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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시편 설교 모음

시편 146편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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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의지할 하나님을 찬양하라 /146:1-10/ 유기성목사

2019-12-11 04:45:54

 

146: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 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3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4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8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9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여러분 모두,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시편 설교가 마지막 다섯 편의 시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시편 145편부터 이어지는 다섯 편의 시편은 다윗의 시로,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찬양시입니다. 마치 헨델의 메시야 중에 있는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 퍼지는 느낌입니다.

묵상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 감동을 설교로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146편은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1) 로 시작되는데, 특히 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은 :2이었습니다.

:2 “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우리가 다 찬양은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평생토록 찬양하며 살아있는 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고백을 해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이 고백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다윗이 너무나 좋아서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내 미갈은 왕인 남편의 위신을 생각하여 책망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하 6:21 ...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하나님 앞에서 무슨 체면이나 위신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찬양이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3에서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찬양이 안 됩니다. 의지하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만 평생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집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찬양만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실망하고 낭패를 겪게 됩니다. 그들에게 우리를 도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4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저도 어릴 때, 부모가 부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나보면 부자 부모를 둔 것이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언제나 부자는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을 의지해야 하느냐, 중국을 의지해야 하느냐 논란이 있지만 그것 자체가 망하는 길입니다. 북한을 믿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으니 큰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돈 있고 힘 있는 사람’ ‘크게 힘 있는 나라를 의지하고 있다면 속히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 정도도 분별하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 선교단체 겨울 수양회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한 자매가 울면서 목사님, 하나님께서 제게 외무고시를 보지 말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요?” 라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고 물으니 그렇지는 않았지만, 만약 하나님께 제 삶을 헌신하였을 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되어서요.” 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 안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매를 위하여 오직 한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자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알게 해주세요.” 그 기도에 자매는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집회 때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약하게 하나님을 왜 의지하려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몰라서 하는 말이고 교만해서 하는 말입니다. 갓난아이에게 왜 나약하게 엄마 아빠를 의지하려느냐? 라는 말보다 더 어리석은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나약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이고 복 있는 사람입니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아무나 이런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고 바알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엘리야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이 터져서 외쳤습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어찌 대답을 못하느냐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그 말 한마디를 못합니까?

 

여러분, 혹시 하나님 외에 믿고 의지하는 것이 없습니까?

속히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른다고요?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진리를 결론 삼는 신앙이 있어야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목사가 되고도 하나님보다 아버지를 더 의지했습니다.

그 사실조차 하나님이 깨우쳐주시기 전까지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이왕 목사가 될 거면 큰 교회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고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사님들을 모델로 목회하였습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제자훈련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니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계속 더 성장, 더 크게, 더 많이 하는 저를 보고 내가 심각해졌구나! 깨달았습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공허해졌습니다. 진짜를 놓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목회는 누구에게 배워야 합니까? 초대교회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누구로부터 목회를 배웠을까요? 주님이었습니다.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하였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를 주님께 맡기고 다음 교회를 개척해 갔습니다. 그렇게 초대교회가 된 것입니다.

 

공산화된 이후 중국 가정교회는 선교사도 없고 신학교도 없고 목사는 다 감옥에 갔고 예배당은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만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었습니다. 그래도 30년 뒤 문이 열린 후 보니 훌륭하게 교회가 섰고 성장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교회의 문이 열리고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들은 한국 교회를 배우려 했습니다. 유익도 있었지만 한국 교회를 본받다가 신앙이 약해지고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시 핍박이 오니 다시 성경과 주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많은 지도자들은 이것이 중국교회에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 자세를 기본으로 가져야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6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8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9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이런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을 것입니까?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파라과이 선교사로 떠나는 김정옥, 김현의 집사님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행복해 보입니까? 불쌍해 보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선교사로 나가는 두 집사님이 행복하겠지요!

고생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살아도 어차피 고생입니다. 이왕 고생할 것이면 정말 잘 살았다 고백할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다 선교사로 나갈 수는 없지만 선교사 마인드로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주님만 의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분명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만 기록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주님이 저와 여러분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눈을 떴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믿어지지 않으면 이런 고백이 안 되는 것 아시지요?

세상적으로 볼 때 다윗보다 훨씬 평안하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은 다윗처럼 고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참으로 허무하였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얼마 전에 미국에 사는 한 집사님이 책을 내었다면서 추천사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데이터 과학 및 인공지능 전문가로 활동하며 과거에 가졌던 영적인 질문들의 해답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믿음의 여정을 다룬 책이었습니다.

 

그 책 중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박사 과정 마지막쯤 너무나 바쁘고 힘들었을 때, 한국에 있는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니? 논문은 잘 되고 있니? 많이 바쁘지?” 물으시기에 , 바빠요, 학교, , 교회 밖에는 아무데도 못가고 공부만 합니다.” 하니까 어머니가 딱하다는 듯이 말하더랍니다.

 

그렇게 바쁜데 교회는 적당히 다녀라.” 그 말에 하고 전화를 끊고 생각했답니다.

바쁜데 교회는 적당히 다녀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든 박사 논문을 쓰는 중의 삶의 에너지였고 영혼의 쉼이었답니다.

 

성경 말씀이 매일 매일의 나침반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목적이 분명해졌고

기도함으로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공부할 수 있었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열정을 주시고 힘들 때 도와주시고 외로울 때 함께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 날, 앞이 캄캄할 때가 있었습니다. 제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고,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고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나니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 복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가 고백했습니다.

그 해는 정말 절망이었습니다. 집을 방문한 한의사가 먹고 싶은 것 편하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때 아무 말하지 않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 때가 30, 지금은 69세입니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삽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정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너무나 중요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영원히 항상 뜨겁게 찬양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사람은 주위에서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뜨겁게 찬양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에 염려의 묶임이 풀어집니다. 두려움과 근심의 짐이 벗겨집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새 부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리라 마음에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그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솔직히 그동안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을 의지하고 살았지,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였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 원합니다, 기도하실 분만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찬양하고 싶습니다, 하는 분은 일어나기 바랍니다.

 

찬양: 꽃들도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146:1-5/이용규 목사(일본,중앙영광교회)

2016-08-26 16:00:15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 인사 (도입)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 시간 우리 모두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했으면 합니다. 입술만이 아닌 영혼이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향하여, 진심으로 함께 고백했으면 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니 감회가 참으로 새롭습니다. 20 몇 년 전, 처음 이곳에 야산을 구입했을 때에 대치동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목회자들이 낫을 가지고 와서 풀을 베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아직 본당이 완성되기 전에는 바로 이 제단 밑이 기도처였는데, 제가 일본에서 잠시 방문했을 때에 이 밑에서 함께 기도하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기쁩니다. 무엇보다 주님 안에서 가족같이 지내던 장로님들, 권사님들, 성도님들 만나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유기성목사님의 사랑으로 이 제단 ''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좋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2. 진정으로 하나님만 의지합니까?

 

저는 이 교회에서 199312월에 일본으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지금까지 23년간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저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훈련을 참 많이 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정말 간단합니다. 사람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이지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라'(146:3,5)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귀인은 세상에서 힘 있는 높은 사람을 말합니다. 아무리 힘 있는 고관이 가까이 있더라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자신의 도움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 인생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146:5)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121:1,2) 나의 소망이 어디서 올꼬 여호와 나의 하나님께로다!' 할렐루야!

 

'내 미래 아무 문제없어. 내 노후 아무 문제없어'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가진 게 많아서요. 그것은 재물에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입니까? 자기에게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자식이 든든하니까 입니까?

 

아니면 반대로 부모가 든든하니까 입니까? 가족에게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나의 미래는 문제없습니까? 하나님만 생각하면 걱정이 없고, 기쁨이 넘치고, 힘이 납니까?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이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일본에 목회자 세미나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유명한 분이 되어서 명절이 되면 경찰서장, 시장 등 세상의 고관들이 먼저 인사를 할 정도라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성도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어요. 저희 아들이 큰 사고를 쳤습니다.

 

빨리 경찰서장님께 전화해서 우리 아들 좀 구해 주세요.' 여러분, 목사가 경찰서장과 더 친할까요? 하나님과 더 친할까요? 누가 더 힘이 있을까요? 경찰서장이 해결할 일을 과연 하나님은 못하실까요? '목사님,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 아들 좀 구해 주세요.' 라고 했다면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나는 과연 누구를 먼저 찾았던가? 경찰서장(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여러분은 이런 다급한 일을 당할 때에 누구를 먼저 찾습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선교사가 되고 나서도 주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했습니다.

 

(간증1)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훈련을 받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22평짜리 사무실을 빌려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한국 본 교회에서 계약할 때에 들어가는 돈을 모두 후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달 달세입니다. 매달 30만엔(한국 원으로 300만원)씩을 내야 했습니다. 계약을 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서 본 교회 담임 목사님께 보고 드리면서, 월세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본 교회 담임목사님에게 '6개월만 교회세만 좀 도와 주세요.' 솔직히 그 때에 저는 이런 말을 내심 기대했습니다. '이 선교사! 역시 대단해. 6개월만 하면 되겠어? 그래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와줄게.' 진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내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담임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온전하고 영원한 선교 후원금을 제게 주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선교사로 갈 때에 하나님께 마6:33의 말씀을 선교 헌금으로 받았듯이 말입니다.

 

담임목사님을 통해서 아주 확실하게 주셨습니다. '이 목사!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자네 혹시 나 믿고 일본에 교회 개척했나? 하나님만 믿고 해!' 사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저는 혹시가 아니라, 진짜로 담임목사님만 철석같이 믿고 교회를 개척 했거든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가 아닌 '나의 힘이 되신 목사님 내가 목사님만 바라보나이다' 였고, 하나님보다 본 교회와 담임목사님을 더 의지했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알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만 믿고 해' 이 말씀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는 절대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오랜 시간을 엎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은 다음부터는 절대로 사람에게 손을 내 밀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새벽기도가 되었습니다.

 

보통 새벽3시경부터 9시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상한 소문이 나더라고요, 기도 많이 하는 목사로 말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닌데... 믿음이 좋아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월세가 없어서 기도하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이것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하던가요?

 

여러분, 하나님이 월세 주셨을까요? 안 주셨을까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첫 달부터 지금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으시고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좋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중에도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형제교회들)

 

그리고 하나님이 일본에서 형제교회들을 개척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8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 두 교회는 죽고, 한 교회는 입양시켰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 저희는 교회를 개척할 때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개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분립개척은 꿈도 못 꿉니다. 보낼 성도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말은 안하지만, 자기들이 알아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해.'를 선교헌금으로 가져갔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죠. 그랬더니 목회자 가족만으로 시작된 교회들이 1년이 지나니 자립을 하고, 성전도 넓은 곳으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도와 주셨기 때문이죠. 주님만을 의지할 때에 주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도움은 귀인의 도움보다 훨씬 큽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7/9)'에서 '조금이라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까? 어떤 환경이나 세상 것들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남아 있습니까? 여전히 당신 자신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많이 의지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터졌을 때에,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십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십니까?

 

!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도 의지하는 것이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만'은 안 된다고 합니다.

 

주님 한분만으로 어떻게 만족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도 의지하면서 세상도 적당히 의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떻게 잘 살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도 의지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을 너의 도움으로 삼으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온전한 사랑의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분이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는 자유를, 맹인들의 눈을 여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146:6-9)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의지하는 대상을 보면 압니다. 돈을 의지하면 그 사람은 돈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이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상관이 없고 돈이 좌우합니다. 귀인을 의지하는 사람은 귀인을 믿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있으면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만큼 의지하게 되어 있고, 의지하는 만큼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라는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귀환할 때에, 지켜 줄 군대를 왕에게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평탄한 길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왕의 군대보다 하나님을 더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의 무기보다 하나님을 더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7)

 

3. 아마샤왕의 선택

 

유다의 9대 왕이 아마샤입니다. 그는 초반에는 참으로 좋은 왕이었습니다. 에돔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그는 이스라엘에서 큰 용사 10만명을 거금을 주고 고용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마샤왕에게 10만 군사와 하나님 중에 오직 하나만 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 다를 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10만 대군과 하나님이면 정말 안전하게 승리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고 하십니다.

 

아마샤왕은 10만 용사, 즉 사람을 포기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는 혹시나 하나님의 사람이 모르고 있을지도 모를 것 같아서 '내가 백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까?'라며 군사 포기 불가론을 내놓았습니다.

 

내가 지불한 대가가 얼만데...이 때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역대하25:9) 이에 아마샤왕은 10만 군사를 돌려보내고, 하나님 한분만을 택하여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0만명을 포기하고 한분만을 택했을까요? 그는 10만의 사람보다 한 분의 하나님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10만의 군사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한분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전쟁에서 큰 용사 10만은 정말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선택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10, 아니 온 천하보다도 주님만을 택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간증2)

 

제가 유학을 갔다가 신학대학에 가기 위해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형님 댁에 잠깐 머물고 있는데,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아시고 창원에서 급히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달랬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말을 듣지 않으니 아버지께서 폭탄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너거 아부지와 예수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더니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꼭 택해야 한다면 저는 예수님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 순간 눈 앞이 번쩍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내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자식 아이다.' 그 때부터 약 10년간을 고아로 살았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5:11-12) 천국가면 이 상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뺨맞고, 예수님을 택한 것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은 4남매 모두 예수님을 믿고 집사급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단 한번 내 빰에 손을 댔지만, 나는 수시로 아버지의 머리에 손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손을 말입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성경에 말씀하신대로 주님이 우리 가정을 모두 구원해 주셨습니다. 고넬료, 루디아, 간수, 그리스보의 가정처럼 말입니다.

 

4.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그 분만을 의지했을 때에는 꼭 나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간증3)

 

제가 일본 선교사가 된 것은 먼저 일본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며칠 앞두고 동경으로 떠났습니다. 나름대로 큰 꿈을 가지고 갔습니다만, 저는 일본에서 엄청난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얼굴과 어깨, 팔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식은 있었기 때문에 화상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몸으로 충분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옥은 가보지 못했지만, 지옥 체험은 충분히 했습니다. 너무 아프니까 그 때 소원은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빨리 죽었으면...'이었습니다.

 

죽으면 고통도 죽을 것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잠도, 음식도, 다른 어떤 것도 못하고 오직 고통과의 치열한 싸움만 했습니다. 지옥이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감옥은 가더라도 지옥만은 가지 말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 하루가 지나니까 통증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두 사람이 왔습니다. 저는 얼굴이 심하기 때문에 얼굴 담당의사와 화상담당 의사가 같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두 분이 내린 진단 결과를 내게 알려 주었습니다.

 

얼굴은 3도 중화상이기 때문에 회복 불가, 어깨와 팔은 가능성이 있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내 얼굴 어떻해?' 하면서 진짜 죽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세례도 받았지만, 저는 완악해서 그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는 온전한 절망의 늪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때 제가 무엇을 했을까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다 붕대로 감았지만, 두 눈은 하나님이 열어 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깨어 있을 때에는 정말 말씀과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말씀이 나올 때마다 그 말씀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 만약에 이 성경 속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면 내 얼굴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세요. 그러면 제가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겠습니다.' 이 기도를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평소에는 믿기 어려웠던 구절들이 너무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그렇게 은혜로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얼굴의 붕대를 풀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이 없었습니다. 아마 처음 진단했던 것보다 상태가 안 좋았던 것 같이 보였습니다. '고레와 혼토니 우소 미따이데스네'(이것 정말 거짓말 같군요.)하면서 의사 선생님이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회복 불능을 선언했는데,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이 분이 볼 때에는 확실히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정말 거짓말같이 얼굴이 원래대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상의 흔적이라도 조금 붙어 있는 것이 정상인데, 점하나 붙어 있지 않고 깨끗이 회복이 된 것입니다. 마치 얼굴에 팩을 했다가 벗긴 것같이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팩을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에 얼굴에 죽은 깨가 조금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싹 빠졌더라고요.

 

사람들이 인사치레인지는 모르지만 저를 오랜만에 만나면 늙지를 않는데요. 지난 번에 고향에 갔더니 친구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자기 아들은 할아버지인데, 나는 새신랑이래요.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성형 수술을 해 주었기 때문에 당신 얼굴은 늙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얼굴이 이 얼굴입니다.

 

(사형선고)

 

내가 나 된 것은 세상에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비빌 언덕이 없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주님께 비비게 되니까. 만약에 의사 선생님이 얼굴이 희망이 있다고 했다면 저는 절대로 주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스왈드도 말했습니다. '뭔가를 의지할 것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내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세상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분이 계십니까? 절대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까? 감사하세요.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왔으니까요. 세상 문이 닫히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9) 바울은 아시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난을 당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주님! 제가 이제부터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고난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26:13)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영광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합심기도)

 

나는 과연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 왔는가? 나는 누구의 도움을 현실적으로 바라며 살아왔는가? 나는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 혹시 사람은 아닌가? 목사님은 아닌가? 능력 있는 사람들은 아닌가? 사람, 재물, , 세상 어떤 것에도 소망을 두지 말게 하소서! 주여! 하나님만 의지하길 원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만 나의 도움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진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내 영혼이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주여 내 인생이 오늘 말씀처럼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146:1)

 

admin

 

 

추수감사 /주님을 찬양하여라 /146:1-10/ 김기석목사

2015-07-12 07:37:05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생의 다짐

 

좋으신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11월 첫 주를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직접 땅에 파종을 하고, 또 추수를 한다면 오늘의 감격이 더 클 텐데, 도시에서 허겁지겁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날은 좀 생뚱같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이 계절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살아온 날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올해 우리 곁에 다가온 가을을 살갑게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가을 숲에 들어가 머물지도 못했고, 억새 바다 속을 산책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시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일찌감치 고뿔에 시달린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 참 고단하다하고 중얼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딘가로 떠나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어집니다.

 

그러다가도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할 줄 아는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차리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약할 그 때가 오히려 강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문장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진 문장입니다.

 

고통을 겪어 본 이들은 압니다. 스스로의 연약함에 놀라 낙심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웃들을 통해 전달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즐겨 은혜의 통로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음 주 쯤에 출간될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김두식 교수의 인터뷰 모음집에 나오는 성공회대학교 김창남 교수의 사연은 참 감동적입니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노래운동을 벌이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2만 원짜리 월셋집을 구해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밥 해먹는 기색이 없자 주인아주머니는 그 고학생에게 밥을 차려주기 시작했습니다. 2만 원짜리 하숙생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냥 식구처럼 지내자는 아주머니의 호의를 그는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주머니는 호구지책으로 야구르트 배달을 하며 근근이 살던 분이었습니다. 쫓기는 신세가 된 학생을 위해 아주머니는 밥을 지어주고, 청소를 해주고, 숨겨놓은 빨랫감까지 찾아 세탁해주었습니다. 겨울에 연탄불이 꺼지면 자기들은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 괜찮지만 혼자 지내는 이가 더 어려운 법이라며 세심하게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생이 제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는 법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이란 고마움의 연속입니다. 은중태산恩重泰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은혜가 태산처럼 크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삶은 여전히 힘들어도 우리 가슴에 봄기운을 안겨주는 이들이 있고, 또 언제든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는 말입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시편은 할렐루야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라입니다. 가끔 이 단어가 오남용되는 일이 있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성도들의 인사말로 이처럼 좋은 말은 또 없을 겁니다.

 

이 단어는 늘 명령형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라는 뜻일 겁니다. 이 단어가 발설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세워집니다. 이 단어는 답답한 우리 삶에 틈을 만들어 하늘의 바람이 불어오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유력한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병원에 가려 해도, 법률적 도움을 얻으려 해도, 사람들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립니다.

 

이게 적나라한 우리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은 정말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가 충성을 바치고 신뢰해야 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시인 김현승 선생님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찬양함이 곧 감사함이고 감사함이 곧 찬양함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삽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사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세상적인 것들에 포획당한 채 버둥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그치지 않습니다. 벗어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야곱의 하나님,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참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야곱은 물론 이스라엘 12지파의 기력의 시작인 인물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추상적 관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채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후 두려워서 고향을 등졌던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외삼촌 라반과 대결하면서 애바르게 자기 재산을 증식시켰던 자기 주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할 때에 그의 곁에 다가오셨고, 머슴살이나 진배없는 세월을 보낼 때에도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얍복강에서 그의 환도뼈를 치심으로써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주셨습니다. 야곱은 그 이후 다리를 절며 느릿느릿 걷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 덕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투성이 인물인 야곱을 다듬어 이스라엘의 밑돌로 삼으셨습니다. 가끔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도 많지만, 연단하고 또 다듬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질서 있게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공평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가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세상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승리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라 철저한 낙관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결국 승리한 것입니다.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승리, 이것은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작중인물인 Q’ 식의 정신 승리법이 아닙니다. Q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아들 뻘인 동네 건달에게 매를 맞고 돌아서면서 아들놈한테 맞은 셈 치지 뭐. 요즘 세상은 참 막돼먹었어'라고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조금 슬프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믿기에 패배해도 패배한 게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렇기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고 살아갑니다. 성서신학에서 하늘은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낮은 곳으로 향할수록 우리는 하늘에 가까워집니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마음 두신 곳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우리도 머무는 것입니다. 그곳은 어디일까요? 시인은 그것을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세상의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짓밟히고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갇힌 자를 풀어주고,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을 열어주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한사코 외면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안일한 신앙생활에 빠진 우리에게 아모스의 말은 철퇴처럼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5:21-24)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순례길에 나선 이들은 압니다. 아직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했다 해도 그 목적지를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르러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이지만, 지금 여기서 맛보아야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시인의 노래는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라는 구절로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담담한 서술법이지만, 이 고백 속에는 천금의 무게가 걸려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유력자도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까닭은 모든 일이 잘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눈 뜬 사람이 된 기쁨 때문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일에 초대받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은 육체로 변했습니다. 정신적 왜소증이 돌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 가운데도 정신적 왜소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순과 아픔을 품으셨으면서도 스스로 비천해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의지하고 삽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을 탓하며 살지도 않고, 뭔가에 중독된 채 살지도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천품을 지켜가며 세상의 유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삶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자꾸만 접속할 때 우리 속에는 감사의 샘물이 솟아나오게 됩니다. 이 가을, 우리 삶이 그러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시편 속의 복된 인생()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인생/146:1-10

2002-03-10 15:12:37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왕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지었다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가 보았는데 정말로 그 궁전의 화려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고가품의 미술 작품과 금으로 치장된 장식품들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권세가 강했으면 저런 궁전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그러면서도 그런 궁전에 거하면서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져보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해서 말년에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불러서 진찰을 해 보았으나 그 원인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나이 많고 경험이 많은 의사를 청해서 진찰을 했습니다. 그 의사는 진단을 한 후에 이렇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대왕의 병은 보통 병이 아닙니다. 이 병을 고치려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의 속옷을 빌려 입으면 병이 낫겠습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행복한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돈이 많은 자에게 찾아가서 진정 행복하게 사는가하고 살펴 보면 다 불행 속에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명예가 많은 사람도, 다 불행 속에 사는 것을 보고 실망을 합니다. "진정 내 병은 고칠 수가 없단 말인가?" 그는 중얼거리면서 궁전으로 돌아오다가 어느 시골길의 나무 밑에서 양을 치는 목동을 보게 됩니다. 그가 나무 밑에서 하프를 켜며 노래하는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애야, 너는 정말 행복하냐?" 하고 물었습니다. ",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그 목동에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너의 속옷을 얻어 입으면 나의 병이 났겠으니 나에게 주려무나 내가 가격은 얼마든지 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동은 빙그레 웃으면서 옷을 벗는데 속옷이 나오지 않고 맨살입니다. 그러면서 "왕이여 나는 가난해서 속옷은 입지 않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루이 14세가 중얼거리면서 한 말이 그토록 유명한 바로 이 말입니다. "세상에 행복한 삶은 있어도 행복한 사람의 속옷은(팬티는) 없구나"

 

이 말이 왜 유명합니까? 불변의 진리를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소유한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도 돈, 명예, , 지식, 좋은 집 등 그 무엇을 소유하는데서 행복을 찾으려는 인생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우리는 연 5주 계속해서 하나님이 시편 속에서 말씀하시는 행복한 삶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아침엔 시편 146편을 통해서 행복한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6편은 그 후 계속되는 시 (147. 148. 149. 150) 와 함께 '할렐루야 시'라고 부르는 회중적 찬양 시입니다. 예배 시에 부른 찬송입니다. '할렐루야' 시라고 부르는 이유는 146편부터 마지막 150편까지 다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시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한번 찾아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 가운데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5절의 말씀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본문에서는 행복한 삶을 두 가지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으면 그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인생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란 그의 삶의 모든 소망이 그의 하나님인 주안에 있는 자란 뜻입니다. 오직 주님의 품안에서만 모든 소망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안에서만 소망을 갖고 있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고 선포하십니까? 하나님이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는 다윗의 찬송시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참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입니다. 그 중에 다윗을 가슴 아프게 만든 일들은 자신이 소망을 두었던 사람들에게서 당한 배신 그리고 실망감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했습니까?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한 것은 충성뿐입니다. 정말로 죽도록 충성을 했습니다. 그런 다윗을 사울은 사위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왕의 사위니 이제 많은 도움이 올 줄로 알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위로 삼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의 순간을 다윗이 겪었습니까? 그러나 결국 누가 죽었습니까? 사울입니다. 그는 자살 비슷한 죽음으로 비참하게 인생의 종말을 맞았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쫓김을 당하면서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왕의 사위라고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구나. 그는 세상 권세의 소망을 이때부터 다 포기를 했습니다.

 

제가 아는 신학교 후배 목사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늦게 했습니다. 30대 후반에 했습니다. 사모를 고르는 눈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모댁의 가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칭 가문 좋은 사모를 얻었습니다. 장인이 어느 교단 총회장이고 또 외삼촌이 큰 교회 목사이고 사돈의 팔촌을 따지면 이름 있는 목사가 많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자기의 앞길을 열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도 제대로 목사 정신을 가지려면 고생을 꽤나 해야하겠구나 자기의 진로를 위해서 가문이 좋은 사모를 택하고 출세의 길이 열리겠구나 생각하는가 보는데 오늘 시편의 말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찌니라"를 좀 생각을 해보라고 말을 했습니다. 속으로만. 좋은 가문의 사위가 되고 좋은 가문의 딸을 얻는다고 다 소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소망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지 말아야 될 것은 가문만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인 압살롬은 어떠했습니까? 얼마나 잘 생겼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잘 났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다윗은 이 아들에게 큰 소망을 두었습니다. 면류관이 될 줄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아버지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백성들을 길 도중에서 가로막고 다 자기가 재판을 해 줍니다. 아버지를 몰래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압살롬이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 다윗 왕에게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사람의 마음이 자기편이 됩니까? 그게 자기 계획대로 됩니까? 압살롬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이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백성들이 많이 따를 줄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별로 따르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이 잘난 아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은 쿠데타 실패하고 도망가다가 머리가 상수리나무 아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요압의 부하들이 창으로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 압살롬도 죽음이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삶이 투명해야 합니다. 음흉하거나 꿍꿍히 속이 있거나 행동이 앞뒤가 틀리거나 잔머리 굴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결국은 비참하게 끝납니다.

 

소망을 두었던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윗이 몸을 사리느라고 도망을 갑니다. 그 때 도망가면서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이여 내가 머리를 못들을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어찌 내 속에 난 아들마저도 저런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아들도 소망을 둘게 못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들이여 너무 자식에게 기대어 살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냥 키운 것으로 만족을 하십시오. 대게 엄마들이 그럽니다. "너 내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키웠으니 결혼해서 부모에게 잘 해야 한다" 은근히 강조를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엄마는 고도의 은근한 협박까지 합니다. 농담 비슷하게 하면서 우리 각서를 쓸까 녹음을 할까? 은근히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여 내가 이렇게 키웠으니 노년에 자식의 덕을 보겠다는 소망을 너무 크게 갖지 마십시오. 그게 안 이루어지면 속만 상합니다. 자칫 병납니다.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되지 않는 것은 자식뿐만 아닙니다.

 

다윗의 충신 가운데 요압이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밀려난 그를 다윗이 잘 세워주었습니다. 군대 장관으로 삼았습니다. 정말 요압은 다윗이 아니면 그렇게 높은 지위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다윗의 뒤에서 아주 간사하게 굴었습니다.

다윗이 통일 왕궁으로 가는 길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지파의 군대 장군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찾아 왔습니다. 다윗 왕에게 그의 부하를 데리고 다윗에게 투항을 하겠으니 평안을 약속하겠느냐 그 확답을 받고자 왔습니다. 다윗은 너무 기뻐서 평안을 약속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 투항하겠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분명히 평안을 약속했습니다. 그는 왕을 만나고 기쁘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일을 요압에게 알리는 부하가 있었습니다. 늘 이런 간사한 앞잡이들 때문에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다. 다윗을 만나고 성밖을 막 나가는 그를 요압이 부릅니다. 왕이 긴밀히 할 말이 있어서 자기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왕의 이름을 빌려서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칼로 배를 찔려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훗날에 또 장군을 한 명 더 죽였습니다. 요압은 정말 아주 나쁜 놈입니다. 아브넬이 얼마나 다윗을 원망하면서 죽었겠습니까? 나한테는 평안을 약속하고 이렇게 간사하게 뒤에서 치느냐? 이런 원망을 하면서 죽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후일에 그 일을 자세히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백성들도 왕이 시킨 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죽은 아브넬의 장례를 잘 치러 주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알았습니다. 다윗 왕은 이 일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다윗은 그런 요압을 그냥 경계를 하면서 두었습니다. 후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솔로몬아 "네가 손을 볼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첫째로 요압을 말했습니다. 그를 평안히 음부에 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명에 죽게하지 말라. 저가 평안의 때에 군대 장관을 두 명이나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 요압도 결국 솔로몬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충신도 참 소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소망을 두었다가 그 사람을 의지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통해서 나온 고백이 3-4절입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방백들은 열강입니다. 그러나 그 열강들을 의지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 앗수르 의지하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은 열국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망을 두었던 주변의 사람들도 다 소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인생의 형편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변하지 않고 끝까지 깊이 묵상하고 나서 역시 믿을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변하지 않고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속성을 생각했습니다.

 

이즈음은 고추잠자리가 짝짓는 때입니다. 며칠 전에 아파트 앞을 나오는 데 고추잠자리가 훨훨 날아다닙니다. 그리고 짝을 지은 여러 마리가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그것도 열을 받아서 뜨거운 자동차의 본네트 위에다 꼬리로 닿았다가는 떨어지고 닿았다가는 떨어지고 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목요일 양천 지구 기독실업인회에서 말씀을 증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갈 때에 이진랑 장로님께서 저를 모시고 가겠다고 해서 장로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고 825분쯤 나오니 거기에서도 고추잠자리가 훨훨 날아다닙니다. 그러면서 짝을 지은 잠자리가 장로님이 차를 주차장에서 빼는데 본네트 위에다 꼬리를 닿았다가 올라가고 또 내려와서 닿고 합니다. 며칠 전에 아파트 앞에서 본 고추잠자리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금은 잠자리가 짝을 짓는 때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로님 오늘 하루 일이 잘 되려는가 봅니다. 저렇게 짝을 지은 잠자리가 장로님 차의 본네트 위에다 꼬리를 닿았다가 올라갔다가 하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하고 축복을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믿음이 좋으신 장로님께서 큰소리로 "아멘"을 하십니다.

 

도시뿐만 아닙니다. 한적한 시골 밭을 가보십시오. 지금은 수많은 고추잠자리가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때입니다. 바로 이즈음이 그럴 때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입니다. 변하지 않는 창조의 질서를 말해 줍니다. 이런 변하지 않는 창조의 질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다윗은 6절에서는 진실하심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6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여기에서 진실하다의 원 뜻은 "신실하시며" 입니다. 영어번역은 그래서 "faithful"로 되어 있습니다. 늘 변하지 않는 하나님 한 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변치 않으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가 있었습니다.

 

한 왕에게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먼 여행을 떠난 후에 달이 가고 해가 가도 약혼녀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들려 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기다리기 함이 들었지만 왕이 돌아온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혼녀의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찾아 왔습니다. "가엾은 애야, 네 사랑은 아마 널 까맣게 잊은 것 같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할거야.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소식이 없는가?"

 

이 말을 들은 그녀의 가슴은 슬픔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픈 가슴을 안고 그녀는 왕이 자기에게 오래 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언제까지나 그녀를 사랑하겠다는 맹세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다시 읽고 나서 그녀는 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왕이 돌아 왔습니다. 왕은 그동안 기다려준 약혼녀의 인내에 감탄하면서 물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어떻게 나를 기다려 줄 수기 있었소?" "나의 왕이여 제게는 당신이 제게 준 편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편지의 내용을 쓴 당신을 믿었습니다. 변치 않을 당신을 믿었습니다."

이게 신실함의 모습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런 왕의 신실하심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성 안에서 다윗은 소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근거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끝까지 변치 않으시고 지키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여러분에게 참 소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집으로 가시면서 또는 휴가지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보시면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어떠한 행복의 열매를 주시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공의로우심으로 인도하시되 그 모든 자비로 도움을 받는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의로 다스립니다. 그런데 세상은 악합니다. 마귀는 악한 자를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판단이 없으면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은 어디에서 하소연을 할 곳이 없습니다. 양이기 때문에 그냥 당합니다. 염소는 뿔이라도 있어서 받지만 양은 뿔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인 우리가 승리하는 열매는 어디에서 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 공의롭게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이기게 하십니다. 이것을 7절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압박 당하는 일을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한마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진리가 승리케 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다니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중상 모략하는 자들에게 당하여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니엘에게 잘못이 없음을 아십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있음도 아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래서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이일을 통해서 더욱 왕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을 하십니다. 그리고 공의로 판단하시되 억울했던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함께 하여주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고 합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증오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정말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누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잘못이 없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2년 만에 해방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것은 해방을 시켜주시되 그 감옥이 애굽의 총리로 가는 길목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되 더욱 좋게 긍휼을 입혀주셔서 더 빛나는 열매를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이 받는 행복의 열매입니다.

 

오늘 혹시 억울하게 남편으로부터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압박을 당하는 아내가 있습니까? 아니면 남편 주변에 생긴 몹쓸 사람으로 인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부인이 있습니까? 사업상으로, 돈 문제로, 아니면 악덕 사채 고리 대금 업자를 잘못 만나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빌려쓰고 억울하게 힘없이 당하는 분이 계세요. 만약 여러분이 말씀에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고 계시다면 반드시 공의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한 일을 아시고 다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 열매의 때가 올 것입니다. 갇힌 문제가 있습니까? 나를 활동 못하게 하는 얽어매는 문제가 있습니까? 오히려 걱정하지 마시고 오히려 믿고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조이첸이라는 중국 본토인의 간증입니다. 그는 수년동안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의 나이는 86세가 넘었습니다. 최근에는 14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감옥에 있는 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심을 믿고 감옥에서도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그를 그냥 놔두지 아니했습니다. 격리수용을 했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가장 더러운 일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모든 죄수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변소에 가서 쓰레기를 다 치우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악취가 너무 심해서 거의 쓰러질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도 냄새가 고약하니 아무도 와서 자기를 괴롭히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참 자유를 맛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더러운 오물을 치우면서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다고 하면서 간증시에 그 때 부른 찬송을 중국어로 불렀습니다. 제가 부르겠습니다. 중국어를 알면 중국어로 부르고 싶은데 모르니 그냥 한국어로 부르겠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하나님은 아주 더러운 곳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둔 그의 삶을 결국은 말씀대로 감옥에서 해방을 시켜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복의 열매를 주실 것을 믿고 사시길 바랍니다. 어떤 행복의 열매가 옵니까? 기대하시면서 7-9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압박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는도다" 여기에 기록된 열매가 올 줄을 늘 믿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영국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때 영국 왕실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온 교회에서 같은 시각에 일제히 종을 울리도록 했습니다. 그 종은 전쟁 중에 있는 모든 자에게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한 희망의 종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희망의 종이 울리기 전에 영국 왕실은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던 윌리엄 탬풀에게 전 국민에게 보내는 방송설교를 의뢰했습니다. 윌리엄 탬풀 주교의 그 유명한 역사적인 방송설교는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의 첫 설교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영제국 국민 여러분, 잠시 후에 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는 종이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모두 교회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두자는 말씀입니다.

 

탬풀의 설교대로 영국 국민들은 종소리를 듣고 다 교회로 나아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앞이 암담한 불확실한 시대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결국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우리 인생의 도움이 누가 되겠습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은 그 도모가 끝나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한 치 앞길을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 저녁에 뉴스를 들으니 버스가 추락해서 19명이 죽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것도 마지막 톨게이트를 한 5분 앞두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죽은 사람이 그런 사고가 날것을 예측했으면 그 버스를 타겠습니까?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한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들에게 소망을 두지 마시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삶에 힘든 문제가 있습니까? 그 신실하신 주님을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행복의 열매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반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도움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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