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예배에 관한 설교문 모음

by Jessi J 2022. 11. 16.
728x90
반응형

 

 

두 예배자의 예배자세 /18:9-14/ 곽선희 목사

2014-11-20 05:09:24

 

정신위생계에 있어서 세계적인 학자요 혹은 이 방면에 전문가인 데 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 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을 써서 알려지고 또 많은 감명을 주고 있습 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에게 있어 서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정신적 안정입니다. 경제적 안정이 아니고 정치적 안정이 아닙니다. 정신적으 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뭘 하겠 다고 떠드니까 되는 것마다 불안하 고 도대체가 안정이 없습니다.

 

그 런고로 한 인격의 정신적 안정은 자 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 적 안정이 있을 때에 육체도 건강하 고 능력도 발휘하고 그 지혜도, 지 식도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신적 안정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이 네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정신적 요 소가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 라고 말 합니다. 첫째가 일입니다, 워크 (Work). 둘째가 놀이, 플레이 (Play), 셋째가 러브(Love), 사랑입 니다. 넷째가 예배, 워십(Worship)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WPLW 라고 약자로 말합니다. 목 사가 아닙니다. 그는 성직자가 아 닙니다.

 

다만 이 방면에 학자일 뿐 이요 교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 배라고 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이 네 가지 요소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온 전히 위탁하는 그런 예배적 행위, 예배적 정신 자세가 아니면은 인간 은 결코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이올시다. 그래서 예배를 정신안정 의 절대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 말하 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것의 중요한 분야는 자세입니다. 자세 즉, 다시 말하면 일하는 자세가 좋아야 됩니다. 일 할 때에 첫째는 목적이 있어야 되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해야 하고, 두 번째는 즐겨야 합니다. 억지로 일을 하면은 무슨 일을 하든 정신적 안정이 되질 않고 스트레스는 점점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 목적이 선명치 않기 때문이요 의미를 모르 기 때문에 일의 즐거움이 없는 것이 에요. 미래학을 전공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21세기에 성공할 사람 은 바로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 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던 일은 즐겨야 됩니 다. 즐거운 마음이 생겨야 됩니다. 즐거운 마음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것이 정신적으로 안정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신세타령하고, 팔자타 령하고, 남 원망하고, 이래가면서 해 선 안됩니다. 무슨 일을 하던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일을 즐기는 것, 그것이 첫째요, 두 번째는 플레이 (Play)입니다. 놀이라고 하는 겁니 다. 2020년이 되면은, 앞에 될 얘기 입니다 만은, 인구의 7% 밖에는 생 산직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기계와 이런 것들이 발달해서 다 생산을 하게 되고 사람은 그 남 는 힘, 남는 여가가 많아집니다. 요 새도 걸핏하면 어떤 분들이 나 뭐 농촌에 가서 초야에 묻혀 살겠다고. 아 초야는 아무나 하나요? 그거 옛 날 얘기입니다.

 

그 쓸데없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괜히 남의 농사 망 치지 말고……. 다 이제는 기계로 하고 과학적으로 하는 세상이요. 그럼 노는 게 중요합니다. 이제는, 잘 놀아야 됩니다. 놀 줄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가 그만 벌어먹기 힘들 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노는 걸 못 배웠어요. 어쩌다가 며칠 놀려 고 하면 고스톱밖에 못해요.

 

아니 면 그냥 잠만 자려고 들어요. 사람 이 늘어져 가지고 못쓰게 되요. 그 래 기껏 한다는 게 그만 산에 올라 가는 것만 배워 가지고 산을 다 못 쓰게 만들었어요. 그러잖아도 좁은 땅에서 말이야. 이게 왜 이래졌느 냐 놀 줄을 모르는 거예요 지금. 즐길 줄을 몰라요.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혹 운동도 하 고 즐긴다고 합니다 만은 꼭 즐기는 데 있어서 승부욕을 내는 사람이 있 어요. 운동을 해도 승부욕과 경쟁 심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손해 랍니다. 그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 라니까

 

사실인 줄 알아야겠죠. 일 본에서 골프를 치다가 일년에 죽는 사람이 160명이래요 평균. 이게 무 슨 소리입니까? 그냥 즐거운 마음 으로 치는 게 아니고요 이걸 이기려 고 마지막엔 퍼팅 하다가 요러다가 뻑하고 죽는 거야 심장마비로. 이 승부욕이 강해 가지고 이기려고, 그 냥 이기려고

 

……. 좌우간 이건 골 프건 뭐건 간에 문제가 있습니다. 꼭 돈내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돈 안 내면 신바람이 나질 않아요. 꼭 돈을 내야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건 정신병자요 그걸 알아야 합 니다. 그건 아주 위생적으로 나쁜 버릇입니다. 그대로 즐기는 거예요. 이걸 이기려고. 그래 이겨서 뭘 어 쩌자는 겁니까? 아 금메달을 탑니 까?

 

또 타면 또 뭘 합니까? 이 플레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10분만 같이 운동을 해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어요. 정신위생의 건강을 알 아볼 수가 있어요. 그런고로 우리 는 이 즐기는 것, 플레이하는 것, 놀 이, 이 놀이를 아주 여유 있게 또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되 요.

 

또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사 랑입니다.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는 반드시 헌신이 따 르게 되어 있어요. 수고와 헌신, 커 미트먼트(Commitment)가 있어야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사 람은 수고는 없이 사랑만 생각해요. 그건 욕정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그건 집착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수고하고 희생하면서 즐거 운 거예요.

 

자 가족을 위해서 음식 을 만들면서 즐겁고 또 가족을 위해 서 일 하면서 즐겁고. 이것이 있어 야 되는데 요새 사람들은 자기가 낳 은 자식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도 손 해라고 생각해요. 이게 바로 정신 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건강한 사람은 바로 사랑과 수고와 희생 속에서 기쁨을 얻는 거예요. 참 사랑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이 것이 건강한 사람이고요 그리고는 예배올시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야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일과 놀이와 사랑과 예배, 이것이 4박자가 바른 균형을 잡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 안정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안정이야말로 가장 생산적 자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 말씀에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올 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성전에 올라갔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 님과 나와 종말적이고 절대적이고 직선적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 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 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하겠는 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는 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분상으로 보면은 오늘 본문에 이 두 사람은 극단적입니다. 극과 극 입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대조 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 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이건 비유가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상 상해 보십시오. 만일에 이것이 예 수님께서 꾸며낸 만들어낸 비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 한 말씀 하시고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정보에 밝았어요. 아주 관찰력이 높아서 실제로 있는 실제 상황을 예로 들어 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세 인과 이 세리, 두 사람이 실제적으 로 올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 어요. 많은 사람이 다 보았어요 그 리고 이것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 니다. 똑같은 얘기를 하나 다시 한 다면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를 보십시오.

 

여기 불한당 맞은 사 람이 여기 누워 있는데 제사장이 지 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갔는 데 사마리아 사람, 천하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구제했다. 이게 꾸며낸 이야기라면은 예수님은 그 말씀 한 말씀하시고 비난받고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만도 못하게 만들었대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낸 얘기로 될 수 있는 얘기입니까? 뭐 쉽게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 분 이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 가 말하기를 여기에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이 그냥 지나가고 장 로님이 그냥 지나가고 창녀가 도와 주었다. 됩니까? 만들어서 이렇게 말했다면 이게 무사할 수 있는 얘기 입니까? 그래 비유라고 해서 그 비 유가 추상적인 게 아니에요. 실제 상황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이 문제를 놓 고 이 소재를 놓고 변론을 벌이지 못했던 겁니다.

 

보세요 이제 바리 세교인, 이건 거룩함의 극치예요. 유대사람의 윤리를 한마디로 말하라 면 '거룩'이거든요. 거룩한 자 중의 최고가 바리세인이요 가장 낮고 천 히 여기고 아주 죄인의 대명사가 세 리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러면 세리와 바리세인, 극과 극입니다. 두 사람을 대조해서 예수님께서 지 금 말씀하십니다. 바리세 교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는 하지만은 그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될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웃을 보고 자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사 람 앞에 자기 자랑을 하려고 했습니 다. 사람들을 의식하던 나머지 하 나님도 못 보고 자기 진실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 었고요, 그래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이 사람은 자기 집착적인 사람이에 요. 그래서 나라고 하는 말을 강조 합니다.

 

"나는, 나는"

이라고 말합 니다. 우리말에는 두 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은 영어나 원문에 는 세 번 나타납니다. 우리는 대체 로 주어를 빼놓고 동사만 말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는"하고 강조합니다. 나 자신에게 집착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게 아 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동안 예배는 예배될 수가 없었어요. 오늘 넌센스 같은 얘기가 여기에 있 습니다. 보면

"따로 서서"

 

그랬어 요. 따로 서서, 그게 무슨 말입니 까? 내가 저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죠. 옆에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썼어요. 저 사람과 나와 같이 대접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실 때 옆에 누가 앉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쓰 십니까? 그것은 예배의 자세가 아 닙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 앞 에 예배, 함께 예배하고 있고 함께 죄인일 뿐입니다. 그가 무슨 뭐 장 관이든, 뭐 혹은 어디 가서 일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있거나 없 거나, 과거가 높건 낮건 예배는 동 일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이 사람은 '이 사람하고, 저런 사람 하고는 내가 같이 앉을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게 얼마 나 교만한 마음입니까? 언젠가 우 리 장로님 한 분이 제게 싱거운 소 리를 한마디 합디다.

 

어느 날 교회 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옆에 앉 다 보니까 공교롭게 앉았는데 예쁜 아가씨가 앉았더래요. '오늘은 참 은혜가 여러 가지고 많다' 생각을 했대요. 아 향긋한 향수 냄새가 들 어오는데 '아 이거 참, 오늘은 기분 이 좋다' 그랬대요. 또 찬송 부를 때 보니까 목소리를 높여서 부르는 데 '아 음성도 좋구나' 얼굴은 못 보 지만 옆에 앉았으니까 이렇게 했대 요. 그런데 보니까

 

"성경을 몇 장 찾읍시다"하니까 이걸 못 찾더래요. 아 그래 가지고 여기 신약, 구약 막 뒤지더래요. 그래서

"제가 찾아 드 릴까요?"하고 봉사했다고 그러더라 고요. 그래 제가

"그래 예배 잘 드 렸소?"

 

이런 생각하지 말라 그 소리 예요. 옆에 누가 있던 말던 그가 높건 낮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는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한 입장에서 예배드리는 겁니다. 따로 서는 마음, 그거 안되고요 또 너와 나는 다르다 하는 구별의식!

 

이건 참으로 크게 잘못 된 겁니다. 게다 가 오늘 본문에 보니까 멸시했어요.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 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이 된다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 떤 일로도 남을 멸시하는 생각이 있 어서는 안돼요. 그런 구별하는 의 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꼭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 매로 영접하고 꼭 같은 마음으로 있 어야 됩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요새도 보니까 종종 이것이 문제예 요. 가끔 제가 깜짝 놀라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어떤 분이 제게 찾아와서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내 아들과 누구하고가 서로 연애를 한다고 그래요. 내가 알아보니까 그 집 애가 아주 가난하고 어려워 요. 그런데……"

"그런데요?"

 

"아 저가 어떻게 감히 우리 집안을 쳐다 봅니까?"

이렇게 나와요. 가슴이 섬찟해요. 세상에 어찌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 돈 몇 푼 좀 더 있다고 해서 뭐 그렇게 좀 다 른 것처럼 느낍니까? 건방진 소리 요. 여러분 혹시라도 꿈에라도 이 런 생각은 해서는 안돼요. 우리는 다 같이 꼭같을 뿐이지

 

"감히 어떻 게 우리 집안을……"

자기가 뭔데? 무슨 대단한 사람인데? 다 잊어버 리세요. 오로지 하나님 앞에 동등 하게 여기세요.

"나는 특별하다"

이런 생각은,

"우리 집안은 특별 하다."

양반 물 갔어요. 잊어버리 세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주 교만해요.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교 만이요. 교만이란 지적 교만이 있 고 민족적 교만이 있고 사회학적 교 만이 있고 그리고 영적 교만이 있는 데 그 중에 영적 교만이 제일이요.

"나는 잘 믿는다"

"나는 저보다 더 경건하다"

"나는 저보다 더 깨끗하 다"

 

이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 람은 종교 의식을 액세서리처럼 생 각해요.

"나는 금식을 합니다. 나 는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그리고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참 놀라운 일이요. 왜 남하고 비교하 고 남을 왜 정죄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토색, 불의를 행치 않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 이것이 세리들이 범하는 기본적인 죄예요. 그걸 말 하는 거예요. 토색, 불의.

 

"자 이 제 이런 죄를 나는 범치 않고 저 사 람과 같지 않습니다"

이래서 바리세 교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 떤 돈 많은 부자가 돈을 더 벌기 위 해서 어떤 계약을 따내야 되겠는데, 이 계약을 따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 가서 기도합니다.

 

"이 계약이 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간절 히 기도하고 있는데 아 뒤에서 누가 기도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와요. 안 들을려고 해도 조용조용히 자기 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소 리가 들려와서 부득불 듣게 됐어요. 들어보니까 이 분은 뭐라고 기도하 는고 하니

 

"하나님 내게 만원을 주 십시오. 오늘 내가 저 용역 시장에 나가서 좀 일을 맡아서 일을 해서 만원을 벌게 해주십시오. 만원을 벌게 해주십시오."이러고 기도한다 고. 이 부자가 홱 돌아서서 만원짜 리 하나를 주면서

"이보게 여기 만 원 있으니 가지고 가게. 그리고 하 나님이 제발 다른데 신경을 쓰지 아 니하도록 헷갈리지 않게 해주길 바 라네."

 

여러분 이 덕에 만원은 쉽 게 응답 받았습니다 만은 여러분 우 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교해서 내 경건이 더 위에 있다고, 내 문제 가 더 중요하다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되겠습니까?

오늘 세리를 보세요. 세리는 하 나님 앞에 오직 긍휼을 구하고 있을 뿐이요. 돈도 명예도 지식도 아니 요.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 말은 의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바라는 것 뿐 이요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마 음뿐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리새 교인이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는 그 사람 을 미워하지 않고 있어요. 그 사람 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어요. 아 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이런 직분을 가졌습니까?",

 

"나는 왜 이런 직업을 가졌습니까?",

"내 팔자는 왜 이렇습니까?"

원망이 없 어요. 직업을 바꿔 달라는 얘기도 없어요. 오로지

"불쌍히 여겨 주십 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그를 의롭다 하셨다"

이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배는 신실해 야 합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웬만하면은 표를 얻 기 위해서 큰 교회에 나가야 하겠지 만 아니요.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 자기 나가던 교회에 나 가서 23년 동안을 개근하며 아이들 을 가르쳐 왔는데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 히 예배했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 도……. 했더니 기자들이 70명이 몰려왔어요.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 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 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 만 은 다음 주일부터는 다 당신들이 나 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부탁 했답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먼저예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 배함이 없이는 내 삶은 의미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그 모든 사업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과 나와의 바 른 관계 이것이 문제니까요.

 

바른 예배의 자세에서 바른 삶의 자세가 유출되는 것이고 생산되는 것이고 결정되는 것이에요. 의롭다 함을 얻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 인하고 새로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새로운 의미의 삶을 살 수 있고 새로운 창조적 역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바른 예배의 자 세, 여기에 우리의 삶의 기본이 있 는 것이올시다.

 

 

예배자로 부름받은 은혜 /105:1-45/ 유기성목사

2018-04-06 04:17:08

 

105: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7 그가 바로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8 그는,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그가 허락하신 약속이 자손 수천 대에 이루어지도록 기억하신다. 9 그것은 곧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요, 이삭에게 하신 맹세요, 10 야곱에게 세워 주신 율례요, 이스라엘에게 지켜 주실 영원한 언약이다. 11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물려줄 기업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 때에 너희의 수효가 극히 적었고, 그 땅에서 나그네로 있었으며, 13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 백성에게로, 떠돌아다녔다. 14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도 너희를 억누르지 못하게 하셨고, 너희를 두고 왕들에게 경고하시기를, 15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사람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예언자들을 해치지 말아라" 하셨다. 16 그 뒤에 주님께서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시고, 온갖 먹거리를 끊어 버리셨다. 17 그런데 주님은 그들보다 앞서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그는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18 사람들은 그 발에 차꼬를 채우고, 그 목에는 쇠칼을 씌웠다. 19 마침내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진실을 증명해 주었다. 20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하였다.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고, 21 그를 세워서 나라의 살림을 보살피는 재상으로 삼아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하며, 22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게 하며, 원로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게 하였다. 23 그 때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내려갔고, 야곱은 함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24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불어나게 하셔서 그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자기의 종들을 교묘하게 속이게 하셨다.

 

26 그러므로 그가 종 모세와 택하신 아론을 보내셔서, 27 백성에게 그의 표징을 보이게 하시고 함의 땅에서 기사를 행하게 하셨다. 28 그가 어둠을 보내셔서 캄캄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29 그가 물을 모두 피로 변하게 하셔서 물고기를 죽게 하셨으며, 30 땅에는 온통 개구리가 득실거리게 하셔서 왕실 안방까지 우글거리게 하셨다. 31 그가 말씀하시니, 파리 떼와 이가 몰려와서, 그들이 사는 온 땅을 덮쳤다. 32 비를 기다릴 때에 우박을 내리셨고, 그 땅에 화염을 보내셨다. 33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고, 그들이 사는 지경 안의 나무를 꺾으셨다. 34 그가 말씀하시니, 이런 메뚜기 저런 메뚜기 할 것 없이 수없이 몰려와서, 35 온갖 풀을 갉아먹고 땅에서 나는 모든 열매를 먹어 치웠다.

 

36 그가 또 모든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장남을 모두 치셨다. 37 그들로 은과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가운데서 비틀거리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38 이집트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떠날 때 기뻐하였다. 39 그는 구름을 펼치셔서 덮개로 삼으시고, 불로 밤길을 밝혀 주셨다. 40 그들이 먹거리를 찾을 때에, 그가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시며, 하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주셨다. 41 반석을 갈라서 물이 흐르게 하셨고, 마른 땅에 강물이 흐르게 하셨다.

 

42 이것은 그가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하신 말씀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43 그는 그의 백성을 흥겹게 나오게 하시며 그가 뽑으신 백성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나오게 하셨다. 44 그들에게 여러 나라의 땅을 주셔서, 여러 민족이 애써서 일군 땅을 물려받게 하셨다.

45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의 관심은 설교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도 설교가 아니고 오직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엄청난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를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105: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저는 오랫동안 예배가 좋은 줄, 예배가 기쁜 줄 몰랐습니다.

예배가 복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배는 언제나 의무요, 부담이었고 때로는 예배가 싫었습니다.

그것은 그 때까지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고 믿었지만 제게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고 너무 먼 당신이고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배가 기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가 기쁘고 복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예배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라고 말합니다.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예배자는 주님을 찾는 자이고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예배가 지겨운 분이 있을 것입니다. 속히 예배의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기쁨의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이제부터 예배 순서를 따라 예배드리고, 찬양하면 찬양인도자를 보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듣고 찬양대를 바라보고, 설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 예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가지고도 예배가 달라집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모든 순간,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간증을 듣고 설교를 듣는 중에 무슨 생각이 떠오를 수 있고,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위로가 느껴질 수도 있고, 깨끗해진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메말라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도 자꾸 싸웁니다. 그것은 형편이 어렵고 살기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동안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교인들에게 목사로서 무언가, 즐거움과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설교를 준비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배 때 정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8:9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지금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44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후손에게 기업으로 물려줄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신실하게 지켜주셨고, 극심한 가뭄 중에 요셉을 통하여 애굽으로 피할 길을 여셨고, 애굽 왕 바로로부터 억압을 당하자 모세와 아론을 세워 출애굽하게 하셨고, 광야에서 구름 덮개와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을 갈라 물이 나오게 하셨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막연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부목사 시절, 구파발에서 압구정동까지 맨발로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온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교회가지 못하게 신발을 감추고 대문을 잠궜는데, 담을 넘어 온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예배하려는 열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 토론토 코스타 마지막 날 간증했던 청년, 11살 때,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때 너무 좋았답니다. 무엇이 좋았느냐 하면 나도 의지할 분이 생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11살 아이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의지할 분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백성들이 기쁨에 넘쳐 예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43 그는 그의 백성을 흥겹게 나오게 하시며 그가 뽑으신 백성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나오게 하셨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 영혼이 살아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5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예배한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밉상인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일은 도외시하고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배만 드리면 다냐?’ 하고 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삶이 변화됩니다.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머리며, 옷이며 얼마나 신경 쓰셨습니까?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외모보다 마음을 단장합니다. 예배드려야 하기에 다툰 사람과 화해합니다.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것이 진정 예배드리는 마음입니다. 예배드려야 하겠기에 분노하는 마음과 염려, 탐심과 거짓, 은밀한 죄 된 마음을 품은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삶이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고 직장에서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운전 습관이 바뀌고 식습관도 바뀝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굳이 말로 전도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가장 큰 변화는 예배였습니다.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구절에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이 예배할 때, 얼마나 기쁨이 넘쳤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변화는 예배만이 아니었습니다. 삶이 너무나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2:44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가 살다 보면 반드시 지치고 힘들 때가 옵니다. 교회 봉사도 어느 순간 지칠 때가 옵니다. 그래서 참 예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으면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갈 힘과 사명을 감당할 힘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죽으면 안 됩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면 큰일입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주님의 얼굴을 찾으며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식을 하는데, 성찬식이야말로 예배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한 몸이 되셨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정말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비록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겠지만 주님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약속을 더 이상 말로 하지 않으시고 성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한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야단치고 달래고 설득해도 학교를 가지 않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한 랍비가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랍비는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한참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를 품에서 물어주었습니다. 그 침묵의 포옹이 그 아이를 변화시켰습니다. 스스로 학교에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말만으로는 충분히 의사전달이 되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없는 행동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인 사이의 입맞춤이 그와 같습니다. 입맞춤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찬은 예수님과의 포옹이며 거룩한 입맞춤입니다. 하나 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토론토 큰빛교회 집회 중 주일 예배를 마치고 임현수 목사님과 함께 서서 교인들과 인사를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임현수 목사님과 인사하기 위하여 줄을 섰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몰려서 목사님 옆에 서서 인사를 계속 받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 때 임현수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고난이 면류관인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임현수 목사님이 26개월 고난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비밀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북한에서 억류 중일 때, 혼자 130주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슨 은혜로운 설교나 찬양이 있었겠습니까? 24시간 감시 카메라 앞에서 무슨 예배가 가능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도 예배드림으로 영혼이 소생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admin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 /2:42-47/ 유기성 목사

2016-08-27 10:50:09

 

우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주일 설교 때마다 은혜 받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사랑 기도의 밤이 있는 주일이기에 예배와 교회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본문은 성령이 임하여 생겨난 초대교회에 대하여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우리는 교회는 생길 때부터 예배하는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는 예배를 의미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임하였을 때, 그들을 예배하도록 교회로 모이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예배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존 맥아더목사는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하여 구원받았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반드시 지치고 힘들 때가 오게 됩니다. 교회 봉사도 예배 안내 위원으로 시작하여 속장, 선교회장, 교회학교 교사, 찬양대원, 각 위원회, 일대일 양육, 제자훈련, 노방전도, 선교 훈련을 하지만 어느 순간 지칠 때가 오곤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공급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갈 힘과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무서운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단의 미혹도 있었고, 온갖 시험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계속 하나님과의 만났기에, 또 그런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었기에 그들은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예배가 어느 정도 은혜로웠는지, :44-45에 나옵니다.

 

:44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여러분, 이런 일이 상상이 되십니까?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그들이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그렇게 만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시끄럽다고 싫어합니다. 뭐가 시끄러운 것입니까? 예배드리는 것이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예배드리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배드리고 교인들이 너무나 놀랍게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게 진정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계속해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34:29-30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십계명을 받아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비취었다고 했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서 모세를 쳐다 볼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얼마나 기뻤는지 하나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아내에게 멸시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한 제사장이었으나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영안이 열리자 입술을 부여잡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며 나뒹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죄라도 회개하고 정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나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못하면 큰 일 납니다. 죽고 난 다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비로소 발견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계 6:15-16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6:15 ...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무나 빛이 강렬하여 말에서 꼬꾸라지고 며칠 동안 눈이 멀었습니다. 그는 육의 눈이 멀었지만 영안이 열려 살았습니다. 박해자가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실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모세처럼 얼굴에 광채가 비취고 다윗처럼 기뻐서 춤을 추고 이사야나 사도 바울처럼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소유욕도 다 사라지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예배, 이것이 우리 예배의 기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귀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4:4에 보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4:6-7에서 자신들 안에 계신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예배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는 예배를 형식만 거창하게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과 전쟁 할 때, 하나님께서 아멜렉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하였는데도, 아각 왕과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가지고 와서, 아각 왕은 백성들 보는 앞에서 죽이고 소와 양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물로 삼았습니다. 사무엘은 제물만 많이 바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울 왕에게 무서운 말씀을 하였습니다.

 

삼상 15:22-24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 때 사울은 사무엘을 붙잡고 무서운 청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을지라도 제발 자신을 높여 달라, 자기와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척이라고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여러분, 이런 태도가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바로 사울 왕과 같은 영적 함정에 빠져 있지 않은가 두렵습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할 때, ‘예배에 목숨을 걸라’, ‘예배 하나 잘 드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예배 순서를 잘 짜야 한다. 예배당을 잘 지어야 한다. 예배당 인테리어를 잘 해야 한다. 악기나 음향 장비는 최고로 준비해야 한다. 찬양대를 잘 조직하고 무엇보다 설교 잘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예배를 모를 때였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예배를 잘 드리기로 유명한 교회가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많은 목회자들이 구경을 가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지난 32년 사역을 되돌아보고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산을 많이 들여 예배는 멋있게 은혜롭게 드렸고,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을 가르쳤지만, 교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사랑하고 있는가? 교인들이 진정 주님과 동행하는가? 하는 물음에 자신 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배 잘 드리는 것은 예배 순서나, 예배당 건물이나 음향설비나, 설교나 찬양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영적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지만, 하나님의 영을 사람 안에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주의 영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지상에는 성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임시로 인간들을 만나주는 성막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우상을 섬기면서 성막에 있는 법궤를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성막시대도 사라집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소원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전을 우상화하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전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저들은 성전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고 헤롯왕이 성전을 증축하였지만, 그 성전 속에 하나님의 영광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타락의 성전에 예수님께서 가셔서 채찍을 들어 상을 뒤엎으시고 무리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으로서 친히 하나님을 보여주는 성전이었고, 살아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고전 3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여 계신 성전임을 명심하면 당연히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2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교회가 교인들에게 무언가, 즐거움과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가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불평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무슨 힘으로 교인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고 격려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도 없고 교인들도 만족하지 못하여 지칠 뿐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성전 된 자로 만드신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 성전으로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합된 한 성전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세워져 가느니라.”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하여 실망하고 교회에 대한 마음이 떠나 있습니다. “나 혼자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되지!” 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가 없이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혼자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성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말씀을 전달받을 수 있고, 어떻게 신앙양육을 받을 수 있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찬송을 부르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많아도 교회는 예배를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몸이 암에 걸렸다면 죽도록 내버려야 합니까? 암은 고치되 몸은 살리지 않습니까?

 

문제 가정이 많다고 가정을 없애자고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교회가 그와 같습니다. 교회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회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도록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죄와 거짓이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5장에 보면 초대교회에 큰 시험이 생겼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으로 헌금한 사건이 터집니다. 탐심이 생기니 하나님을 바로 보는 눈이 가리어져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 때 무서운 징계가 임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교회는 보이지 않지만 보시는 하나님을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6장에서는 구제문제로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성전으로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교회 안에서 분열하고 싸울 수 없습니다.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불만이 있던 헬라파 교인들을 집사로 세워 구제를 맡겨 버립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배를 바로 드리는 교회가 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고 싸우는 데도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없다면 철저히 교회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실패했던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애통하며 기도했던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킬 뿐 아니라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저 은혜로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짐을 지고 있으니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가 고통스러워하는 문제들을 거의 다 가졌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졌던 대부분의 교회는 무너졌지만 우리 교회는 기적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오히려 더욱 부흥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다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늘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일이 있어서 교회를 살려주셨다는 것과 교회에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을 때, 끝까지 교회를 지켜내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원통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교회를 버릴 수도 없는 그 마음, 그래서 울면서 기도만 할 뿐이었고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가 부임할 당시 주일 출석인원은 600명 정도였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얼마나 적은 인원이 큰 짐을 졌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지금의 교회가 선 것입니다. 그들이 겪은 어려움이 말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주님 앞에 설 때 기뻐서 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쓰시는 것은 우리 교회가 죽음을 통과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다신 산 교회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직면할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체험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전하기에 딱 맞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아름다운 예배당이 아니라, 황량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그 모습이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우리 교회의 진정한 은혜가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명심하면 교회가 살겠지만 잊어버리면 우리는 무너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해다가 해방된 것을 영원히 자랑합니다. 매년 유월절 절기를 지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세웁시다. 모세처럼 얼굴에 광채가 비취고 다윗처럼 기뻐서 춤을 추고 이사야나 사도 바울처럼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소유욕도 다 사라지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예배를 드려야 우리가 삽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지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단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저절로 이런 은혜가 주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교회를 지키고 사랑하는 일에 힘을 보태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교만하고 자랑하고 나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교회를 다시 살려주시고 세워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교회를 함께 세우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admin

 

 

예배 /2:46-49,18:19-20/ 이동원목사

2014-12-04 16:16:20

 

요즈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머 가운데 웨이터의 만행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죄수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너무 심심해서 감방에 돌아다니는 개미를 잡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개미에게 차려 동작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개미는 이 사람이 차려하면 아주 멋진 폼으로 차려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출옥하면서 그는 이 훈련된 개미를 가지고 출소했다고 합니다.

 

자기 애인을 만나자 마자 그는 그가 감옥에서 훈련시킨 개미의 묘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개미의 차려 동작이었습니다. 애인은 너무 재미있어 하며 그가 정말 수고했다고 축하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애인의 격려에 고무된 그는 애인과 함께 어느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자기의 묘기를 식당 웨이터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개미를 식탁위에 올려놓고

 

어이 웨이터, 이 개미 좀 봐!” 하자마자, 웨이터는 손님 죄송합니다.”하더니 잽싸게 엄지 손 가락으로 이 개미를 눌러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웨이터의 만행의 전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이런 웨이터의 만행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생각하고 대답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기본 동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군인들의 제식훈련에서 차려 자세는 모든 동작의 기본동작,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 동작인 차려 자세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자세가 흔들리게 됩니다. 성도의 기본 동작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배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네 신앙생활 전반의 자세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편의 주의적 발상, 자기중심적 사고는 오늘 예배의 기본 동작을 아예 취하지도 못하도록 만드는 예배의 영성을 죽이는 만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의 전통은 이미 흔들려 버린 지 오래 되었고, 그나마 주일에 한번 드리는 공 예배조차 제대도 시간을 지키지 않고 5-10분 늦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적당히 한 40-50분을 때우다가 축도 전에 교회당을 빠져나가면서 그래도 예배는 드렸다고 자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이것이 예배를 죽이는 오늘의 성도의 만행이라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그분의 모본, 그분의 교훈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예배의 레슨은 무엇일까요?

 

1. 예배의 습관은 우리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누가 복음에 보면 소년 예수님이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을 맞이하여 그 부모인 요셉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의 명절을 잘 마치고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떠날 무렵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행방이 모연해진 것입니다. 처음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친척들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없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12살의 소년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부모된 입장에서 근심이 안 되었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교외 시골 마을의 거리마다 골짝마다 뒤졌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시내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이번에는 시내의 골목 골목을 뒤지며 12살 소년이 있음직한 곳을 뒤집니다.

 

오락실, 게임방, PC, 볼링장을 다 뒤졌지만 여전히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찾고 또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 맞습니다. 성전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본문 48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찾았노라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이때 예수님은 불과 12살의 소년이었습니다. 4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경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놀라움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 입니다. 이것은 그 때까지 유대 문화에서 결코 익숙하지 못한 표현이었습니다.

 

구약 39권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기한 것은 불과 14회 정도이고 이것도 문서상의 표기일 뿐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불과 12살난 소년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신약학자인 데럴 보크(Darrell Bock)는 여기 이 대목 이 구절에서 사용된 희랍어 단어‘dei’(it is necessary)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단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필요한 우선순위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의미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이 큰 성전이든 아니면 작은 회당이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은 모두 그분의 아버지의 집이었고, 그 아버지의 집에 그가 삶의 중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게 그분의 우선순위적 습관이요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전의 빌딩이 특별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어디에나 게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무소부재하시다 혹은 편재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또한 특별하게 어떤 장소를 구별하시어 그곳에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집중적으로 계시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성전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이고 신악에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예배의 장에서 구약에서처럼 아버지의 특별한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7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보며 예수님에게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다고 증거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예배의 열심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아버지의 집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안고 매 주일 예배의 장으로 나아오는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까?

 

혹시 이 습관을 다른 어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빈번하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으십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그를 예배하는 일- 이 일이 우리의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우선 순위의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예배는 성도의 기본 동작입니다. 이 기본자세가 흔들리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 예배의 목적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18:20은 두 세사람 성도의 모인 곳에 주께서 그들 중에 계실 것을 약속합니다.

 

주경학자 프레데릭 브룬너(Frederick Dale Bruner)는 여기서 두 세 사람은 신약 교회의 성도의 공 예배가 성립하는 최소단위라고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공 예배의 최소 단위를 장년 남자 10명이라고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의 거듭난 성도만 있어도 예배는 성립할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할 목적으로 모인다면 주께서 그들 가운데 당신이 임재 할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부르너 교수는 이 본문을 좀 더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거기에 임재할 것을 미래형으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형이라고 지적합니다.

 

영어로 표현해 보면 “I will be in their midst” 가 아니라 “I am in their midst"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몇 사람이 모였던 진지한 예배가 진행되는 곳에 예수님은 이미 " I am"으로 임재하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고귀한 특권입니까? 우리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리를 자기 목숨까지 드려 사랑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 이미 여기에 와 계신 그분을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예배는 그분과의 만남에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속에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의 가사의 주제이신 주님을 찬양하며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며 우리의 헌물을 받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유일한 초점이신 예수님을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그럼으로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전심으로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그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말씀속에 그분의 음성을 기울여 들으십시오.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집중입니다.

 

집중은 영어로 ‘concentr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concenter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함께’ ‘중심으로나아간다는 말입니다. 함께 우리의 예배 그 한복판에 영으로 임재하시는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요 예배의 목적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예배의 목적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이며 그런 예배의 성공은 집중입니다.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집중하여 찬양하고 집중하여 기도하고 계십니까?

 

3. 예배의 축복은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의 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없는 거룩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체험이 아닙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던 순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스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새롭게 보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예배의 축복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

 

본문 마태 18장의 교훈도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두 세 사람의 예배와 기도의 교훈은 사실상 마태18:15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15절 이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교회 안에서 다루는 문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풀리면 하늘에서 풀리고 이런 것들이 해결 안되면(매인바 되면)우리의 기도도 예배도 응답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교정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변화되고 예배할 때마다 성숙하고 예배할 때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입니다.

 

가장 단순한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닮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바라보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닮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작가인 나타나엘 호손의 명저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어느 평화로운 시골 마을 산마루에 보기만 해도 준엄하고 자애로운 큰 바위 얼굴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이 얼굴을 닮은 주인공이 그 마을에서 나오리라는 오래된 전설같은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출현을 기다립니다. 처음에 게더 골드(황금을 모으는 자)라는 상인 부자가 등장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그는 불쌍한 이들에게 동전 몇푼을 던져줄 뿐이고 끝내는 재산을 탕진합니다.

 

그 후에 피와 천둥의 노인이란 별명의 장군이 등장합니다. 그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다려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올드스토니 피츠라는 정치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언변에 능했지만 역시 마을이 기다려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매혹을 느꼈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가 그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전설의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실망한 마을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그 마을 출신의 어니스트를 향해 시인이 소리칩니다.

 

어니스트다! 어니스트야. 보라 그가 닮았다--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기다려온 사람은 그들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늘 그 바위를 보고 살았습니다.

 

그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그 바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았습니다. 그 바위가 그의 안식이었고 위로였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위를 닮아갔던 것입니다.

 

만일 예배가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된다면 인생의 아침에도 그를 바라보고 인생의 황혼에도 그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도 그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도 그를 바라보고 산다면 무슨 일어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그를 닮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예배를 거룩한 습관으로 삼는 일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

 

예배의 영광 /4:1-4, 4:10-11/ 이동원목사

2014-12-05 04:19:46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뉴욕의 큰 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하게되자 그 교회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 직전에 갑작스런 질병으로 못 오게 되자 헨리 워드 비쳐는 교회와 의논하여 그의 동생인 토마스 비쳐(Thomas Beecher)를 대신 주일 설교자로 급작스럽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 헨리 워드 비쳐가 올 것을 기대한 이 교회는 초 만원 사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설교 순서가 되어 담임 목사가 사정을 설명하고 토마스 비쳐를 소개하자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며 여러 교인들이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을 보자 토마스 비쳐는 이런 유명한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의 형님이 갑작스런 병환으로 오늘 이 예배에 못 오게 됨을 제가 대신 사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특별한 광고를 드리고 말씀을 증거할까 합니다.

지금 예배 중간에 일어나시고 있는 분들 말고 혹시 또 헨리 워드 비쳐를 예배하기 위하여 오신 다른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다 퇴장(excuse)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헨리 워드 비쳐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장내는 조용해 졌고 그 날의 예배에는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예배는 무엇이며 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공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까?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구하고자 합니다. 본문 계시록 4장과 5장은 하늘나라의 커텐을 잠간 열고 하늘나라에서 진행되는 예배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영광을 접할수 있습니다. A.W. 토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실패는 예배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예배의 정의를 통해 예배의 영광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예배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제가 다른 교회의 집회의 인도하는 동안 어느 평신도가 자신의 교회 예배에 대한 불만을 고백하며 던진 한마디 말이 잊어 버려지지 많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배할 때 하늘 문이 열려 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의 천상 예배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계1:10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전도하다가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만 주일에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엎드렸을때의 일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같은 음성을 들으니" 그리고 다시 본문 4:1을 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본문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예배의 갈망을 지닌 사도 요한이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주님앞에 엎드렸습니다.(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던 굴이 밧모섬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나팔소리 같은(자장가가 아니라) 주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4:1에 의하면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4:2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하늘의 보좌를 보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봅니다. 저는 한마디로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예배자의 행복을 어린아기가 엄마의 풍성한 젖꼭지를 물고 행복에 잠긴 것에 비유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임재를 확인하고 엄마에 의해 자신의 필요가 공급되면서 만족해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표정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배를 갈망하는 마음,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자세,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는 마음은 예배자의 필수덕목입니다.

 

본문이 예배자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본문 직전의 계3:22이야 말로 참된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풍성한 임재를 체험하며 그의 말씀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녹아내리는 행복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행복을 주일마다 아니 모든 예배의 순간마다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는 엎드림인 것입니다.

 

저는 예배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바로 가치라는 단어라고 믿습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근은 worth 곧 가치인 것입니다.

 

4:10-11을 보십시오. 여기 신 구약시대의 예배자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여기서 '합당하오니'라는 말은 영어로는 'worthy''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받으실만한 가치가 있으십니까? 11절을 계속 보시면 그가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창조의 엄청난 신비를 묵상하며 그 앞에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학으로도 아직 그 지극히 적은 일부분밖에 탐구못한 창조의 경외감이야 말로 우리가 그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과학과 예배는 동일하게 창조에 대한 놀라움으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5장으로 넘어가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구속자이신 성자 하나님에게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5:8을 보십시오. "책을 취하시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누구 앞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양--예수님" 왜 그랬을까요?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여기도 '합당하도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는 예배 받을 가치가 충분하십니다.

 

왜요? 그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 위해 죽임을 당하신 까닭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당신을 위해 대신 죽으실 분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사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속죄의 신비, 구속의 신비를 인하여 지금 요한은 엎드려 성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때문입니다. 이 창조의 신비와 속죄의 신비를 인하여 요한은 주께 엎드려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10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은 예배하며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 주께 드립니다. 오직 그분만이 예배받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에는 언제나 드림의 정신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찬양을 드리고--기도를 드리고--사랑을 드리고--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셋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게 하는 특권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여기 이십사 장로들은 신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예배자 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12지파가 등장합니다. 신약에는 12제자가 등장합니다. 12+12=24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본문에는 두가지 두드러진 특성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고 금 면류관을 썼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흰옷을 가르쳐 거룩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금 면류관은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가지 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품성 혹은 속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십니다. 그런데 왜 이십사 장로들이 이 두가지 품성을 가진자로 등장합니까? 그들은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해지고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의롭게 되면 이제 우리에게는 두가지 신학적인 혹은 신앙적인 과제가 남아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성화(sanctification)이며 또 하나는 영화(glorification)의 과제라고 가르칩니다. 여기 본문의 24장로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성화의 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화의 완성의 상태가 바로 영화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24장로에게 가능했을까요?

 

그들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라보는 대상을 닮습니다. 부부가 서로 닮은 이유, 자녀가 부모를 닮는 이유-서로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닮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느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주 앞에 설 때 주께서 얼마나 우리를 인해 기뻐하실까요? 거룩해 질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몸부림이 거룩을 실현해 내지 못합니다. 단순하고 진지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그때 우리는 우리 영혼속에 각인된 거룩함과 영화로움으로 주 앞에 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영광입니다.

 

넷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하는 축복입니다.

 

5:14에서 천상 예배가 마무리됩니다. 예배는 아-멘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배가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4-5장에서 사도 요한은 천상의 예배를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6장에서 요한은 다시 지상의 광경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 하나의 인봉이 열리면서 전쟁, 기근, 질병으로 가득찬 세상이 보여집니다. 이런 계시록의 구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예배와 관련하여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아갈 세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7:17의 말씀을 우리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여기 방금전까지 보좌에서 예배를 받으시던 어린양이 이제 목자가 되사 거친 새상 길을 걷는 우리 곁에 계시사 우리 눈물을 씻어 주시고 우리를 생명수 샘물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예배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찬양과 기도를 받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당신을 예배한 사람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이제는 목자로서 우리 앞에 계시사 우리를 이끌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난후 우리 손을 잡고 그는 이제 문제와 갈등이 있는 우리 가정, 직장, 우리 사업의 장, 그리고 우리 고단한 세상 광야를 함께 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얘배의 축복이요 예배의 영광인 것입니다.

 

세계 제이차 대전이 발발 했을 때 대 영제국의 국민들은 깊은 절망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전쟁에는 승산이 없어 보였고 나치 독일의 점령은 시간 문제로 예측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대 영제국의 지도부는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영국이 독일을 대항하여 개전을 선언하면서 유명한 윈스톤 쳐칠경은 당시 성공회의 존경받는 주교이었던 윌리암 템플에게 대 국민 연설을 부탁합니다.

 

같은 날 대국민 메시지를 하면서 윌리암 템플은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고 합니다."대 영국 제국의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전쟁은 큰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더 큰 일입니다.

 

만일 우리 국민이 이와 같은때에 진정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을수가 있다면 전쟁은 결코 큰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히 우리가 예배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을 승리할 것입니다."

 

그 이틑날 주일 영국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렸고 교회마다 예배하는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대 영제국은 치열한 전선에서 버티고 견디어냈고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예배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주일마다 아니 얘배의 모든 순간 순간마다 한 평생 이런 예배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4:19-26/ 김기석 목사

2020-06-10 10:21:53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길고 긴 격절의 시간을 건너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싸안고 정을 나누진 못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신경림 선생은 파장罷場이라는 시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으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지금부터 50년 전의 풍경이긴 합니다만 왠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0주 동안 영상예배를 인도하면서 제 마음에 늘 떠올리던 광경이 있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다니엘입니다. 그는 왕 이외의 신들에게 간구하는 자들을 사자굴에 던지겠다는 왕의 지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가정에서 화면을 열어 드리는 예배를 다니엘의 기도와 연결시키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비감스러웠습니다.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137:1)고 고백했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의 처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 서둘러 교회 오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게 집에서 예배드리니 좋기만 하더구만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어느 해외 신문 만평은 격리생활에 익숙해진 아무개 여사가 모처럼 예배당에 참석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푹신한 슬리퍼를 신은 그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머리에는 그립을 말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예배당에 들어서다가 아차싶은지 당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그런 분이 안 보여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독일말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Gottesdienst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뜻의 ‘Gott’섬기다라는 뜻의 ‘dienen‘이 결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라는 말일 겁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님은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향성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가 이해하는 고테스딘스트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Gott)이 일하신다(dienen)는 뜻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적 예배란 은총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출발하여, 인간이 그 은총에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하는 상호 소통의 과정”(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 있는 사람, 2017, p.89에 나오는 역자 주35)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자 선물입니다. 물론 온전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는 장단에 우리가 더쿵하고 반응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때의 문제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마을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당하며 살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마주침과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열린 사마리아 선교의 가능성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아무도 우물을 찾지 않는 정오 무렵 여인은 홀로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늘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아도 우리 삶도 그런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통해 변전을 거듭합니다.

 

늘 헛헛함에 시달렸던 그 여인은 예수를 만나 가슴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인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범상한 분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메시야라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탐색의 과정 가운데 여인이 주님께 여쭙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4:20)

 

여기서 말하는 이 산은 요단강 서안 나블루스 지역에 있는 그리심산을 가리킵니다. 해발 800미터 쯤 되는 산으로 에발산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 두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이 지역은 또 야곱에 대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인 베델과 세겜에서 가까웠습니다. 베델은 야곱이 형을 피해 달아날 때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세겜은 근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정착생활을 했던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성전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문화적·종교적 관습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바른 예배 장소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장소를 묻는 질문에 주님은 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4:21)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입니다.

 

때를 나타내는 헬라어 호라hora는 자연법에 따른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결정적 시간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마음과 만나는 그 결정적 시간이야말로 예배의 순간입니다. ‘예배하다는 뜻의 프로스키네오proskyneo누구의 손에 입을 맞추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거룩함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털썩 무릎 꿇다

나찌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종전과 더불어 석방된 오스트리아 의사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한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에 벌어진 일을 들려줍니다.

 

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종달새가 푸드득하니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주위 몇 마일 안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갑자기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있다면 내 마음 속에 울려나오는 한마디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저에게 응답을 하셨나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또 그와 같은 한 마디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이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옮김, 청아출판사, 2001, p.149-150)

 

정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그는 호젓한 들판을 홀로 걸었습니다. 몇 년 동안은 꿈에도 생각해볼 수 없었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의 먹장구름이 걷히자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은 그리도 슬프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자연은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득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무릎을 털썩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비좁은 수용소에서 바쳤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것만 같았던 하나님이 그를 감싸 안고 계셨고, 그의 든든한 설 땅이 되어 주셨음을 자각하는 순간, 뭔가 신령하고 압도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체험 이후 그는 고단한 현실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털어내며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에 오를 힘 말입니다. 예배의 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조장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이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체험이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은 여인에게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4:23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번역은 이것을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배를 드리는 이가 가져야 할 진실하고 애틋한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이 본문에 대한 오해에 불과합니다. ‘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은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셨던 생수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과 접속시켜줍니다. 그 마음에 감득된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어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참된 이치를 뜻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 욕망을 내려놓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배를 잘 기획하고, 각본에 따라 정밀하게 수행하는 것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는 잘 준비되어야 하지만 본과 말을 뒤집으면 안 됩니다. 모처럼 현장에서 속개되는 이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끼리 즐겁고 반가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예배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말귀를 알아들었을까요? 아직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인은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아직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메시아의 현실은 저 먼데 어디 있는 것이지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즉각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입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는 구체적 삶의 자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성화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의 어둠을 밝힌다(一燈可破千年暗)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이러스는 소리 없이 퍼져나가 우리 삶을 제약하지만, 우리의 선한 뜻과 의지가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퍼져나가 세상 구석구석을 채울 때 삶이 아름다워질 겁니다. 주님이 앞서 가시니 우리가 뒤따라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의 우리 삶이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1:1-9/ 김기석목사

2015-07-11 16:52:33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 가운데서 짐승을 잡아서 나 주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라.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여라.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지피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고기 저민 것과 그 머리와 기름기를 제단에서 불타는 장작 위에 벌여 놓아야 한다.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이것이 번제인데, 이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바치는 제사이다."]

 

 

멈춤과 나아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봉헌주일예배를 겸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올 한 해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내적 목표를 두 가지로 정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교우들이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태도를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예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어로 예배禮拜를 뜻하는 단어는 '샤하' 혹은 '아보다'입니다. 샤하는 '엎드려 절하다', '굴복하다'는 뜻이고, 아보다는 '봉사, 섬김'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과 헌신이야말로 예배의 두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능동적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근각처에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기대와 설렘을 안고 온 이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으로 나온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대목은 주님의 영광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 광경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난 그곳은 모세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40:35).

 

그 거룩하고 장엄한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유한함과 죄성을 절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다가오는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3:5)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은 몸과 마음에 배어 든 삶의 습속이나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든지, 어떠한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 욕망대로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조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후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6:5)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레위기의 첫 대목이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입니다.

 

자칫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배조차 우리의 공적일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도적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고 가르쳤던 요한의 교훈과도 일치됩니다(요일4:10).

 

예물을 바친다는 것

 

레위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제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제사를 예배 의식으로 대체한 우리들로서는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재미도 없고 알쏭달쏭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성경을 통독하던 이들도 레위기의 제사 규정에 이르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곤 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한 규정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가끔은 그 대목을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해도 건너뛰면 안 됩니다. 때로는 건너뛰고 싶은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예물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물이나 제물을 바치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칠 예물 혹은 제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코르반'(qorban) 입니다. 코르반은 '가까움' 혹은 '사이가 가까움을 나타내는 물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친근함을 회복한다는 표지인 셈입니다. 그런데 코르반의 명사형 어근인 케렙(qereb)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이 말이 지정의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행위는 자신의 심장과 창자를 바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멀뚱멀뚱, 혼곤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번제燔祭(holocaust)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불에 살라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에 사용되는 제물은 소나 양 가운데서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번제를 드려려는 사람은 제물을 이끌고 회막 어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습니다. 자기 죄를 제물에게 전가한다는 상징행위입니다. 손을 얹으며 봉헌자는 빠르게 자기 삶을 돌아볼 것입니다.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잊고 있었던 자기의 허물과 죄가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입니다. ',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얹는 의례가 끝난 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을 직접 잡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잡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대행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물의 숨을 거둔다는 것, 어질고 착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가축을 잡는다는 것, 그것도 나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쓴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참 아찔한 일이었을 겁니다.

 

바다 낚시를 해서 건져올린 물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가미 부분을 칼로 찔러 피를 빼야 하는 데, 그걸 할 때마다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물며 네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언젠가 한상익 장로님께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인턴 시절 하루는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물에 빠졌던 사람이 앰뷸런스에 실려 왔더랍니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모든 조치를 다 해보았지만 그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웠지만,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지금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한 존재의 죽음을 선언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은 정말 깊은 충격이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흔들림입니다. 예배드리는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제사장들은 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뿌렸습니다. 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제사장은 그것을 가져가 제단 위에서 다 태웠습니다.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도 제단 위에서 다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고 계시지요? 제물 곧 코르반은 바로 우리들의 심장이나 창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거룩한 삶의 봉헌

 

그런데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도 반복되다 보면 '틀에 박힌 일'(routine)이 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바치는 것으로 사죄가 완수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이사야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제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1:11-12)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지고 가야 할 또 다른 예물은 우리의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삶입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구석까지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

 

품군의 삯을 가로채지 않는 것,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여 저주하지 않는 것, 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않는 것, 재판을 공정하게 하는 것, 남을 헐뜯지 않는 것. 이 목록은 한 없이 늘어날 수 있을 겁니다.

 

어찌 살아야 마땅한지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는 사람은 숨만 가쁠 뿐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1:8)고 말했습니다.

 

사람 속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채울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 심연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현기증을 느끼거나 허무함에 사로잡힙니다.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태어난다.

 

하나의 목마름을 안고 태어난다"고 노래합니다. 그 목마름은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심을 다해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물질주의에 포섭된 복음 전도자들은 '번영의 신학'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의 복을 받고, 물질의 복을 받고, 범사에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걸 전적으로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의 전부인양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따라오는 부수적 결실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우리 마음에 모시면,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부유하지 못하다 해도,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낙심하지 않는 법입니다. 존 아반지니(John Avanzini)라는 은사파 목사는 <세상의 부>라는 책에서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싸움은 세상에서 자족하려고 몸부림치는 싸움이 아니라, "거짓 종교를 통해 그들의 소유가 충분하다고 믿도록 유혹하는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습니다(미로슬라브 볼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국제제자훈련원, 2012, 220).

 

그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를 일러 거짓 종교’, ‘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이런 가르침이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변형된 형태로 한국교회에서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릴 예배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입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과 지정의를 그분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삶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시인 최승호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예배를 '자동세탁기'에 견줬습니다.

 

때묻는 옷을 자동세탁기 안에 집어던지듯, 일주일 동안 살면서 지은 죄를 교회에 오는 것으로 말끔히 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12:1)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holy sacrifice)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한 예배이고 영적인 예배입니다. 영적인 예배는 몸을 통해서만 구현됩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는 이들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말하는 시대, 승자 독식의 체제를 맥없이 받아들이는 시대는 악한 시대입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72회 생일잔치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는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일을 누가 주관했는지, 받은 선물이 무엇이고, 하객들에게 주어진 답례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아니, 이게 왜 기사거리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기사를 썼던 것일까요? 그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중들의 기호를 의식했던 것일까요? 돈이 말하는 시대가 분명합니다.

 

그런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이 땅에 살고 있는 고통 받는 이들의 사정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절망은 그저 늘 보던 풍경인양 도외시되고 있습니다.

 

홀로 고독하게 죽어간 사내의 시신이 20여일 만에 발견되어도, 냉방에서 혹한과 맞서는 사람들이 있어도, 거리로 내쫓긴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와도 그들의 목소리는 국민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남수단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시리아의 난민촌이 물에 잠겨도 그것은 우리와 무관한 현실처럼 인식됩니다.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는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기운을 세상에 퍼뜨릴 때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교우들의 믿음이 진정한 예배를 통해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728x90
반응형

'설교문 모음 > 주제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례 관련 설교문 모음  (1) 2023.02.12
용서 에 관한 설교  (0) 2022.12.15
감사에 관한 설교 모음  (1) 2022.11.15
귀신에 관한 소논문  (1) 2022.11.12
부부설교모음  (0) 2022.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