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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감사에 관한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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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즐거워하라/3:14-20

2003-02-26 10:54:59

 

 

설교를 빼 놓고는 목회자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목회자가 설교에 쏟는 비중과 설교 준비에 대한 강박감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열정과 인격보다 먼저 설교가 은혜가 있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것이 목회자의 기준으로 대부분의 성도들이 생각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설교하는 목사 자신도 그러한 마음이 듭니다. 세월이 가고 연륜이 쌓여지면 그래도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단위에 오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설교를 위해 한 주간 계속 묵상과 기도로 준비를 하였다 해도 그러할진대 간혹 바쁘다는 이유와 게으름 때문에 충분한 준비가 안되었을 때에 예배 시간이 닥쳐올 때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은 식은땀이 납니다.

 

이럴 때마다 더욱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찬양대의 찬양이 있는 동안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오병이어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시 수 천명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습니다. 저녁때가 다가오면서 제자들은 식은땀이 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 당시로서는 보잘것없는 이름 없는 소년이 갖고 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님 앞에 갖고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천명을 배부르게 먹이시고도 12광주리가 가득 남게 됩니다.

 

영적으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교우들이 피곤을 무릎 쓰고 모여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배부름을 줘야 하고, 생수로 마시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준비한 것이 너무 보잘것없습니다. 있다면 이름 없는 목회자가 지난 한 주간 열심히 준비한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 정도입니다. 태부족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욱 적은 수량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고 있는 목회자는 예수님께 떼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병이어보다 더 보잘것없는 말씀의 떡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 저의 준비한 적은 분량에 축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모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배부르게 하시고, 12광주리를 남기게 하소서"하고 어거지를 쓰며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일단 설교가 끝이나 내려오면 기도 내용이 달라집니다. "전하고 버림받지 않게 하소서" 사도 바울의 기도로 바뀌어 집니다.

 

왜냐하면 "일단 씨는 뿌렸으니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제는 내가 버림받지 않게 설교를 한 대로 행하며 살게 하소서"가 기도입니다. 이유는 설교하는 것보다 설교준비가 더 어렵고 내가 설교한대로 따라 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목회자의 마음에서만 아니라 듣는 성도들도 동일한 마음일 때 이 기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듣는 자의 마음도 준비해야 합니다. 가령 눈은 바로 목회자를 향하여 설교로 인해 마음이 울릴 때마다 진정으로 아멘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빵 한조각을 얻어도 감사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만나를 주는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교회에 나와 주었으면 됐지, 그러니 목회자가 나에게 감사해야지"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이 설교는 누구누구에게 말하는 설교로구나"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나에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내 생애의 어쩌면 마지막 말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 둔하고 뻣뻣한 혀와 입술을 축사하소서 그리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설교는 그렇게 준비된 마음과 떨리고 두려운 심성의 선포가 만날 때 마치 전선의 양극과 음극이 만남으로 스파크, 즉 열과 불이 일어나듯 생명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이 기록된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봅니다. 솔론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여로보암 왕으로 시작하여 왕조가 9번 바뀌면서 19대인 호세아왕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대략 208년 왕조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는 초대 르호보암왕으로 시작하여 20대왕인 시드기아 왕을 끝으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대략 344년정도 왕조가 유지되었습니다.

 

이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10지파들로 구성되었으며 19명의 왕이 다스렸는데 단 한 사람도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시작할 때부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며 결국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왕조가 쉽게 무너지고 나라도 결국 먼저 멸망하였습니다.

 

반면에 남왕국 유다는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가 중심이 되었으며, 모두 20명의 왕이 다스리면서 그 중에 6명 정도는 상당히 훌륭하게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먼저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을 다스리기에 힘썼습니다. 율법책을 찾아내어 백성들에게 가르쳤으며 안식일을 지키려고 애를 썼고, 특히 산당을 제하거나 우상을 제하는데 앞장을 섰고 요시야왕은 성전 수리를 명하며 유다 왕국의 신앙재건을 앞장섰던 대표적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왕들은 우상숭배와 사치 그리고 방종을 일삼았던 왕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남왕국 유다를 배경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유다 왕국의 14번째로 왕위에 오른 "므낫세"왕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다 바알, 아세라, 일월성신등 온갖 우상을 다 모아놓고 함께 섬기도록 하였고, 매일 무당들을 불러다가 굿을 하고 점쟁이들을 불러서 점을 치는 악행을 합니다. 더구나 몰록이라고 불리는 태양신에게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기까지 합니다. 정치는 악정을 펼쳐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흘린 피가 예루살렘 길거리에 흘러 넘쳤다고 왕하21: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악정을 펼치던 므낫세가 죽고 그 아들 아몸이 왕이 되었는데 아몸은 아버지 므낫세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왕이된지 2년만에 쿠테타가 일어나서 암살 당하고 맙니다. 가정 교육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이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으로 먹고 마시고 자라며 꿈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이제 아몸의 아들 요시아가 8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요시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 나라는 아버지 아몸왕과 할아버지 므낫세왕까지 거슬러 가서 거의 60여년간 깊은 죄악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스바냐라는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낙심 가운데 빠져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16절을 보시면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말씀은 기운을 내라는 말입니다. 힘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 낙심하고 있느냐? ! 지쳐 있느냐? 기운 내서 일어서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라고 17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오,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계시는데 왜 축 쳐져있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도탄에 빠져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 힘을 내서 힘차게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15절 보세요. "여호와가 너희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하십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너희 형벌을 없애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손을 축 늘어뜨리고 낙심할 때가 언제 입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듭니다.

 

 

 

작은 교회에서 열심히 목회하시던 어느 나이드신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의 평생 소원이 성지순례를 하는 것입니다. 일생에 한번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성지를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교회가 너무 미약해서 여유가 없어서 가실 형편이 못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내용인즉 20만원만 부담하면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든지 앞뒤를 살펴보지도 않으시고 신청하셔서 성지순례와 함께 내친길에 미국구경까지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웬 청년이 찾아와서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통일교에서 모임이 있으니 나와 주십시오"합니다. 목사님께서 화가 나셔서 "내가 장로교 목사인데 왜 통일교 모임에 나가느냐" 누굴 오라가라 하느냐 하시면서 호통을 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미국과 성지순례 갔다오신 것 누구의 돈인 줄 아십니까? 통일교에서 나온 돈입니다."

 

꼼짝없이 이 목사님은 통일교 모임에 오라면 가야합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서 가실 때마다 "나는 이번만 참석하고 다시는 안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과거의 모든 일을 공개하겠습니다."는 협박을 받으시면서 별 수없이 또 참석하시게 됩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신 목사님은 노회석상에서 자신의 문제를 공개하셨습니다. 통일교 자금으로 성지순례를 갔다온 일, 그 후에 하는 수없이 통일교 모임에 참석했던 일을 낱낱이 공개합니다. 그리고 나를 목사직에서 쫓아내어도 좋습니다. 어떤 징계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고백하셨습니다. 이에 노회에서는 목사님에 대해서 한 회기 노회 총대권 정지와 함께 그 동안의 과오를 용서하고 앞으로는 행동에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그 청년이 전화를 합니다. "이번에 모임이 있으니 나와주십시오" 그러자 목사님은 대답하시길 "이젠 네 마음대로 해라 이놈들아! 나는 자유다"

 

 

 

그렇습니다. 죄는 우릴 꼼짝 못하게 묶어 놓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서 힘을 내려고 해도 또 다시 낙심하고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소망이 넘쳐 납니다. 오늘도 우리는 죄를 짓고 삽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극복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오면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다 정리하고 나오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정리해 주십니다. 죄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성령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안 짓겠다고 맹세를 해보지만 어느새 또 같은 죄를 짓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망하기를 "나는 절대로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구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보세요! 베드로가 어느 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한테 죄를 지었다면 한 일곱 번쯤 용서하면 되겠지요?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 되겠다고 베드로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한한 용서를 뜻합니다. 7은 완전수 또는 무한수를 가리킵니다.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이올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한대로 용서할 것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무한대로, 끝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자꾸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되면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것도 어느 때는 면목이 없어할 때가 있게 되는데 이것은 교만입니다. 인간의 생각입니다. 끝없이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없이 겸손해야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만이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회개하니 나는 너의 모든 죄를 사해 주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낙심하지 말아라 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계시니" 말씀하십니다. 분명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소년 다윗이 전쟁터에 섰습니다. 상대는 블레셋 거인 골리앗입니다. 다윗 손에는 돌멩이 몇 개가 전부입니다. 반면에 골리앗은 두터운 갑옷을 입고 칼과 방패로 무장했습니다. 다윗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외칩니다. 결과는 다윗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 앞에 골리앗과 같은 장애물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위협하는 악하고 강한 힘이 있습니까? 억울하게 하고, 답답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나와함께 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제시대의 대표적 순교자 주기철목사 그의 위대한 신앙의 반려자 오정모집사 옥에 갇힌 주목사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목사를 면회하면서 묻는 첫마디가 "승리냐"였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기를 재촉했던 오집사였습니다. 하도 기가막힌 주목사의 노모가 왜 자꾸 옥에 들어가라고 하느냐고 나무라시면 "어머님, 주목사를 살리는 것이 좋습니까? 죽이는 것이 좋습니까?", "그거야 살리는 것이 좋지",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사는 길은 얼른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시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주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예수님만큼 사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집사는 주목사가 7년 감옥에 있는 동안 신앙투쟁으로 일관하는 목사님의 옥바라지하느라 겨울 내내 불 안 땐 냉방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에서 교회 구내에 주목사 순교비를 세우려할 때 한사코 그것을 말렸습니다. "그것은 산정현교회의 손해일 뿐아니라 전국교회의 손해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이 교회 문에 들어서자 마자 하나님이 머리에 떠올라야 하는데 비석을 보고 사람인 주목사를 먼저 생각하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하셨던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 오정모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확신하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신 것을 믿고 다시 한번 힘을 내십시오. "저 사람은 저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야"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셨습니까? 사업이 어렵거나, 실패하셨습니까?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러기에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 말씀 의지하여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17절 중반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못난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매일매일 하나님 속을 썩여드리는 못난 자녀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볼 때마다 흐뭇해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참으로 못난 자식,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탕진해버린 자식이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 돌아왔다고 동네 사람을 불러다가 잔치합니다.

 

유치부 예배시간에 전도사님께서 돌아온 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여러분,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싫어했는지 아는 사람? 유치부 가운데 한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합니다. "! 살진 송아지가 탕자 돌아오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세상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시인은 말하기를 "사랑은 위대한 편견이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눈에는 자기 자식이 가장 예뻐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다 보이는 단점도 내 눈에는 전혀 안 보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감추어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리 못났다고 하고, 실패했다고 하고, 틀렸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보십니다.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내가 너를 잠잠히 사랑하며, 내가 너로 인하여 소리를 지르며 기뻐한다"말씀하십니다.

 

이렇듯 못난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감추시지 못하는 하나님이 계신데 왜 낙심합니까? 왜 손을 늘어뜨리고 지쳐 계십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새롭게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신앙 /100:1-5

2020-08-11 07:32:40

 

1.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자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어느 임금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백방으로 약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입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모두 행복의 기쁨이 안 보였습니다. 임금의 병세는 더욱 더 악화되어갔습니다. 나중에 왕자가 직접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오두막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에서 기쁨에 넘치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만히 드려다 보니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기쁨에 넘쳐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왕자는 이 집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집이라 생각하고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속옷을 벗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자 칼로 위협하고 겉옷을 벗겨보니 그들은 모두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속옷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행복은 속옷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감사가 곧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과 조건이 맞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게 될 때 행복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칼 힐티의 <행복론>에 보면 행복의 첫째 조건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감사할 때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하게 될 때 여러분의 신앙과 인격이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때 여러분의 삶이 젊어지고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인생 역전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감사라는 단어가 122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다윗이 34회를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감사하는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한 위인이었습니다. 줄곧 감사하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1) 사울 왕은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리고 승전하자, 위기에 처한 나라는 구했지만, 백성들의 지지도와 인기가 자신보다 다윗에게 쏠리자 왕권에 대한 위기를 느끼고 다윗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살해의도를 파악하고 결국 도피하게 됩니다. 사울은 전국에 걸쳐 다윗 살해명령을 내리고 추격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울의 추격을 피해 여기저기로 도피하다 국외(國外)로 도피하는 방법을 택하여, 블레셋의 중요 도시 중 하나인 가드로 도피합니다. 다윗이 굳이 가드로 도망간 이유는 이곳이 이방 국가로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또한 그곳이 과거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삼상17:49-51) 엘라 골짜기였지만 그 전쟁이 끝난 지 벌써 3,4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당시와는 자신이 많이 변모해서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이곳으로 도피하며 또 한가지 기대했던 바는, 블레셋 족속의 가장 큰 적인 이스라엘의 사울 왕으로부터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처신할 때, 어쩌면 가드의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도피했는데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벌써 알아 보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널리 유행했던 노래, “(삼상21:11)...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며 왕에게 보고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다윗이 알고, 자신을 몰라 볼 것으로 생각하고 그곳으로 피신해온 다윗이 심히 두려워하며, 순간 침을 수염에 질질 흘리며 손가락으로 낙서를 휘갈기며 주먹으로 대문짝을 때리는 등의 이상 행동을 하며,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간 최대한 미친 사람으로 행세하게 됩니다. 다윗 생애 중 가장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아무리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요동치 않는 피난처가 되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기스왕을 두려워하여 이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기스 왕은 그래 감히 이런 미친 놈을 나의 궁에 들일 작정이냐?” 며 당장 이 궁에서 그를 쫓아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 왕을 피해 적진(敵陣)에 들어갔다가, 그야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하게 하나님께 감사드린 시편이 시34, 52, 56편 등 입니다.

 

(34:1-8)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2:9)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56:8-13)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2) 한 번은 다윗이 중병에 걸려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릴 정도로, 다시 말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극한 고통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편 6편입니다.

 

(6:1-10)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건져 주소서, 나의 이 죽을 병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슬퍼하다가 지쳤습니다. 내가 밤마다 흐느끼다가 눈물로 베개를 적십니다. 내가 나의 대적 때문에 근심하다가 눈마저 흐리고 침침하여 잘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처절하리만치 철저히 회개합니다. 그리고 이어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주께 감사드리겠습니까?’ 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는 한 항상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을 병에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기도드린 것입니다.

 

8~10절이 바로 그러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아, 이제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나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여호와께서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나의 모든 원수들이 창피를 당하고 놀라며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라.’

 

여기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는 말씀이, 바로 믿음으로 감사기도를 드린 결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다윗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승리하며 잃었던 것을 회복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또한 다윗은 무려 7년 동안, 사울 왕의 추격을 받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그 도피생활 중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반역의 무리들이 제압되고 왕권이 회복한 뒤에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 감사기도가 시편 138편입니다.

 

(138:1-8) (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물론 다윗은 모든 대적이 평정되고 평안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습니다.

 

(삼하 22:1-3)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이렇게 다윗은 평안하고 모든 일들이 잘 될 때보다, 오히려 환난과 역경 중에 더 많은 감사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 평안하게 되면, 은혜를 망각하여 감사하는 생활을 잊기 마련인데, 다윗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윌튼이 쓴 글 가운데 정말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소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 주소는 하늘나라이고, 두 번째 주소는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감사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윗이 황막한 광야같은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감사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마음에 계셔서 함께 하시므로, 마침내 그의 모든 대적들이 평정되고 잃었던 모든 것들을 몽땅 다 회복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회복되어 잃었던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생활해야합니다. 현재의 모습에 불평 불만을 터뜨리지 말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마침내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전도집회를 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며 찬양도 하고 간증도 하는 한국출신 맹인 성악가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맹인인 나를 인도해 줄 때 100m 앞 전방에 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든가, 층계가 있으니 올라가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듣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도 모릅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감사하며 살아갈 때, 마침내 인생역전의 기쁨과 행복,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에 감사하지 못하는 생활은, 이러한 선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죄악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이거나, 선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교만에서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인 것입니다. 영국의 트렌치 감독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모든 은혜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더 큰 은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적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향해 외치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03:2) 라며 감사생활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화단 구석에 장미 한 송이가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미는 언제나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장미는 눈만 뜨면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장미는 밤이면 춥고 어둡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따뜻하고 환한 거실로 옮겨 달라고 주인을 졸랐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화분에 옮겨서 거실에 두었습니다.

 

얼마 후 장미는 또 다시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여기는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창가에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창가에 옮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미는 창가에는 고양이가 다녀서 싫다며 방안 꽃병에 꽂아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싹둑 잘라서 꽃병에 꽂아 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장미는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다시 햇살이 비치는 바깥 화단으로 옮겨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장미는 이미 뿌리가 잘려 시들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왜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했겠습니까?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없으면 결국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믿음으로 감사드리기 바랍니다. 바울은 어둡고 습기가 많으며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지하 감옥에 갇혔어도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을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16:22-26)

 

여러분 가정에 남편과 아내가 어떠하든 감사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부모가 어떠하든 감사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막히고 갇히고 매여 있는 모든 문제들이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죤 헨리 박사는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요 방부제라고 했습니다. 질병 때문에 마음과 육신에 아픔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하시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가족과 형제들간에 마음에 아픔이 있을지라도 감사하므로 화평케 하시는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씻겨지는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으며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열매가 없는 가라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감사하는 믿음과 생활은 축복받는 생활인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31절에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러 가지 고통 중에 감사하는 자들이 점점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은혜를 망각하고 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고통 중에도 가장 큰 고통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네 마음들이 그렇게 변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옛날 독일 나치 정부 시절에 신앙적 핍박을 받은 코리 텐 붐 여사의 간증입니다. 코리는 수용소에서 동생 베시(Betsie)와 함께 처참한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어려운 고통의 자리에서도 그들은 독일군의 감시를 피하여 비밀리에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중에서 가장 고통스런 것 중 하나는 벼룩이었습니다. 감옥에는 벼룩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동생 베시(Betsie)는 성경에는 모든 환경 중에서도 감사하라고 말씀하니, 감사하며 살자고 언제나 밝은 표정을 띠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독일군 초병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엿들었습니다. 그 군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 수용소 안에는 유독 벼룩이 많아 들어가기가 역겨워...”

 

그래서 코리는 자기 방에 벼룩을 많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 베시의 성숙한 신앙에 머리를 숙이며 감사했습니다.

 

벼룩은 비록 우리의 잠을 방해하지만, 독일군 간수로 하여금 우리 방에 못 들어오게 하니 마음껏 성경공부를 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

 

범사에 감사하는 성숙한 믿음생활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기쁨의 기적 /100:1-5/ 유기성목사

2018-04-06 04:01:21

 

100:1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2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3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4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100편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100:1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2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많은 교인들의 마음이 쉽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왔지만 한 주간 동안 힘들고 지치고 낙심이 된 채, 환호성과 기쁨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사춘기 자녀를 안아 보셨습니까?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 표정이 없어집니다. 대답도 단 답입니다. “, 아니요, 몰라요그 아이들을 안으면 전봇대를 끌어안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예배하는 우리가 꼭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스티브 브라운 교수가 [하나님을 누리는 기쁨]이란 책에서 두 아이를 둔 어느 엄마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장에서 퇴근하여 집에 왔더니 둘째 아이가 하루 종일 진창에서 놀았는지 옷과 얼굴이 너무나 더러워져 있더랍니다.

 

그 아이가 엄마를 보고 반갑다고 웃으며 달려와 안기는데, 더러운 몸을 안아주지 않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 때, 생각했답니다. “뻣뻣한 아이보다 더러운 아이를 끌어안는 게 훨씬 쉽더라고요큰 아이는 사춘기인데, 매사에 뻣뻣하고 말도 안하고 불만이 가득하여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이야기, 아시지요? 아버지는 죄짓고 더러워진 아들은 얼마든지 품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뻣뻣한 큰 아들은 좀처럼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정말 주일 한번 빠지지 않고 예배 잘 드렸습니다. 어린 시절 예배 잘 드렸다고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찬양을 드렸었나 생각하면 아니었습니다. 예배 때 제 모습은 사춘기가 된 아이 표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서 제 예배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너는 왜 내 앞에만 나오면 그렇게 화난 얼굴이냐?”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배드리는 우리의 겉모습은 교양 있고 경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가 첫째 아들 같이 너무 뻣뻣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환호성과 기쁨이 가득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예배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하러 갈 때, “춤추러 가자하면 어떻겠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춤추러 왔어!” 그 느낌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심정이 진정한 예배 자의 마음입니다.

 

이런 예배는 마음에 기쁨의 기적이 일어난 사람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쁨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3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 ...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양임을 분명히 알게 될 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 알게 될 때, 우리 안에서 환경과 처지에 상관없이 즐거움과 기쁨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장애를 가진 여 성도님이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그 분은 장애로 인하여 심한 우울증을 앓으셨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제가 왜 장애인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저의 가정 형편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저의 존재를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세상을 장애와 비 장애라는 기준 하나로 나누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안하신다.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화목하고 온전한 가족 안에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정말 궁금했습니다. “주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당신이 내 창조주가 맞습니까? 내 삶의 주관자가 맞습니까?” 주님께 막 따졌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게 맞습니까? 왜 날 만들었나요?”

 

그 분이 이렇게 주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였을 때, 우연히 [눈으로 보는 현실과 믿음으로 보는 진실]이란 제목의 제 설교를 듣고 그동안 원망의 제목이었던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으셔서 이 세상에 차별과 고통.. 전쟁과 굶주림.. 미움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제 장애가 하나님 앞으로 나를 데려갔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게 만든 그 고통과 상처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나를 이끌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지금 저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이제 큰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내게 허락한 그 장애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온전하신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그 고통의 멍에를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상처와 고통이 축복이 되었고, 나에게 죽음이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 분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기쁨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몸이 너무 아팠던 사모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젊은 사모님이신데 병명도 모르고 너무 오래 아프니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유언도 남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 낙망하고 있을 때, 말씀 한 구절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냐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 병든 내 몸 안에도 오셨다.’라고 깨달으니 찬양이 나오더랍니다. 그 때 사모님은 깨달았습니다. 병이 완전히 나아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으며, 그 때 주님이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후 몸이 힘들수록 더욱 찬양을 주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이렇게 아픈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서 주님의 돌보심을 더욱 누리게 되었고, 남편 목사님과 아들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울하던 가정에 기쁨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사기도 후에,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사모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되어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기야 불어와라하루는 아들 친구가 집에서 놀다가 밥을 먹게 되었는데, 가족들이 사모님에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그 아이도 사모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세요.”

 

하루는 아들과 대화하다가, 물었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프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해?” 그랬더니,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막 노래를 부르면서 찬양해야지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질병을 통하여 아들의 믿음을 세워 가심에 너무나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눈이 뜨이면 어떤 형편에서도 기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이 믿어지는 성도에겐 특징이 있습니다.

얼굴이 밝다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 시대에 금광을 찾아 나섰다던 사람 몇이서 금맥을 발견했습니다.

마을로 돌아가 금을 캘 준비를 하고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새어나가면 안 되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자기들만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습니다.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서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누가 폭로했어?”

그러나 비밀을 폭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금광을 발견한 것을 당신들이 어떻게 알았소?"

"당신들 얼굴을 보고 알았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줄 어떻게 압니까? 예수 믿는 우리 얼굴을 보고 알지요!

:4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의 기적입니다. 정말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기쁨의 기적, 여러분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의 기적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큐티를 하고 새벽 기도회에 나오고 제자 훈련을 받고 단기 선교를 가고 영성 일기를 써야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기쁨의 근원은 아닙니다.

기쁨의 기적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성실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임합니다.

:5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하나님께서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으로 예배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기쁨이 넘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보면 기쁘시지요? 때로 속 썩이기도 하지만 자녀는 부모의 기쁨의 이유입니다. 잘 생겨서 그렇습니까? 똑똑해서 그렇습니까? 말을 잘 들어서 그렇습니까? 부모 자신이 낳았기 때문에 자녀를 보면 기쁜 것입니다. 조건 때문이 아니고 존재 자체 때문에 소중하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주님의 마음에 이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기쁨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 2부는 크리스쳔의 아내 크리스티아가 자비 양과 함께 천국까지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하루는 자비 양이 자다가 웃는 소리를 듣고, 크리스티나가 이렇게 힘든데, 자다가 왜 웃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자비 양이 대답했습니다.

 

꿈속에서 자신이 더러운 모습으로 누더기 옷을 걸친 채 자신의 무정한 마음에 대해 탄식하고 있었는데, 한 천사가 자기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 묻기에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더니 천사가 너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하며 자신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더니 금과 은으로 된 옷을 입혀 주고 목걸이와 귀걸이, 머리에는 아름다운 관을 씌워 주고 손을 잡고 자비 양 나를 따라 오세요하며 이끌고 어디론가 데려 가더랍니다.

 

그랬더니 황금 문이 나타났는데, 굳게 닫혀 있더랍니다. 그런데 천사가 가서 뭐라고 말하자 그 문이 활짝 열리는데, 별처럼,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곳이더랍니다. 황금 문을 지나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까지 갔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내 딸아, 환영한다."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안 웃을 수 있었겠어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의 기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을 24 시간 바라보는 자에게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결코 힘든 말씀이 아닙니다. 기쁨의 기적은 희미한 주님이 분명한 주님으로 바라보아질 때 이루어집니다.

 

제 삶에 가장 힘든 때 중 하나가 군목 임관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목발을 집고 다니며 제가 일할 교회를 찾아 다녔지만 한 달이 지나도 저를 써 줄 교회란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기도만 하면서 저에게 와서 일하라는 교회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겠습니까? 아마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믿음을 다 잃어 버렸든지, 다시 뛰쳐나가 사람들에게 부탁하러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평안하고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성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찾아 읽으려 하다가 혼자서 하는 성경 공부에 푹 빠졌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고 저와 함께 하셨고 제게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런 시간이 끝날 것이 아쉬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기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결국 3개월 뒤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부목사로 부임해 갈 때, 제 안에는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성경 공부 한 것이 [예수님의 사람] 제자 훈련 교재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막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분명히 바라보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 기쁨을 구걸하며 살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의 예언이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admin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100:1-5

2018-04-18 03:30:25

 

온 땅이여 야훼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100:1~5)

 

 

오늘은 시편 1001절로 5절 말씀 가지고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일생은 감사의 일생이 되어야만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니 예수 믿는 그날부터 하늘나라 갈 때까지 우리의 입에서는 넘치는 감사가 주님께 올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감사와 찬양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교회 직분을 받으면 더 받을수록 더 넘치는 감사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는데 그 삶에 감사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를 만나도, 어려움 당해도, 환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감사로 나아갈 때 하나님 기뻐하시고 그의 삶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심해야 됩니다. “주님, 한평생 감사하며 살기 원합니다. 어떤 문제와 어려움을 당해도 넘치는 감사로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1. 찬양과 감사

 

첫째로, 우리의 일생 동안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될 것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시편 1001절과 2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온 땅이여 야훼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은혜의 찬송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나아갈 때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땅이여 즐겁게 주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즐거운 소리로 찬양하라는 이 표현의 원어 내용을 보면 환호를 지르며 기뻐 뛰고 즐거워하며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어저께 뉴스를 보니까 페루가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시합에서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골이 들어갈 때마다 페루에서 지진이 측정되었대요. 그런데 그 시간을 보니까 골이 들어갈 때 !” 소리를 지르면서 막 온 국민이 난리를 하니까 그것이 진동이 와가지고 지진계에 잡혔다는 거예요.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아니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그렇게 막 온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골 하나만 넣어도 그냥 지진계가 움직일 정도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우리가 한참 감사가 부족하다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넘치는 감사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이사야 4321절에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찬양과 감사로 나아갈 때 하나님 기뻐 받으시고 하늘의 문을 활짝 여시사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 입에서 찬양과 감사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무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책인 시편 맨 마지막의 결론입니다. 시편 1506절에 말씀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호흡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망에 처했을 때 감사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문제가 변하여 응답과 축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짧은 인생길 지나가는 동안에 넘치는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5023절에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그 행위를 옳다 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감사하지 아니하면 그 행위가 옳은 것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모습을 가졌다고 하면 이 순간부터 바꾸어야 됩니다. 입만 열면 늘 남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부정적인 얘기만 쏟아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뭐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입술이 바뀌어 감사하는 입술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도 잘 풀리고, 건강도 좋아지고, 내가 하는 일에 정말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고, 범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1620,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에서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라고 하는 배를 타고 65일 간을 항해해서 미국 북동부 지역에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라는 지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102명이 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이 102명을 기념해서 지은 빌딩이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입니다. 102층으로 되어있는데. 그해 겨울을 지나면서 마흔네 명이 추위로, 굶주림으로,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 플리머스 지역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교회를 지은 일이고 그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 일입니다.

 

그리고 봄이 되어서 저들이 나가서 농사를 짓는데 대부분이 농사를 지어본 일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농사를 지어서 가을 첫 수확을 거둬들이게 되었는데, 그 수확이 그렇게 풍성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넘치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영국에 모든 자신들의 삶의 기본 재산을 다 내려놓고 왔는데, 전 재산을 다 영국에 내려놓고 온 것에 대해서 그들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65일 동안 배를 타고 오면서 고생했던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이 지나면서 마흔네 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 해 동안 크게 고생해서 수확이 별로 많지 않은 것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서 넘치는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또 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날짐승이었던 칠면조를 잡아서 음식을 해서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3일 동안이나 감사 예배를 드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건립 정신입니다. 기독교 정신, 감사 정신. 할렐루야!

 

이것이 북동부 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지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래서 11월 말쯤 되면 너도나도 모여서 감사하게 되었는데,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1843,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전쟁 중에, 또 북군이 남군에게 막 밀려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을 때, 그런 고난 중에 감사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감사하자. 진정한 감사는 고난 중에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 절기를 지켜오다가 1941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11월 넷째 목요일로 고정을 해서, 넷째 목요일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은 11월 넷째 목요일인 추수감사절인데, , , , , 주일, 닷새를 추수감사절 절기로 지킵니다. 그때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 모여서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예배드리고 주 앞에 감사를 드리는 그러한 귀한 시간을 갖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뼈아픈 남북 갈등에서 비롯된 미망인, 고아, 가까운 이를 잃어 슬퍼하는 자, 전쟁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과 상처 난 미국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추수감사절에 대한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에서의 감사절은 어두운 조선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서 교회가 세워진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비록 나라는 외세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지만, 기독교의 전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수확한 곡식과 열매로 인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하는 날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감사절은 어두운 이 나라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복음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하는 날이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여러분, 진정한 감사는 고난 중에 드려진 감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어려움을 당하든지, 문제를 만나든지, 가족 중에 누가 아프든지,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많은 고난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둘째로,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신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시편 1003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우리의 한평생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신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 할렐루야! 시편 627절입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나의 구원이 나의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반석이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 모든 만물과 구별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눈, , , 우리와 같은 그러한 형상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창세기 1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27절에도 말씀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다음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는데 그 생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언어로 루아흐라고 하는데 이 루아흐라는 말은 영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숨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바람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생기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헬라말로 바뀔 때 프뉴마라고 합니다. 프뉴마. 우리 청년국에 프뉴마라고 하는 부서가 있는데요, 이 프뉴마라는 뜻이 이 루아흐라는 말이고 그 말이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생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흙으로 사람을 지은 다음 하고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심으로 이제 우리가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7절은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고 계신 이용규 선교사님이 최근에 가정에 대한 책을 하나 쓰셨습니다. 제가 엊그제 그 책을 받아서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좀 펼쳐보았습니다. 보면서 그 선교사님의 진솔한 간증을 통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몽골에서 사역하는 중에 그 학생 한사람과 상담을 하는데, 신앙이 들어갔는데 많은 고난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동생이 자살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열심히 주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데도 되는 일이 없이 다 집안일에 어려움만 다가오고 또 동생은 자살을 하고...’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려고 할 때, 그때에 선교사님이 질문을 한 가지 합니다.

 

너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냐?”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기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자기가 잘 살아보려고 했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많았던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그것이 내게 절망이고 아픔이고 상처고 슬픔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다 맡겼더라면 내가 이런 상처가 없었을 터인데... 다 하나님께 맡겼더라면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겼을 터인데... 그래서 그 자매가 말씀 듣고 다시 자신을 돌이키게 되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냐?,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냐?’ 우리가 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멘은 잘하는데 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게 많아요. 왜 상처를 받습니까?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상처를 받는 거예요. 내가 하려고 하니까 상처가 되는 거죠. 하나님께 다 맡겼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어요.

 

왜 분노합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뜻대로 안 되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왜 다툽니까? 하나님이 문제를 다 해결해주실 것인데 내 뜻대로 하려고 그렇게 주장을 하다보니까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존귀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이후로 우리의 믿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모습이 되어서 다 맡깁니다. 내 문제도 맡기고, 내 가정도 맡기고, 내 자녀도 맡기고, 다 맡깁니다. 다 맡깁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늘 물어보세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충분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 외에 돈도 필요하고, 높은 자리도 필요하고, 내가 나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자꾸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진다고 하면, 아직 나는 주님 보시기에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인데 순서가 바뀐 거예요. 내가 다 모든 것을 챙기고 나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백성 되기를 바랍니다.

 

 

3.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하여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10045절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흠이 많고 하나님은 흠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어냐?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본분인 것입니다. 시편 291절로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야훼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야훼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야훼께 예배할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인하여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얼마나 문제가 많았던 사람인지 모릅니다.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때로 남을 짓밟고 피해를 주었던 적도 있습니다. 나의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적도 있고 남을 속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인자하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우린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어디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죄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택하고 구원하여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해방 받았는데도 불평하고 또 불평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40년 동안 먹이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셔서 가나안까지 저들을 이끄셔서 여호수아와 그의 자손들이 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또 불평하고 또 원망하고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해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다가 삼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 사 대째 가서 나눠집니다.

 

그래서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 때 북 왕국 이스라엘, 남 왕국 유다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회개하지 않고 또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니까 북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남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주전 586년에 망합니다. 망했는데도 하나님이 또 사랑하셔서 70년 만에 포로 생활 끝에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저들이 절망 가운데 살고 있을 때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저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주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첫째로는 유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로는 온 우주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그저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시편 1061절은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소아조로증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소아조로증. 남들보다 여덟 배가 빨리 자란답니다, 여덟 배. 여덟 배. 그러니까 한 살이 되면 여덟 살이 된 거에요. 그런데 홍원기라고 하는 이 학생은 지금 열두 살인데요, 107센티 14킬로그램, 그런데 신체 나이는 팔십 세. 이 소아조로증 때문에 그렇답니다. 평균수명이 십대 중반. 그래서 보통 십오 세에서 십칠 세 사이에 세상을 떠난답니다.

 

다섯 살 때 발달 속도가 더뎌 검사를 받았더니, “소아조로증입니다.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이면 사망합니다.”라고 하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신데도 너무 기가 막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아조로증이 대한민국에 한 명 있다는데, 어떻게 그 한 명이 하필이면 원기인지. 아버지께 제 삶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많은 것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보통 아이처럼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불쌍한 우리 원기 도와주세요!”

 

수없이 이유를 물었지만 답이 없으신 하나님. 사 년 뒤 미국 조로증연구센터에서 새로운 약이 나와서 임상 실험을 하는데 이 아이에게 실험해 보겠냐고 그래서 그 약을 받아왔는데, 너무 독해가지고 먹는 족족이 토하다가 결국 위벽이 헐어가지고 피를 쏟아내는 바람에 투약을 중단합니다. 병을 알게 된 원기는 이렇게 기도해서 부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엄마, 나 엄마보다 하늘나라 먼저 가는 거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 빨리 데려가지 마세요. 엄마랑 동생이랑 오래오래 살래요!’”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죽음 또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받아들이면서 온 가족이 지금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자. 어차피 우리에게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오는데 이렇게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말고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자.’ 할렐루야! 아버님의 고백입니다.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원기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아내와 저는 원기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걱정만 했다는 것을, 원기의 그 예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 번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저한테 원기를 주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매일 슬퍼했을 텐데, 전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그래서 저한테 원기를 주셨다는 것을요.” 열두 살 생일 때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원기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준 아버지의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가족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원기도 신앙적인 고백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만나러 가요. 그건 하나님만 아세요. 그러니까 매일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면 되요.”

 

목사님이 쓴 책, 새끼손가락 아들이라는 책의 고백입니다. “한때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아들과 함께하는 그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원망과 분노는 사라져버렸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즐겁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니까. 온 힘을 다해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삶이 내게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되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자체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 있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절망을 바라보지 말고, 상처를 바라보지 말고, 아픔을 바라보지 말고 내가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남은 여생을 매일매일같이 감사하며 살리라.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리라.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다 죄덩어리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우린 늘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인 말을 쏟아놓으며 살았습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주옵소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부터 먼저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무장해서 감사의 언어를 쏟아놓을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이 달라져서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너무나 부정적인 이야기가 꽉 들어찬 우리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긍정의 고백이 바꾸게 하여주시옵소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아들을 두고도 매일매일 감사할 수 있는 그 큰 믿음의 모습을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게 하여주시고, 남은 여생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admin

 

 

감사가 예배입니다(2)/100:1-5

2004-05-22 10:20:26

 

 

많은 성도들이 형식화된 감사의 모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해도 속으로 감사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다가갈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하며 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마음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로 올해 전반기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절기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모두 감사헌금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헌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게 바로 여러분의 감사의 마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두 시간에 이어, 다시 한번 감사에 대하여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5) 이 구절은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노래하고 성전에 들어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선 자신에 대하여 알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3) 그걸 알아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은 이름을 아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의 인격과 관계를 형성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알아도 그가 모르면 그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목회를 하고 큰 능력을 행하였어도 주여 주여하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을 주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내가 안다고 하여도 그분이 모르신다 하면, 그건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인격이 선하고 인자하시며 성실하시다는 걸 알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랑과 공의를 베푸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아버지의 실력을 아는 아들이 지켜보는 모든 사람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기쁨으로 맡길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맡긴 사람이 감사한 마음이 없을 리 없습니다. 선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선하게 일을 처리하신다는 걸 믿으면 기다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선한 분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고 도망칠 분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 이용당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선하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5)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릴 이용하거나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분이 아니란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실 뿐 아니라 성실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다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바로,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믿을 때 나오는 인간의 반응입니다. 감사의 반대는 불평과 불안, 염려와 근심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믿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인간 심리의 작용입니다. 감사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못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감사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감사는 관심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다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초청에 응하십니다. 막 집에 들어가 앉자 한 여인이 다가와 향유 옥합을 깨드려 울며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입 맞추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를 보고 예수님이 만약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얼마나 죄인인 줄 알고 꾸짖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큰 사람일수록 용서받으면 더욱 감사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초청한 바리새인은 하지 아니한 회개와 감사를 그 여인은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구원받았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관심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초청하긴 했지만 예수님에게 이 여인이 가진 것만큼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바로 감사를 낳게 합니다.

 

감사는 피차 관심을 가질 때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10:30,31]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나 지신도 못 세고 있는 머리카락을 하나님은 다 세고 계신답니다. 이보다 더 큰 관심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죽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거기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감사가 관심에서 비롯되지만, 감사는 다시 하나님의 관심을 낳습니다. [7: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이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은 관심이 없었지만 이 여인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관심도 이 여인에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구원을 선포하고 평안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당연히 알 내용입니다. 바로 그것을 안 자가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는 예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염려와 두려움에 갇혀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원망과 불평 속에 갇혀 삽니다. 하나님은 자신은 바로 인류를 지으신 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양떼라는 것을 알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염려나 두려움, 혹은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게 되어 감사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실력이 감사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수학실력이 있는 사람은 모의고사든, 학교시험이든 수학문제 앞에서는 걱정을 안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실력이 있으면 어디서든 언제든지 불평이나 염려가 아니고 감사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삶 자체입니다. 신앙의 실력이 있다는 말은 영적 상태가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상태가 안 좋으면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과 염려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지금 상태가 영적으로 어떤지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범사라는 말을 유념해야 합니다. 감사가 예배라고 할 때 어떻게 범사에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범사가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배는 의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면, 범사에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드러내며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가 예배입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는 자랑은 예배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만을 드러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듯, 범사로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것을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감사로 여는 삶으로 예배를 살아있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버린 돌, 머릿돌 /종려주일 /118:19-29/ 김기석목사

2019-05-02 01:25:22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 나뭇가지로 축제의 단을 장식하고, 제단의 뿔도 꾸며라.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겠습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호산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남산에는 벚꽃이 한창이고 조팝나무 흰 꽃도 세상을 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꽃 시절을 한갓지게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이웃 가운데 아픈 기억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동해안 일대에 일어난 산불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들은 망연자실한 채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검게 탄 것은 숲만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가슴은 여전히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5주기가 다가옵니다. 유족들은 여전히 그 참담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픔의 기억을 안고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나귀를 타는 행위는 상징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순례의 명절에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에 몰리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로마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보내곤 했습니다. 로마 군단의 깃발과 기마병을 앞세운 그 행렬은 조금이라도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다 죽는다는 무언의 협박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의 행렬은 로마군인들의 행렬과 대비됩니다. 느릿느릿 걷는 나귀는 평화 시대를 상징합니다.

 

옛날에 솔로몬은 선왕인 다윗의 나귀를 타고 기혼에 가서 사독 제사장과 나단 예언자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고 나귀를 탄 채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습니다(왕상1:45). 그의 통치 시대가 평화의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겁니다.

 

사람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셨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 깔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11:9-10)

 

민족주의적 열정과 아울러 종교적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호산나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이지만 오시는 주님에 대한 찬양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오랜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생활에 지쳤을 법도 하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선민이라는 자부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시대의 영화로움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왔으니 그런 열망이 더욱 커졌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3대 순례 명절이 되면 할렐 시편을 부르곤 했습니다. 할렐 시편이란 할렐루야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시를 말합니다. 삶이 제 아무리 곤고하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었기에 할렐 시편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시편 118편에는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 시도 할렐 시편에 포함시킵니다. 그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 시편은 찬양대가 축제에 참석한 회중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제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집을 향해 나아가면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주님의 통치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합니다.

 

찬양대는 이스라엘 온 백성과 아론의 집 곧 제사장의 무리,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소개된 개종자들을 찬양의 자리로 부릅니다. 찬양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없기에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기에 주님이 인자하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으며, 원하는 모든 일을 이루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치 않는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괴롭힐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고백은 기억 공동체에 속하여 있을 때 비로소 진실한 고백이 됩니다. 홀로 겪을 때 고통이 우리를 압도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겪을 때 고통은 상대화되게 마련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은 통속적이지만 삶의 경험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배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내가 홀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다른 이들 역시 나 못지않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때 비애는 줄어들고, 고통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여유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하나님이 베푸신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기행사를 통해 그들은 조상들이 경험했던 구원의 감격을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맛보았습니다.

 

할렐 시편을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은 당장은 해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다”(118:5).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곤경에 빠진 자를 건져 넓은 곳에 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 속에 머물 때 우리는 살아갈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118:6) 이런 담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학자인 알란 뵈삭은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절하였다가 화덕 속에 던져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불을 끄지 않으셨다. 그 이상을 하셨다. 하나님은 맹렬히 타오르는 화덕 속에 들어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들은 순종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순종에 뒤따르는 신적 연대성의 기쁨을 발견했다“(Allan Boesak, , WCC, 1984, p.32).

 

이사야도 위험이나 시험을 없애주시기보다는 그것을 함께 감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63:9). 사랑과 긍휼로 구하여 주시고, 백성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시련과 괴로움은 쓰라리지만 우리는 그 모든 난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삶의 이유

이런 확신이 있는 이들은 세상의 위협 앞에서 위축되거나 뒷걸음질치지 않고 당당하게 선 사람이 됩니다. 시인은 10절부터 12절 사이에서 자기를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이들을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물리칠 수 있었다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불의 혹은 어둠과 맞서 싸우지 않고는 이런 고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사는 이들은 이런 강건한 고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런 반복된 경험을 통해 시인은 마침내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분”(118:14)이라는 고백에 이릅니다.

 

주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유월절 이야기의 핵심은 노예생활로부터 자유로, 애도에서 축제로, 모욕에서 존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그런 삶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주님은 죽음이 삶의 최종적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고, 죽음을 넘어서는 참 생명을 우리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고통 앞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거쳐 기쁨에 이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118:17)고 노래합니다. 삶의 이유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세상 앞에 전할 삶의 이야기가 있는지요? 믿음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맛본 영적 자유로움을 증언할 수 있는지요?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순례자들은 이제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118:19)고 노래합니다. 그 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21:27).

 

순례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118:22)는 고백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류 세계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들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8).

 

왜 그럴까요?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지금 아픈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형편에 처한 이들의 심정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절감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괴감에 빠진 이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기에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으며, 연약한 이들의 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하신 것은 그가 넘어진 적이 없는 강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을 넘어 희망에 이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의 신비나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주간 주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유대인인 카프란(Moredechai Kaplan)의 말이 제게는 큰 도전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회당에 들어올 때의 그 사람으로 회당을 떠난다면, 당신은 회당에 오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순절을 지나고도 여전히 옛 사람에 머문다면 우리는 사순절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도 오늘의 시인이 당도했던 신앙고백에 이를 수 있기를 빕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행보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에서 천대받고 잊혀진 이들 곁에 다가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곳에 주님이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주님은 내 편이시다 /118:1-29/ 유기성목사

2018-11-23 01:01:15

 

118: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이스라엘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3 아론의 집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4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5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다. 6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 7 주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망하는 것을 내가 볼 것이다. 8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 9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10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 11 그들이 나를 겹겹이 에워쌌으나,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 12 그들이 나를 벌떼처럼 에워싸고, 가시덤불에 붙은 불처럼 나를 삼키려고 하였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

 

13 네가 나를 밀어서 넘어뜨리려고 하였어도,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다. 14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15 의인의 장막에서 환호하는 소리,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16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18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19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20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21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2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23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24 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25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26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27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 나뭇가지로 축제의 단을 장식하고, 제단의 뿔도 꾸며라.

28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겠습니다.

29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 라는 확신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 라고 믿어지는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118편에서 시편 기자는 주님은 내 편이시다.” 두 번 반복하여 고백했습니다.

:6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 :7 주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망하는 것을 내가 볼 것이다.

주님이 내 편이시므로 어떤 사람도 두렵지 않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렇게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기자는 :1-4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고백을 네 번 반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실제 체험하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편 기자는 극심한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5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다.

 

어느 정도의 고난이었는지, :10에 나옵니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지만.' 이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다 적이 되어서 포위한 것처럼 느꼈다는 말입니다. :12에서는 '그들이 나를 벌떼처럼 에워싸고, 가시덤불에 붙은 불처럼 나를 삼키려고 하였지만' 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는 누가 보아도 죽을 사람이지 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구원을 체험하였기에 시편 118편 전체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은 내 편이시다.’ 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은 내 편이시다.’ 담대히 고백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보고 하나님이 내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다면 하나님이 내 편이신 것 같습니다.

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실패하면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큰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이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과연 관심을 기울여 주실까? 목사님도 나를 잘 모르실텐데 이 한편 구석에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과연 아실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43:0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에겐 주님은 내 편이시다.” 라는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3:1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하였는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주님이 내 편이시다.’ 믿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또한 주님이 내 편이심을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야말로 주님은 내 편이라는 분명하고 담대한 확신을 가질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어도 충분할 만큼 너무나도 분명한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편이라는 확신이 대단히 위험한 신앙일 수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조차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무서운 자기중심적인 신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울 때, 여호와의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라고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어쩔 수없이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하게 패배하고 여호와의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 편이라.’ 외친다고 주님이 내 편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이 자기에게 있고,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자기가 옳은 대로 행하고 살면서 주님이 내 편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항상 부모님이 자기편이 되어주시는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 편에서 한번 생각해보지 못하였습니다. 부모가 되어보니 얼마나 잘못했는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하든지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 내 편 되어 주세요.’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편이 되어 주셨는데, 왜 또 구하겠습니까? 믿으면 됩니다.

믿었다면 하나님 편에 서기만 힘써야 합니다.

자기중심인 사람이 주님은 내 편이라.” 하면 위험하지만 항상 주님의 편에 서기를 힘쓰는 사람이 주님은 내 편이라.”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다.’ 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는 실제로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8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9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그는 어떤 사람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비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 나에게 오세요.”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주님께로 갔습니다.

이런 자세가 분명하면 주님은 내 편이라는 고백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10-12에 보면 시편 기자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주님의 이름으로원수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했습니다.

:12 그들이 나를 벌떼처럼 에워싸고, 가시덤불에 붙은 불처럼 나를 삼키려고 하였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

 

시편 기자는 철저히 주님의 이름으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생각나게 합니다. 9척 거인 골리앗 앞에 섰던 소년 목동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하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내 편이라.” 확신하는 사람의 태도요, 진정한 믿음입니다.

 

시편 기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14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을 알기에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만 찬양할 뿐입니다.

 

그는 더 이상 죽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18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이 구절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오래 살까?’ 를 고민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서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할까?’ 그 생각만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케리 슉 목사와 그의 아내 크리스 슉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삶을 더욱 값지게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기쁨도 감동도 만족도 없다면 삶이 한 달만 남아 있다고 가정해볼 것을 제안합니다.

여러분 한 달만 살 수 있다면 한 달 동안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동안 미뤄두기만 했던, 진심으로 원하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소중하고 아침마다 감사하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표현할 것입니다.

전에는 하려고하지 않았던 모험을 감행할 것입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세상의 풍경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면 한 달 밖에 살지 못하게 된 것도 복이 됩니다.

영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삶, 하나님이 애초에 의도하셨던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된 사람은 죽음조차 복이 됩니다.

 

시편 기자는 예배의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19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20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예배 찬송인데, 시편 기자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반드시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자리는 강연회장도 아니고 발표회장도 연주회장도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찬양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배 때 우리는 정말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노방 찬양전도를 나갔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상 길거리에서 찬양하니 세상의 왕 노릇하는 마귀가 노려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찬양하는 대열에 서지 못하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를 보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때는 마귀가 노려보는 것을 느끼면서 예배하면서 주님이 보시는 것은 느끼지 못하십니까?

 

아기학교 전도사님, 4살짜리 어린아이의 고백을 전해 주었습니다. “전도사님, 좋으신 하나님 찬송만하면 눈물이 나요!”

4살짜리 어린아이가 은혜를 느낍니다!

 

[영상] 유아부실에서 기도하는 아기

 

우리가 예배 때마다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면 예배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약하고 무능하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택하여 쓰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2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23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다고 인용하셨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우리가 정말 이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버림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택하여 쓰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질그릇 같을지라도 보배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 교회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들이 놓인 찬장과 같다고 했습니다! 정말 절묘한 비유입니다. 서로 말씀하실까요. “조심하세요. 잘못 건드리면 깨져요.” 그러나 깨질까봐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대답하실까요. “괜찮아요, 깨져봐야 값도 얼마 안 나가요!”

 

그렇지만 우리는 서서 서로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릇은 별거 아니지만, 담겨있는 것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26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내 편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다른 성도들을 보는 눈도 새롭게 열립니다. 그도 역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자요, “주님이 내 편이라.”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려면 주님을 분명히 체험해야 합니다.

여러분, 태양이 얼마나 뜨겁고 큰지 배워 알지만 실제로 보게 될 때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천국이 있음을 알지만 실제 가서 보게 되면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원망 불평 탄식 슬픔이 다 사라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3: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하시고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멀리서 바라보게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도 멀리서 보는 것과 들어가서 보는 것이 다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보배이시라는 말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밀히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 따라오라는 식의 신앙생활은 청산해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당연히 그의 편이 되십니다.

 

여러분, 매일 한 시간 기도합시다. 시편 기자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기도가 없다면 공허한 고백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서로 기도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담대히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19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아멘!

이처럼 고백하고 노래하며 살기 원하는 분들은 다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합시다.

 

찬양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 이시요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admin

 

댁쟾쇰줈

 

 

 

여호와는 나의 능력 /118:14-21/ 옥한흠목사

2014-11-09 17:44:26

 

저는 오늘 읽은 이 시편 말씀을 굉장히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지난 천년

사이에 이 세상에 등장한 많은 설교자들 가운데서 열 명을 뽑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설교자 한 분이 있는데 바로 영국의 유명한 스펄젼 목사입니

.

 

그 목사님도 이 본문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50세 되던 해,

희년을 기념해서 교회에서 쥬빌리 하우스라는 기념관을 세워 드렸는데,

건물의 머릿돌 위에다 스펄젼 목사님이 이 본문 말씀을 새겼습니다. 그러면

 

서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본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세기에 한 사

람 날까 말까 한 위대한 설교자라면 어떤 면에서 굉장히 화려한 목회를 했

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이 말씀을 그렇게 좋아

했을까요?

 

이는 그에게 정말로 어려운 위기가 자주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도 있었고, 힘이 빠져서 주저 앉고 싶은 때도 한 두 번

이 아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

을 그토록 마음으로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나중에는 돌비에다 새겨 놓을 정

도로 그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오늘 세

례 받으시는 분들은 예수 믿고 세례 받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

고 영광이며 은혜인 줄 아십니까?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이와 같은 신령

 

한 지식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아마 전체의 1/100도 안될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이 대단합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힘이

, 나의 구원이 되신다.'고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우주를 보

 

존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함과

전지전능하신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나에게 구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리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우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

들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합니

.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의인이 됩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사는 가정은 의인의

장막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의인이 된 사람에게와 의인의 가정이 된 집안

에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십니다. 구원이 되십니다. 찬송이 되십니다. 믿

 

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 그 사람은 의인이

, 그 가정은 의인의 장막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에 어디 그런 가정이 있

습니까?

 

세상에 어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나 하나님을 나의 능력이

라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이 되시는 겁니까? 아무나

자기 가정을 의인의 장막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실제로 그 가정이 의인의 장

막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인정을 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는 예수 믿고 의인이 되었고 우리 가정은 의인의 장막이 되었습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요, 나의 찬송이요, 나의 구원이 되셨다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다윗은 먼저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나의 힘

이라고 소리쳤습니다. 15, 16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

 

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

도다.' 권능을 베푼다는 말은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제가 어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해질 무렵 집 옆에 있는 중학교 마당에

가서 산보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쳐다 봤습니다.

그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우리 집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의 장막이지.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에 약속하신 대로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우리집을 덮고 계시고, 우리 가정에 축복하고 계시며, 능력을 베풀

고 계시는구나.' 그러자 정말 우리집 위에 하나님의 오른손이 덮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우리집만 입니까? 그 아파트에 예수 믿는

가정이 한두 가정입니까? 사랑의교회 나오시는 분들이 한두 가정이 아닙니

.

 

그 가정,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시고 강하신 오른손이 덮고 있다는 것

을 저는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몸을 돌려서 삼익 아파트를 보았는데 거

기에도 하나님의 손이 있었습니다. 또 저 서쪽을 쳐다 보니 삼풍 아파트가

보였습니다.

 

삼풍 아파트에도 하나님의 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도 하나님을 믿는 의인의 장막이 한두 가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

가정에 하나님이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할렐

루야! 밤낮 없이 하나님이 오른손을 들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고 믿으면 어지간한 힘든

일을 만나도 주저 앉지 않습니다. 주저 앉았다가도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섭

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면 필

요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쓰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남 보기에는 배운 것도

별로 없을지 모릅니다. 남 보기에는 성공을 못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보기에는 그렇게 대단하게 살지 못하는 초라한 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엄청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손을 들고 보호하

고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

?

 

세상 사람들에게는 초라하게 보여도 우리는 절대로 만만한 존재가 아닙

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죽는 것 같아도 절대 죽지 않습니

.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어려움

을 많이 겪은 사람이 아닙니까? 시편 118편에 나오는 배경을 보면 그 사실

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열방이 나를 에워쌌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적이 되어서 자기를 포위한 것처

럼 느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저희가 벌

떼와 같이 나를 에워싸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 들었다.' 얼마나 위기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의인입니다. 다윗의 가정은 하나님이 지

 

키시는 의의 장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가정을 위기에서 건져 주셨

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너희

들 보기에 내가 죽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

.

 

나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 붙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이 잘

못한 것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매를 드시기는

했어도, 절대로 그를 죽음에는 붙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가 살았다는 이야

기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루하루

를 기적같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기적같이 산다는 말을 할 때는 함부로 하

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사고를 당하여 다치거

나 죽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멀쩡한 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인가요?

내가 운전을 잘해서 그렇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만 가지 병균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살고

 

있는 것이 내가 건강 관리를 잘해서 그런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

원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길에서 구원해 주시고, 모든 병마에

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나 잘났다' 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하루 아침에 집안이 폭삭 망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

도 불구하고 내가 삼십 세, 사십 세, 오십 세, 육십 세 될 때까지 이만큼

 

우리 가정이 화목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 주

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 잘나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구원이 되셨기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

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주님께 예배 드리고 있지 않

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 되셨기에 간혹 내가 잘못할 때라도 하나님께

서 경책 하시기는 하지만, 나를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습니다.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망하는 데서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

는 사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 병이 들었다고 해서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공포에 떨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쉽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우리는 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데 어떻게 우리

입에서 찬송이 안 나오겠습니까?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다오. 내가 하

나님 앞에 가 그리로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 입에서

이런 찬송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앉았을 때는 굉장히 경건한

것처럼 찬송도 잘 하고 하나님께 감사도 많이 하는 것 같아도, 집에 가면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

 

는 사람이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몹시 어려움을 당

하던 시절에 살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서 얼마나 팔자가 늘어졌습니까? 그럼

에도 불구하고 왜 불평합니까? 남편에 대해서 왜 불평합니까? 왜 아내에 대

 

해서 불만인가요?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이 아내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날마다

엎드려 절은 못할지언정 감사는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자녀들을 놓고 한

번 보십시오. 자녀들로 인해서 고통 당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

?

 

그래도 이만큼 잘 자라 주고, 이만큼 순종하는 자녀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동을 보아도 감사하고, 서를 보아도 감사하고, 그저 감사할 것

뿐인데, 왜 집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얼굴이 찌그러지

고 기쁨이 없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가정에 구원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것

을 모르고, 내가 잘나서 사는 줄 알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터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만한 삶을 살면 안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의 은혜

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됩니다. 외출을 하고 들어와도 '하나님,

 

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나를 지켜 주셨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건재하게 집에

돌아 왔습니다.' 하고 생각하면 감사가 있습니다. 병원에 가 보십시오.

마나 많은 사람이 병상에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내 폐를 지켜 주

시고, 간을 지켜 주시고, 내 혈압을 지켜 주시니, 그래도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

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면 무슨 불

평이 있습니까?

 

열 평짜리 아파트면 어떻고, 백 평짜리 아파트면 어떻습니

?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입에서 감사

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

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

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

세주'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의 장막

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

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

.'

 

할렐루야! '그러므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

리로다. 의의 문을 내게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

리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능력 있는 삶을 사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울수록 원칙을 지켜라 /6:1-10

2020-01-18 07:01:43

 

일본의 최고 부자가 누군지 아는가? ‘손정의라는 재일교포 출신의 일본인이다. 그가 가진 재산은 삼성 이건희 회장의 두배이다.

 

손정의는 열다섯 살 때 <료마가 간다>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관이 송두리채 달라졌다고 말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손정의가 감동한 것은 자신의 돈, 지위, 명예 때문이 아니라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스스로의 목숨까지 내던진 료마의 고귀한 뜻에 있었다. 이 책 때문에 그는 '미국으로 가서 세계를 꼭 보리라'고 결심했으며, 열여섯 살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결심대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가서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연구하고 공부하였다. 결론은? 앞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세상을 이끄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소프트뱅크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일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손정의는 말한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추구할 테마를 찾아라"

 

손정의는 열아홉 살 때 인생계획을 세운 이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시대를 쫓아가서는 안된다. 다음 시대에 무엇이 올지 먼저 읽고 준비하며, 시대가 쫓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원칙이 중요하다....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위기의 때에도 과연 그 원칙을 지키느냐?가 중요하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에 그들의 삶의 원칙을 정하였다. 그 삶의 원칙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원칙이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그들은 율법에 먹지 말라 한 음식을 먹지않기로 결심하고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절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자 하나님은 채소만 먹어도 고기 먹은 다른 사람들보다 얼굴도 더 좋고, 지혜도 열배나 뛰어나게 해주셨다.

 

그런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율법에 먹지말라한 음식을 먹기 않기로 결심한 것(정결하게 살겠다는 결심이다) 외에 몇가지 원칙이 더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 원칙은? 다니엘서 3장에 보면 우상에게 절대로 절하지 않겠다는 원칙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서 6장을 보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세운 원칙들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지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니엘 3장을 보자...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높이 약30m되는 엄청난 크기의 우상을 세워놓고 그 우상 낙성식에 모든 신하들이 다 참석하여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도록 명령했다. 만약 왕의 명령에 불복하여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어 불살라 죽이겠다고 선포했다.

 

그 우상 낙성식에 다니엘은 무슨 일이 있어 빠졌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십계명의 분명한 원칙이 있었기에 그기에 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낙성식에서 다니엘의 세명 친구들은 우상에 절하지 않자... 현장에서 바로 적발되어 체포되어 왕 앞에 끌려나오고 말았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명을 거역한 그들이 괘씸하였지만 인재를 아끼는 왕이라 한번 더 기회를 줄터이니 내가 만든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하였다.(3:15)

 

바로 사형에 처해질 위기의 순간인데 왕이 한번 더 살아날 기회를 주겠다는데...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왕의 제안에 다니엘의 친구들은 이같이 대답한다.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다니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세운 원칙을 어떻게 지켰는가?

 

1.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원칙을 지켰다.

 

3;16절에서 왕에게 한 대답은.... 아무리 목숨이 떨어질 상황이 되었지만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왕이 한번 더 기회를 주어도 생각도 할 필요도 없고 대답은 같다는 말이다.

 

그들이 얼마나 원칙을 철저히 지켰는가를 알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원칙(기준)이 확실하면 확실한 인생을 살 수 있고 원칙(기준)이 불확실하면 불확실한 인생을 살게 된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사람이 세운 원칙이라면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세운 원칙은 하나님 말씀에 기준한 원칙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바꿀 수 없는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혀도 뒤로 물러 가거나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고집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하며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이 될 것이다. 다니엘의 삶에서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원칙을 지키는 사회는 질서가 유지되고 안정된 사회가 되지만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회는 무질서와 혼돈이 반드시 오게 된다. 우리나라 대형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같은 한국의 굵직굵직한 참사들이 전부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원칙을 지킬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 미국의 어느 제약회사에서 일어난 일....어떤 부인이 그 회사 품질관리 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부인이 생계와 남편 학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그녀가 근무하던 중 어느날 어떤 약품이 오염되어 있어서 불합격 통지를 하고 상사에 보고 하였다. 그러나 상부에서 그 약품을 재생산하려면 얼마나 돈이 더 들어가는가?를 계산해보고 그녀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냥 그 약품을 합격시켜주고 출하하라는 압력이었다. 그녀는 그 약품이 성분이 오염되어서 합격품으로 처리할수 없다고 고집하였다....그러자 회사 사장이 그녀를 불렀다. 며칠 여유를 줄터이니 그 안에 합격사인을 하라...만약 사인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녀는 고민도 되었다. 자기가 해고되면 생활도 어려워지지만 남편 신학공부도 더 이상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하고 그녀는 사인을 거부했다... 결국 그녀는 해고되고 말았다.

 

당장 어려움이 오고 말았다....그런데 몇 달 후에 다시 복직했다. 어떻게?? 약품검사 자격증을 가진 그녀가 사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제품은 다시 생산해서 출고하였는데 그로인해 늦게 약품을 받은 병원에서 클레임(손해배상) 제기를 하였고 그 회사 이사진에서 그 사실을 알고 조사를 해보니 그녀가 오염된 제품을 사인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인해 해고된 것 까지 알고는 그 회사 사장을 해고하고 그녀는 더 높은 보수로 복직시켜주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2. 위기의 때에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6장의 다니엘의 경우를 보자.

 

다니엘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원칙을 세우고 실천했다. 그런데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되 반드시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성전이 불타고 없어졌지만 성전이 있던 그 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다니엘이 지킨 기도의 원칙이었다.

 

왜 다니엘은 굳이 성전 있던 장소를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나? 그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성전낙성식에서 이렇게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왕상8:46-50)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원근을 막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기도하기를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생겨도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회개하며 성전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면...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포로된 백성들을 회복시켜주소서그렇게 기도했다.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 때 벌써 그 성전이 언젠가 허물어질 것을 성령으로 예지하고 그런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솔로몬의 그 기도를 기억하고 매일 세 번 예루살렘 성전 있던 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니엘의 기도 내용까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포로생활 끝나게 하옵소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 기도는 다니엘 일평생 계속된 기도였다.

 

즉 다니엘의 삶의 원칙? 신약 용어로 쉬지말고 기도하라인 것이다.

 

쉬지 않고 하루에 3번 기도의 원칙을 평생동안 지켜온 다니엘이다. 그런데 그 원칙 때문에 큰 위기에 빠진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에게 큰 신임을 받아 왕이 더 크게 쓰고자 하자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다니엘을 무너뜨릴 흉계를 세우는데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니엘의 정적들은 왕을 꼬드겨서 특별법을 만든다. 그 특별법은 왕 이외의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왕을 무시하는 자로 간주하여 사자굴에 넣어서 사형시킨다는 특별법이었다. 그 법은 계속 시행하는 법이 아니라 한달간만 시행하는 특별법이었다. 그 법은 사실상 다니엘을 잡아 넣기 위한 특별법이었다.

 

다니엘은 자기가 없는 동안 그 법이 발효된 것을 알았다. 다니엘은 그 법이 자기를 겨냥한 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법은 자신이 하루 세번 기도하는 원칙 때문에 생긴 법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하나? 기도하는 원칙 때문에 목숨이 달아날 위기에 처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평소처럼 그대로 기도하였다.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1) 위기의 때에 현실을 핑계로 타협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니엘이 조금만 타협하면 그 위기는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어떤 타협이 가능한가?

 

첫째, 한달간 특별법이기에 한달만 기도 안하면 된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게 아니했다.

 

둘째는 기도 장소를 바꾸면 된다. 늘 하던 장소에서 기도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을 정적들이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적들이 모르는 장소에서 기도하면 되는데 그렇게도 아니했다. 기도 장소 바꾼다고 하나님이 다니엘의 기도 못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서 기도해도 들으신다. 이불 뒤집어쓰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으신다. 그래서 기도 장소만 바꾸어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데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

 

셋째로, 다니엘은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고 기도했는데...창문만 닫고 기도해도....대적들이 증인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타협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이 있었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

 

만약 다니엘이 그렇게 타협하여 한달간 기도를 쉬었으면...하나님이 진노하셨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꽉 막힌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도 다니엘 처지를 이해해주셨을 것이다.(북한 성도....목소리 내어서 찬송 못하는 것...하나님은 다 이해하신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런 타협을 하지 않고 평소대로 날 잡아가라!’는 식으로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렇게 영적인 타협을 전혀 하지 않는 고지식한 다니엘을 더 사랑하셨던 것이다. 즉 위기가 와도 변함 없는 신앙이 다니엘의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원칙을 환경이 어렵다고 쉽게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환경을 핑계대지 말아야 한다.

 

() 호남정유 여자 배구 감독으로 전국배구대회 9년 연속 우승과 92연승이라는 전설적 기록을 세운 전설의 배구감독이 있다. 김철용 감독이다. 그분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감독도 지냈는데 일본과의 대전에서 16연승을 이끌어낸 감독이었다.

 

그분의 신앙고백을 들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도로 이룬 기적이었고 전설이었다.

 

그분은 배구대회 11년 동안 새벽금식기도를 하면서 경기를 준비하였다고...그결과 9년 연속 우승을 하면서 선수들의 부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어떤 스포츠에서도 9년 동안 선수들 부상이 없을 수는 없다고...그런데 호남정유는 9년동안 그게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선수들도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호남정유는 기독교신자 배구팀이 되고 말았다고... 그런데 문제는 주일날 배구시합이 많다. 그러면 어떡 하느냐? 주일 일찍 예배드리는 교회 가서 예배드리기도 하고, 아는 목사님을 초청해서 예배드리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예배는 꼭 드린다고...그래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단만 하면 예배드릴 수 있는 길이 열리더라고...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결단이더라는 고백이었다.

 

그기에 비해서 우리는 예배 빠지는데 너무 변명들이 많다. 무슨 계모임, 몸이 아파서 못온다... 제가 볼 때 다 핑계다. 몸이 아프면 병원은 안가나? 병원은 가면서 교회는 왜 못오나? 핑계 찾지 말고 변함없는 신앙생활 올해는 꼭 하자!!

 

 

2) 위기의 때에 거룩한 습관이 원칙을 지키게 하였다.

 

전에 하던 대로....’

 

영적생활에 있어서 습관이 중요하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하고, 예배가 습관이 되어야 하고, 감사가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런 거룩한 습관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끌어준다. 거룩한 습관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지 죄악된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되면 나의 삶은 점점 저주의 악순환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쩌다 무슨 일이 생기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이고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바쁘면 기도 쉬나? 아니다. 바쁠수록 기도하고, 힘들수록 기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다니엘이 전에 하던대로 기도하니....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도 사자들 입이 막혀버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꾸준한 기도는 우리 삶을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채워지게 한다. 올해 2020년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기를 소원한다면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어머니 전인항 여사...하루에 네 번 기도하는 기도의 인물이었다. 전여사가 언제부터 하루 네 번 기도하였을까?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짐작할수 있는 것은 6.25때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북한에 끌려가고 홀로 5남매를 키워야 하는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 4번 기도하면서 자녀들을 키운 결과?

 

장남 김관중...대창기업 회장을 지냈고, 둘째 아들 김덕중...아주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셋째 김우중...대우그룹 회장이었고, 넷째 김석중... 받데리 회사로 유명한 델코 회장을 지냈다. 딸 김영숙은 서울대 교수와 결혼했다.

 

가만히 보니 5남매 모두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 성공의 근원? 어머니가 매일 4번 기도한 결과가 아닐까?

 

여러분도 기도가 습관이 되게 하라....그 기도가 자녀들을 성공으로 인도할 것이다.

 

 

3) 위기의 순간에도 평소대로 감사하였다.

 

(10)“....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기도를 하면 목숨이 위태해지는 특별법이 발효되었음에도 다니엘은 늘 하던대로 변함없이 기도하고 감사했다. 자기 목숨이 날아갈 판에 무슨 감사가 나왔을까? 그러나 다니엘은 늘 감사 기도하였기 때문에 그날도 습관에 따라 감사하였던 것이다. 다니엘에게 기도도 습관이요, 감사도 습관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다니엘의 삶의 원칙을 또하나 알 수 있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나?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사자굴에 들어가는 상황이 되어도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뜻이 있어서 나를 사자굴에 집어넣어서 나를 이제는 천국으로 불러주시는구나...그런 믿음으로 사자굴도 감사하는 다니엘이다.

 

그 다니엘의 믿음은? 믿음으로 만사형통하고 믿음으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으로 어떤 고난도 소화하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다.

 

믿음만 있으면 아무 어려움 없이 이 세상을 평탄하게 살수 있다는 생각...이것은 사기이다. 기만술이다. 그러나 성경적 믿음이란? 원하는 결과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비극을 당했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며, 어려움이 닥쳤다고 하나님이 무능함이 결코 아닌 것을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살면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에 참 평안이 있고 하늘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으로 2020년 새해를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위기의 때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정한 원칙을 어떻게 지켰는가?

 

1. 다니엘 친구들은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원칙을 지켰다.

2. 다니엘도 위기의 때에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1) 위기의 때에 현실을 핑계로 타협하지 않았다.

2) 위기의 때에 거룩한 습관이 원칙을 지키게 하였다.

3) 위기의 순간에도 평소대로 감사하였다.

 

admin

 

 

 

신뢰의 영성 /6:12-24/ 이재철목사

2015-07-27 16:30:24

 

다니엘은 나라의 정승들과 대신들의 모함으로 사자 굴속에 들어갔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굶주린 사자에게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살아났을까요?

 

다니엘에게는 죄가 없었고(22),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23)

 

살아가다 한계에 부딪치면, 사람만큼 연약한 존재가 없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은, 바람만 훅-하고 불어도 날아가 버리는 종잇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종잇장 같은 인생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첫째, 바람이 불 때 흔들리기만 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보이는 인생입니다.

 

둘째, 좀 더 큰 바람, 큰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에 짓눌려 구겨지는 인생이 있습니다.

 

셋째, 펜으로 찌르면 종이에 구멍이 나듯, 상처로 가슴이 뻥뻥 뚫려버린 인생입니다.

 

넷째, 최악의 경우로,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보다 그 심령이 더 너덜너덜해진 인생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종잇장 인생일지라도, 단단한 벽에 딱! 붙어있는 종이는 다릅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력한 종잇장 같은 인생도, 하나님께 딱! 달라붙어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어 해하려해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 붙들려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시어, 다니엘을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바로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듯,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 지금까지 실패만 거듭했다고 낙심하고 계십니까?

실패의 원인이 내 생각, 내 고집, 내 계획이 아니었는지... 꼼꼼히 되짚어보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해 보십시오.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121:5)

낮의 해와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치 못하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정승들과 대신들이 다니엘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굶주린 사자 굴에 집어넣었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23)

그뿐 아니라 다리우스 왕이, 다니엘을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했습니다. (26~27)

 

만약 다니엘이 정승들과 대신들뿐 아니라,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 자신을 사자 굴에 집어넣은 왕에게

미움과 원망의 독을 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지금 누구 때문에힘들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고, 억울한 고난 같아도,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로 이끄시기 위해, 우릴 다듬어 가시는 위함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포로출신으로 주류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뿐이었던 다니엘은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특히 사역을 할 때는, 정말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구나...’ ‘하나님 밖에 없구나...’라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내가 주인 삼은 또 다른 하나님을 찾아다니면 주님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십니다.

 

우리가 제풀에 꺾일 때까지, 포기할 때까지, 하나님을 의뢰할 때까지, 가만히 계십니다.

한 주간 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는 내 경험, 내 지식, 내 건강, 내 재산을

의지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10)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서도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한 다니엘이 결국 승리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기 위해서는 기도 응답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 경험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반드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실 뿐 아니라, 어떠한 해도 받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 종말론 /6:1-/ 이동원 목사

2015-05-08 15:53:29

 

논 지: 다니엘은 끝까지 순결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설교요약

 

1.다리오 왕도 교만하게 자기 권세를 의지했다.

 

2.새 정권에서 관리가 되었으나 음모를 받는 다니엘

 

3.다니엘의 총명과 지혜는 성령에 의해서 였다.

 

4.다니엘은 충성되고 순결한 사람이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이 어떠한 유형의 신앙인이었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다니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입니다. 1장에서부터 저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다니엘서의 주제를 계속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역사도 변하고 정치 지도자도 변하고 체제도 변하고 권력은 한 제국에서 또다른 제국으로, 한 왕에게서 또다른 왕으로 계속 옮겨 가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역사의 주인이 되십니다. 역사 위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선명하게 증거하는 것이 바로 다니엘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6장에 들어가기 전에 5장의 마지막 부분인 30절 이하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그날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

 

한 제국이 몰락하고 또다른 제국이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는 모습과 함께 6장이 펼쳐집니다. 6장은 다리오의 통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분의 나라를 지상의 역사 속에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어느 시대 어느 역사 속에서나 자신의 사람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다니엘서 6장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도 쓰셔서 자신의 일을 계속 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다니엘서 6장처럼 널리 알려진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우리에게 퍽 익숙했던 이야기가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다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다니엘서 6장은 성경에서 가장 연구가 덜 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것은 으례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으로 묵상을 게을리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입니다.

 

다리오의 정체

 

다니엘서 6장은 1절에서부터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다리오가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1).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대제국의 첫번째 통치자는 다리오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처럼 다리오 역시 세속 역사 속에 전혀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려 드는 사람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다니엘서의 역사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등장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자를 고레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본문에는 고레스가 등장해야 하는데 대신 다리오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견해 두 가지를 우선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견해/다리오는 고레스와 동일한 인물이다.

 

이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대 왕들은 여러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왕에 대해서도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왕을 부르는 관습이 고대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와 고레스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 때 가장 문제시 되는 구절은 628절입니다.“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첫번째 견해를 따른다고 하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겠습니까?

 

그런데도 첫번째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에서 접속사 그리고로 해석하지 말고 히브리 문법에 따라 동격을 나타내는 콤마(,)로 보게 되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 곧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첫번째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둘째 견해/다리오는 고레스 왕의 휘하에 있던 장군 중에 하나였다.

 

최근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은 이 견해를 상당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의견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5:31)라는 구절은 영어 성경의 경우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는데로 번역된 판이 많습니다.

 

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다, 다리오라는 인물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자기 나라를 새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바벨론을 무너뜨린 고레스 왕에 의해서 바벨론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임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1절을 보십시오.“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1,2). 여기서도 다리오를 메대 바사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제왕이라고 하지 않고 방금 무너진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의 통치자로 임명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라는 사람은다리오라고 불리워졌는데, 성경학자들은다리오라는 이름도 어쩌면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당시 통치자에게 붙여진 독특한 명칭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다리오의 본명은 나보니도스에 관한 역사적인 문서에 의해 우그바르(혹은 구바르)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구티움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던 통치자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도지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주전 539년에 벨사살의 연회 잔치를 기습하여 바벨론을 함락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함락된 바벨론을 둘러보고 떠나면서 고레스 왕이 그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우그바르를 임명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도 이 견해가 좀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바벨론은 굉장히 광대한 제국이기 때문에 많은 도지사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그 위에 다시 총리를 두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바벨론 제국 황혼기에 다니엘은 이미 그 제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통치자가 한 지역에 들어와서 그곳을 부분적으로 다스릴 또다른 인물을 임명할 때는 그 지역을 아주 모르는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참신한 인물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다니엘이 선택될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또다시 다니엘은 바벨론 지역을 통치하는 정부 고위 관리의 자리에서게 됩니다.

 

이것은 다니엘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 번영과 출세가 보장되며 생이 순조롭게 풀려 갈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번영과 위기는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다니엘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이 행운의 시간 속에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그릇된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핍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엄격히 말해 핍박이 아닙니다. 순교도 아닙니다. 순교 컴플렉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핍박받는 것을 순교로 간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순교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정당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나의 정당한 행동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유형의 핍박을 그의 생애의 황혼기에 한번 더 맞이하게 됩니다.

 

다니엘에게 찾아온 위기 (다니엘에게는 두 가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의 개인적인 삶을 조사해서 흠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은 다니엘을 마치 천적처럼 생각했던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다니엘이 새로운 나라에서도 또다시 출세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 주변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그의 삶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둘째로,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법률 개정이 착수되었습니다.

 

첫번째 계교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니엘의 적들은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법률 개정에 착수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다니엘이 참되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기도하는 시간을 구별하여 갖고 있음을 안 적들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 추진한 교묘한 함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은 어떠했습니까?

 

위기 가운데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

 

저와 당신은 80세쯤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까요? 저는 다니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다음의 시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92:12-15).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노년의 다니엘의 인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의인 다니엘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80세가 되어서도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아마 할 일이 없다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순간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청청한 빛을 발하는 견고한 나무인 다니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영광을 선포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의 인품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3).“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를 우리 말 번역대로만 읽으면,“다니엘은 굉장히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며라고 이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이 아주 놀라우신 영을 소유하였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우신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아주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었으므로다니엘의 지혜와 탁월한 판단력은 다니엘 자신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총명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했기에 주()의 영이 그 속에 역사하여 이루어 낸 놀라운 결과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도 성령 충만했고 늙어서는 더더욱 성령 충만했습니다. 젊어서도 그의 지혜의 근원은 성령이었습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그가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니엘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여 그의 개인적인 삶을 조사했던 사람들은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14).

 

유명한 전도자인 D.L. 무디가 한창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을 때에 저 사람 말만 잘할 뿐 자기 삶은 형편없을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집요하게 무디의 사생활을 파헤쳤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디의 삶에서 그 어떠한 결정적인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자, 도리어 무디의 그러한 삶에 감동받아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과 저의 삶을 조사한다고 해 봅시다.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를 무너뜨릴 만한 결정적인 흠은 없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할 만한 결정적인 흠이 그의 삶 속에는 없었습니다. 순결함이야말로 어쩌면 다니엘이 늙어서까지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4절을 보십시오.“...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다니엘은 임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그는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매사에 충성스러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과제로 알고 주께 하듯 성실하게 감당했던 다니엘. 그는 진실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충성스러움이야말로 하나님이 다니엘을 쓰신 비밀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나라가 바뀌어도 정치 체제가 바뀌어도 충성스런 다니엘은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다니엘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이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 간교하고 음흉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새로운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왕 외에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기도하면 사자굴 속에 넣겠다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10절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실은 다니엘이 그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 그는 자기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사자굴 속에 던져져서 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집에 돌아가 전에 행하던 대로 주께 기도하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 한번 이름이나 남기고 죽자는 식의 소위 순교적 명예심 때문에 나온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소 습관이 그랬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 앞에서도 이 경건의 습관만큼은 결코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진실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은 타협을 거절하는 경건이었습니다. 사실은 쉽게 타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경우처럼 우상 숭배를 하라는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기도를 공개적으로만 안 하면 그만인 상황이었습니다.

 

“30일간이니까 그 동안에는 마음 속으로만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이렇게 합리화하고 적당히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단 하루라도 경건의 습관이 허물어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늘상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누군가가 생명을 위협해도 다니엘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삶의 보배는내 주님과의 교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창을 열고 교제하며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만큼 다니엘의 일상적인 일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 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다니엘이 하나님을 주일에만 예배 시간에만, 혹은 일이 잘 풀릴 때에만 섬긴 것이 아님을 불신자인 왕조차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세월이나 상황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 경건한 다니엘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다섯째로, 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23).

 

흔히들 다니엘서를 대할 때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사자의 이빨이 다니엘을 물지 못한 극적인 사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니엘의 사람됨입니다. 다니엘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 있는 굴 속에서도, 즉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다니엘은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신뢰합니다. 비록 상황은 이래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이런 다니엘을 어찌 하나님이 지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결국 그의 사람됨이 기적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내 사업과 인간 관계가 번창하기만을 하나님께 요구할 뿐, 자신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별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다니엘 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만한 사람됨을 사모하십니까? 이제 고개를 돌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위기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람의 이 놀라운 인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날이 갈수록 해가 더할 수록 더욱 주님을 닮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젊은 시절보다 내 인생의 황혼의 때에 더욱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기력이 쇠잔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생애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풍성한 기적은 주를 신뢰하는 이 믿음을 주께서 친히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삶이 우리에게 던진 도전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참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그의 생애, 원수조차도 그에게서 아무 틈도, 아무 허물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순결했던 다니엘. 오 주여 또 하나의 다니엘이 되어 남은 생애를 주의 거룩한 성령으로 불붙임 받아 이 악한 세대를 믿음과 충성과 순결로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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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믿음 /6:18-20/ 하용조 목사

2015-05-24 14:14:26

 

I. 다리오 왕은 아주 괴로운 밤을 지새웠다.

 

A. 그는 악한 자들에게 속아 그가 사랑하고 친애하였던 그래서 왕을 돌보는 자로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는 다니엘을 죽음으로 몰아 놓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저들은 왕의 허영심을 부추겨 30일 동안 왕 외에는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경배하거나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칙령을 왕으로 하여금 서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만일 이를 위반하는 자에게는 그 벌로써 그를 사자 굴속에 던져 넣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2. 저들은 자신들이 탐하는 고위 관직에 다니엘이 내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질투심에 불타 있었다.

 

a. 그들은 다니엘이 진실하고 그의 업무 수행에 있어서 어떤 흠도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b. 그들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계속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c. 결국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 하에 그와 같은 칙령을 내리도록 도모하였던 것이다.

 

B. 다니엘은 그 칙령이 다리오 왕에 의해 서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1. 이 명령을 위반한 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다리오 왕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친애하던 다니엘임을 알고는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한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2. 왕은 법의 허점을 찾아 그 칙령을 취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메데 파사 법에 의해 한번 조인된 칙령은 다시 변경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3. 저녁에 사람들이 왕에게 와서 그 법을 시행하도록 촉구하였다.

 

C. 왕은 함정에 빠졌으며 다만 다니엘에게 큰 후회를 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 사자 굴에서 너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다니엘을 격려했다.

 

1. 하나님은 가끔 이상한 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격려의 말씀을 보내신다.

2.아주 사랑스런 젊은이가 몇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그는 약 중독과 사고로 정신이상과 언어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a. 하나님은 그를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그가 오렌지 카운티 병원의 정신과 병등에 있던 어느 날 그를 담당한 정신과 의사 한 사람이 교회로 전화를 걸어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병원에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아는 것 같다. 그는 항상 나에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도 이 예수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b. 그때쯤 나의 아내 케이가 상당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에 청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장애로 인해 정확하지 못한 알아듣기 힘든 말투로 "케이 자매님"이라고 불러 놓고 아주 정확하고 선명하며 지극히 정상적인 발음으로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즉시 다시금 불투명한 말더듬이로 돌아갔던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다.

 

D. 왕은 이러한 말로써 다니엘을 격려했으나 자신은 전적으로 믿어지지 않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1. 그는 저녁 식사와 음악을 전폐했다.

2. 그러한 칙령에 서명한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면서 밤새도록 괴로워하며 지새웠다.

3. 이른 아침에 왕이 사자 굴을 향하여 달려갔다. 돌들을 굴의 입구에서 치우라고 명령한 그는 굴을 향하여 슬픈 목소리로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사자로부터 구하시기에 능하셨느냐?"고 외쳤다.

 

4.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할 때에 왕의 마음은 안심을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II. 네 하나님이 능하셨느냐?

 

A. 다니엘서의 전반부에 보면 세 히브리 소년들이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풀무 불에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당신의 풀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십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B. 우리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기에 능하시다. 풀무에서 흑은 사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C.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나?

 

1. 하나님이 거짓말 이외에 하실 수 없는 것이 또 있는가?

 

2. 비율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 후에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들을 하시기를 구하였는데 지각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함이 가득 차도록 구하였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어 풍부히 지나치게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3.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이 요구하고 생각하는 능력의 범위를 초월한다.

4.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여호와라 모든 육체의 하나님인 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D. 아브라함의 믿음의 열쇠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었고 또한 능히 행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다고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러면 문제가 무엇인가? 왜 염려하는가?

 

2 .많은 경우 우리는 다리오 왕과 같다. 그 말씀으로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하나님이 모두 다해 주신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확신이 없다. 그는 아침에 물었다.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하는데 능하셨느냐?"

 

III.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가?

 

A. 하나님이 당신을 넘어지지 않게 붙드시며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 흠도 없이 당신을 그의 앞에 세워 주실 것이다.

 

1. 비율은 묻기를 "너는 누구 관대 다른 사람의 종을 판단하느뇨. 그의 일어서고 넘어짐이 제 주인에게 있거늘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울 능력이 있으리라."

2.다른 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도 약점을 판단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세우실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신다.

 

B.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며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1. 오 놀라우신 예수님의 은혜는 나의 모든 지은 죄보다 더욱 크시다. 2.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넘치게 하심을 생각해 보라.

 

C.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광스런 확신의 말을 하기를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내가 아노니 그가 그날까지 나를 보호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생명을 보호해 주실 것을 다 맡겼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실 능력이 계심을 나는 안다.

 

1. 나는 연약하나 그가 나를 보호해 주시며

2. 내가 넘어지나 주님이 나를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신다.

3. 내가 실수하나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나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 나는 주님이 구하실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절대적 감사의 속성 /6:3-10/ 곽선희 목사

2014-11-26 19:55:25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Guideposts)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조그마한 기프트샵 선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도나 페터슨(Dona Petterson)이라고 하는 주부가 있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가이드포스트에 기고를 해서 "A Brothers Gift - 형제의 선물"이라고 하는 글이 실리게 됩니다. 이건 자기의 경험이요 생생한 그의 신앙 간증입니다.

그녀는 전남편의 아들 21살 된 제이슨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고 지금의 남편 사이에서 재혼해서 얻은 12살 된 딸 루키라고 하는 딸이 있고 그리고 다시 네 살짜리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네 살짜리 꼬마가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어갑니다. 간에 악성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그대로 급하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12시간 내에 간이식을 받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사의 결론입니다. 의사는 말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건강한 사람의 간을 기증받는 그길 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전남편의 아들 제이슨이 자기 간의 3분의 1을 기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실은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는 다릅니다. 그런 사이입니다.

 

수술실 앞에서 어머니는 기도를 드립니다. 자칫 잘못하면 두 자녀를 다 잃게 되니까요. 염려가 끝이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당장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그는 감사합니다. 자기 친형제도 아닌데 전 남편의 아들 제이슨이 지금 어떤 의미에서 친동생이 아닌 자기 동생을 위해서 자기 간을 내준다니 이런 형제의 사랑, 이런 특별한 사랑을 생각할 때 또 감사합니다.

 

딸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염려하기도 하고 다시 제이슨 큰아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로 받아들이면 거룩하고 다시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오빠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가하면 또 자칫 잘못하면 두 자녀를 다 잃어버릴 수 있기에 걱정이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깊은 문제의 생각을 정리해야 합니다. 염려, 걱정 없을 때가 없습니다. 염려, 걱정 끝나고 감사하는 일은 없습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또 염려가 있고 염려하면서도 또 감사가 있고 염려와 감사의 이 긴장관계, 이 갈등. 여러분,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감사하려고 하면 또 다른 한 면으로 생각하면 불만이 많아요. 또 그런가하면 불만스럽고 답답하지만 또다시 생각해보면 이게다 큰 은혜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있는 거예요. 현실은 언제나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더 크게 느끼면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염려가 커지면 감사하는 마음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추수감사를 감사한 쪽으로 생각하면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저는 늘 해외에 나갈 때마다 생각합니다. 요거 조그마한 나라, 마치 꺼져가는 등불 같은 나라, 세계 속에서 그 사실 인구도 얼마 안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세계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특별히 해외에 가서 우리 한국자동차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어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맨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그 한국 차를 만나서 누군지도 모르고 한 시간 동안 따라다녔어요. 기특하고 고마워서. 왜요?

 

좀 미안하지만 웬 놈의 일본 사람들의 차만 많거든요. 그래 마음이 아팠었는데 한국 차가 하나 들어오니까 너무너무 고맙고 이런 고마운 데가 있나 싶었습니다. 요새는 뭐 어디가나 한국 차가 많아요.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더구나 제가 외국에 가 있을 때 전화기를 늘 가지고 다니거든요. , 이 전화기 로밍시스템 해놓으면 사람들이 내가 한국에 있는 줄 알고 전화가 오더라고요. 한참 얘기하다가 "여기 미국이요." 그러면 "! 그래요?"

 

이 신통하지 않아요? 난 그 전화기 들고 다닐 때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잘 모를 겁니다. 제 마음을. 6.25전쟁 때 무전기라는 게 있었어요. 내가 무전통신 과장이었거든요. 그 무전기가 얼마나 무거워요?

 

이걸 메고 다니는데, 그리고도 무선전화가 잘 안됐어요. 그랬는데 그 큰 무전기 다 내버리고 요만한 거 주머니 넣고 다니니 말예요. 이런 신기한 세상이 어디 있어요? 그 감사하기로 들면 좀 미안하지만 이제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곧 죽어도 감사하죠. 감사하잖아요. 그렇잖아요?

 

전 늘 건강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내가 목회를 하는 일평생 동안 아파서 설교 못하는 날이 하루도 없거든요.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감사하다면 이제 오늘 내가 죽어도 할 말 없어요. 감사하죠. 그러나 여러분 나라고 소원이 없는 줄 압니까?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아요. 생각하면. 그 좀 '요렇게 됐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는 게 난들 왜 없겠어요? 그러니까 염려와 감사의 그 여건은 항상 그러한 거예요. 문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크게 크게 느끼면서 염려를 다 잃어버리도록 극복하게 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지, 어두운 면으로 부정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뭐 끝없이, 끝없이 원망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Thanks' 라고 하죠? 감사하다는 말이? 그 말의 어원은 'Think' 에요. Think, Thank 다시 말하면 생각함으로 감사하고 감사함으로 생각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문제는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느냐에 달린 거죠. 소유를 생각하면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지식을 생각하면 의심에 빠지는 것이고, 또 감격을 생각하면 세상의 마음처럼 변덕스러운 게 어디 있습니까? 감사할 수가 없죠. 그러나 다 잃어 버려도 지혜는 있고, 다 잃어 버려도 하나님의 약속은 있어요. 이 신령한 세계를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열릴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니엘이라고 하는 믿음의 사람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어인이 지킨 것을 알고 그랬어요. 어인을 찍어 금령을 냈다는 사실 그 내용을 알고도 오늘 본문 끝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니라(10)"

 

그랬어요. 이 어인 찍었다는 이야기는 이 성경을 읽으면 잘 알지 않습니까? 다니엘이라는 사람 하나를 잡기 위해서 방백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어요. 너무 깨끗하고, 너무 정결하고, 너무 진실하고, 충성되기 때문에 다른 일로서는 이 사람을 고소할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금령을 만듭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왕 외에 누구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사자 굴에 넣어서 죽입시다." 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러나 좌우간 그럼 금령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가서 얘기했는데 이 멍청한 왕이 도장을 찍었어요. 어인을 찍어버렸단 말예요. 그러고 보면 생각해보세요. 저 방백들의 시기와 질투, 그 질투하는 관원들 그런데 이 멍청한 왕. 말도 안 되는 금령입니다.

 

요새말로 어느 모로 보던지 이건 있을 수 없는 부조리요 모순이요. 이것을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고 정말 복통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원망을 다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어요. 다니엘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

 

이대로, 이대로 죽는다 생각하고 지나온 한평생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감사할 때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사자 굴에서 다시 나오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사가 기적을 낳았습니다. 감사가 기적을 낳았다는 것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인상적인 것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10)" 그 말은 뭡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다가는 죽는다는 걸 알아요. 또 죽이려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요.

 

오늘 내가 한번 기도하고 다음 시간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죽는다는 그 결정적인 것이에요.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께 감사했다.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엄청난 감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우리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전에 행하던 대로(10)" 하는 말입니다. 그는 기도가 일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감사가 늘 생활화되어 있었어요. 여러분, 이걸 잊지 마세요. 이 원망, 불평하면 그 버릇 되요.

 

자기가 자기를 길들여야 되요. 감사하고 그저 어떤 일에도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사해 버릇하면 감사할 수 있는데, 원망과 불평을 하면 끝없이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다시 말하면 감사를 일상화해야 하고 습관화해야 하고 성품화해야 한단 말예요.

 

제가 미국 가정에 한번 초대받아 갔을 때입니다. 어린아이가 의자에 앉았는데, 허리띠를 매고 높은 의자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사하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렸어요. 아이들 실수해서 그럴 수 있지요? 털렁 떨어지니까 아이가 이걸 주을 수 없잖아요.

 

 

의자는 높고 허리끈을 맸으니까. 그래서 숟가락 떨어지니까 애가 울어요. 앵하고 우니까 어머니가 숟가락을 주워 닦아서 도로 들려주었어요. 그냥 또 먹으려고 하니까 그때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땅땅 두드리더니. "아아". 그러니까 애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이 둥그레 가지고. 또 한번 땅땅 하고 "Say Something !" 뭔가 말해라, 그러니까 애가 더 울먹울먹하면서 아주 울어 버리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때 어머니가 큰소리로 말해요. "Say 'Thank you'." 고맙다고 말해라. 내가 주워 주었는데 왜 말이 없이 먹느냐? 이놈아. 고맙다고 말해라. 이놈이 울면서 "Thank you, Mom." "You are welcome." 그러더라고요. , 그 참 중요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감사 공부해야 되는 거예요. 감사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해서 체질화하고 습관화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되는 게 아네요. 이게. 이게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라고요. 가정교육에서부터 잘못됐거든요. 고맙다는 말을 생전 해본 일이 없어요. 이제 하려니까 어색해요. 하는 것 자체가. 이게 문제가 있다고요. 일상화해야 된다는 것 깊이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에릭 아론슨(Eric Aronson) 이라고 하는 유명한 저자가 DASH라고 하는 아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쓴 일이 있죠. 대시- 인생을 뒤집는 성공법칙. 대시. 그게 뭐냐? 첫째 D자요. DDetermination, 단호한 의지로 결단해야한다.

 

이게 첫째에요. 결단이 뭐냐? 하나는 택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게 결단이에요. 둘 다 가지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어차피 버려야 되요. 하나를 꽉 잡으면서 나머지는 버려야 되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안 되면 성공이 없는 거예요.

 

, 제주도 갔다가 재미있는 얘기 들었어요. 신혼여행 갔다가 그 신혼여행 간 사이에 잘못돼가지고 이혼한 사람들이 많대요. 그 이혼을 왜 하느냐 했더니 신혼여행 가가지고 남편이 목욕하는 시간에 옛날 애인에게 전화 걸다가 들켰대요. 그래, 내가 그 맞아 싸다 그랬어요. , 최소한도 옛날 애인 있었더라도 이제는 끝을 내야지.

 

이 양손에 쥐면 안 되는 거거든요. 하나를 잡고 나머진 다 버려야 되는 거예요. 이게 Determination입니다. 그 다음에 Attitude 예요. 이제 붙잡은 바를 향해서 가는 집중력이 있어야 되요. 자세가 좋아야 되요. 바른 자세 그 다음에는 Success예요.

 

자세를 만들어야 되요. 성공적인 습관 체화된 좋은 습관을 키워가야 되요. 그리고 넷째가 Happiness 입니다. 행복을 느껴야 되요. 행복을 익혀 나가야한다 이렇게 DASH 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오늘, 이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쪽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박사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요. 오늘 다니엘은 기도했어요. 기도하니까 감사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과 만나는 거예요. 사람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보니까 감사하고 감사하니까 기도하고 기도가 중요한 거예요. 사람의 문제를 사람과 더불어 풀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해요. 기도하니까 감사하게 되었다하는 얘깁니다. 그리고 감사함을 찾았어요. 감사의 이유를 깨달았어요. 감사의 요소를 발견했어요. 여러분,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한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은 젊었을 때 그는 청각을 잃었습니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괴로웠어요. 청각이 나빠져서 잘 안 들리니까 너무 괴로웠어요. 그러나 그는 말년에 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청각을 잃어버릴 때 좀 괴로웠다마는 청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연구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누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나는 조용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서 생각하지만 청각을 잃어버린 것을 감사하노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일, 상상할 수 없는 일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요. ? 감사할 수 있는 요소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니까. 이유가 충분하거든요.

 

다니엘을 보세요. 바벨론 포로 되어 왔어요. 여기에 포로라는 건 노예입니다. 노예로 5만 명이 잡혀왔는데 왕 느브갓네살이 똑똑한 사람이라서 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똑똑한 청년 중에 선발하고 선발해서 왕궁에 두고 공부를 시켜서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겠다고 해서 발탁한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이 다니엘이 거기에 발탁된 거예요. 도대체가 오만명중에 네 사람이 발탁된 것 감사하고요. 또 그리고 그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지만 우상의 재물을 먹지 않고 유대사람의 신앙적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총리를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았어요. 선민으로 살았단 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그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감사 그 자체가 성공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감사가 나와야 성공입니다. 돈을 벌었다고 성공이 아네요. 출세했다고 성공이 아네요. 하나님 앞에 다니엘처럼 감사합니다할 때 바로 그 자세가 성공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감사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좀 미안한 얘깁니다만 제가 간증삼아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여기 저기 뭐 설교하러 다닐 때, 내가 꼭 어디 가는 줄 알고 따라와서 설교하고 나오면 문 앞에 섰다가

 

"목사님, 도와주세요." 하는 분이 있어요. 그분은 약간 15도 조금 갔어요. 그런 사람이니까, 당당히 얻어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좌우간 무려 30년 동안 그저 어떻게 아는지 꼭 찾아와요. 그래 영락교회에 금요일 새벽에 7시에 예비역 장성들을 위한 모임의 설교를 마치고 나오면 고 앞에 딱 섰다가 손을 내밀어요.

 

거기 있는 분들이 목사님을 괴롭힌다고 내쫓아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분들이 아예 못 오게 해요. 가까이 못 오게 해요. 그러니까 이 양반이 지혜가 있어요. 내가 지하실에서 차를 몰고 올라와 큰 길로 들어서는 거기에 딱 서있어요.

 

여긴 아무도 안 오거든요. 거기 섰다가 손을 내밀어요. 차를 막고. 그래서 내가 얼마씩, 얼마씩 도와줬는데. , 그분이 나이가 많아서 몸도 약하고 그래요. 시력도 나빠지고 당뇨도 생기고 그랬다고 해요.

 

그래서 늘 만날 때마다 제가 그저 그렇지 해서 미안합니다만 꼭 십만 원씩 줬어요. 십만 원씩, 십만 원씩 줬는데 아, 언젠가는 그 십만 원, 그 많은 돈 아녜요? 그런데도 작다고 불평이에요. "오늘은 좀 더 주셔야 되는데요." ", 그만하면 됐어."하고 실랑이를 벌였어요. 그게 좀 마음에 안 들었어요.

 

어쨌든 할 수 없이 이십만 원을 준 일이 있었는데 또 그다음엔 수술 받아야 한다고, 약 사먹어야 한다고, 액수가 자꾸자꾸 올라가요. 그래도, 그래도 그저 그렇게 늘 만났는데 짜증도 좀 났어요. 언젠가부터 안보여요.

 

바로 지난 금요일 날도 돌아설 때 여기 서있던 사람이 어디 갔지? , 죽었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때 좀 더 줄걸. , 그 말싸움을 하지 말걸. 이제는 더 베풀 수가 없어요. 여러분, 선한 일이든 감사든 기회가 있습니다.

 

다 지나가고 나면 미안하지만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합니다. 그저 우리 오늘 받은 은혜 오늘 힘껏 감사하세요.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감사 헌금하고 싶으면 많이 하세요. 여러분, 혹 내가 백만 원 하겠다고 생각하고 왔어요?

 

그것만 바치면 안 돼요. 이백만 원으로 곱해야 그게 진짜지. 다 계산하고 딱 쥐고 있는 거 고것 가지고는 감사가 안 되는 거예요. 감사란 계산을 넘어서야 되는 거예요. 정말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일도 기회가 있어요. 이거 오늘 못하면 내일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늘 다니엘은 죽음 앞에서 감사기도 하고 있어요. 하나님, 사자 굴에 들어가 죽습니다. 주여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자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할 때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금년 일 년도 은혜를 모르는 자를 마다하지 않고 물리치지 않으시고 더 큰 은혜로 함께해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시간 일 년 동안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특별한 감사의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 깊은 곳에서 감사하고 과거에 감사하지 못했던 것도 감사하고, 은혜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오늘은 은혜로 생각하며 감사 충만하게 하사 모든 자질구레한 근심 걱정 다 물리치고 오로지 감사로 승리하는 그런 감사절이 되게 하시고 내 일생 처음으로 맞는 그런 큰 은혜의 감사절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로 승리한 신앙인 /6:1-10/ 곽선희 목사

2014-11-27 15:24:43

 

리더십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2,500만부가 팔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고 하는 책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Steven Covey) 박사님의 근자에 쓴 원칙 중심의 리더십(Principle Centered Leadership)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꼭 필요하고 지도력이 간절하게 요구되는 오늘날과 같은 때에 한번쯤 꼭 읽어볼만한 아주 중요한 교본이라고 생각합니다. Principle Centered Leadership에서 그는 지도력의 3가지 유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강압적 지도력입니다. 추종자로 하여금 두려워 떨면서 따라오게 하는 그런 지도력, 하나의 폭군적이기도 하고 제왕 같은 그러한 지도력을 말합니다. 힘과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일시적 통제를 의미합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가능하나 인격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그저 기업적으로는 가능하나 사회적으로 가능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고민입니다. 옛날에는 이것이 통했습니다. 밀어붙이는 일은 아마도 이제는 안 됩니다. 뭐 다른 데에는 고사하고 우리 가정에서도 안 통합니다.

 

둘째, 어떤 혜택이나 이익을 미끼로 하는 일시적 지도력입니다. 소위 말하면 Intensive 지도력입니다. 잘하면 상주고, 잘못하면 감봉하고, 더 잘못하면 퇴직시키고……, 뭐 이런 얘기입니다. 사람의 진을 마르게 합니다. 그런 지도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적당하게 통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공정한 듯하지만 기능적일 수밖에 없고, 인격적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창의력을 아주 다 고갈시키고 맙니다. 참으로 될 것 같은데 안되는 게 이겁니다. 참 그거 문제올시다.

 

심지어는 교회에서까지도 이런 일이 있는데, 부목사님들 여전도사님들을 많이 두고 시작해서, 다 구역을 맡긴 다음에 그 구역을 부흥시키면 월급을 올려주고 구역이 조금 떨어지면 감봉하고 3번 감봉하면 퇴직시키는 겁니다.

 

이래가지고 그 교역자들이 얼굴이 노래가지고, 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아주 구걸하고 사정을 하는 거예요. 이거 될 듯하지만,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intensive 라는 것을 내걸어서 사람을 끌고 나가보겠다, 능력을 이용해 보겠다는 이런 방법도 한 세대 갔습니다. 아니올시다.

 

셋째는 지도자를 믿고 성취목표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세운 목표가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안 해도 모두가 스스로 선택해서 나아가는 원칙 중심의 지도력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자기대로의 자기의 길을 갑니다.

 

뒤돌아 볼 것도 없고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운 목표와 그가 가진 인격을 따라서 다 같이 따라갑니다. 꼭 말을 해야 되는 게 아니고 뭐 지시를 해야 될 것도 없습니다. 같은 목적, 같은 방향, 같은 원칙을 향해서 함께 갑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입니다. 마치 물 흐르듯이 홀연히 갑니다. 다함께 행복하게 또 자기의 능력을 다 기울이면서 같은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올시다.

 

한 사람 이야기를 더하고 싶습니다. G. 스톨츠 (Paul G Stoltz)박사의 '역경지수'라고 하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AQ라고 그럽니다. 요새 뭐 IQ, EQ, GQ 하다가 근자에 AQ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Adversity Quotient 라고 하는 말입니다.

 

'Turning Obstacles into Opportunity' 라고 하는 명제를 걸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운 역경의 일을 만나게 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의 인격과 믿음이 나타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되느냐하면 세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Quitter, 포기형 입니다.

 

'아이고, 힘든데 포기하지 뭐, 집어 치워, 할 것 없어' 라고 합니다. 둘째, Camper, 현상유지형 입니다. '이런 때는 현상유지가 좋아, 기다려.' 통계에 의하면 60~70%가 이런 대기형이라는 것입니다.

 

현상유지형. '어려울 때는 기다리는 거다. 지금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 불 때를 기다리는 거다. 그때에 가서 항해할 것이다.' 하는 이런 대기형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Climber 유형이 있습니다. 이건 기어 올라가는 겁니다.

 

, 보세요. 산이 있어서 올라가면 이젠 내려가는 것은 거저먹기입니다. 너무 쉬워지는 겁니다. 올라갑니다. 역경을 기어 올라가서 역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회로 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이 가진 철학, 잠언처럼 여기는 철학이 있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앞이 막혔느냐? 뒤를 보라. 뒤가 막혔느냐? 옆을 보라. 옆도 막혔느냐? 위를 보라.' 이제는 앞뒤가 다 막혔으면 위를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 앞에 섰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혔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라옵니다. 양쪽에는 절벽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독안의 쥐. 문자 그대로 독안의 쥐입니다. 어떡하면 좋겠어요? 아우성을 칩니다.

 

모두가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출애굽 자체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원망을 하면서도 위트가 있더라구요.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데려다 여기서 죽이느냐?'

 

우스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 홍해를 건너라. 말씀하십니다. 조용하라.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 지금의 이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것을 읽을 줄 알고 해득할 줄 알고 따르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순경이 아닙니다.

 

역경입니다. 꽉 막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위를 봐야 합니다. 그 홍해 가에 서 있는 이슬라엘 사람들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가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서 홍해를 딱 치고서 쫙 갈라져서 건너갔다고 되어 있지만,

 

제가 읽은 책에서 보니까 전설에는 그렇게 돼 있질 않아요. 딱 쳤는데 홍해가 갈라지지 않았대요. 그러니까 모두가 걱정이 되어서 아우성을 치고 할 때 여호수아가 옆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모세여, 치고 건너가라 했는데 왜 서 있습니까?”

 

그래서 물속으로 텀벙하고 들어갔더니 쫙 갈라지더래요. 그게 마음에 들어요.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지 기적이 나타난 다음에 행동하는 게 아니에요. 순서가 틀려요. 치고 건너가라 그랬어요. 그러면 건너가야죠. 그 다음에 기적이 있었어요. 그 전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마음에 듭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면 지금 다니엘이라는 사람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아주 꼼짝 못하고 올무에 걸렸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딜레마에 빠졌어요. 다니엘은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습니다. 최선의 길을 살아왔습니다.

 

The best way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정결하게, 그렇게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보세요, 유대사람으로 바벨론 포로 때 노예로 끌려온 소년입니다.

 

끌려와서 노예서부터 시작해서 남의 나라의 총리가 될 때까지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수고했겠나? 얼마나 진실했겠나? 얼마나 충성됐겠나? 얼마나 최선을 다하여 살았기에 노예로 끌려갔던 사람이 남의 나라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겁니까.

 

난 여기까지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존경스럽습니까? 노예로 끌려갔던 사람이 남의 나라에서 총리가 됐다는 것은 그 만큼 정직하게 진실하게 충성되게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 웬일입니까? 올무에 걸렸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 모든 것 뒤에는 질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든 문제는 정치 문제요. 정치 문제는 경제문제요. 경제 문제는 심리학적 문제라고 그럽니다. 전부가 질투입니다.

 

질투. 그것이 문제라구요. 지금. 그런 심리학적 문제가 거기 깔려 있어요. 오늘 말씀에 보니까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또 총리 세 사람을 세웠는데, 이 다리오 왕이 그 세 사람 중에 한 사람 다니엘을 더 높여서 요샛말로 말하면 총리 중의 총리로 만들려고 한 거예요. 이렇게 할 때에 그 못된 사람들이 질투했어요.

 

이걸 꺾어버려야겠다. 그런데 아무리 흠을 잡으려고 해도 흠이 없습니다. 너무 정직하고 너무 충성되기 때문에 흠이 없어요. 그래 저들끼리 의논을 했는데 이런 쪽으로 또 머리가 잘 돌아가요. '이건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로 올무를 걸지 않으면 절대로 이 사람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 해서 나름대로 계책을 꾸며가지고 이 다리오왕 앞에 나가서 아첨을 합니다. "만세수 하시옵소서."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부터 30일 동안 안에 왕 외에 어느 누구에게든지, 사람에게든, 신에게든,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사자 굴에 넣어서 죽여 버립시다.'

 

왕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그런고로 뭐 신이건 사람이건 누구에게든지 뭘 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넣어서 죽여 버린다고. 이런 엄한 법령을 하나 만듭시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오왕입니다. 이 멍청한 사람이 자기를 높여준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가지고 어인을 찍어버렸어요. 그 변경할 수 없는 어인을 찍어서 법령을 만들어 공포해 버렸습니다. 바로 다니엘이 걸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 규례를 따라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런고로 이건 기도한 죄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한 죄가 되어서 이제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마 다리오왕이 아차했을 거예요. ', 이거 다니엘을 잡으려고 한 일인데 이걸 몰랐구나'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처넣게 됩니다. , 이제 오늘 이 문제를 앞에 놓고 이런 사건이 있을 때 다니엘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십시다.

 

그는 기도했어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다리오왕한테 찾아들어가서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항의하지 않았어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어요. 기도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사님 세 분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분이예요. 제가 인천 제일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다가 원목이 되고, 그 원목 되시는 분이 은퇴하셨어요. 그 은퇴하신 원로목사님을 제가 11년 동안 모시고 목회를 하고 나왔던 일이 있습니다.

 

이기혁 목사님, 특별한 분입니다. 기도하시는 분이예요. 지금 새문안교회에 있는 이수영 목사님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인데. , 조그마한 교회 사무실에 모여서 앉아 있을 때 신문 배달하는 사람이 신문이요!” 하고 던져주면 모두가 신문을 다 하나씩 들고 신문을 봅니다.

 

, 신문에 있는 이런 저런 사건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신문에 뭐 좋은 얘기가 있습니까. 다 끔찍한 이야기, 사고 이야기, 지진이 나고, 살인 사건이 있고……. 신문에 난 사건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어수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다. 가만히 앉았다가 신문을 이렇게 거둬가지고 말아 쥐고 문밖으로 나가요. 그래 어디가시나 해서 제가 몰래 따라가 봤어요. 예배당으로 들어가요. 본당으로 딱 들어가서 강대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신문을 쫙 펴놓고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눈물 흘려 기도하는 걸 봤습니다.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기혁 목사님' 하면, 제가 고개를 숙입니다.

 

여러분, 뭘 어쩌고, 어쩌고 수선떨지 말고, 고개를 숙이세요.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지금 기도할 시간이에요.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어요. 성명서 그런 것 좋아 안 해요.

 

그 무슨 대회로 모이고 뭘 하고 하는 거 그것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것은 성서적 방법이 아니에요. 다니엘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전례대로'라고 돼 있어요. 전에도 기도했어요.

 

습관이에요. 기도가 습관이에요.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백악관에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종종 어려운 일이 있으면 들어가서 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밖에 각료들이 다 줄서서 기다려요.

 

기도 끝날 때까지 누구도 노크를 하지 못했습니다. 기도 다 끝난 다음에 나와서 일을 처리했어요. 기도의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전례대로, 습관대로 기도해야 돼요. 특별히 예루살렘 쪽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의 성전을 마음에 흠모하면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상징적 의미가 됩니다. 특별히 공개적으로 기도했어요. 숨어서 몰래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 기도함으로 인해서 오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지는 거예요. 공개적으로 기도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끌려가서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우리들 마음을 뜨겁게 하는 본문은 이겁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 감사가 무슨 감사일까? 정말 궁금합니다. 이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될 바로 이 시간을 놓고 감사하였더라.

 

대표적인 기도가 구약에 몇 번 있는데 하나가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죠. 벧엘에서 기도할 때 그는 아주 야곱다운 기도를 합니다. 조건부 기도예요. 나로 평안히 고향에 돌아오게 해 주시면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역시 야곱 같은 기도입니다. 조건부의 기도입니다. '해주시면, 어떻게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예요. 그런가하면 욥기 1장에서 보면 욥은 하나님이 주셨던 자녀들 10남매가 한꺼번에 죽었어요. 재산이 다 날아갔어요. 비참해졌어요. 그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감히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는 현재는 너무 괴롭지만, 이미 주셨던 바를 과거에 받은 은혜를 감사했어요. 그러나 오늘 다니엘은 지금 무슨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깊은 의미와 당당하고 신령한 용기가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갑니다. 이렇게 끝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본문 10절에서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참 놀랍고 위대한 기도입니다.

 

다니엘은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리오왕의 어리석고 멍청한 짓을 비판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가서 하소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이제 제가 읽을 테니 조용히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619절로 20절 말씀입니다.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다니엘아.”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것으로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위대한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역사는 역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역경을 어떻게 감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역경을 기어올라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역전의 기회가 옵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 세대를 보면서 기도하고, 감사하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는, 역경이후에 주시는 역전의 기회를 얻는 신앙인의 패러다임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를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꼭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는 없고 말만 많습니다. 그리고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주여, 믿음의 사람들의 생은 그리하지 않아야 했음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보여준 그 신앙적 패러다임을 따라서 오늘의 역경을 풀어나갈 수 있게 하옵소서. 주는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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