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응답이 시작되다 /느2:1-8/ 하용조 목사/ 온누리교회
2015-05-26 15:34:35
25년 전에 온누리교회를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환경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하는 비전을 가진 것처럼 우리의 비전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의 환경이 변했지만 우리의 비전은 더 강렬하게 빛을 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응답된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기도 응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하자마자 즉시 응답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암이 없어진다든지,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정한 시간이 되어야 응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25세 때에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25년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변치 않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때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합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25년 동안의 기다림을 통해 기다림의 훈련을 시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순종하도록 훈련을 시켰습니다.
세 번째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 응답될 수도 있지만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통곡하며 기도한지 4개월 만에 응답받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일시적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주변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고 가까운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건가 사람이 움직이는 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응답의 표증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에 나는 왕에게 술을 따르는 일을 맡았기에 술을 가져다 왕에게 따라 드렸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네가 아프지도 않은데 네 안색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느냐?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무척 두려웠지만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만수무강 하옵소서! 제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성이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이 불에 타 허물어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 세 구절을 읽을 때 마음을 열고 보면 하나님의 응답의 표증이 많이 나타나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하루빨리 불에 타서 폐허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을 건축하고 싶은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참다가도 힘들면 사람을 찾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은 유혹이 강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술 따르는 일을 맡았습니다(1절). 기도하기 전부터 맡았는지, 기도한 이후에 맡았는지 모르지만 문맥상으로는 최근에 맡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위치에서 이동하게 될 때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내가 좋아서 내 이익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인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 당시 술 따르는 관원은 단순히 자기가 술을 먼저 마셔보고 독이 없으면 왕에게 드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술과 음식을 먹을 때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면 국정을 논하게 되고 정보를 전해 주게 됩니다.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입니다. 느헤미야가 술 따르는 관원이 안됐다면 어떻게 왕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술 따르는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먼저 왕에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왕이 먼저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고 슬픈 기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1~2절).
왕 앞에서 얼굴색이 좋지 않아 혹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쫓겨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왕이 먼저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계속해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하고 싶지만 참고, 말하고 싶은데 참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도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의 기도를 다 들으셨고 필요한 때에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준비된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
사람의 얼굴에는 영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나 크리스천들을 보면 똑똑하고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얼굴을 쳐다보면 기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그 얼굴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이 많고, 영적으로 고갈돼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정이 있고 교회사역은 열심히 하고 능력도 있는데 겸손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고 광고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정은 많은데 자기 수준을 계속 넘어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이런 사람은 일도 말도 서둘러 하기 때문에 실수가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왕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전까지 침묵하며 기다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지혜롭고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5절입니다.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때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기뻐하시고 종이 왕께 은총을 입었다면 왕께서는 저를 조상들이 묻혀 있는 유다 땅으로 보내 그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하소서.’”
여기 보면 이제는 느헤미야가 급한 게 아니고 왕이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꾸 물어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냈습니다. 용기라는 것은 이럴 때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평소에 기도하면서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왕이 묻자마자 “저를 조상들이 묻혀 있는 유다 땅으로 보내 그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준비된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침묵할 때도 있지만 때가 되면 용기 있게 말합니다.
침묵하고 기다리는 리더십
유다 땅으로 가서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해달라는 것은 엄청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아닥사스다 왕이 14년 전에 거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14년 전에 성을 재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란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왕이 뒤바꾼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요청한 것은 왕의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요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비전과 리더십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정도로 기도하면 비전이 생깁니다. 책만 읽는다고 해서 비전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내 평생에 이뤄야할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비전이 있을 때 리더십이 생깁니다. 비전도 없는데 무슨 리더십이 생기겠습니까.
느헤미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리더십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리더십입니다. 두 번째, 침묵하고 기다리는 리더십입니다. 세 번째, 지혜롭고 용기 있고 준비된 리더십입니다.
세상의 리더들은 세 가지 리더십 중에서 한 가지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리더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였습니다.
6절입니다. “그때 왕 옆에 왕비도 앉아 있었는데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언제쯤 돌아오겠느냐?’ 왕이 나를 보내기를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기한을 정해 말했습니다.”
왕과 왕비가 있다는 것은 공식석상이라는 뜻입니다. “언제쯤 돌아오겠느냐”라는 질문은 왕이 이미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거침없이 기한을 정해 말했습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거침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비전에 대해 생각하라
느헤미야의 비전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현상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7절입니다. “내가 다시 왕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 왕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왕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유다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강 건너 총독들에게 보여 줄 친서를 써 주시겠습니까?’”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이미 성전 건축에 대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그 비전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병원에서 하루에 4시간씩 투석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하는데 저는 그것조차도 감사합니다.
저는 투석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합니다. 벌써 25년이 지났는데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점점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 열정을 다시 살릴까에 대해 생각합니다. 계속 생각하니까 그림이 그려집니다.
느헤미야를 보면 정말 용기 있고 빈틈없고 준비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된 사람은 기회가 닿을 때 횡설수설하지 않습니다. 왕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일목요연하게 비전을 설명합니다.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
8절입니다. “‘그리고 왕의 산림 감독 아삽에게 친서를 내리셔서 성전 옆 성문과 성벽과 제가 살게 될 집의 들보 재목을 내주도록 해 주십시오.’ 왕은 내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말한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지혜롭고 분명하게 누구든지 설득할 수 있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공이 자기 자신에게 있거나 아닥사스다 왕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 잘나갈 때 하나님 앞에 공을 돌리지 않고 내가 모두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저는 지난 25년 동안 온누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가장 먼저 선교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복음 중심의 교회, 성령 중심의 교회, 선교 중심의 교회를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나치도록 선교합니다. 25년 동안 1,000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앞으로도 1,000명을 더 파송해야 합니다.
또한 저는 청년사역에 대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열두 가정으로 교회를 시작했을 때 “청년 2,000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 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메뚜기떼 처럼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학청년부에 모이는 숫자가 8,000명이 넘습니다. 누가 그 많은 청년들을 보냈을까요. 제 설교를 들으러 왔을까요? 아니면 교회 시설이 좋아서 왔을까요? 비전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목숨 바쳐 주님의 일을 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순교자가 많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느낍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김사무엘 목사님을 늘 생각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목회를 잘하시다가 북한 선교를 위해 서울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라크에서 전쟁이 터져서 이라크로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한창 전쟁 중일 때 김사무엘 목사님을 비롯한 청년들이 모두 유서까지 쓰고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김 목사님은 전쟁 중에 교회와 선교센터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허리가 아파서 검사를 해보니 백혈암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분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수술을 받고 눈을 뜨니까 워싱턴이 보이는 게 아니고 바그다드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비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의 비전을 세상이 막지 못합니다.
믿음에 대한 확신 있어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은혜의 손길이 내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8절).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미래가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현재처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따라 계속 믿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누리교회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비전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 머리 위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가난과 저주가 우리의 인생에서 물러갔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믿음과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잠깐 파도가 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이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제부터 느헤미야가 불가능의 벽을 넘어서서, 원수들의 모함을 넘어서자 기적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이러한 믿음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도 가끔 파도가 밀려옵니다. 얼마 전에도 혈압 수치가 80까지 내려갔습니다. 투석하던 중이었는데 도저히 투석을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아프다가 죽을 거야. 내가 준비한 일들이 다 없어질 거야.’ 이런 시험이 왜 제게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시험을 가지고 제가 25년 동안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하루도 이런 시련이 없을 때가 없었고 위기가 없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게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5년 전에 온누리교회를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환경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하는 비전을 가진 것처럼 우리의 비전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의 환경이 변했지만 우리의 비전은 더 강렬하게 빛을 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내일을 잉태하라 /느2:1-6/ 이동원목사
2014-12-04 10:24:13
6.25전쟁이 한창일 때 한 종군 취재 기자가 포탄이 나르고 있는 전쟁터의 참호속에 들어가 있던 한 유엔군 병사에게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Give me tomorrow)
문화적 선진국 사람들과 후진국 사람들을 구별하는 가장 현저한 차이는 내일을 대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문화적 후진국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현저한 생활태도의 차이 하나가 저축의 습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을 즐기면 되고 오늘을 생존하면 그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흑인사회 지도자들이 동료 흑인들에게 가장 힘들여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저축의 중요성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물론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빈곤층 흑인들의 경우는 아직도 저축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내일에 대한 혹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조국과 조국의 백성들에게 안정되고 가치있는 내일을 선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우선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 그의 조국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내일을 잉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조국의 내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가 내일을 잉태하기 위해 기도하며 해야만 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일을 위해 기도할 때에 동시에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1.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버린다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여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경과된지 아십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2:1에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때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시작된 달이었습니다. 니산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기도를 시작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1:1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제이십년 기슬르 월에---"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경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 경과한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충분히 기도한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며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그 동안 느헤미야 안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내일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 그리고 우리 한국 성도들 같으면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언제인가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어야 하는 민족, 엘리베이터안에 들어가 자동으로 닫히는 그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 닫아야 하는 대표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자 당장에 응답을 기대합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도조차 인스턴트식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은 기도란 시간과 함께 열매를 맺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장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18:1이하에서 주께서는 기도를 가르치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지속적으로 탄원하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그러면 왜 주께서는 당장의 응답보다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게 하실까요?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기도의 응답 그 자체보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더 중시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한 재벌가문이 있다 하십시다. 재벌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상속받는 일에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벌 아버지가 지혜로운 분이라면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재산의 상속이 아닌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는 아들로서의 인격적인 성숙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로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아들에게 있어서 내일을 잉태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나는 내일을 잉태하려면 기도하고 기꺼이 기다릴줄 알아야 합니다.
2. 기도하며 계획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또 한가지 한일이 있었다면 내일을 계획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자, 이제 느헤미야가 그가 모시고 있던 왕으로부터 그가 기다리던 결정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에 품고 기도하던 제목을 내어놓게 됩니다. "내 고향 내 조국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라고. 왕은 다시 묻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되겠느냐?"고. 이때 6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가 "기한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소요될 시간을 산출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7절이하에는 그가 왕에게 이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한 구체적인 도움의 리스트를 열거합니다. 이 리스트를 보면 우리는 느헤미야가 이 기간동안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그는 우선 왕이 주변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림으로 그가 예루살렘까지 도착하는 일에 장애가 없게 명령서를 하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8절에는 왕의 삼림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성과 가옥 건축에 필요한 충분한 재목들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미리 치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계획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두가지 상이한 입장이 존재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 되었지 계획이 무슨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입장을 극단적인 신비주의적 접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계획하면 되었지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를 역시 극단적인 이성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접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계획합니다.
기도에서 비전과 계획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느냐 못 되느냐를 결정하는 요소가운데 하나가 계획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계획 여부에 따라 비전과 개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개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이들 모두 개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개꿈을 꿉니다.
그런데 한아들은 꿈만 꾸는데 한 아들은 개꿈을 꾸며 개집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이고 한 아들에게만 개를 사주어야 한다면 어떤 아들에게 개를 사주시겠습니까? 개꿈만 꾸는 아들입니까? 아니면 소원을 품고 계획하는 아들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계획하지 못할까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계획하고 실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입니다."(John Maxwell) 그러므로 복된 내일을 잉태하고자 하십니까?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비전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주께서 주신 비전에 따라 내일을 계획하십시오. 치밀하게 계획하십시오.
3. 기도하며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며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결정적인 때를 찾고 그 때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풍자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옛날 희랍 시라큐스의 거리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인데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였습니다. 동상아래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리시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기회. 그대의 앞머리는 왜 그렇게 무성한가?- 내가올 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그렇게 대머리인가?-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 붙잡기 어렵기 때문에. 드디어 느헤미야에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2절에 보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 즉 근심의 표정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무슨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3절의 느헤미야의 대답을 읽어보십시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까?"
4절에서 왕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는 다시 묵도합니다. 감사의 기도와 함께 이제 결정적인 기회를 달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5절을 보십시오. 드디어 그의 요청을 내놓습니다.
'---나를 유다땅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는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회를 찾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 기도해 오지 않았습니까? 1:11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아닥사스다 왕)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 기도는 구체적으로 기회를 얻기 위한 기도였고 드디어 그 기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분을 전도하고 그가 구원받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가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하십니까? 정말 그가 구원받기를 소원하신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도할수 있는 기회가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막연히 기도하면 주께서도 막연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라면 주님의 응답도 구체적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회를 위하여 기도했고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기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61년 존 F.케네디가 미 합중국 대통령 당선자가 된후 취임식 전에 빌리 목사님이 케네디 대통령 당선자의 집에 초청을 받습니다.
케네디는 그에게 선거기간 개신교와 천주교의 종교문제로 갈라진 미국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하나되는 일에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빌리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갑자기 케네디는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습니까?"고 물었답니다. 그래서 "물론입니다" 했더니 그러면 "제가 다니는 우리 천주교도 그것을 믿습니까?"고 묻더랍니다.
"신조(사도신경)에 보면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별로 그런 내용을 설교나 강론으로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해서 빌리 목사님은 케네디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초림은 죄 문제의 해결과 새삶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구주로서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였으며, 그의 재림은 구원받지 못한 인류의 심판과 천국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셔야 하며 그때에 비로소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케네디는 "흥미롭군요, 나중에 다시 한번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후 2-3년이 지나간 후 빌리 그래함은 케네디 대통령을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빌리 목사님은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조찬기도회가 끝난후 케네디가 "목사님, 잠시 백악관까지 가 주시겠습니까? 잠시 목사님께 묻고 싶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하더랍니다.
그래서 빌리 목사님은 "제가 감기가 들어서 병균을 옮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했더니 "다음 기회라고요.---(더듬으면서)그렇게 하시지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해 11월22일 케네디 암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자 마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감기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다음기회라고요--'하고 더듬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에 민감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는 나서지 않으셔야 할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의 절정의 시간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명을 이루시는 십자가의 고난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드디어 그는 "내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을 마시며 당신의 때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한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류는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는 모든 민족가운데 구주와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새로운 내일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그의 제자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분에게 나아와 다시 기도하며 다시 그가 주실 내일을 잉태하는 자가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며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오거든 이제 몸을 던지십시오. 내일을 위하여 말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1:1과 2:1을 비교하며 느헤미야가 기도로 기다린 기간과 왜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3. 본문 2절의 왕의 질문을 3 - 4절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요?
4. 6절 이하의 느헤미야의 대답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기간동안 무엇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까?
5. 우리는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함에 있어서 기도와 계획 중 어느 편에 더 기울어져 있는가와 앞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장애물 뛰어넘기 /느2:7-10/ 이동원목사
2014-12-04 09:58:23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탕 남작은 올림픽의 5가지 기본경기로 달리기,사격,펜싱,수영,그리고 장애물 뛰어넘기를 지정했는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이 다섯 종목이 기본경기로 채택된 인상깊은 이야기를 전세계에 소개했다고 합니다.
19세기 젊은 프랑스 기마장교가 전쟁터에서 중요한 전령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타고 전쟁터를 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적군이 나타나더니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칼을 빼어들고 결투에서 승리한 장교는 다시 말을 달리다가 그의 말이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자 말에서 나뒹굴면서 자기를 겨냥하는 적군의 심장을 향해 총을 뽑아 사격을 한후 적의 사살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맨발로 달려 강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이번에는 수영을 해서 강을 건너 마침내 아군의 진영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성공합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다섯가지의 경주를 치러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달려야 했고, 칼을 뽑아야 했고, 총을 쏘아야 했고, 수영을 해야 했고, 강을 위시하여 여러 장애물을 건너야만 했던 것입니다. 쿠베르탕이 5가지 경기를 제안했을 때 제일 반대가 많은 것이 장애물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베르탕은 장애물 경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이 기본경기에 포함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 이유가 장애물 경기야말로 인생의 그림을 너무나 유사하게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물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삶도 예외일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재건에 착수하자마자 만나는 장애물 체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이 장애물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합니다. 오늘 우리도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너무 힘들어 보이는 장애물을 대하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동족상쟁의 전쟁인 6.25는 끝난지 50여년이 지났지만 민족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남과 북이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것도 그렇고,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국제 열강들의 이해관계속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입니다.
거기에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그동안 우리가 획득한 경제적 안정의 기조를 하루 아침에 잃을수도 있는 현실앞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오히려 가난한 시절보다 더 심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부딪혀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 본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계획하면서 가능한 모든 장애물을 미리 가정해 보았고 그 장애물들을 통과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가 아닥사스다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재건작업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그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기까지의 통과증을 요청한것도 이런 불필요한 장애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할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 스스로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순교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평케 하는자(피스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트러블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제발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문제를 피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은일에도 여전히 어려운 장애가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느헤미야의 경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으로부터 예루살렘 재건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확신했습니다. 본문 8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하지 않았습니까?
자, 이제 예루살렘 성의 중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요, 그가 인도하신 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고국에 돌아가 성의 중건을 백성들에게 설득하자마자 어떤 일이 생깁니까?
18-19절을 읽어보십시오. 여기 이름조차 으시시한 산발랏, 도비야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0절에 의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흥왕을 원치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마귀의 방해공작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면서 동시에 사단의 방해를 허용하실까요?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가 있을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착수한 일에 장애가 존재한다고 해서 너무 서둘러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속단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어서 사단이 질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시고 강하고 담대해 지십시오. 이런 사람만이 장애물 뛰어넘기에 성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즈음 개의 용기를 예찬하는 유머가 유행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제목이 개가 해석한 개에 대한 속담입니다. 그중에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개는 타고난 용맹성을 지닌다. 복날 개패듯 한다/개는 어떤 시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닭좇던 개가 지붕 쳐다본다/개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본다."
자, 그렇다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런 장애물을 우리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장애를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의 느헤미야의 고백을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믿음직한 믿음의 사람의 고백인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종으로 그의 일을 하기위해 여기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가 이 성벽 재건에 착수한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저는 종교개혁이 인류에게 선물한 가장 큰 기여중에 하나는 만인 제사장직의 성서적 발견과 함께 "모든 직업의 성직성"을 우리로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하고자 하는 일은 사실 설교도 전도도 아니요, 성전건축도 아닌 성벽재건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세속적 일이 아닌 거룩한 일 곧 거룩한 사명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그로 하여금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게 한 것입니다. 개혁자 루터는 "만일 소젖을 짜는 하녀가 하나님이 이 일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에 임한다면 그녀의 직업이 바로 성직이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 만이라도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이런 사명감을 가지고 임한다면 이 땅, 이 사회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이 일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이유-하나님이 맡기신 거룩한 사명이라고 확신한 까닭이었습니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그가 선교의 숱한 장애물을 뛰어 넘은 비밀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명이 다할때까지 나는 죽을수 없었다"고.
2)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으로 맡기신 일임을 확신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그일 을 형통케 하도록 도우심을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뜻하신 일인데 그분이 방관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미 생각한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허락하신 일에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어떤 장애, 어떤 난관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애 앞에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 이런 사람들의 방해를 받으면서 무엇이라고 외칩니까? 다시 20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느헤미야의 믿음입니다.
일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또한 일을 마치게 하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빌립보 교인들을 격려하던 바울의 믿음이 아니었습니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1:6)
그것이 중국 오지에서 선교하며 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너무 쉽게 사람들의 도움을 호소하며 손을 벌리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였습니다.
이 정책을 후일 중국내지 선교회를 계승한 OMF는 Faith-miss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지원이 부족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여유있는 환경이 주어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가운데 서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을 위해 서도 우리가 먼저 구할 것 그것은 경제회복도 열강의 도움도 아닌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통일 한국도, GNP 2만불의 번영 한국도 주께서 주님의 때에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민족사의 장애물도 믿음으로 뛰어 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남북 대치의 상황에 대해서도 종종 이런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세계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복음의 부흥, 기독교의 부흥을 주신 하나님이 왜 남북사이의 분단의 철책선은 아직도 거두시지 않으시는가라는 의문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쩌면 이 남북대치의 상황이야말로 이것 때문에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더 기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속에 허용된 장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장애물을 비관하기보다 감사하며 더 기도하는 민족,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지난주말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최대의 골프잔치 미국 US오픈 골프경기는 매우 흥미있는 에피소드들을 가장 많이 남긴 대회로 기록될 전망입니다.
우선 변변한 스승 하나도 가져보지 못하고 8자 변칙 스윙을 하는 짐 퓨릭이라는 의외의 선수가 우승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승 소감에서
"나를 유일하게 믿어준 아버지의 코치를 따라 한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열받은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의 표정 사진이 클로즈 업 된 것입니다.
뉴스는 그가 2라운드에서 샷을 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온 휘파람 소리로 놀란 우즈는 제대로 스윙을 못하고 공은 벙커로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신문들은 "휘파람에 무너진 우즈"라는 보도를 내 보냈습니다.
20위로 쳐진채 대회를 마무리한 그에게 소감을 묻자 그는 다시 평상심을 회복하고 그래서 자신은 "골프에 겸손해 지고 진지해 질 수밖에 없다고. 인생은 골프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 한국을 대표한 최경주는 많은 한국 골퍼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컷 오프 탈락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날 하루나 적어도 며칠동안 골퍼들은 깊은 낙심의 시간을 지난다고 하는데 최경주는 US오픈이 진행되는 경기장 바로 옆의 연습장에 나타나 다시 연습에 몰두해서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그에게 한국 기자가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담담하게 "다음경기가 있지 않습니까?"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 게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라톤 장애물 경기인 것입니다. 하나의 장애물을 비껴가면 또 다른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장애물 통과는 우리에게 실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수치와 자존감을 함께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넘어 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려질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일관성있게 달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 하나의 장애물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인생의 마지막 장애물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십자가를 단순한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질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여, 할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얼굴에 땀 방울이 변하여 피 방울이 되기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엎드려 기도하시는 그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나타나 새 힘을 돋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담담히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깨끗함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새롭게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다시 사심은 우리의 다시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을 당신의 코치로 영접해 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초청해 보십시오. 새 인생이 시작되실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넘어서실 새 힘을, 새 희망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줄거리)는 무엇입니까?
2. 8절에서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3.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 20절에서 느헤미야는 어떤 결심으로 사역의 장애물을 뛰어넘기로 결심합니까?
5. 오늘의 삶에서 우리 각자가 부딪힌 장애물을 말해 보고 그것을 어떻게 뛰어 넘어야 할 것인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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