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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누가복음 설교 모음

누가복음 16:10 - 13절 설교 모음 // 불의한 재물

by Jessi J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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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사청문회 /16:10-13/ 조정의목사

2020-09-22 07:10:05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국가의 중요한 직책, 총리, 장관 등을 선출할 때 청문회를 합니다. 큰 직임을 맡을 만한 사람인지 검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 그곳에서 보인 능력과 자질과 성품은 무엇인지 철저히 조사합니다. 청문회를 하다보면 불법적인 일들, 부정한 일을 한 것이 밝혀지거나 현재 불법으로 가지고 있는 재물이 있는 경우 지탄을 받고,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이 정도의 문제는 있다고 생각되는 결점도 그가 큰 일을 맡을 사람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청문회는 큰 직책을 맡기 전에 했던 작은 일들에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를 보고 앞으로 큰 일을 맡길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 인생에 대한 청문회가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재물에 대한 말씀 중에 이 땅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평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번 불의한 청지기에게 배운 지혜를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재물에 우리가 지혜롭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충성스러운 자에게 다가올 영원한 세상에서 더 큰일이 맡겨진다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10-12절에는 3개의 아포리즘(aphorism)이 등장합니다. 경구라고도 하는데,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입니다. 격언, 금언, 잠언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청문회에서 우리에게 하실 세 가지 기준입니다. 13절에서는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준1: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인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인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 “큰 것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작은 것에 대한 충성도가 큰 것을 맡기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고,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큰 것에도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것을 누구에게 맡기시겠는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5:21) 작은 것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을 다 드리라’, ‘더 많이 드리라는 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충성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9).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물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도록,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내게 맡기신 것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웃 말고도 가족, 국가, 교회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 재물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 특별히 재정적 수입이 별로 없는 사람,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학생,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퇴직한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재물을 사용하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재물에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큰 것을 드리느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얼마나 충성하는가를 보십니다. 충성이 핵심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훈련은 교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손에 천 원, 오백 원을 들고 하나님께 드리는 연습을 합니다. 달란트 시장에서는 아이가 달란트의 일부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도록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학생회에서도 아이들이 받은 용돈 가운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헌금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수 있도록 돕는 방편들입니다. 성도들이 물질로 성도의 필요를 돕기 위해 구제자금을 모읍니다. 구제에 필요한 물질을 충당하기 위해 집에 있는 물건을 기증하기도 합니다. 애찬 당번이 성도를 섬기기 위해 식사에 필요한 물질을 제공합니다. 성도가 성도를 초대하고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 물질을 사용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모습입니다.

 

당신은 작은 일에 충성하십니까? 이 땅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재물에 작은 일에도 충성스럽게 임하고 있습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 이웃, 국가와 교회의 필요를 충성스럽게 돌보고 있습니까?

 

특별히 내 이웃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런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크다는 수, , 질적으로 더 뛰어난 것을 말하는데, 천국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5:12; 6:23) 이 땅에서 작은 것에 충성된 자에게 천국에서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는 것입니다(25:21).

 

기준2: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는 자인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닙니다.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되지 않다면 참된 것을 어떻게 맡길 것인가, 참된 것을 맡으려면 불의한 것에도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많이 당황합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 “의롭지 못한 재물”(검은돈)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아닙니다.

 

불의한”(아디코스), 하나님과 세상을 구분하여 설명할 때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속한 사람(불신자)이나 물질을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5:45)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24:15)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전 6: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불의한 재물”(16:9, 11)은 뒤에 나오는 참된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 땅에 속한 재물을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악하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속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든 적게 가지고 있든 이 땅에 살아갈 동안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재물은 다음 세상에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딤전 6:7).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재물에도 충성되지 않는다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는가입니다.

 

우리는 행인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몇 년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을 계획하고 한국에서 돈을 열심히 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번 돈을 여기서 흥청망청 쓴다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 것입니까? 우리가 현재 그와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가 가게 될 본국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주어진 일시적인 시간과 재물을 규모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원히 여기 살 사람처럼 사는 것은 어리석고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시리아 에프렘은 없어질 것들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1:13)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이고 행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참된 것을 맡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 가치가 진실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참된 빛”, “참된 떡”(1:9; 6:32). 참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17:3; 살전 1:9; 요일 5:20).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하늘에 간직한 것을 의미합니다(벧전 2:3,4). 영원히 가치가 있고, 영원한 만족을 주며, 영원히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것을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랜디 알콘의 책, ‘돈 소유 영원에서는 두 농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지독한 무신론자였고 또 하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두 농부는 봄에 같은 면적의 곡식을 심었습니다. 무신론자 농부는 그리스도인에게 내기를 겁니다.

 

봄에 같이 씨를 뿌리고 10월쯤에 누가 더 곡식을 거두는지 보자. 너는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는 계속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와는 다르게 무신론자가 더 많은 수확을 거둡니다. 무신론자는 어리석은 사람아, 하나님에 대해 이제 뭐라고 더 할 말이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우리 하나님은 이 10월에 모든 계산을 하지 않으시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의 계산은 하늘나라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기준3: 맡겨진 것에 충성된 자인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2)

 

모든 재물이 사실상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재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이 말씀에서 너희의 것은 무엇일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고(5: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5:10).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9:14).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12:32). ,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바로 믿는 자들의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맡겨준 재물, 내 것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사용하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너희에게 주기로 한 천국 기업을 줄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맡겨진 것에 충성된 자인가? 하나님이 지금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것, 재물, 시간, 능력, 그 외 모든 자원에 나는 충성된 자인가?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 4:2)

 

우리는 사회나 공공기관에서 자금을 함부로 사용할 때 많은 책망을 합니다. 그들의 재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물이기 때문에 더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줍니까?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적당한 충성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큰 것을 주시지 않아도 된다. 그냥 적당히 살다가 하늘나라에 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중간지점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은 적당히 충성된 종의 예시를 들지 않으십니다. 충성된 종이거나 게으른 종입니다. 착한 종이거나 악한 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이거나 불의한 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영원한 것, 하나님의 기업을 맡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기준이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있는 것들에 충성된 자입니다. ‘충성된에 반대된 불의한이라는 단어는, ‘믿지 않는 자’, 천국과 연관시켜서 다른 곳에서 불신자로 영원히 지옥에 가게 될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달란트 비유에서도 하나님이 맡겨준 것에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25:26). 그리고 그가 맞이한 결말은 주인의 처소가 아니라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마땅한 삶,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삶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영원한 기업을 받게 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청문회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비결: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

 

지극히 작은 것부터 이 땅에서 내게 맡겨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 왜 안 될까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재물도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재물이 내 안에서 탐심입니다.

 

이것은 갖가지 죄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여 심지어 하나님도 물질을 더 얻기 위한, 물질적 축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통제해야 하는데 오히려 물질의 하인이 되어 물질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얻는 데 헌신하고, 물질을 소비하는 데 헌신합니다.

 

그러나 집 하인은 오직 한 주인만 섬기는 존재입니다. 집 하인은 집 안에 소속되어 그 집을 위해 일하는 종, 노예입니다. 한 학교의 교사, 한 직장의 직원일 때 회사가 허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직장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른 여자에게 아내를 대하듯 헌신할 수 없습니다. 집 하인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친절을 베풀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우선 순위에 두고 충성을 다해야 할 사람, 헌신해야 할 대상은 오직 자기가 속해 있는 집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오직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은 자기 위치를 찾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과 재물 중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재물을 사용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헌신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나의 재정관리하는 모습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재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기뻐하실까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가계부나 재정관리하는 툴을 꺼내두고 맡겨진 재물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는 더 크고 참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재물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헌신의 대상이 무엇인지, 하나님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결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데서 옵니다(1).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 그래야 인간에게 참된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오는데, 그 자리를 항상 넘보는 우상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우상을 매일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상을 영어로 아이돌이라고 하는데 재물은 우리에게 있어 늘상 인기순위 1위 아이돌입니다.

 

양팔 저울에 하나님과 재물이 있을 때 당신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요? 한쪽은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영원히 자기의 영광과 기업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 그 특권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을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부요하기 위해 가난해지신 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분”,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분입니다. 한쪽에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한 일인가요?

 

당신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 것입니까? 주님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이것을 택하라 하십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스럽게 행하라, 그런 자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사청문회에 갔을 때 이러한 질문들을 하실 때 어떤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었고 적당히 살았으니 하늘나라에 가겠죠가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렇게 산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사는 모습 하나만 봐도 영원하고 크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맡길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돈을 잘 쓰는 사람! /16:13/ 김병삼 목사

2016-03-09 13:42:48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 14.

 

[누가복음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돈을 잘 쓴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으며, 혹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펼쳐져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잘 믿어도 얼마든지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도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물질이 복인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요. 아니면, “하나님은 계신 데 물질이 복이 아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돈 너무나 실제적인 문제 아닙니까?

이 중에 혹시 돈을 싫어한다거나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십시오. 사실 돈은 없어도 문제이고 많아도 문제입니다.

 

돈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설교 제목인데, “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 하니까 확 와 닿는 대요!”라고 합디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재물을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가복음 1025절의 말씀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또한, 예수님께서는 38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주 사용하셨던 주제가 재물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거지와 나사로,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등.

이제 여러분이 이 강단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편해지지요?

 

1.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잘 사는 것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잘사는 사람이라고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못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돈 없이 잘살 수 있는 원리를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4:12).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님을,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자족하는 원리가 있음을 말입니다.

 

2.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83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우리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돈으로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욕심을 내던 것을 얻으면 잠시는 만족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3.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축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은사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주시면 감사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선물은 줄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 돈을 참 잘 쓰네."

두 가지 의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마구잡이로 잘 쓴다는 것과 필요한 적재적소에 잘 쓴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돈이 좋고 나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천박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우아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그 돈으로 우리는 많은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돈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인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돈이 없을 때와 돈이 많을 때

어느 쪽이 여러분의 마음에 드시나요?

돈이 없을 때도, 돈이 많을 때도 우리에게 동일한 시험이 옵니다. 양쪽 순간에 모두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합니다. "누가 주인인가?"

 

돈이 없을 때, 우리는 비참함을 느낍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나서도 결국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우리의 가치를 결정할 때가 많지요.

돈에 대한 실망이 대부분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누가 우리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는 막대한 손해를 입혔던지, 아니면 내가 기대하는 사람에게서 도움이 오지 않을 때 동일한 섭섭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사람 역시 단순히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통로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돈 앞에서 우리는 시험을 받는 것이지요.

 

돈의 많음은 역시 우리에게 큰 시험이 됩니다. 그렇게 의지했던 하나님이, 돈이 많아지는 순간 그렇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분으로 보이기 시작하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돈은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결국, 돈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용하거나 즐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의 지배를 받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중요한 영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돈에 대한 중립적인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크리스천의 경제생활에 관한, 혹은 돈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일관된 시각을 가지는데, “돈의 중립적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디모데 전서 610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리고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다!"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돈의 사용의 측면을 보기 전에, 돈이 가진 본질적인 면을 보아야 합니다. 돈이 가진 본래의 위험성을 우리가 간과한다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계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부정적인 접근으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돈으로 야기될 수 있는 악한 영적 능력이 그것입니다.

 

영적 세력으로서의 돈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적인 용어로,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절과 19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17)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19)

 

그렇습니다.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소욕을 구체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돈이 없으므로 정욕의 죄를 짓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의 사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돈을 가지고 즐기고 누리는 모든 것을 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인생의 일반적인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계에서 청부론청빈론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번 돈으로 얼마든지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청부론입니다. 즉 깨끗한 부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이 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이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쓴 어떤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돈을 거부함으로 부득불 가난해질 순 있어도, 굳이 가난함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크리스천이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되 반드시 정직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 돈과 하나님의 돈을 분별할 줄 아는 투명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일 것이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돈을 맡기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요, 우리가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내면을 보면, 우리가 아무리 돈에 중립적인 가치를 둔다 해도 돈을 사랑하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돈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우리가 고고한 것에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사실 원하는 것은 그 돈 자체인 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그리고 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목적이 열심히” “에 있습니까? 아니면 축복에 있습니까?

 

청부론의 주장을 가만히, 그리고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목적이 올바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부, 즉 돈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바로 주어질 축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헌금을 드리는 이유도 바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구별(區別)하여 드린다, 성별(聖別)하여 드린다, 모든 것을 드린다는 신앙의 원리가 결국은 부를 정당화하고, 내가 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요.

무엇을 느끼시나요? 믿음이 가장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탐욕적인 모습이 아닌가요?

깨끗한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의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술이라는 말이 많이 쓰임에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과에 의사들이 지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회자들에게서도 두 교회를 놓고 어떤 교회로 갈까 고민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돈은 중립적인 가치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돈이지 않습니까?

 

돈을 그냥 물질로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은 영적인 세력입니다. 결국은 돈을 섬기는 사람이 되든지 하나님 편에서든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깨끗하게 번 돈으로, 내가 육체의 소욕을 즐긴다.' 혹은 '깨끗하게 번 돈은 내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돈을 버는 것이,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우리 속에 욕망으로, 혹은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아닌지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 핵심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에서 언급이 됩니다. 누가복음 1818-23절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마음속에 가장 큰 관심과 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 청년의 삶에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이 청년이야말로 청부론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부자이지만, 남을 구제하는 사람이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고, 살인과 간음의 죄를 짓지 않는 사람,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누구도 이 청년이 부를 누리는 데 있어서 무엇이라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깨끗하게, 모범적으로 사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물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은 결단의 문제요, 선택의 문제입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라는 예수님의 단언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제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돈을 쓰는 모습을 다 이야기한다면 여러분은 너무나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설교가 아마 귀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제가 돈을 사용함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과도한 지출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기도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제가 실수하는 부분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실수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부분에 감사합니다.

 

아직은 제가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함에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안도감 말입니다. 계속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순간에 돈의 지배를 받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잠언 307-9절에 있는 지혜의 말씀이 와 닿는 순간입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 말입니다.

열심히 살아 가난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 가난한 이유 때문에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죄를 지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혹시 부자가 되어서 육체적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함을 인하여 불림을 받은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돈에 대하여 청지기 의식을 갖는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돈을 주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사는 사람을 "청지기"라고 합니다.

자신의 돈이 아니므로 주저하지 않고 돈을 '' 씁니다.

 

자신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한 돈을 '' 씁니다.

이 둘의 의미가 확실하게 와 닿으시나요?

돈을 ''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 써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로리에게 확실한 믿음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쌓여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이 믿음이 있어야 돈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는 사람 중에 돈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유혹'은 의지하기 때문에 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나서 제일 많이 회개한 것이, 제 미래에 대하여 돈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군목으로 있던 시절 저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군을 마치면서 유학을 생각했고,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유학 자금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삶의 우선순위는 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놓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던 때, 하나님이 제 인생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도해 가실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돈을 쓰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하시리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군목 시절 교회의 헌금은 오로지 병사들을 위문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사역의 기준은 늘 교회에 헌금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 ''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없으면 제가 헌금을 하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딱 한 달 만에 교회 재정이 2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때 철저하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사역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은혜를 받던 때, 저에게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지금도 잊지 못하는 빨간 프라이드를 타고 전방을 누비며 다니던 때, 두 번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빙판길을 가다 다리를 받고, 전주를 받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그 차를 고칠 돈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를 방문한 교인이 도와줬던 그 돈이 정말 정확하게 차를 고치는 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죠.

 

요즘 저는 공급받는 것보다 '' 쓰는 훈련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부목사님과 같이 갔습니다.

 

20일 정도를 다니다 보면 혼자 쓸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조금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 보니까, 아들 웅기가 생일이라고 선물을 해 주는 겁니다. 그 돈 제가 준 돈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쁜지, 게다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살짝 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선물이 얼마짜리니?"

 

며칠 있다 집사람을 시켜 3배 정도 되는 액수를 다시 주었습니다. 가족에게 선물을 사다 주라고 말입니다.

제가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거나 신학생을 만나면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만나러 오는 사람 중에 저를 큰 교회 목사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는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안내를 받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학생 목사님이 저에게 밥을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면서 그런 인사 많이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서 제가 기쁘게 밥을 삽니다. 그런데 나가면서 밥값을 내려고 카드를 냈더니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냈습니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제가 그냥 꼭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저는 가슴에 새겼습니다. 당장 거기에서 밥값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에 제가 꼭 그 마음을 갚아줄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제가 보통 유학생들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돈을 주고 오는데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주는 것보다 큰 것을 생각하고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로바로 응답이 온다고 기뻐하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돈을 잘 쓰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를 조금 더 다루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21절을 보세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돈지갑이 어디에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돈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청지기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도덕적 차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쉬운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욕망을 채우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기에서 원한다!’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어쩌면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조금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영적인 차원의 문제는, “영적인 척을 하면서 해결될 문제인지 모르지만, 이 도덕적인 측면에 와서는 걸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거룩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돈을 버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기 위함이라면.'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그 거룩한 욕망속에 어떠한 이유이든 내가 돈을 벌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문제인지 모릅니다.

저는 너무 쉽게 저는 돈에 대하여는 초연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내 속에 있는 욕망은 이미 충족시켜 놓고초연한 모습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카네기 (Dale Carnegi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이겨내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욕망에 대한 것을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더 가지려는 것,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 남들보다 편하게 살려는 것 등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1:27).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본성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욕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죄 된 욕망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치료되어야 할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원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것들은 아니지요.

어거스틴은 방치된 욕망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거부하지 않으면 필요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욕망을 내버려두면 필요 이상의 물질을 누리는 습관이 생깁니다. 이 습관에 익숙해지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필요한 것만큼이라는 말은 아무런 통제력을 잃게 됩니다.

 

이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살 집이 필요합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집을 원하십니까? 여기에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차를 타기를 원하십니까? 실제로 갈등하는 부분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전, 호텔에서 결혼 주례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호텔에 가기 때문에 제 차보다는 당시 담임목사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서 주차장에 대지 못하고 valet parking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나올 때는 역시 편하게 돈을 주고 서비스를 샀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는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에게는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저에게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필요이고, 어디까지가 원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세월이 흐르면서 필요와 원하는 것 사이의 기준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이런 정도의 차를 타야겠다.' '이런 정도의 삶을 유지해야겠다.'라는 것들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얼마큼의 돈이 필요한 것이며, 얼마큼의 돈을 원하고 있습니까? 이 차이를 구별하려고 고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돈의 필요에 따라,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성령의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솔직하게 돈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을 단순히 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저도 오늘 여러분에게 돈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돈에 대한 고민을 드리려고 합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고민 말입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따라 돈을 추구하는 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충분히 누리며 살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돈이라는 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욕구, 육체적인 욕구를 가장 잘 만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끊임없이 경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 속에 끊임없이 성령의 소욕이 필요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간섭하시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욕망이 되지 않기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만큼을 아는 사람입니다.

 

돈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필요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복을 구하기보다는 물질의 은사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은 누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분명한 신앙은 자족의 원리를 배우게 합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모든 물질 가운데 자유함으로, 감사함으로, 자족함으로 말입니다.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16:11/ 이재철목사

2015-07-30 21:24:33

 

이원론적 기독교란?

 

이 세상은 하나님께 항거하는 마귀가 지배하는 사회로 본다.

성도는 본향인 천국을 지향하며,

세상에 살 동안에는 핍박을 견디며 사는 나그네다.

 

그러므로, 전도의 사명 이외에 다른 사회적 사명을 거의 배격한다.

이런 (잘못된) 세계관이 한국 교계에 대단히 강하게,

(과거에) 널리 퍼져 있었다.

 

관심을 안 기울이면 슬그머니 침입함

교회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안 쓰면

사회의 부조리가 교회로 슬그머니 침투함.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에 대해 무관심다가

사회의 부패함이 교회로 침입해서

그 결과,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되었다(지난 30년 현상).

 

겉으로는 경건해서 기도와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속에서 교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은 물신/권세/명예를 섬기는 세상 가치관과 똑 같았다.

 

 

내가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면 훨씬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사회' 또는 '사회와 교회의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성도는, 그것을 생각하며 사는 성도보다,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을 더욱 쉽게 받아들인다. 쉽게 동화된다.

 

 

한국 교회의 세속화 원인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한국 성도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살아왔으므로,

지금 현재, 사회의 (안 좋은) 영향력을 훨씬 많이 받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돈/권력/명예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경향이 있다.

 

대부분 교회가 돈 우상을 섬기는 이유

그 동안 '사회/경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살았기 때문. 무관심하니까 슬그머니 교회로 침입하는 것도 모르는 체 지내왔다.

 

권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사회의 정치권력 문제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결과, 권력의 폐해가 슬그머니 들어와서, 교회에는 세상 권력 체계가 고스란히 들어오고,

세상 권세자들을 필요이상으로 우대하는 세속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전도가 중지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며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한국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덕적 존경심을 상실하고 말았다.

 

크리스천 정치가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하고 있고, 크리스천 법조인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직업 활동을 한다.

예를 들면, 뻔히 질 재판인데도 한 번 소송을 걸어보자고 나온다.

 

 

'교회 성장'이 너무 과도했음

 

실제로 목회자가 성경대로 설교하면 (초기에)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떠나 버릴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목회자는 교인들 귀에 듣기 좋은 설교를 하게 된다.

교인을 더 끌어 모으려다 보니 축복/사랑/위로의 하나님을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성장'이란 우상은 한국 교회에 여전히 큰 문제이다.

 

금융에 관한 성경적 시각

 

이자 수입

 

원래 성경은 동족인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한다.

중세 시대까지 고리대금업은 매춘보다 같거나 더한 범죄 행위였다.

그래서 그런 범죄적 사업은 비난받는 천한 유대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역사상 최초로 이자 수익을 허용했다. 이유인즉, 구약시대 때 돈을 빌리는 목적은 생계/목숨 유지를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이자를 취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업자본주의'로 시대가 변했고, 돈 빌리는 목적도 바뀌었다.

지금은 사업을 위해 돈을 빌리므로, 공평의 원칙에 의해, 이자 받음이 옳다고 주장했다.

 

주식 투자

 

주식 투자를 통해 '배당 이익'을 얻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그러나 단타 매매를 통해 시세 차익을 챙기는 행위는 불로소득이다.

주식 투자를 하되, 하루만에 사고 파는 'day trading'은 금해야 한다.

 

미국은 day trading15%인데 반해, 한국은 모든 증권거래의 70%를 차지. 크리스천들은,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재테크 방식을 양심상 금해야 한다.

 

윤리적 크리스천이 좋은 크리스천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좋은 크리스천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

거창한 일도 필요하지만, 내 주변의 작은 일에서부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나가보자.

 

축재에 대한 교회의 주장

 

종교 개혁 이전까지 교회는 한 번도 축재에 대해서 장려한 적이 없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르는 것이었다.

교회는 축재에 대해 비판적으로 가르쳤고, 그래서 부자들이 교회 다니기 힘들었다.

 

 

칼빈 이후 개신 교회는 전통 가톨릭교회와 조금 다른 입장을 가르쳤다.

물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일부-선한 것-로 보았다. 죄악시하지 않았다.

거룩한 목적의 부의 축재가 (당시 소수파였던) 개신 교회에서 최초로 용인되었다.

 

그 결과, 귀족과 봉건 영주들이 대거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고, 개신교는 근대 자본주의가 탄생되는데 중요한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반대로 이 사상을 극단적으로 오용, 남용한 결과 '물질의 우상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자기 진실의 진단 /16:9-13/ 곽선희 목사

2014-11-19 10:57:08

 

1940년 미국에서 되었던 이야기 입니다. 노틀담 미국 축구팀의 센 터 포지션을 맡고 있는 사람은 프랭 크 사만스키라고 하는 축구선수였습 니다.

 

그가 어떤 민사소송에 연유 되어 가지고 증인으로 법정에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판사는 그에 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노 틀담 미식축구 팀의 선수로 출전한 일이 있습니까?"

 

"예 재판장님.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 시 물었습니다.

"포지션은 무엇입 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센터 입니다."

 

재판장은 지긋이 좀 비웃 는 그런 얼굴로 물었습니다.

"그래, 당신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센 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청년은 잠깐 생각하고 나서 당돌 하게 하는 말이

 

"역대의 센터 역사 중의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생각합 니다."하고 말했답니다. 모든 사람 이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그 뒤에 와 있던 감독은 더 놀랐습니다.

 

저 사람이 평소에 되게 아주 참 겸손하 고,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그런 사 람이었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 와서 자기가 최고의 센터라고 이렇게 당 돌하게 말하나, 그래서 하도 어의가 없었는데 재판이 끝난 다음에 이 감 독이 이 선수를 데리고 나가면서

 

"자네 평소에 그렇게 겸손하더니 오 늘은 어떻게 당당하게 내가 역사상 최고의 좋은 축구선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이 청년 이 하는 말입니다.

"저는 재판장 앞에서 손을 들고 '진실 외에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서를 했습 니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 다."

 

여러분, 재판정에 선 사람은 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 외에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은 내가 말한 결과가 어떻게 되던지 주위에 누가 듣고 있는지 누가보고 있는지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로 인하여 내게 어떤 이익이 올 것인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진실이 아닙니다. 오로지 진실 하나만 생 각하고 진실만 말합니다. 나는 내 가 믿기에 최고의 축구선수라고 생 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진실을 말한 것 뿐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 진실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 은 자본이라고 합니다. 지식이라고 도 하고 경험이라고도 하고, 열심이 라고도 합니다 만은 아닙니다. 이 를 가능케 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없는 것은 바로 진실 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충성이라는 말 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피 스티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충 성, 진실 이렇게 두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사실 충성과 진실은 하나 입니다. 믿음이올시다. 믿을 수 있 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 말씀 이 '작은 일에 충성했기에 큰 일을 맡기리라.' 자세히 한 번 들어봅시 다. 맡긴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어디에다 맡긴다는 말입니까? 지식 이 있는 자, 능력이 있는 자, 경험이 있는 자? 아니에요. 진실이 있는 자에게 맡긴다는 겁니다.

 

충성이 없는 자의 것은 빼앗았습니다. 그 가 가지고 있는 것도 다 빼앗겼습니 다. 우리가 빼앗긴 것은 바로 진실 이 없었기 때문이요. 다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충성과 진실입니다.

 

우 리는 이 충성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되겠습니다. 자기 진실을 진단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진 실한 자인가, 어떤 진실을 가지고 있는가, 내 진실은 지수가 얼마인 가? 스스로 평가해 봐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말씀을 아주 논리적으로 차곡차곡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재 산을 통해서 보아야 됩니다. 사람 의 진실은 물질 앞에서 무너집니다. 돈이라는 것이 중요한 시금석이 됩 니다. 돈과 사람 어느 쪽이 중요합 니까? 돈만 생각하고 사람을 못 보 면 그건 진실이 없는 겁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특별히 '불의한 재 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랬는데 이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 처음부터 쭉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 니다. 잃어버린 불 충성 때문에 이 미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 마간의 유예기간을 얻었는데 이제 없어질 재물입니다. 내 손에서 곧 떠나게 될 재물입니다.

 

없어질 재 물, 얼마 안 남았습니다. 부득불 빼 앗길 수밖에 없는 재물입니다. 이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어라. 어쩌면 이 남은 기간 내 것 가지고 싶지요. 내 것 만들고 싶지만은 아 니에요.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친 구를 사귀라. 친구가 더 중요하다 는 말이지요.

 

사람을 잃어버린 다 음에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만히 보세요. 돈에 인색한 사람 은 친구가 없습니다. 돈을 바로 쓰 지 못하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그 리고 마지막엔 돈도 지키지 못합니 다. 그것도 다 날아가고 맙니다.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여 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나?

 

1993925일에 있었던 일입 니다. 저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어 떤 청년에게 3억원 상당의 복권이 당선이 됐습니다. 공짜 돈 3억원이 생겼단 말이에요. 온 집안이 모여 서 축하파티를 했습니다. 굉장한 파티를 벌였는데 벌이고 나서 이걸 좀 나누어 갖자. 그래서 친척간에 형제간에 나누다가 싸움이 나서 사 람을 죽였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복권 당선돼 가지고 잘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복권이 아 닙니다 그게. 화권입니다. 화권. 공짜 돈이라는 건 절대로 나를 행복 하게 하지 못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억 만금이 내 손에 들 어와도 아닙니다.

 

공짜는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수준에 도 달합니까? 아니 돈 번다는데 무얼 마다하나? 그까짓 거짓말이 문제냐 진실이 문제냐 사람이 문제냐? 강 도가 별 사람입니까? 사람의 목숨 은 중요하지 않고 돈만 중요한 사람 이 강도요. 그 강도의 마음이에요. 그런고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인격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수준의 진실이어야 한단 말이에요.

 

고려 공민왕 때에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두 청년이 아주 형제간의 우애가 좋았는데 길을 가다가 금 덩 어리 하나를 주웠습니다. 노다지를 주웠는데 자 이 형님의 손에 있으면 동생이 불안하고, 동생의 손에 있으 면 형님이 불안해서 나 좀 보자, 나 좀 봅시다 이러고 가다가 형님이 양 화진 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면서 나룻배를 타고 가다가 이 금 덩어리 를 물 속에다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왜요?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는 데 이 금 덩어리가 우리 손에 있으 면서부터 내 마음도 괴롭고, 네 마 음도 괴롭고 어느 사이에 우리 사이 가 이렇게 나빠지더냐 이거예요. 그런고로 이 금 덩어리는 우리에게 필요 없다. 던져 버렸어요. 자 이 제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인격을 높 이고 신의를 위하여 금 덩어리를 던 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 을 더 소중히 여깁니까? 거기에 진 실이 있는 것이에요.

 

또한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라야 큰 것에 도 충성된다.' 작은 것, 큰 것. 사 람보기에는 작고 큰 것이 있지만은 하나님 앞에는 마찬가지예요. 한 달란트든 두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 든 주인이 준 달란트입니다.

 

작고 크고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작은 일 보면 큰 일도 알 수 있어요. 근 데 사람마다 큰 일하겠다 그러면서 작은 걸 무시해요. 나는 위대한 일 을 하기 때문에 이런 건 상관이 없 다. 여기에 망조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작은 진실을 다시 찾으십시 다.

 

우린 차를 운전할 때 보면 여러 분 다 느끼겠지만 앞에 가는 차 자 세히 보면은 담배 불을, 그 담배 재 를 문 밖에는 터는 이런 사람 볼 때 마다 마음이 괴로워요. 가까이 가 서 보니까 멀쩡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지금 내가 무얼 잘못하고 있 는지 몰라요. 그 사람에게 내가 한 마디 충고하고 싶지만 충고했다가는 싸움 날까봐 못합니다. 그 다음에 더 못된 말 나올까봐 차마 말을 못 하고 지나갈 때 마음이 아픕니다. 슬픕니다. 도대체 이 담배 재를 어 디가 털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의 문화예요 지금.

 

그뿐입니까? 가끔 식당에서 보 면은요 그저 남이야 듣던 말던 소리 지르고 떠드는 걸 볼 때에 웃는 소 리라면 괜찮아요. 일장 연설을 하 고 떠드는 걸 보면 이게 야만인이 따로 없는 거예요. 자기가 전세 냈 어요?

 

누가 옆에서 들을까봐 조용 조용 말해야 되겠는데 이게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냥. 이게 작은 일 아닙니까? 휴지 한 장을 써도 아낄 줄 알아야 되고, 메모지 한 장이라 도 한 쪽이 남았으면 뒤집어 다시 쓸 줄을 알아야지 그까짓 더 사면 그만 아니야 이게 안되지요.

 

내 이런 책을 읽었습니다. '한국 이 미국사람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런 책이 있더라고요. 거기 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은 구두닦이가 성행이고, 미국은 구 두 수선이 성행이라고…… 거기서 졌다는 얘기입니다.

 

백 불 짜리 구 두를 밑창이 떨어졌다고 50불을 주 고 수리를 하더랍니다. 백 불 짜리 구두를 50불 들여서 수리. 우리 같 으면 50불 보태서 새 것을 사지…… 이게 우리 마음이요. 저 사람들은 안 그래요. 50불을 들여서 다시 수 리해 가지고 신는 겁니다. 작은 일, 작은 일 같지만 바로 그것이 복 받 는 그릇이에요. 멀쩡한 걸 내버리 고요. 이래서 되겠습니까? 작은 일에 충성치 못하면 큰 일 바라볼 거 없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 성실히 해야 됩니다.

 

오늘도 귀한 성가를 불러줬습니 다만은 유능한 작곡가 바하는 본래 라이프 치히라고 하는 곳에 있는 토 마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입니다. 오르가니스트로서 그는 생각했습니 다. 매주일 새로운 곡을 내가 작곡 해서 교회를 봉사하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릴 것이다. 매주일 작곡을 합니다. 새로운 합창곡을 작곡하고 새로운 올겐 곡을 작곡을 했습니다.

 

그의 작곡이 출판되지도 않았고 팔 리지도 않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 한 누가 돈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 다. 아무 값도 받지 못하나 교회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부지런히 매주 일매주일 작곡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265 올겐 곡과 263의 합창곡 그리고 162곡의 피아노 곡을 작곡하 게 됩니다. 이렇게 수 십년 봉사할 때에 그 재능이 점점 높아지고 명성 이 높아져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적인 바하가 된 거예요. 그가 천재는 아니에요. 작은 일에 성실 히성실히 봉사하다 보니 이런 사람 이 된 거지요.

 

무엇을 하던지 그렇습니다. 전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제 오늘도 문 제인데 좀 있다가 헌금 할 때 독창 부르겠는데 난 독창하는 사람이 악 보 가지고 나오는 건 영 못 봐줍니 다. 그 한 곡 부르려면 제대로 부 르던지 하지 악보 가지고 나와서 읽 자고야 뭐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작 곡한 것도 아닌데 남의 거 제대로라 도 부르지…… 이걸 그래 악보를 가지고 와서 읽고 앉았어! 그렇게 불성실할 바엔 그만 둬! 그것이 내 마음입니다. 뭐 하나라도 정말 성 실하게 충성되게 정 못하겠거든 손 바닥에다가도 써 가지고 나오지 그 큰 악보를 들고 부르고 있어요.

 

나 이거 영 못 봐. 그런 줄 아세요. 거기에 성의가 없는 거예요. 성의 가. 정성과 진실이 담겨지지 않았 다는 말입니다. 그 한 곡을 위해서 정말 애를 써서 하는 것과, 즉흥적 으로 한 곡 나와서 손들고 찬송가 가지고 부르는 건 이게 바로 진실이 없는 거예요. 마음이 담기지 않았 다는 얘기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 하자. 하나님께서 큰일을, 큰일을 큰 것을 맡기시는 거예요.

 

또 남의 것, 내 것 할 때는 남의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 열왕기 하 6장에 보면 엘리사 선지 때에 그 제자들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찍 게 됩니다. 자기네 숙소를 좀 넓히 기 위해서. 나무를 찍다가 도끼 하 나가 도끼 자루에서 빠져서 물 속에 빠졌어요. 그 때의 그 제자가 이렇 게 말합니다.

 

"아 큰일 났습니다. 이것은 빌려온 도끼입니다."

그리 고 당황합니다.

"내 도끼면 하나 없어지면 그만이지만 빌려온 것입니 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리 안 타까워하여서 엘리사가 그 도끼를 건져주는 이야기가 있지요. 빌려온 물건, 내 물건과 빌려온 물건 어느 쪽이 소중합니까? 여러분 진실을 물어보세요. 내 것과 남의 것 어느 쪽이 소중합니까?

 

내 기분 남의 기 분 어느 쪽이 소중합니까? 내 명예 남의 명예 어느 쪽이 소중합니까? 여기서 우리가 부도난 것이에요.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건 더 중요하니까요. 배 려 의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유명한 얘기입니다. 제가 여기 서도 몇 번 말씀 드린 것 같습니다. 인도의 지도자인 간디는 어느 날 기 차를 타는데 조금 늦어서 달려가는 기차를 겨우 올라탔습니다. 올라타 자마자 신발 하나가 벗어 졌어요. 신발 하나가 벗어 졌는데 뭐 그렇다 고 기차 멈추겠습니까?

 

한 짝 잃어 버렸지. 그런 순간 바로 다른 한 쪽 신발을 벗어서 던지더랍니다. 아니 한 쪽 잃어버린 것도 억울한데 왜 한 쪽은 던집니까? 나야 어차피 잃어 버렸지만은 저 신발을 주울 때 한 짝 가지고야 신겠나 두 짝을 줘 야 신을 거 아닌가 하고 벗어주는 거예요.

 

내 신 잃어 버렸다고 몸부 림치기보다 이 신을 다음에 신을 사 람이 두 짝이 되야 신지 않겠느냐 그 쪽을 먼저 생각했더라 이 말이예 요. 이것이 위대한 사람이요, 남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얼마 나 소중한 얘기입니까!

 

더욱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습 니다. 스위스에 캐스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조그마 하게 시계포를 하는 사람이에요. 시계를 만들어서 파는 그런 사랍니 다. 그런데 좀 사업이 잘못 돼 가 지고 빚을 많이 져서 급히 은행 빚 을 갚아야 되는데 독촉을 받고 있었 어요. 그런데 자기 집에 시계,

 

고급 좋은 시계가 몇 개 있는데 이게 팔 리면 되겠는데 하고 기다렸는데 기 도했어요. 그것 때문에. '이 고급 시계 좀 몇 개 빨리 팔려서 빚을 갚 게 해 주세요.' 시계는 가지고 있는 데 돈은 없거든. 그랬는데 어떤 점 잖은 사람이 와서 시계는 사는 거예 요. 아 그 비싼 시계를 많은 돈을 내고 사요. 돈을 치렀어요. 그래서 이제 됐다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그 러고 나서 하는 말이

 

"사실은다른 시계 하나 보이면서내가 이 시계 를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인, 예수 믿는 사람 집에서 샀는데 이게 사자 마자 고장이 났어. 그래 내가 마음 이 아파서 새 것을 또 사느라고 ……"

그러니까 이 주인이

"시계 좀 봅시다."

보니까 훨씬 고급 시 계예요. 아주 좋은 시계야.

 

"잠깐 무엇이 좀 잘 못 됐나 본데 제가 좀 손봐 드리겠습니다."

잠깐 만지니 까 잘 돌아가요.

"이 시계가 제가 판 시계보다 훨씬 좋은 시계입니다. 그러니까 내 시계는 필요가 없겠구 만요. 도로 주시구려."

 

그리고 돈 을 드렸어요. 이걸 옆에서 보던 아 들이

"아버지, 그러면 은행 빚은 못 갚지 않습니까? 이미 판 시계인데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왜 남의 시계 는 좋다고 칭찬해 가지고 이렇게 되 는 겁니까?"

그 아버지가 하는 말 이

 

"받아서 복된 돈이 있고, 복되지 못한 돈이 있느니라."

그리고 시계 를 주었습니다. 보세요. 이틀 후에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참 좋 은 사람이거든요. 다시 돌아와서 시계를 많이 살 뿐만 아니라

"앞으 로 이 회사에서 만드는 시계 2년 동 안 내가 몽땅 사겠습니다."

 

이래서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물건 남의 물건 어느 쪽이 더 소중 합니까?

우리는 남 칭찬하는 거 아주 못 봐요. 남의 물건 좋다는 것은 죽어 도 못해요. 그러면 죽어야지. 식을 알아야 돼. 충성이 없고, 진실이 없 어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 나 남의 물건이 더 소중한 것이에 요. 남의 인격이 더 소중한 것이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주신 말씀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 느니라. 돈이 진실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과 함께 맘 모니즘이 돼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 큰 채찍을 맞고 있습니다.

 

그 건 바로 맘모니즘에 대한 징계입니 다. 황금 만능주의에 대한 채찍입 니다. 우리가 지금 문제되는 것은 전부 진실은 없고, 돈만 있는 거예 요. 돈 하나만 따라가면서 다 팔아 먹었어요.

 

제가 어느 때 학장 일을 좀 보았 어요. 입학기가 되면은 어떤 부모 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돈은 얼 마든지 줄 테니까 이 학생을 입학시 켜 달라고 그럽니다. 저는 앉혀 놓 고

"그러지 맙시다.

 

학교를 못 다 녀도 진실이 해야지. 이걸 뒷문으 로 돈을 받고 얘를 입학시키면은 얘 는 앞으로 아들딸을 낳았을 때 아이 들을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지금 만 생각하지 마시고 장차를 생각하 십시다."

 

그런고로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해도 말 안 들어요.

"좌우 지간 입학시켜 주세요."

그 때마다 이 한심한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짓 위에 돈은 뭐하고 명예는 뭐하 고 학벌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이것이 문화화 되 버렸습니까? 뭐 그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이것이 문화화 될 때 그건 종말입니다.

 

우리 다시 깊이 생각하십시다. 스스로 진단해 보십시다. 진실을 잃어버린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습 니까! 진실이 없는 열심이 무슨 소 용이 있습니까? 진실이 없는 부지 런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진실을 가르치지 못하고 우리가 돈을 주면 무얼하고 명예를 주면 무얼 하겠습 니까! 온통 거짓 투성이야.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려고도 안 합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작은 것에 충 성돼야 주께서 큰일을 맡기실 겁니 다. 남의 것에 충성할 것입니다.

 

신앙적 자세로 진실을 다시 재점검 해야 됩니다. 그리할 때에 주께서 는 큰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더 넉 넉한 것으로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 니다. 실종된 자기 진실에 대하여 다시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겠습니 다.

 

 

 

 

 

 

새로운 재물관/16:1-13

2008-03-24 17:13:29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래 신앙생활 재점검 시리즈 설교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주제이지만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주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재물관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 전부를 새롭게 합니다. 세상의 생각을 뒤엎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돈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것 가운데 1/3은 재물, , 물질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많이 다룬 주제는 하나님나라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돈, 재물, 물질에 관한 가르침은 성경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중심에 있고 매일의 삶 가운데 다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할 말이 많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돈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돈 때문에 걱정하는지를 아셨고 그것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돈에 대해서 가르침으로 우리를 염려에서 평안으로 스트레스에서부터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자리로 이끌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읽고 나면 좀 의외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칭찬을 받는 청지기의 행사가 전혀 칭찬할 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시면 주님은 그의 불의함을 칭찬하지 않고 다만 그가 한 행동의 지혜로운 측면에 대해서 칭찬했다는 것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이 청지기는 정직하게 주인의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가리켜서 불의한청지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박한 파면을 앞두고 지혜롭게자기 앞가림을 하는 그 모습에서 그 불의한 청지기는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소유에 대한 4가지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지혜로움의 원리

 

이 청지기에 대한 주님의 칭찬을 들어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세상 살아가는 것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런 이야기지요. 이 사람이 한 일은 결코 본받을 만한 정직한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칭찬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은 이 사람의 지혜로움을 약삭빠른 짓이라고 좀 부정적인 뉘앙스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8절 후반절에는 좀 더 놀라운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면이 있다는 거지요. 주님은 이 사람을 칭찬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약삭빠르게 살아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그 정직하지 못한 경리의 약삭빠른 짓을 보고 감탄하였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거래를 하는 면에서는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다.”

 

주인의 것을 속여 취하는 이 사람도 이렇게 지혜로운데 하물며 이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욱 더 지혜로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탄식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님은 어떤 지혜를 우리가 갖기를 원하실까요?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지혜로움이나 영리함이란 말은 단지 부정적인 뉘앙스만 갖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의 삶에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지혜롭게 다루길 원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0:16) 우리는 뱀이냐 비둘기냐를 두고 하나를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둘 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뱀을 징그럽게 여기고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뱀을 관찰하기를 바라십니다. 뱀으로부터도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순결하게 사는 것과 천진난만하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모든 것을 우리가 지혜롭게 영리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쓰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이 청지기로부터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행동의 영리함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의 부정직함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의 지혜로움은 배워야 합니다.

 

1.1 그는 사물을 실제적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직무가 끝난다는 것, 그것을 생각을 했습니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 이 사람은 현실을 바로 파악했습니다. 도적질하는 것은 몰라도 빌어먹는 것은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에 입각해서 대처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8)

 

그러니까 이 청지기가 한 짓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한 청지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자기 파면을 앞두고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1.2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혜로움은 그가 재빨리 행동한 것입니다.

 

옳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주인이 나를 청지기 자리에서 떨려 날 때에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이해 줄 사람들을 미리 마련해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소집을 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습니다. 기름 백 말 입니다. , 이것이 당신의 빚 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땅을 파서 먹고 살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생각한 나머지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반짝하고 떠오른 생각은 불행히도 주인의 재산을 갈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자 바로 행동에 옮깁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떠오르는 아이디어라고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바른 일인지 말씀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신앙의 친구들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람에게서 배울 것은 자기의 파면을 앞두고 재빨리 손을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도 꾸물거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오면 바로 행동에 옮겼다는 것입니다. 자기 직책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의 유익을 얻어낸 것입니다. 파면된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행동을 했습니다.

 

끝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행동했습니다. 종말을 의식하고 행동한 것이야말로 바로 주님이 칭찬하는 지혜로운 점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이 온다고 생각하면, 그 사실에 입각해서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결코 그 불의한 것을 닮으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짓은 불의하지만 한 것은 똑똑한 짓 아니냐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도 자기가 파면될 것을 알고는 대책을 세웠습니다. 인생이 끝날 것을 종말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보다는 똑똑하다 그런 말입니다.

 

2. 투자의 원리

 

우리가 이 비유에서 배울 두 번째의 원리는 투자의 원리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9)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돈으로 친구를 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으로 천국을 사라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에게 하늘 길을 열어 주셨기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생명만이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돈에 대해서 두 가지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2.1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의의 재물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세상의 근본 속성을 불의하다고 보셨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세상의 재물들을 말합니다.

 

세상의 재물은 세상이 지속하는 만큼만 지속합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물질이 나한테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우리의 삶에 주신 것만 소유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해고를 눈앞에 둔 이 청지기와 우리 신세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자기 직무가 며칠 안에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겁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 우리 모두의 삶은 얼마 안에 곧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젊다고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엄숙한 사실은 이 세상의 삶은 매우 짧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곧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영원하지 않다는,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여유 돈이 좀 있어서 주식 투자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회사는 분석을 해보니까 오래가야 한 3,4주 만에 반드시 끝장 날 것이 분명한 망할 회사입니다. 다른 한 회사를 살펴보니 지금도 잘 나가지만 앞으로 더 잘 나갈 회사고 어쩌면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회사에 투자합니까? 어느 회사에 투자를 할까 고민을 합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어디에 여러분은 투자하시렵니까? 이것이야말로 투자의 원리 배후에 있는 핵심문제입니다.

 

2.2 돈은 영원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돈은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돈으로 친구를 매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에 누군가가 여러분을 도와준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우정이 싹틀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돕는다면 우정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이 영원이 지속할 관계의 시작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점심 한 끼 나누기 위해서 사용하는 물질도 누군가에게 영원을 선물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은 시작하지만 영원으로 지속할 수 있습니다. 한 날 천국에서 만나서 그 친구하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 투자한 그 돈이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고 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 물질을 드리는 것은 영원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투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에 표를 던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현재를 위해서 던질 수도 있고 영원을 위해서 표를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가르치는 세 번째의 원리로 넘어가 봅시다.

 

3. 신뢰의 원리

 

돈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그렇습니다.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성실하다는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면 작은 일을 어떻게 다루는 지 살펴보면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돈과 물질은 우리의 삶에서 사소한 문제의 하나입니다. 적어도 주님은 그렇게 보셨습니다. 세상의 물질은 속성상 불의한 것이고 또한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판정 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신뢰가 가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는지, 일주일에 QT 몇 번 하는지, 어떻게 새벽, 저녁으로 기도하는지 살펴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가계부를 보는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영적인 경험과 간증이 아니라 돈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정말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우리에게 어떻게 공급하실 지를 결정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여러분의 금전출납부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온갖 연구를 하고 인터뷰를 하고 소문을 취재하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그가 기록한 금전출납부를 보면 됩니다. 한 사람의 모든 편지를 다 읽어보고 연설을 다 분석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금전출납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섹션별로 나누어진 잡지처럼 되어 있질 않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혹시 왜 하나님이 나를 좀 더 위대한 일에 사용하지 않느냐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적은 일을 내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별로 가진 게 없어요. 하나님은 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있질 않고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칭찬을 받은 연보는 동전 두개를 넣은 과부의 연보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신 연보 가운데 가장 많은 연보였습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희년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칼럼에 밝혔던 대로 8억 이상 리모델링 하고 주변 예배환경을 가꾸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을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들을 자꾸 의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떤 마음자세로 동참하는지 그것을 보시고 여러분을 얼마나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를 평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확한 씨 뿌림과 거둠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여러분이 심는 바로 그것을 여러분은 거두게 됩니다.

 

무엇을 여러분은 심을 것입니까? 장차 그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옥수수를 심은데서는 수박을 거두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농사를 짓진 아니해도 그 정도는 이해합니다. 심는 그것을 우리는 장차 거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불만과 짜증보다는 지금껏 무엇을 심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심은 것을 정확히 거두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대보다 더 많이, 아니면 더 적게 거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여러분이 심은 것을 거둡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거두는 열매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다른 씨를 심기 시작하십시오. 우린 언제나 심는 것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4. 선택의 원리

 

선택은 단순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여기서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돈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둘 다 섬기려 들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돈을 섬기는 쪽으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동전 하나는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동전을 여러분의 눈 가까이 하면 할수록 여러분의 모든 시야를 가리기 시작합니다. 돈을 너무 가까이 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를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정말 돈은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은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의 문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돈에 대해서 우리가 내릴 선택은 어떻게 벌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 입니다.

 

돈에 대한 여러분의 입장은 다음 중 하나일 것입니다.

 

4.1 돈을 사랑하는 입장입니다.

 

돈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실 돈은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해 주기도 합니다. 삶을 편리하게 하기도 하고 쾌적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 여러분의 인생 모든 것이 거기에 탕진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인간관계도 없고 돈만 전부가 됩니다. 삶이란 텅 비게 됩니다. 그러므로 돈을 바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이 여러분의 인생을 주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돈을 섬겨야만 합니다.

 

4.2 정반대로, 돈을 미워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을 취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수전노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돈이 끼치는 수많은 해악을 보면서 나는 돈이 싫어. 돈을 멀리하며 살고 싶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돈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돈은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를 오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도구 자체를 미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도구는 하나님의 선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 삼의 선택도 있습니다.

 

4.3 돈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는 것입니다.

 

잘 사는 나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도 돕지 않는 가진 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해외여행을 해보셨다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사는지를 여러분은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은 우리가 착해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아 누린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우리보다 더 열심히 발버둥쳐도 안 되는 나라는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말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게으른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엄청 열심히 해도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자가 되는 것이 여러분이 부지런하고 여러분이 더 정직하고 여러분이 착해서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엄청난 축복을 받아 누린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당신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잘못된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감추려들지 말고 정확히 실체를 파악하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많은 도움을 바라는 손길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성폭력 피해아동 보호시설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을 시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6,300만원이나 매월 그 돈의 이자에 해당하는 자금이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성폭력 피해 아이들을 좀 살수 있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아서 지낼 수 있는 이런 거처를 하나 마련해 달라는 것입니다.

 

4.4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은 돈을 하나님이 주신 도구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탁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이웃의 선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여유 있는 물질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덜 이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대신에 꼭 필요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돈은 도구입니다. 모든 도구가 그렇듯이 나쁘게도, 선하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선의 방안으로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면서 다음 주 어떻게 헌금 할 것인지를 결단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돈이 여러분을 얽어매지 않습니다. 누구에나 돈을 멀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일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입니다. 돈은 우리를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면모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합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만족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입택 예배를 드린다고 다녀오면 집안이 갑자기 좁아 보이고 복잡해 보이고 어수선해 보입니다. 지금까지 잘 타고 다니던 차가 잘 굴러다닙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새 차를 뽑으면 이놈의 차가 왜 이리 시끄럽노.”멀쩡한 차를 바꿀 궁리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리에 빠져들지 않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유일한 방안은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는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다하기도 전에 때로는 사람도 떠나가고 많은 경우에 여러분이 눈 감기 전에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물질도 떠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신뢰해야 합니까? 얼마 못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돈사랑에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역시 이 청지기와 같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째깍째깍 시간을 흐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시간은 곧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도록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이고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하지 않은 세상물질로서 중요한 것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성공은 얼마나 벌었는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압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위해서 쓰는 자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때문에 여러분은 오스카 쉰들러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폴란드의 이 사업가는 자기가 가진 돈을, 자기가 하는 사업을 유대인 노동자를 구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막는 데에 가진 돈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물질이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래 가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영원히 지속하는 것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투자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을 쏟아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위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영원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3:8)

 

다른 모든 것, 내가 이룬 모든 업적도, 내가 모든 재산도, 명예도 다 무가치합니다.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그것이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은 주님을 아는 일, 그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는데 처음 나오자마자 연보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서 야 역시 교회는 우리 돈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혹시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제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한 설교는 울산교회 세례교인들을 향해서 하는 설교지 그 나머지 분들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갑자기 이 설교를 듣는 순간, 돈에 대한 설교를 듣는 순간에 야 역시 내 지갑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나.” 이렇게 생각해서 시험 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을 주인으로 만나기 전에는 여러분의 지갑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여러분의 오늘까지 삶의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나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 아니면 돈입니다. 그게 사람들의 신입니다.

 

하나님을 아직 주인으로 삼지 못한 사람에게 제가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주님을 만나셔야 됩니다. 그래야 무엇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울산교회 교적에 세례교인으로 이름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약 주님과의 관계를 이미 맺고 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을 사용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분처럼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가게 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희년을 맞이해서 제가 칼럼에 밝힌 대로 8억 이상 되는 돈을 들여서 예배 환경을 더 쾌적하게,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우가 함께 짐을 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지혜로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어디에 투자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주인의 신뢰를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여러분은 선택하셔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를 이 땅에 아직도 남겨두심은 이 거룩한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새로운 재물관을 가지고 새로운 과업을 수행하는 일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함께 나아가는 일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들였던 8억을 투자할 수 있는 보다 훨씬 더 좋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환경이 25년 동안에 많이 개선되었기 때문입니다.

 

25년 전에는 이 건물을 짓고 들어올 때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들어왔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번에 리모델링해서 들어오면서 여러분이 만족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 그 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25년 동안에 삶의 모든 주위 환경이 개선되어서 이제는 이 공간이 많이 낡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출입하고 드나들고 예배하는 데에 제대로 된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울산교회는 마음먹으면 어떤 일이라도 해 내 갈 수 있는 공동체인 것을 확인해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연보는 언제나 자원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교회에 집회를 갔더니 커피 마시는 곳에 자율헌금그렇게 써놓았더라고요. 본래 헌금은 자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를 따라서 우리가 함께 힘을 쓸 때에 백짓장도 맞들면 낫습니다. 우리는 이 할 일 많은 광역시 울산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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