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라- 잊지말라
2002-11-13 14:36:20
2002년 10월 20일
구약의 말씀: 미가서 6:6 ~ 8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2:12 ~ 13
어린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8:21 ~ 35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삭쳐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기를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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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절기로 보면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입니다. 창조절에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생명을 위해서 살고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질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반드시 하늘이 만든 질서대로만 유지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의 전통적인 문화가 있으면, 그 문화에 저항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소위 문화가 있으면 반문화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질서가 있으면, 창조질서에 역행하려는 또다른 질서가 있습니다. 그 중 한 예가 요즘에 “게놈”이라고 이름 붙인 유전자에 관한 기술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질서, 게놈의 질서대로 움직여 갑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는 게놈을, 그 위치도 바꾸고 배열도 바꾸어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의 인간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예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착한 일 하고 좋은 일 한 사람한테 상을 줍니다만, 그 반대쪽의 사람한테 상을 주는 데도 있습니다. 그런 상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상은 진화론을 만들고, 자연도태설을 주창한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따서 “다윈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상은 인생을 살되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법으로 사는 사람, 보편적인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극단적으로 역행하면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서 저항하고, 그래서 또다른 유전자가 생겨나게끔 노력한 사람에게 주는 상입니다. 괜히 어려운 말 같은데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살을 하되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자살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다윈상이라는 상입니다.
그런데 이 상을 작년에 수상한 사람이 남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25살 난 노동자였습니다. 그 얘기 잠깐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노동자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25살 난 남편하고 20살 난 부인간에 불화가 심했습니다. 심하게 싸우다가 8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남편이 아내를 들어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워낙 낙후된 노동자 아파트이다 보니까, 전깃줄이 하도 얼키설키 엉겨 있어서, 아내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전깃줄에 딱 걸려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남편이 그냥 숨돌릴 틈도 없이 창문에서 아내를 향해 뛰어 내렸습니다. 그렇게 뛰어 내렸는데, 남편은 전깃줄에 안 걸리고 바로 땅바닥에 떨어져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상을 준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혹 그 남자가 아내를 죽이려고 내던졌는데 전깃줄에 걸려서 목숨을 건졌으므로, 전깃줄에 걸린 부인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기 위해, 말하자면 소위 살인을 완수하기 위해서 뛰어내렸을까요? 그랬다면 그것도 특이합니다.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냥 스스로 죽기 위해 뛰어 내렸을까요?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살입니다. 그 어느 경우든 특별한 방법으로 생명을 끊었으므로, 다윈상을 수여합니다.”
창조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살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와 반대로 주어진 삶을 내던져 버립니다. 반문화적, 반창조적 선택을 합니다. 게다가 이런 상이 있다니, 참 희한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노동자의 경우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 세계에는 테러라 이름하는 자살 특공대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네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 상대를 무차별 폭격하는 국가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반문화적, 반창조적 행위가 우리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다윈상은 지금 누구한테 주어져야 합니까? 누가 다윈상의 수상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대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남자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 사회 자체, 부당하고 일그러지고 찢겨진 우리 사회 전체가 혹시 이 상을 수상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성서 말씀을 통해서 보면, 자기 몸을 죽음으로 내던진 이 사람에게는, 분명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해 주시고 수많은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셔서 지금까지 살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감사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용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화를 빚은 아내도 용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그 용서에 감사하여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빚진 자를 탕감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감사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을 살펴봅시다. 어떤 왕이 자기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1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자기 동료가 100데나리온 빚진 것을 갚지 않는다고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일을 보고받은 왕은 화가 나서 그 신하를 감옥에 집어넣는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한테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의 생활과, 감사할 줄 모르는, 아니 감사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 얘기가 나왔습니다. 돈 계산 좀 해봐야 되겠는데요, 예수님 당시에 1데나리온은 하루치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100데나리온을 빚진 이 종은 100일 치 임금만큼의 돈을 빚진 것입니다. 1만 달란트는 100데나리온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1달란트는 얼마냐 하면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1달란트는 6,000일 동안의 임금 총액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성서에 하나님께서 달란트라는 복을 주셨으니, 한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주셨으니, 그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말고 장사하여 이윤을 많이 남기라고 합니다. 그때의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그것은 6,000일 분의 임금이라고 했습니다. 6,000일을 햇수로 따지면 15년입니다. 1달란트는 15년 치 임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액수입니다. 혹시 다섯 달란트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75년 치 임금을 일시에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신하가 탕감받았던 액수, 1만 달란트는 데나리온으로 치면 6,000만 데나리온입니다. 6,000만 일 분의 임금, 햇수로 따지면 15만 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15만 년 동안의 임금 총액에 해당되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단 100일 동안의 임금만큼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작은 아량도 베풀지 못하는 건 당시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돈 이야기를 자꾸 해서 뭣합니다만, 당시의 유대 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절에, 그래도 경제형편이 낫고 부유하다고 일컬어지던 곳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역과 그 위쪽에 있던 사마리아였고, 그 다음으로는 이두매였습니다. 이 세 지역이 비교적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1년 동안 로마제국에 바치던 세금 총액이 600달란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교활동을 펴시던 갈릴리 지역과, 변경인 뵈레아 지역은 아주 가난한 지역이어서,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과 인구가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로마제국에 바친 세금 총액은 200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600달란트, 하나는 200데나리온! 그 차이가 얼마냐 하면, 1만 8,000배입니다. 말하자면 세금액수로 따지면, 팔레스타인의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 사이에는 1만 8,000배의 빈부격차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난한 자들에게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타난 비유의 말씀을,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의 복음을 전했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뭐라고 응답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절대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에다, 하나님의 은혜까지 주신다고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1만 8,000배나 더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은 아마도 도전장으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남과 북 사이에도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한지를, 통계 수치마다 달라서 비교하기가 간단치는 않습니다만, 수출입 무역량을 비교하면 된다는 견해가 있어서 그 방식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리 남쪽은 수출과 수입 합친 무역고가 연간 3,700억 달러가 된다고 하고, 북쪽은 한 40억 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만 따진다면 남쪽이 북쪽보다 180배 부자입니다. 우연입니까? 갈릴리와 유대 지역의 차이는 1만 8,000배, 남과 북의 차이는 180배! 어느 경우든지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는 나눔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나눔이 없었습니다. 우리 남과 북 사이에도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근자에 약간의 나눔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누는 것입니까? 우리 남쪽은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북의 사람들을 품을 수 있고 그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복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감사를 잊고 남을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카뮈의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알베르 카뮈라는 사람은 실존주의적 소설로 유명하지만, 재미난 얘기를 쓰기도 했는데 제가 읽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자꾸 먹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심리적,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변화를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을 때, 나에게는 강한 열정이 있었다. 말하자면 패션(passion), 패션이 있는 것이 젊음입니다. 누구나 정열적인 사랑과 정열적인 힘을 가지고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청년시절에 가졌던 패션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이 가진 패션도 보고, 옆 사람이 가진 정열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일방적인 열정이 아니라 상대방의 열정과 나의 열정이 만나서 이루는 묘한 합일된 열정, 곧 컴패션(compassion)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용서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 관계를 성립합니다. 그런 관계를 성립하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긍휼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긍휼과 자비, 그 긍휼과 자비라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시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 홀로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일방적 사랑도 하나님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인간과 더불어 사랑하십니다. 인간이 좌절에 빠질 때는 함께 좌절하고, 인간이 기뻐 찬송할 때는 함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열, 부정적 정열, 긍정적 정열을 인간과 함께 나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때 끌어안고 같이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나누고 함께 합치고 무언가를 같이 만드는 컴패션, 긍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일방적인 사랑을 하지 않으십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 한쪽의 반응 없이 한쪽에서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그 사랑, 그 패션은 짝사랑에 불과합니다. 짝사랑은 자유이겠습니다만, 그것은 결실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쌍방향이어야, 소중한 만남, 행복한 결혼이라는 결실을 낳고는 생산적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혼자만의 사랑으로는 결실할 수 없습니다. 패션이 중요하지만 패션들이 만나야 합니다. 사랑은 만나야 합니다. 사랑이 만나면 감사가 있습니다. 만남이 없는 곳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떼어지고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홀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걸 가리켜서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 컴패션하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방적 사랑, 일방적 관심이 아니라 쌍방적 관심 속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왕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면서 그를 용서할 때, 기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한테 받은 그 큰 용서에 감사한다면, 그 용서를 이웃에게도 베풀어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하나님이 주신 컴패션, 그 긍휼의 신앙을 잊어버리고,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 이 세계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안보라는 이름으로, 평화의 이름으로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미국식 자유를, 미국식 평화를 세계에 강요합니다. 일방적 평화와 자유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숴버립니다. 그것에 반발해서 아랍의 테러범들은 또 일방적 테러 공격을 감행합니다. 일방적 평화와 일방적 자유, 일방적 문화는 이 세계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힘 센 자와 힘이 약한 사람이 서로를 합쳐서 크고도 조화로운 패션을 이루어 낼 수는 없습니까? 서로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나눌 수는 없습니까?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세계는 평화가 아닌 저주의 세계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복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뭘 바칠까요? 짐승의 피를 바칠까요? 아들을 바칠까요? 제 자신을 바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와 내가 함께 이루었던 공의의 열매, 너와 나누었던 그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오너라. 내가 너희와 함께 베풀었던 그 인자함의 얼굴을 가지고 오너라. 이것이 참된 예물이니라. 그러면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 이 사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정의를 추구한답시고 국민을 업신여기면, 이 사회는 불의한 사회가 됩니다. 지도자와 백성은 서로의 생각과 사랑과 정열을 나누어서 함께 가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모 자식간에 패션을 공유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존속하는 한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고 나누는 사랑, 합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용서의 위대함에 감사하며, 그 용서에 감사하기 때문에 나도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감사를 망각한 신앙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창조의 질서에도 역행하게 됩니다. 사랑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나누시려 합니다. 갈등이 있고 힘들지만 나누는 곳에 하나님의 복과 은총이 있습니다. 일방적 사랑이 아니고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 그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고통에든, 기쁨에든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우리 세계와 함께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아멘.
용서하는 사람들
2002-11-13 14:35:09
2002/11/10 // 마 18:18-22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태복음 18:18∼22)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 가운데서 취미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바둑, 장기, 낚시, 축구 탁구, 배구, 등산, 골프, 여행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1부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그는 아멘 대신 "아다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락이나 취미나 여가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상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 오래 담고 있으면 안됩니다.
사랑, 동정, 그리움, 아끼는 마음,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 둬도 좋지만 미움, 아픔, 원한,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담고 있을 것들이 아닙니다.
본문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날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였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훈은 사람이 지은 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다 네 번을 더해 일곱 번 용서할까요?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490번도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완전히 다 용서해 버리는 것인데,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없던 일로 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용서는 "없던 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490번을 반복해 "나는 너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라며 "내 눈에 흙", "내 눈에 흙"을 되뇌어 보십시오. 한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할거야, 없던 일이야"를 490번 반복해 보십시오. 상한 감정과 원한이 눈처럼 녹아져 버릴 것입니다.
1. 용서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가운데 `하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가엾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아끼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습니다.
`카파르`라는 단어의 뜻은 덮다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가운데 `아폴뤼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놓아주다, 가게하다, 풀어주다, 보내버리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리조마이`라는 단어의 뜻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락하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용서의 성격이고 내용인 것입니다.
덮어주는 것, 풀어버리는 것, 이유도 까닭은 따지지 않고 허락해 주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내가 널 용서는 하지만 따질건 따지고 캘 건 캐고 밝힐 건 밝히고 나서 용서해 주겠다"라고 한다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는데는 이유도, 조건도, 과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왜 용서해야 합니까?
본문 23∼35절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빚을 갚기로 한 기한이 지나자 주인이 종을 불러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 달라며 하소연했습니다. 주인은 종의 정상을 참작해 연기가 아니라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은혜를 입은 종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100데나리온을 꿔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이 나쁜 놈, 돈을 꿔갔으면 제 때에 갚아야지 떼먹기로 작정했느냐"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신고해 그 사람을 유치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주인에게 전후사정을 알렸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32절 이하를 보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저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어늘 저에게 폭행을 하고 옥에 가두었단 말이냐"라고 했고, 34절을 보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1만 달란트는 현시세로 3조원이고, 100데나리온은 200만원정도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 사람은 500만원을 받으려다가 3조원을 손해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계산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운 죄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용서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1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을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죽을 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시체였고 진노의 자식이어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네가 용서받을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는 일에는 이유도 까닭도 구실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호프대학에서 71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과거의 상처나 원한을 기억하도록 했더니,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화를 낼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미시간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1,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캐서린 그리핀은"친구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친구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보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교제하며 사는 사람들이 치명적 병을 이길 가능성이 높고, 더 강하고 탄력적인 면역체계를 갖게 되고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사회적 유대가 약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입니다.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친구와 사귀고 사이좋게 지나는 사람은 감기에 걸릴 확률도 4분의 1이라고 합니다. 276명 콧구멍 속에 감기 바이러스를 떨어트린 후 5일 동안 격리한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소 친구나 친지들과 사이좋게 지낸 사람들은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뭡니까?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돕는 것이 친구입니다.
마태복음 6:12에서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의 교훈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즉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용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내가 받은 용서가 유효하고, 용서해야 내 심령이 편하고, 용서해야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평안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용서와 사랑과 화해는 점점 사라져가고 증오와 갈등과 다툼이 점차 거세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까지 그러면 안됩니다.
심리학에서는 계슈탈트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볼 때 어느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느냐 어떤 조명아래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예뻐 보이기도 하고 미워 보이기도 한다는 법칙입니다. 여성의 경우 달빛아래서 보아야 예뻐 보입니다. 단점이 희미한 빛으로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0미터 정도 거리에선 바라보면 0.3정도의 시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쁜 점이 가려져 예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대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법칙입니다. 용서하면 원수가 친구로 변합니다. 적이 동지로 변합니다. 추녀가 미녀로 변합니다.
칼릴지브란이 쓴 "예언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책 속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서 있지는 말라
본문 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중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중심이란 진실한 마음. 거짓 없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고 한을 품으면 나 자신의 정신 건강과 신앙에 손해가 됩니다. 실상 그 사람은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라는 낱말의 뜻은 말씀드린 대로 이유 없이 허락해주고 무조건 덮어주고 혐의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캐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용서합시다. 원한이나 혐의를 가슴에 담아두지 맙시다.
일본에서 노인 3,136명을 추적조사 했습니다.
에히메 대학 의학부가 마쓰야마시 부근의 농촌을 중심으로 60∼84세 노인 3,136명을 4년 반 동안 추적조사 한 결과 보고에 따르면, 남자는 부인이 있는 경우보다 없는 경우가 사망률이 79프로나 높았고, 여자의 경우는 남편이 있는 경우가 없는 경우보다 사망률이 55프로 더 높았습니다.
뭘 말합니까? 서로 돕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아야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고 아내가 남편을 괴롭히면 빨리 죽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받는 사람들이 됩시다
용서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사회를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합시다.
용서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찬송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시다.
admin
용서
2002-09-16 14:50:56
2002-09-01 //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용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간들이 전쟁으로 황폐하게 만든 산과 들에도 봄이 오면 또다시 풀이 나고 들꽃이 피어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치료합니다. 인간의 파괴 행위에 대한 자연의 용서인 것입니다.
서울의 한일월드컵 축구대회를 연 상암축구장이 선 난지도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서울 시민들이 만든 흉물스런 쓰레기 동산이었던 곳이 이제는 아름다운 자연학습동산이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환경파괴를 행위를 용서하고 다시 아름다운 생명으로 재건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거기에는 자연이나 인간의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용서에 대한 기도를 매일같이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어떤집의 딸과 손녀가 길을 건너 가다가 과속차량에 치어서 딸과 손녀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딸의 어머니가 자기딸과 손녀의 죽음을 애통하고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그 자동차 운전수가 경찰에 잡혀 왔습니다. 그 운전사는 말하기를 실수로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하다가 이런 사고를 범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기왕 딸과 손녀가 죽었는데 더 어찌하겠는가 실수로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딸과 손녀를 치고 이 사람은 뺑소니 하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용서할 생각이 싹 사라지고 괘씸한 생각과 복수심이 생겨났으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굉장히 고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흉악한 놈에 대해서 내가 복수를 해야 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용서해 주어야 될 것이냐? 그러나 그는 오래 생각한 끝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해 주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움과 복수심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 자체가 자기를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사회생활 중에서 부정적으로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며 결국 파괴는 자기가 당하지 사고를 낸 그 뺑소니 운전사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하고 주님 안에서 그 뺑소니 운전사를 용서해 주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로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또 어떤 사람의 간증을 들었는데 딸을 강간한 남자를 찾아서 아버지가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총을 쏘아 죽이고 난 다음 복수를 했다는 마음의 시원함을 잠시 있었으나 그 사람에 대한 증오는 계속 마음에 남아 심신을 파괴하여 그는 계속 술을 마시게 되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딸을 강간한 그 나쁜 놈을 총으로 쏘아 죽여도 그에 대한 미움과 원한이 내 마음속에 있는 이상 그 원한이 나를 폐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외형적인 복수가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외적인 복수가 마음에 미움의 문제를 해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로 44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내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어마어마한 미움의 파괴에서 해방시키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란(네덜란드)의 유명한 부흥가 셨던 코르텐분여사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여사의 집이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가족들이 모두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아버지와 언니는 그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노동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만 여사만이 구사일생으로 전쟁 후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주의 여종이 되었습니다. 여사가 복음을 증거 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여사는 하나님께서 가시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만 독일은 나는 못 갑니다. 하나님 그곳만은 빼주십시오. 독일사람이 우리 아버지도 죽이고 언니도 죽이고 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당한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독일 사람에게 가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나를 저주하고 욕하고 등진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을 기억하라. 네가 내 딸이면 독일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말씀을 듣고 여사는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께 나오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는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를 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한참 악수를 하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데 심장이 멎고 온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악명 높은 자기에게 무지무지한 고통을 가한 강제노동수용소 감독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한겨울 이른 새벽 여자포로들을 발가벗겨 밖에 서있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갖은 횡포로 괴롭혔던 장본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 손에 의해 그 여사의 어머니와 언니가 강간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있었던 악몽같은 괴로운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치는데 앞에 있는 바로 그 당사자 남자가 손을 내밉니다. 그 남자는 전쟁당시 수많은 여자 포로들을 죽여 봤기 때문에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여사는 꿈에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 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박고 죽이고 침 뱉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줘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못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서 그의 손이 나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거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란 사람인 당신이 전쟁때 우리가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주님 앞에 나왔으니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십시오." 그 순간 갑자기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사랑이 여사에게 넘쳐 나왔습니다.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때 그 마음속에 쓰린 원한이 치료를 받고 그 이후로 온 세계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힘있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그의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8장 21절로 35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임금님이 자기에게 일만 달란트, 현재 돈으로 말하면 약 1천만달러, 우리 한국 돈으로 1백20억원의 빚진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 불러다가 "빚을 갚으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너의 처자를 다 종으로 팔겠다." 이사람이 땅에 엎드려 간절히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고 도저히 그 사람 힘으로 120억원의 돈을 갚을수가 없어 그만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용서를 받고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고 기쁨에 넘쳐서 나오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요사이 돈으로 환산하면 약 2만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120억원의 빚을 용서받고 나온 그에게 2만원 빚진 친구를 만나서 멱살을 잡고 "이놈아 빚을 갚아라."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갚겠나이다." 그는 이 사람을 당장 끌어다가 고소해서 구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친구들이 너무나 괘씸하게 여겨서 임금님에게 그 사실을 고했습니다. 임금님이 도로 이 사람을 불렀습니다. "야 이놈아 나는 너에게 120억원의 큰 돈을 탕감해 주고 용서해 주었는데 너는 너의 형제 2만원 빚진 자를 잡아서 구치소에 넣었다니 이 고약한 놈, 이놈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어서 120억을 다 갚을 때까지 고생의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고 괴로움을 당하게 하라." 그렇게 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도 가까운 네 이웃에게 죄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사람처럼 하시리라." 우리의 삶 속에 다가오는 많은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가 용서해 주지 못함으로만 당하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는 많은 염려, 근심, 고통, 좌절, 절망의 감옥속에 들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해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용서를 해주지 아니하므로 하나님께서 진노의 채찍을 내리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절로 11절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새벽 일찍이 성전에 나가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보니까 여기 바리새교인 사두개인 교법사들이 한 여인의 머리채를 끌고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 여자는 눈물에 얼굴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몸은 찢어지고 신발은 벗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이 여자를 내동댕이 치고 난 다음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허리를 숙이더니만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주님이 그곳에 십계명을 그곳에 적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계속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그들은 손과 손에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서 돌맹이를 들고 몽둥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천천히 허리를 펴셔서 큰자로부터 작은자까지 눈을 맞추어서 훓어 보시고 난 다음 장엄한 음성으로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쳐라" 그리고 난 다음 고개를 숙이시더니만 다시 손가락으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뭘 적었는지 압니다.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주님이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깨 너머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볼 때 자기들의 감춰진 죄가 백일천하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고 한사람, 두사람 돌맹이를 그 자리에 버리고 살며서 빠져나가서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보니 그곳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흩어진 돌맹이와 몽둥이만 남아 있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없습니다. 다 도망을 쳤습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로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충혈된 눈으로 돌아보니 아무도 그를 고소하는 자가 없습니다. "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 크신 용서와 자비를 보십시오! 모세의 제자들이 와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돌로 쳐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모세의 율법 십계명을 적으시고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들어내서 다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아라." 용서와 사랑과 자비로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모두다 위선자입니다. 자기의 죄가 백일천하에 드러나면 이 자리에 있던 이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도망치듯이 다 도망을 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감추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합니다만 자기의 죄가 드러나면 얼마나 무서운 위선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다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했는데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이 누가 있습니까? 남을 정죄하면 그 정죄하는 것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바울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했어요.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어요. 그러나 우리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이 성경에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았다고 말했습니다. 죄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영도 마음도 몸도 죄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올라가서 처참하게 죄값을 받으시고 몸을 찢고 피흘리셔서 우리의 죄악을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알고 우리가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은혜를 알고 회개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아무리 주님께서 이렇게 해도 소용이 없지요. 열사람이 말을 끌고 물가로 가져갈 수 있지만 강제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무리 위대한 은혜와 용서를 베풀어 놓아도 우리 스스로 마음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효과가 없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로 10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죄가 없어요. 회개할게 뭐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있다고 말씀했는데 죄가 없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데 그리하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설 수 없지요. 솔직히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이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03편 12절로 13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셋째로, 이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면 자기를 용서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여 좌절하고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한 중년의 자매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아주 귀하게 생겼고 옷도 잘입었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어느 회사의 남편이 중역으로써 생활이 아주 부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앉자마자 큰 한숨을 쉬고 눈물을 비와같이 흘립니다. 자기는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려고 해도 믿을수가 없고 자기는 너무나 자기가 원망스럽고 미웁고 죄책으로 견딜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그러냐고 물으니까 6·25때 너무나 어려울 때 자기는 홀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홀로 사니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현재 남편을 만났는데 부산에서 떠도는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같이 모시는데 어머니가 피난살이에 너무 고생하고 눈물을 많이 흘리고 살았기 때문에 그만 치매에 걸렸습니다. 단칸방 생활에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대소변을 방안에서 그대로 보고 옷을 찢고 도저히 혼자 내보낼 수 없는데 두사람이 다 나가서 죽도록 피난살이게 벌어야 먹고사는데 치매된 어머니 때문에 너무나 고통하다가 남편이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치매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당신하고 내가 도저히 단칸방에서 살수 없으니 헤어지자. 이 여인은 남편과 헤어지면 이제 죽는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 어머니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시골에 내려가서 시골길에 내려놓고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이 부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자니 남편하고 이혼을 해야 되고 남편과 함께 살자니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버려야 되고 그 가운데 그는 결단하고 어머니를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다시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남편은 점점 진급해서 이제 큰 회사의 중역이 되고 잘살게 되었는데 낮마다 밤마다 그 죄책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짖눌러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이제 정신적으로 살수가 없어 우울증에 걸려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때 내가 말했습니다. "자매님, 어느 누구도 자매님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처할 때 피난살이에 자매님과 같이 결정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남편이 치매 어머니를 데리고 있으면 당신 버리겠다고 했는데 당신 연약한 여자로써 치매걸린 어머니를 데리고 살수가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살고 늙은 사람을 세상을 뜨게 해야 되겠다는 그런 선택을 누구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그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모르겠거니와 크리스챤도 아니었어요. 이제 당신을 구박하고 박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신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주님이 다 이루시고 용서해 주었으니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당신도 스스로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은 끊임없이 당신을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 것을 당신이 용서 안해주면 당신은 예수님보다 더 높은자가 됩니까?"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용서해 주고 그 용서해준 기쁨과 감격이 너무 깊어서 중년의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주의 종이 되어서 아마 지금도 어느 곳에서 주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자기 학대를 계속하면 삶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고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3년 반 동안 배운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혀서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서 심판받을 때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는데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피투성이가된 예수님이 뒤를 돌아 봤습니다. 예수님이 눈이 부딪히자 그는 밖으로 나가서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고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미웠습니다. 견딜수 없는 자책감이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안해주고는 둘째 문제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3년 반동안 그리스도를 모시고 따라 다녔는데 그가 큰소리로 내가 주님이 감옥에 가면 나도 같이 따라가고 죽으면 같이 죽겠다고 한 그가 예수님을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자괴감에 견디지 못해서 시골로 내려가서 옛 어부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로 내려가서 낡은 배를 끄집어내고 그물을 다시 기워서 옛 어부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잡힐 턱이 없습니다. 정신이 없는데요. 그런데 새벽 안개낀 저 해변에서 누가 서서 말합니다. "얘들아 무엇이 있느냐?" "아무것도 못잡았습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많아 헤어져서 그물을 찢어지니 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그 그물을 끌고 나오는데 베드로는 도저히 양심에 고통에 그냥 배타고 나올 수 없어서 물에 뛰어들어가서 헤엄쳐 나왔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더라도 조금 자기가 위로함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 보십시오. 요한복음 21장 15절로 17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 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시인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베드로가 당혹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사랑한다 해놓고 또 언제 배반할지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아시나이다. 나는 몰라요. 주님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나는 지금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또 언제 배반할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세 번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강력하게 용서와 인정을 해주시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의 확실한 용서와 용납에 베드로는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 들일수가 있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미워하고 혐오하던 어떤 사람도 자기를 용서하고 용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로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하시니 누가 정죄합니까?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니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떻게든지 자기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국민일보에 나온 기사를 보니까 정신과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절반정도는 그들이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면 퇴원할 수 있는 환자들이라는 임상보고가 나왔습니다. 절반정도의 정신병 환자들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미움과 원한과 복수심을 가진적이 있고 현재에도 그러한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음에 자리잡은 미움, 원한, 좌절감, 자기 학대 등은 그 무엇으로도 고칠수가 없습니다. 이와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으면 삶이 어둡고 부정적이 되고 불행합니다. 이와같은 마음의 쓴물은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이 치료되고 해결되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이 용서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와서 그 찢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바라보고 거기에서 내가 내 이웃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용서 속에서 자기의 잘못조차 용서하여 자기 혐오해서 벗어나면 비로써 마음이 젓과 꿀이 흐르는 물댄 동산 같이 되어서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 속에 살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죄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원한과 미움을 품고 있으면
이것은 무시무시한 독을 품어내고 자기를 파괴하고 좌절과 절망케 합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자기를 용서하고
그 결과 사랑이 넘쳐 나서 변화와 행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용서해 보라, 그리하면 용서하는 기쁨을 알리라
2002-09-04 16:09:44
마태복음18:21-35절
조선조 역대 임금 중 배포 좋기로는 성종 임금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언젠가 역적 모의를 하다 잡혀온 일당을 벌은커녕 그냥 돌려보낸 일이 있다고 한다. 신하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였다. 성종 임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괴수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하며 일어 가로되"네 인품이 이 자리에 맞기만 한다면 서슴치 않고 물러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의 인품을 시험하기 위해 함께 거처하기를 권했다. 신하들은 임금님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임금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난처하게 된 것은 모의를 했던 괴수였다.
송구스러운 나머지 그는 벌벌 떨기만 했다. 며칠이 지난 후 성종 임금이 그를 불러 "넌 아무래도 임금 될 그릇은 못돼네 그러니 다시 모의를 해 보라"고 하면서 그를 보냈다. 궁을 떠난 후 괴수의 소식은 후세에 전해진게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곤장을 맞은 것 보다 더 혼이 났을게 틀림이 없다. 역적을 용서한 성종의 도량이나 배포야말로 정말 대담하다. 미련 없이 베푼 완전한 용서의 모습이다.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데는 백번의 형벌보다 한 번의 용서가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한 해를 보내는 12월4번째 주일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 주라는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사람을 너그러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포섭하기를 힘써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일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용서하기를 기뻐하고, 또한 용서를 기쁘고 즐겁게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흔히 자기의 허물에 대해 충고를 받으면 화를 내어 면박을 주거나 마음속에 앙심을 품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곱 번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 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용서를 악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불교나 유교와 다른 점은 기독교가 속죄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즉 죄를 용서해 주는 종교입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은총이 바로 복음이며 기쁨의 소식인 "굿 뉴스"(Good News)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엄청난 은총 속에서 복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은총 속에서 기쁨을 얻고, 그 은총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누가 나에게 범죄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 번쯤 용서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용서는 무한적인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본문의 비유를 들러 주셨습니다.
성서에는"용서해 주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제일 힘든 일이 남을 용서해 주는 일이요,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용서함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남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는"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하는 기도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습니다. 용서하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변이나 가족들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그 일로 인하여 기도의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아 괴로워하며 고통받는 성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은 용서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주홍 글씨"라는 소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서 이넨스에일'라고 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이분은 목사요, 지성인이요, 교양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범죄했습니다. 그것도 남의 여인과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을 격려하고 설교했지만 자기 마음은 평화롭지 못하고 회개도 고백도 없기에 남도 용서할 수 없었던 지극히 형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1.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죄의 용서는 심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연약하고 부족하며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우리가 과연 자신이 손해보고 비싼 대가를 치루면서까지 과연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연약한 우리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남을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 일은 내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기꾼에게 자기 재산 수십억 원을 사기당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갈곳이 없어 처 자식들과 함께 시멘트 바닥으로 나앉게 되자 그 사기꾼을 죽일 생각이 듬.
그러나 교회에 찾아와서 "내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저도 용서할 수 있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한 뒤 마음의 평화를 찾아 비록 자신은 시멘트 바닥 위에 있으나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용서와 이해를 우리가 먼저 시도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내가 먼저 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용서합시다.
내 형제, 내 남편, 내 아내,---무조건 용서하십시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항상 불안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덮어주는 사랑으로 이미 용서함을 받 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서로 용서하며 삽시다.
벧전4:8절에 보면"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영원한 고통과 저주를 받아 죽었어야 마땅할 죄인들이었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 그의 피로 구원받아 속죄함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를 발견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5:11절에서"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오셨고 사람이 예수를 못박은 것이 아니라 죄가 예수님을 못박은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처럼 크게 죄를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끓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며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와 사망을 위하여 전신에 못을 박으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지은 죄를 위해서는 가시관을 친히 쓰셨고. 못된 행위로 인하여 지은 죄를 위해서는 양손에 못을.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서 지은 죄로 인하여는 양발에 못을, 배로 지은 죄를 위하여는 옆구리에 창을, 입과 눈으로 지은 죄를 위해서는 침뱉음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3:13절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씀하셨으니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듯.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했듯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듯이,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도리어 아들로 대신하듯이 우리도 용서할 수 없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을 용서하고, 용서하는 자의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하면 용서하는 자가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용서한 사람은 용서받은 사람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나의 마음에 희락과 화평이 찾아 옵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악한 요소는 내게 찾아와 화평을 잃게 합니다. 마음의 질병이나, 육신의 질병 중 가장 큰 것은 미움에서부터 싹트게 됩니다.
증오가 쌓이게 되면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증오와 미움, 분노가 격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못하므로 혈액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어 결국 갖가지 질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숙한 인격은 남을 용서하여 인격의 조화를 맞추는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② 능력을 얻습니다.
용서하는 자에게 능력 있는 성령이 오며 기도의 응답이 속히 임하게 됩니다.
마가복음11:23-24절에"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하시고는 계속해서 25절에"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맥아더 장군은"남의 과오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격언에"남을 용서하기에 인색하지 말라, 무슨 일에든 남을 용서할 마음의 여유를 간직해야 한다.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의 생활은 늘 미움에 차 있고 평화를 누리기 어렵다.
내가 남을 용서하고 회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하나님은 은혜와 기도의 응답도 빨리옵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기도의 응답을 기디리는 자는 반드시 남을 용서하고 내 자신의 교만이 깨어질 때 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대부흥사'헨리 모어하우스'가 아직 젊었을 때 카나다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첫날의 집회결과는 너무나 실망할 정도 였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집회할 때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대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곳 카나다에서의 집회는 연속적으로 실패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낮과 밤으로 무릎을 꿇고 내심으로 반성하며 부르짖었습니다"아 주님, 어찌하여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의 성령의 역사가 어찌하여 이곳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던 중 이튿날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벽에 나붙은 큼지막한 광고판을 보게 되었습니다."영국 최대의 부흥사, 헨리 모어하우스를 들으시라!" "옳다! 그는 속으로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고 부르짖고는 즉시 주최측에 가서 형제들 이래서는 안됩니다.
저를 최대의 무엇, 최고의 무엇이라면서 광고를 내셨더군요, 그러니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고 소멸케 했으니 이것은 형제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귀하신 분이십니다.
주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오직 그의 영광스러운 복음만을 전할 은혜를 입은 천하고 우직한 종일 뿐입니다.
마침내 그 광고판이 치워지자 축복은 임했고 은혜가 충만하여졌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은 은혜와 기도응답의 큰 원수인 것입니다.
용서함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다른 사람뿐 아니라 원수와도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천사에게서 사랑을 뽑아버리면 마귀가 되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뽑아 버리면 동물이 되고, 남편과 아내에게서 사랑을 뽑아 버리면 원수가 되고, 예수님에게서 사랑을 뽑으면 목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내가 잘했든지 못했든지 나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하나 둘은 있습니다. 괜히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할 것도 이상하게 비딱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통명 스럽게 말하기도 하고,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여러운 일이지만 원수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큰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은혜와 은사를 주시어 자기편으로 만들어 열두 제자보다 더 멋지게 들어 쓰셨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마5:L23-24).
마틴 E.. 마티는"책을 쓰거나 일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참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용서하는 자가 용서함을 받고 참 친구와 협력자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4. 용서와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길에 버스정류장을 자나다가 같은 사무실 여직원을 보고 차를 세웠다. 퇴근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 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방향이 같기에 불러서 태워준 것이다.
남편이 한 젊은 여성을 승용차에 태우고 가는 것을 본 부인의 친구가 급히 전화를 했다. 친구의 전화를 받은 부인은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고, 그날 저녁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대판 싸웠다. 그날 밤 부부는 끝내 화해하지 않았고 그렇게도 긴 밤을 처음 경험했다.
날이 밝았다, 그러나 아내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남편은 아침식사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집을 나갔다.
아내는 늘 하던 배웅도 하지 않았다. 둘은 처음으로 무척 외롭고 슬펐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다음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남편의"미안해!"라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여러분! 불신보다 더 나쁜 것은 불화요 불화한 다음에 용서하지 않는 일입니다. 싸움보다 더 불행한 것은 화해를 요청하지 않는 완고함입니다.
5. 원한은 복수를 낳게 되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된다.
옛날 제(濟)나라에 "이사"(夷射)라는 대신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의 초대연에 참석했다가 잠시 바람을 쐬고 있는데, 형별로 몸이 불구가 된 문지기가 남은 술이 있으면 한 잔 달라고 부탁을 했다.그러나 이사는'문지기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술을 달라느냐'고 호통을 쳤고, 이사가 돌아가자 문지기는 처마 밑에다가 마치 소변을 본 것처럼 물을 뿌려두었다.
이틑날 이를 본 왕이 문지기에게 호통을 쳤다 '감히 어느 놈이 이곳에 소변을 보았느냐?' 문지기는 황송하다는 듯 대답했다. "잘 모르겠사옵니다만, 어젯밤 이사 대감께서 거기에 계셨습니다" 이 한마디에 이사는 죄 없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한비자(漢非子)"
이렇게 원한을 산 경우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작건 크건 남의 원한을 사면 무서운 보복이 기다리는 수가 많습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심하게 모욕당하거나 생활의 터전을 빼앗길 정도로 타격을 받으면 무서운 칼을 갈며 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익을 위해서 쉽게 배신하는 사람은 원한을 사기 쉽다"원한이 골수(뼈)에 사무친다"는 말이 있고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 서릿발보다 무섭다"고도 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을 울리면 자기도 울게 되는 날이 오는 법입니다.
수많은 복수극은 원한에서 시작되는 것이 많지만, 원한을 살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은 복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남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복음성가 '심령이 가난한 자"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내 암의 평화와 행복을 차지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마음의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능력을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용사하면 모든 관계가 회복됩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성숙한 인격자가 됩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마음의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자가 용서함을 받고 참 친구와 협력자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자가 받는 축복이 놀랍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베푼 사람이 기도하면 응답이 속히 옵니다.
용서하면 원수가 나를 돕는 내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면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내 영혼이 살기 위하여 용서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나의 큰 죄를 용서하시며 더욱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용서를 실천하시다가 마지막 날에 미움과 원수가 없는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할렐루야 찬송 부르며 영생 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용서해 놓고 기다리신다
2002-08-20 11:42:13
2002.08.11 // 누가복음 15:11-24
I. 예수님의 자기 변호 비유
역사상 많은 크리스챤 화가들이 돌아온 탕자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이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입니다. 높이 3m 넓이 2m 크기로 그린 수채화인데 아버지와의 만남의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신발이 다 헤어져 왼쪽 신발은 아예 신을 수 없어 벗겨져 있고, 오른쪽 신발은 다 닳아서 밑창은 없고 구멍이나 발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은 없고 남루한 속옷 한쪽을 걸치고 있습니다. 고상함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은 마치 죄수나 범죄자처럼 박박 깎아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마치 왕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가슴에 왼쪽 귀를 대고 안겨있지요. 아버지는 빛나는 황금 팔찌로 온 팔을 장식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냄새나는 아들을 따뜻이 감싸안고 마냥 행복해 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그렇듯이 많은 주경가들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본문의 주인공으로 삼고 「탕자의 비유」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아들을 탕자나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잃은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아들이 살아왔다" 죄인, 탕자 배신자가 아니라 잃은 아들로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두 아들 중에 주인공을 찾는다면 오히려 집에 남아 있던 큰 아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깨우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놀고 죄인을 용납하는 자라고 비난할 때 예수님 당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즉,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자기 변호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용서해 놓고 기다리신다」입니다.
지난 주일 은혜의 영성 여섯 번째 - 이겨놓고 싸운다,
오늘 은혜의 영성 일곱 번째 - 용서해 놓고 기다리신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용서의 비유라기 보다는 용납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된 「은혜의 영성」 씨리즈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발견된 나의 영광스러운 신분이 무엇인가? 나의 새로워진 신분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 은혜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가? 신(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많은 오해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죄사함받고 용서받고 용납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I. 잘못된 하나님 아버지 개념
여러분, 혹시 놀이공원이나 복잡한 길에서 어린 자식을 잃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자식과 부모 가운데 누구의 마음이 더 아플까요? 애간장이 녹고 가슴을 태우는 쪽은 길 잃은 자식이 아니라 잃어버린 부모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본문의 말씀은 아버지의 심정을 나타낸 말입니다.
집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결단한 후에 아버지를 만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되풀이 준비도 해 두었습니다.
① 정말 아버지가 나를 받아줄 것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② 세상에서는 어떻게 말을 하고 상대를 어떻게 이해시키고, 어떻게 감동시키느냐 여하에 따라 일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더라. 말로 설득 여하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성취로 업적으로 공로로 율법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오해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준비한 대사, 시나리오를 첫 대사를 해보는 신인 배우처럼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큐! 신호가 떨어진 것처럼 준비한 대사를 읇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 다음 성경 말씀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 준비한 첫 문장도 채 맺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리고 급하게 종들을 부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사실 돌아올 때는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주저리 주저리 여러 말들을 준비했더랬는데 - 아버지에겐 그 말들이 아무런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왔다.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 중요했습니다.
③ 시나리오를 준비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자식은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크게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한 것도 그 유산을 제멋대로 처분한 것도 그 재산을 다 날린 것도 얼마나 끔찍한 잘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배신에 대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용납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도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분의 성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어떤 분인가? 하나님 개념은 사람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왔는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미지에 따라 그의 신관이 결정된다."
즉, 어떤 아버지 밑에서 살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의식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마틴 루터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주 호되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진노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루터가 "하나님을 꼭 아버지라고만 부르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고도 부르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개념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하나님을 「악덕 기업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고용주 정도로 생각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을 종업원으로 생각합니다. 일을 조금 하고도 감시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늘 생각합니다. 야단 맞지 않을 정도로 일하고 늘 눈치만 살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종업원으로 받아 준 것이 아니고 상속자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덕 기업주가 아니라 우리를 가정으로 자녀로 받아주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재벌의 아들이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일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 보상이 다릅니다. 7-8년 일했는데 그 재산이 몇 조원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분은 이 세상의 재벌 정도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부요로움은 조, 그의 아들이 재벌의 아들이었던 몇 조원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좁쌀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 개념에 대한 두 번째 오해, 하나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나를 지켜보면서 저 놈이 언제 실수를 하나 지켜보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다 실수를 합니다. "너 또 실 수 했구나. 너 언제 철이 들래?" "내 그럴 줄 알았어. 너는 그것 밖에 안되니까!" 하나님을 심판자, 감시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사람관계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생각해서야 어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겠습니까? 비복음적인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을 혹독한 심판자로 이해한다면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주어지는 풍성한 삶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 개념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감히 내가 가까이 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왕처럼 가끔 나에 대해 보고를 받는 분 정도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구체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작은 일은 의논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보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베소서 2장 13절을 통하여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여기 "가까와졌다"는 원래의 뜻은 그분의 품안에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분은 손바닥에 우리를 새겨서 매일같이 들여다 보고 계신다구요.
III.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개념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무조건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돈을 어떻게 탕진했는지, 지금까지 불만이 무엇이었는지 묻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란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 오너라. 온전히 용서해 버립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이제는 나의 풍성함이 모두 네 것이라. 제일 좋은 것, 제일 좋은 것 -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락지를 끼워라. 옛날 가락지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의 인감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권세를 돌아온 아들에게 맡겨버립니다.
·신발을 신겨라. 종이 아니라 온전한 아들로 용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말 성경에 생략된 단어 하나가 원문에 있습니다. 영어의 quick 이란 단어입니다. 빨리, 속히!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속히 입혀라! 급히 잡아라! 소리쳤을까요? 이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 그분은 우리가 완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용서해 놓고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네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 하는가를 보아가면서 구원시켜 주마"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용서하기는 한다. 그러나 네 잘못은 댓가를 치러야 할게야." 엎드려 뻗쳐 푸샵 100개, 반성문 100장 매일같이 100날 동안 써와. 이런 것 없습니다. 무조건 용납하십니다.
2. 하나님은 나를 볼 때마다 늘 사랑으로 웃으시는 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는 늘 심각하고 우울한 일이 많아서 웃으시는 하나님을 이해 한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모든 껄끄러운 것들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본문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기쁨에 너무 흥분이 되어 손익계산을 따질 겨를도 없습니다. 입혀라. 잡으라. 신기라! 퍼부어 주십니다. 아버지는 흥분한 나머지 들에 나가 있는 큰아들 불러올 생각조차 못합니다. 아버지는 그 기쁨을 혼자 기뻐하지 않으시고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함께 기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면 한 가족, 한 아들이 내 품에 돌아오면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천군 천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오늘날 교회의 과제가 있다면 이처럼 웃으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 기쁨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병들고 날로 차가워져만 갑니다.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가정, 교회, 사회, 정치엔 은혜의 주님이 아니계십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만 갑니다. 우리는 웃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이 아침 새롭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3.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 대해 실망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실망이란? 기대치에 못 미칠 때 오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가 있어서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너,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줄 알았어. 나 너에게 실망했다. 나도 이제 너를 포기하고 말겠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도 아니시지만 나에 대하여 실망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나를 절대로 포기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약성경에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에 유대민족은 참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태양신을 섬기는가 하면, 각종 우상숭배와 매춘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암몬을 거쳐 요시아 시대를 맞이합니다. 뜻 있는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풀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스바냐 선지자가 나타나 심판과 재앙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절망과 낙담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어두운 상황, 암울한 메시지 속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선포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너희들의 행위를 보면,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시면 그 메시야가 너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다 짊어지고 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네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나는 너를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님의 안경으로 너를 볼 것이다. 용서의 안경으로 너를 볼 것이다. 예수님 보혈의 피의 안경으로 너를 바라볼 때에 나는 너 때문에 기뻐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내가 될 것이다. 할렐루야.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기뻐하리라.
IV. 공의·자비·은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영광스런 신분을 발견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이 용서의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는 뿌린대로 거두고 심은대로 모든 "공의"와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해 움직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엔 은혜의 원리, 하나님의 영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영성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집을 나갔던 아들은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서 자신은 공의대로 보면 아들의 신분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품군의 하나로, 종으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공의입니다.
공의란, 내가 잘못한 행동에 대하여 마땅히 벌을 받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용서받았지만 죄의 댓가는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복음 밖의 생각입니다. 십자가 밖의 생각입니다.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어리석은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공의를 주장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공의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 아니고 자비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대문을 닫아 걸고 종들을 시켜 몽둥이로 내어 쫓으라. 그래야 옳지만 그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어떤 젊은 여 신도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만했습니다. 교만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얼굴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목사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제가 얼굴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여전도 회장을 무시했고. 얼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님이 안경을 닦고 보니 얼굴이 별 볼일 없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교만죄가 아니고 착각죄입니다."
이런 비슷한 죠크가 영어에 있습니다.
한 여인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이 제법 잘 나왔는데 막상 본인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씬한데 좀 통통하게 나왔고, 주름도 없는데 주름살이 나왔고, 머리가 매끈한데 흰머리가 있는 것 같으니까 이 사진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사진사가 보니까 아주 잘 나온 사진입니다. 정확히 나왔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에게 필요한 것은 공의가 아니고 자비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드리지요." 흰머리를 지워버렸습니다. 주름살을 펴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쁜 사진으로 만들어 뽑아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돌아온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의가 아니고 자비입니다. 만약 우리가 공의를 따른 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가야 하지요. 지옥 가야 할 우리가 지옥가지 않는 것 이것이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반쪽 자리 구원에 불과한 겁니다. 죄사함 받고 지옥 가지 않는다. 이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자비 다음에 나타나는 축복이 은혜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몽둥이 대신 송아지를 잡아라. 새 옷을 입혀라.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그래 네가 보따리 있어야 살지 없는 보따리까지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은혜라고 하는 것이지요.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차를 몰아 가는데 시간이 좀 늦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슬쩍 중앙선을 넘어 추월합니다. 또 길이 좋으면 과속을 합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교통 경찰차가 달려왔습니다. 이때, 스티커를 발부하고 벌금을 물고 감점을 받습니다. 이것은 공의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교통경찰이 "목사님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도 교통법규는 지키셔야 합니다. 스티커는 끊지 않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그리고 깎듯히 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자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목사님 너무 급하신 것 같은데 제가 에스코트를 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삐용~ 삐용~ 앞질러 요리조리 갑니다. 경찰차 뒤를 따라갔더니 목적지에 무사히 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교통 경찰이 나를 쳐다보더니 "목사님 얼굴이 피곤해 보입니다. 이걸로 보약 사 드십시오." 봉투를 하나 줬는데 20만원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의로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비에 머무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없는 보따리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곤한 우리 인생 보약 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V. 아직도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져가 모두 소멸시키셨습니다.
골로새서 2:13-14에 보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도다"
우리의 몇 가지 죄가 사함받았다구요?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가 종이에 일일이 씌여져 있습니다. 수천 수만 페이지에 우리의 모든 죄가 씌여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몇 개를 선택적으로 골라서 용서하셨다구요? 아니요. 모든 죄를 소멸하였도다. 불에 태워버렸도다.
우리가 지었던 몇 가지 중요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구요? 아니요. 우리의 모든 죄를. 과거에 지은 여러분의 모든 죄, 현재 짓고 있는 모든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못 박았느니라. 할렐루야.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사함 받았다. 이해가 안된다구요.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 속에 묶어둘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의 제약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완성되어졌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의 모든 죄는 이미 미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 죄가 사해진 그 시점으로 보면 내 모든 삶은 모두 2000년후 일어나게 될 미래의 사건들입니다. 과거의 모든 죄, 현재의 모든 죄, 미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할렐루야.
시간, 장소, 상황 -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내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시절, 부족한 저는 사무엘처럼 교회에서 주로 일과를 보내고 거기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하나님에 대해 반항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도둑이 들기도 했고 학교 행정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원망했고 하나님께 항의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지도 않았고 짤막한 시간이지만 폭력 써클에 가담했습니다. 학생의 도를 넘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야지. 어느날 나를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많이 거꾸로 달려와 있었습니다.
어떡하나?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거기 내 곁에 와 계셨습니다. "아들아, 이제 불만을 다 토했니. 이제 화가 멈추어졌니. 화가 끝났니." "네. 하나님 제가 참 나쁜 사람이지요. 하나님 앞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나는 너무 많이 달려왔어요. 한 3년쯤 회개하고 내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 다음에 어린 시절 하나님과 약속했던 신학교에 가 목사가 될래요." "아니다. 현재의 네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아파하고 불만에 가득찬 네 모습 그대로, 나는 인정하고 받아주기를 원하노라. 아들아 내 손 잡아라. 나와 함께 가자." 그래서 그 날로 신학교에 원서를 쓰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 죄의 법,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지금부터 57년전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얻었으면 일본나라 법에 우리가 메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해방을 얻었습니다.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본문의 둘째 아들은 돌아올 때에 본래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종으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아들로 받아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송아지를 잡아라.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동네 사람 불러 모아라. 잔치를 벌여라.
도무지 염치가 없습니다. 분명히 잔치의 주인공은 나 자신인데 그 앞에 버젓이 고개를 들고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면이 없습니다. 받아준 것만도 감사한데 집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나한테 준다. 내가 무슨 염치로 그것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래서 거절하는 것 그것이 은혜인줄 알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있는 그대로 아버지가 주는 사랑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받아주시고 아버지의 풍요로운 세계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염치없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복음이라고 하면 주님이 날 위해 예비해 주신 은혜라고 하면 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할렐루야.
이 시간까지도 만약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살아왔다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편협된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다면, 하나님의 그 무한한 은혜를 염치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탄은 거기에 붙어 앉아 나를 묶어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히 하나님을 수용하고 용서를 인정하십시다. 그분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십시다. 나는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힘으로 살아간다. 할렐루야. 선포할 때에 여러분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부요로움이 바로 여러분의 몫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은혜의 영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은혜의 영성, 은혜의 삶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 용서의 힘 -
2002-06-13 19:58:39
마태복음 18:21~22 석원태 목사
보통 ‘매력’이라는 말은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말의 매력, 행동의 매력, 아니면 미모의 매력, 삶의 매력, 사상의 매력 등이 함께 연결되어 관계하고 있습니다. 2000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세상에 왔다가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한 예수를 왜 그토록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를까? 아니 그를 위하여 순교에까지 이를까? 그것을 우리가 일반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에게는 ‘매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에게는 우리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사 53:2). 그런데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예수야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속에 주어진 날(시간)도 주를 위하여, 식음(食飮)도 주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4:6~8).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할 정도입니다. 그것은 예수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전 삶에 ‘총체적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에게 있는 용서의 힘은 실로 위대한 매력입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제자 중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하고 그 이상은 말라고 가르쳤던 것에 비하면, 베드로의 이 질문은 여유를 갖고 나타낸 것처럼 여겨집니다. 주님은 형제가 나에게 범한 죄에 대한 교훈을 세 가지 경우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합치면 ‘용서’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Ⅰ.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15~20).
제일 먼저 나와 그 사람, 곧 범죄한 형제간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가 회개할 때에 용서함으로, 형제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에는 만약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참케 하라고 하였습니다(마 18:17). 그때에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 두세 사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공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입니다(마 18:17). 그리고 교회의 공적인 권고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마 18:17). 물론 이 말도 그를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이 그를 내어버림이 아니고, 그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게 하고 회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에는 ‘회개’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Ⅱ. 용서의 정도는 무한, 곧 얼마든지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마 18:22).
형제가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겠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하였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수학적으로 풀이하면 490번이 됩니다. 수학적으로 해석을 한다 해도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형제가 우리 개인에게 490번이나 실제적으로 잘못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490번을 용서하려고 목표를 정하고 용서하고 용서하는 동안 490번이 되기도 전에 그는 성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490번이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490번보다 더한 무한의 용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수학 이상의 내용이 숨어 있는 말입니다. 이 무한의 용서에는 ① 즉각적인 용서 ② 많은 용서 ③ 무조건적 용서 ④ 완전한 용서 ⑤ 영원한 용서 ⑥ 다시는 기억지도 아니하는 용서 ⑦ 축복을 비는 용서, 곧 잘 되기를 바라는 용서 ⑧ 중심으로 하는 용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까?
1.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죄의 권세’는 예수 자신에게만 있는 생명의 힘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고 하였습니다. ‘예수’란 그 이름의 뜻이 용서의 은총이요, 표징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고 하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였습니다. 2. 주님께서 그 죄인에게 용서받을 믿음과 회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초자연적 능력의 은총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위대한 사죄의 표적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과 회개도 주님 자신께서 은혜와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행 2:37, 14:27, 15:7, 엡 2:8). 그러므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는 벌써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 자신의 사죄의 기도가 공효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의 효능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사죄 기도를 도전하는 어둠에 빠지는 자가 됩니다.
4. 성령님의 간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어둠에 빠지는 자입니다. 5. 주기도의 응답을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일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분부수행이라는 차원에서 한 말입니다. 주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Ⅲ. 용서하지 않으면 내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마 18:23~35).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부채를 다 탕감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약 6천만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빚을 탕감받고 나간 그 사람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 한 사람이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 갚을 것이니 참아달라고 강청하는 그 사람의 요청까지 거절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았던 동관들이 주인에게 이 사실을 직고하였습니다. 그때 그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 18:32~34)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고 하였습니다. 어떤 임금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마지막 날에 회계(계산), 곧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8:23). 바로 자신은 주인에게 평생 갚아도 못다 갚을 빚과 같은 죄를 용서받고서도,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잔인한 행동입니다.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아니 그것은 사실상 큰죄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받을 죄로 남아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잠언 19장 11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4장 16~17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5장 21절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 중에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14절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의 원수로 인하여 난로의 불을 뜨겁게 지피지 말라. 오히려 그 불이 너 자신을 불태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마음에 복수의 불을 피우는 자는 그 불 때문에 자신이 망하고 말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예수에게 있는 매력이 무엇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힘이 그 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 분에게만 사죄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 분을 좋아하고 따르며 사랑하는가? 그 분만이 우리에게 용기와 힘과 미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그 분의 용서가 없었다면, 베드로가 어떻게 복음의 사도가 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었겠습니까? 주께서 그를 돌아보실 때 그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 다시 그를 찾아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복직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 분의 이런 용서가 없었다면 어찌 그가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꾸어 놓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하여 한평생토록 예수만 위하여 사는 데에 자신의 생존의 목적과 의미를 걸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한평생토록 그분에게 용서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매력은 용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매력은 용서에 있습니다. 그 용서 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용서를 받은 사람들만이 예수를 위하여 큰 일을 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의 큰 용서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용서하라는 예수의 분부를 실천하는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형제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또 그에게 용서받은 형제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에게 영원에 이르는 진노의 죄, 사망의 죄를 용서받은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잘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요, 겸손과 온유의 공동체가 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힘! 바로 그리스도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던질 수 있는 생명의 매력입니다. ‘남의 죄를 감추어 주어라.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 용서해 주리라.’고 하였습니다(탈무드). ‘용감한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안다. 겁쟁이는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란 어리석은 사람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글래드스턴). ‘용서는 승리 중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싸이러스). ‘용서는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푸볼리우스).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면 무한한 행복을 맛볼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을 정죄하거나 벌할 권리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톨스토이). 다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자신의 매력이었습니다. 그에게 무한대의 용서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그를 위하여 감격적인 삶을 바친 족적들이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입니다. 교회가 이 아름다운 예수의 매력을 발휘할 동안, 교회는 이 세상 중에 가장 위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힘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의 용서의 표적은 바로 예수 자신이 지신 죽음의 십자가가 아닌가! 그 십자가의 용서는 죄인을 향한 예수의 자기 사랑의 결과가 아닌가! 바로 이것은 교회의 교회된 매력이요, 표적이 아닌가! - 아 멘 -
서로 용서하십시오
2002-02-25 11:22:42
엡 4:25-32 <2002-02-17>
요즈음 우리는 교회적으로 목장교회로 전환하는 격변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장교회 유형가운데는 특성교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운동사에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가운데도 연예인교회, 체육인교회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교도소 교회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만일 거짓말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거짓말쟁이 교회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화 잘내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분노교회가 존재한다면```도적질 잘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도둑교회```혹은 더러운 말을 잘하는 입이 더러운 사람들의 교회가 존재한다면```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에베소 교회는 이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거짓을 버려라, 분을 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충고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것이 에베소 교회만의 실상일까요? 오늘 우리교회 내에는 정말 거짓말하는 교인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화내는 교인들, 심지어 도둑질하는 교인들, 더러운 말을 하는 교인들이 없을까요? 있다면 우리교회나 에베소 교회가 다를바가 없어요.
문제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과연 이런 교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이들의 궁극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의 '궁극적인 변화'(교리적으로 '영화'라 일컫는다)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한순간에 변화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믿음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기독교 교리에서는 이 중간과정을 '성화'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변했지만 우리의 변화는 아직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수하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바울사도는 이런 모습의 성도들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계속 벗어버리며 동시에 새사람을 계속 입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궁극적인 변화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변화의 도상에서 드러나는 변화되지 못한 서로의 모습에 대하여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서로를 향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이 용서가 제일 요청될 곳이 저는 목장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고 살 때에는 사랑할 필요도, 용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삶을 열고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의 사소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앞으로 목장교회에서 반드시 이 과정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상처 많이 받는 곳이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렇다고 가정 무용론을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가정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곳입니다. 영적인 가정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정은 용서가 넉넉한 가정입니다. 가정이 서로를 향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가정은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는 용서가 넉넉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목장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32절이 그 대답입니다.
1.서로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32절의 말씀은 용서를 실천하기 위한 단계적인 삶의 태도를 명하시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첫째가 서로 친절히 대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의 어떤 사람이 있다해도 우선 일차적으로 그를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친절이란 희랍어 단어는 매우 독특한 단어가 씌어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크레스토스"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닙니까? 비슷한 말 가운데 희랍어로 "크리스토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어느 초대교회의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어느 문서에 보니까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행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일에 상관없이 그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늘 링컨에 대해 악의에 찬 평가를 하고 심지어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스탠튼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런 자리에 임명할 수 있는냐고 항의했을 때 링컨은 웃으면서 단 한마디 "그 자리에는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친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2.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둘째는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은 이 단어를 '부드러운 마음'(tender heart)을 가지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번역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번역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Phillips번역은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가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가 내게 행한 분통터지는 말이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십시오. 그를 둘러싼 삶의 역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여 보십시오. 분하고 억울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렇게 대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의 참모였던 아히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의 글을 의미있게 읽은적이 있습니다. 그가 처음 재판정에 나설 때 그는 이런 인간은 만천하가 주시하는 가운데 극형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재판정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고 그의 일생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하면서 이 기자는 놀라운 자기 내면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동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해는 용서의 열쇠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를 이해하게 해달라고 먼저 기도해 보십시오.
3.주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용서가 제일 힘들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주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제시하는 방법이 아닙니까.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5:1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같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 보시면서도 그리스도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 하셨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아직도 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용서를 가능케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인간됨의 가치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실 만큼 고귀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자 한다면 내가보는 시각으로 그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그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이웃을 향한 험담을 조심할 이유를 말할 때 바로 그런 이유를 들고 있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야고보는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3:9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를 싫어한다든지 미워한다든지라는 나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내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유서 깊은 미국의 기독교 명문인 휘튼대학의 총장을 지낸 분가운데 허드슨 애머딩박사 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하는 후원 이사회로부터 심각한 사임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자유화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머리가 길어지고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물을 드린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점차 학교의 후원자들이 감소하고 학교는 재정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몇차례 학생들에게 호소했지만 학생들의 행동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총장의 마음속에도 학생들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회가 채플에서 열리게 되었고, 총장의 권면 시간이 되자 그는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긴 학생하나를 강단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자네와 자네의 친구들은 우리학교의 후원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네. 그리고 이 긴 머리 때문에 나와 내 동료 교수들이 그동안 심적인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리려 하네. 그러나 내가 자네를 이 앞으로 불러낸 이유는 자네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네. 나와 나의 동료 교수들은 우리가 받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후원자들이 자네를 바라보는 식으로 자네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네. 이 긴 머리와 상관없이 자네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진리를 향한 열정을 갖고 있음을 믿고 있다는 것--우리는 자네들의 머리의 길이와 상관없이 자네들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라네." 학생들은 일어나서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응했고,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깍고 기도하는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고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우리의 목장교회가 우리 지구촌교회가 참으로 용서를 배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의 비전과 사명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용서받은 자의 용서
2002-03-11 11:08:02
마태복음 6:12 // 2002. 3. 3.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 중 하나가 있다면 용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 는 눈'이라는 철저한 보복과 앙갚음이 재연되는 한, 그 어떤 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어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신들의 공통점은 용서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천상에 있는 신들임에도 계속 전쟁만 하는 것입니다. 보복과 복수만 계속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는 오직 다툼과 분쟁과 상처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천국은 완전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용서의 신학을 본질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입니다.『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누가복음 23:34)
영국에 유명한 웰링턴 제독이 있었습니다. 이 웰링턴 제독이 한번은 상습적인 탈영병 부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직전이었습니다. 웰링턴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보았다. 나는 너와 상담도 해보았다. 나는 너를 처벌도 해보았다. 나는 채찍을 들어 너를 때려도 보았다. 그리고 노동도 시켜보았다. 나는 너에게 굉장히 심각한 벌도 주어 보았다. 그런데도 너는 돌이키지 않았고, 새로워지지도 않았다. 별 수 없이 너는 죽어야 한다."
이 때 지혜로운 부하 한 사람이 웰링턴 제독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이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제독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각하는 이 사람을 용서해보신 적이 없습니다."
이 지혜로운 부하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사병을 무조건 용서해주었습니다. 그 후 이 사람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탈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런 부하가 되었습니다.
용서가 가져온 삶의 변화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용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독일의 훌륭한 신학자 F.B. Myer는 오늘 이 본문을 가장 아름답게 해석해줍니다.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원문도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리고(And),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즉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Give(주옵시고), 그리고 우리 죄를 Forgive(용서)해 주옵소서.
Alexander Maclaren은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빵이 필요하도록 만드셨듯이, 우리는 스스로 용서가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아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 용서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 여섯 번째 원리는 단순히 내가 용서받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먼저 내 가슴에 아픔이나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부터 드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기 전에, 먼저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용서하는 기도가, 곧 용서받는 기도입니다.
오늘 이 기도의 본질은 『용서의 서약기도』입니다.
주님, 제 평생, 날마다, 매일같이 용서하는 삶이 가능케 하옵소서! 아멘!
1.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인식하며 살자
저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용서해보셨나요?' 라는 질문 대신에, "당신은 용서받아 보셨나요?"
용서받은 감격과 기쁨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용서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용서해야지, 이렇게 도덕론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얼마나 큰 용서의 은총을 받은 자인가를 먼저 회상하면 그의 인격수준이 달라진다는 원론적 메시지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Andrew Carnegie는 주위에 자기보다 훨씬 탁월한 인재들을 수없이 많이 두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처럼 도량이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용서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그는 회사의 공금을 가방에 넣어 전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번은 엄청난 거금이 든 가방을 가지고 기차를 탄 그가 열차 난간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가방이 없어졌습니다. 졸다가 차창 밖으로 가방을 떨어뜨린 것이 분명합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충격에 카네기는 기관사에게로 뛰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열차를 후진시켜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턱도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순박하던 때라, 카네기를 딱하게 여긴 기관사는 몇 킬로미터 정도 열차를 후진시켜주었습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밖을 주시하고 있던 카네기의 눈에 문득 개울가에 떨어져 있는 낯익은 가방이 들어왔습니다. 카네기는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며 열차에서 뛰어내려 그 가방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 아찔했던 기억을 발단으로 해서, 카네기는 평생 실천에 옮길 중요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젊은 사람이 아주 결정적인 큰 실수를 해도, 그가 사기성을 가지고 일부러 한 일이 아닌 이상 용서하고 품어주자. 사람이 살다보면,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돌연히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법인데, 그것 때문에 평생의 꿈이 좌절되는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자인가요?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크고 높고 깊은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엡 3:18-19).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은 만큼만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받았으니,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과연 용서받은 감격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큰 사죄은총으로 용서받은 자인가를 이런 비유로 설명하십니다(마태 18:21-).
우리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6천만 날 품삯입니다. 즉 16만 4383년 동안 벌어야 되는 거액의 돈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부채를 다 면제받은 것입니다. 종신형과 사형에서 특별사면 받은 것입니다.
즉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인데, 십자가의 보혈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에베소서 2:1).
당신은 과연 이런 사죄은총의 감격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용서만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가 마흔도 안되었는데 고혈압으로 쓰러졌습니다. 평시에 화를 잘 내는 성격 탓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건강의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화를 낼 때 입을 꼭 다물고 화를 내면 혈압이 올라갑니다. 피가 위로 몰립니다. 그래서 고혈압이 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낼 경우에는 이빨이 보이도록 하십시오."
영어로 이런 간단한 표현이 있잖아요. "Anger brings cancer." 분노의 감정이 암을 유발시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당신에게 어떤 상처와 쓴 뿌리 때문에 분노의 감정이나 원한 감정이 당신의 행복을 공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우리가 어떤 분노나 원한의 감정을 느낄 때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원한의 감정을 반드시 툭 털어놓는 식으로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젠가 단 한번이라도 내 남편에게 마음의 응어리를 훌훌 털어놓고 말거야.' 효과고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원한의 감정을 다 억눌러서 드러나지 않게 숨겨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처는 숨길수록 쓴 뿌리가 더 깊어집니다. 종기 위에 반창고를 붙여서는 치료가 안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원한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터트려 버림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직장에서의 기분 나쁜 일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원한의 감정을 키움으로써 그것을 처리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 년, 이십 년, 긴 세월 동안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속병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추방하다, 멀리 떠나 보낸다, 벗어 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속죄일에는 사람들의 죄를 아사셀(Azazel) 염소 머리 위에 전가시킨 후 그 염소를 멀리 광야로 보내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습니다(레위기 16:8).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본질입니다(로마서 3:24-26).
아픔이나 상처, 분노의 감정, 쓴 뿌리, 배신감, 울화, 여러 가지 나쁜 감정을 멀리 추방하는 것입니다.
이제 긴긴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몸을 둔하게 했던 겨울옷들을 벗고, 가벼운 봄옷을 입어야 하듯이, 모든 나쁜 감정들과 한 맺힌 쓴 뿌리들을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용서의 신학 3F 표어를 제창하고 싶습니다.
『Forgive, Forget, and Forever』
용서만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실 것이다.』(마 6:14-1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용서는 잃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얻을 뿐입니다."
용서만이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너무도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위시하여 열두 제자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베드로부터 시작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을 하나 씩 하나 씩 그려나가다가 가룟 유다를 그릴 때에는, 자기를 일생동안 괴롭힌 원수 같은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마귀 같은 느낌이 들어,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 친구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 하겠는데 좀처럼 영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몇 달을 두고 고심해도 예수님의 얼굴은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사를 만나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수도사는 대번에, "자네를 괴롭히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을 걸세"하며 충고했습니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했습니다.
그 후에 마음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서만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에베소서 4:32. 골로새서 3:1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용서하는 삶, 그리고 용서받는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매일 같이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매일 같이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랑의 삶을 살고 싶지 않으세요?
(기도 초청) (서로 용서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잘못이나 실수들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지금 이 시간 그를 용서해주시고 자유케 하여 주옵소서.
나에게 행했던 모든 잘못들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품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고, 이 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내가 받은 엄청난 용서의 사죄은총에 감격하며, 그러기에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영적 힘을 주시도록 소원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저에게도 용서의 능력을 주옵소서!
용서의 방법
2001-12-08 00:23:04
몬22-25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예수님과 마귀와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목사님은 그 질문의 의도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저의 마음 속에 찾아오시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반대로 악한 마귀가 저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데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그 청년은 평소에 자기가 신앙 위에 굳게 서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어이없게도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버리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한심한 생각에 목사님을 찾아와서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면서 청년에게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여, 캄캄한 방에 불을 한 번 켜 보십시오. 그러면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두움은 물러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두움이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까? 아니지요. 또 다시 불을 꺼버리면 다시금 방안에는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그 순간에 악한 마귀는 우리 마음에서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시면 마귀는 또 다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금방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마귀 사이는 순식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러니 형제여, 언제나 예수님을 마음 보좌에 모시고 예수님이 형제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세요. 그리고 형제의 마음에 성령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늘 타오를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형제로 하여금 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마귀와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따로 있던가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방심해 버리면 "아차!"하는 순간에 죄의 유혹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가 깨어 경성하면서 우리 마음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비행기의 조종실을 구경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입구에 들어가다 보면 왼쪽편에 조종실이 있습니다. 이따금씩 조종실 문이 열려 있을 때가 있습니다. 흘깃 그 안을 들여다봅니다. 아주 좁은 공간입니다. 조그마한 유리창이 있고, 의자가 몇 개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비록 조종실은 좁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비행기 전체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종실 안에 조종사들이 앉아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공간이지만 테러범들이 그곳을 장악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어났던 동시다발 테러사건처럼 비행기가 가다가 정상궤도에서 이탈해 버립니다. 대형빌딩에 가서 내려 꼽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계신 나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움과 증오에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틈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빌레몬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용서의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미움의 찌꺼기가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오네시모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해묵은 미움의 찌꺼기를 완전히 씻어버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오네시모를 깨끗이 용서하고, 우리 마음에 빛과 사랑이 넘치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풀 것은 풀고 가야 할 것입니다. 맺힌 채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그러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속 우리에게 "너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서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맺힌 것은 다 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22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는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골로새를 방문할 것이라고 바울은 그의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하게 될 때 빌레몬의 집에 머물겠다고 그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바울에게 머물 곳이 없어서 그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바울의 의도는 다른데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해서 빌레몬의 집에 머물게 되면 자동적으로 무엇을 알게 됩니까?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를 용서했는지 용서하지 않았는지가 자동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적당한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기도의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약5:16의 말씀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서 모이고 있는 골로새 교회 모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골로새를 방문하고 또 빌레몬의 집에 유하게 될 것입니다.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했는지 안했는지 바울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고 어떻게 바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것이 선결되어야지 그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은 속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맺힌 것을 다 풀었는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와 너와의 관계가 화목한 사람은 기꺼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러나 아직도 맺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그러한 기도를 드리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종말론적인 신앙을 늘 유지하면 우리는 좀 더 용이하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계셨습니다. 연세가 80세에 가까운 분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사이가 안좋으셨습니다. 매일 싸우셨습니다. 하루는 대판 싸웠습니다. 할머니가 울면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그 영감쟁이와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이제는 갈라서야겠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달래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할아버지와 함께 사시더라도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그냥 참고 사세요."
그러나 할머니는 완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갈라서야 되겠습니다. 다만 몇 일이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도 완고하시니까 목사님도 두 손을 드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할머니. 그러나 제가 할머니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이제 앞으로 한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을 내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머니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쌍해서라도 한 달은 같이 살아주어야 되겠지요."
목사님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할아버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아껴주세요.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지나면 할머니 마음대로 하세요."
할머니가 돌아갔습니다. 잠시 뒤에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역시 볼멘소리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그 못된 할망구와 이제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목사님은 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싫던 좋던 간에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할머니가 이제 앞으로 한 달밖에 못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은 참고 살아주어야 되겠지요."
목사님은 똑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 달밖에 더 못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한 달만큼은 앞으로 할머니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지나면 할아버지 하시고 싶은대로 하세요."
할아버지도 돌아갔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두 사람이 이혼을 했겠습니까? 안했겠습니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달 뒤에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불쌍해서 어떻게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다툴 일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죽어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네시모도 역시 죽어가는 불쌍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 내가 곧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우리는 좀 더 따뜻하고 넓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정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잠시 잠깐 뒤에,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변의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더불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워하고 복수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오네시모를 헐뜯고 비난하고 욕하게 되면,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23∼2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지금 여기에 다섯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빌레몬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또 빌레몬도 그 다섯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잘 아는 다섯 사람의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다섯 사람도 바울과 똑같은 소원과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이 다섯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바울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바울 뿐만 아니라 그들도 함께 마음의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가혹하게 다루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기독실업인이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성대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모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독실업인은 죽기 얼마 전에 자기 장례식장에서 읽어달라고 장례식의 답사를 손수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유족의 부탁에 따라 친한 친구 한 명이 그 답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지금은 나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마지막 가는 이 시간을 내 친한 친구들을 위한 부탁의 시간으로 쓰고자 합니다.
John! 자네도 지금 내 관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있겠지! 친구여, 우리가 함께 골프를 칠 때마다 나는 자네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얼마나 간절히 권면했던가?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내가 이 시간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간곡히 부탁하네.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말고 이제는 마음 문 열고 받아들이게나. 다 자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탁하는 걸세.
George! 그대는 지금도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겠는가? 그 분은 그대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도 그 분은 그대에게 영생을 주시기 원하신다네.
Ed 그리고 Peter! 이제는 그만들 싸우고 화해하게나. 인생은 이처럼 유한하지 않은가? 짧은 인생길 걸어가면서, 다투지 말고 이제는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여기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의 이름이 거기에 나올까 싶어 염려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이고 있습니까?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야.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그 사람 곁에만 가면 절로 엔돌핀이 솟아나! 마음이 평안해져."
이와 같은 평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고집만 세고 도무지 남을 배려할 줄 몰라. 그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야?"
이와 같은 평가를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주변에 하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좀 더 따뜻하고 열린 마음, 여유로운 마음, 포근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배려해 줄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려고 해도 내 의지, 내 힘, 내 인격, 내 성품을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것이 25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지금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서 모이고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만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힘으로는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본능적으로 복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법으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법은 본질적으로 공의와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하늘나라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보좌가 여러 개 놓여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보좌는 특별했습니다. 크기도 더 크고 높이도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보좌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천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 보좌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인 성 프랜시스를 위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제자는 성 프랜시스가 자신의 스승이지만 마음에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야! 천국에서까지 이렇게 높아진다니…'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루는 기회를 봐서 성 프랜시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어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성 프랜시스가 조금도 스스럼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지."
그 제자는 "이때다!"하면서 성 프랜시스에게 가시 돋친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그 말씀은 너무나도 위선적인 말씀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을 성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살인자도 있고, 강도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선생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겸손을 가장한 위선적인 말이 아닐까요?"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그것은 자네가 나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야. 단지 하나님께서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을 뿐이야. 만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똑같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셨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거야!"
그 소리를 듣고 그 제자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승 앞에서 마음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진정으로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인격, 힘, 의지, 교양으로서는 결코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의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의 방법을 우리에게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잠시 잠깐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맺힌 것은 이 땅에서 다 풀고 가야합니다. 둘째로, 우리 주변에는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그들도 함께 더불어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그들도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빌레몬서를 마감하면서 우리 예수님이 용서와 관련해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몇 말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마6:14∼15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18:35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요13:34∼35의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나님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수십 년 동안 용서하지 못한 미움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깨끗하게 다 풀어버리고 마음의 천국, 빛과 사랑이 넘치는 주님의 나라를 우리 마음에 소유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1년 10월 28일 주일 낮예배 설교
용서의 동기
2001-12-08 00:22:11
몬19-21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라함 링컨의 얼굴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링컨의 얼굴을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잘생긴 얼굴입니다. 우선 이마가 시원하게 트여 있습니다. 너무 넓지도 않고 또 너무 좁지도 않고 시원할 정도로 활짝 트여있습니다. 또 이마 밑에 있는 눈썹은 남성답게 아주 강하고도 진하게 나 있습니다. 그 밑에 있는 눈은 적당한 깊이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눈알아래에 있는 콧날은 막힘이 없는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뻗어있습니다. 콧날 밑에 있는 입술, 특별히 아랫입술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리만큼 도톰하게 돋아있습니다. 뺨에는 군더더기 살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두 귀는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릅니다. 큼지막한 것이 보기만 해도 복이 절로 굴러 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레나룻 수염과 턱수염은 얼굴 전체의 균형을 그렇게 잘 잡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링컨이 태어날 때부터 큰 인물이 될 좋은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링컨이 처음부터 사람들이 알아줄 만큼 좋은 얼굴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하루는 뜻밖에도 시골의 한 어린 여학생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링컨 아저씨, 저는 아저씨를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저는 언제나 아저씨가 훌륭하게 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아저씨를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네 어른들은 아저씨가 너무 못생겨서 모두 싫대요. 그래서 아저씨한테 표를 찍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어요? 사실 아저씨는 너무 못생겼거든요.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고, 눈은 쑥 들어갔잖아요. 거기다 턱은 주걱턱이라서 왜 그렇게 뾰족한지 보기만 해도 불안스러워요. 그래서 제가 여기에 아저씨를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러면서 양편 뺨과 턱에 수염을 한 번 길러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뾰족한 턱이 감춰질 것이고 또 얼굴 전체가 잘 조화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그 말을 듣고서 수긍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습니다. 링컨은 완전히 달라진 얼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해서 당당히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링컨의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열린 마음이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제안까지도 하찮게 생각지 않고 그것을 잘 받아들여서 자기에게 유익되게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였습니다. 정적 가운데 그를 몹시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대당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그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에드윈 스탠턴(Edwin Stanton)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품이 아주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독설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놓고 링컨을 비난했습니다. 아주 심한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링컨의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얼굴이 도대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될 얼굴입니까? 저는 고릴라를 잡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가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링컨의 고향에 가면 얼마든지 고릴라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링컨을 고릴라 같은 사람이라고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자기 행정부를 조직하면서 놀랍게도 자기를 그토록 비난했던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과거에 자기를 비난했던 그의 모든 잘못들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해서 국방장관에 임명했던 것입니다. 과연 스탠턴은 링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링컨을 잘 도와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뒤에 링컨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때 제일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링컨의 시신 앞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기에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있습니다. 이제 그의 이름은 인류역사상 영원히 기념되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기 마련입니다. 용서에는 큰 감화력이 있습니다. 용서받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용서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와의 관계가 아름답지 못합니까? 화목하지 못합니까? 용서에 인색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 속에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오네시모가 있다면 깨끗이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야만 하는지 용서의 동기를 몇 가지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야 하는 동기를 깨닫고, 우리의 오네시모를 깨끗하게 용서하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빌레몬 자신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많은 빚을 탕감 받았다면 내 형제의 적은 빚 정도는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절 말씀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이미 바울은 18절에서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 빌레몬에게 진 빚을 바울이 대신해서 변상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사실을 19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했습니다. 자기가 대신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삼중의 강조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나"라고 하면서 일인칭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둘째로, "바울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셋째로, "친필로 쓰노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친필로 썼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바울은 비천한 종 오네시모를 위해서 자기가 대신 빌레몬의 채무자 입장에 선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기가 빌레몬에게 해야할 도리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바울은 빌레몬에게 조심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9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레몬이 바울에게 무엇을 빚졌습니까? 빌레몬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빌레몬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과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은 기껏해야 물질적인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바울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빚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말해 보았자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갚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내게 진 영원한 생명의 빚을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너도 너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보다 쉽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많은 빚을 탕감 받았으니까 형제의 적은 빚은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침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서 주방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다 보니까 식탁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쓴 메모가 그 위에 적혀 있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청구서
1. 이번 주에 아빠 구두 닦아드린 값 - 5,000원
2. 엄마심부름 세 번한 값 - 3,000원
3. 쓰레기 두 번 내다버린 값 - 2,000원
합계- 10,000원."
어머니는 빙긋 웃으면서 그 밑에 답장으로 몇 자 적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청구한대로 지갑 속에서 만원 짜리 한 장을 꺼내어 메모지 옆에 두었습니다. 잠시 뒤에 아들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비비면서 그는 자기가 쓴 청구에 대해 어머니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식당 앞으로 왔습니다. 보니까 자기가 청구한대로 만원 짜리 지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기가 쓴 청구서 밑에 어머니가 답신한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읽어나가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1. 너를 열 달 동안 내 뱃속에 넣고서 데리고 다닌 값 - 무료
2. 너를 그 동안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데 들어간 값 - 무료
3. 네가 아플 때 밤새워 기도하며 눈물 흘리며 너를 간호한 값 - 무료
4. 이외에도 너에 대한 나의 진정한 사랑까지 전부 무료."
아들은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의 뜻을 쉽게 헤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쓴 청구서 밑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미 다 지불되었음. 그래서 만원은 되돌려드립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지고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부모, 가족, 형제, 자매, 이웃에 대한 사랑의 빚을 우리는 엄청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오네시모가 우리에게 진 적은 빚은 우리가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때 바울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서 큰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때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우리와 더불어 기뻐합니다. 또 그들이 마음에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심정으로 헐뜯고 비난하고 욕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른 성도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평안함을 주어야지 마음에 고통을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0절 말씀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지금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게 영원한 생명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적으로 갚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주 안에서 빌레몬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기를 바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으로 인해 평안함을 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빌레몬이 그것을 들어줄 수 있습니까?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일 빌레몬이 사도 바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고 가혹하게 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때 다른 성도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하려고 하고 계속해서 비난하고 헐뜯게 되면,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고통이 더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만달란트의 빚을 진 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1달란트는 6천데나리온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장정 한 사람이 하루종일 일한 품삯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1데나리온은 약 오만원정도에 해당되는 돈일 것입니다. 10,000달란트×6,000데나리온×50,000원=3조원입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 당시에는 더 값어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값을 능력이 없습니다. 종은 왕에게 말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참아주시옵소서. 내가 갚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종의 모습을 보면서 왕은 불쌍히 여기고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종은 엄청난 돈을 탕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왕궁 밖에서 동료 종을 한 사람 만났습니다. 그의 동료는 그에게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일백데나리온은 500만원입니다. 3조에 비하면 500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가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으면 자기 동료의 적은 빚 정도는 탕감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동료의 목을 쥐고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누가 그것을 보고서 왕에게 가서 그 사실을 그대로 고해 바쳤습니까? 그의 동관들이었습니다. 그의 동료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강퍅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심히 민망해서 그 사실을 왕에게 다 고해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 말을 듣고 일만달란트의 빚진 자를 다시금 잡아서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고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복수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질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 저 형제가 저래서는 안되는데 마음이 너무 강퍅합니다. 그 마음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고해 바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함으로서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다른 성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평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명장 가운데 한 사람인 웰링턴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부대에 상습적인 탈영병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에게 벌도 주고 훈계도 했지만 도무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웰링턴은 그 상습적인 탈영병을 총살시키기로 했습니다. 전 장병이 모였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몹시도 아픕니다. 우리는 저 병사를 선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마지막으로 저 병사를 총살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 탈영병을 잘 아는 친구병사 한 사람이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웰링턴 장군에게 자기가 한 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장군의 허락을 받은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저 병사를 위해서 모든 방법을 써보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한 가지 써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병사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웰링턴은 훌륭한 장군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탈영병에게 웰링턴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네 친구의 말이 옳구나! 우리가 너에게 용서해 보지 않았구나. 네 친구의 말에 따라서 이번에는 너를 전적으로 무조건 용서하기로 한다."
총살형에서 사면시켜주었습니다. 그 병사는 바뀌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장군에 대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서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대원들의 마음도 아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전 장병들의 사기가 완전히 충천했습니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그 당시 무적의 군대였던 나폴레옹 군대를 워털루전쟁에서 무찌르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해 줄 때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이 빌레몬이 기꺼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즐겨 순종해야 합니다. 누가 그 말씀에 대해서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21절 말씀입니다.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순종은 누구에 대한 순종입니까? 바울에 대한 순종일까요? 아닙니다. 8∼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바울은 빌레몬에게 결코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순종의 대상은 바울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빌레몬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또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6:14∼15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
또 빌레몬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도 빌레몬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의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빌레몬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미 사도 바울은 5∼7절에서 빌레몬을 여섯 가지로 칭찬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용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기대하는 것보다도 빌레몬이 훨씬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행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고 벌을 주었을 것 같습니까? 물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빌레몬이 사도 바울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빌레몬서가 성경에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빌레몬서가 성경에 들어있다는 자체가 빌레몬이 기꺼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편지를 읽고서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했습니다.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대로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서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영원히 종의 몸에서 자유케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원하는 대로 오네시모를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되돌려 보냈습니다. 갈 때는 노자를 후하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잘 할 수 있도록 돈도 듬뿍 쥐어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자유의 몸이 되어서 로마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사도 바울의 종이 되어서 감옥에 있는 바울의 뒷바라지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잘 하면서 그의 복음사역을 도왔습니다.
뒤에 바울은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서 오네시모도 역시 네로 황제의 핍박때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도 네로 황제의 핍박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주를 위해서 순교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 바울의 말대로 그 세 사람은 영원토록 하늘나라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형제로서 함께 거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빌레몬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기대보다도 더 많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야 합니까? 오늘 바울은 그 동기를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나 자신이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형제의 적은 빚은 탕감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야지 내 이웃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평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고통을 받습니다.
셋째로, 내가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지금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즐겨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자꾸 생각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너희의 오른편 뺨을 치느냐?"
억울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왼편 뺨을 돌려대라."
"누가 너희의 속옷을 달라고 하느냐?"
손해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희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느냐?"
져주는 마음으로 십리까지 동행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손해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져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면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것보다 만왕의 왕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면 그보다 더 안전한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억울하게 사십시다. 손해보면서 사십시다. 져주면서 사십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2001년 10월 21일 주일 낮예배 설교
용서의 길잡이
2001-12-08 00:21:23
몬15-18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천재적인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걸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중간에 앉아 계시고 각기 좌우편에 여섯 명씩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 빈치는 제자들의 얼굴부터 차례대로 한 사람씩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얼굴을 맨 먼저 그렸습니다. 그런 뒤 제자들을 차례대로 그려나가는 가운데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릴 때가 되었습니다. 다 빈치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자니까 그의 얼굴을 험상궂게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에게 한 사람의 모델이 떠올랐습니다. 다 빈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늘 원수같이 지내는 한 이웃이었습니다.
"옳다! 그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에 집어넣으면 되겠다!"
그는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 이웃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려 넣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영상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고심을 했습니다. 한 주 두 주가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영감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없이 그는 그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심정을 내 마음 속에 그대로 품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사랑의 얼굴인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깊이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그 이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뒤 그는 이미 그려놓은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금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웃을 찾아가서 화해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자기가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은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평안해 졌습니다. 절로 그의 머리 속에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최후의 만찬」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마음 속에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내 마음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니까 어떻게 일이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 일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죄인들의 용서를 위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유토피아」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5∼16세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위대한 저술가였습니다. 정치가였습니다. 대법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참수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법관들이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진술이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 옛날 스데반을 돌로 치던 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다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스데반과 사울, 곧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서 지금은 하늘나라에 영원히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시간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나를 사형에 처하라고 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나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한 형제가 되어 저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히 함께 거하기를 위해 저는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이 그의 최후의 진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레몬서는 기껏해야 25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한 나의 오네시모가 도사리고 있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의 길잡이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길잡이에 따라서 "아, 그렇구나! 이러니까 내가 용서해야 되겠구나!"라고 깨닫고, 우리의 마음 속에 아직도 맺혀 있는 것을 다 풀면서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실을 덕으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오네시모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오네시모는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원색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도망쳤다, 달아났다"라고 말하지 않고, "떠났다"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떠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능동형으로 쓰지 않고,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15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잠시"가 "영원히"로 바뀌어졌습니다. "떠나게 된 것은"에서 "두게 함이니"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에서 맺은 주종의 관계는 그저 잠시잠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서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이 땅에서 뿐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실보다 덕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빌레몬이 잃은 것은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잠깐 잃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대신 무엇을 얻었습니까? 사랑 받는 형제를 얻었습니다. 영원한 형제를 얻게 되었습니다. 실보다 덕이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을 사랑으로 잘 뒷바라지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특별히 사랑 받는 형제입니다. 바울과 오네시모의 사이는 기껏해야 영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는 영적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 변화받아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는 육적으로도 자기 주인 빌레몬을 충성스럽게 잘 섬기는 종이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빌레몬을 잘 도와주는 사랑받는 형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잃은 실보다도 얻은 덕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과거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가 우리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우리도 기꺼이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정말 원수같은 존재들입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종살이했습니다.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복주셔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형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꺼이 원수같은 존재들인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용서해 주었습니까? 요셉에게는 섭리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형들의 모든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45:5∼8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50:20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꺼이 선포해 버리십시다. "내가 오네시모를 용서했노라."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될 것입니다. 악이 바뀌어서 선이 될 것입니다. 실이 바뀌어서 큰 덕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오네시모를 보다 용이하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 자신이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의 빚을 많이 지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사랑의 빚진 자구나!"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사랑의 빚을 갚아나간다는 심정으로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나 바울을 영접하듯 하라."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지금 바울은 빌레몬을 "동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빌레몬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사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는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빌레몬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자기를 동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내가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니까 오네시모에게 조금이라도 갚아야지!'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에게 웬 낯선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전과7범으로 있다가 지금 막 교도소에서 출감하는 길입니다.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목사님이 제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저를 책임지십시오. 저는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이 필요합니다. 직장을 알선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교도소에서 한두 사람만 세례를 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겠습니까? 거기다 전과7범에게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청년이 눈치를 챈 듯이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 봐요.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네들 입으로는 '사랑, 사랑!'이라고 떠들지만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나를 낳은 내 엄마도 나를 고아원에 내다버리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지금 어느 하늘아래선가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도 나를 내어버리고 도망치는 판에 세상에 무슨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까? 나는 열네 살 때 고아원의 담을 뛰어넘어서 지금까지 전과7범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내게 누가 사랑을 베풀어주겠습니까? '사랑, 사랑!' 말로만 떠들지 마세요.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발길로 목사님의 책상을 힘껏 차고는 뛰쳐나가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웠습니다.
"여보게, 잠시 앉아서 내가 하는 말 한 마디만 듣고 가게나."
목사님은 그를 차근차근 타일렀습니다.
"젊은이, 한 번 생각해 보게. 남이야 자기가 낳았으니까 자기 자식을 어쩔 수없이 먹이고 입히는 것이 마땅하겠지. 그러나 자네는 자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자네의 똥오줌을 다 받아내고 우유를 먹이면서 키우지 않았나? 그 사람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자네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었겠나?
그리고 자네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걸세. 한 번 생각해 보게나. 자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 자네가 직접 만들었는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옷을 자네가 지금 입고 있지 않은가? 자네가 언제 한 번 손수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땀흘려서 농사를 지었으니까 자네가 하루 세 끼 밥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사랑을 받고서 지금까지 살아온걸세.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네는 자네의 핏줄과는 전혀 섞이지 않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까지 살아온 것일세. 이 한 가지를 결코 잊지 말게나."
그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릴 때 자기를 친자식처럼 길러주셨던 고아원 원장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상하게 자기를 돌보아주셨던 고아원 아주머니의 얼굴들도 생각났습니다. 그는 급기야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놓아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울고 나더니 눈물을 훔치면서 그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군요. 저가 알지 못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까 저는 정말로 남들이 받지 못한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군요. 목사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급히 물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직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랬더니 그가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으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도 이제부터 열심히 살아보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우러나오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해서 그것을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를 화평케 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로 도망칠 생각을 했습니다. 도망치려면 엄청난 돈이 들텐데 그가 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돈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많은 돈을 썼을 것입니다. 가면서도 쓰고 로마에 있으면서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에게로 돌아옵니다. 오네시모는 자기가 훔친 돈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는데 그에게 무슨 돈이 있느냐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행28:30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로마에 있는 한 셋집에서 유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2년 동안의 방세를 지불할 만큼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자기가 태어난 길리기아 다소 지방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당대 제일 가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모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또 바울에게는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때때로 그는 자기 손으로 장막을 만들어서 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빌립보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 정성어린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손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 뒤에 있는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로마의 감옥에서 석방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가 석방이 되면 빌레몬에게 가서 오네시모가 그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저 말로만 듣기 좋게 말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자기가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종종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전11:1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가 그 주인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고 또 큰 빚을 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누가 대신 갚으셨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버려 피흘려 모든 것을 우리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화평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있는 처소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한 토막을 인용해 봅니다.
"고 김태수 집사님이 유방암으로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임종 예배 시간에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서 내 손을 잡았습니다.
지난 가뭄때 논에 물을 대면서 제일 교회 모집사님과 본의 아니지만 험하게 싸웠다면서 화해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서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인 나더러 대신 가서 자기가 모집사님을 용서한다고 전해주고 또 그 모집사님더러 자기를 용서한다는 말을 대신 듣고 화해를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마하고 약속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후일 모집사님을 만나 내가 그 말을 하며 용서의 말을 전하고 그 집사님의 울음 섞인 용서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말미에 "천국 가는 길"이라는 시 한 수를 덧붙였습니다.
"임종으로 가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초행길이라 누구나 두렵고 떨린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자는, 용서받으며 용서하며 살아온 자는 영원한 소망의 길이다.
죽음의 길이 가장 힘든 사람은 화목하지 못하고 간 사람이려니….
미결 인생이 어찌 그 길을 평안히 갈 수 있으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결 인생으로 남지 마십시다. 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 땅에서 맺히면 하늘에서도 맺힌 채 그대로 있습니다. 다 풀어 버리십시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십시다. 비록 오네시모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화가 변해서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용서해 버리십시다.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이미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됩니다. 용서는 사랑의 한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내 마음 속에 미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오네시모를 이 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 용서해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함께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001년 10월 14일 주일 낮예배 설교
오네시모를 용서하라
2001-12-08 00:18:38
몬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누나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그는 누나와 함께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며칠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아침에 일터로 나가면서 자기 조카가 심심할까봐 그에게 새총을 하나 만들어주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고무줄을 끼워서 돌멩이를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이 났습니다. 아침부터 들을 쏘다니며 새를 잡으려고 계속해서 새총을 쏘아댔습니다. 그러나 새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그가 새총을 쏘기도 전에 미리 알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이는 한 마리의 새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마침 집마당에 할머니가 애지중지하시면서 기르는 오리 한 마리가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심결에 오리를 새총으로 쏘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던 돌멩이를 꺼내서 오리를 겨냥했습니다.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돌멩이는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오리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오리는 비틀비틀하더니 곧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심결에 하기는 했지만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오리를 죽였으니까 겁이 났습니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오리를 쥐어들고는 나무 밑을 파서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르는 척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었습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입맛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은 숟가락을 놓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서 걱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얘야, 너 어디 아프니? 안색이 좋지 않구나! 이리 와라. 어디 한 번 이마를 짚어보자. "
그럴수록 그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려던 누나가 그를 불렀습니다. 설거지는 누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는 집안청소를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나가 그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설거지 같이 좀 하자."
설거지는 누나의 담당이었기 때문에 그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이렇게 소곤거렸습니다.
"나는 다 봤지!"
그는 말 한 마디에 완전히 코가 끼었습니다. 그래서 누나가 뒷짐지고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는 꼼짝 못하고 설거지를 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죽여서 파묻은 오리가 꽥꽥거리면서 되살아 날 것만 같습니다. '이 놈! 네가 죽였구나.' 할머니가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화를 내시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또 누나의 행동으로 보아서 내일도 설거지를 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누나의 노예가 되어서 살 것을 생각하니까 한심합니다. 이 고민 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아침 일찍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2층에 있는 할머니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할머니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할머니가 사랑하시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뒤뜰 나무에 묻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런 짓 않겠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사실은 내가 어저께 2층에서 창문청소를 하다가 창밖으로 네가 새총으로 오리를 쏘아 죽이는 것을 다 보고 있었단다. 그리고 죽은 오리를 나무 밑에 묻은 것도 보았다. 네가 저녁을 먹으면서 입맛이 없어 하는 이유도 나는 다 알고 있었다. 또 네가 누나 앞에서 쩔쩔 매면서 누나 대신 설거지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 지금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단다. 네가 먼저 와서 너의 잘못을 내게 고하면서 용서를 구한 것 정말 고맙구나! 잘했다. 내가 물론 다 용서해 주고 말고."
그러면서 할머니는 손주를 가슴에 품고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방을 나서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했겠습니까? 아침식사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을 거의 굶다시피 했으니까 아침은 너무나 맛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식사가 끝난 뒤에 또 부엌에서 누나가 불렀습니다. 누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했습니다.
"오늘도 설거지를 해야지!"
"싫어."
누나가 쫓아와서 성난 얼굴로 말했습니다.
"너 까불면 다 일러버릴거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습니다.
"이르고 싶으면 일러라!"
그러면서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자신만만하게 걸어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용서받는 사람도 기쁘고 즐겁지만 사실은 용서하는 사람도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도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이미 용서함을 받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를 가혹하게 징계하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탕자의 비유나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용서의 정신만을 말씀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한 가정의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몇 주간 살펴보고자 하는 빌레몬서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빌레몬서를 살펴보면서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할 나의 오네시모는 누구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행복과 나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빌레몬서의 서두부분을 우리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세 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발신자입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입니다. 둘째로, 수신자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축복의 말씀입니다.
첫째로, 발신자입니다.
1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빌레몬을 기록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었을 때 마음에 뜨거운 감격이 넘쳐흘렀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나 인정하는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자기가 친서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빌레몬의 마음이 뜨거웠겠습니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반가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빌레몬이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빌레몬에 있어서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때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레몬의 집은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골로새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따금씩 사업차 큰 도시인 에베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빌레몬은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빌레몬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요, 또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바울에게서 편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빌레몬의 마음은 뜨겁고 반갑고 감격에 넘쳤을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 사랑의 감정, 좋은 감정, 엔돌핀이 솟구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할 때 그 마음 속에 사랑의 정, 따뜻한 마음, 엔돌핀이 솟구쳐 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빌레몬이 바울을 생각할 때 그 마음 속에 엔돌핀이 솟아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따뜻함을 주고, 사랑의 정을 불어넣어 주고, 엔돌핀을 솟구치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해 주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엔돌핀이 솟구치게 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 보면 대개는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에 편지를 할 때마다 사도적인 권위로서 말씀을 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또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는 사도적인 권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기를 사도라고 칭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지금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빌레몬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네 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입니다. 이 네 권을 우리는 일명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왜 바울은 빌레몬서에서는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빌레몬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다면, 내가 지금 너에게 부탁하는 것을 너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들어주리라 믿는다.' 지금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을 배반했습니다.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골로새를 떠나서 그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거기서 파묻혀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 오네시모는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감화를 받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극진히 잘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기 곁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수종드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 임의대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위해 편지를 한 장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옥에 갇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는 순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어떠한 짓을 했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일만 달란트 빚을 다 탕감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형제가 내게 일백 데나리온의 작은 빚을 지고 있을 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천 억, 조가 넘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다면 기껏해야 몇 백만원 정도는 기꺼이 탕감해 줄 수 있는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인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누군가 내게 어떤 섭섭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곧 십자가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이 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바울은 자기의 이름과 더불어서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및 형제 디모데는."
사실 지금 바울의 곁에는 디모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3∼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디모데만 자기의 이름 곁에 썼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영적 후계자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디모데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늘 바울 곁에서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디모데는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은 디모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과 친분이 있는 디모데의 이름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바울이 디모데를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형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 비해서 나이가 훨씬 어린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지식과 경험적인 면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디모데를 나의 형제로 대하고 있는 것처럼 너도 오네시모를 종처럼 취급하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와 같이 대해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뜻인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갈3:2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믿음의 한 가족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십시다.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가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가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로서 함께 천국을 향해 기쁨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수신자입니다.
1절 하반부부터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1차적인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을 소개할 때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또 빌레몬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바울은 빌레몬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또한 빌레몬은 바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주되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레몬을 가리켜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곧 나와 디모데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이러한 뜻입니다. 또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동역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너도 오네시모를 종처럼 취급하지 말고,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로 받아주기를 바란다.' 이런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너무나도 따뜻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넉넉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2절에 보면 또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여기서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리고 아킵보는 그들의 아들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아킵보를 가리켜서 "우리와 함께 군사 된"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군사입니다. 골4:17의 말씀입니다.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말하자면 아킵보는 그의 아버지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던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왜 바울은 빌레몬 이외에 그의 부인과 아들의 이름을 함께 수신자 이름에 올렸겠습니까? 빌레몬 뿐만 아니고 그의 부인 그의 온 가족이 다함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맞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절 끝부분을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가 온 교회의 교우들 앞에서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모든 성도들도 이 편지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빌레몬 뿐만 아니고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 모여 있는 골로새 모든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받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얼마든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습니다.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를 살려주더라도 그 이마에 화롯불을 가지고 "F"자를 크게 새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라는 라틴말(Fugitivus)의 첫 글자입니다. 영어의 "Fugitive"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와 같이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의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를 받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박상길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서울의 한 근교에서 푸줏간을 경영하는 나이 많은 백정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정은 아주 천대받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정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양반들은 하대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백정에게는 반말을 했습니다.
하루는 젊은 두 양반이 소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첫째 양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상길아. 소고기 한 근만 잘라서 팔아라."
그는 공손하게 "예!"라고 답한 뒤 소고기를 잘라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양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박서방! 내게도 소고기 한 근을 잘라주게나."
그는 역시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면서 그에게도 소고기 한 근을 잘라주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양반의 고기보다 훨씬 더 많은 고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첫째 양반이 불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똑같은 소고기 한 근을 달라고 했는데 왜 크기가 다른거야!"
그 때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첫째 것은 상길이가 준 것이고, 둘째 것은 박서방이 준 것이니까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일에 상처받기 쉽습니다. 말 한 마디에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옛말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 한 마디라도 남을 배려해 줄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낮추고 디모데는 높였습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하면 반가운 정을 느끼게 되고, 그의 마음 속에는 엔돌핀이 솟구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축복의 말씀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축복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동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존재인 천사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이나 천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쓰인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이십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축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은혜와 평강"입니다.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원인이고 평강은 결과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평강이 따라옵니다. 평강을 원하십니까?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입니다.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 골로새 교우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네시모의 모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따뜻하게 용납해 주고, 형제로 받아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십시다.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내게 무엇을 행했던지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 받는 길입니다. 그가 나를 배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속이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용서할 만큼 성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하자."
우리의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오네시모를 다 용서해 주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평강이 절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영어로 용서라는 말을 "Forgive"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단어와 비슷한 영어단어 몇 개를 써서 용서하는 방법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Forbear(참으라)"입니다. 속상하다고 해서 화풀이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 있는 용서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용서는 참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Forget(잊으라)"입니다.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하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과감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아들이 가더니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오느냐?"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집에서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미를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이놈아!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라."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증오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셋째로, "Forever(영원히)"입니다. 영원토록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말끔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7×70=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가 자기에게 잘못을 범할 때마다 수첩에 기록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번, 두 번…490번까지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491번째 가서 '더 이상 못 참아.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하겠어!'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는 처음부터 용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이미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
우리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지켜 순종하며 행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깨끗하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오네시모를 용서함으로 마음의 천국을 다시금 회복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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