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앞에 서보니, ‘나를 기억해 다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느1:1-11/ 김병삼목사
2023-04-18 03:57:50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로 새로운 시리즈를 열어가려고 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미술가가 좋아요 아니면 음악가가 좋아요?”
그러자 엄마는 “둘 다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니가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성적표에는 “미술 - 가, 음악 - 가”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풀어가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다가 아니라, 무엇을 듣고, 어떻
게 듣고,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의 인생 중요한 문제들이 발생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분명
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일상으로 인해, 우리가
너무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Intro.
2022 말씀으로 돌아가자 – 말씀 앞에서 1
- 2 -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022년을 시작하면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습니다.
지난 몇 년 코로나로 인해 많이 피폐해진 사회와 신앙의 침체를 보면서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
부터 새롭게 rebuilding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롭게 재건되어야
할 우리의 영적 육적 모범을 제시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이야기가 순서
대로 이어져 있습니다. 셋의 특징을 들라면 모두가 페르시아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민족
의식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커다란 주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스라는 학자였는데, 포로기를 지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잊혔던 말씀
을 회복시켰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느헤미야는 말씀회복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재건하므로
신앙회복을 꿈꿨던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간단하게나마 역사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말씀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B. C. 722년 경에 북이스라엘은 앗스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B. C. 587년 이 되어서는 남 유다가 베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연과 되
어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성
벽을 헐고 성문을 불태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바사의 고레스 왕은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향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 성벽을 쌓
고 성전을 재건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성벽이 없이 살아가야 했던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느헤미
야 1장은 그가 고향으로부터 온 소식을 들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
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러면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1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혹시 ‘수산’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없나요? 바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수산에 살고 있었던 이
스라엘 사람이었죠. 이들은 그곳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느헤미야 역시 고위
직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에스더는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였습니다. 당연히 에스더와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 다음 왕인 아닥사스다를 섬겼습니다.
2022 말씀으로 돌아가자 – 말씀 앞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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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아닥사스다는 이미 에스라에게 많은 돈을 주어 그를 고향 예루살렘으로 보낸 선
한 왕이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원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렇게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고, 느헤미야는 왕이 먹는
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습니다. 왕이 지극히 신임하는 신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느헤미야는 고향으로부터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2절 말씀.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우리의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나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가운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느헤미야는 굳이 이런 말을 듣지 않고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
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 가운데 조국 이스라엘과 그 형제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는 말
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
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인 수산궁에 있었습니다. 자신은 페르시아에서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자신의 형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물었습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 즉’
이 말씀을 준비하는 새벽에 신문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찾아온 무더위가 기
승을 부리는 때, 하루에 9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코로나 감별소에서 검사를 받습니다. 나라에
서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폭염을 피해 업무를 정지하고 쉬라고 하지만,
그 열돔 현상으로 온 나라가 뜨겁게 달궈진 도로에서 기다리는 시민들을 그냥 둘 수 없어 일
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보게 된 것이죠.
20대의 한 여성은 기사가 나가는 것은 좋지만, 뒷모습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런 상
황에서 땀띠로 벌겋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가 보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 더위에서 장갑을 벗으면 라텍스와 함께 땀으로 뒤범벅된 손의 피부가 같이 벗겨지기도 합
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저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저들의 수고
를 덜어줄 수 있을까?
오늘 말씀 가운데 정말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고향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에게 자
기 고향이 어떠한지 사정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조국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
다면, 그가 처한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이미 자신은 충분히 걱정없이 먹고 살 수
“내가 이 말을 듣고”
2022 말씀으로 돌아가자 – 말씀 앞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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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위치에 있으니 말입니다. 모든 일들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무엇을 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나요? 4절 말씀.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 말씀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분명히 슬픈 소식을 들었으니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놓
고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쓰실 때는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아파하는 마음을 가
지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부흥과 회복”을 이야기 할 때마다 언급되는 성경이기도 하며,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위대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 위대한 부흥의 역사와 느헤미야의 사역이 일어났던 때를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
까?
느헤미야가 수산궁에 있던 때, 형제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의 형편을 알려줬습니다. 3절,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 때부터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백성과 훼파된 성전을 바라보며
슬피 울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기억하옵소서”
자신의 백성이 당하는 어려움이 무엇 때문인지를 느헤미야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6절
하반 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 .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
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
운데에 흩을 것이요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아 마땅한 민족입니다.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기에 하
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것이요,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열국 중에 민족을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죄로 인한 황량함과 잡초 같은 민족,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당하는 자신
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암울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가 있는 수산궁이었습니
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곳입니다.
기억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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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에게 주신 부흥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기억해 주세요.
9절의 말씀,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저주와 형벌에 대한 무서움만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든지 돌아오면, 언
제든지 회복하면 축복해 주시기를 약속하신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하나님! 현재 범죄 한 우리 민족의 모습과 비참한 징계 당함을 보시지 마시고,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미래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기도하는 비전 부흥의 비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억해 달라는 그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억을 못하시고 잊어버리셨기 때문일까요? 여기에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기억을 되살
리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과 민족이 하나님께 기억 된 바 되는 사람이 되도록 변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리라는 신앙의 다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들의 그런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느헤미야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10절의 말씀을 보세요.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지금은 비록 죄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일찍이 구속하시고 택하여 주신 백성이기에, 회복과 부흥의 비전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22년 시작하며 우리가 바로 이 회복과 부흥의 비전이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훼파된 성벽과 압제 속에서 슬피 우는 백성을 바라보며, 부흥의 비전을 보았던 느헤미야를 생
각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여 주옵소서”기도한 그의 기도에 주목하십시오.
그의 기도는 그의 민족이 달라질 것에 대한 헌신과 다짐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버려진 들판, 잡초가 무성한 땅을 지날 때마다 유심히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
람은 그 땅을 바라보며 버려진 땅이 아니라 비옥한 농토로 바꾸는 상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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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굉장한 땅이야!” 그 사람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그 땅 주인이 들었습니다.
그 땅 주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사람을 바라보며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을 당신
이 가지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며 무성한 잡초를 볼 때, 당신은 이 땅의 비전을 보
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 잡초를 다 뽑아내고 이것을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 거라 확신 하오”
여러분들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아시나요?
일제의 압제아래 연해주에 이주해 정착해 살던 사람들이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강제로 중앙아시
아로 이주되었던 역사를 말입니다.
당시 강대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를 잃은 불쌍한 우리 민족이 연해주에서 땅을 가꾸며 살고 있
었는데,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들이 일본에게 정보를 제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937년 9월 9일
부터 10월 말까지 17만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강제로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갑니다. 이중
1만 1천 명 정도가 열차에서 질병과 기아로 사망을 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은 척박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
다. 추운 겨울에 그곳에 내려진 사람들이 거할 곳도, 먹을 것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굶어 죽으면서까지 종자 씨앗을 먹지 않고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비록 동토의 땅이지만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바뀌어 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척박한 땅에서 비옥한 곡식의 풍성함을 보았던 사람들의 헌신이 오늘날 그 땅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바로 그 척박한 땅에서의 부흥을, 잡초 가운데서 비옥한 땅의 풍성함을 보려
고 합니다.
말씀 앞에서,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서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우리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면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진정한 관계, 그리고 살아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척박한 우리 인생에 풍성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
젊은이들의 놀라운 미래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의 포인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가 이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그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이방 땅에서 민족을 생각하며 부흥을 꿈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어떻게 부흥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느헤미야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 때에. . .” 느헤미야가 민족을 생각하며 슬퍼하며 금식하고
그 때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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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기도하던 때에. . .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1절 말씀에 보니까,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
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방 땅에서 그 왕의 도
움을 받고 부흥의 역사를 시작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정신 의학자 존 화이트는 ‘탁월한 지도력’ 이라는 책에서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을 이야기
합니다. 무엇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can'과 ’will'을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부르짖어 간구했다
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십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느헤미야가 왕의 술 맡은 관원이 된 것을 개인적인 축복으로 생각할 수 있습
니다. 그에게 주어진 개인적인 영광으로 생각하며, 어쩌면 자신의 기도를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민족의 아픔을 깨닫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형통함을 위하여 기도
할 때,
‘이 때에’ 느헤미야가 왕의 술 맡은 관원이 된 것이 ‘이 일과 이 상황’을 위해서 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있게 하심이 우리 민족의 형통함을 위해 가져
다 놓으신 자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때에 내가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를 잘못 오해하면,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된 느헤미야를 하나
님이 높이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NIV 영어 성경을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
습니다. “I was cupbearer to the king.”
부흥을 꿈꾸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니,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복된 자리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깨닫게 되는 가장 큰 축복은 이미 하나님이 쓰스는 그릇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
입니다.
이제 2장에 가서 보면, 그가 어떻게 자신의 비전을 이루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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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가 왕의 앞에 나아갔을 때, 얼굴에 근심된 표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총애한 왕이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근심 하냐고, 그 때 느헤미야는 솔직하게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을 고합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 되어, 고위직에 있는 그가 아직도 자신의 땅을 못 잊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고백입니까? 그 때 왕이 묻습니다. 느헤미야 2장 4절에서,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왔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담대하게 구합니다. 자신을 그곳
에 보내 무너진 성읍을 재건하게 해달하고 왕에게 간청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황당한 요구
였는데, 느헤미야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2장 8절.
. .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이제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벽이 앞에 있나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2장 8절 말씀을 영어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 .And because the gracious hand of my God was upon me, the king granted my requests.
그렇습니다.
오늘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들 위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일어날 일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 일을 기대하며 느헤미야가 기도했던 ‘하나님 나를 기억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계획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그의 생각)
(verse1)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는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는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 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2022 말씀으로 돌아가자 – 말씀 앞에서 1
- 9 -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 보신단다
(chorus)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verse2)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너와 같이 있고 싶어 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 중에도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 초장으로 인도 하신단다
(1) - 하나니 그리고 느헤미야 /느1:1-/ 김형익 목사
2021-05-17 12:11:47
1. 역사적 배경
느헤미야서는 주전 445년부터 432년까지 유다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오래 전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지도자 느헤미야의 회고록처럼 쓰여진 성경입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패망한 유다의 많은 백성은 쇠사슬에 매인 패전국의 포로로 멀리 바벨론 땅으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주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유다 민족은 세스바살의 인도를 받아 50~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1차 포로귀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때 돌아온 사람들이 스룹바벨 총독의 지휘 아래,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제2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1차 귀환으로부터 80년이 지난 주전 458년에는 다시 에스라의 인도를 받아 대규모 유다민족의 2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포로귀환의 이야기는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많은 백성이 오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돌아간 고향은 옛날의 화려하고 평안한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예루살렘은 성벽도 없어서 어떤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폐허가 되어버린 도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 느헤미야가 살았던 시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지 140여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예루살렘의 성벽 터는 온갖 잡초와 나무들이 자라고, 더러운 오물로 덮인 폐허로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 긴 기간 동안, 성벽을 재건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는 성벽을 재건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해 보였던 성벽 재건의 역사는 수많은 대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견된 느헤미야의 지도력에 힘입어 불과 52일 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로운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서, 주전 445년 8월 1일에 시작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역사는 그해 9월 21일에 마쳤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2. 느헤미야라는 인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의 후손입니다. 그의 조상이 포로로 잡혀온지 100년쯤 되었을 때 느헤미야가 태어났다고 보면, 그는 포로 후 4세대 정도 되는 셈입니다.
1차 귀환과 2차 귀환 때, 많은 유다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모든 유대인이 다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오랜 타국 생활에 이미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가 패망한지 1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보다 100여년 정도 앞선 인물들인 다니엘(주전 620년경에 태어났고 605년에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와 536년 정도까지 살았을 것이다)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30여년 전의 모르드개와 에스더(에스더는 주전 478년에 아하스에로의 왕비가 됨) 같이, 제국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인물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의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술 관원은 독살이 많던 고대세계에서 왕이 최고로 신임하는 신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이 경호실장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위치였으니 그의 성공은 외국인으로서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게 되면, 만사가 다르게 보이기 십상입니다. 이제 자신의 삶 뿐 아니라, 자녀들의 삶도 어느 정도 보장된 셈입니다.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자기 민족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것은 자신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느 1:1).” 수산궁은 지금의 이란 남서쪽의 따뜻한 지역으로,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 때는 수도였다가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때 수도를 옮기면서 주로 겨울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왕은 따뜻한 수산궁으로 와서 거하면서 통치를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1:1은 느헤미야를 소개하면서, 유대 민족의 역사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권력과 부를 보장받고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던 사람으로 느헤미야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3. 느헤미야의 관심
2절은 유다에 다녀온 몇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중 하나니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그는 느헤미야의 친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성공에 정신이 팔려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국, 옛 고토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형제 하나니가 유다에서 막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더냐? 우리 조국의 형편은 어떠하더냐”고 묻습니다(2).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들은 소식은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3).”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은 1차와 2차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국으로 돌아간 동포들이 과연 잘 정착해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잘 재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관심은 단지 조국에 대한 향수나 애국심 정도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적이고 신앙적인 관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이었고, 그 땅은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었습니다(9). 그리고 유대 민족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고 주의 백성”이었습니다(6,10).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가 자기 민족과 옛 고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신앙적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유다 민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그는 알았고 소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지고 있던 깊은 관심의 동기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관심과 근심은 철저하게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이었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었습니다.
4. 느헤미야의 근심과 기도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이 4절에 소개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여러분은 느헤미야가 좀 격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이 지금 아직도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 49:6 참조).” 느헤미야의 슬픔은 영적인 것이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예에 관한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니의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가 기도한 내용을 보면, 우리는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달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당당함 내지 의로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느헤미야만이 보여준 예외적 태도는 아닙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70년이 차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게 됩니다(렘 25:11; 단 9:2). 그리고 계산을 해보니 그 때가 이미 찬 것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반응할까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다니엘 9장에서 보여주는 다니엘의 태도입니다. 왜 회개합니까? 이런 황폐함이 조상들의 죄와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느헤미야가 본문의 기도에서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느헤미야가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한 내용은 5~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의 내용이 회개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과 여전히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있는 것이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느헤미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징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회개합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1:6b~7).”
느헤미야는 이 회개에서 자신의 죄를 제외하지 않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앞에 자기 의로움과 당당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느헤미야의 태도는 비록 조상들은 잘못했지만,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할 자격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는 희망이 보입니다. 이 희망은 근거없는 낙관적인 희망이 아닙니다. 이 희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내린 희망입니다. 9절입니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 계명을 지켜 행하는 순종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모아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느헤미아의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또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히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이 백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10).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의 슬픔과 눈물이 그저 단순한 인간적 감수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내린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이 그의 모든 정서와 지성 속에 침투해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느헤미야의 기도는 회개로 시작해서 간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행동을 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마음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술 관원으로서 엄청난 지위를 내려놓겠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리고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 주의 백성을 위하여 자기가 할 일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본 것입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술 관원의 자리에서 내려와 유다 총독으로 가는 일을 허락 받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자리에서 내려와 도서 산간의 이장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왕이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을 쉽게 놓아줄 리 없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 보다 높으시고 왕의 마음을 바꾸기를 물의 보를 바꾸듯 하시는(잠 21:1)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행동을 낳습니다. 참된 기도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그 진정성을 드러냅니다. 느헤미야는 말로만 생색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듯이, 예루살렘과 유다 민족을 향한 느헤미야의 관심은 일회성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에 다녀왔다고 하니까 호기심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수일을 슬퍼하며 금식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라는 고백도 느헤미야의 관심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이 누리는 그 화려한 지위를 포기하고 유다의 총독이 되기로 작정한 것은, 예루살렘과 유다 민족을 향한 그의 관심사가 삶 전부를 걸 만큼이나 전존재적 관심사였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5. 잊혀진 인물, 하나니!
느헤미야 1장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조연이 한 사람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스토리의 주연인 느헤미야를 주목합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수많은 대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52일만에 재건하는 탁월한 리더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하나니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인물, 바로 하나니입니다. 하나니의 예루살렘 방문(우리는 그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공적인 방문이었는지 사적이 방문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과 느헤미야의 질문에 대한 하나니의 상세한 답변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열쇠입니다.
물론 하나니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공을 다 하나니에게 돌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니의 존재는 귀하고 중요합니다. 하나니가 있었기에, 그가 전해준 예루살렘의 소식이 느헤미야의 삶을 움직인 방아쇠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느헤미야에게는 왕의 술 관원으로서 직접 사랑하는 조국 땅에 가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생 하나니를 시켜 다녀오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하나니의 존재 때문에,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회개하며 이 모든 일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적용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적용을 두 가지로 제시하겠습니다.
A. 우리들의 하나니들
이번 주 목요일, 우리 중 여섯 사람이 단기선교로 인도네시아로 출발합니다. 이들은 그냥 몇 명이 아니라, 모두 벧샬롬교회,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다녀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벧샬롬 교회의 하나니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었듯이, 우리 몇 사람이 가는 인도네시아는 다 하나님이 소유권을 주장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곳에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또 그곳에는 복음을 들어야 할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대다수는 무슬림들입니다. 우리와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도 있을 것입니다. 단기선교팀은 벧샬롬교회의 하나니들로서 이 모든 상황과 형편을 직접 보고 듣고, 할 수만 있다면 경험하고 돌아와 그 내용을 전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명, 하나니들로 부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우리가 느헤미야들이다.
단기선교팀이 하나니들이라며, 우리 벧샬롬의 가족들 모두는 느헤미야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높임과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고 느꼈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의 안위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도전하십니까? 여러분의 진정한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집값이 오르고 주가가 오르는 것입니까?
자녀들이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니까? 아니면,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신자는 이렇게 자기 인생의 그림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더 나아가는 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는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는 그 큰 그림 안에서 자기 인생을 보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역할, 교회의 역할을 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예가 여러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도네시아가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물론 느헤미야는 눈을 감으려면 딱 감고 모른 척 하고 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를 그렇게 살도록 놔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술 관원이라는 보장된 자리를 내려놓고 유다의 총독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단기선교팀을 보내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에 그들이 불을 붙이고 움직이고 행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교회에게 허락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7.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자들(시 122:6)
시편 122: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이런 심정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사,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 인도네시아 단기 선교를 다녀오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선교를 담당하는 벧샬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admin
믿음의 기도는 역사를 바꾼다! /느1:1-5/ 오주철 목사
2016-04-10 09:45:52
유명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톤 처칠경이 남긴 기록 가운데 "전쟁 회고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가운데서 그는 회고하기를 1940년 9월 15일을 가리켜 자기 조국인 영국이 당시의 나치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특별한 승리를 거둔 '절정의 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 공군기와 폭격기가 영국 땅에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그런 상황에서 영국측으로서는 뾰족한 방어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갑자기 10분 동안 모든 독일 비행기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훗날 영국의 공군 전투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공군대장 다우딩경은 전쟁이 끝나자 그 날의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설명을 할 방법이 없다. 이 사건이야말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노만 그럽이 쓴 "탁월한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당시 웨일즈 성경대학의 학장이었던 리즈 하월즈의 영향으로 처칠 수상이 전쟁 가운데 두 번에 걸쳐 전국적인 기도의 날을 선포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기도를 호소하게 됩니다.
리즈 하월즈 자신은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 학교 강당에서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 1시간, 점심 후에 1시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달할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공군이 이유 없는 후퇴를 하던 9월 15일 바로 직전에 학교 강단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잦은 공습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공습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왜 믿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만일 이와 같은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저 나치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체제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해 종말을 고할 것이며, 이 땅의 고귀한 생명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시는 일을 반드시 행하실 것입니다."
그의 말은 예언이 되었고, 그의 그 말은 몇일 내에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드려졌던 리즈 하월즈와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리켜 후에 "역사를 바꾸는 기도"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기도의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 445년경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세계 신흥제국이었던 페르시아 정부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아다사스다왕 1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사람이 느헤미야였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맡은 관원이었다고 해서 술만 따라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왕의 상에 음식이나 술을 올리는 사람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술이나 음식에 독을 넣으면 왕의 생명은 끝이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그 자리를 맡깁니다. 그러면 그는 왕에게 술을 갖다 바칠 뿐만 아니라 왕의 옆자리에서 왕과 함께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 느헤미야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었던 고레스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헌신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건립되었지만 고국 땅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폭동의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약탈과 무질서에 노출된 채 깊은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조국에 대한 이러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고 조국에 돌아가 조국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쌓아주기로 결단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벽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벽은 그들의 삶의 울타리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이 안전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을 보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그 성벽이 무너져서 백성들의 삶이 위협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고국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그 일에 헌신했고, 그 일을 완수하게 됩니다. 그 일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느헤미야의 일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골방에서 드렸던 기도에 있었습니다.
고국으로부터 이 비참한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민족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느헤미야로 하여금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출발이었습니다. 그는 골방에서의 기도로 역사를 바꾸는 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마음의 고단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이대로는 살 수가 없다, 이제는 무엇인가 좀 변화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갖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주 앞에 나와 기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골방에서 나와 내 자녀와 가정과 우리의 사회와 민족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열방을 향해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기도는 역사를 바꿉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열려진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참된 의미에서의 진정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의 이미지가 생각이 나십니까?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세상에서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거룩한 목소리로 깊은 산 속 높은 곳에서 주여 삼창을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저는 그것이 정말로 참된 기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소리를 듣고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역사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이 잘못된 역사를 바꾸어달라고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닫힌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기도를 해도 결코 자신과 가정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아닌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었던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여기에 보면 2절의 마지막에 물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장관을 하고 있던 느헤미야가 어느 날 고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자기 조국의 형편이 어떤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외국 땅에 와서 출세를 해서 잘 살고 있었지만 조국에 대한 관심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절입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는 지금 이와 같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조국의 비참한 현실이 눈에 그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었던 느헤미야의 반응이 이어지는 4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조국에 관한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슬픔 속에서 결단을 합니다. 그것은 그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역사를 바꾸는 믿음의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역사 의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식을 바로 갖는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려 그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느헤미야, 그에게는 역사를 바로 보는 눈과 귀가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끌어안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열린 눈으로 여러분의 현실을 한 번 보십시오.
내 삶의 마당에서 이웃들에게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느껴보십시오.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먼저 여러분의 가정을 천천히 열린 눈으로 한 번 돌아보십시오. 안타까운 일들이 없습니까? 그래서 내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또 내 가까이에서 돌아보아야 할 내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찢어진 가슴으로 아파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보십시오. 저들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느껴보십시오.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우리 민족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아픈 가슴으로 바라보십시오. 저 북한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바다를 만들어버리겠다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외국의 바이어들이 불안해서 거래처를 바꾸겠다고 합니다. 9천억이 넘게 투자를 해서 만들어진 개성공단이 무일푼으로 끝나게 생겼습니다. 123개의 기업들과 그와 관련된 5000여개의 하청업체들이 당장 부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떠나서 내가 살고 있는 울산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울산은 우리 나라 국민소득의 평균에 3배나 더 잘 먹고 잘 사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나 독일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울산의 현대 자동차는 고비용 저생산으로 심대한 위기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두 주 전에 현대 자동차는 국내 생산을 줄이고 해외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국내 자동차 소비도 줄었지만 세계 수출도 꽉 막혀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전국적으로 가장 타락한 소비의 대표적인 도시가 울산입니다.
이런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을 보신다면,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려진 의식, 열려진 귀로 소리를 들어보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을 똑 바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아픈 가슴으로 느껴보십시오. 이것이 역사의식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주님께서 먼저 역사를 보는 열린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열린 역사 의식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열린 역사의식 갖는 것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아픈 가슴으로 느끼고 있는 그 역사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엎드려 이 민족을 위해,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만이 역사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만물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십니다. 영어로 역사라는 단어를 표기할 때 우리는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his와 story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을 가리켜서 흔히 섭리사관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분의 섭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Great God)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러나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나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보이지 않거나 작게 보이고, 기도를 할 때 눈을 감았는데 계속해서 내 문제만 떠오릅니다. 그 문제가 너무 너무 크게 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그 문제 아래에 짓눌려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망할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다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의 핵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선이 주님에게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보고 있었을 때 물위를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의 시선이 주님에게로부터 떨어지고 파도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주변에서 널뛰고 있는 파도와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에는 파도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두려움 속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의 그 환경은 나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환경은 나로 하여금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큰 문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더 크게 보이신다면 그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문제는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크게 보인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정말 문제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는 못하는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이 내 눈에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좌절하거나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고단한 역사의 현실이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지금의 역사적 현실이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아직도 자기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약'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느낌은 이 구약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나의 샘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할 때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때 동일한 일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을 통해 세계 모든 민족들의 열방을 향해 동일한 심정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이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기록된 쉐마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레마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우리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2장 39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를 위한 약속인가를 선포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먼 데 있는 이방 사람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시는 모든 나라, 모든 족속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약속들을 읽을 때마다 나를 위한 약속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이 무척 고단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단한 환경에만 시선을 두지 마시고 성경을 좀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읽으십시오. 그 성경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십시오. 거기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약속들이 나에게 부딪혀 올 때마다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꽉 붙드십시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그 약속을 주장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는 변함없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약속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약속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에게 약속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약속은 나와 내 가정을 위한 약속이며, 이 약속대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면 그 약속을 믿는 믿음대로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역사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종종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사람에게도 관심이 있습니까? 나 같이 연약하고 왜소한 사람에게도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4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들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버려진 고아입니다. 두 번째는 외롭게 홀로 살아가는 과부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외국에서 와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나그네들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 이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거의 편애에 가깝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긍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약자들이나 약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시는 덕입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자기 민족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면서 바로 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5절의 하반부를 보면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가 이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너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정말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가까스로 긍휼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은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말은 끝이 없고 바닥이 없는 넉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빈민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어느 날 빈민선교를 하다가 바다 구경을 한 번도 못한 가난한 빈민촌 청소년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바다를 구경시켜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자동차에 태워서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이 아이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아이가 그 넓은 바다를 보더니 갑자기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우느냐고 했더니 이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넉넉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이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은 그런 끝이 없는 넉넉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야."
그래서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들의 실수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우리들에게 아직도 생명을 주시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여기에서 무궁하시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그 많은 실수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살아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고 고통스러운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분 앞에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분의 끝이 없는 넉넉한 자비와 풍성하신 긍휼을 구해 보십시오.
아직은,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여러분의 희망,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여러분의 인생의 노래,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붙들고 그분 앞에 다시 부르짖어 기도해 보십시오.
5월 1일부터 시작되는 "기도울산 33일"을 통해서 골방에서 열방을 경영하며 역사를 바꾸는 기도의 주인공이 되어 보십시오. 매일 한 시간씩 시간을 정해 놓고 나누어드린 책을 중심으로 기도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 기간 동안 울산의 56개 교회 25000여 교인들이 매일 같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긍휼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를 할 때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축복이 이 울산 도성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가정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무릎을 꿇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새 역사는 오늘 시작될 것입니다. 고통의 역사는 바꾸어질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새롭게 지어질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역사를 바꾸는 기도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골방에서 열방을 경영하는 기도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주여, 비통함을 제게 주소서 P1 /느1:4/ David Wilkerson
2015-06-22 11:12:38
▲세속화된 교회 현실
오늘날 기독교의 모든 모습들을 볼 때
제가 보는 것은,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방식과 사역들뿐입니다.
그런 사역들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사역들은 세상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오히려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에 기어 들어와서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에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일례로, 지금 교회에는, 음악이 하나님의 집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영감 없는 찬양이 너무 시간을 잡아먹고, 말씀이 거의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듯)
그 외에도 각종 오락거리들이 하나님의 집을 차지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조차, 노는 것entertainment에 정신이 팔려 있고,
죄에 대한 교정과 책망에 대해서는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어디로 갔습니까?
사역 가운데 비통함이 있습니까?
더 이상 그런 단어를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하며 자라난 이 세대에서, 들어보지 못합니다.
교정, 꾸짖음, 슬픔, 비통 등이.. 교회에서 전혀 들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비통함 anguish>이 필요합니다.
비통함anguish이란..
극도의 아픔과 고뇌를 말합니다.
내 마음/또는 내 주위의 타락한/세속화된 환경 때문에
나의 감정이 너무 휘젓듯이 불안하고, 매우 고통스런 상태,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깊은 아픔을 뜻합니다.
비통함 Anguish
진한 아픔 Deep pain
진한 슬픔 Deep sorrow
하나님 마음의 고통의 탄식 Agony of God's heart.
이제까지 우리는 종교적 미사여구와 부흥을 얘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변했어요.
이제는 이야기할 힘조차 다 빠져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은 ‘비통함’입니다.
왜냐하면 비통함으로부터.. 진정한 열정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열정은, 비통함의 세례(푹 잠기는 것)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을 찾아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폐허가 된 상황을 회복시키실 때,
그분은 먼저, 당신의 심한 고통anguish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당신의 교회와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벌어지는 잘못된 해프닝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한 고통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두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 사람을 취하여,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격정anguish으로
그에게 세례를 주십니다. 그를, 하나님의 마음/격정 속에 푹 잠기에 합니다.
▲느헤미야에게서 그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이 폐허를 어떻게 다시 재건하실까요?
여러분, 느헤미야는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장인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반짝 감정적인 (고뇌anguish하는) 사람,
또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관심을 가진 뒤
바로 식어지는 사람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나는 엎드렸다. 슬피 울었다.
그리고 금식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느1:4
왜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왜 느헤미야만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는데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에게 고뇌anguish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간절한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과연 당신은, 오늘의 영적 현실이, 당신에게 부대낌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적 예루살렘인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과 결혼한 것이.. 정말 당신에게 걱정이 되고 있습니까?
지금 이 땅에는, 무감각한 차가움이 맴돌고 있지 않나요?
좀 더 가까운 데로 얘기하자면,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예루살렘이 어떤 상태이십니까?
(느헤미야 때처럼) 황폐되고 폐허가 된 사실에.. 어떤 부대낌이 있습니까?
폐허의 징조가 서서히 당신의 영성과 열정을 마르게 하지 않습니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당신 심령의 미지근함이,
또한 세상과 혼합주의가 점점 ‘예루살렘’(교회/나 자신)을 파고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사탄이 원하는 한 가지는,
당신의 전의戰意를 꺾어버리고, 싸울 의지조차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당신이 수고롭게 기도하지 않게 하고,
이제 더 이상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쏟지 못하도록, 사탄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당신은 TV를 보는데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런 가운데 당신의 가족들(영적 가족 포함)은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여러분 마음에 찔림이 됐습니까?
혹시 이런 설교를 듣고도, 찔림조차도 없지 않습니까?
▲비통함anguish과 관심concern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관심’은 무엇인가 잠깐 당신의 흥미를 끄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프로젝트에, 어떤 문제의 원인에, 당신의 관심사나 필요에
어떤 관심을 잠깐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난 50년 동안 설교사역을 해 오면서, 배운 한 가지를 가르쳐드리죠.
비통함anguish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성령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보고 들은 예루살렘의 폐허 때문에 무릎이 꿇려지거나,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마음에 비통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님으로부터만, 오직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우리 마음에 비통함이 생기고,
진짜로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알 것 같아요.
오 하나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내가 심한 괴로움agony 가운데 있기 전에는
그것 때문에 심한 비통함anguish에 빠지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프로젝트(추진 사업)들,
우리의 모든 사역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모두 헛것입니다.
요즘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말씀을 듣지 않고 지옥에 갈 아이들을 위해
비통하게 우는 교사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진정한 기도 생활은, 심한 고통anguish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을 기도하기로 작정하면,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그 분의 비통anguish한 마음을.. 당신에게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부르짖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모독 받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조롱받고 있습니다.
대적들은, 주님의 신실하시다는 증거(설교/책)들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런 일을 막는 무슨 대책이 지금 나와져야 합니다.’
영적 갱신, 부흥, 영적 각성과 같은 움직임들도.. 이제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수어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기 전까지는
영적 갱신과 부흥은 결코 안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시간이 점점 지나가고 있고,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여러분이 그런 일에 관심concern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탄식하며 기도는 안 하고 인터넷과 텔레비전 앞에서 몇 시간씩 보내면서 말입니다.
제발요.
‘주님, 지금 우리가 주님 제단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원래 되어야 할 참 자녀의 모습을 지금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하나님이 가지시는 마음의 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쉽게 살기 원했고,
마냥 제 삶이 행복하기만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 진정한 기쁨/참된 기쁨은,
비통함anguish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육체를 따라 허무하게 살지 맙시다.
육체의 그 어떤 것도.. 진정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회중들: 아멘!)
돈이 얼마나 있든지,
어떤 새 집을 샀든지 상관없습니다.
물질적인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우리에게 참 기쁨을 줄 수 없으며..
우리에게 참 기쁨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들만을 통해서,
또한 우리가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함을 통해서,
또한 우리가 주님의 비통한 마음을 품을 때만.. 참 기쁨이 내게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가정 주변에 세속주의의 침입을 막는.. 느헤미야처럼 성벽을 세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주변에 생활의 나태함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느헤미야처럼 성벽을 세우십시오.
예루살렘 주위에 난공불락의 성벽을 지어, 대적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 죄, 복된 회개 62.
.................................. 위 설교문의 영어원본 ...................................
And I look at the whole religious scene today
and I all see are inventions and ministries of man and flesh.
Its mostly powerless.
It has no impact on the world.
And I see more of the world coming into the church and impacting the church.
Rather than the church impacting the world.
I see the music taking over the house of God.
I see entertainment taking over the house of God.
Obsess with entertainment in God's house,
A hatred of correction and a hatred of reproof,
Nobody wants to hear it anymore.
Whatever happened to anguish in the house of God?
Whatever happened to anguish in the ministry?
Its a word you don't hear in this pampered age.
You don't hear it.
Anguish means extreme pain and distress.
The emotions so stirred that it becomes painful.
Acute deeply felt inner pain because of conditions about you,
in you, or around you.
Anguish.
Deep pain.
Deep sorrow.
Agony of God's heart.
We've held onto our religious rhetoric and our revival talk
but we've become so passive.
All true passion is born out of anguish.
All true passion for Christ comes out of a baptism of Anguish.
You search the Scripture, and you'll find that
when God determined to recover a ruined situation,
He would share His own anguish
for what God saw happening to His church and to His people.
And He would find a praying man
and he would take that man and
literally baptize him in anguish.
You find it in the book of Nehemiah.
Jerusalem is in ruins.
How is God going to deal with this?
How is God going to restore the ruin?
Folks, Nehemiah was not a preacher, he was a career man.
(But) This was a praying man.
God found a man who would not just have a flash of emotion,
Not just some great sudden burst of concern and then let it die.
He said "No. I broke down and I wept and I mourned and I fasted.
Then I began to pray night and day."
Why didn't these other men, why didn't they have an answer?
Why didn't God use them in restoration?
Why didn't they have a word?
Because there was no sign of anguish.
No weeping!
Not a word of prayer!
It's all ruin!
Does it matter to you today,
Does it matter to you all that God's spiritual Jerusalem, the church, is now married to the world?
That there is such a coldness sweeping the world?
Closer than that, does it matter about the Jerusalem that is in our own hearts?
The sign of ruin that is slowly draining spiritual power and passion.
Blind to lukewarmness, blind to the mixture that is creeping in.
That's all the devil wants to do is get the fight out of you. And kill it.
So you won't labor in prayer anymore.
You won't weep before God anymore.
You can sit and watch television and your family go to hell.
Let me ask you,
is what I just said convicted you at all?
There is a great difference between anguish and concern.
Concern is something that begins to interest you,
you take an interest in a project or a cause or a concern or a need.
I want to tell you something.
I've learned over all my years, of 50 years of preaching,
If it is not born in anguish,
If it has not been born of the Holy Spirit,
Where what you saw and heard of the ruin that drove you to your knees,
took you down into a baptism of anguish where you began to pray and seek God.
I know now.
Oh my God do I know it.
Until I am in agony,
until I have been anguished over it,
all our projects, all our ministries, everything we do... (are meaningless)
Where are the Sunday school teachers that weep over kids they know
are not hearing and going to hell?
You see, a true prayer life begins at the place of anguish.
You see, if you set your heart to pray, God's going to come and start sharing His heart with you.
Your heart begins to cry out,
Oh God, your name is being blasphemed.
Holy Spirit is being mocked.
The enemy is out trying to destroy the testimony of the Lord's faithfulness.
And something has to be done.
There is going to be no renewal, no revival, no awakening,
until we are willing to let Him once again break us.
Folks, it is getting late, and its getting serious.
Please don't tell me, don't tell me you're concerned...
when you're spending hours in front of internet or television.
Come on.
Lord, there are some need to get to this altar and confess.
I am not what I was, I am not where I am suppose to be.
God I don't have your heart or your burden.
I've wanted it easy.
I just wanted to be happy.
But Lord, true joy comes, true joy comes out of anguish.
There is nothing of the flesh will give you joy.
I don't care how much money,
I don't care what kind of new house,
there is absolutely nothing physical that can give you joy.
It is only what is accomplished by the Holy Spirit when you abey Him and take on His heart.
Build the walls around your family.
Build the walls around your hearts.
Make you strong and impregnable against the enemy.
God. that's what we desire.
admin
역사를 바꾸는 기도 /느1:1-5/ 이동원목사
2014-12-04 10:37:03
유명한 영국수상 윈스톤 쳐칠경은 그의 "전쟁 회고록"(War Memories)에서 1940.9.15을 가르쳐 자기 조국인 영국이 당시의 나치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특별한 승리를 거둔 "절정의 날"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 공군기와 폭격기가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상황에서 영국측으로서는 거의 방어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 이 결정적인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독일 비행기들이 전혀 이유없이 10분동안에 걸쳐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의 공군 전투 부대 사령관이었던 공군대장 다우딩(Dowding)경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날을 회고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의당 일어나야 할 사건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만 그럽이 쓴 "탁월한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Rees Howells)"에 보면 당시 웨일즈 성경대학의 학장이었던 리즈 하월즈의 영향으로 쳐칠수상은 두 번에 걸친 전국적인 기도의 날을 선포하여 온 교회 온 국민에게 기도를 호소했습니다.
리즈 하월즈 자신은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 학교강당에서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1시간과 점심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달할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는 독일공군이 이유없는 후퇴를 하던 9.15직전에 기도회를 인도하며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잦은 공습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공습에서도 구원받을수 있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합니까?---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수만 있다면 나치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체제는 오래지 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며, 고귀한 생명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시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의 리즈 하월즈와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르쳐 "역사를 바꾸는 기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기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445년이나 444년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의 세계의 신흥제국 페르샤 정부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아다사스다왕 1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조국 이스라엘,
특히 수도인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당시 그의 조국은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함으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조국건설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파괴되어 짐으로 백성들의 삶은 약탈과 무질서에 노출된채 깊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자기 조국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쌓아주기로 결단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은 백성들의 삶의 안전과 미래의 번영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보호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역은 그의 기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역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꾸어야 할 답답한 현실은 없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1.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적 현실에 대한 눈이 열려 있고 귀가 열려 있고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한 기도를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많이 하는 사람하면 어떤 사람을 연상하게 됩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세상을 향해서는 마음을 닫고 산으로 올라가서 주여 삼창하는 사람일까요? 저는 역사의식이 닫힌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기도해도 결코 자신과 가정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이런 사람에게 기대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와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장관하고 있던 이 사람이 어느날 고국을 방문하고 온 사람들에게 고국의 형편을 묻습니다.
"--유다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했습니다. 그가 외국에 와서 출세하여 살고 있지만 고국에 대한 관심을 접치 못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절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국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그 현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4절은 느헤미야의 반응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렇게 해서 그의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천천히 열린 눈으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자녀들을 보십시오.
배우자를 보십시오. 찢긴 가슴으로 아파하는 이웃들을 보십시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고백할 정도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의 답답한 현실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 역사의 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참으로 듣고 있다면 그 정직한 현실을 보고 있다면 그 아픔을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엎드려 이 민족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가정과 미래를 위해서도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실뿐 아니라 섭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가르쳐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story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이 그분에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1)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Great God)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 문제가 여전히 더 크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까요? 결국 우리는 그 문제아래 눌리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시선을 주님께 두고 있는한 파도가 두려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파도에 두기 시작하자 주님은 작게 보이고 파도만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믿음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크게 보여도 아직 주 하나님이 더 크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다면 우리는 주저앉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의 고단한 역사가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2)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지금의 역사적 현실이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아직도 자기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이고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늘이 아무리 열악한 현실이어도 이 백성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시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또한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변함없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약속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옛 언약인 구약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궁극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행전2:39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메시야의 언약도 궁극적으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임을 역설하지 않습니까?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오늘의 삶이 고단하십니까? 그 고단한 환경에만 시선을 두지 마시고 약속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붙잡고 외치십시오. "주님,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시는 이 약속을 지키실줄을 믿습니다"고. 그러면 믿음대로 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나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져 주실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19세기말부터 시작하여 20세기초에 기독교가 가진자들 소위 기득권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로 오해되어 혹독하게 비판된 때가 있었습니다.
소위 기독교가 선교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치적이고 물량적인 방법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강자의 종교 혹은 강자만을 위한 종교로 곡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일부 신학자들가운데 성경을 지배자의 관점이 아닌 눌린자의 관점에서 다시 연구하고 읽기 시작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신학적 운동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해방신학을 수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해방신학의 강조점들 가운데는 오히려 반 기독교적인 것들이 적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기독교계 전반에 기여한 분명하고 긍정적인 요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가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4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문자 그대로 성경에 넘쳐 납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아와 과부 가난한자들 그리고 나그네들인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성경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거의 편애에 가깝다"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하나님의 관심과 편애의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어떤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약자들이나 약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심의 덕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시 5절의 하반부를 보십시오. 그는"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고 기도합니다. 주께서는 이런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저는 이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넉넉함으로 응답하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풍성함이란 끝이없는 넉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빈민선교 하시는 목사님이 바다 구경을 한번도 못한 가난한 빈민촌 청소년들을 데리고 자동차로 해안에 도착하여 모래사장에 내려놓자 한 아이가 바다를 보더니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우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넉넉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를 꼭 안아주면서 "그래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저 바다처럼 끝이 없이 넉넉하시지요"하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 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렘애3:22-23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 /느1:3- /느3:20-23/ 이동원목사
2014-12-04 10:33:21
망해가던 미국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를 재건하여 경영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경영의 비밀을 물었을때 그는 유명한 3-P로 대답했습니다.
1)principle(원리 혹은 원칙) 2)practice(실천) 3)persistence(일관성 혹은 집중).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되 일관성있게 집중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국가 경영에도 자주 인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때 리 아이아코카는 처음 원칙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리더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바로 원리 원칙을 세우는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건강한 리더십의 이상으로 '원리 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이란 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는 이미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면서 바로 이런 원리 중심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중시한 리더십의 원리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느헤미야 3장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목장에서나 직장 혹은 어떤 사역의 현장에서도 주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중시해야 할 원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금년 여름 단기선교로 선교지에 나아가 사역하게 될 모든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할 사역의 원리들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는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들은 무엇입니까?
1. 협동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홀로 이 사역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치 않은 것입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함께 하는 협동의 사역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협동의 원리를 중시한 리더였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3장을 읽어보면 무려 75명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느헤미야 혼자 이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본문 1절을 읽어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어떤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지요?
"때에 대 제사장 엘리아삽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여기서 강조된 말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떤 단어가 두드러지게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이 느헤미야 3장에 제일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요? 네, 맞습니다.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그 다음'이라는 표현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나란히 서서 협동하여 이 성의 재건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협동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리더십에서 결격사항 제 1호가 바로 이런 협동의 정신이라고 지적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다를까요?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여러 지체들이 연결되어 협동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요즈음 말로하면 인간의 몸이야말로 가장 탁월하게 네트워킹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교회를 몸이 되게 하셨을까요? 주의 일이야말로 혼자 할 수 없는, 해서도 안될 팀-스피리트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사역이 진전되지 못하는 현장을 보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비 협동적입니다.
세상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쓴 이규태씨는 특히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협동하지 못하는 원인을 산업화의 과정에서 과잉된 경쟁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변질된 오늘의 한국인들을 '독속의 게'에 비유합니다. 독속의 게 하나 하나는 모두 독밖으로 기어 나올 충분한 역량이 있는데 기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 하나가 기어 나오려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게들의 생존방식은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또 한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자주 말하는 상생의 철학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장 공동체에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서로 서로"의 원리로 소개하지 않습니까? 교회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서로 서로를 지원할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이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순종하고 실현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 은사의 원리입니다.
본문 느헤미야 3장에는 적어도 15가지 이상의 다양한 직종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모두 성의 재건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자기들이 일하게 될 사역의 자리를 책임지고 건축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절을 보시면 제사장들은 양문 건축을 담당합니다. 양문(sheep gate)은 제사장들이 제물인 양들을 가지고 출입하는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문의 용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이 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에는 어문(fish gate)이 나옵니다. 이 어문은 아마도 지금의 예루살렘 성의 북으로 향한 다메섹 문 근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두로쪽에서 오는 생선들이 이 문을 통과하여 시장에 가서 팔렸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스나아의 자손들은 아마도 이 문을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거나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로 판단됩니다. 그들이 이 문의 건축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집부분의 건축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23절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사용할 부분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책임지는 형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은사배치의 원리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에 적합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내 은사에 맞는 사역인 것입니다. 두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 우리가 어떤 일을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은사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저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제가 솔로이스트를 시켜 달라고 하든가 지휘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오늘의 사회에서는 전문성이라고 말합니다.
한 공동체가 잘 돌아가려면 전문성이 존중되고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여 적합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 맡겨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자원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면 나에게 적합한 일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평가를 받아 사역의 장에 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역은 소위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목장교회에서부터 이것을 실행하여 보십시오.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안에 존재하는 가장 고도의 욕구를 자아실현의 욕구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은사에 맞는 봉사를 발견한다면 인생의 살맛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희랍어로 은사를 나타내는 말인 카리스마는 본래 카라라는 말 즉 기쁨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너무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은사의 원리를 잘 사용하여 적재 적소에서 지도자들이 일하게 함으로 단시일에 예루살렘 성의 중건이라는 대업을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3. 격려의 원리입니다.
자, 본문인 느헤미야 3장에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세심하도록 여러 지도자들의 이름과 사역의 내용을 상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격려하기 위해서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격려받지 못한다면 어떤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격려의 반대는 낙심입니다. 영어로는 격려를 'encouragement'(in+courage)라고 합니다. 격려받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낙심은 영어로 'discouragement'라고 합니다. 낙심하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말합니다. 한국인들의 의식속에는 유교문화의 전통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습니다. 그런데 유교문화는 성경적으로 율법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따라서 책망과 정죄에는 빠르지만 격려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챤 유머리스트인 마크 퉤인은
"칭찬보다 공동체를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갈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칭찬을 모르는 가정을 들여다 보십시오. 감옥이 아닙니까? 칭찬을 모르는 부부관계를 보십시오. 원앙(원한과 앙심으로 맺어진 부부)의 부부가 아닙니까? 칭찬을 모르는 목장이나 교회를 들여다보십시오. 찬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20절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느헤미야는 바룩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수식어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 있음을 보십시오.
"그 다음은 사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고--"라고 말하면서 그의 특별한 '힘써서' 노력한 헌신을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격려가 사역의 효율성을 증대시킬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격려가 분위기 띄우기 용도의 감상적이 아닌 진지한 격려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격려가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효과밖에는 가져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격려한다는 것이 결코 평가를 간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느헤미야 3장에는 사역을 소홀히 한 사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예컨대 5절을 보면 드고아의 귀족들에 대하여는 "--그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합니다.
(프랭크 틸라파 목사라는 분은 어떤 사역의 현장에도 한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존재한다는 교훈을 위해 이들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아마도 이들은 지나친 자신들의 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주의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헌신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제발 이런 귀족들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필요이상의 비판을 조심하고 있는것도 유의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예외적인 사람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3장 전체의 톤은 지극히 긍정적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명 무명의 모든 공동체원들의 헌신으로 이 위대한 역사가 가능할수 있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하며 일일히 그들을 격려하고자 한 것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 부분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느헤미야가 남들을 격려하기 위해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을 격려하는 것을 잊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한 격려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격려자가 또 한 사람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은 이름 조차도 '격려자'였습니다. 바나바이지요. 그는 본래 안디옥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자 사울이라는 방금 회심한 청년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격려하여 그를 지도자의 반열에 세웁니다. 그리고 세계선교 여정에 나서며 그를 동반합니다.
처음에 이 두사람의 관계를 기술하며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사울이--"하다가 나중에는 "사울과 바나바가--"
로 바뀝니다. 리더십의 주도권이 이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된 사울이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지도자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역의 무대 저편으로 조용히 퇴장한 지도자 그가 바로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바나바가 이런 느헤미야가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 우리교회에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런 격려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1849년에 미국 뉴 잉글랜드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세관 감정관으로 일하던 한 남자가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실직을 당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뜻밖에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잘된 일 아니에요. 이제야 말로 당신이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실때가 되신 것 같으네요. 글을 쓰고 싶어 하셨잖아요. 소원대로 글을 쓰시지요."그리고 아내의 부탁으로 교회친구 몇 사람이 그날 밤 그를 찾아와 그에게 창작활동을 할 것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불과 반년이 못되어 소설 하나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 소설이 유명한 "주홍 글씨"였던 것입니다. 이 남자는 청교도 문학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기게 된 나타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직하던 밤부터 꾸준히 그를 찾은 친구가운데 한 사람은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였습니다. 그에게 만일 아내의 격려가 없었다면 친구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만일 자기의 은사를 발휘하여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위대한 정신사의 유산을 잃을뻔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진실로 저와 여러분이 협동의 원리, 은사의 원리 그리고 격려의 원리를 다시 배워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느헤미야 3장의 대의(줄거리)는 무엇입니까?
2.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많이 출현하는 단어들은 무엇이며 그것이 시사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 느헤미야 3장에 나타나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성 건축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었습니까?
4. 본문 20절에서 느헤미야는 바룩이라는 일군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5. 우리들의 목장교회나 여름철 단기선교 사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교훈들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응답받는 기도 /느1:6-11/ 이동원목사
2014-12-04 10:28:36
영국에 F.B.Meyer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한번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긴 여행중에 그를 알아본 선객들이 그에게 선상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마이어 목사님이 흔쾌히 허락하고 예배를 인도하시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무신론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권고로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날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의 응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하셨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난후 그를 예배로 인도한 친구가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난 절대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믿을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이 무신론자가 예배후에 갑판위를 거닐다가 어느 부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반쯤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 부인의 의자위로 펴져있는 그녀의 양손에 오렌지 두 개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친구가 "당신 이 부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면서 그냥 심심풀이 장난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가 그리스도인 친구와 갑판을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이 부인 곁을 지나게 되었는데 잠을 깬 부인이 아주 명랑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자기가 주었던 오렌지를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렌지 맛있게 드시네요."하니까, 부인이 갑자기"하나님을 찬양합니다"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정색을 하고 "왜 하나님을 찬양하십니까? 사실은 이 오렌지 두 개는 제가 부인에게 드린 것입니다."하니까,
이 부인이 그 무신론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 그랬군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도구 이셨군요. 사실 저는 배 멀미가 너무 심해 갑판에 나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오렌지 두 개만 먹고 싶다고 기도했거든요"
마이어 목사님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기도를 비웃는 무신론자를 웃기시고자 무신론자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흥제국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왕 1세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재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에스라서 4장에는 이미 한차례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성곽의 건축을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히여 공사 중단을 명령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4:11-22) 그러나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 재건에 가장 부정적인 왕을 기도응답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유머라고나 할까요?
하나님은 이 유머스런 사건을 통해 기도 응답의 비밀을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직도 최선의 기도응답을 기대할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응답받는 기도-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1. 기도의 장애가 옮겨져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장애는 기도하는 사람들 자신의 죄 문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혹은 기도 대상자의 삶속에 있는 죄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사야59:1-2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올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 응답의 장애를 옮기는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죄의 장애를 옮길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복 혹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자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일서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처럼 성도의 신실한 죄의 자백은 죄에서 우리를 께끗케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힘없는 기도의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먼저 자신과 자기의 조상들의 범죄함을 자복합니다. 본문의 6-7절입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는 자기의 조상들의 범죄함을 자복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또한 포함시키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그는 또한 자신들의 죄와 악을 합리화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습니다.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심히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교인들이 주차 금지된 곳에 차를 주차하며 양심에 꺼렸던지 한분의 아이디어로 창문에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15분간 이 근처를 돌았습니다. 주차안하면 직업을 잃을 것 같아 할수 없이 여기에 주차합니다.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했더니 나와 보니까 위반 티켓이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근처를 15년간 돌고 있습니다. 티켓을 드리지 않는다면 직업을 일을 것같아 할수 없이 위반 벌금을 드립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이것을 우리는 관점의 차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볼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본래 자백이란 말은 죄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지한 기도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기도의 장애가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기도의 통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2. 기도의 근거를 주장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한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받는 기도에는 기도의 성경적 근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말합니다. 즉 야고보는 응답하지 못하는 기도에는 잘못된 근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기심이라는 비 성경적 근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성경적 근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할수 있으나 그 기도가 응답받을수 없는 기복적인 기도인지 아니면 응답받기에 합당한 기도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의 근거인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믿고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맹목적이 아니고 기복적이 아닌 성경적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지금 느헤미야는 주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하고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성경적 기도의 가장 분명한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편 혹은 통로라고 할수 있습니다. 에스겔36:36-37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기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내가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루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37절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주께서 약속하셨지만 그래도 주의 백성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약속하신바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렸다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기위해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기도한다는 사실이상으로 무엇을 기도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한분이 앵무새를 샀는데 유일하게 한마디 하는말이 "키스해 주세요"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놓고 황당한 경우들이 많아 이 앵무새에게 경건한 말을 가르칠 필요를 느꼈다고 합니다.
마침 어떤 목사님이 기르는 앵무새가 경건한 말을 잘한다고 해서 목사님께 훈련을 부탁했더니 목사님 댁에 그 앵무새를 보내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교인 앵무새가 도착하자 목사님이 자기 앵무새장에 함께 집어넣었습니다.
목사님 앵무새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다같이 기도하십시다."하니까, 교인 앵무새가 "키스해 주셔요"하더랍니다. 이때 목사님 앵무새가 지금까지 한번도 안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 주께서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고.
기도의 사실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기도의 내용을 형성할 때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기쁨으로 응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의 근거가 되게 하십시다. 그것이 바로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입니다.
3. 기도의 대상을 신뢰해야 합니다.
누가 기도의 대상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세상을 보고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요?
마치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제 아내가 저와 대화중에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내의 공통된 특성입니다. 대화하다가 다른 사람 쳐다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전적인 관심을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나누어지지 않은 관심과 신뢰의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면에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마음을 다,
목숨을 다, 힘을 다, 뜻을 다하여 사랑을 요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도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이 소망임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만 소망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날마다 그를 만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자기의 문제를 왕에게 아뢰이지 않은 것을 주목하십시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현실적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행정적인 결재가 없이는 예루살렘성의 중건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결재에 앞서서 하나님의 결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응답의 싸인을 받고 싶어한 것입니다.
사람이 허락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이셔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이 '만사는 인사'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사는 천사'입니다. 사람의 일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일인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이 허락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의 기도를 읽어보십시오. 지금 그는
"--이 사람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자주 아니 더 많이 이 세상이나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산을 타다가 미끄러져 벼랑끝 나무위에 걸렸습니다. 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데 점점 힘이 빠져 갑니다. 마침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와 주셔요,하나님."했더니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손놔, 내가 받아줄께"그러자 그는 다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누구 다른 분 없어요?" 시편기자처럼 고백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62:1-2)
기도의 응답을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기도의 대상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그의 자녀들을 자상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보여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안에서 살아가도록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의 능력을 신뢰하시고 기도할 수 있으시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의 문제를 갖고 하나님앞에 나오십시오. 그분을 슬프게 했던 당신의 모든 죄를 자백하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이제 오직 그분만을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하여 보십시오.
당신의 황폐한 삶의 마당에 견고한 은혜의 성곽이 건설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안에서 당신은 날마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는 신기한 삶을 살아가시게 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 1:6-7의 느헤미야의 자복의 기도의 특성들을 살펴 보십시오.
2. 본문 1:8-9에서의 기도에서 느헤미야는 무엇에 근거하여 기도의 응답을 주께 호소하고 있습니까?
3. 본문 1:11에서 느혜미야가 기도하는 대신 왕에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며 그렇게 하지 않고 기도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4. 우리가 이런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배우고 적용해야 할 교훈들은 무엇들인가요?
◀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는 리더십 /느1:1- /옥한흠 목사
2014-11-11 14:05:49
러더십의 첫 단계는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날마다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 다음의 내용은 릭 워렌 목사의 느헤미야 설교에서 발췌한 것이다.
느헤미야 1장에 나와 있는 기도는 그가 4개월 동안 한 기도의 모형이다. 그가 4개월 동안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면 그의 기도는 이렇게 발전했을 것이다.
"하나님, 이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셔야 합니다. 제발 그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마도 이렇게 서너 주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느헤미야야, 너 자신이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네가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왜 네가 그 일에 뛰어들지 않느냐?"
넉 달을 기도하는 동안에 느헤미야의 마음에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기도의 응답이 내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시어 성벽을 지으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제가 성공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된다.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도의 4가지 요소를 정리해보자.
1. 확신의 기도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확신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시고 위대한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내게로부터 들으시고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빨리 받게 하는 비결이다.
2. 내가 무엇을 했고 누구인가를 고백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제가 범죄했습니다. 저는 잘못 행했고 불완전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하여 자신을 가지고 하는 기도이다.
"나는 당신이 누구이신 지를 압니다. 내가 누구인가도 압니다. 당신이 무슨 약속을 하셨는지도 압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한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비결은 약속을 내 것으로 외치는 것이다. 성경 상에 나타난 7,000 개의 약속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4. 헌신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제가 기도의 응답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제 자신을 헌신합니다. 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
느헤미야가 가르쳐준 기도의 4단계를 사용해 실제로 기도해보라. 당신의 마음을 어느 한 분야에 집중하라. 정말로 기도하고 싶은 분야를 정하라. 첫째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맞추라.
두 번째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라. 그리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주장하라.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달라고 할 수 없다면 다른 일을 시작하라. 마지막으로 헌신의 기도를 하라. "하나님, 제가 문제 해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어떤 방향으로라도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는 리더십 4
느헤미야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고 계획했다. 그 다음 단계는 사람들이 협조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성공은 결코 한 사람의 쇼가 아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들의 협력이 없이는 성을 재건할 수 없음을 알았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지난 90여년 동안이나 성을 건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패배감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을 단합시키고 총동원하여 52일만에 성을 재건했다. 그는 동기부여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기부여를 하는지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라.
1. 반대를 예상하라.
반대가 없는 기회는 없다. 훌륭한 생각이 있다면 좋다. 그러나 사람을 바꾸거나 상황을 바꾸고자 한다면 반대를 예상하라. 누군가가 당신을 넘어뜨리려고 화살을 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2. 알맞은 시간을 기다리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즉시로 당신의 상관이나 배우자에게 가서 털어놓지 말라. 적절한 때를 기다리라.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주며 변화를 제안할 때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기다리며 기도하고 계획하라. 세상만사에는 때가 있다.
3. 상황을 파악하라.
느헤미야는 한밤중에 소수의 사람들만 데리고 나가서 예루살렘 성을 조사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사람들보다 더 언성을 높이게 마련이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진상을 먼저 파악했다. 지도자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사실과 숫자를 가지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4. 일체감을 형성하라.
훌륭한 지도자들은 모두다 사람들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와서 "내가 온 목적은 성을 재건하는 것이다. 질문이 있으면 내 사무실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함께 재건합시다."라고 말했다.
5. 사실에 직면하도록 도우라.
느헤미야는 그림을 그리듯이 현 상황을 묘사했다. ". . .황무하고 . . .소화되었으니. . .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그는 정직했다. 이 단계에서는 지도자가 사람들이 사실을 직면하도록 돕는다. 학교, 가정, 사무실에서 변화를 일으키려면 지도자는 문제에 직면하도록 해서 현상태에 대해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6. 행동을 요구하라.
지도자는 현실과 이상 전부를 본다. 지도자들은 현재의 상황도 보지만 미래에 어떻게 될 수 있는가도 본다. 이 두 가지를 보게될 때 지도자는 구체적인 반응을 요청할 수 있다. 실제적이면서도 낙천적인 지도자, 느헤미야는 "나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7. 개인적인 간증으로 격려하라.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라고 자기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축복해 주셨고 환경이 어떻게 증명했는가를 나눌 때에 사람들의 믿음이 확장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비전이 전가되면 더 이상 지도자 혼자의 생각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된다.
8. 반대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제공하라.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면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을 예상하라. 간판을 거는 순간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할 것이다. 비난을 받지 않는 유일한 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연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나는 것이지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날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지도력의 시작이다.
리더십을 가진 자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계획을 세운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선한 청지기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계획을 세웠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1. 곰곰이 생각한다.
느헤미야가 성을 재건하는 생각을 처음 갖게된 이후에 그가 실제로 그 계획을 왕께 제출할 기회를 가질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그는 기도와 함께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이미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요청할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하도록 계획하는 것이다.
2. 기회를 찾기 위해 준비한다.
기회가 문을 두드릴 때에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기회를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 당시 왕의 앞에서 슬픈 기색을 띠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였다. 왕 앞에서 이맛살을 찌푸리면 목 베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수색을 보이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큰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왕에게 나아갔다. 지도자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간다.
3. 목적을 세운다.
우리가 목적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보통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너무 목적을 작게 세우든지 그 목적을 너무 빨리 달성하려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결코 건축가가 아니었다. 왕의 술관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계획,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비전을 세웠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위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4. 기한을 정한다.
목적은 기한이 있어야 한다. 세운 목적에 기한이 없다면 목적이 아니다. 계획에는 시간관리가 포함된다. 당신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를 알고 언제 하기를 원하는지를 안다. 여기에 질문해야 될 문제는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이냐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기한을 정했다(느2:6).
5. 문제를 예상한다.
이라크에서 이스라엘까지는 약 800내지 1,000 마일이 되는 먼 여행길이다. 여러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느헤미야는 이 위험한 여행길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도록 자기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다(느2:7).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하는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6. 대가를 계산해야 한다.
이것은 계획에 있어서 예산을 짜는 분야에 속한다. 삶의 모든 분야는 대가를 치루도록 요구한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왕에게 요구하는 일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고 왕에게 필요한 물품들의 항목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기회를 제공하신다. 우리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된다. 당신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무슨 계획을 세우는가? 당신의 삶을 향한 주님의 비전을 가지고 어떤 계획을 세우는가? 당신은 계획을 세우는가?
아니면 저절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전도나 성경읽기, 기도하는 일이나 성도간에 아름다운 교제를 갖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성공을 위해 계획하기보다는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시간과 예산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계획을 세우라.
마쓰시타가 주는 21세기를 위한 교훈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설립한 회사 '파나소닉'과 '내쇼날'같은 브랜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방용품과 가전제품을 공급해왔다. 경영도 잘 했지만 바른 경영철학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한 것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엄청난 성공으로 수십억 달러의 재산을 얻었지만 호화로운 삶에 투자하지 않고 일본의 정치적 체제를 개편하기 위한 정치학교 마쓰시타 정경숙의 설립과 기타 수많은 민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그 돈을 사용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어떠한 개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난 후,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전략을 채택하고 1979년에 이 기관을 세웠다. 이 기관의 목적은 21세기에 적합한 관료와 정치인을 육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경숙의 목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도록 하는데 두었다. 이 기관을 졸업한 150명의 동문 중 15명이 국회에 진출한 것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존 코터라는 하바드 경영대학원의 리더십 교수는 최근에 마쓰시타의 리더십을 분석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성공의 원리를 소개했다. 코터 박사는 마쓰시타가 이러한 훌륭한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닥쳐왔던 여러가지 고난들 때문이었다고 소개한다.
젊은 시절의 마쓰시타를 보통사람 이상으로 더구나 위대한 경영자로 여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교 성적이 100명 중에 45등이었다. 그에게는 계속해서 어려움이 찾아왔다. 4살 때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고, 초등학교를 중퇴한 후 9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견습생으로 취직했다. 30살이 되기 전에 7형제자매를 모두 병으로 잃어버리고 외아들이 죽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2차 대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전범으로 몰려 회사를 빼앗긴 일 등, 그의 일생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코터 교수는 평범한 마쓰시타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이런 어려움을 장애물이 아니라 도전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락한 곳에 머무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독려했으며, 관습에 도전했고, 위험을 감수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했으며, 열린 마음으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평범한 한 일본인으로 세상을 마쳤을 것이라고 코터 교수는 말한다.
제널럴 존슨이 신조(credo)를 적성하기 10년 전에 마쓰시타는 자기 자신의 기업원칙을 분명하게 밝혔다. 산업보국의 원칙, 공명정대의 원칙, 화친일치의 원칙, 역투향상의 원칙, 예절겸양의 원칙, 순응동화의 원칙, 감사보은의 원칙 등이다.
그는 아침 조회시마다 모든 종업원들로 하여금 큰 소리로 마쓰시타의 경영원칙을 복창하도록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마쓰시타는 자신이 세워놓은 사명을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명과 원칙을 신봉하는 것처럼 행동을 했고 그러한 행동은 목적과 가치와 조화를 이루어갔다.
사업초기에 좋은 교육을 받거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그는 조건에 만족되지 않는 사람들을 채용하고 그들의 젊은이다운 열정과 선입관을 갖지 않은 순수함을 유용한 자질로 바꿔놓으려고 애썼다. 그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쓰시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만 행동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열린 눈을 갖고 있으면 당황하지 않게 되며,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항상 귀를 기울이면 분별을 잃지 않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배울 것을 기대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듣는다면 예상치 않았던 지식을 얻게 됩니다."
21세기를 맞는 목회자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들이 그의 생애 속에 숨어있다.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장애물들은 성숙과 성장을 향한 소중한 기회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축복일 수 있다. 오늘의 모습을 보며 한탄하기보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사람을 세워가는 목회를 한다면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느1:1-11/ 성서적 애국심 / 한경직 목사
2014-08-23 20:08:39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十四․三十四)
지난 금요일 대한 민국의 정신적 탄일(精神的 誕日)이 되는 三․一절 제三十八회 기념일을 우리가 맞았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자유에 불타는 그 마음,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생명도 즐겁게 바친 애국 애족의 그 정신이 공통한 목적을 위하여 경향(京鄕), 문야(文野), 종교의 구별 없이 대동단결 했던 날입니다.
그 정신과 비폭력적 무저항주의의 혁명 운동과 정의의 신념 등의 三․一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귀한 영적 유산으로 남겨졌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고귀한 운동에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핵심(核心)이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오늘「성서적 애국심」이라는 문제아래서 애국심에 대한 성서의 교훈을 배우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 견지에서 읽을 때에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애국 애족의 책이라는 사실이올시다.
구약은 모세의 오경으로 시작됩니다. 오경의 중심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화려한 바로의 궁전을 떠나서 피압박 가운데 있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광야 四十년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적 일대장관(一大壯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애국자였습니다. 여호수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자기의 민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담대히 건너가서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고, 국가의 기초를 닦은 이가 애국자 여호수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 민족사를 통해서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등 모든 선지자는 그 하나 하나가 애국자가 아닌 분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적 국가적 운명과 같이 했습니다.
자기의 국가와 민족이 번영할 때 기쁨과 웃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고, 자기 민족과 국가에 치욕이 올 때에 한없는 탄식과 눈물을 뿌린 자들입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눈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哭)하리로다.』이는 예레미야가 자기 조국이 멸망당한 후에 부른 애가(哀歌)입니다.
구약 가운데 에스더는 누구보다도 애국 여성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대로 하만의 모략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전멸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비밀을 자기 삼촌 모르드게가 에스더에게 말하면서『이것은 네가 왕에게 들어가 직소(直訴)해서 이 칙령(勅令)을 구두기 전에는 우리 민족은 전멸 당하게 될 터이니까 네가 들어가 직소 하라』고 강권(强勸)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사에서는 이상한 법령이 있었습니다. 왕이 부름이 없이 왕정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습니다.『다만 왕이 금홀(金笏)을 들어서 특서(特恕)하라』고 하는 지시가 있기 전에는 누구나 죽는 그런 법이 있었습니다.
에스더 역시 오랫동안 부름을 받지 못하던 중입니다. 왕의 기분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다가 에스더가 하는 말이『나를 위해서 당신들이 금식하며 기도해 주세요. 내가 들어가서 말하겠습니다.
왕께서 나를 살려 주시면 좋고 죽이면 죽으리라』했습니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에스더에 대하여 있습니다. 에스더, 느헤미야, 모두 민족을 예루살렘으로 반환케 한 애국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애국자이십니다. 감란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내가 너를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이런 예수 님의 탄식의 말씀을 하신 것은 애국의 눈물이요, 애국의 탄식인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런 말씀을 로마서에 썼습니다.『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나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이는 사도 바울의 애국의 심정, 애국의 지정(至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로마서 八장 마지막 절에『생명이나, 사망이나, 세상의 무엇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끓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전에 일본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고 특히 구약을 읽지 말라고 강제로 우리 교인들을 향해서 지도 한 것은 바로 여기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애국자가 되는 까닭입니다.
제가 지난여름 아프리카의 카메룬에 가서 거기 형편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운동으로 말미암아, 어떤 선교사는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애국적 정신을 일으킵니다. 신앙심과 애국심은 같은 밭에서 자라나는 풀이고 같은 밭에서 자라나는 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귀하지마는 국가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세계 역사상에 이와 같은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가 일어날 때는 기독교와 충돌되었고 교회는 그 사상과 운동 때문에 반드시 핍박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이 사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는 대로 독일에서 대전 전에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 운동은 민족지상주의였습니다.『우리 독일 사람은 세계의 으뜸이다. 독일 사람으로 지상의 목적으로 삼자』민족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대전 전에 일본 사람들이 천황 신성 불가침론(不可侵論)을 주장했습니다. 천황을 지상(至上)으로 삼고 천황을 숭배의 대상인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대전 전 이태리는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파시즘, 소위 국가지상주의를 세웠습니다.
오늘날의 공산당들은 계급을 우상화합니다. 계급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면서『농민과 노동자 외에 다른 것은 우리 안목에 없다. 이 사람들의 권리를 지상(至上)으로 삼자』고 합니다. 계급지상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서적 견지에서 보아서 용납 못할 사상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민족과 국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입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했습니다.『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했습니다.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의 의,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민족과 국가의 운영을 주장하십니다. 민족과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래에서 신앙심과 겸해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할 때에만 그 애국심은 잘못된 대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그릇된 애국심을, 우리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경계하여야 합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서 변태적으로 발전되게 되면 거기서 독재주의가 생기는 것이고, 거기서 배타주의가 생기고 심지어는 온갖 불법과 테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성서적 견지에서 우리 한국 실정에서 이 성서적 애국심을 어떻게 발로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실제 문제를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한국 실정에 있어서 참으로 기독교적 애국심을 가졌다고 할 것이면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실제 문제를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을 보면 과거의 모든 애국자들이 그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성경의 교훈으로써 들은 말씀은 느헤미야의 기도올시다. 예루살렘이 황폐되었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공경 가운데 있는 소식을 듣고 애국자 느헤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되 그저 복을 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죄를 자복 하면서 자기 민족과 국가가 과연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만한 의로운 민족, 의로운 국가가 되기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역천(逆天)자는 망하고, 순천(順天)자는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민족이 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민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민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고 에스더가 그런 사람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모든 선지자가 다 그런 사람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예루살렘 선전을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민족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한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기도를 그치지 않고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다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이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인 줄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랴?』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죄로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더욱이 三八선이 그냥 있고 북한이 공산 도배의 압제 아래 그냥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남한 전체가, 기근과 환난과 죄악으로 가득 합니다. 이 같은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합니까?
여러분이 과연 마음에 애국심을 가졌다면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스스로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좀더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이 과연 의로운 민족이 되기 위해서 좀더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개인으로 기도하고, 단체로도 기도하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간 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면 기도에 가치지 않고 국민으로서의 책임의식, 책임감으로 이 애국심은 반드시 발로 될 것입니다. 책임을 느끼고 반드시 자기 책임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보셨습니까? 느헤미야가 기도한 때, 죄를 자복 할 때에 이런 말로 했습니다.『나와 내 아비의 집이 범죄 하였습니다.』이와 같이 했습니다. 나와 내 아비 집이 범죄 하였습니다.
사살은 예루살렘의 모든 형편을 직접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느헤미야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것이 다 내 죄의 책임, 내 값이요 이것이 내 아버지의 죄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는 유기체요 국가도 유기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서, 연대적 책임(連帶的 責任)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민주국가에서는 그 국민이 궁극적 책임을 지며 마지막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국민이 선거해서 대통령도 선거하고, 국민이 선거해서 국회의원도 선출하며 국회가 조직되고 모든 국가의 운영도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국회를 비난하기 전에 내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정부를 지난하기 전에 내 책임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국회가 잘못하면 우리가 투표를 잘못했습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우리가 투표를 잘못했습니다. 내 책임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책임을 깨닫고, 이것이 다 내 실수요, 내 죄인 줄을 알고, 나와 내 아비의 죄를 우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복(自服)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내 생활부터 고쳐야 되겠습니다.
국민도 이러해야 할진대 하물며 선량의 명예를 가졌다고 하는 국회의원은 더 책임감이 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삼천만을 대신해서 우리 국가의 일을 대신 맡아하는 정부의 요원들이나 공무원들은 좀더 책임의식이 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남한의 실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절량(絶糧)농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처에 여러 가지 사건, 여러 가지 사고, 화재 등 남한 전체가 불안과 공포 가운데 쌓여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국민 각자가 여기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국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정당이나 정부의 지도자나 사회의 지도자면 더울 책임감을 통절(痛切)히 느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전 정력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우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납세를 피하거나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세력 있다고 자기의 납세를 적게 바치면 안 되겠습니다. 애국자이면 납세의 의무를 충성되게 합니다. 병역의 의무도 충성되게 하여야 합니다. 내가 젊은 사람이면 국가에서 나를 부르면 나가서 그 의무를 충성되게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 주인이 와서 하는 말이『장로님 아무 육군 병원 원장 잘 아신다지요?』『네 잘 압니다.』『내 아들이 지금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해서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좀 나으면 제대하도록 편지 좀 잘 써주세요.』『네 써 드리지요.』
그 후에 그 목사님이 장로님께 찾아와서 하는 말이『전에 우리 아내가 찾아와서 무슨 부탁합디까? 네 제대 좀 빨리 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장로님은 생각하기를 아! 내가 편지가 늦어서 안됐다.
아마 재촉하려 온 줄 알고,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하는 말씀은『우리 아내가 그저 여자가 되어서 미쳐 생각 못하고 그런 부탁을 장로님한데 한 모양입니다. 제가 부끄럽습니다. 우리 아들 삼 형제가 군대에 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 민국의 사활(死活)에 관한 전쟁이요 우리 기독교인의 견지로 보면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싸워야 할 일인데 아들이 좀 부상했다고 해서, 제대 운동을 하려 다니면 되겠습니까?
아예 그 편지 취소해 주세요. 내 아들을 도로 전쟁에 내어 보낼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임감이 있으면 의무를 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과연 애국심이 있으면 법을 지켜야 되겠습니다. 민주국가는 법치국가입니다. 법이 서야 국가가 번영되고 국가가 운영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간절히 명령하는 말이『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케 해서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민주국가는 법을 지켜야 그 국가가 설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남용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유는 언제든지 질서와 법 아래서 자유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자유를 얻습니다.
새는 공중에 있어야 자유로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기차는 궤도로 가야 자유가 있습니다. 질서와 법을 떠나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향유(享有)하여야 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법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법을 만든 국회위원들과 정부 요인 공무원들부터 먼저 법을 지켜서 법대로 하여야 되겠습니다. 권세를 남용하면 안 됩니다
. 법을 지키지 않는데서 권세의 남용이 있고, 권세의 남용이 있는 곳에 국가의 기관이 문란해지고 국가 기관이 물란 할 때 민심이 해이해집니다. 법을 지켜야 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법 아래서는 만민이 평등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헌법을 너무 자주 고치지 않는가! 하는 감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법의 존엄성에 손해가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헌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언제든지 민주주의 국가의 원칙에 의해서 한번 제정할 것이지 어떤 소수나 어떤 정당에 의해서 경우를 따라서 조변석개(朝變夕改)로 고치는 헌법이 아닙니다. 법을 존엄하게 지켜야 우리의 자유가 보장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의 수치가 됩니다.』여기 의는 모든 의로운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법으로만 나라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도덕과 양심이 있어야 되고, 도덕과 양심 생활에 의지해서, 죄를 짖는 사람이 적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특별히 이 방면에 우리 깨끗한 생활로서 자유의 파수꾼이 되고, 이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 우리가 먼저 꼭 법을 지킴으로서 도덕 생활에서 법을 초월해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직책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처음에 청교도들이 유명한「오월의 꽃」이라는 배를 타고 미 대륙에 도착한 플리마드만(灣) 맞은 편 높은 산 위에 기념상을 세운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어떤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기념상에는 네 귀에 사람 네 명이 서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대표하고 하나는 자유를 대표하고 하나는 도덕을 대표하고 하나는 교육을 대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높은 단위에 여자의 상(像)이 있는데 한 손은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에는 성경을 편 그런 상이 있습니다. 이 여상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하나님께 대한 높은 신앙 아래 자유가 있고, 도덕이 있고, 법이 있으며, 교육을 지켜서 민지가 깨게 될 때에만 과연 축복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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