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창2:18-25/ 조성노목사
2021-10-20 09:58:32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남자가 먼저 입니까? 여자가 먼저 입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여자가 사람을 낳으니까 여자가 남자를 낳았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남자가 먼저고 여자는 나중에 남자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8절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그런데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분명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겁니다. 그러나 창조의 우선순위는 분명 다릅니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게 누구 입니까? 아담입니다. 남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첫째 날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둘째 날은 대기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날은 각종 나무와 채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넷째 날은 하늘의 별, 달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다섯째 날은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나서도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왠일인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남자만 창조해 놓고 보니 홀아비로 사는 게 좋지 않게 보였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자는 처음부터 돕는 배필을 필요로 했던 2% 부족한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해 살을 채우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21-22). 아담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23절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여자는 남자와 동시에 만들지 않고 나중에 만드셨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남자가 여자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합니다.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여자를 나중에 만드셨냐는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만든 게 완성도가 높습니다. 여자는 자신들을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남자들 역시도 그 사실 때문에 여자를 자기 부속품쯤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남자는 재료가 흙입니다. 흙은 무기물입니다. 여자는 그 질료가 남자의 갈빗뼈입니다. 유기물입니다. 흙은 1차 산업이고, 갈빗대는 2차 산업입니다. 남자는 1차 산업품이고 여자는 2차 산업품입니다. 소재가 다릅니다. 남자들은 노하우 없이 하나님이 처음 만드셔서 세련미가 떨어집니다.
여자는 남자를 한 번 만들어본 경험이 있기에 훨씬 섬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었습니다. 유전학적으로도 여자가 염색체가 하나 더 많습니다. 이것은 더 진화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정신적으로도 여성이 더 우위에 있습니다. 남자는 미련하게 힘만 씁니다. 그러나 여자는 훨씬 더 남성에 비해 지혜롭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입니다. 남자가 그럴 것 같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선악과도 남자가 따먹고 여자에게 준 게 아닙니다.
따먹지 말라고 하니까 남자는 미련하게 그쪽으로 눈길도 안 줬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선악과를 쳐다봅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합니다. 따먹지 말라고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결국 뱀이 유혹하자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에게도 줘서 공범을 만듭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냉큼 따먹는 걸 보십시오. 남자는 차라리 순진한데 여자는 약삭빠르고 독합니다.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돈을 잘 벌 것 같습니까? 안 벌어 그렇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잘 법니다. 남자는 기껏해야 사오백 만원이지만, 여자는 한 건에 수천만 원입니다. 어느 날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이사했다고 하면 틀림없이 여자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남자는 그럴 재주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도전한 것도 여자입니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남자들이 목숨 걸고 전쟁에서 가져온 게 다 여자에게 갖다 바친 겁니다. 남자는 그저 여자들 편리하게 하려고 냉장고 만들고 세탁기 만들지만, 여자들은 좋은 식당에 가서 식사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떱니다. 그런데도 설문조사를 해보면 다시 태어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냐고 하면 절대 안 한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다 바보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을 보겠습니다. 여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 하반절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에베소서 5장 22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골로새서 3장 18절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베드로전서 3장 1절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오직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이 여자에게 복종을 강요합니까? 디모데전서 2장 12절 이하입니다.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하와가 남편과 상의 없이 혼자 마귀와 수작하다가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그래서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이 안 되겠다 싶어 여자를 남자의 권위 아래에 두게 한 겁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대등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계질서를 깨면 그 가정은 불행해 집니다. 늘 불행은 가정의 위계질서를 깬 데서 시작됩니다.
이 무슨 진부한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성서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녀들도 절대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이 사라졌기에 진정한 권위를 배울 데가 없어진 겁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해야 자녀들도 배워서 부모에게 복종하는데, 그런 교육적 효과를 가정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위기가 온 겁니다. 모든 주권이 아내에게로 다 갔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이런 극단적인 말씀을 들어보셨습니까?
이게 과장된 말씀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가정의 행복을 위한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아내들아 새벽기도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내들아 여전도회 회장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내들아 목사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가 아닙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목사에게 복종해야 복 받는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복 받는다고 합니다.
남편에게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에베소서 5장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또 2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남자가 아내를 때리는 건 자기 몸을 치는 겁니다. 아내가 남자의 갈빗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갈빗대를 위하고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고 위하라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치면 여자만 아픈 게 아니라 남자도 아픕니다.
물론 아내의 순종도 남편의 아내 사랑도 말만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갈수록 어렵습니다. 왜냐면 요즘 문화가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부부 중 누가 사랑하며 삽니까? 서로 사랑하며 백년해로한다는 건 기적입니다. 그러나 길은 있습니다. 말씀이 일러준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정말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 주님이 자기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생연분으로 만났다가 평생원수로 끝납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내리신 분부를 청년주일이요 가정의 달이며, 가정의 날인 오늘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admin
서로 돕는 부부 /창2:18
2019-05-29 00:03:36
제목/서로 돕는 부부
(예)혼자 사는 어떤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길을 가다가 등이 가려웠습니다. 등골 깊숙한 곳이라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누가 대신 긁어줄 사람도 없고 해서 어느 랍비의 담장에 등을 대고 부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그 집 주인인 랍비는 거지를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과 좋은 음식을 먹게 하였고 상당액의 용돈까지 주어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동네 모든 거지들에게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어느 약삭빠른 거지 부부가 랍비의 집으로 가서 그 집 당장에 등을 부비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광경을 본 랍비가 그들을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랍비에게 부름을 받은 거지 부부는 융숭한 대접을 받을 줄 알고 기뻐하며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랍비가 하인들을 시켜 다짜고짜 매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거지 부부는 하도 억울해서 왜 사람 차별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그 사람은 대신 등을 긁어 줄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후대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부부이면서 담장에 등을 부비는 것을 옳지 못하다. 서로 등을 긁어주면 될 것이 아니냐?"
이 이야기는 부부란 어떤 관계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부란 서로 의지하고 사는 아름다운 동행의 관계이다. 오늘 본문이 그점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보여서 <돕는 배필>을 만들어 짝을 지워주었는데 그것이 하와이다.(창2:18)
<돕는 배필>이란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서로에게 다 해당되는 필수 역할이 바로 "서로 돕는 부부"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우려면?
1.서로 깊히 이해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다.
도우려면? 먼저 깊히 이해해야 진정으로 도울수 있다. 깊히 이해하지 못하고 돕다가 보면 내가 돕는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이 되려면 먼저 상대방을 깊히 알아야 한다. 부부사이를 살펴보면 서로가 잘 아는 것 같은데 의외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남자 때문에 속을 많이 썩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정말 속 썩이는 남자들도 있지만 그중에 상당수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남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또 여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남녀의 특성부터 이해해야 한다.
**시중에 가면 「남편사용설명서」라는 책이 있다. 책 제목이 조금 요상하지 않는가? 남자가 무슨 세탁기나 전자렌지도 아닌데....'남편사용설명서'라니???
그런데 그 책내용이 좋아서 많이 팔렸다고....그래서 제2탄으로 나온 책이 <아내사용설명서>라고....
그 책 내용은 아닌데...인터넷에 떠도는 <남편사용설명서>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
**다섯번째...제품(남편)이 집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통신이 두절되거나 귀가 시간이 늦어질 수 있으니 유의하십시오... 여섯번째, 제품의 알콜 함량이 높을 시에 콩나물국이나 북어국을 투여하십시요 .[그대로 방치하면 집에 이상한 냄새가 많이 퍼집니다]....
그리고 끝에 <주의사항>도 있더라....[주의사항] 1.열 받으면 순간 폭발할 수 있으니 급격한 온도변화를 유발하는 잔소리는 삼가하십시오.
여하튼 '남편사용설명서'같이 여자는 남자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하고 남자는 여자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오늘 그중에 몇가지를 이야기 하겠다.
<남자의 여자의 차이점>
여자는 무드에 약하다.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여자는 자랑할 일이 생기면 친구를 찾아간다. 남자는 괴로운 일이 생기면 친구를 찾아간다.
여자는 자기보다 예쁜 여자와 같이 다니지 않으려 한다. 남자는 자기보다 돈없는 남자와 같이 다니지 않으려 한다.
여자는 허영심을 위해 무언가를 들고 다닌다. 남자는 자존심을 위해 무언가를 들고 다닌다.
여자는 수다로 남자를 질리게 한다. 남자는 침묵으로 여자를 오해하게 한다.
여자는 남자의 허풍에 속는다. 남자는 여자의 외모에 속는다.
여자는 남자의 감정을 느낌만으로 알 수 있다. 남자는 여자의 감정을 말해 줘야 안다.
<이하 생략>
오늘 그중에 하나 설명하고 넘어갈 것은....여자들이 불평하는 사항중에 남편이 밖에서는 천사인데, 집에서는 망나니라는 점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이 자기만을 생각해 주고, 자기만 사랑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여자가 결혼하고 나서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남편은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다’ 라는 사실이다. 보통 남자들은 남들에게는 정말 잘 한다. 인사도 잘 하고 신사적이고 매너도 좋다. 일도 잘 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 인정도 받는다...그러나 막상 아내가 느끼는 것은 남편이라는게 밖에서는 잘 하여서 밖에서는 신사이지만, 집에서는 매너가 빵점이라는 점이다... 바깥에서 남들은 말한다.
“아휴, 자기는 남편 잘 만나서 참 좋겠어!” 그러면 아내는 속으로 말한다. “네가 한 번 데리고 살아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이렇게 보통 남자들이란 남들에게는 잘 하면서, 아내에게는 잘 못한다. 아내는 이런 남자의 태도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낀다. ‘결혼 전에는 그렇게 매너가 좋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나, 남에게는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는 이렇게 대할 수 있지?’ 그러니까 ‘사랑이 식은 것 아니야?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나 봐!’ 그런다....
그런데 남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라...자신은 아내를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그냥 밖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게 남자의 특징이라서 그렇다. 기억할 것은 남자는 생존지능이 강하고, 여자는 관계지능이 강하다는 것이다.
생존지능이 발달해야 그 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남편들은, 사회에서 남이 볼 때는 참 완벽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그렇지 않다...왜? 집에 들어와서까지 생존지능을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집에 들어오면 팍 퍼지고 만다....그래서 남자는 집에 들어오면 모든 긴장을 풀고 TV만 줄창나게 본다. 왜 남자들은 집에만 오면 TV만 볼까? 그것도 넋이 빠지게 볼까? 그것은 ‘남자에게 집이란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있어서 집은 쉬는 곳이 아니다. 긴장하는 곳이고,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서 집은 쉬는 곳이다.
하루 종일 밖에서 긴장하면서 살다가 집에 오면 다 내려놓고 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집에 오면 밥부터 찾는다...그래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는, 집에서 딱 세 마디만 한다고 그런다. “아는? 밥 도! 자자!”
그런데 아내는 아내대로 집에서 피곤하다. 하루 종일 아이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로 인해, 그리고 이웃집 여자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남편이 들어오면 남편에게 확 풀어 버리려고 아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수다를 떤다...그러면 남편은 화딱지가 난다. 일단 밥을 먹이고, TV를 좀 보게 하고, 그렇게 몸과 마음을 좀 식힌 다음에 남자들은 대화하고 싶다.... 이렇게 여자들은 남자들이 생존지능이 강하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팍 퍼진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자! 기억하라....남자의 특성? 생존본능...그러나 집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인정과 칭찬이다. 남자는 "당신이 최고야" 그말만 들으면 없던 힘도 생긴다. 생존을 다투는 세상에서 인정만 받으면 행복한게 남자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특성은? 관계지능이다....그래서 여자는 사랑을 느끼는 관계라야 행복하다. 그래서면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다. "당신이 최고 예뻐!!" 그 말만 들으면 모든 피곤이 사라진다. 세금도 안들고 돈도 안드는 이 "당신이 최고 예뻐!!"
이 말을 남자들은 왜 아끼는 것일까? 남자들은 말만 하지 말고...하루 한번씩만 안아주라(오늘 주보의 명언..."이 약은 가슴에 난 상처에 특효약이다. 최소한 하루 한번씩 껴안아라"....매튜 헨리)....
그러므로 사랑의 행동을 보이라....관계에서 행복하면 여자는 행복해한다.
2.서로 희생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두사람이 협력하려면 자기 힘, 자기 주장, 자신의 방법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협력이란
자신의 방식을 꺽고 상대방의 방식과 합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희생하면 협력이 쉽다.
그런데 협력하면 일이 더 잘된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성경 말씀이 (전도서4;9)이다.
(전4: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현대어번역)"두 사람이 일을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갑절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바른성경)"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사람이 협력하여 일하면 결과는 2배가 아니라 3-4배의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한다. 내가 희생하여 상대방을 도와 협력하여 일하면 일이 더 잘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희생의 축복이다.
성경을 보면 모든 진리는 역설적이다.
"죽으면 살고, 나누면 부해지고, 섬기면 지도자가 되고, 버리면 얻는다."
이 진리는 교회생활에서 뿐이 아니고 가정생활과 부부생활 모든 곳에 다 적용된다.
<한국가정사역학회장>인 <주수일>씨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먼저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행복이란 포기하면 온다는 말이다.
현대인의 이혼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이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희생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희생하지 않으려니까....안맞다고 말하고 그점이 살아가기 힘든 조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이 안맞다는 것은 "나는 포기 절대 안한다"는 이기심에서 생겨난 자기 합리화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행복은 <누구를 만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만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배우자가 되는가?>가 중요하다. 행복한 부부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부의 사랑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꾸준히 뜻을 맞추고, 목표를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자기희생 속에 사는 것이다. 그렇게 희생하며 살다가 보면 마침내 불만들이 감사로 바꾸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작자 미상)
전에는 남편 때문에 내가 힘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나 때문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합니다.
전에는 내가 참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남편도 많이 참는구나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했습니다.
이제는 남편을 창조적으로 바라봅니다.
전에는 남편이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남편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참고 살았지만
이제는 잘 싸우며 삽니다.
전에는 남편이 전화 안 해줘서 섭섭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나를 믿기 때문이라 해석합니다.
전에는 남편을 직분으로 평가했는데(집사가 그럴 수가?)
이제는 남편을 사람으로 봅니다(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전에는 농담을 부정적 의미로 느꼈는데
이제는 재치로 해석합니다.
전에는 친정이 우리 집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시댁이 우리 집, 친정을 남편의 처갓집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제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며 삽니다.
전에는 아이들이 우선순위였는데
이제는 남편이 우선순위가 되었고
전에는 남편을 내편 만들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이제는 남편은 남편으로 나는 여편으로 삽니다.
전에는 남편에게 집중했던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집중하며 삽니다.
전에는 남편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적용 안 해 속상했는데
이제는 나에게만 적용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돈 벌어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남편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가해자이고 내가 피해자였는데
이제는 남편도 나로 인한 피해자임을 알고 삽니다.
전에는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남편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전에는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남편을 사랑해야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3. 서로 기도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창2:18)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가 오묘한 단어이다. '돕는다' 본래의 원어의 뜻에는 '에제르'이라고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말의 의미와 같다. 이 '에제르'이라는 단어는 (시121;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고..."에서 도움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었다....
즉 이 말은 돕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도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도움' '하나님의 도움'을 의미한다. 즉 '돕는 배필'이란 스스로 남편을 자기 힘으로 돕는 것도 의미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도움이 오도록 중보하는 자란 의미가 더 강하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돕는 배필은 하나님의 도움이 오도록 중보하는 자이다....즉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진정으로 돕는 배필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은 남편(아내)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남편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라. 그들의 일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라.
오늘날 여성들이 남편과 인류를 망친 하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지키고 민족을 살린 에스더가 될 것인가?...그것은 여성들의 영성에 달렸다고 보아야 한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서로 돕는 관계이다.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1.서로 깊히 이해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다.
2.서로 희생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3. 서로 기도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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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성경적 의미와 진정한 축복은? /창2:18-25/ 김병삼 목사
2016-03-23 19:40:20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결혼을 생각한다!
“바다에 나갈 때는 일주일을 기도하라.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달을 기도하라. 결혼에 대해서는 평생을 기도해야 한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힘 포낙스라는 사람은 “결혼한 남자의 일생 중 가장 좋은 날은 이틀이다. 결혼하는 날과 자기 아내를 매장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하는 중에 보았던 결혼에 관한 한 가지 유머입니다.
두 명의 중년 신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자네 결혼기념일이 곧 돌아오지?”
“그래, 아주 큰 기념일이지. 20주년이냐”
“오! 부인을 위해서 무엇을 할 예정인가?”
“호주로 여행을 떠날 거야”
“음. 호주라 정말 멋진 곳이지. 아주 근사한 선물이군. 자넨 정말 멋진 남편이야. 그럼 25주년 때는 멀 할 건가?”
“호주에 가서 그녀를 데려오는 거지.”
제가 hot issues를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동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은 많은 문제가 본질적인 결혼의 의미를 찾을 수만 있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먼저 말씀으로 풀어가기 전에 어쩌면 여러분이 겪을 수 있는 결혼에 대한 문제를 잠깐 드라마를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만나교회 홈페이지 예배 동영상 보기 참고)
결국,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가 “돈”이라는 문제 때문에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아마도 여러분이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재클린 케네디와 선박왕 오나시스의 결혼이야기 말입니다.
재클린의 혼전 계약
1968년 10월, 저 유명한 재클린 케네디와 그리스의 억만장자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결혼할 때 그들은 ‘혼전계약’을 했다. 그 내용은 ‘부부의 침실은 각기 독립하고 한쪽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1년에 3개월은 동거 생활을 하되 9개월은 제각기 따로 생활할 수 있다.’ 동거동락을 전제로 한 남녀 간의 만남이 결혼생활이라면 이 얼마나 놀라운 계약인가? 또 이런 약속을 했다.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면 1년에 10만 달러로 쳐서 결혼기간에 상당한 위자료를 내고 만 5년 이상일 경우 종신 연금 1백만 달러를 준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도 일시불로 2천만 달러와 그 이후 10년간 18만 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이 혼전계약서에는 의상비, 미용비, 용돈 등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는 돈 중의 돈’이라서 결혼하는 세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혹시 이러한 결혼을 보면서 “행복”을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저는 결혼 주례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에서 누구보다도 축복을 많이 비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을 준비하면서 상처를 경험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다룰 문제이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어야 함에도 외적인 일로 말미암아, 혹은 결혼이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결혼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2009년 5월 6일 신문에 실린 기사 카피를 소개합니다.
체면치례. . .치솟는 예식비. . .호텔만 웃는다
“어지간하면 다 하는데. . .” 가문위세 과시 심리 퍼져
올 3-5월 1,000쌍 올려 꽃값만 5,000만 원대도
조금 더 자세히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하객 1인당 식비 6만 -15만 원, 예식장 꽃 장식비용 400만-1500만 원, 드레스 대여, 메이크업, 스냅 사진 등 45-600만 원, 기념 초 20-30만 원, 6단 웨딩케이크 100만 원. 서울 시내 특1급 호텔의 결혼식 견적서에 찍힌 숫자들이다.
하객 500-700명을 기준으로 간소하게 치러도 전체 비용이 5,000만 -7000만 원은 나온다. 옵션을 더해 호사스럽게 치르면 금액이 억대로 치솟는다. 꽃값만 5000만 원을 부르는 곳도 있다. 부가세 10%와 봉사료 10%는 별도다.
위에 소개한 기사는 많은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소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99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이 폐지되면서 시작된 현상입니다. 이전까지 재벌가와 연예인의 결혼 장소로 여겨지던 특1급 호텔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고액의 결혼 비용을 생각하지 않다 하더라도 결혼식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면 과연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여기에 있는 분 중에 저처럼 결혼을 자주 경험해 본 사람이 있을까요? 고급호텔에서 결혼주례를 하는 것은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조용하고 서비스도 무척 좋습니다.
아마도 그런 결혼식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추억은 짧고 부담은 길다.”라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반 예식장에서 하는 결혼은 비용이 조금 적게 들지는 몰라도 꼭 시장통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주례를 집례 하는 목사에게 가장 당황이 되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과 마음껏 떠드는 하객들, 결혼 순서에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그나마 자리에 앉아서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이고 밖에서 잡담하거나 아니면 결혼식장은 들어와 보지도 않고 바로 돈을 내고는 식당에 가서 식사하고 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여기를 왜 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1년에 몇 번 정도 결혼 예식에 참석하며 그 결혼식 중에 정말 기뻐서 가는 결혼식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여러분이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 중의 하나가 결혼식에 갈 때, 아니 청첩장을 받는 순간 얼마를 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시작됩니다.
2009년 5월 8일 자 조선일보에 보면 [모두가 피곤한 ‘고비용’ 결혼식]이라는 제목하에 이런 카피가 있습니다.
- 청첩장은 고지서
- “준 만큼 받자” 정서 확산 이사 가도 교회는 안 옮겨 축의금 명부는 채무증서“
요즘 많은 사람이 축의금 장부를 씁니다. 축하해준 분을 잊지 않겠다는 뜻도 있겠지만, 상대방이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겠다는 ‘실용적’ 목적이 대부분입니다. 참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실용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그렇게 계산적인가요? 우리가 받은 사랑이 그렇게 계산적인가요?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게 계산적으로 오갈 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나요?
참 바보 같은 구절이 많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지혜서 기자가 말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장 1절)
여러분이 뿌린 씨를 바로 눈앞에서 거두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가 가끔 쓰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땅속에 들어가 썩은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계산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할 수 있을 때 기쁜 마음으로 물 위에 식물을 던지는 마음으로 던질 수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교회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수십 년간 내가 뿌린 것을 찾아야지 하는 심정이라면 그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 설교를 듣는 분 중에는 이미 출가를 시킨 자녀 때문에 빚진 것을 갚으려고 생각하니 벌써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출가시킬 자녀를 생각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낸 축의금의 액수와 명단을 보니 이만큼은 들어올 것이라고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계산과 부담을 털어버리지 않는 한 신앙적인 결혼의 의미를 깨닫는 데 무척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척 어려운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줘야 될 사람과 받아야 될 사람 중에 누가 결단해야 이 고리가 끊어지겠습니까?
현재 여러분 주위에서 일어나는 가장 적나라한 이야기를 잠깐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내용 - 만나교회 주일예배 동영상 보기 참고)
결혼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분명한 결혼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그 정의 아래서 어떤 결혼이 되어야 하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잘못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결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최초의 가정이 아담과 하와를 짝을 지어 주셨나요? 창세기 2장 18-25절에 처음의 만남이 나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결혼의 가장 큰 의미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 불행해 지는 첫 번째 이유는 상대방을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성경의 결혼은 부족함을 채우는 이기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워주는 이타심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일의 대부분이 나의 소원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2009년 7월 18일 조선일보에 나온 기사입니다.
결혼 정보회사를 통해 수백억 원대의 재산가들이 공개적으로 신랑을 찾습니다. 49세의 재산가인 여인은 연하 남을 찾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전문 직종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이 여인의 돈을 보고는 직장을 그만두고 그 돈을 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백억 원대의 재산가의 부모들이 딸들 모르게 공개 구혼을 해 신랑을 찾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그 재산을 잘 관리해줄 착실한 남자입니다.
모든 결혼 정보회사를 보세요.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혼기를 놓친 많은 사람이 솔직하게 내면을 드려다 보세요. 여러분이 상대를 찾을 때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결혼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야!”
그래서 사랑이 가장 큰 조건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줄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만나는 그 사람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당신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달에 “하미사”를 녹화하면서 당황이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 방송을 보다 부부싸움을 할 수도 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화면을 통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만나교회 예배동영상 보기 참고) 우리 연예계에 잉꼬부부로 소문난 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가수 션 과 작곡가 주영훈씨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둘 다 남편이 먼저 신앙을 가졌고 결혼하면서 아내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은 더 좋은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먼저 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얼마 전 부인이 촬영하는 장소에 장미꽃 3천 송이를 가지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두 사람이 만난 지 3천일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부인은 그날을 세고 있지 않았지요. 감격스런 순간입니다.
그런데 션의 이야기를 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는 남자랍니다.
내가 오늘을 살다 죽을지 모르는데, 만일 아내가 본 나의 마지막 모습이 화내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불행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입니다. 많은 여자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남자들에게는 도전되었겠지요.
이번 상해 코스타에서 션이 강사로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2천일이 되던 날 둘이 함께 서로에게 고마운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에게 5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정혜영 씨가 마지막으로 가장 감사한 일이 “이 남자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고백했답니다.
자신이 결혼해서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자신을 신부 삼아 주셨기에 그래서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자신의 신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로 살아가면서 신랑 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존경을 받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아내가 남편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결혼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지를 말입니다.
주영훈 씨는 신앙이 없는 이윤미 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좋은 신앙을 가지게 된 부부는 잘 때도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의 수첩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답니다.
기도제목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다 남편을 위한 기도제목, 방에 꽂혀 있는 책 제목이 다 남편을 위해 어떻게 좋은 아내가 될까에 대한 내용, 내조를 잘하는 아내, 신앙 있는 아내 등등.
두 가정이 참 행복하게 본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둘 다 좋은 배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지요. 사실 결혼의 원리가 성경대로만 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세 가지 동사에 주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연합하다” “둘이 한 몸을 이루다”라는 말입니다.
연합하다 : 연합한다는 것은 딱 들러붙어 하나가 된다(아교로 붙이다)는 의미의 히브리어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 친밀함, 서로에 대한 100%의 헌신, 사랑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월터 트로비쉬는 “남편과 아내는 종이 두 장을 풀로 붙여 놓은 것이다. 하나로 붙여 놓은 종이를 나누려고 한다면 이 둘을 다 찢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나타내야 합니다. 긍정적인 플러스의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의 가정은 같이 살기 때문에 행복하며, 둘이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행복하십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국의 총리였던 처칠은 도저히 건강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줄담배, 폭음, 비만, 운동부족 등 성인병에 걸리기 쉬운 온갖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66세에 수상에 올랐고, 77세에 재선되었습니다. 또한, 재임 기간에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회고록을 쓰며 9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장수 비결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사는 낮잠 때문에 장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사는 처칠의 장수 원인이 ‘화목한 가정’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처칠이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의 격려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은 성공의 가장 위대한 비결이고, 그것이 바로 이 땅의 천국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아내 때문에, 당신의 남편 때문에 살맛이 납니까? 아니면, 그 사람만 없으면 살 만하시겠습니까? 아주 무섭고 근본적인 질문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서 여자가 하는 일을 ‘살림’이라고 합니다. 그 ‘살림’이라는 말의 어원은 ‘살려 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대로 여자들이 가정 살림을 한다는 것은 가정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다 : 결혼의 원리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 속에는 아주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 너무나 다른 성격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이 "한 몸"이라는 것이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연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트로비쉬는 “두 사람은 그들의 육체나 소유물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감정, 기쁨과 고, 희망과 두려움, 성공과 실패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결혼 서약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 할 때나 가난할 때, 아플 때나 건강할 때…” 이렇게 모든 순간에 한 몸을 이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까? 문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을 하는 데 있어서 서로의 선택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부에서 설교할 때마다 교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많이 권면합니다. 나이가 들면 그 사람 자체를 보지 못하고 조건을 보기 때문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인을 만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만나지만, 윤리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지 만남 자체는 아주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조건보다는 배우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 대상자를 보는 기준은 이 사람이 가진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뚜렷한 비전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눈동자가 살아 있고 삶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설교를 잘 들으세요.
그런 대상자를 찾는다면 여러분은 결혼하기 참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면 참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게 산다! 아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혹시 결혼이 사명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사명' '부흥' '축복'이라는 것은 "고난"과 함께 올 때가 참 많습니다. 아니 이 과정을 거쳐야만 만들어져 가는 것이 행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참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가 욥이 고난 가운데서 고백했던 "주가 모든 것을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가 아닙니까?
부부가 하나가 되는 과정도 때로는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일방적인 한쪽의 희생과 기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명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의 그것 말입니다.
우리 한국 초대사에 나오는 김덕신이라는 정말 무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시골에 살던 여인, 아들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된 여인.
어느 날 밤 교회를 다녀오는데, 그것이 못마땅한 남편이 칼을 들고 기다리고 성경을 든 아내의 손을 내리쳤습니다.
손을 잘라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손은 잘라지지 않았지만, 피투성이가 되었고 이 여인의 핍박을 아는 여인네들이 모여 이 가정을 위해 중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김덕신이라는 시골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지 4년, 내 남편이 예수를 믿는다고 나를 핍박하고 내 팔을 자른다 하여 어떻게 포기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남편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기도의 여인을 위해 모여 기도하던 모임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선교회가 되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파송한 일이었다는 역사를 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가정을 이루는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없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 문제 가운데 복된 가정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떠나다 : 떠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의 외적인 분리뿐 아니라 내적인 분리도 포함합니다. 이제까지 부모에게 의존되었던 관계를 버리고 새로 독립된, 스스로 책임지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9년 9월 한겨레신문에 “엄친아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제목의 김선주 칼럼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요즘 젊은 판사들 가운데 판결에 앞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어봐야 안심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위 ‘엄친아’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새로 임용되는 판사 열 명 가운데 네 명이 특목고와 강남 3구 출신이라는 뉴스를 들으며 과연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한 근거가 있구나 싶었다.
… 문제는 엄친아와 결혼하면 부모의 후광과 재산과 함께 엄친아의 엄마까지 세트로 딸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엄친아들의 이혼이 많다는 소문도 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방으로 들어간 신랑 신부들이 밤새 ‘엄마’에게 전화 걸어 보고하고 코치를 받고 다음날 다시 새로운 논리를 내세워 부부 싸움에 나서기 일쑤라고 한다.
엄친아가 지배하는 세상은 불행하다. 결혼할 때 엄마가 딸려오는 것은 개인적 불상사에 그친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인물이 그들 부모의 가치관의 그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중요 정책이나 재판의 형량까지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 사회의 앞날은 암울하다.
자!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의미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부모를 떠나”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결혼식은 양가 부모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근 들어서 호화 결혼식이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결혼식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관행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부분입니다.
저도 청첩장이 오면 화환을 보내거나 축의금을 보냅니다. 사실 우리 삶이 그런 관계를 단절하고 살 수 있나요?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는데 모르는 척, 나만 의롭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이 얼마나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겠습니까?
올바른 결혼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신앙적인 결단 그리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녀에게서부터 결혼이 부모와 가문의 위세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떠난 여러분의 자녀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녀가 가진 것, 그 자녀의 사회적 지위에서 결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녀가 잘못되지 않습니다. 허황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해주는 것이 결혼이 되기보다는 결혼하는 당사자의 시작이 결혼이 될 때 훨씬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혼수”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결혼은 분명하게 양가를 떠난 홀로선 사람들의 의식이라면 가족과 친지들에게 주었던 우리의 풍습이 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는데, 왜 주변에 친지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합니까? 신랑과 신부에게 주는 지나친 혼수용품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런 물질적 가치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꼭 표현해야 하나요?
구약적인 개념이나 고대에 결혼하면서 서로 돈과 가축을 상대방 가정에 주었던 이유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한 여자를 데려오면 그 가정에 노동력이 손실을 보기 때문에 보상하는 의미에서 이거나 혹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귀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이런 생각이 오늘 결혼하는 여러분에게도 맞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의미에서 저희 가정이 조금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형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대로 물건을 받아 쓸 준비를 하고 또 제 동생은 저의 물건을 받아 쓸 준비를 하고 필요한 것 이상의 지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을 원하는 것으로 채우려고 하면 행복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가는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의 기준도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삶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절대 당사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신랑과 신부 두 사람입니다.
제가 조금 앞서가는지 모르겠지만, 결혼식 당일에 입는 드레스의 비용을 생각해 보세요. 이왕이면 결혼식에서 입은 옷을 빌리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결혼 후에도 입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결혼식의 모양이 언제부터 만들어진 문화인지 모르지만, 그 문화를 바꾸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문화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인들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상적인 결혼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힘들고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부터 성경적인 좋은 결혼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실천하기
1. 결혼은 무엇보다 진정으로 축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채무관계가 아닌 사랑의 빚을 진 자들의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도 참 많은 사람이 왔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아내 때문에 오신 분보다는 저희 부모님과 처가의 교인이 더 많았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을 저는 얼굴도 보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결혼을 인격적인 두 사람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얽혀진 가족 관계와 사회적 관계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결혼이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지 지금까지 적금 들듯이 낸 부조금과 결혼 비용을 충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흔히 우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빠가 현직에 있을 때 결혼해야 손님이 온다는 것, 그리고 결혼식을 꼭 주말에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많이 와야 가문의 위세,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혼이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이 신실하게 만나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꼭 축복해줄 사람들의 모임이 가능한 장소와 시간을 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 때부터 실천하려고 합니다. 꼭 와야 할 사람들이 함께 축복하는 결혼이 되도록 말입니다. 부모 때문에 축의금을 내고 온라인으로 내고 식사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꿈꾸는 일 중의 하나가 만나교회 티디관에 아름다운 교회를 지어서 가족이 함께 결혼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게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기쁨이 될 사람들을 초청하고 축복하는 결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비용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결혼식 전날 저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혼이 난 경험이 있습니다. 먼저 결혼식 순서지가 너무 화려하며 첫날을 워커힐 호텔에서 지내도록 형이 예약해 주었는데, 전도사로서 너무 사치스럽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기에 좀 과하게 혼난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결혼이 비용적으로 너무 과하게 들어가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결혼은 완성이 아니고 시작이기에 점점 나아지는 삶의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먼저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식장이 가지는 장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며 먼저 교회에서 결혼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음을 알려 드립니다.
적은 사람이 함께하는 아가페홀,
좀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프라미스 홀,
그리고 계절적으로 좋다면 파구스 앞의 공간을 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탄천을 끼고 주변에 나무들과 푸른 잔디 등 아름다움 결혼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몹시 어려운 분을 위해서는 무료로 드레스를 대여해 주는 방법,
그리고 장소는 교회에서 하되 필요한 사진과 화장 드레스 등은 각자의 선택에 의해서 찾도록 하는 것. 또한, 식사도 사치하거나 낭비하지 않도록 차등을 두어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여러분이 교회에서 결혼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린 주보에 교회에서 결혼하는 데 필요한 guide line을 잘 소개해 드렸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비용을 절약하는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자연적 환경과 주차장을 잘 활용하세요. 그리고 결혼하는 신랑신부가 시간에 쫓겨서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 가장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결혼 순서를 만들 때 신랑 신부에게 많은 자율권을 줍니다. 그들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일인데 의미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나교회가 가진 첨단의 기계, 음향 시설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진정한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혹시라도 한쪽이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 때문에 가족 간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프라미스 홀을 일반 결혼식처럼 꾸며 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래는 흡연실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교회에서 하는 축복,
결혼을 목사님의 축복 속에 하는 것,
그리고 제가 모든 주례를 할 수 없어서 토요일 하루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선순위는 결혼 예비학교를 마친 사람에게 있고요. 토요일이 아닌 평일에 결혼한다면 제가 수고를 감수하고 주례를 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3. 신앙적인 결혼을 위해.
바로 전에 언급한 것처럼 신앙적인 결혼을 위해 결혼 장소가 성전이 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결혼 후에 주일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만나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뿌리를 내릴 교회에서 주일도 지키지 못하면서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 신혼여행을 가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서 시작한다면 신앙적인 결혼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 군 데서 결혼 주례를 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에 쫓기는 것이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결혼을 위해 금전적인 것이 결부되지 않도록 하세요. 이제는 축의금 문화가 아니라 신랑 신부를 축하하는 문화가 되도록 고리를 끊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먼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도 결혼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무료로 합니다. 음식은 사치스럽지 않게 필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합니다. 단지 여러분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결혼을 위해 과외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사례입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에는 이 돈의 액수가 청소하는 분, 영상과 음향 담당자들을 다 포함해도 20만 원을 넘지 않는 수준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관련된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주례 비를 받습니다. 물론 아무 사례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요. 제가 받은 사례보다 제가 더 많은 돈을 부부에게 준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에게 기준은 무엇인지 또는 서로 민망한 일도 있습니다.
제가 명확하게 지침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결혼을 주례하는 목사님을 찾아 인사하는 것은 예의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에 따라 적절한 선물을 하세요. 넥타이, 와이셔츠, 양복 형편에 따라 하세요.
그러면 그 많은 것을 제가 어떻게 다 입을까요? 물론 제가 입는 것도 있지만, 어려운 교역자들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정 주례 비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많이 주세요.
지금부터 들어오는 주례 비는 따로 통장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려고 통장을 만들 겁니다. 행복하게 결혼하며 기쁨으로 준 주례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쓰인다면 참 좋겠지요.
저도 주례 비를 받는 것이 무척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주례자에게 선물하는 것은 예의의 차원에서만 하시면 됩니다. 감사는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하면 됩니다.
결혼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가장 기쁜 날,
축하하러 오는 사람들이 행복한 날,
주례를 하는 목사가 진정으로 축복할 수 있는 결혼,
무엇보다 하나님이 두 사람의 결혼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크리스천 문화를 만들어가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혼으로 출발하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해주시리라는 확신입니다.
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 /창2:22-25/ 류영모 목사
2015-12-07 11:30:11
I. 둘이 한 몸으로
어느 교회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첫 사람의 이름이 뭐지요?” “아담이예요” “그러면 아담 아내의 이름은 뭐지요?” 다른 아이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자신있게 손을 들고 큰소리로 대답 을 합니다. “마담~”
오늘 본문은 아담과 마담 즉 하와가 부부가 되는 인류 최초의 결혼식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담 하와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아무리 읽어봐도 명령형이 없습니다. 본문 24절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이루다” 동사가 아니라 “있다”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입니다. 둘이 한 몸으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명령이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입니다.
인류 최초의 구성원은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 부부였습니다. 부부 에겐 1촌 2촌 – 촌수가 없습니다. 둘이 한몸 무촌입니다. 하나님께서 “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의 집이었고, 일터였고, 선교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좋지 않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에덴은 기쁨의 동산, 행복의 동산이었는 데 혼자 있으니 기쁨이 없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십 니다. 에덴동산안에 가정이 있지만 사실은 가정안에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기쁨의 동산, 행복의 동산은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직장도 있고, 사업도 있고, 심지어 교회도 있는 겁니다. 가정을 위해 학교가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는 겁니다.
솔제니친은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는 분명하다. 가정을 소홀히 생각하고 파괴했기 때문이
다”라고 말했습니다. 직업을 얻고 가정을 잃었다면 그 직업은 버려야 합니다. 명예, 권력, 사업... 따위들이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아담을 위하여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22절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결혼식장에서 아버지가 딸을 데리고 가서 신랑에게 인계하듯 하와를 아담의 손에 맡깁니 다. 예식장에서 아버지가 딸을 사위손에 넘기는 것은 이제 이 딸을 너에게 맡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딸은 물건이 아닙니다. 맡기는게 아닙니다.
- 보라! 그대의 가슴 갈비뼈에서 나온 신비한 존재다. - 그대는 이 여인의 기쁨이 되어라. - 이 여인은 그대의 행복이 될 것이다. - 지금까지 나뉘어져 살았으나 이제 둘이 한 몸으로 살아라! - 그대 가정은 이 여인과 함께 에덴동산, 기쁨의 동산을 이루고 살아라! 엄중한 명령의 순간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성경을 몰랐을 터인데 송강 정철은 훈민가에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한몸 둘로 나누어 부부를 만드시니 (성경귀절을 읽는 것 같아요) 있을제 함께 늙고 죽으면 함께 간다. 어디서 망령된 것이 눈 흘기려 하느뇨. (에덴동산에서 가정을 파괴한 사탄을 꾸짖는 듯 합니다.)
II. 중매쟁이는 하나님
“하나님이 ... 그를(하와)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인류 처음 가정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하심으로 비롯되었습니다. 한 가정의 출발 – 결혼이라는 것은 어느날 우연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오고 가다가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계획으로 이루 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진정한 중매쟁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고 이끌어 내 배우자에게 인도한 것입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에스더서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란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장 매절 강력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손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고 복되게 이끌어 주시는 그 손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가정의 불행은 바로 이 하나님이 빠져 버린데서 시작이 됩니다. 만나게 하신 분도, 가슴 설레이게 하신 분도, 행복을 느끼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마음을 빼앗고 서로 핑계하게 하고 유혹하고 원망하게 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와를 애기나 어린아이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처음부터 혼인적령 기 성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도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이 나이로 가는 것 같습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언제나 온전한 완성품이었습니다. 진화론은 처음부터 창세기 모든 곳에서 거부됩니다. 닭이 먼저요 달걀이 먼저요? 강정버거가 먼저지~. 장성한 성인 하와, 알 낳을 수 있는 닭으로 만드셨지요.
가정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사람을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에덴동산 – 행복의 동산을 건설해 가는 것입니다. 왜 결혼을 합니까? - 편안하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기 위해 결혼을 합니다. - 출세하고 성공하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 결혼을 합니다. - 부자로 살기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맛보기 위해 결혼합니다.
어느날 부모님 사랑받고 살던 아이가 자라 사랑하는 짝을 만납니다. 부모에겐 관심이 없어지고 짝에게만 마음이 있습니다. 이때 부모는 섭섭해지기 시작합니 다. 자식 키워놔도 소용이 없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마음을 들켜버린 자식도 지혜롭지 못하고 못난 자식이지만 부모도 섭섭해 하면 아니 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부모의 짝사랑만 받더니 이제 장성하여 자기 사랑을 할 줄 알게 되었구 나. 축복해야 합니다. “꼭 너같은 자식 하나만 낳아라”저주합니다. 저주하지 않아도 꼭 저 같은 자식 낳아 언젠가
는 부모의 섭섭함을 또 느낄 겁니다. 이게 인류역사입니다. 저주하지 마세요. 축복하세요.
예수님도 우리를 짝사랑만 하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 도, 자식된 인간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다 느끼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사랑도 해보고 상처도 받아보고 섭섭도 해보고 이제 그 예수 사랑 그리워하다가 신랑되신 참된 사랑 맛보려 천국 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 천국에 금은보석으로 지은 집에 살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 수고하기 싫어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 아프고 병들고 늙는 것이 싫어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님 사랑하러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미움도 상처도 원망도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 님 만나 사랑하기 위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가정은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저는 주례하는 가정에 꼭 가정천국을 이루라 권면하며 예언을 합니다. 주례를 하면 애기를 낳을 텐데 남자 아니면 여자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엄마 아빠 천국이 어떤 곳이예요.” “천국이 뭐예요?” 물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천국은 우리 집인 것 같아. 엄마 아빠가 사랑하며 행복한데, 너희들이 엄마 아빠를 좋아하며 잘 자라주는데 여기가 천국 아니겠니.” 이 대답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권면을 합니다.
오래전 故 이중표 목사님이 우리교회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이 직접하신 말씀이니 사실일 것입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목사님들과 타종교의 승려, 사제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한 사제가 묻기를 “어찌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설교를 잘 하십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길래 한 마디로 요약해서 가르쳐 주었답니다. “장가 가!” 성경은 모두 가정으로 설명되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우리는 신부. 사랑해 보고 자식도 낳아보고 부모도 되어 봐야 하나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지요. “일리가 있다”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제게 “류목사님 장가가는 신부님, 승려님 생 기게 함께 기도해 줘!” 하더라구요.
III. 사랑의 고백
드디어 아담 앞에 하와라는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 진기하고 아름다운 곤충과 새들, 온갖 동물을 볼 때 느낀 마음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이 여자를 보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의 체온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뒤로 갈수록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 예술가들의 말이 이 세상에서 그랜드캐년이 아름답고 이가수폭포가 아름답다고 해도 최고의 아름다움은 여성이랍니다.
사회적 명성이 있는 부부들이 미술관에 갔더랍니다. 한 남자가 여자 나체 그림 앞에서 넋을 잃고 서 있습니다. 팔등신 미인에 중요부분 세 곳만 낙엽으로 살짝 덮어 놓은 그림이었습니다. 부인이 옷자락을 끌며 말합니다. “여보, 올겨울에 한번 더 옵시다. 그땐 저 낙엽도 떨어져 있을 거예요.” 예술은 예술일 뿐이지요. 예술을 감상하는게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초등학교도 못 나온 아담이 프로포즈 시를 읊어 댑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시중의 시요, 프로포즈 가운데 최고의 프로포즈입니다. 섹스피어도 못 읊어본 시입니다. - 사랑할 사람을 만난 감격이요 감탄입니다. - 그 여인에게서 또다른 자신을 본 것입니다. - 하나이었으나 나뉘어진 분신을 본 것입니다. - 몸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 이것이 부부입니다. “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미치도록 사랑할 만한 사람을 만나면 평생 행복할 수 있답니다. 미치 도록 좋아할 수 있는 일거리를 만나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IV. 결합하여
아담의 프로포즈를 받고 하와가 응답을 했겠지만 생략이 되었습니다. “내 몸은 당신에게서 나왔습니다. 내 뼈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 살 또한 당신에게 속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 거라예” 아마도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제 상상일 뿐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주례사가 시작됩니다. 하객으로 온갖 동물을 대표하는 피조물들이 참석했습니다. 결혼식후에 피로연 잔치는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축가는 누가 불렀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의 주례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본문 24절 하나님의 주례사는 세 가지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떠나라”입니다. 우리 문화는 여자가 부모를 떠나 남편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부모가 있던 그 자리에 아내로 채우라는 거지요. 대가족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도 영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떨어져 살아도 떠나지 못하고 부모에게 매여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떠나라고 하니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함께 살던 따로 살던 공경해야 하지요.
둘째 동사는 “결합하다”동사입니다. 이 말은 접착제로 붙여 하나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 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으면 안됩니다. 결합하기 위해서는 상처나 죄 그리고 잘못 된 모든 것을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물기 하나도 없어야 하고 녹이 슬어서도 아니됩니 다. 먼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끼어 있으면 접착제는 제대로 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있으면 곪고 터집니다. 고백되어지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되어야 연합 즉 접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먼지 한톨까지 씻어냈으면 이제 접착제를 발라야지요. 사랑과 용서라는 접착제입니다. 씻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요, 접착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제가 어린시절 운동을 하다가 왼팔이 부러졌습니다. 운동하다 거울에 비춰보면 오른팔보
다 왼쪽팔이 훨씬 뼈가 굵어져 있습니다. 접착하면 부러진 뼈는 더 단단해지고 나누어진 나무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이것이 접착제 - 사랑의 힘입니다.
셋째 동사는 “있다” 동사입니다. 있으라. 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입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할래요~ 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듣다 말고 물었습니다. “당신 다시 태어나도 나랑 살래?” 물어보면 “미쳤어”하는 사람 이 있고 “당신 좋은 사람이지만 한번 살아보았으면 되었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조건 다시 산다고 대답하십시오. 질문이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절대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당신 만나 살거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래야 노후가 편합니다. 자꾸 반복하면 진실이 됩니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지난번 우리끼리 있을 때는 치매 걸린 사람이나 네 마무라 내 마누라 구별 안되어 다시 산다매?”이런 친구를 보고 요즘 젊은이들은 “넌씨눈”이라고 합니 다. 넌씨눈이 뭡니까? “넌 씨 눈치도 없냐?”의 생략어입니다.
5월5일은 어린이날, 5월8일은 어버이날, 5월15일은 스승의 날, 5월21일은 둘이 하나 된 부부의 날입니다. 부부의 날 서울시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남편은 73.2%, 아내는 62.9%가 현 배우자에게 만족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다행이지요. 우리교인들 대상으로 조사하면 90%는 넘게 나올 수 있지요? 아니예요? 말해봐! Yes or No.
V.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러분, 결혼식보다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입니다. 결혼생활 잘 할 생각하지 않고 결혼식만 자꾸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평생 한번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주례 아래 아름다운 결혼예식을 치룬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살았을까요? 밥은 누가 만들어 어떻게 먹었을까? 취미생활은 어떻게 했을까? 부부싸움을 했을까? 안했을까?
창세기 저자는 아담과 하와 가정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짧으나 임펙트 있게 전해줍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
그렇습니다. 에덴의 가정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서로 감출 것이 없었습니 다. 가정은 병풍, 가리개 가리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은 훈장 달고 계급장 붙이고 사는 곳도 아닙니다. 모자로 대머리 가리고 넥타이 매고 분장하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다 씻고 다 벗고 사는 곳입니다. 혹 집에 들어가서도 완전 무장하고 사시는 분 계십니까?
제가 가정에 들어갈 때 목사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내 어머니의 아들로 아내의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빠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넥타이 풀고 옷을 벗는 일입니다. 혹시 저희 집에 오시는 분들 집에서 제가 정장 입고 넥타이 매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부부가 벌거벗고 산다는 말은 서로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허물이 많이 보이면 지옥이 되고 허물이 가리어지면 천국이 됩니다. 실수와 약점이 자꾸 보이면 지옥이 되고 장점과 좋은 점이 드러나면 천국이 됩니다. 비판과 저주가 난무하면 지옥이 되고 칭찬과 격려 그리고 축복이 풍성해 지면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가정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인간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부터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입니다. 그래서 가정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넘쳐야 천국이 됩니다. 용서와 치료가 넘쳐야 천국이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천국이 됩니다.
그때 가정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넘치고 허물이 덮여지는 속죄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벗고 살아도 부끄럽지 않는,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부끄럽지 않는 천국의 신비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한 자를 싫어합니다. 세상은 죄지은 자를 저주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허물이 가리어지고 서로 의롭다, 거룩하다, 소중하다 인정해 주는 곳입니 다. 가정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찾아 즐거워해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의롭다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설 때마다 예수님은 나의 크고 작은 죄를 다 아시지만 덮어 주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디서도 고백할 수 없는 죄를 주께 모두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이요 천국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성인이 되어 만났는데 서로 뜯어 고쳐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부모도 나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서로 인정해 주고 덮어주고 사는 겁니다. 사랑해 주면 자기가 자신을 고쳐갈 것입니다. 잔소리에 고친 자도 없고 구박에 바뀐 자도 없습니다. 칭찬, 격려만이 그를 바꿉니다. 칭찬은 잘 할 때 하는 것이고, 격려는 모자람을 덮어주는 소리입니다.
제 눈에 교인들의 허물이 보이면 나는 불행한 목사입니다. 교인들의 눈에 목사의 허물이 보이면 교회 생활이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정에서 내 부모의 허물이 보이면 존경이 사라집니다. 내 부모 존경하면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식의 못난 점만 눈에 들어오면 부모는 그때부터 불행해 집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것이 천국입니다.
남으로 생긴것이 부부같이 중할런가 사람의 백가지 복이 부부에게 달렸으니 이리 중요한 사이에 화목하지 않고 어찌하리. (박인로, 오륜가 - 부부유별)
다정하기만 하던 어느 부부가 싸움을 했습니다. 늘 말싸움에 밀릴 수밖에 없는게 남편이지요. 남편은 화는 나지요. 말은 딸리지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장 나가!” 아내는 “내가 못 나갈 줄 알고!” 휙 나가더니 금방 집으로 들어옵니다. 남편은 왜 들어오느냐고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내가 하는 말이 “뭘 두고 나갔어요” “뭘?”
“집안에 소중한 보석를 두고 나갔어요.” “그 보석이 뭔데? 우리 집에 보석이 어디 있어?” “바로 당신이 내 보석이지요.” 두 사람은 껄껄대고 웃다가 함께 나가 산보를 했더랍니다.
사실 보배는 아내가 보배입니다. 여보란 말은 같을 여(如), 보배 보(寶) 자를 써서 보배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어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여자는 남편을 “당신”이라 부릅니다. 마땅할 당(當), 몸 신(身) 자를 써서 당연히 내몸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여보 당신이란 말 속에도 성경적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둘이 한 몸으로 있으라!
서로 고백하세요. 당신은 나의 보배입니다. 당신은 내 몸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돕는 배필 /창2:18-22/ 하용조 목사
2015-05-24 15:47: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주만물을 창조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은 모든 관심이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2장으로 넘어오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만드시고 다스리고 축복하셨는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됩니다.
맨처음 창조된 남자 ‘아담’
하나님은 맨처음 남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가리켜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이 살 수 있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섬세하시고 놀라운 분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놓으신 후에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에 창조의 더 놀라운 단계로 이끌어 가시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그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동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사는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육축을 모두 만들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사람까지 만드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2장에서는 동물을 만든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장 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새와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동물은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동물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도 물론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고 흙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셔서 생령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동물을 만들때는 암컷과 수컷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6장 19절을 보면 노아홍수때 방주에 동물을 모두 이끌어 생명을 보존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동물은 암컷과 수컷이 동시에 흙으로 만들어져서 자연생리대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암컷과 수컷의 생리현상만으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원리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이 암컷과 수컷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암컷과 수컷만으로 생각하며 진화론적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자연생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온 인간이 복제인간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모양이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 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독특하고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일부다처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여자를 아내로 삼아도 된다는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생각입니다.
여자를 인격적으로 보지 않고 생산기능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보지 않고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을 상품화 해 왔습니다. 번식기능으로 간주합니다. 인격도, 인간됨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자를 종으로 여기고 학대합니다. 부부관계의 위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원리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흙으로 만들어서 인격이나 양심이나 윤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각각 따로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신 후에 에덴동산에 살도록 했지만 그때에는 여자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총각입니다. 혼자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혼자 살고 있었을 때 무엇을 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첫번째 선물은 동물입니다. 여자를 주기 전에 먼저 동물과 친하게 하셨습니다. 동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혼자임을 알게 됨
여러분, 어떤 사람의 이름을 지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의료선교팀과 함께 선교를 나갔을 때 일입니다. 한 동네에 갔더니 할머니가 계셔서 할머니 성함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박 딸그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딸 그만낳으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이름짓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이 많이 나오는데 아담은 최초에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을 지을 때는 특성에 따라 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관찰을 잘 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원칙은 같은 이름을 지으면 안됩니다. 수천종의 동물이름을 짓는 일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담은 대단한 지혜와 창조력을 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를 짓기전의 인간은 이렇게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 이름의 뜻이 좋아야 하고 부르기가 좋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토끼는 토끼같이 느껴지고 곰은 곰같고 쥐는 쥐같습니다. 그 이름과 느낌이 같습니다. 결코 원숭이가 곰일 수 없고 토끼가 쥐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이 지으면 모두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지어주었다는 말속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진화론이 맞다면 모두 진화가 끝난후에 이름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 직후에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때 크게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동물들은 모두 암컷과 수컷으로 짝을 이루었는데 아담 자신에게는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그에게도 배필 즉, 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하나님도 하고 계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혼자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혹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둘 다 만들었다면 더욱 좋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동물이 되고 맙니다.
사람은 인격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부부는 동물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만들어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결혼이란 남자가 여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 받아들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오랜 시간동안 여자를 기다리고 사모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부족을 채우는 사람
하나님은 여자를 만들때 인격적인 배려를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진 여자를 너무나 비인격적으로 취급합니다. 여자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전세계의 종교와 문화속에 퍼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거나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자는 미완성입니다. 여자가 지어져야 인간은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여자는 종이 아니라 돕는 배필입니다. 남자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들은 자기가 돈을 벌고 힘도 세기 때문에 여자를 종으로 착각해서 함부로 다룹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남자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인간 홀로 살 수 없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남자끼리만 살 수 없습니다.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여자끼리만 살아도 안됩니다.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남자끼리 살고 여자끼리 사는 것, 남자끼리 결혼해서 성생활하는 것은 큰 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동물은 세상에 태어나는 즉시 걸어다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키워야 하고 학교를 보내야 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들어 여자를 받아들이게 한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단순히 번식의 도구나 성적대상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가정의 위기는 여자를 잘못 생각하고 다루는데 있습니다. 만일 여자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대하기만 한다면 가정은 천국과 같이 되고 이세상도 천국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존재입니까? 18절에서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부속품이나 종속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남자는 여자를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미완성품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남자를 먼저 만드신 후에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를 사랑하십시오.
보호하십시오. 여자는 당신의 완성품입니다.
남자의 죽음 통해 태어난 여자
두번째, 놀라운 사실은 여자를 만든 재료가 남자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남자로 만들었습니다. 여자가 훨씬 재료가 좋습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1차 가공품이고 여자는 2차가공품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져서 여자가 예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흙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동물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인격이나 도덕이 없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진 남자는 동물적입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여자를 만들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첫째, 여자를 만들때 아담을 재료로 써야 했기 때문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술할 때 마취를 해서 아무것도 모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남자가 죽을 때 여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여러분, 여자에게 아내에게 최선을 다해보십시오. 가정은 천국과 같이 됩니다.
부부사이에 예수님 계셔야
두번째,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재료를 아담의 다리나 머리에서 가져 오지 않고 옆구리인 갈비뼈에서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이 갈비뼈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35번을 사용하고 있는데 본문과 같이 ‘갈비뼈’라고 사용하지 않고 ‘옆구리’라고 쓰고 있습니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옆구리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 붙어 있을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본적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은 자기의 옆구리를 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여자가 아픈것이 아니라 남자가 아픈것입니다. 여자를 학대하면 남자가 외로워집니다. 여자를 사랑하면 남자가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서 나왔습니다. 머리에서도 아니고 발에서도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의 동료이며 친구입니다.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자를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제일 나중에 만든 상품이 좋은 것입니다. 남자를 만드시고 그 남자에게서 나온 최고의 작품이 바로 여자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끌고 아담에게로 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자기들 끼리 길거리에서 눈맞아서 삽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서로 부딪히고, 상처받고, 깨지고, 죽이고, 이혼합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부부도 이혼할 때는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원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사이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못이 가득 박힌 자루와 같습니다. 못이 가득 담긴 자루는 서로 부딪히면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거기에 스폰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를 이끌고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
여자는 아름답고 귀한 존재입니다. 기가막힌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인 여자를 저는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동안 50번을 말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침부터 밤에 잘때까지 해야 합니다. 칭찬도 같은 말을 하면 안되고 골고루 섞어서 해야 합니다.
여자는 칭찬하면 꽃이 핍니다. 그러면 식사도 좋아지고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집이 깨끗해지고 꽃도 생깁니다. 이것이 가정의 비밀이고 부부생활의 비밀입니다. 창조의 원리대로 살면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자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돕는 배필로써
창조의 꽃으로써
이렇게 귀한 여성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들을 축복해 주시고
가정과 교회의 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람직한 부부 1 /창2:18-25 잠17:1
2014-10-16 14:23:54
목사가 자기 아내를 때리는 세상
얼마 전 신문에서 짤막한 기사 한 토막을 읽었습니다. 목사가 자기 아내를 때려서 구속됐다는 기사였습니다. 과거에는 목사가 자기 아내를 때렸다면 그것은 대단한 뉴스거리가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워낙 뉴스거리가 많은 세상이므로 이 정도 얘기 갖고서는 뉴스가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줄을 읽어보니 왜 이 사건이 기사거리가 됐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가 ‘가정 사역’을 하는 목사였답니다. ‘가정 사역’은 교인가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 특히 부부간의 문제를 상담하고 해결해주는 사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던 목사가 자기 아내를 때렸다니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세상이 이렇습니다. 굳이 매 맞는 아내나 매 맞는 남편에 대한 통계숫자를 들지 않더라도, 미국인의 이혼율이 50%가 넘고 한인의 이혼율도 이에 못지않다는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최근 가정이 쳐해 있는 상황은 위기를 넘어서서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다음과 같은 통계도 있습니다. 현재 한인 부부들 중에 다시 태어나도 현재 배우자와 결혼하겠다는 사람보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경제적으로 부유할수록 다시 태어나면 현재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점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 17장 1절은 “집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다투는 것보다 누룽지를 먹어도 마음 편한 것이 낫다.”고 말씀합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교회가 세상 밖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고,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교회나 교인들도 이와 같은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정 사역을 하는 목사가 자기 아내를 때리는 세상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다음주일에 우리가 바람직한 부부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마련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는 선교부에서 발제할 사람을 정하려고 이리저리 찾아보고 궁리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없고 또 외부 강사를 청할 입장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그 과제가 제게 떨어졌습니다.
저도 전문가가 아니기를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민한 주제인 ‘부부관계’에 대해 발제를 하려면 그 분야에 이론적으로도 밝고 임상 경험도 많은 전문가이든지, 아니면 발제자 자신이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남편 또는 아내여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할 수 있든지, 둘 다면 더욱 좋겠지만 둘 다가 아니라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돼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저는 둘 다 아닙니다. 하지만 발제를 맡았으니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공부한 내용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발제를 위해 공부를 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부한 내용을 한 20분 정도에 다 발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제가 지난 수년 동안 부부관계에 대해 신앙적으로 조명하는 설교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주간에 걸쳐서 이 주제를 갖고 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신앙’은 바람직한 부부관계의 기초
결론부터 말하면, ‘신앙’에 기초하지 않으면 바람직한 부부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일이든 신앙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는 ‘신앙지상주의’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바람직한 부부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형’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려고 합니다. 바람직한 부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전제는 우선 부부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같은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전제 아래서 바람직한 부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신앙을 갖고 있다거나 한편만 기독교인인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겠지요. 이번 설교와 세미나에서는 그 문제까지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앙만 같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앙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을 저절로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도깨비 방망이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 없으면 바람직한 부부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는 결론은 ‘신앙지상주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다만 부부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신앙’의 문제를 만날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신앙에 근거해서 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입으로만 하느님을 찾거나 입으로만 신앙을 말하거나 성경구절을 많이 외워서 부부싸움 할 때 적절하게 써먹는 것을 가리키지 않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은 바람직한 부부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부부 간의 갈등을 풀어주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신앙에서 찾아야 합니다. 부부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동력도 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부로서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육체나 마음의 결합을 넘어서는 ‘영혼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도 신앙적으로 만나야 하고 영혼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앙은 바람직한 부부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정목회를 하는 분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세우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 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가정은 우선 한 사람의 인격이 성장하는 장소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이나 결손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온전한 인격을 갖추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건강한 인격을 세울 수 있습니다. 또한 가정은 한 사람이 최초로 경험하는 경제 단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에서 경제를 배웁니다.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지를 배우는 곳은 일차적으로 가정입니다.
돈밖에 모르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돈밖에 모르게 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그 방법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뜻있는 일에 돈을 쓸 줄 아는 부모에게서 배운 사람은 그런 생활방식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가정은 문화 창조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보고 듣느냐, 무엇을 느끼고 감상할 줄 아느냐는 가정이 결정합니다. 가정은 인간관계의 출발점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곳은 가정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정은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교회에서 신앙을 배우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신앙을 배웁니다.
사람이 교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몇 시간 되지 않습니다. 한 인격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교회보다 더 중요한 곳은 가정이고 목사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부모입니다. 가정에서 어른들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부부 사이에 갈등은 필연
이렇게 서로 다른 가정에서 몸과 인격을 형성하고 경제생활을 배웠고 문화를 몸에 익혔으며 인간관계 맺는 법과 신앙을 배운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결혼은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혼은 부부 두 사람이 땅을 파고 사랑이라는 ‘씨앗’을 묻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물을 주고 흙을 북돋우고 잡초를 제거해서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는 것이 곧 결혼생활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만났으니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똑같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갈등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문제는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갈등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갈등은 한 개인의 경우에도 그가 성장하면서 여러 단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인간은 각각의 성장 단계에서 자신과 갈등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이렇게 스스로도 갈등을 겪고 있는 개인과 개인이, 서로 다른 가정과 환경 속에서 성장한 두 인격이 만나서 연합하는 과정이니 거기에는 얼마나 더 크고 다양한 종류의 갈등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결혼생활에서 부부간의 갈등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는 존재하는 갈등의 모습은 매우 다양합니다. 성격과 성품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습관과 기질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 간에 대화 부족에서 오는 갈등도 적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가정으로 이어져 갈등을 빚기도 하고 출산과 양육에서 오는 부담이나 재정적 압박에서 갈등이 비롯되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의외로 사소한 데서 비롯된 갈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 배우자를 타인과 비교하는 데서 의외로 크게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음주나 흡연 등의 습관이나 기호의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시가 식구나 처가 식구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부 간의 가장 근본적인 갈등은, 남편이 남성이고 아내가 여성인데서 비롯되는 근본적인 성적 차이에서 온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도 실수도 잘못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허물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이기에 용서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라면 용서가 될 텐데 하필 그것이 아내나 남편의 허물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부관계에는 정말로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것을 덮어주면서 내 가슴이 썩어 들어가면 그것도 바람직한 일은 되지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덮어주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부 간의 갈등은 무작정 감추거나 덮어두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결’되어야 합니다. 바람직한 부부관계는 이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곧 갈등 해결의 과정에 달려 있습니다. 부부 간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성숙한 부부관계의 척도라는 말씀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창세기 2장이 말씀하는 바, “둘이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과 갈등은 나란히 가는 것
따라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과 갈등은 공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갈등이 완전히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갈등이 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사랑이 아주 깊어지면 아무리 큰 허물도 덮어줄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부 사이에 사랑과 갈등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갈등이 커지면 사랑이 식을 수 있고 반대로 사랑이 식으면 갈등이 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갈등을 잘 해결하면 부부 두 사람의 인격이 몰라보게 성숙해질 뿐 아니라 사랑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사이에 없을 수 없는 이 갈등은 때로는 사랑을 식어버리게 할 수도 있고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진정한 부부의 연합을 깊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는 관계를 심화시켜서 성숙한 부부가 되게 만들어주는 잠재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부부관계란 ‘우연히’ 코드나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이 만나서 저절로 잘 살아지는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만났다 하더라도 갈등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부부사이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갈등을 지혜롭게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갖고서 신앙으로 해결해나감으로써 벽돌을 하나씩 쌓음으로써 집을 짓듯이 관계를 쌓아가는 것에 바람직한 부부관계인 것입니다.
바람직한 부부 2 /창2:18-25 잠17:1
2014-10-16 14:21:16
가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는 아닙니다
오늘 설교는 지난주일 설교의 계속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과 오늘, 그리고 오늘 오후이 열릴 부부 세미나를 통해서 ‘바람직한 부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공동체가 둘 있는데 가정과 교회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중 '교회’를 하느님께서 직접 제정하셨는가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창세기 2장 18절 이하가 이를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보다 더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과연 여기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일반적으로 가정과 부부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정이란 무엇입니까? 가정이란 남녀가 만나 짝을 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이런 저런 일 겪으면서 세월과 함께 적당히 늙어가는 그런 곳입니까? 정말 가정은 그런 곳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만일 가정이 그런 곳이라면 세상에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체 건강한 남자와 여자라면 특별히 크게 애쓸 것도 없이 그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정은 그런 곳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정이란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가정, 곧 결혼을 통한 남녀의 결합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분명히 있습니다. 부부로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육체의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결합에 그치는 것도 아니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영혼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 가정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한 영혼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또 다른 한 영혼과 만나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형상과 하느님의 형상의 만남, 그것이 바로 부부요 가정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매우 특별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정이 매우 특별한 결합이라도 해도 그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는 아닙니다.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되는 결합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이혼이 흔하다고 해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긴 이혼이 흔하다고는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쉽게 하는 것 같은 이혼이라고 해도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당사자들에게는 결코 쉬운 이혼이란 없습니다. 세상에 이혼을 쉽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게 되는 것은 미리 그렇게 운명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배우자를 무조건 받아들여서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은 자유로운 두 인격의 만남이고 자유로운 두 인격이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이라는 제도에 본인들의 의지로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친히 만드셨지만 모든 사람이 결혼해야 한다고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예외를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할 수도 있고 또 일단 한 결혼을 해소할 자유도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도 행복하고 뜻있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이 있고 이혼한 후에 오히려 결혼생활 하던 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이든 아내든 인생을 망가뜨린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다가 문제가 생기거든 망설일 것 없이 갈라서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가정은 인간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기필코 지켜야 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구나!”
이제 창세기 2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했듯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정 반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선 야훼 하느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피조세계를 하나하나 만드시며 하느님은 “좋구나!”(it is good!)라고 스스로 감탄하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후에는 “정말 좋구나!”(it is very good!)라고 크게 기뻐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구나!”(it is not good)라고 하셨습니다. 여기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 사용된 구절입니다. 하느님의 불만족이 표현된 최초의 구절이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불만족의 원인이 된 일은 아담이 혼자 있다는 사실인데 바로 앞장인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정말 좋구나!”고 하셨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 아닙니까? 사람 때문에 크게 만족하신 하느님의 마음이 그 사람이 홀로 있다는 사실 때문에 좋지 않았다니 말입니다.
여기서 아담이 ‘홀로 있었다’고 할 때 ‘홀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드’입니다. 이 ‘바드’는 물론 ‘홀로’라는 뜻이고 영어로도 ‘alone’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 이 말 안에는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separation)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냥 홀로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상태, 곧 정상적이 아닌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기로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에쩨르’를 공동번역은 ‘그의 일을 거들 짝’이라고, 개역성경은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help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말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우월한 지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왔습니다. 하지만 본문 안에는 그렇게 볼 근거가 없습니다. ‘돕다’는 뜻의 히브리어 ‘에쩨르’는 노예 또는 열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상전’을 섬기거나 돕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 때 쓰는 히브리어는 ‘에베드’입니다. ‘에쩨르’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도와 구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약성서 베드로전서 3장 1절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들도 자기 아내의 행동을 보고 믿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거나 듣는 이야기도 이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남편들이 남편의 도움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아내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많은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는 아내 또는 어머니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아담은 동물들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는 자기 짝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에쩨르’의 의미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동물들 가운데서 인간의 ‘에베드’를 찾을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에쩨르’를 찾을 수 없었다는 듯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깊은 잠(deep sleep), 히브리어로 ‘티르데마’는 단순한 수면(睡眠)이 아니라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담은 하와의 탄생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와를 창조하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
그 다음으로 “하느님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갈빗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쩰라’는 말 그대로 ‘갈빗대’를 가리킵니다.
이 갈빗대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우린 보통 갈빗대라고 하면 다 먹고 버리거나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하찮은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갈빗대는 가장 중요한 ‘심장’을 싸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이 피 안에 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고기를 먹되 그 피만은 먹지 말하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히브리인들에게 ‘심장’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감정과 지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현대인은 뇌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뇌는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지성’의 자리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뇌가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심장이 그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심장을 감싸고 있는 것이 바로 갈빗대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갈빗대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와를 본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풍습이나 이스라엘의 풍습이나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면 여자가 친정 부모를 떠나 시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남자가 어버이를 떠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떠난다’는 말의 뜻은 ‘몸’이 떠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독립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는 말도 단순히 육체적 결합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은 ‘홀로’ 있었던 상태(히브리어로 ‘바드’의 상태)에서 비로소 생의 반려자를 발견하고 ‘한 몸’(히브리어로 ‘르바싸르 에하드’)을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몸을 이룬 이들은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서로 부끄러워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부끄러워 벗은 몸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 비로소 벌거벗었음을 알게 됐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전에도 벌거벗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둘의 관계의 깨어짐으로써 벌거벗고 있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입니다.
진지하게 사랑을 배우십시오
가정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학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되게 사랑하는 것인지를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물론 사랑을 배우는 곳이 가정만은 아니겠지만 남녀가 한 지붕아래서 서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가정이야말로 인간이 과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 가정은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라고 말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흔치 않지만 과거에는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역설하는 것을 전도의 방편으로 삼는 부흥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곤 했습니다. 하나는, 정말 저 분이 천국을 가보고 와서 저런 말을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고, 또 다른 의문은 정말 천국이 저렇게 좋은 곳인지 알려면 천국의 반대인 지옥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과연 저 분은 지옥도 가봤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지옥이 두려운 줄 모르는 사람이 천국이 소중함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둠이 얼마나 답답한지 무슨 수로 설명하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빛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둠이 그리 답답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번뇌가 없으면 열반도 없다’고 말하고 번뇌가 곧 열반이라고까지 말하는 모양입니다. 사랑이 있는 천국을 알고 싶다면 사랑 없는 지옥을 겪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간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과 다툼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등과 다툼 그 자체가 소중하다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화해와 일치의 진가를 깨달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갈등과 다툼이 소중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모든 갈등과 다툼이 화해와 일치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분열과 관계의 단절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아무도 다툼과 갈등이 반드시 화해와 일치에 이른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갈등과 다툼이라는 어두움 터널을 지나 화해와 일치에 이르기를 진정 원한다면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부부가 겪고 있는 갈등과 다툼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배우자를, 그리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자를,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용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시오. 헤르만 헤세는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용납하지만 진지하지 않은 자에게는 등을 돌리신다.”고 말했습니다.
다퉈야 할 일이 있으면 다퉈야지요. 그러나 다투면서도 진지한 태도를 잃어버리지는 마십시오. 싸우면서도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시고 가슴을 느껴보려 하십시오. 그렇게 진지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갈등과 다툼을 통해서 화해와 일치의 진정한 가치를 터득하십시오. 바람직한 부부 관계는 이런 기나긴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나가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 맺은 약속 /엡5:22-27/ 유기성목사
2017-06-13 05:40:46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행복한 부부 생활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이 아닙니다. 가정에 대한 좋은 책들이 너무나 많지만 어느 기간이 지나고 나면 서점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책은 여전히 서점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맺어주신 하나님은 아무 생각 없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정 설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한 부부 생활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가정의 중심은 부부라고 가르칩니다.
딸을 탁월한 음악가로 기르려고 일생을 바치다시피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지만 그 대가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잃어야 했습니다. 오직 딸만 위하는 아내로 인하여 남편의 마음에 심각한 상처가 생겼습니다.
남편보다 더 사랑했던 딸이었지만 그 딸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딸은 어려서부터 아빠 엄마가 헤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자랐습니다. 행복한 결혼이 어떤 모습인지, 남편과 아내는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지 보고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엄마와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는 최선의 방법은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녀 교육이며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부부가 먼저 연합한 다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까?
부부 문제는 복잡한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예수님께 하듯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할 때 신랑과 신부가 맺는 약속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잘못 만나서 불행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꼭 어떤 날에 결혼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수가 좋은 날 결혼했다고 잘 사는 것 아닙니다.
부부의 행복은 결혼할 때, 맺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결혼할 때, 그런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예수님께 하듯 순종하라’ 하셨습니다.
아내가 남편 보다 더 지혜롭고 섬세하고 똑똑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 하신 것은 남편을 행복하게 해 주는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이기 전에 남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는 칭찬받고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가장 불행해지는 존재입니다.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흘러갑니다. 문제는 아내들이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남편을 돕겠는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남편에게 바른 말을 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너무나 쉽게 남편의 단점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잔소리가 되고 면박도 줍니다. 잘 살아보자는 것이고, 남편을 위하여 하는 말이지만 그 때 남편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의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아내로부터 자존심의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혹시 시집가는 딸에게 “처음부터 네 남편 잡아야 한다” 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딸의 가정을 파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9세기 최고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인 폴 세잔느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무명 화가 시절 밤새워 그림을 그리다가 원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구겨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 구겨진 그림을 다시 잘 펴서 화실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세잔느가 다시 그립니다. 그것들이 유명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어떠한 남성이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비웃을 때 자기편을 들어 주고,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아내가 필요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점은 남편에게 말하고 단점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요구하는 말은 줄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면 남편은 훨씬 더 좋아집니다.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사모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사모님은 누군가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면 그 사람이 사모님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사모님이 거실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또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또 사모님을 저렇게 힘들게 했나 하고 들어보니 목사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위하여 기도하더랍니다.
그 목사님께서 목회 잘하시고 부부가 행복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게리 토마스가 [사랑학교]에서 어느 고등학교 풋볼 시상식에 갔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수들이 연단에 올라가 상을 받는데, 학교에서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상을 주려고 온갖 명목으로 상을 만들어 시상을 하더랍니다. 최우수상을 받는 학생이 호명되어 강단에 오르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장려상 수준의 상을 받는 학생이 호명되어 강단에 오를 때, 비슷한 수준의 환호와 박수가 터지는 것입니다. 선수 본인은 부끄러워 악수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 부모와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환호는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학생을 향한 것 못지않았습니다. 거의 열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때,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임이 깨달아졌다고 했습니다.
아내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의 남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작은 무엇이라도 잘하면 그것을 마치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천재를 보는 것처럼 기뻐하고 환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내도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남편을 보면 잘하는 것이 보입니다.
제 아내가 어디서 말씀을 전할 때, “남편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한 모양입니다. 그 말이 돌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무슨 천연기념물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제 아내에게 정말 늘 예수님처럼 보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제 아내의 믿음과 기대와 소원입니다. 그러면 제가 제 아내에게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계속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이것이 남편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았습니다.
아내의 인정을 받은 남편은 내일 떠오르는 태양이 기다려집니다. 용기가 생겨 좋은 남편이 되고 아내를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내는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남편이 사랑한다는데 왜 아내가 힘들어 합니까?
남편이 자기 식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남편이 부모도 사랑하고 직장도 사랑하고 축구도 사랑하고 술도 사랑하고 미스 킴도 사랑하고 그리고 아내도 사랑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편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참으로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기에 십자가를 져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갖 죄를 짓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것을 다 보셨으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흠이 없는 거룩한 신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말은 아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죄를 짓든, 다 남편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한 유명인이 결혼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녀와 만나고서 모든 일이 너무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잘못되면 아내를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함께 살아보면 아내에게 티와 주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혼 후 가사에 전념하다 보면 화장도 못하고 늘어진 티셔츠와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살게 됩니다. 이때 화려하게 꾸민 여인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내는 순간 멍해집니다.
여기에 아내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부족해도 사랑해 줄까?’ ‘내가 나이가 들어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런 아내의 두려움을 남편이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티와 주름을 없애는 약을 남편이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의 허물을 남편이 대신 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아내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어집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됩니다.
어느 남편이 “나도 감정의 동물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물은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동물이 되면 안 됩니다.
남편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만드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아내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아내를 보는 제 눈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남편의 눈으로 아내를 보았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아내를 보는 관점으로 아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제 아내일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딸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생각의 변화였습니다.
남편은 얼마든지 아내의 허물을 대신 질 수 있습니다. 딸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랑입니까?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며 조건에 따라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딸의 허물을 기꺼이 대신 진다는 것입니다. 딸이 어디 가서 무엇을 잘못하여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면 아버지는 얼른 달려가서 딸을 뒤로 감추고 말할 것입니다.
“제가 이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제가 다 책임질게요! 아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남편 여러분, 장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딸인 여러분의 아내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딸과 아내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이 순간 헷갈리면 안 됩니다. 아내입니다. 딸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아내에게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딸은 자식이지만 아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요셉 집사님, [결혼을 배우다]
나는 결혼한 후, 한동안 나를 위해 아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기도드릴 때 주님은 내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네 아내를 사랑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고 찾다가 가장 사랑해 줄 사람으로 너를 찾았단다.” 순간 놀랐다. 나를 위해 아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철저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내를 사랑해 줄 사람으로 나를 찾으셨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는 아내가 아파서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때 내가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도는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주님, 나와 아내가 한 몸이라는데, 나는 아프지 않은데 아내는 이렇게 아파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한 몸인데 나는 이렇게 멀쩡합니다.” 기도는 점점 절박해져갔고 내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님, 아내의 아픔을 내게 주세요. 그리고 내가 가진 평강을 아내에게 주세요. 우리는 한 몸인데 아내 혼자서만 이렇게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내가 아플 게요.”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회개하며 울었다.
이런 사랑이면 아내가 어떤 형편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부는 침실의 순결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언젠가 배우자와 사별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날 어떤 심정이 될지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 가장 친밀한 관계가 부부입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을 내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영원히 후회를 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큰 고통은 배우자 이외의 이성에게서 기쁨을 찾으려 한 일일 것입니다. 자신과 한 몸인 배우자를 불행하게 해 놓고 자신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부부가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부부는 이기고 지는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이기면 반드시 상대방은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인데 배우자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 역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와 싸우면 항상 내가 이긴다”고 호언장담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다들 부러워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 물으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한테 물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한 걸 알면서 왜 자꾸 나한테 져 주는 거야?"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 몸인데 내가 나와 싸워 이겨서 뭐하겠어?"
부부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순종하려고 해도 안돼요” “사랑하려고 해도 안돼요” “이젠 지쳤어요, 포기하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젠 정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게 해 주시고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이 천국 같게 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오늘 같이 더워도 우리는 겨울 준비를 합니다. 겨울이 온다는 것을 믿으니까요!
예수님을 믿은 우리 부부는 순종하고 사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믿으면 그 길로 가게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선 배우자에게 행복을 요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행복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하나씩 주님께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예수님이 손님이실 때는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무런 역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의 자리에 서시게 될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행복을 회복하지 못할 부부가 없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결혼식 주례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여러분의 결혼을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 여러분의 사랑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살아보면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싸우고 헤어지면 끝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은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고도 행복하지 않는 순간이 오거든, 결혼할 때 약속을 잘 지켰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부부로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604장
배우자를 볼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 /엡5:33/ 유기성 목사
2016-08-17 11:59:21
지난 주간 데이비드 배너의 [거룩한 사귐에 눈뜨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어느 모임에서 그리스도인 부부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전하였답니다. 그런데 한 여성이 강력히 항의하더랍니다.“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요! 거기에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구요? 우리 보고 죽으라는 것예요?”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우리 교인들도 제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부부 관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전하려는 내용은 이미 잘 아는 내용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아,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요.‘ ’이제부터 남편에게 순종해야지!’ ‘이제 아내의 모든 죄는 다 내가 책임져야지!’ 하고 결단하실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분들은 ‘아니, 남편에게 순종만 하라구? 아내의 죄가 다 내 책임이라구?’ 하며 화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사랑하라고 설교 좀 해 주세요, 남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 좀 더 해 주세요 할지 모릅니다.
한 교역자 세미나 때 강사님이 목회자의 부부생활에 대하여 강의하시다가 목사님들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실습을 하게 하였습니다. 다들 그렇게 했는데 한 분만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나이든 목사님이었습니다.“난 못한다. 난 안한다.”주저하는 목사님을 보다 못해 주위 목사님들이 대신 전화를 걸고 수화기를 주면서 빨리 사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재촉했습니다.
마지못해 수화기를 받아든 목사님은“여보, 내다. 사, 사, 사”계속‘사’자만 말하는 목사님에게 주위 목사님들이 손짓 발짓하면서‘사랑해’라고 말하고 하였는데, 그 목사님은 드디어 한다는 말이“사찰 집사는 잘 있나?”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도 안되는데 교인들에게 설교해야 합니까?
말씀듣고 싸우는 부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이 아주 당당하게 ‘순종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래요!”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비난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랑이여?”
부부 생활은 간단히 설교 하편 듣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not a fan] [팬이냐 제자냐]에서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이 신혼 때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다가 경험한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노부부의 가정을 심방하였는데, 남편이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의 침실로 들어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겨 왔답니다. 남편되는 분이 실례를 한 것입니다. 남편은 스스로 변을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먼 목사님은 서둘러 기도를 마치고 방을 나와 거실에서 아내의 손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그 사이 방 안에서는 아내되는 분이 남편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환기를 시키고 나왔습니다, 거실에 당황하여 서 있는 젊은 목사 내외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답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결혼 서약이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답니다.‘아 이것이 결혼이구나!’그 후 아이들먼 목사님은 결혼식 주례할 때, 신랑 신부가 서약할 순서가 되면, 결혼 생활의 적나라한 실체를 알려 주곤 한답니다. 동화 같은 결혼 생활을 꿈꾸며 서있는 신부에게 말해줍니다.
“이제 1년쯤 지나면 예쁜 속옷올 입고 침실로 들어가면 배불뚝이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침대에 누워 시리얼을 접시 째로 입에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축구를 보고 있겠죠. 남편은 시리얼을 씹는 중간 스푼으로 가려운 동올 긁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신랑을 향해 말합니다.“그 즈음 아내는 당신 엄마 처럼 말하기 시작할 겁니다. 시리얼올 먹을 때 소리 내지 말고 식탁에서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겠지요. 말만이 아니라 몸매도 엄마처럼 변해 있올 겁니다. 그래도 서약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결혼할 때, 어느 때나“순종하겠다. 사랑하겠다”서약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은‘남편이 승진할 때나 해고될 때나. 아내가 임신할 때나 유산할 때나. 집을 구입할 때나 집을 팔고 좀 더 싼 집으로 이사할 때나.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을 할 여유가 있을 때나 한 주 내내 라면으로 때올 때나. 많은 돈을 모았을 때나 카드 대금 연체가 되었을 때나. 팔팔할 때나 늙어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때나. 순종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부부가 싸울 일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부부에게 주시는 교훈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리기 보다, 어떻게 하면 그 교훈대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부부가 싸웁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싸우는 것이 정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안 싸우고 사는 부부가 어디 있어?’ 라고 생각하니 싸움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 사이가 왜 이렇게 힘든지 영적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부부 문제의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까지만 해도 아담과 하와는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이 하와를 보고 첫 번째로 한 말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자신과 한 몸이라고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한 후 아담은 하와를 '저 여자'라고 하나님 앞에서 불렀습니다.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과 '저 여자'라는 말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큰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틀어진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부 관계를 깨뜨리려는 사탄 전략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전 인류의 파멸을 노립니다. 그 일을 위하여 가정을 깨뜨려는 것이고, 가정을 깨뜨리자니 가정의 중심인 부부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어느 나라든 가정마다 부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서 가정 문제는 계속 증가할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볼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부부 사이가 틀어지고 깨어진 것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요?
어느 젊은 부인이“예수님은 아이를 길러 보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우리 사정을 아시겠어?”했다고 하는데, 이러면 안됩니다. 왜 아이를 안 길러 보셨겠습니까? 저나 여러분 기르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떤 부부 문제도 해결됩니다! 지난 주일 오후 4시에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충청연회 선교대회에서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도착해 보니 많은 성도들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고, 열기는 너무나 뜨거웠습니다.
높이 설치한 강단 위에 마련된 강사석에 올라 앉아 보니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강렬한 조명으로 인한 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처에 세워진 방송 카메라, 체육관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땀 닦는 동작 하나 하나도 조심스러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12:1) 그 때까지 나는 이 말씀을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내가 사실은 이런 가운데 사는 것이구나!’체육관에 모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증인들이 내려다 보는 가운데 나는 말하고 행동하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사는 자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은밀한 죄를 짓고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많은 증인들 보다 나를 더 사로잡는 눈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허다히 많은 증인들 보다 더욱 중요한 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계셨습니다. 증인들이 허다히 많아도 그들은 나의 외적인 행동만 지켜 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오셔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 지켜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12장 1-2절의 연관성을 그 날 너무나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이 눈이 열리면 부부 관계가 바뀌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가정 불화의 요소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천국에 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는 동안 고생한 것, 실패한 것, 만족치 못했던 것, 실망했던 많은 일들이 다 사라지는 것을 아십니까? 그 어떤 일도 억울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괜찮아요!” 할 것입니다.
오히려 지옥을 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너무 너무 미안할 것입니다. 불평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슬퍼하면 세월 허비하지 않고 더 사랑하고 감사하고 섬겨주고 복음 전하여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사람이 많았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눈이 천국 갈 때서야 뜨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 입니까?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눈이 열립니다.
레나 마리아(Lena Maria)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웨덴 출신의 가스펠 싱어입니다. 그녀는 날 때부터 팔이 없었습니다. 왼쪽 다리는 30cm 정도이며 오른쪽 다리만 정상인 중증 장애자였습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사흘 동안 부모에게 아이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누군가 나에게 예수가 부활하셨고 지금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대라면 나는 약한 육신과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나의 입술을 보여줄 거예요.” 레나의 마음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작년 11월 강영우 박사님이 췌장암으로 한 달을 더 살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한국 많은 지인들에게 e-메일로 성탄절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늘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하며,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보다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여러 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왔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12월 16일 강영우 드림“
당시 이 메일을 받아본 이들은 설명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문 방송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4살 때 축구공에 맞아 실명한 이후‘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미국 백악관 정책보좌관’‘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즈벨트 재단 고문’등 장애를 갖고서도 남들이 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들을 했습니다. 그에게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시련이 많았지만 단지‘성공한 사람’이 아니라‘위대한 사람, 감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했습니다. 어떻게 죽음 앞에서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전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2012년 2월 23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이런 편지 글을 남겼습니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 가득 품고 떠납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강영우 박사의 삶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예수님만 아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 자신을 위해서 평생 그의 눈이 되어 준, 예수님 안에서 하나된 아내‘석은옥 여사’가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4년 시각 장애인으로 살면서,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도 그는 너무나도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 역사는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을 살았을까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영접하셨습니까? 당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인정하셨습니까? 당신 같은 자를 위하여 예수님은 그토록 오래 참고 받아 주심을 믿습니까?”
그런데 순종 못할 남편이 있나요? 그런데 사랑 못할 아내가 있나요? 예수님의 눈으로 배우자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자신의 눈으로 보는 배우자와 다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정말 잘 믿으시는 교회 장로님에게 찾아가서 좋은 신부를 한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이 어떤 신부를 구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믿음도 제일 좋고 마음씨도 제일 좋고, 음식 솜씨도 제일 좋고..."
등으로 제일 시리즈를 읊었답니다. 그 말을 듣던 장로님은 "그럼 자네 결혼하기는 틀렸네.“ 하더랍니다. ”왜요?“ 했더니“자네가 찾는 사람은 벌써 결혼했거든..." 하더랍니다. 청년이 당황하여 "그런 여자가 있기는 있었나요?"
하고 묻자 장로님이 "응, 내 아내가 그 여자야!" 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혼란스러운 것은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은 얼굴도 평범하고, 키도 작고 좀 뚱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장로님은 조금도 거짓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순간 청년의 여자 보는 눈이 거듭났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 잘 믿으면 자기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여겨지는 거구나! 주님의 눈인 것입니다.
부부 생활에 문제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시 바랍니다.
부부가 하나되는 비밀 /엡5:22-33/ 유기성 목사
2016-08-11 10:45:28
서울광염교회 조현삼 목사가‘관계 행복’(생명의말씀사)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목회하면서 교인들끼리 싸우고 갈등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답니다.
한번은 교인들이 싸우기에 왜 싸우시냐고 했더니“목사님, 다 잘하자고 싸우는 것 아닙니까?”하기에“싸우면서 잘하기 보다 싸우지 말고 보통만 하자.”고 했답니다. 그것이 교회의 원칙이 되었답니다.
목사님이 책에서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 부족함, 허물이 있게 마련이고 뿐만 아니라 좋은 면도 뛰어난 점도 다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람을 서로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것을 앝잡아보고, 부족한 것은 무시하고, 허물을 들추어내고 좋은 점은 작게 여기고 뛰어난 점에 대하여는 시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고 지적하며‘연약함은 도와주고’,‘부족함은 채워주고’,‘허물은 덮어주고’,‘좋은 것은 말해주고’,‘뛰어난 것은 인정해 주자.’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예요.”정말 말해주어야 할 좋은 것은 두루뭉실 지나치고 하지 말아야 할 허물과 부족함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극단적으로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인지 아닌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하신 다음에 가장 먼저 부부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결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변화는 당연히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으면 부부 관계가 좋아진다는 말에 혼란스러워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나도 예수를 열심히 믿는데 우리 부부 관계는 힘든데!’ 이런 경우는 예수를 믿는 것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불신 남편이 아내가 새벽 기도가는 것을 보고“교회 나가는 것은 좋으나 제발 미치지는 말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때문에 부부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말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 꼭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음에 계신 것을 알고 그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부부 관계가 좋아집니다.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데 싫어할 남편이 있겠습니까?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불평한 아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아내는 순종하고 남편은 사랑하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영화배우 김지미씨가 신문에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금 70세이지만 60년대 최고 흥행 배우이자, 미인의 대명사였습니다. 50년 영화배우로 살았던 그녀는 여러 유명인들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기를 "살아보니 대단한 남자 없더라."고 했습니다. 대단한 남자들과만 살았었던 그녀가 한 말입니다.‘그런 남자에게 순종하라니!’말이 됩니까? 그러나 남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이런 여자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남편에게 순종할 생각을 하면 아내를 사랑할 생각을 하면 끔찍한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만 다니는 믿음으로는 ‘순종하라 사랑하라’ 불가능합니다. ‘순종 아내 사랑 남편’은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에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했습니다. 아내가 평소에 예수님을 정말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며 사는 자라야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지 않겠습니까?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고 본 남편이어야 아내를 주님이 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남편과 아내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아니면 ‘순종하라 사랑하라’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여러 번 설교도 해 보았지만 싸움거리만 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이것도 순종이야 이것이 사랑이예요’ 기대하다가 더 좌절합니다.
어떤 남자가 애인에게 프로포즈를 하였습니다.“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소.”그랬더니 여자가 대답했습니다.“저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저를 위해 죽을 그 각오로 평생 저녁 설거지만 해 주세요.”이 말을 들은 남자는 한참 생각하더니“그건 좀 어렵겠는데요.”하더랍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되잖아요. ‘안된다, 못하겠다’ 하지말고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표징입니다.더 이상 성공, 집, 차, 옷 등이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결혼하면 잘 삽니다.
남편이나 아내 중에 한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어른이면 부부관계는 유지됩니다. 배우자가 영적으로 어려서 예수님으로 행복하지 못하여 배우자에게 매달리면 업어주고 달랩니다. 투정할 때마다 안아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줍니다. 한 쪽이라도 행복하면 겉으로는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남편과 아내 둘 다 행복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항상 싸웁니다. 서로 요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린 사람은 상대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떨어지기를 싫어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끊임없이 배우자를 고치려 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계속 불만이고 고통스럽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우리는 배우자를 완전할 수 있다고 믿고 기대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절망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 사람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의심하지도 않으셨고 결코 악감정으로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절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에게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행복한 사람은 배우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래서 진정으로 배우자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부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아야 하고 해답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부부갈등이 생기면 배우자에게서 원인을 찾거나 배우자를 고치려 해서는 안됩니다.
부부관계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합니다.예수님께서 아내가 남편을 보는 눈을 바꾸어주십니다.
남편을 경외하라는 말은 아내에게 예수님을 믿으라는 밀고 같습니다.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도 남편에게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우리 주님의 계획은 결혼이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곳이 결혼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손님이실 때는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되셨을 때에야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기적입니까? 부부가 진정으로 한 몸이 되는 기적입니다.
31절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데려오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아담의 눈에 하와가 자신과 한 몸처럼 보였다는 말입니다. 한 몸처럼 여겨야지가 아닙니다.
한 몸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 당시는 아담이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던 때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때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한 몸인지 아닌지는 내 허물이냐 네 허물이냐 하는 생각이 사라졌는지 보면 됩니다. 자존심 싸움이 없어졌는지 보면 됩니다. 이익이다 손해다 그런 생각이 없어졌는지 보면 됩니다.
여러분 부부가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여러분 자신과 한 몸처럼 여겨진다면 성령충만하신 것입니다. 아니라면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사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왜 갑자기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입니까? 한 몸되는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신비한 동동체입니다. 단순히 교인들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한 몸을 이룹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부 사이가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된 관계라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의 열쇠는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목사인 저도 갑자기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가라앉아 도무지 회복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이 부족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실망해서 그럴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누구와 기쁘게 밥을 먹다가 갑자기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기쁜 것이 죄책감이 들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교인들이 많다보니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이 항상 많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누가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나, 무조건 나를 받아주고 내 기분을 좋게 해 줄 사람이 없나 찾게도 됩니다.
저는 주로 제 아내에게 의지합니다, 제 아내는 제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일을 잘 합니다. 주일 예배가 다 끝나고 교회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다리가 부은 것을 보고 아내가 따뜻한 물로 제 발을 씻어줍니다.
목과 어깨를 주물러 줍니다.‘좋겠다.’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목사님 같은 분이니 사모님이 당연히 그렇게 하시겠죠.’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제가 그런 대접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어제 아내 부엌 일을 좀 거들었더니 딸이 하는 말이“내일 설교 때 써먹으려는 것이지요.”하더군요.
제가 아내의 섬김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내야말로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발을 씻겨주어야 하고 어깨를 주물러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발 하나 편하게 맡기지 못합니다.
누군가에 마음 편하게 내 기분을 좋게 해줘 하고 발 하나 어깨 하나 맡기고 싶어 둘러보면 다 제가 섬겨 주어야 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기성아 내게로 와, 내가 너를 쉬게해 줄게.”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행복을 구하며 방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가 하나되는 비밀,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데 있습니다.이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지치고 우울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샘물의 근원이 되어 가족과 이웃 모두에게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admin
댁쟾쇰줈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라 /엡5:31-32
2015-08-28 10:31:32
▲진정한 결혼 준비는... 결혼에 대한 말씀의 원리를 붙드는 것
청년들이 제게 결혼 주례를 부탁해 오면 먼저 만나서 물어봅니다.
“결혼 준비는 잘 했어?” 그러면 다 잘했다고 그래요.
아마 대부분 혼수 준비나 살 집을 마련했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런 준비도 꼭 해야 하긴 하겠지만, 정작 진정한 행복한 결혼을 위한 준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준비 없이 결혼하는 부부들이 상당히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을 갖고 결혼을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너무 불행해 하는 젊은 부부들도 봅니다.
▲결혼생활이 연애처럼 달콤하지 못한 이유 - 말씀의 원리를 떠나니까!
이런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연애는 단꿈이요, 결혼은 꿈을 깨는 자명종이다.”
실제로 정말 그렇다고 느껴집니다.
연애할 때는 단꿈을 꾸는 것 같은데,
막상 결혼하고 나면 그 꿈이 다 깨져버리는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행복한 결혼은 마음에 소원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와 가정의 원리’에 대한 말씀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려고 애를 써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는 것
도대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부모를 떠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을 결혼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여러분, 부모를 떠나셨습니까?
만약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 부부는 행복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 상당히 많은 분들이 그냥 씁쓰레한 웃음만 지으실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자고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정작 행복하냐고 물으면 행복하다고 대답을 못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라. 한 육체가 될지라.
하신 말씀을 우리 부부는 정확하게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점검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행복한 부부가 됩니다.
◑1. 부모로부터 떠남이 분명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떠나라는 말은 부모님을 버리라든지
부모님에게 불효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부부가 한 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는 첫 번째 원리
가족학자 쥬디스 윌러스타인이 결혼한 지 10년 이상 된 행복한 부부 50쌍을
뽑아서 면담을 한 결과, 행복한 부부가 된 원인 중 첫 번째가
“부부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꼽았답니다.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005년도에 한 신용카드 회사에서 30~40대 부부를 대상으로
‘이혼을 생각해 보았느냐? 왜 이혼을 생각했느냐?’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시댁 때문이 26.7% 또 처가 때문이 25.5%>가 나왔답니다.
많은 부부가 본인들 사이도 문제가 있지만
부모 가족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의 배우자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비율도
시댁에게 잘할 때, 처가에 관심을 가져줄 때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부모와 가족들이, 부부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기보다는
아주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혼을 했지만 부모나 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른 채 평생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 배우자와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혹시 느끼시는 분이 있습니까?
결혼해서 지금 살고 있지만, ‘ 내 배우자와 하나라는 느낌은 안 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신 분이 있다면,
대부분 여러분 자신이나 배우자가 부모님으로부터 온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입니다.
▲효도하는 것 중요합니다. 효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먼저 부부가 하나가 되고 그리고 효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효도부터 먼저 내세우면
부부가 하나 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 결과, 부부가 갈라지면 나중에는 효도도 제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도 꼭 이해하셔야 돼요. 자녀가 잘해 주기만 기대하지 말고
자녀들이 하나가 되어서 잘해 주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부모보다 배우자가 우선이다.
어떤 남편/아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 배우자가, 자기 부모와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편/아내 본인이, 아직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완전히 떠났는지/아닌지는,
‘자신의 가족문화를 배우자의 눈으로 볼 수 있느냐/없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가족보다 배우자에게 우선순위를 두고 배려하는 것이지요.
내 남편은 내 친정을 어떻게 볼까?
내 아내는 내 부모님과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볼까?
그것이 이해가 되고, 그렇게 보여지게 되면... 이제 부부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정말 부모로부터 떠난 것이에요.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결혼하기 전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깨끗하게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릴 때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삽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장을 했어요.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어요. 이것을 마음의 쓴 뿌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치유 받고 결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상처는 부모로부터 받았는데
내 남편이나 아내를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혼을 할 때 부모를 떠나라고 하는 말은
내 마음 속에 어릴 때 받았던 상처를 깨끗하게 치유 받고
배우자와 온전한 하나가 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를 남편에게 투사하면 안 돼!
2004년 북경 코스타를 갔을 때 한 자매와 상담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지시하시는데,
자기는 정말 그렇게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자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도 곁에서 보면서,
딸로서 아버지에게 배신감도 느끼고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아버렸어요.
그 아버지를 거의 잊고 지내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서
‘제가 아빠를 미워한 것을 용서해 달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싫은데
아버지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에요. 도무지 싫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왜 내가 아버지에게 오히려 잘못했다고 해야 하고,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 되느냐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꼭 그렇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 상담을 하면서 성령님께서 제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매에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위함이 아니고, 자매의 마음을 치유하려 하심이에요.
앞으로 한 형제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될 텐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지고는 그 형제를 괴롭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모습을 남편에게 투사)
자매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그냥 가지고 결혼을 하면
남편에 대한 의심, 남자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어서
자매를 사랑하는 그 형제는 결혼생활이 그것보다 더한 지옥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자매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아버지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아버지의 허물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아버지 미워했던 것 고백하고, 아버지의 용서도 받고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성령님께서 하시라는 대로 순종하세요.”
그랬더니 그 자매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어릴 적 응어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내적치유가 필요.
여러분, 어떤 때는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안에 어떤 감정적인 응어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렇게 하는가?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내가 왜 이렇게 슬프지? 나는 왜 이렇게 행동을 할까?’
여러분 스스로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적인 응어리가 있다면
한번 잠잠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 감정이 언제부터 시작이 된 것인가?
이 마음이 언제부터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인가?
여러분이 정말 주님께 그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한번 돌아보아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이, 언제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던 옛날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어릴 때 부모님과의 관계, 가정에서 있었던 문제들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건을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 그 사건을 보고 또 보며
주님의 섭리로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배우자와 함께 나누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건에서 풀려나게 되고
그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 상처들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결혼 준비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해요.
그래서 부모를 떠나라고 할 때, ‘과거에 부모로부터 받은 부정적 감정’으로부터도
떠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2. 부부가 진정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가장 대표적으로 느끼는 불만은
남편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보통 아내가 말을 시작하면 첫 마디만 들으면 벌써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착각이지요. 그 다음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남편은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지시)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 저렇게 해.”
그러면 아내는 그냥 속이 터지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해결책을 잘 제시해 주었는데도
아내가 속상해 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남편은 더 어리둥절해 합니다.
아내가 왜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느냐고 몇 번이고 말을 해도
남편은 알아듣지 못하고 같은 일을 되풀이합니다.
▲남편들이 아내들에게서 가장 많이 느끼는 불만은
아내가 늘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자기 사람이라고 여기면,
남자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사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즉시 남편 개조위원회를 조직해서 끊임없이 남편에게 할 일을 일러주고
도움을 제공하려고 듭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것을 조금도 고마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불만인 것을 보며
아내는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것은 모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서로 너무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요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해주는 것이
남편에게는 얼마나 비판적이고 불쾌하게 들리는지 알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조언을 하면 어린애 취급을 한다고 느껴요.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내가 그것도 안할까 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가?’
하고 아주 자존심이 확 상합니다.
▲남편은 아내 말 들어주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도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는 아내가 말하는 것이 전혀 타탕하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또 즉시 해결 방안이 머리에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자기의 느낌을 함께 나눔을 통해서
사랑과 만족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말의 내용보다 느낌을 통해, 비로소 만족감과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가 말을 하고 싶으면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듣기만 한 것인데도 아내가 그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내용이 없는 말이라도,,, 관심 있게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3. 믿음으로 한 몸 되는 원리
▲말씀의 진리를 믿을 때... 한 몸 된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것이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렇게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 몸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진짜 부부가 하나가 되려면 무엇보다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했으면 부부가 한 몸이다.” 그랬다면
그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배우자를 자신과 한 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많은 부부가 한 몸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한 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데.”
여러분, 느껴지고 난 다음에 믿어지려면
세상에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을 대부분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전부 믿고 난 다음에 경험하는 것들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여러분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이 복음을 먼저 느끼고 난 다음에 믿으셨나요?
복음의 말씀을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속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여러분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시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에 믿으려면, 평생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먼저 믿고,
그것이 내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후에 차차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몸 되는 것도... 믿음으로 하나 된다. 엡5:31~32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그랬는데,
예수님과 우리 교회가 <한 몸>같이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요?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먼저 믿음이 필요해요.
<예수님과 우리 교회가 하나이다> 하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경험이 뒤따라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 성도들끼리도 우리가 서로 한 몸이지 않아요?
그런데 전혀 한 몸이라고 느껴지지 않으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나는 저 집사와 한 몸 되는 것 끔직해.’ 이런 생각을 하신 분도 있으실 거예요.
먼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나는 온 교우들과 한 몸이다.’
그 다음에 하나 되는 경험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나를 힘들게 할 때
여러분, 1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몰아 부칠 수 있나요?
지옥 갈 사람인 내가 천국 갈 사람이 됐고,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을 알면,
남편이나 아내가 변화 됐거나 안됐거나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이 와서 용서를 빌고 안 빌고 그것도 상관이 없어요.
마치 100억 탕감 받은 자가, 돈 백만 원 갚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뭐라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변했나/안 변했나 아무 상관없어요. 믿음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지/안 믿는지는 부부관계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현재 마음에 남편과 아내를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여러분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생명의 그 놀라운
복음의 감격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는 일은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본래 올바른 자였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노력을 열심히 해서, 우리 힘으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부활해서) 살면
예수님께서 여러분 부부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그들도 건널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었어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 믿고 약속을 믿고
순종의 걸음을 디디니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내가 예수님 안에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이 생명 되시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에요.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복인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자기 아내/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예쁘게 보입니다.
실제로 제일 예쁜 것은 아니지만, 자기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 정말 잘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이렇게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06.05.21. 인터넷설교 스크랩
[주제별 분류] 행복한 가정
admin
행복한 부부를 위하여 /엡5:22-33/ 하용조 목사
2015-05-26 14:45:48
가정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
‘행복한 부부’란 많은 것을 소유하고,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무언가를 성취한 부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부가 바로 행복한 부부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성경의 원리를 기초로 세워진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말합니다.
창세기에 가정을 이루는 세가지 요소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가정의 창설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빠지면 가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 중심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이 될 때 어떤 위기와 역경도 다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권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붕괴는 권위가 없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남편의 권위가 무너질 때 가정은 붕괴됩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이 되면 비록 남편과 아내가 실수하더라도 그 가정의 권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세가지 요소 중 두번째는 ‘에덴동산’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환경을 에덴동산처럼 쾌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에 두셨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해도 환경이 나쁘면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의 공간때문에 싸웠던 것처럼 서로 다툴 수 있습니다. 환경을 잘 만드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 중 하나인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가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가정에는 부모, 부부, 자녀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입니다.
동양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온데 간데 없고 온통 부모와 자녀에게 모든 시간을 다 빼앗깁니다.
부부중심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 헌신하다보면 막상 부부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통해 본 가정은 하나님중심이었고 에덴이 중심이었으면서도 부부가 중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는 죄가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창세기에서 배울 수 있는 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모르는 죄가 있다든지, 아내에게 남편이 모르는 죄가 있으면 안됩니다. 부부사이에 죄가 있을 때 가정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가장 행복한 부부의 성경적인 조건은 서로에게 죄를 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로에게 숨기는 죄가 있는 가정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 죄를 다 떠나보내기를 축원합니다.
숨겨진 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집, 좋은 차와 명예를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 가정은 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죄’입니다. 에덴동산에 죄가 찾아와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생명나무는 감추어지게 되었고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적인 가정은 성경의 원리 위에 세워지는 가정이요, 이 지침을 꼭 붙들고 지켜나가는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은 결국 마지막 때에 승리할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부부에서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남편이 주축이 되어서 살아가는 가정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22, 23절과 마태복음 19장, 창세기 2장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적인 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우리 가정에도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가정은 ‘독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독립되지 않으면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모가 연로하셨거나 홀로 되셨을 경우 함께 살아야 하겠지만 이런 경우일지라도 가정이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성숙을 의미합니다. 독립할 능력이 없을 때 결혼을 하면 위기가 찾아 옵니다. 결혼을 했지만 부모의 영향권 안에 있게 되고, 종속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과 ‘부모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모를 공경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정, 부부는 부모의 영향권에서 떠나 독립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원리를 부모와 자녀 모두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떠나 보낼 용기가 있어야하며, 자녀에게는 부모의 도움을 되도록 거절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숙한 태도를 보일 때 가장의 권위가 생기고, 가정에 독립성이 생기며, 하나님의 가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남의 도움없이 살 수 있는 성숙한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돕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스스로 가정을 세워나가기 위해 노력할 때 권위를 회복하게 되고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될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완전한 독립을 해야 남편은 아내와 온전히 연합합니다. 부부는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치관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차츰 서로 닮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부부들은 결혼한 후 서로가 서로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근본부터 버려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함께 가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1=1’ 이것이 결혼의 공식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영적질서가 있는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영적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와보다 먼저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남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가정의 영적 책임자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부르시지 않고 아담을 부르셨습 니다. 그런데 아담은 가장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의 영적 질서입니다.
한편, 여자는 ‘돕는 배필’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남편을 고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부인이 남편의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돕는 자로 부름을 받았지 선 생님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자 여러분, 남편을 자신 또는 다른 남편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은 고유한 오직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종이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일 뿐입니다. 남자를 조종하고, 요구하고, 고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남자에게는 약점이 있고 따라서 실수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완하는 존재가 바로 여자입니다. 본문말씀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야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면 가정은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해야 합니까? 남자가 먼저해야 합니다. 남자가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악처도 사랑하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모든 실수도 남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방법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무례히 행하지 말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성내지 말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사랑할만 하지 않더라도 사랑하기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들으십시오.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변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남편들에게 대들지 마십시오. 이것이 아내에게 유익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항상 경어를 쓰십시오.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남편의 머리에 올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또 남편의 발 밑에 있지도 마십시오. 항상 남편의 옆구리에 있으십시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갈비뼈’는 ‘옆구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현주소입니다.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부
진정으로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 해야 될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부부만이 건강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아상이 건강하지 않은 부부는 열등감, 비교의식, 우월감, 오만, 교만, 좌절감 등으로 뒤범벅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문제 자체보다 열등감, 우월감등이 문제가 됩니다. 결국, 이런 마음의 상처는 모든 관계를 왜곡시키고야 맙니다.
따라서 내적인 상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 앞에서 거듭날 때 이것이 가정 생활의 기초가 될 것이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적인 부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나누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먼저 치유를 받으십시오. 옛 사람이 죽어야만 신앙생활, 가정생활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당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상처를 받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지 마십시오. 그래야 인격이 건강해 집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부부는 모두 다 인격적으로 건강하게 치유되며 옛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으로 되시길 축원합니다. 부부사이에 무슨 말을 해도 상처가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속는 것이 있습니다.
가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지, 가정을 위하여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정을 너무 강조하고 부부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하나님은 간 곳이 없고 가정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녀 교육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부모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잃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혼의 의미 /마19:3-9/ 이동원목사
2014-12-05 20:45:06
저는 지난 주일에 인생을 모험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험 가운데 가장 치열한 모험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결혼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 격언에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여라.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여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사건은 바다의 항해보다도 포탄이 나르는 전장보다도 더 치열한 더 위험한 모험의 장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노르웨이 극작가인 입센은 "결혼생활 이 거친 바다를 헤쳐갈 나침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제도를 처음 만드신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바다를 항해할 그의 자녀들을 위해 정확한 나침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결혼의 명확한 의미를 알고 우리가 이 모험을 시작한다면 결혼의 모험은 단순히 불안한 모험이라기 보다는 좀더 기다려지는 좀더 설레이는 더할수록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땅에서 결혼하는 모든 커플들 가운데는 세 커플 중에 한 커플은 결혼의 모험이 이혼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지켜 보아야 하는 가슴 아픈 시대 속에 살고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아~몇 달 전에 통계를 보니까 이 땅의 이혼율이 이제는 32.4%로 증가되었다는 이런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접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가 그렇게 안전한 세대가 아니라는 염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누군가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정리하기를 결혼이란, "결, 결국. 혼, 혼자되는 것" 이라고 그렇게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하하~~
누군가는 푸시킨의 시를 이렇게 곡해 하여 읽기도 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남이 된다 하여도 그대는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그것이 조물주의 뜻이라면"
그러나 그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오늘 이혼의 행렬 가운데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 조차 가담 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결혼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교훈은 앞으로 결혼할 사람들을 위해서도 또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결혼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머지 인생이 건강한 항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숙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었던 일종의 로마에서 임명된 분봉왕이었던 헤롯왕의 이혼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잘 아는 유명한 침례 요한, 세례요한은 그의 이혼과 불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 유태인들은 또 유명한 그 학자들이 힐렐과 샴마이라는 두개의 학파로 나뉘어져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힐렐 학파는 이혼에 대해서 좀더 관용하는 입장이였는가 하면 샴마이라는 학파는 절대로 이혼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의 이슈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 속에 몰아넣기 위한 위험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19장 3절에 "바리새 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는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님은 결코 이 질문을 피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이혼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 밖에 없었던 필요 악과 같은 제도라고 주님은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8절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8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제도가 이혼이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절에서는 간음, 음행의 연고 외에 어떤 이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 일 수 밖에 없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 9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이혼이 가능한가 불가한가 이런 이슈에서부터 이혼의 문제를 접근하시기 보다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좀더 확인해야 할 중요한 물음은 그러면 애초에 처음에 결혼의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결혼의 의미, 그것이 무엇인가를 주님은 이 본문을 통해 밝혀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5절에서 그 대답을 발견합니다. 자, 5절을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5절 시작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나타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동사 속에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발견해 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처음에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두 번째 "합하여" 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그 다음에 한 몸을 이룰지니라 "이룬다"는 세 번째 동사가 강조되고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결혼의 의미, 이 말씀에 의하면 무엇일까요? 첫째로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사회적 혹은 법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부모를 떠나간다는 것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말은 우리가 부모를 버리거나 혹은 부모를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의 좀더 깊은 의미는 결혼은 새로운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인 독립의 사건이라고 주께서는 강조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를 의존하고 살아왔던 자녀들이 이제 당당한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건설 하기위해서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로부터의 심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의 필요성이라고 주께서는 가르쳐 주신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 이렇게 선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그 동안 부모님의 은혜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여인을 만나 혹은 이 남자를 만나 우리가 결혼하며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나가고 살아나가겠습니다. 이것을 법적으로 선언하는 사건이 바로 결혼의 의미인 것입니다.
혼인신고서라는 것은 바로 이 법적인 독립이 이루어진 것을 사회적으로 선포하고 그리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자녀들이 만약 계속해서 부모의 도움을 기대한다든지 혹은 부모가 자녀가 안쓰러워 계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면 이것은 자녀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도 부모 의존적인 삶의 패턴을 형성할 것이고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도움을 계속해서 구하고 있는 자녀들의 가정 혹은 자녀들이 안쓰럽다고 해서 계속해서 자녀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있는 그런 자녀들의 가정치고 여러분 건강한 가정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우리 중에 누가 결혼을 하고도 부모를 계속 의존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하루 빨리 의존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자녀들이 안타까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한두번 도움을 주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녀를 도움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의존하지 않고는 삶을 계속할 수 없는 그런 패턴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망치는 부모의 삶의 행태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땅을 살고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산 안 남기기 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기도와 생각을 언제가 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남겨준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유산을 남기지 않는 것 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기 보다 사회에 환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 속에 환원하는 것이 청교도의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것이 결혼해서 자녀들에게 왜 중요할까요?
만약 재산이 좀 있는 부모들이 그 유산이 자녀들에게 오는 것을 자녀들이 알고있다면 그들은 삶을 계속하면서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 스스로의 삶으로 인생을 개척하기보다도 부모의 유산을 바라보는 그런 삶의 패턴을 계속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늘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해 왔습니다.
"아들들아, 나는 말이야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너희들이 자라가는 과정에 있어서 공부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꺼야. 너희들이 공부하기를 원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아빠와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너희들을 서포터하고 지원하고 도와줄 꺼야. 그리고 너희들이 결혼식을 할 때 까지 결혼식 비용까지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꺼야.
그렇지만 결혼하면 그 다음부터 너희들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야 아빠가 말이야 이 세상을 떠나갈 때 돈이 아마 조금 있을지 몰라, 그런데 그 돈은 아빠는 미리 유언서에 써 놓았는데 그것은 너희들에게 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이 아빠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 손을 가지고 태어났고 아빠는 세상을 떠나갈 때 빈 손으로 떠나갈 꺼야. 그 몫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아빠가 아빠에게 주어진 몫의 재산은 그리로 다 갈 꺼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혼한 그 순간부터는 너희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야 해 알겠니?"
적어도 일년에 한번씩 그런 얘기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느날 그러더라구요. 그 얘기를 듣더니 "아빠, 그러면 결혼하면 우리는 땡이야?" 하하하~~ "땡 이다" 그랬습니다. '땡'이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부모를 의존하는 의존의 끈을 일찍 끊음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진정한 의미에서 자녀를 도와줄 수 있는 부모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떠나가는 것이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결혼은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강조된 단어는 연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한다는 말은 본래 그 유태인들에게도,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옛날에 한지를 많이 썼는데 한지 비슷한,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뭐 파피루스 같은 것도 많이 씁니다마는 이런 것들을 거기다가 아교풀 같은 것을 붙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장을 붙여요 그래서 두개의 종이를 아교풀을 붙여서 딱 붙어버리면 하나의 종이처럼 딱 붙어버리지요.
그래서 두 장의 종이나 파피루스를 한 장의 종이처럼 연결시켜 붙일 때 "붙인다" 이런 데서부터 연합한다는 단어가 유래한 것입니다. 자, 일단 붙어있는 두 장의 종이를 다시 분리시켜 보세요. 이것을 다시 분리 시킬려고 하면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장이 다 찢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결혼해서 한 남자와 한 아내가 부부로 연합하게 되면 이 관계는 다시는 찢어질 수 없는 다시는 찢어져서도 안되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도 끼여들어갈 수 없는 하나됨, 그것이 바로 부부의 연합이요 결혼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적인 의미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부모로부터 떠난다,라는 사실만 강조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또 다른 이성, 내 삶을 함께 나눌 배우자를 찾아 그에게 소속하고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의 하나가 소속감이라고 말합니다. Sense of belonging. 우리는 어딘가 누구엔가 혹은 어떤 공동체엔가 의미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게 소속되지 않고는 사람의 마음은 안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참 묘한 존재에요. 사람은 한편으로는 독립과 해방을 원합니다. 혼자 마음대로 살고 싶어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소속해서 안정을 찾고싶어 하는 역설적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속감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계속해서 방황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가정 사역자 가운데 조이스 렌돌프라는 여류 가정사역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가운데서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자기 남편의 친구 가운데 한때 캘리포니아에 금융업계의 큰 손이었던 죠지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남자들은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누구나 이 사람을 부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밤마다 하나의 파티에서 다른 파티로 파티를 전전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서 캐시가 현금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고 그는 매일밤마다 섹스의 파트너를 바꾸어서 살수 있었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현대판 돈주앙과 같은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의, 남자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종의 플래이보이 비슷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어느날 이 조이스 부부를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더래요. "친구들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외롭다네. 이제 나는 한 여인과 정착하고 싶다네. 아침에 눈을 뜨면 말이야. 비록 섹스가 없어도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리고 식탁을 함께할 수 있는 그리고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내게 필요하단 말이지"
그는 방탕한 삶을 살면서도 이 사람이 정말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혼을 통한 진정한 심리적인 하나됨, 연합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대 일의 연합, 아무도 그 누구도 그사이에 끼여들어갈 수 없는 연합의 갈망을 갈증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다른 이성은 물론 부모도 끼여들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자식도 끼여들지 말아야 할 일대 일의 온전한 연합 그것이 부부의 연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부모는 자식들이 결혼하면 마음껏 진심으로 축복하면서 자녀들을 정신적으로 떠나보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사이에 끼여들지 않을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한번은 미국 목사님이 주례를 하는데 너무 인상적인 주례사가 있었어요.
제가 결혼식을 할 때에도 그 부분을 써 먹을까 생각을 했지마는 한국 문화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때문에 늘 주저하고있는 대목입니다. 이분이 주례하면서 미국 목사님이 이렇게 주례 하더라구요. 보통 결혼 예식 중에는 신랑신부의 서약이 있잖아요? 그런데 신랑신부의 서약이 끝난 다음에 양가의 부모님 일어나시라고, 그래서 양가의 부모님들이 다 일어났어요.
"양가의 부모님들 제가 묻는 질문에 서약하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가의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자녀들을 정성과 눈물로 아름답게 키워오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성경의 말씀을 따라 자녀들을 떠나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자녀들을 마음속으로 축복하며 떠나보내 주시고 그리고 자녀들이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자녀 사이에 끼여들지 않으시기로 부모님들은 서약하십니까?"
이것이 한국의 정서에는 어느 정도 다칠지 모르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매우 중요한 교훈인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부사이에는, 부부사이에는 이러한 부모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갈등들이 노출되고 있습니까? 자녀를 결혼을 시켰지만 끊임없이 뒤에서 자녀들을 리모트 콘트롤 하고 있는 부모들 때문에 겪는 심각한 고부의 갈등은 이 땅의 가정의 파괴에 만만치 않은 요인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축복하고 떠나 보내주셔 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는 심지어는 자녀도 끼여들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얘기 입니까? 한국의 자매들 가운데는 주부들 가운데는 일단 아기를 낳으면 그 다음부터 남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않고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아내와 어머니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위험한 것임을 아십니까? 자식을 낳아도 부부의 우선순위는 내가 일단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내 남편이에요. 그리고 내 아내에요. 자식들은 이차적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들을 결코 소홀히 여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부부관계는 온전한 연합이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생의 우선순위는 내 남편이고 내 아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남편에 대한 관심을 자식으로 옮겨버리면 남편은 충족되지 않은 정서의 탱크가 그 마음 속에 있는 정서의 저수지가 메말라 가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남편들은 그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다른 시선을 옮겨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많은 가정의 위험한 시그널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결혼이란 것은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일대 일의 한 남자와 한 여인의 온전한 연합이어야 한다라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오늘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또 여러분의 자녀의 가정 가운데 이런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어떻게요?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그 다음에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세 번째로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역사적 의미라니? 실존적 의미라니? 너무 말이 거창해, 거창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여기서 한 몸이 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성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교란 것은 부부 안에만 허락된 창조주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부의 성행위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성의 본래의 목적, 성경에 의하면 성을 허락하신 본래의 목적은 창조주의 목적은 생육함과 번성함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자녀가 출산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양육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행위는 우리의 가정의 가정사 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기르는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키워내는 자녀들이 우리의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출산행위와 자녀의 양육행위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것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이란 장난이 아니에요 결혼은 게임이 아닙니다. 결혼은 엄숙한 역사적 책임을 동반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임하는 사람들은 이 자녀를 통해서 내가 내일의 역사를 만든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든다 이런 역사적 소명감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부의 성행위는 출산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부로 하여금 성행위를 통하여 즐거움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잠언5장15절 이하에 보면은 결혼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주는 지혜로운 충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결혼한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결혼한 아들에게 이제 아버지가 교훈을 보냅니다.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의 결혼생활을 매우 아름다운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다른 샘 가지말고,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라.
그 다음절에는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북한 갔더니 리해가 되십니까 그러더라구요 리해가 되십니까?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도랑물을 거리로 흘리지 마십시다" 네, 부부가 같이 오셨으면 아내가 남편보고 이 시간 한번 그렇게 말씀해 보십시요. 자 시작, 한번 해보세요 옆에 있는 남편에게, "도랑물을 거리로 흘리지 마세요" 시작, 하하하~~
아, 챤스는 기회다! 이게 기회인데 이럴 때 안하시면 언제 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이것을 자세히 제가 설명을 해야겠습니까? 하하~~
그 다음 계속되는 말씀에는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그랬네요. 또다시 "나누지 맙시다" 하하~ 자, 또 같이 오셨으면 남편보고 한번 더 이럴 때, 이 남자들이 문제가 더 많으니까, 자, 아내 여러분이 남편에게 "나누지 마세요" 시작, 하하~ 참~ 이럴 때 못하면 언제 해요? 녜,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다음절에 보시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 하라" 이 아내를 엔죠이 하라 그랬어요. 다른 영어성경 번역에 보시면 "satisfy" 만족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있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성적 즐거움을 통한 고독의 극복이야말로 결혼이 존재하는 실존적 의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지말고 수용할 줄 아는 이러한 아름다움이 피차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속에 부부들을 향한 편지 가운데서 기도할 잠시의 틈을 얻기 위한 예배를 빼놓고는 부부는 분방해서는 안된다 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생활을 통하여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부부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서 사랑 받고 또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서의 자기확인, 바로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결혼을 허락하셨다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결혼을 통해서 이런 의미들을 성취해 갈 수 있다면 이런 결혼이야말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부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결혼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그 의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책임과 노력을 다할 수가 있다면 이런 가정이야말로 지상의 작은 천국일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그랬습니다. 미워하신다는 단어가 매우 강력한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영어에 "hate"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 말은 이혼 자를 미워하신다라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이혼한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제기하기를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혼 그 자체는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혼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혼은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삶의 풍성한 기쁨을 박탈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시 다소나마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고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한번 십자가 앞에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왜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할까요? 오늘 성경에서도 본문에서도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이혼이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완악함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죄가 원인인 거에요. 죄!
이 죄는 때로는 이기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 죄는 때로는 학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 죄는 때때로 불친절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흔들고있는 모든 욕망의 밑바탕에는 바로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 우리의 죄 때문이에요.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망, 우리의 정욕,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라면 오늘 다시 그 십자가 앞에 서 보십시요.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고있는 그 분을 바라보십시요.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이기심 때문에 나의 욕심 때문에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다면 그 피로 다시 한번 죄 사함을 받으십시요. 그 피로 나의 용서를 확인 하십시요. 그리고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씻을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십자가 앞에서 저는 회복되지 못할 가정은 없다고 믿습니다.
제가 한번 미국 시카고에 어떤 집회 인도하다가 한 부부의 가정에 초청을 받았어요. 너무너무 아름다운 집에 살더라구요. 아주 아름다운 레이크사이드에 정말 아름다운 집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집보다도 그 집안에 들어가 보니까 이 부부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주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아주 부부의 태도가 싱글벙글 아주 성령 충만한, 아주 아름다운 향기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그 현관쪽으로 부엌쪽으로 들어오다가 보니까 그림하나가 붙어있는데 그 그림이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사진 같기도 하고 페인팅 같기도 했는데 사진과 페인팅이 가만히 보니까 결합된 것이었어요. 십자가를 그려놓고, 그 십자가는 그렸더라구요. 아주 잘~ 인상 깊게 십자가를 그려놓고 십자가의 양 날개에 부부의 사진을 딱 붙여놓았습니다. 환하게 웃고있는 부부의 사진.
그래서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네요?" 제가 그러니까 "이 그림이 사연이 있지요" 그러더라구요 남편이. "무슨 사연입니까?" 그러니까 아주 겸연쩍은 표정으로 "목사님, 실은 저의 부부는 삼년 전만 해도 저의 부부의 부부관계는 지옥이었습니다"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좀 간증을 해도 될까요?" "아이 그럼요" 간증을 시작해요.
긴 얘기를 짧게 줄이자면, 3년 전에 그 부부는 이혼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별거하고 있었어요. 분리되어 있었어요. 미국에는 일정한 별거시간이 지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이혼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서명하고, 변호사 앞에서 싸인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이혼이 되는 거죠. 그런데 마지막 서명하고 정식으로 법적으로 헤어지기 며칠 전,
남편의 마음 속에 아주 부담이 되더래요.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끝내고 말아야 하는가? 자식 낳고 살아온 10년 이상의 삶, 그런데 우리 부부관계가 이렇게 청산 되어야 하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고 무겁더래요. 그러면서 갑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나더래요. 그때 이 남자는 교회조차 멀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전에 나갔던 교회의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새벽기도에 거의 끝날 때 즈음을 선택해서 갔대요. 왜냐하면 사람들 만나는게 싫어서 다 빠져 나올 무렵에, 가니까 한 두 사람만이 있더래요. 맨 앞으로 나왔습니다. 은은한 십자가의 불빛 앞에 엎드려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이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래요. 자기가 살아왔던 삶의 헛된 모습들이 보여지기 시작하고 그러더니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보니까 그 십자가에, 아무것도 없는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달리시는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 나더래요. 거기서 피를 뚝뚝 떨구고 계시는 예수님, 왜요? 왜요?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내 죄 때문이지요. 나도 알아요. 제 욕심, 제 정욕, 제 고집, 제 이기심, 지금까지 그는 부부관계가 어려워진 것은 아내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고 늘 주장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 자기의 죄를 바라보면서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하고 있었더래요. "하나님 제가 더 잘못했어요" 제가 더 잘못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편이 이런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 아내가, 남편이 들어온 좀 후에 그 예배당에 들어왔다는 거에요. 아내는 아내대로 마지막에 싸인 하는 날짜를 앞에 두고 또한 그 마음 속에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는 계속 그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날 따라 좀 늦게, 늦게 왔대요.
아내도 아이들 학교 보내고 좀 늦게 교회당에 도착해 보니까 앞에서 훌쩍이고 통곡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 였대요. 아니 남편이? 그런데 남편의 기도 속에서 이런 말이 계속 들려 오더래요. "하나님 제가 더 잘못했어요" 제가 더 잘못했어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아내는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따져 보고 생각해보니까 남편뿐만 아니라 자기도 실수를 했던 자기의 모습들이 십자가 앞에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남편이 기도하고 있는 앞으로 달려왔답니다. "여보! 저에요" "아니 당신이?" 두 사람은 예배당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함께 무릎 꿇고 부등켜 안고 통곡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그 새벽 손잡고 나왔답니다. 다시 해보자고,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놀랍게 이 부부를 회복시켜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그 다음부터 이 부부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답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여보 내 책임 이에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이 언어를 통해서 부부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 부부가 잘 알고 있었던 화가에게 어느날 부탁을 했대요. 바로 일년 전에, 제가 방문하기 일년 전에 부탁을 해서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어느 정도 그 가정이 정말 아름답게 회복을 시작한 다음에 두 사람이 알고있는 painter에게 화가에게 부탁을 해서 십자가를 그려달라고 그리고 양쪽에 부부의 사진을 붙이겠다고,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서 우리부부는 이렇게 화목했다. 십자가 아래서.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위기가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가정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을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연약함 더 따지고 보면 우리의 허물과 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의 연약함 우리의 죄를 들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십시요. 그리고 십자가 앞에 피 흘리고 있는 그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와 용납을 구하십시요. 그 피가 여러분의 죄와 여러분의 허물을 씻는다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지 못할 가정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가 치유하시는 사랑이 우리의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다 일어나시겠습니다.
둘이 한 몸 되어 천국 같은 가정 이루고 살라고 주께서 부탁하셨지만 때로 쉽지 만은 않은 그 부부관계. 그래서 흔들리는 가정의 모습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그리고 회복시켜주세요. 오늘 이렇게 기도하신다면 십자가 아래서, 눈부신 회복의 은혜가 함께 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이 시간 우리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우리의 가정을 위해 또 여러분의 자녀들이 나중에 이룰 그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귀한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의 현장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우리가운데 너무나 가슴 아픈, 갈등하고 고뇌하는 가정들이 있사오니 주님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전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으로 회복되어 인생의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세요.우리의 손을 잡아주세요. 오 하나님 가정마다 주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 송 152장 아주 먼 옛날, 가사의 뜻을 기억하며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이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우리 손잡고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손잡아도 괜찮은 분들이면 옆에 있는 분들 손잡고 부부는 꼭 좀 잡고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로운 인생길 외롭지 말라고 부부 삼아주시고 가정을 만들어주신 주님 그런데 때로는 우리 인간성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저질은 잘못 때문에 우리는 가정의 위기를 초래하고 또 가슴 아파하며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는 삶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십자가 아래에 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던 주님 그 피로 우리들의 아픔과 우리들의 죄와 우리들의 허물을 이 시간에 씻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설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무도 나눌 수 없는 그 누구도 우리 사이에 끼여들 수 없는 그 온전한 연합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렇게 손잡고 나머지 인생길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또 우리 자녀들이 이러한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미 가정에 흩어지는 깨어지는 아픔을 겪은 분들에게는 회복의 은총을 속히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과 화평케 하심이 말씀을 붙들고 다시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지구촌 교회의 모든 가정마다 또 모든 우리의 삶의 현장마다 사업의 장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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