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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야고보서 설교 모음

야고보서 2:14 - 26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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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26/ 행함이있는 믿음 / 한경직 목사

2014-08-23 16:38:48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二十六)

 

지난주일신앙의 정로(正路)라고 하는 문제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신앙의 바른 노선을 찾아야 된다고 하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다 사실이지마는 오늘 아침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노선을 찾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행함이 따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가르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외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그 진리와 모순되는 듯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학적 견지에서,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위 곧 자기의 있는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唯一)의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확실히 가르친 것이며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진리가 꼭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 견지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이 믿음은 참 믿음이어야 되겠고, 이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참 믿음은 무엇으로 알 수 잇느냐?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로써 믿을뿐더러 입으로써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실지로 행위에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그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옛날도 필요해서 이와 같이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신 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언제나 필요하고 오늘날도 우리에게도 또한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믿음과 행위, 이 문제를 가지고 성신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잠깐 생각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진리는 뿌리요 행위는 열매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납니다. 나무가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열립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 대 원리(政治六大原理)가운데 진리와 행위에 대한 원리가 그 원리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진리와 행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외치기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참 믿음과 회개가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삭개오가 과연 예수를 믿고 회개하였습니까? 무엇을 보고 압니까?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토색(討索) 하였던 것을 네 배나 도로 갚아 주었습니다. 있는 것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 몇 해 전에 가져갔던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될 재봉틀을 돌려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믿음이 있습니까? 반드시 열매도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인정합니까? 어째서 인정합니까? 행위도 따랐습니다.

 

고향과 친척을 다 이별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나라로 가라고 할 때에, 순복해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간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모리야산에서 자기의 독생자까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기생 나합이 과연 믿음을 가진 것으로 인정합니까? 왜 인정합니까?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정탐 군들을 잘 숨겨주고 피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반드시 행위가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믿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믿을진대, 우리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진대,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선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생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생활의 특징이올시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하고 그와 반대로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을수록 마음은 더 교만해지고, 욕심은 더 많아지고, 돈을 더 사랑만 하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그 믿음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성결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불결하고 깨끗하지 아니한,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 믿음입니까? 믿음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는 진리이십니다. 예수에게 허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와 같은 주를 내 주로 섬기면 아무래도 우리 생활과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이 진실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성경이 그르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 그냥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허위를 선전하고 모략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중상하면,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생활에 있어서 양심적인 생활로 반드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사업을 할 때에든지, 금전거래를 할 때에든지, 사교적 생활을 할 때에든지 모든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인 방면으로 반드시 우리의 생활이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지만, 오래 믿었다고 하며 햇수도 길었다고 하면서, 비양심적인 태도와 비양심적인 생활을 그냥 계속해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까? 행위는 믿음의 필수적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마음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그것은 첫 대지에 따르는 진리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열매인 까닭으로 우리는 그 반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는 결국 믿음의 진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바른 믿음이냐? 그릇된 믿음이냐? 결국은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알게 됩니다. 열매인 행위를 보아서 우리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행위를 보고 열매를 보아서 판단하라고 몇 번이나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나무는 종류를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사과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요, 열매가 배면 그 나무는 배나무요, 은행이 열리면 그 나무는 은행나무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줄 생각합니다.

 

혹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신앙은 정통인데 행위는 이단이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연 모순되는 말입니다. 신앙이 사실 정통이면, 참 신앙이면, 그 행위도 정통입니다. 사실 그 행위가, 이단적이요 비 기독교적이면, 신앙도 옳은 신앙은 못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입으로만 떠들고 사실은 믿지 아니하던가, 그릇 믿던가, 혹은 시험에 들어서 병든 믿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에 있는 말씀을 지금 다 들었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여기 분명히 그와 같은 열매 없는 믿음은, 말로만 하는 믿음은, 일용할 양식 없는 이에게 평안히 가서 잘 먹고 잘 있으라고 말하듯 말만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송장과 같은 믿음이올시다. 썩어진 믿음이란 말입니다. 백합화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가러나 백합화가 썩어지면 냄새는 제일 고약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게 귀한 신앙이라고 죽게 되면 냄새가 날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보다 더 격렬한 말씀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十九절 읽는 것을 다 들으셨을 줄 압니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말만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귀신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봅니다. 우리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종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예배하지 아니합니다. 말만하고 실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 귀신이 가진, 마귀가 가진 믿음과 같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준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른 신앙의 노선을 찾아서 바르게 믿는다고 하지마는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격으로 행함이 없으면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복음과 우리의 복음 적 믿음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를 해도 관계하지 않다 든 가, 또는 우리가 어떤 진리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비 신앙적 행동을 감행하여도 관계하지 않다고 하는 사상처럼 비 성서적이요, 위험한 사상이 우리 신앙 생활에 없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을 가진 이는 자연히 마지막에는 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위선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훼방을 받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試金石)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깨닫고 내 행위로서 내 신앙을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행위는 최후 심판의 표준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맙시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결국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 행위로서 판단한다고 성경에 말하였습니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주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 十七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면양과 산양의 비유를 기억하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면양 편에 있는 의인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 영원 전부터 내 아버지께 축복을 받은 이들아, 너를 위하여 준비한 복을 나와서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찾아와 보았고 내가 병 가운데 있을 때에 너희가 와서 위문하였느니라.

 

고 하셨을 때 의인들이 하는 말이주여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서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려서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옷을 드렸으며,

 

언제 방문했으며, 언제 찾아가 보았나이까?그 때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우리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주께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입니다.

 

예수께서 역시 유명한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 칭찬과 상을 주신 후에, 마지막에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 그 종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셨습니다. 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이제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셔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발라 버렸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만하고 열매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의 지도를 받고 따라가던 유대 민족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주후 七十년에 송두리째 멸망을 당한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최후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의 세 가지 큰 덕으로, 이 세 지가 합해서 아름다운 행실로 나타나야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소망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사랑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산보훈을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말대로 한다고 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교도나 유교도보다도 그 행위가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다고 한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어느 사람이 예배당에 다니는 거나 안 다니는 거나 그것이 뭐 신앙의 표준이 됩니까 라고. 이런 말을 들을 때처럼 기막힌 때는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하나 더 인용하고 그만 두겠습니다. 야고보 二十二절에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듣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 얻는 줄도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른 노선을 찾을뿐더러 산 신앙을 우리가 얻어서 우리의 행위로 나타나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믿음과 행함 /2:14-26/ 염두철목사

2023-02-05 11:36:26

 

1859년 미국의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외줄을 걸고 횡단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장대 하나만 들고 무사히 건너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격려하듯 큰 소리로 믿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곡예사는 여유 있는 자세로 외줄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외줄을 타는 동안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가 안전하게 도착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곡예사는 반대쪽으로 건너기 전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람을 등에 업고 건너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건널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까?” 사람들은 또 다시 믿습니다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곡예사는 용감해 보이는 청년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제 등에 업히시겠습니까?” 곡예사의 초청에 청년은 하얗게 질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때 곡예사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것이 진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살인 자신의 딸을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 기네스북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이 충만하다고 믿음이 충만한 것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를 가졌다고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른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에 대해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바울이 정죄하는 행함과 다릅니다. 바울이 비판적으로 말하는 행함은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을 입증하려는 행위입니다. 즉 바울이 믿음의 뿌리를 말했다면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를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무효화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즉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보다 못하기에 믿음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복음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에 행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로, 우리의 믿음에 행함이 없으면 자신을 구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믿음이 능히 너희를 구원하겠느냐하지 않고 그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불완전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 속에 행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이 진짜인지 죽은 믿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행위가 바뀌지 않는다면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죄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고,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어느 편에 섰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마귀 편에 서서 마귀 일을 하던 사람이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리에 있다면 구원을 얻은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도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무디(D. L. Moody)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 구원에 대한 말씀이 증거 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청년은 무디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때 무디가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 믿기는 하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무디는 그 청년에게 요한복음 524절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디가 청년에게 이 말씀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니 청년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었습니까?”라고 묻자 청년은 글쎄요라고 대답합니다. 무디는 한 번 더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믿는 자가 영생을 얻었다면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하나님을 무시합니까?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면 있는 것입니다.” 무디의 고함에 깜짝 놀란 청년은 그러면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까?”라며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라는 무디의 말에 청년은 구원의 확신 없이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청년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무디가 은퇴한 후에 무디의 후임자가 된 윌버 체프맨(J. Wilbur Chapman)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 자신도 구원에 이르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믿음에 행함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5-16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믿음이 좋아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었는데, 굶주린 사람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면서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자이겠느냐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옷 한 벌과 밥 한 끼를 먹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다면 아무리 큰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무익한 믿음일 뿐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길을 지나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돕기는커녕 다른 길로 피하여 가버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경건한 믿음을 가졌노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야고보는 본문 17절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입증하는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Leo Tolstoy)가 길을 가는데 걸인이 나타나더니 손을 내밀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동전이 한 푼도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걸인의 손을 꼬옥 쥐며 속삭였습니다. “형제여, 미안합니다. 지금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때 걸인은 미소를 지으며 톨스토이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한 푼의 돈보다 귀한 것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믿음도 행함으로 나타날 때 유익의 역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에 설복이 되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의 말에서 우리는 행함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누구에게든 유익을 주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믿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누구에게나 유익을 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믿음에 행함이 없으면 귀신들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본문 18-19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는 행함이 없으면 귀신들의 믿음과 다를 바가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마가복음 57절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말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말은 귀신이 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하지 마옵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행전 1617절을 보면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 소리 지르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귀신같이 잘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귀신들은 잘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만 귀신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귀신만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다 해도 귀신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며, 다시 천사들로 바뀌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있고 귀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귀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귀신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아는 데서 더 나아가 믿음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 20절에서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헛것이라는 말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59절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우리의 믿음에 행함이 없으면 하나님께 아무 상급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한 실제적인 예로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어 그들이 행함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복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1-22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그가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일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다면 하는 무서운 신념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의롭다 인정을 받았지만 이삭을 드린 일로 그 믿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을 통해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길은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순종, 위대한 행동은 위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종의 결과를 본문 23-24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하나님은 행함으로 믿음을 입증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시고 하나님의 벗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벗의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으로 대우하셨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상급을 베풀어주십니다. 벗으로 삼아주십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2:8-13) 행함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使者)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말은 라합이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으며(6:23),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1:5).

그래서 후대에 신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언급이 되고 히브리서의 믿음장인 11장에 그녀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11:31).

주의 형제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대조적인 라합을 예로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보시고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성경대로 천국 문이 진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습니다. 힘껏 두드리니 문이 열리며 베드로가 나타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집사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천국에 들어오려면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증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정합니다. “증표를 찾아도 없네요.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저는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베드로는 단호히 말합니다. “증표 없이는 안 됩니다. 믿음의 행함도 없이 교회 마당만 밟고 다녔으니 무슨 증표가 있겠습니까? 그만 돌아가십시오.”라며 천국 문을 닫아버립니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이름뿐인 집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신실한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든 이야기이지만 교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신앙생활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바로 믿음의 증표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26절을 보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온전한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릅니다.

 

구원을 확신하고 어디서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 누구에게나 유익을 주는 믿음,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강해-6/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2:14-26

2022-01-27 10:35:56

 

[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에르가)[행위들]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믿음이 행함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임을 교훈한다. 그는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믿음은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상하며 행위들은 선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신앙은 선한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 즉,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6에 말한 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야고보는 자신이 강조하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 예를 든다. 그것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자를 돕는 행위이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웃의 몸의 필요한 것도 주어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이웃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내세 천국만 전하지 말고 그에게 밥과 옷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선행과 구제의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선행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선한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다. 선한 행위들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18-20]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너의 행위들로](전통사본)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죽은 것](전통본문)5)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선한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참된 믿음이 있다면 선한 행위로 그 믿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긴 하지만 그런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귀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죽은 것이다.

 

[21-2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 믿음이 그의 행함[그의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그 행위들로] []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참 믿음이 행함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증거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했었다.

 

야고보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대해 강조하였던 것(3:22, 28, 30)과 달리,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하였다. 또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그 행위들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23-24]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이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해졌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다시 말한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또 하나의 예로 기생 라합을 든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기생 라합은, 가나안 땅을 치기 위해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피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한 행위로 나타났다. 야고보는 21절과 24절에 이어 세 번째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26] [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것임이니라].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유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말도 17절과 20(전통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야고보가 2장에서 세 번이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교훈한 것과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초대교회는 서로 다르지 않은 한 복음을 받았다(2:9). 신약성경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사도들과 사도적 인물들이 쓴 책이며 그들의 교훈은 서로 모순될 수 없고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대조하면서,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과 선한 행위가 있는 산 믿음을 대조하면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가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야고보의 표현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인 바울의 교훈과 충돌하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는 뜻을 이해한다.

 

또 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했을 때 결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말한 것이다.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본문의 요점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절과 20절과 26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 강조된 내용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선한 행위로 증거되는 산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어떤 행위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행위, 라합과 같은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경건한 삶뿐 아니라,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성경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고,

둘째로, 선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구제하기를 힘쓰는지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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