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것도 거절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다윗 왕실에 주는 징조를 예고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나오는 ‘처녀’라는 말에 집착하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처녀는 마리아이고 임마누엘은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alma) 결혼을 했지만 아직 출산하지 않은 여인이나, 가임기에 있는 여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말로 옮기면서 번역자들은 ‘알마’를 ‘파르테노스’(parthenos), ‘처녀’라고 옮겼습니다.

 

이사야는 아기의 탄생이라는 일상적인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려 것인데, 그리스말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뭔가 초자연적이고 신기한 탄생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위된 조국을 위해 태어난 운명의 아기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말합니다.

 

아기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위기를 견뎌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키고 보호해야 아기의 존재야말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라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던져진 역설적인 희망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비쳐진 불빛입니다.

 

임마누엘의 징조가 사람들

 

아기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강대한 제국 로마의 식민지 변방에서, 그것도 말구유에 내려온 비천한 아이, 우리는 그분을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만나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눔과 섬김과 돌봄이야말로 평화의 길임을 배웠습니다. 떳떳한 삶의 길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것은 그런 삶이 지금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다른 임마누엘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절망에 맞서 싸울 있습니다. 서해 바닷가에 엎드려 기름을 닦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마음속에 드리운 어둠을 지우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논현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배정철(46) 씨는 1999 3,000만원을 시작으로 매해 액수를 올리다가 올해는 1 원을 얼굴 기형 환자들의 수술비용으로 내놓았습니다. 미담의 주인공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는 이들입니다.

 

죽임의 농법을 버리고 유기농으로 전환한 농부들, 이주 노동자들을 성심으로 돌보는 사람들, 다문화 가정을 돕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어두운 세상에서 별빛처럼 환히 빛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임마누엘의 징조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정부를 이끌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각계에서 욕구들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외국계 기업들은 규제완화와 노동의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해고를 자유롭게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정규직은 늘어날 것이고, 양극화는 심화될 것입니다.

 

미국은 한미 FTA 조속한 체결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함께 북한을 압박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임마누엘의 소식을 듣습니다.

 

희망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겨자씨 속에서 천국을 보셨던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성탄절은 이처럼 새로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삶이 임마누엘의 징조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소망과 심판 /7:10-14/ 권오진목사

2020-10-05 14:14:16

 

솔로몬 왕이 기브온으로 예배하려고 갔습니다. 그는 최대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리의 제물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구하여라.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꿈에서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네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구하여라. 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만약 심청이가 지금 살아있다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주세요” 그랬겠지요.

 

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3학생이나 부모님들이라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주세요.”라고 기도하겠지요.

결혼적령기에 있는 청년들이라면 “좋은 직장과 배우자를 주세요” 하며 구할 것이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라면 “건강하게 주세요”하고 구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라면 “물질의 복을 허락해 주세요”라고 구할 것입니다.

 

저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구하여라.”라고 말씀한다면 저는

“우리교회가 지금처럼 평안하고, 앞으로도 계속 부흥하게 주세요.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이 행복하게 하시고,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 충만하게 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듣는 마음을 주셔서 주의 백성을 인도하고 선악을 분별하게 주십시오”(왕상 3:9)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만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그가 구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거기에다가 보너스로 부귀와 영광의 , 장수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 우리가 기도만 하면 들어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나옵니다.

10-1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라 - 그러면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12절에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합니다.

 

여러분! 아하스 왕이 하나님께 대답한 말을 표면적만 본다면 <그는 훌륭한 인격자요, 신앙의 깊이가 깊어 보이는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체면이 있지요,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합니까? 더군다나 징조를 구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까?>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인 이사야 7 전체를 살펴보면 아하스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님을 쉽게 있습니다.

<아하스 > 유다의 12 왕입니다. 그가 통치했던 때는 주전 735년부터 주전 715년이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방민족의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산당과 산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알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왕하 16:3-4).

 

그러니 나라가 평안하겠습니까? 그의 통치 말기에 <아람>나라 < 이스라엘>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게 것입니다. 이야기를 오늘 본문 앞인 <1-9>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연합해서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 하반 절에 보세요. .....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모두 공포에 질려 떨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로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하스 왕에게 전달합니다. 4 하반 절에 ... 이들은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합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은 부지깽이가 무슨 용도로 쓰여 지는 아시지요? 부지깽이는 부엌에서 불을 지필 , 불을 밀어 넣거나, 재로 불을 덮을 사용합니다. 부지깽이를 사용하다 보면 부지깽이에도 불이 붙기도 하지만, 꺼내어서 흙에다가 문질러 버리면 불이 꺼져 버리게 되고, 나중에는 부지깽이도 불에 태워 없애 버리지 않습니까?

 

지금 아하스 왕을 위협하는 <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 이런 부지깽이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는 나라가 구체적으로 언제 멸망할 것인지 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확신할 있도록 나에게 징조를 구하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징조를 구했어야 하지요?

 

예를 들면) 기드온이 하나님께 부름 받을 양털 뭉치를 가지고 징조를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테니,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변 땅은 마르게 주십시오, 그러면 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 구원해 믿겠습니다.> 기드온이 구한 징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징조를 보여주었지만, 기드온은 징조를 구합니다. 번째는 번째와 반대의 징조를 구했습니다. <이번에는 마당에 양털 뭉치를 두었을 , 양털은 이슬에 젖지 않고 말라있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있게 달라고 했습니다.> 역시 하루 밤이 지나고 확인해 보자, 기드온이 징조를 구한대로 양털은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고, 주변 땅은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징조를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한 기드온은> 300용사로 미디안 군사 13 5천명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였습니다. 요즈음 흔히 하는 비율로 따진다면 1:450 비율에도 거뜬히 승리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들어와서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 이스라엘과 + 아람> 연합군이 침략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라의 멸망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좋다. <깊은 데서도 좋고, 높은 데에서도 좋다> 어디든지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면 눈에 보이는 징조를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전혀 밖에 대답을 합니다.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여러분 기가 막힌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왕이 <나는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하스 왕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공소식을 듣자 하나님께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위기를 어떻게 하면 넘길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사신을 앗수르에 보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왕하 16:7)

 

여러분,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에게 원정을 청할 그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과 은을 앗수르로 보내었습니다.> 앗수르의 도움을 받는 대신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대신 앗수르란 보이는 국가를 의지합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몰렉 우상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몰렉에게 바치느라 태워 죽였습니다.

 

어리석어도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정작 우리를 도와줄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찾아가서 의지하려고 하고, 어디 물어 때가 없는지>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생활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는 이런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하여 응답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가 없는 사람>중에는 교만한 지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 혼자 명상할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가 되더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고 명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이라고 책에 놓았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기도는 미신적인 환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철학자가 기도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기에 어떻게 기도에 대해서 알겠습니까?

 

기도를 보지 않는 사람은 기도가 응답되는지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는 사람만이 압니다. 기도는 응답 받아 사람만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무식자도, 배운 사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직접 하나님께 구해보고, 찾아보고, 두드려 보면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지성인이 되시되, 기도하는 지성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어리석은 무신론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도 감사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성군이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하면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본문으로 다시 보십시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징조를 구하라, 깊은 데도 좋고 높은 데도 좋다 구해라> 말씀에 12절에 아하스가 대답을 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2절에 나타난 아하스 왕의 대답을 보면서 그는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이구나! / 교만한 사람이구나! /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있습니다.

 

그런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을 합니다. 13절을 보세요.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구절을 <메시지 >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사야가 그에게 말했다. 다윗 왕실이여, 들으십시오! 그대들은 소심과 위선에 불과한 경건으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하나님까지 지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디로 껍데기만 있는 신앙의 모습에 사람도 지치고, 이젠 하나님도 지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책망한 다음, 징조를 구하지 않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직접 징조를 알려줍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나를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그에게 10 하나도 주기 싫어할 것입니다. 그와는 관계를 끝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아하스 왕이 있었지만,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중단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국가나 개인이 아무리 완고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배후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개인과 국가를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14절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로 통해서 아하스에게 메시지의 핵심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뜻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과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어보면 아하스 때가 아니라 <처녀가 아들을 낳고>

15-16절로 가보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 왕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처녀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의 징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본문을 보면서 <처녀가 잉태한다.> 말을 들을 , 당연히 처녀는 <동정녀>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처녀는 <동정녀> 단어가 아니라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젊은 여인> 말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는다. 아이가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의 징조>라고 - 1차적인 대상은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때를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중심으로 유대의 평화를 가져왔으며, 히스기야 아람과 이스라엘 아니라, 앗수르까지 멸망당하는 역사가 일어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징조가 히스기야 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700 후에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결정적인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근원적인 문제로 들어 보십시다.

하나님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있는 아하스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징조를 구하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며 거절합니다.

 

거절한 결과 아하스 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록 <임마누엘> 징표를 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시대에 있을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 히스기야 때의 이야기였고, 앞으로 700 후에 있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결국 앗수르에 굴복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고, 아하는 죽은 후에도 왕들의 묘에 묻히지 못하는 불명예를 안는 것으로 종료됩니다.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는 <심판>이었습니다.

 

만약 아하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렸다면 -- 그는 자신이 살아있을 <임마누엘> 경험했을 것이고, 그의 나라는 더욱 든든하게 유지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 그뿐 아니라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축복이 주어져있고, <임마누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가지 선택을 있습니다.

A: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구하여서 - 소망의 삶을 것인지

B: 그분을 믿는 척은 하지만, 속으로는 진실 되게 믿지 않고, 구하지 않아서

심판 받는 삶을 것인지 ....

 

하나를 우리가 택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주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고, 주님을 의지하셔서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admin

 

 

임마누엘의 징조 /7:10-14/ 송기성목사

2020-03-17 07:42:37

 

하나님의 은혜로”

 

1400 동안 기록된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사역과 대속적 죽음에 관한 예언이 직접적으로는 350 , 간접적으로는 450 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많은 예언 가운데 오늘의 본문 이사야 7 10-14절은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을 ‘한 징조’라고 하였으며, 그것은 ‘임마누엘’의 징조 (a sign of Immanuel)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징조’ (sign)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증거’를 뜻합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Immanuel)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God is with us.)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예언의 성취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증거인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임마누엘의 징조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지라도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과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인물 아하스를 통해서 우리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멸망을 자초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 아하스에게 “너는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심은 ‘지하 죽음의 세계 깊은 데에서든지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징조를 보여 달라고 청하라’ (공동번역, sign from deep in the world of the dead or from high up in heaven) 뜻입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징조를 구하여 하나님을 시험해 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하스의 대답은 아주 경건한 사람의 신앙적인 태도를 보여 것처럼 여겨질 있습니다.

 

신명기 6 16절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대답은 성경을 내세워 경건을 가장한 가식과 위선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징조를 하나님의 말씀 대로 순종하여 징조를 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세에 왕위에 올라 20년간을 (B.C.735-715) 통치한 그는 선지자 호세아, 미가, 이사야의 예언을 들었지만 자기 아들을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여 우상 제물이 되게 정도로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왕하16:3).

 

당시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수리아 아람과 에브라임 이스라엘이 동맹군이 되었다는 것으로 인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기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 주시고자 징조를 하나님께 구하라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대신 앗수르 디글렛 빌레셋의 도움을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결과 유다는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왕 14년에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엔 그가 도움을 구했던 앗수르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멸망을 자초하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여 징조를 구하였더라면 멸망을 자초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롯 사람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 유다는 ‘찬양’,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축복’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그는 당연히 그의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는 회계를 맡은 자였습니다. (12:6;13:29)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고치는 권능도 함께 받았습니다 (10:1;9:1).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12:3-5).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히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라며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습니다 (26:10). 예수님은 그가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6).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그의 행위는 스승 예수님을 30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벌써 속에 들어가 마귀의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13:2,27). 예수님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에게 좋을 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26:24).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17:12).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한 가룟 유다, 그는 결국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27:5).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그리고 주님께 좋은 일을 사람을 괴롭게 하는 자는 결코 찬양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만 마귀의 도구가 뿐이며, 멸망을 자초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자체가 찬양이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직분에 겸손하며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징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의 징조를 무시하고 불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은 징조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의 징조를 믿고 보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멸망을 자초하는 마귀의 도구 불의의 도구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의 징조로 구원을 받는 성령의 도구 의의 도구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괴롭히는 자가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에게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라며 반문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이란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받은 신앙의 명문 집안을 뜻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사람들을 괴롭히고도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길 아니라 이젠 그것도 부족하여 하나님까지 괴롭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일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전한 말씀에 대한 거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괴롭게 하는 불신앙이며 불순종입니다. 사실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작은 일로 여기며,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임마누엘의 징조를 믿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임마누엘 하나님과 같이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임마누엘 하나님의 구원을 받겠습니까?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하나님을 괴롭히지도 않는 사람은 임마누엘의 징조를 믿고 하나님과 같이 하며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하나님도 괴롭히지도 않는 사람은 임마누엘의 징조로 구하게 되고,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것입니다.

 

우상숭배자 아합 왕이 엘리야를 보았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So there you are-the worst trouble maker in Israel?)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엘리야가 그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대답하였습니다 (왕상18:17-18). 그리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대상으로 영적인 대결을 벌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백성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량의 물을 핥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36개월 가뭄이 그쳤습니다.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5:18).

 

사람을 괴롭히는 그리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자는 하나님도 괴롭히는 자가 됩니다. 문제는 자기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다른 사람을 그런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하나님을 괴롭히지도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제단과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는 축복도 받게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징조,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괴롭히는 자에게는 심판과 징벌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하나님을 괴롭히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임마누엘의 징조가 구원과 승리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며 하나님도 괴롭히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드림으로써 임마누엘의 징조를 은혜와 평화로 맞이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13년간 투병 생활을 하던 깨달은 것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몸도 마음도 약해질 때면 ‘임마누엘,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주님께서 곁에서 지켜주셔서 몸과 마음이 강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에게 오해를 받을 때에도 짧은 기도를 드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하시므로 순간 기쁨이 솟아납니다. 아멘!

 

임마누엘의 징조를 믿는 사람은 ‘임마누엘, 아멘!’을 합니다. ‘임마누엘, 아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괴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의 징조를 믿고, 임마누엘, 아멘! 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임마누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admin

 

댁쟾쇰줈

 

 

 

 

임마누엘 /7:10-14, 21:1-7, 1:18-25/ 인명진목사

2018-03-13 06:07:41

 

요즘 불임 부부가 늘면서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아 태어나는 아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보다는 쌍둥이가 많이 태어납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글을 썼는데 꼬마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요즘은 쌍둥이가 많이 태어나는 것일까? 우리 반에 말고도 다른 아이도 쌍둥이이다. 쌍둥이가 많이 태어나는 것일까? 나는 아기들이 홀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형과 동생이 함께 손잡고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분,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얼마나 순진하고 담백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저에게 쌍둥이 아이의 글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가 연못 저편에서 돌을 하나 던졌는데 멀리 멀리 동심원을 그리면서 다가와 건너편에 있는 어른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는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사람이 겪고 있는 가장 문제인 외로움과 고독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이런 아픔과 약점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번째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게 보여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을 함께 나눌 있는 배우자라는 이름의 친구를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서로가 사랑하는 관계가 되면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이 해결되지만 모든 관계가 사랑일 수만은 없습니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수많은 전투의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이 사랑 아닙니까?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갈등하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여 찌르고 찔리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떨 때에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마음은 구멍 뚫린 풍선처럼 허전할 때가 있고, 곁에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몸소 느끼면서 이것이 인간의 가장 문제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모든 세대에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문제였지만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런 같습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을 흔하게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나에게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은 외롭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 천만 명이 살고 있지만 누구나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서 혼자서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에게 사람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2 바둑의 천재인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대결을 벌였습니다. 기계와 컴퓨터에게 밀려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인간 이세돌을 응원했습니다. 이세돌 구단은 개인 자격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인간 대표로써 인공지능과 대결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의 열렬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4 1 알파고가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인간에게 완승을 거둔 알파고가 새로 개발한 알파고 제로에게 완패하고 당하고 말았습니다. 알파고 제로는 불과 2 만에 사람이 3 동안 쌓아놓은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었다고 말합니다. 2 만에 사람들이 3 동안 축척한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었다고 하니 인간이 이상 경쟁이 되지 않는 겁니다.

 

문제는 바둑 분야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기계와 컴퓨터에게 밀려나고 소외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4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기계에게 밀려 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직업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사람들이 기계에게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쓰다 남은 나머지 ‘잉여’로 산더미처럼 쌓이게 것입니다. 고독과 외로움을 넘어 인간이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외로움과 고독을 과연 무엇으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느 시대만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던 것은 아닙니다. 시대에서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의 강도는 어느 때보다 심하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 외로움과 고독이 시작되었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외로움과 고독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지고 가야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과연 무엇으로 해결할 있겠습니까?

 

특별히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은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가정불화나 심장마비나 자연사도 많아진다고 합니다. 사건도 많이 일어납니다. 지난 주중 제천의 사우나 화재로 인해 29명이 죽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가장 기쁘고 즐거워야 시기에 외로움과 고독은 우리네 인생을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가 확산되고 있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메리 크리스마스이지만, 슬픔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결코 기쁜 크리스마스가 없어서 우울한 크리스마스, 블루 크리스마스라고 부릅니다.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는 성탄절 보다 3 빠른 동짓날 저녁에 드려지는데 가장 저녁 예배라 부르기도 합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 사람들이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려고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 받았으면 좋겠다는 시기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사랑받아야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기가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래서 성탄 카드도 주고받고, 선물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확인할 없는 사람들에게 시기는 사랑의 계절이 아니라 외로움의 계절이요,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사람들이 많이 아픕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습니다.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데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우리를 돌보는 이웃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같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블루 크리스마스의 현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아는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데 돌보는 사람, 돌보는 마음, 돌보는 이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블루 크리스마스입니다. 이것보다 겨울을 춥게 만드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크리스마스의 외로움은 우리 모두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동시에 나도 내가 누리고 있는 사랑으로부터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이것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가 이름을 지었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이 이름을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이에게 그런 이름을 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임산부나 그의 남편들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무엇이라 기도합니까? 제가 매주 화요일 새벽이면 임산부와 아이 가지기를 소원하는 부모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건강한 아이를 순산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요즘 부모들은 뱃속에 있는 아이의 태명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부모가 그의 아이의 이름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지을 있겠습니까? 생각하기에 따라 발칙하기도 하고, 담대하기도 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하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히브리어인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뜻입니다. 말씀은 구약 이사야 7 1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당시 유다 왕은 아하스였는데 세계를 최초로 통일한 앗수르와 갈라진 형제인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한 때였습니다. 너무도 급박한 위기였습니다.

 

그때에 선지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왕에게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면서 왕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편의 하나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상징적인 이름을 지어 주곤 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진 아기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예언이요, 특히 위기를 당한 아하스 왕에게 있어선 말할 없는 용기의 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하스 왕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지 못하고 명령대로 좇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불행을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750년이 지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아기가 태어났고, 그는 성장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후에 마태라는 기자가 그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분의 탄생이야말로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의 행적을 지켜보았고, 그가 승천하신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고, 또한 교회의 놀라운 확장과 거기서 발생하는 기적적인 역사들을 지켜 마태는 “임마누엘”의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음을 확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없는 구원의 역사가 요원의 불길처럼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혈통의 경계선인 유대인을 넘어서서 헬라인, 로마인, 아프리카 사람에게까지 번져 나갔습니다. 또한 지역의 경계선인 팔레스틴을 넘어서서 소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인도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예수 그분이 구약에 예언한 임마누엘이 예언한 분이 아니고는 일어날 없는 일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입니다. 그의 부모로부터 이름도 아니요, 그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름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작명소로부터 이름은 더욱 아닙니다. 이름 속에는 대단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쌍둥이가 되어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게 것이다. 항상 우리와 함께 것이다. 홀로 세상에 있지 않게 하겠다. 바로 이런 말씀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임마누엘 이름이야말로 복음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무도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어지럼증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에 관한 마태복음의 단어인 동시에 마지막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장도 임마누엘, 28장도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는 복음서 장에서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시금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 자신이 세상 날까지 우리와 임마누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나머지 부분은 처음과 마지막 진술을 채우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나머지 부분은 임마누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 마태복음만 그러합니까? 신약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 요한계시록 말씀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육신의 세계뿐만 아니라 죽음의 세계까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태생적인 외로움과 고독으로 떨고 있는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입니다.

 

신약성서 처음 탄생의 임마누엘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죽음의 임마누엘까지 하나님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멍 뚫린 마음을 채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이 들려주는 요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했는데, 사람이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율법으로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꿈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를 아내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 왔으나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나 명예와 평판을 위해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마리아를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희생 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의 행동반경 안에 산다면,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의 둘레 안에 산다는 것은 불편하고 사회적 멸시와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마리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의 둘레 안에 산다는 것은 마리아를 수치와 외로운 삶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를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소설은 아프리카 알제리 오랑이라는 도시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소설은 1947 발표가 되었는데 2 대전이 끝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랑이라는 도시에 대규모 흑사병 페스트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는 봉쇄되고, 상당한 시간 동안 누구도 도시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갑니다. 생존한 사람들도 점점 지쳐갔습니다. 마음도 깊은 병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페스트 앞에서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이웃이 죽어도 얼굴 한번 내밀지 않고 자기만을 보호하려합니다.

 

이때 의사를 중심으로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의료자원봉사대를 발족시켜 페스트와 맞서서 싸웁니다. 의료봉사대에 그랑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 성탄절이었습니다. 상점의 창문을 통해 격리된 아내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너무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보지 못할 같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을 기억하려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까뮈는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항상 그런 시간이 옵니다. 어떤 시간 말입니까? 자신의 일에 지쳤을 , 의무에 대한 헌신에 지쳤을 때에,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간절하게 사모하고 있는 모든 것이란 결국 사랑받았던 얼굴이고, 사랑하는 따스함과 놀라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런 시간 말입니다.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인지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사랑받는 얼굴이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사랑받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사랑하는 마음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까뮈는 페스트라는 극심한 전염병을 이겨나가는 것도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절실하게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받는 얼굴이요, 사랑하는 마음의 따스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아셨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땅에 보내신 이유는 사랑하는 얼굴이 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의 따스함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에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얼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사랑받는 얼굴, 임마누엘을 떠올리면서 인생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사랑받는 마음, 임마누엘을 떠올리면서 인생의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얼굴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기쁨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아기 예수의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임마누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에게 사랑받는 얼굴이요, 사랑받는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세상 날까지 우리와 동행할 것입니다. 복된 소식을 안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얼굴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아가 성탄의 기쁨을 전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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