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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7장 10절 - 24절

by Jessi J 2023.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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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판별(1) /7:10-24/ 김형익 목사

2021-05-06 10:56:38

 

1. 사소해보이는 중요한 질문(20:31): “사소해 보이던 것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질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하면서 인간이 살아갑니다.

 

인간이 살면서 쏟아내는 그 많은 질문들 중에서도 사소해보일지도 모르고, 별로 관심없어할 수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피하든 피하지 않든,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믿음 여하에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천국 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질문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던 것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벌써 48번째로 상고하고 있는 요한복음이 쓰여진 목적도 그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20:31).

 

2. 오해들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수많은 논쟁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세례 요한과 제자들에 의해서, 2장에서는 표적을 본 사람들에 의해서, 3장에서 니고데모,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 5장에서 38년된 병자,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 7장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분이 누구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해서 수군거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쓰여진 것과 같이, 유대 당국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사람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벌써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는 어느 정도 뭇 사람들에게도 감지되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바라보는 수많은 오해들, 극에서 극에 이르는 평가들이 있습니다. 대략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해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12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리를 미혹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립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수준이 이 정도였습니다. 1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명절 중간에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보고는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에 대한 무시가 담겨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나사렛 사람이고, 목수라고 하는데, 그는 랍비보다 더 권위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분명히 무시할만한 사람인 것 같은데,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0절에는 드디어 주님께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시자, “귀신이 들렸다고 단정해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주님에 대한 그들의 판별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을 제대로 판별한 이해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수군거림은 지난 2000년 동안 세계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오늘날에는 그 질문 자체를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 예수가 하나님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하는 식입니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평생 이 질문을 피하고 살았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대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가정, 기독교와 경제 와 같이 많은 주제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실존적 대답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저는 C.S.Lewis가 그의 명저인 <단순한 기독교>에서 이 질문과 관련하여 제시한 논증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도덕 선생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도덕 선생으로 본다면 이율배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장이 혹은 유대인들이 본문에서 판단했듯이 미치광이이거나 아니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 절대로 도덕 선생이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대답 밖에는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어떻게 판별해야 합니까? 주님 자신이 가르쳐주신 기준이 여기 있습니다.

 

3. 그리스도 판별 기준

조금 무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제시하신 판별 기준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있습니다.

 

A. 객관적 기준

i.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가, 자기 말을 하는가?(16).

객관적인 첫번째 기준은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가, 아니면 자기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16). 주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했던 방식은 새롭게 발견한 독창성이 아니라, 다른 권위에 의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주님도 그들의 방식을 따라서 말씀하시는 것인데,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심으로써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가르침의 권위를 하나님께 두시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 중에서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주님 자신보다 더 높은, 의지할만한 권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약성경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과 복음서,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는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자기 영광을 구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18)

두번째 객관적 기준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18).

 

주님 자신이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지, 아니면 모든 영광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면 그 속에는 자기의로 채색된 불의가 가득한 것입니다. 주님만큼 철저하게 낮아지시고 하나님의 종이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죽음을 가지신 분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하는 객관적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B. 주관적 기준

주관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판별 기준도 주님은 제시하셨습니다.

 

i.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는 판별한다(17).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17).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너희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다시 부메랑처럼 되돌아가서 그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가?”하고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고 싶다고 정직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 주님의 질문은 네가 교회를 다니냐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참석하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진짜 있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자기들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이 되었겠습니까? 마치 어느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주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ii. 율법이냐 자기 의(율법주의)?(19, 21~23)

두번째 주관적인 판별 기준은 율법과 율법주의의 구분입니다. 주님은 더 구체적으로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느냐고 도전하셨습니다(19). 이 말씀이 나오자 유대인들이 이 사람, 보자 보자 하니까, 미친 소리를 하는군이라고 한 것입니다(20).

 

주님께서 적당히 말씀하시고 그쳤으면 되는데, 조금 많이 나가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누가 당신을 죽인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사건을 들이대십니다. 전에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셔서 문제가 되었던 사건, 바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 이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5:18). 주님이 말씀하시는 한 가지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21). 주님은 할례 이야기를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자기들이 정할 수 없었기에, 난지 8일에 할례를 해야한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설령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할례는 해도된다고 정해놓고 그렇게 했습니다. 할례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이것을 제대로 수행하려고 율법의 안식일에도 예외적으로 허용했었다면,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온전케 해주신 것이 어떻게 율법을 범한 것이 되겠으며, 이 일로 인하여 분노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할 수 있느냐고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23).

 

여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율법이냐 율법주의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가졌다는 너희가 율법을 결국 자기의를 인정받기 위해서 쓰고 있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를 인정받기 위해서 율법을 쓰게 되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이 나는 괜찮다, 나는 의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 , 어떤 죄인도 도달할 수 없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게 하는 그런 의의 수준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율법은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기를 세워주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게 될 때 나타나는 특징은 자기 자신을 지적하는 그 어떤 것도 미워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반응은 그 전형입니다. 설령,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예수님을 등진 부자 청년 관원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C. 외모가 아니라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24).

주님은 그들에게 외모가 아니라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24).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흠을 잡으려고 이잡듯이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참된 것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머리와 가슴을 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공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위라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공의의 판단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행위 뿐 아니라, 우리의 동기와 속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의로운 판단입니다. 주님을 흠잡으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주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 2000년 동안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흠잡으려고 하지 말고, 머리와 가슴으로 제대로 판단해보라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머리와 가슴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별하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객관적 기준은 연장해서 보면 또한 모든 주님의 종들에 대한 판별 기준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그가 자기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영광을 구합니까, 진정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객관적 기준들은 그 자체로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만일 나 자신이 자기 의를 구하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구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객관적 판별기준 역시 힘을 잃을 것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사람의 말인지를 분별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A.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는 단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세 철학에서는 하나님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목적론적, 그리고 도덕론적 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해서 사람이 회개하고 믿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설명 자체가 전혀 무익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태도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인의 본성으로는 좋아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그 말씀과 말씀을 하는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해서 공의의 판단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싫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뿌리깊은 죄성인 자존심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긍정받고 싶어합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잘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싸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거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중대한 사실은 주님은 대충 대충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고 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자비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고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뿌연 눈으로는 볼 수가 없으니까, 우리 눈을 밝게 해서 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때가 보이고 더러운 구석도 보이고, 치명적인 병균도 보입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것이 지금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흠이 잡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단지 정서적인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수준의 문제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정서적으로 밖에는 반응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영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바르게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119:18).

 

우리 모두가 늘 주님 앞에 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했고(1:18),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기도했습니다(1:10). 여러분이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이렇게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내 눈을 열어 주사 머리와 마음으로 주님을 알게 하여주옵소서.”

 

B. 율법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기준이다.

율법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지식이 쌓여갈 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언제라도,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자기의를 쌓아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율법이 자기의의 도구가 될 때 우리는 율법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되고, 심지어는 주님까지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가진 무서움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유대인들의 그 무서운 율법주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은 이제 막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판단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판단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관되게 판단, 영적 판단을 요구합니다. 주님께서도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도 분별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흠잡는 판단, 이잡듯이 하는 판단, 비판을 위한 판단,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판단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언제나 복이 있습니다.

 

C. 순종하라.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도전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전혀 모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 손해가 끼쳐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고 싶은 각오가 있습니까? 그 마음으로 살아가신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의 영적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복된 은혜를 더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 /7:14-18/ 이백민목사

2020-07-06 02:55:05

 

이집트와 아랍지역, 무슬림들은 신의 뜻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일상 중에 (알라)의 뜻에 따라라는 의미를 가진 인샬라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합니다.

 

이집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어떤 분이 인터넷에 인샬라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자신은 무슬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사용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생활하다 보면 상황에 따라 약속을 거절하기는 힘들고, 지키자니 좀 그런 경우가 있는데 거절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 한국 여행객이 여행을 하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사람이 아주 많이 다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고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여행 안내하시는 분이 차에 내려서 몇 마디 하고 돈을 쥐어 주니 모든 상황이 끝났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과 관계 있는 사람이 상황을 끝내면서 하는 말이 바로 인샬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인샬라가 무슬림들의 삶 가운데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될 만큼 아주 중요한 용어가 되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인샬라가 정말 인샬라인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욕심과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도라면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1.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 유대의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였습니다. 그는 악한 왕이었지만 종교적인 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예레미야서 28장에서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시드기야가 어떤 예언을 좋아하는지를 알았고 시드기야가 좋아할만한 예언을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바벨론에 끝까지 저항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줄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시드기야 왕의 마음에 드는 쪽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고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시드기야 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편한 대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편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전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 보다 조상들의 유전과 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고르반이라는 용어를 지적하시며 그들의 잘못된 삶을 책망하셨습니다.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물질로 섬겨야 할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물질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서 고르반이라고 외치고 더 이상 부모를 물질로 섬기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마음대로 해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7: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교회의 전통이나 사람의 해석, 자신의 생각 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제일 우선시 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2.예수님의 뜻, 하나님의 뜻 The Will of Jesus, The Will of God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계실 때도 예수님의 육신의 뜻대로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셨습니다.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학문적인 배경도 없는데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던 유대인들이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 보다 율법적 해석, 전통, 학문적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만큼이나 아는 것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서는 오히려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들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을 때도 종교법을 내세웠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을 박해할 때도 종교법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그들의 법에 억지로 끼어 맞추기 위해 거짓증인들까지 세우는 불법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사셨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원하시던 것이 있었습니다.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이유 없이 박해 받는 것, 무시 당하는 것, 수치 당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을 좋아하셨던 것이 아니라 육신이 요구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감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기도에도 분명히 그것이 나타납니다.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우리의 삶은 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3.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If anyone chooses God’s will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이 막연히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예수님 자신)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믿는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그 뜻을 행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든 육신의 뜻을 버리고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든 말씀, 예수님의 모든 교훈도 예수님의 육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예수님께 먼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이 회복해야 할 사람의 참 모범이 되셔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 나의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서 삶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그의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에서 사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살듯이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강해-34/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7:14-24

2020-01-21 10:58:50

 

영화배우 송광호 씨가 주연한 관상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번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6관왕에 올랐습니다. 저도 그 영화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관상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후에 사람들이 자신의 관상을 보러 점집에 몰려들고, 관상을 좋게 하기 위해 성형외과에 몰려든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얼마나 불안 해 하는지를 보여주고 또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관상과 관련해서 김구 선생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과거에 낙방한 후에 인생의 다른 길을 찾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그때 부친으로부터 네가 큰일을 하려면 사람 보는 법부터 배우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관상학을 공부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관상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관상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자신의 관상 대로 운명이 결정된다면 자신의 앞날은 꽉 막혀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상학적으로는 장래가 없었던 김구 선생님이 외모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공부를 하여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은 얼굴 모양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라는 글을 읽은 후부터 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이 글을 읽은 후부터는 자신의 외모보다 바른 마음을 품는 일에 집중하는 가운데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외모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뿌리이며 근본입니다. 뿌리가 흔들리면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나무의 수형을 잘 만져 주고 다듬어 줘도 뿌리가 제대로 자리집지 않으면 건강하게 설 수가 없습니다. 삶의 근본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성형수술을 통해 관상을 바꾸어 복을 받기 원하는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의 첫 인상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사람의 첫 인상은 처음 보는 약 5초 안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5초 안에 보고 느낀 이미지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평가와 관계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관계가 불안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하실 때 외모를 보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자 그를 떠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 장남인 엘리압을 보는 순간 그의 준수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영안이 밝았던 사무엘조차도 놀랄 만큼 엘리압의 외모는 준수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어린 나이에 블레셋 장군인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조롱할 때 어린 다윗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골리앗을 대적합니다.

 

다윗이 죽음 앞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한 유언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다윗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이스라엘의 왕 중의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우리 행복한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윗과 같은 마음을 품어 다윗이 받았던 은혜를 누리면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외적인 조건들로 인해 많은 조롱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출신 지역으로 인해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나사렛 지역 사람이라는 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아냥거림을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가난한 목수였기에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계속해서 들은 말이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과정을 통해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좋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정규 대학 과정도 마치지 못했다고 무시를 당하고 조롱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기회를 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유대 군중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지내셨습니다. 초막절의 중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에 놀랐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은혜를 받자 유대지도자들이 날을 새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유대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하시키면서 하는 말이 저가 율법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랍비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대로 랍비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그의 가르침에 권위가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의 비난에 예수님이 대답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의 외모는 단순히 얼굴이나, 키 등 신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가용을 타고 나니느냐,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 어느 대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회사에 다니고, 직위가 무엇이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항상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나눕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없는 사람, 예쁜 사람과 미운 사람,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나눔의 기준이 자신의 이기심과 영광입니다. 자신이 정해 놓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은 틀리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과 틀에 들어오지 않으면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이 되면 어떤 일이든지 여지없이 악으로 정의하고 공격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그것이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정죄하며 죽이려했습니다. 강도가 회개를 하고, 세리가 변하고, 창녀가 자신의 추했던 삶의 자리를 정리하고 변화되어도 유대지도자들은 그들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경계하며 멀리했습니다.

 

자신들은 그런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자신을 의롭게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을 악하고, 추하게 만들어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유대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며 질서를 깨고 문란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내 몰아 세웁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창녀, 세리, 강도,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 부자, 건강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주인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존중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달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로마 병사를 위해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고 저 일을 하니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며 인격적으로 존중하려면 한 가지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먼저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말을 듣고도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16-17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예수님은 당신이 탁월하게 가르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당당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해서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많이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변화되어 섬겨야 하는데 섬김의 대상 중의 첫 번째 대상이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입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있습니다.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대로 품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나를 섬겨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시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해 너는 존귀한 자고, 보배로운 자고,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작품입니다. 작품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에 의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나를 또한 기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야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할 때 나에 대한 자존감이 생깁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과 관계에서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조그만 상처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둡니다. 분노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방치하고, 열등감과 다른 사람의 무시함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것은 슬픈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수가 성의 여인이 와 보라고 외치며 마을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보며 한 주간 동안 내가 나를 칭찬하며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우리가 머무는 공간과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품격기독교인(高品格基督敎人 ):가말리엘과니고데모와요셉 /5:33-40/7:45-52/23:50-54/ 노창영 목사

2019-06-08 08:15:47

 

서론// 브룩 포스 웨스트코트(Brooke Foss Westcott, 1825-1901)"성자의 특징은 완전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자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완벽한 삶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삶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말고 소신껏 정의와 진리의 말씀 붙들고 걸어가라는 얘기입니다.

 

고품격기독교인 여덟 번째 설교로 산헤드린(Sanhedrin)이라는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에서 아름다운 말을 했던 분별력 있는 세 인물을 통해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의미를 깊이 깨닫고 분별력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먼저 가말리엘입니다(5:33-40).

 

A. 그의 배경

 

석학이요 현자인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의 율법선생(22:3)으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힐렐학파를 세운 힐렐(Hillel)이라고 하는 위대한 유대율법학자의 손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명한 7명의 랍비 중에 한사람으로써 별명이 율법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만큼 박학다식한 교사였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교회역사에 따르면 가말리엘은 사도바울과 베드로를 통해 개종을 했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B. 그의 발언의 지혜로움

 

가말리엘은 예수를 핍박하려고 모인 자들 앞에서 만약 이 사람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다 무너져 버릴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자들은 옳다고 생각하여 사도들을 매질하여 풀어주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종교적, 학문적, 철학적, 이성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말리엘 같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있습니다.

 

C. 세상의 현자들의 지혜들

 

세상의 현자들의 말을 무작위로 소개를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좌우지간 결혼해라 왜냐하면 착한 아내를 만나면 행복하게 될 것이요 악한 아내를 만나면 네가 철학자가 될 것이다’, 사우엘 존슨(Samuel Johnson)장사라고 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친절을 버는 것이고 친절을 벌면 돈도 들어온다고 말했습니다.

 

모두 시대를 초월한 지혜의 말입니다. 동양에도 많은 현자들이 있습니다. 맹자(孟子)만일 위대하게 되려거든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 노자(老子)학문을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무지한 것을 깨달을 뿐이다’, 중국속담에는 네 친구에 이마에 있는 파리를 잡기 위해서 손도끼를 들지 말아라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철학자, 사상가들도 이성의 빛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말리엘이 하는 말은 상식적, 이성적, 합리적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의 빛, 이성의 빛, 사상의 빛을 뛰어넘는 영적인 결단들이 있어야 합니다.

 

. 둘째로, 니고데모입니다(7:45-52).

 

A. 그의 배경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은 백성들을 이긴다입니다. 니고데모는 내성적이고 소극적 인물이었습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밤중에 주님을 찾아옵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관원, 산헤드린 공회원의 최고 종교인, 최고 부자가 되었는데 만족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요세푸스라고 하는 예수님 당시 역사가의 형제였고 처음에는 기독교를 소극적으로 믿고 변호했지만 나중에는 더 잘 믿고 결국 직분과 재산을 빼앗기고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B. 그가 한 말의 의미와 가치

 

니고데모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할 때 주님을 변호했습니다. 사람을 불러서 증거도 듣기 전에 결정내리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니고데모의 주님을 위하여 소극적 방어를 하였습니다. 그는 방어적, 소극적 변호자였습니다.

 

37살의 젊은 청년목사 다니엘 김의 철인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그는 한국에서 10살까지 살다가 야쿠자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갑니다. 17개국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영어로 공부하는 후쿠오카국제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졸업할 때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과 부모들이 함께 주는 최고의 상인 P.T.A.(Parents-Teacher-Association)상을 받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한마디 하라고 단상에 올라오게 하자 그는 소감을 말하지 않고 이와 같은 때에’, ‘감사해요 주님의 사랑이라는 찬양을 부르고 내려왔습니다. 800만 우상을 섬기는 일본에서 겪게 될 불이익 때문에 기독교인임을 밝히지 않은 몇 몇 선생님과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단상을 내려온 다니엘 김을 끌어안더니 자신들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숨어있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오바댜는 아합왕의 궁내대신으로 이세벨의 대환란이 왔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지자 100명을 살려주었던 기록이 나옵니다. 오바댜는 훌륭한 일을 하였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지는 못했습니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불이익, 편견, 평판이 두려워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극적 방어적 변호자인 니고데모에서 한단계 더 나가야 합니다.

 

. 셋째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23:50-54).

 

A. 그의 배경

 

아리마대는 동네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37km 떨어져있는 동네인데 이 동네의 이름은 구약의 라마로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그는 이 지역 출신의 큰 부자로 유대인의 공의회 멤버가 되었고 훌륭한 석학이요 바리새파사람입니다.

 

B. 그의 결단의 가치들

 

그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낼 때 예수님의 장례를 치룬 장례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궂은일을 담당합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은밀한 예수의 제자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장사지내면서 공개적 신앙인이 됩니다.

 

특히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산헤드린공회에서 결의할 때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공격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19389월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장로 188명이 참석하여 제27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모였습니다.

 

그때 일본사람들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조상들의 귀신위패를 갖다놓고 축복해달라고 절하는 명백한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평양경찰국장이 미리 평양노회장, 평서노회장, 안주노회장 불러놓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결국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가를 사랑하는 우리의 의식이므로 장려되고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해야 한다고 총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때 188명중 반대했던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블레어선교사, 헌트선교사가 이것은 불법이요 왜 부()는 물어보지 않습니까?”물었을 때 경찰들이 이들을 억지로 끌고 나갔습니다. 정작 한국인 목사와 장로는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이게 우리 총회의 치욕적인 역사입니다.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공개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말할 수 있는 용기, 궂은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사랑, 하나님나라를 기다릴 줄 아는 종말론적 태도, 선과 의를 따라가는 하나님의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고품격기독교인입니다.

 

결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말리엘의 이성과 율법과 종교가 훌륭하지만 우리의 의와 결정이 가말리엘의 종교적 율법사의 생각과 사상보다 못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니고데모를 뛰어넘어 아리마대사람 요셉까지 나아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공격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불편하니까, 자존심이 깨질까봐, 명성이 깨질까봐, 진급이 안 될까봐, 하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용기를 갖고 사십시오.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모습임을 기억하시고 본문의 아리마대사람 요셉처럼 고품격기독교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38 /7:1024

2011-01-20 16:53:24

 

'예수님에 대한 세 가지 반응'

 

<본문 배경 분석>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출세를 하려면 갈릴리에 계셔서는 안되고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로 가시라고 권했습니다. 때마침 유대 장정이면 누구나 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초막절이 가까워져 왔기 때문에 시기상으로도 너무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이 믿음 없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 이유인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해서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동생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에 당신도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게 올라가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세상 사람들의 '예수관()'을 눈여겨볼 차례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먼저 유대인들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유대인들'이라고 할 때 거의 틀림없이 예수님께 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께 악을 끼치기 위해서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유대인들''바리새인들''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입니다. (제사장들은 거의 다 '사두개인들'로 이루어졌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들은 모두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으로서 자타가 공인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적어도 종교적인 계율과 경건성에 있어서는 단연 자기들이 최고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조그만 틀을 더 중요시했고 더 사랑했습니다.

 

아주 쉬운 비유로 말한다면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의 별을 관측할 때 망원경을 사용합니다. 그들의 연구 대상은 밤하늘의 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별보다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망원경이나 천체 관찰기구들만 자랑하고 거기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른바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이나 율법 준수의 방법이 모두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만들어 낸 율법적인 편협한 틀들을 더 애지중지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정부와 죽이 맞아서 아주 안락하고 사치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메시아가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향유해온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어쨌든 간에 바로 이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중에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주역들이 됩니다.

 

두 번째로 '무리들'이 나옵니다. 요한 복음에서 '무리들'은 언제나 두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논쟁도 벌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참 하나님의 아들, 진정한 메시아로서는 영접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반신반의하면서 주님 곁을 맴돌았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처음에는 흥미위주로 예수님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적극 고백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이 무리들 가운데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님에 대한 세 부류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에 대한 세 가지 반응>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찾았다고 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혹은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룹이라고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찾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거나 잡아죽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것은 12-13절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말 저런 말을 수군거리기만 할 뿐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한 이유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에서 잘 입증됩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종교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밉보이면 타격이 옵니다. 결국 예수에 대하여 왈가왈부한다는 사실이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게 하는 일이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큰 반감을 가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본문 14-19절을 보십시오. 명절, 즉 초막절 중간쯤 되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가르침이 정확하고 깊고 넓은지 유대인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교육이라곤 전혀 받지 못한 예수님이 너무나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명한 랍비학교도 가지 못하셨고 공식적인 학교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누구입니까? 오늘로 치면 서울 대학을 나오고 하버드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요 지성인들요 최고 엘리트들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초등학교 근처도 가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그토록 심오한 강의를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 경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안됩니다. 특히 학력으로 한 사람의 진가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고, 학력보다는 실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학교 근처에도 못 가셨고 책 한 권 남기지 않으셨지만 수천 수만의 석학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연구하고 수천 수만 권의 책을 써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학력보다 실력, '진실한 삶의 힘'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어쨌든 간에 학교도 안나온 주제에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빈정거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중요한 대답을 주십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스스로 인간적인 것을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자는 언제나 진리를 말하며 그 속에 불의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빈정거리는 유대인들이 들으라고 한 마디 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 무슨 뜻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인간 예수님 자신의 말인지 금방 알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무학(無學)의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지어낸 말인지 쉽게 분간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애당초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가방끈, 즉 교육 배경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 혹은 '선지자'라 수군거리며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비롯해서 공관복음서에서 '무리들'은 매우 모호한 집단입니다.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다가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을 매몰차게 버리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변하기까지 하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평판을 놓고 수군거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수군거린다'는 말은 희랍어로 'gongysmos'인데 '불평한다'(complain), 혹은 '중얼거린다'(mutter, murmur)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은 '불평한다'고 번역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13절과 관련해서 볼 때 무리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예수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렸다는 번역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라는 모호한 집단은 그 성격상 언제나 다양한 사람들을 내포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견해 역시 일률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good m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좋은 태도이지만 결코 온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사람, 혹은 종교적인 천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폴레옹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그 이상이다."--"I know men, and Jesus Christ is more than a man." 예수님은 분명히 인간이시지만 인간 그 이상의 하나님이십니다!

 

19-24절을 보면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혹평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모세의 율법을 거론하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 나를 죽이려 하느냐." 모세의 율법은 모두 예수님, 즉 메시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까닭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모세의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한다는 사실을 고발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여기서의 무리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께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 합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신나간 분이요 귀신들렸다는 것입니다. 실로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깨는 사람이요, 죄인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는 자요, 모든 정통 종교를 뿌리째 흔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미친 사람입니다. 정복의 왕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당신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하시지 않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상식이나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 도저히 맨 정신이 아닌 일만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본문 40절에 보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본 사람들이 또한 무리들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는 무리들 중 일부는 예수님을 성경에 약속한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에서 선지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 그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자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는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의 'conduit,' '도관'(導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 근본이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1절에 보면 일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간주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가장 정확한 반응이요, 구원받을만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도, 미친 자도, 좋은 사람도, 선지자도, 종교적 영웅이나 천재도 아니고 오직 메시아, 즉 그리스도, 구세주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결어>

 

무리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되기 위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부류에 속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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