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맺는 가을이기 위하여 /눅13:6-9/ 이동원목사
2014-12-04 14:37:16
오늘은 실물로 설교 하겠습니다. 실물이 영 없어졌나? 여러분이 생각할까 봐 실물이 아직도 아~ 건재한다 존재한다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나 항상 또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제가 여기서 이 시간대에 설교를 하게 되면은 다른 예배시간 대가 다 죽어버리기 때문에 또 이 제일 편리한 시간대가 집중이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되도록 여러분들이 좀 11시 반에 나오지 마세요. 9시반, 이렇게 1시반, 3시반, 5시반, 11시 반 예배를 피해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걸 강조하기 위해서 제가 오늘 설교를 합니다 녜,
아~최근에 미국에 한 그 기독교 가정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에~아버지는 아마 알코올 중독자 였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의 그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을, 삶을 변명하는 편지를 썼고, 딸은 그기에 대해서 자기가 느낀 반응을 쓴 그런 편지였습니다.
간단히 내용이 이런 내용이에요. 아버지가 아~ 쓴 편지에는
‘나는 내가 당연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영어로 아이 켄 헬핀(I can’t helping),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다. 마약은 나에게 기쁨을,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이란다 이 마약 마저 없다면 내 인생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구나’
이것이 아버지가 쓴 편지구요.
이런 아버지에게 딸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 아빠는 무책임 하십니다. 아빠는 자신을 포기하고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딸인 저의 인생도 간접적으로 파괴하고 계십니다. 아빠는 아빠의 눈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 파괴를 보지 못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아버지와 딸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것이 비단, 이런 어떤 나라에 살고있는 특이한 아버지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 이 현대를 가리켜서 3 무(無)의 시대다 그랬어요.
3가지가 없는 시대다 첫째로 무책임한 세대, 둘째로는 무 관심한 세대, 무관심한 세대. 세번째는 무감각한 세대. 세가지 무(無)에요.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한 세대다, 이렇게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들이 뭐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소수라고 할찌라도 마약 중독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떤 포커스를 초점을, 아~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빼앗아 가는 그 중독들에 의해서 붙잡혀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허영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쾌락에 중독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중독됩니다. 그래 사람들은 일의 중독에만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워크 홀딩(work holding)’ 이란 일 중독도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아~조금 아까 예배시간에 9시 반 예배에 게리 콜린스박사께서 오셔서 이 비지니스, 바쁘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초점과 목적을 깨뜨릴 수가 있는 것인가에 관해서 아주 명설교를 하셨습니다. 한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는 사람. 하하~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일에 빠져버리다 보면 인생에 어떤 포커스와 목적을,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지하게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찰라의 만족, 순간의 쾌락, 그 환락에 매달리면서 하루 하루를 때우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가을입니다. 가을 바람이 벌써 차가워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해를 마무리 짖는 시점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은 늘 제 마음속에 되뇌어지는 제가 좋아하는 고(姑) 시인 김현성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질문을 묻고 있을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3장의 본문을 같이 생각하자고, 할려고 합니다. 이 누가복음 13장을 흔히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의 비유,이렇게 일컬어 말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의 비유. 이렇게 시작되죠? 오늘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 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앞서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내 인생에는 열매가 없는가? 내 인생에는 왜 열매가 없을까? 우리가 먼저 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열매 없었든 무화과나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고 살고있었다. 여러분, 무화과 나무의 책임이 뭡니까? 무화가 나무의 책임은 열매 맺는 게 책임입니다.
그것이 무화가 나무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 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요즘은 뭐 꽃꽂이가 발달해 가지고 별거 가지고
다 그것을 어떤 데코레이션에,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마는 적어도 성경이 쓰여진 예수님 당시만해도 무화과 나무는 절대로 장식용은 아니였습니다.
전시회 목적으로 Show up을 목적으로 해서 이것은 전혀 쓰여질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재목용도 아니에요 뗄감용으로도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 목적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한다
인생은 왜 존재할까요? 저는 무화과 나무의 존재이유와 인생의 존재이유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하신이유, 그들을 품으시고 가르치시고 3년 동안 삶을 같이하신 이유,
요한복음 15장을 가리켜서 우리는 13장부터 사실은 18장까지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교훈을 가리치신 소위 다락방 강화 라고 불리워지는 한 토막입니다. 그 중에 요한복음 15장이 끼여있어요.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의 교훈이에요. 우리가 흔히 포도나무 비유의 장,이렇게 부르죠? ‘나는 포도나무요’ 뭐에요? ‘너희는 가지니’ 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맺을 수 없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은 인생의 목적을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 생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다. 무슨 열매일까요?
성경에 열매라는 이 단어를 아~가르칠 때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생명의 열매,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안에 있었든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어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는가? 쉽게 말하면 전도의 열매, 전도열매,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 그것을 가리켜서 지상명령이라고 부르죠? 소위 Great Commission 마지막 명령 가운데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제자들에게 무얼 부탁했어요?
제자들에게 ‘제자 삼으라’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내 삶의 목적과 의미와 초점을 줄 수가 있었다면,
그러면 이 생명을 어떻게 나 혼자 간직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신앙생활의 열매, 인생의 열매인데 내가 교회당 드나든 회수가 얼마가 되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녜, 당신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이게 전도의 열매요. 생명의 열매에요.
자,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금년 한해동안에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름을 델 수가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그러고도 우리가 예수를 생명이라고 예수를 구원이라고 정말 예수가 소망이라고 증거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시고, 내 삶을 바꾸었고 나에게 저 영원한 삶을 보증하신 주님이라면, 이렇게 좋은 주님이라면 어떻게 그 주님을 침묵할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 열매가 있느냐? 실제로 전도의 열매가 있느냐 말이죠
.
뭐 교회에 얼마나 많이 나왔느냐?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우리교회가 성경공부를 강조합니다마는 성경공부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녜, 제가 늘 아~여러분에게 드리는 그 비유중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친구를 만나서 자랑을 하면서 이런 자랑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나는 오늘 여덟끼나 식사를 했습니다.’ 그게 자랑이에요? 왜 여덟끼를 먹어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여덟끼를 먹는 거에요? 먹는 것을 위해서 먹는 겁니까?
먹는 것은 내가 에너지를 취하고 그거 가지고 제대로 삶을 살기위해서, 제대로 삶을 살기위해서, 성경 공부한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더 고난도의 성경공부가 있느냐? 뭐 이런 것만 또 찾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뭐 그래서 어쩌자는 거에요? 말씀을 받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그런데 그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전도의 열매에요. 당신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새로워진 인생이 어디에 있느냐 말이에요. 얼마나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의 열매에요.
또 하나,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를 다룰 때 늘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격의 열매입니다. 인격의 열매, 자,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녜,우리가 흔히 9가지열매다 이렇게 말하죠. 9가지 열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하고 말할 때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그 열매란 단어는 복수가 아닙니다.
단수에요. 성령의 한 열매는,하고 9가지가 나와요. 그런데 한 열매 속에 있는 9가지의 특성 이렇게 보는 것이 좋아요. 그러니까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 속에 9가지의 특성이 들어있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예수님의 인격이에요. 사랑으로 가득 찼든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든 분,
화평,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든 그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참을 줄 알았든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열매를 맺느냐는 것은 내가 그것도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그 예수님을 닮아올 수가 있었느냐?
금년한해를 결산해 가야할 이런 시점 앞에 서서 우리는 이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내가 금년한해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작년하고 비교해서,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내가 얼만큼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내 인격에 얼마나 변화가 있었느냐 이 말 입니다. 그게 열매에요, 열매,
자, 금년 한해를 또 마무리 해야할 이 중요한 어떤 계절의 에~시간 앞에 서서, 여러분과 제가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할 질문이 바로 이 열매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이 무화과나무를 보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 심겨 졌습니까?
포도원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이스라엘땅, 이 팔레스타인땅은 사막의 한 부분이죠. 그렇게 좋은 땅은 아닙니다.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보면 포도 재배를 참 많이 합니다.
무화과나무도 많이 나구요 무화과열매 포도열매 이런 것들이 많이 생산되죠. 그런데 이 포도원은 사막지대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포도원을 일구게 됩니다.
거기에 포도나무도 심고 또 무화가 나무를 심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는 좋은 포도원, 좋은 땅에 심겨진 것이에요.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그래도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심겨졌다. 그러면 좋은 땅에 심어졌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죠.
제가 왜 이 얘기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누리고 있었든 가장 놀라운 특권 중의 하나가 뭡니까? 그것은 선민이라는 특권이에요 나는 선택을 받았다. 우리는 선민이다.
나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이 아니죠. 신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우리가 베드로전서에 보시면, 너희는 왕 같은 뭐에요? 제사장이다! 그가 택하신 족속이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놀라운 특권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을 입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이 선택은 분명히 특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특권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에요.
자,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고 또 거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면 거기서 제대로 된 열매를 좀 맺어야죠. 제대로 된 열매를, 그 열매가 뭐냐말이예요 그 열매가, 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다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 이건 어마 어마한 특권인데, 놀라운 특권인데 그렇다면 이 특권에 합당하는 책임, 책임.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열매를 맺는 이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때로 우리는 하루 하루를 때우면서 존재만 하고 있는 인생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그렇다구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절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우리는 명절, 국경일, 공휴일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생각 입니까?
응? 논다! 우리는 그걸 먼저 생각하죠.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절을 지키는 방법은 상당히 교육적입니다.
에듀케셔널해요. 아주 교육적이에요, 뭐 유월절이 되면은 뭐 쓴 나물도 먹구요. 나물 쓴 거 아이들이 안 좋아하거든요. 왜 이런 쓴 나물을 먹어요?그러면, 우리 조상이 옛날유월절에 애굽 땅을 떠날 때 이런 쓴 나물을 먹었단다.
자식들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 그 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또 명절을 지키는 특이한 방법 중에 하나가 대부분의 명절에, 뭐 일주일 내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명절의 어느 하루를 선택해서 금식을 합니다.
특별히 용 키퍼 같은 속죄 죄를 지킬 때 금식을해요. 금식, 왜 금식을 할까요? 이것은 생활의 리듬을 깨트리면서 우리에게 좀 생각할 수 있는 챤스와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예요.
1년 365날 하루세끼씩 어김없이 찾아 잡수시는 신사 숙녀 여러분, 식사를 안하면 갑자기 우리가 늘 먹든 식사를 안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가정 주부들은 우선 시간이 남아요. 오, 할 일이 없어요. 가끔 금식집회, 이런 것을 이따금씩 해본 경험이 있는데 이 금식집회를 하다보면 정말 할 일이 없어요. 식당갈 일도 없죠, 화장실 갈 일도 없죠 하하~ 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그 시간, 짤막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우리가 좀 앉아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여유가 있어요. 생각 좀 해보란 말이죠. 그래 바쁘게 달리지만 말고 내 인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아야 하는지 좀 생각 좀 해보잔 말입니다.
자, 왜 이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
요즘 우리세대는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장가는 들어놓고, 시집은 가놓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줄 모르는 아버지들 어머니들, 얼마나 많아요?
서약하고도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있는 이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공동체 생활할 때도 교회생활 할 때도 뭐 제직이 되어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아요.
아마 우리교회 같은 싸이즈는 교회를 분류할 때 아마 mega church에 해당하는, 대교회에 해당하는, 한국교회 아주 적은 퍼센티 안에, 통계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적지 않은 싸이즈의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로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갖는가?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가지 필링이에요. 영어로 믹스드 필링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주 복합적인 느낌이라고 그럴까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좋고, 그래 제가 좋아하는 느낌은 특별히 이런 것입니다. 뭐 전도할 수 있는 챤스가 많으니까, 많은 사람 대상으로 말씀을 전할 수가 있고, 설교할 수가 있고, 또 그 가운데 정말 구원 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또 지난번 전도집회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더해간다 그런 면에서 큰 교회를 목양하는 것은 특권이고 기쁨이죠. 계속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또 어제 그제 이틀동안 우리 사랑의 순례 세미나가 있었는데 모임이 있었는데 가정들이 변해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깨어졌든 가정들이 봉합되는 그 기쁨을 간증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피곤했지만 야,참 보람이 있다, 굉장히 보람이 있다.
이런 목양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또 한편 저자신이 메가쳐치의 싸이즈의 교회를 목양하면서 어떤 좌절감이 있습니다. 좌절감, 혹시 오늘 현대인들이 대 교회를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아~책임지지않아도 좋으니까
대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 속에 썩여 있단 말이죠. 군중 속에 썩여 있어요. 누가 나를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왔다가 조용히 사라져도 좋아요. 또 우리 교회는 뭐 헌금도 자유롭게 하니까 매미채도 안 돌아다니고,
중간에 저기 헌금함에 돈 넣느냐 안 넣느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감시원도 없고, 뭐 헌금 안하고 그냥 가셔도 되고, 얼마나 자유로와요? 그러나 이것이 혹시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좌절감을 가질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는 인생들, 그래서 내 인생 속에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체 빈손으로 내 삶을 결산해야 하는 어느 날이 올 것은 혹시 아닌지요,
왜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또 한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며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살고 있기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때로 저는 열매가 없다는 것에 관해서 이 시대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민이나 하는지, 아니 고민조차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이런 고민을 합니다. 하하~
이 본문에 보시면 아주 흥미있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7절,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7절 다같이 시작,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어찌해서 땅만 버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을 버린다, 이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고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저는 의도적으로 무화가나무가 내가 디디고 서있는 이땅을,또 이 주변 땅을 버리겠다,
이런 의도적으로 버렸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은 아니고 의식적도 아니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
특별히 저는 항상 교회 내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하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인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오랜세월이 지났는데 열매를 맺지 못한 교인들, 교회의 연륜은 굉장히 길었는데 내 삶 속에 뚜렷한 변화의 어떤 열매가 없어요. 열매가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뭐 그렇다고 해서 이런 변명을 할지 모르죠.
그렇다고 내가 뭐 교회서 내가 말썽부린 것도 없고, 내가 뭐 다른 사람을 해 끼친 것이 있느냐? 그러나 전혀 책임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제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아,예수는 저렇게 믿는 모양이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영향을
,
여러분 우리의 존재는 나 라는 사람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며 살고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 대단했죠. 일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 숫자는 현대보다는 훨씬 크리스챤의 숫자는 적었어요 그러나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이 무서운 영향력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은,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부쳐진 여러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 중에 하나가 뭐였느냐하면은 염병이 였어요.염병, 생각나십니까 염병? 우리 어렸을 때는 옘병이라고 그랬습니다.
옘병, 전염병이란 말이죠. 전염병,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그 영향력 때문에, 확산되는 영향력, 녜,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아요.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또 다른 사람이 변하고 이 무서운 영향력의 확산, 저들은 염병이다! 저들은 염병이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쳐진 또 하나의 별명가운데 이런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 데살로니가에 바울사도 일행이 들어갔을 때 그런 말을 했어요.
그렇죠?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왔다. 그런 거 보셨어요? 성경에서 보셨어요? 녜? 그런데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이 말이 본래 원문 그대로 읽어보면, ‘데이 해브 턴 더 월드(They have turn the world)’ 세상을 이렇게 턴했다,
틀었다. 그 다음에 엎사이드 시켜서 다운 시켰다 이런 뜻 입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을 상징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그것이 부정적이든,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요?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녜, 왜냐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마저 내가 빼았고 있으니까,
그 광물질의 자양분은 내가 다 빨아드리면서도 열매는 맺지 못하고,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가면 좋을 텐데,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표현하신 이런 아주 경고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는,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생각나세요? 자기도 못 들어가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의도적으로는 아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단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을 끼친다.
요즘 어떤 경제적인 그 중요한 원리로, 사회학적인 원리일지도 모르겠어요. 한 공동체에 20프로의 사람만 건강하면은80프로는 그 혜택을 나누어가질 수가 있다는 거에요. 저는 이 교회도 사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20퍼센트만 헌신한다면 우리교회는 굉장한 사건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20퍼센터, 20프로 될까요? 20프로?
한 크리스챤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저는 그것이 한국교회에도 적용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세계교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프로는 벤치워머에 불과하다고 그랬어요. 벤치워머. 벤치워머가 뭡니까?
의자를 따뜻하게 한다. 교회에 기여하는 것은 와서 한시간 예배 드리면서 여러분이 앉아있든 의자, 히프로 땃땃하게 만들었다가 나가는 것, 그게 유일한 기여에요. 당신이 교회에 기여하고있는, 역사에 기여하고있는 유일한 기여, 앉아있든 자리 떳떳하게 만들고 나가는 것 그것 밖에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게 신앙생활 아니에요.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정말 한20프로만이라도 복음 앞에 헌신하고 이세상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가 기도하고 복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약 20프로만 될 수가 있다면 세상은 바뀌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몰라요.내 상태를 몰라요.자신의 상태를 몰라요. 땅만 버리고있는, 땅만 버리고 있는 사람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무화가 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세번째는 자신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고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땅만 버리고있는 자신의 상태도 보지 못했고, 세번째는 자신 앞에 다가오고있는 위기,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한 거에요.위기를 깨닫지 못했다.
여러분 본문을 가리켜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지는데 저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 13장에 그 앞서 기록하고있는 어떤 사건과 연관이 있지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직접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복음 13장1절부터 보시면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사고가 일어난 거에요. 갈릴리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일어난 거란 말이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 다음에 읽어보시면요. 4절 한번 읽어보세요 다같이, 4절 다같이 시작,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갈릴리에서도 사고가 났고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어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 단순한, 그 당시 있었든 어떤 사고에 관한 얘기를 예수님이 하신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사고가 일어나면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변에서 내 이웃사람이 뭐 교통사고가 났다, 뭐 좀 안됐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은 ‘글쎄 그 사람 죄 때문에, 뭐 업보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죄 때문에 그런 사고를 만난 것이 아니냐?
예수님이 이런 사고를,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을 지적하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 아니야, 너도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이웃 사람들의 비극에서 경고를 받아야 된다 말이죠.
그래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이웃들의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나 사고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경고로 보면 돼요 나를 향한 경고,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경고다. 어쩌면 내 인생도 한순간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나를 쪼여 들어오는, 내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위험을 나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싸인이다 말이죠.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너도 이와 같이 망할 수가 있다 그걸 아느냐 이말 이죠.
내 주변에 일어나고있는 심상치 않는 사건들, 이것은 너희에게도 다가오고있는 위험에 대한 싸인이고 징조일 수가 있다 정신을 좀 차려라 이 말 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위기에요.위기, 이것이 위기에요 신앙생활 그만큼 하면 좀 달라져야죠. 그래 주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할까요?
오늘 본문에, 본문에 메시지를 저는 문자적으로 좀 적용해서 이 교훈을 받고 싶어요.자, 7절 한번읽겠습니다. 7절 다같이 시작,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여기서 몇 년 얘기하셨어요? 3년, 저는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3년 가르쳤으면 너희도 열매 맺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꺼냐?’ 이3년이 저는 문자적으로 좀 받아드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5장에도 보시면,
아까 말씀한 요한복음15장, 예수님이 십자가 직전의 마지막 교훈이거든요? 이 포도나무 비유의장에서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진데 너희가 나에게 정말 붙어있고, 그리고 나와 더불어 제대로 교통하고 옳바른 관계 속에서 산다면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한다, 몇 년이에요?
3년, 진지하게 신앙생활 3년 했으면 좀 바뀌어야죠. 그래 3년 진지하게 신앙생활 했는데 바뀌지 않았다, 이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에요.오늘 좀 우리자신에게 경각심을 갖는 이런 깨달음이 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에 보시면, 그 성찬식에 관한 교훈이 나오거든요. 이런 성찬식은 성찬식 자체보다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징이다 성찬식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면 주님과 나사이게 그 관계를, 교제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징계,
그징계의 스텝을 말할 때 세가지 단계로 가르치고있어요. 징계의 세가지 스텝, 그게 뭐냐하면 ‘너희가 이런 이유 때문에 너희들 중에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잠자는 자가 적지않다’ 세가지 단어가 나와요.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 이게 하나님이 한 그리스도인들을 채찍을 때려서 그걸 깨워 일으키고 그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드실 때, 하나님이 첫번째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하면 약하게 하는거에요.
그래서 갑자기 약해지면 우리가 다른 사람보고 정죄를 해서는 안되지만, 자기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나서는 내가 약해질 때 혹시 하나님의 어떤 징계가 아닌가? 정신차리고 살라고, 그런데 깨닫지 못해요.
그러면 두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너 약해져도 깨닫지 못해? 그러면 드러누워서 생각해! 눕혀놓으십니다. 병들면 누워야지, 그런데 누워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단계가 하나밖에 없어요. 응?
그냥 자, 그냥 자, 재워놓으셔요. 육체적 죽음이란 말이죠. 육체적사망, 너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존재이유를 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찍어버리겠다! 그 얘기 아니에요? 찍어버리겠다. 불신자 얘기가 아니에요.
너희가 신자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열매가 없어! 내가 찍어버리리라 이 말이에요 찍어버리리라.
언제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타성에 젖은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그리고 무감각한 그런 삶을 계속할까요? 어느날 갑자기, 어느날 갑자기 내 인생을 결산을 알리는 사건이 내게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예고없이 찾아와요.
지나간 두주간은 특별히 우리교회에서 장례식이 많았습니다. 그건 우리의,우리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어느날 갑자기 그 순간이 올 때 우리는 어떤 결산을 하게 될까요?
감사한것은 우리의 손은주 집사님 같은 분, 많은 사람들을 교회 운전하셨지마는 열심히 섬기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고 마지막에 자기의 시신까지 아주대학 병원에 다 기증하시는,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신, 저는 차라리 그분의 죽음의 모습이 부러워지기조차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든 최혜빈 어린아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부르셨다고 생각해요. 혜빈이는 가면서 저금통을 남겼습니다. 이 저금통은 선교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혜빈이가, 드리기를 원했든 그런 저금통이였습니다.
차라리 이 어린소녀가 보여준 감동적인 삶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인생을 단순히 길게만 산다, 만수무강하겠다,그래도 끝나요. 그래도 끝나요. 만수무강하셔도 끝나요.
녜, 끝나는 순간 나는 어떤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수가 있을까요?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찍어버리겠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오늘 이 주님의 이 엄숙한 경고 앞에서 이 가을,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추수를 생각하는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계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이 열매 맺는 계절이기를 위하여,
저는 이 세가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책임,우리의 책임.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있는지? 나의 상태, 현제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계신지요?
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 비유에서 과원지기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인 앞에, 청지기의 책임을 지고 있었든 과원지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인하여 찍어버리겠다고 주인이 선언하니까 8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런데 이 번역이 조금 약해요 더 달리 번역한다면, ‘금년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물론 주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이 비유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기쁘게 기회를 허락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있는 이유, 왜 그래요?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주님 금년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러나 이때쯤 한해가 저물어가면 많은 분들이 이런 결심을 합니다. 제가 내년에는 잘 할께요. 1월1일부터요. 그런데 1월1일부터 하겠다고 하는 사람치고 1월1월부터 하는 사람 절대로 보지 못했어요.
1월1일부터,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셔야 돼요. 지금부터,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바꾸세요. 구체적인 열매를 향한 내 인생의 노력을 시작하겠는가? 아니라면 주님의 엄숙한 이 명령 앞에 어느날 서야 합니다. 너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대답은 오늘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다.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우리들의 열매를 위해서 그 열매를 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그날을 위해서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어계신지요? 우리 다 일어나서 한번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오늘 과원지기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챤스를 주십시요. 거름을 주겠습니다. 내 땅을 파겠습니다. 그리고 좀 진지하게 이제는 신앙생활을 해보겠습니다. 어느 한순간 내 삶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주앞에 드릴 수 있는 풍성한 열매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 하십시다.
기도 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나간 한해를 돌이켜 보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주앞에 아름답게 결산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정말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그리고 주의 인도하심과 붙잡아주심과 그리고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 바를 따라서 그 말씀 앞에 응답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눅13:6-9/ 곽선희 목사
2014-11-26 17:57:15
1986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말석에서 군무를 추는 한국인 한 댄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초라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1년 후에 솔리스트가 되고 1993년 6년 만에 주연 무용수가 되고
그리고 3년 후에는 프리마 발레리나로 등극하고 다시 3년 후에 1999년 4월에 최고의 무용수에 선정이 된 한국이 자랑하는 강수진이라고 하는 발레리나가 있습니다. 인내와 끈기의 사람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연습벌레라고 하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딘가 아픕니다. 아픈 곳도 무용수의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날은 오히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딘가 아픈 것이 자연스런 것이고 그만큼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그는 스스로 자기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하루에 10시간 연습을 하고 토슈즈라고 하는 그 발레리나가 신는 신이 있잖습니까? 이것을 한 시즌에 150개를 버렸다고 합니다. 때로는 하루에 19시간 연습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신었던 토슈즈는 수천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강수진은 어느 날 자고나니 신데렐라가 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는 확실히 천재입니다. 천재가 천재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엄청난 희생과 수고를 했습니다. 초인적인 수고를 했습니다.
요새 세상이 왜 시끄럽습니까? 한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 전부가 다 하룻밤 한 순간에 신데렐라가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대박이라는 게 뭡니까? 대박……. 대박을 좋아 안합니다. 왜? 내가 대박 터지는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울어야 합니까?
기독교인은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됩니다. 내 성공이 남을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돈 버는 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면 차라리 손해를 택해야 합니다. 그래, 대박이니 공짜니 그것이 바로 망조입니다.
때로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도하면서도 대박을 바라는 사람 있어요. "주여!"하고 했답니다. 안 나오더랍니다.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시 말합니다. 천재가 분명히 천재가 됩니다. 천재되기 위해서 엄청난 피나는 노력이 있어서 강수진이 됐어요.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무화과나무와 그 열매에 대한 이야깁니다. 이 말씀은 신구약성경을 통찰하는 엄청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이 본문을 사랑하고 제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와서 또 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연은 없습니다. 기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기적위에 있는 더 높은 의미의 기적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이것은 관상나무는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아무리 봐도 그 이파리 하나도 그렇고 나무 모양도 못생긴 나무입니다.
게다가 나무질이 단단하지도 않아서 재목으로 쓰지도 못하고 곧게 자라지 않아 기둥감이 되지도 못합니다. 아무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옆으로만 퍼지고 높이는 얼마 올라가지 않습니다. 비틀비틀한 나무입니다.
이것은 관상나무도 아니고 재목으로 쓸 나무도 아닙니다. 오로지 열매입니다. 별로 많이 가꾸지 않아도 열매가 잘 열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서울 지방에는 별로 없습니다만 여수, 순천, 제주도 쪽으로 가면 무화과나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열매가 없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는 거죠.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무화과나무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답니다.
자세히 보시면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말씀하십니다. "저걸 찍어라.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심판입니다. 왜? 열매가 없으니까.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데 열매가 없으면 찍어 마땅하죠. 열매를 바라고 심어놓고 가꾸어 왔는데 열매 없다면 찍어야죠.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자라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면 찍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경우에 과원지기를 나무랄 수 있거든요.
과원지기가 수고를 안했어요. 너무 게을렀어요. 잘못했어요. 잘못 돌아보았어요. 잘못 가꾸었어요. 그래서 주로 이런 식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자연에게 죄를 묻지 않거든요. 오히려 과원지기에게 묻죠. 네가 할 수고를 다 못했다.
그래서 과원지기를 심판할 수도 있고 과원지기를 책망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는 주인은 과원지기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가 나쁘다는 겁니다. 그런고로 나무를 찍으라고 말합니다.
이 점이 굉장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과원지기는 땀을 흘렀어요. 수고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주인은 충분한 수고가 있었다고 보고 절대로 과원지기를 향해서는 한 마디라도 꾸짖지도 않고 비판도 하지 않고 심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가 나쁘다. 그런고로 이 나무를 찍어라”고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3년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여기에 심판의 유예기간이 있었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인내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다고 당장 벌을 받나요? 오늘 내가 죄를 지었다고 그날로 벌을 받는 게 아녜요. 하나님의 인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오래 참으십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그 인내가 곧 사랑입니다. 인내가 은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3년을 참았다는 것 하나님의 인내올시다. 심판해야 될 대상을 심판하지 않고, 벌해야 될 사람을 벌하지 않고,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3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3년이라는 기간을 하나님께서 참아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를 경험하십니까? 때때로 우리가 잘못할 때가 있어요. 내 양심이 알아요. 성령이 말씀하세요. 가책도 되고 후회도 되요.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예요. 너그럽게 참아주세요. 덮어주시고 용서하시고 기다려주세요.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를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업수이 여겨도 안 됩니다. 참아주시니까 그런 거죠. 이해해주시니까…….
그리고 방종할 생각을 마세요. 왜? 여기 보니까 시한부더라고요. 3년만 기다렸어요. 그리고는 아녜요. 이제는 찍으라는 거예요. 3년을 기다리고 이제는 찍어라. 이게 뭡니까? 인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에요.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단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예요. 사랑의 한계인 동시에 인내의 한계예요. 십자가의 독생자를 못 박으시면서 우리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찍어버리라. 여기가 한계다. 여기까지다. 그 이상은 아녜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신다고 늘 참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무한히 참아주시리라 생각하지 마세요. 이걸 신학적인 말로 만인득구설(萬人得救說)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데 어떻게 사람들을 그저 영원토록 지옥으로 보내겠나? 만일에 지옥에 가더라도 그건 대합실처럼 잠깐 유치장처럼 같다가 나올 거지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토록 벌하시겠는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걸 만인득구설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너무 크게 보고 그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소화하다보니까 하나님에게는 심판이라는 게 없고 있다면 임시적인 것이라고 풀이해봅니다. 아니올시다.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봐라.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어요. 이것이 나의 마음이요 이것이 내 심판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감사한 일이에요.
그러나 업수이 여기지 마세요.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순간순간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찍어버리라. 그래요. 찍어버려야죠. 특별히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아 그렇죠. 다른 곡식을 심었으면 될 텐데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왜 땅만 허비하느냐? 찍어버리고 다른 것을 심어라." 이렇게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이 나무는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찍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유구무언입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제 할 말이 없는 무화과나무입니다마는 대신 중보자 과원지기가 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너무 은총적인 말씀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1년만 더 참아주세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의 뜻은 뭡니까? 거기 암시된 것은 주인은 이 나무는 못쓰겠다, 찍어버리려고 했지만 과원지기는 생각합니다.
'이 나무 열매 없는 것이 나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내 잘못인 것 같습니다. 내가 1년 더 수고해보겠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좀 더 정성을 다해서 1년 더 수고하겠습니다.' 자기 책임으로 돌립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게 뭔데요? 책임을 내가 지는 거예요. 남의 책임을 내가 지는 거예요. 아니 대신지는 거예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옛날 책들 보면 그런 말이 많잖아요? 자식이 잘못됐을 때 부모들은 자식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건 내 잘못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얼마 전에 수필집에 보니까 그런 얘기가 있대요.
어떤 어머니가 가만히 보니까 애가 강아지하고 노는데 그 강아지를 잘 데리고 놀다가 어떤 때는 무자비하게 때리더래요. "어째서 내 말을 안 듣느냐"고 무자비하게 때리더래요. 깜짝 놀라서 어머니가 애를 붙들고 회개의 기도를 했답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를 그렇게 때린 일이 있거든요. "어째서 내말을 안 듣냐? 너 사람 되겠냐?" 하고 때린 때가 있거든요. 얘가 이걸 본 받아가지고 강아지를 때리더래요. 깜짝 놀란 거예요. 얘가 어디서 배웠습니까?
왜 내말 안 들어? 하고 때리는 거 어디서 보고 배운 겁니까? 어머니가 목을 놓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그렇게 뉘우쳤다는 얘기예요. 생각해보세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들에게 다 보여준 거예요. 다 가르쳐준 거예요.
그 누가 책임져야 됩니까? 저 불쌍한 젊은이들을 누가 책임져야 될 겁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 보니까 이 과원지기는 말 없는 중에 말을 합니다. '열매 없는 거, 제 책임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채근담(菜根譚)이라고 하는 책이 있죠? 책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은 과실은 꾸짖지 않는다. 숨겨진 일은 폭로하지 않는다. 옛 상처를 잊어버린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그래요,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숨겨진 일은 폭로하지 않는다. 옛 상처는 다시 기억치 않는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이 무슨 보따리입니까? 무슨 선물 보따리인줄 아세요? 사랑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의 모든 허물을 떨치고 다 숨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책임을 지는 거예요. 그 책임은 내 것이라고요.
그래서 오늘 중보자는 말합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수고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세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다시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8)" 곧 1년 동안 자신이 수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무화과나무에게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과원지기에게 기회를 주는 거예요. '내게 기회를 주세요. 1년이라고 하는 다른 기회를 내게 주세요.'라고 과원지기가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의 그 주인은 아마도 '그래, 네가 1년 더 수고해라' 하고 말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내와 용서 이것만 가지고는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을 지는 겁니다. 책임을 지는 겁니다. 이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말 없이 책임을 지는 겁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옛날 여러 번 말씀드린 이야기가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알버트 뒤러(Albrecht Durer)의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손목까지의 두 손만 그려진 그림이 있지 않습니까? 요새는 그게 유행처럼 나옵니다만 어쨌든 알버트가 맨 처음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걸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알버트와 그의 친구는 화가입니다. 그의 친구와 함께 도시로 공부하러 왔습니다. 두 사람이 다 공부하려고 하니까 영 공부도 할 수 없고 돈도 벌수가 없어요. 그래서 2년씩 2년씩 교대하기로 했습니다.
서로 먼저 하라고 미루다가 알버트가 그림공부를 하고 친구는 식당에 가서 부지런히 그릇을 닦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2년 후에 교대하려고 보니까 그 친구는 식당에서 일하는 동안에 손마디가 굳어져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어차피 나는 이렇게 됐으니 네가 계속해서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어다오." 권면에 못 이겨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훌륭하게 성공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 문밖에 섰는데 기도소리가 들려와서 문틈으로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사랑하는 친구가 자기를 위하여 버려진 그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어요.
자기 친구 알버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손을 그린 겁니다. 자세히 보세요. 손마디 하나가 이렇게 꺾어져 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내 지혜로 내 노력으로 된 줄 알았지만 내 사랑하는 친구의 희생이 저 엄청난 희생이 있어서 오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감격합니다.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려야 됩니다. 열매 없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군가가 어디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희생이 있어서 오늘 내가 있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마셔야 됩니다. 참아주시고 대신 책임을 져주시고 대신 희생한 그 누군가가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 그 엄청난 은혜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주의 음성을 다시 들으세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제가 한 번 더 수고해보겠습니다." 그 거룩한 수고와 인내와 희생으로 해서 오늘 내가 있습니다. 이 종말론적인 마지막 기회에는 분명히 훌륭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열매 없이 산 날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의 기대에 어긋나고 우리 자신들의 이상에도 너무 멀어진 헛된 세월을 많이 살아왔습니다마는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오래 참아주시고 때로는 대신 희생하시면서 오늘이 있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여, 주의 인애하심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 오늘 이 은총 속에서 내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아니 열매 없는 이웃 열매 없는 이 민족 앞에 분명 나로 인해서 나의 중보적 기도, 중보적 책임으로 인해서 저들에게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도적 신앙의 본질 /눅13:6-9/ 곽선희 목사
2014-11-21 05:40:08
여러분은 무화과나무를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무화과나무는 서울, 경기 지방에는 거의 없고 저 남쪽으로 여수, 순천, 제주도에 가면 이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지리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잎도 그저 보통 가랑잎처럼 그렇게 생기길 잘 못생겼구요, 또 그 나무도 곧게 자라서 뭐 재목
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도 아닙니다. 그저 비틀비틀하면서 옆으로 퍼져서 그 목재는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건 관상나무도 아닙니다. 보기 좋은 그런 나무도 아니고 동시에 꽃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무화과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꽃 자체가 열매고 열매가 곧 꽃입니다. 꽃이 피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나무는 이 벚꽃 같은 것은 활짝 피는 멋이, 그 멋이 있는데 이건 그것도 없는 지지리 못 생긴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무화과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는 많이 열립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열매는 대개 열매라는 것은 다 익어서 완전히 먹을 때가 될 때까지는 입에 댈 수가 없습니다. 떫고 쓰고 그렇습니다마는 무화과 열매는 다 익기 전에도 정말 배가 고플 때에는 따서 먹고 시장기를 끌 수가 있는 그런 열매입니다.
많이 열리기도 하고 또 이렇게 시장한 사람에게 요기할 수 있는 그런 열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 옛날 당시에는 길거리에 많이 심어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이제 배고픈 사람은 좀 따서 먹고 정말 급한 배고픈 사정을 면할 수도 있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 말씀대로 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는데 그 열매가 없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이올시다.
가만히 보세요. 모든 것은 좋은 목적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요, 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이던지 다 귀한 것이 되는 겁니다. 저는 늘 이 강단에 설 때마다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귀중한 것, 그게 바로 이 마이크입니다.
이 마이크라고 하는 기계가 나오기 전에는 목사님들이 아무리 설교를 크게 해도 삼백명에서 최고 오백명까지 밖에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요새 같이 방음장치를 잘 한 건물도 정확하게 천팔백명이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우리 목사님들은요, 여기 연세 높은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목소리가 다 커요. 꽥꽥 합니다.
소리 지른다구요. 그렇게 안 하면 듣질 못 하니깐요. 그런데 이 마이크라고 하는 것이 있어 가지고 오늘 이렇게 수 만 명을 상대로 해서 일시에 설교할 수 있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꼭 같은 마이크지만 댄스 홀에 있는 마이크하고 교회에 있는 마이크하고는 천양지차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마이크입니다 이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 목적이 그 가치를 결정해 주는 거예요.
창조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마른풀도 발에 걷어차이는 돌 하나도 존재의 이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다 나름의 목적과 이유와 가치가 있다하는 말씀이올시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소중한 간증을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만 그런 거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자기를 위해서 자기로 인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격하고 '맞어, 맞어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확실합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삶의 목적이 있는 거고 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사건으로 보아도 우연한 사건은 없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다 신중한 의미가 있어요. 심지어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그 속에 의미가 있구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되는 일입니다. 재난이든 지진이든 전쟁이든 엄청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도 하나님께는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있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볼 거 같으면요 자,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요. 없다고 해서 "당장 찍어버리라"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3년을 기다렸다는 얘기입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말씀이에요. 열매 없는 것을 알고도 1년 2년 3년을 기다렸어요.
그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기다림, 하나님의 인내, 그 속에 긍휼과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것은 곧 인격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에요.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격적으로 돌아오기를 열매맺기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아름다운 관계가 있어요. 뭐 거저 기다린 게 아니죠. 계속해서 김을 매주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가꾸어 주면서 기다리죠.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비유이올시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릴 때 거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련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주의 종들을 통해서 계속 일깨우시면서 많은 수고를 하면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었다 이거예요.
이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3년을 지난 다음에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나무를 찍어라"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에요. 오래 참아요. 그러나 끝까지 참는 거 아니에요.
어느 순간에 가서는 심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인내의 한계를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가노라면요 정말 하나님께서 말이죠 어떤 때는 참고 어떤 때는 못 참으신 것을 볼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뭐 많이 잘못했지요. 부도덕하고 이렇게 되도 오래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요.
가끔가끔 성경에 보면은요 참지 못하시고 그대로 꽝하고 내리치는 때가 있어요. 그게 어느 때인가, 그 하나님의 눈치를 좀 봐야겠어요. 대표적인 예가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광야에 머무는 동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산에 올라갔는데 고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깁니다.
그런데 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저들이 말하기를 "모세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이제 우리가 볼 수 없고 하니 그저 이제는 우상이라도 섬기자" 뭐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아론이 하는 말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라 불렀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꽝'하고 내려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어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큰 도전이요 모독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할 때는 하나님을 우상화했다 그럽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했어요.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것을 볼 수가 있어요. 확실히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예수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타국으로 갔고 그리고 종을 보내서 세를 받으려고 했더라. 종을 보냈는데 안주더라. 때려 죽였다.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말을 안 들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냈다. 아들의 말은 듣겠지, 하고 보냈더니 "상속자니 이 사람만 죽이면 저 땅이 우리 것 될거다"하고 죽였다 이거 지금. 이제 주인이 와서 어떻게 하겠느뇨?' 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인내의 한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고 그 속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속에 무한한 주님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 심판이라고 하는 무서운 선언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 이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 찍어버려!" 했더니 과원지기가 대신 나타납니다. 이 나무는 말을 못합니다.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과원지기가 하는 말이 여기서 주도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분이 쓴 책으로서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온 세계 사람들이 읽고 많은 지혜를 얻은 책이 있습니다.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고 하는 책이죠. 이 책 속에서 일곱 가지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말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프로액티비티(Proactivity)입니다. 알고 보면 일곱 가지도 전부 그것에 해당하는 겁니다.
이 책 전반적으로 프로액티비티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도성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내가 책임진다' 그 말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화를 내면서 손해 볼 수 없어요. 그건 잘못이에요. 누구에게도 잘못의 책임을 탓할 필요가 없어요. 내 책임이니까요. 지금 내가 책임지고 환경에게 책임 돌릴 것 없어요.
그 책에서 강조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하고싶어 한 일이다"하는 것이에요. 모든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한 일이에요. 그럴 때에 주도성이 살아납니다. 만일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저 사람이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 존재가 없어지는 거예요. 나는 뭐요? 난 아무 것도 아니요.
어떤 일이든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그게 주도적 인격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렇지 않은 분도 많습디다마는 옛날에는 왜 그런지 사장님은 다 배가 나왔어요. 그래서 배 많이 나오면 '사장님 배'라고 그랬어요.
이 사장님이 왜 배가 나오느냐, 그거 아십니까? 사장님이 기분 좋은 시간이 있어요. 자 과장님들, 그 밑에 있는 분들이 결재 서류를 가져와서 '그저 돼야겠는데' 하고 쩔쩔매면서 이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결재안을 내놓으면 이러구 보다가 "음, 좋아" 도장을 꽉 찍어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책임져. 가지고 가" 이렇게 됩니다. 그 때에 그 기분이 좋은 거예요. 사장님이 그 때마다 배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이거 내가 책임져." 그 무슨 소리입니까? 내 영역이 커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내가 책임질 때 그만큼 내 존재가 커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존재 의식이거든요. 그런 고로 핑계를 많이 하는 사람, 특별히 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 그거 존재가 아주 형편이 없는 거예요. 뭐 어떤 사람은 부부싸움을 하다가 막 화를 내고 그러니까 아내가 왜 당신은 이렇게 계속 화를 내느냐고. 대답이 뭔 줄 아세요? "나는 본래 그렇지 않았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됐다." 저 못난 거 제가 못났지 누구 책임이요?
이런 인간이 바로 인간 가치가 떨어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되요. 게다가 원망을 해요. 원망하는 순간 내 존재가 증발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원망할 것 없어요. 환경 탓 할 것도 없어요. 누구 잘못이고 할 것도 없어요. 내 책임 내가 지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재가 살아나는 것이지요. 그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내 책임을 내가 질 뿐만 아니라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만큼 나의 인생의 영역이 커지는 것이에요. 세계적인 언론가 중에 한 사람인 월터 크론카이트라고 하는 분에게 누가 질문하기를
"당신의 성공 비결이 뭡니까?" 딱 한마디 대답하는데요 "방송이 나를 위해 있으니까요" 라고 말했어요. 그 한 마디 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직장이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나를 위해 직장이 있는 것이지 직장을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니오. 그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남의 직장에 가서도 어디 가서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주인이에요. 가정을 생각할 때도 가정을 위해 지금 내가 머슴살이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위해 가정이 있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대하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요. 그럼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사는 거야. 그러니까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도 내가지는 거죠. 그만큼 존재의 영역이 커지고 있는 것이에요.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은 무화과나무 과원지기가 책임을 지면서 하는 말속에 중요한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열매가 없어요 분명히. 3년 동안 없었어요.
그러나 주인 이 무화과 과원지기는 생각합니다. 이 속에 잠재적 가능성이 있고 잠재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의 병도요 병이라는 것이 있고 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장애를 디스오더(Disorder)라 그러고 병을 디지즈(Disease)라고 합니다. 장애와 병은 다른 겁니다. 병은 지금 아프고 괴롭지마는 이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지요. 그러나 장애라는 것은 이젠 멎은 거예요. 이건 그래 장애자가 불쌍한 거예요. 장애는 끝난 거예요. 이제 그게 낫는 게 아니에요.
없던 팔이 생기는 거 아니잖아요. 그게 장애거든요. 그러나 병은 지금 괴롭지마는 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거기 있는 거예요. 오늘 이 과원지기는 이 무화과를 보면서 이것은 하나의 병리적 관계로 보는 거예요. 생리적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여러분 혹 부부싸움을 할 때요 두 사람의 말속에 올웨이즈(Always), 항상 이라는 말을 빼야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저녁에 남편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매일처럼 늦게 들어와도 문 밖에서 딱 요렇게 얘기를 해야 돼요.
"당신은 그렇지 않은데 오늘 무슨 바쁜 일이 있었습니까? 어쩌다 늦었습니까?" 요렇게 말해야 돼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왜 밤낮 그 모양이야?" 왜 항상 늦게 돌아오느냐 이거예요. 이럴 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게다가 하나 더 떠서 "당신의 아버지도 그랬다는데 당신도……" 이렇게 아예 유전인자 문제로 돌려놓으면 이건 장애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망이 없어요 그러면. 그러면 그 쪽에서 막 나가는 거예요. "그래 어때?" 이러고 나온다고요. 이게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매일같이 있는 것도 처음 있는 것처럼, 엑시던트처럼, 병리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해요. 이거는 본래가 그렇고, 족보가 그렇고, 그냥 근본적으로 못된, 이렇게 되면은 그럼 끝난 거지. 뭐 거기다 데고 같이 살 거 뭐 있나. 그냥 살든지 말든지 할거지. 이제 대고 말 할 것도 없는 거 아닙니까?
믿음이에요. 그 속에 가능성이 있어요. 아직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어요. 그걸 볼 줄 아는 믿음, 이게 중요하단 말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 말씀 보세요. 누가복음 13장에 처음부터 보면은 18년 된 귀신들린 여자가 있습니다.
이 18년이나 되고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딱 보는 순간 가능성을 보았어요. 그 사람이 귀신이 붙어서 그렇지 귀신만 나가면 되는기라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 그랬어요. "저도 아브라함의 딸이다." 얼마나 참 귀한 말씀입니까?
또 뿐만 아니라 이 과원지기는 열매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것을 함께 할려고 했어요.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내게도 있습니다" 하는 말이에요. 저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습니다, 라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때에 내려칩니다. 크게 정죄하고 계십니다. 다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 정히 그러시려거든 내 생명부터 먼저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귀중한 말씀이에요. 이 백성의 죄 중에 내가 함께 하겠다는 거예요. 형벌을 함께 받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번성케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니요. 나 그거 원치 않습니다. 이 백성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마음이에요. 오늘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습니다. 바로 이 순간 과원지기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에요.
그 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다시 1년 동안 수고하겠다는 겁니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으세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세요. Last Chance, 종말론적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무화과나무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이 과원지기에게 기회를 준겁니다. "네가 다시 한 번 해봐라."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부자만을 연구해 가지고 유명해진 토마스 제이 스태니(Thomas J. Stanney)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백만장자 마인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거예요. 백만장자들이 백만장자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은 심층분석 한 결과 여덟 가지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은 결코 교육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운도 아니에요.
백만장자가 되는 길은 성실함과 건전함과 원만한 가정과 종교적 신앙과 우정과 스포츠맨쉽, 낙천성, 그리고 자기 관리 능력이 있고 나아가서 남의 책임을 내가 지는 성격을 가졌어요. 이 사람이 백만장자가 되는 거예요. 뭘 잘못했다고 다 남에게 떠맡기고 이리저리 변명하는 이 시시한 인간은 성공할 수가 없어요. 요새 우리는 이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렇게 책임질 줄을 모르는 사회입니까? 대체 누구 잘못인지 알 수가 없어요. 청문회를 해도 소용없어. 왜? 서로가 발뺌만 하니까요. 이런 시시한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복잡한 거예요. 지도자 자격이 없어요. 책임을 져야지요.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같이 허물이 많고 부족하지마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어요. 왜? 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소망이 있어요. 가능성이 있어요. 십자가의 희생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믿어주신 거예요.
그리고 대신 죽으신 거예요. 그런 고로 이 주도적 신앙의 본질이란 바로 십자가의 마음이요. 열매 없는 무화과를 위해서 대신 책임을 져요. 왜? 그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로 주도적 신앙이란 생산적인 거예요. 이렇게 책임지는 그 누군가가 있어서 이 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오늘도 그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여 우리는 너무나도 비겁했고 책임질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살아왔습니다. 주도적 신앙, 주도적 세계관, 그리고 이 나라,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그런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이상 아무도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조용히 내 책임을 다시 생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심판 보면서 내가 대신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러한 주도적인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 되게 하시고, 그래서 열매 없는 이 사회가 다시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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