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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시편 설교 모음

시편 33 편 설교

by Jessi J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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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 노래로 하나님을 노래하라

2001-12-25 19:41:42

 

본문 시 33: 13

 

 

 

성경에는 "새 노래"라는 말이 열 번 가까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새 노래"라는 말이 등장하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새 노래라고 하면 새로 만들어진 노래 - 가사를 새로 쓰고 작곡을 새로 한 노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새 노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새 노래의 뜻이 '새로 만들어진 노래'라면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노래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는 1983년에 나왔으니까 18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는 일제 시대부터 부르고 있는 찬송가들도 있습니다. 411"예수 사랑하심은" 같은 찬송은 우리 나라에서 1800년대부터 부르던 찬송입니다. 헌 노래 가운데 헌 노래인 셈입니다.

 

그러면 어떤 노래가 새 노래입니까?

시편 40: 3은 새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 새 노래입니다.

상대적으로 세상의 노래는 모두 헌 노래입니다. 아무리 신곡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해도 모두 헌 노래들입니다. 헌 것은 그만큼 값이 쌉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 가운데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새로운 마음이 바탕이 된 노래입니다. 여러분 찬송가를 열 때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같은 찬송이라도 새 노래가 되고 새 노래로 하나님을 노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것이 됩니다.

오늘 성가대원들 임명 순서가 있는데 성가대원들, 새로운 마음으로 새 노래를 부르기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한 번 사용한 예화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느냐, 한 번 말한 내용을 다사 말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른 바 재탕의 문제입니다.

목사님들, 설교를 참 많이 하지요. 담임목사가 주일 낮에만 설교 한 번 한다고 알고 있는 분들은 교회 출석 제대로 하지 않는 분입니다. 새벽기도회, 중고등부와 청년부에서 때때로 하는 설교를 합하면 저의 경우 새해 들어 이것이 설흔두 번째 설교입니다. 요즘 대심방 중인데 각 가정을 심방해서 드리는 짧은 설교들까지 합하면 예순아홉 번째 설교입니다. 재탕 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은 "재탕을 해도 좋다"하는 것입니다. ", 새로운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준비하기 싫어서 재탕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 경우, 이 예화, 또는 이 내용, 한 번 사용한 것이지만 다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하는 마음으로 재탕하는 것은 좋다는 것이 설교 준비의 율례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다시 사용하면 낡은 내용이나 예화도 새로운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새 노래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또 새 노래를 부르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먼저, 새 노래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새 노래를 부르려면 감사와 있어야 하고 감격이 있어야합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이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재탕을 해도 좋다고 했는데 지난 주 수요예배에서 한 설교 내용 일부를 재탕하겠습니다. 재탕이라고 하지만 스무 분에게만 재탕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은 설날이었는데 어린이들 빼고 스무 분이 나오셨으니까요.

김정일 위원장이 상해를 방문한 일이 세상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상해의 발전한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상해에 대해 연구할 때 꼭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이 개방정책을 쓸 때 교회의 문도 함께 열었습니다. 교회의 문을 열 때 상해에 있는 교회 문을 제일 먼저 열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19799월 셋째 주일 상해 목은당(沐恩堂) 교회의 문을 제일 먼저 열고 예배를 드리도록 했는데 수천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도들이 찬양을 부르는데 얼마나 우렁차게 불렀는지 교회 천장이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삼십 년만에 교회에 모여 마음놓고 찬송 부를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그렇게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찬송을 부르지만 늘 그런 마음으로 불러야합니다. 그러면 그 찬송은 하나님이 부르라고 하신 새 노래 가운데 새 노래가 됩니다.

 

그 다음에 심양에 있는 서탑(西塔)교회가 중국 안 소수민족을 위한 최초의 교회로 문을 열었고 이어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도인 연길(延吉)에 있는 교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연길 교회의 초기 예배광경을 비디오로 보았습니다. 주로 할머니들이 모여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로는 9, 일제 시대에 사용하던 찬송가로는 4"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를 개회찬송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사를 옛 가사 그대로 "성재(聖哉) 성재 성재 전능하신 주여"라고 부르는데 비디오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평양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는데 봉수교회 성가대가 매우 잘 합니다. 어느 분이 평양을 방문해서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순서가 되었는데 '성가대가 참 노래를 잘 한다'하는 생각은 들었어도 이상하게 '참 은혜롭다'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 예배가 끝난 다음에 성가대원 한 사람에게 "성가연습을 언제 하느냐?" 물었더니 씩 웃으며 "우리는 이 정도는 연습 필요 없어요"하더랍니다. "아니 왜요?"했더니 "우리는 모두 평양시내 각 학교 음악교사와 교수들이에요"하더랍니다. 신앙과는 상관없이 음악 전문가들을 모아서 성가대를 조직한 것입니다. 그 때서야 이 분은 그 성가대의 찬양이 잘 하는 찬양이기는 하지만 은혜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가대 찬양은 그런 찬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부르는 찬양을 새 노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도 새 노래, 부르는 사람도 은혜가 되고, 듣는 사람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찬양이 퍼지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새 노래를 부르려면 찬양이 그 어느 노래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나라에 복음성가 가수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을 들라고 하면 남자 가수로는 박종호 성가사(聖歌師), 여자로는 송정미 사모라고들 합니다. 지금 제가 성가사라는 말을 썼는데 이 분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지휘하는 분들을 목사, 전도사와 같은 반열에 두어 성가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두 분 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분들입니다. 박종호 성가사는 서울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는데 세계적인 성악가라고 알려져 있는 조수미씨와 동창이라고 합니다.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박종호 성가사를 모셔다가 간증과 찬양을 들으려고 합니다만 이 분 말에 의하면 학교 다닐 때는 자기가 더 촉망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수미씨가 화려한 무대에 등장해서 박수를 받고 세계적인 가수라고 찬사를 받는 광경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될 때는 어머니가 힐끗 자기 얼굴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어느 때는 ", 재는"하려다가 입을 다문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 약간 시험을 받는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곧 '아니다,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는 이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냐?' 이렇게 마음을 고쳐 갖는다고 합니다.

'이 일이 귀한 일이다'는 마음으로 복음성가를 부르니까 그 복음성가가 새 노래가 되어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찬송가 102"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를 작곡한 죠지 바블레 쉬(George Beverly Shea)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베이스 바리톤 가수였습니다. 자기의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 어머니가 자신이 애송하던 복음시를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것이 102장의 가사입니다. 바블레 샤는 여기에 곡을 붙였는데 한국의 한 교회음악 전문가와의 인터뷰에서 "단숨에 곡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감사하여 작곡한 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자기가 작곡한 이 찬송가 가사 그대로 살았습니다. 복음성가 가수의 길을 택했고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한 사람으로 큰 일을 했습니다. 찬송가 작가인 챨스 웨슬리 없는 요한 웨슬리를 생각할 수 없고, 복음성가 가수 생키 없는 부흥사 무디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죠지 바블레 쉬 없는 빌리 그래함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한 찬양 없는 예배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찬양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새 노래가 됩니다.

 

온 몸으로, 삶으로 드리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대표 기도하는 장로님이 "우리가 열 줄 비파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교회에는 열 줄 비파가 없는데, 비파는 옛날 악기인데 열 줄 비파로 찬양하겠다니 어떻게 하는 것인가?" 궁금하게 생각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장로님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귀로 오로지 주님의 음성만을 들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주님을 섬김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발로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감으로써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간증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향기를 냄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자신을 태워 빛을 냄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주님께 바쳐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함께 모여 협력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 , , , , 마음, , 자신, 가진 것, 함께 모임, 열 가지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생활로 드리는 찬양이 새 노래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께 노래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반복되는 명령입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사실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961절 전반부는 짧고 단호합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시편 981절도 그렇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시편 1491절도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명령입니다.

이사야 4210절은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역시 명령입니다.

 

찬양은 성가대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있는 데요, 성경은 성가대원들만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지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이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 감사함이 있어야겠고, 감격이 있어야겠고, 찬양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겠고 온 몸으로 찬양해야겠습니다.

 

새 노래를 부르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먼저 자신이 새 힘을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분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했는데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충격과 분노와 염려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건강에도 이상이 생겨 위궤양에 걸렸습니다.

어느 날 밤,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 자지 못하고 위의 통증 때문에 다시 잠이 깨었습니다. 머리맡의 디지털 시계가 349분을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349' 무심코 머리맡에 두었던 찬송가를 집어서 349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 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좋아해서 자주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익은 가사니까 그저 보았고 그 다음에는 읽었고 그 다음에는 소리내어 읽게 되었고 다음에는 부르게 되었습니다.

잘 아는 찬송이었지만 그 가사가 마음에 새롭게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이 사람은 새 힘을 얻었습니다.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비참하게 보여지던 자기의 모습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349장을 여러 번 불렀습니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길로 일어나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가서 앉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놀랐습니다. 전에는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아픈 배를 움켜잡고 벽을 짚어가면서 갈 수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교회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새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새 힘을 줍니다.

 

좋은 시를 많이 쓰는 용혜원(龍惠園)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저희 교회 심야합심기도회에 오셔서 간증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는 그 시의 내용에 대해서 은혜를 받기 전에 우선 그 분이 쓰는 시의 분량에 대해서 놀라게 됩니다. 참으로 엄청난 양의 시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분은 자기의 시집을 남에게 줄 때 꼭 십자가를 그리고 "찬미 예수"라고 씁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씁니다. 예수님을 찬미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렇게 엄청난 시, 그렇게 은혜로운 시를 쓸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어느 지방에 아침 인사를 할 때 "찬미 예수!"라고 하면 상대방은 "영원히!"라고 화답하는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모르기는 해도 그 마을에는 파출소가 필요 없고 그 마을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것이고 그 마을에는 활기가 넘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노래는 듣는 이들에게도 힘과 의욕을 줍니다.

여러분 오 헨리가 쓴 "순경과 찬송가"라는 단편의 내용을 아시지요? 어떤 가난한 사람이 겨울이 다가오니까 차라리 감옥에서 보내는 것이 낳겠다고 생각하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일부러 나쁜 짓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무사했습니다. 저녁에 지쳐서 교회 근처까지 왔는데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 찬송을 듣노라니 의욕이 생겨서 '막노동이라도 하며 이 겨울을 이겨야겠다' 의욕을 갖게 됩니다. 이 단편소설의 줄거리는 그 뒤에 반전(反轉)이 됩니다만 찬송을 통해서 의욕을 얻는 것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노래하면 듣는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영국 황제 루이스가 민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평민의 복장을 하고 국내를 순시합니다. 어느 동리 허름한 물방앗간 옆을 지나는데 찬송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오네

 

루이스 황제는 방앗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노인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노인에게 그 노래의 2절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없다고 1절뿐이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그러면 내가 2절을 부를 테니 들어보시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황제 루이스가 날 부러워하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오네

 

방앗간 주인 노인은 그 때서야 이 사람이 영국 황제라는 사람을 알고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함으로 새 노래를 부를 때에 황제도 부러워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라면 곡조가 붙어 있는 기도인 찬양은 우리의 맥박입니다. 맥박이 힘있게 뛰어야 하는데 새 노래의 맥박이 뛰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 힘을 얻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어 그들의 발걸음이 교회로 향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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