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 무엇을 주려는가? /신6:6-9/ 차용철 목사
2020-10-28 02:33:06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6-9)
<序言>
저는 결혼 생활을 하기 전에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었던 설교가 '부부생활'과 '자녀교육'이었습니다. 지금은 가장 자신없는 주제입니다. 어떤 젊은 목사님이 결혼하기 전에 자주 '자녀 양육의 법칙'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을 때 설교제목을 '자녀 양육을 위한 제안'으로 바꾸었습니다.
자녀들이 자라 10대가 되자 목사님은 더 이상 그 주제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자녀 교육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교육에서 많은 부분에 실패해도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온 두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구약에서 한 사람, 신약에서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두 사람의 가계도와 생애를 보면서 자녀에게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기를 바랍니다.
1. 구약의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적 계대를 이은 9대손입니다 (마1:1-5). 살몬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로 이어지는 신앙을 잘 이어받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라합'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원주민으로서 여리고성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생(창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일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굽에서 이끌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고 요단 동편 아모리왕 시혼과 옥을 굴복시킨 일들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당할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이 멸망 가운데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국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여리고 성 수색대로부터 숨겨 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죽을 가운데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수2:1-24, 6:17).
성경은 그의 신앙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립니다. 히브리서11:31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2:25에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살면서 아브라함의 9대손 살몬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아스'라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마1:5).
보아스는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①경제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거하면서 많은 밭과 사환과 소년들과 소녀들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룻2:1-7,23).
②인성적으로 긍휼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엘리멜렉 가정이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했는데 10년쯤 지나서 가장 엘리멜렉과 두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와 그 며느리 룻만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모압 지방 여인이지만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 백성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고 할 때 고향과 친구와 친척과 풍습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따라왔습니다. 재혼에 대한 보장도 없는 곳으로 따라왔습니다.
그리고는 먹을 것이 없으니 추수하는 남의 밭에 가서 보리이삭을 주워 끼니를 해결하며 시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어느날엔가는 룻이 보리추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줍게 됩니다. 보아스가 밭에 왔다가 한 여인이 보리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사환에게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이 나오미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국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왔다는 사실과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차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으라 하고,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떠온 물을 마시라 하고, 점심 식사 때에는 일꾼들과 같이 배불리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소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도록 했고 그를 위해 이삭을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리라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을 알고 최선의 도움을 주려 한 것입니다 (룻2:8-16).
③신앙적으로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룻에게 선대한 보아스가 근족(近族)이라는 것을 안 나오미는 그가 율법에서 말한대로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기업무를 자'라는 의식 가운데는 남편 엘리멜렉이 잃었던 재산을 회복해 주고 (레25:25-26), 엘리멜렉의 계대를 이어 줄 자라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신25:5-6).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10년 전에 가난하여 팔았던 재산을 다시 사서 되찾아 주는 것과 엘리멜렉이 아들들이 있었으나 엘리멜렉의 아들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 아들들의 아내를 취하여 자손을 잇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업(基業)무르는 법(法)' 혹은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게 하기 위해 보아스가 타작 마당에서 자기 위해 누울 때에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고 했습니다. 룻이 마오미의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율법대로 그에게 먼저 기업무를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업을 무를 것인지 물어보고 기업 무르기를 거절하면 자기에게 권리가 있기 때문에 먼저 그에게 묻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성읍 장로 18명을 청하여 기업무를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 기업을 무를 것인지 물은 다음 그가 기업무를 권리를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양도하자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기업을 물렀습니다 (룻3:1~4:12).
보아스는 경제적으로 부요했고 인성적으로 긍휼이 많았고 신앙적으로 덕을 세우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자손 가운데서 다윗왕이 납니다. 다윗왕이 그의 증손자입니다 (룻4:21-22, 마1:5-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대의 계대를 이은 언약적 신앙을 가진 살몬, 그리고 비록 이방여인이며 기생이었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헌신의 결단을 보인 라합, 두 사람이 신앙적으로 낳아 신앙적으로 양육한 아들 보아스가 이처럼 모든 면에서 훌륭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2. 신약의 '디모데'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이름을 알 수 없으나 헬라인이었습니다 (행16:1).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독실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였습니다. 그들이 헬라인을 사위로 혹은 남편으로 맞았다는 사실은 그가 개종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으로서 '유니게'입니다. 유니게는 유대인으로서 어머니 로이스와 함께 더베나 루스드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헬라인과 결혼하고 디모데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 들렀을 때 복음을 받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행14:6,22).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 말씀을 잘 배워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딤후3:15).
①믿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였습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믿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행16:2).
②바울의 전도사역에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중 다시 루스드라에 들렀을 때 바울을 만나 신앙적 교제를 하면서 전도여행의 동반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에게 안수를 받고 바울과 전도여행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2~3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의 전도 사역을 도왔고 그러면서 바울에게서 많은 진리를 배우게 되고 사역을 배우게 됩니다 (딤후3:14). 빌립보서2:19-22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③바울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위로자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바울을 배반하고 떠날 때에도 끝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마가가 떠났고 2차 전도여행 시작할 때 마가의 동행문제로 바나바가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도 디모데후서1:15에 보면 "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4:11-12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선교 사역에서 물질의 궁핍, 대적의 공격, 결박과 옥에 갇힘, 질병과 죽음의 위협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동역자들에 대한 배반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디모데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2차로 갇혀 순교하기 직전까지 바울을 배반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에베소교회를 잘 목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만큼 그를 진정한 동역자와 위로자로 여겼습니다 (고전4:17, 딤후1:2).
④바울의 뒤를 잇는 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 로마에 갔다가 투옥되고 다시 석방되는데 (히13:23), 그 이후에 바울의 뒤를 이어 충성되이 목회를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사역의 시대를 이어 새로운 목회시대로 사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런 훌륭한 목회 사역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산 것이 자신의 가르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배운 성경 말씀과 경건 훈련이었다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3:14-17에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1:5에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보아스와 디모데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언약적인 신앙을 가진 야곱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자기 가족과 민족을 흉년 가운데서 살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이집트 궁정에서 신앙이 좋은 유모(어머니)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민족을 구원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엘리 제사장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여호야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의 선한 왕이 되어 40년 동안 치리했습니다.
에스더는 부모도 없고 노예로 붙잡혀 같으나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투철한 외삼촌 모르드개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페르시야 왕후가 되었고 페르시야에서 일시에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인을 구한 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 이른바 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s) 그룹도 그들의 후예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대부분 와쉽 그룹입니다. 영국에서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던 청교도들의 후손입니다. 청교도인들은 알파벳 A를 가르치면서 아담을, B를 가르치면서 바벨탑을, C를 가르치면서 가인을, D를 가르치면서 다윗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우리 나라 인구센서스에 나타난 종교 현황을 보면 불교인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최고위층 인사들의 종교 현황을 조사한 것을 보면 기독교가 가장 많습니다. 정계뿐 아니라 재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주일 철저히 지키게 하고 십일조하게 한 사람들입니다.
<結言>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녀에게 율법(말씀)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잠언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딤후3:15-17).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사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의 앞 길을 말씀이 지도할 것이고 하나님이 인도하여 형통한 길이 열리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6:6-9을 보십시오.
오늘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손목에 배어 기호로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났을 때든지 강론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10~11절에 보면 그렇게 하면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고 자기가 짓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을 자기가 채우지 않은 물건이 집안에 가득하게 할 것이며 자기가 파지 않은 우물물을 얻게 하실 것이며 자기가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여 배불리 먹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서고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고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가치를 물려주지 말고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가치를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자녀의 눈물 /엡6:1-3/ 유기성 목사
2020-06-17 10:25:25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오늘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이 오면 젊은이교회에서 한 주간 부모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입니다. 부모를 위한 새벽기도회 첫 주제가 [기도로 꽃피우는 카네이션] 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여 참석해 보면 울며 기도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올해도 젊은이교회, 부모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올해도 많은 청년들이 부모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모의 기도를 받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보다, 부모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또 하나는 자녀를 위하여 부모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지만 부모에게도 자녀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성경에만 나와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효는 포악하고 방탕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모님에게 불효하고 산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삽니다. ‘나는 효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의 둘째 아들이나 첫째 아들이나 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들어보면 기가 막힌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부모님에게도 효도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만약 부모가 완벽하다면 사람들이 공경하고 사랑하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가 잘못이 있어서 탕자가 된 것입니까?
우리가 복되게 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레 19:32에서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이든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주께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일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 답을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도덕 교과서의 효도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은 요 14:6에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면 ‘어디로 가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목적지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이심이 믿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보시며 즐거워 기뻐하시며 춤을 추시는 분이십니다.
습 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믿어지지 않는 성경 구절입니다. 여러분을 보며 노래하고 춤추시는 하나님! 상상이 되십니까?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한번도 아들아, 사랑한다. 딸아,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날마다 사랑한다, 사랑스럽다 말씀하십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특별히 사랑하고 아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회사에 가고 싶고 학교에 갈 맛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어지면 어떻겠습니까? 살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삶의 전환점이 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3:11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것 때문에 배우자와 자녀, 주위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고통당합니다.
어린 시절의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부모로부터 옵니다. 그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언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정말 믿게 될 때 입니다. 모든 응어리, 원망, 상처가 다 눈 녹듯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한 번은 너무나 힘든 문제로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할 때, 큰 예배당 한 쪽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고 고백하다가 눈물이 터졌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수도 없이 “아버지”부르짖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만 부르며 울다가, 제 마음에 너무나 놀라운 평안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울고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열등감으로 고통당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세상이, 그 뒤에는 마귀가 준 생각으로 자기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존재에 대한 세상의 상식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화에 의하여 우연히 생긴 존재이며, 이 세상은 강한 자만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진정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왜 낳았느냐, 왜 이 모양으로 길렀느냐?”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 것일까요? 고아를 되찾은 아버지이십니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 교회에 강사로 오신 한 목사님이 설교하시다가 여동생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려서 친척 분이 장난삼아 “너는 업둥이야. 내가 다 봤어” 하는 말에 악을 쓰며 “아니라”고 하다가, 악을 쓰는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그 친척이 계속 같은 말을 하자, 그만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마음에 받아들이자 다른 형제들과 유난히 다른 피부색 하며, 유독 자기 돌 잔치 사진이 없는 것 하며 의심스런 증거가 한 둘이 아니더랍니다. 그 때부터 고2 때까지 얼마나 방황하였는지 모른답니다.
괜히 집 밖에 나가 친 엄마가 자기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하고,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차라리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친구가 “넌 엄마랑 꼭 닮았구나!” 하는 말에 충격을 받고 집에 들어가 엄마의 열여덟 살 사진 찾아서 보니 자기가 보아도 자신과 너무 닮았더랍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달려가 소리쳤답니다. "엄마! 내 엄마가 맞구나!" “엄마, 난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닌 줄 알았어!” 울면서 소리소리 지르더랍니다.
이 부분에서 목사님께서 여동생처럼 “엄마!”라고 부르짖을 때, 전율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심을 깨달았을 때, 그 마음이 다시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때부터 여동생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오면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삽니다. 비싸다고 망설이는 이유는 아직 그만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요?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유기성)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이들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가 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입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형편이 좋으면 좋으신 하나님이고 형편이 어려우면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을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고 늘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모를 향한 마음이 열립니다.
자녀도 부모를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젊은이교회 부모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에서 귀한 간증이 있었습니다. 젊은이교회 출신인 한 집사님이 간증해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늘 술에 만취되어 소리를 지르고 엄마와 싸우던 아빠, 견디다 못하여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한 미음으로 너무나 우울하고 슬픈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청년이 되어 ‘주 안에서’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성경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었는지... 깊은 밤 성경을 붙들고 한참 울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혹여 나를 잊을지라도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저를 평안으로 이끄셨고,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 때, 젊은이교회에서 부모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첫날 아버지의 아버지 됨을 인정하지 않았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나의 죄 된 모습을 깨닫게 되자 부모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두 분 모두 상처 많은 불쌍한 영혼이었습니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위치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알게 되었고 부모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두 분을 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한 자매는 어릴 때 엄마가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기에 엄마는 딸에게 늘 화를 많이 내었고 그로 인하여 이 자매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밤마다 혼자 울었습니다. 사춘기에는 엄마에게 대들기도 하여 집이 편안치 못했고 집에 들어가는 일이 지옥같이 느껴졌고 살고 싶지 않다는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 슬픈 마음으로 하나님께 넋두리에 가까운 기도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음에 따뜻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였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자 어릴 때부터 끙끙 앓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날 집으로 가면서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홧김에 먹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 깊이 들어온 평안 때문이었습니다.
그일 이후 엄마와의 관계가 점점 회복됐었는데, 엄마가 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고 나니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하게 일하셨고 사랑을 가르쳐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기 전, 여러분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에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야 하는 고아가 아닙니다.
이것을 믿고 누릴 때, 육신의 부모를 향한 마음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라 할지라도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다.
찬양: 그 사랑
부모와 자녀의 관계 (성경적 가정생활 2) /엡6:1-4/ 이강웅목사
2020-04-05 11:06:33
서론: LA에 소재한 동양선교회 현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박형은 목사님이 한인이민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한 말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분은 1.5세로서 본래 2세 목회를 성공적으로 잘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잘하고 있던 2세 목회를 내려놓고서 1세 목회에 뛰어들게 된 것은 1세 교회가 바뀌어야 2세 목회도 소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대학을 졸업하면 우리 자녀들 80-90%가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조용한 탈출(Silent Exodus)’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분쟁이 나면 싸우며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는 뜻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목회자들의 자녀들도 있고, 중직자들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 목사님이 한인교회의 장래와 2세들을 위해서 마음 아파하는데 어느 날 한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은 문제 있는 아이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아이의 문제를 고쳐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이가 너무 천방지축이어서 전혀 부모가 통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와서 아이를 교정시키는데 그 문제의 실마리를 어디서 푸는가 하니 부모였습니다. 부모의 태도와 말이 먼저 바뀌니 아이들은 저절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뀌자 아이도 그것에 반응해서 바뀌는 모습을 볼 때 역시 전문가답다 싶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박 목사님은 2세 목회를 내려놓고서 1세 목회에 뛰어들었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장래를 준비하지 못하면 한인이민교회는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소리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지난 역사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1903년에 하와이 호눌룰루에 첫 한인 이민자들을 태운 배가 도착했습니다. 이로써 한인이민역사가 시작됐고, 동시에 한인이민교회도 시작됐습니다. 그때 이민교회는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특히 일제치하에 있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금활동을 하는 등,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일에 동참했습니다.
이 호놀룰루에 첫 이민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그 기념교회로 남아있는데 불행히도 그 후손들은 어디에 갔는지 찾아 볼 수 없어요. 그들이 조국과 한인사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지만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아서 그만 도중에 맥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는 교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70-80년대에 이민 문이 열리면서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북미에 4천여 개가 되는 한인교회가 세워졌는데,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한인이민 1세에게 이민 온 목적을 물어보면 대부분 자녀들을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진입해서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통계를 보면 잘 살기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는지를 물어 본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선뜻 답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 하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지만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그 은혜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가 이민 온 목적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에서 결국 실패로 끝난 셈입니다. 자주 자녀들을 자랑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좋은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 가서 돈을 잘 벌어서 부모에게 용돈도 잘 주고,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아니라 실상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여서 오늘날 자녀들이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산다면 비극입니다.
작년에 한국 세월호 사건이 있었을 때 아이들의 떼죽음을 보고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미안하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직 살아있을 때,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일을 해서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처럼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이 만약 지옥에 간다고 하면 우리는 몸을 던져서라도 이것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책임지고 노력하며 감당해야 할 부분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신앙을 전수해 주는 몫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오래전 사사기 시대에 이미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가정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선포한 여호수아와 그 당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앙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 사람들이 죽고 그 다음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은 알지 모르고,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한 일들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세대만 건너뛰면 이렇게 신앙이 죽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입니다.
우리가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가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이어서 오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부모를 순종하라
먼저 자녀들에게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5장에서도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남편에게 먼저 권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당하고 있는 아내에게 먼저 복종하라고 명령한 이유를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아이들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인권이 전혀 고려되지 않던 시대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며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탐탁지 않아도 존경하라는 거예요.
그 이유는 첫째로‘그것이 옳으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옳다’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도덕적인 관점에서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르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돌보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본래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녀에게 전달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계획이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에게 자녀를 잘 다스리도록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의 권한 아래서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2절에서 우리가 부모님을 귀히 여겨야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옵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를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오직 다섯 번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 자신은 먹지 않아도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잘 먹는 모습에 배불러 하셨습니다. 이제 그 분들의 머리는 희어지고, 피부는 탄력을 잃고, 눈은 침침해지며, 몸은 이곳저곳 쑤시는 곳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인생이란 너무도 덧없이 느껴지고, 남은 것이라곤 온 몸이 쑤시고 아픕니다. 삶의 재미보다는 짜증과 한숨뿐입니다. 그리고 외롭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 102:6)라고 인생의 황혼에 찾아온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음식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부모님의 심경을 헤아릴 알아야겠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이 쓸쓸하지 않도록 허한 마음을 채워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영혼이 잘 되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지고, 자식들도 그 빈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채우심을 받고,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받는 것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자녀라면 부모님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이야마로 가장 중요한 효도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믿어 영접하시도록 도와드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아가시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신자들의 전형적인 불효의 모습이 나옵니다. 부모를 공양하는 물질이 아까워서 고르반이라고 선언하고, 부모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선언하고서 실상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부모님도 섬기지 않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위선적인 태도를 가리켜 이렇게 경고합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핑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먼저 자녀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들에게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명한 후에 이어서 부모가 자식에게 특별히 아비들에게 명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절)
그 당시 사회는 아버지 중심의 가부장적인 제도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한이 막강했습니다. 자칫하면 아버지의 일방적인 독선과 억압으로 마음이 여린 자녀들이 쉽게 상처를 받아 자신의 잠재력을 활짝 꽃 피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은 ‘낙심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쓴 뿌리가 내리지 않도록 하라는 거예요.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는데 있어서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선결적 조건입니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절제하는 자제력이 필요해요. ‘왜 부모는 성령 충만해야 하는가? 특히 아버지는 왜 성령 충만하기를 힘써야 하는가?’성령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있는 사람이 될 때에 자녀를 적절하게 교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훈계하면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어요. 또 변덕스러운 말과 행동이 자녀를 쉽게 노엽게 해서 도리어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킬 때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그때마다 기준이 달라지면 자녀에게 혼동을 가져오고 나중에는 원망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우리 기준과 생각, 그리고 감정에 따라 자녀를 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하고 있어요. 이것은 크리스천 부모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들의 삶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일차적 훈련 장소는 가정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가 먼저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잘 받아야 해요. 부모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의해 교훈을 받으며, 책망을 받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되기를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해요. 이것처럼 더 좋은 교육이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다.’ 이것만 제대로 심어준다면 아주 훌륭한 부모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그 부귀와 영화가 극에 달했던 것만큼이나 실패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부흥을 위해서 7년의 대역사 끝에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했지만 인생 후반에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어 신앙생활에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자식 농사에는 실패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는 지혜 있는 사람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일에 심혈을 기울여서 자식 교육을 위해‘잠언’을 썼습니다.“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언 1:8). 이렇게 시작된 ‘내 아들아’는 잠언 1-7장에서 무려 열 세 번이나 계속됩니다.
이것은 잠언의 모든 교훈이 다 그 아들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어요. 때로‘아들들아’라는 복수 호칭도 나오지만 대부분이 단수 호칭인 것으로 보아 후계자로 정했던 ‘르호보암’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훗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원로대신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친구들의 말만 듣다가 그만 왕국이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통일 왕국이 어리석은 아들로 말미암아 일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솔로몬이 왜 그 아들의 교육에 실패했을까요. 그것은 자식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솔로몬은 여러 이방 여인을 취하여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들을 두고 살았는데 르호보암도 부친만큼은 못했으나 아내 18명과 첩 60명을 두었습니다.
또 솔로몬은 분별력을 상실한 노년에는 아스다롯 여신을 섬기고 이방 여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신들을 위한 산당을 지었습니다. 르호보암 때에는 그보다 더 심해져 모든 산에 산당과 우상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사회는 타락하여 심지어 남색하는 자들까지 있었어요. 결국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이 기록한 지혜서 잠언보다도 부친의 행동만을 본받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 보다 행동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타지로 갈 때에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녀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 나갈 것이다. 악한 친구의 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성장해 나갈 것이다.’이런 믿음이 있어요?
그러므로 아직 자녀가 우리의 품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부모의 품을 떠난 자녀가 있다면 이제 부모의 몫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자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눈물로 기도하는 모니카에게 암부로스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자녀를 위해서 더 많은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자녀는 부모에게 주안에서 순종하십시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맙시다. 기도하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상처가 씻어지고, 싸매져서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이 자녀 사랑인가? /골3:21
2019-05-25 00:02:36
제목/무엇이 자녀 사랑인가?
**어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이런 시를 썼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쁘해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가 오늘날 가정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집의 아빠는 자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였다. 하지만 자녀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에 불과했다.
이것은 오늘날 부모와 자녀세대간의 격차가 아주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 어린이 주일과 다음주 어버이 주일에는 세대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설교를 준비한다. 오늘날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깊히 이해해야 하는데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서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말이 안통해서 답답하다"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를 향하여 말이 안통하니 답답하다고 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들과 말이 안통하니 답답하다고 한다.
이렇게 세대간의 갈등이 유독 많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대간의 갈등이 가장 적은 민족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그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 안에는 세대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원리가 다 들어 있다.
<본문>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말)"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녀들을 화나게하고(스트레스 주고) 낙심하게 한다. 부모와 세대단절을 가져오게 한다. 그 이유는 성경적인 자녀사랑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1.성경을 가르치며 대화하는 것이 사랑이다.
유대인들은 자녀와 말이 통하는데 왜 우리는 자녀와 말이 안통할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부모가 어릴 적부터 자녀와 자주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엄마는 자녀와 대화를 잘 나누지만 아빠는 자녀와 대화가 거의 없다. 그러니 말이 안통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2500년 전부터 나라를 잃고 세계에 흩어져서 살아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녀 교육을 학교에 맡기지 않고 가정에서 책임졌다. 그 전통은 사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본 직업은 유목민이다. 유목민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민족이다. 그러니 일정한 장소에 계속 살면 선생님을 데려다가 학교교육을 시킬것인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니 자녀교육은 당연히 부모의 몫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장(場)은 가정이며, 교사는 부모이다. 유대인에게는 가정이 교회요 가정이 곧 학교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요일 안식일이 되면 온가족이 모여서 대화하며 성경을 아버지가 가르친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어릴적부터 나누니 서로 말이 통하고 세대간의 갈등이 없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교육은 학교에서 다하는 줄 안다. 그래서 학문교육은 물론이고 인성교육까지 학교에 다 맡기고... 신앙교육은 교회에 다 맡기고 산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가정에서 대부분 이뤄짐을 알아야한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교육을 부모들이 책임졌다.
우리나라도 자녀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학교에 다 맡길수 있나? 요즘은 학교도 입시 학원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이 품성이 나빠지고 좋아지는 것 선생이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사고만 치지마라'....그런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아이들 교육을 책임지다보니 어릴때부터 아이들과 대화가 막힘이 없이 진행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안식일은 온 가정이 대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어릴적에는 어리다고 대화 안하고... 커서는 말이 안통한다고 대화 안하니 말이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예)두레마을 김진홍 목사....어느 세미나 가서 부모와 자녀간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고 집에 왔다.... 고등학생 아들을 불렀다. '아들아 대화하자!'...
아들이 '말씀하실 것 있으면 하세요' '아니 네가 할 말 있으면 먼저 해라' '전 없어요...아빠나 할말 있으면 빨리 하세요. 나 바빠요....' ....그렇게 마주 앉아도 할말이 없더라고....그래서 '우리 대화 그만 하자'하고 끝냈다고....
아마도 이런 가정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자녀와 대화가 안된다고 안할 것인가? 물론 어릴적부터 대화가 되어야 하지만 지금이라도 자녀와 진솔한 대화를 조금씩 나누어야 한다.
대화한다고 하면서 대놓고 화내지 말고....대화의 분위기부터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라.
그렇게 하면서 먼저 마음문이 열리게 해야한다. 마음이 열리면 입은 저절로 열리는 법이다.
2. 사랑이란 무조건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고 한다.
하물며 내 자식이 어찌 예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우리 한국 부모들은 유독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같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되고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 때문에 힘들어 한다.
무엇이 진정한 자녀사랑인가? 그것을 부모들은 진지하게 되물어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자녀 사랑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나?
한국 부모들은 자녀사랑을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조건 다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
나머지는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게" 그래서 아이들 방청소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하는데...엄마가 다해준다. 나중에 학교 가면 학교 교실청소도 엄마가 가서 다 한다. 방학 숙제....공부와 관련없는 숙제들....엄마가 다 해준다. 학원도 엄마가 다 골라주었고....대학도 엄마가 결정해주었고... 나중에 대학 입학하면 수강신청도 엄마가 다 하는 가정이 많다고....
그렇게 엄마가 다 해주다 보니...나중 사회에 진출에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을 못하는 반병신이 되어버린다. 그러다가 결혼해도 여전히 엄마만 쳐다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 나머지는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게" 바로 그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엄마가 가르쳐야 할 것은 공부를 제외한 다른 능력들인데...요즘 엄마들은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로 키우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그렇게 하여 사실은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캥거루족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이다.
일본에서는 중년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캥거루족이 35세-44세 인구가 300만이라고 하여 사회적 문제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사랑이란 무조건 다 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자녀를 공부만 할줄 아는 캥거루 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시켜도 유능하게 잘 해내는 사람으로 교육 시켜야 한다.
한국 부모들은 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꼴사나운 사람이라도 보면 옆에 있는 아들에게 반드시 이런 말을 하고 지나간다. "저거 봐! 공부 안하면 저렇게 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좋은 대학만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지나치게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진짜 가르쳐야할 가치는 이것이다.
(잠1: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자녀들에게 참된 신앙을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고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는 자녀를 좋은 대학 진학시키는 것보다 가정에서 훌륭한 신앙 문화 만들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안한다. 이 말은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매일 같이 가정 예배를 드린다든지 TV는 전혀 보지 말라고 하라는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훌륭하게 사는 것을 자녀들이 보게 하는 것이다. 삶 자체가 곧 교육이다. 그러면 아이들이 저절로 교육이 된다.
자녀사랑이란 무조건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훌륭한 인격자로 키우는 것이다.
3. 신세대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부모 세대와 요즘 자라나는 세대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가?
**가족계획표어의 변천을 보면 안다.
1960년대 -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70년대 -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대 -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90년대 - 아들 바란 부모 세대, 짝꿍 없는 우리 세대.
(1998년,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위 표어를 지어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0년대 - 아들 딸 낳지 말고 우리끼리 행복 찾자.
**신세대의 몇가지 특징을 들어보자.
1)자녀세대는 풍족한 시대이다.
현재 50대 이상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겪은 세대이다. 보릿고개가 무엇인지 안다. 배고픔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안다. 1960년대 우리나라가 그만큼 가난했다. 그때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가 못되었다.
아프리카의 소말리아나 콩고보다 못살았다. 그런 세대가 현재 부모들이 살았던 시대이다. 그때에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죽어라고 일하였다. 밥만 먹여준다면 무슨 일든지 했다. 식모살이든 신문팔이든...
그때는 한번 배 터지게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라나는 자녀세대는 그렇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시대는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태어나서 자랐다.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다. 부모들이 그렇게 키웠다. 냉장고만 열면 먹을 것이 천지인 시대이다. 엄마가 더 먹으라고 하는 것이 괴로운 아이들이다.
이들 신세대는 엄마 아빠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세대가 먹고 사는 생존적인 욕구에 관심을 보였다면... 이들은 문화를 향유하고, 그보다 높은 즐거움을 추구하며 욕구충족의 자유를 누리려는 세대다.
그래서 신세대는 몇십만원 청바지로 멋을 내고... 한끼밥은 라면으로 때우고(먹는게 중요하지 않으니).... 고급 커피숍에서 몇만원짜리 커피를 아낌없이 마신다. 기성세대는 커피값이 5000원 하면 기절초풍하겠지만 이들은 전혀 상관치 않는다.... 그게 당연한 소비라고 느낀다.
풍족한 시대에 태어났으니 돈쓰는 씀씀이부터 다름을 어른들이 이해해야 한다.
2)개인 중심 시대이다.
부모들은 많은 형제들 틈에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과 어울려 놀 수밖에 없는 가정이었고 놀이문화였다. 그러나 요즘 자녀들은 외아들 외딸이 50% 이상이다. 형제자매가 있어도 자기 방을 다 주어 혼자 논다. 놀때도 예전처럼 술래잡기나 고무줄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혼자 논다. 커서 대학에 가서도 원룸에서 혼자 산다.
그러니 요즘 자녀들은 혼자 노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재미있다. 그래서 단체활동이라면 무언가 불편하고 거북해한다... 당연하다. 그렇게 자라났으니....그래서 자녀들의 개인주의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봐야한다. 신세대는 철저하게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한다.
이 확고한 자기의식이 때로는 개성으로, 권위에 대한 선별적 복종으로, 개인주의로, 부단한 자기개발로, 창조적인 사고로 나타난다.
그것을 어른들의 눈으로만 봐서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있느니 없느니....' 매도하지 말아야한다.
3)고민 많음을 이해하라.
한국의 청소년 사망원인 제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의 청소년 자살율이 세계1위(?)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청소년들이 그만큼 고민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의 스트레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정이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보고 뭐라고 말하는가? "너희들 제일 좋은 시기에 무슨 걱정이냐?"...마치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르듯이 말하는 어른들의 이 말을 들으면 자녀들은 더 화가 난다고 한다.
질문해보자....여러분들은 청소년 시기에 마냥 행복했느냐? 아니다. 그때 대부분 고민 투성이였다. 성적 때문에 고민했고.... 공부하고픈데 공부할 여건이 안되니 고민했고....좋아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밤새워 고민했고... 부모들 땜에 고민했고.... 확실치 못한 장래 때문에 고민했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와서 "그때가 좋았지?"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다.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든지 지금 현재를 가장 힘들어한다.
아이때는 아이 나름대로의 고민 때문에 힘들어 하고...학생 때는 또 그 나름대로의 고민고민거리가 있는 법이다. 지금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복잡한 사회때문에...그리고 그때보다 더 큰 부모들의 기대심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
이것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이다.
4. 기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사랑이다.
자녀에게 부모의 책임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랑의 책임이요 또하나는 기도의 책임이다.
어떻게 자녀를 사랑할 것인가?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다....그것이 오늘 주내용이었다.
그런데 또하나 기억해야할 것은? 부모는 자녀를 기도로 사랑해야한다.
부모가 자녀가 크면 일일이 따라다닐수 없다.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면서부터는 부모는 기도의 책임을 다해야한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책임지게 해야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녀사랑이다.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는가?
(예) 60년대, 70년대 초 우리나라는 중앙정보부라는 곳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의 인식이 "그곳은 아주 무시무시한 곳이다. 거기 한번 잘못 끌려 들어갔다가는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다."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들이 학생 운동을 하다가 그곳에 잡혀 들어갔다. 그 청년을 담당한 정보부 사람이 그 청년을 취조하는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청년을 때리려고 하면 급하게 팔을 내리고 신음하고 주저앉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겁니다. 그 청년만 문책하기 시작하면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니까 그가 한 말 "야! 너의 집에 기도하는 사람 있지?" 어머니가 기도한다고 했다가는 더 맞을 것 같아서 "아닙니다.
없습니다." "거짓말 마라! 이 놈아! 너만 때리려 하면 내 팔에 힘이 빠지고 쥐가 나는데 이건 기도 때문이야!" 그때 사실은 그 어머니가 철야 기도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기도가 아들을 지킨 것이다. 기도로 키운 자녀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진리이다.
여러분도 이제는 자녀를 기도로 양육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의무이다.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자녀사랑법인가?
1.성경을 가르치며 대화하는 것이 사랑이다.
2.사랑이란 무조건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이해하는 것이다.
3.신세대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1)자녀세대는 풍족한 시대이다.
2)개인 중심 시대이다.
3)고민 많음을 이해하라.
4.기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사랑이다.
에베소서-18] 부모와 자녀 관계 거듭나기 /엡6:1-4
2018-07-12 04:29:50
어느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교인들이 가장 마음이 아파서 교회에 오기 싫은 달이 "5월"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 주일]에는 자식 없이 사는 분들이 눈물을 흘리고 [어버이주일]에는 부모를 잃은 이들,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이 눈물나는 주일이고 [부부 주일]은 혼자된 사람들이 가슴 아픈 주일이며,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이들이 힘드니 5월이 가장 예배드리러 오기 싫은 달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필요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부담스러운 곳입니다. 말씀대로 사나 안사나 꾸미고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 가정의 행복을 포기한 분이 계십니까? 안됩니다. 그것은 신앙을 포기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천국 같은 가정의 소망을 되찾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정말 모든 것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복음의 능력은 부부 관계 분 아니라 부모 자녀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부모 자녀 관계는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마귀의 역사입니다. 부모 자녀 관계가 깨어지면 인류는 마지막입니다.
성경은 말세에 ‘부모 거역’하는 심각한 풍조가 만연하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딤후 3:2 “말세에 고통의 때가 이르리니 ...부모를 거역하며”
모든 축복이 다 막힙니다.
2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부모 자녀 관계에 대하여 주신 말씀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아비들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모라 할지라도 “교회 다니지 마라, 성경 읽지 마라.” 하는 말은 순종하면 안되지만, 다른 것은 다 순종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모에게 순종하려 해도 우리 힘으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쓴 글입니다. [사실 이미, 세상을 떠난 어른들(부모들)을 추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불효자는 없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다 효자입니다. 돌아가신 분들과는 더 이상 감정적으로 얽힐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살아계신 부모님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부모님에 대해서 미묘한 이중 감정에 얽혀 시달립니다. '부모는 끝없이 파고들고 싶고, 끝없이 찾고 싶은 고향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는 어떻게 하면 멀어질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부모님들과는 감정적으로 얽힐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 여러분은 공감하십니까?
어떤 문화권에도 부모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 문화는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는 양심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느 사회나 효자보다 불효자가 더 많습니다.
‘말세야 말세, 자녀는 당연히 부모에게 순종해야지, 너를 낳아준 분이잖아, 네가 어릴 때 어떻게 길렀는 줄 알아?’ 말은 맞는 말인데, 그런다고 순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분노하고 섭섭하고 낙심하고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힘든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병들어 있으니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배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결심으로 안됩니다. 노력해서 안됩니다.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동안 주의 교훈과 훈계를 ‘교회에 다녀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세상 공부는 학교에서 배우지만 성경 내용도 배우게 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을 가르친 것이지 주의 교훈과 훈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주의 교훈과 훈계는 ‘속죄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함,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예수님과 동행함.’입니다. 이것들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 권사님 한 분이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게 불만이 가득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말도 잘 안 듣고, 머리도 물들이고, 이상한 옷을 입고,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 더 늦게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딸이 밤늦게 들어오는 것을 현관에서 맞닥뜨렸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옷을 한 채 전혀 회개하는 기색도 없는 딸을 보고 권사님은 불같이 화가 나 딸의 뺨을 세게 때렸습니다. 그때 딸이 두 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떨면서“아버지,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 번도 예수님의 모습을 본 일이 없었어요!.”하고 확 쏘아붙이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드는 딸에 너무나 화가 났지만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겠더랍니다. 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답니다. 방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는데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그러다가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고백하였답니다.“주님, 예수님의 모습을 갖지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딸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딸이 방문을 열었습니다.“딸아, 내가 잘못했다.”아버지는 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아버지를 용서해라. 너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을 용서해라.”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버지의 행동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처음 딸의 입에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이었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부모의 삶을 통하여 배웁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좋아야 내용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마음에 맺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 상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가르치기 전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기르려면 부모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충만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계시면 말로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주님 되신 삶을 살면 됩니다. 그것을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선교사 훈련원에서 매번 선교사 지망생들을 면담하는데, 심각한 것은 선교사 지망생들의 마음 병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담당 간사가 말했습니다.“이 마음으로 선교지에 가면 현지인들 마음에 상처만 줄 것입니다.”그래서 선교사 훈련 때 내적 치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선교사만 아닙니다. 부모가 깨달아야 합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자신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항상 우울한 얼굴을 한 가족을 둔 가족들은 너무나 힘듭니다.
저는 나의 삶이 나의 생각대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에 의하여 되어짐을 알았습니다. 기분과 감정이 나의 삶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예수 믿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나의 마음은 나 자신의 의지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마음 만은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 자유를 몽땅 죄와 마귀에게 넘겨버리고 종노릇하고 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유럽 유학생 수련회를 갔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유럽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얼마나 복받은 학생들입니까? 그러나 겉보기만 그렇지 하나같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환경도 아니었고 학업도 아니었고, 재정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도은미 사모님이“여러분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 중, [소외감, 열등감, 쉽게 포기, 좌절감, 죽고싶은 마음] 다섯 가지 중 세 가지 이상인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했을 때,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유학을 갈 때 자신도 주위에서도 기대는 컸는데, 좌절도 크고 열등감도 크고 외로움과 인간관계의 상처로 인한 어려움.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금방 우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처음에는 기도 소리가 없었습니다. 벽을 대하듯이 답답하고 메말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었고 나중에는 통곡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가 다 어디서 옵니까? 부모와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치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가정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 마음의 상처가 예수님 안에서 치유받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썩을 대로 썩으셨습니다. 미움, 원망, 배신, 수치, 고통, 슬픔, 근심, 거절감 모두를 십자가에서 끌어 안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왕으로 모시게 되면 마음의 상처가 눈녹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누구도 예수님처럼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치유받게 됩니다.
너무나 마음이 뒤틀린 중3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난폭하고 화를 잘 내고 동생들을 때리고 어머니의 근심거리였답니다. 자신도 끊임없이 죽고 싶었답니다. 죽으면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서 복수심으로 더 죽고 싶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명절에 기도 많이 하시는 외숙모가 집에 찾아오셨는데, 자기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방언으로 한참을 기도하시더니 통역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해주시더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고 하셨다.”그 말을 듣고 이 아이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은 순간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집에서 뛰어나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기도실에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예수님, 정말 저를 아세요? 예수님, 정말 저를 사랑하세요? 왜 저를 사랑하세요?”그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말 자신을 위한 십자가인 것이 믿어지더랍니다.‘예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구요.’너무나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
그리고 저절로 감사가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더랍니다. 그 때 생각은 자신이 목사가 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생각나지 않아서 목사가 되기를 약속하였답니다.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수지에 있는 목양감리교회 김완중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저도 간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온유하신 분이 그런 학생이었다니.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자녀를 화나지 않게 하라, 우리 힘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것이 진심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결단하셨습니까?
다시 여러분에게 전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것인지 아닌지 분명히 합시다. 정말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정말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누구를 고치려고 하지도 말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요구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몸부림치지도 말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주시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윤이라는 청년 자매의 간증입니다.
자신의 엄마에 대해 분노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일부러 엄마 속을 뒤집어 놓고 엄마를 공격했습니다. 그런 자신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 속에 울음이 가득차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은혜 체험하고 어린 3살 때 사건이 기억 났습니다. 윤이는 어릴 때 많이 울고 보채는 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 아버지가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날이었는데 그날 집안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았겠죠. 그날따라 비도 추적추적 오고 있었는데 3살 된 윤이는 더 많이 보채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 때 갑자기 친할머니가 윤이한테 화내면서 “얘가 애물단지야!” 윤이를 집어 들고는 비가 오는데 대문 밖에 진흙탕 속에 버렸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얼마나 자지러지게 울겠습니까? 그 때 엄마가 진흙에 버려진 자신을 그대로 놔두고 집에 들어가더랍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 해도 엄마만큼은 나를 지켜주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엄마에 대해 이유도 모르게 증오하고 반항하고 미워하게 된 마음의 깊은 상처를 알았습니다. 그 때 마음에서 예수님께서 “엄마를 용서해라!”하시는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고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자신의 가슴 속에 가득한 울음이 없어졌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뀐 척 하는 것은 더 부담스럽습니다. 죽은 척 하는 것은 서로 힘듭니다. 순종하는 척, 사랑하는 척, 공경하는 척, 정말 힘듭니다. 상대방에게도 힘듭니다. 다 압니다.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노력의 한계요 지식의 한계요, 결심의 한계입니다.
죽은 척하는 것과 진정 예수님으로 사는 차이는 사람에게서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정말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히 보상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되어집니다.
나도 살고 배우자도 살고 부모도 살고 자녀도 삽니다.
마음 속에 빛으로 오시옵소서.
숨어 있는 미움, 원망, 배신, 수치, 고통, 슬픔, 근심, 거절감 모두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평안과 기쁨, 사랑을 품습니다.
예수님 나의 왕입니다.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만 믿고 삽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23:28/ 유기성목사
2017-06-13 03:47:35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젊은이교회에서 지난 주간 부모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할까요?
한 엄마가 아들을 믿음으로 키우기를 원하여 젖먹이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말귀를 알아들을 때까지는 건강하고 지혜롭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유치원에 들어가서는 엄마 말을 잘 듣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자기가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너무나 기뻐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엄마가 내 말을 좀 잘 듣게 해주세요."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문제가 심각해져서야 허둥지둥 댑니다. 항상 늦습니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잘 길러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기도도 했다구요” 그러면 물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눈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할 때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것이 지금 주님께서 부모 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울어야 할 만큼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입니다.
눅 19:41-42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다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 제국에 지속적으로 대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아이들을 땅에 던져서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남자들을 무참하게 살육했습니다. 이 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앞으로 예루살렘 여인들과 그 자녀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시면서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하여 울면서 따라오는 여인들을 향하여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자녀들에게 닥칠 일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앞으로의 세상은 어떨까요?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황폐화되고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월남 파병 때, 배를 타고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면서, 하루는 배에서 태평양 바다를 보는데, 수영 실력이 있고 없고가 아무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수영을 잘하나 못하나 태평양 바다에 빠뜨리고 나면 거기가 거기였습니다! 그리고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바다는 태평양 보다 더 크고 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능력의 차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질병, 재난, 시험 앞에서, 어떻게 인생의 바다를 헤쳐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을 믿어야 살겠구나! 깨달아지더랍니다.
자녀들이 살아갈 인생이 태평양 바다 보다 깊고 넓다는 것을 깨달은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친밀히 교제합니까?
예전엔 대학에 가면 교회를 떠난다고 했는데, 요즘은 중학교에 가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우리의 자녀가 이처럼 점차 세상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개 취급을 받고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런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떴지만 영의 눈은 보이지 않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눈물의 기도가 됩니다. “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해 주소서”
그러나 우리 자녀만을 위하여 울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악해져 가는데 우리 자녀만 믿음이 좋아서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7년 4월 16일에 버지니아 텍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의 범인은 한국인 조승희씨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문제가 없는 학생이었지만 마음에는 온갖 상처와 아픔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터진 후 한국 교민들의 태도를 지적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미국 사회나 희생자나 가해자가 겪었을 아픔을 헤아리기보다 가해자의 부모에게 ‘자식하나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 창피하게 하느냐?’며 원망하고,
혹시 길에서 한국 사람이라고 돌이라도 맞고 욕설이라도 들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심지어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도 자녀들의 참석을 만류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많은 미국 시민들은 희생자를 위하여도 눈물로 기도했지만 가해자를 위한 기도와 눈물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도 억울함과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총을 쏜 청년의 이름까지 새겨 넣은 추모석을 만들어 다른 희생자들 틈에 나란히 세워놓고 기도했습니다.
짧은 일생이지만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힘겹게 살았을 그 불쌍한 청년을 위해. 그리고 자식이 저지른 일로 정신을 잃고 충격에 빠져있을 가족들을 배려하며 진심이 담긴 위로의 메시지를 여기저기 남겨놓았습니다.
우리는 내 자식만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나쁜 친구랑 놀지 마” 라고만 말하면 안 됩니다. 자녀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 전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 동성애 문제, 음란한 풍조, 낙태 문제, 각종 중독,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물든 사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로 기도하다 보면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녀들을 말로 양육할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오래 전 부산학복협에서 청년연합집회를 준비하면서, 주 강사 초청 문제로 회의를 했습니다. 세 분 목사님이 추천되었는데, 모두 설교 잘 하시기로 유명한 분들이었습니다. 그 때 한 목사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 질문이 강사 선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삶이 설교여야 하는 시대이구나!”
이것은 단순히 목사 만 아니라 모든 부모들의 문제입니다.
자녀를 말로만 가르치려 했기에 자녀 양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부부가 살다보면 싸우기도 하고 말을 막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자녀들의 마음이 어떠할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속으로는 깊은 병이 듭니다. 그래서 폭력성을 가지게 되고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됩니다.
제 어릴 때 기억에 부모님이 크게 싸우시지는 않으셨지만, 돈 문제로 서로 불편해 하시던 것은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어려운 목회에 4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고충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만 당시에는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돈 문제로 잔소리하는 것이 가장 싫었습니다.
밥을 굶어도 좋으니 싸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말하지 않아도 부모가 싸우지만 않는다면 자녀들을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싸웠다면 반드시 자녀들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심한 상처를 준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할 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에 화가 쌓입니다. 부모가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볼 때, 어려서 말은 못하지만 다 기억합니다.
‘엄마 아빠도 싸웠잖아? 왜 우리만 싸우지 말라는 거지?’
‘엄마 아빠도 TV 보면서 왜 우리만 공부하라는 거지?’
‘엄마 아빠도 거짓말했으면서 왜 나만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야? 엄마 아빠도 화를 내고 소리 질렀잖아! 그런데 왜 우리 보고는 좋은 말만 쓰라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잘못해서 야단을 맞아도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터집니다. 자신도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소리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화가 쌓인 것입니다.
자녀를 말로 양육하는 것이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자녀들은 더 빗나갑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기도로 양육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 보이지만, 반드시 예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일어나십시오” 하면 다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사람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만 하면서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자녀를 향해 이처럼 말하지 않고 기도만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자녀를 양육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블린 크리스텐슨 사모님이 쓰신 [나를 변화시키소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모님에게는 제인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18살 되던 해, 어느 날 외출 준비를 하면서 딸의 옷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제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마세요. 엄마가 잔소리를 시작하면 목소리가 얼마나 커지는지 아세요? 첫 마디만 하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요”사모님이 딸의 말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침실에 들어가 펑펑 울었습니다. 처음에는 딸이 타락한 것 같아 울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벧전 3:1-2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사모님이 깨닫고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주여, 제인을 변화시키기 전에 나를 변화시키소서” 다시는 어떤 말로도 딸을 가르치지 않고 이 기도만 했습니다. 4년 후, 제인이 어머니날에 보낸 카드 겉장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말없이 행동으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 어머니께’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얘들아, 앉아서 우리 대화하자.하면 필경 화내고 끝납니다. 1960년대 말, 한창 히피 문화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할 때, 자동차 뒤에 오늘 아침 당신의 자녀를 안아 주셨습니까? (Did you hug your child this morning?) 라는 글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대부분 가정과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이젠 말이 아니라 행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셋째, 자녀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울어야 할 대상은 먼저 부모 자신입니다.
우리는 부모인 자신의 마음이 진정 자녀에게 복된 사람이 되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창 49장에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다 같이 복을 선포한 아들도 있지만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처럼 저주를 선포한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 33장에 나오는 모세의 축복기도는 다릅니다. 모세는 12 지파 중 한 지파도 빼지 않고 복을 선포합니다.
야곱과 모세의 축복기도가 왜 이렇게 달랐을까요? 야곱과 모세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곱은 바로 왕 앞에 나갔을 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창 47:9 ...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은 다릅니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야곱의 마음과 모세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그것이 축복기도의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신의 마음 상태, 영적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는 줄 알지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를 물려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과 가정과 자녀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의 상처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복되게 양육하려면 부모가 자신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큰 딸, 지영이가 중1 되던 어느 날, “아빠 나 다른 교회 다니면 안돼요?” 하였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왜 그럴까?’ 생각하며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아버지인 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초1 때 매를 든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제 얼굴 표정이 제 딸의 마음에 각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딸의 마음에 아버지는 무서운 아버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화난 것만 생각했지 어린 딸의 마음에도 화가 났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이 지나고 나니 제 딸의 마음은 하루라도 아버지 없는 곳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결국 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딸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펄쩍 뛰던 딸이 5분 정도 가만히 있더니 제 목을 끌어안고 ‘아빠 용서할게요“ 하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날 딸을 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딸과의 관계가 풀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서야 제게 영적 질병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서 자랐습니다. 언제나 교인들과 동생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항상 참아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되고, 공부도 잘 해야 했습니다. 욕구나 감정 표현은 금기였습니다. 언제나 점잖아야 했습니다.
어릴 때 한복을 입고, 사진관에서 찍은 독사진이 있는데, 울상을 하고 찍었습니다. 지금도 그 사진을 찍을 때 기억이 납니다. “웃어, 웃으라니까” 그래서 저는 힘을 다하여 웃었습니다. 저는 웃었는데, 사진을 보니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였습니다.
제게는 풍성한 사랑을 느끼고 표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제 딸 지영이에게,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너무나 기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의 역할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게 해 주옵소서
장모님께서 처남의 결혼을 위하여 40일 금식을 하실 때, 좋은 며느리를 주시라고 기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장모님 자신이“좋은 시어머니가 되게 해 주옵소서”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며느리를 맞으신 모양입니다.
부모라면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지금은 정말 그런 때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자신을 위하여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이면서 자녀를 향하여 눈물이 없다면 지금 한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
‘주 품에 품으소서’
주 안에서 행복한 부모 자녀의 행복 /엡6:4/ 유기성 목사
2016-08-27 14:54:07
오늘은 자녀를 기르는 부모에게 주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 두 딸을 생각했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격 없는 아빠가 설교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오직 주님만 의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가장 큰 복입니다. 자녀가 생겼다는 말을 들을 때, 자연스런 감정은 행복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이니까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녀 때문에 정말 행복한 가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식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여 돈을 벌었는데 정작 자녀는 망가진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복인데, 자녀로 고통당하는 가정이 왜 이렇게 많은 것입니까?
부모가 자기 마음대도 자녀를 길렀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잘 길러주고 싶다고 잘 기를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죄인이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는 일이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헬리콥터 부모, 헬리콥터 맘이라는 말 들어 보였습니까? 자녀 양육과 교육에 극성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쏟는 부모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헬리콥터처럼 자녀의 머리 위를 맴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헬리콥터 부모는 대학까지 진출했습니다. 서울 지역 사립대학 한 교수는 학년말 학부모가 전화해
“우리 애가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이렇게 나온 이유가 뭐냐”고 항의하고, “로스쿨 들어갈 건데 이런 과목을 듣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교수는 “강의실에 웬 중년 부인이 앉아 있기에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애가 아파서 대리 출석하러 왔다’고 해 기겁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대학이 유치원이 되었습니다.
요즘 헬기 맘은 군부대까지 출동합니다. 중대장에게 전화해서 아들 안부를 챙기는 부모가 있습니다. "아들이 산을 타다 넘어져서 긁혔다는데 겨울에 산에 올라가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가 하면 보직 바꿔 달라는 부탁은 흔하고 행군 따라가 간식 돌리는 아버지도 있다고 합니다. "군대가 '국방 유치원' 됐다"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녀를 잘 기르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 얼마나 조심스럽게 예수를 길렀겠습니다. 부모가 그런 마음으로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먼저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화를 내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4살 된 딸이 “아이 짜증나” 하면서 씩씩 거리는 것을 보고 웃으며 ’너무 귀엽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귀엽고 작은 아이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심각한 말을 하다니, 그 대조적인 모습에 어른들이 빙그레 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아내가 그렇게 화를 낼 때, 남편이 귀엽다고 반응한다면 아내는 어떻겠습니까? 사장이 그렇게 화를 낼 때, 부하 직원이 귀엽다고 반응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좀 더 크면 자녀들이 화를 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버릇없다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면 마귀가 자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감정은 상했는데, 화는 나는데, 표출하지 못하면 부모를 미워하고 부모를 떠나고 싶게 하고 죽고 싶은 마음,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감정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리니 더 섬세하여 상처받기 쉬운 마음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부모와 가까이 살기 때문에 부모의 모순된 모습, 이기심과 허물을 다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잘하라고 말할수록 반발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점이 부모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싸우면서 자기들에게만 싸우지 말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드라마를 보면서 자기들만 공부하라고 하니 반발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기에게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마음껏 화를 내고 말도 막 하면서 자기들은 화내지 말고 말조심하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부모가 불완전한 사람, 죄인이기에 자녀를 잘 가르치려 할수록 자녀에게 화낼 거리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놉니다. 아빠 엄마 놀이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자아이가 말합니다. “싫어, 나는 아이 안 할 거야. 그럼 너희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잖아. 난 아빠 할래!” 그러자 남자 아이가 말합니다. “그러니까, 넌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한테 이것저것 시키기나 하겠단 말이지!”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역할에 대하여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요?
부모 자신이 정직해야 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말 자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자녀들에게 그렇게 많은 공부를 시키는 것입니까?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계산이 있습니다.
어느 부모나 자녀들이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유명한 학교에 다니고 성적이 상위권이면 좋아합니다. 자랑스러워합니다. 그것은 반대로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창피하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기대만큼 행동하지 못하면 아무 생각 없이 말합니다. ‘너 때문에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이 말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젊은이교회 특별새벽기도회 때, 한 남자청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증하였습니다. “내가 어릴 때, 집이 고물상을 하고, 슈퍼마켓을 할 때도 부모님에게 나는 자랑거리였다. 내가 학교에서 시험점수 잘 받아오면 엄마 아빠가 행복해하시는 것을 알고, 부모님께 힘이 되어 드리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대학교 합격 발표 며칠 후 아버지와 함께 간 낚시터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는 네게 실망했다. 더 좋은 학교 갈 수 있었는데 너는 도전을 포기했다.”그 때 내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다. 나는 나름 열심히 했고 들어간 대학교에 만족하였는데, 아버지의 그 기대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고시합격을 해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야지 결심하고 20대를 그 꿈 하나를 품고 지내왔다. 그런데 생각처럼 고시합격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에게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변했다 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냥 예전처럼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아버지께 실망만 안겨드리는 아들이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실망에 원망하고 반항하는 아들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내가 없어지면 아버지가 행복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참해졌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픔이었고, 두렵고 힘든 존재였다.“
자녀들은 엉망인 성적표를 받았다고 마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 성적표 때문에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부모가 창피해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뒤 떨어지는 것 때문에 죽고 싶지 않습니다. 뒤 떨어진 것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죽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를 보고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 여기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까?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들 중에 무거운 짐이 자녀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녀로 인한 짐도 져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은 단순히 말하면 더 이상 부모 자신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자녀를 주님께 내어드리라는 것입니다.
부모인 자신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모 자신보다 주님이 자녀들과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어디서나 자녀와 함께 하시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한동대 이기복 교수님은 고등학교에 올라간 딸의 성적이 떨어졌을 때, 주님의 마음으로 딸을 보니 하나님은 딸을 사랑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딸을 끌어안고서 “난 널 성적과 상관없이 사랑한단다.”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또 성적이 떨어졌답니다. 그 때도 주님의 마음으로 딸을 격려하고 칭찬했답니다.
세 번째 성적표를 가져 왔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렇게 얼굴이 밝더랍니다. 그런데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순간 이 교수님에게 실망감이 다가 오더랍니다. “내가 잘못했나?" 그런데 그 순간 깨달아지기를 요즘 학교 성적 때문에 방황하고, 거짓말하고, 심지어 가출하는 아이들이 많다는데, 내 딸은 성적이 계속 떨어지는데도, 밝고, 어머니에게 담대한 것이 너무나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매 주일 교회에 보내고,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가정예배 드리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흐르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강요가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예수 잘 믿으라, 잘 믿으라.” 노래를 부르는데도 커서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좋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좋은 것입니까?” 자녀들은 말없이 부모에게 묻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도 말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 살아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행복하면 최고의 부모입니다. 자녀를 구원하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실수하는 가장 큰 요인이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지 살피지 않고 자녀들을 잘 기르려고만 덤비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를 억압하게 되고 부모는 좌절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 엄마는 정말 행복하셨어!” 이렇게 자녀들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왜 우리 아빠, 엄마는 행복하실까?” 질문하게 됩니다. 자기도 살아보니 부모에게 힘든 일도 많고 고통스런 때도 있었는데 행복한 것이 너무나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 대답해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야”
여러분,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부 잘해야 행복할까? 성공해야 행복할까?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부모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시간 부모가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다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가정에 대한 책을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부모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행복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부모가 진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지금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무 것도’ 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잘 기르는 것도 포함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롬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자녀를 기르는 정답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소서.” “주님 나를 통하여 아이들을 기르소서.”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
한국 초대교회 유명한 목사님이신 길선주 목사님의 아들은 술주정뱅이에, 망나니였습니다. 길선주목사님이 장로님일 때, 아들을 볼 때마다 야단을 쳤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볼 때마다 책망을 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들은 더 빗나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미국 선교사님께서 그런 길선주 장로에게 “아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보세요.”하고 권면했습니다. 길장로님은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심정, 안타까움, 노여움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100일 동안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의 눈으로 보였습니다. 술주정뱅이지만 하나님의 복된 아들임이 믿어지고 그래서 더욱 축복하고 선포하였습니다. 100일 기도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새벽기도회에 그 아들이 술이 취하여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 날 이후, 그 아들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 두 사람에게 공통점은 믿음이 좋은 부모 슬하에서 「젖 뗄 때까지」 자랐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젖 뗄 때까지」 엄마의 기도로 자랐고, 엄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슬하를 떠났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엘리 제사장은 타락한 제사장이라 그에게서 하나님에 대하여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 들어가 이방 학문을 배우며 자랐으니 더욱 하나님에 대하여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젖 뗄 때까지 어머니를 통하여 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었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언젠가는 험한 세상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무서운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핍박이나 시련을 겪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 자녀가 모세와 사무엘 같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으려면 주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게 해주는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을 기르면서 또한 헤어지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녀들의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항상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주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부모도 믿음의 실험을 해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양육할 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주님과 함께 자녀를 길러보는 흥미로운 실습으로 여겨야 합니다.
저희 둘째 딸이 고등학교 들어가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할 때,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영이와 함께 하시는 주님, 하영이에게 공부의 기쁨과 감사를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랬더니 저희 딸이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아빠는 정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믿어져요? 나는 안 믿어져요. 아빠는 믿어지는데, 나는 왜 안 믿어지는 거야!” 저는 저의 딸의 탄식이 교인들의 탄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목사님 정말 예수님이 목사님 안에는 계신가요? 그런데 왜 저희들은 안 믿어지나요?”
다시 기도했습니다. “주님, 하영이 안에 계신 것이 믿어지게 해 주옵소서”그것 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딸이 고3이 되었을 때, 학교에 데려다 주는데 불쑥 “아빠, 감사해요”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더니 “아빠 아니었으면 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을 거예요”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독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많이 듣다보니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를 보니까 아빠는 분명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정말 믿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기는 계신가보다!’하고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등부에서 영성일기를 쓰게 되면서 놀랍게도 주님이 자기 마음에 임하여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버지로서 딸에게 무엇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허물 많은 아버지를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니 눈물이 핑 돌만큼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딸에게 이런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제가 영성일기를 쓰면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 뿐 이었습니다.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부모에게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힘으로 자녀를 잘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함께 하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자녀들이 사는 길입니다.
찬송 430장
우리 가정이 날마다 날마다 한걸음 한걸음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admin
자녀양육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롬12:15/ 조쉬 맥도웰
2015-06-25 16:19:52
관계가 사람들의 삶,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가치라면,
우리는 관계를 잘 형성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저 조쉬 맥도웰은 이 문제를 늘 골똘히 생각하며,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발견한 중요한 법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관계가 결핍된 규칙은 반항에 이르게 합니다.
▲Rules without Relationship Leads to Rebellion
젊은이들은 규칙에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친밀한 관계라는 환경이 조성된 아래서만, 규칙에 따르려 합니다.
Loving intimate relationship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이들이 제멋대로라고 탓하기 이전에,
그들과의 관계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몇 살이든 간에,
자녀와 관계를 형성하는 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원칙들은, 자녀를 둔 부모에게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직원을 둔 사업가,
소그룹 성경공부 리더/ 목회자/ 청소년 사역자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원칙입니다.
관계가 결핍된 규칙은 반항에 이르게 합니다.
Rules without Relationship leads to Rebellion
▲자녀 양육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슨 원리나 원칙에 의해서, 자녀가 반드시 잘 자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경건한 부모가, 성경적 원리로 자녀들을 잘 양육한다 해도,
거기서 꼭 경건한 자녀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부모라고 해도,
그 아래서 꼭 훌륭한 자녀가 나온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완벽한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부모가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자녀를 양육했다고 해도
여러분의 자녀가 커서, 여러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빠/엄마를 증오해요!’ 라며 집을 떠나거나,
십대가 임신을 하거나, 마약에 손 댈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모든 법칙을 다 따른다 해도,
자녀교육이 잘 되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자녀양육에 있어서, 지식과/ 경험과/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 은혜에 맡겨야 하겠죠. 방치하면 안 됩니다.
▲관계가 깨어져 있으니까, 반항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도 선택, 또는 거부할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꼭 부모 말에 100% 순종하고 따라올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하는 아이도 없고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자녀와 먼저 관계를 형성하신다면, *Loving intimate relationship
자녀가 반항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집니다.
자녀양육의 핵심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반항을 하고, 집을 떠나 가출했을 때는,
그들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부모가 평소에 그들에게 가르친 ‘진리’가 아닙니다.
부모가 평소에 그들과 형성한 ‘관계’입니다.
◑자녀와 관계 형성에,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
▲1. 관계 형성에 늦은 때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몇 살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30살에 마약중독자가 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관심한 십대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관계형성이 훨씬 쉽습니다.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물론 경우에 따라,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자녀도 있습니다.
자녀와 극복해야 할 과거가 더 많은 관계에서는, 시간이 더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녀가 나이가 들수록,
조금 더 빨리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든 자녀일수록, 과거의 아픈 관계적 기억을, 빨리 용서하고, 용서 빌고, 쉽게 잊습니다.
▲2. 천성적으로 양육하기 힘든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빠보다 엄마가, 이 사실을 더 잘 압니다.
여러분이 이런 자녀를 두지 않으셨더라도,
주변에 이런 자녀를 둔 사람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과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천성적으로 양육하기 힘든 아이들이 있습니다.
‘다시 엄마 뱃속에 집어넣어서, 좀 더 성숙시켜서 꺼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부인과 병원에서 집에 데려온 날부터, 키우기 힘든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천성적인’ 아이들은,
부모의 자녀 양육의 기술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태어날 때부터, ‘구부러진 가지’가 있습니다.
(유전자적 잘못이란 뜻인가요?)
결국 많은 연구를 거듭한 학자들은,
이런 ‘구부러진 가지’를 펴는 길은, 너무너무 힘들지만
즉 그 아이가 폭력, 마약, 알콜 중독, 기타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길은,
그 아이 주위에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종종 그 구부러진 가지가 곧아질 거라고 말합니다. often not all the time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키우기 힘든 자녀이고,
혹시 태어날 때부터 ‘구부러진 가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가 ‘구부러진 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좋은 관계’입니다.
주위의 좋은 관계만이.. 그 ‘구부러진 가지’를 점점 다시 펼 수 있습니다.
▲3. 관계 형성은 시간이 걸립니다.
자녀와의 관계도 물론이고,
부부와의 관계 형성도 마찬가집니다. 수 년 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혼이 성행하는 것은.. 관계에 금이 갔기 때문입니다.
그 금이 간 관계를, 다시 돌이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요,
거기에는 배우자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가치와 소중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인내의 시간을 꾹 참고 견딜 것입니다.
그 뒤에는 값진 행복의 열매가 있으니까요!
관계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관계가 결핍된 진리는, 거절에 이르게 합니다.’
Truth without Relationship Leads to Rejection.
관계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건 원래 동양적 가치가 아닌가요? /주)
▲4. 관계를 형성하려면.. 그를 일단 무조건 지지해야 합니다.
(아래에서 따로 큰 단락을 만들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관계를 형성하려면 - ‘지지’의 원칙 Affirmation
관계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중요하지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등, 모든 사회생활에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와 관계를 형성하려면, 그를 지지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감정을 ‘지지’할 때, 자녀는 부모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 됩니다.
본문 롬12:15절을 찾아보실까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NLT성경은, 위 구절의 후반부를, 약간 당시 문화적으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슬퍼하면, 그 슬픔을 함께 나누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누라’입니다. ‘share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전에, 미리 알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제가 이 <지지의 원칙>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제 아내와 자녀들에게, 상처를 준 적이 많았습니다... 후회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봅니다...
▲아내가 상처 받아 괴로워할 때, 남편의 잘못 된 반응들
아내가 어떤 모임에 갔다가, 거기서 만난 어떤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아내에게 큰 상처를 주는 말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내에게, 제가 눈치를 채고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봅니다.
아내는 제게 하소연을 합니다.
이때 제가 수년 간 보여 온 잘못된 반응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보통 이렇게 4가지로 잘못된 반응을 보입니다.
①“여보, 신경 쓰지 마세요. 무시해 버려요!”
어쩌면 남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답게 통 큰 마음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가련하고 훨씬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처럼 쉽게 ‘무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
②“여보, 그 사람이 몰라서 한 말이에요. 그 사람 탓이에요!”
남자는 쉽게 남을 탓해 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항상 옳고, 남자는 항상 틀리지 않는다.’
여기서 ‘남자는 항상 틀리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잘못된 일이 생기면, 남자는 항상 남에게 탓을 돌리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 탓이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내는, ‘자기 슬픔에 지지와 동참’이 필요한 때입니다.
남의 탓을 하면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③그 시간에, 아내를 가르치는 남편이 있습니다. (슬픔을 지지해 주어야할 시간에..)
“여보,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는, 다음의 3가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아내)도 이러이러한 점에서 ‘고쳐야 합니다!’ .. 하며 가르치려 듭니다.
④잠깐 기도해 주고 나서, 자기 볼일을 보러가는 것입니다.
물론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빨리 자기 볼일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서둘러 잠시 기도해 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 나쁜 것은, 기도하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아내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점들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조용할 때 해야 되고요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관계이며,
‘당장 슬픔을 당한 자에게는, 그와 함께 그 슬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를 지지하고, 그를 위로하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부부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만,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 훈육, 교정’도 다 필요하지만,
먼저는 그의 슬픔, 괴롬, 상처를, 이해, 사랑, 쉐어링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8시 경에, 출근하려고 차고로 나가는데,
아내가 아이를 학교에 차로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얼굴을 보니, 심하게 운 것 같았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아내는, 학교에서 만난 어떤 여자가,
큰 상처가 되는 말을, 자기에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0분 내내 운전하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때 같으면, 저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여자가 몰라서 한 말이에요.”
그리고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아내를 가르치면서,
바삐 제 볼일을 보러 시내로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지의 원칙’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때, 한참 그 원칙을 제 삶에 적용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그 슬픔을 나누라’는 구절을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 숨을 깊게 들이키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정말 안 됐네요. 마음이 정말 아팠겠네요.
나까지 마음이 아프네요. I love you!” 진정은 언제나 통하는 법입니다.
그러자 아내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두 팔로 저를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고마워요, 여보!”
저는 이 <지지의 원칙>이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시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20년 전 목요일 오전 8시15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지지의 원칙>이란,
일단 자녀나 상대방의 ‘감정’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도 말입니다.
처음부터 교정, 교훈, 말씀을 통한 훈계는 금물입니다!
그래야만 관계가 형성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제 딸 캘리가 의대에 다닐 때였습니다.
제가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서 보니까,
집에서 캘리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의대에서 제일 어렵고도 중요한 시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캘리와 함께 잠시 기도했습니다.
저는 다음 날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의대생들은 아침 일찍 병원에 출근하기도 합니다.
저는 차가 있는 데까지 걸어가서,
새벽에 출근하는 캘리를 위해, 다시 한 번 기도를 해주고는, 말했습니다.
“딸아, 그런데 시험이 몇 시니?”
“아침 9시요.”
“그 시간이면, 아빠가 컨퍼런스에서 강의할 타임이지만,
시험이 끝나는 대로 전화해서, 시험이 어땠는지 알려줘!”
“하지만 아빠는 강의 중이실 텐데요?”
“괜찮아, 진동으로 해 놓을게”
그날 오전 11시15분경이었습니다.
제가 예정대로, 5백 명의 기업간부들 앞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전화벨 진동이 울렸습니다. 전화를 슬쩍 보니 캘리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핸드폰을 들고서,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제 딸이 아빠를 급히 찾고 있어요!”
그리고 강의 중에, 핸드폰을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시험이) 어떻게 되었니?”
“아빠, 98점 받았어요!”
만약 제가 <지지의 원칙>을 배우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캘리야, 지금 아빠는 강의 중이니까, 나중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물론 우리 딸도, 강의 중인 제게 아예 전화를 걸지도 않았겠죠.
저는 그날 아침, 5백 명의 기업간부들 앞에서 전화 통화로 말했습니다.
“캘리야, 정말 기쁘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구나!
내 딸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아빠도 기쁘단다.”
저는, 우리 딸이, 의대의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를 <지지>해 주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 일상의 지지가 쌓여서,
아빠와 딸 사이에는, 놀라운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도 딸은, 어려운 시험이 있을 때마다, 그 전후에,
제게 전화를 하면서, 지지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빠인 제 마음도, 그 전화를 받으면, 성가신 게 아니라, 기뻤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말씀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12:15
admin
자녀와 관계는 시간에 비례합니다 /시34:11/ 조쉬 맥도웰
2015-06-25 16:23:33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34:11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자녀 사랑에는, 시간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주시고,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모습으로 키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래 창조하신 목적대로 자녀를 잘 키우려면,
<거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쉽게, 빨리 빨리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얼마나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하든지.. 별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시간’인 것입니다.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모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저 입술의 말로만으로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결코 부모에게 속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뿐인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위선자로 보일 뿐입니다.
▲아빠가, 자녀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학교 1~2학년 3백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습니다.
그 학생들이, 얼마나 오래 동안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하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조사 결과, 일주일에 평균 7분30초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약 1분이라는 것입니다.
한참 성장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춘기의 학생이
자기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 meaningful conversation를 나누는 시간은,
하루에 1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짧지 않습니까.
또 1백 명의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연구원들이 조사를 했습니다.
유치원생이 자기 아버지와
얼마나 오래 동안 의미 있는 시간 meaningful interaction을 보내는지 알아보았더니
(아버지가 작심하고 같이 놀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같이 대화하는 시간 등)
놀랍게도 그 결과는 하루에 고작 37초로 나타났습니다.
다들 바빠서,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서둘러 회사로 출근하고,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서둘러 학교로, 유치원으로 갑니다.
그리고 집으로 귀가하면,
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바쁘고, 자녀는 자녀대로 바쁩니다.
그래서 한참 자녀를 돌봐주어야 할 유치원생이지만,
아버지와 의미 있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은, 하루에 37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서로 스쳐지나가는 것을, 쳐다보기만 할뿐입니다.
(엄마가 전업주부인 경우는, 엄마와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겠죠.)
어쨌든 특히 아빠인 경우, 자녀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고,
이렇게 아빠가, 자녀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니까, 자녀 양육이 제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출장을 가더라도, 꼭 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녀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눕니다.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도록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방식으로 자녀를 양육하려면,
부모는, 자녀와 의미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합니다.
대화를 통해,
자녀 속에 올바른 가치관, 올바른 생각, 성경적 진리를 심어주려면,
아빠가 자녀들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진지한 대화를 어려서부터 해 나가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저는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열린 교회 캠프에, 강사로 초청받았습니다.
저는 6일 동안 머물면서, 10번의 강의를 했고, 41번의 개인 상담을 가졌습니다.
저는 41명의 청소년들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평소에 너랑 시간을 함께 보내시니?’
41명 중에 39명의 청소년들이,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냥 같은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고 산다고..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아빠가, 자녀와 함께 놀아주어야 합니다.
어릴 때는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주고(놀아주고),
청소년이 되면 ‘의미 있는 대화’를 자녀와 함께 나눠 주어야 합니다.
◑평소에 자녀와 같이 보내는 일상적인 시간이,
휴가 때 한 번 크게 자녀와 놀아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들은 자녀 양육을 하면서, 자녀에 대한 그럴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 착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소 일상이 중요합니다.
자녀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일상 생활입니다.
‘평소에는 거의 시간을 함께 보내주지 않다가,
나중에 한 번 여행 같이 떠나주면 된다...’ 이거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짧은 시간을 여러 번 함께 보내주는 것이,
나중에 크게 한 번 같이 놀아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한 번 크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 입니다.
사업에 바쁜 아빠들이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디즈니랜드 심리’라고 부릅니다. Disneyland mentality
‘얘들아, 두 달 후에 디즈니랜드 데려다 줄게’
‘아들아, 이번 여름에는 바닷가에 가자’
자녀교육을 평소에는 포기하고,
휴가 때 한번 같이 놀아주면 다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물론 그런 큰 이벤트도 중요합니다.
아이들도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정말 영향을 끼치고, 그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은,
그런 큰 사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와 작은 일상의 경험’들입니다.
저의 네 자녀는,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우리가 어릴 때 디즈니랜드에 갔던 적도 있었고,
아빠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거나, 바닷가에 간 것도 좋았지만,
제게 가장 좋았던 기억은
아빠와 함께 했던 일상적인 일들 daily routine 이었어요.
그것들이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어요!”
▲자녀 교육은, 자녀가 어릴 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이런 고충을 호소합니다.
“제 자녀는 이제 14세, 15세, 16세예요.
어린 시절에 인격이 형성된다는데, 그 시기가 이제 지나고, 다 컸어요.
그러니 부모가 지금 무슨 인격적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격의 형성기’는, 청소년기에도 계속됩니다.
자녀에게, 아버지가 가장 필요한 때는, (어머니는 항상 곁에 있다고 치고요)
그러니까 자녀에게 아버지가 가장 필요한 시기는,
사실은 12~16세의 나이입니다.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어릴 적보다 아버지가 더 필요합니다.
청소년이 되었다고, ‘인격의 형성기’가 다 지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제가 제 자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는
그들의 십대 청소년기 때라고 봅니다.
자녀들의 머리가 커서,
자녀와 진지한 대화가 가능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가 십대 청소년이 되면, ‘이제 다 컸으니까!’ 하면서
절대 자녀교육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히려 그 때가, 자녀교육을 진짜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빠가 돈 벌고 나서, 나중에 자녀와 시간을 보내려면.. 때는 늦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나중에 기반 갖추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많은 경우를 봐왔습니다.
‘지금 열심히 일하고, 사업이 잘 된 후에,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면 되지..’
이렇게 말한 부모들 가운데,
실제로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 부모가 열심히 일해서, 사업에 성공하고, 이제 여유가 생겼다고 칩시다.
그래서 부모가 이제 자녀와 시간을 같이 좀 보내려고 하는데,
그때 즈음이면.. 자녀가 시간이 바빠지는 것입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녀는, 이제는 자기 또래 집단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일이 많아지고,
아버지와는 같이 시간을 통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십대가 되면, 부모가 자녀 스케줄에 맞춰주어야 합니다.
자녀가 10살 때 까지는, 그래도 부모가 마음대로,
자녀를 자기 계획에 맞출 수 있습니다.
놀러 데리고 가고 싶거나, 식당에 데리고 가고 싶을 때.. 자녀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만11~13세가 되어서부터는,
이제 부모가 자녀의 계획에 맞추어야 되는 시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자녀가 9세 이전에는
자녀가 집에 돌아와서 ‘아빠, 제게 문제가 생겼어요.’ 라고 하면,
‘아빠가 나중에 대답해 줄게. 저녁때 이야기하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가 십대가 되었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부모는, 그 즉시 응대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10대자녀의 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청소년이 되면, 점점 바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 양육해 놓고도
‘우리 자녀가 빗나간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
‘이것도 다 하나님의 예정(작정)이다.’
이런 식으로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의 주권이요, 섭리일 수도 어쩌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부모의 무관심과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부모가 잘못 양육해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우리 자녀에게 계속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평탄하게 살아가야지,
우리 부모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괴롭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양육 잘못으로, 자녀가 괴로움을 당하게 하지는 맙시다.
▲자녀를 위해 도저히 시간을 내지 못하신다고요?
지금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 시간을 못 내신다면,
나중에 여러분이 늙어서 쓸쓸하게 지낼 때,
자녀가 여러분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노년에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때,
자녀가 부모를 찾아와서
“아빠, 우리 같이 골프 치러 가실까요?”
“오늘 저녁에 저희랑 나가서 외식 하실까요?”
이렇게 한다면,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시간이 정말 안 나고 바쁘더라도,
지금 어린 자녀와 함께 보낸 시간이
나중에 늙어서 뒤돌아보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들은, 부모가 늙었을 때, 반드시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 집중하십시오.
제가 경험을 통해 힘들게 깨달은 교훈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자녀와 식사 시간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들과 식사를 함께 할 때는,
TV도 끄고, 휴대전화도 끄십시오.
그 시간을, 오직 자녀에게만 집중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컬럼비아 대학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부모와 식사를 자주 하는 자녀일수록,
더 건강하고, 성적도 높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일 확률도 낮고,
집에 있기를 좋아하고, 길에 나가서 방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그러니 그 시간에 핸드폰 꺼 놓으셔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자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시간,
그 시간에도 핸드폰을 꺼 놓으세요.
그리고 오직 자녀와 대화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저 조쉬 맥도웰 는 가정세미나로 여러 곳에 다니며 활동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알려진 편이어서,
어떤 성도님들은, 주말여행을 다니시다가, 우리 동네 근처를 지나실 때면,
불쑥 저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 가족과 외식을 할 때에도,
저를 알아보고, 다가와서 제게 말을 붙이는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아들이나 딸과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 제게 와서 “조쉬 맥도웰 목사님 맞죠?”
그러면서 제게 말을 붙이며, 잠깐이라도 즉석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응대합니다.
“안 됩니다. 저는 지금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의 그 말이,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아빠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구나!’
그런데 예외적으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중이지만,
정말 손님과 꼭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도 간혹 있습니다.
그때 저는, 먼저 자녀들에게 꼭 양해를 구합니다.
“아들아, 내가 저 분과, 지금 잠시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렇게 자녀의 허락을 받고서, 손님을 응대합니다.
그만큼 제게는 가족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들에게 그렇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자녀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매우 소중한 존재야!’
이렇게 자기 자존감이 높아지면, 절대 바깥에 나가서 문제아가 되지 않습니다. (후략) ▣ 행복한 가정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 표현하기 /엡6:4/ 조쉬 맥도웰
2015-06-25 16:26:17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서론, 자녀를 훈계하기 이전에, 사랑의 관계 형성이 중요합니다.
▲친밀한 관계가 결핍된 가운데, 부모의 원칙 고수는, 자녀를 반항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을 잘 하려면, 훈계를 잘 하고/잘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훈계 이전에, 먼저 자녀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와 부모사이에 서로 정이 들어야 합니다. affection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가운데서,
아무리 자녀를 훈계하고,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은.. 오히려 독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충분한 사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자녀를 훈계할 자격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평소의 삶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항상 사랑으로 대하여,
자녀는 ‘나는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있어!’ 하는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때, 자녀는 스스로 자존감이 생깁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하는 자존감은, 자녀에게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 청소년기의 자존감은.. 부모의 사랑 받음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아빠와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춘기를 지나기 전후로, 그들은 또래 친구들에게서 사랑을 구할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이 사랑 받을 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또래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표현을 잘못하면, 자녀가 도리어 부모를 더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몇 가지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1. 부모는 언어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affection
▲자녀들은 반복적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가정에서 이렇게 목표를 정했습니다.
저는 매일 우리 자녀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또는 그 비슷한 말을
하루에 10번씩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역에 바쁘다보니,
그렇게 10번을 말한 날보다는, 2~3번만 말한 날이 많았습니다. 물론 15번 말했던 날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제 목표는, 매일 10번씩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굳게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어려서부터 서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어릴 적에 한 번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던 부모가,
한 번도 그렇게 말하며 자녀를 껴안아 주지 않았던 아빠가,
이 강의를 듣고, 어느 날 불쑥 집에 가서,
16살 된 자녀에게 ‘I love you’ 라며 껴안아 준다면 부모도 그게 쉽지 않겠지만
아이는 소름 돋는다며.. 기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아빠, 어디 아프세요?’ 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이때는 조금씩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little by little 조금씩, 서서히..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보십시오.
가장 좋은 때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입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춘기가 되어도, 그 말을 하루에 10번을 들어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언어로, 관계의 다리를 놓으십시오.
십대 아이가 다 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대 자녀들도,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사랑받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아니 어쩌면, 어린 아기 때보다, 더 많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 부모의 사랑표현의 첫 단계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야”
“나는 항상 널 생각하고 있단다”
이렇게 말로 표현할 때, 관계의 다리가 형성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소통하려면, 먼저 다리가 놓여 져야 하는데,
그 가장 기초는 ‘사랑의 언어 표현’입니다.
아시다시피 부모의 세계와, 자녀의 세계는 전혀 다른 별세계입니다.
그래서 서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하려면, 먼저 다리가 놓여져야 합니다.
그 다리를 놓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사랑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계속에서, 다리를 놓기 위한, 보다 발전된 방법을 알아봅시다.
◑2. 적절한 신체적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affection
▲포옹, 키스, 어깨동무, 손잡기 등으로,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언어적으로만 표현할 뿐 아니라,
“적절한” 신체적 표현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여기서 “적절한”이란 말에 유의 하십시오.
너무 과도하게 표현해서, 자녀에게 무안을 주면 안 될 것입니다.
십대 아이들도, 이런 사랑의 표현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 조쉬 맥도웰은 50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난 젊은이들 중에,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를 원치 않았던 청년들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부모를 미워하고, 집을 뛰쳐나오기 원하는 청소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청소년들을, 단 15분 내에 눈물 흘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비장의 무기는, ‘제가 우리 아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제 얘기를 듣는 청소년이 여자이면,
‘제가 우리 딸과의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 해 줍니다.
그러면 모든 청소년들은, 비록 그들이 자기 부모를 끔찍이 싫어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그 따뜻한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는,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말로는 ‘부모가 싫어요. 나는 가출할 거예요!’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모두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아버지와 그런 관계를 갖고 싶어요!
제 아버지가 저를 그렇게 대해 주기를 바랬어요!’
▲제가 아버지인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의 아들 또는 딸이
여러분에게서 충분한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하면,
그들은 또래 친구 또는 다른 대상(애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충분히 사랑 받고 싶은 갈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래 압력 peer pressure’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대가 되면, 또래 친구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연애 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 자녀들이 빗나갑니다.
그러나 자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신체적 표현, 즉 안아주고, 아기의 손을 잡아주고, 볼에 뽀뽀해 준다면,
아이가 자라서 10대가 되어서도, 또래 친구들과 일찍 연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충족되기 때문에, 일찍 연애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부모는, 그래서 자녀가 나이가 차도, 결혼할 생각을 안 해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만큼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저는, 제 아들과 그 친구들 몇 명,
또한 제 딸과 그 친구들 몇 명을, 몽땅 데리고 야구 경기장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딸과 아들은, 각각 틴에이저 야구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동료 야구부원들을 데리고, 레이커스 야구팀 경기를 보러 갔었습니다.
저희 일행은, 다 같이 피자를 먹고, 대형 주차장을 가로질러, 야구장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손에 우리 아들 손을, 한 손에 우리 딸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양 손에, 다 큰 아이들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어쩌면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주위에 그들의 친구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도, 우리 가족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빠와 아들과 딸이,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우리 아들과 딸은, 그런 모습을 자기 또래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우리 가족은, 서로 손을 잡고 걸어 다니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부모와 자녀사이에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요지는.. ‘신체적 사랑의 표현’은.. 자녀가 어릴 적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지나서 시작하려면.. 서로 어색해서 못 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았다면, 조금씩 작은 것부터 천천히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특별히 자녀의 친구들이 쳐다보고 있는 자리에서는,
자녀에게 신체적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을 표현할 때는, 자녀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펴보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아니면 그 수준에서 중단할지 판단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녀와 관계의 다리를 놓는 2번째 단계입니다.
적절한 <신체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3. 자녀의 세계에 동참하십시오. approach
▲관계가 결핍된 원칙의 강조는, 자녀를 반항에 이르게 합니다.
Rules without Relationship Lead to Rebellion!
이 말은 너무 중요하니까, 아예 외우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아무리 올바른 이야기를 해도, 자녀가 오히려 반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와 소통하고, 자녀를 훈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 형성을 위해서
1. 사랑의 언어를 말해야 하고,
2. 사랑의 신체 표현을 해야 하고,
3. 이 단락에서 <자녀의 세계로 동참하는> 단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부모가 자세를 낮추어, 자녀의 세계에 접근해 들어갈 때,
그 작전이 성공적일 때, 자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빠도 좋아하는구나.’
‘내가 관심 가지는 것에, 엄마도 관심을 가지시는구나.’
-자녀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제야 진정한 가족관계가 이뤄집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녀의 세계로 한 번 접근해 들어가 보십시오.
고전13장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유익, 상대방의 관심사에
나 자신을 맞추어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관계로 치면,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쇼핑, 또 무슨 대화에..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남편은 그것에 동참하는 것을, 정말 두드러기 날 정도로 싫어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되면,
항상 자녀가, 부모 관심사에 동참하도록 요구 받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가고 싶은 곳에, 따라 나서야 하고,
부모가 먹고 싶은 것에, 자녀가 맞추어야 하고,
자녀는 관심도 없는데, 아빠가 좋아하는 운동경기를 관람해야 합니다.
이래서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세계로, 한 발자국 발을 옮겨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자녀가 어릴 때, 아빠가 자녀가 같이 놀아주어야,
아빠가 노쇠해지면, 자녀가 아빠랑 같이 놀아줍니다.
자녀가 어릴 때, 아빠가 바쁘다고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아빠기 노쇠해졌을 때, 자녀는 아빠랑 같이 놀아주지 않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려고 해도, 서로 서먹서먹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저처럼 이렇게 늙어 보십시오.
자녀가 이 늙은 아빠의 세계로 들어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젊었을 때부터,
자녀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추어서, 같이 놀아주는 것은,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딸과 놀아주기 위해, 얼마나 바비 인형놀이를 많이 했는지요!
제 막내딸이 어렸을 때, 바비 인형에 푹 빠져서 놀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저는, 출장을 갈 때마다. 그 도시의 인형가게에 가서,
바비 인형에게 입힐 드레스를 사서 딸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딸과 함께 거실 바닥에 앉아서,
바비 인형에게 새옷을 입히며 같이 놀았습니다.
저는 그 소중한 기억들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혹시 늙어서 치매가 되어 그런 소중한 기억들을 다 잊어버릴까봐 걱정 될 정도로
저는 우리 어린 자녀들과 함께 놀았던, 그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 나이가 되어서, 다 늙어 보십시오.
이때 가장 소중한 것은, 과거에 우리 자녀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 들입니다.
그것은 자녀에게도 중요하지만, 부모에게도 똑같이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일에만 몰두하지 마시고,
자녀의 사춘기 이전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처럼, 여러분, 자녀들의 세계로 지금 들어가십시오. step in!
그러면 나중에 여러분이 노쇠해 졌을 때, 자녀가 여러분의 세계로 들어올 것입니다.
자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특별한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다음 단계를 공부해 봅시다.
◑4. 상대방의 관심사에 주목하십시오. approach
▲저는 자녀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항상 발견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관심사는, 반년마다 새롭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이 10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길에 지나다니는 스포츠카의 이름을 댈 수 있습니다.
“아빠, 저건 페라리고요, 저건 렘브로기니 예요.”
“저기 지나가는 것은, 포르쉐고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요즘 스포츠카에 관심이 많구나.”
그래서 저는, 아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아들의 관심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우리 집 근처의 ‘고급 자동차 판매점’의 전화번호와 주소들을 다 적었습니다.
저는, 고급 스포츠카를 파는 모든 자동차 대리점에,
이렇게 편지를 적어 보냈습니다.
‘저는 어린 자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무척 애쓰는 아버지입니다.
요즘 제 아들이 스포츠카에 빠졌습니다.
혹시 제가 시간을 내서, 아들을 데리고, 귀 대리점을 방문하면,
우리 아들을 차에 한 번 시승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대리점에서 무료시승 하잖아요.
그러자 제가 편지를 보낸 ‘모든’ 자동차 대리점에서
기꺼이 그러겠노라는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저는, 하루 시간을 내어서, 아들을 데리고,
자동차 대리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고급 스포츠카에 시승을 해 보았습니다.
아들도 신나 했지만, 저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들이 운전해 주는 고급 스포츠카를, 그것도 몇 대씩이나, 바꾸어 타고 달려 보았습니다.
제가 아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의 관심사와 함께 했던 그 날은,
정말 복된 시간이었고,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소중했던 시간은,
스포츠카를 시승해보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차 안에서 저는 아들과 진지한 신앙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고급 스포츠카의 물질주의에, 아들이 현혹될까봐 염려해서입니다.
아들은, 지금 장성해서(32세) 자기도 아빠가 되었지만,
그 날의 소중한 추억을 지금도 두고 두고 얘기합니다.
하루는 제게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아버지, 이제 우리 아들도, 스포츠카에 관심 가질 나이가 되었어요.”
지금 제 아들이, 어디에 가서, 자녀 양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제 부모님이 제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부모님이 제 삶으로 들어오셔서,
제 관심이었던 스포츠카에 함께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녀의 세계로 들어가서 동참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늙어 노쇠해졌을 때, 자녀가 여러분의 세계로 들어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 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항상 이 질문을 했습니다.
‘요즘 내 자녀들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가?’
제 아들이 11살쯤 되었을 때는, 만화책에 빠졌습니다.
헐크와 스파이더맨에 빠져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그래서 저는 출장을 갈 때,
아들이 써준 헐크와 스파이더맨 만화책 목록을 가지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만화책을 사려고, 시내로 갔습니다.
이제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기서 사 온 새로운 만화책을, 아들과 함께 마룻바닥에 앉아서,
그 만화책을 같이 읽곤 했습니다.
그것이 제 아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빠는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항상 책을 집필하느라 바쁘면서도,
내 만화책에 관심을 가지시는구나.’
이제 교사가 된 제 아들의 방은,
여전히 스파이더맨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방 천정을 줄로 가로지르는, 스파이더맨 장난감도 있습니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이 선물이 대대로 물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 교사 아들이,
자기 아들에게 (제게는 손자죠)
스파이더맨과 헐크를 선물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잘 키우면,
자녀도 자기 자녀를 대대로 잘 키울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자녀의 세계로 잘 들어가신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 아빠도 소중하게 여긴다.’
자녀가, 엄마와 아빠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
서로 사랑하는 진정한 가족이 되고,
가족은 서로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서로 대화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서로의 관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에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같이 소중히 여겨 주십시오.
그게 배구, 야구, 농구, 육상, 만화책, 바비 인형 등 그 무엇이든지,
자녀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들의 관심사에 같이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원래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법입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의 세계에, 관심을 가질 힘/능력이 없지만,
부모는, 어린 자녀의 세계에, 얼마든지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며,
-사랑의 신체 표현을 하며,
-자녀의 세계로 접근해 들어가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5. 책임감을 심어주십시오. accountability
▲관계 형성의 주요 원칙 중 하나는 ‘책임감’입니다.
자녀와 관계를 형성해 가면서,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책임감을 심어주면, 자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나는 책임이 있다.’
둘째, ‘나는 사랑 받고 있다.’
이게 무슨 얘기인지, 설명을 들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정당한 한계와 원칙>을 주고, reasonable limits & rules
그 위반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지 않으면,
십대 자녀는, 부모가 자기를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를 방치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당한 한계와 규칙을 주는 것이,
그리고 그 위반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자녀 입장에서 볼 때,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관계가 결핍된 상태에서, 위반의 책임만 물으면, 자녀는 반항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당한 한계와 원칙>을 제시해야 합니다. reasonable limits & rules
예를 들면 ‘귀가는 밤 10시까지다. 음주나 흡연은 안 된다.
거짓말은 안 된다.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등입니다.
그 <정당한 한계와 원칙>을 정할 때는,
부모 독단적으로 정하지 말고,
자녀를 참여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가 아주 어릴 적에도,
아이들과 협의하여 ‘꽃밭에서 꽃을 꺾지 않는다. 음식을 흘리지 않는다.
식당에서 떠들지 않는다. 길에서 뭘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등의
<정당한 한계와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자녀가, 나중에 자라서, 사회적 법규도 잘 지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의와 불의에 대한, 분명한 관념이 생깁니다.
아이의 도덕성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 것인지,
그 처벌의 한계도, 아이들과 함께 미리 약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혹시 위반해서 처벌을 받아도, 반발하거나 상처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배고플 때는, 장을 보러 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 나머지, 이것 저것 막 사게 된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부모가 화가 나 있을 때에는,
절대로 아이를 훈계하거나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언제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화가 나서,
혹시 극단적인 훈계, 극단적인 처벌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배우자가 말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리는 배우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남편이나 아내를 말릴 때는,
아이들 보는 앞에서, 그 권위를 무시하고, 배우자에게 대들거나 나무라면 안 됩니다.
‘여보, 잠시 저 방에 들어가서, 우리 의논 좀 할까요?’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해서, 아이들 안 보는 데서, 배우자를 말려야 합니다.
그래서 아빠나 엄마의 권위를,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훈계할 때는,
아빠는 엄마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엄마는 아빠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극단적인 처벌을 피하고, 합리적인 처벌을 하는 길입니다.
그럴 때, 자녀들은, 부모의 권위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 처벌을, 부모의 사랑과 관심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 내가 한 잘못은 내가 책임을 져야지. 내가 이렇게 벌 받는 것은 당연한 거야!
아빠의 처벌은 정당하며, 우리 아빠는 나를 사랑해서, 내가 잘못 하는 것을 못 보셔!’
이렇게 자녀는, <정당한 한계와 원칙> 아래서
자기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격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어버이에 대한 자녀의 책임 /엡6:1-3/ 이동원목사
2014-11-30 09:24:10
미국에서 12살도 채 안된 소년이 아버지에게 가벼운 야단을 맞은 후, 총으로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까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경찰이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이 소년의 대답은 "아빠가 보기 싫어요"였습니다.
아마 자기가 하는 일마다 잔소리하고 간섭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자유와 인생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의 사냥총으로 잠든 아버지에게 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입니다.
물론 이 소년은 수감되었지만 미성년이어서 소년 감호소 같은 곳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교도소의 숙직간수는 소등한 이후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복도를 지나다가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가까이 다가보니 이 소년이 감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소리로 뜻밖에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더랍니다.--"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보고 싶어요"
영어에 'love-hate relationship'이란 말이 있습니다.
애증의 관계라고 할까요. 사랑하면서 때로는 그 사랑의 요구가 자기식으로 충족되지 않았을 때 사랑이 오히려 미움으로 변해버리는 경우들이 오늘의 가정에서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서 또다시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책임을 말한다는 것은 어쩐지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가부장적 시대의 도덕강론처럼 들려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믿는 성경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변함없이 가르치는 이 시대 어버이들을 향한 자녀의 책임, 무엇입니까?
바울이 살고 있었던 시대도 오늘 이 시대 못지 않은 급격한 윤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가져온 '팍스-로마나'의 식민지 문화는 기존 전통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부모와 자녀사이의 전통윤리에도 상당한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돈을 찾아, 자유를 찾아 부모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가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와 같았던 에베소에는 아테미의 신전을 중심으로 사회가 음행을 합법화해주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거대한 로마식 체육관은 젊은이들의 힘과 기예를 한껏 상품화하고 있었고, 노인들은 사회의 짐스러운 구성원으로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변인간으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주후 60년대 초 그가 삼년여를 정성을 쏟아 양육하고 세웠던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전달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사도는 어버이에 대한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두 가지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순종의 책임입니다.
6:1에"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가르치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될 때에는 더 높은 권위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예를 들어, 너 예수 믿지 말라 하면--)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 잔소리처럼 들려지는 부모의 교훈 그 밑바탕에도 실상 자녀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이 주시는 본능 때문인 것을 안다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정당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1절 말미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옳으니라/자연의 명령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법-Natural Law라고 하지요. 자연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긴 양심의 법입니다.
어떤 문화권에도 부모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 문화는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는 양심의 명령인 것입니다. 부모의 존재는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낄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볼수 있어야하고, 부모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 교도소에 수감된 어떤 분의 수형생활에 대한 참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작년 겨울 첫 면회를 오신 어머니께서는 창너머로 고개 숙인채 땅만 내려다 보고 있는 이 불효자식에게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후 어머니께서는 '춥지?' 이 한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보셨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시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시느라고 어머니의 눈가는 붉어지더니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 이셨습니다. '춥지' 겨우 그 한마디하시고 접견시간을 다 보내버리신 어머니는 성경책 한 권을 남기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후 다시 면회가 없으신 어머니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을무렵 형이 면회를 와서 형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하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야, 이놈아 아직도 정신 못차리니, 너 어머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하고 말하더랍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가 다그쳐 묻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며칠 전화를 안받으셔서 찾아가 보니 엄동설한 추운계절에 자식의 죄가 내 죄 때문이라고 방에 불을 끊으시고 나도 감옥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며 자식의 죄와 어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몸져누우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고백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거스림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부모를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옳은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시작은 잔소리같은 부모의 말에 진지한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의 뜻이 본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서 사랑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의 소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공경의 책임입니다.
2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어버이 주일에 주일학교 학생에게 엡6:1-3 말씀 성경봉독을 하라고 하니까, 이 대목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격하라"고 읽었더랍니다. 공격이 아니라 공경입니다.
순종이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공경은 정서적 측면이 더욱 강조된 단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 '공경'이라는 말은 희랍어에 'timao'라는 단어가 씌어졌는데, '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부드럽고도 친밀한 반응'을 뜻하는 말입니다.(영어성경에는 honor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순종이 외적행동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공경은 내적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래 두 개의 돌판에 나뉘어 쓰여졌습니다. 첫 돌판에는 1-4계명이, 둘째 돌판에는 5-10계명이 기록 되었습니다.
둘째 돌판의 첫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공경은 신의 명령이요, 신의 법입니다. Divine Law라고 합니다. 신의 명령은 자연의 명령 혹은 양심의 명령을 넘어섭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종이상으로 공경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따르는 이들에게 두가지 약속을 합니다 1)네가 잘되고, 2)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위의 두가지 약속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면 자동적으로 출세하고 장수가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도 성공하고, 심리적으로도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고, 내적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또한 장수할수 있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약속이라고 할만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슷한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질 높은 성공적 삶과 더 오래 장수의 가능성이 있는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일반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해전 미국 플로리다의 어느 미국 침례교회 선교대회에 강사로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 집회후 점심에 해변가에 위치한 아주 근사한 식당에 초청을 받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그 식당주인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자기교회 집사인데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는 분이라고 칭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식당에 들어올 때 식당 입구 현관에 걸린 여인의 사진을 보았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식당주인의 어머니라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후 타주에서 플로리다로 이사온후 해변가 도시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했는데 정성껏 손님을 섬기다 보니까 식당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과 계획 끝에 저축한 돈으로 드디어 아름답고 큰 식당을 바닷가에 열 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픈 직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어 그만 오픈되는 것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는데 자기를 돕고 있었던 아들에게 두가지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1)식당을 잘 경영해 달라고 하면서 그러나 사업보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달라. 2)이번에 오픈되는 식당에서는 술은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아들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순종했는데 처음에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있었는데--
주류회사의 폭력배같은 사람들이 위협차 찾아왔을 때 아들은 식당입구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가르치며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라'고 했더니 시비안하고 가더랍니다.
식당에서 나가다가 저는 그어머니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 아래 무엇이라고 글이 써있었습니다. 다섯 줄의 글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미소는 저의 추억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저의 용기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저의 능력입니다. 어머니의 주님은 저의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그리고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순종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면 공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박은수라는 분이 쓴 어머니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좋은 옷이 필요치 않으신줄 알았습니다./예쁜 그릇도 갖고싶지 않으시고/맛있는 음식에도 마음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빛깔 고운 립스틱이나/꽃무늬 화려한 양산품/눈 여겨 보시지도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집와서 마흔 고개에 다다르며/이제사 깨달아 집니다./어머니도 여자이셨음을/어머니의 가슴에도 무지개가 있고 파랑새가 있고/사파이어 같은 꿈이 있음을/이제사 알아 봅니다.
어머니/언제나 귀한 이름입니다./언제나 우리맘속에 별처럼 살아있는/아름다운 이름입니다./이날에 어머니를 그리워 합니다.
부모와 자녀 /엡6:1-4/ 이동원목사
2014-11-29 20:20:09
지난 금요일 저의 집에 권사님 한분이 방문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중에 저의 교회 섬기시는 다른 권사님 가정 이야기를 하셨는데 아주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본인도 이 자리에 계시고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름다운 이야기이어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 권사님이 아들이 미국 유학중에 우리 교회가 시작하고 지원하는 코스타에 참석하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드디어 박사학위까지 받고 귀국하여 삼성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부모에게 와서 평양 과기대에 가서 봉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공부시킨 자식인데--공부하고 박사 받기까지 7억이나 들은 자식인데 하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가정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가정의 아버지는 변호사 출신이신데 이런 말씀을 아들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 난 인생을 살면서 돈도 명예도 가져 보았는데 그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데 너는 아마도 나보다 더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 네 가는 길을 축복하겠다”
그리고 이 가정의 어머니 권사님이 북한 땅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한 1억을 모은 것이 있었고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기도했는데 아드님을 통해서 드릴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이런 가정이 축복받은 가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난 시간 가정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부관계의 비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가정은 부부관계만으로 성립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가정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며 자녀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제 가정 공동체의 또 하나의 중요한 구성원인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각자의 책임은 무엇이겠습니까?
1. 자녀의 책임입니다.
바울 사도는 두 가지로 자녀의 책임을 서술합니다.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어렸을 때 할 수 있는 것이고 공경은 자녀들이 좀더 성숙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경은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자녀들이 적극적으로 부모를 높이고 마음으로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종이 외적인 상태라면 공경은 내면의 상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공경이 없는 순종은 결국 불완전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할 이유를 또한 두가지로 지적합니다. 한 이유는 자연법 때문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옳다는 말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지 않는 문화가 없고 이것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가 없습니다.
이것을 자연법(natural law)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이렇게 행하다는 것이 마땅하다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소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양심의 소리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모가 만일 명하는 바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순종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순종할수 없지요. 이것을 순종하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골3:20에는 “자녀들아, 모든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2절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에 나누어 쓰여 졌는데 첫 판에1-4계명까지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하는 계명입니다.
두 번째 돌판에는 5-10계명까지 여기에는 소위 인간과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계명입니다. 그 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명령을 지킬때에 자연법에 순종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divine law)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에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본문 3절은 두가지 약속을 합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잘 되는 것은 질적인 축복의 약속이고, 장수는 양적인 축복의 약속입니다.
저는 이 약속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같은 삶의 조건에서는 분명한 축복의 약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보모의 마음속에 자식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모의 말을 따르면 우리의 삶은 보호되고 축복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7명의 자녀들을 훌룽하게 키운 웨슬리 목사의 부인 수산나는 “할수 있으면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인생의 성공의 유일한 길입니다”고 했습니다.
2. 부모의 책임입니다.
바울사도는 역시 부모의 책임도 두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접근이고 또 하나는 긍정적인 접근입니다.
먼저 부정적인 혹은 소극적인 접근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표현을 빌리면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1)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자녀에 대한 책임있는 훈련을 기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훈련이 지나쳐 자녀의 삶에 대한 의욕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자녀 훈계의 목적은 행동의 교정과 교정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일어서 가도록 인도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부모들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녀들을 징계할 경우 그것은 자녀 학대가 되고 자녀의 마음속에는 부모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올바른 징계와 잘못된 학대의 차이는 소위 책망이 끝났을 때 부모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있느냐, 분노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시 노력하겠다는 결심이 생겼느냐, 아니면 자포자기의 마음이 생겼느냐의 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요즈음 많이 읽히는 치킨 수프(chicken soup) 스토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생이 친구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막 영접한후 교회에 나가고 싶어 주일에 학교 길 건너에 있는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이 대학생은 아직 교회 문화를 몰라 학교에서 입는 청바지 차림으로 머리를 길게 기른채로 교회를 갔더랍니다. 조금 늦게 갔더니 교인들이 꽉 차있어서 자리를 찾을수 없자 학교에서 하는 습관대로 앞쪽으로 나가 중앙 카펫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여기 저기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있었고 이 젊은이에게 눈총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교회에서 존경받는 80가까운 집사님 한분이 지팡이를 집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런 학생은 우리 집사님께 야단 맞아 싸! 저런 젊은이는 한번은 혼나야 해!. 그런데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앞으로 나가신 이 집사님은 이 학생옆에 오더니 지팡이를 접고 덜썩 학생곁에 주저앉아 이 학생에게 찬송책을 찾아 보여주며 함께 부르시고 기도할 시간이 되자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어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교인들은 그 집사님에게서 목사님의 설교이상의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배후에 어느 교인이 그에게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하실 생각이 났어요”하고 묻자 그는 웃으시며 “자식 기를 때 보니까 그렇게 길러야 하더라구요”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자녀들에게 훈계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 양육의 적극적인 측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교양이 올바른 태도와 가치관에 대한 학습이라면 훈계는 그릇된 태도에 대해 일관성있고 단호하게 교정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는 솔직히 요즈음의 젊은 부모들에게는 이런 훈계의 교육이 방치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도 전세계의 아이들중 가장 훈련이 없는 혹은 버릇없는 아이들이 한국 아이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의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말씀을 통한 교육 훈련을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모의 최선을 다한 기도와 교육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잘못 될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따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10년전 미국에서 한국으로 나올 때 저희가 제일 먼저 한일이 아이들과 의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두 아들이 다 고등학교 재학중이었고 사춘기 시절 가장 민감한 때이어서 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사실 아이들의 동의가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아이들은 예상과 달리 쾌히 허락하며 “아빠는 한국에서 더 보람된 목회 사역을 할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염려말고 나가세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대화에서 저희 아이들이 자기들이 동의하고 허락했음에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2-3학년 까지 부모님이 곁에 없는 상황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았고 정신적인 방황이 적지 않았는데
두가지 자기들이 부모님이 한국 나가시도록 자기들이 동의한 사실, 그리고 부모님의 지속적인 기도와 사랑, 그리고 어려서 부터의 말씀의 교훈이 아니었더라면
그 시기를 극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희 큰 아들이 최근 주님과의 깊은 만남속에서 신학교 가기를 결정했고 대학 캠퍼스 동창이었던 한국인 그리스도인 자매와 금년 여름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에게 여러 차례 아버지와 자기의 관계에 대한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중에도 제 가슴에 남는 내용 중에 자기는 괜찮은 자녀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주님앞에서 자기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면
“자기는 사실 탕자였다”고 고백하며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편지를 쓰면서 지난 금요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다시 저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원문은 영어로 쓰여진 것입니다.)
“행복한 어버이날에 아빠와 엄마에게
아시다 싶이 미국에서는 어머니 날이 5월 9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버이날이 5월 8일 인 것을 기억하며 이 편지를 씁니다. 무엇보다 먼저 어머니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일찍이 기독교 철학자 조렌 케엘케골이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기를 출산하는 순간에 부르짖는 여인의 고통소리를 들어보라. 인생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싸움을 싸우는 한 죽어가는 남자의 몸부림을 지켜보라. 그리고 이렇게 인생의 처음과 끝을 진지하게 바라 본 다음 나에게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나를 낳아 주실때의 어머니의 고통이 어떨 것인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 기적의 출생,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을 남자된 제가 어떻게 다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카툴릭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높이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고통을 드렸는지 얼마나 기쁨을 주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저를 사랑해 주었고 소중히 여겨 주셨는지 제가 어떻게 다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어머니 제가 진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안에 있는 모든 숨결을 다해 감사를 드리오며 제게 인생을 살수 있는 기회를 주신것에 대해 그리고 제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것에 대해 진정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아빠! 아빠가 나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그 모든 도움에 대해 어떻게 제가 다 글로 감사를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제가 어떻게 다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제가 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는 날 그때 비로소 조금은 그 뜻을 알게 되겠지요. 다만 이 시점에서 저는 아빠의 그 무한하신 희생에 대해 영원히 빚진 자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미국에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무엇보다 제가 영어로 책을 깊이 자유롭게 읽을수 있도록 자극을 주신것에 대하여도 감사를 드립니다. 서구의 많은 지성사의 책들을 통해 인생의 위대한 신비들을 탐구하는 특권을 갖게 된 것을 인해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에게 기독교 신앙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무엇으로 감사 드려야 할지요. 이제 저는 저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의 위대한 문을 열고 본격적인 진리의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빠, 저는 요즈음 종종 아빠가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아빠가 제 인생에 부어주신 그 조건없는 사랑-그 사랑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을 고백드립니다.
끝으로 아빠, 진주와 저의 결혼을 허락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결혼이 허락되기까지 인내해 주시고 이해해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진주를 저희의 한 가족으로 받아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제 제가 저의 가족의 한 부분인 것처럼 진주도 그렇게 느끼고 있답니다.
다시한번 저희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고 지지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시점에서 진주와 저의 결심은 다만 한가지- 부모님이 저희에게 그렇게 좋은 부모이셨듯이 저희도 좋은 부모가 되도록 준비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진주와 함께, 아들 황이가. 어버이 날에.“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에 의하면 자녀가 부모에게 할 도리는 무엇입니까? 자녀된 나의 어려움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2. 본문에 의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할 도리는 무엇입니까? 부모된 나의 어려움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3. 각자의 가정이 좀 더 성경적인 가정이 되기 위해 무엇을 노력해야 할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 어버이와 그 자녀 /고전4:14-17/ 곽선희 목사
2014-11-24 23:12:33
얼마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라고 하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잇이 열 세 살 때에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수술에서 수혈이 잘못되어서 이 소년이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고 하는 AIDS 라고 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이 병원에서 잘못한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대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가정도 특별히 의사선생님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기쁘게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 미국에 전해지게 될 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유명인사들이 앞을 다투어서 이 어린아이를 찾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병문안을 드렸습니다.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레이건도 친히 이 어린 소년을 찾아 방문했고요 또 당시의 유명한 팝 가수인 마이클 잭슨까지도 이 어린 소년을 방문해서 위로했습니다.
결국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이 소년은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욱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 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니올시다. 전 지금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아무도 아빠가 제게 준 선물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내게 천국 열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고, 교회에 나아가 예수를 믿게 해 주었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선물은 다시 없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어겠습니까? 윌리암 F. 오그번(Willian F. Ogburn)이라고 하는 교수님의 Recent Social Trends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가정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 가정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가정의 기능이 뭡니까? 먼저는 경제적 기능입니다. 다 같이 먹고살아야 겠으니까요. 또 하나는 교육적 기능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지 않습니까. 또 종교적 기능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가치관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고, 경건한 생활을 배웁니다.
또 하나는 오락적 기능입니다. 가정에서 우리 오락을 얻어야 합니다,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즐거움을 찾아야 됩니다. 이게 오락적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그만 상실되어가고 있다, 라고 아주 면밀하게 비판 분석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경제적 기능, 이 생산적 능력을 공장과 사무실로 빼앗겼다는 것이죠. 이 경제적 기능이라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자, 농사를 짓습니다. 같이 이 농사를 짓고, 보세요. 남편이 땅을 파고 부인이 씨를 뿌립니다. 전 이런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파고 어머니는 서서 씨를 탁 뿌립니다. 그 장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이게 생산적 기능입니다. 자, 베를 짭니다, 실을 뽑습니다, 아 이거 다 아버지가 도와주어야지요. 부인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농사와 길쌈과 모든 생산적, 그 아이들까지 거들어야돼요. 저도 가을만 되면 참 그 일을 같이 나가서 해야되고, 아무리 어린아이지만은, 예?. 또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짜야되거든요. 가마니 짜 보신 분들은 압니다만은 그 기계로 짜는 것도 있지만 손으로 짜는 것은요 한 사람이 자를 대고 하구요 한사람은 내렸다 올렸다 하구요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싸울 일도 없고요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산, 그 과정 속에 가정이라고 하는 유대가 점점 깊어지거든요. 하나되어 가는데 이걸 그만 공장과 사무실로 빼앗겨버렸어요. 그 쪽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가정은 완전히 소비 기관이야. 생산기능은 없고 오로지 소비. '어떻게 쓸까? 어떻게 하면 더 쓸까? 남편의 것을 얼마나 빼앗아 쓸 수 있을까? 아내가 감추어 놓은 것을 내가 어떻게 빼앗을까?' 이 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되겠습니까? 아이들은 '어떻게 용돈을 더 받을까?'
생산적 기능, 그것을 공장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소비만, 오로지 가정은 소비기관으로 되어버렸다. 이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또 하나는 교육기능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뭐, 음식 만드는 것이나 농사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가정으로부터 배웠으나 지금은 학교에서 배웁니다. 교육은 학반에서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거기에다가 위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종교 문제, 이거 더더욱 중요합니다.
이건 완전히 가정에서 배워야 할 것인데 이것도 교회에다 맡겨버렸어요. "교회에 가라" 그리고 끝입니다. 여기서 가정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또 하나는 오락기능입니다. 가정에서 즐겁고 행복한 모든 행복의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요.
가정이 가장 행복한 오락기능을 발휘해야 되는데 이것도 극장과 운동장과 텔레비전과 컴퓨터에게 다 빼앗겼어요. 도대체 이렇게 되고 보니까 가정이 필요가 없어요. 일찍 들어와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재미는 다 밖에서 보고 사니까요. 자, 이것이 가정을 파괴했고 가정이 또 인간을 파괴했고 또 인간성을 파괴해서 이 세상은 불행해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학자의 이론,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가정에서 키워집니다.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에서 성숙합니다. 가정에서 인간이 됩니다. 가정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다 가정에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남는 보람도 가정에 있는 거예요.
나는 그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가끔 외워봅니다. 그거 영어로 외워보면 맨 마지막 말에 참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오. 내 아들이 이러이러한 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고 맨 끝에 기도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그는 장군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큰 일을 많이 했지만은 생각하고 보니 별 일이 아니에요. 그 얼마든지 나 아닌 사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별 일이 아니더라구요. 마지막 남는 보람은 가정밖에 없어요.
'내 아들이 훌륭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때 그리하여 내가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가정에 마지막 보람이 있는 것이에요.
자, 육체적으로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납니다.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말씀과 성령,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랍니다. 인간이 됩니다. 오늘 성경에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내가 너를 낳았음이니라... 복음 안에서 내가 너희를 낳았다. 여기에 '에겟네싸'라고 하는 이 헬라어의 원 뜻은 'Get now'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출생'이라는 말입니다. 이 출생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어요. 우리말은 어머니가 낳는 것도 낳는 거요, 아버지가 낳는 것도 낳는 겁니다.
"내가 낳았다" 이렇게 말하게 되겠습니다만은 영어는 안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낳는 것은 'born'입니다. 아버지가 낳는 것은 'beget'입니다. 'beget!' 그래 오늘 말씀은 beget입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
어머니가 낳는 것 같은 그런 출생이 아니고, 생산적 의미가 있는가 하면 생명적 기원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네게 생명을 물려주노라" 그런 뜻이올시다. "그런 고로 너는 나를 본받으라.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되라. 그 부모의 그 자녀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본받을 만한 부모가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받을 만한 부모가 되었느냐 이것이 문제올시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데이비드 스튜어드라고 하는 분이 Parents as Teachers 라고 하는 논문에서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가르침으로써가 아니라 부모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모화, 부모화, parenting, parent가 아니고 parenting 동사로 썼습니다. 그 특별한 용어를 만들었어요. Parenting! 부모화 함으로써 자녀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가르치려고 하는 별도 노력이 필요없다. 부모만 제대로 되라 이거예요.
부모만 되면 자녀는 되는 거예요. 그 부모 그 자녀예요. 예외 없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면 참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일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 하나가 히틀러가 육백만의 유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6.25전쟁을 치루었지만은 피난민까지 포함해서 백 오십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전쟁 중에 서로 쏘고 죽이고 이런 것이지만은 아, 조용하게 사는 유대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끌어다가 죽였어요. 육백만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숫자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보세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를 해서 늘 집을 비웠어요. 그리고 물건을 다 팔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요.
일주일도 그만, 한 달도 그만. 돌아다니다가 가끔가끔 집에 돌아왔어요. 집을 지키고 있는 그 부인은, 히틀러의 어머니는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서 그만 부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많고 타락한 유대사람, 돈 많은 유대사람, 권세가 있는 유대사람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들이 압니다. 아들이 눈물로 말렸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나 이 어머니는 이 생활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 장사하는 동안에 어머니는 집에서 돈 많은 유대사람하고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대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습니다. 결국은 히틀러가 권세를 잡는 날 유대사람을 죽입니다. 육백만을 죽였어요. 이 얼마나 무서운 사건입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는 충격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만은 제가 결혼 주례를 무려 40년 동안 했거든요. 하면서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옛날에는 신랑은 크고 신부는 작았어요. 아 이거 으례히 그랬어요.
그거 조금 키가 큰 신부는 아예 낮은 신을 신고 오고, 뿐만 아니라 결혼식 할 때도 꾸부정하고 있어요. 작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는데 요새는 뭐 신부가 크고 신랑이 작은데 그래도 또 힐을 신었어요 보니까. 뭐 거침없이. 신랑이 작고 신부가 큰 게 많아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연상의 여인이 많아요. 내가 딱 보면 이건 연상이다. 이건 5년이다 이건 10년이다, 내가 보면 알아요. 연상의 여자가 많아요. 그것도 또 당당해요, 가만히 보면. 그 잠깐 여기서 결혼식 하는 그 동안에도요 남자가 여자 앞에서 꼼짝을 못해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냐구요? 무려 24%가 연상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이들을 엄마가 너무 잔소리를 많이 했어요. 다 챙겨주었어요.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얘들이 컸어요, 남자가 컸는데 그 때는 싫었어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렇게 싫었지만은 이제는 이게 체질화되었어요. 그 잔소리가 없으면 잠이 오질 않아요. 그 간섭이 아니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그래서 연상을 찾아가는 거예요. 엄마 찾아가는 거라고 저게.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렇게 간섭받는 일에 길들여졌다니까요.
이건 알게 모르게 그렇게 배운 거예요 지금. 그런 인간이 되어버린 거예요. 마마보이를 만든 게 바로 엄마라는 것을 생각 못하세요? 그리고 결혼해 가지고 살면서도 여전히 마마보이예요. 조금 언짢으면 엄마한테 전화걸어서 "엄마, 나 지금 매맞았어"
그런 답니다. 어쩌다 이 모양을 만들었냐 이거예요. 이게 다 어머니가 만든 작품이거든요. 이 정신적으로 성품이 이런 관계가 와요. 얼마나 중요합니까? 요새 아이들 가운데서는요 아버지를 향해서 이렇게 대드는 아이들도 있데요.
난 아버지 때문에 창피해 못살겠소, 당신의 아들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연애도 못하겠대요. 누구 아들이라고 그러면 난 장가도 못 가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런 고로 생각해야 합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논리성은 있지요. 지식에 불과해요. 정서로 가르치는 거,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을 보이는 것이에요. 본을 보이는 것. 믿음과 존경으로 본을 따라서 배우게 됩니다.
가장 무서운 교육은 저절로 배워지는 거예요. 가장 확실한 교육은 무의식중에 있는 거예요. 의식보다도 더 깊은 세계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보세요. 여러분 부모간에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그래서 문간에서 키스하는 것도 보여주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이들이 '아 아빠, 엄마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겠지만,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요 대학 졸업하기가 무섭게 시집장가 갑니다.
그 꼴 보기 싫어서 빨리 가야겠다. 나도 간다 나도. 이게 된다고요. 믿으니까. 저렇게 행동 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요새도 보면 내 아들이 저놈이 장가를 안갑니다, 내 딸이 저놈이 시집을 안갑니다.
걱정하지만 그것이 이미 걱정은 지났어요. 당신이 행복을 보여주지 못했어! 여자에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남자에게 여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못 보여주었어요. 애들의 눈으로 볼 때 저렇게 살 바에는 왜 살아야 되나? 우리 아버지 왜 사는 지를 모르겠대요 도대체. 이렇게 자라왔는데 애들이 시집장가 가겠어요?
자 보세요.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어머니를 보았는데 이 딸아이가 시집을 가겠어요? 누가 와서 나에게 사랑한다 뭐란다 하면은 '이렇게 나오다가 결혼식만 끝나면은 이제 뻥뻥할 거지 이제?' 생각합니다. 이게 되겠어요 이게? 겁이 나니까 연애가 안됩니다 연애가. 도대체가 예? 자, 이게 다 말로 되는 게 아니에요.
야, 시집가라 장가가라, 그게 문제가 아니죠. 결혼생활이란 참 행복한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었어야지. 그 본을 보여주었어야지. 이건 보여줌이 없이 강요한다고 그게 될 일입니까? 그것이 말로 될 일이냐고요. 가정 교육이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가치관이 그렇고 행복관이 그렇습니다. 사는 행복,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걸 그대로 저들은 보고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선한 일을 하는지, 선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이런 것을 본 일이 없거든요. 참으로 불행합니다.
현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는 텍스트가 아니고 참고서일 뿐이다. 교과서가 아니고, 교본이 아니고 참고서일 뿐이다. 아니올시다. 부득불 교본일 수밖에 없어요.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교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대로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사도권이 어떻고, 생활이 어떻고 가정이 어떻고. 여러 가지로 비방을 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6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마음을 넓혔노라. 내가 마음을 넓혔으니 보답할 량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내가 복음 안에서 이렇게 행복하다.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우선 그는 자기 만족에 살았습니다.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알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많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행복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명에 만족했습니다. 이대로 관제와 같이 죽을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하고 있는 일을 위하여 전심전력하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믿음과 행복과 사랑과 소망에 본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믿었습니다. 이제 말합니다. "나는 너를 믿노라 내가 너를 낳았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요 사랑은 믿어주는 것이요 그리고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거쳐서 지금은 본으로 교육을 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귀한 가정 귀한 자녀들은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참으로 귀한 본을 보여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새기게 하시고 복음으로써 낳고 복음으로써 키우고 좋은 본을 보여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행복을 찾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6:1-9/ 자녀에게 줄 믿음의 유산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53:30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六․七)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부모된 사람들에게 자녀들에게 귀한 진리를 잘 가르치라고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어린이날로 지키는 주일이올시다. 혹은 꽃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아마 어린이들이 꽃과 같이 아름다우니까, 그런 이름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시는 모든 축복 가운데 아마 가장 큰 축복은 어린이들일 것입니다. 부모된 사람들이 다 그의 자녀를 귀여워하지만은 그 책임이 얼마나 소중하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잊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어린이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예배하는 날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부모된 사람은 항상 아이들을 위해서 준비합니다. 어린 아기가 세상에 오기 전부터 해산에 대한 준비를 합니다. 점점 크게 되면 교육에 대한 준비를 합니다. 청년이 가까워 오면 결혼에 대한 준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는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유산을 남기기를 힘쓰는 것이 부모된 이의 성정인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좋은 집도 남겨주기를 원합니다. 옛 사람들은 좋은 토지를 남겨주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지금 사람은 회사의 주식이든 돈을 할 수만 있으면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기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대하여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와 같은 유산은 다시 말하면 재산의 유산은 자녀가 받아 가지고 꼭 그대로 지킬지는 지내보아야 압니다. 또 돈을 주어서 그 돈이 꼭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겠는지 도 결국은 지내보아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축복이 되고 늘 지닐 수 있는 축복, 유산 돈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든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유산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아침 그런 면을 잠깐 생각하기로 합시다.
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로 오래 있던 블랙우드라는 박사가 계시는데 그분이 이런 서너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좋은 부모이면 그 자녀들에게 기쁜 기억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다. 어렸을 때의 생각이 기쁜 기억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누구든지 좋은 부모라고 할 것이면 그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조성시켜서 좋은 습관의 유산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셋째는 높은 이상, 고귀한 생의 목표를 어린 자녀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으면 그것이 아주 귀한 유산이 될 것이다. 여러분, 이 시간 이런 서너 가지 면에서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 된 사람들의 하나 하나를 이 시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억에 대한 유산을 말씀 들이고자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이 기억이라고 하는 말은 가장 달고도 또 가장 쓴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지나간 것을 회상해 보면 어떤 기억은 매우 답니다. 달콤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매우 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기억은 매우 기쁩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매우 슬픕니다. 아렸을 적에 가정에서 자라던 기억 중 어떤 기억이 내 머리에 남아 있나 지금 각각 생각해 보세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단 기억이 많은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쓴 기억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기쁜 기억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픈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개인의 어렸을 적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라났으니까 농촌에서 자라나던 여러 가지 경험이 제 머리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봄철에는 뒷동산에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고 옆에 있는 송림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뻐꾹새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쟁쟁하게 들리고 들에 나가면 보리밭에서 나와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아름답게 노래하던 종달새의 소리가 지금도 쟁쟁히 들립니다.
그래서 삼팔선만 열리면 내 고향에 가서 종달새 소리를 한번 더 듣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아주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목화밭에 가서 목화를 따던 기억이 늘 납니다. 아마 여기 젊은 사람들은 목화가 무엇인지 잘 모를 분도 있을 것입니다. 솜 만드는 나무를 목화라고 합니다.
그것을 따는 재미가 보통이 아닙니다. 또 시골에 있으니까 닷새에 한번씩 장이 섭니다. 아버지가 늘 장보러 가곤 하는데 한번은 장에 따라가서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왔던 것이 어떻게 기뻤던지 지금도 기억납니다.
못 따라 가게 되면 점심을 먹고 아버지 오시는 길목에 나가서 기다립니다. 그 목적은 아버지가 오실 때에 엿을 하나씩 사다 주시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나기 전에 조그만 예배당이 촌에 세워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거기 가서 찬미 배우던 생각, 처음으로 키 큰 방 목사라고 하는 서양 사람을 보던 생각이 지금도 늘 납니다.
그이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는 찬미를 저에게 배워줬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어떻게 기쁜 기억이 많은지 모릅니다. 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밤새 더듬어 보아도 제 기억 가운데 우리 부모님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본 기억이 안 납니다.
저는 그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또 매맞아 본 기억도 없습니다. 책망 받은 기억은 한번 특별히 생각나는데 그것은 언젠 고 하니 우리 어머님이 병중에 계실 때에 약을 다려서 잘 짜 놓았는데 뛰어다니다 그만 그것을 엎질렀어요. 단단히 책망을 받은 것 지금도 기억납니다.
물론 저에게 슬픈 기억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열 살날 때, 정월 열 나흗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 일입니다. 그 기억이 늘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여간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어렸을 적의 기억을 가만히 회생해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참 감사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대해서 언제든지 감사하고 부모님이 극진히 귀여워하고 사랑했다하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소매치기 하다가 자수해서 온 분이 자기의 과거 수기를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그것을 잠깐 읽어보니 이 분은 볼래 진주의 어떤 부자 집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자기 기억에 세 살 적에 자기 아버지와 첩하고 싸움이 났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놓고서 싸우는고 하니 자기를 놓고 이게 내 아들이냐 아니냐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은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업혀 둘을 내쫓았습니다. 어머니가 쫓겨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니 그의 어머니가 행실이 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 후에 화병으로 자기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낫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자기 아들 아니라고 내쫓았고 어머니는 홧김에 세상을 떠난 다섯 살 난 고아가, 이런 기억밖에 없는 고아가 어떻게 옳은 길 가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특히 귀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청년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을 이 시간에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문호 도스토엡스키가 어떤 저서 가운데 이런 글을 썼습니다.『좋은 기억, 특별히 어렸을 때의 가정 생활에 있어서 이 귀한 기억처럼 장래에 깊은 감화를 주는 것은 없다. 귀한 성스러운 기억은 최대의 교육이 된다.
그런 기억이 많은 사람은 최후까지 인생 길을 바로 걸을 수 있다. 그런 기억이 단 하나만 있어도 그는 그의 영혼을 기억할 수가 있다. 그 한 가지 기억이 그를 많은 죄악 가운데서 건질 수 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부모 되신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기쁜 가정의 기억이 남도록 좋은 기쁨의 유산을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가정이 단락 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제일 입장이 곤란한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아들과 딸들입니다. 꼭 싸움할 일이 있으면 아이들 없는데 가서 해야 합니다. 아이들 있는데서 아예 싸우지 마십시오. 그것이 앞으로 아주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도 그런 좋은 기억의 유산을 주려고 할 것이면 우리 가정이 물론 경건하여야 합니다. 죄가 들어오면 여러 가지 풍파가 일어납니다. 도 무리하게 아이들에게 욕한다든지 때린다든지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어떤 분이라도 성이 나든지 자기가 속상하면 괜히 애꿎은 아이들을 때리고 욕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일을 한 기억이 더러 있습니까? 우리가 속 상하다 고 왜 아이들을 북 치듯 때린단 말입니까?
제가 주일하교 선생님들에게 말할 기회가 있을 대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합니다. 혹 아이들이 예배당에 와서 좀 못되게 굴어도 그저 말로 권면(勸勉)하지 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다음에 커서 내가 예배당 가서 매맞은 기억을 갖게 된다면 아주 좇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이런 말을 들었어요, 아이 적에 예배당에 가서 매맞고 와서 다음부터 예배당에 안 갔단 말입니다.
또 물론 어린이들에게 친절히 하며 장난감도 사다 주고 책도 사다 주고 했지마는 가만 지내 놓고 보면 가장 기쁜 기억은 어머니하고 어디 함께 가는 것이 제일 머리에 잊지 않고 마음에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좋은 구경을 갈 때는 부부간만 가지 말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전에 평양에 있을 때 보니 어떤 젊은 부부가 모란봉에 산보 가느라고 아이들을 다 재워 놓고 문은 밖으로 잠그고 갔습니다. 한참 있다가 아이들이 깨서는 아무도 없으니 자꾸 웁니다. 종일 울다가 기진맥진해진 다음에 부모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이 이 다음에 무슨 기억이 남겠습니까? 내가 들으니 어떤 애가 자기 동무에게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합니다.『우리엄마는 얌체야, 얼른 갔다가 온다고 하더니 종일 안 와.』
그런 어머니가 여기에는 없습니까? 그 아이의 기억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어머니는 나를 속인다. 그 영향이 이 어린이의 앞날에 어떻게 미치겠습니까? 여러분 어떻든지 아이들과 놀려도 같이 가고 예배당 올 때도 같이 오고 이렇게 해서 아이들 생각에나,
후에 남는 기억에『참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귀여워했지, 참 나를 사랑했지, 내 유년시절의 생활은 참 행복했어.』하는 기억이 남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유산을 주면 이 유산이 이 자녀들과 일생을 같이 해서 이 자녀들이 축복 받습니다.
둘째로 좋은 습관의 유산을 주라고 했습니다.
품성과 인격조성에 있어서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심리학자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가 다 상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은 심어서 행동을 거두고 행동은 심어서 습관을 거두고 습관은 심어서 품격을 거두고 품격은 심어서 일생의 운명을 거둔다.
꼭 그렇습니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쌓여서 품격이 됩니다. 결국 품격이 그 사람 일생의 운명을 주장합니다. 그만큼 습관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습관은 어렸을 적부터 한 가지 하고 두 가지 하는 행동이 모여서 습관이 되고 나중에 품격이 됩니다. 그러나 부모 된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을 양성해 줄 수 있도록 각별히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는 말도 자주 쓰도록 배워줘야 하겠습니다. 예의를 배워줘야 하겠습니다.
친절히 하는 것, 참말 하는 것, 무엇이나 정직하게 하는 것, 무엇이나 깨끗이 하고 정돈하고 살 줄 아는 것. 부지런한 것, 일찍 일어나는 것,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적은 것 같지마는 이 습관이 모여서 결국은 그 사람의 품격이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어렸을 적부터 식기도 하는 것,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것, 주일이 되면 꼭 예배당에 가는 것, 이것이 습관이 되고 이것이 품격이 되어야 그 사람의 건전한 터전 위에 서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 나와서는 엄숙히 예배보는 습관을 양성해 줘야 될 줄 압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배당을 놀이터에 간 것처럼 생각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 실에 앉기는 하지마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 사다 주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자꾸 사다 주면 아이들이 놀이터에 왔는지 예배당에 왔는지 분간을 못할 것입니다.
으레 히 그런 곳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적에 왔지 마는 예배당에 오면 엄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같이 예배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성찬을 베푸는 것을 어린이 때에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 엄숙한 기분을 어렸을 적에 배울 수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에게 순복(順服)하는 것,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 자연을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하면 꽃은 꺽지 말고 가꾸는 것, 새와 같은 것은 잡아서 죽이지 말고 잘 기르는 것,
특별히 국가에 대한 사랑의 관념을 넣어 주기 위하여 국기를 소중히 간수하고 국경일에는 국기를 내다가 띄우고 언제든지 국기를 볼 때에는 아이들이 엄숙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 등 좋은 습관을 이루도록 우리가 좋은 습관을 이루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히 좋지 못한 습관이 양성됩니다. 참말 하는 습관을 배워주지 아니하면 거짓 말하는 습관이 저절로 생깁니다.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적은 물건이라도 남의 물건 가져오는 것을 용납하면 그런 버릇이 커서 이 다음에 어떤 도둑놈이 될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부슈넬이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가 있는데 그분이 기독교 교양론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섰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품격 조성에 있어서 아이들이 세 살이 나면 벌써 부모는 할 수 있는 일이 절반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옛날부터 동양에서 내려온 말 가운데 삼세기습이 지우팔십(三世奇習持又八十)이라 하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벌써 세 살 나서 습관 된 것이 팔십에 나기까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벌서 세 살 나기 전부터 좋은 습관이 양성되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말로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친히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남에게 인사를 깍듯이 하고,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알고 예의가 있고, 친절하고, 봉사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부모가 실제로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습관의 유산을 남기고 있는가? 좋은 습관의 유산을 남겨 주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셋째는 어린아이들이지만 고상한 이상을 주도록 힘쓰라고 했습니다.
고귀한 생의 목표, 내가 이 다음에 커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어린이지만 있어야 합니다. 고귀한 인격, 경건한 생활, 참 그리스도와 같이 고귀한 인격 혹은 성모 마리아와 같이 거룩하고 성결한 품성, 이런 고귀하고 높은 비전과 이상을 주도록 부모가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어리지마는 그의 마음에『나는 이 다음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하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합니다. 예수 님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는 비전이, 이상이 머리에 들어오게 되면 마치 크리스마스별이 멀리 동방 박사를 인도해서 베들레헴까지 인도한 것처럼 그 아이의 일생을 그 이상이, 그 신앙의 별이 그의 갈 길을 바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결국 어떻게 그런 고귀한 인격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디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부모가 고귀한 품격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지 아니하면 어린이가 그런 모습을 볼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혹은 아버지로서 혹은 어머니로서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엄숙하고 고귀한 어떤 모습을 내 가정 생활에서 보여 줍니까? 여러분이 엄숙히 기도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본 적이 있습니까? 혹 여러분의 경건한 생활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줍니까? 청년들과 얘기해 보면 이런 말 많이 합니다.
그저 우리 어머니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기도 많이 합니다.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내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 어머니는 그 고귀한 기도의 모습을 자기 아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내가 전에 들으니 六․二五때 어떤 미국 군인이 어떻게 한국 교회에 와서 예배를 보는데, 여자가 기도를 하는데 말은 모르겠으나 어떻게 간절히 기도하는 그 기도 소리를 듣고 마음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뜻은 모르나 기도하는 음성과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성스러워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제 경험을 가만 더듬어 보아도 우리 시골에서 한번은 예배볼 때에 어떤 영수 님이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무슨 말인지 어려서 잘 모르겠으나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어렸을 때 본 그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제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고 고귀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고귀한 생활과 인격의 모습을 부모들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 어디서나 속일 수 없으나 가정에서는 더욱이 속일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는 다 압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 믿는지 아이들이 다 압니다.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압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내게 와서 자기 아버지께 대해서 얘기하는 것 들었습니다.『우리 아버지는 예수를 믿기는 하나 돈을 너무 알아요』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믿는지 자녀들이 압니다. 부모들이 가정에서 하는 것이 활동사진의 필름에 박힌 것처럼 어린이의 마음에 다 박힙니다.
이 다음에 그 사진이 그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고귀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면 결국 내 자신이 참된 신앙 생활을 하고 온전히 헌신해서 자녀들이 우리 아버지는 참 경건한 분이다, 우리 어머니는 참 진실한 분이다. 하는 인상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아직까지도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오늘 새롭게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고 오는 내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주보를 보면 매주일 두서너 분씩 세상을 떠나십니다. 장례식에 가서 주례를 할 때마다 문득 내 마음속에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분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자녀들에게 줄 유산이 무엇입니까? 물론 돈도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실상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기쁜 기억의 유산을 줄 수 있으면, 좋은 습관을 양성시켜서 좋은 품격을 유산으로 줄 수 있으면, 고귀한 생의 목표를 유산으로 우리 자녀에게 줄 수 있으면 이에서 더 큰 유산이 없습니다.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2014-08-05 14:28:27
현용수 교수(쉐마교육연구원 원장)
Biola University, Talbot School of Theology 졸업(Ph.D., 기독교교육학 박사)
I. 문제 제기
II.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1. 신약 성도들도 영적 유대인이다
2. 신약과 구약의 중심주제: 신약은 복음, 구약은 선민교육(쉐마)
3.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교육
4.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과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5.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6. 일부 오해들에 대한 답변
III. 결론
I. 문제 제기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이 들어가기 힘든 정통파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서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전3권)”을 집필하였다.
이 책이 약 12만권 이상이 팔리면서 한국 교계는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가정교육과 기독교교육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왜 복음도 없는 유대인 자녀교육이 기독교교육에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책 원제: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2천년 동안 기독교와 유대인과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질문이다.
필자가 유대인 자녀교육을 연구한 동기는 “기독교는 어찌하여 지난 2천년 동안 계대교육에 실패하였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신약교회의 태동은 예루살렘의 오순절 다락방 성령강림에서 시작된 후 기독교 2천년 동안 계속 다른 민족에게 복음은 전하고 자기 민족교회는 죽어왔다.
현재 한국 교회도 2세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90%이상이 교회에 안 나간다. 교회교육과 가정 교육이 90%이상 실패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유대인은 어떻게 아브라함부터 현재까지 4천 2백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데 성공했는가? 필자는 그 비밀을 유대인의 쉐마(선민교육)에서 찾았다. 따라서 필자는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이 필요한지를 논증하여 그 당위성을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어 한국민족 교회의 후대교육을 살려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세계 속의 제사장 민족이 되기를 소원한다.
II.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1. 신약 성도들도 영적 유대인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유대인만 유대인이 아니라 신약 성도들도 영적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가 의인이 된 것처럼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의인이 되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기 때문이다(갈 3:6∼9).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성도의 ‘아버지’다(롬 4:11).
따라서 신약의 기독교인들이 장차 천국에 가면 구약에 나타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물론 모세나 다윗, 그리고 이사야나 예레미아 같은 선지자들도 만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나 바울도 유대인이셨다. 따라서 그들이 받아왔던 선민 교육은 현재 기독교인들도 받아야 한다.
2. 신약과 구약의 중심주제: 신약은 복음, 구약은 쉐마(선민교육)
왜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자녀 교육을 배척해 왔는가? 그것은 신약과 구약의 중심 주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약의 중심 주제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라면, 구약(토라)의 중심 주제는 첫째, 메시아닉 사상이고 다음은 선민교육인 쉐마다.
먼저 신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된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십자가의 도(고전 1:18)이다. 이를 온 인류의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 즉, ‘복음(Gospel=Good News)’이라고 말한다(Bryant, 1967, p. 203).
그러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구원받은 이후 갓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a baby Christian)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성숙한 선민(기독교인)이 되느냐의 선민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주로 구약의 선민교육에 있다. 특히 가정에서 자녀를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양육하는 성경적 원리와 방법은 구약 성경에 근거한다.
물론 신약에도 부분적으로 있지만 원론적으로는 구약에 있다. 따라서 신약의 중심 주제인 ‘복음’이 구원의 열쇠라면 구약의 중심 주제인 ‘선민교육, 쉐마’는 자녀교육의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신약과 구약이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신약의 복음과 구약의 쉐마가 서로 뗄 수 없는 보완 관계이다.
따라서 기독교교육학적인 입장에서 신약의 ‘키 워드(Key Word)’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한다면, 구약의 ‘키 워드’는 유대인의 선민교육인 ‘쉐마’이다(참조: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구약의 키 워드는 ‘메시아닉 사상’이다. 기독교교육학적인 입장과 구원론적인 입장이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에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빠질 수 없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선민교육에는 신약의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자주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데 필요한 성화의 도구로 구약의 율법을 자주 인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에 필요한 기독교교육은 실천신학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복음과 선민교육은 구별되어야 한다. 따라서 “유대인 자녀교육의 원리와 방법들은 기존 기독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성경의 유일한 대안이다”(고용수,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문, 2002년).
3.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교육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가정에서 부모가 혈통적 자녀에게 율법(말씀)을 전수시켜 자녀를 ‘말씀 맡은자’(롬 3:2)로 키워 자녀를 영적 제자로 삼는 선민교육이다. 따라서 유대인의 성년식인 ‘Bar Mitzva'는 ‘율법의 아들(말씀 맡은 자)’이란 뜻이다. 선조로부터 율법을 전수받은 부모는 다음 세대인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시키기 위해서는 성경에 근거한 다음의 주제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몸소 가정에서 실천해야 한다.
- 왜 가정은 성전인가?
- 성경적인 자녀의 개념은 무엇인가?
- 쉐마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여호와의 토라(율법, 말씀)를 그토록 강조하시는가?
- 왜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인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의무는 무엇인가?
- 왜 어머니는 남편을 돕는 배필인가? 무엇을 도와야 하는가?
- 왜 자녀를 말씀의 제자로 삼는데 효도교육이 중요한가?
- 왜 고난의 역사 교육이 중요한가? 왜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가?
위의 주제들은 모두 원론적으로 구약 성경에 근거한다. 유대인의 자녀 교육은 자자손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여 영적 자녀로 키우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유대인이 자자손손 토라를 전수하여 현재 우리가 구약 성경을 갖고 있지 않는가? 만약 그들이 말씀을 전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신약 시대의 기독교인도 말씀으로 거듭난 ‘말씀 맡은 자(롬 3:2)’다. 따라서 우리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해 준 유대인의 수고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세대차이 없이 말씀을 전수한 비밀을 연구하여 우리 자녀 교육에 적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은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라다임이다.”[김의환, 현용수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서문, 1999년].
4.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과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선민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에게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다(롬 9:15-18, 10:6-7). 구약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적 유대인임을 강조한다. 물론 유대인도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창 15:6). 그들은 오실 메시아(예수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다.
따라서 그들은 출생 때부터 교육의 내용으로 구원에 대한 교리보다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어떻게 이방인과 구별되게 살아가느냐 즉,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닮아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율법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들의 613개의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의 영적 순결과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책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약 시대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선택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백성이다.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 이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 따라서 기독교인은 누구든지 출생하여 이방인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선민이 된다. 구원론적 입장에서 예수님은 복음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먼저 개인 구원을 강조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론에 의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보아야 옳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이다(롬 10:4). 따라서 유대인은 구원을 위한 복음(예수님)이 필요하고,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선민교육인 쉐마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한 동반자여야 한다.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구원과 성화의 차이점
* 구약의 유대인: 출생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선민
출생 -->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교육(Holiness) = Christlikeness
구원 성화의 과정(Process of Sanctification)
* 신약의 기독교인: 기독교인의 가정이라 하여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선민
출생 --> 구원 -->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교육(Holiness)
기독교 가정의 기독교교육의 우선 수위는 무엇인가? 첫째, 복음을 자녀에게 증거하여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하고, 그 후 유대인의 선민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의 선민교육 자체만으로는 훌륭한 성경적 교육이 될지 모르지만 영혼의 구원에는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구원과 선민교육이라는 두 개의 열쇠가 필요하다. 즉, 첫째는 구원을 위한 복음(예수님)이란 열쇠이고, 둘째는 자녀교육을 위한 유대인의 선민교육(쉐마)이란 열쇠다.
기존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 소위 모태 신앙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이 약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즉, 복음은 전하지 않고 성경 교육(선민교육)만 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목사의 가정이라도 자녀들에게 먼저 구원을 위한 예수님(복음)을 전한 후 신구약 성경을 기본으로 한 선민교육을 해야 한다. 아울러 기억할 것은 예수님(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성령 체험이 필수적이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 없다. 때때로 교회에서 미온적인 모태 신앙 신자라 하더라도 성장 후에 성령의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난 후 크게 변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대인은 신약의 복음 없이 구약의 선민교육만으로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우리가 신약의 복음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을 더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유대인보다 더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5.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유대인 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유대인의 율법을 거론한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나 바울이 배척했던 것은 율법을 남용하는 율법주의이지 율법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악하나 율법은 선하고 신령하다(롬 7: 12, 14).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이 필요하다. 왜 필요한가? 율법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는 복음을 받아드리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이고, 둘째는 율법의 교육적 기능이다.
첫째, 복음을 받아드리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은 인간에게 율법이 있으므로 죄를 깨달아 죄인임을 시인하고, 이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예수님의 보혈의 귀중함을 알아 그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기능이다(롬 3:20, 5:20, 7:7; 딤전 1:9).
둘째, 율법의 교육적 기능은 구원받은 이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필요하다(레 19-1-2; 신 28: 1-6: 롬 8:4; 엡 4:15).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서 구약의 유대인과 신약의 기독교인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유대인은 구약에서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했고, 신약에서는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왜 그런가? 구약의 유대인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율법에 의한 선민교육이 필요하고, 신약에서는 율법에 의한 선민교육 이전에 모든 백성,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먼저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을 강조하여 구원을 받게 하고, 그 이후에는 구약에서 유대인이 강조했던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가르쳐 지켜 행하여야 한다. 즉,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이 먼저이고, 그 다음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여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의 조화이기도 하며 신구약의 조화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통적 기독교의 입장의 가르침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어 왔다(갈 3:24).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율법에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말씀(율법)을 따라 구별된 백성이 되는 데는 미흡했다. 율법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별된(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율법 없이 어떻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이는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전혀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바울은 어떻게 말하였나? 바울도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율법교육을 받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3:1-3). “무엇이든지 저희(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율법)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왜 그런가? “저희는 (율법을) 말만 하고 (율법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위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무엇이든지 유대인(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율법)는 행하고 지켜야 한다(마 23:2). 왜 그런가? 구약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적용되는가? 물론 적용된다. 만약 오늘날도 바리새인적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는 성경대로 잘 전하지만 행위가 위선적이라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저희(목사들)의 말하는 바(율법)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실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율법(말씀)을 지켜야지 안 지키거나 율법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구약 신학적 입장에서 기독교인은 왜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 속에 구체적인 율법을 기록하여 보존하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단순히 구원을 얻고 거기에만 머무르도록 하고자 함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전케 되어야 하며 또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딤후 3:17). 그렇다면 왜 이방의 기독교인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의 빛(사 49:6)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빛으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율법 역시 이방에 비쳐져야 하며, 이방인 역시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김철원,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가장 완벽하게 활용하는 성경적 인성교육의 내용과 방법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된 백성이다. 유대인은 세속과 구별되게 살기 위하여 “하라”는 명령 율법 248개와 “하지 말라”는 금지 율법 365개, 도합 613개의 율법을 지켜 행한다. 따라서 영적 유대인인 기독교인도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을 기독교교육의 기능으로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성화의 도구이다. 그리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정통파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는 것과 신약의 성도들이 율법을 행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현대 정통파 유대인이 율법을 행함은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구원 없이 행하는 선민교육이고,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행함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구원 받아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성화의 과정이다(롬 8:4). 그런 면에서 필자의 유대인 자녀교육은 구원론적 입장에서는 보수 개혁주의 내지 칼빈주의 입장을 취했지만, 기독교교육의 성화교육 입장에서는 웨슬레안 입장의 기독자 완전론과 연관 시켰다(이정근,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물론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킬 필요는 없다. 대체적으로 유대교 율법이 요구하는 특별한 날과 절기를 지키는 전통이나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신약 시대의 성도는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어느 율법은 지켜야 하고, 어느 율법은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신약 성경에는 명확히 없다는 점이다. 샌더스는 이를 “바울이 신약의 성도에게 맞는 완전한 할라카 체제(유대인의 세세한 응용 규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아직도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Sanders, 1995, pp. 144-145).
6. 일부 오해들에 대한 답변
그동안 필자는 많은 질문들을 받아왔다. 이런 질문들은 기독교 2천년간 쌓여온 문제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따라서 지면상 중요한 몇 가지만 답한다. 어떤 이는 “유대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이단이다. 따라서 그들의 교육 내용이나 방법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단인 유대인이 사용하는 교육의 내용인 구약성경을 왜 기독교에서 글자하나 빼지 않고 사용하는가?
그리고 왜 유대인의 조상들인 아브라함이나 다윗, 다니엘, 에스라 및 느헤미아 등을 믿음의 조상으로 소개하고 그들의 교육(유대인 교육)과 사상(유대인 사상)에 대하여 설교하는가? 그들도 신약의 기독교인처럼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구약은 복음의 뿌리이다(유대인과 기독교인과의 자세한 관계는 로마서 11장 참조).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시켜야지 왜 복음도 없는 유대인의 자녀교육을 시켜야하느냐?”고 질문한다.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민이 된 후 하나님의 형상,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교육을 말한다(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고후 4:4; 골 1:15; 히 1:3). 하나님의 선민은 누구인가?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이요, 신약 시대에는 복음(예수님)을 받아들인 기독교인이다. 따라서 신약의 기독교인이 신약의 중심주제인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으면, 구약의 중심주제인 유대인의 선민교육(쉐마)을 받아들여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은 신약 성경은 물론 유대인이 저술하고 자자손손 보존해온 구약 성경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이다. 만약 신약의 기독교인이 유대인은 복음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성경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따라서 신약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시대에 비록 복음을 거절하여 하나님의 선민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구약 성경과 구약에 근거한 선민교육을 전해준 유대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2천년간 구약의 선민교육을 소홀히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약의 기독교가 너무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복음만 강조한 나머지 신약의 복음과 구약의 선민교육을 구별하지 못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본다.
어떤 이는 “유대인의 성경은 구약뿐인데 그들의 교육이 신구약을 믿는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물론 적용된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히 4:12)라고 말씀한다. 당시 바울과 히브리 기자가 지칭한 ‘모든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을 말하는가 아니면 신약 성경을 말하는가? 물론 그것은 구약 성경뿐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편집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참조: AD. 약 300년 경에 신약 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됨). 따라서 초대교회는 물론 몇몇 사도들의 서신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구약 성경만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 성경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할 수 있다”는 뜻이다(딤후 3:16-17). 여기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교육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구약의 토라 즉, 율법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초대교회에도 구원은 복음을 전하여 받게 하고 자녀교육은 구약의 율법, 즉 쉐마로 시켰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구원의 열쇠인 복음과 더불어 자녀교육의 열쇠인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회복시키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III. 결론
지금까지 2천년간 기독교인들이 자녀교육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구약의 쉐마교육을 유대인 것이라고 무시한 데 있었다. 따라서 신약교회는 구원의 열쇠인 복음은 강조하여 구원은 얻었지만, 자녀교육의 열쇠인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배척했다. 그 결과 시대마다 어느 민족이든지 다른 민족은 선교하면서도 자자손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구약의 쉐마교육을 통해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자 삼을 수 있다.
복음은 신약의 중심주제이고 쉐마를 통한 말씀전수는 구약의 중심주제이다. 즉,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신약과 구약이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신약의 복음과 구약의 쉐마가 서로 뗄 수 없는 보완 관계이다. 왜 신약교회가 자자손손 말씀을 전수하는 데에는 실패했는가? 유대인처럼 랍비는 부모를 말씀의 제자삼고, 말씀을 받은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성경적 교육목회의 본질을 외면했기 때문이다(박희민,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한국 교회의 90% 이상이 실패하는 2세 교육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대안은 4200년간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뿐이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민족이지만 한국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으면 또 다시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1세 신앙의 유산을 자자손손 후세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더 늦기 전에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실제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의 유익은 많은 목사님들이 필자의 저서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를 읽고, 혹은 ‘쉐마목회자클리닉’을 마치고 교회에서 성경적 쉐마교육목회를 실천하여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가 회복되어가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현용수 교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아름다운세상, 2002) 참조바랍니다>
참고 서적
Bryant, Alton. Editor. (1967). The New Compact Bible Diction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Sanders, E. P. (1995).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Translated by Jin-Young Kim, Seoul: Christian Digest.
고용수, (2002). 바른신앙, 바른지식, 바른생활의 균형있는 성경적 자녀교육 지침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 녀를 제자 삼아라’ 서문.
김의환, (1999). 개혁주의 교육에 공헌할 것. 현용수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서문.
김철원. (2002). 유대인의 율법도 이방에 비쳐져야 한다(구약 신학적 입장에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박희민.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안고 있는 가장 핵심 문제를 찌른 발견(목회신학적 입장에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성경(한글 개역). (1997). 서울: 대한성서공회.
이 정근.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취약점을 보완했다(기독교교육학적 입장에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현용수. (1999).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전3권). 서울: 조선일보.
현용수. (2002).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부제: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서울: 아름다운세상.
자녀는 부모의 기업 /시127:1-5
2011-06-10 15:11:23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성도님들의 가정 가정 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부모가 되시고, 형통한 자녀들이 있는 그런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잘 아시지만 가짜 복이 있고 진짜 복이 있습니다. 세상 복이 있고, 천국 복이 있으며, 육적인 복이 있고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순간적인 복이 있고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가짜 복, 세상 복, 육적인 복, 순간적인 복이 아니라... 진짜 복, 천국 복,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서 진짜 복, 천국 복,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을 찾고, 누릴 수 있습니까? 성경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이런 복을 찾아 누릴 수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십니다.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진짜 복, 천국 복,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Happyness is not Born but Makeing” 행복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행복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듯이...행복한 가정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까요? 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앞장서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앞장서서 만드는 것입니다.
가끔은 좋은 부모 밑에서도 불효하는 자식이 나오기도 하고,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도 효도하는 자식이 나오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효자는 좋은 부모 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효자가 먼저가 아니라 부모가 먼저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버이 주일에 자녀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부모님들에게 자식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라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라는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 째는, 좋은 부모에 대해서이고, 두 번째는, 잘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첫번째로,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좋은 부모를 그저 좋은 ‘Sponcer’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뒷바라지만 부족함 없이 해 주면 그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쉽게들 합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란 좋은 스폰서가 아닙니다
. 좋은 스폰서가 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자녀가 ‘좋은 부모는 돈 많은 부모다’ 라는 생각을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자녀가 ‘부모는 스폰서하는 사람이다’는 생각을 우리에게서 배운다면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입니까?
좋은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날마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부모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부모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스폰서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들은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물질이 아닌 기도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것으로 부모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지금 우리나라는 그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세계가 놀랄만큼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좀 넉넉해지면서 많은 부모들이 기도를 잊어갑니다. 아이들을 비싼 것으로 먹이고, 비싼 것으로 입히며, 자녀들이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하게합니다. 그러면서 돈 많은 부모가 좋은 부모이고, 예전의 가난한 부모님들보다 지금의 자기들이 더 유능하고 훌륭하다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돈의 혜택을 더 많이 받는 자기 자녀들이 더 복을 받은 자녀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눈물의 기도를 잊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입니다. 아멘이신가요?
혹시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富者 부모가 좋은 부모이며, 가난한 부모는 나쁜 부모라고 가르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자녀들에게 좋은 스폰서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스스로 좋지 못한 부모라고 자학(自虐)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되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입니다. 오늘부터 자식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날마다 좀 더 기도하는 부모가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잘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은 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배웁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사랑은 말과 혀가 아니라 행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옛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교사요 스승이었습니다. 옛날의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예절을 배웠고 인생을 배웠고 신앙을 배웠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기 전에 미리 미리 부모가 나중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
사실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면서 남자의 역할을 배웠고, 어머니가 하시는 것을 보면서 살림을 저절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 아버지처럼만 하면 된다’라고 아들에게 말하는 어머니가 드뭅니다. 오히려 ‘제발 너희 아버지는 닮지마라’ 합니다. 또 결혼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라면은 잘 끓인다’ 합니다. 집안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 보내는 것으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나 학원에서 강의하는 것은 지식입니다. 설령 좋은 학교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만 하겠습니까? 자식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스승과 교사는 부모입니다. 부모이어야만 합니다. 돈으로는 자녀에게 본이나 모범을 보일 수 없습니다.
부모여러분, 내 아이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알아야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알려면 대화(對話)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자녀들에게 인생과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교사 같은 부모가 되겠다고 결심을 합시다. 도전하십시다.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부모가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본을 보여야 할지는 이미 성경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오늘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의 내용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십계명 중에서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인 5계명입니다. 둘째는 시편 127편 3절의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제 5계명입니다. 출20: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 엡6: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입니다.
성경은 가장 먼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이 땅을 주시며 그 생명이 길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부모님에게 불순종하는 자녀가 잘 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신 하나님은 잠언 30:17에서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녀가 잘되고 장수하기를 바라지...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일찍 죽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자녀가 잘 되기를 위해서 ‘부모 공경과 순종, 즉 효도(孝道)’를 가르치는 것에는 소흘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효도야 말로 ‘약속 있는 첫 계명’이요,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분명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까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효도를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효도없는 자녀는 미래가 없습니다.
구약 삼상 2장을 보면, 엘리제사장의 가정이 나옵니다. 아버지 엘리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인데 두 아들은 방탕자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였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간음도 하였습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벌이 내립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삼상2:31-32)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내용이 뭔가요? 그 가정에 노인이 없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가정에서 장수의 복을 거두어 가신다고 합니다. 젊어서 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가정에 나이 드신 노인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 축복을 잘 모르고 싫어합니다. 노인이 있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노인이신 부모 스스로도 ‘빨리 죽어야지’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귀의 생각입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 잘못된 사회입니다. 부모님이 재산이나 많이 가지고 있으면 서로 모시려고 하고, 재산을 자녀들에게 다 나눠준 부모를 서로 모시려고 하지 않는 이 사회는 비 성경적인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용납하면 안 됩니다.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부모(父母)를 통해서 태어나게 했습니다. 부모가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언제인가는 우리 자신도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를 이 세상에 출생케 해야 하는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이 관계를 일컬어 우리는 가정(家庭)이라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응답이 옵니다. 어떻게 옵니까? 평소 여러분과 관계(關係)를 맺은 사람들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가정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가정이라는 관계를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습니까? 가정은 하나님의 어떠한 의도를 이 땅에 보여주고 있습니까? 부모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엄숙하게 명령하고 있습니까? 부모님을 잘 공경할 때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모공경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제 여동생이 고아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원’에는 어린아이부터 고3까지 있습니다. 제 여동생이 돌보고 있는 한 여자애가 ‘원’에 있는 다른 남자애와 눈이 맞아 임신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낙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낙태가 정말 되었는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확인을 하더랍니다. 물론 그 여자애의 심리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동생을 통해 들은 말로는... 원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버림받았다’는 피해감이 강하답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존재인 부모에게서 조차 ‘버림받은 존재’ 라는 생각에 자기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답니다. 자기를 함부로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에 있는 아이들은 ‘내 몸은 소중하니까요’ 하는 생각이 매우 부족합니다. ‘난 부모에게서도 버림받은 사람인데 뭐’하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자기를 버린 부모에 대한 미움이 나중에는 자기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결(純潔)개념이 약합니다. 자기를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낙태한 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해 못합니다. 그 임신하고 낙태한 그 아이의 부모는 적어도 자기를 낳아주었지 않습니까? 생명으로 태어나 살아가게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뭡니까? 뱃속에 있는 자기 아기를 죽여 버렸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제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고 원망할 자격이 있나요? 자기는 아예 제 자식을 죽여 버렸는데... 부모는 나에게 생명을 주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해 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공경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적어도 고등학교졸업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잠잘 곳을 주며, 사람을 고용해 ‘엄마’ 라고 부르게 하면서 돌보아주게 하였습니다. 최소한 이상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다 이렇게 복지시설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주 선진국 몇 나라입니다. 중동이나, 남미,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부모가 있는데도 매일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에 비교하면 복을 받아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보다 더 환경적으로 풍부합니다. 감사하자면 감사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녀를 오랫동안 품속에서 기른다는 점입니다. 동물들은 몇 개월만 기르다가 독립을 시켜 떠나보냅니다. 아주 길어야 1~2년 지나면 다 독립합니다. 그때부터는 제 스스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새끼가 어미를 봉양해야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20년에서 30년 동안이나 보호하고 길러 주고 사랑해 줍니다. 한 10년 길러주고 버리면 ‘인간도 아니다’ 는 말을 듣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고생을 하며 살다가 늙어 버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를 위해 늙어 버린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륜(人倫)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인륜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모를 공경하여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륜지 도덕을 외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천륜(天倫)지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명령에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공경은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충격적인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한국 인구 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이 세계 주요 27개국 가운데 (세계에 나라가 많지만 괞찮은 나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주요 27개국이란 정상적이고 괜찮은 나라를 말합니다.) ‘부모의 소득이 높을수록 자녀와 만나는 빈도가 높아지는 1위’ 입니다. 그리고 ‘따로 사는 부모와 만나는 횟수’ 는 일본과 더불어 최하위입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큰돈이 필요할 때 찾는 사람’으로는 52%가 은행이 아니라 ‘가족 및 친척’을 꼽았습니다.
이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자녀가 부모를, 자기가 필요할 때, 돈을 대주는 존재에 불과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세계 주요 27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즉 가족관계가 자발적이고 정서적인 관계가 아니라 의무적, 도구적인 관계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만나는 것 보다는 돈 때문에, 유산 때문에 만나는 비율이 세계최고이며, 열심히 키워준 부모를 찾아가는 비율은 세계최저라는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나라 60대 노년층 10명 가운데 8명은 은퇴 후에도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는 조사도 있습니다. 이는 일본보다 4배 더 많은 수치입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이 손자, 손녀를 보살피고, 가사를 도와주는 등 ‘비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비율역시 세계최고’ 수준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노인이 되어서도 80%정도가 자녀에게 오히려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시 이런 자녀에게 화를 내시나요? 화낼 수 없습니다. 자녀가 가장 원하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돈이 최고다. 오로지 공부다’ 하고 키운 대로,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돈과, 시간과, 열정, 노후계획까지 포기하면서 다 쏟아 붓고, 자기의 노후 계획 도 포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는데도... 나중에 자녀가 부모를 찾아뵙고, 함께 지내는 비율이 전세계에서 제일 낮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게 키운 아이가 효도를 하는 경우도 드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의 두 번 째는 시편 127편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업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짐이 아니라 부모의 기업입니다. 세상의 어떤 기업보다 더 크고 중한 기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나 가게를 기업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요즘은 연금보험이나 퇴직 연금을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가 부모의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의 기업으로 주신 것이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여러분, 또 부모여러분, 자녀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혹시 인생의 황혼에 자식 덕을 볼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분계십니까? 자식 덕을 본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염치가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고 좀 엉뚱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다 잘되는 아주 좋은 복된 기도입니다.
만약에 ‘늙어서 자녀의 덕을 보고 싶다’ 라는 이런 기도가 영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녀를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아니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부모처럼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과도하게 쏟아 붓는 부모가 또 없습니다. 이것은 비유컨대 씨를 심는 일입니다. 자녀가 씨앗입니다. 우리는 이 씨앗이 잘 자라서 정말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바라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 붓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모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기도 하십니까? 자녀가 어떤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나요?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해줄 것 다해주고, 늙어서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는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 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마음 같습니다. 좋은 마음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어서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에게서 받을 것은 다 받고, 부모에게 신경을 꺼시오’ 하는 말이 아닙니까?
정말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자녀들에게 해줄 것 다해주고, 늙어서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는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 는 말은 자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 줄 알지만... 부모에게 힘써 효도하지 않아도 좋다, 부모를 남으로 취급해도 좋다는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정말 ‘부모에게서 받을 것은 다 받고, 부모에게 신경을 꺼는’ 자녀가 되는 것을 기도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자녀가 부모의 기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자녀가 효도할 마음은 있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나이 든 부모를 돌보고 싶어도 돌볼 수 없는 그런 경우가 있고,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이 드신 부모를 전혀 모실 마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둘 다 비극입니다. 특히 자녀가 능력이 되는 데도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의 인생은 철저히 실패한 인생입니다. 헛고생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효도조차도 안하는 아주 못된 자녀를 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를 원하십니까?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하신 말씀은 자녀가 마음도 있고 경제적 능력도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경우가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대하고 기도하는 ‘자식의 덕’은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식 덕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몰라도 경제적으로까지 자식 덕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힘든 일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압니다. 부모 나이 60이면 자녀는 겨우 30정도입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자녀가 대부분입니다. 부모나이 70이면 이제 손자손녀들이 초등학생입니다. 부모가 80이면 이제 손자 손녀가 대학생이거나 빨라야 결혼을 한다 안한다 합니다. 그러니 내 자녀가 얼마나 축복을 많이 받아야 부모가 ‘자녀의 덕’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내 자녀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자녀의 덕을 보면서 산다는 것은 계산이 잘 안 되는 일입니다. 60은 그만두고, 70이 넘고, 80이 되어서도 ‘자녀의 덕’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말은 자녀도 부모도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반드시 필요한 기도입니다. 자녀가 잘되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반드시 그런 자녀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자녀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내가 부모의 기업이 되기를 원합니다. 꼭 그렇게 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자식은 여호와께서 부모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연금이나, 집이나 땅이 부모의 기업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녀가 다 부모의 기업이 되는 축복이 우리교회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자녀들이 다 이 말씀을 붙들고 ‘부모의 기업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어쩌면 좀 심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아무리 열심히 해봐라. 아무리 수고하고 깨어 있어봐라 다 헛일이다. 내가 세워야 되고 내가 지켜줘야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너희가 아무리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까지 수고하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빠서 짜장면으로 때우고 해봐도 다 헛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 편하게 잠을 잘 것이고 잠자는 동안에 내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다.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사화복과 일어나고 넘어지는 것이 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상급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대로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 비성경적입니다. 그리고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십니다. 자녀는 짐이 아니라 부모의 복이며, 원수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모든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다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한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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