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영혼이 뒤척일때 /시77:1-20/ 배영진 목사
2022-08-18 09:27:28
오늘은 내 영혼이 뒤척일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말할 때,
믿음이 좋다 안좋다 라는 것을 단지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믿음이 안좋은 사람,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경은 믿음이 깊어진다,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을 말할 때, 고정된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은 한번도 의심이나 흔들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든지, 믿음이 아직 어린 사람은 언제나 의심만 하고, 하나님앞으로 가까이 가려는 생각을 안한다든지, 이렇게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삽의 시를 보면, 그가 지은 시편의 여럿 중에, 가장 고통속에서 토해낸 것입니다. 아삽의 마음이 오늘 엎치락 뒤치락 합니다. 밤새 잠을 못잡니다. 뜬눈으로 뒤척이는 모습입니다. 몸만 뒤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도 뒤척입니다. 4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셨다, 나는 지쳤다! 말할 힘도 없다 이 정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날 버리셨구나, 날 떠나셨구나, 이제는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안내리기로 작정하셨구나! 그분의 사랑이 이제 끊겼어! 아주 흔들림이 심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다 드러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에 보면 이렇게 그 영혼이 뒤척이는 시간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영혼의 고통을 가리켜 17세기 청교도들은 영혼의 깊은 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아삽은 다윗왕국에서 다윗왕을 보좌하는 최고의 찬양인도자이며, 탁월한 영성으로 온 백성을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안내하는 리더의 위치였어요. 아삽의 시편이 시편73편에서 83편까지 주옥같은 찬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이란, 한번도 흔들림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치의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아삽은 심히 흔들립니다. 영혼의 깊은 밤, 뜬눈으로 잠을 한숨도 못잡니다. 갈팡질팡, 엎치락 뒤치락, 고통을 말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패턴이 늘 그렇듯이, 우리 신앙의 패턴이 그렇듯이, 그 고뇌의 뒤척임 끝에 아삽은 다시 일어납니다. 힘을 내고 일어납니다. 고뇌하다 그 믿음이 꺼져버리면 그것은 시편이 아닙니다. 신앙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같이 심지가 기어이 탁 꺼져버렸다면, 오늘 우리가 아삽의 시편을 묵상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관건은 뭐냐? 아삽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청교도들, 믿음의 선진들도 다같이 영혼의 뒤척임이 심히 있었는데, 거기서 일어난 비결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이 뒤척임을 주님과 같이 했다는 것. 둘째, 이 뒤척임속에서 주님을 보고 일어날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영혼의 뒤척임은 주님과 같이 한다.
오늘 아삽의 영혼이 뒤척이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아삽의 믿음이 사실 형편없구나 생각한다면, 오늘 이 시편을 완전히 잘못 읽은 것이 됩니다. 왜 그런가? 이렇게 뒤척이는 사람, 이렇게 영혼이 뒤척이는 과정이 뭐냐?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의 뒤척임이 없이 신앙이 단단해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1절 아삽은 밤에 하나님께 소리내어 부르짖습니다.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으면 주께서 내 부르짖음에 얼른 귀를 기울여주실 것이다 믿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에이 이럴 바에는 기도를 하자 그리고 하나님앞에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주님 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세요. 두 손을 들고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신앙이 꽤 연륜이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아삽은 엎기착 뒤치락, 기도를 하는데 마음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2절 내가 고난당할 때에, 개역성경은 나의 환난날에 라고 했습니다. 깊은 환난날. 주님을 찾고 밤새도록 손들고 기도를 올렸는데 내 마음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밤에 얼른 주의 응답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3절 이게 가장 뒤척이는 표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지어요. 이게 뭐예요? 개역성경은 내가 하나님은 기억하고 불안했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앞뒤가 안맞는 표현이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기억하고 평안했다,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 밤 뒤척이면서 하나님을 기억했지만 마음은 점점 요동쳤다는 겁니다. 주님 생각에 골몰하면서 내 마음이 약해집니다. 이게 얼른 보면 앞뒤가 안맞고 말이 안되는 것 같아요. 영어성경에는 내 마음이 어지럽다 그래요. faint, 혼란스럽고 내 영혼이 어지럽다 그래요. 4절을 보세요. 주께서 나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지쳐 말할 힘도 없어요. 이게 지금 밤새 뒤척이면서 자기 마음이 불안하고 어지럽고 지친 겁니다.
5절부터 9절까지 보면 오늘 아삽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어요.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붙드심을 다 의심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 강조하고 싶은 포인트 하나가 이겁니다. 자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다? 모든 의인들도 의심을 한다! 이 영혼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 믿음의 여정에 필수코스입니다. 5절 6절 그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7절부터 9절입니다. 주께서 영원히 날 버리셨는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 이게 언약백성을 향한 끝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게 다 끝난 것인가? 그 약속은 폐하여졌는가? 주께서 베푸실 은혜를 다 잊어버리셨구나. 그랬구나!
믿음이 상한 갈대같이 흔들리는 시간입니다. 아삽의 믿음이 꺼져가는 심지같이, 꺼져가는 상황입니다. 영혼의 뒤척임입니다. 그가 환난날을 맞이했는데 왜 그 영혼이 이렇게 미약해진 상태가 됐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부재상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은 둘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임재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내가 엄청 담대해지죠. 그런데 영혼의 뒤척임은 언제 옵니까? 하나님이 항상 내 삶에 하나님 임재상태를 부어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안계신 것 같은 상태를 내 삶에 허락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부재상태입니다. 이때 연약해집니다.
아기에게 있어, 엄마는 둘중 하나입니다. 엄마의 임재, 엄마의 부재! 언제 아기가 무서워요? 엄마가 없을 때, 배고픈데 엄마가 안보일 때, 쉬해서 젖었는데 울어도 엄마가 어디 갔는지, 아기 눈에 엄마가 안보입니다. 아기가 칭얼칭얼 울다가, 그래도 엄마가 안보이면 빽빽 웁니다. 아삽의 현재의 심정이 이 아기와 같습니다. 내가 힘든데 엄마는 어디갔어? 이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엄마가 안보여 울 때 엄마가 계속 안오나요?
오나요? 엄마가 옵니다. 그러면 그 시간, 엄마가 안보일 때 엄마는 뭐할까요? 엄마가 주방에서 아기 줄려고 이유식 만드는 중! 엄마의 부재는 일시적입니다. 이유식을 만드는 동안 엄마는 좀 멀리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부재가 영원하다고 느낍니다. 항상 엄마품에 젖을 빨던 아기에게 눈만 뜨면 젖이 입에 쏙 들어오다가, 갑자기 엄마 젖이 사라진 겁니다. 그러나 엄마는 어때요? 이제 젖을 뗄 때가 된 거고, 그럼 젖만 물릴 때가 아니고 이유식 먹여야죠. 그래서 아기를 잠시 눕혀놓고, 주방에서 맛있는 이유식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심리학에서는 이 엄마의 부재상태를, 적절한 좌절감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젖먹다가 이유식 먹을 때가 되면, 엄마의 젖이 사라집니다. 엄마의 부재상황입니다. 왜 아삽의 뒤척임과 부르짖음에 주님은 얼른 대답해주지 않으셨나? 왜 이제까지 계속 부어지던 주님의 따스한 사랑, 주님의 긍휼, 주님의 한결같은 임재, 이게 다 떠난 것처럼, 계속 부르짖어봐도 대답이 없는 시간, 주님의 부재, 그 고통의 경험을 주시는가? 오늘 아삽이 그 영혼의 뒤척임의 시간에, 그 고통은 4절부터 9절까지 적나라하게 나옵니다만, 그 날 밤에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 이것을 유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저는 아삽에게 이 뒤척임의 시간은 너무나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은 늘 임재의 시간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재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래서 영혼의 뒤척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시간은 적절한 좌절감입니다. 주님이 이유식을 만들고 있는 시간입니다.
둘째, 영혼의 뒤척임은 영적 회상으로 사라진다.
10절부터 20절까지 이 시편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아삽의 영혼이 뒤척임이 싹 사라집니다. 오늘 이 비결을 여러분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삽이 영혼의 뒤척임속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회상한 것입니다. 이른 바 영적 회상입니다. 영적 회상이라 함은 10절에 나오는 표현으로 말하면, 가장 높으신 분의 오른손! 이것을 개역성경은 ‘지존자의 오른손’이라고 묘사합니다.
아삽은 지극히 높은 자, 지존자께서 오른손으로 일하시던 때를 회상합니다. 여러분에게 설명을 드렸듯이 성경에 오른손은 왼손의 반대손이 아닙니다. 오른손이란 권능, 능력을 뜻합니다. 아삽은 밤새 뜬눈으로 내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이거 빨리 해결해달라고, 두손까지 들고 실컷 부르짖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밤새 잠 한숨도 못자고 기도했는데 영혼이 피곤해지면서 불안해지고 지치고 이제는 말할 힘도 없었어요. 아 응답이 없구나!
그러다가, 문득 영적 회상을 해봅니다. 지난 날 하나님께서 오른손의 권능으로 자기 삶에 행하신 일을 하나씩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아삽이 그때를 사모합니다. 지존자, 가장 높으신 분, 그분이 그 오른손으로 내게 행하신 일들이 뭐였을까? 11절, 주님이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해봅니다. 내 인생 예전에 하나님이 뭘 하셨지? 이것을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12절 하나하나 되뇌이며 그 일들을 깊이깊이 마음에 되새겨봅니다. 13절 그러다 깨달음이 옵니다.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가 있을까요? 자 아삽의 영혼이 밤새 뒤척뒤척이고,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딱 뭔가 힘이 생깁니다. 점점 아삽의 영혼에 힘이 임하고 있는 것을 느끼시나요? 하나님이 지난 날 내 삶에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하나 하나 마음이 되새겨보면서, 영혼이 소생합니다.
14절 이제 점점 아삽의 마음이 고백이 명확해집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신다! 주님이 제 삶에 행하신 일이 기적이었어요! 이걸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만방에 알리셨습니다. 내게 행하신 일을 내 주변사람도 다 목격했습니다! 이겁니다. 아삽이 그 영혼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맑은 가락, 찬양이 올라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찬송가 412장입니다. 아삽은 기가 막힌 수렁과 골짜기에서 자기를 구원하신 일을 회상합니다. 이것이 아삽의 영적 회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최고로 놀라운 일이 뭘까요?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은 노예 이스라엘에게 기적입니다. 4백년이 넘게 노예로 있었는데 어느날 모세가 와서 바로왕과 대결을 벌이더니, 이집트가 망하고 바로가 항복을 합니다. 아삽이 출애굽사건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여러분 이 영적 회상이야말로 우리가 밤새 잠못자고 문제가 안풀리고, 기도도 응답이 더디고, 답답하고 우울할 때 아삽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회상하고 기억하는 일보다 더 좋은 출구가 없습니다. 15절부터 20절까지 아삽이 출애굽을 회상합니다. 그 출애굽의 기적의 하나님이 내 인생도 출애굽기적을 행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백성을 주님의 팔로 우리를 속량하신 일을 회상합니다. 16절 홍해바다! 하나님 물들이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님이 홍해를 가르실 때 바닷속 깊은 물이 주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바다속 깊은 물이 주님 명령에 무서워 떨었습니다.
이제 됐어요. 이제 아삽의 뒤척임이 사라질 시간이 왔습니다. 아삽은 홍해사건, 구름기둥 사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천둥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하던 사건, 그리고 회오리 바람이 불었을 때를 기억합니다. 아삽은 그때를 경험하지 않았죠. 아삽은 홍해바다, 광야의 구름기둥, 시내산, 만나,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삽에게 그 출애굽과 광야 만나기적은, 자기 인생에, 똑같은 차원으로 기적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 인생에,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있으면 그것은 출애굽의 기적과 홍해바다의 기적과 만나의 기적과 똑같은 기적입니다. 엄마가 갓난아기 눈을 떼지 않고 젖먹여 키우듯,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갓난아기 젖물린 엄마처럼 눈동자같이 우리를 돌보셨고 키워주셨습니다. 20절 다같이 읽어봅니다. 아삽은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듯이 우리를 인도하셨다! 고백합니다. 그때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인도해주신 일들을 회상합니다. 이 영적 회상을 하는 중에 아삽은 영혼의 뒤척임이 사라집니다. 이제 엎치락 뒤치락 하지 않아요. 다시 그에게 평강이 임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신앙의 여정을 가는 중에 영혼의 뒤척임이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젖먹는 갓난아기 상태로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엄마는 어떤 경우 젖을 떼고 아기를 눕히고 이유식을 만들러 주방으로 갑니다. 엄마의 부재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없어졌어요. 울어도 엄마가 얼른 오지 않습니다.
늘 울기만 하면 젖이 내 입에 쏙 들어왔는데 그 엄마젖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아기가 보챕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 입에 엄마 젖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엄마의 부재시간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왜 떠났는가? 엄마는 과연 아기를 영영 버렸는가? 잊어버렸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기를 더 쑥쑥 키우려고, 더 영양분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먹여 건강하게 하려고 잠시 부재상태가 된 것입니다. 엄마의 부재는 일시적 부재입니다. 엄마는 이유식을 들고 아기에게 옵니다. 그 아기에게 평강이 찾아옵니다.
아삽이 오늘 영혼의 뒤척임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부재상태를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 그러나 그 하나님의 부재는 일시적 부재였다는 것,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확인하고 깊은 평강으로 일어난 것을 봅니다. 오늘 이 비결을 여러분이 가슴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비결은 딱 한가지입니다. 언제 여러분 내 인생에 가장 영혼이 뒤척일 때였는가 생각해보세요. 잠에 잠이 안오고 뜬눈으로 지새울 때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앞에 부르짖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가 있었습니까? 그래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셨구나, 나를 떠나신 거야! 그분의 은혜와 긍휼이 메말라버렸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이 엎치락뒤치락, 아구가 안맞고, 그때가 내 영혼이 뒤척일 때입니다. 어느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될 때입니다.
그때 한가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아삽이 했던 일입니다. 내 지난 날 나의 하나님, 지존자의 오른손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현재가 고통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쳐갈 때, 다시 일어나는 힘은 영적 회상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강하게 하시려고 우리 인생여정에서 주님의 부재상태를 가끔씩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적절한 좌절감으로 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절대로 멀리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내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될 뿐입니다. 아삽에게만 그런 것 아닙니다.
다윗도 이 영혼의 깊은 밤에 뒤척임이 있습니다. 시편22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울부짖었던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부르짖음이었어요. 그게 시편 22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어찌하여 날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원수가 많은가요? 왜 내 삶에는 지지자 서포터즈가 이렇게 없고, 나를 비난하고 싫어하고 밀어내는 자들이 이렇게 많은가요? 하나님 나를 잊어버리셨나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한가지, 영적 회상으로 그 뒤척임을 해결했습니다.
상한 마음을 치유받으려면 /시77:3-/ 문기태목사
2019-03-05 03:18:02
영국 황실 아카데미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피터 구르퍼라고 하는 사람은 한번은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일생 소원인 스트라디벨리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바이올린을 연주해 보기를 원했습니다.
마침내 이 분이 258년 전에 스트라디벨리우스가 만든 바이올린을 가지고 핀란드에 가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흥분한 가운데 스트라디벨리우스의 바이올린을 안고서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 바이올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실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런던의 악기를 손질하는 기사가 "내가 그 악기를 고쳐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기사가 다시 악기를 잘 만져서 감쪽같이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고친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주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큰 찬사를 받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다 깨졌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아니면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상처 투성이인 우리들입니다. 쓸모없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이 붙잡아 주셔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온전케 하시고 과거보다 더 좋고 더 귀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상해서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하는 데 마음이 상할수록 더욱 교회를 찾아와 상한 마음을 치유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안고 성전에 올라간 한 세리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상한 마음을 안고 성전에 올라간 세리는 그곳에서 자기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께 보이며 기도를 하는 중에 다 치유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상하고 아픈 마음을 안고 교회를 찾아왔다면 본문의 세리처럼 하나님께 다 털어내놓고 치유받아 상쾌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상합니다. 한나가 성태치 못하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삼상 1:6) 울고 먹지도 않았음.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누명, 나라에 반역했다는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따라서 억울 누명으로 마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시 109: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가난하면 이웃도 멸시하고, 친구도 떠나가고, 형제도 멀리합니다. 가난하여 부모봉양도 제대로 못하고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마음이 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생활을 하셔서 가난하여 마음이 아픈 것을 이해하십니다.
오해가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출 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불안과 근심이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시 77: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오른쪽 다리가 약간 마비되는 듯한 증세에 병적인 공포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늘 "이러다가한 순간에 마비될거야"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어느날 부인과 함께 모임에 참석했는데 식사 도중 오른 쪽 다리를 슬쩍 꼬집어 보던 그는 "결국 내 다리가 마비되고 말았어"라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귓속말을 건넸습니다. "여보, 지금 꼬집고 있는 것은 당신 다리가 아니라 제 다리예요"
악인의 함정에 빠졌을 때에도 심령이 상합니다. 시 142:3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시 143: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고생과 고난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할때도 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애 3:19)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애 3:20)
불법과 불의가 난무함을 볼때도 마음이 상합니다. 벧후 2: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이외에도 다른 사람에게 멸시받았을 때, 다른 사람과 비교당했을 때, 하는 일이 잘 안될 때, 몸이 아플 때 등 우리 마음이 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앞에서 범죄하였음을 깨닫게 될 때 마음이 아픕니다. 죄를 많이 짓고도 마음이 아픈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상태가 심각한데 아픈 줄을 모르면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정상인은 가시에 손가락 끝만 찔려도 눈물이 나오도록 아픕니다. 문둥병자는 살이 썩어 냄새가 나고 고릉이 흘러도 느낌이 없고 심지어 떨어져 나가도 아무 고통이 없답니다.
오늘 많은 사람의 심령상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무감각합니다. 오히려 문둥병자처럼 쾌감을 느낍니다. 결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가고야 말것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나병환자 수용소에 자원하여 찾아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열심히 환자들의 고름을 닦아주고 약도 발라주고 하며 돌아 보면서 지내던얼마후 갑자기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는것 같았습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늘로 발을 꾹 찔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쑥 빠지도록 아팠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감각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아파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고민하며 하나님께 엎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본문에 나오는 세리는 수입도 좋았습니다. 가정도 편안했습니다. 몸도 건강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아무 불평도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보았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직업상 하면서 합리화 할 수도 있었지만 세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을 안고 하나님앞에 나아와 그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의한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행위로 따져볼 때 자랑할 것 하나 없는 세리를, 오히려 부끄러울 것 투성이인 세리를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의롭다, 잘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는 아주 기쁘게 신이 나서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괴로우십니까? 하나님앞에 얼굴을 들수도 없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앞에 나오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그런 마음을 멸시치 않고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상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왔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의 세리는 어떻게 함으로 의롭다함을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았습니까?
1. 겸손한 자세로 나아갔습니다. 세리는 성전 제단 가까이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멀찍이 서서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앞에 자기자랑을 늘어 놓을때 세리는 눈을 들지도 못한채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며 우월감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겸손히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상한 마음을 안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겸손히 예배드리고 겸손히 기도하십시오.
2. 겸손할 분아니라 회개하였습니다. 자기의 가슴을 쳤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누구에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삽니다.' 하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구조적인 악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자기보다 더 악한 사람을 가리키며 자기를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죄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앞에 회개하였습니다.
위대한 예술가 램브란트는 성경의 진리를 그의 그림 중 하나에 담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그를 둘러싼 군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무서운 장면 한 구석 컴컴한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그는 누구이겠습니까? 램브란트 자신입니다! 자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이 예술가는 구세주의 죽음에 자기 또한 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죄를 미화하며 합리화시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 운운하며 자신의 죄는 슬그머니 감추어버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바로 보며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참된 회개를 하여야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경험할 것입니다.
3. 겸손하고 회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매달리는 죄인의 손을 하나님은 뿌리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자비를 베푸시면 만 가지 죄가 다 용서받습니다.
나폴레옹 수하에 있는 군인 한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구해보려고 나폴레옹 황제를 찾아갓습니다. 황제는 "이번이 두번째이므로 당신의 아들은 공의대로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나는 공의를 구하러 온것이 아니고 황제의 자비를 구하러 왔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시 "그는 나의 자비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황제여 자격이 있어서 베푸는 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나는 황제의 자비를 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풀리라."
여러해전에 미국배 한 척이 동양에서 많은 새들을 싣고 태평양을 건너오던중 바다에서 새 한 마리가 새장을 빠져 나와 좋다고 창공을 날아 올라 어디론가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그 새는 다시 그배의 갑판으로 날아 왔습니다. 늘어진 날개에 숨을 할딱 거리며 사람이 손을 대도 날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다한가운데서 그 배는 새의 자유를 억압하는 곳이 아니라 새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 갈곳은 교회밖에는 없습니다. 답답해 보이고 자유를 억압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것 같아 보여도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마음을 치유받고 위로와 안식과 평안을 누릴 곳은 교회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슴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세상에서 상처받고 괴로우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께로 나아 오십니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나아 오십시오. 겸손한 마음을 품고 나오십시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도 상처받고 괴로운 마음을 깨끗이 치유받고 건강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낙심을 이기는 믿음 /시77:1-20/ 유기성 목사
2016-08-27 15:17:07
성경에 영성일기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 분이 계셨습니다. 예, 있습니다. 시편입니다. 시편을 읽어 내려가면 영성일기를 읽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편 77편은 어느 신실한 성도가 낙심으로 마음이 무너졌을 때, 쓴 일기입니다.그가 어떤 문제로 낙심했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사연은 다르지만 낙심할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크게 낙심한 시편 기자는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시 77:1 내가 하나님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으시고,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여기 부르짖었다고 썼지만 사실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저도 악을 쓰며 소리소리 지르며 하나님을 불러볼 때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 ...:4 주님께서 나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시니, 내가 지쳐서 말할 힘도 없습니다.
저는 잠 하나는 잘 잡니다. 그러나 밤인데 잠을 자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있을 것입니다.
낙심하면 자꾸 부정적인 말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시 77:7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
말도 안 되는 질문입니다. 밤이 길다고 누가 ‘해가 다시 뜨게 될까?’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겨울이 길다고 “봄은 다시 올까?”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낙심한 사람에게서는 이런 말이 자꾸 나옵니다.
:7 ...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8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9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
이처럼 낙심에 빠지면 본인도 힘들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너무나 힘이 듭니다. 오늘 이 시편을 읽을 때, 즐거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읽기만 해도 힘든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녀나 교인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낙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 77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있어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직 끝은 아닙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결말은 해피엔딩이겠구나, 믿어집니다.
욥은 이유 없이 고난당했습니다. 전 재산을 빼앗겼고, 자녀들을 다 잃었으며, 온 몸에 악창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이 어떻게 견뎌낼 있었습니까? 끝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따지기도 하고 낙망의 말을 내뱉기도 했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이겼던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기도]라는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나라 전체도 우울증에 빠져들었지만, 목사님의 가정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합니다. 아내 캐시(Kathy)는 크론병으로 고생하고 목사님도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헤매던 어느 날, 아내는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매일 밤마다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이 아니고 매일 그러자는 제안에 목사님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답니다.
그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불치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봐요. 의사가 약을 주면서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알씩 먹으라, 절대 잊지 말라, 그랬다간 몇 시간 안에 숨이 끊어질 거라고 경고했다면 약 먹는 것을 깜박 잊을 수 있을까요?
아닐 거예요. 지금 우리 부부가 그런 형편이죠. 함께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눈앞에 닥친 일들을 헤쳐 나갈 방도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팀 켈러 목사님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답니다. 그 후 아내와 함께 매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기도를 빼먹는다는 건 상상 못할 일이었고,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을 때는 전화로라도 함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처럼 당장 기도를 시작해야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문제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자살 유혹을 받은 사모님 상담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 되고 자살하면 지옥 간다지만, 이것보다 더 힘들까?’ 하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기도가 안 되면 “‘예수님’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몇 번 부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되 시편 기자처럼 계속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2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
그는 고난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여러 가지 이유로 울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찾는 것은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가 가진 모든 문제의 답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오지 않으면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니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2 ... 밤새도록 두 손 치켜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소리 지르며 기도하던 시편 기자의 기도가 :10부터 갑자기 달라집니다.
:10 그 때에 나는 또 이르기를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오른손으로 일하시던 때, 나는 그 때를 사모합니다." 하였습니다. 11 주님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12 주님께서 해주신 모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주님께서 이루신 그 크신 일들을 깊이깊이 되새기겠습니다.
문제에 빠져 헤매던 그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지난 날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보던 눈이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13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 14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을 만방에 알리셨습니다. 15 주님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주님의 팔로 속량하셨습니다. (셀라)
시편 기자는 무슨 기억을 했기에 기도가 이렇게 바뀐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며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출애굽 하였지만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이 없는 막다른 길에 몰렸습니다. 앞으로 가면 바다요 뒤로 가면 애굽의 군대였습니다. “길이 없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정말 탄식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 14:11에 보면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아우성을 쳤습니다. 누구나 문제만 바라보면 이런 믿음 없는 말, 탄식, 원망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 때 모세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문제를 만났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다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실지 알았을까요? 몰랐을 것입니다. 모세가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한 가지 분명히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정말 아무도 못 보는 길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다 속에 있는 길이었습니다.
:19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길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모세는 안 놀랐겠습니까? 그도 놀랐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장면을 바닷물이 하나님을 만나 두려워 떨었다고 시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16 하나님, 물들이 주님을 뵈었습니다. 물들이 주님을 뵈었을 때에,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바다 속 깊은 물도 무서워서 떨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홍해를 가르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생각이 바뀝니다.
:20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양 떼처럼,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절망적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일이 아니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황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심각합니까? 아니라면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기도하고 성경 읽으라는 말이냐?” 설교자는 늘 그 말만 한다고 투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자가 되면 여러분도 그 말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는 눈이 바뀌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보지 않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만이 성령의 역사를 힘입게 합니다.
제가 아주 어려운 일을 만나서 3일 금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데 혼란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모든 일에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지 못하였기에 순간순간 주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생긴 문제를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문제가 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 분명히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문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때 모든 일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저도 사는 길이고 모든 사람을 살리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겐 어떤 어려움도 낙심도 이겨낼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급 사건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믿으면 어떤 형편에서도 낙심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희 딸이 3살 때 쯤, 테이블에 넘어져 눈 밑이 찢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인데다 응급실 담당 의사가 워낙 예민한 부위라 꿰매는 시술을 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급히 병원을 하시는 장로님께 데리고 가서 눈 밑을 꿰매었습니다. 제가 딸의 머리를 붙잡았습니다. 딸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린 딸은 아빠가 자기 머리를 꽉 잡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꽉 잡고 꼼짝을 못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도 버리신 것도 해를 주시려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욥은 고통 가운데 꼼짝 없이 묶였었지만 그 후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꼼짝 없이 갇혔었지만, 그 후 홍해가 갈라지는 체험을 하며 바다 가운데 난 길을 걸어 출애굽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사흘은 정말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자신들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 후 그들은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저는 장애인이 될 처지에 몰려 한동안 꼼짝없이 갇힌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저는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6년 동안의 지루한 군 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저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대학원 졸업도 하지 못하고 부산에 내려가 십년을 목회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 교재가 만들어 졌습니다.
저는 선한목자교회 부임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예배당 건축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제겐 능력도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님만 바라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몸부림친 후 [영성일기]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낙심 중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낙심은 자신도 괴롭지만 주위 사람들을 다 수렁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속히 낙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당장 여러분의 마음이 낙심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문제만 묵상하지 말고,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낙심을 이기는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찬송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압도적인 우울/시77:1-10
2003-10-15 22:13:11
여기에서는 끔찍스러운 함정과 진흙으로 된 수렁에 빠져 버렸으나 그곳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즉 압도적이 우울 가운데 있는 선한 사람에 대한 생생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슬픈 심령을 가진, 풀이 죽은 성도들은 여기에서 거울을 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그의 슬픔과 두려움으로 인해 가졌던 갈등은, 그가 그것에 대해 이러한 기록을 했을 때 끝나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 시리로다."하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절). 투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그가 나중에 가졌던 그런 안도감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환난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 그것을 그의 이야기 처음에 삽입해 놓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의 우울한 기도.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는 기도했고(약 5:13), 번민 속에 있기 때문에 그는 더욱 간곡히 기도했다(1절).
"내 음성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내가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리로다." 그는 원망이, 큰 원망이 가득했으나, 그것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 그것을 모두 기도로, 소리내서 하는 매우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로 바꾸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위안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택했다 (2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나이다." 환난의 날,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처럼 보이는 내적 환난의 날은 기도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자. 우리는 그를 찾아야 하며, 그를 발견 할 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의 환난 날에 그는 그의 고통을 떨쳐 버리기 위해 기분전환 하는 일이나 오락을 찾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은총과 은혜를 찾았다. 마음이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것을 술로 잊어버리거나 일소에 붙여 버리려 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기도로 떨어버려야 한다. "내가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다." 하몬드 박사(Dr Ha-mm on d)는 그 다음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그칠 줄 모르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43:5, 6 과 비교).
Ⅱ. 그의 우울한 근심. 근심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정말 우울이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1. 그것이 잠시도 중단되지 않을 때, 그의 근심이 그러했다. "내 아픔," 또는 상처가 "밤에도 계속되어," 내적으로 피를 흘렸도다. 그리고 그것은 휴식과 잠을 위해 보내야 할 시간에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2. 그것이 어떤 위안도 허락치 않을 때. 그의 경우가 또한 그러했다.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는 그를 위로하는 자들에게 청종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이다"(잠 25:20). 뿐만 아니라 그는 그에게 위로가 될 만한 일들을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슬픔 속에 아주 빠진 자처럼, 그러한 것들을 멀리 했다. 어느 면에서 보면, 슬픔 속에 있는 자들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면 그들 자신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Ⅲ. 그의 우울한 명상. 그는 그 환란이 사적인 것이었는지 공적인 것이었는지 매우 골똘히 생각했기 때문에,
1. 그를 위로해야 할 방법들이 그의 근심을 불어나게 할 뿐이었다(3절).
(1)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그를 위로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았다. "내가" 불쌍한 욥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였도다." 즉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두려워하는구나"(욥 23:15). 그가 하나님을 생각했을 때, 그의 생각은 오직 그의 의와 진로 그리고 두려움 위엄에만 고정되었으므로, 하나님 자신도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2) 어떤 사람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은 것이 그의 마음을 편케 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았다. 그가 "근심하니," 그러할지라도 "그의 심령이 상했고" 그 짐 아래 쓰러졌다,
2, 그는 자기의 당면한 근심을 위로해 줄 온갖 방편을 거부했다 (4절). 그는 잠을 즐길 수 없었다. 만일 우리가 평온하고 신선한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슬픔과 걱정을 잊게 해준다. "주께서 두려움을 주시며, 나의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그는 생각이 혼돈 되었고 정신이 산란 했으며, 마음으로 당황했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이 뜨거워" 있는 동안은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즉 그의 "가슴은 가죽부대가 터지게 됨 같았다"(욥 32:19). 그는 이처럼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었고 활기를 되찾을 수가 없었다. 심령이 질식할 정도로 감금되어 있을 때처럼 근심이 그 마음을 그렇게 크게 침식하는 적은 결코 없다.
Ⅳ. 그의 우울한 반성(5,6절). "내가 옛날을 생각하였사오며, 그것을 현재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형통했던 것은 현재의 참상을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조상이 이야기해 주었던 가사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사람들은 현재 상황의 불안과 불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옛날을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더 나은 지 아닌지를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 7:10). 우리가 잃은 즐거움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남아있는 즐거움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거나 우리의 고난을 참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특히, 그는 "밤에 한 그의 노래," 곧 이전에 그가 슬픔 속에 있었을 때 그에게 힘을 주었고 또 고독 속에 있었을 때 그를 즐겁게 했던 위안 거리들을 "기억했다." 이 노래들을 그는 기억했고, 그가 그것을 다시 부를 수 있는가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노래들을 잘 부를 수 없었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혼을 하나님에 쏟아붓는" 것에 불과했다(43:4; 욥 35:10 참조).
Ⅴ. 그의 우울한 불안과 염려. "내가 마음에 묵상하였다"(6절). 오라 내 영혼아,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으며, 그것이 결국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나와 다투셨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였고, 내 환란의 이유를 "궁구하였다." 그리고 나는 "주께서" 현재에 행하시는 것처럼 "영원히 버리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면 그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긍휼이" 이제 사라졌다. "그 인자하심의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이 이제 실패했다. 그러면 "그것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은 지금 은혜롭지 않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그의 긍휼은 지혜롭게 보류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7-9절)"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들에게도 흔한 경우로서(사 50:10), 암흑 가운데 행하여 빛을 얻지 못하는 서글프고 버림받은 한 영혼의 말이다. 여기에서 그는
1. 심한 고통 아래에서 신음하고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얼굴을 감추셨고, 일상적인 은총의 표적도 거두어 가셨다. 영적인 고통은 은혜로운 영혼에게 있어서는 모든 고통들 가운데 가장 비탄스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의 은총을 의심하는 것과 그의 약속을 박탈당하는 것, 그것보다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것은 없다. 이것이 심령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2. 강한 시험과 싸우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잇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침울하고 어두운 날에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의 상태에 대해 절망적인 결론을 내릴 유혹을 받기 쉬우며, 이 두 가지에 대해 모두 좌절된 것으로서 포기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고, 은혜의 언약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며, 우리 하나님의 온화한 긍휼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사라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암시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만일 두려움과 우울함이 이처럼 까다로운 질문을 한다면, 믿음으로 하여금 성경에서 그것을 대답하게 하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그럴 수 없다(롬 11:1).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리로다"(94:14). 주께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베푸실 것이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애 3:32).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아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이른다." 그것이 "영원부터" 있는 것처럼 "영원까지" 있다 (103:17).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있으셨는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며, 그가 자비롭고 은혜로우심을" 반포하신(출 34:6) 그의 이름을 부인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아니다. 그것은 "아침마다 새롭다."(애 3:26), 따라서,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 11:8, 9) 그는 이처럼 어둡고 우울한 불안을 계속 안고 있을 때 갑자기 "셀라"하고 말함으로써, 즉 "거기에서 멈추고 더 계속하지 말라. 우리는 불신으로 말미암은 이러한 추측은 더 이상 듣지 말자"라고 말함으로써 먼저 그 자신을 저지시켰고, 그 다음에는 그 자신을 꾸짖었다 (10절). "내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하였다. 그는 그 말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고통이라"(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이는 내 몫으로 떨어진 재앙이므로 나는 그것을 최대로 선용해야 한다. 각 사람은 육신 안에 자기의 괴로움, 자기의 환난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것.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이다. 또는 오히려 "이는 나의 죄라. 그것은 나의 불의, 내 마음에서 나온 재앙이다." 이러한 의심과 두려움은 믿음의 결여와 연약함에서, 그리고 평정을 잃은 마음의 부패함에서 나온다. 이것을 명심하자.
(1)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즉 우리를 매우 쉽게 엄습하는 죄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고통 아래서 심령이 낙담하는 것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매우 흔한 연약함이며, 이러한 것들은 여기에서의 시편 기자에게와 같이 우리에게도 슬프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언제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작용할 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것을 억압해야하며 악한 영이 말하도록 내버려 두어 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의 시편 기자처럼 불 신앙의 반란을 설복 시켜야 한다. "내가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를 기억하리"이다. 그는 "이전 해(年)"를 깊이 생각해 왔었다. 즉, 이전에 즐긴 축복을, 그의 슬픔에 가중시키기만 하는 것들을 생각해 왔었다 (5절). 그러나 이제 그는 그것을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年)"로서 생각했다. 왜냐하면, 옛 시대의 축복들은 신(神;Ancient of days)으로부터, "만유 위"에 계시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축복하신" 그의 오른 손의 능력과 통치권으로부터 왔고, 이것이 그를 만족케 하였던 것이다. 지존 자께서는 그의 오른 손으로써 변화시킨 것을 그가 기뻐 여기시지 않겠는가?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시77:1-12
2002-10-14 12:30:01
하나님이 우리 사람에게 주신 감정 가운데 하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웃이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아파하고 위로와 사랑을 함께 나누는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이웃을 발견하도록 하며, 그에게 돕는 손길을 펴게 합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때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역사상 그 어느 시대 사람보다 처량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은 나보다 건강하고 유능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매력적이고 더 부자고 더 좋은 직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비교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하며 살다보니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고 나는 몹시 불행한 사람,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며 내 자신이 측은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밖으로부터 여러 가지 환난도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만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스스로 시험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오히려 밖으로부터 오는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균형이 참 중요합니다. 마음의 균형이 흔들려 넘어지면 결국은 다 넘어지고 맙니다. 세상에서 우리 마음의 균형을 잃고 낙심할 때가 가장 큰 위기요 고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77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편 저자는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처량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아삽은 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소리높여 부르짖는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크게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정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소원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체험을 많이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도무지 들으시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밤새도록 두 손을 치켜들고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전혀 응답하시는 것 같지 않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된 그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위로를 하신다 해도 그 위로를 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셔서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곤궁함과 고난과 아픔을 주셔서 하나님을 항상 찾고 밤에는 잠도 자지 못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도록 만드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타게 부르짖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응답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도 원망하거나 불평치 말아야 합니다. 인내로써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지면 자기는 늘 불이익을 당하고, 자기에게 아무 것도 해준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자기의 먼 친척되는 국회의원에게 다음 번 선거에는 우리 가족의 표를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그 의원은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도시와 마을을 위해서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해서 새로운 길도 냈고 중고등학교 지붕도 새로 고쳤고 정보 네트워크도 설치했는데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노인은 "내 아들과 손녀에게 직장을 구해 주지도 않았고 나에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 않느냐"고 투덜댔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기억하지 못하고 "네가 최근에 나에게 해 준 일이 무엇이냐"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시편 77편의 저자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많음에도 근자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은 없고 답답하여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 섭섭한 마음에 이제는 하나님이 어떠한 위로를 주신다고 해도 내가 그 위로를 거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연민은 모든 관심을 나에게로만 집중합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불안해 하고 근심하여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마음이 약하게 되어 잠도 못자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내 불행의 원인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없습니까? 자기 중심적 생각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 중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자기 연민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향수심에 빠지게 합니다. 5절에 보면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옛날이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 사람들보다 정이 더 많고 더 따뜻하며 더 정직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 좋았던 때가 언제였던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하지만 100명중 99명은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애처롭게 여기고 자기 연민을 가지게 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에 비해 과거가 행복했던 것 같아 과거를 미화시키게 됩니다.
자기 연민은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로만 집중시킵니다. 불행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나 자신의 처지에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기도도 나 중심의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나 중심의 묵상이기에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찬 묵상이 됩니다. 6-9절 말씀을 보면 그 마음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6절 이하에 "밤에 부르던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속으로 묻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배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히 사라졌는가, 그 약속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내 눈이 닫혔을 뿐이지 하나님이 숨었겠습니까? 내 마음이 소심하여 낙망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약속을 파기하시겠습니까? 내 믿음이 연약하여 불평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이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미쁘심과 신실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비아냥거리고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보는 눈을 이제는 높은 곳을 보고 멀리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세상만 보고 자기만 보는 눈이 영적세계를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9절까지 내용은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망의 수렁에 깊이 빠지고 있지만 10절 이하에서는 자기 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초점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 결국은 멸망합니다만 믿음의 사람은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초점을 바꾸며 사는 것입니다. 생각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옮길 때 자기 연민에서 해방되고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77편의 후반부는 자기 초점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자기 관심을 하나님께로 집중할 때 그의 삶을 마비시키는 모든 악에서부터 해방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기쁨이 회복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좀 성공했다 싶으면 자서전을 냅니다만 수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는 자서전은 성 어거스틴의 자서전 「고백론」입니다. 이 고백론이 기독교 역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어거스틴의 자서전인 고백론은 독자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어거스틴이 자기의 젊은 시절의 방탕했던 모습, 그리고 이교에 빠져 방황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살았을 때의 자기 중심적 삶이었는데, 그가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 삶의 초점을 바꾸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고백론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며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77편의 전반부만 읽으면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의 불평과 원망하는 이야기에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후반에서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며 하나님을 묵상함을 통하여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생각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능력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소망과 비젼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짐 베이커(Jim Bakker)라는 유명한 미국 TV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PTL(Praise The Lord)"라는 유명한 기독교 TV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수많은 기부금을 통하여 사치한 삶과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개집에도 에어콘을 달아주어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디즈니랜드를 모방한 엄청난 크리스천 위락시설을 짓느라고 시청자들에게 거짓약속을 하고 기부금과 헌금을 모았습니다. 결국 그는 사기 횡령죄로 기소되어 45년이라는 장기 감옥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5년 후에 모범수로 풀려나 지금은 LA의 빈민촌에서 자원봉사자로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새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석방된 후에 그는 「I was wrong」(나는 잘못 됐었다)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감옥에서의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밤, 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오시더니 주님의 눈을 하나 빼어서 짐 베이커의 눈에 끼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네 눈에 끼워준 내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짐 베이커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로 결심하고 행동했습니다.
우리의 바른 믿음은 하나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이 될 때 하나님은 하나하나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게 갇혔을 때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며 환경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초점을 하나님께 향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는 인간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인간은 어리석게도 짐승처럼 감사할 줄을 모른다. 정말 인간은 놀랍게도 감사할 줄 모른다.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는 인간이란 두발로 걸어 다니는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은 감사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바라보는 연약한 신앙인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믿음과 지혜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일에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관심을 바꿉시다. 시편 62:1의 말씀처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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