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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누가복음 설교 모음

누가복음 10:27 - 37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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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10:25-37/ 안두익목사

2024-03-26 04:39:57

 

며칠 전에 중국 길림성의 한 한 쇼핑몰에서 노인이 물건을 사던 중에 뇌경색으로 뒤로 쓰러진 채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12분정도 의식을 잃은 상태인데 그 북새통 같은 시장에 178명이 그 노인을 빤히 보고도 어느 누구하나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한 여성이 신고를 해서 구급차에 실려간 이 사건은 지금 중국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tv에 나온 장면을 보니까 사람들이 쓰러진 할아버지 신체 위를 지나가는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도와주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요즘 중국이 자본주의 발달로 사람의 가치성, 사람의 소중성을 잃었다고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이웃나라의 이야기만 해당되겠습니까? 우리 역시 내 도움을 바라고, 내 관심을 갈망하는 이웃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오늘 우리는 장애우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내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36km정도 되는 그리 멀지 않는 길이지만, 예루살렘은 해발 760m나 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50m나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주변에 바위들이 많아서 도적이나 강도들이 자주 출현하는 곳입니다. 바로 그 길을 가다가 유대인 하나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거반 죽을 만큼 맞고서 길에 버려졌습니다. 옷까지 빼앗기고 죽게 될 정도로 매를 맞은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세 사람이 본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입니다. 여기 나오는 대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 지도자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두고 갔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1부 예배시간에 임박하여 차를 몰고 오는데 앞에 어떤 차가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손을 내젖고 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가정 해봅시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너무 안됐다. 내가 도와줘야 할 텐데! 하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겠지. 나는 한 주간 동안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새벽에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시간이 없다! 빨리 가야지.’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어냐?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저와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에게 있지 않습니까? 나의 일이 너무나 바쁘고 중요해서 꼭 해야 될 중대한 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강도만난 사람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 손을 뻗치지만 해야 할 바쁜 일 때문에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33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단어의 원어 표현을 보면, 내장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아파하며 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세우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왜요? 주님은 우리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끝난 인생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셔서 새 삶을 주시고 희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마음이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남들이 다 외면하는 거반 죽어가는 강도만난 이 사람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자신이 타고 왔던 나귀에 그 사람을 태워서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를 치료하면서 드는 비용을 나중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자기 길을 갔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강도들이 자주 출현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가다 오히려 자신이 강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을 보살펴 줍니다. 상처를 치료해주고 자신의 나귀에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갑니다.여러분, 진정한 도움은 내가 넉넉하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돕는 것입니다. 안전하거나 평안하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고 불쌍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돕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도움입니다.여러분, 삶이 힘드십니까? 힘들 때일수록 나보다 더 힘들고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는 이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주님이 가지셨던 사랑의 마음으로 잠시만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내 힘든 삶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었던 그 작은 사랑을 주님은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께서는 오른 쪽에 있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35-36) 그 때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공궤하였습니까?” 주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볼 수 있는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베풀고 도와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두 번째 이유는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이 정책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방인들과 뒤섞여 살면서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일들이 생겼고,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었다는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 더 미워했습니다. 멸시했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면 부정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자신들을 사람 취급도 안하는 유대인이 길바닥에 피투성이가 된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원수가 있는데 누가 동정이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들을 그렇게도 미워하고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세 번째 이유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을 다해 그를 치료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자기 나귀에 타우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주막 주인에게 자기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사업 때문에 여행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행 중에 있었고, 여행 도중에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도 만난 그 사람 때문에 여행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성껏 보살펴 준 후에 그는 자기의 계획대로 여행의 길을 계속 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계획했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올 때에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거나 보살펴 줄 때 들어간 경비를 자신이 책임질 테니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보살펴 줄 사람이 있는 주막까지 데리고 온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그를 못 본 체 하고 피해 가버렸지 않습니까? 그러니 동족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설움당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냥 지나간들 아무도 그를 향해 못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까지 데리고 간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칭찬받을만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속해서 돌봐줄 수 없으니 주막 주인에게 그를 맡기고 자기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와서 치료해 준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1회성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치시고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누가 이웃인지 찾지 말고,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인지 따져 묻지 말고 네가 그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냉랭한 마음? 단순한 동정의 마음? 그것이 아닙니다. 내 아픔처럼 느껴지고 내 일처럼 생각될 때 비로소 참된 이웃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구역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전도가 가능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위스콘신 주에 어느 한 청소년이 암에 걸렸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고 머리가 다 빠져 버렸습니다. 특별히 청소년기에 외모가 얼마나 신경 쓰입니까? 항암 치료를 다 받고나서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어떻게 해야 될지 정말 고민이 되었습니다. 여자 친구들은 어떻게 만나며, 또 친구들은 어떻게 볼지를 말입니다. 저녁 늦게 퇴원하여 집으로 갔는데 반 친구 5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0여 명의 친구들이 모두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 일화가 미국 매스컴에 보도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들이 이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이웃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오히려 강도처럼 필요한 것을 빼앗아 오는 사람은 아닌가요? 내가 생각하는 이웃과 주님이 생각하시는 이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 다음에야 우리는 이러한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보통어려운 이웃하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한 두 사람이어야 도와주지!’ 혹은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남을 도와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무리해서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를 돕는 방법을 보십시오. 우선은 강도 만난 사람을바라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의 눈에서 새로운 주님의 눈으로 보는 눈을 바꾸어야 합니다. 낮은 사람을 높일줄 알고, 천한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알고, 헐벗은 사람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봉사의 눈을, 사랑의 눈을 가져야 됩니다. 정욕의 눈은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 교만한 눈은 그런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봉사하고 섬기며 사랑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모습을 이야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도움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우선은 그들을 바라보며,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나눌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돕는 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 도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지금 옆에 앉아 있는 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옆에 있는 분에게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미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나라는 어느 때보다 더 손을 펼쳐야 할 이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 장애인이 전 국민의 10% 500만 정도입니다. 여기에다 해마다 늘어나는 장애인이 아주 많습니다. 교통사고로 일 년에 만 명이 죽고, 오만 명은 평생 불구자가 됩니다. 뇌를 다친 사람, 척추를 다쳐 일어나지 못하는 분이 오만 명이나 됩니다. 산업재해로 삼만 명이 불구자가 됩니다.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기계에 손, 발이 잘린 사람이 일년에 삼만 명이나 됩니다. 질병과 의료사고로 일 년에 삼만 명 나옵니다.

 

기형아 100명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4.7명이나 됩니다. 일 년에 2만 명의 기형아가 생겨납니다. 노인 장애인들도 해마다 3만 명씩 생겨나고 있고요, 또 에이즈 환자가 얼마나 많고, 알콜 중독자가 전 국민의 10%이고, 마약 중독자가 지금 얼마나 늘어나고 있습니까? 교도소에 갇힌 자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에 수많은 가정이 파탄하고, 사업이 실패하고 소년, 소녀가장 까지 하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정부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1000만 우리 성도들이 깨어서 우리 이웃을 돌봐야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지.. 나라가 이것을 다 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정신을 차려야 되고, 지금까지 하느라고 했지만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더 열심히 더 많이 해야 되고, 지금 경제는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하는데 이제 마지막 더 갈 곳 없는 사람, 더 이상 덮을 이불도 없는 사람, 더 이상 팔아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나의 작은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내 이웃이 보이십니까? 우리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때로 그들 중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지경 빠진 사람처럼 정말 간절하게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내가 섬기고 도울 이웃이 보일 것입니다. 이번 25일에 우리 교회는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등대 교회에 여성인들을 위한 노숙자 쉼터를 마련하기 위해 사랑의 콘서트를 엽니다.

참 감사한 것은 바쁜 가운데서도 어려운 이웃을 섬기기 위해 연예인들도 오고 정치인들도 오고, ccm 가수들도 오고 대학의 교수들... 다양한 분들이 오셔서 이웃 사랑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웃을 돌보는 이 소중한 시간을 교회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팔을 뻗어 주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현대인에게는 큰 죄가 있는데, 고독입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생각 때문에 이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자식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남편도 없고 아내도 없습니다. 이웃이 없습니다. ? 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너도 가서 이 와 같이 하라! ’

 

 

 

 

 

나는 어떤 사람인가? /10:29-37/ 崔仁根 牧師

2023-07-10 23:41:29

 

철학자 소크라테스는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이처럼 짧고 어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말을 했던 소크라테스 자신이나 오늘 우리 모두가 자신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으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하나님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도무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 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에 관한 놀라운 진리 하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6:8-1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여기에서 특별히 밑줄 친 부분을 오늘 가슴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이 누구인지를 천명하는 가장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밝혀졌다면 이제 거기에 합당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우리들이 이제 과연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을 오늘 본문에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인간은 여러 종류였습니다

 

(10:30-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종류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슴 없이 이웃에게 해를 가하는 날강도들과 졸지에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유명한 지도자들과 그 지도자들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친히 반문하셨습니다. 이 세 사람들 중에 즉,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인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스스로 잘산다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잘사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비로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나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든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다든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스스로 잘난 것은 될는지 몰라도 하늘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한 가지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말입니다. 나는 강도와 같이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연약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레위인과 제사장들과 같이 허울은 위대한 종교지도자이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하는 표리부동한 사람인지, 아니면 욕을 먹으며 살고 있을지라도 이웃의 아픔을 지나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도와주는 사마리아 사람인지,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서 오늘 고민해 보는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중한 생명을 받고 죽어도 다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하나님의 구별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지난 4 13일 밤 10시 쯤 켄자스에서 16살 먹은 소년이 쌍둥이 동생을 데려오라는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어떤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주인이 나오더니 머리와 팔에 각각 총을 쏘아 총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미주리주에서 16세 흑인 소년이 총격을 당했다. 잘못된 주소를 받아 심부름을 가서 생긴 일이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경찰에 따르면 13일 오후 10시쯤 캔자스시티 주택가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현지 검찰은 17일 총을 쏴 부상을 입힌 84세 백인 남성을 1급 폭행죄와 무장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16세 흑인 소년 랄프 얄은 부모님 부탁으로 쌍둥이 동생을 데리러 갔다. ‘노스이스트 115 스트리트노스이스트 115 테라스라는 주소가 혼선을 빚은 게 사건의 빌미가 됐다. 결과적으로 다른 집을 찾아간 얄은 초인종을 두 번 누른 후 총을 두 방 맞았다.

 

총격을 가한 앤드류 레스터는 얄의 머리와 팔에 각각 한 방씩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중앙일보 2023 4 19일자에서 발췌)

 

과연 랄프는 총을 맞아야 할 엄청난 잘못을 저지는 것일까요? 전혀 아니지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아주 작은 일에도 갑질을 하며 고통을 주는 가해자와 어이없이 총을 맞은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존은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지금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교 폭력과 전세 사기 사건이 그렇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못생겼다는 이유로,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끝내는 자살을 하거나 심각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전세를 내주고 돈을 받은 다음 전세 기간이 만료 된 후에 돈을 내주지 않고 주거지를 팔아버림으로 한 순간에 전세를 떼이고 길거리로 쫓겨나는 피해자가 2,400세대에 이르고 그 피해액만 2천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비관하여 20-30대가 3명이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누군가는 고통을 주고 또 누군가는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가해자입니까? 아니면 그와 같은 악랄한 가해자로 인하여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수도 없는 악한 인간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예수님께서 이처럼 악한 자들로부터 시험을 당하던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본문으로 돌아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5-2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율법사가 예수님께로 나와서 질문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29절에는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예수님께 또 질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자가 그 예수님께 옳게 보이려고 했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올무로 엮으려고 했던 인간이 그와 같은 예수님께 잘 보이면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악한 인간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망한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이요 현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끊임 없이 이웃을 공격하고 전쟁하면서 스스로의 욕망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으로 러시아의 푸틴이

 

그 아까운 젊은 생명들을 우크라이나에 보내어 죽게 하고 선량한 우크라이나의 백성들을 죽이고 있는 모습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도와 같은 악한 자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듬고 강도 만난 자와 같은 불쌍한 이웃들을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함께 마음과 사랑을 모아 이처럼 소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가족들이 서로 총질하고 미워하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며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수단에서는 내전이 일어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같은 민족끼리 총과 대포를 쏘아대며 며칠 사이에 400명이 주고 4천여 명의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총과 대포는 우리나라의 선량한 백성들을 지켜내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웃끼리 서로 죽이는데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입으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 처럼 이웃 사랑을 외치지만 정녕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을 때는 피해서 도망가는 비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성도들이니 우리들도 조건 없이 섬기고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명령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0:36-37)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잘난 척하고 예수님까지도 시험하였던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별하신이 세 사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가 원수지간이었고 특별히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인간으로조차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고 남은 백성들이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어 태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함께 예배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사조차도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여 극렬하게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별도로 산당을 짓고 예배드려야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습니다.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던 것도 그들만의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19:16)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19: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도 다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보다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중심에 있는 진실을 바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12:10-13)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못하게 금하고 있지만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안식일 법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율법이나 말씀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올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법을 만드시고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자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이 믿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못내 그 불쌍한 사람을 피하여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으로도 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불쌍한 강도 만난 피해자를 도와주었습니다.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그 어떤 종교적인 이론과 성경적인 교리보다도 더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푸는 정성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대로 제사장과 레이인과 같이 그들이 믿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이처럼 불쌍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정작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정성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가르치시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희생하고 도와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가르치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는 구별된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종할 수조차 없는 더럽고 부정하게 태어나고 살아가는 천박한 사람일지라도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알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가장 소중한 예수님의 제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워싱턴주에서도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불쌍한 이웃이 위기와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면 처벌을 받게 되는 법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말입니다. 나는 성경교리를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도 외면하는 종교인인지,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강도인지, 비록 사회적으로는 욕을 먹으며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초라한 존재일지라도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소중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까지도 고통당하는 이웃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사랑의 사람인지, 깊이 한 번 고민하며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천 번 만 번 죽어야 할 죄에서 해방 되었고 우리들을 그렇게 자유케 하시려고 살을 찢고 피를 흘려 희생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힘차게 소생하고 일어나는 아름다운 봄의 계절에 우리들의 영혼도 이처럼 새롭게 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멋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5-37/ 이병권목사

2020-09-23 06:55:56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법률적인 용어가 있기도 하고, 교회 밖에서도 사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구제 사역이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할 때 인용이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귀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비유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라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비유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 비유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라는 내용만 생각하는 것은 이 비유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30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럼 30절부터 읽으면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30절에서 37절까지만 읽으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구나!’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입니다. 이 배경을 잘 파악하는 것이 비유를 목적에 맞게 이해하는 포인트가 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비유의 시작을 25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알아야 비유의 목적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여기 어떤 율법교사가 나옵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님이 어느 정도 되는 랍비인지, 그 인기가 과장된 것은 아닌지 알아보며,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 율법교사의 질문의 의도는 잘못되었지만, 질문 자체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 꼭 가져야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세상 사람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요? ‘영생, 그런 게 어딨어!’ ‘영생은 종교에서 만들어낸 거야!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영생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원한 존재로 태어나서 영원히 삽니다.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나지만 그 후에 정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어디서 보내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영원한 천국이냐 아니면 영원한 지옥이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말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시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교사가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이 율법교사는 신명기 6:5절 말씀과 레위기 19:18절 말씀을 함께 말합니다. 율법에 대한 완벽한 요약, 그 핵심을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그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는데(22:37~40) 이 율법교사도 같은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이 대답 자체는 아주 훌륭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 맞다! 그 율법을 지켜 행하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떠십니까?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십니까? ‘그래~ 맞아!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 맞습니까? 아니죠! ? 이건 좀 이상한데 이런 생각이 드시죠?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마치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안 좋은 마음으로, ‘그래 너 고생 좀 해봐라하는 마음으로,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의 거울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어서 그가 율법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율법교사가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봤다면, 자신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음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음을 알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 율법의 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못합니다.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합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음을, 그래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신다면 바로 자신이 그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율법에서 명하는 하나님 사랑,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유대인이 생각했던 이웃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이웃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켜야 할 사랑의 한계, 최소한의 경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을 넘어간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읽은 겁니까?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편한 대로 읽은 겁니다. 원래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는 다르게 읽은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은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울타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은 울타리 안에 둡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이웃입니다. 하지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적이고 원수로 생각합니다. 결국, 사랑할 만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그럼 누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일까요?

 

기본적으로 유대인들,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은 울타리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도 세리와 죄인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기준은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고,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교사는 자신이 좀 더 넓은 울타리를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려고 예수님께 이 기준에 대해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웃 사랑하기가 참 쉬워지죠?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사랑하기에 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울타리 밖으로 보내면 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맞춤식으로 율법을 읽은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 이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이웃이라는 말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대해 율법의 원래 의미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 그가 도달할 수 없는 그 율법의 기준을 일깨워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준을 낮추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 그 원래 기준을 분명히 알려주시고, 사람들이 낮추어놓은 기준을 다시 원래대로 높이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깨닫도록, 그리고 그 기준을 자신이 온전히 순종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실제로 당시에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한 산지를 따라 길이 이어졌고, 지형적인 특징으로 큰 바위와 동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들이 많이 활동했었는데, 바위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렸던 것입니다. 아마 이 비유를 들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쉽게 공감하며 그 지역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위험한 지역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냥 가진 것만 빼앗기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을 정도까지 때린 후에 버리고 갔습니다. 여기 옷을 벗겼다는 것은 이 사람의 소유를 모두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옷도 돈이 되는 물품이기에 강도들이 뺏은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까지,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죽을 만큼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19에 신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려달라고 소리칠 힘도 없고, 소리친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고통 속에서 외로이 죽어가는 겁니다.

 

그런데마침극적으로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이라면 여기에 죽어가는 자를 충분히 도와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어떻게 합니까?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여기피하여 지나갔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맞은편으로 발길을 옮겼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분명히 그를 보았지만 그냥 피해갔습니다. 일부러 가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어서 곤경에 처한 그를 외면한 것입니다.

 

다음에 등장한 사람은 레위인 입니다. 이 레위인도 종교적인 일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일반적인 업무에 종사했고, 제사장을 돕고, 성전을 관리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제사장과 똑같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의도적으로 피하여 모르척하고 지나갑니다. 두 번에 걸쳐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지만,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에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서로 경멸하며, 원수로 지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기준에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이라는 울타리에서 저 멀리 끝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으로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고 별 감흥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그냥 봐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서운 사람이 지금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상황을 모르고 보면, 누가 봐도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지목할 사람입니다. 아니 더 빼앗아 갈 것이 남았나? 아니면 완전히 끝을 내려고 온 건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를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그에게 가까이 갑니다. 그를 보고 피해 갔던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상처를 위해 응급처치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냥 맡기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하룻밤을 함께 머무르며 그를 간호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이 모두 제공합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돌보아 주기를 부탁합니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수고와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물질을 희생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내 이웃이 누구인지, ‘너는 내 이웃이 아니야! 너는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고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잘못된 질문을 바꾸십니다. 율법교사는내 이웃이 누구인가?’ 질문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내가 누구의 이웃인가?’ 하는 겁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내 이웃이 누구인지 구분하며 내가 사랑할 만한 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사람들을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으로 구분하며 율법을 제한시켜왔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이웃임을 율법의 원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예수님은 분명하게 율법의 높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도 율법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끝이 납니다. 율법교사가 그 후에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이제야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켰는지, 아니면 계속 자신의 고집대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영생과는 반대의 길로 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요? 그것은 이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는 율법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읽은 대로, 그가 이해한 대로, 그가 믿는 대로 산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이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의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우리가 삶에서 어떠한 태도로 이웃을 대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도와 준적이 있습니까? 나의 손해를 감수하고서, 나의 시간, 나의 수고, 나의 물질, 그 모든 것을 아주 관대하게 누군가를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뭔가를 바라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푼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이웃 사랑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그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이웃을네 자신같이사랑하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만큼 이웃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그러한 이웃 사랑의 범위는 조금 더 넓힐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조금 더 넓혀 나의 가족,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 범위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 원수를 위해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교사가 했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율법의 기준이 불가능할 정도로 높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식으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비유에서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일은 놀랍게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못 하는 것을 이 사람이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항상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을 알잖아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힘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물론, 정말 그렇게 할 때도 있죠! 하지만 항상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아니, 이웃에게까지 가기 전에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잘 안 됩니다. 내 배우자를 항상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합니까? 때로 배우자를 통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아니라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하나님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약 영생이 나의 노력으로 행함으로 얻어야 한다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셨습니다. 자비로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치 강도를 만나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자와 같았던 우리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행한 것과 관계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이제는 우리를 바꿉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을 때 율법을 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저주입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 말씀을 보십시오. 생명을 가진 자로서 보면 어떻습니까? 생명이 있을 때 율법을 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율법의 참 목적과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허락하신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이웃이 되겠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본을 따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비추어서 우리가 어떤 자인지 제대로 보시고, 그런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넘치는 은혜를 찾으시고 그 은혜를 제대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위주로, 내 편한 대로, 내 기준대로 읽으며, 나 정도면 괜찮다고, 나는 자격 있는 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와 같이 되는 겁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착각 속에서 사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 있는 그런 교만함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는 질문 앞에 스스로를 점검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며 그 은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은혜를 나누며,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한일 관계 /10:30-37/ 다끼모도 쥰

2015-06-24 23:52:30

 

적을 도왔던 사마리아인

 

선한 사마리아인이, 길에 강도만나 쓰러져 있던 유대인을 도운 것은

자기에게적과 마찬가지인 사람을 도운 것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대적이 있다.

나에 대해서 뒤에서 소곤대거나,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

마치 나에게 대적과 다름없는 사람이

하루는 강도만나 길에 쓰러진 것 같은.. 큰 환란을 당한 것을.. 내가 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말로는거 참 안 되었군요하지만

속으로는거봐라, 내 욕하고 다니더니만 꼴좋다. 속이 시원하구나!’ 이런 마음이 든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하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일단 쓰러진 사람은 살리고 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그를 도와주게 된다.

 

본문의 사마리아인을선한 ~또는착한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자기 동족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기들과 원수지간인,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을 도와준 것이었다.

 

앞서 제사장과 레위인..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과 같은 동족/유대인들이었다.

같은 동족이면서도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서, 도움 주기를 회피했는데..

 

사마리아인은, 전혀 도울 의무가 없고..

오히려 강도만난 유대인을 보고서거 참 잘 됐다며 고소하게 여길 처지인데

그런 인간의 본능적 복수심을 물리치고.. 일단 위기에 처한 적을 돕고 본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가 내 친구이든지/내 대적이든지/나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든지

어떤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일단 돕고 볼 일이다.

 

 

일본의 저희 교회 이야기

 

일본에는, 한국과 달리, 교회가 많지 않다. (설교자는 일본 목회자)

교회도 많지 않은데, 교회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은, 인구가 35천명인데,

교회는.. 저희 교회 하나 뿐이다.

저희 이웃 교회는, 저희와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다.

 

한국에는 교회가 따닥따닥 붙어있어서, 어쩌면 서로 부대끼기가 필연적이다.

제가 얼마 전에, 성남의 어느 교회에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주소를 들고 찾아가서, 바로 그 교회인줄 알고 들어가서 앉아있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에 붙은) 이웃 교회에 제가 찾아갔던 것이다.

 

그 교회 목회자는, 새신자가 찾아온 줄 알고, 저를 반겨주셨지만,

제가오늘 강사인데요하니까,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두 교회가 바로 붙어있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일본에는 교회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제가 일본처럼 '이 근처면, 이 교회가 맞겠지'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국에는, 교회들이 이렇게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선의의 경쟁에서 오는 서로간의 갈등과 대결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일본은

교회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서로 교회끼리 갈등하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하다. 아마 마귀가 그런 것을 더욱 부추기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에, 저도, 이웃 교회 목회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한 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그 목회자는

저와 저희교회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고 다닌다는 말을.. 제가 전해 듣게 되었다.

 

일본에는말을 전달하는 새같은 것이 날아다닌다.

새처럼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면서,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일본에 성행한다.

 

하루는 제게도 그가 날아와서

이웃교회 목회자가, 저와 저희교회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고 다닌다는데,

들어보니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전도에 특별히 열심인 교회였다.

그래서 1시간이나 떨어진 우리 동네까지 와서, 어느 고등학교 앞에서 정기적으로 전도하는데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그런데 저기 십자가가 보이죠?

그 교회는 가지 마세요. 좀 안 좋은 교회입니다라고 전도한다는 것이다.

 

아마 저와 우리교회가 오순절적인 분위기라서

그런 오순절 신학/신앙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진 목회자인 것 같았다.

(아마 신학교에서 그렇게 비판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저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몹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 동네까지 와서 전도하는 것도, (다른 지역도 많은데)

별로 내가 환영할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런데 그 이웃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하루는 또가 날아와서, 제게 이렇게 말을 전해 주었다.

 

목사님, 들으셨습니까? 쥰 목사님을 나쁘게 말했던 그 목회자가

자기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겨서, 교인들이 절반이나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병이 나서 드러누워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 저는 표정관리를 하면서그 참, 안 되었군요!’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떤 시원하고 후련함을 느꼈다.

나를 비방하고 다니더니.. 거 봐라..’

 

시일이 더 지나서, 그 이웃교회 목회자 부부가, 하루는 우리 교회로 나를 찾아왔다.

그들 부부의 눈빛을 보니,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들과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때 갑자기선한 사마리아인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사실 그는, 나에게적과 다름없는 형제였다.

적 같은 형제, 지금 자기 교회에 강도 만난 것 같은 큰 문제가 생겨서,

뭔가 도움을 구하러 내게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저 인사치레로 차 한 잔 대접하고는, 돌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을 생각하면서, 적 같은 형제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 목회자와 대면해서, 그의 말을 들으면서 교제해 보니,

’(말 퍼뜨리는 사람)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던 말의 상당부분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그를 오해한 것을반성했다.

또한 그도, 나를 오해한 것이 있었다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도시와 교회는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를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한다.

 

그는, 자기 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저도 목회를 하고 있어서, 다 이해되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이었다.

 

제 아버지가 목회자여서, 저는 어려서부터 목회 현장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런데 목회는 참 이상한 것이어서,

교회가 사람이 좀 많아지면, 꼭 문제가 생기면서, 분열되었다.

그 결과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상처를 받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몇 년 동안 힘든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교회에 성도가 많아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이제 회복되었다며 모두가 기뻐하며,

이제 다시 재도약을 기회를 맞았다고 흥분하는데.. 그때 또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서 또 상처를 입고, 실망해서, 인내해야 하는 시기를 거친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저는 어려서부터 쭉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의 실패담을 듣다보니,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겪었던 비슷한 일이 생각났다.

우리도 비슷한영적 전쟁을 겪었는데,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제가 한 가지 배운 영적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와 나누었다. ↙

 

교회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영적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자연히인간적인 원인으로 돌린다.

그러나 교회 문제는, 표면은 인간적인 갈등이지만, 그 이면에는 영적 전쟁이 있다.

 

그렇지 않고, 교회 문제를 인간적 갈등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 되는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 다 해결될 줄 기대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A가 사라지면, 교회가 잠잠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얌전했던) B가 새롭게 나타난다. 그는 A보다 한 술 더 떤다.

이제는 제발 B가 사라져주기를 간절히기도까지 한다.

 

그래서 B가 사라지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이제 C가 나타나서 악역을 담당한다.

(이런 갈등의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지도자의 성장/변화이다.

지도자가 성장/변화가 빨리 빨리 안 되니까.. 같은 문제가 계속 불거지는 것이다.)

 

한국에도 있겠지만, 일본에두더지 잡기놀이가 있다.

망치를 들고, 올라오는 두더지를 때리는데,

두더지가 어디서 올라올지 몰라서.. 당황한다.

 

마치 목회 중에 발생하는 문제는두더지 잡기와 같다고 본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두더지가 올라오며,

하나를 때려잡으면 또 올라오고.., 또 때려잡아도 또 올라오기 때문이다.

 

교회 내 갈등을 영적 전쟁으로 보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마귀를 대적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친다.

그 사람을 대적하고, 그 형제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를 대적하고, 영적 권세를 물리치는 것이다.

이런 영적전쟁은 .. 깨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특별한 깨우침을 주셨는데,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중보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편안하려면.. 지역사회가 편안해야 하고,

지역사회가 편안하면.. 교회도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갈등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지역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노력을

(기도를 통해서 지역을 중보하는 영적전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에 다니는 성도, 또는 교회에 새로 전입해 들어오는 사람은

결국 지역사회에 사는 주민들이다.

 

지역주민이 교회에 들어올 때, 그 지역의 영적 영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가만히 뜯어보면,

그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거의 비슷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나, 특히 새신자는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듯이) 지역의 영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교회 안에 성령의 지배가 약화되면, ‘세상 영/그 지역의 영이 활개 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세상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해서, 그 세상 영을 지배하지 않으면

도리어 시기, 분열, 다툼, 거짓, 당 짓기, 음란, 물질 욕심 등,

강력한 세상 신spirit이 교회에 들어온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 분위기와 엇비슷하게 돌아간다. 아니 세상 분위기와 똑같이 돌아간다.

- 이것이 교회가 강력한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에서는 새신자가 오면 크게 환영한다.

너무 새신자가 안 오는데, 가끔씩 새신자가 오면 얼마나 반가운가!

그런데 너무 좋아라 할 일만은 아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새신자가 들어올 때, 그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었던세상 영이 따라 들어온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그 새신자를 통해서/ 이면적으로는 세상 영을 통해서

교회가 한 번 홍역을 치를 수도 있다.

물론 기(이미 旣)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회는, 아예 그 도시의 영적 분위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 도시에 교인들도 살고 있기 때문이고,

교인들은, 성령의 영향도 받지만,

그 도시의 (악한) 영적인 기운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렘29:7

 

그래서 저희는, 저희가 사는 도시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이 도시에 모든 마귀(악령)들의 역사를 대적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서부터, 교회 안에 문제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교회가 굉장히 평화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람의 영적 상태와, 그 지역의 영적 상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우리 교회가 겪었던 영적 전쟁의 경험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 교회도, 그 지역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영적전쟁을 싸울 때

교회의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나는 일러 주었다.

(이것이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나중에 그 교회 사정을 듣고는,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도시에 있는 산은, 특별히신령한 산으로 불리었고,

그 지역은 특별히 절temple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목회자는, 예전에는절은 절이고, 교회는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나의 조언을 듣고, 그는 성도들과 함께 도시를 위해 중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문제가 생길 때도,

적이사람이 아니라, 마귀와 악령임을 분변하고,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기도를 계속 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 교인들 가운데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원래 이 목회자는, 오순절/은사주의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었으나,

거듭되는 교회 문제를 통해서 마음이 겸손해져 있어서, 이런 신앙을 겸허히 수용하였다.)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이 그 지역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사이에

어느 절에 있는 주지승의 딸이, 먼저 그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딸은 자기 아버지(주지승려)가 좋은 일을 한다고 이제까지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게 귀신의 역사(굿 같은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아버지 주지승려도 너무 머리가 아프게 되었고,

교회 와서 기도 받으면, 신기하게 두통이 사라지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해서 경험하고는

그 주지승려도 자기 승려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의 일가족 4(,,,) 모두가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주지승려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자기 간증문을 인쇄물로 만들어서

자기 절에 다니던 모든 신도들의 집에 우편으로 발송했다고 한다. 전도를 위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는.. 한국과 일본 사이와 매우 비슷하다.

 

성경적 배경

솔로몬 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왕국이 시작되었는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면서, 그들이 혼혈되면서.. 사마리아인이 생겼다.

그러니까 원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조상/같은 혈통/같은 12지파였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전에 서로 같은 민족이었는데,

앗수르의 혼혈정책 이후로,

유대와 사마리아가 서로 견원지간으로 멀어졌다.

 

비슷하게, 일본과 한국은 뿌리가 같은 민족이었다.

일본인의 DNA를 조사하면, 70%가 한국인의 DNA와 일치/유사하다고 한다.

 

원래 일본 원주민은 수렵을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런데 4세기 경, 규슈 지방부터, 농경문화, 철기문화, 고분 매장법이 차츰 시작되었다.

그것은 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전래한 문화였다.

 

예전에 일본은, 가야문화와 일본문화가서로 섞였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학문적 정직성으로 말하면, 가야문화가 일본에건너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년에 NHK(일본방송)가 이 사실을 시리즈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를 계기로)

한국-일본이.. 마치 유대인-사마리아인처럼 .. 서로 멀어져버렸다.

원래는 같은 뿌리root이었는데 말이다.

 

한국과 일본이 연합하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예언자적 음성)

한국과 일본이 혈통적으로같은 뿌리라는 동질성을 회복해서

영적인 영역을 넘어서.. 모든 면에서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북통일에도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통일한국일본이 서로 연합하면

앞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본다.

 

정말 영적인 영역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일 두 나라의 연합을 통해서.. 세계의 지도자 나라로 부상할 것이다.

(그래서 한-일 월드컵이 2002년에 치러졌는가?)

 

나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교회적 차원에서부터, -일 두 나라의 연합이영적전쟁

지금보다 몇 배 더 친밀해 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긴요한 '전략'이 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하는 죄 /10:30-37/ 이동원목사

2014-12-04 15:42:29

 

우리가 추석절과 같은 명절은 자 연스럽게 가족을 생각하고 또 가족 들과 함께하는 그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계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 합니다.

 

이번 추석 특집 KBS 프로 그램 가운데 이야기 좌담, 토크 쇼 로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인의 멋 이라는 그런 좌담을 잠시 청취한 적 이 있습니다. 이때 출연한 러시아 사람 교수에게 사회자가 이런 질문 을 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 살고 한국 사람을 접촉하고 한국을 연구 하면서 한국인에게 단점과 장점이 있겠지만 한국인의 장점, 저력을 하 나 들자면 뭐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이분이 서슴없이 상당히 유창한 한국말로 그것은 가족주의라 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더 라구요.

 

가족주의 그것은 가족을 특 별히 귀하게 생각하고 가족의 견고 한 유대감 이것이야말로 IMF 나 한 국이 역사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 치고 나온 저력이다. 저는 그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객관적인 외국 인의 시각에 비친 그 견해로서 타당 하다는 것을 저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제 마 음 속에는 한국인이 견고한 가족주 의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국인의 가족관은 때때로 그 범주가 범위가 너무 좁다는 생각을 저는 했 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 사 람들이 자기 집안에서는 그 집안의 물건을 아끼고 집안 사람들을 소중 히 여기고

 

하지만 일단 집 밖으로 나갈 때는 공공 건물이나 공적으로 쓰는 기물 같은 것은 우리가 소홀히 하고 또 쉽게 쓰레기를 방기하는 이런 모습들, 이것은 흔히 의식의 밑바탕에 이것은 여기는 우리집이 아니니까 라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 하고 있다는 말이죠.

 

또는 가족들 을 유달리 아끼고 사랑하고 또 조심 성스럽게 가족에 대한 우리들의 애 정을 표현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 해서는 때때로 아주 거칠고 무례한 모습들을 보이는 겅우들이 있습니 다.

 

이런 의식의 밑바탕에는 우리 식구가 아니니까,

내 사람이 아니니 까라는 의식이 지배합니다. 저는 한 국이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선을 향 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가족관이, 가족의 개념이 좀더 넓어 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의식 의 전환, 공동체를 커다란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집, 우리의 사회로 볼 수 있는 이런 안목, 그래서 이웃 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우리의 가족 과 우리의 이웃으로 이웃을 발견하 려는 그런 노력이 어느때 보다도 아 쉬운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21세기를 향해서 나아가는 이 시점 에서 한국교회, 한국 사회앞에 주 어진 과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웃 사랑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 리는 지금까지 죄에 대한 여러 가지 시리즈의 메시지를 말씀을 함께 나 누었습니다.

 

우리는 죄하면 하지말 아야 할 것을 한 것을 먼저 떠오르 게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는 살인했고, 간음하지 말라. 그 런데 우리는 간음했다. 그것은 죄다. 그것은 아주 실감있게 느껴져 옵니 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마땅이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한 것. 그것도 죄라는 이런 인식은 상당히 빈약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성경에 야고보서 4 17절에 보시면 '사람 이 선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 '.

 

그것도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셨 어요. 영어로는 하지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을 'sins of commission' 'commission' 이라는 단어를 씁니 다. 반대로 마땅히 해야 할 줄로 알 면서 하지 않은 죄를 말할 때는 'commission'에서 'c' 자를 빼고 'omission' 이라고 말합니다.

 

'sins if omission' 마땅히 해야할 줄 알면 서도 행하지 않은 것 그것도 죄입니 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줄 알면 서도 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것 그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한 것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왜 죄인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 어떤 죄악인가를 우리가 대답을 얻 기 위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 한 누가복음 10장 본문에 나타난 선 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번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웃을 사 랑하지 못한 것 그것이 어떤 죄일까 요? 첫째로 그것은 주님의 가장 커 다란 계명을 불순종한 범죄다. 이렇 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비 유를 주께서 말씀하신 그 배경이 도 대체 뭡니까? 그 배경은 25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누가 복음 10 25 절 부터 읽어 보시면

 

'어떤 율법사 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 시되 율법을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여 목슴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 과 같이 사랑하라'

 

그랬더니 29절 에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렇게 다시 주님께 반문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래서 시작되 는 이야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야 기가 바로 오늘 본문 30절 이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같 은 말씀이 마태복음 22장에도 기록 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어떤 계명이 가장 커다란 계명입니까? 어떤 계명이 가 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가장 큰 계 명입니까?

 

네 마음을 다, 목슴을 다, 뜻을 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 하라 그랬더니 다시 율법사가 반문 하기를 내 이웃이 누굽니까? 이렇 게 질문을 대답을 주고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 리면 예수님의 대답은 뭐예요? 네 이웃이 누구냐? 네 이웃은 옆 집에 사는 사람, 우리 아파트 바로 앞동 에 바로 앞에 사는 사람만이 내 이 웃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그 사 람이 내 이웃이지만,

 

내 가족 내가 늘 어울리는 친지 친구들만이 내 이 웃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 여리고 길처럼 내가 걸어가는 인생 길에 내가 발견하게 된 피흘려 쓰러 져 누워 있는 사람, 나의 사랑을 요 구하고 내 관심을 요구하고 또 내 주목을 요구하고 내 앞에 누워있는 사람, 그는 누구이든 내 이웃일 수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도윱과 사랑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내 이 웃으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 그것 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말 하는 이웃에 대한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절 대로 나누어 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커다란 계명 안에 이 두가지를 함께 말씀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 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의 계명은 왜 나누어질 수 없을 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위대 한 사랑의 장 그러면 어떤 장이 생 각나세요?

 

고린도 전서 13장이겠 죠?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 장 위대한 사랑의 장은 사실상 고린 도 전서 13장이 아니예요. 사실 고 린도 전서 13장은 그전에 있는 12, 13, 그다음 14장 까지 합해서 그것 이 영적 은사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유익을 가져올 수가 있느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들을 사랑 으로 사용할 때 사랑의 태도로 내 은사와 재능을 발휘할 때 그것이 공 동체 유익을 준다. 사실은 은사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다가 샌드위치 처럼 잠간 끼어들어간 것이 13장입 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장 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 일서 4장입 니다. 아니 요한 일서 4장에 무슨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위대한 말씀.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러나 그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은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 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 었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재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어디에서 제일 잘 나타났다구요? 십자가에서. 누구를 통해서? 십자가 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를 넘어서는 사랑. 조건이 없는 사 랑. 초월적인 사랑. 정말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진정한 사랑이 시사된 자리 그것은 십자가입니다.누구를 통해 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이 나 타났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의 사랑의 교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요. 계속 읽어 보시면 성령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마암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바 되었 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 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끝나지 않아 요. 요한일서 4장의 정점이라고 그 럴까요? 클라이막스는 뭐냐하면 요 한일서 4 20절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서 읽어보시죠.

 

'누구든지 하나 님을 사랑한다하고 그 형제를 미워 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 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 니라'. 그리고 마지막 절은 하나님 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런 말씀으로 요한 일서 4장이 끝나요. 다시 정리해 볼 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 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서 제 일 잘 나타나 있습니까? 십자가에 서. 누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 조 건이없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아가 페의 사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위 한 사랑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 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 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 러분과 제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 다.

 

이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 험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한다면 이제 마지막 결정적 사랑 의 테스트는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 을 체험한 사람, 그리고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내 옆에 내 곁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제를 내가 사랑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할 수가 있느냐?

 

때로는 그 형제가 거 북하고 좀 까다로운 형제라 할지라 도. 때로는 나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형제와 자매라고 할 지라도 그를 사랑할 수가 있느냐? 여기 사랑의 테스트가 있습니다. 주 님은 이것을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 십니다.

 

큰 계명, 가장 중요한 계명, 이것을 큰 계명이라고 붙이신 이유 는 그것은 주님의 가장 커다란 기대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장 커다 란 기대를 깨뜨리고 이웃을 사랑하 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마 땅히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를 깨뜨 린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의 범죄인 것입니다.

 

,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그 것이 어떤 죄인가? 두 번째로, 그것 은 인간을 수단화 또는 인간을 도구 화 시키는 범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 다. , 예수님의 비유가 시작됩니 다. 30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 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 을 버리고 갔더라"

 

이 얘기는 강도 의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 그 러면 먼저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 강도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한번 이 강도에게 이 스토리 드라마 의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이 이 강도 에게 당신은 왜 강도질을 했습니 까? 라고 질문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어떤 대답을 할까요? 제 가 여기서 멀지 않은 수원의 교도소 에서 제가 도사 시절에 제가 오늘 이렇게 옷을 입고 나오니까 제가 도 사가 된 기분인데요. 도사란 말은 전도사의 줄인 말입니다. 제가 전 도사 시절에 수원 교도소에 자주 가 서 설교도 하고 때로는 상담도 하고 이렇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들어오면서 제가 느낀 것이 하 나있어요. 죄를 짓고 정말 여기 내 가 들어와서 마땅하다고 느끼는 사 람은 한 사람도 제가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다 억울하게 들어오셨더라 구요. 다 이유가 있어요. 거기에 들 어 올 수밖에 없었떤 어떤 이유를 다 갖고 있어요. 명분이 있드라구요.

 

저는 본문의 이 이야기 속에 나타난 이 강도에게도 당신은 왜 강도질을 했습니까? 강도질을 하고 싶어 했습 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렇게 대 답하지 않을 거라구요. 어떻게 대답 할까요? 틀림없이 네 저는 제 가족 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이 일을 했습 니다. 제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 에게는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에 게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제 게 마지막 인생의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대답을 할것이라고 생 각해요. 저마다 자기 대답이 있어요.

 

그러나 설령 자기의 목적과 명분이 정당해 보이고 올바르게 보인다 할 지라도 그러나 지나가는 애매한 이 나그네를 희생자로 삼아서 그를 패 고 그를 죽게 만들은 사건.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역 사에서는 기독교 윤리를 말할 때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베이직, 그 기초적인 것으로 늘 이것을 강조 해 왔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목적 은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좋은 목적을 갖고 있다면 수단도 좋아야하고 수단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명분이 좋아도 잘못 된 수단, 잘못된 방법으로 그 목적 을 성취해 갈 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어떨까요? 우 리는 이 강도를 비난 할 수가 있습 니다. 이 강도를 규탄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행로 속에서 때로는 나의 목적 성취 를 위해서 내 목적 실현을 위해서 내 주변의 이웃들을 너무나 쉽게 상 처를 주고 이웃들을 이용해 버린 그 런 경험들이 없었는지요?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강도 야. 바로 내가 이 강도일 수가 있 다.

 

만약 어떤 사람을 목적으로 인 격으로 다루지 못하고 그를 이용하 려는 의도가 내 속에 있었다면 그래 서 그를 피 흘리게 만들었다면 우리 는 이 강도가 바로 우리 자신 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서야합니다. , 다시 본문에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십시 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뭐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마 어 떤 분들은 말하기를 저는 그래서 하 나님을 예배합니다. 맞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자리에 와 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 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합니 다.

 

그러나 제가 더 나아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 십니까? 예배의 목적이 뭐예요? 아마 좀 성경 공부를 하신 분들은 이렇게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 님은 나에게서 예배와 사랑과 찬양 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 다.

 

혹은 다른 말로 그 하나님은 나 에게 예배를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 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이해 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가치라 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치. 우리가 예배를 영어로는 worship 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worth 라는 단어에서부터 나왔습니다. w o r t h, worthy 그러면 가치 있다. 가치 있는, 가치. 왜 예배를 드려요? 하나 님은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창조자이신 하나 님, 구속자이신 하나님, 섭리자이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에게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고 예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우 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드는 것 이예요. 그리고 그 예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 우리가 이웃을 사랑 한다면 어떻게 그 사랑은 또 표현 되어야 할까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까지 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을 예배해서도 안되고 예배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웃을 존중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 로 이웃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웃을 존중하는 것, 왜 존중하십니까? 다시 한번 그것은 이웃에 대한 가치를 인식했을 때, 여러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때 로는 그 사람들이 사람같은 사람으 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 도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성경이 보는 인간의 가 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 다. 믿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형 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하나님의 작품, 너무나 소중한 대상,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를 구 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고귀한 사람의 대상 인 인간. 그것이 인간의 가치예요.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가치 입니다. 이런 이웃들의 가치를 인식 한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가 이 웃을 어떻게 존중히 여기지 않을 수 가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이웃을 회손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희생하는 것은 죄일 수밖에 없 습니다.

 

저는 요즘 매스컴의 보도를 지켜 보면서 좀 안타가운 사건이 하 나가 있어요. 소위 권희로사건입니 다. 저는 우리 민족이 일본 사람에 게 차별당한 그 심정적 동조 때문에 이 사람을 동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 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도 그것을 쑥스럽게 여겼는지 나는 영웅이 아 니라는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매스컴은 계속 그를 영웅으 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사람을 죽인 것, 민족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라 는 고상한 명분이 있다고 해도 사람 을 죽인 그 행위 그 자체는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 히 죄인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이 권희로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가 있느냐?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어 요. 나도 나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내가 주변의 사람들을 다소나마 이 용하려는 그런 경향이 내 안에 있었 고,

 

그리고 내 이웃들에게 상처를 준 사실이 있었더라면 나는 권희로 를 향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나도 죄인이다. 이것이 이 사건 앞 에서 내가 느끼는 솔직한 소감이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 지 못한 것 그것은 이웃을 도구화 시키는 죄악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 하지 못하는 것이 왜 죄일까요? 그 것은 성도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범죄인것입니다.

 

셋째로 이웃을 사 랑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성도의 나 라는 존재의 존재의 이유를 포기하 는 혹은 존재의 이유를 거부하는 범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우리 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 금 이 자리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 하고자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데 예배에 대해서 연구하시는 분들 이 예배에 대해서 글을 쓰는 분들이 기독교 저서에 보면 종종 이런 표 현들이 나옵니다 인간은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 말은 옳습니까? 틀립니까? 틀릴까봐 대답을 안해요.

 

, 맞습니다. 옳은 얘기예요. 인간 은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어요. 우 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는 것 그것은 예배하도록 지음받은 인간의 고상한 아주 중요한 존재 이 유 가운데 하나라고 말 할 수가 있 습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지 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존재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별 로 안 중요한 이유가 아니예요. 굉 장히 중요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어떻게요? 그 구체 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예배라면 나 는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을 표현하고 그 하나 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 한다 맞죠. 인간의 고상한 존재의 이유이고,존재의 목적입니다.

 

, 이 웃을 예배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웃을 존중히 여기는 것 이 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못 지않게 소중한 우리의 존재의 목적 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랑하 기 때문에 이웃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를 귀히 여기는 것.

 

이것은 내가 인생에서 해야할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내가 여기 살아있는, 내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라는 사 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예 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 내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이 제 사장과 레위인이 나오면 그냥 제 눈 이 걸려요. 내가 꼭 이 제사장 같아 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1 , 32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늘 이런 질문이 저 자신에게 돌아옵니 다. 네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던 제 사장이라면 너는 어떻게 했겠는가? 그때마다 제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 이 있어요. 틀림없이 나도 아마 그 냥 지나갔을 것이다.

 

이것이 솔직한 대답이예요. 나도 그냥 지나갔을 지 모른다. 예를 들어서 오늘 아침에 제가 교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집에서 교회로 오다가 중간에 교통 사고가 나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을 보았다고 합시다.

 

내가 그 자리 에 머물렀을까? 아니면 교회로 왔을 까? 그때마다 제 대답은 나는 틀림 없이 교회로 왔을 것이다. 그때 내 변명이 뭘까요? 이 제사장의 변명이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제사장은 지 금 아마도 제사드리러 가는 길이었 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처럼 예배를 인도하러 가는 길, 지금 우리 교회 에 천명, 이천명이, 삼천명이, 오천 명이 내 설교를 듣기 위해서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 는데 내가 여기서 머물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틀림없이 그 자리를 빗 겨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나타난 제사장이 바로 나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 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하고 아주 똑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사 건에 있어서 조금 제가 진보된 모습 을 보이는 제 모습을 한가지 발견한 것이 있어요

 

. 제가 젊었을 때 물론 지금도 젊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그 때는 토요일 날 설교 준비를 할 때 제일 신경질 나는 것이 뭐냐하면 토요일날 전화하는 교인들,

 

그리고 토요일 날 신방해 달라고 하시는 분. 참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목사를 모르나? 툐요일이 어 떤 날인데? 말씀 준비하고 기도하고 묵상해야 되는 날인데 나를 만나자 고 하다니. 그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요

 

. 나가긴 나가서 겉으로는 싹 웃어도 속으로는 아휴 하필이면 이런 날 날 불러내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부글부글 끓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부글부글 끓지는 않아요. 요 즘도 아,토요일 날 불러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 러나 옛날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있 어요. 어느 날 제가 생각을 바꾸었 어요.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나하면 내가 설교 준비를 왜해? 이런 질문 이 생겼어요. 내가 설교준비를 왜하 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 을 증거해서 어쩌자구요?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이 폭풍우 같은 세상에서 삶이 견고해 지고 그리고 인생의 전선에서 그들 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 섬 기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전한다면 지금 이 사람과 앉아서 이 사람을 돕고 얘기를 들어주고 기도하는 일 이것은 바로 설교의 목적이 아니냐 는 말이예요. 설교의 목적이 아니냔 말이예요.

 

그 생각을 하니까. 요즘은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토요 일 날 어쩔 수 없이 불려나가는 경 우에도 그러나 옛날처럼 끓지는 않 아요. , 그러시겠군요. 이것도 설 교 준비의 일환이다. 내가 이분을 섬길 수가, 세울 수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 mission, 내 소명 이기 때문에. 나의 미션만이 아니예 요.

 

여러분 모두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있는 목적. 하 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 인으로 호흡을 가지고 이 땅에 살 게하는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이 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여기서 피흘리고 상처받고 어려워하 는 이웃과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것은 부르심이예요. 소명이예요. 이 것을 거부하는 것 이것은 나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고 포기하는 죄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마 지막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 리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 는 이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웃을 정말 좀 사 랑해 볼 수가 있을까요? 저는 본문 에서 두가지 대답을 찾습니다.

 

첫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발견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해보자라 는 것입니다. 발견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해 봅시다. 말이 좀 어려워요? 발견된 이웃을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해 보자는 것 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합시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그 실천을 거부하는 내 속에서 올라오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변명 이 있다면 그 변명이 어떤 변명입니 까? 우리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니 이 세상에 불쌍한 사 람이 한 두 사람이야? 이 세상에 불 쌍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도와 야 할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또 내가 비록 한 사람을 돕는 다고하자 그렇다고해서 세상이 달라집니까? 또 나는 내 코도 석자인데 내 인생 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아픔과 좌 절이 많은데 나는 다른 사람까지 도 울 수 있는 에너지가 내 속에는 없 다. 이런 변명이 있지 않습니까?

 

, 저는 그래서 이 세상은 점점 더 어 두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 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책임지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서 나에게 발견된 이웃, 내 발부리에 채인 사람, 지금 여기 피흘려 누워있는 이 사람, 내 눈에 발견된 이 사람 이 사람만이라도 책 임지라는 말이예요. 할 수 없는 것 가지고 도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느냐?

 

네가 할 수 있는 자원 가지 고 할 수 있는 시간 가지고 할수 있 는 것을 가지고 사랑해 보지 않겠 니? 저는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 고 생각울 해요. 다시 읽어보세요. 본문의 33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 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뭔저 중요한 단어는 그를 보고, 그 를 보고 하는 단어예요. 보고, 안 볼 수도 있었어요. 아니 안 보는 척 할 수가 있었어요. 못 본척하고, 우리는 시선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대 로 지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은 말하기는 이 어떤 사마 리아인은 그를 보았습니다. 보았습 니다. 피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라 는 거예요. 이것이 발견된 이웃을 향해서 가져야 할 태도예요. 보고, 쳐다 보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 까?

 

34절에 가까이 가서, 이것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쟎아요? 할 수 있 는 일이쟎아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할 수 있 는 일이쟎아요. 할 수 없는 것 가지 고 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네게 있 는 것 가지고, 네게 있는 기름, 네게 있는 그 포도주를 가지고 그 상처 에 부어라.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 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짐 승,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할 수 있을 때 한 것이예요.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냔 말이예요? 발견된 이웃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한번 사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 나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 직도 이런 변명이 계속 우리를 붙들 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세상은 달라 지지 않을 것이다.

 

너 혼자 구세주 인 척, 성자인 척 그렇게 해 봐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 서 세상이 안 달라지는 지도 몰라 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이런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늘 떠오 르는 만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지금은 차라 리 썰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늘 저에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어요. 어느날 지구촌에 살고 있 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에 일제히 지구상에서 한 순간에 와하고 한번 소리를 질러보 자. 거대하게 폭발하는 지구의 함성 은 금성이나 화성 다른 곳에 생물체 가 있다면 우리의 함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 도록 한번 소리를 쳐보자. 그래서 지구인들이 합의가 되었습니다.

 

드 디어 그 시각이 가까워집니다.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 일제히 와하 고 소리를 지르려는 시각이었어요. 그때 꼭 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 어요. 꼭 한 사람이 야, 굉장한 소리 나겠다.

 

나 혼자 소리를 질러 봤자 그게뭐 거기 보태주는게 있겠느냐? 나는 좀 들어보자. 나 하나만은 들 어보자. 드디어 모월, 모일, 모시, 모 분, 모초가 왔습니다. 얼마나 큰 소 리가 났을 것 같아요?

 

사상 최대의 정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데요. 왜 그럴까요? 다 들어보기로 했어 요. 다 똑같은 발상을 했어요. 다 똑 닽은 발상, 나 혼자 소리쳐 봤자 그 것이 소리가 얼마나 되겠느냐? 다 른 사람이 다 소리치겠지 뭐. 누군 가 하겠지? 다른 사람이 하겠지?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여리고 길이 예요. 아직도 여리고 길입니다. 발견 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 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로 이 웃이 처한 고통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을 해보자는 것입 니다. , 본문의 사건은 주로 강도 만난 이 사람을 치료하는 일, 그를 회복시키는 일에 초점이 모아져 있 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꼭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질문이 생겨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여리고 길에서 계속 강도를 만난다 면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여 기서 사고를 만났어요.

 

다음 달에 도, 그 다음달에도 또 계속해서 사 고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계속 앰브 란스를 보내고 간호사를 보내고 그 래서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 거기 에만 집중을 할까요? 아니면 한번쯤 은 이런 생각을 해야 옳지 않습니 까?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길을 좀 바꿔보면 어때요? 전보산대 세우고 밝게 만들어보고 경찰에 부탁해서 순찰대가 좀 왔다갔다 하고 가급적 이면 파출소도 그 옆에 하나 세우고 이렇게 환경을 바꾸어 보면 좀 낫지 않겠어요?

 

그런 일도 해야된단 말이 예요. 기독교 윤리 학자들은 혹은 기독교 사회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책임을 둘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하나는 social service라고 말해요. 사회봉 사. 사회봉사의 책임이 있어요. 이 사람을 치료하고 돌보는 것. 그건 사회봉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습니다.

 

'social action'입 니다. 사회행동이예요. 이 길을 바꾸 는 것, 주변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사회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혼자 할 수가 없 어요. 더불어 같이 해야되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런 이유를 위해서 하나 님이 교회를 세워 주셨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우 리는 이길을 어느 정도 바꾸어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는 한국 교회가 또 우리 교회도 이런 일에 좀 관심을 가지고 뜻있는 사람 들이 모여서 스타디도 하고 교회 앞 에 제안도 하고 우리 교회가 어떻 게 우리 주변의 사회를 바꾸기 위한 사회 행동에 우리가 건강하게 참여 할 수 있는지,

 

에를 들어서 환경을 보존하는 운동, 환경 오염을 막는 운동, 선거 때 공명 선거를 실천하 는 운동,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이 복지 사역에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 로 참여하는 일 , 그리고 낙태가 많 아지는 이 시대에 낙태의 법이 낙태 를 장려하지 않도록 법을 바꾸어 가 는 일. 함께 해야될 일이예요. 함께 해야될 일.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 람은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그렇 다고 해서 세상이 바꾸어 질건가? 나 한사람의 행동이 쉽게 빠르게 세 상을 바꾸지 못할지는 모릅니다. 그 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런 광경 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작은 노력, 작은 사랑의 노력,작은 사랑의 참여마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생 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희망이 없는 세상이죠. 성경은 우리가 다가오는 천국,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서도 천국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하 나님의 뜻이 이 사회에서도 이루어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칩니 다.

 

비록 내 작은 행동이 세상을 당 장에 밝은 세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최근에 제가 카 톨릭 수녀 시인 이해인씨의 시집을 하나 읽다가 이런 아름다운 시를 발 견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럐 요. 엘리자베스 노벨이라는 사람이 쓴 동시, 어린아이들의 시인데 시의 제목이 'A little' ,'조금' 이 시의 제목이예요. '조금' 설탕을 조금 가 지고도 음식맛이 달게 된다네. 비누 를 조금 가지고도 내 몸이 깨끗하게 된다네.

 

햇볕을 조금 가지고도 새싹 이 자라난다네. 조금 남은 몽당 연 필로 나는 책 한권을 쓸 수 있다네. 조금 남은 양초, 하늘하늘 춤추는 불꽃 이 불꽃은 여전히 어둠을 밝힌 다네. 그리고 수녀 시인 이해인씨는 자기의 신앙 고백 같은 이런 투명 한 고백을 말합니다.

 

언제나 조금의 진리를 잊지 않고 조금의 보석이 뿜 어내는 행복의 빛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잎처 럼 나는 겸허하게 흔들리면서 감사 하면서 그리고 조용히 조금씩 사랑 하면서. 이 사랑에 젖는 이 계절이 기를 소망해 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7:29-35/ 곽선희 목사

2014-11-24 22:16:22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거룩한 몸을 맨 먼저 보여주신 분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놀라운 역사 그 엄청난 사건 첫 번 증인, 첫 번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그 천한 여자에게 거룩한 몸을 먼저 보여주셨는지 그가 첫 증인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놀라운 기적입니다. 또 한가지 궁금한 것은 어떤 경로로 또 어떤 계기에 막달라 마리아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까?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때에 예수를 만나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까? 이 또한 궁금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해서 그것을 근거로 한 소설가가 어디까지나 그건 추리 소설 입니다마는 소설 속에서 그 경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Christ 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의 저자는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입니다. 포르투갈 사람인데 그가 전설에 근거해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전도하실 때 가버나움 동구 밖으로 나가시다가 그만 실족을 해서 발을 좀 다쳤습니다. 그리고 발 어디서 피가 납니다. 이걸 좀 싸매고 싶지마는 인근에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리번하고 보았더니 저 동구밖에 외딴 집 하나가 있어요.

 

그래서 외딴 집을 찾아가십니다.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거기서 나옵니다. 이 집은 전문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하는 창녀의 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요염하게 차려입고 손님을 기다리다가 문을 두드리니까 반기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문을 열었는데 보자 하니 점잖은 어른이 문 밖에 섰거든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오셨습니까?" 예수님 말씀이 "어떤 집인데?" "창녀의 집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저는 이 소설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영접합니다.

 

만일에 이때에 예수님께서 화다닥 놀라면서 "이 더러운 것!" 하고 그만 비켜갔더라면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그 상처를 치료받고 그 집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이야기하면서 그 날밤 거기서 유숙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나사렛고향으로 가셨다가 일주일쯤 있다가 이 자리를 또 지나가게 됩니다. 지나가다가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 마리아가 어떻게 지낼까? 나를 만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창녀 직업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갈까?" 궁금합니다. 그래서 이 집을 또 찾아들었습니다.

 

이제 마리아가 반갑게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궁금한 것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여자가 변화됐나? 아니면 그대로 창녀 일을 하고 있나?" 하지만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어요. 그의 자존심과 그의 아픈 마음을 생각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새 손님이 많으냐" 그래요. , 그 말이 얼마나 얼마나 깊은 사랑에서 하는 말입니까? 요새 손님이 많으냐? 그랬더니 막달라 마리아가 정색을 하고 대답합니다. "선생님, 여자는요 참으로 존경하는 어른을 한번 만나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래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따르고 마침내 십자가까지 따라가고 부활하시는 언덕까지 그 무덤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무엇이 사랑입니까?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정말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친구로 맞아 보았습니까? 내가 누구의 친구라고 생각해 보십니까?

 

런던 타임즈가 설문조사를 해서 도대체 친구가 뭐냐. 어떤 걸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해서 많은 응모를 받아 가지고 깊이 조사해서 그 가운데서 가장 잘 됐다고 하는 친구의 정의를 내 놓았습니다.

 

그 첫째가 뭔고 하니 모든 사람이,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에 그때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라고. 어떤 이유로든지 모든 사람이 나를 배척하고 버릴 때에 나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친구다.

 

둘째는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말이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설명하려고 그러면 설명하지 말라고 그래요. 다 아니까. 무슨 긴긴 말이 필요합니까?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나는 너를 안다. 네 억울함을 안다. 네 고통을 안다. 네가 바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네 진실을 안다. 침묵을, 나의 침묵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그게 내 친구요. 또 하나는 나의 기쁨을 곱해 주기도 하고 나의 슬픔을 쪼개 주는 자다, 그랬어요. 나의 기쁨에 대해서는 멀티플라이(Multiply), 그와 만나면 기쁨이 배나 커져요.

 

점점 커져요. 제곱으로 커져요. 슬픈 마음으로 만나면 슬픈 마음이 반으로 감해져요. 자꾸만 작아져요. 그것이 친구다. 참 훌륭한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런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때때로 너무 쉽게 감상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의미를 우리가 잘 깨닫질 못해요. 우리가 가진 편견과 그 집착된 잘못된 관념 때문에 참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참 사랑을 깨닫는 순간, 벌써 나는 새 사람이 됩니다. 참 사랑을 베푸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내 앞에 전개되는 것이올시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예수님 보세요. 우리 죄인을 사랑한 결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반갑지 않은 오명을 받았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가졌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여러분 다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창녀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이제 어떤 오해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소문이 많이 나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서 창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차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면 변화됩니다. 먼저 사랑을 하는 순간 내가 변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순간에 내가 달라집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먼저는 듣는 마음이 생깁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들어주는 게 사랑입니다. 비판이 없습니다. 지루함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들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됩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거요. 긴 설명이 없어도 사랑하면 '그랬을 거다. , 나도 그랬을 거다. 아니 나는 너보다 더 어려워졌을 거다. 네 심정을 내가 안다.' 어떤 형편이라도 충분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럴 수 있느냐, 택도 없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그 누구라도 충분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게 달라지는 거예요. 전에 같으면 비판했는데 이제는 비판할 마음이 없어요.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요.

 

또 하나는 애정의 눈으로 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니 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희망적으로 봅니다. 사랑에는 낙심이 없습니다. 어떤 자를 사랑했든지 사랑하는 순간 그에게서 소망이 보입니다. 희망적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실망이란 없습니다. 환하게 미래가 보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가끔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 싹이 노랗다" 그래요. ", 이것아……." 이게 사랑입니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말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또 사랑은 내가 그에게로 가까이 갑니다. 저가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그의 처소에 머뭅니다. 그와 함께 합니다. 그와 함께 먹습니다. 함께 잡니다. 함께 삽니다.

 

그리고 책임을 같이 집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주인이 "이제는 더 땅을 허비할 수 없으니 찍어 버리라. 열매 없는 나무 찍어 버리라" 했는데 과원지기가 대신 나서면서 하는 말이 "1년만 더 기다려주세요." 여기는 중요한, 깊은 신앙이 있습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는 겁니다. 이 책임을 내가 지겠습니다. 내게 기회를 주십시오. 열매 없어 심판 받은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책임을 과원지기가 대신 집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함께 지고 아니 대신 집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랑은 주는 겁니다.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얻고자하는 마음이 베푸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시작합니다. 내 입장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주는 게 아닙니다.

 

그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뭔가, 그걸 알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충만했던 바로 그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필요, 필요를 알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뭡니까? 정말로 필요한 게 뭡니까?

 

그것이 보여지는 거예요. 그것을 알게되는 거예요. 또한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거예요. 여기서 마음이 가고 관심이 가고 사랑이 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의를 줍니다. 내 명예가 더러워지지마는 그에게 의를 줍니다. 의롭다 함을 줍니다. 이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어요.

 

보세요, 마태복음 8 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세무를 보고있는 사람, 마태를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 이 세리가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니 너무 감격해서 자기 동료들을 다 불러 가지고 집에서 잔치를 합니다. 예수님 이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잡수셨습니다. 이건 안 되는 겁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도 안 되고 세리와 만나도 안 되고 그 집에 가서 음식이라는 건 말도 안됩니다. 그것이 당시 풍속이요.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을 안 받았답니다. 모르고 받았다가 저만큼 가는데 "너 지금 돈 한푼 구제해 준 사람이 그게 바로 세리다."

 

"그래?" 도로 갖다 던졌대요. 죽어도 세리 돈은 안 받는다 이거요. , 이런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집에 가서 잡수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쓰느니라" 말씀하셨고 머물렀고 잡수시고 유숙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집에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오히려 대접을 받았습니다. 같이 잡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요. 왜요? 그를 죄인을 의인으로 대접하는 겁니다. 추한 자를 거룩한 자로 영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의를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렇게 참 사랑을 베풀면 이제 사랑 받는 자가 변합니다. 사랑 받는 자가 달라집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할 때 내가 변하고 저가 변합니다. 내가 달라지고 저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게 사랑의 신비요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는 내가 달라집니다. 사랑 받는 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사람이 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날 젊은 여자 분이 찾아와서 자기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일류대학을 다녔는데 대학을 다니면서 소위 학사들 사이에 서로 연예가 돼서 학사 부부로 결혼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아주 무난하게 아이 둘 낳고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여대생과 동거하고 있다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오기도 하고 한 달에 한번도 돌아오고. 그런데 이건 지금 큰일 났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영 안 돌아오는 거예요. 제가 물어봤어요. "혼자 살 자신이 있느냐." 없대요. "사랑하느냐." 한대요. 그래서 자기가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뭐 갖은 방법으로 잘해주고 불평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몸이 약해 보여서 약도 대접을 한다고 그래요. 보약도 대접을 하고. 그럼 보약 먹고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간데요.

 

이런 기가 찬 일이 어디 있나. , 이거 아무리 해도 안 돌아오는데 자기가 또 몰래 가보았더니 그 여자가 자기보다 젊기는 하지마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만 못 하더래요. 그런데 왜 저기 가서 저 여자를 좋아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정말로 남편을 살아합니까?" 했더니 사랑한대요.

 

"그렇습니까. 나 하나 물을텐데 부끄러워하지 말고 대답하세요. 그러면 돌아왔을 때 잠자리는 어떻게 합니까?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펄쩍 뛰면서 "그건 안돼요. 그 더러워진 거 안돼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그래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내가 죄인이 되야 됩니다. 더러운 자를 사랑하려면 내가 더러워져야 됩니다. 당신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자기 사랑일 뿐입니다. 갔어요. 얼마 있다가 다시 왔는데 남편이 돌아왔대요.

 

어떻게 돌아왔냐 했더니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기도하며 생각해 보았대요. 많이 기도하는 중에 그는 응답을 받았대요. 이 남편이 밖으로 나아가게 된 동기가 그 원인이 내게 있더래요. "당신은 밖으로 나돌고 원인 제공자는 나입니다.

 

내가 잘못한 겁니다. 당신에게 잘못이 없소. 이것은 내 잘못입니다" 하고 고백했대요. 했더니 저쪽에서 "아니야, 사실은 내가 나쁘지." 아주 가정에 부흥이 일어났어요. 아주 뜨거운,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하게 됐어요.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높은 자리에 서서 얼마의 구제금을 던져줄 생각입니까? 내 자랑하면서 선한 일 했노라고 할 것입니까? 사랑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을 사랑한다면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명언을 제가 늘 마음에 새깁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거라고. 창조적 사랑,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참 사랑을 얼마큼 깨달았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받는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걸 아십니까?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이 되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셨어요.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는 죄인이 되었어요. 내가 죽는 대신 그는 죽으셨어요. 여기에 사랑의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에 나도 변하고 저도 변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바꿉니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을 바꿉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리고 때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하며 스스로 속고 스스로 속이며 사랑하는 미련한 저희들, 참사랑을 모르기에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참사랑을 해본 일이 없기에 사람됨의 의미도 모르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이 얼마나 엄청난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거룩한 사랑에 감격할 뿐더러 그 사랑을 다소라도 실천하면서 사랑의 행위 속에서 주의 사랑을 확증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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