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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시편 설교 모음

시편 5편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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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살고 싶은 열망 /5:1-12/ 유기성 목사

2016-08-11 14:46:59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해에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 속에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놀라운 간증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소원을 가진 우리에게 하나님께 말씀을 주셨는데, 의롭게 살기를 열망하라는 것입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죄지으며 살면서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살면서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의롭게 살고자 하는 열망은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열망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시편 5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1...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 2절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 3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누군가가 이처럼 간절히 기도한다면,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아마 병을 고쳐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원수를 갚아주세요하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8...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그래서 이 기도가 놀라운 것입니다.처음 이 시편을 읽을 때만 해도 잘 몰랐습니다. 늘 듣고 읽는 평범한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새해 첫 주일의 설교 본문인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신년 설교 주제로는 너무 무거운 주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년 설교는 밝고 희망차고 무엇인가 배불러지는 느낌이 드는 설교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다가 점점 무릎이 꿇어졌습니다. ‘주님, 이것이야 말로 신년 설교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것이군요!’

 

의롭게 살고자 하는 소원정말 놀라운 소원입니다. 이런 소원을 가진 사람이 진정 복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준 잘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시편 기자가 의롭게 살기를 소원한 것이 놀라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주위에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4-6절에서 시편 기자는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에 대하여 탄식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말합니다.

 

9절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으면 사람이 당연히 같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다 법을 안 지키는데, 나만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손해보는 일이고, 억울한 일이며, 바보 취급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주위 사람들을 따라 적당히 죄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주위 사람들이 다 악하게 사는 데도 자기만이라도 의롭게 살고자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오직 나는이 말은 나 한 사람이라도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복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링컨 대통령 때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전쟁이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개전하고 나서 한 1년 동안 계속 북군이 밀렸습니다. 링컨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기록에 의하면 체중이 83kg에서 57kg로 떨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으로 북군이 이겼다는 소식이 백악관에 전달됐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참모가 링컨에게 축하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북군 편입니다."

 

그러자 링컨이 정색을 하면서 내밷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마음에 걱정하는 하나는 내가 정말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게 해 주셨습니다." 평소에도 이런 자세를 갖기가 어려운데, 전쟁 중에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링컨은 이런 교훈을 다윗에게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 시편 5편의 저자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소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세상 사람과 소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가 되었느니, 역시 세상 사람과 소원이 다른 것입니다.

 

[워치만 리]라는 훌륭한 중국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워치만 리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돈을 걸고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작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워치만 리를 바라보면서󰡒당신도 돈이 있으면 와서 함께 합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워치만 리가 대답하였습니다.󰡒마작놀이를 하던 워치만 리는 이미 죽었소!󰡓

 

우리는 악한 세상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자의 형통을 부러워 말아야 합니다.

 

24:19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세상이 우리의 선생입니까? 세상이 우리의 왕입니까? 세상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줄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서 조급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하지 말아야 합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세상이 다 악한대도 의로운 길, 선한 길, 경건한 길을 가고 있다면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야 말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입니다.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고민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에 의롭게 살고자 하는 열망 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한 욕망이 더 클 때가 많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우리의 생각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예수님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지만, 세상이 주는 생각으로 우리 마음이 꽉 차있다면 성령님은 우리 마음을 주관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님을 따라 살려면 먼저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므로 24 시간 예수님을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생각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탄광에서 광부들이 질식사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카나리아를 길렀다고 합니다. 카나리아의 심장이 예민하여 산소가 줄어들고 공기가 탁해지면 금방 죽습니다. 그래서 카나리아를 보고 갱도의 상태가 위험한지 아닌지를 점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카나리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 안에 계신데, 우리 마음이 세상 것으로 꽉 차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불륜의 유혹을 받고 괴로워하다가 상담을 하였습니다.“그 남자와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한 마음이 드는데, 아무리 생각을 떨쳐버리려 해도 안된다.”고 상담하는 여 집사에게 목사님께서 대답하였답니다.

 

이것이 유혹이 된다면 차라리 나의 영혼을 거두어가 달라고 기도하세요.”그랬더니 그 여 집사님이 움찔하면서 놀라더랍니다. “그것이 성도님 영혼을 위하여 차라리 낫습니다.”그리고는 정신이 돌아왔답니다.

 

아직도 은밀히 죄의 종노릇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로 의롭게 살고자 갈망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기게 해주십니다/

 

중국 모택동 시절, 지하 교회 지도자였던 왕명도 목사님은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통에 못 이겨 예수를 부인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석방되고 더 고통스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송구스런 심정으로 두통이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힙니다.

 

그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북경 거리로 나와 목에다 간판을 걸고 거리를 다니며 "저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신 저의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울면서 외쳤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다시 체포되어 19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식은 지하 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어 그의 뒤를 따르는 많은 지도자를 일으켜 세웠고 하나님은 중국 지하 교회들 가운데 기적적인 임재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이 감옥의 무서운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웃으며 대신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했답니다.

 

몸은 늙었고 손마디 마디는 뒤틀려 있었고 그의 아내는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빛나는 눈동자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찬송 후에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이 찬송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의 가사처럼 하늘의 위로가 주님의 위로가 저에게 있었기 때문에 19년 동안 저는 행복했답니다."

 

예수님께 정직하게 반응함으로 왕명도 목사도 중국 지하 교회도 살게 된 것입니다.시편 기자는 아침 첫 시간에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3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것은 그가 의롭게 살기를 정말 갈망하였는 말입니다.

 

허드슨 테일러(J.Hudson Taylor, 1832-1905) 선교사님은 말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調律) 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집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입니다. 오늘은 올 한해를 하나님과 조율해야 할 시간입니다.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입니까? 평안과 성공과 풍요를 구할 것입니까? 그것들은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로마 황제의 평균 수명이 35세였고, 중국 왕들의 평균 수명은 39세였고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3세 였음을 아십니까? 화려한 명예와 세상 영광도 순간 뿐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헛되게 끝날 것이 아닌 것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제 새해 첫 날, 장로님 부부들이 강단 기도를 드렸습니다. 앞으로 매주 토요일 주일 예배를 위하여 장로님들이 강단 기도를 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말을 듣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도 함께 참석하여 기도하는 중 우리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놀랍게 열리지 못하는 이유가 저 때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제가 온전히 정결하면 성령님께서 더욱 강하게 역사하실 것인데.’하는 애통함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온전히 예수님만 바라며 목회할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오직 그것 하나면 충분하였습니다.

 

지금 구제역이나 조류 인플루엔자 등 동물 전염병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처럼 온 나라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기도를 드려봅니다.

 

오늘 새해 첫 시간, “세상은 악하지만 나는 의롭게 살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주님과 행복한 동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한 기도 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드립시다!

 

 

 

온전한 예배/5:1-3

2001-11-05 09:37:37

 

"불은 꺼지지 않게 하자"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에는 은혜의 불과 진노의 불이 있는데 은혜의 불은 살리고

노의 불은 꺼지게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슴드리면서 은혜의 불은 사랑의 불씨라고 했습니다.

 

둘째 주일에는 "사랑의 불씨를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면

서 하나님사랑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님 사랑의 불씨는 예배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셋째주일부터는 하나님 사랑의 불씨를 살리는 온전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진리를 찾아 배우고 있는중입니다.

2월 첫째주일과 셋째주일 두시간에 걸쳐 하나님사랑의 불씨를 살

리는 온전한 예배는, 첫째, 말씀을 은혜롭게 받아들여야 하고,

둘째, 감사화 기쁨으로 찬송을 드려야 하고, 셋째, 온전한 헌금

을 드려야 하고, 넷째 온전한 시간을 바쳐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

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온전한 예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

. 다섯 번째, 온전한 예배는 온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예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

를 빼놓고 예배를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기도는 필수적이다.

7:7-11 -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

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

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36:37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나라의 회복을 약속하신

후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

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 하여야 할 지라"고 했습니

.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이루는 열쇠입

니다. 기도는 은혜 받는 통로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요 하나님

의 능력과 의를 회복하는 양약입니다.

33:26 -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

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고 했습니

.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하는 자에게 자

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기도하는 자에게 그 의를 회복

시키십니다.

온전한 예배는 온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한 기

도란 무엇입니까?

 

1.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4:6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

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짓누르고 염려가 가득한 삶은 삶의 활력을 잃게

하고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방해합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

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되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

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불신의 산물이요,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근심과 걱

정과 염려는 믿음 생활의 적이요 방해자입니다.

예수께서도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사기떨기 밭에 떨어

진 씨앗과 같이 결실하지 못하는 신앙은 이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빠지고 일락에 기운에 막힌 자라고 했습니다.(8:14)

하나님께서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하

는 자에게 생각과 지각에 넘치는 응답을 주십니다. 공연히 하나

님만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처리해

보겠다고 하다가 문제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거나 복잡하게 만들

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

답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상상치도 못

한 평강을 주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전능자 하나님께 맡기시

기 원합니다.

57:22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평강을 얻고,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축복이

있으시기 원합니다. 우리는 순간의 생각한번 잘못하고 마음한번

잘못결정 함으로 일생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올바른 판단

과 선한 결정을 하도록 지키시기 원합니다.

이러한 축복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

가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2. 겸손의 기도입니다.

18:1-8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교훈 하

시면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9-14까지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하여 겸손하게 기도할 것을 교훈하고 있

습니다.

바리세 인은 따로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토색, 불의,

간음한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나이다. 라고

기도를 합니다.

세리는 바리세인 옆에도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

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리가 바리세인

보다 의롭다함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

하고 부족함을 고백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십니다.

리하여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했

으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

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어 상처를 내어 상한 심정으로 기도

하는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합니다.

 

3.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오늘본문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3절에 이르러서는 그의 확신하는 믿음의 기도를 발견하

게 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

침에 내가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심을 그는 의심 없이 믿었습

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기대하고 기다

린 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에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

니다.

요일5:15 -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했습

니다.

21:22 -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

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했으며

11:24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기도가 온전한 기도입니다.

시골에 농사때 가뭄이 들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후제를

지내고 굿을 하고 우상에게 빌기도 하고 야단들입니다. 교회에서

도 장로님과 함께 몇몇 열심있는 권사 집사님들이 우리도 엘리야

같이 비 오기를 기도하러 가자고 하여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

. 그런데 교회학교 다니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같이 가

겠다고 합니다. 만류했지만 꼭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

여 하는 수 없이 허락을 했더니 우산을 가지고 나옵니다. 부모

가 멀쩡한 날 웬 우산이냐고 했습니다. 어린 학생이 하는 말이

기도하면 비가 올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

한 믿음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4. 합심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4:9 -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

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했고

12 -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협력과 합심의 유익함을 교훈 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여러 사람이 협력

하고 합심하므로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을 생활에서 자주 체험하

게 됩니다. 매사가 그러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협력은 상상외에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도 120문도의 합심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축

복입니다.

아멜렉과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이스라엘 백성

이 이기고 모세가 지쳐 기도하는 손이 내려올 때 아멜렉이 이깁

니다. 이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붙들어주고

돌을 주어다가 그 손을 내려오지 않게 받쳐 주어 승리하게 되었

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협력하고 합심하여 기도할 때 기대이상의 응답을 체험하게 됩니

.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

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

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고 했습니다.

온전한 기도는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합심하는 기도는 아

론과 훌과 같이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협력하고 도와주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협력하는 기도, 대표자가 기도할 때는 아멘으로 화답

하고 함께 힘쓰는 기도가 합심하는 기도입니다. 합심하는 기도

가 온전한 기도입니다.

 

5. 간구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오늘본문2 -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

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29:12-13 -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

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했으며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

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삼상9:19 -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인에게 압제와 고통을 당하

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겠

다고 약속하시면서 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음으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고 간구 하는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부르짖는 기

도란 절대로 실현되거나 관철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

정으로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는 황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자와 같은 심정으로 외

쳐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물에 빠진 자가 도움을 요청

하는 것과 같이 불이 났을 때에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미사구려를 구사하여 기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동설한이 지나고 먼 산에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개나리 진달래

가 피고 어느덧 목련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봄철을 맞이했나이다

이는 여유 있고 한가한 자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아름답고 시적이고 문학적인 기도가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다급하고 황급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기도

가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갈 때 문학적이고 시적인 기도 미사구

려를 구사하여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자 굴입니다. 구원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 만나 하도 다급

해 하나님 호랑이입니다. "살려주십시오"하는 기도를 "하호살 하

호살"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로 황급하고 다급한 문제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의 절대

적인 응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부르짖음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

.

예수께서도 겟세마네동산에서 얼마나 힘쓰고 애쓰며 부르짖었으

면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겠습니다.

니누웨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고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

까지 금식하고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한 것 같은 기도가 때로

는 필요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군사독제정권에 반대하다 희생되는 젊은이들을

보고 강단에 엎드려 기도하다 입에서 비린내가 나고 가래가 넘어

와서 보니 목에서 피가 넘어 왔더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이 의를 외치다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화에 그들의 정신과 몸과 영이 수없이 희생되어지고 있습니

. 황급하고 다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기쁨이 어디서/5:1-12

2004-02-25 21:13:23

 

 

오늘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서 그 사상의 아름다움과 깊은 신앙의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옛날 성도나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상황이 너무 같은 것을 느끼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외부 세계는 많이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 세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 쓴 시 같습니다. 첫부분(1-3)은 기도를 들어 달라는 호소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그날의 생활을 여는 열쇠이고, 그날의 생활을 닫는 자물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 때 열고 잠글 때 잠그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혼은 도둑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기도하고'라는 동사는 레위기 17절 말씀의 내용과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 붙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심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응답해 주시는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기도드리는 것으로 끝내고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기다리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어떤 사람이 무슨 소원이 있어 서 그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분에게 찾아가서 그의 소원을 자세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 어른의 대답은 들어 볼 생각도 없이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그저 "안녕히 계세요"하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로자린드 링커라는 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대화식 기도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1) 보통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청원의 기도입니다.

 

물론 자식이 아버지에게 청원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며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우리편에서나 하나님 편에서 합당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조심할 것은 잘못하면 이 청원의 기도는 이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가 쉽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 간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중재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약간은 덜 이기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병으로 앓아 누워 계신 분을 위해서, 사업의 실패로 고통과 번민 속에 빠져 있는 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슬퍼하는 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3) 그 다음에는 찬양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넘쳐나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을 쏟아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렸고 놀라운 응답이 있었습니다.

 

 

 

(4) 그리고 대화식의 기도가 있습니다.

 

가장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이 대화식의 기도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습니다. 무엇을 청원하거나 중재하거나 찬양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님이 또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이 또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내면의 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 분석가는 '2의 귀'라고 말합니다.

 

우리안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이 기도를 통해서 평화와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깜짝 놀랄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가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은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는 능력과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의 귀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귀를 하나님께 기울이고 있을 때 우리의 생애가 변화됩니다. 우리 심령의 다이알을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949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을 들으시는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성 있게 기도드려야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둘째 부분은 기도의 근거(4-6)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잠언 616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 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눈을 미워하십니다. 사실 교만은 하나님만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교만을 미워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교만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보통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교만, 지식의 교만, 사회적인 교만, 신체적인 교만, 심지어 신앙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모두가 따지고 보면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사실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혀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어둠의 일입니다. 마귀의 특성이 거짓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싫어하십니다. 우리의 손은 부지런히 일하라고 주신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긴한 손으로 남을 돕는데 쓰지 아니하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을 미워하십니다. 세익스피어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켜 '사상의 대장간'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장간에서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대장간에서 무엇을 벌여내는 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대장간에서는 무엇을 만들어 내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구를 만들어 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기구를 만드십니까?

 

이제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보십시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다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기쁨이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세상 기쁨이란 육신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육감적인 기쁨입니다.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기쁨은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기쁘고 흐린 날은 슬픕니다. 건강하면 기쁘고 병들면 슬픕니다. 순경에는 기뻐하고 역경에는 슬퍼합니다. 젊어서는 기뻐하고 늙어서는 슬퍼합니다. 살때는 기쁘고 죽을 때는 슬픕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기쁨은 일시적인 기쁨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마치 지는 해와 같아서 점점 없어집니다. 서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려면 이발을 하라, 한 주간을 기쁘게 살려면 새 자동차를 사라, 한 달을 기쁘게 살려면 결혼을 하라 일년을 기쁘게 살려면 새집을 지으라." 의미있는 말입니다. 세상기쁨은 잠깐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혼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기쁨이요, 양심의 기쁨이요, 목마른 영혼이 생수를 마시는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도,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집회에 참여하면 기뻐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한숨쉬고 화를 내고 하는 사람을 봅니다. 이것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종교가 그런 의미에서 아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아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듯 솟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 속에서 샘처럼 솟아 나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여기 "영원히 기뻐 외치라"고 했습니다. 외침은 열광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은 기쁠 때 소리를 지릅니다. 운동 경기에서 자기편이 이길 때 모습을 보세요. 기뻐 외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기쁘면 소리칩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을 자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쁠 때는 마음껏 기뻐 외치십시오. 다만 그 기쁨의 원천만 분명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보호로 인하여 기뻐 외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피하므로' 그러니까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될 때의 그 기쁨을 말합니다. 세상의 어떤 요새도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만큼 군사들을 잘 지켜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 지켜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한 것처럼,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마 이 자리에도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많으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감정입니다. 두 눈에 눈물이 괸채로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을 하는 때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영혼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이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기쁨의 진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실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을 주님께 기울여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샘 솟는 기쁨과 바다 같은 사랑, 그리고 강같은 평화가 넘치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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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주를 피하는 사람, 주께 피하는 사람/5:11,7:1

2003-03-21 19:20:13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때는 세상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드려워 할 줄 아는 사람''하난미을 두려워 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질서에 순응하고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질 않습니다.

하나님 두려워 할줄 아는 사람은 어려움이 있을때 혹은 세상적으로 두려운 일이 있을 때

얼른 하나님을 찾습니다.

주님 품안에서 쉬기를 원하고 나아갈 길도 찾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아는 사람은 언제든지 주께로 피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없고 따라서 은혜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주 이런 말을 하고 다닙니다.

'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난 나 자신만을 믿는다'고 이런 사람은 주님을 만나야 할 순간

아니 주님이 자신을 찾고 계시는 순간에도 결코 주앞으로 나아오질 않습니다.

오히려 주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때 세상에는 두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주를 피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주게 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어찌하든 주께 피하는 자만이 은혜를 받을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내 지식, 지헤, 내 공로만으로는 이 놀라운 은혜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온 성도들은 모두다

'주를 피하는 사람'되지 마시고 '주께로 피하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시편에는 매우 여러차레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46:7)

'여호와는 나늬 환란날에 피난처 심이니라'(59:16)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71:7, 73:28, 91:2,9, 142:5)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오니(144: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금번 수재를 다안 수재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집을 잃었다는 것,

생명과 같은 논,밭이 몇미터 진흙더미 자갈더미 속에 묻혀 벼렸다는 것입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그 집한채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새벽부터 나아가 일구던 논, 밭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아무것도 없어요. 몸뚱아리만 남았어요. 이젠 어떻게 살아요'하는

저들의 모습이 우릴 너무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농부들에게 있어서 그 초라한 집과 얼마 안되는 논밭은

'저들의 마음의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도시 사람들처럼 요령껏 재산 불려가고 땅투기하는 것 같은 일을 할줄도 모릅니다.

욕심도 없습니다.

그저 손바닥만한 텃밭이라도 진실하게 일구고 땀 쏟으면서 '살아갈 수 만 있으면'되는 것입니다.

 

헌데 저들은 그 마음의 피난처를 잃고 오열하고 잇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은 큰소리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마음의 피난처, 그 돈, 그 권세, 그 건강을 잃게 될까봐

전전 긍긍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람은 그렇게 인정하고 살든 인정하고 살지 못하든 두려움들이 다 있습니다.

'마음의 피난처'를 상실하는 일을두려워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제 지혜있는 크리스찬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분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살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마음의 피난처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지치고 시달리다가도 그것만 생각하면 듬직한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절망하다가도 그것만 바라보면 다시 희망이 샘솟는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내 마음속에 찾아드는 우울함과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것마저 없었다면 난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사람이 의지할만한 마음의 피난처들을 마련해 놓고 살아도

사실은 의지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피난처를 찾지 못한 인생이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신기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피난처를 우상삼고 그것을 지켜가기 위하여 인생 전부를 거기에 겁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주를 외면하는 인생'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로 피하기는 커녕, 주님을 피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찬들은 당연히 주님 붙들고 주님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소위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내가 실상은 주게 피하기는 커녕, 주를 피하는 인생,

주님을 외면하고 세상의 신기루를 피난처 삼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경우고 적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한때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믿었고

'위기의 순간'주게 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20:11에서 그는 자기가 살아야겠기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다음 이런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함이요'

그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께로 피해야 할 순간 하나님을 회피하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결국 이것은 그가 한순간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로 피했어야 할 순간에 주를 피하는 결정을 내린것은

결국자신과 자신의 가정이 죄악을 저질렀다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말았습니다.

 

옛날 모세가 태어날 당시 애굽은 매우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감당할 수없을 만큼 번성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위험을 느낀 바로는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산파들에게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한 산파는 모세를 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피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두려운 사람은 그만 하나님을 피하고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골리앗은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누굴 두려워했다거나 누구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골리앗이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흔적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능력, 자기 힘, 자기 권세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새상그럽게 어떤 신의 힘을 빌릴 이유도 없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정말 작은 소년, 보잘것없는 힘도, 없는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이 소년 다윗은 오로지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이 소년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조약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어느 냇가에서나 주울수 있는 돌맹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소년에게는 그 어떤 무기나 힘보다 더 막강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주게로 피할수 있는 견고한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삼상17장에서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차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하였습니다.

주를 외면하고 사는 자, 주를 모르는 자 앞에 너무나도 당당한 '주게 피하는 자'의 외침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주께 피하는 선한 결단으로 살아가는 견고한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십니까?

출애굽을 체험하고 광야엥 나온 이스라엘 은

'출애굽의 기적' (지나간 삶속에서의 하나님의 돌보심의 흔적)보다는

광야앞길을 가로막고 있을 이방민족들에 대한 걱정에 더 크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헤로 살아난 백성이 이제부터는 자기 힘으로 살아갈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7:17에는 저들의 독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수 있으리요'

주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그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그분만 붙들고 의지하고 가야할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고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도자 모세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7:18)

그리고 '네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고 외쳤습니다.

주를 피할 생각말고 끝까지 '주게 피할 생각을 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순간에도 주께 피할 생각이 드는 사람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 '체험이 확실한 사람' '능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도 '주께 피하라,'하면서 세상의 두려움에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7:21'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세상의 두려움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피하면 세상의 위협을 오직 나홀로 알아서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맙니다.

주께로 피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을 피하지 않고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린 다윗이 그랬고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도 그랬고 기생라합도

그랬고 지팡이를 든 모세가 그랬고 어린 모세를 살린 한 산파도 그랬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우리 온 수성 가족들이 이제는 더 이상

'세상눈치보니 않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님께로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은

사람두려워하고 사람눈치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을 피하는 시람은

결국 세상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여러분은 좋게 봐 주질 않는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망하도록 고통을 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말을 다 만들어 내고

헐뜯고 누명을 씌우고 사사로운 꼬투리라도 잡아서 괴로움을 주고자 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왜 그 사람을 그렇게도 못살게 구느냐'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그냥 저 사람 잘되는게 싫어서 그런다.'고 아주 싱거운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이라크의 후세인대통령이 오랫동안 밈국의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이제 곧 미국이 그 나라를 정식으로 치고 들어갈 기세입니다.

몇일 전 신문에 후세인의 수많은 아내중 한 여인이 탈출하여 그의 숨겨진 생활을 폭로 했는데,

이것도 후세인의 이미지를 꾸겨 놓으려는 미국의 심리전인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거기엔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후세인은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고 의심도 많은 인물이 라고 하는데,

그의 취미는 혼자 방에서 자기의 정적들이 심한 고문을 받고 고통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게 틀림 없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비정 상적으로 잔인한 사람들이 존재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 하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열번이 이 사회에서 이런 사람(즉 이유없이 나를 해라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 하겠습니까?

신경이 많이 쓰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이때도 주께 피하시길 바랍니다.

 

만일 이때 내가 주를 피하면 인각적 해결 방법을 동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나도 그를 대적하고 나도 그를 저주하고 나도 그의 말꼬리를 잡고,

나도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 세우고 살아야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께 책잡히지 않는 일에 신경을 쓰고

하나님께로 피하시길 바랍니다.

 

주를 피하는 자, 주없이도 자기가 다 해결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참으로 피곤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험하고 복잡한 세상에 일일이 내가 다 알아서 결정하고 살아가려면

빈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더 이상"사람 눈치 보지 않기로"작정 하고 하나님만이 의지하고

주께만 피히기로 작정 한 사람은 "참 평강"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참 평강이 임하길 바랍니다.

 

"상대를 해주지 말자. 대꾸를 하지 말자. 그저 내가 참자-"하는 것만으로는 '참 평강'을 얻을수 없습니다.

"주께 피하자. 주님께 맡기자 지금 내가 두려운 건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이다"

할 줄 아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참 평화'의 주인공이 될것입니다.

 

잠언 2925"사람을 두려워 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한주간 이 말씀 붙들고 승리하실 바랍니다.

 

시편 5:11에는 '주에게 피하는 자''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인생이라고 하셨습는데, 그 결론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시편 7:1에서는 주께 피하는 자는

그를 쫓는 모든자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되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부담을 안기는자)에게서 구하여

건짐 받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31:1에서는 주께 피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께피하는자"에게 베푸시는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변화 무쌍한 인생이라는사실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간격이 지금보다 더 가까워 지면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공급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우리 간격이 지금 보다 더 멀어지면 우리는 금방 차늘하게 식어지고 말것입니다.

주께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이 순간 마음의 피난처는 어디입니까?

아직도 젊음이 능력이 물질이 건강이 든든한 배경이 피난처 입니까?

 

이제 이 순간

'난 언제든지 무슨일 만나든지 누구앞에서든지 당당하게 하나님께 피할줄 아는 사람'

되겠다하고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늘 대적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사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피할곳을 찾았고 피할곳이 어디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이신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주께 피하는 자가 있고 주를 피하는 자가 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는 신앙인이고 주를 피하는 자는 죄인입니다.

주께 피하는 자는 은혜를 받고 주를 피하는 자는 버림을 받습니다.

오늘 범사에 '주께 피하는 지혜가 있는 인생의 승리자가 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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