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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시편 설교 모음

시편 96편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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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뛰어라 /96:1-13/ 유기성목사

2017-06-13 05:58:37

 

96:1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땅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2 주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려라.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하여라. 3 그의 영광을 만국에 알리고 그가 일으키신 기적을 만민에게 알려라.

 

4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어떤 신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5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지만, 주님은 하늘을 지으신 분이시다. 6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주님의 성소에는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다.

 

7 만방의 민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여라. 8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예물을 들고, 성전 뜰로 들어가거라. 9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땅아, 그 앞에서 떨어라.

 

10 모든 나라에 이르기를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세계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이 만민을 공정하게 판결하신다" 하여라. 11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12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13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숲 속의 나무들도 주님 앞에서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나는 언제 하나님을 진짜 믿게 되었나?’생각해 보았습니다.

장애인이 될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당황스럽게도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관심은 하나님께로 옮겨 갔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신가?’ ‘주님은 정말 내 안에 오셨나?‘ 이 갈망이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후 제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배가 기쁨이 된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수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예배는 거룩한 의무였었고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이었지만 빨리 끝나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 때는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예배 그 자체가 좋아졌습니다. 헌금이 좋아졌습니다. 예배 때, 설교자 보다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시편 96편은 하나님께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96:1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땅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라 마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찬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꽃이 핀 것을 볼 때 어떻습니까? “, 꽃이 폈네하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달려가서 끌어안고 펄쩍 펄쩍 뛰며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암 덩어리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하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영생을 얻는 것이 어찌 꽃을 보거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거나 암에서 고침 받은 것에 비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누구나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던 다윗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중국 교회가 뜨겁게 부흥될 때, 3시간, 4시간씩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중국 가정교회에는 99절짜리 찬송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되면 한 번 더 부르자고 했답니다. 여러분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까? 공감이 됩니까?

 

찬양이 기쁘고 더 부르고 싶으면 하나님을 정말 알게 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4에서 하나님이 위대하시니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 하였습니다.

96:4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4:1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락시장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면 잘 가르쳐 줄 것입니다. ‘가천대학교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면 잘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어보면 정신 나간 사람 보듯 쳐다볼 것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가천대가 중요합니까? 인생의 목표가 중요합니까?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가락시장이 어딘지 알아서 무엇합니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다들 정신없이 바쁘게 삽니다. 그러나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바쁘긴 바쁜데, 쓸데없는 일에 집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고 삽니다. 분명히 무엇인가 빠진 느낌입니다. 때때로 사는 것이 너무나 허무하고 또 미래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마귀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악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아를 숭배하며 마귀 종노릇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성공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오직 사랑만 하며 살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한 분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해 보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7에서 만방의 민족들에게 주님을 찬양하라하였습니다. :8에서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9에서는 거룩한 옷을 입고 예배하라’ ‘하나님 앞에서 떨어라하였습니다.

 

:10-12에서는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싶습니다.

이런 예배는 억지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런 은혜도 깨닫지 못하는데, 뛰며 소리 높여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만약 아직 이처럼 기뻐 뛰며 찬양할 마음이 아니라면 은혜 받은 만큼만 예배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은혜가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라면 누구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뛰며 즐거워할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어찌 눈물 없이 찬양 없이 뛰며 즐거워함이 없이 그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에 그런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영이 살았고,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된 은혜를 받았으니, 천국 길을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영은 이 은혜 안에 있습니다. 세상 근심 먹고 사는 걱정에 사로잡혀 살다 보니, 보고 듣는 것들 때문에 심령이 메말라서 예배를 드려도 억지로 드리는 것이지 실제로는 누구나 뛰며 하나님을 찬양할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제가 안산에서 목회할 때, 공단에 있는 한 공장에 한 달에 한 번씩 직장 예배를 인도하러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 사장이 서울 어느 교회 장로님이고 지금은 그 아들이 사장인데, 집사님이었습니다. 예배라고 하지만 사장이 교인이기에 강제로 모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몇 백 명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라 여겨져서 나름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기울어져 가더니 결국 경매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드리기 전 사장실에서 사장인 아들이 제게 기도부탁을 하였습니다.

 

이제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어야 할 것 같은데, 경영권을 지키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인수하는 회사가 이 직장 예배만큼은 계속 드리게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예배를 드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마음에 간절한 것은 이 공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처음 그 젊은 사장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날 예배 후 직원들 앞에서 공개 고백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했음과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 예배가 계속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정원 감독님이 중국 단동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 목사님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70대 할아버지 한 분이 북한에서 건너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더랍니다.

 

지난 60년 이상 혼자 신앙생활 해 왔다고 하시면서 그동안 내지 못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헌금을 하시고 그동안 제대로 기도하지 못했는데, 교회에서 일주일 기도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금식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고 하시기에 그냥 여기서 신앙생활하시라 하였지만 이제 죽으러 갑니다하며 가셨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가 구원받은 자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입니다.

 

여러분,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예배를 전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 때, 우리의 연약해진 심령이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인생 자체가 사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만민에게 하나님을 전하라고 외칩니다.

96:2 ...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하여라. 3 그의 영광을 만국에 알리고 그가 일으키신 기적을 만민에게 알려라.

 

하나님을 알게 되면 만민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96:13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숲 속의 나무들도 주님 앞에서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먹고 마시고 집짓고 돈 벌기 위하여 일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을 전하는데 거는 것은 가장 탁월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전하고 알리는 일에 일생을 건 사람이 최고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천하 만민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저의 집에서 인터넷이 안 되는 날이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난감했습니다. 인터넷 회사 문제도 아니고 전파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터넷 중계기가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신론자처럼 살아가는 이유도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그 증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안에 있는 특별한 마음의 소원입니다.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나요? 나는 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나요?”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미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마음에 그런 갈망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 제 마음에 이런 갈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를 바꾸면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놀랍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주님 저를 인도해 주소서!” 하는 갈망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의 인도함을 소원하지 말고 믿으라” “지금 내가 너를 인도하고 있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51:2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홀로 있을 때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51: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분주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홀로 있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일하고 사람 만나고 인터넷하고 TV보다가 자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틈이 없으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요일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모임에서는 서로 허깅하며 인사를 합니다. 어떤 교인에게 허깅하려고 다가가는데, 그는 저를 보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허깅하였습니다. 순간 뻘쭘했습니다.

 

어색함을 감추려고 얼른 다른 사람을 안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도 그러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다가 오실 때, 내가 다른 것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다면 주님은 쓸쓸히 지켜만 보실 것입니다.

 

한번 둘러 보세요. 혹시 주님이 지켜 보고 계실지 모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을 무슨 큰 영적 체험이나 기적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평범한 체험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영성일기 입문 세미나 때, 한 여집사님이 간증을 하셨습니다.

영성일기 제자반 훈련을 통해 복음의 비밀인 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다시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동행한다고 자부하며 살았지만 둘째 아이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는 사건으로 저의 믿음은 산산조각으로 깨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성일기를 통해 제 심령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들이 믿어지고 주님과의 동행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 딸을 향한 감사함이 생겼습니다.

 

부족한 아빠 엄마의 품이 아닌 주님의 품에 있음을 감사하고 천국을 향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하루빨리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 라는 우울한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주님 앞에 있을 우리 딸에게 충성된 모습, 믿음의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소망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다 이해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 딸을 저의 가정에 작은 예수님으로 보내주신 사랑에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의 삶에 행복, 기쁨, 감사의 말들은 사라진 단어들이었는데 지금은 제 입술에서 고백으로 흘러넘칩니다. 주님 앞에 다시금 나아갑니다.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세월을 보낸 저에게 사랑한다. 너의 아픔을 다 알고 있다라는 말씀으로 찾아와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지 않는 자에게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나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같이 하셨습니다,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보이지 않으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성찬을 받을 때, 개인적으로 주님이 다가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주님은 이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는 매순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춤거리면 안 됩니다. 구경만 하면 안 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기뻐 뛰며 예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주님께서 다스리신다 /신년주일 /96:1-13/ 김기석목사

2016-06-04 14:15:48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땅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주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려라.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하여라. 그의 영광을 만국에 알리고 그가 일으키신 기적을 만민에게 알려라.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어떤 신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지만, 주님은 하늘을 지으신 분이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주님의 성소에는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다.

 

만방의 민족들이,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예물을 들고, 성전 뜰로 들어가거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땅아, 그 앞에서 떨어라. 모든 나라에 이르기를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세계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이 만민을 공정하게 판결하신다" 하여라.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새해 첫 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과거를 기억으로 존재하는 현재라고 말하고, 미래는 기대로 존재하는 현재라고 말합니다.

 

현재는 기억과 기대를 품은 직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말이 어렵습니다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지금을 영원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죽음 이후에 이어질 영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영생을 살라는 말입니다.

 

하루하루 살기도 바쁜 처지에 뜬구름을 잡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애는 영원의 감각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현실 논리에 꼭 붙들어 매두려 합니다.

 

새해 첫 주일 아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의 근본을 살피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96편은 유대인들의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 때 낭독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날 유대인들은 쇼파(나팔)를 불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불러 세웁니다.

 

나팔 소리가 들려오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표현합니다. 20세기의 유대 철학자 마이마너디는 뿔 나팔 소리가 상기시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너의 악한 방법과 생각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변순복, <변순복과 함께 하는 성경 속의 절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탈무드에듀아카데미, 2015430, p.221)

 

새 노래

새해는 그림자를 사냥하고, 허망한 것을 따르느라 생을 탕진하던 습속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돌이킴이 없다면 시간은 우리에게 공포심이나 허무의식을 심어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시의 화자는 온 땅을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새 노래'는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어제 먹던 찬밥을 데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고, 누군가의 호의와 돌봄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 덕분에 삽니다.

 

눈을 뜨면 보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눈을 감고 삽니다. 눈을 뜬 이들은 그렇기에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1절부터 3절 사이에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단어가 일곱 번 등장합니다. '노래하여라'3, '영광을 돌려라', '구원을 날마다 전하여라', '영광을 만국에 알려라', 기적을 만민에게 알려라' 등이 각각 1번입니다.

 

명령형 동사의 반복은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들의 영혼을 확고히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의 삶이 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즐겨 소비되는 노래를 보면 그 시대가 보입니다.

 

댄스, 발라드, 힙합, 랩 음악 속에는 그 시대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을 기반으로 하는 애상의 정서, 기존 질서에 대한 막연한 저항과 분노, 욕망을 서로에게 투사하는 곡들이 차고 넘칩니다.

 

대중 가요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가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조금은 더 건강한 노래가 불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권위주의 시대에 음반에 한 곡씩 넣어야 했던 소위 건전가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시인은 땅에 살고 있지만 자꾸만 하늘을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고대 세계의 뱃사람들이 북극성을 바라보며 자기의 항로를 살폈던 것처럼 하늘을 준거점으로 삼을 때 오늘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어떤 신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지만, 주님은 하늘을 지으신 분이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주님의 성소에는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다"(4-6)

 

주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매우 배타적인 인식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런 말이 그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신 분입니다. 우상은 그 존재 가운데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돌보시기 위해 기꺼이 당신을 선물로 내주십니다. 우상은 자기 앞에 엎드리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고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우상은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이들을 지키는 일에 동원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위엄과 영광,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잇대어 살아간다면 우리 삶 또한 그렇게 든든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찬양으로의 초대

시인은 이제 모든 민족들을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예물을 들고, 성전 뜰로 들어가거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땅아, 그 앞에서 떨어라."(8-9)

 

찬양이란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하늘 예배 광경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물네 장로가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서, 주님께 경배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놓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대학 졸업식에서 내 늙으신 어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드렸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18살에 시집을 오셔서 갖은 고생을 다 하시며 8남매를 건사하시느라 수고하신 그 어머니의 신산스런 삶을 잘 알기에 저는 그 모자를 어머니께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자는 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것임이 마땅했습니다. 스물네 장로의 마음이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린 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4:11)

 

이 사실만 알고 살아도 철부지 신세는 면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전히 자기 중심성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방의 민족들이 온 세계를 향해 외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보아도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공평함이 없습니다. 양지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응달진 곳에 유폐된 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 마루에 서서 오연한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는 사람도 있고, 수난의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현실을 바루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높은 산은 낮추고, 우묵한 골짜기는 메우며 사는 삶 말입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을 노골적으로 윽박지르거나, 은밀하게 괴롭히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세계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이 만민을 공정하게 판결하신다"(10)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일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합의를 종용한 오바마도 아니고,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설레발치는 아베도 아니고, 이번 합의를 국민들이 대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박근혜 대통령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믿는 이들은 그런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유난히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들의 아픈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덧없는 욕망이 우리를 이끌고 가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불화를 극복하는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문화에 저항해야 하고, 이웃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발생하는 기쁨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될 때 우리는 기쁨이라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세먼지에 덮인 하늘이 뿌옇습니다. 하지만 그 먼지가 걷히면 청명하기 이를데 없이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습니다. 잠시 가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먼지를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드러내 보이는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 하늘을 볼 때면 누구라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11-12)

 

하늘과 땅, 바다와 들, 그리고 산의 나무들까지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세상,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시인은 우주적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정의와 불공평으로 얼룩진 세상에서는 피조물들조차 신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수립되는 순간 신음은 기쁨의 노래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말 새해에는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그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오셔서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신년에 심판을 상기하는 까닭은 삶의 새로움은 자신의 허물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돈스러워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절망을 조금씩 몰아내는 일입니다. 한 해 내내 이런 아름다운 소명을 성취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어떻게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까? /96:1-13

2018-04-17 04:26:29

 

16세기 성자라 불리는 필립 디 네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당시 최고의 대학이었던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청년을 만나 왜 이 학교에 왔느냐고 물어보니 청년은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 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했더니 청년은 "박사 학위를 얻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리는 계속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는가?"

"변호사가 되어 명성을 얻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후에는 많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그 다음에는?" "명성과 재물을 누리며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을 모른 체 살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성공으로 잘못 알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을 살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급급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광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사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기도의 핵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순간에,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고통스런 순간에도 자신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요점이 무엇입니까? 7절 보십시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절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하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적당히 영광 돌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까?

 

1. 새 노래로 찬송함으로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2)

 

4절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지극히 찬양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찬양을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1절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것도 새 노래로 찬송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새 노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래 전부터 많이 불러서 잘 아는 찬송가 말고 새롭게 만든 찬송으로만 찬양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찬송이라 수 없이 많이 불리어진 찬송가로 하나님을 찬양하더라도 새롭게 부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나의 신앙의 간증을 담아 새로운 감동과 감격을 가지고 부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방송에서는 노래를 경연하는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오래 전에 히트한 명곡이더라도 새롭게 편곡도 하고 새롭게 자기만의 곡 해석을 하여 자기의 이야기처럼 부릅니다. 그러면 듣는 수많은 청중들이 자기의 삶과 동질감을 느끼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노래를 듣는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소름이 돋았다고 고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쳐 환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노래를 평가하는 사람이 말합니다. 익히 잘 아는 노래지만 아주 새롭게 들려졌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 이별, 상처 등의 주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들으라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노래를 새롭게 부르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사랑과 희생과 은혜를 찬양합니다. 저들보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저들보다 더 새롭게 오늘 체험한 감격과 감동 그리고 감사를 담아서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에 있던 나치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은 공장에서 오물을 처리하는 곳이었는데, 연합군이 이곳에 폭탄을 투하해 공장이 전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포로들은 이제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나치 군인들은 이 포로들에게 무너진 공장의 파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은 그 파편들을 다시 제자리에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 날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나 목적이 없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포로들이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포로들이 살아갈 의지를 잃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매일 매일 하는 그 일이 아무런 의미나 목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만 죽고 싶어져서 나치 군에게 달려들어서 일부러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의도적으로 자살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미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지면 사는 이유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성공하는 것보다 유명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의미 있게 지어진 존재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향해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러분을 창조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의 존재 목적을 찾으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며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건의 용도를 모르면 잘못 사용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한 방법은 철학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점쟁이를 찾아가서 물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텔레비전 토크쇼에서는 이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스승을 찾아서 물어보아도 사람이 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을 만드신 창조주와 이야기하고 창조주가 만든 매뉴얼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가장 처음 부분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니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목적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지으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을 온전히 이루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 가장에 중요한 것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행적을 전파함으로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2,3)

 

2절은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했습니다.

3절은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날마다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종 저는 지체들에게 간증을 부탁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 한 번 준비해 보겠습니다." 또 어떤 분은 "부담스럽습니다. 간증 안 하면 안 되요." 합니다.

 

간증이 매 주일 이어지는 교회가 건강하고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서로 간증하려고 경쟁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아무 간증도 없는 교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생명력이 사라진 교회입니다. 간증을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 이야기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아요.

 

간증은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이야기 하면 좋은 간증입니다. 기도하는데 간증이 없을 수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데 어떻게 간증이 없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면 삶 속에서 믿음을 드러낸다면 간증이 넘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끈따끈한 새로운 간증이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 교회 예배에서 담대하게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목장모임에서도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모임에서도 간증할 기회에 담대하게 간증하세요. 비 신자들을 만나서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을 확신을 가지고 자랑하세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저렇게 큰 일을 행하시고 왜 나에게는 작은 일만 이루실까?'

 

그렇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행하신 일은 시시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작게 보이는 일이든지 크게 보이는 일이든지 다 중요합니다. 비교하지 말고 움츠러들지도 말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담대히 그리고 낱낱이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 응답이 진행되고 있는 것, 말씀은 하셨는데 그대로 있는 것 가리지 말고 전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7-9)

 

8절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하신 말씀 직후에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9절에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이 무엇입니까? 물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예물은 우리의 소유중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예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하라고 하셨는데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 무엇일까요? 본래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성전에 나아가려면 적합한 복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까요? 그것은 외적으로 의식을 위해 갖추는 어떤 복장이 아니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변화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거룩하고 성결한 삶에서 나오는 찬양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동시에 기쁨을 안고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께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11절과 12절에 즐거워하며, 즐거워 할지로다, 즐거이 노래하리니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즐겁게 누리며 나아와 예배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 영 제국의 왕실은 당시의 존경 받던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 윌리암 템플에게 대 국민 방송설교를 요청하게 됩니다. 당시의 영국은 나치 독일의 기세에 대항할만한 객관적 전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국 국민들은 싸움을 하기도 전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채로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윌리암 템플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그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대 영 제국의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전능 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일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끓고 그분을 경배하며 그 동안의 우리의 죄,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들은 전쟁 가운데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합당한 영광입니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님을 전파하는 은혜로운 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입으로 전하는 말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에 거룩함이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에 즐거움이 가득합니까?

 

하나님께서 도저히 받으실 수 없는 찬양, 하나님이 불편해하시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말들로 가득했다면 부족함을 인정하고 회개합시다. 그리고 변화시켜달라고 간구합시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감격으로 충만하여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더욱 민감하여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날마다 전파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사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예배를 매 번 드리도록 더 거룩하게 변화시켜 달라고 하늘 기쁨이 충만하여 즐겁게 나아가게 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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