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이 주는 위로” /눅24:13-53
2024-04-16 09:26:14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우리는 보통 ‘승천’이라고 부릅니다. 승천 교리는 사실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만, 사실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만큼 주목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일반의 교회들이 지키고 있는 절기만 보아도, 성탄절과 부활절은 굉장히 크고 성대하게 지키지만, 승천일은 언제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교회의 절기로 지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도 별로 얻지 못하는 것이 이 ‘승천’이라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교리문답을 보시면 아실 수 있겠지만, 교리문답은 승천을 대단히 중요한 주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무려 네 개나 되는 문답이 여기에 할애되어 있고, 대답도 굉장히 길고 상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책에 거의 빽빽하게 두 페이지입니다. 승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교리문답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교리문답이 이렇게 승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신학적인 배경이 있어서입니다. 개혁파가 이 교리문답을 만들 당시는 ‘편재설’에 있어서 루터파와의 갈등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루터파는 예수님께서 몸으로도 이 세상에 편재하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개혁파는 이것을 거부하는 훌륭한 방법으로 승천이 ‘주님의 몸이 친히 하늘에 올라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땅에서 주님의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찬에 대해 배울 때 여러분이 배우셨던 것입니다. 루터파는 성찬의 떡을 뗄 때, 하늘에 계신 주님의 몸이 친히 이 땅에 내려옵니다. 하지만 개혁파는 성찬의 떡을 뗄 때, 성령께서는 그 떡을 영적으로 주님의 몸이 되게 하시지만, 물질적으로는 주님의 몸이 땅에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고, 지금도 거기 ‘몸으로’ 계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승천 부분을 길게 다룬 데에는 신학적인 배경이 물론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많은 지면으로 다루어진 승천의 교리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승천 교리는 설교의 서두에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신자가 매일 살아가는 데 있어 큰 힘을 주는’ 아주 유익한 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유익”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을 말하면서 46문답의 대답이 “우리의 유익”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보시는 점이 중요합니다.
교리문답 설교를 들으면서 많이 익숙해지셨겠지만, 교리문답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사변적으로 정립하지 않습니다. 이론적 정립이 필요해서 문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리문답은 학자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신자들을 위한 공간이며, 따라서 이 교리들은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매우 ‘유익’합니다.
46문답을 보십시오. 질문은 이렇습니다.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하는가?” 그리고 대답에서 교리문답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 계신다.”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것이 우리의 유익과 결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유익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49문답입니다. 이렇게 46문답은 49문답과 연결하여 보셔야 합니다. 이 때 유익을 49문답은 세 가지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일에 이어서 다루겠습니다만, 일단 우리가 오늘 주일에서 알아야 하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승천 사실이 우리에게 크게 유익을 준다.”라는 점입니다.
이를 살피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로 저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을 오늘 설교를 통해서 분명하게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승천사건
주님의 승천을 다루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본문은 누가복음입니다. 물론 마태복음과 마가, 요한복음에도 주님의 승천과 관련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자세히 설명된 곳은 누가복음이고, 사도행전도 누가가 썼기 때문에 이 누가복음과 함께 연결해서 읽어보면 사도행전 첫머리에도 승천사건이 나옵니다. 이렇게 주님의 승천에 관하여 누가복음을 잘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은 주님의 승천을 무엇과 결부시키고 있는가?
일단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말하고 있는 곳은 24장 50절, 51절 말씀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들이 다 보는 가운데” 주님께서 올라가신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누가복음에 안 나오는 내용도 나오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이 주님은 너희가 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함께 나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승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을 격려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교리문답 46문답을 보셔도 거기 시작이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승천이 아주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렇듯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분명히 제자들을 격려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승천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격려가 되겠습니까? 이 점이 누가복음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보통 성경은 일어난 일을 죽 시간 순서로 써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저자들의 생각과 의지를 주장하셔서 그들이 비록 글을 쓰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도가 거기 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나 어떤 사건을 다룰 때, 그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어떤 의도에서, 무슨 목적을 가지시고 이루고 계시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을까요? 왜 주님은 자신의 승천 모습을 제자들에게 꼭 보여주셔야 했을까요? 성경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누가복음만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 승천 앞에 이루어지는 일들 역시 누가복음에서만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승천 앞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바로 우리가 오늘 읽었던 13절부터의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승천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던 일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마가복음에는 아주 단순하게만 기록되어 있음.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정도. 막16:12-13).
13절부터 시작되는 이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한 번 보십시오.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면서 예수께서 죽으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따라붙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인줄 알아보지를 못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물으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라고 합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이야기를 보면, 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여인들의 이기도 들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라고 꾸짖으시면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셧다.”(27절)라고 했습니다. 제자 둘은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권하여 함께 머물면서 더 이야기를 듣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들의 눈을 밝게 하셔서 예수님인줄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 때 이들이 한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32절)
그리고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보니까 열 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 두 사람이 하는 말이 34절입니다.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그렇죠? 그리고 36절을 보면, “이 말을 할 때에”(원문에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마가복음에서 보면 마가복음에서는 이 두 사람이 이렇게 말을 했는데도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16:13)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이 주님의 말씀 후에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누가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주님의 승천 장면은 두 대상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 주님께서 증거를 통해 ‘굳게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상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참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분명 자신이 죽으실 것과, “따라서 너희는 갈릴리로 가 있거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긴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풀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주님의 부활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대상은 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증언을 들은 제자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분명히 이 대상에는 사도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교회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할 일차적 직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도 역시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렇듯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두 부류의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 없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올려가셨다.”라는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이 이렇게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을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하늘로 올라 가셨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보여주심으로써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부족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시켜주시려는 우리 주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뵈옵는 일을 통하여! 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승천사건의 목격은 성례가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믿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기 위한, 눈에 보이는 방편!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부활 신앙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사실을 우리는 누가복음 본문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50절과 51절에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일이 그들에게 참으로 부활의 사실을 확신하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믿게 하려는 주님의 선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그런 효과로 나타났습니까? 그렇습니다. 나타났습니다. 이어지는 5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두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첫째는 “경배”라는 단어이고, 둘째는 “큰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1. 경배
“저희가 경배했다.”
별 것 아니게 생각할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에게”란 당연히 앞의 문장에서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지요. 그런데 이 예수님께 그들이 한 일은 “경배”였습니다.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단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배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해 존중을 표했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예배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은 주님의 승천을 보고서야 주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즉 하나님으로 확실히 여겼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여기 이전에는 제자들에게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여인들은 이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 “프로스퀴네오”, 즉 “경배”합니다(마28:9).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보면,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이리 저리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특별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어간에 있어서, 전혀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이야기는 쓰고 있지 않습니다. 4복음서 전체에서 제자들과 관련하여 프로스퀴네오가 쓰인 곳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보낼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도 하고, 예수님을 참된 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정확한’ 믿음이나 인정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예배하게 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누가복음에 처음 등장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목도한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직 성령 강림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조금 더 있다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승천하시는 일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경배하게 된 것! 그 배경이 바로 주님의 승천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큰 기쁨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큰 기쁨”입니다. 큰 기쁨은 성경에서 곧잘 발견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예전에 구약성경에서 이 개념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극락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시편 43편 말씀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43:4)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극락의 하나님, 큰 기쁨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참 믿음 없음으로 인해 실망하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혹은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는 장면을 통하여 그분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인시켜 주셨고, 이를 경험하자, 제자들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그들에게 있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큰 기쁨”, 즉 “극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안에서도 이 “큰 기쁨”(헬. 카라스 메갈레스)이라는 주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두 단어가 동시에 사용된 곳이 딱 한 군데 더 있습니다. 그 부분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언제 주어졌던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면서 했던 말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같은 누가복음 안에서 시작과 끝에 “큰 기쁨”이 나옵니다. 그러면 마지막의 큰 기쁨은 당연히 앞의 큰 기쁨의 성취입니다.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큰 기쁨이 성취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을 목도한 제자들에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따라서 우리가 앞서 했던 말들은 진실로 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두 부류의 제자들, 즉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또 이들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참으로 믿지 못했던 이들에게,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는지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방식은 승천을 목도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참된 믿음, 그리스도를 향한 참 부활의 신앙을 갖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승천을 목도한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이것은 진실로 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보자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이전까지 의심하고 있었으나, 승천을 보고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자가 되었고,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승천교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도 좋고 부활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잘 강조되지 않았던 ‘승천’은 어떻습니까? 승천은 성탄이나 부활에 비하면 많이 강조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주제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이 참이었음을 실증해 주는 중대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승천을 ‘통하여’ 어리석고 무능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승천교리를 붙드는 이들이 참으로 얻을 것을 기대해도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부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치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까지도, 끝까지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붙드시기 위하여 증거를 주시고 확신을 주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즉 주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들을 돌보시는 일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확신이 부족하고, 내가 하나님을 굳게 붙들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에 빠지십니까? 약한 믿음 때문에 낙심하십니까? 혹은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적응이 되어서 결국 아무렇지 않게 되십니까? 혹 이 낙심 때문에 좌절하거나 “나는 어쩔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습니까?
승천교리를 붙드십시오! 승천의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끝없이 격려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은혜의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실 때 손을 펴셔서 축복하시면서 올라가셨습니다. 레위기 9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레9:22)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실 때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엄격한 군주의 모습도, 심판하시는 주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중보하시는, 제자들을 향하여 끝없이 자비와 참으심으로 대하시는, 그런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서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부족하고, 내 속에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낄 때, 승천하시면서 손을 들고 우리를 향하고 복을 내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엠마오를 향해 실망한 마음으로 걷고 있던 이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여인들로부터 전해 듣고도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초대교회의 기둥과 터였던 사도들에게, 참 믿음과 확신을 주셔서 담대하고 분명하게 나아갈 수 있게 만드셨던, 주님의 끝까지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 이것을 붙잡으시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승천교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유익을 줍니다. 이 사실을 잘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승천의 비밀 /눅24:50-53/ 박종화목사
2022-04-04 09:37:35
오늘은 교회절기로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승천하신 날을 기념하는 승천기념주일입니다. 승천이 하나님께는 좋을지 모르나 저희들한테는 서글픈 헤어짐입니다. 서글픈 마음이나 승천하신 주님이 주시는 말씀 으로 승천의 비밀, 승천에 담긴 주님의 귀한 뜻을 듣고자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만났다가 헤어집니다. 만날 때의 기쁨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의 경우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어느 한 헤어짐도 우리한테 아쉬움과 슬픔을 안주는 헤어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헤어질 때 웃고 헤어지는 경우 거의 못 봤습니다. 헤어질 때는 울음이 솟아나옵니다.
저희 남북이 분단 되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이산가족들이 서울에서 평양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남 뒷이야기를 들었더니 이런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만나기 전에 설레었던 마음으로 막상 가서 만났더니 할 말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한 것으로 만남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가슴이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헤어져 오신 다음에 막상 만나고 보니 몸의 헤어짐 마음의 헤어짐이 너무나 슬퍼서 나이 드신 어르신들 중에 예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부름 받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헤어짐이 주는 충격이지 않을까 생각이듭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북쪽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북쪽의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더니 사람밖에 안 만났지만 아니면 평양에 가서 며칠 동안밖에 안 살았지만 거꾸로 평양에 계신분이 함경도 계신분이 서울에 와서 이산가족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북쪽에 관해서 상당부분 알게 됐습니다. 북쪽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 계신 분들은 남쪽의 사는 모습과 남쪽의 맛을 그걸 통해서 보았습니다.
북쪽 맛을 보았더니 너무 슬퍼서 내떨어진 혈육이 끊어져 있지만 북쪽에서 고생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아마 가슴 졸여 살다가 빨리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간 것 같습니다. 거꾸로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쪽이 너무나 생각이상으로 잘살고 좋아서 천국 같아서 밤마다 그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남이든 북이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짐은 아픈 과정인데 중요한 것 하나는 그걸 통해서 우리는 일부분이긴 하지만 북쪽을 알게 됐습니다. 북쪽에선 일부분이지만 남쪽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 알았습니다. 알고 났더니, 알고 난 것에 대한 관심과 아픔과 슬픔이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우리 교인들도 해외여행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해외여행 어느 나라 하셔도 괜찮습니다.
일단 해외여행을 하고 나시면 며칠 하셨던지 몇 달 하셨던지 아니면 오랫동안 사셨던지 그 나라와 국민들을 이미 경험을 한겁니다. 그래서 이미 그 나라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습니다. 좋은 건 좋은 데로 나쁜 건 나쁜 데로 다 기억하기 때문에 이미 알았습니다. 알았다고 하는 얘기는 굉장히 중요한 얘깁니다. 알았기 때문에 안 것을 포기 할 수도 없고 경험한 것을 포기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행이 주는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당 부분은 알게 됐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렇게도 사랑하고 우리를 아껴주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란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눈물 흘린 자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우리한텐 너무 가까웠던 그분 그리고 그분이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가면 병자가 낫듯이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고 그러는데 그 하나님 나라 이야기 현실을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접했습니다. 경험했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와 헤어져서 다시 하늘나라로 간다고 합니다. 가시면 언제 옵니까? 지금 가신 그대로 오신답니다.
우리한테 하늘나라를 전해줬던 그 양반이 지금은 잠깐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나라를 가지고 온답니다. 하나님나라가 열매를 맺을 시절이 되면 그 시절이 성경말씀에는 종말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열매 맺고 완숙이 되면 그때 그분이 구름타고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우리한테 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 오는지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 이 세상에 슬픔이 없어 졌다고 생각될 때. 그때 오시는 분은 우리가 보았던 우리와 얘기했던 우리와 만났던 그분이 똑같은 모습대로 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장래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 막연하지만 누가 올지에 관해선 분명히 압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었던 사람, 처참하게 창에 찔렸던 사람, 눈물 흘렸던 사람,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부활했던 사람, 그분이 종말에 다시 오십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고 우리와 함께 했던 분이고 성탄절에 나셨던 분이고 그분이 다시 오시게 됩니다. 이 중요한 사실 하나는 승천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실 그분에 대한 확고부동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가시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나대신 성령을 보내마. 성도여러분! 성령과 함께 약속된 하늘나라를 계속해서 넓게 더 깊게 더 높게 하나님나라를 맛보시고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시점은 예수께서 구름타고 승천하셔서 자기 나라로 가신 후, 다시 오실 그때까지 승천과 재림사이 시간을 우리가 지금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울었다는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많이 울었을 겁니다. 울고 나서 승천하신 다음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성전에 모여서 매일같이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힘을 쏟습니다. 이것이 오늘 누가복음서의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승천하신 그분이 다시 오실 약속을 믿고 우리는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나라 약속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제가 오늘 성전이야기를 거꾸로 돌아가면서 설명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성전은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오늘 열왕기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통일국가로 만들어준 최초의 왕이 다윗 임금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임금이나 같습니다. 출애굽 한 다음에 혼란이 있었죠. 각자 흩어지고 싸우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하나의 나라로 통일시킨 사람이 다윗임금입니다. 통일 왕. 다윗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한테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왕만 되게 하지 마시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성전도 제 손으로 짓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다윗 너에게는 내가 축복을 주되 통일까지만 축복 주노라. 통일 이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건축은 다윗의 손을 벗어나 너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주겠다. 하나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통일 하느라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다윗의 손에서 피가 너무 많이 묻었다. 그 손으로는 나의 거룩한 성전을 짓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지만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하나님의 것을 맘대로 맡기시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훌륭하지만 훌륭한 다윗에게는 통일왕국의 지도자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통일왕국 다음에 펼쳐질 신앙의 나라. 통일된 다음에 신앙이 아름다움으로 승화하여 문화와 예술이 찬란하게 펼쳐질 그 나라는 미안하지만 다윗의 손이 아니고 그 아들 솔로몬에게 맡겼습니다. 용맹 대신 지혜의 왕. 피 묻히는 싸움대신 아름다운 문화를 즐기게 하는 왕. 그래서 솔로몬에게 그런 일을 맡기고 하나님의 성전을 맡기십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여 나라를 부강 시키게 하는 책임은 다윗에게 주었고 창세기 기록대로 하면 마지막 날 하나님도 쉬고 인간도 쉬고, 축제가 벌어지고 즐거움이 만끽되는 날 안식일 날의 축제는 솔로몬에게 맡겼습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성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서 만사를 다 맡기시지는 않습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만큼 하나님이 계획하신 만큼 사람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이 오늘 축복의 구절이 오늘 읽어드린 열왕기상에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모신 지성소를 성전에 만들었습니다. 성전 안쪽에 지성소를 만들어놓고 당신께서 모세에게 준 율법을 담은 언약궤를 지성소에 모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언약궤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 돼서 이 땅에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언약궤를 보며 당신이 거기 계심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쟁터에 나가도, 어디로 이사해 나가도, 언약궤만은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언약궤 속에 계신 하나님 당신이 언약궤를 통해서 우리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시옵소서. 성전에 올 때마다 지성소에 보관된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주춧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히 받았습니다. 성전에 오는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언약궤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언약궤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산 증거가 되셨는데 솔로몬의 고백은 당신이 언약궤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말이 히브리말로 임마누엘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은 높은데 계셔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 약하고 너무 죄를 많이 지었고 이스라엘도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런 방식대로 통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성소에 앉아계신 방법으론 이스라엘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성소를 깼습니다. 하늘에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온 게 아니라 직접 사람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게 아니고 지성소에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 되서 우리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를 고쳐주셨고 함께 우셨고 함께 웃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상징적 행위 하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다 사했다고 했을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열었다고 하셨을 때 그때 상징적인 사건이 뭐냐 하면 언약궤를 모셨던 솔로몬이 만든 성전에서 지성소에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갈라진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졌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제는 높은데 계신 하나님으로 우리와 만나지 않고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육과 육이 만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성전 휘장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한테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믿게 되었고, 부활을 통해서 믿게 되었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대들과 항상 함께 있겠지만 이제는 언약궤 방식으로는 항상 같이 있지 않겠다. 성령을 보낸 대신 성령을 통해서 나는 그대들의 가슴속에 있고 싶다.
그대들의 마음 중심에 있고 싶다. 그대들 마음을 돌이켜 보아라. 그대들 가슴에 내가 항상 함께 있겠다. 단 그대들도 내 가슴에 있어야한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계십니까. 여러분 가슴속에 하나님을 다 안고 오셨습니다. 이 가슴이 상징적으로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 성전 휘장이 찢겨지고 직접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제 가슴속에 계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우리가 오늘 모시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와서 모신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삶의 이야깁니다. 누구의 얘기를 듣던 간에 모든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모은 것을 역사라 이름 합니다. 역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이야기, 나라의 이야기, 우리 사회이야기, 저 개인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다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내 가정이 하나님과 내 나라가 함께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 이것이 진실 된 역사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올 때 하나님이 이곳에 계셔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내가 만든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일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서로 나눕니다. 오늘 오셔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이야기 하셔야 됩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가실 때 무슨 이야기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예배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란 단어이며 또 하나는 섬김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외국 말씀 양해하십시오. 영어의 worship 그러면 별로 의미가 없는 번역인데 독일 말에 (고테스딘스트) 그렇게 말합니다.
딘스트라는 것은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신다. 섬김 받은 우리는 그 섬김이 너무 감사하여 다시 하나님께 섬기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 이 두 가지가 응축된 것이 예배입니다. 다른 말로 번역해보겠습니다. 섬긴다니까 너무 고상하고 거창하지요. 요즘 영어로 제가 service란 말을 쓰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한테 service 반드시 행하신다. 받아보셨습니까? 예배가 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server하신다. 하나님의 service를 받았더니 전 너무 감격하고 고마워요 제가 하나님께 제 service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예배는 service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service입니다. 하나님의 service받아보셨습니까? 받아볼 필요가 없습니까? service 라는 말을 써서 너무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진짜로 하나님은 우리한테 service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사라고 하십니다. 값없이 젖과 꿀을 사라.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내가 피와 몸을 바쳐 그대를 server할 테니 죄수까지 구해 줄 테니 내 service를 받아라. 받아서 감사하면 나한테도 service 해라. 사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셨을 때 담임목사는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오셔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득 찼으니 감사합니다. 예배가 복되길 바랍니다. 근데 한편으로 하나님은 저보고 이렇게 말씀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service 안 받은 사람은 미안하지만 나중에 나오십시오. 왜? service도 안 받았는데 감사할일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service를 받고 너무 감사한 것이 있으면 감사한 마음 가지고 와서 오늘 하나님께 service에 대한 감사를 합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예배입니다.
감사 없는 삶. 혹시 살아계시면서 분노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의 service 안 받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service는 열려있다고 합니다. 열어 놓을 테니 와서 맘대로 가져가라. 왜 인간들이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하면서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합니까? 왜 심한 고통을 나 혼자 끌어안아야 됩니까? 오늘 승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service를 받아라. 받고 고마우면 모여서 나와 함께 우리들의 이야기 털어놓고 하고 서로 service를 교환하자.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오늘 우리들의 예배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이 성령을 끌어안고 매일같이 예배하면서 사십시오. 오늘 드리는 예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service는 주일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축복주신다고 시편에 써있습니다.
제가 일할 때도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service를 항상 받으시고 받는 즉시 항상 감사하시고 그것을 오늘 합쳐서 주일날 오늘 예배로 드립니다. 사실 예배드리는 날이 주일날만은 아닙니다만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 예배의 순간들입니다. 그렇게 사시면 헤어짐의 주님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분 그런 분이고 싶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오늘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 통해서든 성령을 통해서든 이 하나님나라 맛보십시오. 기꺼이 드리겠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법궤를 통해서도 함께 하셨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몸으로 함께 하셨고요 지금은 성령을 통해서 가슴으로 마음으로 얘기하신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입니다.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신다. 아니 천지창조 때도 계셨고 천지가 다 완성될 미래에도 계시고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항상 계신답니다. 단 그분은 항상 service하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service 받으십시오. 무료입니다. 결단만 필요합니다. 그 service에 우리가 감사로 응답하면 됩니다. 오늘 예배가 하나님의 service를 받고 감사로 응답하는 우리의 service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상처가 남은 부활. /눅24:36-43/ 김형익 목사
2021-05-05 06:46:37
성경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을 자세히 소개하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날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과 죽음에서 일어나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사건입니다.
특별히 첫번째 성탄절과 첫번째 부활절에 대한 성경의 기사를 살펴보면 부활절은 성탄절에 비해 매우 조용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사실, 부활절 새벽이 되면 여의도 광장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부활을 기뻐하고 예배하던 그런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에 첫번째 부활절도 그랬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는 매우 달랐습니다.
1. 조용한 부활절
A.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빌라도와 헤롯도 아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아닌….그리고 천사들의 노래도, 동방박사들, 목자들의 경배도 없었던….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던 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박았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 앞에 서서 ‘부활했다’고 선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만나러 갈릴리로 가실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마 28:10; 막 16:7). 예수님은 당대의 정권을 가지고 있던 빌라도와 헤롯에게로 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당신을 고소하고 비난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외치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찾아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 온전히 알려지고 예수님을 거절하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야 했을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생각처럼 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역사가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고 당대의 미디어들이 앞다투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한 마디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지도 않으셨고 조용한 부활절을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그 날 새벽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던 날 밤 하늘에서 울려퍼지던 천사들의 합창도 들려졌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서 하늘에 떠올랐던 큰 별도 없었습니다. 물론 동방박사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습니다. 주변에 양을 치던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지도 않았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정말 조용했습니다.
B. 새벽녁 사람들이 많지 않은 동산의 무덤(24:1)
부활의 기사를 전하는 네 복음서의 기사들은 동일하게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으로 찾아갔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아직도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니까, 오늘날로 치면 월요일 새벽 쯤 되는 것입니다. 월요일 새벽에 무덤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새벽녁 동산의 무덤, 그리고 여인들로 첫 부활절의 이야기는 조용하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C. 마리아: “마리아야”(요 20:16)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는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한 것 같고, 또 막달라 마리아는 특별하게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마리아는 무덤의 돌이 굴리워져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몸을 돌려 이제 무덤에 도착하는 여인들을 지나쳐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건을 전하기 위해서 달리기 시작합니다.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 무덤으로 왔습니다.
이제 제자들도 돌아가고 마리아는 무덤에 여전히 남아서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도둑질해갔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덤 속을 바라보는 마리아에게 흰옷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머리편과 발편에 앉아서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치웠는지 몰라서 운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뒤에 서서 또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울면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으면 어디로 옮겨갔는지 말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조용히 “마리아야”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주십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녁에 무덤가에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은,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이시고 말씀을 하시던 그런 큰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첫 부활절 아침 주님이 하신 말씀은 ‘마리아야’라고 당신이 위해서 죽으신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렇게 찾아오셔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자기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개인적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오셨고 만나주셨습니다.
D. 희망을 잃어버린 두 제자의 귀향길(13~35; 막 16:12~13)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사에서 특별히 전해주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아마도 그들의 고향이었을지 모르는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와 동행하신 사건입니다. 이것도 조용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두 제자들과의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제자들은 무덤에 가서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여자들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신들이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시면서 구약성경에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들을 그들과 동행하는 길에서 가르쳐주십니다. 해가 저물어 여관에 들어가 저녁을 먹으려고 예수님께서 떡으로 축사를 하실 때 비로소 그 두 제자의 눈이 열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 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져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해하는 두 제자에게 조용히 나타나셔서 당신을 보이시고는 다시 사라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정말 조용한 만남이었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E. 두려워하는 제자들(36~43)
그리고 다시 장면은 아직도 예수님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의 모습의 잔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이 두려워서 함께 문을 닫고 모여있던 자리입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이 사셨다는 천사의 전한 이야기를 들었을 터이고, 마리아가 전하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 놀라운 사실을 마리아의 증언만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그 죽음이 자기들에게로 미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인 그 다락에 오신 것은 정말 홀연히 임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으셨고 영화로운 몸을 입으신 부활하신 구주께서는 그들 가운데 홀연히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샬롬!(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인사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함의 상태, 의로움이 가득한 상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인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 가운데 조용히 찾아오셨습니다.
F. 오백여 형제와 사울(고전 15:6,8)
자세한 정황을 성경이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 사도는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5:6). 그들은 모두 형제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었고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모여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맨 나중에는 당신을 핍박하던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고전 15:8). 사울은 주님을 알지 못하던 자였지만, 주님은 그를 창세전에 택정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 사건은 사울을 바울로 변하게 만들었고 교회사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G.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부활절 경험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그분의 나타나심을 믿고 바라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첫 성탄절은 헤롯의 왕궁을 뒤집어놓았고 멀리 동방박사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하였으며 하늘에서는 천군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이어졌던 정말 그렇게 떠들석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부활절은 그토록 대조적으로 조용한 사건으로 찾아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부활의 사건이야말로 세상 역사를 뒤집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사람들에게 멋진 복수를 할 수 있는 사건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주님은 부활로써 회복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그 나라는 육체의 복종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영혼의 복종으로 들어가는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던 대로 로마제국을 뒤집고 세우는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이해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이유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죄인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하시는 나라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세상과 우주의 왕권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는 그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첫 부활절은 조용히 믿는 자들 가운데 일어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부활절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그분의 나타나심을 믿고 바라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첫 부활절이 조용하게 찾아온 이유입니다.
2. 부활절에 일어난 폭력(히 2:14)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잡히셔서 모진 폭력과 고문에 시달리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든 최고로 잔인한 폭력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기억합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이 하나님의 아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폭력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끝나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에도 또 하나의 새로운 폭력, 인간이 알았던 적이 없는 폭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이 죽임을 당한 폭력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씁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망과 함께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 악한 폭력을 멸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서 일어난 폭력의 종언이며, 죽음의 죽임당함인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죄인이었던 우리들에게 임할 모든 죄와 죄책 그리고 죄의 저주와 죽음을 다 멸하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받아야할 저주와 죄책, 그리고 영원한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놀라운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확증되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이 없었고 단지 죽으심만 있었다면,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주님이 내어주심이 되었을지라도 어떻게 우리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영단번의 제사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하게 만족시켜 드린 제사가 된 것임을 우리는 그분의 부활로써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부활의 사건이 세상을 뒤집을만큼 소란스럽게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하게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나타난 사건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부활절에 일어난 폭력은 죽음을 죽여버린 폭력이었습니다.
3.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가 남아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활과 관련한 질문을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부활 후에 영화로운 몸을 입으신 우리 구주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보고도 믿지 못해 하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손과 발의 상처를 보이신 것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고 말씀하시고(39), 직접 손과 발을 보이셨습니다(40).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손과 발의 상처였으며 창에 찔리신 옆구리의 상처였습니다(요 21:37).
A.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거기서 창에 찔린 흔적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영화로운 몸에서 지워지지 않은 까닭은 그 상처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영원토록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도록 죄인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못자국난 상처를 바라보는 천국의 성도들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죄인들을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상처와 창자국이 선명한 예수님의 몸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하였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받으신 그 저주와 진노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영원토록 증거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성도들의 자랑이 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자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랑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성 삼위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역사의 한 순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부활도 그 영광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B. "주님께서 나를 살펴보실 때 그분은 내가 딴 학위나 내가 받은 상이 아니라 내가 입은 상처로 판단하실 것이다."(William Lane)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 제가 목회 서신에 언급했던 신학자 William Lane의 말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펴보실 때 그분은 내가 딴 학위나 내가 받은 상이 아니라 내가 입은 상처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의 제자인 마이클 카드(Michael Card)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사실 하나를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우리 가슴에 달고 싶다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있는 상처들로 우리 자신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의 흔적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진정한 표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둔 성공, 학벌,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왕국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제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이땅에서 자신들만의 상처를 안고, 그들의 주님이 베푸신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요.”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몸에도 십자가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있었다면, 하물며 우리들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의 기준으로 얻었고 누렸던 영광스러운 성공의 흔적들, 학위, 상, 훈장, 학벌, 소유가 부활 후에도 과연 우리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분은 우리가 딴 학위나 우리가 받은 상이나 영예나 칭찬이나 유명세나 업적이나 소유나 성공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절로 말미암아 받은 상처들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그 날에는 영원토록 그 상처가 우리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상처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토록 성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C. 겸손과 순종이 우리를 영광의 부활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신 부활절을 기념하고 기뻐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신다면, 때로는 굴욕과 같이도 느껴지는 겸손함을 겪을 때가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이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주님의 겟세마네로부터 2000년 전에 이삭이 모리아산의 제단에 누워서 칼을 든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셔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리는 순종을 드려야 할 순간이 오게 될 것입니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매일 매순간을 그런 결단을 내리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종이 우리를 온전하게 속으로부터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겸손과 순종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나아가게 했고 그것이 구주를 영광의 부활로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겸손과 순종도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할 것이며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상처와 함께 영광의 부활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겸손과 순종이 우리를 영광의 부활로 인도하는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님의 승천 /눅24:50-53/ 조정의목사
2020-09-19 12:52:14
이제 누가복음의 마지막 본문입니다(129번째).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마지막 기록을 4구절에 기록했는데(1151구절), 이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을 담고 있습니다(행 1:2). “승천”(昇天)의 뜻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인해 보니 “예수가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하늘(天)에 오른(昇)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세속적인 사전의 정의지만 정말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 보이셨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 1:3). 제자들이 보고 듣고 만져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 확증하셨고, 말씀을 풀어 설명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리고 그 사역을 위해 위로부터 입혀질 능력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눅 24:49).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사명을 주신 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주님께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시고(축복), 그들 앞에 마지막으로 놀라운 기적(승천)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축복), 마지막 기적(승천), 그리고 제자들의 반응(큰 기쁨)을 살펴보고, 오늘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제자로서 우리가 어떤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주가 맡겨주신 사명을 다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1. 마지막 말씀: 축복(50절)
50절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베다니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낼 때 숙소로 삼으신 곳이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살던 동네이기도 했습니다(요 11:1).
제자들이 모여있던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베다니까지는 약 3km 떨어졌는데(요 11:18, “오 리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의 혼잡한 거리를 지나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 서쪽 경사면을 올라가 동쪽 능선으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베다니 앞”이라고 했으니까, 베다니에 아직 이르기 전에 있는 곳인 감람산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마지막 때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마 24~25).
예수님이 “데리고” 가신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 즉 사도와 여러 남녀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눅 24:33). 사도행전 1장 10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의 수가 120명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베다니 앞 감람산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입니다. 아쉽게도 누가는 축복의 말씀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손을 들고 백성을 축복하는 장면은 구약 레위기에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했던 장면과 유사합니다(레 9:22; 민 6:23~26). 여호와 하나님은 제사장 가족인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예수님이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신 내용도 이와 유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에게 복주시고, 너희를 지키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누가가 기록한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구약의 축복과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자세히 보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돼라”는 명령어지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돼라”는 ‘너희가 이렇게 하라’는 말이지만, “되리라”는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덧붙이면 예수님이 하신 축복의 말씀이 더 명확해집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 20).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통해 내 능력으로 너희를 지키고 은혜와 평강을 베풀며 담대하게 나를 증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정말 놀랍게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당했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해 거기서도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땅끝까지 이르러 온갖 반대와 어려움을 만나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아니라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사도들이 신실하게 순종하여 예수님을 증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증인인 우리에게도 주님은 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님을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을 통해 주님의 증인이 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두렵습니까? 내 힘으로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축복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베푸시며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축복의 말씀을 아침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주님 주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가 주신 사명대로 매일매일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마지막 기적: 승천(51절)
51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마지막 말씀인 축복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승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구름이 가려서 제자들은 그분을 더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행 1:9).
사람이 땅에서 올려져 하늘로 간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 즉 기적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승천’을 보여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런 장면은 오직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에녹과 엘리야에게 일어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지 이 땅에서 들려져 하늘로 올려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빌 2:9~11). 이렇게 예수님의 승천은 단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누가복음 주석에 예수님의 승천이 담고 있는 의미를 11가지나 제시하고 있는데, 짧게 몇 가지만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구원 사역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이 종료되었고 이제 모든 능력과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위에서 얘기한 부분). 땅에서 하늘로 자리를 옮기셨을뿐 아니라 종의 형체로 자기를 비우신 모습에서 하늘 보좌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승천은 곧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확증합니다(요 16:7). 예수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실상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도 예수님이 승천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과 함께할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요 14:1~3). 예수님은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나고, 거처를 마련하고 나서 제자들을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이유 중 하나는 우리와 함께 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승천은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 복음 선포의 일이 제자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엔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말입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이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엡 1:20~23), 일곱번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사탄을 이기셨다는 것을 확증합니다(요일 3:8).
여덟번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보좌 옆에서 모든 자비로 우리를 동정하며 신실하게 중보하시는 대제사장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2:17; 4:15; 7:25).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승천은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합니다(행 1:11).
이처럼 승천은 제자들에게 참 많은 의미를 가져다주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 승천의 기적은 이천년 전에 그 능력이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의 머리로 계시며,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신실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할 처소를 지금도 예비하고 계시고, 그 처소에 들어갈 백성을 우리를 통해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불러 모으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승천의 기적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 그 능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기적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저 하늘나라, 주님이 마련하고 계신 그 아름다운 처소에 함께 살아갈 백성들을 주님의 명령에 따라 불러 모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는 삶과 건네주는 말로, 회사에서 직장 동료에게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에 참여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전하는 말씀과 학생회에서 아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청년들과 함께 먹고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이 놀라운 기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우리 삶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똑같이 세상의 염려와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사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 제자의 삶일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하루 24시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기적에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제자의 반응: 기쁨(52~53절)
52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절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제 제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승천은 놀라운 기적이지만 한편으로 매우 슬픈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구름 속으로 사라진 예수님을 찾으려는 듯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행 1:10). 제가 당시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마음이 공허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무척 슬펐을 것입니다. 종종 삶이 힘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를 찾아와 하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했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천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올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크게 기뻐한 이유입니다. 주가 곧 오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주가 곧 오신다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큰 기쁨으로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에 뛰어들 준비를 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는 일이 힘썼습니다(행 1:14). 언제든 성령이 오시면 그 능력으로 예수님을 선포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못 되어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얼마나 폭발적으로 모든 성도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담대히 증언했는지 누가가 기록한 두 번째 책 사도행전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뜻이면 내년에 함께 그 생생한 역사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왜 매주 드리는 예배에 늘 기쁨이 넘치지 못할까요? 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기 어려울까요? 왜 힘 있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지 못할까요? 주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머리로는 압니다. 언제라도 주가 오실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안 믿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우리 마음이 눌어붙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여러분 우리의 힘은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승천하신 주님이 우리를 만나러 다시 오시면 얼마나 기쁠까요? 다시는 눈물이 없는 하늘나라이지만 너무 기쁘고 벅차서 눈물이 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손과 발을 보며 정말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면 정말 최고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결산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은사, 많은 기회를 통해 주변에 있는 영혼에게 얼마나 주님을 신실하게 나타냈는지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맡기신 사명이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 결산하실 일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승천(昇天)하신 예수님 /눅24:50-53
2018-04-19 04:02:43
1. 특별한 동행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知性人’에서 이제는 대한민국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靈性人’으로 거듭난 이어령 박사는 팔순 잔치를 지인들과 함께 하는 ‘문학 콘서트’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동행>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어령의 동행 콘서트>는 ‘진정한 동행(同行)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같은 시·공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자신과 동행(同行)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되새겨 보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 자리에 초대된 30 명의 사람들은 이어령 씨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을 정말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즉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행하신 것을 기록한 누가복음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묵상하는 것 역시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누가복음 강해의 제목을 정하라고 한다면, <아주 특별한 동행>이라 하고 싶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하여 경험한 예수님과의 동행이 아주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서른 살부터 서른세 살까지의 公生涯만 아니라, 사실 그의 전 생애가 특별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탄생부터 특별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정말 거창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당시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정치인들인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와(눅2:1) 팔레스타인의 분봉 왕 헤롯 등이며, 저 멀리 동방의 관료들이자 학자들인 동방박사들까지 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탄생의 무대가 별들의 세계, 즉 우주였다는 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들을 살피다가 아주 특별한 하늘의 움직임을 보았고,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천상의 존재들인 천사들의 방문과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 탄생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헤롯과 팔레스타인 정치권 등 상류층의 움직임 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의 대표 격인 목자들, 그리고 한 가난한 부부의 마구간 출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대하드라마처럼 그의 탄생이 그렸습니다.
또 그의 공생애의 시작은 어떻습니까? 무대는 요단강변,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고 모인 곳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리는 등, 공적인 사역의 시작 역시 아주 특별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 또한 얼마나 특별했습니까? 함께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인 로마와 유대의 골수분자들,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법과 상식을 뛰어넘은 不法的인 재판과 超法的인 판결,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찬송하던 바로 그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고 고함친 엄청난 모순, 그리고 극에 달하는 수치와 모욕감을 안겨주는 형 집행 과정과 그 잔인함 …. 이러한 것들은 모두 역사상 그 어떤 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특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은 더더욱 특별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각인되어 쉬 지워질 수 없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또 확인되고 거듭 확인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권력을 이기신 부활, 유대주의자의 불신과 어리석음을 깨뜨리신 부활, 모든 불법과 불의와 죄악을 이기신 부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이기신 부활이었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再起와 治癒와 回復의 상징이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다시 시작하는 것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단 하루라도 同行한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 것이고, 그 기억은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 분의 표정과 말투와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하신 말씀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들은 쉬 잊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승천
이러한 예수님의 지상 생애, 즉 육신을 입으신 사역의 마지막은 “승천”입니다. 이 땅에 오실 때는 일반 사람들처럼 마리아의 뱃속, 아주 작은 아기로 오셨고, 사람과 똑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자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마치실 때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30대 초반의 모습으로, 세상의 옷을 다 입으신 채로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승천은 정말 특별한 사건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승천은 그의 탄생과 부활만큼이나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들에게 승천 사건은 부활보다도 더 놀랍고 더 큰 관심을 끄는 사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신자가 승천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하는 이유는 사도행전 1장 11절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즉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자가 예수님의 승천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약속인 주님의 재림과 연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 기록자들은 승천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은 “…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마28:16~20)”라고만 기록할 뿐 승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고 단 한 절로 승천을 알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도 요한은 승천에 관해서는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1장의 3개 절, 즉 누가가 기록하여 전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서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한 기록만 남긴 것일까요? 왜 사도들은, 왜 초대교회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승천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먼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재구성해 볼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승천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볼 것입니다.
1) 승천의 재구성
첫째는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때는 부활하신 후 40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되는 날에 승천하신 것일까요? 복음서 기록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분명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경학자들은 성경에서 ‘40일’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부활 이후 40일을 연결 짓습니다. 즉 부활과 승천 사이의 40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머물던 40년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40년이라는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도 40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주님께서 태어나신 지 40일 만에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또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아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세상에 머물러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머무셨던 40일은 새로운 나라, 즉 ‘승천시대’, ‘성령시대’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➁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장소는 감람산의 베다니 근처였습니다.
감람산은 여호사밧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고, 한편으로는 작은 산을 사이에 두고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즉 감람산은 예루살렘과 베다니 사이에 있는 산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이 보이는 감람산 정상에서 주님이 승천하셨다고 생각해 왔고, 그곳에 <승천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딘 스텐리라는 사람은 그의 책 『시내와 팔레스타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베다니 바로 위의 야산 고지는 예루살렘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외딴 곳이며, 감람산의 긴 산마루를 배경으로 하는 작은 야산들이 (거기에) 있다. 그 산들 아래에는 베다니가 있으며, (거기서) 예루살렘의 모습과 … 황량한 바위들과 멀리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보인다. 주님은 바로 거기서 승천하셨다.” 즉 예수님은 감람산 정상이 아니라 베다니 쪽에 있는 ‘우묵한 곳’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역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➂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자들에게 <선교 위임 명령>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아침 일찍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을 넘어 베다니 위에 있는 조용하고 외진 곳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온 세상이 새롭게 시작될 때, 주님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50). 그 축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님은 천천히, 그리고 위엄스럽게 하늘로 올라가시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어느 정도 올라가셨을 때, 갑자기 구름이 그를 감쌌고, 그 순간 주님은 그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행1:9). 아마도 사도행전에 언급된 구름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상징으로 설명된 바로 그 구름일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행1:10)”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1:11).” 즉 천사들은 茫然自失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은 것이죠. 그러면서 그들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선포했습니다. ‘이제는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제자들은 하늘 쳐다보기를 포기하고 힘과 용기내어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주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일까요? 왜 주님은 꼭 승천하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2) 승천의 의미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는 ➊ 첫째로 승천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아가서 하나님이심을 입증해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빌2:5~11, 엡4:10, 히1:3). 즉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으나 원래의 자리로 회복되시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➋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기 위해서 승천하셨습니다.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가장 큰 신임을 얻고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자신의 신성에 적합한 최고의 위엄과 영광을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➌ 나아가서 승천은 지상 사역으로 당신의 모든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당신의 사역이 계속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중보자로서의 사역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현재 위치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요, 거기서 하시는 일은 믿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➍ 넷째로 주님의 승천은 믿는 자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구원의 완성’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회복 되는 것, 나아가 주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➎ 다섯 번째로 예수님은 <성령 시대>를 열기 위해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성령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➏ 여섯 번째로 주님은 천국이 분명 實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거기에 장차 우리가 있게 될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땅에서 충성스럽게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취하심으로 장차 성도들이 누릴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장차 주님과 동일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즉 장차 우리는 주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할 것입니다.
이런 점들에서 볼 때,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장차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자 그 보증이며, 우리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주님의 편에서도 기뻐하실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더 기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승천은 우리 구원이 완성되었으며, 장차 우리가 어디로 갈지, 그리고 그 다음 우리의 모습과 영광이 어떠할 지를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나를 사랑하였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14:28)”는 말씀처럼 성도는 그 어떤 어려움과 좌절과 아픔의 때에라도 흔들리지 않으며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 주관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계신 한,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한, 우리는 안전하고 우리는 복 되기 때문입니다.
3) 승천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이유
그렇다면 승천이 이렇게 놀라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서 기록자들은 자세히 기록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마태는 아예 기록조차도 하지 않았고, 마가는 단 한 절만 기록했으며(막 16:19), 누가가 비록 승천 사건을 기록했다고(눅 24:50~52) 할지라도 충분하지 않고, 또 사도행전에서 다시 한 번 주님의 승천을 기록했다고 해도(행1:9~11) 그 역시 3개 절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두 차례 걸쳐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 언급했으며(엡 4:8~10, 히 10:12),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승천에 대해서 두 번 언급했습니다만(벧전 1;21,3:22), 그 분량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에 가서야 비로소 주님의 승천을 기록했습니다만(계 2:8), 그 역시 아주 적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사도들과 당시 신자들은 모두 주님의 승천을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승천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복음서 기록자들이 승천 사건을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한 이유는 ➊ 첫째 승천 사건이 부활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승천’이 아니라 ‘부활’이었습니다.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문제가 해결되면, 승천 문제는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습니다. 즉 죽었던 예수님이 확실하게 부활하셨다면, 하나님이신 그 분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결론이었다는 말입니다.
➋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時間과 空間을 넘어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육신으로 곁에 계시지 않는 것, 자신들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같이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같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냐, 아니면 땅에 계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같은 시간과 공간에 계시지 않아도 주님은 ‘늘 함께 있겠다’ 약속하셨고, 그것을 믿는 자는 늘 현재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승천하셨으나 여전히 함께 계신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승천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도 계시지만 지금 여기에도, 여러분의 삶에 자리에도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3.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서 장차 믿는 자들이 어디로 갈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고대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천국을 “영원한 행복”으로 묘사했습니다. 천국에는 “결핍이 없고 확실하고 안정되고 영속하는 행복만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의 나라에는 한 가지 복이 더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끝없는 안식의 축복”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양할 것이다(『하나님의 도성』에서).” 그야말로 천국은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영원한 행복’과 ‘끝없는 안식’이 보장된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地上生活은 천국이라는 책의 서문이요, 마치 마트의 시식코너에서 눈치 보며 조금 먹는 정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계신 천국에 영원한 행복과 온전한 샬롬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同居同樂하며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상한 것입니다. 이런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한 사도행전 1장 11절 말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을 때와 똑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입니다(골 3:4).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부활할 것이고, 그 부활의 모습은 마치 승천의 주님이 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주님처럼 변화될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천국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천국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복입니다. 승천하심으로 온 세상과 우리 모두의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심으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심으로 그가 계신 곳에 우리도 갈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시는 날, 우리 모두 주님과 같이 변화될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천하신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도 계시지만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곳에도 계십니다. 하늘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도 하시지만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바쁠 수도 있는 분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믿고, 또 이 주님과 동행한다면, 여러분의 생애는 아주 특별해질 것입니다.
33.승천의 기적 /막16:19-20, 눅24:50-52, 행1:4-11
2014-07-09 12:08:26
구약성서에 보면 승천하신 분이 두 분 있는데 한 분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이요(창5:24). 또 한분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있습니다(왕하2:11).
그들이 죽지 않고 그대로 변화하여 승천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속죄의 공로가 없고 개인의 영광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값을 십자가의 피로 지불하고 속죄의 공을 세우고 다시 사셔서 승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도 죽지 않고 승천하셨다면 속죄의 공을 세우지 못했고 구원의 역사도 완성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 죽어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의 사명을 완수하고 부활하여 승천했기 때문에 그것은 인류를 위한 영광의 승천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교리 곧 처녀의 몸에서의 탄생, 십자가의 삼일만의 부활, 사십일만의 승천, 마지막 날의 재림 이 모든 교리가 다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현재 우리에게 직접 관계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교리인 것입니다.
1. 승천의 성질
첫째, 전인격적인 승천이었습니다.
(행1:9)에 "저희 보는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볼 수 있는 육체적 모습 그대로 승천하셨습니다.
둘째, 진정이요 물자적인 승천인 것입니다.
(행1:11)에 "하늘로 올리우심" (엡4:8)"위로 올라가심" 즉 예수님의 변화된 영체 그대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셋째, 목격적인 승천입니다.
(행1:9-10)에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올라 가실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는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 보느냐"고 하셨고 너희가 직접 보는데서 승천을 하니 이는 승천에 대해 하나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부인도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넷째, 공간적인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어떠한 방해물이 없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진 사실입니다.
(눅24:5)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 자신도 이 사실을 밝히시기를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요16:28)에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장소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섯째, 영화의 승천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몸은 사망을 이기고 죄와 상관없이 승천하신 몸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성과 몸의 변화를 포함한 것입니다. 그 몸은 무죄 세계인 천국 영광이 충만한 왕국에 완전히 조화되는 신비체입니다.
2. 예수 승천의 광경
첫째, 많은 사람이 보는데서 영광중에 승천하시고(행1:9)
둘째, 구름타고 영광중에 승천하시고(행1:9)
셋째, 흰 옷입은 두 천사의 호위속에 승천하시고(행1:10)
넷째, 두 천사가 재림을 예언하면서 승천하셨습니다(행1:11).
3. 예수 승천의 의의
첫째, 마귀를 박멸하여 승리하고 금의 환향(요12:31)
둘째, 구속의 대사업을 성공하시고 승천하심(요19:30)
셋째, 복음을 인류에게 선포하시고 승천하심(막1:38)
넷째, 하나님이 높여 주의 보좌에 앉으시었습니다(빌2:9-10).
* 석가의 승천관
불교에서는 교주 석가모니가 승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가 숲속에 들어가 오늘쪽으로 누워서 동으로 등을 대로 서쪽으로 낮을 두고 머리는 북으로 발은 남으로 두고 별세하니 그때에 사과수나무 여덟이 일시에 말라 죽었고 거기서 입관하여 승려들이 그 관을 옮겨 가려고 하되 들리지 않았는데 그관이 스스로 뚝 떨어져서 허공에 올라 그 도시의 천공에 머물다가 7일만에 성중에 내려왔고 화장하려고 했으나 불이 관에 붙지 아니하더니 그 후에 관이 다시 허공으로 올라가며 불이 스스로 나서 타버리고 말았는데 때는 주목왕 52년 1월 15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석가가 별세한지 300년 후의 일이라 믿을 만한 유전이 못됩니다. 그리고 성중 사람이 전부 관을 옮기려 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 천주교의 마리아의 승천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모마리아가 승천했다고 주장하며 1950년 11월 1일 전 교황 비오 12세가 그 승천을 공포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귀향을 의미합니다.
그가 하늘로 부터 오셨으니 하늘로 가야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인것입니다. 하늘은 예수님의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요14:4)에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바로 그길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향방을 뜻합니다. 이는 주님이 가신 천국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 장막집을 떠나야 합니다. 그때 누구든지 이 영광의 본향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는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사실 앞에 절망하지 말것입니다.
(요14:2)에 "내아버지 집에 거할 것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요8:23)에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하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세상의 생활은 머리둘곳 집 한체 마련하시지 않으셨고 그런 그의 삶은 자기의 본향이 천국이라고 생각할 때에 그의 귀향은 지당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영원한 거처를 준비키 위한 승천입니다.
(요14:1-3) 그는 승천하실때 우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곳에 너희도 항상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목적중 하나가 신자들의 영원히 살 수 있는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 천국의 개척자요 선구자 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처할 곳이 다 준비가 되면 각자에게 주시고자 한 사람 한사람 불러 가시기도 하시고 또한 어떤 자들은 재림시에 데리고 가시어 주시기도 합니다.
불교는 이 거처할 집을 마련할 신이 없어서 그들의 영혼이 이곳 저곳 유리 하다가 여러가지의 형태로 다시 태어나 어떤자는 동물로 어떤자는 미물로 어떤자는 사람으로 태어난다고서 살상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런 유리하는 영이 되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집을 주님이 준비하시니 이 얼마나 고마옵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요.
셋째, 천국의 실재성을 확인하신 기사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체의 몸이 되었지만 육체의 인간과 똑같이 생활을 하셨으니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시고 주무시기도 하시며 40일여간은 인간들과 다른게 조금도 없이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몸이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 가실 곳이 있고 거처할 곳이 있어서 그곳에 계시고 이 땅에 아직 내려 오시지 않고 있으니 이는 분명코 그가 말씀하신 대로 천국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천국에 대해서 (눅23:43)에 "한편 강도가 당신에 나라에 이른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할 때 오늘 너와 나와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심을 보아도 천국이 있음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고후5:1)"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우리에게 있을 줄 아나니"하셨고 (행7:55-56)에 스데반은 순교하게 될 때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쳤으며 (고후12:2)에 사도 바울은 "세째 하늘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이외 사도 요한은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천국이 있음을 소상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넷째, 성도들에게 승천을 보장하신 기사입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내말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 만이라도 믿고 있어야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요14:3)에 "내가 다시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만 영혼이 편안하게 있지 아니하고 너희가 나를 따르며 나를 섬기며 나의 일을 하면 내가 너희들과 영원토록 같이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21:3)에도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뿐만이 아니라 주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구원의 교리를 믿는자와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이같이 영원한 천국을 의심하지 않도록 지금도 성령의 은사를 통해 확신케 하고 계심을 알수 있습니다.
다섯째, 승리를 보여준 증거입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승리자 보다는 패배자가 더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진자가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땅에 오시여서 하나님에 뜻하신 대로 그길을 어김없이 생활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승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는 문제로 인해 아버지께 드린 마지막 기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시고 그 길을 피하시지 아니하시고 고초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들처럼 교훈이나 하시고 십자가를 않지셨더라면 한 위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 승천하시는 일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박해하던 로마의 정부가 그를 죽이면 예수는 완전 멸망하고 그의 자취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들 권세자들이 본 빈무덤만 남기고 승천하셨으니 박해자와 죽음에서 완전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일곱째, 승천은 주님의 통치가 시작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고 심장의 고동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때 마치 인간의 생명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더 높고 더 좋은 영생이 시작됨을 잊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입장에서 볼때 더욱 성스럽고 영광된 사업입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복음의 결론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가 감람산을 뒤덮은 구름을 타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때 모든 것을 끝났습니다. 그는 자기 갈길을 갔다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의 통치는 이제 부터인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시키려 오시었지 세상의 권세나 명예를 위해 오시지를 아니 하시었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나 통치력을 나타내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승천하시고 가신 그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의 능력과 권력이 회복되고 그가 주관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영원한 나라이므로 그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악의 세력이 없어서 다시 그의 선한 성품을 꺽어 버리려고 하는 자는 없고 평화로운 세계의 주인공인 주님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4. 있을 곳을 예비하시려고 승천하셨습니다.
(요14:2)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했습니다. 주님의 승천 이유는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신 후에 다시 와서 우리를 당신이 계신곳으로 영접하기 위하여 승천하셨습니다. 주께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서는 제자들과의 인간적인 친분 관계를 떠나 온 인류를 위하여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었고 따라서 이러한 은혜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제자에게 베풀어 지는 것입니다.
한편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부로 묘사하여(요3:29, 계21:2,9)최후의 심판이 행해진 다음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예비된 새 에루살렘에서(계21:2) 영원토록 함께 지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랑되신 예수께서 그 처소를 예비하시는 것과 같이 신부된 성도들도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믿음과 의로운 행실로 단장하여 주님과 만나는 그날을 부끄러움 없이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5.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려고 승천하셨습니다.
(요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 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당시의 사명을 마치고 남은 뒷 사업은 성령께 일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리라 그 허락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백이십 신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지금부터 예수 오시는 날까지 성도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우리를 신부로 단장시켜서 주예수께 신부로서 드림으로써 그 임무를 마치게 됩니다.
6. 성경의 예언을 청취하신 사건입니다.
승천은 주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완전히 나타낸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일어나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승천하셨다는 소식이 조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의 사역 초기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헐뜯는 자들에게 훈계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 온자 곧 인자 외에는 올라간자가 없느니라"고 했으며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 간다 하라"고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의 권위는 그의 말씀이 너무나 정확히 이루어짐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과 강림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또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오셨던 것을 이제는 이미 행하셨으며 고난 당하셨고 말씀을 다 전파하셨습니다.
지상 위에서 해야 할일이 더 이상 없을 때까지 주님은 이땅을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기록된 주님의 중재기도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했습니다.
7. 생명의 완성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인간 생명의 완벽한 성취로서 생명의 의미를 최초로 완성시킨 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입니다. 이제 생명이란 죽지 않는 것임을 진리가 확립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생명은 죽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추방해 버린 것입니다.
결 론
예수님 승천의 증거
1. 성서가 증거하고 있음(행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 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 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했습니다. 이같이 성경은 그의 승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승천을 지켜 보고 증거했습니다(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했고 (고전15:6)에 "그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이같이 예수의 승천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3. 두 천사가 증거했고(행1:100
"흰 옷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죄가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증거는 더욱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復活)과 승천(昇天) /눅24:36-53/ 지성래목사
2020-02-28 03:34:08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부활이 없다면 복음도 없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열 한 제자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며 사도 바울도 불행한 사람들 중의 대표가 될 것이다. 왜 열한 제자인가. 가롯 유다를 빼고 하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맛디아가 채워졌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천년 전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 나셨고 말구유에 누이신 적이 있으시다. 그는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고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는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병자를 치유했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는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하게 하셨고 광야의 배고픈 무리 이만 여명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먹이시고 배가 부르게 먹이시고도 그 부스러기만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그는 때로 파도 위를 걷기도 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열 두 살 난 외동딸을 살려 내기도 하셨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장례가 끝난 무덤 앞에 가셔서 불러내심으로 다시 살려 내신 적도 있으시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 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 그는 친히 붙들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묘실에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이른 새벽 시간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지낸 돌무덤을 찾아간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었다. 저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키고 있던 흰 옷 입은 두 천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저들 여인들은 놀랍고 기쁘고 무섭기도 한 착잡한 심정으로 열 한 제자가 숨어 있던 곳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고 말씀하셨다.
평강의 선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
Peace be with you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은 평강의 선포이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나 평강을 원한다. 평강처럼 귀한 것이 없다. 아무리 권력자라면 무엇하고 아무리 부자라면 무엇할까. 만약에 그 마음에 평강이 없고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다면 그 마음을 그 누가 다스려 줄 수 있을까.
임금이라도 그 마음이 늘 불안하고 착잡하다면 임금의 그 높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을 누르며 살며시 찾아드는 것이 염려와 불안과 초조와 긴장과 스트레스와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마음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충고해 주셨다. 이에 더해서 교훈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또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근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 있는 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차원의 평강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가 경험하는 평안과 평강은 나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공급해 주시는 평강이다.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강이다.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가. 70장 찬송가의 가사처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하는 고백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의 뿌리는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신앙으로 자기 자신과 환경을 소화해 나가는 믿음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후서 4장 8절 이하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욱여 싸임을 당할 때가 있다.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박해를 받거나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욱여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는 믿음을 갖고 살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자.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으리라는 소망과 믿음을 갖자.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자.
시편 3편 6절에 보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다윗의 주변에는 대적하는 원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시편 3편 1절에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처럼 대적이 많은 것은 그가 겪는 환경들이고 그런 불안한 환경 중에서 기도하는 다윗의 기도를 보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다윗은 언제나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환경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시고 그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부족한 다윗의 머리를 들어 주시리라는 믿음과 소망과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평강하게 누워 자고 깨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부활 신앙은 평강으로 대답되어야 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선언 그대로 말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식탁
예수님은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잡수실 것을 찾으셨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그 때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이 있어서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맛있게 잡수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셔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착잡해 하는 제자들 곁에서 잡수셨다.
사도행전 10장 41절에 보면,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여러 차례 음식을 함께 잡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이 2012년 추석날이며 주일인데 오늘 하필 금식하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주의 날은 기뻐하며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더욱이나 명절날의 특징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제자들과 무리들과 함께 음식 잡수시기를 즐겨 하셨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 거리는 말도 ‘왜 너희 선생은 언제나 창기나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집에 가셔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 잔치집의 음식을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거운 잔치집의 흥을 함께 나누셨다. 예수님은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도 먹고 마시고 주무시기 위해서 들어 가셨고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도 먹고 마시고 쉬기 위해서 들어 가셨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제자나 무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웃고 말씀하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고도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하던 베드로와 일곱 명의 제자들을 그 다음 날 새벽에 해변 가에 찾아 가셔서 불러 내셨다.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있던 저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하니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잡혔다.
얼마나 크고 많은 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고 그물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겉옷을 벗고 있다가 급하게 겉옷을 두르고는 200여 미터의 물길을 허우적대며 예수님께로 달려 나갔다. 이미 예수님은 그 해변 가에다가 숯불을 지펴 놓고 계셨다. 그 불 위에다가 떡과 물고기를 굽고 계셨다.
다른 제자들이 서둘러 풍성하게 물고기를 잡은 배를 뭍에 대자.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고 말씀하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하시자 제자들이 숯불 가에 예수님 주변에 모두 둘러앉아서 아침을 함께 먹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라. 갈릴리 해변 가의 이른 아침 숯불 가에 둘러 앉아 떡과 물고기를 구워서 먹는 조반 상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더불어 같이 함께 먹는 일이다. 이 세상에 먹는 일처럼 귀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가족도 함께 먹는 일이 중요하다. 서로 바쁘다 보니 하루 혹은 일주일에 가족이 더불어 같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 같이 음식을 먹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간다. 자주 함께 먹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풍성한 음식의 식탁을 차려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는 말씀은 원수들이 바라다보는 앞에서도 풍성하고 기름진 것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을 차려 주신다는 말씀이다. 군대가 싸움터에서 쫓기고 싸우고 피를 흘리는 때에는 전투 식량이나 주먹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원수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신 다는 말씀은 원수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인생의 결투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할렐루야.
부활은 승리다. 죽음을 이긴 승리요 죄악을 이긴 승리이다. 그러므로 부활 하신 주님이 잡수시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부활 하신지 사흘 째 되던 날 이른 새벽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잡게 하셔서 잡힌 153마리의 물고기를 해변 가로 싣고 나오게 하신 후에 떡과 물고기를 구워서 함께 잡수시는 그 해변의 식탁은 은혜의 식탁이요 회복의 식탁이요 용서의 식탁이요 축복의 식탁이요 감격의 식탁이요 승리의 식탁인 것이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6.25 때 남하하여 살아가는 실향민들은 통일동산이나 도라산 전망대나 임진각에서 북한에 두고 온 고향 땅과 선조들의 묘가 있는 선산을 멀리 바라다보면서 명절의 허전함과 쓸쓸함을 달랜다.
그런데 이런 날들이 다 지나가고 도라산 역에서 개성으로 평양으로 신의주로 원산으로 함흥으로 KTX 고속 기차를 타고 북녘 땅의 고향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통일의 날이 왔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복되고 감격스러운 날이겠는가. 때가 되면 그런 통일의 날도 오리라고 믿는다.
시편 126편 1-2절의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126:3)고 했다. 이런 기쁨의 식탁, 이런 감격의 식탁, 이런 축복의 식탁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이 아닌가.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초청하셨다.
그렇다. 신앙생활은 주와 더불어 영원히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 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주인공이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의 모든 말씀들 가운데 예언된 메시아 예언 즉 예수님께 대한 모든 예언이 성취된 부활의 주인공이시다.
그것을 몰랐을 때에는 몰라서 믿지 못하고 몰라서 부인하고 몰라서 배반하고 몰라서 숨고 몰라서 비겁하게 행동하던 제자들이었는데 여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닫혀 있던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고 성경의 예언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자 깨닫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소개하는 당시의 장면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묵상할 필요가 있다. 45절의 ‘그들의 마음을 열어’라는 본문의 ‘열어’라는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31절의 ‘눈이 밝아져’와 32절의 ‘풀어 주실 때에’와 똑 같은 표현을 사용한 말씀이다.
즉 ‘열어’라는 ‘디아노이고’(dianoivgw)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신 것이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깨닫도록 해 주신 것이지 제자들 스스로 깨달아 안 것이 아니란 말이다. 본문을 보면 완전히 수동태로 되어 있다. 45절에,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다. 그렇지 않은가.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도 예수님이시고 성경을 깨달아 알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은혜 받기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깨달음과 변화의 주체는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객체들이다. 예수님이 능동이고 제자들은 수동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믿는 배후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의 그 누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죄 사함과 회개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는가. 예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가지고 그 부활의 사실을 전파하고 알리는 부활 소식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택함 받은 자의 얼마나 감격스러운 주님의 축복인가. 그러므로 49절의 말씀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하여야만 한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단 한 가지도 없다.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그런 강력한 복음 전파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맨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가셨고 그 곳에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부활 신앙과 승천 신앙을 기독교 신앙의 뼈대와 같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장면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된 우리들이라고 하면 성령도 믿고, 거룩한 공교회도 믿고, 성도의 거룩한 교제와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이며 승천이 역사이듯이 재림도 역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맨 마지막 부분인 22장 20절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주의 성도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이런 신앙 말이다. 한국 교회 역사에 빛나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가 작사 작곡한 ‘주님 고대가’라는 부제가 붙은 “낮에나 밤에나”라는 찬송이 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오늘 날도 우리는 이런 신앙을 회복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주님을 경배하며 큰 기쁨으로 분부하심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누가복음을 썼으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그 사도행전의 첫 장면에 보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려고 모여 든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그 곳에는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님의 동생들과 예수님의 분부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열한 제자들은 맛디아를 가롯 유다의 빈자리에 제비 뽑아 보충한 후에 열심히 성령 받기를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열흘 째 되는 날에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저들 위에 임하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의 힘은 자동차로 비유하면 엔진에 공급되는 휘발유(揮發油)나 경유(輕油)와 같은 것이다. 엔진에 기름이 공급되어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자동차가 동서남북 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은 성령 받은 성도들을 땅 끝까지 나아가서 복음의 증인(證人)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좋으신 영이시며 보혜사의 영 즉 돕는 영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8절에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證人)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렇다. 오늘 날 성도들은 계속하여 신앙의 선조들처럼 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만 할 것이다.
1876년에 백홍준, 이웅찬, 이성하, 김진기, 이익세가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선교사에게 만주에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일이다. 그 이태 후인 1878년에 인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1848-1926)이 만주에 장사하러 갔다가 장티프스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던 중에 스코틀랜드 의료 선교사 헌터를 만나서 도움을 받고 치료 받아 건강을 회복하고 그 후에 메킨 타이어 목사와 로스목사에게 전도를 받고 로스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에 로스목사를 도와서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882년에 ‘에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갖고 들어오다가 걸려서 감옥에 갇혔다. 그 후 탈옥하여 외가 마을인 황해도 송천리에 머물면서 전도하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를 개척하였다.
1883년 5월 16일의 일이다.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는 자기 집에서 시작된 교회의 교인으로 1887년 1월에 서울에 올라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아들 서병호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아들 서병호는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 아동이 되었다.
그해 9월 27일에 존 로스 선교사와 14명의 교인들이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새문안 교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서경조는 최초의 한국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공부하고 1907년에 길선주, 이기풍 등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1884년 6월 9일에 서상륜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동생 서경조의 집인 초가집을 교회로 삼아 10명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1년 이 지난 1895년에 기와집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당시 17만 냥의 돈건축 헌금을 모아서 마을의 서낭당 터에 8평의 기와식 예배당을 지어 봉헌 한 것이다. 얼마 후 교인이 늘어나자 교회를 다시 증축하였다. 그 삼 년 후인 1898년에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이 소래 교회에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는 1885년 4월 5일에 인천 제뭂포 항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그 같은 해 가을인 10월 11일에 한국 최초로 성찬식을 거행한 것으로부터 정동제일교회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정동제일교회의 최초의 벽돌 예배당은 1895년 9월 9일에 시작되어 2년 후인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하였다.
당시 부흥하는 교인 500명 이상을 수용하기 위하여 지은 예배당은 성단(聖壇) 부분의 좌우편에 익부(翼部)가 달린 십자가형의 지붕을 갖춘 예배당이다.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였으나 6. 25때에 예배당의 일부와 함께 불탄 것을 2003년에 고 이종덕 권사의 유족들이 복원하여 봉헌하였다.
이 교회는 이승만, 김활란, 유관순 등이 출석하며 예배드리고 기도하던 곳이다. 1917년 충남 공주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한 16살의 어린 소녀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늘 태극기를 품에 숨기고 파이프 오르간 뒤에 엎드려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늘 기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후 연기 진천 청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 운동을 모의한 그는 2년 후인 1919년 3월 1일 3. 1절에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 씨와 어머니 이씨는 그 날 아오내 장터에서 일본 헌병의 총칼에 찔려 피살되었다.
유관순은 공주지방 법원에서 3년 형을 받았으나 항소하였고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수시로 끌려가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는 모진 고통의 시간을 지내다가 다음 해인 1920년에 19살 나이에 옥사하였다.
유관순의 참살 소식을 들은 이틀 후에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과 월터 교사가 시체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 경찰과 간수들은 들어 주지 않았다. 유관순을 학살한 사실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 대응하자 그제야 석유 상자에 든 시체를 내어 주었는데 열어 보니 토막 내어 참살한 비참한 모습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그렇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 사람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환란과 시련과 모함과 오해와 조롱과 역경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 다시 오실 예수님의 거룩한 부활 승리의 복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복음의 증인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부터 37절까지에서 선언하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와 같은 부활 복음의 승리가 부활 신앙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를 통해서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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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승천 /눅24:50-53/ 조정의목사
2020-09-19 12:52:14
이제 누가복음의 마지막 본문입니다(129번째).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마지막 기록을 4구절에 기록했는데(1151구절), 이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을 담고 있습니다(행 1:2). “승천”(昇天)의 뜻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인해 보니 “예수가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하늘(天)에 오른(昇)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세속적인 사전의 정의지만 정말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 보이셨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 1:3). 제자들이 보고 듣고 만져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 확증하셨고, 말씀을 풀어 설명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리고 그 사역을 위해 위로부터 입혀질 능력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눅 24:49).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사명을 주신 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주님께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시고(축복), 그들 앞에 마지막으로 놀라운 기적(승천)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축복), 마지막 기적(승천), 그리고 제자들의 반응(큰 기쁨)을 살펴보고, 오늘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제자로서 우리가 어떤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주가 맡겨주신 사명을 다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1. 마지막 말씀: 축복(50절)
50절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베다니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낼 때 숙소로 삼으신 곳이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살던 동네이기도 했습니다(요 11:1).
제자들이 모여있던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베다니까지는 약 3km 떨어졌는데(요 11:18, “오 리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의 혼잡한 거리를 지나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 서쪽 경사면을 올라가 동쪽 능선으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베다니 앞”이라고 했으니까, 베다니에 아직 이르기 전에 있는 곳인 감람산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마지막 때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마 24~25).
예수님이 “데리고” 가신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 즉 사도와 여러 남녀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눅 24:33). 사도행전 1장 10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의 수가 120명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베다니 앞 감람산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입니다. 아쉽게도 누가는 축복의 말씀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손을 들고 백성을 축복하는 장면은 구약 레위기에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했던 장면과 유사합니다(레 9:22; 민 6:23~26). 여호와 하나님은 제사장 가족인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예수님이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신 내용도 이와 유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에게 복주시고, 너희를 지키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누가가 기록한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구약의 축복과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자세히 보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돼라”는 명령어지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돼라”는 ‘너희가 이렇게 하라’는 말이지만, “되리라”는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덧붙이면 예수님이 하신 축복의 말씀이 더 명확해집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 20).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통해 내 능력으로 너희를 지키고 은혜와 평강을 베풀며 담대하게 나를 증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정말 놀랍게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당했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해 거기서도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땅끝까지 이르러 온갖 반대와 어려움을 만나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아니라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사도들이 신실하게 순종하여 예수님을 증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증인인 우리에게도 주님은 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님을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을 통해 주님의 증인이 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두렵습니까? 내 힘으로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축복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베푸시며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축복의 말씀을 아침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주님 주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가 주신 사명대로 매일매일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마지막 기적: 승천(51절)
51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마지막 말씀인 축복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승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구름이 가려서 제자들은 그분을 더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행 1:9).
사람이 땅에서 올려져 하늘로 간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 즉 기적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승천’을 보여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런 장면은 오직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에녹과 엘리야에게 일어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지 이 땅에서 들려져 하늘로 올려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빌 2:9~11). 이렇게 예수님의 승천은 단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누가복음 주석에 예수님의 승천이 담고 있는 의미를 11가지나 제시하고 있는데, 짧게 몇 가지만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구원 사역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이 종료되었고 이제 모든 능력과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위에서 얘기한 부분). 땅에서 하늘로 자리를 옮기셨을뿐 아니라 종의 형체로 자기를 비우신 모습에서 하늘 보좌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승천은 곧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확증합니다(요 16:7). 예수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실상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도 예수님이 승천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과 함께할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요 14:1~3). 예수님은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나고, 거처를 마련하고 나서 제자들을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이유 중 하나는 우리와 함께 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승천은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 복음 선포의 일이 제자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엔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말입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이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엡 1:20~23), 일곱번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사탄을 이기셨다는 것을 확증합니다(요일 3:8).
여덟번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보좌 옆에서 모든 자비로 우리를 동정하며 신실하게 중보하시는 대제사장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2:17; 4:15; 7:25).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승천은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합니다(행 1:11).
이처럼 승천은 제자들에게 참 많은 의미를 가져다주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 승천의 기적은 이천년 전에 그 능력이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의 머리로 계시며,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신실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할 처소를 지금도 예비하고 계시고, 그 처소에 들어갈 백성을 우리를 통해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불러 모으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승천의 기적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 그 능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기적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저 하늘나라, 주님이 마련하고 계신 그 아름다운 처소에 함께 살아갈 백성들을 주님의 명령에 따라 불러 모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는 삶과 건네주는 말로, 회사에서 직장 동료에게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에 참여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전하는 말씀과 학생회에서 아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청년들과 함께 먹고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이 놀라운 기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우리 삶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똑같이 세상의 염려와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사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 제자의 삶일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하루 24시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기적에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제자의 반응: 기쁨(52~53절)
52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절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제 제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승천은 놀라운 기적이지만 한편으로 매우 슬픈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구름 속으로 사라진 예수님을 찾으려는 듯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행 1:10). 제가 당시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마음이 공허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무척 슬펐을 것입니다. 종종 삶이 힘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를 찾아와 하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했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천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올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크게 기뻐한 이유입니다. 주가 곧 오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주가 곧 오신다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큰 기쁨으로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에 뛰어들 준비를 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는 일이 힘썼습니다(행 1:14). 언제든 성령이 오시면 그 능력으로 예수님을 선포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못 되어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얼마나 폭발적으로 모든 성도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담대히 증언했는지 누가가 기록한 두 번째 책 사도행전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뜻이면 내년에 함께 그 생생한 역사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왜 매주 드리는 예배에 늘 기쁨이 넘치지 못할까요? 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기 어려울까요? 왜 힘 있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지 못할까요? 주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머리로는 압니다. 언제라도 주가 오실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안 믿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우리 마음이 눌어붙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여러분 우리의 힘은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승천하신 주님이 우리를 만나러 다시 오시면 얼마나 기쁠까요? 다시는 눈물이 없는 하늘나라이지만 너무 기쁘고 벅차서 눈물이 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손과 발을 보며 정말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면 정말 최고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결산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은사, 많은 기회를 통해 주변에 있는 영혼에게 얼마나 주님을 신실하게 나타냈는지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맡기신 사명이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 결산하실 일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부활신앙 /눅24:1-12/ 박요한 목사
2024-04-30 07:37:46
오늘 부활절 및 해피데이 축제에 참여하신 성도들과 처음오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기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승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문을 여시고 부활승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승리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가장 기쁘고 행복한 소식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어두운 소식들이 많습니다. 특히 요즘 들려오는 세상의 소식은 세계경제와 우리나라의 경제가 불안하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정치는 선거를 앞두고 요란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사건 사고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특히 지난주에는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분노케 하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안양 어린이 유괴사건의 결과입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혜진, 예슬양이 생명을 잃은 소식입니다. 그것도 사체를 토막내서 버렸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정왕동 군자천에서 발견되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중에 좋은 소식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좋은 소식은 아무리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히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좋은 소식입니다. 어두운 소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시대에 빛과 소망을 가져다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2000년 전부터 전해졌는데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전 세계를 흥분시키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시대를 초월해서 기뻐하는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것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엘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은 십자기에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2000년 동안 계속 전해지고, 또 전해져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미래에도 계속 전해질 것이며 영원히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나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나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 됩니다.
“기독교의 자랑!” “기독교의 생명!”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공자도 죽었지만 부활하지는 않았습니다. 석가도 죽었지만 부활하지는 않았습니다. 마호메트도 죽었지만 부활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부활절 예배는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부활의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천사들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그랬습니다.
“살아나셨느니라”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인들도 처음에는 놀랄 뿐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빈 무덤을 확인하고서도 “기이히” 여기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손의 못자국을 직접 보고 손과 옆구리를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은 모두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평생을, 생명 걸고, 순교하면서까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파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부활의 축복이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은 김부장님이 박주임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박주임! 자네는 부활을 믿나?”
박주임이 어리둥절해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그러자 김부장님이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부활을 믿게나!”
박주임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면서 물었습니다.
“부장님! 왜 그러십니까?”
이 때 김부장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지난번에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몇일 결근했지? 자네 장모님이 부활하셨네.
장모님한테 전화왔어!!!”
장모님 돌아가셨다고 핑계대고 결근했었나 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분설”이라고 합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있게 하셨습니다. 즉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 속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서 영혼은 내세로 가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흙으로 돌아간 육체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 말씀에도 보면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그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한 몸이 어떠한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5장 42절 이하에 있는 말씀에서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부활한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을 가지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소망을 가지고 살다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 목요일 3월 20일은 “춘분”이었습니다.
“춘분”은 이제 완전한 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봄입니다. 봄이 완전히 우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유난히 추운 날이 많았습니다. 1월부터 2월까지 따뜻한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삼한사온”이라고 했는데, 지난겨울엔 “삼한사온”도 없이 계속 추웠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자연의 신비로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꽁꽁 언 땅속에 죽은 듯이 묻혀 있었던 것들이 봄의 따뜻한 햇살과 따뜻한 바람으로 인해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자연 현상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부활의 나팔을 불면 모두가 다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나는 부활의 새 봄을 맞게 됩니다.
뿐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이 소생하고, 심령이 새로워지고, 믿음이 솟아납니다.
더 나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던 인생도, 그의 삶이, 성공과 축복의 삶으로 일어나는 부활의 축복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 영화 중에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잖습니까?
이 영화는 “루이스 윌리스”라는 사람이 쓴 “벤허”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루이스 윌리스”는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의 장군이었으며 후에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허구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추적하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을 소설로 썼습니다. 이것이 “벤허”라는 소설입니다. 그때가 1880년이었습니다.
그 후 1959년에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알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도 부활도 믿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문학자 중에 유명한 “이어령 교수”가 있습니다.
이 분은 장관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어령 교수의 가정에 숨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손자가 과잉행동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딸은 시력을 잃어가는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는 자신이 가진 지식의 힘으로 외손자의 병도, 딸의 병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외손자와 딸이 예수님을 믿고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어령 교수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도 의학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삶속에서도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부활절 및 해피데이 축제에 참여하신 여러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내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을 받으면서 사십시오.
그리하여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뿐만이 아니라, 심령의 부활, 삶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눅24:13-27/ 이승진 목사
2024-03-28 11:01:51
오늘 거룩한 주일을 맞이해서 주님의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님들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사망 권세 깨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도 부활의 능력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 깨고 부활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능력과 영광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만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믿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살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첫째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부활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정말로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면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가? 왜 내 삶 속에서는 주님의 능력보다는 사망의 권세, 마귀의 권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믿기가 어렵고 현실적인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누리며 확인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3년을 같이 먹고 자고 살면서 예수님 가까이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수 많은 기적을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는데 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장 13절은 “그 날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날에”는 어떤 날입니까? 24장 1절을 보시면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무슨 날입니까? 예수님이 방금 사망권세 깨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날에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슬픔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생명과 기쁨 가득한 부활의 세상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그 마음에 놀라움과 기쁨이 충만해서 무덤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걸음에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여전히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고 증거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18절에 나오듯이 글로바이고 또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25리, 약 10킬로 떨어진 엠마오로 가면서 주님이 십자가 죽음사건에 대해서 갑론을박 토론합니다.
14절의 “이 모든 일”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사건들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서로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만 할 뿐 그 사건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란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면 고민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동행하시다가 적당한 기회가 되면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갑론을박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무슨 목적으로 질문하십니까? 주님은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물으십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입으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그렇게 질문하자 이들은 얼굴 표정이 슬픈 표정을 짓고서 멈춰 섭니다. 왜 두 제자의 얼굴 표정이 어둡고 슬픕니까? 그 이유는 이 두 제자는 여전히 사망권세에 붙잡혀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은 무언가 혹시 내가 부활의 주님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반성해야 합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얼굴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하나의 무의미한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슬픈 얼굴 빛을 하고서 18절 이하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당신은 행색을 보아하니 근자에 예루살렘에 채류했다가 그 도시를 빠져나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근자에 예루살렘에 며칠이라도 머무른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당신은 요즘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단 말이요? 예루살렘이란 도시에서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왜 당신 혼자만 알지 못합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왜 당신 혼자만 모르고 있소! 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지금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세워두고 왜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당신 혼자만 모르냐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 혼자만 모르고 있소?”라는 핀잔은 사실 누가 누구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겠습니까? 실은 예수님이 이 두 제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이들이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부활을 모르는 이유는 무의미한 사실과 생명을 살리는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사고에 관한 무의미한 사실(fact)과 생명을 살리는 진실로 이루어진 실재현실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건사고에 관한 사실은 그저 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난 무의미한 사건들입니다. 지금 놀이공원에 벗꽃이 눈부시게 휘날리는 사실은 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님이나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사실일 뿐입니다. 그들은 벗꽃 구경하지 않고 예배당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 속에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일요일에는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그 진리가 있고 그 진리대로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많은 사실들이 있지만 그 사실들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그 사실이 진실로 바뀌어서 나에게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모든 사실들은 그저 무의미할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친다면 이들은 100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9절에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습니다. 21절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아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20절에서처럼 대제사장과 관리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서 빌라도에게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게다가 23절 말씀처럼 이 두 제자들과 가까운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했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천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관계된 사실들을 참으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데도 이 지식이 이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섭리를 내가 고집하는 요구조건에 맞추어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 입장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지만 그 분이라도 내 인생 속으로 찾아오시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찾아오시기를 고집피우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가 주님의 시신이 눕혀 있었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과연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 무덤에 시체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부활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24절의 말씀처럼 그 자리에서 예수는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덤 안에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목격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무덤에 도착하는 그 순간에 죽어 있던 시체가 서서히 일어나면서 부활의 주님으로 바뀌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뭐 그런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기 어려우시면, 최소한 무덤 안에 주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내가 교회를 출석하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하나님도 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집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고 죄도 짓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분명하게 생각이 변하지 않고 성품이 변하지 않고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기도하더라도 내가 바뀌지 않고서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무의미한 사실들만을 잡다하게 이것저것 늘어놓기만 할 뿐이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사건으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모든 사실들이 혼란스럽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얼굴에는 근심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왜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지 걱정도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요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서 천하가 다 알고 있는데 왜 당신은 혼자만 이런 사실을 모르냐? 당신은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 맞냐? 오히려 예수님께 성질을 부리고 역정을 내고 있습니다.
무의미한 사실을 진리로 바꾸시는 주님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해서 사실을 진실로 바꾸실까요? 이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결정적인 방법은 바로 말씀과 성령입니다. 1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열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줍니다. 이 때 열명의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들려서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12절에 보면 베드로는 그 소식을 듣고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주님이 부활한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고 열 두 명의 제자로 그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으실 때 사망권세가 너무 무서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로마병사들이 자기도 붙잡아서 죽일까 싶어서 도저히 예수님을 뒤따라 갈 수 없어서 다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승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쓸쓸하게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겨우 3일 밖에 지나지 않아서 베드로는 지금도 로마병사들이 자기를 찾아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처형할까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서 그렇게 오돌오돌 떨고 있습니다. 바깥으로 문을 열기가 두렵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귀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주님이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소식을 듣고 다락방에 가만히 숨어 있을 수 만은 없어서 한 걸음에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덤 안을 살펴보니 왠걸!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12절을 보면 무덤 안에서 세마포를 목격했던 베드로의 반응을 가리켜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가 아마도 아침이 조금 지난 오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주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이제 32절에서 이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부활 소식을 나머지 제자들에게 전달합니다. 33절에 보면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서 하는 말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간증을 전해 줍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 시몬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이셨을까요? 주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시점은 베드로가 아침 일찍 무덤에서 세마포를 본 때 이후 그리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 또는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제자들을 만나기 이전 그 사이 어느 때입니다. 그 사이 어느 때 베드로의 심령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가서 죽임 당하신 주님의 시신이 뉩혀 있던 곳에 세마포가 개켜져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단정하게 개켜져 있는 세마포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사건사고에 관한 사실 fact입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이 무의미한 사실을 이용하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무덤 안에서 세마포만을 발견한 베드로는 참으로 이상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합니다. 무덤 안에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세마포만 남아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누군가가 시체로 남아 있는 주님을 무덤에서 몰래 훔쳐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시신에는 채찍질 당하신 핏자국과 로마병사들의 창자국으로 온 몸에 피범벅인데 시신을 훔쳐가려면 굳이 세마포를 벗겨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마포가 차곡이 개켜 있다는 것은 주님이 직접 부활하시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주님이 진짜로 부활하셨나? 방금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말하기를 주님의 형상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형상이었는데 어떻게 주님의 시신이 그런 모습으로 변모하실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그의 머릿 속에 번뜩 떠오른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만나서 담화를 나누시던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은 이들 앞에서 그 형상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로 변모되십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도 빛과 같이 희어져서 감히 맨 눈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거룩한 형상으로 변모되십니다. 말하자면 부활 이후의 모습을 미리 세 제자들에게 은밀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광체 앞에서 그리고 위엄찬 소리로 압도되어 제자들이 심히 두려운 마음이 들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엎드리자 예수님께서 다가와 손을 대시며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에 그 영광스러운 변화산에서 내려오는데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빨리 동네로 내려가서 다른 제자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서 오늘 본 것을 다 말해 주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또 꿈에서도 감히 만나볼 수 없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강림하여 예수님과 담화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또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 날의 충격과 감동을 입 안에 조용히 담아두고 비밀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답답한 마음에 대고 망치질을 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변화산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충격과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충격적인 말씀을 더하여 듣게 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변화산 사건을 전부다 기록하고 있지만 특히 베드로의 설교를 녹취한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9장 10절에서는 변화산의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한 세 사람 중에서 특히 베드로가 느꼈던 충격과 당혹감을 좀 더 사실적으로 기록해 두면서 이런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10절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 말씀을 마음에 두면서 제자들끼리 서로 갑론을박 토론을 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궁금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일에 베드로는 빈 무덤 안에서 세마포를 발견하고 이를 놀랍게 여기며 마음 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무덤에 시신이 안치될 때까지 몸에 감싸고 있던 이 세마포를 벗어버리고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형상으로 변모되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의아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 놀라운 비밀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모든 일을 다 미리 예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몇 달 전 변화산에서 이미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예고하시고 자신이 나중에 부활하게 되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될 것인지 그 실제 모습까지도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미리 보여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 속에 주님의 예언이 하나도 빠짐이 없이 모두 성취되어 주님이 결국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베드로가 목격한 주님의 모습과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어서 훗날에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1장 17절과 18절에서 이렇게 이 날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변화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신 주님에게 그에 대한 하늘의 모든 상급과 보상으로 부활을 허락하셔서 주님은 성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이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께 베푸시는 최고의 보상과 상급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친히 일으켜 부활시키셨다고 기록합니다. 세마포와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형상으로 변모하신 주님의 상호 관계를 고민하던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미리 예언되었고 또 변화산에서 주님이 이 모든 예언들을 친히 눈으로 보여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가운데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난을 받고 영광으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은 두 제자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방식도 동일합니다. 24절까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무의미한 사실들을 늘어 놓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우리 중에 어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지만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도 만나보지는 못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25절부터 다시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십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는 책망은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켜서 한 마디로 너희는 그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책망할 때 늘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네 가 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는 동기가 있느냐 없느냐? 둘째는 일을 완수하려는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 셋째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와 추진력이 있느냐 없느냐? 동기와 목표, 그리고 의지와 추진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모두 포함해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동기도 없고 반드시 사랑을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목표와 의지도 없고 그것을 실제로 감당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낼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 예고됩니다. 하지만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작정 진노하시고 우리를 그냥 저주와 심판 가운데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우리와 맺은 언약관계를 회복하시되 그 죄의 삯인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신 담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구약에 모든 선지서의 말씀들이 그런 말씀입니다만, 예를 들어 이사야서 53장 5-6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우리 죄악을 대신 감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선지서에서는 중요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문제를 하나님이 새언약으로 해결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을 날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는 새 언약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언약은 내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시내산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이다. 그 때는 내가 그들과 결혼의 언약식을 거행해서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트려버렸다. 33절에 하지만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시 맺을 새 언약은 이전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내가 나의 법을 돌비에 새겨서 그들 마음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둘 것이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던 이유는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언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 말씀을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길 것이고 하나님이 언약을 보증하는 도장을 종이 잉크 위에 찍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사람 마음 속에 강림하여 내주하시는 완전히 새로운 언약을 채결하는 새언약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얼마나 강력한가? 34절에 보시면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이렇게 힘들게 억지로 강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든 백성들이 그 마음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조차도 못할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가하면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새언약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있은 후로부터 400여년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새언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 우리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에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주님 자신의 피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다시 새롭게 맺는 새언약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성경을 풀어주시면서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 죄의 대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다고 설명해 주니까, 누가복음 24장 32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점점 뜨거워지고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음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옛사람도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집에서 직장에서 더 이상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옛사람의 이끌림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인도하시는대로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삽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더라도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 주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주님의 부활의 능력대로 사는 것입니다. 슬픔과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도 기쁨과 생명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동행 /눅24:44-49/ 지성래목사
2021-01-30 14:33:05
동행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다.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사람과는 천리만리 동행할 수 있다. 그러나 불편한 사람과는 십리를 함께 가는 일도 고통이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한 달을 함께 여행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념이 같고 사상이 같고 신념이 같고 추구하는 바가 같고 믿는 바가 같은 이들과는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이라도 극복하며 평생을 동행하길 원한다. 그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이 어떤 경우에 누군가를 배반하고 관계를 악화시키고 오랜 우정을 끊어 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는 가롯 유다가 그런 경우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이다. 요한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한 말씀 중에서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렇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나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나의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한다. 그래야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상의 동행이 시작된다. 주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나면 순교자의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활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꺼워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모습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항상 마음에서 그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우리가 어떤 취미나 습관에 빠지면 밤낮 없이 그것에 마음과 생각을 쏟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위해서 시간, 재물, 돈 등 그 무엇이든 무한 투자하여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사람을 사랑해 보라. 일을 사랑해 보라. 스포츠나 게임이나 그 어떤 오락에 빠져 보라. 그것에 시간과 돈과 온갖 정열을 쏟아붓게 마련이다.
정선 카지노에 도박하러 가는 이들은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어서 빨리 갑시다. 더 속도를 내세요”라고 재촉한다고 한다. 어서 빨리 가서 정선 카지노의 돈을 다 내 주머니에 긁어 담을 의욕에 가득해서 달려가는 것이다.
최근에 뉴스거리가 된 제주신화월드 안에 있는 랜딩카지노 145억 6,000만원 횡령 사건를 보라. 이런 뉴스가 전해지고 나면 범행에 연루된 카지노 전문모집인인 에이전트를 향한 궁금증이 커지게 마련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검은 손이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어두운 일, 불의한 일에 관련된 이들과 동행하는 이들이 있다. 불의한 일에 가담하는 사람들 곁에서 동행하는 척하며 쉬운 방법으로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 것을 전업처럼 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나면 삶의 중심에 늘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예수와 함께하는 일상의 가치를 만족으로 여기며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동행이며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주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였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함께 하신다. 누구에게나 동행하신다. 문제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뿐이다. 산상 수훈에 소개된 예수의 교훈처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비추신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신다. 그러나 악인이나 불의한 자는 햇빛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 불의한 자는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공급에 대하여 감사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형제 아벨에 대해서도 가인처럼 처세하고, 그래서 사울 임금처럼 어리석어 지는 것이다.
지난 삼 주 동안 연속하여 묵상한 누가복음 24장의 예수 부활 이후의 내용을 좀 더 묵상하길 원한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한 밤 중에 있었던 장면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11제자가 한 곳에 숨어 있었다. 거기에는 그들 말고도 몇 사람들이 더 같이 숨어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33절이 그런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곳을 찾아간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도 그 곳에 같이 있던 그 밤 중에 예수께서 그 곳에 찾아 가셔서 하신 말씀이 본문 내용이다.
성경을 깨닫게 하는 열리어진 마음.
예수께서는 부활 하신 날 오후 내내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전해진 메시야 예언에 관한 내용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 밤에 예수께서는 11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에 찾아 가셔서 다시 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담긴 메시야 예언과 뿐만 아니라 시편에 기록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셨다.
문제는 성경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혹은 얼마나 자주 접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 깨달아져야 한다. 깨달아져야 믿게 되고 믿게 되어야 신앙생활이 건강해지는 법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별 것 아닌 것 같고 인생이 풀리는 것도 없고 더 어려움만 계속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에이 다 그만두고 절에나 다녀 볼까” 하는 식으로 믿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문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주님이 아무리 나의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셔도 내가 마음 문을 꼭꼭 닫아 걸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므로 나의 완악한 마음, 나의 고집스러운 마음, 나의 어리석은 마음의 문이 열려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내 고집, 내 주장, 내 경험, 내 편견, 내 어리석음에 갇혀서 내 마음 문을 닫고 산다. 세상에 내가 왕이다. 세상에 내가 최고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이렇게도 살아가고 저렇게도 살아가려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나 그런 삶의 태도를 갖고는 예수께서 나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가 없다. 내 닫혀진 마음 문을 주님도 여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주님께서 내 마음 문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것이 은혜 생활의 시작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이래 보여도 내가 누군데, 내가 어느 학교 출신인데, 내가 이래 보여도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 왔는데 하며 자신의 과거와 공로를 추켜세우려 한다. 자신의 학력, 경력, 사회 신분, 지위, 재력, 경제력, 명예 등을 은근히 자랑하며 자기 자신의 성(城)을 쌓고 살아가려 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발 들이실 곳이 없게 된다.
그러나 물론 주님이 한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 오시기로 작정하시면 그 어떤 누구의 마음에라도 찾아 오 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주님이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부모, 나의 자녀, 나의 형제자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고 그 마음에 찾아와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만나는 이달리아의 백부장 고넬료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후 세시 경에 기도하는데 환상을 보았다.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고넬료의 구제생활과 기도 생활을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욥바에 머물며 선교 여정 중인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라고 명하셨다. 고넬료는 집안의 하인 둘과 경건한 사람 하나를 대동해서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심부름을 보냈다.
베드로 사도를 모셔 오기 위한 것이었다.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불로 모으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렸다. 다음 날 도착한 베드로 사도를 모시고 말씀 부흥 성회를 열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 부흥 성회 첫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도행전 10장 34절이 그 내용이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렇게 시작해서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내용과 부활 승천하시기 까지의 내용을 자세하게 전하였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힙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10:43)는 내용까지 소상하게 전파하였다.
그 때에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한 저들에게 물 세례도 베풀었다. 그러니까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은 성령 세례를 먼저 받고 물 세례를 나중 받은 역사적인 주인공들이 되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물로 세례를 받은 저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며칠간 더 머물면서 말씀을 더 전파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 지내는 이 때에 영상으로 접하는 예배의 찬송, 기도, 말씀 묵상 등을 주변과 세계 열방에 있는 가족, 자녀, 친구, 친척들에게 전해서 오히려 이러한 때를 나의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주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기회로 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복음 전파의 사명.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몇몇 영혼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다. 예수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의 구원의 부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밤 중에 11제자들 곁에 찾아 가셔서 이 말씀을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 부활, 죄사함,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게 하는 일에 너희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사명을 고취하셨다.
성도는 부르심과 사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의 직업이 다 다르고 생업의 분야가 다 다르고 삶의 차원과 여건이 다 다를지라도 우리 각 사람을 향한 부르심과 분부하신 사명만은 한가지이다. 이 부활 복음이 땅 끝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게 하는 일에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속회를 강조하고 매주 속회에 모이기를 강조하는 바탕이 이것이다. 우리는 다 선교사들처럼 열방에 직접 나가서 사역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매주 언라인으로라도 서로 문안하고 서로 찬양하고 서로 말씀을 접하고 서로 삶을 나누며 적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일정하게 모아서 선교지에 보내는 이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전쟁은 최 전선에서 싸우는 군대의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되면 안된다. 식량과 무기와 탄약이 줄기차게 보급되어야 전쟁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교회의 속별 후원금은 별것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이고 쌓여서 백도 되고 천도 되고 만도 되는 것이다. 모래가 쌓여서 산이 되는 것이고 시냇 물이 모여서 강도 되고 바다를 이루는 것이다. 작은 것을 결코 작게 여기면 않된다. 금은 작아도 금이다. 눈에 보일까 말까 한 금가루가 모여서 금괘 덩어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은 금보다 더 귀한 믿음 사역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비행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조선 땅을 찾아 태평양을 배를 타고 건너 온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 땅에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렸다.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 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곧이어 병인양요로 이어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극에 달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1866)라는 선교사가 한국말을 배워서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영국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런던선교회를 통해 중국으로 파송 받았다. 그 후 중국선교를 포기하고 있는데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는 한국의 백령도 근처 섬에 1차로 선교여행을 와서 한문으로 된 성경 200권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복음을 전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 갔다가 1866년 무장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왔다.
그러나 조선군과의 무력충돌이 생겨 토마스 선교사는 체포되었다. 한 권이라도 더 조선에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그는 조선군에게 잡힐 때까지 사력을 다해 강가로 성경책을 던졌다. 그는 즉시 생포되어 칼로 순교를 당했다. 대동강변에서 그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를 죽인 사람은 조선군 군인 박춘권 이라는 자였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 선교사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손을 모아 짧은 한국말로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1840년, 영국 하노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다. 그는 23살에 런던 뉴칼리지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인 24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교지인 중국에서 신혼 부부였던 그의 부인이 죽는 슬픔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려 하였다.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당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최치량이라는 13세 살 된 소년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강변에 던져 놓은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서양인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온 것이 무서워서 다시 그 책을 평양성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데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 한문성경책 3권을 집으로 가져다가 뜯어 벽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얼마 후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다가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이후 13살이었던 최치량이 성인이 되어서 박영식의 집을 사들여 주막으로 썼다. 주막이란 것이 나그네가 잠도 자고 음식도 먹던 당시의 여관이다.
평양선교가 제대로 시작된 것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죽은 지 27년 후인 1893인데 이때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최치량의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마펫 선교사는 성경으로 주막의 벽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주인 최치량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최치량도 예수를 믿고 그 다음 해인 1894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곳이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널다리골 예배당은 우리가 아는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다. 그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는 후에 평양 신학교를 제 1기생으로 졸업하고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널다리골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던 노인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와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바로 30년 전에 로버트 토마스를 대동강변에서 칼로 쳐 죽인 박춘권 이었다. 지난 30년간 박춘권은 서양인을 죽이고 죄의식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몇 년전 부터 널다리골 예배당에서 새벽마다,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박춘권은 자신이 예수를 믿은 후 그가 간직하고 있던 한문성경책 1권을 그의 조카 이영태에게 건네 주었다. 이영태 역시 그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데 훗날 이영태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한글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디 엘 무디나 빌리 그레함 목사와 같은 세계적인 복음 전파의 거장들이 되기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앞에 열려진 마음을 갖고 이 부활 복음이 내 곁의 그 누군가의 마음 속에 복음의 씨앗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일에 증인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지금 집 안에서, 내 무릎 위에서 자라나는 내 어린 자녀들에게 그런 복음의 증거가 잠잠히 계속하여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양육하자. 모세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어린 아들이었다.
다윗도 가난하고 힘겹고 블레셋의 잦은 침략으로 불안하기 그지없던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자라나던 어린 소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심겨진 이새의 아들다운 하나님 신앙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부모 잃찍 잃은 에스더를 역사적인 인물로 성장시킨 배후에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있었다.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와 동행하는 길은 성령을 받는 길이다.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이 임해야 한다. 세상에는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다.
A. W. 토저 목사의 여려 권이 설교집 중에 <임재 체험>이란 책이 있다. 그는 책에서 사도행전 4장 23절의 앞부분을 인용하며 동행하는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라는 이 본문을 중심으로 10여 페이지의 묵상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사도들이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말한다. 사도행전 4장에는 예수를 죽일 당시의 그 세력들이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 앞의 걷지 못하는 걸인을 걷게 한 기적 사건으로 예수의 소문과 제자들의 소문이 점점 예루살렘에 퍼져 가고 있었다.
예수의 부활 복음의 증거는 예루살렘 안에 약 오천 명의 남자들이 예수 부활을 믿고 전하는 강력한 신도들이 되었다. 안나스와 그 당시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와 요한,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한 재판이 열렸다. 관리와 장로와 서기관들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때 저들이“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심문하였다. 그 때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0-12)
저들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더 이상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심문한 이유를 찾지 못한 저들은 다시 한번 위협하고 풀어 주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나자 마자 저들이 풀려나기를 기도하던 동료들에게 간 것이다.
토저 목사는 그의 책에서 질문한다.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에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그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주일에 맹장염이 심해서 응급실로 실려 가고 수술대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나의 선택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대로 주일에 비대면 예배와 영상 예배를 핑계 삼아 골프장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이는 시간, 재물, 돈, 경험 그 모든 것 앞에서 누구나 그러하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내 힘과 내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범사에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새해를 맞아 오늘 처음으로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올 한해 바이러스의 전염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지혜롭고 슬기롭게 굳굳한 믿음의 사람답게 자신의 신앙을 잘 지켜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어지기를 축원한다. 아멘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 /눅24:36-53/ 김원효목사
2020-04-19 11:06:29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일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까지 무엇을 하셨습니까? 복음서들의 증언 속에서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평강을 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먼저 하신 일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도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첫 안식일이 다 지나려고 하는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제일 먼저 찾아갔던 여자들을 만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평안하냐” 하신 것입니다(마28:1, 8-9).
또한 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도마도 함께 있을 때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죄의식과 자괴감을 일시에 씻어주는 해방과 구원의 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자 제자들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리해도 인간적으로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평안을 소유하기란 인간의 의지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평안이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2.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셨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주님께서 부활하시자 제자들은 그 사실을 금방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만나 뵈었다는 다른 사람의 말도 믿지 못했고, 자기 눈앞에 와계신 주님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만져 봐라. 내 손과 발을 봐라” 하셨고, 그래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어디 먹을 것 없느냐” 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진짜 몸으로 다시 사신 주님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풀어서 당신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 당신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으나 도마는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집 안에 있을 때에 다시 그들 가운데 오셔서 도마에게 말씀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4-27).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렇게 열심히 부활을 믿게 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이 헛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바로 참 메시야이시고 그의 십자가가 참 구원의 능력임을 확증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며 십자가가 구원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구원의 성취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2-19)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자만이 훗날 자신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과 우리 모두는 실패자요 낙오자입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과 우리는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에게 주
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이렇게 부활이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부활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3.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줄 테니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기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후편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앞머리에는 이런 중요한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또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보다 분명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는 그것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첫째 제자들에게 평강을 비시고, 둘째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시며, 셋째 전도의 사명을 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일체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시고 어떤 죽음을 죽으셨습니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지도층의 음모와 허위고발과 거짓증언, 매수되었거나 선동에 넘어간 군중들의 배신, 거기에 제자들의 배신까지 더해져 이루어진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복수심에 불타오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십자가의 처형에 넘겨준 모든 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불의와 비겁함을 비웃고 조롱과 저주를 퍼부으며 의의 심판을 선언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홀연히 나타나셨다가 홀연히 사라지시듯 그들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밤 그들의 잠자리에까지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곤 함으로써 잠을 이룰 수 없는 극도의 불안과 번민으로 그들을 괴롭힐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그들에 대한 그 어떤 원한이나 증오심이나 복수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어찌 날 그렇게 다 버릴 수 있었느냐?” 물으신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 한 대로 됐지?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는데 기분이 어떠냐?”하고 빈정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50-5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52-53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돌아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과 함께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축복을 주시고 경배와 기쁨과 찬송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평강과 믿음과 사명과 복과 경배와 기쁨과 찬송의 근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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