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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누가복음 설교 모음

누가복음 23장 설교 모음 (가상 칠언)

by Jessi J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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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의 일곱말씀(가상의 칠언) /23:32-46

2010-08-03 17:41:04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고통당하실 때 꼭 필요한 7번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귀한 진리말씀을 요약하여 가상의 칠언(架上七言)이라 부릅니다. 상고하여 보면서 은혜를 입으십시다.

 

. 십자가란?

 

십자가는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 )라 하였는데, 멸망과 구원』「살리고 죽이고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두 종류 십자가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강도들이 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강도가 진 십자가는 죽이는 십자가 입니다. 강도는 자기 죄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기 죄 값이 아니고, 택한 성도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므로 성도를 살린 것입니다. 마치무엇과 같은고 하니, 죄 짓은 아들이 사형 받는데, 대신 아버지가 받아 죽고, 아들이 살아남과 같습니다. 할렐루야!

 

1: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 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우리 믿는 자를 죄의 멸망에서 살리려고 진 십자가입니다.

고전1:18절에 예수 십자가의 진리가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멸망이 되나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되느니라했습니다. 할렐루야!

 

. 십자가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七言)

 

1. 용서하여 주옵소서(23:34)

 

첫 번째는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못 박은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행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가상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용서하여 주옵소서”(23:34)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의 가르침”(5:44)을 몸소 실천한 부분이며, “사하여 주옵소서로 번역된 아피에미(ἀφίημι) ’(2:5) ‘과실’(6:14) ‘불법’(4:7) ‘마음에 품은 것’(8:22) 을 용서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경우가 아니라,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리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용서는 인간으로서는 기도하기 어려운 너무나 관대한 기도로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들의 행위에 대해 무한하신 신적 사랑에 기초하여 용서해 줄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일차적 용서의 대상은 십자가에 매단 로마 군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안 믿는 모든 인간들이 대상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용서의 기도 응답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즉 죄를 고백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용서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의 효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아, 용서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죄 용서받은 자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날마다 아버지 앞에 나와서, 발에 먼지를 씻는 것 같이, 자범죄를 용서받아가야 합니다. 새벽에 나와서 지난 하루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악행을, 하나님 아버지!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죄악이 나를 아프게 하고,

내 살림을 손해 내고 있고,

내 몸을 병들게 합니다. 천대 멸시 받게 합니다. 술 담배 마약으로 몸이 병든 자는 용서를 구해야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죄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그 죄와 벌은 그대로 있어서 계속 몸과 생활을 어렵게 합니다.

계속 고통아래 처해 살렵니까? 용서받고 불행에서 벗어나 자유, 치유, 기쁨을 얻어 가시렵니까? 얻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또 다른 사람을 예수님 만나게 하여, 그들이 용서받고 죄벌에서 자유 해방되고, 치유되고, 복된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불신 풍습을 쫓아 산 악행에 대하여 용서받고, 죄벌에서 벗어나서 자유몸, 건강한몸, 기쁨의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다같이 기도하여 볼가요?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신 예수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의 죄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멘

 

2.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23:43)

 

둘째는 예수와 함께 달린 강도 중 한 사람의 영혼을 낙원으로 초청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을 파라데이소(paradeivsw)라 했습니다. 낙원은 천국을 설명하는 단어로서, 천국의 즐거움을 나타내는 뜻입니다. 주님 재림으로 이루지는 영육 결합부활체 되기 전, 영혼만 가서 누리는 즐거운 천국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나사로가 가서 누리는 천국을 말합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천국(낙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예수 믿은 강도에게 천국을 허락하셨고, 즐거운 천국에서 영생하는 복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복을 우리도 받기를 축원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가 이 축복을 받기를 소원하시는 분은 크게 아멘 하세요. 아멘!

 

이 세상에서 천국(낙원)에 대한 구원이 결정 됩니다(9:28) 예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지금 내속에서 천국자기가 커져가고, 또 지옥자기가 커져 갑니다. 천국자기가 커져가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3. 여자여 보옵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미라(19:26-27)

 

셋째는 모친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아들임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다만 자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긴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내려다보는(25) 아들로서의 심리적 걱정은 그의 온 심장과 오장육부를 파고들어 타는 듯한 아타가운 심정이 있어서,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봉양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십자가 위에서 여자여(guvnai 귀나이) 부르신 것은, 구원자로서 부르심이요, 둘째로 모친(mhtri메트리(어머니)으로 부르심입니다.

 

여자여 보옵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사람관계를 가장 바로 했습니다. 부모, 부부, 자식, 형제, 이웃, 동포, 인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을 했는데, 육신관계는 이 세상에서 잠간이지만, 영원한 관계를 먼저 가졌으니,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뤄가셨으니, 하나님을 믿는 진리관계를 먼저 맺었고, 그 후에 육신 관계에서 효도를 했습니다.

 

진리관계가 먼저 되지 않으면 지옥 불구덩이로 가니, 사람관계에 먼저 할일은 부모 부부 형제 자식관계에서 진리관계(믿음관계)를 먼저 맺어야 합니다. 부모 형제 자매가 예수를 믿습니까? 또 살아계신 부모, 자식, 형제 내 몸같이 사랑하고 대접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7:46)

 

넷째는 그 유명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예수님의 극한 버림의 이유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들을 건지기 위하여 죄없는 대속 제물이신 예수를 십자가상에서 희생시켜서야 했던 것입니다. 마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어린양을 번제단에 불태워 버림같이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용한 말씀은 아람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엘리 엘리부분만 히브리어로 표현했고, ’레마 사박다니는 아람어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엘리는 히브리어 엘리(yriא)의 역어인데, (אל)에 접미어가 붙어 나의 하나님뜻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뜻으로,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위에 던져 져야하고, 버려 져야하고, 희생되어야, 죄 벌을 대신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십자가위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양을 제단에 올려놓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위에서 희생물로 내려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희생되지 아니한 이상 얻을 수입은 없습니다. 해산 수고해야 전도됩니다. 너 몸을 십자가위에 내어 놓아라 합니다. 희생되기를 바랍니다. 아끼지 마세요. 희생된 것만큼 내가족, 내형제, 내생활, 내교회가 살아납니다. 할렐루야!

 

5. 내가 목마르다 (19:28)

 

다섯째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원어 딥소(diyw)는 인간으로 극도에 달하는 고통의 표현이며, 구약성경을 인정하고, 구약예언을 성취하신 말씀입니다“(69:21),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이 육신이 죽으면서 목마른 것은, 인간의 최고의 고통의 절정을 체험한 것이니, 이 고통을 체험했기에 인간의 어떠한 어려움 고통을 알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중에 부르짖으면, 즉시 찾아와서 고통에서 건저주십니다. 직접 인간의 최고의 고통을 체험해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예수께 가지고 와서 해결받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6. 다 이루었다 (19:30)

 

여섯째는 다 아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원어 테텔레스타이(tetevlestai)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자신이 어떤 일을 성취하였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자신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그 모든 일들이온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겸손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신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6:10, 7:27) 성취하신 것입니다.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교회 앞에 건축하는 집을 보았는데, 얼마 후에 아름다운 건물을 완성했어요,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구원을 완성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미완성의 구원이 아니고, 완성하신 구원이요, 예수님은 자기 전 생애를 다 쏟아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컨대, 우리 죄를 과거 현제 미래 모든 죄를 대속하여 도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 영원까지 다 완성하여 이룬 그 대속을 믿어가므로 효과를 봅니다. 할렐루야!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놓고, 아들아 먹고 출근하라 합니다. 엄마가 밥, 옷 다 준비 해 놓았고, 아들이 먹고 입고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어 가면, 계속 효과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다이루어 놓은 용서, 천국, 자유, 기쁨, 구원을 믿어 효과를 계속 입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7.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일곱 번째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는 부탁 기도입니다.

영혼(pneu'ma 프뉴마)을 부탁했습니다(parativqemai 파라티데마이)

 

예수님은 천국에서 세상에 와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고, 모든 기력을 다 쏟고 숨을 거두기 전에 큰 소리로 부탁합니다. 내 영혼이 아버지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죽음 즉시 그 영혼이 천국에 갔습니다. 우리는 즉시 천국가고, 지옥 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계신 천국, 보좌에 가셔서, 천상에서 지상의 성도를 위하여 성령 통해 사역하시고 계십니다. 때가 차면 재림하실 것입니다.

죄인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위에서 피 흘리신 구주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 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이사야53:4-6)

 

십자가위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시고, 죄인 구원하는 일에 총 매진하시기를 주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사형 선고받은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 Part II /23:13-25/ 조정의목사

2020-09-19 13:54:14

 

금요일 아침, 밤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새벽부터 빌라도와 헤롯에게 각각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5번의 재판 끝에 이제 마지막으로 빌라도 앞에 다시 서서 예수님은 최종 판결을 받으실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예수님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고 간 죄의 심각성 그리고 그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깊이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1. 빌라도의 판결(13~16)

 

13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빌라도는 최종 판결을 내리기 위해 무리를 불러 모았습니다. 무리 중에는 유대인 최고 지도자였던 대제사장들 그리고 관리들(서기관, 장로들)이 있었고, 많은 백성도 함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 각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의 전형적인 심문 절차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했고(체포-고소-심문-판결) 그에 따른 판결이 무엇인지 차례차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빌라도의 말은 마치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체포와 고소가 있었다고 빌라도가 말합니다.

 

14절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빌라도의 말대로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 앞에 끌고 왔고,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고소했습니다(백성을 미혹한다는 구체적인 고소 내용: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함, 자칭 왕 그리스도라 주장함, 23:2).

 

그리고서 빌라도는 내가 그 고소에 대해 심문했다고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다.” 빌라도는 로마법대로 고발 내용을 근거로 관정에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무리에게 법대로 재판했음을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체포했고, 나에게 고발했고, 내가 심문했다. 이렇게 법대로 하나하나 제대로 처리하였고, 이제 판결이 남았다.

 

그리고 이것이 빌라도의 판결입니다.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14)

 

이 사람은 백성을 미혹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세금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왕이 되어 황제를 반역한 일도 없다.

 

모든 고발 내용에 대해 무혐의, 한 마디로 무죄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빌라도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판결을 지지하는 또 다른 판결이 있었습니다. 갈릴리를 다스리는 지역 통치관, 헤롯 안디바 역시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빌라도는 헤롯의 재판 결과를 무리에게 알려 자기 판결이 정당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15)

 

헤롯이 그를 그냥 다시 돌려보낸 것을 보라. 나만 예수를 무죄라 생각한 게 아니고, 헤롯도 또한 그렇게 판결했다는 게 아니냐.

 

그리고 빌라도는 마침내 이렇게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15-16)

 

로마법에 따라면 예수님은 사형죄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사형에 처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바르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곧바로 예수님께 태형을 선고합니다. 빌라도가 봤을 때 예수님이 매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가 없으면 풀어줘야지 왜 매를 댑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을 때려서 놓겠다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을 고발한 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죽일만한 죄는 없으니 법대로 죄수를 놓아주긴 해야겠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성화니 때려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백성을 두려워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엄청난 영토를 차지했는데, 피정복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빌라도 같은 총독을 지역마다 세웠습니다. 로마 황제가 총독에게 바라는 건 아주 분명했습니다. 다스리는 지역의 치안과 평안, 그리고 정확한 세금 징수입니다. 민란이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거나, 반역이 일어났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 지역에 배정된 총독은 황제 눈 밖에 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미 몇 차례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수도 사업을 하기 위해 성전 금고를 사용하려 했고, 유대인이 우상숭배로 여겨 혐오하는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행군하여 들어가 수많은 유대인이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도 한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빌라도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던 자들을 그 자리에서 죽인 사건입니다(13:1~2). 이 사건은 유대 전역에 퍼져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소동이 황제의 귀에 제대로 전달됐다면 빌라도는 아마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같이 전과가 많은 사람으로 한 번만 제대로 소동이 크게 일어나면 큰 낭패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죄라는 정확한 판결과 상관없이 예수님에게 태형을 내리려 한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줬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27:18; 15:10). 하지만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태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판결에 만족했을까요? 그들의 반응을 들어보십시오.

 

2. 백성들의 항소(18~21)

 

18절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하니 19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백성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엄청나게 흥분하여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일제히소리 질렀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반응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갑자기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말했을까요? 먼저, 바라바는 누가의 설명대로 민란을 꾸미고 민란 중에 살인하고체포되어 옥에 갇힌 죄수였습니다(15:7). 그는 유명한 죄수였습니다(27:16). 성중에서 적지 않은 민란을 일으킨 널리 알려진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총독이 백성이 요구하는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어 자비를 베푸는 전례가 있었습니다(27:15; 15:6). 우리에게 광복절 특사와 같이 특별사면 제도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백성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27:17). 이에 대한 대답이 우리는 바라바를 원한다. 예수는 죽여라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하여 넘긴 사람은 대제사장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27:18). 나머지 백성들은 이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명백한 죄가 드러난 유명한 죄수 바라바와 무죄 판결을 받은 예수님 중 누구를 놓을지 생각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당연히 누굴 놓으라고 말해야겠습니까? 무죄 판결을 받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을 없이 하고(죽이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참 충격적인 반응입니다.

 

바라바는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고발한 내용을 실제로 범한 사람이 아닙니까? 민란을 꾸며 백성을 미혹했고 그 과정에 사람을 죽였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로마법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아닙니까? 그 바라바와 심문 결과 죄가 없다고 판결이 난 예수 중 누구를 놓을 거냐는 질문에 어떻게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마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27:20)

 

백성들은 무지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4:22)

 

그랬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들끓는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판결을 굽혔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하여 자기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후에 사도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할 때에 이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3:13-15)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3:17, 19)

 

백성들은 얼마나 무지한지 의로운 예수님을 죽이고 살인자를 놓아주기를 일제히 소리 질러 구했습니다. 생명을 빼앗은 자를 원하고 생명의 주를 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죄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시기하는 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빌라도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매 순간 위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무엇이 선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무지함이 은연중에 우리 삶에 만연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죄에 넘어지고(분노, 비방, 용서하지 않음, 감사하지 않음) 그래서 이 죄를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바로 이 죄가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죄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무게를 측량해보십시오.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작아 보일지라도 우리의 그 죄가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 하여 바라바를 내세웠지만 그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도대체 백성들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때려서 놓겠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바라바랑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바라바를 택하고, 무리는 이 예수에게 어떻게 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요?

 

빌라도는 법적으로 무죄인 예수를 놓아주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진지하게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서 충격적인 요청을 들었습니다. 백성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게 된 것입니다.

 

20절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절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는지라

 

십자가. 그들이 예수님에게 내리고 싶었던 판결은 바로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왜 이것이 충격적일까요? 로마에는 사형 방법으로 십자가형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목숨을 끊는 형벌이지만 고통의 순간은 짧습니다.

 

십자가형은 다른 방식에 비해 아주 잔인하고 고통의 시간이 매우 길며 그 방법이 정말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라 로마 시민은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십자가형은 받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노예나 국가의 가장 악독한 범죄자, 흉악범을 처형할 때만,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경고하려고 이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무죄판결이 내려진 예수님을 그 잔혹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 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이 예수가 모욕적으로 비참하게 죽으면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는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참 그리스도이십니다. 시기와 비방,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에 무지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절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나무에 달려 그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21:23; 3:13).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수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죄 때문에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입니까?

 

빌라도에겐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만한 죄를 지은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씁니다. 이제 마지막 그의 노력과 그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3. 예수님의 사형(22~25)

 

 

22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하니

 

빌라도는 참으로 여러 번 백성에게 자신의 판결을 확실하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 “그는 무죄다”,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러는 것이냐?

 

죄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 애썼습니다. 그의 아내가 간밤에 꾼 꿈을 말하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사람을 보내 간청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27:19). 법대로 다스려야 할 통치자로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런 방법으로 백성의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19:1-3)

 

빌라도는 예수님을 관정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을 시켜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영화에서 본 아주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채찍을 상상하시겠지만 그건 후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나서의 일입니다(27:26; 15:15).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덜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주요 목적이 예수님을 죽기까지 때리는 것이 아니라 고발한 자들을 설득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군인들이 가시로 엮은 십자가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아마도 근처에 있는 대추야자 나뭇잎을 엮어 만든 것일 텐데 크고 굵은 가시가 많이 난 가지로 직경 30cm가량의 고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굵고 기다란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지면서 살을 찢고 파고들어가 피가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

내게 되었는데 그가 가시 면류관 쓰셨네

(조준모, 나무에 달린자)

 

군인들은 또한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로마 군인이 입는 망토를 예수님의 어깨 위에 걸친 것입니다. 가시관과 자색 옷은 예수님의 죄목인 유대인의 왕을 비웃고 희롱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왕에게 예의를 차리듯 꿇어앉아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소서”,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치며 희롱하고, 손을 들어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많은 조롱과 구타를 당하신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보라 이 사람이로다”(19:5).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머리엔 가시면류관이 쓰여 피를 흘리고, 얼굴은 맞아서 벌겋게 부어올랐고 자색 옷을 걸친 꼴이 참으로 우습고 처량하게 그들 눈앞에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본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했습니다. 상처 입은 예수님을 보고도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이토록 무섭습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와 고난과 수치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무지와 교만과 시기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이천년 전 빌라도 법정 앞에서도 그랬고, 지금 구세주의 십자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죄는 구세주의 희생과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자기 욕심을 더 사랑합니다.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정말 무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죄의 무서움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랑하여 죄를 택할 때 우리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가 그 죄를 담당하기 위해 당하신 슬픔과 고난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됩니다. 내 눈앞에 있는 욕구를 채우는 것이 급하여 가시관 쓰고 피 흘리며 희롱당한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분노할 때, 시기할 때, 사람을 두려워할 때, 비방할 때 주가 그 죄 때문에 당하신 모욕과 수치를 기억하십시오.

 

백성들은 빌라도를 점점 더 압박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19:12), ‘이 사람은 자칭 왕이라 하니 가이사의 반역자가 분명합니다’(19:12).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19:15). 당신은 이 사람이 가이사와 같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서 놓으려고 하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점점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계속해서 예수를 놓으려 했다간 민란이 일어날 게 분명해지자 빌라도는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23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절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절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 전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했습니다(27:24). 대제사장들이 가룟 유다에게 한 말, “네가 당하라를 그들이 듣게 된 것입니다. 백성은 이에 다 대답하여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27:25). 그리고 예수님은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준비된 순서대로 십자가형이 진행됐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다에게 네가 당하라고 말했고,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백성에게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며 나는 죄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예수님이 당하신 수치과 고난에 무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9:28)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그분이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건 우리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하신 건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으신 것은 죄 때문에 단절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함이고, 그분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가 이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입게 하기 위해서입니다(53). 그분이 당하신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8:12)

 

여러분,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죄에게 져서 죄가 원하는 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러기엔 우리가 진 사랑의 빚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이 사랑을 몰라보고 무지한 가운데 머물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위해 모든 수치와 고난을 적극적으로 참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받은 이 큰 사랑에 대해 무지한 자로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사랑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왕 /23:26-38/ 조정의목사

2020-09-19 13:49:16

 

빌라도는 유대 관리와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23:23~25).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빌라도 관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형의 순서에 따라 극심한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1) 주님이 당하신 고난, 2) 고난 중에 주님이 품은 심정, 그리고 3) 주님이 하신 말씀(반응)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헤아려 보기 원하고 본받을 주님의 마음과 이웃 사랑의 본을 배우기 원합니다.

 

1. 주님의 고난(26-27; 32-38)

 

십자가형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난에 관해 복음서 저자들은 극도로 표현을 아낍니다. 아마도 그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주목적이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말씀(53:4)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조금은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했던 고통, 하지만 주님이 대신 당하신 그 고통의 크기를 함께 헤아려봅시다(채찍질-군대의 모욕-고난의 길-십자가/관정-골고다).

 

a. 채찍질(27:26; 15:15) @관정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먼저 잘 훈련된 고문 기술자(릭토르)에 의해 거의 초주검에 이르는 채찍질을 당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아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채찍질했다”), 절대 감당하기 쉬운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몽둥이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죽끈이 달린 이 채찍 끝에는 아주 날카로운 금속, 뼛조각, 유리, 돌 등이 박혀있어 죄수의 몸에 찍혀 그 살점을 뜯어내기 알맞았습니다.

 

3세기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의 이 잔인한 채찍질은 죄수의 핏줄을 다 드러내고 근육, 힘줄, 심지어 장기들을 외부로 드러나게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채찍에 맞는 과정 중에 사망한 죄수가 종종 있을 정도로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을 예수님은 발가벗겨져 기둥에 손이 묶인 채 채찍을 맞는 내내 참아내셔야만 했습니다.

 

유대인의 법은 39대를 넘지 않도록 제한했고 맞는 부위도 등과 어깨로 제한했지만, 로마법은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등, 어깨, , 다리, , 허리, 가슴, 엉덩이, 얼굴 가릴 것 없이 집정관이 그만을 외칠 때까지 계속해서 맞았습니다(50: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b. 군대의 모욕(27:27~44; 15:16~32) @관정

 

아마도 채찍질은 빌라도 총독의 온 군대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브라이도리온(15:16)이라는 관정 뜰 안에 약 600명에 육박한 군사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 예수님이 채찍에 맞는 피튀기는 장면을 UFC 경기를 지켜보듯 흥미롭게 관람했을 것입니다.

 

죄수에게 지속해서 채찍을 가하면 금세 쇼크가 오고 실신하기 때문에, 아마도 3~4대를 때리고 나서 능욕하고 조롱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예수님의 등에 홍포를 입히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게 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가 로마 군대 앞에서 얼마나 힘없고 초라한 존재인지 놀려댔습니다. 거짓으로 절하는 척하고, “평안하소서라고 희롱하고, 손에 쥐여준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c.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26)

 

군인들의 구타와 온갖 희롱을 받은 예수님은 이어서 사형 집행인(네 명의 로마 군병)의 손에 끌려 처형장을 향해 걸어가야 했습니다. 30분 정도 걸렸을 이 고난의 길행렬은 왕의 행렬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는 치욕스러운 장면의 연출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좁은 길목마다 서서 죄수를 구경하고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여기 유대인의 왕이 행차하신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란 사람의 꼴을 보라” “우리 로마를 대적하는 반역자의 종말을 보라, 이스라엘은커녕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는가이런 식의 조롱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의 머리엔 왕관 대신 가시면류관이 박혀있었고, 온몸은 갈기갈기 찢겨 피가 흐르고, 탈수증세와 약해진 몸으로 겨우 행렬에 따라 자기가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셨습니다.

 

빌라도 관정에서 성문 밖 처형장까지의 거리는 약 800m에서 1km,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밤새 심문받고 극심한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약 40kg 나 되는 십자가의 가로막대기를 목에 매고 그 길을 끝까지 가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친히 얼마큼 십자가를 매고 걸어가시다가 힘에 부쳐 돌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얼굴을 쾅 하고 부딪혔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은 죄수가 쓸데없이 동정받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매고 갈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와 있던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리비아, 당시엔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로마 군병에 의해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26).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53:8) 그가 이런 모욕을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 곧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d. 십자가(32~33) @골고다

 

마침내 그들이 이른 곳은 아람어로는 골고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불리는 곳인데, 그 의미는 모두 해골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죽은 수많은 죄수의 해골이 쌓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지만, 땅에서 솟아오른 언덕의 모양이 해골 모양이라서 그렇게 불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두 행악자가 사형을 받게 되어 함께 끌려 왔는데, 이들이야말로 정말 십자가형을 받기 합당한 흉악범이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이 그들과 같은 범죄자 취급을 받으셨습니다(53:12).

 

갈보리 오르막길에 다다라 시몬이 지고 온 가로막대기를 이미 그곳에 준비되어 있던 세로막대기에 부착하고 나서, 예수님은 발가벗겨져 그 십자가 형틀에 양팔을 벌리고 누워 양 손목에 못이 박혔습니다.

 

아마 양 발목에도 못이 박혔을 것이고, 그 발아래 작은 발 받침대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받침대는 죄수의 체중이 손목에만 쏠려 몸이 찢겨 십자가 아래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동시에 죄수가 발에 힘을 실어 상체를 들어 올려 숨을 쉬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오래 경험하게 만드는 잔인한 장치였습니다(22:16).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 병사 중 하나가 예수님께 쓸개(몰약)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일종의 진통제로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과정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15:23). 십자가의 고통을 맑은 정신으로 모두 다 받기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으로 단단하게 고정된 예수님의 몸은 지상에서 약 60cm~1m 정도 떨어진 높이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 발 앞에 선다면 서로 얼굴을 제법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망에 이르는 가장 큰 이유는 질식이었는데, 양 손목에 체중이 실리면서 팔이 늘어나고 어깨가 탈골되며 폐와 횡격막을 압박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수는 살기 위해 몸을 들어 올려 숨을 쉬려고 발에 힘을 주는데, 그러면 발목에 고정된 상처와 다리 근육에 극심한 고통이 더해집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팔, 가슴, , 다리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한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 방치된 채 며칠을 쉬지 않고 고통받다가 탈수와 영양실조 증세를 보이고 기력을 완전히 잃어 결국 다음 숨을 들이쉴 수 없어 질식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e. 십자가에서 받은 모욕

 

예수님이 바로 이런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셨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에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코앞에서는 모욕과 조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했는데, 관리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라고 모욕했고, 군인들은 그들이 마시는 싸구려 신 포도주를(69:21) 예수님께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비웃었습니다(37). 그리고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 신발, 터번, 속옷 등을 각각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22:18).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는데, 격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중 몇몇은 예수님 앞에 지나가면서 그 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 15:29~30).

 

유대 종교 지도자들, 군인들, 백성들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했습니다. 그들의 아비 사탄과 똑같은 말투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4:3, 6).

 

그들이 비난한 내용은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먼!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0:15, 18).

 

주님이 받으신 고통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53:5-6).

 

2. 주님의 심정(22:1~21)

 

빌라도 관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이 받으신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품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이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이 이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 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12:2)고 말했고, 베드로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 그리고 공의로운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22편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호소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조상)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자신)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22:1~21) 구원의 요청 그리고 신뢰

 

22~31구원의 확신, 고난 너머의 기쁨을 바라봄

 

우리는 예수님이 고통 중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 중 하나가 시편 22편이었고(27:46), 이 시편이 확실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 하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예수님은 이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1) 자기의 고통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2) 아버지의 구원을 요청하며, 3) 거룩하신 아버지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감당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수치스러운 모욕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 8)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3. 주님의 말씀(반응)(28-31; 34)

 

주님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육체적 고통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 중에 또 한 가지 가장 놀라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하게 맞아 고통스러울 때 또는 수많은 희롱과 욕설을 받는 순간에 참으로 놀랍게도 거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욕으로 되갚지도 않으시고, 고통 중에 짜증 섞인 호통을 치거나, 경고하지도 않으시고, 원망이나 두려움에 터져 나온 외마디 말도 없으셨습니다.

 

흔히 우리 몸이 심히 아프거나 많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때 가까운 사람들이나 원수들을 향해 우리 입에서 아주 쉽게 나올만한 말들을 예수님의 입술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하지만 주님은 입을 열어 몇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주님의 반응 즉 주님이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두 가지 말씀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고통 중에 주님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 반응입니다.

 

1. 나 말고 너희를 걱정하거라(28~31)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28).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여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자기를 따라오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슬퍼했다기보다 로마 군병에 의해 죽임당하는 유대인 죄수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슬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딱하고 안됐다고 느껴서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 흘리고 모욕받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앞으로 징벌의 날을 맞이할 예루살렘 백성을 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욱 구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29절부터 30절까지 하신 말씀은 예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며 경고하신 임박한 심판에 대한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21).

 

곧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된 징벌의 날이 닥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록된 말씀대로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29; 54:1). 한마디로 심판을 피해 목숨을 겨우 부지하려면 애가 없는 상태가 훨씬 유리한 심각한 상황이 예루살렘에 닥칠 것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한지 사람들은 산들을 보며 차라리 지금 우리를 덮어 우리 목숨이 단번에 끊어져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30; 10:8; 2:19,20).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게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물으셨습니다(31). 생명력 있고 열매 맺는 푸른 나무 같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면, 죽어서 말라버린 그래서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 같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더 극심한 심판을 내리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40년 후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포위되어 식량이 없어 자기 아기를 잡아먹고 굶어 죽고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등 약 110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중 약 만 명의 백성이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10만에 가까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딸린 식구(특별히 아기)가 있는 사람은 그날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빨리 죽기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안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그 무서운 징벌의 날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통곡하시기도 했습니다(13:3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극심한 고통 중에 죽음으로 가는 길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닌 자기 백성의 안위를 돌아보셨습니다. 너희가 당할 고난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키라.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 너희를 위해,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

 

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34)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해서만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두 번째 말씀이자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가상칠언) 바로 이것입니다(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하는 군병들과 관리들, 서서 구경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죽인 원수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 대못을 박은 군병, 자기 속옷을 벗기고 겉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경비들, 욕하고 비웃은 백성들, 자기를 이 죽음까지 오게 한 교만하고 완악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아무런 분노의 말도 쏟지 않으셨습니다.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너희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하신 말씀,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대신 아뢴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죄를 범하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반역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사해진 것은 죄가 그만큼 덜 심각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 대신 그 죄의 징벌을 다 지시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5:44). 예수님은 친히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15:12)

 

서로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3:13)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기 힘든 원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기 힘든지, 용서하기 어려운지 계산하고 따지지 마십시오. 다만 주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셨는지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도리어 백성의 안위를 돌보신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원수를 위해 도리어 용서를 빌어주는 한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깊이 묵상해볼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아무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옮겨간 시몬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며 이 시몬의 아들 루포를 가리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라고 부릅니다(16:13). 이로 봤을 때, 시몬은 아마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들 루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까지 숨차게 십자가를 들어 나르고 그 무거운 통나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시몬은 어쩌면 두손을 털고 유유히 내려가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 다행이다. 내가 이 십자가를 옮기기만 했지, 실제로 여기 못 박혀 죽을 저주받은 사람은 아니라서

 

하지만 시몬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뒤에 피 흘리며 온갖 조롱을 받고 따라오던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이것이 우리가 주를 영원히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을 붙잡고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어떤 원망이나 불평, 염려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굳건한 신뢰 그리고 철저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어떤 힘든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고통의 행렬 가운데 철저한 침묵을 유지하셨지만, 그중에 입을 열어서 하신 말씀을 통해 백성과 원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형제 사랑이며 원수 사랑입니다. 주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합시다. 주가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합시다.

 

 

 

구세주와 함께 못박힌 두 죄인 /23:39-43/ 조정의목사

2020-09-19 13:21:00

 

오늘 우리는 영혼의 구원자이자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두 죄인의 마지막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들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금요일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달린 그들은 여섯 시간 후에 다리가 꺾여 사망에 이릅니다(19:32).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말아 달라는 유대인의 요청에 따라 빌라도가 군인을 시켜 그렇게 한 것입니다(19:31-32). 체중이 실린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다리가 꺾이면 숨을 들이마실 수 없기 때문에 몇 분 만에 질식하여 죽게 됩니다.

 

이렇게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것 외에도 두 죄수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먼저, 둘 다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행악자”(범죄자)라 부르고(23:39), 마태와 마가는 강도”(27:38; 15:27)라고 부릅니다. 사람, 특별히 여행자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이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자로 빌라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수로 갇혀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십자가형이라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을 정도로 확실한 악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결코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둘 다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한편 그들 가운데 함께 못 박힌 예수님은 확실히 무죄 판결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십자가에 넘겨줄 때까지 계속해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판결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고 기록된 구세주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22:37; 53:12). 예수님은 무죄한 분으로 두 사람이 저지른 죄와 같이 많은 사람의 더러운 죄를 담당하시려고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26:28; 9:28).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유대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에게 여간해선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들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죄목이 죄 패에 적혀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23:38).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하며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예수님의 죄명을 적었습니다(19:21~22). 로마의 라틴어, 당시 문화권에서 주로 사용된 헬라어 그리고 아마도 유대인이 사용했던 아람어까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썼을 것입니다(19:20).

 

두 죄수가 고개를 돌려 그 죄패를 보면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유대 민족이며 나아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른 유대 민족 지도자들이나 백성, 로마 사람들, 그리고 십자가 옆에 달린 두 사람 중 그 어느 하나 예수님이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27:44).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하라고 조롱했을 뿐입니다(15:32).

 

유대인으로서 심각한 죄에 대한 처벌로 사형 집행 중이던 두 죄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곧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순간부터 그들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숨쉬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천천히 죽음이 점점 그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그 죽음은 모든 사람에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여섯 시간 후에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말입니다.

 

흉악한 삶을 산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그들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이 죽음 이후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 그것이 주는 진짜 공포는 이 땅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나 어디로 가는가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갈 곳은 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의 장소, 지옥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를 종종 스올이라고 부릅니다(참고: 16:30; 32:22).

 

한편 두 사람이 바라볼 때 가운데 달려 있던 예수님 역시 죽음에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온몸이 찢기고 머리와 양손과 발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육신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여섯 시간 후 두 죄인이 다리가 꺾여 죽었을 때 예수님은 다리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19:33)

 

두 사람은 죽음 너머 영원한 지옥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형벌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자리였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23:46)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셨고(10:40) 지극히 높여 하늘나라 하나님 우편 곧 만민을 다스리는 자리에 앉히셨으며(1:20; 3:1) 빌립보서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2:10).

 

유대인의 왕예수님은 죽음 그 이후에 참된 왕권을 가지고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 로마인, 그리고 모든 민족과 만민을 다스릴 왕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왕국을 이 땅에 가지고 내려와 실현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에 조롱하듯 적혀 있는 유대인의 왕 예수를 하나님께서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또 만민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각각 매달려 있던 두 사람. 그들은 죄를 짓고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에 떨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종점에 거의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형벌을 받고 계신 예수님, 그 이름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나신 분(1:21), 죽음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실 참 유대인의 왕이자 만민의 왕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일평생 죄를 지으며 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는 그때, 그들 인생에 있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엄청난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구세주가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예수님이 그들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운명을 바꿀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함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되 40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니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니라

 

1. 한 사람의 반응: 비방(39)

 

여기 한 사람이 먼저 이렇게 구세주께 반응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

 

이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군병들, 백성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비방한 것입니다(23:35~37).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에 예수님은 절대 그리스도일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여기서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죄인을 가리킵니다) 구원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그럼 어디 한 번 너를 구원하고 덩달아 우리도 같이 구원해 보시지. 그럼 내가 믿겠다. 그런데 그렇게 못 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네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니 얼마나 우습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주장이란 말인가?

 

이런 식의 반응이었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가 이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이 죄인처럼 자신이 어느 정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죄의 삯인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두신 양심으로 인해 죽음 그 이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9:27).

 

그런데 영원한 심판에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에 관한 소식 즉 복음을 들어도 그들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소리처럼 들립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발소리가 들리고 있는데도 구원자 예수님에게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던 사람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오직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면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습니다. 그 비방 속에서 강도의 주요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강도는 영혼의 구원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목숨을 건지는 것 하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좋은 밭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 때문에 복음의 씨가 그 마음 밭에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8:14).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안개처럼 사라질 이생의 삶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서 구세주가 주시는 영원한 영생의 복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마치 정신없이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기를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승무원에게 비행기에서 마실 음료수를 가져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죽음 그 이후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이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데도 구세주에게 구원을 간청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원을 요구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정말 그리스도냐라고 비방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죽은 한 비참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좋게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다. 도덕적인 모델이다. 세계 사대 성인 중 하나이며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의 본이 되신 분이다. 인격이 훌륭한 스승이다그러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억울하게 죽었다. 죄 없이 죽었다.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었다. 십자가 위에서도 사랑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이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며 그리스도로 죄인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그 이유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죄패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을 당혹게 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의 모델이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내 영혼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자가 자기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한 이유였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구세주를 거절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온통 이 세상의 것에 있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2. 또 다른 사람의 반응: 간청(40~42)

 

여기 또 다른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도 처음엔 앞의 한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욕했습니다(27:44; 15:32).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자칭 유대인의 왕 예수를 보며 비웃었는데, 그 예수가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의 고백에서 우리는 그의 참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A) 먼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40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는 자신이 십자가라는 끔찍한 처형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임에 틀림이 없고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구원 받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다이런식으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는 이들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십자가에 달린 강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분명히 판결 내립니다(3:23).

 

당신이 진정 구세주의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먼저 당신의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 철저히 깨닫기 전에는 당신은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B) 둘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보았습니다.

 

 

41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사람은 단순히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가 조금도 없을 수 있습니까? 사대성인 중 한 사람? 훌륭한 스승? 인격의 완성자? 도덕적인 스승?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시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당신이 멸망으로 향하는 인생에서 구원받기 원한다면 반드시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세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선생으로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도덕적인 모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준 성인으로도 부족합니다. 당신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죄 없이 죽은 당신의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기 옆에서 똑같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죄 없는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 미련해 보이는 구원의 방법을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죄 없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의 죗값을 치르게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가능합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셨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4:25).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가 은혜로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라는 것을,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에 관해 이해하고 있었는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1)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2)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받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3)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C) 그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참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나라가 지금 여기에 바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시작될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사라질 분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자기 나라를 차지할 왕이 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하기를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라고 구한 것입니다.

 

더불어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구원을 간청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여~”라고 예수님을 친밀하게 부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구원의 정통 교리를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편지하면서 자신이 받고 전파한 복음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믿었으며 그 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아직까지 예수님께 이 간청을 드리지 않은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저주 받을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영원한 저주를 향해 날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유일한 구세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왜 구세주께 당신의 영혼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으십니까? 왜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이 땅에 정신이 팔려 살다가 영원한 지옥에 빠지려 하십니까? 왜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황하십니까?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그러면 찾아낼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7:7~8).

 

십자가 위의 두 행악자는 동일한 조건과 상황 가운데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숨이 끊어지기까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약속(43)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 곧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이 다시 부활하여 만민의 왕이 되실 것이라 믿은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아멘) 너에게 이르노니.” 이것은 강조입니다. 내가 확실히 말하는데, 분명히 말하는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됩니다(고후 1:20).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한 죄인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이 아닌 바로 오늘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페르시아어로 정원을 가리키는데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서 동산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막힘 없는 교제, 죄가 없었던 아름답고 행복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의인이 죽음 이후에 이 낙원에 거할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의인 아브라함도 거기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는 표현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16:23).

 

쉽게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 바로 낙원입니다. 몸의 부활은 나중에 일어나지만,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죽음 이후 즉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를 믿고 구원을 요청한 죄인에게 그 순간 바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던 그가 한순간에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들 모두가 이 죄인에겐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짓고 결국 십자가에서 사형당할 정도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행악자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인생 대반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옆에서 자기 죄를 대신 지고, 자기가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심장이 뛰고 있는 한 그리스도의 초대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384p). 그는 심장이 멈추기 몇 시간 전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4. 결론: 그들의 운명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유평교회 계속해서 참석 중인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 않고 있는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기도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시간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놓친 인생 최고의 기회를 영원히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유대인의 왕이요 만민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잡은 인생 최고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안개와 같이 금방 있다가 사라집니다.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옵니다. 예상하지 못했을 때, 아니 예상하였더라도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종종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성도님의 믿지 않는 가족을 방문할 때가 있는데, 그때 저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 생각이 납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제발 하나님을 붙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께 구원을 간청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을 마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처럼, 금방이라도 찾아올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 옆 두 죄인처럼 바라보며 애타는 마음으로 요청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구하십시오. 더는 지체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빠져 영원한 운명을 바꿀 기회를 차버리지 마십시오. 의식을 잃고 침상에 누울 때까지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죄를 직시하십시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죄가 없는 그분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영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구세주를 영접한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이 줄어드는 삶을 볼 때 우리가 또다시 이생에 눈을 두고 살고 있구나! 가슴을 쳐야 합니다. 또 내 사랑하는 가족, 친척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처할 영원한 운명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십자가의 강도처럼 그들이 빠르게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영원한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복음이 여러분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까? 가서 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주는 세가지 의미 /23:44-56/ 조정의목사

2020-09-19 13:17:26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장면(44~49)과 묻히시는 장면(50~56)을 살펴볼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게다가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까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다닌 적이 없는 분들에게 스포일러를 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들도 예수님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떻다는 것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마지막 이야기를 잘 압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단순히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신 장면을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세 가지 의미를 발견하기 원하는데, 첫째는 역사적 의미이고, 둘째는 신학적 의미, 마지막 셋째는 개인적 의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원합니다(누가의 본문 기록 목적).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과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는가? 마지막 세 번째로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천년 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묻힌 예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확실히 알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 역사적 의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먼저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무엇이 팩트인지 체크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실에 입각한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면 신학적 의미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의 기록이 얼마나 사실에 입각한 기록인지, 역사적으로 확실한 기록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장에 가면 고인의 마지막 장면이 어땠는지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직접 본 유가족들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때로는 돌아가실 때 주변 상황이나 분위기가 어땠는지도 설명합니다.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이 많을수록 이야기는 분명해집니다. 그들 모두는 고인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입증해줄 수 있는 강력한 역사의 산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면밀히 조사해순서대로썼다고 말하는데(1:3, 우리말성경), 그의 말처럼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 장면을 눈으로 본 증인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증인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현상을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경험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44절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육시 즉 정오(12)부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보통 낮 12시에는 태양이 오히려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기 시작하고 제구시인 오후 3시에는 절정에 이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때문에 마치 해가 그 빛을 잃은 것처럼 컴컴한 암흑이 예루살렘 성 전역을 덮는 것은 자연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코 일어날 리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유월절인 3-4월은 일식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고,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세 시간 동안이나 일식이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참고. 10:2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20087월 유평교회 예배당에서 결혼을 했는데, 하객이 많이 참석하여 평소보다 더 세게 에어컨을 풀가동하였습니다. 그러자 과부하에 걸려 전기가 끊기고 사람들은 부채질하고 아주 많이 더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더운 여름 그것도 한낮에 에어컨이 망가졌던 그 특별한 일 때문에 저의 결혼식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수많은 죄수 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분명히 기억하게 하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었으니 바로 세 시간 동안 칠흑같이 흑암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기이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목격한 증인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는 47절에 나오는 로마 군병 백부장이(로마소속 군인) “그 된 일을 보았고, 4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경하러 모인 무리가 있었습니다(대제사장들, 장로들, 유대인 백성). 그리고 49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아는 자들즉 가까이에서 따르던 무리(제자들), 특별히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역시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습니다(49; 27:55).

 

이들은 단지 불특정 다수의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49절에 언급된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또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27:56; 15:41).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증인(그중에 이름이 분명히 언급된 증인을 포함하여)에 의해 목격된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묻히심에 대한 증거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죽은 사람이 묻힌 무덤은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며,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증표가 됩니다(참고. 2:29,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다”,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 역시 이런면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물어본다면 그 무덤에 가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처형된 범죄자는 보통 무덤에 묻히지 않고 다른 죄수처럼 골짜기에 버려져 짐승의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월이 지나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이 모두 죽고 나서 후에 누군가가 예수가 정말 죽었는가?”라고 묻는다면 확증할 수 있는 시신 또는 그 시신이 묻힌 장소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한 사람을 통해 해결하셨는데, 그의 이름은 아리마대의 부자요셉이었습니다(27:57). 50절을 보십시오.

 

50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은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 의원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그가 예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이를 숨겼다고 말합니다(27:57; 19:38).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누가가 초반에 소개했던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메시아의 영적 왕국을 기다렸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그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공회에서는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당돌하게”(15:43) 그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차마 주님의 시신을 길거리에 버려진 짐승 밥이 되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이 정말로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 그 후에 예수님의 시신을 내주었습니다(15:44~45).

 

 

52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절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받아 (아마도 물로 씻기고-베드로복음) 깨끗한 세마포로(고운 베옷) 시신을 쌌습니다(27:59). 그리고 자기 소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었습니다(27:60).

 

누가의 이 표현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요한은 새 무덤이라고 말합니다(19:41).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유대인, 특히 부유한 사람의 무덤은 큰 바위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굴을 만들어 여러 시신을 보관할 수 있는 각각의 공간을 만드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가족들이 앞으로 묻힐 가족묘였을 것입니다.

 

굴 안에 시신을 두고 향료와 향유를 듬뿍 발라 몸이 부패하면서 나는 냄새를 덮고, 살이 완전히 썩으면 유골함에 뼈들을 모아 단지에 보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가족 납골묘와 비슷합니다. 단지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것과 먼저는 그 안에 시신을 보관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무덤에 다른 시신이 있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여러 시신이 있어 예수님의 시신과 혼동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 무덤은 오직 예수님의 무덤이었습니다.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 하나만 놓여 있었습니다. 이 말은 이 무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랜 시간 확실하게 증명해줄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어느 날 이 무덤이 비어있는 채로 발견된다면, 수많은 시신 중 누구일지도 모르는 시신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이었습니다. 누가 훔쳐 갔거나 혹은(스포일러).

 

또 한 가지 요셉이 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는 것을 본 증인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주 많은 증인이 예수님의 묻히신 장소에 찾아왔습니다. 먼저 누가가 55절에 기록한 것처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56절에 말하고 있는데 시체에서 나는 썩은 냄새를 덮기 위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 적용되는데,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3시간 후인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었습니다(54). 안식일에 유대인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야 했고 특히 부정한 시신 곁에 가는 것은 더욱더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향품과 향유를 충분히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안식일 후 그 일을 하려면 어디에 예수님을 묻는지 확실하게 장소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따라 예수님의 무덤을 따라온 것이고 예수님이 묻히시는 곳과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본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지킵니다(56).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오는데

 

이 여인들 외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또 다른 숨은 제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드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30kg) 가지고 찾아왔습니다(19:39).

 

게다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이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혹시라도 제자들이 시신을 몰래 훔쳐 가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 증언할 수 있으니 경비병을 무덤 앞에 배치해달라고 요청합니다(27:62~66). 그래서 대제사장, 바리새인, 경비병 모두 그 무덤에 찾아가 큰 돌로 막힌 무덤에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킵니다. 예수님이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누가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진실로 죽으셨고 진실로 묻히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본 사람이 너무 많았고 잊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묻히심을 입증할 증인과 증거도 충분했습니다.

 

2. 신학적 의미

 

,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증했습니다. 2003년 댄 브라운이 쓴 허구 소설 다빈치 코드나 유명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보통 사람처럼 남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팩트 체크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셨다고 확증하고 있으며,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조차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처형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한 죄인이 죽었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에 의해 무덤에 묻혔다는 게 아무리 사실이더라도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일부로 신학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신학곧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특별히 구원자로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통해 하려고 하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 중 45~46절의 기록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제육시로부터 시작된 암흑으로 돌아갑니다. 제구시까지 계속된 암흑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그 주변을 완전히 뒤덮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암흑이 태양마저도 인간의 손으로 행한 행위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지만, 구약의 기록을 보면 암흑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의미합니다(2:10, 30~31; 3:15; 8:9; 1:15).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를 둘러싼 흑암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계신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나무에 달린 죄인 예수에게 쏟아졌습니다. 창세로부터 종말까지 많은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지옥 심판이 예수님에게 내려졌습니다.

 

이 흑암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이 퍼부어졌기 때문에 마태와 마가의 기록처럼 예수님은 이렇게 크게 소리 지르셨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15:34).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실 때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죄인으로서 영원 전부터 누렸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찢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45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일종의 커튼으로 길이가 15m 정도이고 두께가 약 10cm 정도의 두꺼운 천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장소로 하나님의 율법이 담긴 언약궤가 있던 자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어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일 년에 단 하루만 그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많은 사람이 성전 안쪽 지성소에서 휘장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마태의 증언처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면 큰 소리가 들릴법합니다(27:51). 들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 이들은 아마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느 날 큰 소리가 나서 보니 이 강대상이 둘로 쪼개지거나, 앞에 있는 만찬상이 둘로 쪼개졌다면 우리 마음이 어떨까요?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둘로 찢어지는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가로막은 휘장이 동시에 찢어졌다는 것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그 죽으심을 증명하는 묻히심이 주는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이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담대히 휘장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많은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속건제가 성전에서 드려졌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역할은 이제 종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때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순종과 희생의 참 번제물이 되셨고, 헌신과 섬김의 소제가 되셨으며,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가져온 화목제가 되셨고, 많은 사람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씻어낸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화해하며 죗값을 온전히 배상하는 속건제물이 되셨습니다.

 

유월절 수많은 어린양이 바쳐진 성전 그 밖에서 참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이제는 더이상 양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19~20)

 

단번에 영원히 죄인을 향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었을 때 말입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이 숨지기 전에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원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셨지만, 마지막으로 크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이 유언은 다윗이 시편 315절에 기록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를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로 인해 고통 중에 있을 때, 고난 중에 영혼과 몸이 쇠하여졌을 때 주의 공의에 의탁하며 구원을 요청했던 시편입니다(31:1, 7, 9).

 

후에 이 유언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들었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유언에 대해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벧전 2:2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공의로운 아버지께 자기 영혼을 부탁하시고 구원을 요청하셨으며 그러고 나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취하셨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0:15, 17~18)

 

예수님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셨고 이를 기뻐하셨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믿는 마음으로, 그분이 다시 얻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리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3. 개인적 의미

 

,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묻히심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라면,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을 주목해볼 차례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가져온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47절에 백부장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백부장은 또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27:54). 48절에 구경하러 모인 이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그들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우리의 반응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은 죄인이 가슴을 쳐야 할 일입니다. “아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저와 여러분에게 새로운 숨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전부터 누리던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랑이 둘로 쪼개졌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쪼개진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흑암이 덮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받아 죽었을 때, 우리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을 앞에 두고도 망설이고 계신 분이 있다면, 더이상 망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 입어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위해 치르신 희생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위대합니까? 친구를 위하여 것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15:13). 가장 고귀하고 흠 없는 보배로운 생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예수님, 그분을 믿으십시오(벧전 1:19). 이 놀라운 사랑을 거절하는 무서운 죄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3:18).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신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여전히 주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합니까? 만찬을 대할 때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십니까? 정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있고 중요하단 말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 이런 작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가 절대로 잊지 않고 날마다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가 됩시다.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23:39-43/ 오주철 목사

2016-04-08 15:41:48

 

오늘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은 우리 언양 영신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1,492년까지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던 지브랄탈 해역에는, '네블루스 울트라'라는 라틴어의 세 글자로 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NO MORE BEYOND'인데, 이 말은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스페인 사람들, 그리고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구는 여기에서 끝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가 끝이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람이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저 건너편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지구의 끝, 그리고 참담한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지구의 끝을 넘어서서 거기에 미지의 새로운 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표지판은 바뀝니다. 사람들은 첫 글자를 뗐습니다. '네어' 라는 단어를 빼버렸습니다. 네어가 영어로는 노(No)입니다. NO라는 단어가 빠지니까 이제는 'MORE BEYOND', 그러니까 "저 건너편에는 많은 것이 있다! 놀라운 것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음 앞에 서서 우리는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현상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로 불리는 하버드대학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는 연구팀을 만들어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합니다.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던 사람들, 우리가 보았을 때 죽었던 사람들, 그런데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의식 세계만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연구했습니다. 그가 쓴 책은 학문적으로 어렵지만 그의 조수들이 쓴 책들은 세상에 많이 소개가 되었습니다.

 

죽음 건너편에 뭐가 있는가?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던, 아니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했던, 그래서 이 사람은 이미 생명이 끊어졌다고 선언을 했던 사람들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드문 경우들을 연구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돌아왔는지를 연구합니다.

 

이때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악몽을 경험하고 옵니다.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현상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돌아옵니다.

 

그것은 터널을 잠시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의 세계에 잠깐 발을 디뎌 놓는 순간 너무너무 좋았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할만한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도 천국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반반 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던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한다면 준비만 했었다면 갈 수 있었던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그래서 자기를 도박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죽기 직전에 극적으로 죽은 이후에 천국이라는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더불어 양쪽에 두 사람이 매달려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강도였고 행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마음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죽어가면서 저주하고, 죽어가면서 욕설을 퍼붓고, 죽어가면서 몸부림을 치는 그를 향해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한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그 정죄를 받고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우리 가운데 매달린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옆에 매달린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때 예수님은 역시 똑같은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거야.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서 깨어 날거야"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병을 앓고 거의 죽어 가는 분에게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권면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강도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사람은 아파도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까? 선생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겠죠."

이분이 마침 은행계통에서 일하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 지점장도 많이 하셨죠?"

",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뉴욕은행의 지점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지점장으로서 본부의 지시와 전혀 상관없이 마음대로 돈을 쓰시고, 그리고 본점에 하나도 보내지 않고 다 쓰셨으면 그런 사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강도겠네요?"

이때 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것이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강도가 아닙니까? 자기 이기심의 만족을 위해서, 내 작은 이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만이 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강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이 아침에 여러분과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는 슬픈 소식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강도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강도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을 기독교의 용어로 말하면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천국을 보장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0절에 보면 강도 한 사람이 다른 강도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41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처형을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강도로서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에 해를 끼쳤을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죄값이다는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은 분명한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여기 서 있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사람들은 의인을 말합니다. 영웅을 말합니다. 성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견해일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내 심장을 꿰뚫어보시고 겉으로 표출된 내 행동의 배후에 있는, 내 삶의 동기를 살피시며 가장 은밀한 곳,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었던 내 삶의 모든 모습을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이 땅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예수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의사야, 나는 병자를 위해서 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아픕니다. 여기가 아픕니다. 막 쑤시고, 결립니다." 이것이 정확한 진단에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건강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용서받은 자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첫째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 강도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옳아. 좀 원색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죽는 것이 싸. 강도질하고 살아왔던 인생, 나를 위해서만 살아왔던 내 인생은 이렇게 죽어도 마땅해, 나는 죄인이야. 우리는 정죄된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천국을 보장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그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회개한 강도의 부르짖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본문 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강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두려움,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이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그가 죄를 범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가 나를 심판하신다, 내 말도 심판하고, 내 행동도 심판하고, 내 의식과 생각까지도 심판하신다.

 

내가 쏟아놓은 모든 말, 내 모든 행동들이 어느 날 나의 창조자이신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심판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믿는다면 죄를 짓겠습니까?

 

시편에 보면, 시편 기자가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보셨나이다. 나의 생각을 통촉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행동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내가 하늘 저 높은 곳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저 음부의 깊은 곳에 가서 눕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 바다 끝으로 새벽날개를 치면서 가서 거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나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인생을 지어 만드신 창조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데.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불꽃같은 안목으로 나를 꿰뚫어 보시고 내 깊은 생각의 밑바닥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이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입니다.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주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경외라고 말합니다.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진지한 회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의 어떤 공적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인생을 살면서 조금 잘해놓은 일, 내가 조금 한 자선사업,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 번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처럼 우리가 해야할 세 번째 일은 예수님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께 매달려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다니고 핍박을 받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강도는 그 예수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오늘 이 말을 기독교인들은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으실 때 두 번째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전에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골고다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몸부림치면서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예수를 향해서 야유와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군중들과 로마의 병정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때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옆에 있는 강도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분은 남을 용서하고 있다. 자기를 저주하고 못박은 원수들을 용서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의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고통이 너무 심하면 다른 생각을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한 때 저도 이것을 경험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경희의료원에 40여 일을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때 일리자로프라는 기구를 차고 있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40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 본 것은 4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마약에 가까운 진통제를 맞고서 잠을 잤습니다

 

. 거의 매일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데, 제 머리에는 그저 "아프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극한의 고통에 이르게 되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 밖에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의 극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옆에 있는 강도에게 충격을 준 것입니다.

 

아니 저 분이 누구야? 그 동안 세간에 떠돌던 소문처럼 저분이 메시아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계신 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올 수 있는 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 그렇다면 저분이 나를 용서해 주신다면, 지금 저들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저 분이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나도 용서받고 저 천국 그분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말을 바꾸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제는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를 위해서 매달립니다.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그리고 예수님을 용서할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방금 전에 예수님의 용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격렬한 고통과 저주와 야유와 조롱을 받고도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기보다도 이웃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저 분은 메시아다, 맞았어, 약속된 메시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이시는 바로 그분이야,

그렇다면 내가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잎새 같은 최후의 소망, 그 소망을 예수에 걸고, 옆에서 같이 고통을 토하지만 자기와 전혀 다른 그분을 향해서 외칩니다.

 

"주 예수여,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은 낙원입니다. 파라다이스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라다이스를 말했습니다. 이상향을 말하고 유토피아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도 유토피아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진정한 낙원, 우리가 그리던 그 이상향, 우리의 꿈,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소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 진정한 나라, 천국은 낙원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저는 예수님이 없으면 천국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분,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이 있어서 천국은 진정한 파라다이스일 것입니다.

 

이민을 간 우리 한국의 교포들 가운데는 친척들이 모두가 미국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 별로 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조국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신 예수님, 우리를 사랑해주신 예수님,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내게 꿈을 주시고, 내게 기쁨을 주시고, 노래를 주시는 그 예수님,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강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회개하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무나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내 생명이 끝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얼마나 평안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맞아! 나는 그 분의 낙원에 저 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야. 그 낙원에 있게 될 것이야."

 

물론 저는 이 강도에게도 후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을 일찍 만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나는 강도가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인생을 헛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은혜였습니다.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그 강도의 심장이 멎는 순간 그의 앞에는 낙원으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려져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복음성가에 보면, 한 눈먼 사람이 소리치며 찬양할 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디가 길이--? 어디가 길이--? 어디가 길이--?

말해다오--"

 

인생을 사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로 가는 그 길이 어디냐?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의 죄 많은 인생, 그의 허물 많았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보장받고 마지막 순간에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이 강도, "네가 말이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어떻게 말입니까?

 

그가 자기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저를 구원해 주시구요. 당신의 나라가 올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은 이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그의 심장이 멎는 순간 이 밝은 길을 통해서 주님의 품안에 안기는 그 순간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죄송해요 주님, 잘못 살았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염려 마라. 이제는 다 잊어버려라.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거야. 영원히 나와 같이 여기 있는 거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는 구원받은 강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바로 내 이야기이어야 합니다. 죄 많은 인생, 허물 많았던 내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주님께서 천국에서 나를 맞아 주신다.

이것은 먼 훗날, 아니 잠시 후에 주님 앞에서 섰을 때에 고백하게 될 우리의 노래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특징 /23:40-43/ 앤드류 머레이

2015-06-22 23:20:20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1. 첫째, 깊고도 절대적인 겸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교만한 것은.. 모순이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겸손한 사람만 그게 가능하다.

 

또한 죄에 대한 죽음이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지극히 복된 증거가.. 겸손이다.

 

이렇게 겸손은 자기를 깨어지게 한다.

깨어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 높이 나타내도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해진다.

 

2. 무력함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전적으로 무력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육적으로 너무 강하고

일을 할 때 분투하며 다툰다면

그리스도의 복된 삶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힘이 내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무능력을 철저히 깨닫기에, 부활의 주님을 의지한다.

 

3. 안식 새로운 관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었다.

무덤은 최고의 안식처이다. 무덤에 누운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윗은 내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16:9)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함께 무덤 속으로 내려간 사람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사람은)

"내게는 오직 하나님만 계시니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나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내 육체는 주 안에서 안식한다.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이루실 일을 기다리며

안식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죽음, 무덤에 장사되는 것

3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임을 기억하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주님의 고귀한 말씀도 기억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나사로의 무덤 옆에서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무덤 옆이다.

믿는 중에 죽음 속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임할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비록 내안에는 죄밖에 없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내영혼의 생명이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라고 큰 목소리로 선포하시라.

 

4.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강도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를 보면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십자가의 강도를 보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마음!

 

십자가의 강도에게서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된 마음이 보인다.

 

강도는 겸손히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그는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있었고 구경꾼들은 그 옆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도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다. 내가 고통당하는 것은 정당하다.

나는 십자가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했다.

 

5. 지성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끔찍하게도 죄의 저주가 우리의 지성에도 임했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죽어야 한다.

 

내가 볼 때에, 교회에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지성과 육적 지혜와 문화와 세련된 정신을 의지하는 것이다.

 

세상의 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오히려 복음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세상으로 가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지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6. 우리 마음의 애정도 죽어야 한다.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사랑은 지극히 아름답지만

이런 본능적 사랑은 성화되지 못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살리셔서

성화된 사랑으로 되돌려 주실 것이다.

 

종종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셨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즐기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라고 내게 묻는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질 때 좋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늘 잊지 말고, 우리의 애정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해야 한다.

 

죄의 저주가 모든 것에 임한 것이 사실이다.

죄의 어두운 그림자가 모든 것들 위에 드리워져 있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들 위에도 말이다.

그것들이 거룩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야 한다.

 

주님과 함께 죽은 강도에게 주어진 특권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

"주 예수님 주님의 죽음의 능력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라. 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려라. 반드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의 삶을 살려면 주님의 능력 안에서 죄에 대해 죽어야 한다.

주님이 죄에 대하여 죽으셨으므로, 당신의 영혼이 주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

주님이 이 놀라운 일을 이루시도록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 강도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다. 23:43

 

이 약속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주님과 교제하는 약속이다.

둘째. 죄 때문에 인간이 쫓겨난 낙원에서 영원히 안식할 수 있다는 약속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시라! 십자가 강도의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회개한 강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과 이 강도의 차이가 무엇인가?

강도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산다면

우리는 날마다 낙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앤드류 머레이,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중에서-

 

...........................

 

십자가에 자아가 죽은 사람의 예

 

중국 용정시에 속한 노투구라는 곳이 있고 그 교회에 노투구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새로 지어 그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필자(중국선교사)1992년도에 노투구에 갔을 때에는

그 교회와 노 권사님의 간증을 직접 들은 일이 있습니다.

 

문화 혁명이 시작되어 교회가 홍위병들에게 폐쇄를 당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투쟁 할 때에

노 권사는 젊은 여자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예외 없이 붙잡혀서 투쟁을 받습니다.

 

예수쟁이, 미신 쟁이라고 푯말을 목에 걸고 고깔모자를 크게 씌우고,

앞뒤에 예수쟁이, 미신 쟁이라는 글을 쓰고,

줄로 묶은 후에 시가지를 끌고 다니면.. 철없는 아이들이 돌을 던집니다.

 

돌에 맞아 피가 나고, 침을 뱉음 당하고, 욕을 먹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돌이 머리에 맞지 않고 다른 신체에 맞은 것이요,

또 하나는 돌에 맞아 피가 흘러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간증을 합니다.

 

그 후에도 하루 종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서서

예수쟁이, 미신 쟁이라는 푯말을 걸고 서서 있으며

지나가는 사람의 욕을 받고 있었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생산대에서 일 할 때에도

자기는 닫혀진 교회 문 앞에서, 주일마다 혼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생산대에서 붙잡아다가 다시 투쟁을 합니다.

당신은 주일날에 일을 안 하니, 다른 사람보다 52일을 일을 덜하니,

생산량이 그만큼 떨어지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며 투쟁을 당할 때에도,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주일날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야 하고

생산량이 떨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일에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열심히 일하니

일년 통계를 보니 다른 사람보다 생산량이 훨씬 많은 것을 본 후에는

공산당들도 주일날 일 안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

 

 

 

 

 

용서 /11:1-4, 23:34/ 이동원목사

2014-12-04 15:19:56

 

5월 다시 가정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우리 시대의 명화 글래디에이터 중에서 검투사 막시무스와 더불어 또 한명의 주인공이었던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가 절규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황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한 황제의 아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아들 코모두스의 절규 말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언제나 네 가지 덕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지혜, 정의, 용기, 절제를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 모든 것을 지키고 싶었고 신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사랑을 그리고 인정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안고 따뜻한 말 한마디만 주셨더라도 그 말은 저에게 태양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아버지는--”

 

이렇게 절규하며 그는 조용히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와 용서하지 못한 아들의 상처가 만들어내는 비극적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물론 이 장면은 역사의 사실과 달랐다는 비평이 많았습니다만,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연출되는 비극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우리들 가정의 보편적 경험임을 누가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시대의 자녀들이 그들의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돈과 잔소리로만 그들을 키워온 부모를 용서할 수 만 있다면,

아니 거꾸로 우리 시대의 자식들에게 가슴 아픈 소외를 경험한 부모들이 그들의 불효자식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 가정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 시대의 아내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속물 남편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아니 거꾸로 우리 시대의 남편들이 자신들에 대한 용납을 거절한 새 시대의 아내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 가정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문제는, 그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한 가정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용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고, 그 분의 거룩한 모범적 습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용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1. 인간의 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생의 결론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다름 아닌 그분의 용서의 실천의 마당이셨습니다. 그는 인류의 용서 곧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씀도 바로 용서의 말씀이셨습니다.

 

본문 눅23:34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우리는 이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에서 우리의 이웃들을 용서하기 위한 중요한 마음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 된 인간의 무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타임 머쉰을 타고 이 천년전 골고다의 언덕에 올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던 로마의 병정들에게 당신들은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고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안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몰랐단 말입니까? 그들이 과연 그들이 지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알았단 말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임을 알았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전2:8에서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행3:17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도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몰랐다는 무지가 그들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의 무지를 용납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별수 없는 이기적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의 잘못을 정당화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의 잘못된 행위 그 자체를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 때문에 별수 없이 행하는 그 연약함을 이해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에 의해 도무지 용서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흔히 그들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그럴 수도 있지. 죄인이기 때문이지”-하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죄인 된 인간 무지의 이해-그것이 바로 용서의 출발점임을 잊지 마십시오.

 

2. 용서의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아무리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용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대하여 유일하게 타당한 우리의 반응은 순종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은 느낌이 들거든 용서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 혹은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정서적 느낌을 넘어서서 용서가 주님의 명이라면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의지적 반응이 곧 순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가장 보편적인 출발점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누가 11장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소위 주기도를 가르치면서 그 무엇보다 용서의 기도를 실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2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4절 주기도의 절정에서 어떤 기도를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무엇보다 필요한 것-그것이 바로 용서라면 지금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교훈으로만 설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걸어놓고 기도로 실천하신 것이 아닙니까? 다시 누가23:34에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모든 용서에 성공한 사람들은 용서의 기도에 먼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용서가 안 되시면 주님, 용서가 안 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저 유명한 화란의 믿음의 여인 코리 텐붐이 자기 언니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을 수용소에서 학대한 수용소 간수를 전쟁 후 만났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주님께 아뢰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용서하라였습니다. 코리는 다시 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다시 그녀에게 "난 네게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라는 나의 명령에 순종하겠느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그녀가 의지적으로 순종을 결단하고 두 팔을 내밀어 그를 안는 순간 하나님은 그를 진정 용서하는 마음을 부어 주셨다고 그녀는 간증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후에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 난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용서의 능력이 주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결단하고 용서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에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 용서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덕목들은 표현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고는 결코 전달되지 않는 것-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용서이고 다른 하나가 사랑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표현되지 않는 한 상대방이 용서 받은 것을 그리고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용서와 사랑은 결국 하나입니다. 용서의 열매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다. 노래는 불리어질 때 까지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표현될 때 까지는 사랑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많은 문화적 유산을 지닌 민족입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표현력의 빈곤입니다.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의 치명적 빈곤은 사랑의 표현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잘못 했습니다

 

혹은 사랑 합니다라는 표현을 어색해 하는지요? 그러나 성경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성경은 얼마나 용서와 사랑의 언어로 가득차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여,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를 용서/사랑하노라

 

오늘 두개의 본문에서도 주님은 공개적으로 용서를 가르치고 공개적으로 용서를 선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용서와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당신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시고 증명하셨습니다.

 

바울은 롬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가정만이라도 좀 더 대담한 사랑의 전달과 표현이 있다면 이 땅의 가정들의 회복은 그 만큼 빨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란노 아버지 학교 가정 회복 사역 팀장인 정회성씨가 쓴 아버지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라는 책에 보면 이런 고백이 실려 있습니다. 정 회성님은 아버지에게 온통 얻어맞은 폭력의 기억만을 가지고 자랐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는 가정을 공포의 장으로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자기 친구가 아버지와 씨름을 하며 아버지의 배를 만지고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습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도 있었구나--라는 발견이 그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 전도단 DTS 훈련을 받으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해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자란 그는 사랑의 표현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기 나이 스물 세살 되던 해 그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 아버지 저를 낳아주시고 기도해 주신 것 감사하다고 말하니까 아버지는 그래 열심히 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다시 아버지 오늘 꼭 드릴 말씀이 있는대요하니까 뭔데?”하시더랍니다. 기도하고 연습했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23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 합니다라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전화를 끊고 처음으로 한 자신의 사랑의 고백을 인해 스스로 울고 감격하던 그날 그 고백과 동시에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변화만은 감지할 수는 없는 채 7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도하다가 아버지를 한번 안아드리고 싶다는 강한 갈망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직접 그분의 책에서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구정 날 부모님 댁에 세배를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아버지를 안아 드리리라 결심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사역자가 되었으니 주안에서 사역을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하고 꼭 한번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 가려고 했다. 앉아 계시는 아버지와 내가 서 있는 거리가 불과 1.5M도 안되는데 그 거리가 마치 요단강 같이,

 

아니 홍해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뻗어져야 할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못하게 되면 나는 진정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강하게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서 앉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난 울면서

아버지 사랑하고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아버지 품에 안겼다. 그때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그때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버지에게 한번도 사랑의 안김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나를 안아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품이 너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도 좋았다. 옆에 계신 어머니도 울고 뒤에 있던 아내도 울고--

 

그 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거기서 천국을 경험했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자녀사이에 어떤 불필요한 긴장감이나 어색함이 더 이상 없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만이 충만했다.---최근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어디셔요?” “여기 월 마트다. 그런데 너에게 할말이 있다.” “뭔데요?” (한 동안의 침묵 후에 들려온 말은--)“회성아, 나 너 사랑한다그리고 아버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으신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을 주님으로 만난 사람들의 그 어느 날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 이루어지는 순간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가정에는 이 용서가 이 사랑이 오늘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나는 과연 천국에 갈수 있을까? /23:39-43/ 이동원목사

2014-12-04 10:56:31

 

1492년까지 스페인령으로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던 저 유명한 지브랄탈 해역에는, 라틴어의 세글자로 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세 글자인데 라틴어로, 네블루스 울트라, 네불루스 울트라, 영어로 번역하면 노 모어 비얀더’ (NO MORE BEYOND)

 

그러니까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당시 스페인 사람들,그리고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습니다.지구는 여기에서 끝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가 끝이다.

 

그런데 왜 제가 1492년을 얘기했을까요? 1942년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저 건너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든 지구의 끝,

 

그리고 참담한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었든 지구의 끝을 넘어서서 그기에 미지의 새로운 대륙인 소위 아메리카가, 미 대륙이, 신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그리고 이 표지판은 바뀝니다.

 

사람들은 첫 글자를 뗐습니다. 네어 라는 단어를 빠트렸습니다. 네어가 영어로는 노(No)거든요 N0, 단어가 빠지니까 이제는‘MORE BEYOND’ 저 건너편에는 많은 것이 있다! 놀라운 것이 있다! 이렇게 간판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죠. 죽으면 다 끝났다, 죽음 앞에 서서 우리는 다 끝났다 .내 끝이 가까워온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현상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현대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에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는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그런 학자일 것입니다. 그분의 팀들은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합니다.

 

니어 데스 익스피어린스라고 그러는데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든 사람들, 우리가 보았을 때 죽었든 사람들, 그런데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의식세계만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연구했습니다.

 

그분의 쓴 책은 매우 학문적으로 어렵지만 그분의 조수들이 쓴 책들은 굉장히 여러 권들이 많이 세상에 소개 되었어요. 죽음 건너편에 뭐가 있는가?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든, 아니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했든, 병원이 사형선고를 내렸든,이 사람은 죽었다고 죽음의 진단을 내렸든, 이미 생명이 끊어졌다고 선언을 했든 사람들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드문 케이스들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경험의 세계, 그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돌아왔는지,

 

이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악몽을 경험하고 옵니다.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현상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돌아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터널을 잠시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가 기다리고있다 그리고 그 빛의 세계를 잠깐 발을 디뎌 놓는 순간 너무너무 좋았다.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

 

성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할만한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도 천국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챤스는 반반 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지나간 세계의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얘기를 했어요.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겠죠? 천국이 없어도,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그래서 자기를 도박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그래서 저는 죽기직전에, 죽기직전에 극적으로 죽음을 보장 받고,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그러니까 죽은 이후에 천국이라는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잠시 나눌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 누가복음2339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과 더불어 양쪽에 매달린 두 강도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 강도였고 두 사람이 다같이 행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심경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한 사람은 여전히 죽어가면서 저주하고,죽어가면서 욕설을 퍼붓고,죽어가면서 몸부림을 치는 그를 향해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한 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그 정죄를 받고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은 우리 가운데 매달린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갑자기 자기 곁에 매달린, 자기 곁에서 꼭 같이 몸부림치고 고통하지마는, 뭔가 달랐든 자기 옆에 매달린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여, Oh Jesus!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 예수님은 역시 똑같은 고통 속에서, 똑같은 몸부림 속에서, 똑같은 신음속에서, 그러나 그 곁에서 이 고백을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서, 천국에서 깨어날꺼야

 

어떤 미국의 목사님이 병을 앓고 거의 죽어가는 분에게 이사람 얘기를 하면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 받은 사람의 얘기를 하면서, 선생님 지금도 늦지않았어요 이 강도처럼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 가셔야 합니다.

 

이 사람이 아프면서도, 사람은 아파도 자존심이 있잖아요? 그래서 하는 소리가 목사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하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대요.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까? 선생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저 하나님 모르니까 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겠죠. 그럼 선생님, 이분이 마침 은행계통에서 일하든 분이였다고 합니다. ‘

 

그럼 선생님 지점장도 많이 하셨죠?’ ‘녜 그렇습니다선생님이 뉴욕은행의 지점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본부는 따로 있고 거기 지점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지점장으로서 본부의 상부의 지시와 전혀 상관없이,

 

은행을 소유한 사주의 견해와 상관이 없이 마음대로 돈을 쓰시고 그리고 본점에 하나도 보내지않고 다 쓰셨으면 그런 사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강도겠네요?

 

하하~ 강도겠네요. 선생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게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계시더래요.

 

그런데 어떤 부자가 죽어가면서, 갑자기 죽어가면서 자기 식구들 보고 변호사 불러달라고, 변호사하고 의사를 불러오라고, 변호사와 의사를 불러오라고, ‘아니 아버님 갑자기 왜 변호사와 의사에요?’

 

나도 예수처럼 죽고싶다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그러니까 나도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싶다하하하~ 변호사님, 의사님 계시면 참 죄송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의료보험 많이 빼앗기고 재판하다 보면 법률가들에게 주는 돈이 참 많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강도죠? 자기 이기심의 만족을 위해서, 내가 작은 이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만이 강도가 아니라,누구나 다 강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저는 여러분과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어요.Good news를 말하고싶어요. 오늘밤 저는 슬픈 소식을 말하고 싶지않아요.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는 놀라운 소문을 들은 날인데, 어떻게 비극을 얘기합니까?

 

하하~ 좋은 소식을 얘기해야 옳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이것입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할렐루야? 하하~ ,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냥 가는 거는 아니에요.

 

어떻게 했어요?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가 천국에 갈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을 기독교의 용어로 말하면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신앙고백 때문에, 그게 무슨 말 입니까?

 

그걸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이 말도 어렵죠?

 

, 다시 풀어보겠습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천국을 보장 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든 이유, 첫째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했어요.

 

, 누가복음 2340절에 보시면 이 강도한 사람이 다른 강도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절에 그 다음절에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이 십자가에서 이런 처형을 받는 것이, 강도로서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끼치고 아마도 생명에도 해를 끼쳤을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죄값이다. 이 한 사람은 분명한 죄의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은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모든 사람, 여기 서 있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의인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영웅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성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견해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내 심장을 꿰뚫어보시고 겉으로 표출된 내 행동의 배후에 있는,

내 삶의 동기를 살피시며 가장은밀한곳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고있었던 내 삶의 모든 모습을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여러해 전에,영국에서 런던의 장난치기 좋아하는 청년 하나가 장난을 쳤습니다. 런던의 가장 유명한 사회적 저명한 명사 40명의명단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똑같은 Telegram,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전문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났음 피신하기 바람그 다음날 40명이 다 없어졌습니다.하하~

 

사람은 다 죄인이에요.그런데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이땅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이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이 세상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 밖에 없어요.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이 있고, 내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아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다. 절망이다. 그러나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예수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세상에 어차피 의인은 없으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다음에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의사야, 나는 병자를 위해서 왔다,

 

여러분 병자의 치유의 희망,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은 뭘까요? 그것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아파요. 제 여기아파요 막 쑤시고요, 결리고요, 괴로워요, 아파요. 이것이 정확한 진단의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건강의 시작인 것 입니다.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날 내, 이세상에서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용서 받은 자로 하나님나라 천국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첫째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 강도처럼 말입니다.우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옳아, 좀 원색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죽는 것이 싸, 강도질하고 살아왔던 인생, 이 인생을 위해서,나를 위해서만 살아왔든 내 인생은 이렇게 죽어도 마땅해,

나는 죄인이야, 우리는 정죄된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첫번째 단계에요.

 

두 번째,나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두번째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두번째 단계입니다.

 

자 다시 한번 오늘 본문에 있는 이 회개한 강도의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요. 40절에, “하나는 또 다른 그 사람 다른 강도를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않느냐?”

 

이 강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어요.두려움, 두려움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이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두려워해요. 왜 사람들이 죄를 범할까요? 죄를 범하는 이유, 하나님이 두렵지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나를 심판한다, 내 말도 심판하고, 내 행동도 심판하고 내의식, 내 생각까지도 심판한다.

 

내가 한, 쏟아놓은 모든 말, 내 모든 행동, 어느날 나의 창조자 심판자 앞에서 내 일생은 낱낱이 심판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여러분 참으로 믿는다면 죄 범하겠어요?

 

저는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든 사건하나가 있습니다. 요즘 이러한 시대가 좀 뒤떨어진, 벌써 얘기일줄 모릅니다마는, 저는 80년도 말에 평양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만해도 평양 가는 사람 많지 않았으니까, 조금 두려워하면서 갔어요.그래서 뭐 마치 무슨 순교자의 걸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뭐 이런 얘기까지 하고, 평양으로 갔다온 적이 있어요. 몇몇 목사님들하고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도착해서 이제 호텔에 들어가는데, 사실은 평양 가기 전에 베이징에서, 북경에서 우리 같이 가는 일행 몇 사람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북한에 가면 호텔 안에서 모든 얘기가 다 감청 되고 도청될 테니까 우리 호텔 안에서는 극도로 조심하자, 그런데 한 분은 또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거기는 다 도청장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낱낱이 행동을 다 감시하는 시청장치도 있다. 그러니까 호텔 안에서는 절대로 우리 얘기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끼리할 어떤 중요한 얘기 있으면 우리 바깥에 나와서 버스 탈 때, 걸어 다닐 때 길에서 얘기하자 이런 약속을 단단히 하고 우리가 갔거든요?

 

딱 평양에 도착해서 이제 호텔에 싹 들어갔어요. 저는 호텔에 들어가서 호텔내부를 제 평생에 그렇게 유심히 관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그날 따라 보니까 호텔내부에 방에 뭐 이렇게 뾰죽한 게 나온 게 있으면 이건가? 이건가? 내가 무슨 엔지니어나 된 것처럼 호텔의 내부구조를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천정주변에 뭐가 하나가 있어요.맞아! 저기서 나를 보는구나,하하~ 이런 생각이 들자 머리가 싹 서더라구요. 그러니까 정말 조심하게 되더라구요. 저는 평생 호텔방에서 그렇게 거북하게 정중하게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하하~.

 

그 이튿날 나와서 이제 우리가 좀 거리에서 그 얘기를 하는데, 저하고 같이 갔든 아~옆에 방에 드셨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목사님 한 분이 그러더라구요 자기는 아예 옷을 다 입고 주무셨데요 하하~

 

그래서 아무리 목사님 그래도 그렇게 옷까지 다 끼어 입고 어떻게 그렇게 주무셨어요? 그러니까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 공산당이 보는데 어떻게 빤스 바람으로 자냐?

하하하~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그가 나를 감찰하고 있다.

 

우리가 시편에 보시면, 구약성경에 시편에 이 시편을 기록한 기자가 이런 말을 쓰고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의 앉고 일으서심을 보셨나이다.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행동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내가 하늘 저 높은 곳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저 음부의 깊은 곳에 가서 눕는다고 할찌라도 내가 저 바다 끝으로 새벽날개를 치면서 가서 거한다고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하나님 전지하신하나님, 인생을 지어 만드신 창조주, 우리의 낱낱이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죄범할 수 있을까요?

 

죄범?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보지않는데, 아니요! 불꽃같은 안목으로, 그렇습니다.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불꽃같은 안목으로 나를 꿰뚫어 보시고 내 깊은 패부를 살피시며 내 생각의 밑바닥을 살펴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이것은 회개의 시작이에요 회개의 시작. 벌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이에요.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주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성경은 그것을 경외라고 말합니다.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 성경은 이것이 진지한 회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이 죄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삼판을 받을 것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그리고 내 어떤 공적을 들고도 내가 인생을 살면서 조금 잘해놓은, 조금 잘 해놓은 일, 내가 조금 한 자선사업, 그거 가지고 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그거 가지고 설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 번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 처럼 해야할 이 세 번째의 일,

그는 예수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자기의 구원을 호소합니다. 예수님께 매달려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십시요. 예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아니 예수님이 나라를 가지고 있나? 사람들에게 쫓겨다니고 핍박을 받았든 젊은이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 강도는 예수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나라,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아니 예수님이 나라를 가진 분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 나라에 저를 받아주시고 기억해달라고, 아니 예수가 그런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오늘 이 말을 기독교인들은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메달려 고통을 받으실 때 두 번째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하신 말씀. 그런데 이 말씀 전에 첫번째로 하신말씀이 있어요.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첫번째로 하신말씀, 첫번째는 이것입니다. 그가 십자가가 세워지고, 골고다의 언덕에 이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던,

 

로마의 군병들 앞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저 예수 십자가에 매달렸다, 이 몸부림치면서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예수를 향해서 야유와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십자가 주변의 군중들과 로마의 병정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십자가상에 매달린 예수의 첫마디 음성이 이것이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이때 그 얘기를 들은 옆에 있는 강도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저분은 남을 용서하고있다 용서하고 있다.

 

여러분? 사람이 너무 너무 고통스러우면요 그 고통이 극점에 도달하면, 고통이 크라이막스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의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사람이 다른 생각을 아무것도 못한다 아프다! 그거 밖에는 생각을 못한다 고통스럽다,

고통.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의 극점에서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세요.이것이 옆에 있는 강도에게 충격을 준 것 입니다.

 

아니 저 분이 누구야? 세간에 떠돌든 그 동안의 소문처럼, 그 동안의 소문처럼 저분이 메시아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계신 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올 수 있는 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 그렇다면 저분이 나를 용서해 주신다면,

 

지금 저들을 향해서,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저분이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나도 용서 받고 저 천국에 그분의 나라에, 메시아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예수여,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 말을 바꾸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 저를 구원해주세요. 쎄이러 미, 저를 구원해주세요.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이제는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를 위해서 매달립니다.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그리고 예수님을 용서할 수 있는 분으로 믿은 것 입니다. 그는 방금 전에 예수님의 선포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 격렬한 고통과 저주와 야유와 조롱을 받고도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기보다도 이웃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저 분은 메사아야, 맞았어, 약속된 메시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이시는 바로 그분이야,

 

그렇다면 내가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소망, 마지막 잎새 같은 최후의 소망, 그 소망을 예수에 걸고, 옆에 같이 고통을 토하지만 자기와 전혀 다른 그분을 향해서외칩니다. 예수여! 주예수여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구원해 주십시요.

 

그때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은 낙원입니다. 파라다이스 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라다이스를 말했습니다.

 

이상향을 말하고 유토피아를 말했습나다 그러나 이땅은 아직도 유토피아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상 유토피아란 말의 본래의 뜻을 아세요? 유토피아라는 말은 노 프레이즈, 그런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하~ 유토피아는 그런 곳이 없어요. 세상에는 없어요.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진정한 낙원, 우리가 그리던 그 이상향,

 

우리의 꿈,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소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 진정한 나라 파라다이스, 천국은 낙원입니다.

 

그리고 천국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에요. 네가 나와 함께, 나와 함께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저는 예수님이 없으면 천국 갈 생각은 없어요. 사랑하는 그 분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이 있어서 천국은 진정한 파라다이스일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개척하면서 한 2년쯤, 그 동안은 제 아내가 미국에 있으면서 왔다갔다 했죠. 그래서 제 아내와 떨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남자들이 다 그렇지만 저도 제 아내의 생일날을 잊어버렸습니다. 깜빡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의 생일날 제 아내가 저한테 전화를 했더라구요. 잘 들어십시요 제가 한 전화가 아니라 제 아내가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 오늘 내 생일이에요보지는 안 했습니다마는 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아이 미안하잖아요. 제가, ‘아이 내가 깜빡 잊어버렸다고 미안하다고, 그런데 아이 괜찮아요, 괜찮아요. 우리 애들이 카드도 샀고요 꽃도 주었고요, 교인들이 또 아무개 교인 집에서 잔치를 해서 잘 먹었어요’.

 

그래 좀 이상하더라구요. ‘그런데 왜 전화했어?’ 그랬어요. ‘그런데 왜 전화했어?’ 그러니까 가까스로 하는 소리가 그래도 당신이 없었잖아’, ‘그래도 당신이 없었잖아이런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되세요?하하~,

 

제가 20대초에 저는 아주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뭐 철학을 많이 알지는, 조금알지만 철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그래서 철학 책들을 읽고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아주 즐겨 읽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얼마되지않아서 아직도 신혼 때였는데 그때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 회의가 일찍 끝났습니다. 어떤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일찍 끝났는데, 저가 너무 너무 가고 싶었던 곳이 덴마크였습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의 어떤 그림자를, 내가 청년 시절에 그토록 좋아했든 이 우수의 철학자, 이 키에르케고르의 발자취와 그림자를 좀 밟아보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저 혼자 비행기 일정을 좀 변경해서 코펜하겐으로 덴마크으로 날라갔어요.

 

그리고 부지런히 수소문해서 키에르케고르가 살던 집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그런 모든 것을 모아놓은 조그만 유지용, 이런 데를 왔다갔다 했어요. 처음에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했는데 저는 굉장히 기대를 갖고 왔거든요?

 

그러나 생각보다는 이렇게 많이 보존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고 몇군데 다니다가 그날 오후에 호텔에 돌아오니까 너무너무 힘들더라구요.피곤하고,

그래서 왜 그럴까?내가,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던 코펜하겐의 거리,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집을 갔다왔는데 내 마음속에 흥분이 살아나지 않는 거 있죠, 별 그렇게 좋지 않더라구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녀가 없었거든요. 하하~그래서 그냥 아유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아마 와이프(Wife)가 옆에 있었으면 달랐을 꺼에요.

 

Wife가 옆에 있었으면, 저는 이민생활을해서 그 미국에 좀 살아봐서 아는데 미국에 사는 그 우리 한국 사람들 동포들 가운데 친척들이 다 미국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친척들이, 가족들이 다 미국에 살아요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 별로 오고 싶어하지 않아요. 별로, 왜 조국을 그리워하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할까요?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우리를 용서해주신, 우리를 사랑해주신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시고 그리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를 텃치 해주시고 내게 꿈을 주시고 내게 기쁨을 주시고 노래를 주시는 그 예수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그 좋은 곳 천국에 있으리라. ,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강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회개하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무나 감격스러웠겠죠?

 

그는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있어요. 조금 있으면 내 생명이 끝날 것이 뻔합니다. 그는 얼마나 평안하게, 얼마나 감사한마음으로 얼마나 평안한마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맞아! 나는 그 분의 낙원에 저 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야, 그 낙원에 있게 될 것이야.

 

물론 저는 이 강도에게 후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을 일찍 만나서 저 예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나는 강도가 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터인데, 나는 이렇게 인생을 헛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순간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내가 저 분을 만난 것, 그리고 저 분의 보장을 받은 것, 저분이 나를 용서하신다고, 그리고 나를 받아주신데요.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주신데요.

 

그분과 함께 있게 될꺼라구요. 드디어 그분의 심장이 그 강도의 심장이 멎는 순간 그의 영혼이 육체에서 딱 분리되는 그순간 그 분 앞에는 낙원으로 가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려져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박관용 형제가 그 눈먼 사람이 소리치며 찬양할 때, 길이 어디냐?, 그 길이 어디냐, 그 길이 어디냐? 인생을사는,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로 가는 그길이 어디냐? 예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자가 없느니라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분을 통해서 용서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갈 수 있는 길,

 

아무도 자기의 의, 아무도 자기의 공적,아무도 자기의 크레딧을 가지고 그 분 앞에 창조주 앞에 갈 수 없지만 예수 믿고 용서받아, 예수님의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그 나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떤 선교사 한분이 아프리카에 밀림을,정글을 마을마을을 찾아 다니다가 길을 잘 모르겠어요.그래서 그 토인 아프리카 정글지대에 살고있는 토인 하나를 길잡이로 자기 가이드로 고용을 했습니다.

 

내가 어느 마을에 가기를 원하는데 나를 그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 그런데 이 청년 가이드가 그래요? 저를 따라오세요. 돈을 주기로 하고 가이드를 고용하고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전혀 길 같지 않는 길로 계속 그냥 가는 거에요. 이게 어디? 정말 그 마을이 나올까?

 

그래서 가다말고 선교사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답니다. 그 청년에게 당신 길을 아시오? 이때 토인청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선교사를 바라보면서 이 선교사의 평생 잊지못할 대답을 하더래요.

 

선교사님, 제가길이에요. 내가 길이에요. 아임 더 웨이(I am the way) 내가 곧 길이이에요. 내가 길이에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저가 와싱톤 지구촌교회에 있을 때, 거기서 저와 같이 신안생활하든 한교인의 얘기를 마지막으로 좀 들려드리고 싶어요. 공치조란 집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공치조형제, 그 아버지는 장로님이셨습니다.

 

부인도 좋은 그리스도인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냥 아버지가 장로님이셨으니까 교회 근처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나오는 의미를 별로 몰랐습니다.

 

나왔다 안 나왔다, 제가 보기에도 늘 답답한, 목회를 하다 보면 교인가운데 답답한 교인 몇 사람이 있습니다. 제눈을 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분일지도 모릅니다. ,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였어요.

 

그런데 이분이, 뭐 그래도 좋은 분이에요. 열심히,이민생활 열심히 해서 드디어 세탁소를 차렸습니다. 미국에서 세탁소 차리면 그 인제 이민생활에 익숙해졌고 상당히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거에요.그런데 미국의 이민생활의 풍속도를 풍자하는 얘기가운데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들은 얘기에요.

 

제가 아는 분 한 분이 LA에 왔어요. 황집사님이라는 분인데, LA로 이민 오셔서 제가 만나서 집사님 요즘 뭘 하세요? 그러니까 이분이 목사님, 제가 LA를 쓸고 다녀요. LA를 쓸고 다녀요.그래서 뭘 하시는데요?

 

아 진짜 쓸어요.진짜, 진짜 청소해요, 그래요.청소하는 Job을갖고 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만났어요. 집사님 요새는 뭘 하세요? 아이 목사님 제가 LA를 누비고 다닙니다. 누비고 다닙니다. 그래서 뭘 하시게요?

 

그러니까 봉제공장 다니세요.하루종일 누비는 겁니다. 봉제공장, 그런데 다시 한 2-3년 흘러가서 또 그분을 만났거든요. 집사님 뭘 하세요?그러니까, 목사님 제가 드디어 LA를 주름잡게 되었습니다.하하~그게 뭔 줄아십니까?

 

그게 세탁소에요. 세탁소가 하루종일 주름 잡는 거 거든요? 뭐 그러다가 조금 더 나가면 이제 뭐 모텔도 사고, 개스 스테이션도하고 그게 이민 가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속도, 삶의 이야기거든요? 이분이 인제 세탁소 차리니까 살만큼 산 거에요.

 

이제 얼만큼 어떤 자리에 돈도 좀 만지게 되었고 그래서 워싱톤 지역에서 돈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운데서 부토멕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네를 부뜨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부토멕,

 

하하~ 거기 아주 큰집도 이렇게 샀었어요. 그런데 살만하게 되었고 나이 40이 조금 넘었는데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첵크를 딱 받아보니까, 암이에요. 위암이에요.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런데 뭐 제가 이제 방문을 하는데, 이분이 평소에 와서, 교회에서 뭐 항상 뒤에 앉으세요. 항상 뒤에 앉아요. 제 시선을 피했어요. 구석진 곳,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교회에 하하하~ 졸다가 이렇게 나가시고, 어떤 때는 빠지시고,

 

하하~ 그런데 이분이 저가 병원에 심방을 갖더니 제 설교테잎을 들어요.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목사님 말씀이 꿀같이 달아요. 하하~항상 교회에 와서 졸든 분이 말씀이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요.

 

아파서 병원에 들어가서 조용히 앉으면서 그때부터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거에요. 설교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저 목사님 제가 너무 죄를 많이 지었어요.그리고 이제 정말 복음을 알겠어요.십자가를 알겠어요.

 

어느날 제가 갔더니 저 정말 이제 예수님이 제안에 게세요 저 여기서 일어나면 저 열심히 이제 주님 섬길꺼에요’. ‘그래요 집사님 꼭 일어나셔야 돼요이제 그러면서 제가 계속 찾아간 거죠.

 

그런데 몸이 계속 쇠약해져요 계속 쇠약해져요.그러다가 조금 회복이 되시는 것 같더라구요. 잠시 퇴원을 했어요. 퇴원을 할 무렵이 였습니다. 퇴원을 할 무렵인데 그때, 와싱톤지구촌 교회에서, 지금 여기서도 우리교회서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만 성지순례를 간다고 그러니까,

 

이분이 성지순례를 가겠데요. 그래 암환자인데, 앓든 분인데 그러니까 뭐 주치의가, 아이 힘드시다고, 안 된다고, 그런데 꼭 가겠데요. 저한테 좀 얘기를 해달라고, 주치의도 우리교회 집사님이고 의사선생님이시니까,

 

그런데 이분이 너무 간절하고 제가 보니까 마음속에 어떤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저 예수님이 걸으셨든 그 땅을 밟고싶어요’ .예수님이 걸으셨든 그땅을, 그래 제가 그 주치의 되시는 분한테 좀 강요를 했습니다.

 

좀 허락을해주세요. 이분이 너무 가고싶은 모양이에요.하나님이 도와주실꺼에요 잘 갔다오시도록그래 갔습니다.

 

이분이 성지순례팀에 그 참가를 해가지고, 같이 간 거에요.그래서 이스라엘여러 곳을 다니다가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그 마지막극치,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든 삐아돌로 로사의 피묻은 길,

 

세 번씩이나 쓸어지셨다가 다시 일어나신 그길, 성묘교회라는 곳, 과거에는 성문 밖 골고다의 언덕 그 언덕을 십자가를 지시고 쓸어지셨다 일어나셨다 걸어가셨든 그 거리, 그 거리를 제가 가다보니까 그분이 제 옆에 딱 있더라구요 그런데 너무 힘드신 것같에요. 몸의 표정이, 집사님 저 붙들고 같이가요.

 

그래서 제가 손을 딱 붙들고, 이분을 붙들고 같이 그 길을 걸었어요. 걸으면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 그 길에 내력 옛날에는 여기보다 조그만 산에 탑이 낮았다고, 보시죠?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죠?

 

저기 있는 교회, 저기가 사실은 성문 바깥이에요. 골고다 언덕이거든요 과거에, 예수께서 이 길을 가셨어요.

 

넘어지시고 다시 일어서시고 피를 떨구시면서 가신 길이죠. 제가 이런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그 분이 목사님, 이 길 때문에 하늘가는 그 길도 우리가 가는 거죠?그래요.

 

이 길 때문에 하늘가는 그 길을 가는거죠? 맞아요. 십자가의길, 예수께서 걸으셨든 십자가, 내 대신 걸으셨든 십자가, 나 대신 못 박히신 십자가, 나 대신 피 흘리신 십자가,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죄 용서 받고 하늘가는, 천국 가는 그 길이 열린 거에요. 제가 설명을 해드렸어요. ’

 

그러네요.’ 이분이 막 감동을 하면서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때는 전통적으로 성지순례객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찬양을 부르면서 그 길을 쭉 걸어올라갔어요. 성지순례 잘하고 오셨어요. 잘하고 오셨어요. 그리고 한 석달 후에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떠나시기 직전에 저가 제가 현장증인은 아니지만 사모님 한테 들은 얘기인데, 갑자기 코마상태 속에,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있든 이분이 갑자기 순간적으로 깨어나더래요. 잠시 깨어나더래요.

 

그러더니 일으켜달라고, 그래서 침대에서 일으켜드리니까 하늘 가는 길이 보여요! 하늘 가는 길이 보여요. 설명할 수 없는 광채가 희열을 가지고 손을 들고 할렐루야, 하늘 가는 그 길이 보여요.

 

내 사랑하는 형제 공치조 집사님이 가셨든 그 길,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회개한 강도가 갔든 그 길, 하늘가는 밝은 길,그의 죄많은 인생, 그의 허물 많았든 인생, 그럼에도 불과하고 감히 사랑하는 주님에게 천국을 보장받고 마지막 순간에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든 이 강도,

 

네가 말이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어떻게, 어떻게요. 그가 자기의 죄를 인정했으므로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저를 구원 주시구요. 당신의 나라가 올 때, Remember me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주님은 이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그의 심장이 멎는 순간 이 밝은 길을 통해서 주님의 품안에 안기는 그 순간 죄송해요 주님, 잘못 살았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마라. 염려마라 이제는 다 잊어버려라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거야. 영원히 나와 같이 여기 있는 거야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같이, 우리 다같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축복하는 기도를하나님 감사합니다.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해주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하시고 오늘 결심한 이분들을 축복해주시옵소서. 안아주시고 받아주시고 오 하나님 저들의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 아버지 하나님 함께하시고 저들의 마음을 붙들어주시고 저들의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보십시요 이들이 이렇게 결단하며 일어서서 예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의 주님이 되십사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십사고 오 하나님 저들의 아름다운결단과 기도를 들어셨을진데 십자기상의 그 강도에게 주셨든 말씀을 주시옵소서 네가 오늘부터 나와 함께 같이 있는 거야, 그리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나와 같이 더불어 있는 거야하나님 이제 이 천국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예수님과 함께 기쁘고 아름다운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경 읽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제하며 멋지고 아름다운 풍성한 인생을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들, 천국의 백성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제는 다 주님 앞에 맡기는 것 입니다.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외로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한 행악자 /23:39-43/ 이동원목사

2014-12-04 10:45:41

 

서양격언에 참호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하여 인생이 가장 보편적으로 부르는 것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편도 아내도 선생님도 부처님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는 오히려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여기 있는 먼저 하나님을 믿으신 대부분의 성도들이 경험한 진실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다가 인생을 끝마치는 예외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유형의 대조적인 케이스를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두 행악자 혹은 두 강도 사이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자기 옆에 계신 분이 자신을 구원할수 있는 메시아 구주이심을 깨닫고 그에게 도움을 호소하여 구원의 약속을 받았고,

 

또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9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그의 반응을 대표하는 언어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웃음과 비방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비방하고 조롱하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먹으면 이렇게 끝까지 악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또 다른 행악자의 전혀 다른 부르짖음을 들어 보십시오.

 

42절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그리고 그는 마침내 예수님에게서 어떤 약속을 받았습니까?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구원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반응은 얼마나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물론 우리들의 특별한 관심은 구원을 약속 받은 강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극적인 회심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구원의 진리를 배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 영혼의 구원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우선 그의 구원의 조건은 그의 선행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행악자였다고 말합니다. 악을 행한 자라는 말입니다. 본래 십자가형은 로마의 통치시절 최고의 악질범들에게 내리는 형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를 했기에 이제부터 회개한 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하자마자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그의 선행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선행을 추구한다 해도 그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아십니까? 선행자체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선행으로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이 행악자의 구원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그의 구원의 조건은 단순히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가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에게 구원을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예수님의 십자가의 달리심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범죄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임을 이 강도조차도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의 죄로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인정하고 자복함이 용서에 이르는 길임을 일관성있게 강조합니다. 신약성경의 한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리라”(요일1:9)

 

이제는 구약 시편32:5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순간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자백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나아와 죄를 자백하고 구원을 호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법정도 최후의 심판자는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메시아의 나라만이 완전한 공의가 실현된 유일한 나라이며 메시아되신 그분만이 인류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회개한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를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원과 심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아 곧 구세주로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분 메시아되신 주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지금 이 강도는 바로 그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예수의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예수가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행전4:1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이제 당신도 당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마 어떤 분은 이 악행을 행한 강도야 그런 용서, 그런 구원이 필요하겠지만 비교적 양심적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도 그런 구원이 필요하겠느냐고 물으실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악행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죽하면 이런 서양 유머가 생겼겠습니까? 유머니까 지금 말씀드린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잘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서양 부자가 죽어 가면서 임종의 자리에서 갑자기 자기 주치의사와 전담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왜 하필 이 시간에 그들을 부르시냐고 했더니

 

내가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 싶다고 대답했답니다.

의사와 변호사에게 너무 많은 돈을 쓴 것을 풍자한 유머이겠지요.

 

그러나 이 유머는 어떤 고상한 직업도 어떤 고상한 인생도 죄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줄 따름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의인이나 성자라는 말은 모두 상대적인 인간 묘사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머도 있습니다. 외국의 시골 마을에 악동으로 유명한 형제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형 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동생은 형의 장례식을 치러야 할 터인데 동네 모든 성직자들이 장례 주례를 회피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만일 자기 형 장례식을 주례하고 자기 형에 대하여 성자라는 말만 해 주면 무려 일만불의 사례를 하겠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한 기개가 있는 젊은 성직자가 주례를 자원했습니다.

 

장례식장은 호기심에 찬 마을 사람들로 만원사례를 이루었습니다. 도대체 이 형편없는 인간을 이 성직자가 어떻게 성자라고 부를 것인가가 관심이었습니다. 주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고인과 형제는 우리 마을에서 악인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형은 살아있는 동생에 비하면 차라리 성자라고 할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선도 악도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원은 이루어 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원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구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삶의 약속입니다. 하나는 낙원의 삶의 약속이고, 또 하나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약속입니다. 낙원은 영어로는 파라다이스(paradise)입니다. 궁극적인 천국은 파라다이스 곧 낙원입니다.

 

천국이 낙원일수 있는 것은 죄와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와 고통이 해결된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성경이 스스로 묘사하는 궁극적인 천국의 상태에 대하여 들어 보시겠습니까?

 

계시록21:4의 말씀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고 애곡이 없고 이별이 없고 사망이 없는 곳-어떤 곳일까요? 그곳이 바로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 된 낙원 곧 천국인 것입니다. 그 천국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인생은 결론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이든가 지옥입니다. 구원이든가 멸망입니다. 어떤 결론을 원하십니까? 당신의 인생은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구원은 낙원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낙원을 찾는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낙원을 유토피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유토피아(/없음+토포스/장소)라는 말은 그런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지상에는 낙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원을 준비하고자 저 영원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14:2-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이 지상을 떠나기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요한14:6의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구원의 또 하나의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단지 죄와 고통이 없는 낙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가 충만히 거하는 곳입니다. 여기 본문에 회개한 강도에게 주신 약속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낙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낙원에 예수님이 안계시다면 낙원은 낙원일수 없습니다. 물론 완성된 낙원은 아직도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이 땅 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죄와 고통이 존재하지만 구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의 다스림을 경험하며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이런 찬송(495)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 받고/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2)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마음을 열어주는 101한가지 이야기(Chicken soup stories)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부가 어느 휴일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그들의 가정이 작은 천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남편이

 

하나님 저희 가정에 천국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아내의 마음속에 이런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그들이 경험한 천국의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도 그럼 오늘 누군가와 꼭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지하고 거들더랍니다. 그래서 오늘 누군가와 이 천국의 기쁨을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로 아침 기도를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에 부부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한 중년의 여인이 혼자 쓸쓸히 식사하는 모습이 부인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천국의 기쁨을 나눌 대상이 저 여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떻게 하지?”하고 묻습니다. 잠시 묵도하던 부인이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가 엽서 한 장을 쓰겠으니 당신이 저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부인이 오늘 하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식사비를 지불하고 간다는 내용을 적고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기를!”하는 인사카드와 함께 남편은 그가 이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자리에 돌아와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낸 여인이 식사비를 지불하려고 카운터로 가면서 자신의 식사비가 지불된 것과 누군가가 카드 한 장을 남겼다는 것을 알고 카드를 읽어 내려가던 그 여인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노트를 적기 시작합니다.

 

멀리서도 노트를 꺼내 무엇인가를 기록하던 여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가던 여인이 카운터에 있는 분에게 뭔가를 부탁하며 황급하게 식당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 부부가 받아든 노트 쪽지에는 이런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신지 모르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저는 교회를 꽤 오래 다녔지만 요즈음 하나님도 천국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사랑이 없는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인입니다.

 

사실 오늘 마지막 근사한 식사를 이 식당에서 하고 세상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신은 천국에서 보낸 천사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회로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초대 받아 오신 모든 분들이 또한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천국의 선물을 받으시고 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23:32-38/ 곽선희 목사

2014-11-27 14:46:43

 

여러분 잘 아시는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사람에게 언제나 세 가지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죄는 공부를 하지 않는 죄입니다. 사람은 공부해야 됩니다. 계속 배워야 되는데 배우는 자세를 잃어버렸을 때 인간됨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고로 공부하지 않는 죄가 큰 죄라고 했습니다. 둘째 죄는 알고도 행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또한 큰 죄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내가 알았으면 가르쳐야죠. 또 소중한 진리라면 남과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는 죄, 그것 또한 큰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에 보면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는 무식이라고 하는 죄입니다. 지식을 거부하는 죄입니다. 구약 성경 호세아 46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네가 지식을 버렸음으로 내가 너를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지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잘못된 지식에 매여서 새로운 지식을 거부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감옥에 갇혀서 새로운 지식에 대하여 전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이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일입니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이라고 하는 분을 아실 겁니다. 아마 레닌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구소련 연방을 창건한 광신적인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와 함께 혁명을 일으켰던 동료가 레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레닌은 혁명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자나 먹으나 깨나. 꿈도 혁명 꿈을 꾸었다. 혁명이란 부르주아를 없애는 것이다. 부자를 없애는 거다. 지주와 권력자를 없애고, 지성인을 없애는 거다.' 그래서 혁명, 혁명, 혁명. 이것을 한평생 외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역사를 전진시킨 것이 아니라 후퇴시켰습니다. 복지사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 백만 명을 숙청하면서까지 혁명을 이루어보겠다고 몸부림을 쳐서 그 넓은 광활한 러시아 땅을 거지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러시아를 한번 여행해 보세요. , 이렇게 땅이 넓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비옥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좋은 여건인데 왜 못 사나? 왜 거지가 됐나?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 때문에, 잘못된 지식 때문에 거기에 붙들려 있는 동안 그만 자기도 죽고 많은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다.

역사를 되돌려 놓은 사람이 되고 말았더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바른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요한복음 1149절에 보면 가야바라고 하는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이 큰 소리를 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자기는 안다는 얘기죠.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죽여." 이런 생각은 철학적으로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어쨌든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그가 의인인지, 죄인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바 아니다. 죽여 버려. 이것이 가야바의 이론이에요. 가야바의 철학이에요.

 

이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고 저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진리를 떠나는 것이요. 진리를 모르는 무지함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무지란 하나님의 엄연한 현재적 심판입니다.

 

현재적 심판. 집행은 잠깐 유예되어 있지만 벌써 정신세계에서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고집과 집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무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을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용서하소서.

 

이 기도는 너무나 소중한 기도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한마디가 없었다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좀 외람된 얘기지만 만일에 예수님께서 만일에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 보자. 심판의 날에 전부 지옥불로 몰아넣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아니 세상에 이럴 수 있나. 내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병고치고, 가르치고 얼마나 많이 했는데 마지막에 이 꼴이 뭐람.' 세상을 그렇게 탓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내가 3년이나 가르쳐 놨는데 이 제자들이란 놈들은 뭐람. 어느 놈 하나 나와 같이 십자가에 죽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이게 제자들인가' 이렇게 만약 원망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절박하게 바로 그 모순된 부조리의 십자가를 지면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들을 사하소서." 놀라운 말씀입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내려오라. 남의 병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사람이 아니냐? 그 능력이 많은 사람인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라. 내려오면 믿겠노라.' 조소를 합니다. 비웃습니다.

 

이 비웃음을 당하면서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여러분, 이 순간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시던 분입니다. 큰 권세와 능력의 메시야가 이 많은 조소를 들으면서

 

'내려오라, 내려오라,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 하는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침묵했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억울한 말을 들을 때 꼭 한 마디 하고 싶지요. 침묵하세요. 우리는 할 수 없어서 당하는 거지, 할 수만 있다면 면하려고 할 거예요. 그러나 또다시 생각합시다. 능력을 제한하고 생각을 고치고, 침묵하세요. 침묵하세요.

 

여러분, 밀양이라고 하는 영화 보셨습니까? 못 보셨으면 이제라도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만든 아주 소박한 영화입니다만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되어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라운 것은 그걸 보고와도 뭘 봤는지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아주 의미가 있는 건데요. 그 작품상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은 신애입니다. 배우 전도연이 그 역을 합니다. 신애라는 여인의 남편이 시원치 않았어요.

 

사실은 못된 남편이었지만 어쨌든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아들 하나를 남겼어요. 그래서 그 아들 하나만은 꼭 바로 키워보고 싶어요. 그래서 생전 가보지도 못한 곳이지만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라서 애를 데리고 낯선 밀양을 갑니다.

 

거기 가서 어떻게, 어떻게 살면서 애를 키워보려고 애 하나에다가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이 아이가 유괴를 당했어요. 서울서 온 아주머니라서 뭐 돈이나 좀 있는 줄 알고 누가 유괴해서 산으로 끌고 갔다가 죽여 버렸어요. 유일한 소망인 아들이 죽었어요. , 얼마나 비통하겠어요? 그래 몸부림을 칩니다. 막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이 잡혔어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던 중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인도 받아서 교회 나갔어요. 그런대로 믿음을 얻었어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몸부림을 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지막에는 여기까지 생각을 했어요.

 

'용서해야지.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까짓것 용서해야지. 내가 이런다고 죽은 애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용서해야지' 그 마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말리지만 끝내 용서하기 위해서 감옥을 찾아갑니다. 용서하려고 찾아 갔는데 딱 면회하는 시간에 그 유괴범이 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이미 죄 사함 받았습니다." 이러고 나와요. 그만 화가 났어요. '내가 용서 안 하는데 누가 용서했냐' 이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 말 되거든요. 내가 원문을 읽을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라기보다 이미 내가 그러고 싶었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저를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나 먼저 저를 용서한단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 먼저 용서받을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를 빼앗아 가버린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마는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저를 용서한단 말이에요. 그가 바라는 것은 이 유괴범이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지어 잘못했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러고 나서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가 용서하기 전에 벌써 용서받았다고 그럽니다. 여기서 화가 난 거예요. 그 몸부림을 치는 건 이루 말도 못해요.

 

여러분,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해요? 나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또 용서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큰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오늘 예수님 기도하십니다.

 

이거 꼭 잊지 마세요. 이건 도덕적 용서가 아니에요. 이건 신앙적 용서예요. 저가 나에게 용서를 빌었기에 내가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용서라고 하는 높은 덕성으로 내가 저를 용서하는 것도 아니에요.

 

주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도 용서할 뿐이에요. 도덕적 용서에서 신앙적 용서로 차원을 바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용서를 비는 사람 용서하기는 쉬워요. 아니 침묵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의 용서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는 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노라'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내가 용서하노라'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최고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구제가 아니에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용서입니다.

 

그 말은 마음속에 있는 미움, 증오, 원망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거예요. 최고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긍휼입니다. 이것은 높은 차원입니다. 높은 차원에서 낮은 자를 향한 긍휼,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821절에 보면 넌센스가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다 보니까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하시거든요. 베드로가 기가 막혀서 한번 물어 봤어요.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 번쯤 용서할까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일곱 번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일곱 번 용서할까요? 그랬더니 예수님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말 있습니까? 여러분, 이거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용서 없이는 자유가 없어요. 용서 없이는 내 영혼이 깨끗할 수가 없어요. 아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건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천국 문을 들어설 수가 없어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벤허라고 하는 영화를 보셨지요? 벤허에 보면 처음서부터 끝까지 벤허가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하나의 박애주의자로서 노예로 팔려가서 매 맞고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끝까지 대항하지 않습니다.

 

박애주의자로서 끝까지 참고 견디고 인내합니다. 전혀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내와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찌 당신은 이렇게 끝까지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참고 견디느냐고. 그는 딱 한마디 대답을 합니다. '

 

내가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옆에 있었노라'. 예수님 그 모진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실 때 '그 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오는 순간 내 손에서 검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노라. 그 후로 나는 일생 손에 검을 쥐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하는 그 순간 그 속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내가 회개 못하고 있어요. 아니 회개 못하고 있어요. 회개할 마음도 없어요. 그러나 주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용서받은 바로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 여기에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요.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정죄할 자격도 없습니다.

 

누구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소라도 어려움이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까? 깊이 반성해 보세요. 용서 못하는 사건이 있어요. 아니 이건 용서할 수가 없어. 바로 그 마음 때문에 내가 죽어가고 내가 병들어 가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더 신비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의역해서 풀이를 한다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주여, 저들 대신 내가 지금 죽고 있습니다.

 

속죄 제물로 내가 대신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대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사하소서.'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그 소리가 귀에 들려옵니까? 들려오는 순간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용서받은 사람으로 아니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엄청난 용서를 받았고 또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건만 아직도 우리는 당연히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도 못하고 아니 이러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아직도 마음에 맺힌 바를 풀지 못하고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시던 그 귀한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게 하사 용서받은 사람으로 아니 용서하는 사람으로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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