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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야고보서 설교 모음

야고보서 1:1 - 8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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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결정이 필요하다 /1:5-7/ 김병삼 목사

2016-03-11 11:40:36

 

[야고보서 15-7]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지난 7주 동안 우리는 삶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처와 아픔에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누가 우리 가운데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언제까지 늘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데 신경을 쓰며 살아야 합니까? 이제는 가능하면 후회하지 않을 지혜로운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녀가, 가정이, 사업이, 우리의 꿈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죠.

아마도 우리가 인생을 후회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합리적인 선택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속여 왔습니다. “우리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하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며 행복을 쫓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착각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충족시켜주면 만족이 오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좌절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요? 그 이유를 성경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79절을 보세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부패한 우리의 마음과 거짓된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오늘 마지막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결정을 하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실수를 할 때라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교정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교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과거에 내렸던 결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결정을 미래에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분명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의 인생에서 아름다운 결정을 가능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말씀을 묵상하는 재미를 아시나요? 계속해서 말씀을 보고 있으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혹은 그냥 스쳐 갔던 말씀이 다가와 말씀합니다.

 

저에게는 오늘 5절 말씀이 그런 경우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누구든지그리고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다고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지만,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첫 시간에 꼭 이런 말을 합니다.

공부를 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질문하세요! 종종 이런 질문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은 나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이 모르는 것은 다른 사람도 모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묻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질문을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답하는 것은 제가 아는 데까지입니다. 결국,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은 것도 인정하고, 제가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인정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지식을 놓치는 일이 아까운 일인데, 여러분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지혜를 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아는 것까지입니다. 제가 안다고 하는 것은 제가 경험하고 공부한 것이 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장 적절한 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가장 적절한 답을 해주실 것을 믿으시나요?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성경을 보아야 하는 이유도,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도,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맹목적이다!”라고 말하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우리는 미신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인격적이다!”라고 하는 이유는 맹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계획과 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결국, 설교를 써 내려가다 보면 같은 말씀을 인용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죠.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것을 인용해야겠다는 부담감으로 참신한 것을 이야기해 보자!”

 

그런데 결국, 우리 인생의 문제라는 것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과 가장 평범한 것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본은 기본입니다!”

욥기 2310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를 지으신 그분이 아십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신앙의 기본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을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게다가 오늘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하는 모든 이에게 후히주신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gladly’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꺼이

야고보서 기자는 그것으로 안심이 안 돼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어떤 질문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꾸짖기보다는 기꺼이 대답해 줄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교수법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어떤 질문을 하든 그 질문을 받은 교수가 꼭 대답하기 전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good question!”

 

저도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칠 때 꼭 그렇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질문 가운데 질문 같지 않은 질문들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질문이든 대답하는 사람이 현명한 대답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에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송창의 씨가 쓴 [격을 파하라]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MBC PD로 예능프로그램을 성공하게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무엇보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남자 셋 여자 셋이라는 시트콤을 처음으로 만들고, 근래에는 케이블 tvN을 통해 롤러코스터같은 프로그램을 만든 유명한 감독이죠.

 

그가 처음부터 성공한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고정관념을 벗어나면서 성공하게 된 것이죠.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부분은 고정관념이라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생각과 관행의 틀에서 벗어날 때 그 벽 너머를 볼 수 있다. 창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창의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버젓이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서 그가 던진 창의적 질문은 왜 웃기기 위해서 꼭 콩트를 해야 하는가? 에서 시작했다고 하죠. 그 질문을 던지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배워봅시다라는 리얼 다큐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죠.

이 모든 것이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적용한 것이죠.

 

저는 신앙의 세계와 우리 삶의 지혜가 여기에 적용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감추어진 지혜와 보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계획해 놓으신 놀라운 일을 우리의 고정적인 생각의 틀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죠.

지혜로운 결정은 내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일상을 벗어나면 최상이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은 바쁜 나의 일상을 벗어날 때입니다. 내가 분주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상을 벗어나라!”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한 순간에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특권을 누리는 티켓!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단서가 6절에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신 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입장권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의심을 품고 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

무슨 뜻일까요?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묻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답을 주셔도 방황합니다.

 

종종 우리는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서 묻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묻습니다.

참 재미있죠? 묻기는 하는데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구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위 귀얉사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제 아내가 이 클럽에 아주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데요.

지난여름 미국에 갔을 때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이제 차를 사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숙사를 나와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만나 교회 담임목사의 아들로, 그리고 유학을 하는 대학교 3학년 학생에게 가장 적절한 차가 무엇인가를 생각했죠. 우리 가정의 합의 사항은 애국심을 고려하고 가격을 고려해서 한국의 모 기업의 작은 차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처음 만난 한 분이 이야기를 합니다.

사모님. 같은 가격이면 중고로 큰 차를 사주세요. 미국에는 고속도로를 달릴 일이 많은데 튼튼한 차가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아내가 같은 가격의 중고차를 열심히 물어봅니다.

 

처음에 새 차를 사줘야 하는 이유가 중고차를 잘못 사면 차를 고치다 힘들어질 수 있다는 이유였는데, 새로운 이유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된 거죠.

며칠 지나서 선배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아들도 차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사 주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한 등급 위의 차였습니다. 그분의 경험에 의하면 우리나라 차가 아주 좋은데 조금 큰 차가 훨씬 튼튼하고 편안하다는 겁니다.

 

아내의 마음이 그쪽으로 조금 옮겨 갔습니다.

며칠 후에 다른 분을 만나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분의 이야기는 그 차에다 조금 만 더 보태면 소나타를 살 수 있는데 왜 그 차를 사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의 마음이 또 움직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처음에 사주려고 했던 차 가격의 두 배가까이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차를 사 주었는지 궁금하시죠?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옵니다. 묻기는 하나님께 묻지만, 믿음이 없는 물음은 마치 바다 물결에 요동하는 배와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물음에는 늘 합리성이라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를 했지요.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합리성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NASV]영어 성경에 아주 재미있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But let him ask in faith without any doubting, for the one who doubts is like

the surf of the sea driven and tossed by the wind.

 

왜 야고보서 기자가 믿음을 강조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로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표현을 쓴다면 저항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려 해도 그것을 방해하는 저항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여러분의 삶의 정답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쉬운 길은 옳지 않은 길일 때가 많다!”

쉬운 길은 종종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전에 유행하던 것 중의 하나죠.

교실마다 급훈이 있는데, 어떤 여고 교실에 붙어 있던 글귀입니다.

 

놀고 미싱 할래, 열심히 공부해서 미팅할래?”

어윈 루처의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에 나오는 글귀를 소개합니다.

 

“‘쉬운이라는 단어와 옳은이라는 단어가 함께 어울릴 경우는 거의 없다. 물살을 거슬러 갈 마음이 없어 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면 조만간 결정할 때는 쉬웠지만, 삶으로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어려움이 없는 쉬운 길을 따르면 구불구불 구부러진 강과 후회하는 그리스도인이 나오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가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인도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힘들었던 것은 광야 너머에 있는 가나안 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결정에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있는 자들은 일시적인 것, 오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결정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반대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성급함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게 하지만, 믿음이 없는 자들은 내가 정한 시간 안에서 안달합니다. 조급함이 때로 사단의 유혹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민이 생생합니다.

군목을 마치고 왕십리 감리교회에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은퇴할 목사님이 계셨고, 곧 담임이 되리라고 생각을 했지만, 목사님이 은퇴시기를 번복하셨습니다.

 

아버님도 힘들고 교회도 힘들고 참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님은 은혜 체험을 하고 부흥회를 다니실 때, 찾는 사람도 많고 오라는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버님은 은퇴하실 목사님을 잘 섬기기로 작정하고 참으셨습니다. 참 많이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 왕십리 교회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호주에서 참 좋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교회에서 이미 담임으로 결정이 되었지만, 담임목사님이 후임 목사님에게 권한을 이양하지 않은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심장마비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목사님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시드니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였던 그 교회가 점점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쳐서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답니다.

 

그 젊은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하나님이 다 내려놓게 하시더군요. 이런 질문을 하시면서. 2천 명이 넘는 교인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안달하는데, 200명 교인이어도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 못하겠냐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인 것 같은데, 신앙적으로 보면 기다리며 인내해야 할 순간인 것 같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육신의 생각으로 보는 것이 참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믿음은 우리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교만과 혹은 불순한 의도로 결정을 내리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어떡해야 내가 행복할까의 질문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이죠.

그러므로 믿음이란 성공이 아닌 의미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힘든 질문을 제기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저는 목사이니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죠?

성공적인 교회는 무엇이고, 의미 있는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교회가 성공하기를 원하시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밥 소르기의 내 영이 마르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갑작스럽게 부르시더니 우선순위의 균형이 깨져 있음을 부드럽게 알려 주셨다.

, 너는 주유소를 찾듯이 내게 오는구나.”

 

나는 주유소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유를 좋아하진 않지만, 운전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운전을 하려면, 반드시 주유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나는 이렇게 받았다.

 

, 너는 네 필요를 채우려고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구나. 내가 네 마음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구나. 재충전해서 그 힘으로 네 인생의 첫사랑을 좇으려고 내게 나오는구나.”

 

내 첫사랑은 사역이었다. 영혼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시 전체를 취해 주님께 드리고 싶었으며,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87:7)라는 말씀처럼 내 모든 근원이 주님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나를 지탱하는 주된 힘은 사역의 성취에서 오는 짜릿함이었다. 나는 주님이 알려 주신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어떤 일보다 먼저 주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맺는 사람, 그리고 이 관계에서 힘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얻는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과의 괴리가 사라지고 간격이 좁혀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의도가 하나님 중심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필요함을 압니다. 충동적일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죠.

결국, 우리의 삶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마음 배우기!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갖기!

 

가장 튼튼한 신앙의 기본기가 우리의 삶의 지혜로운 결정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붙들었지만, 이제는 더욱 지혜롭게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회복시키시는 간증도 귀하지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귀하지 않겠습니까?

 

 

 

 

 

 

 

 

세속주의Christian Secularism를 극복하는 길 /1:5

2015-08-28 15:13:02

 

평탄한 삶이 좋지만.., 세속주의가 쉽게 침투한다.

 

시험인줄도 모르고 당하는 시험 - 안주

살다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다. 1:2

그런데 시험인줄도 모르면서 당하는 시험이 정말 위험하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다.

 

삶의 안정감stability이 있는 것은 좋고, 누구나 그것을 동경한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이유도,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편안히 살기 위함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도,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원하신다.

 

그러나 <세상에 깊이 파묻혀 안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안주>는 이유 없이, 그저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롯이 소돔 성에서 안주하고 살았다.

실제로는 좋지 않은데도 말이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시험은 - 세속에 안주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유혹)

베드로서에서 말하는 시험’(박해로 인한 시련, 투옥, 방랑)과는 약간 다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은

안주하고 싶은 마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하는 적당하게 믿으려는 신앙 자세,

주님 임하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하는 뜻뜨미지근한 마음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야고보서의 시험과 가깝다.

과거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던 일제시대 때는 베드로서의 시험과 가까웠다.

 

세속주의secularism의 시험

인류 역사에 면면히 내려오는 시험은 - <세속주의>라는 시험(유혹)이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풍요로움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풍요롭게 살고 싶은 마음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속에서 풍요로움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세상적 풍요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점점 떠나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구약시대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얼굴을 띠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믿음으로부터 이탈시키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고.. 나는 믿는다.

바알주의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풍요와 다산'의 유혹이었다.

 

이 세속주의 유혹은

교회가 '핍박'이란 외적인 압력이 없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언제든지, 어디든지,

예쁘고 화려한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편안할 때 두 배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

내게 모든 것이 잘 될 때, 삶에 큰 어려움이 없을 때,

우리는 평소보다 두 배로 기도하고, 두 배로 성경 읽어야 한다.

 

수준 있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문제가 없을 때, 기도를 두 배로 전념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어렵다.)

문제가 생겼을 때가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두 배로 기도한다.)

 

편안한 지금, 앞으로 내게 문제가 안 생기게 예방차원으로, 두 배 기도가 아니라,

문제가 없이 편안할 때, 그 때 내 신앙이 나태하고 부패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에 세상적인 문제가 없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신앙생활 더 뜨겁게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내게 문제가 없어질수록, 내 삶에 세속주의가 쉽게 침투하는데...

그래서 오늘 설교 주제는,

<평탄한 삶 가운데, 침투하는 세속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마음을 품는 성도들

 

자기 욕심에 이끌리던 성도들에게...

야고보 사도는

점점 세속화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이 야고보 서신서를 썼다고 저는 생각한다.

 

네로의 박해 직전인 주후60년 경에

교회는 벌써 세속화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세속화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적 풍요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4

이 말씀을 보시라.

그 당시 성도들이 받았던 시험

자기 욕심이라는 세속주의였지, ‘환란, 투옥이 아니었다.

 

우리 신앙이 더 성숙하게 되면

이 세상 욕심들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세속적 욕심에 시험들지 말아야 하는데...

 

문제가 없을 때.. 세속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문제없으라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 교회를 괴롭게 하는 문제가 없을 때,

교회는 세속화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평탄하고 편안할 때

안 넘어지는 성도와 교회가 있다면... 기적일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바깥에서

세속적인 만족, 세상적 부요함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한다.

, 내가 바로 세속화 된 성도일수도 있다고 생각하셔야 한다.

 

세속화된 성도의 특징 - 결핍

이들이 겪는 공통적인 특징은 <결핍을 겪는다>는 것이다.

참 만족이 없고, 참 행복이 없고,

늘 부족하고, 불만족하고, 자기가 늘 불행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세상이 주는 만족과 행복은, 잠시 달콤하게 느껴지나,

결국 아무리 먹어도, 가져도, 올라가도... 거기엔 <결핍 의식> 뿐이다.

아직 만족 못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가져야 되겠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목청 돋군 <터진 웅덩이>

예레미야가 이런 세속화된 성도들에 대해 잘 지적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2:13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참 만족과 행복은 주님께 있는데, 그분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스스로 풍성해지려고, 스스로 발버둥 친 것이다.

 

그래서 풍성한 웅덩이를 만들어 보았는데, 그 웅덩이가 터져 버렸다.

아무 것도 저축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다. 그 결과, 더욱 결핍을 느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찬송하며 아멘해야 하는데,

믿음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아울러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뭔가 부요함과 만족함을 찾으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속주의다.

<하나님을 떠나서/등지고, 하나님 말고 다른 데서 만족함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 살다 보니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물을 저축치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다.

 

야고보 사도는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권고한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4:8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잠시 제쳐두고,

세상 속에서 부요함을 찾으려고 했을 때

두 마음이 든다.

 

세상 사람들은 두 마음이 안 든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아예 (세상을 사모하는) 한 마음 뿐이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부요함, 참 만족을 찾으려 할 때... 두 마음이 된다.

하나님 외에, 내가 다른 어떤 중요한 것(우상)을 두면

나는 두 마음을 갖게 된다.

 

두 마음(세속주의)을 품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2가지 현상

성도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속에서 부요함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는 결핍이었다고 했다. (예레미야)

 

그 결핍이 일어난 인간들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야고보는 2가지로 설명한다.

 

입술로 인한 분열 약3:1~12

내 마음이 결핍되면, 내 언어가 자꾸 거칠어진다.

그래서 내 입술로, 사람들을 갈라 세우는 말을 하게 된다.

 

여러분, 잘 살펴보시라.

여러분과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을 공정하게 칭찬하시는가?

 

그런데 세속(세상)에서 부요/만족/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내 입술로 누군가를 깎아내려야 한다. 경쟁에서 그를 도태시켜야 한다.

내가 세속적 인정과 만족을 추구할 때.. 그렇게 된다.

 

하나님이 입술을 주신 이유는,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한 입술로

사람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는데,

때때로 우리는 쓴물과 단물을 같이 솟구쳐 내고 있다.

자기 마음에 '복음이 주는 부요함'이 없으니까...

결핍이 있으니까...

 

하나님은 적당히 믿고서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존경, 칭찬, 높임... 이런 것들을 받으려고 하면,

내 입술이.. 세상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똑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입술에서 쓴물과 단물을 동시에 배출해서.. 사람들을 이간, 분열시킨다.

 

물질로 인한 분열 약2:1~7

세속주의를 추구하면서 얻은 물질은, 그것 때문에 많은 분열이 생긴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물질이 결정적으로 인간을 분열시키는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을 중심으로 사람을 구분해서 대할 때> 특히 그렇다.

 

이것은 결핍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내 안에 복음의 풍성함이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안 생기는데,

내 안에 결핍이 있을 때는

자꾸 물질 있는 사람없는 사람을 차별하고 구분하게 된다. 2:1~7

 

이렇게 그 당시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속에 오염되어

결핍과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두 마음 품기=세속주의>를 해결하려면?

 

야고보 사도는 어떻게 세속주의를 이길 수 있는지 얘기해 준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풍성함을 찾으라>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놀라운 풍성함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눈 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 가치에 눈을 안 돌리고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신다.

 

1. 그래서 <참된 지혜를 구하라>고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야고보 사도가 보니,

성도들이 자꾸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가서

여러 가지 시험(유혹)을 당하는 것이 야고보는 너무 안타까웠다.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길로

<하나님에 대한 신령한 지식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서두에서, 참된 지혜를 가지라고 가르치는데...

저는 이 1:5절이,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라고 본다.)

 

2. 하나님만이 풍성한 선물을 주신다.

 

가장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1;17

*여기서 '은사'는 성령의 은사라기 보다는, '좋은 선물'이란 뜻

 

앞서 예레미야는, ‘물을 저축치 못하는 웅덩이를 말했다.

야고보는 그것과 정 반대되는 <가장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라고 했다.

 

<가장 좋고 온전한 선물>을 가졌다는데,

세상 것이 뭐가 부러워서 자꾸 한 눈 팔겠는가?

 

문제는 이 축복이, 내 귀에 솔깃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축복이 예수 믿는다고, 구원 받았다고

그날 당장 피부에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풍성함을 끊임없이 더 알아가고, 더 발견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정답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가장 좋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가 정답이다.

우리 인생의 참 만족, 참 행복, 참 풍요로움은... 오직 주님께로부터만 온다.

 

생수의 근원을 놓치고, 자꾸 물을 저축치 못하는 웅덩이를 파면 안 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독교 신앙이,

이런 주님을 세상 축복을 주시는 도구로 바꾸어 버렸다.

기독교를 세속주의와 혼합시켜버린 것이다.

 

물을 저축치 못하는 웅덩이에 물을 더 보태 달라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주님께 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던 적이 있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그런 좋고 온전한 선물을 줬다/안 줬다 하시지 않으신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주신다. 차별없이 주신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보다 더 밝고, 더 빛나는 누가 있다면.., 그 빛 때문에 그림자가 생긴다.

그러나 그런 분이 없기에, 하나님께는 그림자가 없다.

가장 전능하신 분이, 가장 좋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그 선물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다른 세상 재미와 행복을 달라고 한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자면, 야고보 사도는 이 편지를 읽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세상 가운데서 세상에 휩쓸려 살고자 하는 유혹과 위기에 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풍성하시고

가장 좋은 분이시며,

가장 좋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니,

그것을 <지혜>를 가져서 깨달아 알고 약1:5

그 분에게서만 만족과 행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세상에 안주하거나, 세속에 빠지지 않는다.

 

입양아로 살면 안 돼!

어떤 입양아는 입양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냉장고 문을 마음대로 못 연다고 한다. 눈치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의 친자녀는, 새벽 2시에도, 곤히 자는 부모를 깨워서

자기가 아프다고 약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한다.

 

(우리는 성경에 보면 양자로 입양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입양아처럼 눈치 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아버지 집에서 풍성함과 은혜와 각종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야 정상인데 말이다.

 

어떤 집 아이들은

자녀가 아버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까

아버지 집안에서 안정감과 행복을 못 누리고

집 바깥에 나가서 동네 나쁜 아이들과 어울린다. 탕자처럼 말이다.

거기서 배고프며 죽을 고생하면서도... 거기가 더 좋다고 믿는다.

 

그런 말단적인 재미에 자기 영혼을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바로 우리 모습은 아닌지..?

 

하나님 안에서 풍성함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것은 뭔가 부족한 것 같고,

그래서 바깥에 나가서, 세상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한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신다. 1:5

 

 

마치는 말

모든 풍성함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 안에 있다. 위에서 내려 온다.

그러나 풍성함을 하나님 밖에서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세속주의에 물들게 되는데...

 

야고보 사도는

모든 풍성함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에 대한 신령한 지혜와 지식을 갖는 것이

세속주의를 이기는 힘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지혜를 구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신다. 1:5

 

이 말씀의 도전에 우리 모두가 진실하게 아멘으로 응답하실 수 있기 바란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주님과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돈 버는 재미, 출세하는 재미, 영화보고 여행다니고 취미생활하는 재미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기도에 관한 격언 모음 /1:6-7/15:8/ 존 파이퍼

2015-07-18 10:32:05

 

조지 맥도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 타고 가다가) 잠시 쉴 자리를 찾으면, 거기서도 기도하라

 

George Macdonald said: “Anything large enough for a wish to light upon, is large enough to hang a prayer upon.”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전쟁이다.

인생의 전부가 통털어 다 전쟁이란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은 늘 전쟁의 연속이다.

 

왜 신자들이 기도에 게으른가?

바로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전쟁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하지 않겠는가!

 

기도는, 교전 장소에서, 마치 워키토키와 같다.

교회와 성도는, 어두움의 세력과 마주한 가운데서,

자기 미션을 수행하며 적진을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 전장에서 워키토키(기도)는 매우 필수적이다.”

 

John Piper said, “Life is war. That’s not all it is. But it is always that.

Our weakness in prayer is owing largely to our neglect of this truth.

Prayer is primarily a wartime walkie-talkie for the mission of the church

as it advances against the powers of darkness and unbelief.”

 

 

1: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J. C. Ry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다른 크리스천보다 표정이 훨씬 더 밝고, 거룩하게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사람이 환하게 보이는 경우에

20명 중에 19명은, 그의 은밀한 개인기도 습관 때문이다.

그것이 표정이 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사람이 경건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기도 부족 때문이라고.

반대로 사람이 경건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혼자 있을 때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J. C. Ryle said, “What is the reason that some believers are so much brighter and holier than others?

I believe the difference, in nineteen cases out of twenty, arises from different habits about private prayer.

I believe that those who are not eminently holy pray little, and those who are eminently holy pray much.”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일 같이 기도를 많이 하시라. 그러면 당신의 길이 평탄할 것이다.”

 

John Wesley said: “Proceed with much prayer, and your way will be made plain.”

 

존 셀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뭘 달라는) 기도는 짧아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것을 내려주셔야 하고, 저것도 주셔야 하고.. 하지 마시라.

그 분은 당신에게 뭐가 최선인지.. 다 아신다.”

 

 

사무엘 채드윅이 말했습니다.

참 기도는, 정말 외로운 작업이다.”

 

Samuel Chadwick said: “True prayer is a lonely business.”

 

잠언 158절은 말씀합니다.

악한 사람의 예배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정직한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Proverbs 15:8 which reads: “The sacrifice of the wicked is an abomination to the Lord:

but the prayer of the upright is his delight.”

 

 

토마스 아켐피스가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이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적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거의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Thomas a Kempis said: “What most of all hinders heavenly consolation is that

you are too slow in turning yourself to prayer.”

 

 

레너드 레이븐힐이 말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으로 충만하려면, 하나님과 오래 같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홀로 오래 계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긍휼함으로 가득 찼다면, 어떻게 눈물이 안 나올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예레미야도 눈물의 선지자였고, 예수님도, 바울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 미국에는, 감춰진 눈물의 중보기도자들이 일부 있기는 하겠지만,

오늘날 기도는, 우리 미국에서, 마치 외국 문물(문화)처럼 되어버렸습니다.”

 

Leonard Ravenhill. He said, “To be much for God, we must be much with God.

Jesus, that lone figure in the wilderness, knew strong crying, along with tears.

Can one be moved with compassion and not know tears? Jeremiah was a sobbing saint.

Jesus wept! So did Paul. So did John. Though there are some tearful intercessors behind the scenes,

I grant you that to our modern Christianity, praying is foreign.”

 

존 론스타트가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로 자극하지 않으면, 금방 더럽혀져 버린다.”

 

John of Kronstadt said: “It is necessary to rouse the heart to pray, otherwise it will become quite dry.”

 

 

찰스 스펄전이 말했습니다.

기도에 무관심해 질 때, 사람은 십중팔구 죄를 짓기 시작한다.”

 

Charles Spurgeon said: “It is well said that neglected prayer is the birthplace of all evil.”

 

 

제임스 스토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오래 기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아름다움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같아지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기도의 응답으로 받는 선물이다.

그래서 기도에 깊은 성도는, 그 깊은 기도에서 주님을 닮은 성품이 흘러나온다.”

 

James Stalker said, “There is a beauty bestowed in some degree on all God’s saints

who pray much which is of the same nature and is the most precious of all answers to prayer.

Character flows from the well-spring of prayer.”

 

 

 

 

 

희망 만들기 /1:2-4/ 김기석목사

2015-06-28 00:28:48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

 

교우 몇 분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리 현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한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어렵게 합의에 이르러도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깃장을 놓거나, 위반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온 질문입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우리의 민족성을 들먹입니다. 그러면서 외국의 예를 듭니다.

 

미국을 가보니 어떻고, 구라파를 가보니 어떻고, 일본을 가보니 어떻더라.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이렇게 납니다. "우린 안 돼." 참 자존심 상하는 결론입니다. 정말 우리는 안 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 '이거 참 큰일이야' 하고 말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다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답도 있을 겁니다. 교우 한 분이 제게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 있다면 어디에 있지요?" 하고 물은 것은 해보나마나인 질문인 줄 알면서 그저 물은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그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다고요.

 

하나는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 왕이나, 맹자가 말한 왕도정치를 실현할 현자가 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존경하고, 흠모할만한 사람, 힘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그를 바라보면서 시민들 모두의 마음이 순후(醇厚)해지는 그런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단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현실은 그런 이들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우리들이잖아요?

 

두 번째는 더뎌 보이지만 꾸준히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서, 그 희망이 조금씩 커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결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어떤 결과를 보고 싶어해요. 현대 문화의 특색은 '기다림'의 요소를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것은 돈만 있으면 거의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패스트 푸드'로 점심을 해결하고, 고속도로를 타고 질주하고, 컴퓨터 통신망과 휴대폰을 통해 세상을 헤집고 다닙니다. 이것이 진보인가요? 나는 사람의 성장이 동반되지 않은 문명의 진보는 진보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삶이 불안정해 보이는 까닭은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뜸 들이고, 숙성시키는 과정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속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역사의 걸음은 느립니다. 물론 때가 이르면 그보다 빠른 것이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싶은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닦아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의 크기를 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작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옳게 시작한다면 그 일의 결과에 우리가 연연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못 다 이루어도 하나님이 완성하실 테니까요.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 말라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글귀를 읽었습니다. 사티쉬 쿠마르라는 평화 운동가가 한 말입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 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 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도보여행을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모든 긴 여정들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면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만,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번 붓질을 하고 그 다음에 또 한번의 붓질을 한 겁니다. 매번 여기에는 어떤 색을 넣을 것인지, 어떤 질감을 나타낼 것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일들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일을 통해 시작됩니다. 갈릴리 변방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이 전 세계를 움직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거리에서 최일도 목사님이 불쌍한 행려병자를 위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오늘의 다일공동체로 성장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하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선각자라 합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길은 무엇입니까? 본래 길이 없던 곳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감으로 생겨난 것입니다(魯迅).

 

초대 교회 사람들이 '그 길의 사람'이라고 불리운 것은 참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 예수님이 온 몸을 바쳐 열어놓으신 그 길을 걷고 계십니까? 너무 안이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선생은 아주 힘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말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대로 살려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불의한 세상의 관행에 따라 처신하기를 거부할 때 여러분은 고지식한 사람, 혹은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따돌림' 받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법보다는 세상의 법을 추종합니다. 믿음의 시험에 빠질 일도 별로 없습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데 무슨 시험이 있겠습니까?

 

당연하게도 그런 이들의 믿음은 자랄 수 없습니다. 생명의 길이란 삼각형의 꼭지점을 향해 가듯 항상 올라가야 하는 길인데, 쉽고 편한 길로 가다보니 영혼의 내리막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험, 기쁨에 이르는 기초

 

야고보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시험 당하는 것을 오히려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기초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인가요? 생명의 근원과의 일치에서 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거나,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옵니다. 나 같은 미물이 우주의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느끼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을 받고 놓여났을 때 기뻐했습니다. 사지에서 풀려났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의회에서 물러 나왔다."(5:41)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보고 기독교적 메조히즘이라고 말해요. 고통받고, 모욕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몰라요. 그 기쁨을요.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겪거든 실망하지 마세요. 속상해 하지 마세요. 오히려 기뻐하세요. 그것을 기뻐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겁니다.

 

시련, 인내의 훈련장

 

믿음의 길을 걷다가 시련을 겪는 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익이 있어요. 시련은 우리를 인내로 이끌어 갑니다. 인내란 이를 악물고 참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참 대단해요.

 

사우나에 들어가서 오래 견디는 사람도 대단해요. 고통을 견디는 환자들의 인내도 대단해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야고보가 말하는 인내란 근원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는 힘이에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힘을 가리키는 거예요. 시련은 나약한 이들에게는 절망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내의 훈련장이에요.

 

선한 일을 하다가 쉽게 낙심하는 이들을 볼 때가 많아요. 결실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선을 행하려면 '지속에의 열정'이 있어야 해요. 한 두 번 해보고 그만 두면 무슨 소용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한 두 번 선을 행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 지속하기는 매우 어려워요. 간혹 설거지를 해보면 재미있더군요. 하지만 저보고 날마다 하라고 하면 문제는 심각해져요. 저는 아기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아기만 보면 안고 돌아다녀요. 하지만 잠깐뿐이에요. 종일 아기를 보라고 하면 저는 아마 도망갈 거예요. 지속에의 열정이 없는 것은 거품이에요.

 

여러분, 시련을 많이 겪으면 이런 '지속에의 열정'이 생겨요. 대장간에 가보셨지요? 쇠를 풀무불에 달구고는 그것을 모루 위에 놓고 해머로 치지요. 그리고는 물 속에 푹 담궈요. 쇠는 물과 불 사이를 오가면서 단단한 쇠로 변해갑니다. , 매 맺는 과정도 있네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어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

 

야고보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

 

시련을 통해 인내의 사람이 되면, 그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인내는 결국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내가 체질이 된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여유롭습니다. 웬만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꿈을 가로막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꾸기를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주님은 포기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라고 부르셨습니다.

 

큰 일을 할 수 없다면, 아주 작은 일부터라도 시작하십시오. 교통질서를 지키는 일, 공공 장소에서 남을 배려하는 일, 부드러운 말과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일, 골목길을 쓰는 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일,

잘못된 일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참 많습니다. 작지만 소중한 이 일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희망 만들기입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폭포를 이루듯이,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만든 작은 희망들이 모일 때 세상의 어둠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희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희망을 만드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열매 /1:1-8/ 이동원목사

2014-11-30 16:58:17

 

골프의 보편화, 생활화를 행정지 침으로 시달하셨다는 그런 뉴스를 우리가 접했습니다. 아마도 그 배경 에는 박세리 라든지 수퍼 땅콩 김미 현 이런 여류 골퍼들의 활약이 우리 사회의 사회적 변화를 유도한 것으 로 생각이 됩니다.

 

저는 골프에 문 외한입니다. 골프장에 가본 적이 있 습니다. 골프장 식당에 식사하러 따 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골프를 잘 모르는데요. 요즘 이런 사회적 변화 때문에 여류 골퍼들이 골프하 는 게임을 시청해본 적이 몇 번 있 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골프를 생각 할 때 막연히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에 골프 가방을 메고 아주 낭 만적으로 걸어 다니면서 하는 스트 레스 없는,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 는 그런 아주 낭만적 게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실제로 그 게임을 시청하면서 좀 생각이 달라 졌습니다.

 

이 골프하는 사람도 스트 레스가 많겠구나. 왜냐하면 공이 물 속으로 쳐 박히기도 하고 모래 벙커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그런 광경 들을 봅니다.

 

다시 그 물 속에서, 모 래 속에서 탈출해서 목표 지점으로 근접시키기 위한 안타까운 그 노력 하는 그 모습들을 우리가 지켜 봅니 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골 프 칠 마음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 다.

 

그러치 않아도 인생에 스트레스 가 많은데 골프 치면서 또 스트레스 를 경험해야 한다면 뭐 하러 치겠는 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 아마도 골프가 인생을 닮은 어떤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 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물 속으 로 쳐 박히고 또 모래 속으로 곤두 박질하는 그런 경험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야고보서 1 2절에 보시면

"내 형제들아 너희 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 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서 여러 가 지 시험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여러 가지라는 단어는 본래 원문에는 여 러 가지 색깔에, 다양한 색깔에 그 런 뜻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시 험, 우리 인생을 살면서 형형색색의 시험,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 험하는 시험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시험이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이라는 단어가 본래 원문 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에 떨어지거 든 영어 성경에는 'fall' 이라는 단 어가 쓰여 졌어요.

 

여러 가지 시험 에 떨어지거든 그런데 그냥 떨어지 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떨어지 거든 이런 뜻입니다. 여러 가지 시 험에 갑작스럽게 떨어지거든 또 떨 어진다는 말이 만일 여러분이 시험 에 떨어지면 이라는 어떤 가정법의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if' 라 는 단어가 없어요.

 

이것이 영어 성 경 번역에 보시면 'when' 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습니다. 그 시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시험을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시험을 안 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시험은 옵션이 아닙니다. 누 구나 인생을 살면서 시험을 반드시 통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느냐는 것입니 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 를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 든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말씀 앞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즉각적 인 어떤 반응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요? 시험은 아프고 고 통스런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온전 한 기쁨으로 시험을 맞이할 수가 있 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것은 인위적으로는 불가능한 응답 입니다. 인위적으로는 그렇게 기쁘 게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522절에 보 시면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를 말 하면서 성령의 열매는 첫째 사랑 둘 째는 희락, 기쁨이예요. 성령의 열 매 가운데 희락, 기쁨의 열매가 있 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시험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 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자연스런 충동적 반응으로는 불가능하고 그것 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 다. 로마서 53절에 보시면 바울 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거예요. 환난 중에도 즐 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낳고 그 다음에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할 줄 앎이라. 다시 말해서 환난 중에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지막 어떤 소망 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되는 말씀 로마서 55절에서 보면

 

"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 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됨 이니"

 

이렇게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환난 속에서도 환난이 가져 올 궁극적인 어떤 소망을 기대할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바 라보는 사람마다 환난은 아프지만 여전히 환난을 극복하는 어떤 기쁨 과 즐거움의 태도를 가지고 환난을 돌파해 나갈 수가 있다고 성경은 가 르칩니다.

 

유대인으로서 나치 독일 의 히틀러의 핍박 아래서 잔인한 고 통을 당했던 유명한 세계적인 심리 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나치 의 고문을 받고 그 감옥소에서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한 결같은 마음에 평정의 자세,

 

또 인 간다움의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가 그 감옥 생활을 잘 견뎌냈던 그 비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감옥 에서 나온 후에 받았을 때 프랭클 박사는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 것은 나의 고난이 장차 가져올 나의 삶에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를 저는 줄기차게 묵상했습니다. 저는 그것 을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내가 이 시험과 고통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유익이 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내가 변할 수 있었던 내 삶의 모습, 그리고 이 고통을 견디는 삶의 의 미, 희망의 문제 이런 것들을 묵상 하고 이것을 통해서 전세계 사람들 에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계속 묵상했고 이런 희망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험 중 에도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험 의 유익을 묵상할 때 가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에게 어 떤 유익을 줄 수가 있을까요?

 

시험 이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 로 그것은 시험은 우리를 믿음의 사 람이 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시험 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합니 다. , 오늘 본문의 야고보서 13 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런데 2절에서 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이 시험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3절에 는 이 시험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 이예요. 이것은 믿음의 시련이다. 시 련과 시험은 다릅니다. 그러나 시련 이라는 단어가 시험의 성격을 설명 합니다.

 

크리스챤이 받는 시험 하나 님의 백성들이 경험하는 시험은 믿 음의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련 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말하면 테 스트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테스트. 시험은 믿음의 테스트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학교생 활에 추억과 경험이 있습니다.

 

학교 다니실 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시험 을 enjoy하고 즐기신 분이 계십니 까? 혹시? 그런 이상한 다른 나라 에서 오신 어떤 위성에서 오신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무 도 시험을 enjoy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 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시험을 아 무도 enjoy 하지 못하지만 시험은 필요한 것이죠. 왜냐면 시험을 통해 서 우리는 자기의 실력을 평가합니 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나에게 어디가 부족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 다. 그래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실 력이 향상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 님이 그리스도인들의 인생 속에 시 험을 허용하신 이유는 그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믿음의 실력이 증가 할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 것입니 다. 그런 의미에서 시련은 시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 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귀한 선 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에베소 서 2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 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지마는 문법적으로 이 구절 을 좀더 깊이 들여다 보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예요. 믿 음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우리 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 앞에 온 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우 리 안에는 진정한 믿음이 주어졌습 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어진 믿 음은 아직은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믿음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이 좀더 견고한 믿음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강력한 믿음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건강한 믿음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성숙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 는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테스트에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 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시험을 허용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1세기에 살던 그리스도인들도 시험을 겪었던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11절 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 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 라"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을 흩 어진 열두 지파 이런 표현으로 설명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역사적으로 주어진 별명 가운데 하나로 유대인 들을 가리켜서 디아스포라의 민족이 다 이렇게 부릅니다.

 

흩어져 있는 백성.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들이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그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단순히 흩어졌다라는 지리적인 흩어짐만을 뜻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이 고난을 위 해서 흩어져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 다.

 

흩어져 고난 받고있는 주의 백 성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시험을 허용하셨을까요? 성경은 오 늘 그것이 믿음의 테스트라고 말합 니다. 우리가 야고보서 1장을 읽다 가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서 하나를 읽어보면 그 출발 구조가 거의 야고 보서 1장과 비슷한 것이 또 하나 있 어요.

 

그것이 베드로 전서입니다. 야 고보서 11절이 흩어진 열두 지파 에게 문안하노라 이렇게 시작되는 것처럼 베드로 전서 11절도 흩어 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한다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16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 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기뻐한다."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 1 7절에 보시면

"너희 믿음의 시련 이"

거기도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이 나와요.

"믿음의 테스트가,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 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 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시험을 허 용하시는가?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 마치 불을 통과한 금이 더 아름다운 금으로 재련되는 것처럼 우리 믿음 이 보배롭고 더 순결하고 더 아름다 운 믿음으로 나타나 주님 오시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도 록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시 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사람들이 받는 시험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를 원하면 우 리 믿음의 원조를 생각해 보십시다. 믿음의 조상, 믿음의 원조 할아버지 누구죠? , 아브라함입니다. , 하 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 를 선택하고 부르시면서 그를 축복 합니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네 이 름은 위대하게 될 것이다. 너는 복 의 근원이 될 것이다. 천하만민이 너를 복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약속받은축복의 포인트 는 어디 있느냐 하면 자손이예요. 자손. 네 자손이 하늘이 별처럼 바 닷가의 모래알처럼 될 것이다.

 

그런 데 아직도 아브라함은 자식이 한 개 도 없었어요. 아직. 근데 아브라함이 자식을 쉽게 얻었습니까? 쉽게 얻지 못했습니까? 쉽게 얻지 못했지요. 하나님이 약속은 해 놓고 자식이 오질 않아요. 그러니 얼마나 딜레마 예요. , 백살이 가까워지도록 아직 도 자식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자식을 얻었습니다. 기적의 아들, 이삭. , 이 아들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흥분을 했을 까요? 이삭을 바라 볼 때마다 너는 기적의 아들이다. . 아브라함의 기쁨 이요, 아브라함의 자랑이요, 아브라 함의 모든 것이 그 아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적적으 로 얻은 아들, 그 후에도 이 아들의 성장 과정이 평탄했습니까? 어느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 때문에 기 뻐하고 enjoy하는데 이삭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빠져있었을지도 모르지 요.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 시려고. 테스트하시려고 시험하시려 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바쳐라. 모리아 산상에서 제물로 바쳐라. 죽여라 이 말이예요. 얼마나 딜레마예요. 하나 님, 죽이자면 왜 주셨습니까?

 

얼마 나 고민을, 고민이 아니라 괴민을 했을까요? 아주 고민을 했을거예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심각한 번뇌 의 밤, 깊은 고뇌와 그리고 방황 끝 에 드디어 아브라함이 결단을 합니 다. 어떤 마음으로 결단을 했을까 요?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이 다 른 계획이 있는 모양이지 다른 자식 을 주실까? 아니면 이 아들을 데려 가셨다가 또 주시지 않을까? 어쨌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이 달라 그러 니까 하나님을 믿어야지.

 

드디어 하 나님의 주권을 설명할 수 없는 상식 을 뛰어난 자기의 고뇌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그 모리아의 제단 에 올려 놓는 그 순간,

하나님이 스톱. 내가 네 마음을 알았어. 시험 끝이야. 시험은 끝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서 다른 것을 예비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다른 제물을 준비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왜 이렇게 아들을 약속해 놓고 하나님이 아브 라함을 힘들게 만드십니까?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뭐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 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예요. 하나 님을 신뢰하는 믿음. 내 상식과 그 리고 내 이성을 초월해서 생명의 근 원이요,

 

창조주요, 그리고 역사의 섭 리자이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을 배워가는 것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 순전하게 더 깊이있게 더 영광스 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 라함을 분명히 테스트하셨다는 사실 입니다. 그래서 본문 야고보서 16절에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 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 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 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

 

믿 음의 사람, 그렇습니다. 시험을 통해 서 내 믿음이 순결해지고, 내 믿음 이 아름다워지고 내 믿음이 더 강력 해지고, 또 내 믿음이 더 고상하게 성숙할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 러분, 시험은 아픈 것이지만 이 시 험이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 것 이다.

 

우리는 시험 중에 고통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조용히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웃을 수 있는지도 모 릅니다. 그래 맞아. 나는 이 시험 속에서 믿음의 사람이 될거야. 그리 고 우리는 아직도 기뻐할 수가 있습 니다. 시험의 유익이 무엇일까요?

 

둘째로 시험은 우리를 인내의 사람 이 되게 합니다. 시험은 우리로 하 여금 인내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둘째로 인내의 사람이 되게 할 것입 니다. 여러분, 시험이 오면 많은 사 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뭘까 요?

 

시험이 오게되면 많은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일이 뭘까요? 기도해 요? 기도하는 사람은 조금있어요. 그렇게 많지 않아요. 불평하고 원망 하는 일도 많이하고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은 참는 것입니다. 참는 것입니다.

 

때때 로 많은 경우에 우리는 견디는 일 밖에는 할 일이 없어요, 아무것도. 견뎌야 되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 을 요구하십니다. 시험 속에서 인내 를 요구하십니다. , 본문의 4절을 읽어보시지요. 야고보서 14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시험 속에서 인내를 성취하 라. 본래 인내라는 단어는 희랍어 에서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단어입 니다.

 

휘포 메네. 휘포란 단어와 메 네. 휘포는 전치사인데 무엇무엇 아 래서. 메네는 머문다. 'remain under' 무엇무엇 아래 머문다. 프레 셔 아래서 압력아래서 고통 아래서 정말 어려운 환경 아래서 우리가 계 속 머물러 있다.

 

성실하게 머물러 있다. 그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 고 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를 억 압하는 그 상황의 고통에도 불구하 고 우리는 계속 성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내예요. 그 런데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이 인내 합니까?

 

인내하지 못하죠. 우리는 참지 못하죠.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합니까? 무언가를 좀 해봐야지. 서 두르다가 우리는 일을 그르치고 그 리고 더 큰 고통, 더 큰 재앙을 초 래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 다.

 

여러분, 아브라함도 자식을 주신 다고 하셨는데 자식이 안 와요. 끝 까지 참았습니까? 아브라함도 참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혹시 성경 보셨어요? 아브라함도 참지 못 했어요.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합니 까?

 

, 이제는 생산 능력도 다 없 어져가고 성경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경수도 끊어졌고, 이제 낳을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어떻게요. 만가지 생각이 있었겠죠. 자기 합리화의 생각도 있 었을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 속을 했지만 꼭 뭐 원조 부인을 통 해서 낳으라는 약속이 어디있는냐?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자기 부인 말고 하갈이라는 자기 계집종, 메이 드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이 바로 누굽니까? 이스마엘이 예요. 열심히 자기가 꾀를 써서 낳 은 것이죠.

 

그러나 그 낳은 이스마 엘과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부인 사라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하나님이 진짜 주신 아들 이삭, 이 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얼마나 길고 긴 고통이 계속 됩니까? 오늘도 계 속되고 있는 아랍민족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갈등의 시초가 바로 그것입 니다.

 

이것이 다 참지 못해서 그래 요. 기다리지 못해서. 히브리 사람들 의 읽는 그 이야기들의 콜렉션, 스 토리 콜렉션집을 내가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민화집인데 거기에 이 런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어느 날 아브라함이 그 저녁 무렵 텐트 바깥 에 나와서 이렇게 앉아 있는데, 저 기서 80세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 터벅터벅 찔뚝거리면서 걸어 옵니 다. 피곤한 표정, 남루한 옷차림, 거 지에 가까운 옷차림이었습니다.

 

배 고파 보였습니다. 얼굴은 아주 찌들 린 모습이었습니다. 80세된 노인 이 아브라함 한테 오더니 나 이 텐 트에서, 장막에서 하루 밤 쉬어 갈 수가 있겠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저희 장막에서 쉬어 가시죠. 그리고 이 노인장의 발을 정성스럽게 물로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 비해서 식사를 드시지요. 그런데 이 노인이 기도를 안하고 들어요. 순간 적으로 아브라함이 열을 받았습니 다. 그래서 노인보고 하나님께 기도 도 하고 감사도 하고 좀 식사를 하 시죠?

 

그러니까 이 노인이 '신이요? 나에게는 음식이 신이요.' 이 말을 듣자 아브라함이 진짜 열 받았어요. 노인장, 나는 노인장 같은 노인은 우리 집에서 모시고 싶지 않소. 그 리고 쫓아내 버렸어요. 그날 밤 아 브라함이 자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셨 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하나님.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손 님이 왔지? , 그랬었습니다. 왜 쫓 아냈니? , 하나님도 보셨군요. 아 시쟎아요? 하나님을 모독하고, 음식 이 신이라고 그러는데 제가 참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냥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 씀하시길 아브라함아 나는 말이야. 그 노인에게 80년이나 참았는데. 너 는 말이야, 하루 저녁, 그리고 한 시 간도 참을 수가 없었더냐? 나는 80 년이나 참았는데 너는 하루 저녁 , 한 시간도 그 노인에게 참을 수가 없었더냐? 이건 성경에 나오는 얘기 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찾아 보실 려고 하면 안되요. 그런데 성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히브리서 613 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 함하고 약속을 하실 때, 하나님이 약속하실 때 맹세하실 때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시면서 축복 하시기를 히브리서 614절에

 

"내 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리라". 그 다음에 히브 리서 615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 이 있어요. 따라서 읽으세요. 저가 여기서 저라는 것은 아브라함인데 요, 다시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아브라함도 참지 못했던 순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마침내 참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 니다.

아브라함도 마침내 오래 참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가 있었다. , 오래 참음의 교훈을 아브라함이 받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 랑하시는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라 고 말합니다. 우리가 실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견디고 오래 참 을 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격 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 입니다. 다시 읽어보시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 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인내를 이룰 때 이것이 바로 인격의 완성이라고. 우리 인격의 성숙에 가장 중요한 요 소가 바로 인내를 이루어 가는 것이 라고 오늘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렇 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인내할 줄 아는 사람, 오 래 참을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그 사람 되기 위하여 나에 게 견디기 어려운 이 시험을 허용하 셨다면 시험은 아프지만,

 

시험은 고통스런 것이지만 이것이 나에게 이런 인격적인 성숙과 온전함을 줄 수가 있다면 시험의 회오리,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조용히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 파요. 그러나 알겠어요. 기뻐할께요 '. 이것이 기쁨의 열매인 것입니다.

 

, 시험이 주는 유익이 또 하나 있 습니다. 시험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가? 세 번째로 시험은 우리를 지혜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시험은 우리를 지혜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시험 치르기를 싫어하는 학 생치고 똑똑한 학생이 될 수가 있을 까요?

 

, 시험이 오면 어떤 학생 이 시험지를 앞에 놓고 시험이 올 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도하는 것 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기 도하셔야 합니다. , 그러면 시험을 앞에 놓고 시험을 치르면서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게 될까요? 제일 바 람직하지 못한 것 이런 기도를 한다 면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시 험지를 앞에 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학생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 이 시험 안치르게 도와주세요. 시험은 안치를 수 없는 것이예요. 시험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예요. 시험은 통과해야 합니다. , 센스가 있는 학생이라면 그 시험지 앞에서 어떤 기도를 할까요?

 

하나님, 이 시험 잘 치르게 도와 주세요. 그런데 잘 치 르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뭘까요? 지혜입니다.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 그래서 잘 치를 수 있도록 도와 주 세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5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야고보 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 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 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 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 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 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 하라.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좋아 하신다는 겁니다. 무지무지하게 좋 아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후히 주 신다는 거예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혜를 구했다가 너무너무 수지 맞 았던 사람 생각나는 사람있어요? 솔로몬. 네가 한가지만 구해보라. 이 한 가지만 구해 보라 그러니까 뭘 구할까요? 한가지. 아파트 당첨권. 수지 2. 하나만 구한다면 뭘 구할 까요?

 

하나만 구한다면? 그 때 솔 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이 백성을 잘 다스리고 싶어요. 이 백성을 겸 허하게 잘 섬기고 싶어요. 하나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셔서., 그래? 너는 지혜만 줄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준다.

 

명성도 권위도 네 삶의 평안 함도 내가 다 주겠다. 그렇게 하나 님은 지혜를 기뻐하셨습니다. 지혜 란 무엇입니까? 저는 지혜는 지식과 다르다고 생각해요. 지식은 책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책에 서 얻을 수가 없어요. 지혜는 삶을 통해 얻습니다.

지혜는 일종의 판단 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 다 경험하지 않아도 올바른 판단 력, 올바른 센스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고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 게 나 자신에게 함께 유익이 될 수 있는 삶의 정확하고도 올바른 판단 력을 실행할 수 있는 지혜, 이 지혜 는 얼마나 존귀한 것입니까?

 

그래서 이 지혜를 가진다면 우리는 이 환난 과 고통을 잘 통과할 뿐만 아니라 통과한 후에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주님 앞에 서 있을 수가 있다 는 사실. 하나님은 초대 그리스도인 들에게 그것을 기대한 것 같아요.

 

사실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아마도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을 것입니 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 이 사람의 역사를 들추어 보면 이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형님이었던 예수님에 관해서 다소간 불신을 가 지고 있다가 나중에 진실한 신자가 됩니다.

 

훌륭한 신자가 됩니다. 초대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 다. 근데 그는 기도를 많이 했던 사 람으로 유명해요. 그래서 나중에 교 회의 사가들은 그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 주었는데 낙타의 무릎을 가지 사나이. 그는 기도를 많이 했던 사 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 를 통해서 그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 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 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아 름다운 리더쉽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11 절에도 어느 정도 이 사람의 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 님의 동생이니까, 지혜가 없었다면 나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폼잡고 다 녔을 거예요. 그러나 야고보는 이 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뭐라고 그랬습니까? 종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말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환난 시대의 교회를 리 드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순교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영광스럽 고 존경받는 순교자로서 일생을 아 름답게 마무리지을 수가 있었습니 다. 그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가 이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다 고 생각을 해요. 제가 미국 살 때 이렇게 운전하고 가다보니까 범퍼 스티카 미국 사람들 자동차 뒤에다 뭐 많이 써 붙이고 다니는데 범퍼 스티카 가운데 이런 스티카가 하나 있더라구요.

 

'When life hands you a lemon' 인생이 너에게 레몬을 주 거든, 레몬은 시고 쓰쟎아요? 인생 이 너에게 레몬을 주거든, 아주 쓰 고 신 레몬을 주거든, 그다음에 이 런 말이 쓰여 있어요. 'Make lemonade' 레모네이드 차를 만들어 라.

 

어떤 레모네이드란 말이 이것도 뭐 고장난 차 이런 다른 의미도 있 을 수 있지마는 어쨌든 이 쓰디쓴 인생의 경험이 오히려 달콤하고 아 름다운 인생의 축복으로 변모할 수 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

 

우리의 태 도 여하에 따라서. 만약 시험 속에 기도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이 기도 를 통해서 시험을 통해서 주님이 나 에게 주실 궁극적인 유익과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험 은 결코 파괴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고, 내가 인 내의 사람이 되고, 내가 지혜의 사 람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 주 앞에 서 있게 될 것 이다. 그렇다면 시험의 폭풍우 속에 서도 우리는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울면서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 리고 조용한 기쁨의 인격을 만들어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 분 가운데 시험을 지나고 있는 분들 이 계십니까? 두 가지만 꼭 기억하 고 싶어요. 결론적으로 시험이 올 때 꼭 시험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레슨을 우리는 마음 속에 잘 간직해 야 합니다.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로버트 브라우닝 해밀튼이라는 크리 스챤 시인이 있었는데요. 그분이 이 런 아름다운 시 한편을 썼습니다. 나는 쾌락과 함께 일 마일을 걸었다 네. 그녀는 그 그녀는 쾌락을 말하 는 거예요.

 

그녀는 계속 떠들어대며 말했다네. 그러나 그녀가 떠나간 다 음에 나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네. 근데 그 다음 문단, 나는 슬픔과 함께 또 일 마일을 걸었다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네 그러나 그 녀가 떠났을 때 나는 많은 것을 배 웠다네. 쾌락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 생은 교훈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 나 고통스런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는 인내하고 침묵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깊은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어떤 레슨을 주십니 까? 우리는 마땅히 그 교훈을 배워 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 더 배워야할 것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입니 다.

 

시험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 에서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을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제 가 좋아하는 헨리 나우엔의 그 책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어요. 그가 중 세기 어떤 수도사의 얘기를 인용하 고 있습니다.

 

아주 노련한 성숙한 존경 받는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 수도를 막 시작했어요. 아직 은 좀 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있는 젊은 수도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서 그가 흙을 만지면서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아주 견고하고 딱딱한 흙 을 만지면서 젊은 수도사 보고 여보 게, 여기 물 좀 붓지. 그래서 물을 부었어요. 근데 물이 딱딱한 흙이니 까 옆으로 다 흘러내려 갔어요. 이 딱딱한 흙은 물을 받지 못하는 구 만. 그렇지?

 

그러면서 옆에 있는 망 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 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막 파쇄 하고 부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젊은 수도사보고 여보게 다시 좀 물 을 부어보게. 부드러워진 흩어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자 그 물이 흙을 응 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수도사는 웃으면서 여기다가 말 이야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꽃을 피 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겠나? 우리는 이것을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이라고 말하 지.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 내가 깨 어지고 내가 부서질 때. 하나님은 거기서 기뻐하는 꽃과 아름다운 열 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 열매 를 위하여 아름다운 꽃을 위하여 때 로 하나님이 나를 깨시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때 원망하기 보다는 하나 님, 깨세요. 깨뜨리세요. 그리고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게요.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정말 참을 줄 아는 인내의 사람이 되고 지혜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 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는 기쁨의 찬미 를 노래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 기쁨의 열매에 도전해 볼 만한 삶의 열매가 아닌지요.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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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1-8/ 곽선희 목사

2014-11-18 20:09:13

 

여러분은 농기계에 대해서 얼마 나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제 농촌에서는 그 어느 집에든지 도끼라고 하는 아주 흔한 농기구가 있습니다. 도끼 날은 쇠로 된 것 입니다만은 도끼자루는 나무로 되 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끼자루 라고 하는 나무는 보통나무로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 를 깎아서 만일에 도끼자루를 만들 었다면 한 번 내려치면은 다 부러 져 나갑니다. 이 도끼자루라고 하 는 이 나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 무 중에 가장 강하고, 튼튼하고, 굳 은, 그런 나무로 만들게 되는 것입 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를 데리고

 

"자 우리 오늘은 산 에 가서 도끼자루를 좀 찍어보자."

 

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손자를 데 리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산 중턱에 보니까 그 바위틈에 곧게 자란 좋 은 도끼자루 될 만한 참나무가 있 습니다. 손자를 말하기를

 

"저걸 찍어서 도끼자루를 하면 되겠습니 다."할아버지는"아니다."

 

그러십 니다. 그 힘든 골짜기를 오르고 올라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한 참나무를 보고

 

"저걸 찍어라"하 고 말합니다.

 

"저런 나무는 저 산 밑에도 있었는데요. 저 나무 그늘 속에도 있었고, 바위틈에도 있었고, 계속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 높 은 곳에 와서 똑같은 저 참나무를 찍으라는 겁니까?"

 

그 때에 할아 버지는 말하기를

 

"비바람을 많이 맞지 아니하고 자란 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같은 이름의 참나무 이지만은 비바람을 많이 맞고 자란 그 나무라야만 쓸만한 도끼자루가 되느니라."

 

이것이 옛날 어른들이 손자에게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성공과 성취는 같은 게 아닙니 다. 어떤 객관적 이유에서 성공할 수는 있어도, 그가 누리는 성취라 고 하는 것은 그건 자기 나름의 것 입니다. 성장과 성숙은 또 같은 게 아닙니다. 성장이란 키가 자란 다는 얘기입니다.

 

멀끔하게, 아주 훤하게, 튼튼하게 몸은 자랐습니다 만은 성숙이라고 하면 이것은 속 사람 내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여 러분 성장은 있고 성숙이 없다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입니까! 몸의 성장은 있어요. 혹은 지식의 성장도 있어요.

 

많이 배웠어요. 똑똑해요. 인격의 성숙함이 없다 고 한다면 그 또한 아무 소용없는 인재올시다. 성숙함이 없다고 한 다면 그 또한 아무 소용없는 인재 올시다. 그런고로 성숙한 인격, 성 숙한 품격, 여기에 우리는 다시 초 점을 맞추고 생각을 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은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가슴을 찌르는 말씀 이기도 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 이 아니니라.' 여러분, 징계는 아 픈 겁니다. 그러나 징계가 없다면 내 자식 아니라는 거예요.

 

내 자 식이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대 를 걸고 있기 때문에 이 자식에게 는 꼭 징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 요. 징계 없이 사람되지 못하니까 요. 징계 없이 공부를 할 수는 있 어도, 징계 없이 인격이 바로 되지 는 않아요. 그런고로 많은 비바람 을 맞고 많은 역경을 통해서 단련 시켜서, 징계를 통하여 성숙한 인 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참 부모 요, 그리고 참 아들에게 대하는 태 도란 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 요. 시련이 없다면 이건 죽은 것 입니다. 또 시련이 없다면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권면 하고 징계하고 또 책망하고 하다가 마지막에 아주 낙심해서 포기할 때 에는 '될 대로 되라' 그래 버리고 맙니다. 그 다음에 상관하지 않습 니다. 그건 버려진 인간입니다. 포기된 인격입니다.

 

파산된 양심 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에 기 대를 걸고 있습니다. 살아있습니 다. 기대를 걸 만 합니다. 그럴 때에 그에게 징계가 있고 시험이 있고 시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러니까 시련이 있다는 것은 살았다 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매 질하는 사람은 없어요. 포기한 인 간을 향해서 징계를 운운하지 않습 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험이나 시련에 대한 우리 의 태도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회피형입니다. 어떻게 하 던지 피해보려고 또 시험 없게 해 보려고 합니다. 부모님들의 잘못 입니다. 시험,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그저 편하게, 편하게, 편 하게…… 그거 아닙니다. 회피시 키는 것, 그거 잘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잘하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시험을 피해보려고 하는 그 마음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원 망형입니다. 그 책임을 남에게 전 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 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 망하고, 다 원망하고, 책임을 남에 게 전달하고, 그리고 항상 원망과 불평에 살아가는 그런 인격이 있습 니다. 심지어는 부모님의 권고나 징계까지도 원망합니다.

 

또한 비관형입니다. 한계를 넘 어선 것처럼 생각해서 그만 절망해 버리고 맙니다.

 

또 하나는 낙관형입니다. 그 사람은 소망 가운데서 문제를 다시 재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시험, 모든 시련을 풀 수 있는 Master key, 열쇠는 바로 소망 문제입니다. 소망이 있느냐, 약속 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있으면 오늘의 시련이란 문제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다음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통해서 얻어 지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그것을 똑바로 알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시련인들 문제 삼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최근 미국에 스웬슨 박사님이 쓰신

 

"Margin"이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삶의 구조를 설명하고 그 특성을 말하는 중에 한마디로 말해서 Margin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유가 없는 것이 현대인의 삶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 여 유가 없느냐? 없는 게 아니에요. 넉넉한데 스스로 자기 스스로 여유 없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가두고 속박해 나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서적 메마름이 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정서적으로 고갈 돼 있고, 또한 신체적으로 탈진상 태에 있어요. 대개 보면 현대인이 피곤해 보여요. 얼굴 보면 떴어요. 누렇게 떴어요. 벌써 화기가 없어 요. 생기를 잃어 버렸어요. 먹기 는 잘 먹는 것 같은데 벌써 화색이 없어요. 건강지수가 떨어졌습니다. 또 쫓기는 삶입니다.

 

자유가 없어 요. 언제나 무엇에 쫓겨서 뭐 그 렇게 바쁜지 조금도 여유가 없어 요. 그리고 재정적 압박감을 누리 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정말 내일 일은 내일 해결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밥을 굶은 것도 아 니고,

 

옷을 벗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돈에 쪼들리는 지. 어떻게 이보다 더 어려운 때도 살았는 데…… 우리는 넉넉히 가지고도 아주 빈곤한 사람으로 살아요.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느냐? 이것이 바로 여유 없는 인간, 현대 인의 특징이란 말입니다.

 

경험주의 신학자인 다니엘 데이 윌리암스라고 하는 박사님의 우리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 그 주는 의 미를 세 가지로 설명해 나가는 것 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 리가 많은 시련을 통해서 Identity 를 얻는다"

 

그래요. 정체감을 알 게 된다.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린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우린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 려운 시련에 딱 부딪칠 때 '내가 누구냐' 다시 말하면 한계상황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가 끝이구나. 내가 추구했던 것이 뭐냐, 내가 바 랬던 것이 뭐냐!'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욕심을 정비하게 됩니 다.

 

오늘 본문도 15절에 보면은 유명한 말씀 있지 않습니까? '욕 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를 장 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저는 그 래서 요새 그런 생각을 해요. 욕 심이 잉태하여 IMF를 낳고. 이제 회개하지 못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그걸 알아야 돼요. 이 무얼 말하 는 거예요. 도대체가. 우리의 욕 심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어떤 작가가 재미있는 글을 썼 더라고요. 이제 앉아서 자기 묘비 명을 써라. 나의 무덤에 묘비명을 먼저 써 놓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남은 시간을 살아라.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비석을 뭐라고 쓸 겁니 까? 당신 스스로 한 번 써 보세 요.

 

아주 욕심 덩어리입니까? 형 편없는 인간입니까? 무슨 묘비명 을 써야 됩니까? 어떤 부자가 세 상을 떠났는데 아버지를 위해서 묘 비를 쓰려고 그래 유명한 사람을 찾아가서 써 달라고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느냐? , 뭐라고뭐라고 설명을 아무리 해도 설명할 게 없어요. 그거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 욕심이 많았 어요.

 

그랬어요. 그래, 그 묘비명 을 쓰는 분이 뭐라고 썼는고 하니 '먹다, 죽다.' 그랬다고 그래요. 뭐 그것밖에 쓸 게 없으니까. 당신의 묘비명을 당신이 써라 이거예요.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자기 죽음에 대 해서 미리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 든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싶다.

 

저 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라 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 이다. 그 한마디가 내 마지막 소 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묘비명을 써야 합니까? 또한 지능 목록을 한번 살펴보세요. 무 엇을 알 수 있습니까?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습니까? 이제는 정리해 야 될 때가 됐습니다.

 

저는 조금 불만이 있어요. 가 끔 식당에 식사하러 가면 뭐라고 써 붙였는고 하니 '냉면전문'하고 써 붙였어요. 그 냉면 하나 밖에 없어서 잘하나 보다 들어갔더니 냉 면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불고 기에다, 만두에다가, 지짐에다가, 뭐 많이 하더라고요. 도대체 이 집이 냉면전문이라는 거예요. 여 러분 이것 때문에 우리가 망한 걸 아십니까?

 

왜 그렇게 욕심이 많아 요? 냉면 하려거든 냉면만 잘 하 시고 다른 거 좋아하는 분은 좀 다 른 집으로 가라고 하세요. 한 집 에서 다 팔아버리려고 하지 말고 안 그래요? 만두 좋아하는 사람은 저 집으로 가고, 빈대떡 좋아하는 사람은 저 집으로 가세요.

 

오로지 냉면만 우리 집으로 오세요. 이게 바로 정리해고라는 거예요. 이게 구조조정이라는 거예요. 도대체 재벌이라는 말과 회장이라는 말은 이것은 영어로 번역 받지 못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영어로 '자이벌' 그런다고요.

 

왜요? 세상에 없는 말이니까.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요? 한 가지, One item! 하나만 좀 잘하세요 제발! 하나도 신통치 않으면서 뭐 그렇게 많이 해서 욕 심부리다가 이 난리를 맞은 거예 요. 그 좀 다른 사람도 벌어먹도 록 해주세요. 왜 저만 벌겠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 사업도 좀 되 게 해주세요. 왜 나만 혼자 하겠 다는 거예요.

 

이게 망조라고요. 전문화, 세계화는 전문화예요. 기 능화올시다. 생각을 바꾸세요. 다 른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이건 저런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이것 하나만! 그것이 충실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시련을 통해서 욕심을 조정해야 돼요. 줄여야 돼 요. 아주 작게, 아주 작게! 여태 까지 작은 사업, 작은 정부 그건 무얼 말합니까?

 

수없이 들으면서 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요. 이 제는 깨끗한 마음으로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다른 사람이 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정체를 분명히 해 야 돼요. 한계의 상황을 바로 이 해해야 된다 말이에요. 이것이 시 련을 통해 얻는 것이에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없는 것 이 무엇인지 한계를 알게 합니다.

 

또 하나는 Communication! 소 통을 가능케 합니다. 대개 보면 일이 잘못될 때는 다같이 교만해 요. 그래서 소통이 없어요. 아내 와도 말이 없고, 친구와도 말이 없 고 모든 사람은 다 그저 무시하고 자기만 잘났지.

 

이것이 바로 어려 운 시련을 당하게 되는 이유입니 다. 이제 이 시험과 함께 우린 생 각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알 고, 이웃과의 대화를 열어야 되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열어야 돼요. 이제 비로소 낮추고 낮춰서 아주 겸손한 가운데서 벽 없이 격이 없 이 마음을 열고 소통합니다.

 

아시 는 대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끼리 소통해요. 실패한 사람들끼리 소 통해요. 실패하고도 아직도 소통 이 없다면 그 사람은 좀 더, 좀 더 뜨거워야 돼요. 아주 발바닥이 밑 에 땅에 닿을 때까지 겸손해 져서 아주 완전한 서민으로 돌아가서 너 와 나의 수평관계에서 대화할 수 있는 그러한 소통을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는 치유능력이 생깁니다. 이건 좋지 않은 말입니 다만은 지금 북한에 식량이 없어서 너무 어렵거든요. 식량배급을 못 주어서. 그러니까 그분들하고 얘 기를 하면서

 

"아이고! 이렇게 몇 달 동안 혹은 어떤 때는 몇 년 동 안 식량배급을 안 주면 어떻게 사 노. 당신들 참 딱하다."고 했더니 대답이 뭔지 아세요?

 

"아니에요. 식량배급을 안 주어 봤더니 자생능 력이 생겨요."

 

그래요. 이 무서운 소리입니다. 자생능력이요. 하기 야 그렇죠. 여러분, 우리가 이 고 난을 당할 때 그 고난 속에 깊이 들어가 보면은요 사실은 자생능력 을 얻습니다. 자기 치유능력을 얻 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도 3D 기피 현상이 있습니다.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 안 하겠다고. 요새도 보니까 어떤 회사에서 사람을 모집해도 사 람이 안 온대요. 힘들다고. 며칠 하고 다 가버린대요. 이게 어려운 거 아닙니까? 그러나 아시는 대로 분명히 생각해 보세요. 3D를 떠나 서는 절대로 지식도 없고, 깨달음 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 람은 남달리 고생을 많이 한 사람 이에요. 돈 없고 힘든 일 한 사람 이에요. 뼈가 부러지도록 일한 사 람이에요.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능력의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고난 속에서 힘을 얻습니 다. 자생능력을 얻습니다. 극기 능력을 얻습니다. 3D속에 깊이 들어 갈 때 창조적 능력을 얻게 되 는 것이에요.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은 말합니 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 온전하다는 말은 텔레이오스라 (perfect)가 아니고 이것은 파스 (every)라고 하는 말입니다. Every circumstances, 모든 경우에 서 기쁘게 여기라. 이런 일을 당 하나 저런 일을 당하나 모든 경우 에서 기쁘게 여기라. 왜요?

 

믿음 의 시련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통해서 믿음을 얻고, 믿음을 굳히 고, 믿음을 성장케 하기 때문에 금 보다 귀한 중요한 가장 큰 신용과 믿음, 이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자 라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요.

 

우 리는 건강을 잃으면서 믿음 얻는 사람 많이 봅니다. 재산 잃어버리 고 모처럼 믿음을 정비하는 사람을 봅니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하나 님은 믿음 외의 다른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 그 뜻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인내를 이룬다고 했어요. 끈기를 이룹니다. 구체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또 현대인이라는 게 대체로 너무 약해요. 의지가 약해요. 이건 시련을 못 겪었기 때문이에요. 많은 시련을 겪어야 돼요. 끈기 있는 인간이 됩니다.

 

세상에서 뭐 요새 골프가 유행 입니다만은 야구라고 하는 운동이 있는데 베이브 루스(Babe Ruth)라 고 하는 유명한 야구 왕이 있습니 다. 그는 1976년까지는 세계 제일 입니다. 왜냐하면 홈런 왕으로써 714개의 홈런을 날렸어요. 그래서 홈런 왕이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이 사람이 홈런 왕인 동시에 Strike-out 세계 기록보유자라는 건 모르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는 1330번의 Strike-out을 당했습니다.

 

1330번의 실패가 있고 714개의 홈 런을 날린 것이요. 사람들은 실패 한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홈런 왕만 생각하더란 말입니다. 많은 시련이 없이 강인한 인격이 존재하 지 않습니다. 훌륭한 믿음도 없습 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오늘 성경 말씀은 '온전히 기뻐하 라.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 게 하여야 한다.'

 

구비한다는 말은 완전무장이라는 말이에요. 능숙해 진다는 말이에요. 앞으로 어떤 시 련을 당해도 잘 넘길 수 있어요. 문제가 되질 않아요.

 

저는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들 었어요. 다방 레지로 있던 사람이 결혼을 하면 그렇게 잘 산다면서 요. 그거 왜 그러냐 하니까 다방 레지로 있을 때 그 별 남자들 많잖 아요? 그 싱거운 소리하는 걸 다 척척 받아넘기다가 능숙해져서 그 다음에 결혼해 가지고 남자 하나쯤 휘어 잡는 건 문제가 아니래요

 

그 것은. 좀 능숙해야 된다 이거예요. 근데 뭐 한마디에 눈물 짜고 죽는 니 사는니 이런 겁나는 여자하고 어떻게 삽니까? 안 그래요? 좀 능숙해 져야 되는데 이게 어디서 오느냐? 많은 시련 속에서. 그런 고로 과거도 아니요, 현재도 아니 요. 오로지 미래! 약속의 땅을 바 라볼 때, 이 오늘의 당한 시련은 잘 견딜 수가 있는 것이요.

 

여러분! '' 라고 하는 질문은 더이상 하지 맙시다. 과거는 그만 합시다. 그만 들추어요. 밤낮 청 문회 해 봤자 별 것도 아네요. 그 만하고 우리에겐 미래가 있을 뿐입 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길 것입니 다. 왜냐하면 이것은 살았다는 증 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시 련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 미하기 때문이요, 쓸모가 있기 때 문이요, 적어도 온전히 기쁘게 여 길 것은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생각하시고 더 유익 하게 더 훌륭하게 더 크게 쓰시고 자 하시는 깊은 섭리가 있는 것으 로 확실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여 러분,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 쁘게 여기는 거기에 도달해야 오늘 의 시련을 극복할 것입니다.

 

 

온전한 인내의 사람 /1:2-8/ 곽선희 목사

2014-11-20 13:54:14

 

테크노 가수 이정현이 불러서 아 주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는 '바꿔'라 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랫 말입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가고만 있어/어느 누굴 믿 어 어찌 믿어 더는 못 믿어/누가 누 굴 욕하는 거야/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해/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속의 속물들이야/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사랑도 다 바꿔 거짓도 다 바꿔 세상을 다 바꿔"

 

노래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바꿔'라는 소리밖에 들린 게 없는데 그 가사내 용을 알고 나면 이런 겁니다. 참 절묘하게 이 세계를 풍자하는 노래 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빌게 이츠라고 하는 유명한 분, 여러분 다 아십니다마는 그가 '생각의 속도' 라고 하는 책을 써서 작년에 세계적 으로 많이 읽히워졌던 때가 있습니 다. 그 책 속에서 말합니다.

 

1980 년대를 퀄리티(Quality)의 시대라고 합니다. 1990년대 가리켜서 리엔지 니어링(Re-engineering)시대라고 했 습니다. 2000년대를 내다보면서 스 피드(Speed)시대라고 했습니다. 속 도의 시대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변화의 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변화에 속도를 가합니다. 이 변화속도, 모든 것이 빠르게 변 하고 있는데 문제는 생각의 속도입 니다. 사물과 세상은 빨리 변하는 데 내 생각의 속도가 그것을 따라가 지 못하면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 이올시다. 여기는 안정이 없는 것 입니다.

 

불안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생각에 속도를 가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그것만 이 아니지요. 생각컨데 인식의 속 도가 문제고, 조화의 속도가 문제고 요, 다 소화하고 균형을 잡아야 되 겠는데 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 로 달려가면 이거 어떻게 되는 겁니 까?

 

이 발란스를 잃어버리면 안되 거든요. 이 철학의 속도가 중요합 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 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방향입니다. 이렇게 변해나갈 때 어느 방향으론가 가고 있단 말이요. 어느 방향으론가 가고 있는데 도대 체 어디로 가는 거냐 하는 것이 문 제고, 변화의 목적이 문제고 변화의 동기가 문제입니다.

 

변화의 동기가 미래냐, 과거냐, 현재냐 하는 겁니 다. 보다 더 앞에 있는 밝은 미래 를 바라보며 우리가 급하게 변화하 고 있는 거냐, 아니면 과거에 몰려 서 그저 막연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변화는 다가오는 거냐, 아니면 현재 라고 하는 것이 지겨워서 '에라, 모 르겠다 아무렇게나 바꿔보자. 못 살겠다 바꿔보자.' 뭐 그런 얘기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문제 지요. 그런고로 최종목표 궁극적 가치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변화에 속도가 가해진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에 여기에 미치지 못한 다. 우리의 철학이 이것을 따라잡 지 못한다 할 때에 우리의 도덕이 이걸 함께 가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 할 때 세상은 아주 망가지고 마는 겁니다. 인생도 다 망가지고 맙니 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인내를 온 전히 이루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오늘 이 세대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큰 변화, 속도가 가 해진 무서운 변화 속에서 나는 무엇 을 생각하고 있느냐. 이 변하는 세 대의 속도와 함께 나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느냐. 이제 그 변화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 가 일치하게 될 때 거기에 안정이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면 내 마음 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러분 생 각해보세요. 자동차가 달립니다. 내가 서있을 때 보면 자동차가 급하 게 달립니다.

 

그러나 내가 차를 타 고 빨리 가는 차와 똑같은 속도로 가면은 두 차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 집니다. 전 하나 재미있는 걸 하나 늘 느낍니다. 내가 운전을 할 때는 내가 모는 차의 속도와 내 생각의 속도가 같이 가기 때문에 아무리 빨 리 가도 빨리 간다고 느끼질 않습니 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이거 안되겠는 데' 좀 천천히 가라고. 그게 불안해 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운전 대를 잡으면 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생각의 속도란 말입니다. 가장 큰 성공의 비결은 안정의 비결 은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와 함께 내 생각의 속도에 가속을 붙이는 겁니 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하 고 어엿하게 때로는 고요하게 넉넉 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 게 있어야 합니다.

 

인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이나 혹 은 거부라든가 혹은 증오라든가 혹 은 굴복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 다. 여기 인내하고 하는 말, 휴퍼모 네라고 하는 말은 어엿하게 대처한 다, 넉넉하게 수용한다, 그리고 사랑 으로 대한다, 이것이 인내올시다.

 

자 이제, 우리는 인내를 생각하면 서 먼저 하나님의 인내를 생각합니 다. 인내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 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는 성 경 전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 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비유,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은 이렇게 참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탕자가 탕자 됩니다. 그 탕자 됨을 참아주십니다. 그가 집을 나갑니다.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참아주십니다. 그가 가서 어떻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참아주십니다. 그가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에 그를 영접해 주십니다.

 

아버 지의 인내,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 좋은 아버 지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넉넉 합니까, 얼마나 어엿하게 인내하셨 습니까. 다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라고. 히브 리 12장에 보면 역력히 말씀하십니 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두 가지입 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참으사'그 랬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 를 보세요. 그 모순과 부조리한 그 십자가,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서 말 이 없으신 예수. 빌라도가 뭐라고 하든 제사장이 뭐라고 하든 예수님 은 벌써 뜻하신 바가 있어서 조용하 게 참으시고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까 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운명을 생 각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인 애하심.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내가 있어요. 이것을 본받으라. 또 있어 요. 그것은 죄인들이 거역한 자, 죄 인들의 거역함을 참으시는 예수를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멀리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지금 본 직책 을 버리고 갈릴리에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찾아가서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조반을 대접하면 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내가 있습니다. 우리 의 부족함, 우리의 허물, 우리의 나 약함을 다 참아주셔서 엄청나게 참 아주셔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의 인애하심, 깊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다시 본문 성경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 우라. 야고보서에서는 '농부의 인내 를 배우라',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 을을 기다리는 것처럼, 또 다시 야 고보서에서는 말합니다.

 

'욥의 인내 를 배우라 그리고 본을 삼으라', 욥 기를 우리가 압니다. 물질과 가정 과 재산과 건강과 의를 다 잃어버렸 어요.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이 많은 고생을 치르나 그러나 그는 하 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꾸준히 기 다립니다.

 

인내합니다. 욥의 인내. 그래서 그 결말을 봅니다. 욥은 다 시 큰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그 결 말을 보고, 그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 없는 인내는 고통입니 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절망입니 다. 결국은 믿음과 소망, 이것이 그 속에 있을 때 넉넉하게 어엿하게 참 아나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 성경에서 인내의 지혜 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참 을 것이냐고요. 먼저는 시련의 원 인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 니다. 오늘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먼 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아주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M. Scott Peck)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더 로드 레스 트레블드(The Road Less Traveled)'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아직도 가야할 길' 그렇게 번역이 됩니다. 이 책에서 많은 정신병자 들을 치료하면서 정신병이 왜 걸렸 을까? 또 어떻게 해야 정신병자가 나았나? 어디서부터 치료가 되기 시작하나?

 

그의 많은 경험과 지식 으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해줍니다. 맨 먼저 중요한 것은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벌써 50%는 병이 낫는답니다. 내 불행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세상 에 있다고, 남을 원망하는 동안은 절대로 병이 낫지 않습니다. 이건 구제불능입니다. 그걸 알아야합니 다. 애당초 정신병 걸린 이유도 바 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 불행의 원인이 나 외에 다른 데 있다고 생 각하면서부터 병에 걸리는 겁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그러나 '이것이 나 자신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순 간부터 벌써 치료가 되기 시작을 합 니다. 그걸 말하고 그걸 설득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시간이 걸립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이 고통은 나 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내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다.

나의 인간을 위하여, 나의 생각 을 위하여, 나의 철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시 련은 유익한 것이다. 이걸 긍정적 으로 대하게 되는 것, 이것을 통해 서 발전하고, 이것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궤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사건 앞에 진실해지고, 그리 고 삶의 균형을 잡게 됩니다.

 

그것 은 자기가 당한 지금 어려움에 몰두 하지 아니하고 좀더 멀리 떠나서 현 실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음의 균 형을 잡게될 때 치유는 가능하게 되 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씀 합니다마는 '시련의 원인이 나 자신 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인내의 시작입니다. 또 한가 지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그 초점을 믿음에 맞추어 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고, 믿 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그것이 시련이 있는 이유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헤맵니다. ?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만나를 일년 분을 한꺼 번에 주지 아니하시고 매일매일 주 십니다. 아침마다 거둬들여서 식사 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용 할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 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 님만 의지하고 시간시간 매일매일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이 시련을 주 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 각해야합니다. 믿음,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때때로 물질이 중 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건강이 중 요하지만 좀더 달관된 세계에서 생 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은 오직 믿음만 중요합니 다. 깨끗한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 는 순수한 믿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시련 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걸 인정해야 하고, 또 한가지는 이 시 련은 시련이지 시험이 아니라는 겁 니다.

 

같은 개념같이 보이지만은 시험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있고, 시 련이란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험은 남을 넘어뜨리게 한다고 하 는 그런 의미가 있는가하면 시련은 이것을 통해서 강하게 만든다는 뜻 이 있어요. 마치 훈련과 같은 거예 요. 그런고로 이 사건 속에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말입 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구 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비한다는 말은 헬라 원문대로 하면 완전 무장한다는 뜻 입니다. 군인이 무장을 하고야 일 선에 나가잖아요. 제가 최일선에서 군인으로 있을 때 보니까요 이제 전 쟁의 실전에 나가게 되면요 탄약을 쭈욱 갖다놓고 수류탄 많이 갖다놓 고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지 고 가라 그래요.

 

그래서 군인들의 옷이 그렇게 얼기설기한 거예요. 모조리 갖다가 수류탄을 여기다 걸 고, 여기다 걸고, 허리에다 띠고, 또 탄알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 갈 생각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욕 심 많게 많이 가져다 넣고 일어서질 못해요. 왜요? 어떻게든 이걸 가 지고 가야하거든요. 맨손으로 싸우 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비 해야 합니다.

 

이 시련을 통하여 계 속 훈련을 받아서 강인하게 훈련을 받아서 채워나가야 되는 것이거든 요. 그러니까 여기에 의미가 있어 요. 그래서 고칠 것을 고치고,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고, 깨 달을 것을 깨닫고, 사랑할 것을 사 랑하게 만드는 것, 시련을 통해서. 이것을 알고 인내하시는 거지요. 이것을 알 때에 참을 수 있는 거지 요. 유익한 것이니까.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까. 그런고로 또 한가지 오늘 성경말씀에 아주 중요 한 요절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 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 라. 기쁘게 여기는 것, 그리함으로 그게 참는 거예요. 여러분 참는다 는 거, '두고보자' 이거예요. 이를 갈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세 타령 하면서, 그건 참는 게 아니에요. 찬 송을 불러야 참는 거예요. 기쁘게 여겨야 참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 을 알아야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서 53절에서 말합니다. 환난 중 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 는 줄로 앎이니라. 인내가 필요해 요. 소망이 필요해요. 그런고로 우 리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는 거예 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게 되 기 때문에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 이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이에요. 사 도바울은 로마서 837절에서 말합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서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 히 이기느니라, 이것이 인내요.

 

사람은 임종시에 세 가지를 후회 한답니다. 첫째가 좀더 베풀 걸, 둘 째가 좀더 즐길 걸, 셋째가 좀더 참 을 걸. 참지 못한 유감이 우리 마 음을 임종시에 괴롭힌다고 합니다.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대만의 역사가이자 사학자이자 작가인 백양 이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이 있습니 다. 그 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일본 사람하고 미국사람하고 중국사람 세 사람이 밀폐된 돼지우리 속에 들어 가서 돼지가 있는 돼지우리 속에 들 어가서 상금을 걸고 인내심 경기를 하게 됐습니다. 누가 오래 참나 보 자. 일본사람 들어가자마자 아이고, 숨 막혀 못 견디겠다고 나왔고, 미 국사람 어지간히 견디더니

 

"아이고, 이제는 실신하게 되어서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나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중국사람이 안 나옵니다. 심사위원들이 들어가 보니까 돼지를 떡 베개하고 누워 자고 있더랍니다. 이 중국작가는 말합니다.

 

이것이 중국사람이라고. 이것이 중국사람 의 저력이라고. 여러분 인내로서 승부가 결정이 됩니다. 얼마나 참 느냐, 얼마나 잘 참느냐, 얼마나 넉 넉하게 참느냐, 얼마나 어엿하게 느 긋하게 참아내느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말든 내가 어엿하게 대처하 면 그게 생각에 속도를 가하는 거예 요. 변화를 즐겨야 합니다.

 

겁내지 맙시다. 파도 타기하는 청년들처럼 파도가 밀려오면 타고 즐기는 거요. 세상 파도 무서워하지 맙시다. 우 리 앞에는 확실한 약속의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 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 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생각컨데 넉넉히 참을 수 있었던 일에 참지 못한 일 이 너무 많았습니다. 인내가 부족 함으로 해서 많은 실수가 또 있었습 니다.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이 급 변하는 세대에서 우리의 마음은 고 요하게 하시고 넉넉하게 잘 수용하 면서 참고 견디는 가운데서 하나님 이 약속하신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승리할 수 있는 주의 사람으 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넉넉히 이기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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